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안개
새벽.
웨이팅하우스 시의 중앙 공원에는 안개가 짙게 내려앉아 있었다. 이
런 안개 속이라면 공원에서 길을 잃는 일도 그리 드물지 않게 일어날
것 같았다. 메이런은 이 안개가 어쩐지 자신의 처지를 말해 주는 것
같아서 될 수 있으면 안개에 대한 생각은 하지 않으려고 했다.
전투.
메이런은 전투에 모든 생각을 집중하려고 노력했다. 이미 지나간 일
보다는 지금 눈앞의 일이 훨씬 중요한 시점이다. 공원 한 가운데에 위
치하고 있는 조각상 아래에서, 메이런은 숨을 가다듬으며 서 있다. 이
제, 최후의 전투를 준비하는 각오를 다져야 할 시간인 것이다.
"두렵지 않아?"
목소리가 메이런에게 묻는다. 메이런은 두렵지 않았다. 분노와 격정
이 메이런의 피를 거칠게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메이런은 다시 한 번
호흡을 가다듬었다. 이제 곧 전투가 벌어질 거였다. 흥분된 상태로는
이길 수 없었다. 침착해야한다. 냉정해야한다. 메이런은 스스로에게 이
렇게 당부했다.
"그래, 그래야지."
목소리가 메이런에게 말했다. 메이런은 그 소리를 무시하고 고개를
들어보았다. 그러자 안개의 저편을 응시하고 있는 조각상의 얼굴이 눈
에 들어왔다.
조각상은 고대의 한 영웅을 묘사하고 있었다. 조국을 지키기 위해
적장을 사살하고 자신은 죽었던 영웅. 메이런은 조각상에 새겨져 있는
이름을 살펴보았다. 음각이 되어 있었을 이름은 세월의 힘에 의해 지
워져 이제는 알아 볼 수가 없었다. 메이런은 어쩐지 이것이 자신의 운
명을 예견하는 것만 같아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고대의 무사들 중에는 약속 시간에 일부러
늦게 나오는 것을 필승의 전략으로 삼았던 무사도 있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났다. 그만큼 상대를 초조하게 만드는 것은 유리한 것이다.
메이런은 느긋한 마음으로 기다리기로 했다. 권총을 확인하면서 시
간을 보내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메이런은 가죽으로 된 홀스터에 꽂
아 두었던 권총을 뽑아 실탄을 확인해 보았다. K-5 9밀리 권총에는
15발의 실탄이 가지런히 들어있었다. 메이런은 발목에도 38구경 리볼
버 한 정을 예비로 소지하고 있었다. 38구경 리볼버는 작고 가벼웠지
만 그만큼 명중률도 떨어졌고 위력도 작았다. 하지만 만약의 사태가
벌어졌을 때 메이런의 목숨을 구해주기에 충분한 화력이었다. 휴먼레
이스의 피부는 38구경이건 9밀리건 45구경이건 모두 통한다.
가슴에 두 발을 쏘자.
메이런은 스스로에게 이렇게 당부했다. 가슴에 두 발을 맞는다면, 제
아무리 방탄조끼를 입은 거한이라고 해도 잠시 동안 움직이기 어려울
것이었다. 그 때가 기회다. 그 때 머리를 노리던가, 여의치 않으면 다
리를 노리는 거다. 메이런은 숨을 천천히 들이쉬었다가 다시 내쉬었다.
사실 이런 종류의 결투는 처음이었다. 적이 중앙공원에서 기다리겠
다고, 따라오라고 큰 소리로 외쳤다는 건 메이런으로서는 이해하기 어
려운 일이었다. 만약 싸우고 싶었다면 바로 메이런에게 니들건을 난사
했어야 옳았다. 게다가 상황은 그 쪽에 유리했다. 하지만 적은 메이런
에게 사격을 가하지 않았고, 장소까지 친절하게 알려주며 자리를 떠났
던 것이다.
"매복이 있을 거야."
메이런은 이렇게 말하는 목소리를 무시했다. 매복을 해 놓고 확실하
게 처리해야할 만큼 자신이 중요한 인물도 아니었고, 매복을 할 거라
면 그 자리에서 처리하는 편이 나을 거였다. 무슨 할 이야기가 있는
게 아닐까 싶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긴장을 늦출 수는 없는
일이었다.
"침착해야 해요, 메이런."
마음 깊은 곳에서 조이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메이런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런 충고가 이제와서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메이
런은 갑자기 수많은 상념이 순식간에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먼저 조
이스의 얼굴이 떠올랐고, 곧이어 팀과 잭의 얼굴이 떠올랐다. 세론의
얼굴, 메이런과 처음으로 트랜스 했던 키티-본의 얼굴, 만티드 레이스
시크사의 얼굴... 그리고 아이라. 메이런은 아이라의 얼굴을 떠올리고는
잠시동안 머리 속이 텅비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메이런은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마치 그렇게 하면 상념이 떨어져 나가기라도 할 것
처럼.
어찌되었건, 메이런은 이제 곧 확인하게 될 거였다. 상대가 누구인
지. 또 무슨 목적으로 메이런을 불러내었는지.
지금까지 보아온 상대는 냉혹한 살인기계였다. 일을 처리하는 데 있
어서 한치의 오차도 없었다. 세론이 남긴 말로 미루어 짐작컨데 아마
도 녀석들 사이에서는 리퍼라는 코드네임으로 불리고 있는 모양이었지
만 그게 본명일 리는 없었다. 메이런은 상대가 누구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만약 그 상대가 메이런이 생각하는 상대라면... 아마
도 결투는 피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이젠 정말로 두려워하지 않는군."
목소리가 불쑥 메이런에게 말했다. 메이런은 목소리를 듣는 데에는
익숙해져 있었다.
"두려움은 적보다 더 위험하니까."
메이런이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목소리도 알고 있었고,
또한 메이런도 알고 있는 일이었다. 이제 더 이상 메이런에게는 지키
고 싶은 것이 남아 있지 않았다. 끝없이 달려가던 동전은 이제 방향을
잃고 추락하고 있었다.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조이스. 팀. 잭. 세론.
부디 대답해 줘요. 하지만 그들의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메이런은 안개의 저 편에서 인기척을 느꼈다. 그러자 모든 상념은
한순간에 사라져버렸다. 군에서 익힌 전장 감각이 순식간에 살아났다.
온몸의 감각 세포 하나하나가 일어나 적의 작은 기척 하나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긴장하기 시작했다.
메이런은 안개 저편의 기척을 향해 K-5권총을 겨누었다. 하지만 이
안개 속에서 기척만으로 상대를 명중시킬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는 일
이었다. 아니, 이 안개 속에서 상대를 명중시키는 일은 어쩌면 안개 속
에서 셔틀을 수동으로 무사히 착륙시키는 일 만큼이나 어려운 일일 거
였다.
적이 기척을 조금만 더 내준다면 명중시킬 수 있을 텐데.
메이런은 이렇게 생각했다.
1초.
예전에 메이런은 총격전에 있어서 1초가 얼마나 중요한지 배운 적이
있었다. 1초의 틈이 생긴다면 총격전을 승리로 이끌 수 있다는 것이
그 가르침의 전부였다. 그리고 메이런은 잊혀진 옛 영웅의 조각상 밑
에 몸을 숨기고 그 1초를 기다리고 있었다.
적이 실수하기를 바라는 것은 패배로 가는 첩경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 1초가 발생했을 때 그것을 놓치는 것은 패배 차제일 것이다.
메이런은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적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제 목:[하이어드] Who wants to live forever? -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