소설리스트

하이어드-37화 (37/52)

8.지원병-3

대체적으로, 미지의 것은 공포심을 불러일으킨다. 같은 레이스가 아

닌 외계의 레이스를 본 적이 없는 이가 우연히 다른 레이스와 마주치

게 된다면 당연히 괴물을 본 것과 똑같은 태도를 취하게 될 것이다.

호야미는 공포심을 느끼지 않고 있었다.

공포심을 느꼈던 건 처음 휴먼 레이스에게 호송되었을 때뿐이었다.

그 때의 호야미는 온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이

제부터 어떻게 될 것인지, 극심한 고문을 가하지는 않을지, 본보기로

잔인하게 처형되지는 않을지, 호야미는 그런 것들이 걱정이었다.

하지만 그건 잠시 뿐이었다. 호야미는 이내 곧 모든 것을 체념해 버

렸다. 하수구를 빠져나가는 순간, 호야미는 다시는 접할 수 없을 줄 알

았던 깨끗한 공기를 들이마시게 되었다. 그것은 지금까지 호야미가 들

이쉬었던 숨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호야미는 눈물이 흐르고 있는

걸 느꼈다. 살아있다는 기쁨 때문이었을까? 호야미는 하수도 위를 떠

다니던 살조각들을 떠올렸다. 지금 호야미는 두 발로 땅을 딛고 서 있

었다. 그것이면 되었다. 더 이상 바라고 싶은 건 조금도 없었다.

"왜 울지?"

통역병이 락벳어로 호야미에게 물었다. 호야미는 대답하지 않았다.

"걱정하지 마. 죽이지는 않을 테니까."

통역병이 호야미를 위로하려고 했으나 이미 더 이상 호야미에게는

위로 따위는 의미가 없었다. 아마 통역병이 호야미의 빰을 때렸다고

하더라도 호야미는 당황하지 않았을 거였다.

호야미는 다른 포로들과 함께 호송 셔틀에 올랐다. 호송 셔틀은 대

략 100여명의 포로를 동시에 수송할 수 있게 만들어져 있었고, 앉으면

중앙에서 통제되는 수갑과 족쇄가 자동으로 작동되게 되어 있었다.

대부분 깨끗한 상태의 포로들이었다. 대부분 간부급 장교들이나 민

간인 중에서도 고위직에 종사하는 부류로 보였다. 다들 모르는 얼굴이

었지만 그 중 하나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지화란 참위였다. 지화란 참위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고개를 숙이고 있다고 해도 지화란 참위를 알아보지 못할리가

없었다. 지하 병영에서 호야미는 발소리만 들어도 지화란 참위인지 아

닌지를 구별해 낼 수 있었다.

호야미는 지화란 참위를 발견하는 순간 가슴이 벅차게 뛰어올랐다.

처음에는 지화란 참위가 두려워서 그렇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이

감정은 결코 두려움이 아니었다. 이제 지화란 참위의 명예가 땅에 떨

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는 즐거움이었다. 지화란 참위가 정통 정부군

에게 맞으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호야미는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 되

었다. 다들 고개를 숙이거나 허탈한 표정이었지만 호야미는 미소를 짓

고 있었다.

셔틀이 출발할 때 즈음이 되었을 때, 호야미의 감정은 즐거움을 넘

어서서 증오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호야미는 고개를 숙이고 있는 지

화란 참위의 머리꼭지를 노려보고 있었다. 눈 앞에 어른거리는 것은

죽어간 미루의 얼굴이었고 미루가 마지막으로 외친 소리가 당장이라도

다시 들려 올 것 같았다.

고통받아라.

호야미는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진심으로 지화란 참위를 저주했

다.

고통받다가 죽어 버려라. 너의 모든 자존심이 땅에 떨어지고 너의

잘난 권위가 바닥을 기어다니게 될 지어다. 명예는 더렵혀질 것이고

결국에는 적에게 무릎을 꿇게 되리라.

호야미는 지화란 참위가 자신을 보게 된다면 어떤 감정을 느끼게 될

까 궁금했다. 그러나 지화란 참위는 셔틀이 착륙할 때까지 고개를 들

지 않았다.

호야미가 도착한 곳은 해방정부군의 기무사령부가 있는 베가 시였

다. 베가 시에 한 번도 와보지 못한 호야미는 이곳이 어디인지 알 도

리가 없었다. 장갑복을 입은 병사들이 포로들을 차례로 셔틀에서 내렸

고, 호야미는 두 손을 앞에 있는 락벳인의 어깨에 올리고 고개를 숙이

라는 지시를 따르느라 지화란 참위의 얼굴을 보지 못하였다.

"차례로 올라가."

이번에는 호송용 호버카였다. 보통 호버카의 몇 배는 될범직한 크기

였다. 이곳도 앉으면 바로 수갑과 족쇄가 채워지게 설계되어 있었고,

타자 마자 고개를 숙이라는 지시 때문에 역시 지화란 참위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호야미는 보고 싶었다. 지화란 참위의 얼굴을 정면에

서 바라보고 싶었다.

호송된 포로들은 수용소 입구에 도착했다. 수용소는 원래 있던 강당

을 개조해서 만든 곳이었다. 운동장으로도 쓰였고, 가끔 시 행사를 위

해 쓰던 곳이었지만 지금은 출입구 한 군데만 제외하면 모두 막혀 있

는 상태였고, 채광을 위한 거대한 창문들에는 아마도 전류가 흐르고

있을 두꺼운 창살이 부착되어 있었다. 호야미는 거대한 방 하나짜리

감옥을 연상했다.

포로들은 수용소에 입소하기 전, 분류를 위해 간략한 심문을 받게

되었다. 심문관은 정통군의 중위였고, 그 옆으로 용병으로 참전하고 있

는 휴먼 레이스들이 서 있었다. 하나는 통역병이었고 다른 이들은 고

위 간부처럼 보였다.

호야미는 여기서 지화란 참위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호야미는 줄

의 뒤편에 서 있었기 때문에 앞쪽에 서 있는 지화란 참위를 분명히 볼

수 있었다.

"관등성명은?"

해방군의 중위가 지화란 참위에게 물었다.

지화란 참위는 굳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모습

과는 달리 꽤 당당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누구나 저런 얼굴을 할 수

있지. 하지만 고통이 가해지면 곧 달라지게 될 걸. 지화란 참위. 그 잘

난 얼굴이 어떻게 변하는지 똑똑히 봐 주마. 호야미는 생각했다.

"자랑스러운 정통 정부군 소속 지화란 참위다."

"자랑스러워? 잡혀온 정통 정부군도 자랑스럽나?"

포로들은 조용했다. 웃는 건 해방군의 중위와 통역병 뿐이었다.

"자랑스러운 정통 정부군 소속 지화란 참위다. 중위. 말조심해. 아무

리 포로로 잡혔어도, 나는 너보다 계급이 높다."

중위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이 때다. 때려. 고통을 줘. 호야미는 속으

로 기원하고 있었다. 지화란 참위. 조금만 더 건방지게 굴어 봐. 중위

를 흥분시켜. 어서.

"입 조심해. 여기서는 다쳐봐야 너만 손해야."

중위가 웃는 얼굴로 충고했다. 하지만 지화란 참위는 그 충고를 달

갑게 듣는 것 같지는 않았다.

"입 조심해야 하는 건 너다, 중위. 용병의 밑구멍이나 핥는 주제에.

그러고도 락벳인이냐?"

중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주먹으로 지화란 참위의 얼굴을

가격했다. 지화란 참위의 고개가 뒤로 휘청거리며 넘어갔다. 하지만 지

화란 참위는 곧 똑바로 섰다. 콧등에 정확하게 맞았는지 코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너같은 녀석은 우리 해방군에서는 받아 주지도 않아."

"밑구멍을 핥을 줄 알아야만 받아준다고 해서 지원할 수도 없었다."

지화란 중위는 이렇게 말하며 옷소매로 코피를 닦아 내었다. 얼굴에

는 여유로운 미소마저 흐르고 있었다.

다음 순간, 중위는 욕설을 내 뱉으며 지화란 중위에게 달려들었다.

통역병은 상황을 휴먼 레이스 간부들에게 설명해 주고 있었고, 줄에

옆으로 서 있던 장갑복으로 무장한 군인들이 중위와 지화란 참위를 갈

라놓았다.

휴먼 레이스 간부가 통역병에게 뭐라고 휴먼 레이스 언어로 말했고,

통역병이 그것을 통역했다.

"중위. 조용히 하고 임무에 충실해. 흥분하지 말고."

통역병이 중위에게 말했고, 중위는 숨을 씩씩거리며 다시 자리에 가

앉았다.

"그리고 저 친구는 격리 수용소로 보내고."

통역병이 덧붙이자 중위의 얼굴에 희색이 돌았다.

"격리 수용된다, 너는. 꼴 좋군. 거기서 식사 대신에 똥찌꺼기나 먹

으면서 지금 이 순간을 후회하라고."

"나는 해방군이 제공하는 건 뭐든 거부한다. 그 어떤 협조도 하지

않을 것이며, 최선을 다해서 탈출의 기회를 노리겠다. 그리고 똥찌꺼기

라고 해도 외계인들 밑구멍보다는 향기로울 거다."

중위는 다시 달려들 기세였지만 이번에는 장갑복으로 부장한 병사들

에게 밀려 자리에서 일어서지도 못하였다. 지화란 중위는 장갑복을 입

고 있는 병사들에게 이끌려 다른 쪽으로 끌려가고 있었다. 호야미는

그 순간 지화란 중위와 마주쳤다. 입술 위로 피가 흘러내리고 있는 지

화란 참위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호야미는 공포를 느꼈다. 그리고 이

내 곧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고통과 비애를 느껴야 했다. 기

대했던 모습은 볼 수 없었다. 지화란 중위는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

던 것이다.

"관등성명은?"

중위가 심드렁한 음성으로 묻는다.

"호야미 하전사입니다."

중위는 뭔가 기록하고는 호야미를 전사급 수용소로 분류했다. 호야

미는 위를 올려다보았다. 강당을 개조해서 만들어진 건물의 전장으로

는 빛이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오직 차가운 조명기구만이 호야미를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강당 안으로 들어서자 수용소의 전경이 보였다. 수용소에는 조립식

가건물이 마치 주택가처럼 줄지어져 있었고, 그 사이사이에는 경계선

들이 그어져 있었다. 조립식 가건물들은 아마도 포로 수용을 위해서

특별하게 제작된 것인지 외벽은 매우 두껍게 되어 있었고 창문마다 두

꺼운 쇠창살이 박혀 있었다.

가건물 하나 당 20명씩을 수용하게 되어 있었고, 각각의 건물에는

열 명이 누울 수 있는 침상이 두 개씩 놓여 있었다. 하지만 침구류도,

옷가지도 아무 것도 없었다. 모두 텅 비어 있었다.

"자네도... 미린 시에서 온 건가?"

늙은 하전사 하나가 미린에게 물었다. 미린은 그렇다고 했다.

"틀림없다니까. 여기는 모두 하나같이 미린 시 출신 녀석들 뿐이야.

다른 곳에서 잡혀 온 녀석은 없어."

"이상한데. 포로들은 원래 분리해서 수용하는 거 아니야?"

"앞으로 조를 짜자고. 계급별로 하는 게 좋겠지?"

"나는 상급전사야."

"나도 상급전사였어. 군번이 얼마야? 보아하니 나보다 훨씬 어린 것

같은데."

"젠장. 그걸 어떻게 따져?"

여기저기서 토론이 벌어지고 있다. 그러고 보니 가건물 밖에 서 있

는 강갑복으로 무장한 병사 외에 막사 안에는 별다른 규제 사항 같은

건 없었다. 왜 이런 식으로 포로를 다루는 걸까? 호야미는 언뜻 이해

가 가지 않았다. 병영에서의 경험으로 미루어 보면 질서를 가장 잘 유

지시킬 수 있는 방법은 계급을 부여하는 거였다. 즉, 하전사와 간부를

적당히 섞어서 배치시키면 질서는 가장 잘 유지될 수 있다. 그런데 지

금 이들은 계급별로 막사를 분리해서 수용하고 있었다.

무슨 생각일까.

호야미는 도대체 그 의도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조용!"

무장한 병사가 소리쳤다. 순식간에 막사 안은 조용해 졌다.

"조용, 조용, 조용!"

아마도 그 말 밖에는 할 줄 모르는 휴먼 레이스 용병인 것 같았다.

하지만 '조용'이라는 단어 하나로 막사 안은 완벽한 질서를 보이고 있

었다.

곧이어 통역병이 막사로 올랐다.

"차렷! 지금부터 간단하게 설명한다. 너희들 중에서 막사 대표를 뽑

아라. 지금부터 10분 뒤, 막사 앞에 대표가 선다."

통역병은 이렇게만 말을 던져놓고는 다른 막사로 이동했다. 통역병

의 숫자가 그리 많은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형씨가 대표하슈."

털털한 목소리로 덩치 큰 중급전사 하나가 척 보기에도 나이 들어

보이는 전사에게 이렇게 말했다.

"안돼! 저 나이에 하전사라니. 강등 당한 게 틀림없는 녀석한테 막사

대표를 시키자고? 보나마나 사고 친 녀석일 거라구!"

누군가 소리쳤다. 호야미는 강등이라는 말에 가슴에 차가운 쇳덩어

리 하나가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젠장. 적한테 잡힌 주제에 사고를 쳤으면 어떻게 아니면 또 어때?"

"맞아. 어차피 살아 돌아가 봐야 우리한테는 불명예뿐이라고."

전혀 기강이라곤 찾아 볼 수가 없었다. 호야미는 그런 모습에 안도

했다. 만약 자신이 강등당한 하전사라는 건 언젠가는 밝혀 질 거였고,

기강이 잡힌 분위기에서 그 사실이 밝혀진다면 이곳 생활은 지하 병영

에서와 다를 바 없어질 거였다.

몇 번 논쟁이 오가다가 10분이 다 되자 대표는 처음에 말을 꺼냈던

덩치 큰 중급 전사로 정해졌다. 중급전사는 막사 앞으로 나가서 인원

수를 보고하고 인원수대로 침구와 세면도구, 옷가지들을 지급 받았다.

그렇게 하는 동안 수용소의 첫날은 마무리되었다.

수용소에서의 일상은 그 다음날부터 시작되었다.

새벽에 기상해서 가벼운 맨손 체조를 하는 것으로 하루가 시작된다.

그리고 나서 고기는 찾아 볼 수 없는 고기 스프와 딱딱한 빵 한 조각

을 먹고 나면 오전 일과 시작. 오전 일과는 휴식. 막사 대표가 건의하

면 운동기구도 받아 올 수 있다. 그리고 점심식사. 점심은 종이처럼 얇

은 고기조각 한 장을 끼운 빵 한쪽. 오후 일과 역시 운동을 하거나 하

면서 노닥거릴 수 있었다. 저녁만큼은 조금 푸짐한 편이어서 두툼한

고기 한 쪽과 부드러운 빵, 스프가 함께 나온다. 그리고 나면 매일 바

뀌는 간식과 휴식. 하루 종일 뭘 했다고 휴식은, 하면서 투덜거리는 전

사들도 있었지만 호야미는 너무나도 행복했다. 군에 입대한 이후 처음

으로 맛보는 평온한 생활이었던 것이다.

아침을 먹고 막사 대표가 가지고 온 프레아(얇은 나무로 만든 공)를

차며 시간을 보내는 동안, 호야미는 가만히 앉아 그 모습을 바라보기

만 했다. 점심을 먹고 나서 막사 대항 마락시(씨름의 일종) 경기가 벌

어지면 호야미는 가볍게 응원을 따르며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저녁

식사가 끝나고 전사들이 간식거리를 걸고 진마(카드 게임)를 즐기는

동안 호야미는 몽상에 빠져들었다.

해가 떨어지고 취침시간이 되면, 귀에 익지 않은 취침나팔이 울려

퍼졌다. 아마도 해방군의 취침나팔 소리일 것이다. 처음에는 대단히 어

색한 기분으로 잠자리에 들곤 했던 호야미였지만 며칠이 지나자 그러

려니 하고 넘어가게 되었다. 이 취침나팔 소리를 들으며, 아마도 지화

란 참위는 분통을 터트리리라.

도저히 전쟁중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생활이었다. 호야미는 진심으

로 행복을 느끼고 있었다.

이런 생활이 며칠 계속 되는 사이, 막사간에는 약간의 분쟁이 생기

기 시작했다. 발단은 식단이었다. 전사들의 식단과 간부들의 식단은 누

가 보아도 분명 현격한 격차를 지니고 있었다.

전사들이 멀건 스프를 바닥까지 핥아먹을 때 간부들은 건더기가 가

득 차 있는 스프를 먹었다. 전사들이 딱딱하고 오래된 빵을 씹을 때

간부들은 부드럽고 방금 구워낸 빵을 씹었다. 전사들이 썩은 부분을

골라내야 하는 과일을 간식으로 먹을 때 간부들은 막 농장에서 따낸

것 같은 과일에 징겨우 차도 한 잔씩 마시고 있었다.

불만은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이었지만 조금씩 쌓여갔고, 결국에는

폭발하고 말았다. 하필이면 호야미가 속해있는 막사 대표였다. 덩치 좋

은 중급전사는 사소한 시비 끝에 좌관급 간부의 얼굴을 주먹으로 쳤던

것이다. 그것을 보고 있던 좌관급 간부 하나 -소문에는 특수전사령부

소속 좌관급 장교 였다고 한다- 가 중급전사를 쳤고, 곧 이어 싸움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말았다.

호야미는 늘 그랬듯 그런 광경을 마치 공놀이를 구경하는 것처럼 그

저 보고만 있었다. 싸움은 술과 같다. 싸움을 하고 있는 당사자들과 술

을 마시고 있는 당사자들은 알 수가 없다. 자신들이 얼마나 추하고 흉

한 모습을 하고 있는지. 아주 작은 욕심과 자존심을 부리는 당사자들

은 흥분에 취했건 술에 취했건 간에 자신들의 모습을 냉정하게 바라

볼 수가 없는 것이다. 이렇게 싸움을, 혹은 술판을 멀리서 바라보면 세

상이 '자신과는 동떨어진 곳에 있는 어떤 것'으로 여겨진다. 호야미는

주먹을 내지르는 간부와, 쓰러진 전사의 옆구리를 걷어차는 간부의 발

길질과, 코를 감싸쥐고 비명을 지르는 좌관급 간부와, 흥분으로 마치

짐승처럼 일그러진 포로의 얼굴과... 모든 것들이 그저 비현실적으로

보일 뿐이다.

호야미는 고개를 까딱거리고 있었다. 뭔가 생각에 잠긴 듯 한 얼굴

이었지만 실은 그저 박자를 맞추며 싸움을 방관하는 태도일 뿐이었다.

싸움판에서 한 걸음 떨어지면 싸움꾼보다 훨씬 많은 것을 볼 수 있

다.

호야미는 흥분한 당사자들은 볼 수 없었던 것을 볼 수 있었다. 장갑

복으로 무장한 해방군 병사들도, 휴먼 레이스 용병들도, 통역병들도 그

저 자신처럼 싸움을 구경만 하고 있는 것이었다. 호야미는 그리 깊은

고민을 하지 않고서도 정통군이 뭔가 꿍꿍이를 가지고 있을 것이 틀림

없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 누군가가 싸움을 말리 시작했다. 때로는 욕설을

들으며, 또 때로는 얻어맞으며 싸우는 전사들과 간부들을 떨어뜨리고

있었다. 호야미는 그 얼굴을 확연히 구별해 낼 수 있었다. 뭔가에 취하

지 않은, 그렇지만 현실을 현실로 받아들이고 있는 냉정한 얼굴. 그런

얼굴들 사이에는 낯익은 얼굴도 있었다. 누군가에게 얻어맞았는지 조

금 부은 얼굴이긴 했지만 분명했다.

지화란 참위였다.

제 목:[하이어드] Soldier of fortune - 21

지화란 참위는 뭔가 소리치고 있었다. 호야미는 지화란 참위의 입모

양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지화란 참위는 외치고 있었다. 우리는 이용당

하고 있는 거야! 이게 녀석들이 노리는 거야! 정신 차려! 우리는 적과

전쟁중이야! 우리와 전쟁을 하고 있는 게 아니란 말이야! 호야미는 누

가 뭐라고 하는 것도 아닌데 슬쩍 자리에서 일어나 막사로 도망치듯

걸음을 옮겼다. 다시 지화란 참위와 눈을 마주치게 된다면 어쩐지 견

디기 어려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다음 날부터 수용소에는 약간의 변화가 생겨났다. 일과시간에 아무

런 일도 없었던 지금까지와는 날리 막사 별로 돌아가면서 몇 명씩 해

방군에게 이끌려 어디론가 끌려갔던 것이다.

"고문하는 거야. 틀림없어."

"아냐. 해방군으로 투항하라고 권고한다던 것 같던데."

"설마 돌아가면서 조금씩 죽이는 건 아니겠지?"

"그럴 리가 있어? 뭔가 이용해 먹으려는 거겠지. 끌려간 녀석들 공

통점을 생각해 보라고. 그 편이 더 빠를 테니까."

소문은 항상 무성했다. 포로들이 알고 있는 사실은 두 가지 밖에 없

었다. 무작위로 몇 명씩 끌려간다는 것. 그리고 그들 중 몇몇은 돌아오

지 못한다는 것. 돌아오지 못한 군인들이 어떻게 되었는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끌려간 몇몇의 증언에 따르면 그들은 전혀 알 수 없는

양면거울이 설치된 지하실로 끌려가 심문을 받았다고 했다. 교본에 나

와있는 대로 협조하지 않겠다고 말하면서, 기운이 빠지게 되면 묵비권

을 행사하거나, 혹은 혹시 가해질지 모를 고문에 대한 두려움에 떨거

나 했지만 적은 그저 몇 마디 일상적인 대화만 했을 뿐 별다른 위해를

가하지는 않았다고 했다.

"그렇다면 돌아오지 못한 친구들은 어떻게 되었다는 거야?"

이런 물음에 끌려갔다 온 해방군은 변명을 늘어놓았다. 하나같이 완

전히 통제된 상황에 있었으며, 함께 끌려온 전우의 얼굴조차 볼 수가

없었다는 게 전부였다.

"그냥 방안에 앉아서 말도 통하지 않는 이상한 녀석하고 얼굴만 마

주보고 있다가 왔다던데?"

"설마. 거짓말 일거야."

"혹시 돌아온 녀석들은 우리 중에 첩자로 남기로 약속을 한 녀석들

아닐까? 돌아오지 못한 녀석들은..."

"...협조하지 않아서 죽였다?"

"가능성 있지."

"젠장. 그만들 둬. 이런 식으로 하다간 서로 의심만 하게 될 거야.

아직까지 우리 막사에서 끌려간 녀석은 없지만 이제 곧 생길텐데. 누

가 되었건 일단 돌아오면 의심부터 하게 될 거 아니야. 그게 녀석들이

진짜로 노리는 거라고."

가장 그럴듯한 해석을 한 것은 덩치 좋은 막사 대표였다. 하지만 호

야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혹시 강제최면이 아니었을까? 그런데

정통정부군에서도 강제 최면으로 심문한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는데.

호야미는 이런 의문을 나누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강제

최면에 대해서 알고 있다는 건 아군에게 심문 당한 적이 있다는 말이

었고, 하전사가 강제 최면을 당한 경험이 있다는 건 말 그대로 '명예롭

지 못한 정통정부군의 수치'라는 걸 스스로 밝히는 꼴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호야미는 이런 의문을 그저 혼자 품고만 있을 뿐

이었다.

호야미 보다 먼저 지화란 참위가 끌려가게 된 것은 어떻게 보면 다

행스러운 일이었다. 적어도 호야미는 그렇게 생각했다.

지화란 참위가 끌려가게 된 것은 오전 일과가 시작된 후의 일이었

다. 호야미의 막사는 옆 전사 막사와 막사 대항 프레아 차기 시합을

하던 중이었다. 지난 번 패배로 이틀동안 간식 과일을 빼앗기게 된 상

대편 막사 대표는 복수의 각오를 다지고 도전해 왔고, 이틀 동안 간식

과일을 두 배로 먹은 호야미의 막사는 승자의 이름을 지키기 위해 도

전을 받아들였다.

프레아를 차는 병사는 상당히 근사해 보인다. 프레아를 가지고 경기

를 하게 되면 두 발을 동시에 떼지 않으면 안될 만큼 급박한 상황이

벌어지기 마련이었고, 가볍고 작은 프레아를 차는 빠른 동작은 누가

보아도 숙련된 체조선수 같아 보인다.

호야미는 그런 광경을 가만히 앉아서 지켜보고 있었다. 사실 간식을

이틀 동안 두 배로 먹게 되건, 먹지 못하게 되건 별 상관은 없었다. 응

원을 하는 것도 그저 달리 할 일이 없기 때문이었다.

"내가 협조하지 않겠다고 했지!"

강당을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였다. 모두들 그 소리때문에 프레아

를 차는 걸 멈추었고 덕분에 허공을 가르고 있던 프레아는 누군가의

머리통에 명중했다. 하지만 아무도 웃지 않았다. 수용소에 온 이후 처

음으로 보는, 포로가 해방군 병사에게 반항하고 있는 모습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나는 분명히 협조하지 않겠다고 했어!"

지화란 참위는 양팔을 장갑복을 입은 병사들에게 붙잡혀 버둥거리며

소리치고 있었다. 휴먼 레이스 간부 하나가 지화란 참위에게 다가가

뭐라고 통역병을 통해 뭐라고 이야기를 건네고 있었다. 하지만 지화란

참위는 조금도 태도를 바꾸지 않고 있었다.

"협조하지 않는다니까!"

지화란 참위는 이렇게 소리치고 있었다. 호야미는 지화란 참위가 무

너지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마음 따위 들지 않았다. 지화란 참위에 대

한 두려움만이 있을 뿐이었다. 호야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막사

안으로 돌아가 버렸다. 지화란 참위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이제

그가 무너지건 끝가지 버티건 그건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이라는 생각

이 들었다. 그저 피하고 싶었다. 결코 눈이 마주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는 생각 뿐이었다.

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 호야미는 막사의 침상 위에

걸터앉아 있었다. 하지만 소란스러운 분위기로 미루어 볼 때 뭔가 심

상치 않은 일이 벌어진 듯 했고 호야미는 침상에서 일어섰다. 조금 전

까지의 생각과는 달리 지화란 참위가 어떻게 될 것인가에 관심이 쏠렸

던 것이다.

일단 마음을 먹기까지 시간이 걸렸을 뿐이지 마음을 먹자 몸은 순식

간에 움직였다. 호야미는 다시 막사 밖으로 뛰쳐나갔다.

지화란 참위는 장갑복을 입은 병사 하나를 밀어서 쓰러뜨린 상태였

다. 보통의 경우 10배 이상의 힘을 발휘하는 장갑복 병사를 밀어냈다

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었다. 하지만 더 대단한 것은 지화란 참위가

병사의 니들건을 빼앗으려고 했다는 거였다. 물론 그 시도는 옆에 있

던 다른 병사의 개머리판에 의해 좌절되었다. 퍽,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지화란 참위는 앞으로 쓰러졌다.

휴먼 레이스 간부는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으며 포기했다는 얼굴이었

고 장갑복을 입은 병사도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는지 그저 지화란

참위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약골들!"

기절한 줄 알았던 지화란 참위가 구경하고 있는 포로들을 향해 소리

쳤다.

"그렇게 당하고만 있다니. 너희들이 짐승이냐? 너희들은 인격체야!

게다가 자랑스러운 정통정부군의 군인이란 말이야!"

지화란 참위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휴먼 레이스 간부가 뭐라고 지시

했고, 장갑복을 입은 병사들은 지화란 참위에게 수갑을 채웠다. 그리고

난 뒤 지화란 참위는 운동장 한 복판에 있는 큰 기둥에 포박되었다.

휴먼 레이스 간부가 뭐라고 말하자 통역병이 간부의 말을 전달했다.

"주목. 오늘부터 1주일 동안 간식은 없다. 점심 메뉴 물과 딱딱한 빵

만으로 바뀐다."

순식간에 수용소 안은 침묵에 휩싸였다. 휴먼 레이스 간부는 다시

뭐라고 통역병에게 말을 전했다.

"이 참위가 마음을 고쳐먹지 않는 이상, 일 주일씩 그 기간은 연장

된다. 다음 주까지 이 참위가 마음을 고쳐먹지 않으면 운동기구 대여

도 금지된다. 그 다음 주에는 취침시간이 줄어든다."

말이 끝나자 수용소 안의 인원들은 모두가 분노를 터트렸다. 호야미

는 분노하는 포로들에게 두 부류가 있다고 여겨졌다. 하나는 해방군의

처사에 대한 분노를 터트리고 있는 부류였다. 아마 이 쪽은 간부들이

많은 것 같았다. 그리고 또 하나는 지화란 참위에 대한 분노를 터트리

고 있는 부류였다. 이쪽은 아무래도 전사 계급이 많은 것 같았다.

통역병의 말이 끝나자 지화란 참위가 갑자기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

다.

"이 녀석들은 지금 우리를 분열시키려고 하는 거다! 협조하지 말자!

그리고 탈출의 기회를 잡자! 이것이 우리 정통 정부군의..."

지화란 참위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장갑보병이 일단 손으로 지화

란 참위의 입을 막은 다음 입에 자갈을 물렸기 때문이었다. 지화란 참

위는 얼굴이 시뻘개져서 몸을 바둥거렸지만 별 소용은 없었다.

"이 참위는 내일까지 반성의 의미로 여기에 묶여 있는다. 접근은 금

지된다. 이상."

통역병은 이렇게 말하곤 휴먼 레이스 간부와 함께 돌아가 버렸다.

호야미는 휴먼 레이스 간부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아마 이곳의 책임을

맡고 있는 간부인 모양이었다. 머리가 희어서 나이가 많이 들어 보이

기는 했지만 거리가 멀어서 자세히 볼 수는 없었기 때문에 정말로 나

이가 많은지는 알 수 없었다.

호야미는 지화란 참위를 바라보았다. 지화란 참위의 눈동자는 분노

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누구에 대한 분노일까? 전사들

에 대한 분노? 호야미는 이제 더 이상 지화란 참위가 무섭지 않았다.

그는 그저 묶여 있는 포로에 불과한 것이었다. 호야미는 지화란 참위

를 한참동안 바라만 보고 있었다.

"병신새끼."

호야미는 막사로 돌아가면서 이렇게 중얼거리는 막사 대표의 모습을

보았다.

다음날 아침, 지화란 참위는 죽어 있었다. 자살은 아니었다. 기둥에

묶여있는 채로 자신의 목을 조르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 사건을

두고 병사들 중 누군가가 죽였다느니, 해방정부군 녀석들이 살해한 것

이라느니 말들이 많았지만 뾰족한 결말이 나지는 않았다. 접근이 불가

능한 지역인데 어떻게 병사가 살해할 수 있겠느냐는 의견도 있었고,

해방정부군이 묵인 한 게 아니겠느냐는 의견도 있었다. 하지만 그 어

떠한 의견도 다만 추측일 뿐이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이 일로

인해 간부들과 전사들간의 갈등이 더욱 깊어졌다는 점이었다. 호야미

가 보기에도 수용소는 이제 두 부류로 완전히 분리되어가고 있었다.

지화란 참위의 의도와는 정반대의 의도로.

어찌되었건 포로가 사망했으므로 조사가 있었다. 하지만 누가 보아

도 형식적인 게 분명한 조사였다. 그리고 사건은 미제로 남게 되었다.

시체는 곧 하얀 천에 덮여서 수용소를 빠져나갔다. 호야미는 그 모습

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호야미는 이렇게 해서 지화란 참위의 최후를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지화란 참위가 자신에게 요구했던 명예로운 죽음이었던가에 대

해서는 결코 결론을 내릴 수 없었다.

호야미가 일과시간에 끌려가게 된 건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

였다.

"저 자식은 묘하게 존재감이 없어. 이름이나 알아?"

"돌아오지 못한다고 해도 아무도 모를 것 같은데. 내기할까?"

"좋아. 내일 저녁을 걸자고."

호야미가 끌려가게 되었을 때 막사 안의 병사들이 나눈 대화였다.

말에는 누구도 알 수 없는 힘이 존재한다고들 한다. 말의 힘으로 누

군가의 운명이 뒤바뀌기도 하고, 말의 힘으로 환경이 변하기도 한다고

한다. 분명 이런 이야기들은 미신이겠지만 결국 그들의 말처럼 존재감

없던 호야미는 두 번 다시 막사로 돌아오지 않았다. 이에 대해서 의견

이 분분하기는 했지만 결국 알 수 없는 건 알 수 없는 일로 남게 되었

다.

수용소의 천장에 매달려 있는 조명등은 그저 창백한 빛만을 내뿜고

있을 뿐이었다.

제 목:[하이어드] Soldier of fortune -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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