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이어드-38화 (38/52)

9.그림자 속으로

기무사에 새로운 부서가 신설되었다. 부서의 이름은 3반. 반의 이름

에 숫자가 붙는 건 기무사에서 하는 일등 중에서도 극비에 속하는 일

들을 진행한다는 뜻이다.

숫자가 붙어있는 반은 기무사령관 직할에 속하게 된다. 보고를 해도

기무사령관에게만 하면 되었고 명령을 받아도 기무사령관에게 직접 받

게 되어 있었다. 인사권과 예산책정, 집행권은 물론 전적으로 반장에게

있었고 대부분의 경우 기무사령관의 전폭적인 지지아래 업무를 진행하

곤 했다.

3반의 임무는 심문에 의한 첩보에 대한 기술 연구를 주 업무로 하고

있었다. 구성원은 다음과 같았다.

먼저 3반의 반장은 로웰 중령이었다. 반원으로는 아이라 대위가 있

었고, 린 중사, 그리고 메이런도 속해 있었다. 메이런은 소위 계급장을

달고는 있었지만 정식 소위는 아니었다. 메이런의 어깨에는 준(準)군무

원을 뜻하는 R비표가 붙어 있었다.

반의 정식 인원은 이것뿐이었다. 나머지 인원은 모두 기무사령부의

직할대와 예하대에서 지원을 받고 있었다.

처음 메이런이 기무사 3반에 아이라와 함께 도착했을 때, 메이런은

로웰 중령의 얼굴을 알아보았다. 메이런은 로웰 중령에게 군대식으로

거수 경례를 붙였다. 로웰 중령은 가볍게 목례로 메이런의 인사를 받

았다.

"메이런. 다시 만나게 될 거라고 했지요?"

로웰 중령이 메이런에게 악수를 청하며 말했다. 메이런은 내키지 않

는 마음으로 어정쩡하게 로웰 중령의 손을 잡았다.

"아직도 악몽을 꾸나요?"

로웰 중령이 꺼낸 첫마디였다. 메이런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나름대로 훌륭한 선택이었어요. 하이어드 일이나 하면서 미싱 되는

것보다는 도망치는 편이 나았겠지요."

로웰 중령의 말은 비꼬는 내용을 담고 있었지만 목소리만큼은 조금

도 비꼬는 투로 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메이런은 걱정하는 것처럼 들

리고 있었다.

"메이런이라는 이름을 듣는 건 참 오래간 만이겠어요. 멜 상병이라

고 불렸다면서요?"

로웰 중령이 화제를 돌렸다. 메이런은 잠자코 듣기만 했다. 별로 이

야기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로웰 중령도 그런 메이런의 마음을 짐

작했는지 대답을 듣지 않고 이야기를 진행시켰다.

"그런 이야기는 차차 하기로 합시다. 먼저 우리가 진행하게 될 일부

터 정리를 해 보죠."

로웰 중령은 아이라에게 눈짓을 보냈다. 아이라는 도면 한 장을 책

상 위에 폈다.

"뭔지 알아보겠어?"

"음. 건물의 도면 같은데? 책상 위에 놓여져 있는."

아이라는 메이런을 향해 눈을 흘겼지만 메이런은 꿈쩍도 하지 않고

아이라의 눈길을 받았다.

"여기는 수용소야. 우리 3반에서 직접 관리하게 되는 수용소. 이번

미린 시 작전에서 획득한 포로 중에 일부가 이곳에 수용될 거야."

"메이런이 참가했던 그 전투죠."

메이런은 건축 대해서는 조금도 지식이 없었기 때문에 그저 도면을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여기에 포로 180여명이 수용됩니다. 모두 군인이죠. 아이라한테서

우리가 하는 일이 뭔지 들었나요?"

"심문에 의한 첩보에 대한 기술 연구? 그렇게 들었습니다."

"그게 뭔지 알겠어요?"

메이런은 한숨을 내쉬었다.

"로웰 중령님. 아마도 트랜서를 이용해서 심문을 하시려는 모양인데

요, 그건 불가능합니다. 트랜스는 말이죠..."

"예. 트랜스는 상대방이 마음을 열지 않으면 불가능하다는 걸 말하

려는 거죠?"

"알면서 이런 일에 예산을 투자합니까?"

메이런이 로웰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말했다. 상병이 중령에게

이런 식으로 말대꾸한다는 건 군의 생리상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메이런은 이곳에 오게 된 순간부터, 소위 계급장을 받은 순간부터 자

신이 정상적인 군 업무를 하는 게 아니란 걸 눈치채고 있었다.

"메이런. 누구한테서 트랜스를 배웠지요?"

"그건..."

메이런은 키티-본의 이름을 말해야 하나 망설였다.

"아. 부담스러우면 말할 필요는 없어요. 하여간 뒷골목의 무허가 트

랜서들이었겠지요? 제대로 된 교육을 받았을 리가 없죠. 그렇죠?"

메이런은 눈을 돌려 도면 쪽을 바라보았다. 왜 이런 도면은 파란 색

을 띠고 있는 걸까?

"메이런 말이 맞아요. 근본적으로 트랜스라는 건 상대방이 마음을

열지 않으면 불가능하죠. 트랜스 된 공간을 열기 위해서는 두 개체의

마음이 열려 있어야 하니까요."

메이런은 문득 아이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이라는 진지한 표정

으로 로웰 중령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메이런은 표정으로 미루어

보아 아이라도 이 이야기를 처음 듣는 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데, 메이런. 메이런은 트랜스를 하는 것 말고 다른 능력도 있지

요? 예를 들면 지금 내가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있잖아요.

그게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는 건지는 내가 트랜서가 아니라 모르겠지

만, 하여간 트랜서들은 그걸 '마음을 읽는다'고 표현하죠?"

"예. 비슷합니다. 하지만 마음을 읽는 것으로 심문하는 건 불가능합

니다. 가끔씩 구체적인 단어를 읽을 수도 있고, 어떤 영상을 받아들일

수도 있지만 그렇게 마음먹은 대로 읽어 낼 수 있는 건 아니거든요.

음...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 아닌지 정도는 알 수도 있겠지만 그것도

분명한 건 아니고요."

한 참 동안 입을 다물고 있었기 때문에 로웰 중령이 질문을 하자 메

이런은 마치 쏟아내는 것처럼 답변을 이었다. 로웰 중령은 흐뭇한 표

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그런데 트랜서의 능력이 그것뿐일까요?"

로웰 중령은 메이런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이렇게 물었다. 메

이런은 뭔가 대답을 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입에서는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트랜서의 다른 능력이라는 건 메이런에게는 단 한 번도 생각

해 보지 않은 일이었던 것이다.

"나는 오래 전부터 트랜서의 활용에 대해서 생각해 오고 있었어요.

행성 어스가 정치적으로 미묘한 역학관계의 중심에 놓여있기 때문에

트랜서가 외교 목적으로 많이 쓰였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에

요. 하지만 타인의 마음을 읽을 수 있고, 타인과 트랜스 된 공간을 열

수 있는 존재에게 능력이라는 게 고작 대화뿐이라면 그건 재능의 낭비

라고 봐요. 메이런. 만약 메이런이 그림을 잘 그린다고 해 봅시다. 그

런데 나라에서 메이런에게 초상화만을 그리라고 한다면 그건 메이런이

재능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게 하는 거겠지요. 나는 트랜서도 그렇다

고 봐요."

꽤 긴 이야기를 로웰 중령은 한 번도 막히지 않고 술술 늘어놓았다.

아마도 꽤 오래 전부터 정리해 온 생각인 것 같았다.

"나는 M.I에서 근무하면서 이 부분에 대한 연구를 꾸준히 해 왔어

요. 하지만 아다시피 트랜서는 그 수가 턱없이 부족하고 트랜서에 대

한 연구는 너무나도 미약한 수준이죠. 그래서 나는 일부는 군의 도움

을 받았고, 또 일부는 라디오 그룹으로부터 지원을 받기도 했지요."

로웰이 이렇게 말했을 때 아이라의 표정이 굳었다. 메이런은 아이라

가 어떤 여자를 떠올리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중년의 아름다운

휴먼 레이스 여성이었는데 메이런은 그 여성이 누구인지 짐작할 수 없

었다.

"하지만 연구의 속도는 정말 더뎠죠. 또 내가 주로 현장근무를 즐겨

하다 보니 제대로 진행이 되지 않은 측면도 있지만요. 메이런. 혹시 가

장 빨리 과학과 기술이 발전하는 시기가 언제인지 알아요?"

가장 빨리 과학과 기술이 발전하는 시기라.

"외계 문명과 접촉했을 때?"

메이런은 자신 없는 투로 말했다.

"그건 과학과 기술 발전의 한 계기일 뿐이죠. 진짜 과학과 기술은

전쟁 때 가장 빠르게 발전한답니다. 지금 우리 행성 어스도 외계 문명

과의 접촉 이후, 과학기술이 대단히 발전한 것 같아 보이지만 실은 전

혀 그렇지 않지요. 기술만 발전했을 뿐이지 과학은 전혀 발전하지 않

았으니까요."

"과학과 기술이 어떻게 다른지 잘 모르겠습니다."

메이런이 솔직하게 물었다. 로웰 중령은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설명을 시작했다.

"연락선 조종사가 항공 역학이나 반중력 이론을 알 필요는 없다고들

하죠. 그럼 조종사가 가지고 있는 건 기술일까요, 과학일까요?"

"기술... 인가요?"

"그렇죠. 아무리 과학에 대한 지식이 없는 휴먼 레이스라고 해도 훈

련만 받으면 셔틀을 조립할 수도 있고, 연락선을 몰수도 있어요. 하지

만 셔틀이나 연락선을 만들어 낼 수는 없지요. 지금 우리 행성 어스의

과학은 형편없는 수준이에요. 유전공학 쪽은 발달하고 있는 것 같지만

나머지 기초과학 분야는 전무하다고 볼 수 있죠. 물론 기술 자체는 훌

륭하지만요."

메이런은 로웰 중령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기술의 발전은 외계문명과 접촉만 해도 이루어 질 수 있어요. 하지

만 진짜 과학과 기술은 그런 식으로는 어렵지요. 누군가가 떠먹어 주

어선 곤란해요. 스스로 방법을 찾아낼 수 있어야 하지요. 고대의 예를

들어볼까요? 고대 1, 2차 식민지 전쟁 때에도 과학과 기술은 눈부시게

발전했지요. 비행물체에서 프로펠러가 사라지게 된 것도 고대 2차 식

민지 전쟁 이후예요. 프로펠러로 하늘을 나는 비행체와 제트엔진으로

하늘을 나는 비행체, 또 반중력장을 이용해서 하늘을 나는 비행체는

완전히 다른 과학을 바탕으로 개량된 기술의 산물이에요. 이건 장갑

기술이나 이동식 건물 기술, 또 그보다 훨씬 전에 개발된 식량 보존

기술... 예를 들자면 한도 끝도 없어만, 이런 것들과도 같아요. 이 모든

과학과 기술은 전쟁 때문에 탄생했고, 또 연구 된 기술이죠."

메이런이 이해하기에는 벅찬 내용이었지만 로웰 중령은 메이런이 이

해했는지 아닌지는 신경 쓰지 않는 듯 했다.

"중요한 건 어떻게 그게 가능했을까 하는 거예요."

로웰 중령은 과학과 기술에 대한 이야기는 이렇게 마무리 짓고 다음

이야기로 넘어갔다. 그리고 이 부분이 로웰 중령이 강조하고자 하는

부분인 모양이었다.

"저능아 같은 정치가와 공무원들이지만 신기하게도 전쟁 때에는 효

율적으로 움직이죠. 왜 그럴까요? 일단 전쟁에서 이겨야 하거든요. 적

이 존재하지 않으면 정치가와 공무원들은 늘 현상만을 유지하려고 해

요. 그러니까 과학이나 기술 따위가 발전할 리가 없죠. 그런데 전쟁이

일어나면, 어쩔 수 없이 효율적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과학과 기술이 발전한다고 말씀하시는 건가요?"

메이런이 반문했다.

"효율적이라는 말뜻이 뭔지 알아요? 그건 '열심히' '잘' 이런 말하고

는 달라요. 효율적으로 움직인다는 건, 어떠한 수단과 방법도 동원할

수 있다는 뜻이에요. 예를 하나 들어볼까요? 휴먼 레이스의 몸에서 피

가 삼분의 일이 빠져나가면 죽게 된다던가, 전염병에 걸렸을 때 얼마

정도의 시간이 흐르면 죽게 되는가, 혹은 팔이나 다리를 잘라낼 수 있

는 효과적인 방법 같은 건 어떻게 알 게 되었을까요? 너무나도 훌륭한

의사들이 있어서? 그건 아니죠. 생체를 가지고 실험을 하지 않으면 그

런 정확한 데이터는 얻어낼 수 없어요."

로웰은 끔찍한 이야기를 아주 상냥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나는 전쟁소식을 들었을 때, 이 전쟁이 호기라고 생각했어요. 오랫

동안 꿈꿔온 트랜서의 기술에 대한 발전 가능성을 본 거지요."

"...그리고 저는 아주 좋은 실험 대상인가요?"

메이런이 물었을 때, 로웰은 껄껄대며 큰 소리로 웃었다.

"그냥 날 돕는 것뿐이에요. 메이런. 그리고 나도 메이런을 도울 거고

요."

로웰은 이렇게 대꾸하곤 사무실에 있는 작은 책장을 만졌다.

"이 전쟁통에 상부에서는 트랜서를 용병들 통역으로나 쓰고 있어요.

그것도 중대에 한 명씩! 이 얼마나 엄청난 인력의 낭비입니까? 차라리

트랜서들을 행성 어스에서 다른 일을 하게 하고, 이곳에서 통역병을

키우는 편이 훨씬 효율적일텐데 말이죠."

로웰 중령의 목소리는 차갑게 느껴졌다. 린은 겁먹은 얼굴을 했고

아이라는 린을 달랬다.

"우리는 사실 이번 전쟁의 승패여부와는 아무 상관도 없어요. 해방

정부군이 이기든, 정통정부군이 이기든 우리는 전쟁이 오래가면 갈수

록 좋을 뿐이에요. 이 전쟁을 통해서 우리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부를

축적할 수 있거든요. 참전한 군인들의 임금은 물론이고 어마어마한 량

의 기술 이전까지. 그런데 문제는 장군들이 그 부에만 눈이 멀어서 효

율적으로 움직이지 않는 다는 거예요. 아까 말했죠? 전쟁 때 과학과

기술이 발전할 수 있는 건 멍청한 정치가들과 공무원들이 전쟁에서 이

기기 위해서 효율적으로 움직이기 때문이라고요. 그런데 꼭 이기지 않

아도 되는 전쟁이니 역시 게을러 질 수밖에 없죠."

"그렇다면 과학과 기술이 눈부시게 발전하는 건 힘들겠군요."

메이런이 말하자 로웰 중령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여유 있어 보이

는 표정이었다.

"꼭 그렇지만도 않아요. 무슨 수단과 방법을 사용하든지 간에 다 용

납될 테니까요."

"혹시 트랜서의 뇌를 해부해 보려는 건 아니겠죠?"

메이런이 말하자 로웰 중령은 정말 재미있는 농담을 들었다는 듯 웃

었다.

"황금 알을 낳는 거위에 대한 설화가 생각나는군요. 거위의 배를 가

른다고 해서 황금 덩어리를 한꺼번에 얻을 수는 없죠."

"제가 낳을 수 있는 알은 대화뿐이에요. 고작 대화뿐이라고요. 그리

고 락벳어를 할 줄 아는 병사도 꽤 되지 않나요?"

메이런이 말했다. 하지만 로웰 중령은 메이런의 말을 무시했다.

"지금 우리 군은 꽤 중대한 위험에 봉착해 있어요. 우리는 정보전에

서 지고 있거든요. 녀석들은 강제최면이라는 매우 효율적인 방법으로

우리 아군 포로를 심문하고 있어요. 자. 이제서야 본론이 나오는 군요.

나는 상부에 건의했어요. 우리에게는 트랜서가 있다! 우리는 트랜서를

이용해서 보다 효과적으로 적군을 심문할 수 있다! 예. 천만 다행으로

이 건의가 결국에는 먹혀 들어갔어요. 아무리 승패에 상관없는 전쟁이

라고 해도 전쟁은 전쟁이죠. 누구나 이기고는 싶어하거든요. 연이은 패

배의 덕을 보게 된 건지도 모르고요. 어찌되었건 그래서 우리는 상당

수의 포로를 지원 받을 수 있었어요. 약간의 트랜서도..."

로웰 중령은 말끝을 흐렸다.

"저 말고 지원 받은 트랜서가 없는 건 아니겠죠?"

메이런이 로웰 중령의 의중을 떠보기 위해서 물었다. 로웰 중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공식적으로는 메이런 하나 뿐이에요. 아니. 정확하게는 메이런이 트

랜서라는 걸 상부에서는 모르고 있어요. 그냥 잡무를 하는 준군무원

멜 소위로만 알고 있죠. 메이런은 그냥 사무 기능 간부로 등록되어 있

어요. 말했잖아요. 트랜서가 중대 하나 당 한 명씩 용병 통역을 위해서

배치되어 있다고요. 나머지 트랜서는 필요할 때마다 요청하면 보내준

다고는 하지만 아마 힘들 거예요. 알잖아요. 군인도 공무원이라는 걸."

"그래서 어떻게 하시려는 거죠?"

"메이런. 프로젝트의 진짜 이름을 말해 줄게요."

"'심문에 의한 첩보에 대한 기술 연구'보다 긴 이름인가요?"

"훨씬 짧아요. 적이 가지고 있는 기술이 강제 최면이라고 했죠? 우

리가 연구하려고 하는 건 강제 트랜스에요."

강제 트랜스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메이런은 전율이 느껴졌다. 팔이

떨리고 있었다. 가슴이 뜀박질하고 있었다.

"강제로 트랜스를 한다는 건가요, 지금? 그게 가능할 거라고 생각해

요?"

메이런의 목소리 역시 떨리고 있었다. 도저히 감출 수 없는 흥분이

일어나고 있었다. 메이런은 이 흥분의 원인이 무엇인지 짐작조차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흥분하고 있다는 건 로웰 중령에게 자신감을 불

어넣어 주는 일이기도 했다.

"지금부터 가능하게 할 거예요. 어렵게 잡은 이 좋은 기회를 멍청하

게 놓칠 수는 없어요, 메이런."

로웰 중령이 말했다.

3반은 기무사 내부에 사무실을 가지고 있었다. 지하 사격 연습장 옆

에 있는 작은 조립식 건물이었다. 기무사를 오가는 간부들과 마주칠

일이 없다는 것이 3반 건물의 가장 큰 장점이었다. 그렇게 해서 보안

을 조금이라도 더 지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가끔 야간에 사격장

관리관에게 말 몇 마디만 해 두면 사격장을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다

는 장점도 있었다.

장점이 있는 만큼 단점도 있었다. 우선 연락선 비행장이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이어서 조용한 분위기에서 사무를 보기에는 좋지 않

았다. 게다가 일과 시간에 폭발형 니들탄 사격이라도 하는 날은 하루

종일 총성을 들어야 했다. 하지만 두 가지 경우 다 충분히 견딜 수 있

을 거였다. 메이런은 아직 모르고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업무를 하는

곳은 방음시설이 잘 되어 있었다.

사무실에 처음 들어섰을 때, 메이런은 조립식 건물이 생각보다 너무

좁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근무하는 인원이 넷 뿐이라고 해도 달랑 책

상 하나와 책장하나 뿐인 사무실이라니. 화병이 없다거나 그림이 걸려

있는 걸 탓할 게 없을 것 같았다. 게다가 사무실 벽면도 얇아서 겨울

에는 춥고 여름에는 더울 게 분명해 보였다.

"앞으로 여기서 일을 하게 됩니까?"

메이런이 로웰 중령에게 물었다.

"아뇨. 설마 여기서 일하겠어요?"

로웰 중령은 이렇게 말하곤 벽면에 있는 키패드의 비밀번호를 눌렀

다. 그러자 책상이 움직이며 계단이 드러났다.

"...뭐죠?"

메이런이 당황을 감추기 위해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하며 물었

다.

"비밀번호는 1111이에요."

로웰 중령은 이렇게 말하곤 아이라, 린과 함께 계단을 내려갔다. 메

이런도 그 뒤를 따랐다. 1111이라니. 바보나 그런 숫자 조합으로 비밀

번호를 만들 거였다.

"우리의 원칙 세 가지가 뭔지 알아, 메이런?"

아이라가 물었다. 메이런은 대답대신 아이라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

았다.

"보안, 보안, 보안이야."

아이라는 꽤 자신만만한 투로 말했다.

"불, 불, 불조심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메이런이 말하자 아이라는 어색한 얼굴이 되었다. 웃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도 없는 농담이었다.

"보안이 그렇게 중요한데 비밀번호를 1111로 하나?"

"필요한 곳에 필요한 보안이지. 쓸데없이 복잡한 번호로 만들어서

적어 가지고 다니는 것보다 낫잖아. 그리고 여기는 우리 외에는 아무

도 출입할 수 없어."

"비밀번호가 너무 어려워서?"

"아니. 비밀번호 인식 키패드에 생체 감식장치가 되어 있으니까."

아이라는 당연한 거 아니냐는 투였다. 메이런은 별 대꾸를 하지 않

았고, 그래서 둘의 말싸움은 일단 무승부로 끝이 났다.

지하로 내려가자 위에서 보았을 때에는 상상도 하기 어려울 만큼의

넓은 공간이 나타났다. 복도가 일단 눈에 보였고, 양쪽으로 내무반과

비슷한 구조의 방들이 죽 이어져 있었다.

"원래 방공호거든요. 이번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동안 지원 받은 몇

가지 중 하나예요."

"포로수용소도 이렇게 되어 있나요?"

"포로수용소는 가건물만 있어요. 베가 시 강당에는 방공호가 없어서요."

로웰 중령이 말했다.

넷은 다시 지문인식장치로 열리는 문을 하나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이곳이 진짜 사무실인 모양이었다. 진짜 사무실도 집기만 몇 가지가

더 있었다 뿐이지 별다른 장식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아마도 방공호

가 지어졌을 무렵부터 설치 되어있었던 게 아닐까 싶은 책상과 의자는

설치된 이후 한 번도 닦지 않은 모양이었다. 다만 눈에 뜨이는 것은

벽면에 걸려있는 커다란 거울이었다. 거울만은 새로 설치된 모양으로

자신의 클론이 진짜로 서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깨끗했다. 메이

런은 거울이 설치된 의도가 무엇인지 쉽게 알 수 있었다.

제 목:[하이어드] Soldier of fortune - 23

"저기서 취조를 하는 건가요?"

로웰 중령은 대답대신 조명 버튼을 조작했다. 사무실의 불이 꺼졌고,

동시에 취조실의 불이 켜지자 양면거울의 거울 위치는 바뀌었다.

거울 너머로 보이는 취조실에는 조명 하나가 올려져 있는 큰 책상하

나를 중심으로 의자가 두 개 마주보게 되어 있었다.

"지금 우리는 180명의 포로를 가지고 있어요. 다시 말해서, 180장의

카드를 가지고 있는 거지요. 표본집단이라는 말 들어 본 적 있어요?"

"통계학 시간에 배웠습니다."

아이라가 대답했다.

"이 180명의 표본집단 안에서 우리는 효과적인 심문 방법을 찾아내

야 해요. 메이런이 해 줄 부분이에요."

"제가 해야 한다고요?"

"가장 중요한 부분이죠. 트랜서는 메이런이니까요."

로웰 중령이 말했다.

"정통정부군은 오랜 군의 전통을 가지고 있어요. 정통정부군에 대한

충성심도 대단하고, 또한 계급간의 상하관계도 믿어지지 않을 만큼 철

저하게 잘 지켜지고 있죠. 우리가 늘 심문에 애를 먹었던 건 당연해요.

나는 먼저 포로들을 정통정부군에 대한 충성심이 약하고 상관에 대한

존경심도 약한 군인으로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어요. 아이라는 몇 번

본적이 있었지만... 메이런이 전투 마치고 휴양 콜로니에 있을 때부터

하고 있었죠."

"운이 좋았지. 소대에서 둘 빼고 다 전사했으니까 말야. 메이런. 도

대체 무슨 생각으로 보병으로 지원 입대 한 거야? 넌 트랜서잖아. 트

랜서가 얼마나 중요한 자원인줄 알아?"

"그 전투에서 그 중요한 자원도 죽었어."

메이런이 나즈막하게, 하지만 분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메이런은 하

수위에 둥둥 떠 있던 트랜서 꼬마의 목을 떠올릴 수 있었다. 더러운

구정물에 떠다니던 목을 생각하자니 목 부근이 스멀거렸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이니까. 이제부터는 앞일만 생각하죠."

로웰이 침묵을 깼다. 메이런은 이 말에는 긍정했다.

"나는 락벳 군이 전통과 명예심을 잊도록, 그래서 조금이라도 편한

상태에서 심문에 임할 수 있도록 작업을 했어요. 이제 오늘부터 몇 명

씩 선발해서 이곳으로 오게 될 겁니다. 메이런은 일단 그 친구들부터

심문을 해 줘야겠어요."

"솔직히 말씀드려도 될까요?"

"늘 솔직했으면 좋겠어요."

메이런의 말에 로웰 중령은 만약 누군가가 얼굴에 벽돌을 집어던진

다고 해도 용서할 것 같은 얼굴로 대답했다.

"강제 트랜스라는 걸 전 상상도 해 본 적이 없습니다. 게다가 저는

사실 트랜스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알고 계시겠지만, 행성 어스에 있

을 때부터 저는 두통과 악몽에 시달렸어요. 트랜서의 능력을 사용할

때 마다요."

"참. 그걸 잊고 있었군요."

로웰이 너무나도 당연한 것을 잊고 있었다는 듯, 무릎을 탁 치며 말

했다.

"미싱. 미싱 트랜서에 대한 대비도 철저하게 하게 될 겁니다. 너무

걱정 마세요."

"아직까지 그런 대비책은 하나도 보지 못했는데요."

"생각해 보니 아직 얘기 안 했군요. 일단 병원으로 간다고 생각하세

요."

"병원요? 트랜서를 치료하는 병원도 있나요?"

메이런은 침대에 누워있던 키티-본을 떠올렸다.

"미싱은 병이 아니니까 병원은 없죠. 하지만 트랜서의 여러 문제를

다루는 전문가는 있어요. 사실 여기로 불러올까 했지만 여긴 보안 지

역이니까. 아이라가 좀 데려다 줘요. 나는 여기서 수용소 업무를 준비

하고 있겠어요."

로웰이 말했다. 메이런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나도 저 꼬마처럼 취급받는 게 어떨까 궁금했거든요."

린은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걸 알고는 아이라를 물끄러미 올려

다보았다.

"네가 어린아이라서 데려다 주는 게 아니라, 어딘지 모를 테니까 같

이 가 주는 거야."

아이라가 친절하게 덧붙였지만 메이런은 그렇게까지 편한 마음으로

아이라의 말을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그래. 그렇게 해 두자고."

메이런은 이렇게 말하는 자신이 투정 부리는 어린애 같다고 생각했

다. 린이 아무런 감정도 느낄 수 없는 눈을 하고서 메이런을 올려다보

고 있었다.

호버카의 앞자리에는 아이라가 앉았고, 뒤에는 린과 메이런이 앉았

다. 선임자가 조수석에 앉는 군대 관습상 당연한 것이었지만 아이라는

불편해 보였다. 아마도 자신이 상급자라는 걸 옛 친구에게 다짐받는

기분이어서 그런 모양이었다.

"아이라."

아이라가 뒤돌아보았다.

"혹시 말이야, 슈이롱 시에 갈 수 있을까?"

"슈이롱 시? 거긴 갈 일이 없을 텐데. 이제 넌 더 이상 로윙 사단

소속도 아니라구."

"그건 알아. 그런데 말야, 사실 마음에 걸리는 게 있어."

"뭔데? 현지처라도 두고 온 거야?"

아이라는 이렇게 말하곤 뒤돌아보는 게 어색한지 앞으로 고쳐 앉았

다. 메이런은 아이라의 좌석에 턱을 대고 말을 이었다. 아이라의 머리

에서 향긋한 냄새가 풍기고 있었다.

"애인 같은 거 없어."

메이런은 이렇게 말해놓고는 쓸데없는 소리를 했다는 생각이 들었

다.

"사실 거기에 내 총을 맡겨놨거든. 알지? 시에 외출이나 외박을 나

가서 비무장으로 다니는 건 위험하잖아. 사실 지금도 좀 불안하긴 한

데."

"지금 당장은 슈이롱 시로 못 돌아가. 일이 많거든. 만약 간다고 해

도 총은 못 가져와. 필요하다면 하나 내 줄 게."

아이라가 간부답게 답변했다. 메이런은 아이라에게 이런 기질이 있

었던가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냉정하고 판단이 빠르긴 했지만 막상

이렇게 변한 아이라의 모습을 보니 어쩐지 아이라의 모습이 생경하게

여겨졌다.

"45구경이었는데. 보증금으로 1000오빌에 보관료로 50오빌 씩 지급

했거든."

"뒷골목 상인한테?"

메이런은 고개를 끄덕였다. 메이런은 바로 눈앞에 있는 아이라의 목

덜미를 바라보았다. 짙은 갈색 빛 피부는 탄력이 있고 부드러워 보였

다. 메이런은 입술 끝에 전류가 흐르는 듯 찌릿한 기분을 느끼곤 스스

로 쑥스러워져서 입을 가렸다.

"잊어버려. 저녁 한 번 살 게. 지금 무장하고 있지 않아서 불안해?"

"아니. 꼭 그런 건 아냐."

"그럼 그렇지. 메이런한테 그런 군인 기질이 있을 거라곤 생각 안

했어."

아이라는 웃고 있었다.

"1년 넘었나?"

메이런은 도로 뒷좌석으로 몸을 묻으면서 말했다. 아쉬운 기분이었

다.

"지난번에 본 게... 웨이팅하우스 시였지?"

"응. 그래. 웨이팅하우스 시. 참 오랜만에 들어보는 이름이네."

메이런은 잠시 추억에 잠겼다. 쿨란과 함께 하이어드 일을 하던 일.

덩치 큰 타이론. 메이런이 상대했던 수많은 레이스들. 화약식 권총. 총

격전. 전화. 홀로그램 명함. 그리고 무엇보다 커피. 메이런은 쿨란이 만

들어 줬던 커피 향을 생생하게 재현해 낼 수 있었다.

창 밖에 베가 시의 풍경이 지나고 있었다. 낮은 건물들. 분주히 어디

론가 떠나고 있는 주민들. 호버카. 구식 4륜 차량. 메이런은 어디선가

이 모든 풍경을 본 적이 있다고 느꼈다. 그리고 그 순간, 오랫동안 느

껴보지 못했던 진짜 두통을 느꼈다.

"어디 아파?"

아이라가 물었다. 그러고 보니 이렇게 추억에 잠긴 것도 오래간만의

일이었다. 메이런은 한 손으로는 관자놀이를 누르며, 다른 한 손으로는

아이라에게 괜찮다는 신호를 보냈다.

"그, 미싱이라는 거지? 로웰 중령 님한테 들었어."

메이런은 남의 일이라고 그렇게 쉽게 말하는 게 아니라고 따끔하게

한 소리 해 주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머리가 너무 아파서 말을

하기도 힘이 들었지만 일단 아이라에게 싫은 소리를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괜찮아 질 거야. 로웰 중령님한테 들었어. 미싱은 완벽하게 방지가

가능하다고 말이야."

정말일까? 그래. 뭔가 방법이 있을 거야. 그러니까 군대에 트랜서가

그렇게 많이 있는 거겠지. 외교관 일을 하는 트랜서는 또 어떨까? 매

일같이 무슨 알약을 먹거나 주사를 맞아야 하는 걸까? 메이런은 지난

번 베가 시 작전에서 보았던 꼬마 트랜서를 떠올렸다. 꼬마 트랜서는

어딘지 멍해 보였다. 마치 린 처럼. 젠장. 어떻게든 되겠지. 메이런은

그저 엄지손가락으로 관자놀이만 세게 누르고 있을 뿐이었다.

아이라가 메이런을 인도한 곳은 군사령부 소속 직할대 중 하나인 제

4여단이었다. 베가 시에는 방공포대, 군수지원단, 항공여단, 전차여단,

헌병단 등의 군사령부 직할 부대들이 모여 있었고 제 4여단도 그 중

하나였다.

제 4여단은 보통 '트랜서 부대'라고 불리는 작은 부대였다. 부대 명

칭은 여단이었지만 여단에 비해 규모도 턱없이 작았고, 실제로는 막사

하나 뿐이었다. 아이라와 메이런이 제 4여단을 찾았을 때, 제 4여단의

군인은 둘 뿐이었다. 하나는 대령이었고, 다른 하나는 중위였다.

"어이구. 수고 많으십니다. 아이라 대위, 그리고 메이런. 이 쪽은 린

중사죠? 만나서 반갑습니다."

지휘소에서 일행을 반갑게 맞은 건 비스토 대령으로 제 4여단장이었

다. 보통의 경우, 여단장은 준장 - 그러니까 별 하나를 단 장군이 지

휘하는 게 보통이었다. 하지만 제 4여단은 이렇게 말년 대령이 지휘를

하고 있었다. 말년에는 한직에 배치되는 것이 일반적이라는 사실로 추

측해 보건대, 이 부대의 운영은 상당히 한가로울 것 같았다.

아이라와 린은 대령에게 거수 경례를 붙였고, 메이런은 잠시 망설이

다가 둘을 따라서 거수 경례를 했다. 대령은 웃는 얼굴로 경례를 받았

다. 도무지 긴장감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표정이었다. 메이런은 비스

토 대령이 그대로 앞치마만 두르면 고급 음식점의 인자한 주방장이라

고 해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저희가 여기에 온 이유는 여기 메이런 소위 때문입니다."

"소위라고 하긴 했지만 진짜 소위는 아니지. 안 그런가, 메이런?"

비스토 대령은 한 쪽 눈을 찡긋 해 보이며 메이런에게 말했다. 메이

런은 무슨 표정을 지으면 좋을지 몰라서 얼른 비스토 대령의 눈을 피

했다.

"로웰 중령, 참 대단한 군인이야. 전시에 트랜서를 빼가서 자기 밑으

로 넣다니 말이야. 이 친구, 아마 준(準)군무원으로 분류해서 데리고

온 거겠지? 비표를 보니까 대충 짐작이 가는 구먼."

메이런은 아이라의 표정을 살펴보았다. 아이라는 묵묵히 그저 비스

토 대령의 얼굴만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트랜서 담당관을 만나보고 싶습니다."

아이라는 대단히 사무적인 투로 비스토 대령에게 말했다. 대령은 웃

음을 지었다.

"아. 걱정하지 말아요, 아이라 대위. 그렇게 굳을 거야 없지. 나야 트

랜서 부대 지휘관이긴 하지만 트랜서 욕심은 없으니까. 사실 연금을

받기 위해서 복무기간을 몇 달 채워야 해서 여기 지휘관으로 온 것뿐

이지 내가 뭘 아나. 사실 여기 제 4여단 일은 대단히 한가로워서. 내무

반 보면 알겠지만 부대는 늘 텅 비어있어. 트랜서들은 거의 대부분 파

견 근무 중이거든. 파견이 끝나도 여기로 돌아오는 게 아니라 현지에

서 바로 이동하니까. 내가 하는 일이라곤 트랜서들 월급 챙겨주는 일

이랑 휴가 보내주는 일밖에 없지."

비스토 대령은 여기까지 말하곤 숨이 차는지 잠시 쉬었다가 다시 말

을 이었다. 그러고 보니 비스토 대령은 체중이 기준체중보다 훨씬 더

나가는 모양이었다. 숨을 쉬는 게 힘든지 이마에 땀방울이 흐르고 있

었다.

"가끔 트랜서들이 망가져서 - 아, 이런 표현을 이해하게, 메이런. 우

리는 망가진다고 그냥 표현하는 것뿐이지 특별히 트랜서한테 어떤 편

견 같은 게 있는 건 아니야. 하여간 망가진 트랜서들을 정상으로 만들

어서 원대 복귀시키는 일도 해. 그건 나는 어떻게 하는지도 몰라. 지금

내무반에서 쉬고 있는 일리야 중위 밖에는 모르는 일일세."

"그럼..."

아이라는 대령이 말을 이어주기를 바라면서 이렇게 말했다. 대령은

의도를 이해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내무반으로 가 봐요."

대령이 말을 마치자 아이라는 다시 한 번 거수 경례를 붙이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내무반 쪽으로 향했다. 메이런은 경례도 하는 둥 마는

둥 하면서 아이라의 뒤를 따랐다.

"저, 아이라..."

"괜찮아. 말년 대령이야. 떨어진 별이라고. 오르지도 못했지만."

아이라는 꼭 쓰레기를 버리는 것처럼 감정 없이 이렇게 말을 내뱉었

다. 메이런은 아무 말 없이 린처럼 아이라를 뒤따를 수밖에는 없었다.

메이런은 린을 바라보았다. 린은 아무 감정도 없을 뿐만 아니라 아

무 쓸모도 없는 존재였다. 예전에 아이라가 수사관이었을 때는 린의

능력이 필요했을지 몰라도 지금은 아니었다. 린은 그런 사실을 알고

있을까? 린도 트랜서라고 했다. 생명체가 아니라 물건과 트랜스를 할

수 있는. 린은 두통을 느끼는 일이 없을까? 생명체를 트랜스 했을 때

에만 두통을 느끼게 되는 걸까? 아이라를 따르는 동안 메이런의 머리

에는 이런 저런 생각이 떠돌았다.

아이라가 노크를 하고 내무반에 들어서자 메이런은 내무반 침상에

대충 이불을 깔고 드러누워 있는 군인을 볼 수 있었다.

아이라는 헛기침을 몇 번했다. 그러자 누워있던 군인의 눈이 떠졌다.

"연락한 대위님이시군요. 트랜서도 함께."

군인이 이렇게 말하면서 침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잠든지 꽤 된 모

양이었다. 머리가 엉망으로 헝클어져 있었다.

"저는 아이라 대위, 이 쪽은 제 부관 린 중사. 그리고 이 쪽이 메이

런입니다."

"저는 일리야라고 합니다."

일리야 중위가 벗어 던져 놓았던 전투복 상의를 걸쳐 입으면서 말했

다. 일리야 중위의 어깨에는 메이런의 비표와 같은 R비표가 붙어 있었

다.

"음. 대위님. 자리를 좀 비켜 주시겠습니까? 그 부관님도 함께요."

일리야 중위는 꼭 동네 의사 같은 태도로 정중하게 아이라에게 부탁

했다. 아이라는 메이런을 바라보았다. 메이런은 고개를 끄덕였고, 아이

라는 내무반을 나섰다. 일리야 중위는 아이라와 린이 문을 닫고 내무

반에서 나갈 때까지 문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생각보다 일찍 왔군요. 한 숨 자두려고 했는데."

일리야 중위가 메이런에게 침상에 자리를 권하며 말했다. 메이런은

일리야 중위를 마주보고 앉았다.

"메이런 소위... 예. 대충 이야기는 들었어요. 좀 더 정확하게 증상을

들어보고 싶은데요. 어떤가요?"

"두통을 느낍니다."

메이런은 질문을 듣자마자 이렇게 대답했다. 하지만 원하는 대답은

아닌 것 같았다. 일리야 중위는 가만히 앉아서 메이런의 대답이 이어

지기를 기다렸다.

"처음에는 지금 본 광경이 언젠가 전에도 한 번 본 것 같다는 생각

이 드는 걸로 시작됩니다. 그런 거 있잖습니까. 아, 이거 분명히 언제

본 건데, 어디선가 경험한 건데 싶은 그런 거요. 처음에는 꿈에서 본

게 아닐까 싶은 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건 아니더군요. 그냥 그런

느낌이 드는 거였습니다. 그런데 그건..."

메이런은 키티-본의 이야기를 할까 잠시 동안 망설였다. 그 순간 일

리야 중위의 눈동자가 번득였다.

"미싱에 대해서 누군가한테 들은 적이 있군요. 트랜서였나요?"

"...예."

메이런은 이렇게 대답하는 순간 일리야 중위에게서 익숙한 느낌을

감지해 낼 수 있었다. 그건 키티-본의 느낌과도 비슷한 것이었다.

"일리야 중위님도 트랜서인가요?"

메이런이 물었다. 일리야 중위는 입술을 비죽 내밀며 침상에 흐트러

져 있는 이불을 대충 치웠다.

"예전에는 트랜서였죠. 공무원이었습니다, 정확하게는. 외교 일도 하

고, 망명자 관리도 하고 그랬죠. 그러다가 좋지 않은 일이 있었어요.

그런 거 알죠?"

메이런은 아마도 좌천당했을 거라고 짐작했다.

"지금은 내 생각을 읽는 것 보다 메이런의 의견을 말하는 편이 나을

거예요. 메이런의 생각을 한 번 들어보고 싶네요."

일리야 중위가 사뭇 진지한 투로 메이런에게 물었다. 메이런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훤히 알고 있다는 투였다. 휴먼 레이스 트랜서와 트랜

서 대 트랜서로 만나는 건 처음이었다. 메이런은 그 사실을 상기하자

조금 긴장이 되었다.

"긴장하지 말아요. 나는 메이런을 도우려는 거지 메이런을 심문하는

게 아니잖아요."

일리야 중위의 말은 옳았다. 메이런은 숨을 한 번 깊게 들이 쉰 다

음 천천히 말을 이었다.

"키티-본이라는 카니보라 레이스 트랜서였습니다. 그 트랜서 말이

트랜서에게 무서운 건 기억이라고 했습니다. 그림자... 예. 기억은 그림

자 같다고 했어요. 늘 따라다니는 그림자. 그런데 멈추어 서면, 뒤를

돌아보려고 하면 그림자는 지금까지 뛰어온 관성 때문에 저를 앞질러

가려고 한다고 했어요. 그래서 기억이 저를 앞지르려고 해서 그런 현

상이 나타난다고 했어요."

메이런은 생각나는 대로 말을 이었다. 일리야 중위는 감탄한 눈치였

다.

"상당히 정확한 표현이군요. 예. 맞습니다. 트랜서는 그런 일을 겪죠.

미싱 트랜서라는 건 정확하게는 기억에 잡아먹힌 트랜서입니다. 메이

런의 비유를 빌어 보자면 그림자에게 잡아먹힌 거죠. 사실 트랜서가

아닌 평범한 개체들도 이런 경험을 하죠. 데쟈뷰... 예. 그런 현상을 데

쟈뷰라고 하죠."

메이런은 데쟈뷰라는 단어를 알고 있었다. 문득 웨이팅하우스 시에

서 들었던 조이스의 피아노 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듯 했다. 일리야 중

위는 말을 이었다.

"하지만 보통의 개체들과 트랜서는 다릅니다. 왜냐하면 트랜서는 본

질적으로 타자(他者)의 기억과 직접적으로 접촉할 수 있는 존재거든요.

메이런은 느껴 본 적이 있지요? 다른 레이스의 감각이나 기관이 몸에

붙어 있는 듯한 느낌... 예. 기억은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것 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담고 있습니다. 휴먼 레이스라면 손가락을 쓰는 법이라

던가, 혹은 배가 고픈 감각이라던가... 아주 사소한 것까지 기억은 모두

담고 있지요. 실제로 기억은 머릿속에서, 그러니까 두뇌에서만 일어나

는 작용은 아닙니다. 하지만 트랜서는 트랜스를 할 때 상대방의 온 몸

의 기억을 받아들일 수 있죠. 이게 아마도 미싱의 근본적인 원인일 겁

니다."

일리야 중위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보통의 휴먼 레이스가 데쟈뷰를 경험한다면 두통 같은 건 느끼지

않아요. 물론 미싱이 일어나지도 않지요. 데쟈뷰라는 건 그저 삶이 힘

들어서 지쳐있다는 하나의 신호일 뿐이거든요. 하지만 타자의 기억과

직접적으로 접촉하는 트랜서에게 그건 대단히 위험한 일이 됩니다. 메

이런도 꿈을 꾸지요? 트랜스 했던 다른 레이스로 변해 있는 꿈을. 그

리고 평소에도 다른 레이스의 감각이 살아나는 것 같아서 두렵고... 예.

트랜서라면 누구나 겪는 일입니다."

침착하게 또박또박 말을 이어가는 일리야 중위의 목소리에서 메이런

은 깊은 신뢰를 느낄 수 있었다. 이 휴먼 레이스라면 분명 해결책을

제시해 줄 수 있겠다 싶었던 것이다.

"저는 그냥 달려가기로 했어요. 그래서 하던 일도 다 때려치우고 군

대에 입대했습니다. 그러지 않으면... 그러니까, 기억에 잡아먹힐 것 같

았거든요."

"군대를 일종의 도피처로 삼았던 거군요. 군대가 아니라 외항 셔틀

이었어도 지원했을 거고요. 그렇지요?"

"...예."

메이런은 그렇다고 대답했다. 일리야 중위의 말은 맞는 말이었다. 꼭

군대가 아니었어도 좋았다. 뭐든 계속해서 일을 해 나가야만 했던 것

이다. 다만 메이런은 멈추어 서고 싶지 않았던 것뿐이다.

"그것도 하나의 방편이 되죠. 여기서 일하다 보면 수많은 트랜서들

을 마주치게 됩니다. 그 트랜서들은 모두가 한 번 쯤은 그런 경험을

하게 되죠. 미싱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기도 하고요. 하지만 그림자를

떼 놓기 위해서 계속 달려가는 건 위험한 일이에요. 왜 그런지 알겠어

요?"

"그걸 알면 내가 여기 이러고 있지는 않겠죠."

메이런이 말했다. 일리야 중위는 고개를 끄덕였다.

"메이런에 대해서는 사실 꽤 많이 알고 있었어요. 로웰 중령님이 미

리 조사를 많이 해 두셨더군요. 아버님께서 트랜서 일을 하셨죠? 지금

은 고인이 되셨고요."

메이런은 일리야 중위가 자신의 아버지의 일을 알고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메이런은 일리야 중위 앞에서 벌거벗은 기분이 되었다.

제 목:[하이어드] Soldier of fortune - 24

"메이런 아버님의 기록을 찾아 봤습니다. 훌륭한 트랜서였더군요. 상

당히 굵직굵직한 외교적 성과를 거두셨습니다."

메이런은 가슴이 뛰었다. 어머니는 단 한 번도 아버지가 어떤 일을

했는지 이야기 한 적이 없었다. 메이런이 어머니에게 들었던 건 오직

아버지가 트랜서였다는 것과 국가에서 일하는 트랜서는 결코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뿐이었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저... 그럼 혹시 어쩌다가 아버님께서..."

말을 제대로 하지는 않았지만 메이런이 뭘 알고 싶어하는지 일리야

중위는 금새 알아차렸다. 일리야 중위 역시 트랜서인 것이다.

"아버님께서도 미싱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누구에게 들어서

였는지, 아니면 아버님께서 깨달으신 건지는 기록만으로는 알 수 없었

습니다만, 아버님도 멈추지 않고 달려가는 쪽을 택하셨던 것 같아요.

계속해서 더 위험한 레이스와 트랜스를 시도하셨고, 모두 성공하셨습

니다. 그러다가..."

일리야 중위는 망설였다. 하지만 메이런이 진심으로 알고 싶어한다

는 걸 느낀 순간 망설이는 걸 멈추고 말을 이었다.

"그러다가 결국 단 한 번의 실패를 경험하셨던 겁니다. 로즈웰 레이

스에 대해서는 알고 계시죠?"

로즈웰 레이스. 메이런은 그 단어를 듣는 순간 두려움을 느꼈다. 너

무나도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던 대사관의 로즈웰 레이스 조가 떠올

랐다.

"아버님께서는 로즈웰 레이스와 협상 도중에 돌아가셨습니다."

메이런은 눈앞이 캄캄해지는 걸 느꼈다. 뭔가 근원을 알 수 없는 감

정이 가슴 깊은 곳에서 아련하게 울려오고 있었다. 그것은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슬픔이기도 했고 아버지에 대한 동경이기도 했다. 아버지

는 했구나. 로즈웰 레이스, 그 높은 곳에 있는 녀석들과 트랜스를...

"알고있죠? 로즈웰 레이스와 관련 된 사건인지라 정확한 당시의 정

황은 알 수가 없습니다. 그 높은 쪽과 관계 된 이야기는 거의 극비로

분류되는지라 저 같은 일개 트랜서가 그런 고급 정보에 접근할 수는

없었지요. 하지만 몇 가지 사실은 기록에서 확인해 볼 수 있었습니다.

아버님의 마지막 시도는 결국 로즈웰 레이스로부터 긍정적인 반응을

얻어내는 데에 기여했다는 사실과, 그들이 아버님의 유해를 인도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유해는... 짐작하고 계시겠지만 아직도 그들이 보

관하고 있을 겁니다."

일리야 중위가 이렇게 설명을 장황하게 늘어놓았지만 메이런의 귀에

는 들어오지 않았다. 메이런은 상상하고 있었다. 그 두려운 대상인 로

즈웰 레이스와 필사적으로 트랜스를 시도하는 아버지의 모습. 그리고

실패. 실패의 순간 아버지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을까. 절망? 좌절?

후회?

"메이런."

메이런이 생각에 잠겨 있다는 걸 알고 있는 일리야 중위는 한참 동

안 메이런이 생각에 빠져있을 시간을 준 다음에 이렇게 메이런을 불렀

다. 메이런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메이런은 막 깊은 물에서 떠오른

시신처럼 표정이 엉망으로 변해 있었다.

"그림자를 떨어뜨리기 위해서 달려가는 건 하나의 방편 밖에는 되지

않아요. 잠시 시간을 연장할 수 있을 뿐이죠. 그림자에게 먹히는, 그러

니까 미싱이 되는 시간을 연장하는 방편."

메이런은 일리야 중위의 이 말에서 키티-본을 떠올릴 수 있었다.

"보통 어떻게 하나요?"

메이런이 물었다. 보통의 경우, 이곳에서 근무하는 트랜서들은 어떻

게 하느냐는 질문이었다.

"간단해요. 그림자를 없어지게 하려면 어떻게 하면 될까요?"

"죽어버리면 되겠죠."

메이런이 냉소적으로 대꾸했다. 일리야 중위는 메이런의 말에 웃음

을 지었다. 메이런의 냉소를 그저 가벼운 농담으로 바꾸어 버리는 힘

을 가지고 있는 웃음이었다.

"그것도 좋겠지만 죽으면 다 끝이잖아요. 목숨은 소중하게 다뤄야

죠."

"그런가요? 군대에 있다보니까 그런지 왜 목숨을 소중하게 다뤄야

하는지 잊어버렸나봅니다."

"솔직히 나도 목숨을 왜 소중하게 다뤄야 하는지는 잘 모릅니다. 하

지만 누구에게나 하나 뿐인 목숨이니까 소중하게 다뤄야 하는 거 아닐

까요?"

"그렇다면 니들탄도 소중하게 다뤄야겠군요. 드르륵 갈겨 버리면

120발이 사라져 버리지만, 그 하나하나는 다 하나 뿐이니까요."

메이런은 되는대로 지껄이기는 했지만 막상 말을 해 놓고 보니 일리

가 있는 말이 아닌가 싶어졌다. 군대에서 생명이라는 건 그저 니들탄

하나의 가치밖에 없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이른 것이다.

일리야 중위는 헛기침을 했다. 메이런은 일리야 중위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죄송합니다. 절 도우려고 하시는데..."

"괜찮아요.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죠."

일리야 중위는 메이런에게 바짝 다가갔다. 메이런은 긴장감을 느꼈

다. 그리고 일리야 중위 역시 긴장하고 있는 듯 했다.

"그림자를 없애기 위해서는 보통 어떻게 할까요?"

일리야 중위는 진지하게 질문을 던졌다.

"보통 그림자는 없어지지 않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진지한 투가 아니었다면 빈정거림으로 들렸을 법한 대답이었다. 일

리야 중위는 코로 한 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한 번 해 보죠."

일리야 중위가 손을 뻗어 내무반을 컨트롤하는 리모컨을 쥐었다. 버

튼을 누르자 커튼이 작동하며 내무반에 들어오는 햇살을 가렸다.

"지금 그림자가 있나요?"

메이런은 커튼의 그림자에 가려 사라져 가는 자신의 그림자를 볼 수

있었다. 아니, 그것은 이제 커텐의 그림자도 자신의 그림자도 아니었

다. 그저 햇빛이 닿지 않는 그늘일 뿐이었다.

"간단해요. 빛이 사라지면 그림자도 사라지죠."

"빛이 사라지면 죽는 거 아닌가요?"

메이런이 일리야 중위에게 물었다. 일리야 중위는 고개를 가로 저었

다.

"이건 간단한 비유일 뿐이에요. 트랜서들은 이걸 그림자에 숨는다,

고 표현해요."

"그림자에 숨는다고요?"

일리야 중위가 고개를 끄덕였다.

"타인의 그림자와, 또 다른 타인의 그림자와, 또 또 다른 타인의 그

림자와..."

"잘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메이런이 일리야 중위의 말을 끊었다. 일리야 중위는 말을 막는 메

이런을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타인의 기억과, 또 다른 타인의 기억과, 또 또 다른 타인의 기억...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나는 지금 메이런이 미싱을 벗어나는 방법은

끊임없는 트랜스뿐이라고 말하는 거예요. 메이런은 트랜스를 하지 않

고 엉뚱한 곳으로 달아나려고만 했어요. 그건 일시적으로 미싱을 막을

수 있을 뿐이지 근본적으로 미싱에 대응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니란 거

죠."

메이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끊임없는 트랜스. 미싱. 메이런은

도대체 뭐라고 대꾸를 하면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허탈하다고 해야

할지, 실망했다고 해야할지, 화가 난다고 해야할지 몰랐다. 어찌되었던

일리야 중위의 대답은 대단히 실망스러웠던 것이다.

"이등병 때 고참이 저한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어요. '군 생활 잘하

는 비결이 뭔지 아냐?' 저한테는 그 대답이 그 때 고참이 했던 말과

똑같이 들립니다."

"그 고참은 뭐라고 했나요?"

"그냥 열심히 하는 거다."

메이런은 싱겁게 웃었다. 아무 것도 얻지 못했다는 기분이었다.

"메이런. 진리는 항상 가까운 곳에 있어요."

일리야 중위가 말했다.

"누구나 그래요. 언제나 가까운 곳에 해답을 두고서 빙빙 돌아가죠.

해결책이라는 거, 대부분이 사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쉽게 알 수 있는

것이고, 또한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이죠. 하지만 아무도 그렇게 하지 않

아요. 하지 못해요. 욕망에 눈이 멀어서. 게을러서. 혹은 귀찮아서. 아

니면 별 이유 없이. 그게 생명체가 가지고 있는 본질인지도 모르죠. 혹

시 개를 길러 본 적이 있나요?"

"아뇨."

메이런은 개를 길러본적은 없었지만 카니데 레이스와 트랜스를 해

본 적은 있었다.

"개는 두 종류가 있어요. 멍청한 개와 똑똑한 개. 둘을 구별하는 건

쉬워요. 굶긴 다음에 유리판 하나를 놓고 그 뒤에 먹이를 두죠. 멍청한

개는 유리판에 머리를 박으면서 낑낑거려요. 똑똑한 개는 빙 돌아서

먹이를 먹고. 너무나도 간단하지만 개는 식욕 때문에 돌아가면 된다는

아주 간단한 사실을 실천하지 못해요. 휴먼 레이스라고 다른 것 같아

요? 받으면 안 된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돈을 받는 정치가, 환자에게

악영향이 갈 걸 뻔히 알면서 엉뚱한 이유 때문에 치료를 게을리 하는

의사, 돈 때문에 이길 수 있다고 거짓말을 하는 변호사, 모두 똑같아

요. 유리판에 코를 문지르고 있는 개와 다를 바가 없죠."

"트랜스를 하지 않는 트랜서도 그렇다는 건가요?"

"비슷해요."

완곡하게 표현하기는 했지만 멍청한 개와 비교된다는 게 휴먼 레이

스에게 기분 좋은 일일 수는 없었다.

"메이런. 트랜스를 두려워하지 말아요. 트랜서는 트랜스를 하며 살아

갈 수밖에 없어요. 물고기가 물 속에서 밖에 살 수 없듯이, 트랜서는

타인의 기억 속에서 살 수 밖에 없어요."

키티-본은 그걸 몰랐군. 메이런은 속으로 빈정거렸다.

"그렇게까지 빈정거릴 건 없는데."

일리야 중위가 중얼댔다. 메이런은 놀라지 않았다. 트랜서와 대화를

나누는 게 그리 흔한 일은 아니었지만 하늘을 활공하는 새를 보며 놀

라는 새는 없는 법이다. 물론 대단한 방법으로 난다면 조금 다르겠지

만, 일리야 중위는 그리 대수로울 것이 없었다.

"오늘 말씀 감사했습니다."

메이런은 침상에서 일어났다. 일리야 중위도 따라서 일어났다.

"내 말을 믿어요, 메이런. 트랜스를 해 봤으면 알잖아요. 타인을 믿

는다는 게 얼마나 큰 힘을 가지고 있는지."

일리야 중위의 말에 메이런은 일단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이

것도 끝없이 달려가는 걸까. 이것도 내 운명일까...

"다시 와요."

일리야 중위가 손을 내밀면서 말했다. 메이런은 마지못해서 악수를

하기는 했지만 맞잡은 손에는 힘이 없었다.

"상태가 좋아지지 않으면 다시 오라는 거죠?"

"예. 하지만 메이런이 끊임없이 트랜스를 한다면 틀림없이 다시 오

지 않아도 좋을 거예요. 틀림없이."

"그럼, 다시 보지 않길 빌어보죠."

메이런의 말에 일리야 중위는 웃음을 터트렸다.

돌아오는 호버카에서 메이런은 팔짱을 끼고서 아무런 말도 하고 있

지 않았다. 머릿속이 온통 복잡했다. 무슨 생각을 하면 좋을지,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메이런은 온 몸의 기운이 죽 빠져

나가는 기분이었다. 몸이 흐물흐물해져서 호버카 시트에 붙어 버릴 것

같았다. 그런 메이런의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린은 멍한 눈을 하고

서 메이런을 올려다 보고 있을 뿐이었다.

"어떻게, 일은 잘 됐어?"

정적을 참을 수 없었는지 아이라가 메이런에게 물었다.

"어떤 게 잘 된 건데?"

메이런이 퉁명스럽게 되묻자 아이라는 당황한 눈치였다.

한참동안 창 밖을 바라보고 있는데 아이라가 불쑥 다시 말을 꺼냈

다.

"미안해. 쉽게 물어봐서."

솔직한 사과는 듣는 이에게 오히려 미안한 감을 일으킨다.

"트랜서가 어떤 고충을 겪는지 나는 몰라. 그 미싱이라는 게 어떤

건지도 모르고. 하지만 우리는 너한테 해 줄 수 있는 건 다 해주려고

생각하고 있어.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것 뿐이야. 나는 트랜서가 아니

거든."

메이런은 아이라의 말이 진심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어쩐지 자신

이 속 좁게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할건지 묻고 싶은 거야?"

이번에는 메이런이 아이라에게 물었다. 아이라는 돌아서서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라의 앞 머리카락이 가볍게 흔들렸다. 메이런은 문득 그

것을 손에 쥐고 싶어졌다. 물론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았지만.

"너무 걱정하지 마. 열심히 하기로 했으니까."

메이런은 일리야 중위와의 대화를 떠올리면서 자신의 답변이 재미있

다고 느껴져서 혼자 웃었다.

"그럼, 잘 된 거야?"

아이라는 그 웃음을 좋은 의미로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아무렴 어때.

메이런은 그렇다고 했다.

"어떻게 그렇게 된 거야?"

아이라가 물었다.

"결국 갈 수밖에 없지 않겠어?"

메이런은 아이라의 눈을 피했다. 아이라의 눈동자와 앞머리는 부서

지기 쉬운 얇은 유리창을 연상케 했다. 손에 닿으면 부서지는 유리창.

메이런은 아무리 배가 고프다고 해도 유리벽을 향해 머리를 들이미는

멍청한 개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어디로?"

아이라의 물음은 마치 다른 세계에서 울려온 종소리처럼 여겨졌다.

메이런은 호버카의 강화유리로 만들어진 차창에 머리를 기대었다. 차

가운 유리의 감촉이 이마로 전해져왔다.

"그림자 속으로..."

메이런은 이렇게 중얼거렸고, 그 의미를 아이라에게 설명해 주기는

그리 쉽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안타까워했다. 아이라는 트랜서

의 세계를 절대로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 날은 일이 없었다. 메이런은 심각한 표정으로 피곤하다는 핑계를

대고 아이라와 함께 B.O.Q로 돌아왔다. 만약 로웰 중령이 무슨 일이냐

고 물었다면 트랜서만이 알 수 있는 일이라는 뉘앙스로 답변을 해 주

려고 마음먹고 있었던 메이런이었지만 로웰 중령은 메이런에게 그런

답변을 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럼 돌아가서 쉬어요."

로웰 중령은 아주 가볍게 허락했던 것이다. 메이런은 그런 로웰 중

령의 모습에서, 로웰 중령이 강제 트랜스에 대한 일을 얼마나 오랫동

안 추진해 나갈 생각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여기 14층이야."

아이라가 메이런이 앞으로 생활하게 될 B.O.Q 건물 앞에 메이런을

내려주며 말했다. 메이런은 그리 가볍지 않은 발걸음을 하고서 호버카

에서 내렸다.

"14층까지 올라가는 방법이 계단만 있는 건 아니겠지?"

메이런 딴에는 농담이라고 한 말이었지만 말하는 순간 메이런은 작

전 지역이었던 미린 시에서 건물의 옥상을 확보하기 위해 계단을 뛰어

올랐던 일이 떠올라버렸다. 아이라는 재미있다는 듯한 얼굴로 메이런

을 바라보며 웃고 있었지만 메이런은 인상을 찌푸린 채 아이라의 말에

대꾸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디 아파?"

메이런은 대답대신 손을 내저었다.

"그냥. 걸어갈 생각하니까 머리가 아파서."

아이라는 호버카에서 내렸다. 메이런의 어줍은 농담에 넘어갈 아이

라는 아니었다.

"괜찮아?"

아이라가 메이런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메이런은 반사적으로 몸을

움찔하며 아이라의 손을 피했다. 아이라는 부끄러워진 손을 어떻게 할

지 몰라 잠시 허공에 두었다가 슬그머니 내렸다. 잠시 둘 사이에 정적

이 흘렀다.

메이런이 막 뭐라고 말을 하려던 참이었다. 호버카의 경적소리에 둘

은 고개를 동시에 돌렸다. 경적소리가 난 곳에는 호버카가 한 대 서

있었다. 이윽고 호버카의 문이 열렸고, 호버카에서는 날렵하게 생긴 영

관급 장교가 내렸다. 거리가 조금 있기는 했지만, 메이런은 장교의 계

급이 소령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아이라!"

소령이 반갑게 손을 흔들면서 뛰어왔다. 아이라는 불안한 시선으로

메이런과 소령을 번갈아 가면서 보았다.

"인사해. 이 쪽은 로스 소령. 군사령부 부관과에 근무해. 이쪽은 메

이런 소위. 비표 보면 알지?"

아이라가 둘을 소개시켰다.

"알고 말고. 내가 M.I로 이 분 보내는 발령장을 썼는걸. 반가워요,

메이런."

로스는 쾌활한 태도로 메이런에게 손을 내밀었다. 두통 때문이었을

까. 메이런은 로스가 보이는 태도와는 달리 자신에게 미약한 적의(敵

意)를 품고 있다는 걸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메이런은 아이라가

자신의 머리에 손을 얹었던 일을 떠올렸고, 그 결과 아이라와 로스의

관계를 쉽게 결론지어 버렸다.

"반갑습니다, 소령님."

메이런은 이렇게 말하면서 로스의 손을 가볍게 잡고 흔들었다.

"나 들어 갈 게. 엘리베이터 정도는 혼자 탈 수 있거든."

메이런은 이렇게 말하고는 도망치듯이 B.O.Q를 향해 돌아섰다.

"1401호야! 메이런! 내일 출근 늦지 마!"

아이라가 소리쳤지만 메이런은 돌아보지도, 대꾸하지도 않았다.

엘리베이터의 차가운 철문 앞에 서서, 메이런은 엘리베이터의 층수

를 알려주는 숫자가 1에 가까워지는 것을 바라보며 두통을 참고 있었

다. 메이런은 엘리베이터 문에 머리를 기대었다. 당장 알람 소리와 함

께 경고등이 들어왔지만 메이런은 그대로 얼마간을 유지했다.

"특별히 이럴 것까지는 없잖아."

메이런은 스스로에게 타일렀다.

"멍청한 개나 하는 짓이야, 이런 건."

메이런은 몸을 다시 세웠다. 어쩐지 두통마저 조금 가신 듯한 기분

이 들었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고, 메이런은 엘리베이터에 탄 다음 14층 버

튼을 눌렀다. 묵직한 금속음과 함께 엘리베이터는 천천히 14층을 향해

움직여나갔다. 엘리베이터 안에는 서늘한 조명과 잡음 뿐 텅 비어 있

었다.

14층에 도착했음을 알리는 벨이 울렸고, 메이런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복도 너머 창밖으로는 어느 사이 어두워진 하늘이 내려앉아

있었다.

메이런은 아이라가 알려준 1401호를 향해 무거운 발걸음을 끌었다.

여전히 두통은 남아 있는 상태였다.

1401호의 문은 버튼식 잠금장치가 되어 있었다. 메이런은 아이라에

게 들은 그대로 비밀번호 1111을 눌렀다. 그러자 문은 간단히 열렸다.

저능아들이나 쓸법하다고 놀렸던 비밀 번호를 누르고 있자니 자신이

조금은 더 M.I의 직원에 다가선 것이 아닌가 싶어져서 메이런은 쓴웃

음을 지었다.

방은 생각보다 깨끗했다. 내무반에 익숙해져 있는 메이런의 눈은 중

대장이나 쓸법한 거실 쇼파나 고급스러워 보이는 조명등, 어떻게 준비

했는지 모를 책장과 가벼운 읽을 거리, 일기장 등을 살펴보며, 메이런

은 이곳이 정말 내무반과 마찬가지 용도로 쓰이는 곳인지, 아니면 혹

시 평범한 민간인의 방에 잘못 들어 온 것이 아닌지 의심스러울 지경

이었다. 다만 장롱 안에 들어있는 군 지급품 -속옷, 세면도구, 수건,

복무수칙 따위가 적혀 있는 메모장 겸용 수첩- 들은 이곳이 군인의

방임을 말해 주고 있었다.

메이런은 침대에 쓰러지듯 누웠다. 푹신한 쿠션이 탄력 있게 메이런

의 몸을 받쳤다. 메이런은 천장을 바라보았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이

시간에 천장을 바라보면 내무반의 천장이 보였다. 어쩌면 다시는 볼

수 없을지 모를 내무반 천장을 생각하자 조금은 그립다는 생각이 들었

다.

휴양 콜로니에 있으면 자신이 정말 내무생활을 하고 있었을까 싶어

진다. 내무반에 돌아오면 자신이 정말 휴양 콜로니에 있었던가 싶어진

다.

메이런은 낯선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라가 트랜서였다면 좋

았을 텐데. 그랬다면 아이라는 자신을 이해해 줄 수 있었을 것이다. 하

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굳이 아이라가 말하지 않았어도, 아이라는

트랜서가 아닌 것이다.

메이런은 그날 밤 내내 아이라를 생각하다가 잠이 들었다. 하지만

메이런은 정작 자기 자신을 돌아보지는 못하고 있었다. 만약 단 한 번

만이라도 일리야 중위에게 트랜스를 시도했더라면, 혹은 일리야 중위

의 감정을 읽어 내려고 시도했더라면, 메이런은 일리야 중위의 말뜻이

솔직한 사과와는 완전히 다른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을

지도 몰랐다.

제 목:[하이어드] Soldier of fortune -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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