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피아노
사방은 온통 어둠뿐이었다. 숨을 들이 쉴 때마다 어둠이 몸 속으로
흘러 들어오고 있었다.
메이런은 침대에 누워있었다. 잠은 오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며
칠 째 밖으로 나가지 않고 잠만 자고 있었던 것이다. 시간 감각이 무
디어지고 있었다. 식사시간에 배가 고프지 않을 때가 많아졌고, 한 밤
중에 혼자 일어나 서성거린 적도 여러 번 있었다.
메이런은 멍하니 침대에 걸터앉아 지금 몇시 쯤 되었을까 생각해 보
았다. 마음속으로 시간을 생각해 본다. 그리고 나서 시계를 보는 것이
다. 그렇게 하면 자신의 시간 감각이 혼자 있는 동안 얼마나 무디어
질 수 있는 지 알게 된다.
"새벽 여섯 시."
메이런이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말했다. 지나치게 오랜 시간 누워있
었던 탓인지 몸 구석구석이 쑤셔왔고, 특히 허리가 아팠다. 메이런이
조명 버튼에 살짝 손을 얹어 놓자, 지하실의 방이 환하게 밝아왔다.
예전에는 무슨 용도로 쓰였는지 잡동사니가 가득한 방이었다. 눈알
이 하나 빠져있는 곰인형부터 시작해서 부서진 자전거 바퀴, 촌스러운
장식의 촛대, 언제 발간된 것인지 알 수 없는 찢어진 잡지 더미, 선이
끊어진 전화기 따위가 여기 저기 흩어져 있었다. 마을에서는 물건을
함부로 버리지 않는다. 언제 어떻게 사용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메이런
은 잡동사니들을 바라보다가, 어린 시절 작은 나사라도 하나 줍는 날
에는 그것을 장난감으로 만들어서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놀 수 있는
가를 떠올렸다.
사실 방에 가득한 잡동사니 중에서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 것은 책상
위에 놓여진 작은 시계 하나와 벽면에 문을 향해 서 있는 조명뿐이었
다. 시계는 오후 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시간 감각이 무뎌
진 걸까? 메이런은 혼자 쑥스러운지 겸연쩍게 웃었다.
문 밖에서 인기척이 들린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아마도 동지인 팀
이겠지만, 메이런은 베개 밑에 넣어둔 K-5 9밀리 권총을 집어들었다.
만약을 대비하는 건 아무리 많이 해도 지나치지 않는 다는 건 메이런
과 같은 직종에 종사하는 이들의 신조였다. 메이런은 문을 향해 서 있
는 조명기구를 바라보았다. 조명기구의 등은 마치 거대한 괴물의 눈동
자처럼 번득이고 있었다.
"메이런?"
팀의 목소리가 들렸다. 만약 무슨 일이 생긴다면 '메이런, 나야'하고
말하게 되어 있었다. 메이런은 안심하고 문을 열었다.
"안색이 안 좋군."
팀은 키가 작은 사내였다. 팀의 머리에는 새치가 자라고 있었고, 얼
굴 색은 아주 흰 편이었다. 목소리는 매우 가느다란 미성이었고 표정
은 얼굴 색과는 달리 어두워 보였다.
"며칠동안 지하감옥에 누워 있었더니."
K-5권총 끝으로 팀에게 앉으라는 신호를 보내면서 말했다. 팀은 조
심스래 총구를 손끝으로 치웠다.
"오늘은 한 잔 하는 게 어때?"
팀이 메이런에게 물었다.
"일루젼? 일루젼을 구할 수 있었어, 팀?"
메이런이 물었다.
"어떻게 구했지. 특별한 날이니까. 잊었어? 내가 피아노 바의 바텐더
였다는 걸. 팀이 술 한 병 구하지 못한다면 말이 되지 않지."
"글쎄.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지금은 피아노바도 없고, 팀도 바텐더
가 아니니까."
"그래도 팀은 팀이야."
팀이 웃으며 말했다.
웨이팅하우스와 푸우순 시를 비롯한 120개 특별 도시에 긴급조치가
발동된 이후, 3인 이상의 정치적 집회는 모조리 금지되었다. 이것은 매
우 편리한 법률이었다. 적어도 피아노바와 같은 술집을 문닫게 하기에
는 더할나위 없이 편리했던 것이다. 팀의 피아노바는 폐쇄되었고, 피아
노는 압수되었다. 팀은 피아노만큼은 빼앗기고 싶어하지 않았지만 무
시무시한 힘을 발휘하고 있는 시경 앞에서는 별 수 없었다.
"오늘 같은 날은 피아노를 듣고 싶은데."
팀이 품에서 일루젼 병을 꺼내며 말했다. 메이런은 침대 밑에서 먼
지가 뽀얗게 앉아 있는 컵을 두 개 꺼냈다.
"어떻게? 피아노를 돌려달라고 소송이라도 걸 생각이야?"
메이런이 옷소매로 컵을 대충 닦아내면서 말했다.
"긴급조치에 대항하는 건 긴급조치 위반이야. 그랬다가는 시 전체와
싸워야 한다고."
"지금 시 전체와 싸우고 있잖아."
메이런은 이렇게 말하며 팀이 들고 있던 일루젼 병을 빼앗듯이 가지
고 와서 병뚜껑을 땄다. 팀은 웃었지만 입술만 겨우 움직이는 웃음이
었다.
"그러고 보니 벌써 3년이 다 되어 가는군. 메이런이 우리와 합류한
지."
팀이 말했다.
메이런은 탈영한 직후, 가니메데와 어스를 오가는 화물선에서 얼마
간 일을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메이런은 결국 어스로 돌아갈 수밖
에 없었다. 반복되는 일을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오늘, 조이스가 온다고 했어. 아루밀이 전해줬지."
팀이 말했다. 조이스라는 말에 메이런은 더러운 잔에 일루젼을 따르
다가 잠시 멈칫했다.
"알고 있어."
짐짓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말하긴 했지만 팀을 속이기에는 역부족
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일루젼을 들고 왔지."
팀이 말했다.
"예정 된 거 였잖아."
"아무리 그래도 좋은 건 좋은 거야."
팀은 메이런이 권하는 잔을 받아 들면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투쟁을 위해."
잔을 높게 들면서 팀이 건배를 제의했지만 메이런은 그저 씩 웃을
뿐이었다. 잔이 부딪쳤고, 팀과 메이런은 독한 일루젼을 단숨에 들이켰
다. 간만의 일루젼은 속에서 후끈 달아올라 금새 머리까지 치밀어 올
랐다. 메이런은 잔을 내리면서 3년 전, 푸우순 시를 다시 찾았을 때를
떠올렸다.
메이런이 푸우순 시로 돌아오게 된 것은 사실은 거의 즉흥적인 일이
었다. 메이런을 구해 주었던 화물선 조종사 델라이스는 메이런이 어스
로 돌아가겠다는 말을 했을 때 메이런에게 현금이 충전되어 있는 카드
를 건네주면서 말했다.
"꼭 돌아가야 하나?"
메이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델라이스는 어깨를 한 번
으쓱 했다.
잠시 둘 사이에는 아무 말도 없었다.
"너무 많습니다."
메이런은 카드를 확인해 보곤 이렇게 말했다. 카드에는 충전된 금액
을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는 디스플레이 창이 달려 있었다.
"연락선은 생각보다 비싸. 쪼개서 엔진 따로, 레이더 따로 팔아도 한
밑천 잡을 수 있지. 게다가 군용은 더 비싸다네."
델라이스는 비싼만큼 파는 데 위험이 크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메
이런은 감사의 마음을 표하고 싶었지만 달리 표할 방법이 없었다.
"자네, 돌아가 봐야 달라지는 건 없어. 만나고 싶은 친구라도 있다면
모를까."
메이런은 역시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을 기다리던 델라이스는 이윽
고 결심한 듯 한숨을 토했다.
"젠장. 내가 말한다고 해 봐야 달라지는 것도 없겠지. 어서 가 봐!
뒷모습을 오래 보는 건 취미가 아니니까."
메이런은 델라이스에게 고개 숙여 작별을 고한 다음 스테이션으로
향했다. 메이런은 뒤돌아보지 않았다.
전쟁이 끝나고 나자, 콜로니는 몹시 북적이고 있었다. 지원병들은 지
금까지 받은 급료를 탕진할 생각으로 어스로 돌아갔지만 용병으로 남
기로 한 병사들은 콜로니를 통해 여러 곳으로 흩어졌다. 로즈웰 레이
스의 전쟁에는 항상 용병이 필요했다. 메이런은 그런 용병들 틈에서
쉽게 가짜 여권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비밀리에 어스로 향하고자 하
는 이들은 넘쳐 났고, 따라서 여권 장사꾼이나 입국 브로커도 그만큼
많았던 것이다. 탈영병을 잡으려는 손길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
만 모든 단속이 그렇듯, 단속이란 때가 있어서 그 때만 지나면 얼마든
지 피할 수 있는 것이었다.
사실 불법적인 일을 하는 이들 중에는 일의 성격상 사기꾼 또한 많
을 수밖에 없었다. 메이런은 델라이스를 믿었다. 델라이스가 소개시켜
준 브로커를 믿었던 것이다. 운이 좋아서 메이런은 '카라이호 이스턴'
이라는 고약한 이름의 전역 장병이 되어서 행성 어스로 돌아가는 셔틀
에 몸을 실을 수 있었다.
돌아가는 셔틀의 표를 사려는 데, 막상 어디로 향하는 티켓을 사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만약 그 때 조이스가 연주했던 데쟈뷰, 라는
곡이 떠오르지 않았다면 메이런은 얼마나 오랫동안 멍하니 서있었을지
몰랐다.
"푸우순 시."
메이런은 이렇게 말했다. 푸우순 시 말고는 돌아갈 곳도 없었다. 아
주 잠깐 이었지만 델라이스에게 돌아갈까 하는 생각도 있었다. 하지만
그건 아무리 생각해 봐도 어리석은 일이었다. 가니메데와 어스를 오가
며 살수는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메이런은 델라이스를 떠나기로 마음
먹었던 것이다. 뭔가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멈추어 서면 사라져 버릴
테니까.
"고향으로 돌아가는 군."
목소리가 메이런에게 말했다. 이제 목소리는 메이런과 많이 친숙해
져 있었다. 메이런은 거의 목소리와 자신을 구분하지 않고 있었다. 특
별히 구분해야 할 필요도 없었다. 목소리는 메이런과 기억을 공유하고
있었고, 같은 기억을 가진 두 개의 기억은, 하나의 기억과 다를 바 없
었다.
"내 고향은 도시가 아냐. 마을이야."
메이런은 이렇게 말했다.
메이런이 푸우순 시를 찾았을 때, 메이런은 기쁨을 느꼈다. 원래 있
던 곳으로 돌아간다는 건 어떤 의미로건 기쁜 일이었다. 푸우순 시는
거의 변함이 없었다. 건물들도 돔의 우중충한 빛깔도 그대로였다. 다만
다른 레이스의 모습은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가끔 보이는 다른 레이스
는 예전에 볼 수 있었던 우쭐거리는 귀족이나 용병이 아니었다. 메이
런의 눈을 두려워 하고 있는 불법 체류자가 분명한 레이스를 보면서
망명객들은 다 어디로 가 버렸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메이
런은 그 이유를 깊게 생각해 보지는 않았다.
메이런이 가장 먼저 찾은 곳은 힐사이드였다. 쿨란과 함께 하이어드
일을 하던 곳. 힐사이드에는 여전히 낡은 건물이 그대로 방치되어 있
었다. 아무리 전쟁으로 얻은 수입이 많다고는 해도 푸우순 시처럼 외
진 곳에 있는 도시에까지 그 부가 미치지는 못하는 모양이었다.
메이런은 먼저 익숙한 기억속의 힐사이드의 엠파이어 빌딩을 찾았
다. 사무실은 텅 비어 있었다. 쿨란은 없었고, 타이론도 전근을 간지
오래였다. 메이런은 잡일을 하면서 하루하루를 연명할 수밖에 없었다.
메이런은 그 다음으로 피아노바를 찾았다. 피아노바의 문은 굳게 닫
혀 있었다.
'시 정부 소유'
붉은 색의 커다란 딱지가 입구에 붙어 있었다. 메이런은 한 참 동안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부는 언제나 국민들에게 희생을 강요하지."
만약 팀이 이렇게 말을 걸지 않았다면 메이런은 얼마나 더 멍청하게
서 있었을지 몰랐다. 메이런은 팀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시는 언제나 시민들에게 조금만 더 참고 견디라고 하고 말이야. 누
구도 그 말을 믿지 않지만, 달리 대항할 방법은 없어. 이것이 몇 천 만
년 동안 이어진 휴먼 레이스 정치의 역사야."
메이런은 박수를 치는 시늉을 했다.
"훌륭한 강의야 팀. 그거, 긴급조치 위반 맞지?"
메이런의 말하자 팀은 황송하다는 듯한 과장된 동작을 취하며 허리
를 숙였다.
"긴급조치도 아는 걸 보니까 온지 꽤 된 모양이군."
"그건 오자마자 알았어. 그리고 강의를 들으니까 더 분명하게 알겠
는데."
"강의라고 하지 말아줘, 메이런. 그저 희생자의 한풀이일 뿐이지. 어
찌 되었건 반가워 메이런. 그런데 락벳에서 죽었다고 들었는데."
"소문이야 늘 그런 식이지. 잘 지냈어?"
팀은 대답대신 굳게 닫혀 있는 피아노바의 출입구를 손가락으로 가
리켰다. 메이런은 고개를 끄덕했다.
"그런데 메이런. 누굴 찾고 있지? 쿨란? 다시 하이어드를 하게?"
"쿨란은 사라졌어. 아무도 행방을 알지 못하더군."
메이런이 한숨처럼 말했다.
"그래. 나도 그렇게 들어서 알고 있어. 그런데 귀향병 씨, 무슨 계획
이라도 있어?"
"글쎄. 특별히 계획을 세운 건 없어."
팀은 미소를 지었다.
"귀향한 병사들 이야기는 많이 들어서 알고 있지. 급료의 70%를 세
금으로 떼였다던가, 종종 강도로 돌변해서 사고를 친다던가 하는 이야
기들 말이야."
팀이 이죽거렸다. 하지만 메이런은 별로 개의치 않았다.
"솔직하게 말하지. 나, 탈영병이야."
팀의 안색이 싹 변했다. 팀은 얼른 메이런을 붙잡고 골목으로 들어
갔다.
"쉿! 미쳤어?"
팀은 메이런의 양어깨를 붙잡고 좌우를 살피면서 말했다.
"여기 저기서 탈영병 잡으려고 난리야. 귀향병들은 무조건 골치거리
라고. 무슨 문제건 꼭 문제를 일으키지. 정식 귀향병은 물론이고... 탈
영병은 더더욱 말이야."
"팀. 날 도와 줄 수 있겠어?"
메이런이 팀의 양팔을 밀쳐 내리면서 말했다.
"메이런. 네가 도와 줄 수 있다면."
"무슨 일인데?"
메이런은 여유 있는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세상에 공짜가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시민들과 국민들이 대항할 방법이 없다고 했지?"
팀이 말했다.
팀은 대항하는 시민이자 대항하는 국민이었다. 스스로를 '해방전사'
라고 부르고는 있었지만, 정부에서 정해놓은 공식 명칭으로는 '반란군'
이었다.
팀이 메이런을 데리고 간 곳은 피아노바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
은 곳에 위치하고 있는 지하실이었다. 그곳에는 푸우순 시에서 구성된
반란군들이 모이는 포스트였다.
"포스트라면... 접선장소?"
메이런이 팀에게 물었다. 팀은 고개를 끄덕였다.
"은신처로 쓰는 곳도 있어. 우리는 점 조직으로 이루어져 있어. 알
아? 점 조직?"
팀은 대략적으로 설명을 시작했다.
반란군은 점 조직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가장 위에 반란군 대장이
있었고, 그 밑으로 세 명의 중간 대장이 있었다. 중간 대장은 각각 세
명의 '핵'을 거느리고 있었고, 그 핵은 또 각각 셋의 핵을 거느리고 있
었다. 반란군의 전체 규모가 얼마나 되는지, 또 자신의 위나 아래에 누
가 있는지 알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었지만, 반란군은 칸, 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
는 휴먼 레이스가 조직한 조직이었다. 칸은 몇 명의 동지들로부터 시
작해 행성 어스 전체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통합정부의 입장에서 본다
면 칸과 반란군은 전염성 강한 세균이었다. 그리고 그 세균을 박멸하
기 위해서, 통합정부는 거의 모든 군사력과 정보력, 경찰력을 투입하고
있는 중이었다.
포스트는 핵이 된 반란군이 만남의 장소로 정해놓은 곳이었다. 팀의
경우, 핵이 된지 얼마 되지 않았고, 따라서 거느리고 있는 핵도 메이런
뿐이었다.
팀과 함께 간 포스트는 힐사이드 부근의 다 부서져 가는 폐가였다.
주변에는 부랑자들이 수상한 눈초리를 하고서 주위를 기웃거리고 있었
지만 특별히 누군가를 감시 한다기 보다는 공격당하거나 체포되는 걸
두려워하는 모습이었다. 메이런은 그들의 시선을 피했다.
포스트로 정해진 폐가에는 아주 낯익은 얼굴이 기다리고 있었다. 하
얀 얼굴. 머리를 아주 짧게 잘라서 인상은 바뀌었지만 누군지 알아보
는 데에는 큰 지장이 없었다.
"조이스!"
메이런은 자신도 모르게 큰 소리를 치고 말았다. 조이스는 환하게
웃었다.
"당신을 봤다는 소문이 있었어요. 그래서 팀을 보냈죠. 거봐, 팀. 피
아노바를 기웃거리고 있을 거라고 했지?"
조이스가 웃으면서 말했다.
"어떻게 알았어? 이 친구가 예전에 피아노바에서 일루젼 중독이라도
됐다고 생각한 거야?"
"아니. 예전에 약속한 게 있어서."
팀의 질문에 조이스가 대답했다.
"데자뷰를 연주해 주기로 했죠."
"약속을 지키지는 못할 것 같아."
조금은 힘없는 목소리로 조이스가 말했다.
조이스가 반란군에 가담하게 된 가장 결정적인 동기는 알고 보니 피
아노 때문이었다. 3인 이상의 정치집회를 금한다는 법률 때문에 피아
노바는 폐쇄되었고, 피아노는 압류되었다.
"그런데, 그거 가져가서 뭐 하려고 그랬을까? 연주나 할 줄 아나?"
팀이 인상을 찌푸리면서 말했다. 조이스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피아노바는 일루젼을 마시며 신세 한탄을 털어놓기에 좋은 곳이었
다. 때문에 긴급조치에서 금하고 있는 3인 이상의 집회가 종종 열리는
곳이었고, 그 결과는 피아노바의 폐쇄였다. 어이없는 일이었지만 팀도,
조이스도 그저 체포되지 않을 걸 다행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체
포 된 시민들은 다시 돌아오는 일이 거의 없었고, 어디에서 무엇을 하
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러다가 조이스가 먼저 핵을 하나 만나게 된 모양이었다. 조이스는
자신이 새롭게 맡게 된 일이 마음에 들었고, 거기에 팀을 가담시켰다.
그러다가 메이런을 만나게 된 것이었다.
"여기는 우리가 모이는 포스트에요, 메이런."
포스트는 말이 좋아 포스트지 그저 다 무너져 가는 폐가에 불과했지
만 앉을 자리 정도는 마련할 수 있었다. 메이런은 의자처럼 보이는 나
무토막에 쌓여있는 먼지를 대충 손으로 털어낸 다음 앉았고, 조이스는
기둥에 몸을 기댔다. 팀은 주위를 둘러보더니 바닥에 털썩 주저 않았
다.
"그런데, 도대체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된 거죠?"
메이런이 조이스에게 물었다.
"여기 땅 주인이 여길 돌보지 않았으니까. 이런 곳, 많은 걸 뭐."
"아니, 내 말은 어쩌다가 푸우순 시가 이렇게 됐느냐는 거죠."
"망명객."
조이스가 말했다.
"망명객이 왜요?"
"망명객들이 여길 떠나 버린 거야.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메이런은 조이스의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망명객이 떠나다니요?"
"이제 더 이상 행성 어스는 정치적 중립 지대가 아니란 거지. 우리
는 로즈웰 레이스의 대리 전쟁에 참전했어요. 그래서 아무 이해관계도
없는 락벳 인들을 죽였지. 그런데 누가 더 이상 여기 행성 어스를 정
치적 중립지구라고 생각하겠어요?"
"그렇군요."
메이런은 수긍할 수 있었다. 망명객이 없다면 수입도 없고, 수입이
없다면 푸우순 시는 더 이상 예전처럼 유지될 수 없는 것이다. 메이런
은 거리에서 다른 레이스의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었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물론 로즈웰 레이스는 그에 따른 천문학 적인 액수의 보상을 통합
정부에 약속했지. 물론 그 약속은 지켜졌어요. 메이런이 받은 급료도
포함해서."
그 말에 메이런은 쓴웃음을 지었다. 군에 있을 때, 메이런의 목표는
행성 어스로 돌아가 지금까지 번 돈을 쓰는 거였다. 하지만 그 돈을
쓰지 못하게 된 것은 물론이고 범죄자가 되어 쫓기고 있는 신세를 생
각해 보니 쓴웃음이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내 조직원은 둘이 됐군. 우리 조직에 대해서는 들었죠? 내가
핵이고 메이런과 팀이 내 조직원이야. 하나만 더 하면 내 몫은 끝이죠.
그럼 오늘의 불법적인 일은 일단 이만 해 두자고요. 합법적으로 먹고
살 일도 해야 하니까."
조이스가 농담처럼 말했다. 메이런은 그 말에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데, 나는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불법인데요? 탈영병도 일자리
를 구할 수 있을까요?"
"음... 팀이 어떻게든 해 줄 거야. 그렇지, 팀?"
조이스가 말하자 팀은 손으로 자신을 가리키면서 '내가?'하는 표정을
지었다.
"어쩔 수 없잖아? 난 일을 해야 한다고. 합법적인 일."
"나도 해, 합법적인 일은, 조이스."
"팀은 공사판에 나가잖아? 거기다가 혼자 살고."
메이런은 순간 조이스가 결혼 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래. 조이스는 방송국에서 관사도 내 준 인기 가수니까."
"비꼬지 마."
조이스가 눈살을 찌푸리면서 말했다. 팀은 두 손을 내밀어 항복이라
는 표시를 전했다.
"남의 이목은 중요해. 내가 메이런 같은 친구하고 함께 산다고 소문
이라도 나면 더 이상 나는 방송국에서 노래를 부를 수 없게 될 걸?"
조이스가 말했다.
"알았어, 알았어. 그만 두자고. 내가 메이런은 모실 테니."
"정말, 방송국에서 노래하는 가수인가요, 조이스?"
메이런이 조이스에게 물었다. 조이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합창단 단원이에요, 메이런. 그냥 수 십명 중에 하나죠. 보수
도 적고, 얼굴도 안나오고, 특히 자기가 만든 노래 같은 걸 부를 기회
는 없어요. 방송국 기숙사에 작은 방이 하나 생긴다는 거 말고는 장점
이라곤 없는 일이죠."
조이스의 말에 메이런은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이렇게 해서 조이스와의 재회는 싱겁게 끝났다. 데쟈뷰 연주도 없었
고, 일루젼도 없었다. 변한 건 없었지만, 동시에 너무나도 많이 변해
있었다.
제 목:[하이어드] Who wants to live forever? - 7
팀은 일단 메이런을 팀의 거처로 데리고 갔다. 팀의 거처는 변두리
중에 변두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자그마한 집들이 모여있는 도시의 끝
에 위치한 작은 촌락이었다. 그들은 모두 시의 중심에서 벗어난 이방
인들이었고, 때문에 서로에게 관심이 없었다. 이건 메이런에게는 행운
이었다. 메이런은 그 누구의 주목도 받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마을
에서는 물을 긷거나 식료품을 사거나 하는 일에 별 다른 지장을 받지
않아도 좋았다.
하지만 문제는 있었다. 거의 이곳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이다. 메
이런은 특별한 모임이 있는 날이 아니고서는 거의 집에 갇혀 있다 시
피 했다. 메이런은 두통을 느끼게 되지나 않을까 늘 조마조마했고, 가
끔 날개가 자라나거나 뒷다리를 비벼 신호음을 보내는 형태의 생명체
로 변하는 꿈을 꾸기도 했다.
"너무 걱정하지마, 메이런."
땀으로 뒤범벅이 되어 악몽에서 깨어난 메이런의 어깨를 두드리면서
팀이 말했다. 메이런은 물끄러미 팀을 바라보았다. 메이런은 알 수 있
었다. 팀은 자신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팀의 말은 위안이 되었다. 적어도 누군가가 자신을 진심으로
걱정해 주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메이런은 위안 받을 수 있었다.
"공짜 밥 먹는 일은 그렇게 오래 가지 않을 거야. 곧 일이 생길 테
니까 말이야. 그것도 아주 큰 일이."
메이런은 미소를 짓기는 했지만 그리 자신 있어 보이는 미소는 아니
었다.
"트랜서 일이라도 할 수 있지 않을까?"
"그야 망명객이 많았을 때 일이지. 그리고 트랜서는 대부분 공무원
이야. 트랜서가 있다는 소문이 돌면 당장 경찰에서 메이런을 찾아나설
걸? 망명객이 줄어서 힘들어진 건 하이어드 트랜서 뿐이야. 공무원들
은 여전히 격무에 시달린다고."
팀이 말했다.
"망명객이 없는데 격무?"
"꼭 망명객 통역만 트랜서의 일은 아니지. 소문에는 뭐 이상한 연구
같은 것도 하고 있다고 하더라고."
메이런은 팀의 말을 이해했다.
"이제 메이런도 핵이 돼서 조직원을 거느려야지. 아직은 아니지만
곧 그렇게 될 거야. 조이스가 셋을 채우면 우리도 셋을 거느릴 수 있
는 자격이 생겨. 아, 급하게 생각하지 마. 이건 시간을 두고 오래 진행
해야 하는 일이거든."
팀이 말했다.
"그것보다는 여기 상황을 먼저 잘 익혀야 할거야. 누가 어떤 불만을
가지고 있는지, 왜 가지고 있는지, 이런 걸 파악하는 게 먼저야. 그래
야 우리가 하는 일에 확신을 가질 수 있지. 생각해 봐. 메이런조차도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확신이 없다면 누구를 설득할 수 있겠어?"
물론 팀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하지만 메이런은 그런 일에 관심이
없었다. 뭔가를 믿어야 행동할 수 있다는 말은, 이론적으로는 그럴싸하
게 들릴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누구나 무엇인가를 하고
있지만 누구나 왜 자신이 이런 일을 해고 있나를 알고 있는 것은 아니
다. 그리고 굳이 알 필요도 없는 것이다. 메이런은 군대에서 이것을 배
웠다.
"메이런. 잘 알아 둬. 조직원을 거느린다는 건 상당한 위험부담이 있
는 일이야. 언제 배신자가 생길지 모르거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조
직원을 늘리지 않을 수는 없어. 조직원을 거느리지 않으면 조직이 커
질 수 없으니까."
"부대원이 많으면 많을 수록 통제는 어려워지지."
메이런의 말에 팀은 고개를 끄덕했다.
"그리고 배신자가 숨어들 가능성도 그만큼 커지고 말이야."
"어떻게 구분하지?"
"배신자와 진짜 우리편 말이야? 글쎄. 일단 이런 원칙이 있어. '그런
말을 하는 존재가 아니라 그런 행동을 하는 존재를 찾고, 그런 행동을
한다고 해서 믿지 말고 정말로 그런 상황에 빠져 있는 가를 조사하라'
이런 원칙 말이야."
팀은 이렇게 말하고는 한 참 동안 메이런을 바라보다가 자신의 머리
통을 자신의 손으로 쳤다. 멍청한 소리를 했던 것이다.
"아, 물론 메이런이라면 쉽게 알아차릴 수 있겠지. 메이런은 트랜서
니까."
메이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쩌면 자신이 그런 일을 하게 될
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들었다. 그런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 심문은 군
에서의 경험으로 충분했다. 또 다른 목소리를 얻게 된다면 어떻게 될
지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다행스럽게도 메이런이 첫 번째로 조직을 위해서 하게 된 일은 심문
이 아니라 진짜 트랜스였다. 조이스가 트랜서를 확보했다는 정보는 핵
과 핵을 통해 더디게 상층부로 올라갔다. 상층부에서는 메이런의 능력
과 신뢰도를 점검했고, 그 결과 메이런을 반란군의 정식 트랜서로 임
명하기에 이르렀다. 조이스의 등급은 순식간에 상승했고, 조이스도, 팀
도, 메이런도 조직원을 모으지 말 것을 명령 받았다. 조직원을 모으면
모을 수록 조이스의 위험 부담은 커진다. 상층부에서는 그런 위험 부
담을 줄이고 싶었던 것이다.
첫 트랜스는 처음 조이스와 만났던 폐가에서 이루어졌다. 메이런은
그곳에서 예상치 못했던 얼굴을 하나 만날 수 있었다. 얼굴이 홀쭉해
지고 살이 많이 빠진 모습이기는 했지만, 누구인지 메이런은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었다.
"선생님?"
"잭이라고 부른다, 여기선."
잭의 왼쪽 눈은 검은 색이고 오른쪽 눈은 푸른색이었다. 그것만으로
도 메이런은 잭을 충분히 알아 볼 수 있었다.
"잭."
메이런은 얼른 고쳐서 말했다. 하지만 쉽사리 말을 이을 수는 없었
다.
"잭이 조이스의 핵이었나요?"
메이런이 이렇게 물은 건 약간 사이를 둔 뒤였다. 그 사이 잭은 메
이런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노려만 보고 있었다.
"아니. 그런건 알려고 하지 마라."
잭의 말투는 여전했다.
"나는 네 이야기를 듣고 파견되어 왔다. 어디에서 왔는지 묻지 말도
록. 여기보다는 높은 곳이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잭은 여전히 딱딱한 말투를 쓰고 있었다. 메
이런은 보안에 신경을 쓰고 있는 잭을 이해할 수 있었다. 모르는 자는
아무리 심문을 하고 고문을 가해봐야 소용없다. 때문에 필요 이상의
것은 알지 못하는 편이 좋은 것이다.
"때마침 트랜서가 필요하던 차였다. 트랜서 몇이 있었지만 그중 몇
은 죽었고, 몇은 체포됐고, 몇은 제 정신이 아니다."
"트랜서한테 하기에 딱 좋은 말이군요, 잭."
팀이 이죽거렸다. 하지만 잭은 얼굴 표정하나 변하지 않고 말을 이
었다.
"그건 실수였다, 팀. 그리고 다시는 그런 실수 범하지 않을 생각이
다."
조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몇몇 후원 세력을 가지고 있다. 만약 우리가 마을에서 스피
어나 농기구를 들고 일어나는 작은 집단이었다면 통합정부가 이렇게까
지 과민하게 대처할 리가 없다. 우리는 로즈웰 레이스와 맞서는 여려
레이스들의 후원을 받고 있고, 또한 개별적으로 우리를 돕고 있는 레
이스들도 있다. 락벳 인들을 아나, 메이런?"
잭이 물었다. 물론 메이런은 락벳인들을 잘 알고 있었다.
"전 우주에서 가장 흉폭한 종족이죠."
이렇게 말하면서 메이런은 예전에 쿨란이 메이런에게 했던 말을 기
억했다. 그리고 그 말이 반쯤은 농담이었다는 것도 깨달을 수 있었다.
"락벳어를 할 줄 아는 통역은 찾을 수 있었지만, 카니데 레이스 통
역은 찾을 수 없었다. 때마침 메이런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고, 내
가 확인해 보기 위해서 직접 온 거다. 메이런. 트랜스 할 수 있겠나?"
잭이 물었다.
"아마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럼 지체하지 말자. 조이스. 호버카를 부탁한다. 팀. 자네도 같이
간다. 무장하고 있나?"
"포스트에 올 때는 항상 무장합니다, 잭."
팀이 대답했다.
말이 끝나자 조이스는 호버카를 몰고 왔고, 잭, 팀, 메이런은 호버카
에 올랐다. 잭은 앞자리에 앉아서 조이스에게 길을 알려 주었고, 팀과
메이런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만 있었다.
차는 푸우순 시의 변두리로 향하고 있었다. 어느 도시나 그렇겠지만,
빈민과 부랑자, 예비 범죄자로 가득한 뒷골목을 호버카로 지나는 일은
그리 안전한 일은 되지 못했다. 몇몇 부랑자들이 호버카에 달려들었고,
어떤 부랑자는 발로 호버카를 걷어차기도 했다. 하지만 조이스는 조금
도 흔들리지 않고 차를 몰았다.
차는 낮고 낡은 건물들 사이를 헤집고 빠져나가, 변두리의 유흥가를
지나친 다음, 작은 숙박업소들이 모여있는 곳에 도착하였다. 잭은 조이
스에게 차를 주차장에 대 놓으라고 지시한 다음, 팀과 메이런에게 내
리라고 신호했다.
메이런이 내린 곳은 허름해 보이는 여관이었다. 이름은 글자가 중간
중간 지워져서 정확하게 알아볼 수는 없었지만 '로이의 여관' 이나 '롤
스로이스의 여관' 혹은 그 중간쯤 될 것 같았다.
"변두리에는 아직도 신원 체크 없이 잘 수 있는 숙박업소들이 남아
있거든. 아무리 긴급조치 중이라고 하지만 말이야."
팀이 메이런에게 말했다. 아마도 뭔가를 암시해 주려는 모양이었지
만 메이런은 별로 신경쓰고 싶지 않았다.
"내가 통합정부라면 이곳부터 뒤지겠어, 팀."
메이런의 관심사는 사실 이제 곧 만나게 될 카니데 레이스에 쏠려
있었다. 카니데 레이스는 털이 많고 입이 길죽한 레이스다. 메이런은
문득 자신의 손을 확인해 보았다. 시커먼 손바닥과 긴 발톱이 돋아 있
지 않은 것을 확인하는 거였다.
카니데 레이스와이 트랜스는 참으로 오래 전에 있었던 일이었다. 그
때 받은 인상으로 카니데 레이스는 대체적으로 휴먼 레이스를 신뢰하
지 않고 있었고, 어떤 의미에서건 행성 어스의 통합정부를 증오하고
있었다. 그 때 메이런이 만난 카니데 레이스는 카니데 레이스 행성에
서는 귀족이었고, 이곳에서 동포들이 매춘과 눈요기의 수단으로 팔리
고 있다는 사실에 몹시 분개하고 있었다.
"차는 대 놨어요, 잭."
조이스가 가벼운 걸음으로 걸어오면서 말했다. 조이스는 챙이 긴 캡
을 쓰고 있었는데 머리카락은 모두 캡 안에 밀어 넣고 있었고 가벼워
보이는 면바지 차림이어서 꼭 주말에 운동 나가는 시민처럼 보였다.
"그럼."
잭이 먼저 앞장서서 여관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 뒤를 셋이 따랐다.
잭은 카운터에 앉아 있는 나이든 주인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201호."
잭이 말하자 주인은 보고 있던 텔레비전에서 눈을 떼었다.
"당신,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
여관 주인이 조이스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조이스는 당황하지 않았
다. 아마도 이런 상황이 닥치면 어떻게 대처할지 많이 생각해 둔 모양
이었다.
"그런 말 많이 들어요. 예전에 방송에 출연한 적이 있거든요."
그러자 여관 주인은 껄껄 웃으면서 잭에게 들어가 보라는 손짓을 보
냈다.
"그런데, 중요 인물을 이렇게 허술한 곳에 있어도 되는 건가요?"
팀이 잭에게 물었다.
"들키게 된다면 허술하건 허술하지 않건 상관없으니까."
잭이 반론의 여지를 남겨두지 않겠다는 듯 딱 잘라서 말했다. 팀은
뭐라고 덧붙이려다가 숨만 한 번 길게 들이쉬고는 말았다.
2층에 올라갈 때까지 모두들 말이 없었다.
마침내 일행이 201호 앞에 서자, 잭은 노크를 두 번 했다.
"아쳐."
암호인 모양이었다. 사고가 생기면 '아쳐, 나야' 하고 말하게 되어 있
을 거였다. 어찌되었건 잭이 무뚝뚝하게 상대의 이름을 말하자 문이
열렸다. 문을 열어 준 것은 휴먼 레이스였다. 그 휴먼 레이스는 부두
노동자처럼 상당히 체구가 크고 거칠어 보이는 사내였는데, 잭 일행을
눈으로 한 번 훑은 다음 안으로 일행을 인도했다.
방은 싸구려 여관이 그렇듯 옅은 곰팡내 풍기는 지저분한 꼴을 하고
있었다. 벽지는 때가 타지 않는 갈색 계통의 것이었고, 바닥에는 여관
이 생긴 이래로 단 한 번도 걸래질을 하지 않은 것 같은 두꺼운 때가
앉아 번들거리고 있었다.
방에는 침대 하나와 텔레비전 한 대가 마련되어 있었는데, 잭이 말
한 카니데 레이스는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다. 카니테 레이스는 매우
밝고 부드러워 보이는 흰털을 가지고 있었다. 까만 눈동자는 동그란
모양을 하고 있었고, 입은 약간 벌린 채로 혀를 내밀고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아마도 더운 모양이었다. 땀이 나지 않는 카니데 레이스는 입
으로 체온을 조절한다는 걸 메이런은 알고 있었다.
"저는 아쳐라고 합니다."
틀림없이 본명이 아닐 것 같은 이름이었다. 하여간 문을 열어준 휴
먼 레이스는 이렇게 자신을 소개했다.
"이 쪽은 알고 계실 바로 그 카니데 레이스입니다. 우리는 편하게
각하, 라고 부릅니다만 원래 이름은 발음도 어렵더군요. 각하. 이 쪽이
트랜서입니다."
트랜서라는 말은 알고 있는지 카니데 레이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메
이런에게 손을 내밀었다. 메이런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그 손을 잡아
핥았다. 방안에 있는 다른 휴먼 레이스들은 엄숙한 분위기가 되어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카니데 레이스의 예법에 능한 건 메이런 뿐이
었고 나머지는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럼 상황을 말씀해 주시죠, 아쳐."
메이런이 아쳐에게 말했다. 아쳐는 잠깐 동안 무슨 말을 하라는 건
지 몰라서 당황하는 눈치였다. 아마도 귀족이라고 불리는 카니데 레이
스의 경호만을 맡았을 뿐, 어떤 상황인지는 잘 모르는 모양이었다.
"이제 상황을 설명한다, 메이런. 그 전에, 아쳐."
잭이 아쳐에게 손짓을 보내자 아쳐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밖으로 나
갔다. 아마도 외부 경계를 하러 나간 모양이었다. 아쳐가 문을 닫자 잭
은 설명을 이어갔다.
"우리 하부 조직원 중 하나가 길을 걷고 있었다. 평소 직업은 행상.
여기 저기 돌아다니면서 소문을 듣는 것이 그 조직원의 임무였다. 그
런데 그 조직원이 어느날 이 카니데 레이스를 만나게 되었다. 그 때는
부상도 심했고, 술집에서 쫓겨난 카니데 레이스로 보였다. 그 조직원은
이 카니데 레이스를 치료해 주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카니데 레이
스는 회복되었다."
메이런은 카니데 레이스의 자연 치유력이 얼마나 강한지 잘 알고 있
었다. 메이런이 트랜스 했던 카니데 레이스는 뼈가 부러졌음에도 불구
하고 한 달 만에 완전한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이 카니데 레이스는 그 조직원에게 팬던트를 주며 도움을
요청했다. 조직원은 팬던트를 감정했고, 그 결과 팬던트가 카니데 레이
스 귀족의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이 카니데 레이스가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다. 여기까지가 바로 지난 주 까지의 상황이다."
"그러니까 이 카니데 레이스의 사정을 들어보고, 가능하다면 우리
조직의 일에 도움이 되도록 만들어 보라는 말씀이십니까?"
메이런이 물었다. 잭은 고개를 끄덕했다.
"지금 당장 트랜스 할 수 있겠나?"
잭의 물음에 메이런은 방을 둘러보았다. 잭도, 팀도, 조이스도 다들
메이런을 주목하고 있었다. 만약 메이런이 나가 달라고 말한다면 순식
간에 모두 나가버릴 태세였다.
"하죠."
하지만 메이런은 이렇게 말하곤 트랜스 했다. 트랜스는 간단했다. 귀
족이라고 불리는 카니데 레이스는 누군가와의 트랜스를 간절히 원하고
있었고, 특별히 마음을 열 필요도 없었던 것이다.
메이런은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하얀 털로 뒤덮여 있고 날카로운
발톱이 솟아 있는 카니데 레이스의 손이었다.
"자네, 트랜서 맞지? 그렇지? 여긴 트랜스 된 공간 맞지? 지금 트랜
스 된 거 맞지?"
귀족답지 않게 수선을 떨며 카니데 레이스가 메이런에게 말했다.
"예. 저는 메이런이라고 합니다."
메이런은 침착하게 천천히 대답했다. 상대를 진정시켜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아, 메이런. 그런군. 반가워, 반가워. 난 죠리, 라고 하네. 죠리 남작
저하, 라고 불러주면 좋겠지만, 하필 자네가 내 약혼자 모습을 하고 있
군. 그냥 죠리, 라고 불러주게. 그 편이 편하겠어."
아마 오랫동안 말을 하지 못해 굶주린 모양이었다. 메이런은 저런
상태의 레이스를 본 적이 많이 있었다. 아무리 용건이 급하다고 해도
이럴 때에는 상대가 하고자 하는 말을 끝까지 들어주는 편이 좋다는
걸 메이런은 잘 알고 있었다.
"고향을 등지고 온지 몇 해가 지났는지 모르겠네. 내가 사찰단 자격
으로 이곳에 온게 말일세. 이곳에서 우리 동포들이 착취당하고 있고,
혹사당하고 있다는 소문이 사실인지 아닌지 알기 위해서 말일세. 내가
본 현실을 참혹했다네. 다들 죽어가고 있고, 다들 고통스러워하고 있
고, 다들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했네. 몇몇 동포들은 약에 취해서 그
런 말조차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지만 말일세. 그래서 나는 결심
했지. 고향에 이 진실을 알리기로. 만약 그렇게 된다면 행성 어스의 통
합정부와의 전쟁이라도 불사할 생각이었다네. 그런데 그 와중에 어떤
랩타일 레이스 녀석에게 강도를 당하고 말았네. 거의 죽을 뻔했지만,
자네 동료의 도움으로 살아날 수 있었지. 그건 정말 고맙게 생각하네."
죠리 남작은 다행스럽게도 혼란상태에 빠지진 않은 모양이었다. 메
이런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었지만, 죠리는 메이런이 듣고 싶어
한 사연을 조금씩 펼치기 시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저희가 무엇을 도와드리면 되겠습니까, 죠리 남작 저하."
메이런은 정중하게 물었다. 일은 아주 쉽게 잘 풀렸다. 죠리는 약간
의 사담을 들어달라고 부탁했을 뿐 거의가 반란군의 의도와 맞아 떨어
졌다.
첫 번째 트랜서의 결과는 대단히 만족할 만한 것이었다. 반란군은
연락선을 사 죠리의 가문에 연락을 했고, 죠리의 가문은 일개 사단 규
모의 병력을 유지시킬 수 있을만한 금액을 반란군에게 제공하였다. 덕
분에 반란군은 정통정부군의 거점과 요지를 기습하는 일 외에도 카니
데 레이스가 있는 술집을 공격하기도 했지만, 어찌되었건 결과는 만족
스러운 것이었다.
이 일로 해서 조이스를 핵으로 하는 작은 집단은 반란군의 꽤 중책
에 오르게 되었다. 만약 메이런이 밀고자였다면, 푸우순 시의 조직 전
체는 와해되었을 것이다. 메이런은 반란군의 푸우순 시 사령관의 위치
도 마음만 먹는 다면 알 수 있을 위치에까지 오른 셈이 되었고, 그건
일개 핵이 이끄는 집단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반란군 입장에서는 메이런을 믿고 트랜스를 맡길 수밖에 없었다. 트
랜서는 구하기 어려운 자원이었던 것이다. 대부분의 트랜서는 공무원
이었고, 예전처럼 하이어드로 일하는 트랜서는 찾을 수 없는 실정이었
다. 그럴만큼 망명객의 수가 많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반란군 나름대로의 조사도 병행하였다. 전사자로 등록되었다는
점이나, 그 이전에 하이어드 경력 같은 것은 조사되었다. 그것이면 충
분했다. 메이런의 이용가치와 메이런의 위험성을 놓고 비교했을 때, 메
이런의 이용가치 쪽으로 기울만한 이유는.
어찌되었건, 조이스를 핵으로 하는 작은 조직은 위치에 걸맞는 곳으
로 이주하게 되었다. 조이스는 방송국에 계속 나갔고, 팀은 노동자 일
을 유지했지만, 메이런을 숨겨 놓을만한 안전한 곳으로 시 외곽의 외
딴 집이 할당되었다.
"운이 좋았다, 메이런."
잭은 그런 메이런을 두고서 이렇게 말하곤 했다.
"마을의 선생님이 반란군이 된 것만큼 운이 좋았겠죠."
메이런은 그럴때마다 잭에게 이렇게 대꾸해 주곤 했다. 예전 같았다
면 감히 엄두도 못냈을 일이었지만, 잭은 이제 더 이상 선생님이 아니
었던 것이다.
제 목:[하이어드] Who wants to live forever? - 8
조이스는 방송국의 기숙사에서 지냈지만, 팀과 메이런은 반란군에서
제공한 집에서 상주했다. 팀은 일주일에 다섯 번, 여덟 시간 씩 노동을
나갔고, 메이런은 그 때마다 잠을 자거나 책을 읽었다. 다행스럽게도
팀은 책이 장식용으로 가치가 있다고 믿는 편이었다. 팀은 자신이 읽
지 못하더라도 책을 사가지고 와서 벽에 꽂아놓곤 했고, 메이런은 그
것을 읽어 팀에게 자신이 해석한 내용을 말해주곤 했다.
"그 병법책, 어땠어? 그거, 재미있을 것 같던데. 책방주인 말이 고
대 병법서라고 했어."
팀이 일을 마치고 와서 옷을 갈아입으며 묻는다.
"좀 딱딱하긴 하지만 흥미롭던 걸. 전쟁에게 이기는 방법이 적혀 있
었어."
"무슨 이야기가 있어?"
"무기보다는 백성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이 국방의 요체라고 하던
데."
"백성의 마음은 어떻게 사로잡는데?"
팀의 질문에 메이런이 책을 뒤적인다.
"잠깐만... 여기있네. 백성을 군주의 뜻대로 부리는 방법은 저울로 균
형을 잡는 것과 같다. 인재의 선발은 공정하게 적재적소에 맞추어서
하고, 부자의 남는 돈을 가난한 국민에게 나누어주어 균형을 맞추어야
한다."
"통합정부의 방침하곤 정 반대네. 그럼 통합정부의 국방력은 약해
져야 하는 거 아닌가?"
"응. 그러니까 '소위' 반란군들이 있는 거겠지."
대개 이런 식이었다. 책의 종류는 고대 문헌에서부터 현대까지 다
양했고, 종류도 잡지부터 인문학 서적이나 과학서적까지 매우 다채로
웠다. 메이런은 사실 학교를 졸업한 이후, 전우신문이나 잡지 외의 책
을 접해 보는 것이 처음이었다. 하지만 책을 읽는 다는 건 그다지 어
려운 일이 아니었다. 지루하다기 보다는 오히려 새로운 지식을 쌓는
재미를 느끼게 했고, 어떤 대목에서는 메이런을 흥분시켰다. 메이런은
책을 읽는 동안은 반란군도, 정통정부도, 트랜스도 모두 잊을 수 있었
다.
주말이면 조이스가 찾아왔다. 찾아오지 않는 날은 포스트에서 만났
고, 그런 날은 대개 트랜스가 있거나 훈련이 있는 날이었다. 훈련은 2
차 포스트, 3차 포스트로 들키지 않고 이동하는 법을 익히는 것과 간
단한 사격훈련 정도였다. 잭은 훈련교관으로, 혹은 안내원으로 함께 자
리하곤 했다.
트랜스는 대개 카니데 레이스인 죠리 남작과의 대화였지만 가끔은
포미사이드 레이스나 랩타일 레이스일 경우도 있었다. 사실 처음 이후,
트랜스를 통한 성과는 카니데 레이스의 지원에 비한다면 미미했지만
그래도 도움은 되었다. 적어도 절대 배반하지 않을 동지 하나를 얻을
순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메이런은 한 가지 사실을 더 알 수 있었다. 그건 바로 락벳
에서 군에 있을 때, 일리야 중위가 했던 말이 큰 거짓은 아니었다는
사실이었다. 트랜스를 하면 할 수록, 메이런은 두통에서 멀어지고 있었
다. 끊임없이 달리며 끊임없이 뒤돌아본다. 이것이 메이런이 찾아낸 미
싱으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이었다. 메이런은 이 방법이 최선이라고 여
겼다. 적어도 이 즈음은 그랬다.
"병법책도 본다고 했던가?
어느 날인가 사격장으로 이동하면서 잭이 메이런에게 물었다. 메이
런은 몇 권의 병법책을 읽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 내용은 하나같이
지금의 실정과는 맞지 않는 것이었다.
메이런이 파악하기에, 전술의 본질은 다수로 소수를 상대하는 것이
었다. 즉 이기는 싸움만을 하라는 것이 전술의 요체였던 것이다. 모든
전술은 적을 소수로 만들고 아군을 다수로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적
을 분산시키고, 보급선을 끊고, 빠른 기동으로 수적 우위를 점하는
것... 이러한 모든 전술적 활동은 아군을 다수로 만들고 적을 소수로
만드는 데에 필요한 것이었다.
하지만 반란군의 상황은 그렇지 못했다.
반란군은 분산되어 있었고, 보급은 형편없었으며, 기동을 하기에 훈
련은 너무나도 부족했다. 병법책을 보면서 메이런이 느끼는 것은 반란
군은 지금 가망이 없는 싸움을 하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가끔. 팀이 사다주거든요."
"느끼는 바는 있나?"
메이런은 대답하지 않았다. 잭에게 우리는 지금 가망 없는 싸움을
하고 있는 겁니다, 하고 말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아무리 잭이 더 이
상 선생님이 아니라고 해도 별 수 없었다. 잭은 유심히 메이런을 바라
보았다. 색이 다른 두 개의 눈동자가 메이런을 바라보고 있다. 메이런
은 문득 두 휴먼 레이스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느꼈
다.
"잭. 잭은 왜 눈 색깔이 다르죠?"
메이런은 말을 돌리기 위해서 잭에게 이렇게 물었다.
"이건 전상이다."
잭이 손가락으로 자신의 왼쪽 눈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전상?"
"전상은 훈장이다."
잭은 이렇게 딱 잘라 말했다. 메이런은 전상이라는 단어가 생경해서
이렇게 되물었다.
"전쟁의 상처. 전쟁의 상처는 남겨둔다. 그게 군인의 긍지다."
잭은 호버카의 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잭의 얼굴에 드리운 그림
자가 어쩐지 쓸쓸해 보였다.
"흉터... 흉터 같은 것이다. 보면 상처가 기억나지만, 아프지는 않다."
잭은 한 참 동안 말이 없었다. 메이런은 화제를 잘못 돌렸나보다 싶
어서 괜한 자책감마저 들었다.
"모택동, 이라는 휴먼 레이스를 아나?"
"글쎄요."
메이런은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고대의 거대한 국가인 중국의 장군이다. 중국은 행성 어스의 인구
오분의 일에 해당하는 인구를 가진 거대한 국가였다. 이 중국을 통일
했던 휴먼 레이스는 모두 열 두 명이 있는데, 모택동은 그 중 여덟 번
째로 중국을 통일한 휴먼레이스다."
잭이 말했다.
"모택동은 절대적으로 불리한 가운데에 싸움을 벌였다. 모택동의 적
은 장개석. 장개석의 군대는 수적으로 유리했다. 하지만 둘의 전술은
판이하게 달랐다. 장개석은 모택동의 군대를 밀어 부치면 이길 수 있
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모택동의 생각은 달랐다."
메이런은 어렴풋하게 나마 잭이 자신이 병법책에 대해 품고 있는 의
문을 감지해 내고는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것이라 느꼈다.
"모택동은 싸움에서는 지더라도, 국민의 마음을 사로잡으면 전쟁에
서 이길 수 있다고 믿었다. 요컨대 병력과 물자를 잃는 것은 작게 읽
는 것이고, 땅을 잃는 건 크게 잃는 것이고, 민심을 잃는 건 전부를 잃
는 것이라고 본 것이다. 모택동은 적은 수의 병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
문에 유격전을 펼칠 수밖에는 없었다. 그래서 16자 유격전술이라는 것
을 만들어 실천에 옮겼다. 적이 진격해오면 우리는 후퇴한다. 적이 주
둔해 있으면 우리는 그들을 교란시킨다. 적이 피로해있으면 우리는 공
격한다. 적이 퇴각하면 우리는 추적한다. 이것이 16자 유격전술이다.
왜 열 여섯 글자라고 말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찌되었건 문헌에 그
렇게 전한다."
"우리도 16자 유격전술이라는 거, 그것대로 하고 있는 건가요?"
메이런이 물었다.
"유격전술은 기본적으로 이럴 수밖에 없다. 우리는 병력이 많은 것
도 아니고, 물자도 충분하지 않다. 우리의 활동은 대체적으로 마을 주
민을 포섭하고, 시에 대항하도록 만드는 것뿐이다. 작은 파괴공작과 테
러는 그저 우리가 있다는 걸 알리는 수단일 뿐이다."
"솔직히, 잭, 그런 식으로 해서 정통정부를 쓰러뜨린다는 건 상상도
못하겠어요."
메이런이 말했다.
메이런이 느끼기에 정통정부는 하나의 요새였다. 그것도 그 규모를
짐작조차 하기 어려울 정도로 거대한. 메이런이 알고 있는 병법으로는,
요새를 공격하기 위해서는 열 배의 병력이 필요했다.
"메이런. 락벳을 기억하는가?"
잭이 물었다. 잭의 말에 메이런은 그러고 보니 병법책을 읽으면서
단 한 번도 락벳인들과 연결시켜서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락벳은 로즈웰 레이스와 우리를 상대로 해서 전쟁에서 이겼다."
"정통정부군이 이겼지요."
메이런이 말했다.
"정통정부군이야 말로 16자 유격전술에 어울리는 전법을 사용한 것
이다. 메이런. 알고 있나? 정통정부군의 베가 시 공습을?"
메이런이 기억하지 못할리가 없었다. 메이런은 베가 시 공습 덕분에
탈영할 수 있었다.
"정통정부군의 거의 전 공군력이 동원된 이 폭격에서 그들이 노린
것은 해방정부군의 군사적 거점이나 요충지가 아니었다. 장개석의 군
대였다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정통정부군은 잡혀간 자신의 포
로들을 노렸다."
"정보가 새 나갈 걸 걱정한 거겠죠. 입을 막기 위해서."
"아니. 그렇지 않다. 그들이 바란 건 그들의 병사들이 명예를 지키고
죽는 것이었다."
잭의 목소리는 비장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것이 그들의 방식이었으니까. 명예롭게 살다가 명예롭게 죽는 것.
우리가 하는 일도 그렇다. 우리가 싸우면 적은 쓰러지지 않는다. 그러
나 국민의 마음은 우리 쪽으로 한 걸음 더 다가오게 된다. 마을 주민
들은 이미 우리편이다. 우리의 존재를 알고, 우리의 의도를 알기만 한
다면 틀림없이 우리를 위해 목숨을 바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진짜
전력이 되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모택동이 이긴 이유이다."
이론적으로는 그럴싸하게 들리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메이런은 정말
로 그런 일이 벌어질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않았다. 메이런은, 시에서
밀려나 어머니와 함께 마을에 버려진 아이였고, 트랜서의 재능이 있다
는 사실만으로 시에 들어가 하이어드 일을 하며 세상의 온갖 불합리와
부정을 몸소 체험하였으며, 군에 들어가서는 부도덕한 전쟁에서 패배
와 낙오, 탈영을 경험한 휴먼 레이스였다. 그런 메이런의 귀에 잭의 목
소리는 도덕윤리 과목 교과서와 별로 다를 바 없이 느껴졌다.
"저라면, 필요하다면, 마을 주민들을 모두 다 죽일 겁니다. 그래서
영영 알려지지 않게 할 겁니다."
메이런의 목소리는 마치 서늘한 바람처럼 호버카 안의 온기를 모조
리 식혀버렸다. 잭은 한 참 동안 대답이 없었다.
"그렇지 않다."
뭐가 그렇지 않다는 건지. 마을 주민들을 다 죽이는 일이 힘들다는
것인지, 그런 사실이 알려지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는 건지, 그런 일이
발생한다는 것 자체가 어렵다는 건지. 뜻을 짐작하기 어려운 말이었다.
메이런은 잭도 자신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트랜서의 능력을 통해서
가 아니라 이 말 한마디로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반란군의 훈련장으로
정해진 하수도까지 가는 동안 대화는 이어지지 않았다.
사격 훈련은 보통 시 외곽에 떨어져있는 하수도에서 실시했다. 화약
식 총의 소음 때문이었는데, 실외에서 하는 사격은 정통정부군 항공정
찰에 잡힐 우려가 컸다. 때문에 반란군은 폐쇄된 하수도를 찾아 그곳
을 이용하곤 했다.
하수도를 내려갈 때마다 메이런을 락벳의 기억이 떠올랐다. 헬멧을
쓰고 바라보았던 하수도의 풍경. 시쟌 상병. 레이 중위. 킨 하사. 이어
진 전투. 폭발. 시체 조각들. 메이런은 그런 것들이 떠오를 때마다 다
른 생각을 하려고 애썼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기억에 잡혀 먹힐 것
같은 두려운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잭이 먼저 내려가 휴대용 라이트로 내려오라는 신호를 보냈다. 팀이
먼저 내려갔고 조이스와 메이런이 그 뒤를 따랐다.
폐쇄된 하수도는 락벳의 그것과는 다른 곳이었다. 하수가 흐르지 않
아서 바닥은 말라있었고, 윤기가 흐르는 검을 털을 가지고 있는 집쥐
가 아니라 탁한 회색 빛의 들쥐들이 하수도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공
기가 통하지 않아서 탁한 먼지 내음이 나기는 했지만 악취는 풍기지
않았다. 조이스, 팀, 메이런은 하수도를 따라서 잭의 휴대용 라이트 빛
을 따라서 걸었다.
조이스의 솜씨는 아주 형편없었다. 잭이 몇 번이고 자세를 교정시켜
주고, 또 몇 번의 보충 사격을 하기는 했지만 조이스의 총탄은 매번
표적을 빗나갔다.
"사격은 제 전문 분야가 아니라고요."
노기 띤 얼굴의 잭에게 조이스가 말했다. 메이런은 어떤 남자라도
저런 표정 앞에서는 화를 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조이스는 나
이에 맞지 않는 어려 보이는 얼굴과 미소를 지니고 있었다.
팀은 명중률은 좋은 편이었지만 속사에 있어서는 명중률이 현격하게
떨어졌다.
"빨리 쏘면 빨리 빗나가는 법이라고."
팀은 이렇게 변명하곤 했지만, 사실 그 말은 메이런 때문에 거의 농
담처럼 들리곤 했다.
메이런은 명사수에 가까운 솜씨를 지니고 있었다. 메이런의 명중률
은 속사에 있어서나 보통 사격에 있어서나 무척 높았다.
"가슴에 두 발을 쏘는 군."
잭이 말했다. 메이런은 쿨란을 생각했다. 쿨란은 어떻게 보면 자신의
아버지와도 같은 존재였다. 가끔 사격을 하면서 메이런은 쿨란의 기억
을 떠올리며 향수에 젖기도 했다.
"예. 그렇게 배웠습니다."
잭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잭. 그런데 메이런은 저격수로 키워야 하는 거 아닙니까?"
팀이 잭에게 농담조로 물었다.
"트랜서는 저격수 보다 몇 배는 귀중한 자원이다, 팀."
잭은 무뚝뚝하게 이렇게 받았다. 팀은 어깨를 한 번 으쓱 했다. 농담
이 통하지 않는 휴먼 레이스는 다른 레이스만큼이나 상대하기 어려운
법이었다.
시간은 쉽사리 흘러갔다.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아이는 금새
어른이 되고 어른은 금새 늙는다. 메이런은 3년이라는 세월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게 지나갔다는 사실이 아쉬웠다. 계속 이런 식으로 10
년이고 20년이고 지나지 않을까 싶은 적도 있었다. 하지만 평화롭게까
지 느껴지는 시간은 계속되지는 못하였다.
긴급조치 중 비상사태가 몇 번 있었다. 하지만 그 어떠한 것도 메이
런이 이곳에 온지 2년 2개월만에 닥친 비상사태에는 미치지 못했다.
통합정부가 대규모의 검거작전을 강행한 거였다.
무차별적인 가택 수색이 실시되었다. 검찰은 영장 발부 업무 때문에
재판이 정상적으로 진행이 되지 않을 정도였고, 거리에는 시민보다 경
찰이 더 많이 눈에 들어올 지경이었다. 이것은 반란군의 수괴인 칸의
특수부대가 통합정부중앙청사를 폭탄테러한 일 때문에 빚어진 사태였
다. 사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반란군도, 통합정부도 명확한 사실을 알
고 있지 못하였다. 누군가는 통합정부의 자작극이라고 하기도 했고, 또
누군가는 칸의 특수부대가 자체적으로 벌인 일이라고 하기도 했다.
어찌되었건 무모한 시도임에는 틀림없었다. 특수부대원 12명은 대부
분 현장에서 사살되었고, 살아남은 대원도 스스로 머리를 쏘아 생을
마쳤다.
이 테러는 통합정부로부터 일종의 선전포고로 받아들여졌고, 정통정
부는 언론을 통해 '반란군과의 전쟁'을 선포하였다. 통합정부의 경찰청
장은 이 사실을 매우 엄숙한 목소리로 텔레비전 모니터를 통해 선포하
였고, 검찰총장도 사용할 수 있는 모든 공권력을 총동원하여 반란군
색출에 나서겠다고 발표했다.
반란군은 일단 물러서지 않을 수 없었다.
메이런과 팀도 거처를 옮기기로 했다. 경찰의 손길은 당연히 시 외
곽까지 이르렀으며, 반란군에서 마련해 준 집에 머물러 있는 다는 건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였다. 메이런과 팀은 서둘러 짐 -이라고 해 봐야
개인화기와 당장 입을 옷가지 정도였지만- 을 꾸려 포스트에 집결했
다. 포스트는 시 외곽의 폐가였고, 팀과 메이런은 훈련받은 대로 도보
로 이동했다. 경찰의 눈에 뜨이지 않게 골목골목을 돌아서 가야했기
때문에 시간은 조금 더 걸렸지만 그래도 경찰에게 붙잡히는 것보다는
나았다. 팀 혼자라면 어떻게든 둘러댈 수 있겠지만, 메이런은 신원조회
를 해도 사망자로 나오는 탈영병이었다.
포스트에는 조이스가 먼저 도착해있었다.
"조이스? 방송국은."
팀이 물었다.
"일단 피하기로 했어."
조이스는 얼굴이 상기되어 있었다. 아마도 긴장 탓인 모양이었다. 하
긴 동료들이 잡혀갔다는 소식이 계속해서 들려오는 와중에 평정심을
찾을 수 있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일지 몰랐다.
"잭, 잭은?"
"아직 안온 모양이야."
팀이 다급하게 묻자 조이스가 답했다.
메이런은 사실 그렇게까지 긴장이 되지는 않았다. 메이런이 팀과 조
이스와 다른 점은, 무엇보다 실전경험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잭은 언제까지 여기서 기다려야 하지?"
조이스는 초조한 목소리였다. 메이런은 조이스가 입술을 뜯는 것을
자세히 관찰해보았다. 그 모습은 마치 데뷔 무대의 오르기 전 대기실
의 가수의 모습 같았다.
"우리가 만난지 25분이 지날 때까지."
셋은 동시에 시계를 보았다.
5분.
또 5분.
메이런은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기다리고 있는 시간이 슬슬 초조해
지고 있었다. 메이런은 팀과 조이스를 살폈다. 둘도 말을 하지 않는다
뿐이지 메이런보다 훨씬 더 긴장하고 있는 것 같아 보였다.
그 때, 가까운 곳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려오자, 메이런 일행은 소리
가 나는 쪽으로 거의 동시에 총을 뽑아서 겨누었다. 상대는 휴먼 레이
스였다.
"잭?"
조이스가 상대에게 이렇게 묻자, 메이런은 어이가 없어서 조이스를
처다보았다. 섣부른 행동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절대 이름을 말해서는
안 된다는 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초조한 나머지 조이
스는 실수를 범하고 만 거였다. 게다가 팀은 그것이 섣부른 행동이라
는 걸 깨닫지도 못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잭은 먼저 이동했습니다. 저는 리코, 잭의 안내원입니다."
두 손을 들고 접근해 오면서 휴먼 레이스가 말했다. 메이런은 다가
오고 있는 리코라는 사내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메이런은 등에 소름이
돋았다. 리코라는 사내의 얼굴은 메이런도 잘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래서만 소름이 돋은 건 아니었다. 리코라는 사내의 얼굴은
이미 죽은 자의 얼굴과 같았던 것이다.
"시쟌 상병?"
메이런이 중얼거리자 조이스와 팀이 메이런을 바라보았다.
"아는 친구야?"
위험한 순간이었다. 리코라고 자신을 밝힌 사내는 셋 사이에 의심의
분위기가 흐르고 있는 것을 느낀 모양이었다. 리코는 웃으면서 아주
자연스럽게 손을 내렸다.
"잭이 기다리고 있어요. 긴장들 푸세요."
환하게 웃는 시쟌 상병과 꼭 닮은 얼굴을 바라보다가, 메이런은 두
발을 발사하였다. 9밀리 탄환은 리코의 가슴에 명중되었고, 리코는 9밀
리탄의 위력에 그대로 뒤로 밀려 쓰러졌다. 총성은 단 한번만 들렸다.
팀과 조이스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총만 들고서 멍하니 메이런의 얼굴
만 바라보았다. 메이런은 일단 팀과 조이스를 무시하고 리코에게 달려
갔다. 리코는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아마도 갈비뼈가 부러진 모양이
었다. 틀림없이 방탄복을 입고 나왔겠지만 한 자리에 두 방을 동시에
얻어맞은 이상 충격을 피할 순 없었다.
메이런은 리코의 이마에 K-5 총구를 대었다. 메이런은 리코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리코는 메이런의 매서운 눈을 보고 메이런이 누군
가를 충분히 죽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 같아 보였다.
"두 번 묻지 않겠어. 하이어드, 맞아?"
메이런이 묻자 리코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이 메이런은 자유로운
왼 손을 움직여 리코의 총을 찾아내었다. 총은 허리춤에 두 정이 꽂혀
있었다. 하나는 구하기 쉬운 K-5였고, 다른 하나는 구하기 어려운 45
구경 자동권총이었다. 아마도 K-5는 지급 받았고, 45구경은 암시장에
서 비싼 값을 치르고 산 모양이라고 메이런은 생각했다.
"잭은?"
리코는 대답하지 않았다.
"두 번 묻지 않는다고 했지."
메이런이 총구를 눈 쪽으로 내리면서 말했다. 리코는 눈을 감았지만
총구가 눈을 찌르자 몹시도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리코의
입에서 나온 말은 뜻밖의 말이었다.
"죽여라."
리코는 이렇게 말하곤 이를 악물었다. 메이런은 바로 방아쇠를 당기
려고 했다. 하지만 차마 방아쇠를 당길 수는 없었다.
제 목:[하이어드] Who wants to live forever? - 9
"젠장."
메이런은 총구를 리코의 눈에서 떼었다. 그리고 권총의 총신 쪽을
잡았다. 리코는 총구가 눈에서 떨어지자 눈을 떴다. 다음 순간, 메이런
은 권총손잡이로 리코의 미간을 강하게 내리쳤다. 리코는 순간 충격으
로 사지가 펄쩍 뛰어오르는가 싶더니 이내 곧 잠잠해졌다.
"메이런?"
조이스가 아직도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하고서 메이런에게
물었다.
"하이어드였어요."
메이런이 말했다. 메이런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흐르고 있었다.
"하이어드?"
"통합정부가 고용한 하이어드. 클론들을 이용해서 반란군과 탈영병
을 잡죠."
메이런은 만약 군에서 시쟌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또 웨이팅하우스
시의 경찰과 똑같이 생긴 간부와 마주치지 않았더라면 지금 눈앞에 쓰
러져 있는 리코에게 당했을 거라고 생각하니 몸이 다 오싹해 졌다. 하
지만 지금은 그런 설명을 하고 있을 시간이 아니었다.
"녀석은 혼자 우리를 전부 다 잡으려고 한 모양이에요. 아마 잭을
미행했겠죠. 혼자 나타난 걸 보니 잭은 근처에 있을 겁니다. 사살당했
거나, 부상당했겠죠. 빨리 잭을 찾아서 여길 떠야 해요."
메이런은 숨 한 번 제대로 쉬지 않고 팀과 조이스에게 말했다. 팀과
조이스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메이런은 리코에게서 빼앗은
9밀리 K-5와 45구경을 팀과 조이스에게 내밀었다.
"이 친구는?"
조이스가 물었다.
"이 친구가 깨어나기 전에 우린 여길 뜰 거에요."
메이런이 말했다.
잭은 메이런의 예상대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찾아낼 수 있었다.
포스트 바로 바깥쪽에 쓰러져 있었던 것이다. 다리에는 총상을 입은
상태였고, 팔은 뒤로 돌려져 견고한 수갑으로 묶여 있었다. 입에는 수
도관을 고칠 때 쓰는 테이프가 붙어 있었다. 메이런은 테이프를 떼어
내었다.
"빨리 가. 나는 부상이 심하다. 도망치는 건 불가능하다."
잭이 고통을 참으며 말했다. 메이런은 웃옷을 벗으며 잭의 다리에
난 총상을 살펴보았다.
"관통한 것 같아요. 지혈만 되면 어떻게 응급조치는 되겠어요."
메이런은 벗은 웃옷을 조이스에게 내밀었다.
"팀. 응급조치, 부탁해요."
메이런은 이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조이스는 호버카를 가지고 오고요."
조이스의 조직이 모이는 1차 포스트에는 항상 호버카가 숨겨져 있었
다. 이것은 트랜서라는 소중한 인재를 잃지 않으려는 반란군의 배려였
다.
"알았어."
조이스도 이제는 침착을 되찾은 듯 보였다. 어쩌면 바닥에 흐르고
있는 잭의 피가 조이스의 이성을 제대로 돌아오게 만든 건지도 몰랐
다.
"여기서 부터는 호버카로 이동하자고. 일단 지하 하수도까지 간 다
음에, 거기서 차를 버리고 지하도를 따라서 3차 포스트로 도망치는 거
지. 알겠죠?"
"2차 포스트로 이동 안하고?"
팀이 물었다.
"우리 넷이 다 모이면 바로 가야지. 지금 우리는 도주중이야. 2차 포
스트에서 몸을 숨기고서 영원히 살 자신이 있으면 그렇게 해."
조이스가 말하자, 팀은 수긍했다. 2차 포스트는 골먹의 한 구석이었
다. 메이런은 팀이 아직 평상시처럼 생각할 수 있을 만큼의 평상심을
지니지는 못한 것 같다고 생각했다.
메이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딜 가는 거지?"
조이스가 메이런에게 물었다. 팀은 메이런이 준 웃옷을 이빨을 사용
하여 적당한 크기로 찢어낸 다음 잭의 다리에 묶고 있었다.
"수갑 열쇠요."
조이스는 미처 생각 못했다는 듯 아, 하는 탄성을 내었다. 메이런은
다시 리코가 쓰러져 있는 1차 포스트로 향했다.
메이런은 걸어가는 도중, 리코의 몸이 움찔거리는 것을 알 수 있었
다. 생각보다 훨씬 금방 정신을 차리는 것 같았다. 메이런은 만약을 대
비하여 K-5를 뽑아 들고 사격태세를 갖추며 리코에게 다가섰다.
"빌어먹을..."
리코는 중얼거리면서 다리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는 뭔가를 뽑아들
었다. 메이런은 지체하지 않고 방아쇠를 두 번 당겼다. 다시금 포스트
에 총성이 울려 퍼졌고, 리코의 얼굴에서 두 번 핏물이 튀어 올랐다. 9
밀리 탄두가 두개골을 뚫고 지나갈 수 있다는 건 당연한 이치였다. 움
직이고 있던 리코의 사지는 완전히 쭉 뻗었다.
메이런은 조심스럽게 리코에게 접근한 다음 리코가 뽑아든 것을 살
펴보았다. 리코의 손에는 38구경이 들려 있었다.
아주 형편없는 솜씨는 아니었지만, 자신의 솜씨를 너무 믿은 나머지
지나치게 자신감이 넘친 하이어드였다고 메이런은 생각했다. 앞으로도
이런 리코와 같은 하이어드만 만나게 되리라는 법은 없었다. 메이런은
숨이 완전히 끊어져있는 리코를 바라보면서 이런 불길한 예감에 휩싸
였다.
메이런은 38구경과 발목에 차는 권총 홀스터를 리코에게서 빼앗았
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의 발목에 찼다. 수갑 열쇠는 홀스터에 달려 있
는 보조 주머니 속에 들어 있었다.
잭은 출혈이 심해서 의식이 완전치 않은 상태였다. 팀과 메이런은
잭이 의식을 잃지 않도록 애쓰며 호버카로 하수도까지 이동했다. 버려
진 하수도에 도착했을 때, 조이스는 호버카의 운행 로고 기록을 지우
고 오토 모드로 시 쪽으로 가게 했다.
"당분간은 추적하기 힘들 거야."
조이스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 3차 포스트로가야지."
팀이 부연했다. 조이스와 메이런은 고개를 끄덕였다.
3차 포스트는 마을이었다. 하수도를 따라서 밖으로 나온 메이런과
조이스는 사막에 그대로 노출되었다. 사막에는 모래바람이 심하게 불
고 있었다.
"젠장. 부상자하고 함께 도망가기에 아주 딱 좋은 날씨군."
해치를 열고 고개를 내밀자마자 팀이 말했다. 이런 경우를 대비한
헬멧이 마련되어 있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래 바람 속의 여행
이 즐거워 질 리는 없었다.
"적이 추적하기에 좋은 날씨도 아니야, 팀."
메이런이 헬멧을 쓰면서 말했다.
3차 포스트인 마을까지는 날씨가 좋다면 도보로 이틀 정도 걸리는
거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하지만 날씨는 점점 더 악화되고 있었고, 이
대로 간다면 한 달이 걸릴지 두 달이 걸릴지 알 수 없는 상태였다. 잭
은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의 상태였고, 당장 메이런 일행의 목숨을 부
지하기에도 어려운 상태였다.
일단 포스트로 가는 길 도중에 있는 오아시스에서 묶기로 결정한 것
은 조이스였다.
"잭을 살려야 해."
조이스가 말했다. 메이런은 단호하게 말하는 조이스를 충분히 이해
할 수 있었다. 잭은 반란군의 중간 간부였고, 메이런만큼이나 소중한
존재였다. 그렇게 쉽게 포기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
만 메이런은 조이스가 잭을 포기하지 않는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다는
것을 트랜서의 능력으로 알 수 있었고, 때문에 질투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메이런은 데쟈뷰의 멜로디가 귓가에서 울리고 있는 듯 한 착
각을 느꼈다.
모래바람이 붉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저녁 노을이 서편으로 지고
있는 것이다. 사막의 노을은 서서히 벌판을 붉게 물들여 갔다.
일터에 있던 휴먼 레이스들은 이제 곧 찾아올 어둠을 피해 하나 둘
집으로 돌아가겠지. 그리고 밤을 지배하는 괴물들이 고개를 내밀 것이
고. 상상속에서, 긴 혀를 내두르며 먹을 것을 찾아 헤매는 리자드들이
말을 잘 듣지 않는 어린 휴먼 레이스들을 잡아먹고, 파이슨들이 길 잃
은 여행자들의 발목을 물어 사막의 모래 속으로 끌고 들어갈 것이다.
메이런은 마을에서 보냈던 마지막 날을 기억했다. 메이런은 정신을 잃
은 채로 아이라와 함께 시로 들어올 수 있었다. 그 때 잭은 마을은 자
신에게 맡겨달라고 말하고 메이런을 돌려 보냈다. 그 때의 기억을 떠
올리지, 메이런은 질투를 느낀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오아시스에서 숙영을 하기 위해서 팀이 호버카에서 꺼낸 숙영장비를
꺼냈다. 해가 진 뒤에 닥쳐올 냉기로부터 보호받기 위한 천막과 침낭
이었다. 침낭은 셋 뿐이었고, 잭이 침낭 하나를 차지해야 했으니 잠은
셋이서 번갈아 가며 잘 수밖에 없었다.
"그냥 가. 그냥."
잭은 의식이 돌아오면 이렇게 말하곤 다시 눈을 감곤 했다. 메이런
은 그런 잭이 믿음직스럽게 느껴졌다. 군에서도 저 정도의 책임감을
가지고 있는 간부는 몇 보지 못한 메이런이었다.
불침번 순서는 제비뽑기로 정했다. 아무래도 중간에 걸리게 되면 불
리하기 때문에 공정을 기해야 한다고 조이스가 말했던 것이다. 팀과
메이런은 조이스의 의견에 따랐다.
공교롭게도 중간에 걸린 건 조이스였다.
"이럴 줄 알았다니까."
조이스는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메이런은 그것이 그
저 침울한 분위기를 바꾸어 보려는 과장된 제스처에 지나지 않는 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밤이 되어도 모래바람은 멈추지 않았다. 천막은 애당초 사막 야영용
으로 만들어 진 것이었기 때문에 바람에는 강하게 설계가 되어 있었
다. 일단 자동으로 지면 밑 2미터까지 뻗어나가는 지지대가 그랬고, 탄
소계열 합금으로 주조된 골격이 그랬다. 메이런은 흔들리는 천막에서
기둥을 붙잡고서 조이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천막 내부에 설치된 붉
은 조명등 아래 보이는 조이스의 창백한 얼굴은 붉은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메이런은 색과 그림자 때문에 기괴하게까지 보이는 조이스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문득 저 뺨에 손을 대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
다. 바람소리가 메이런의 마음을 흔들고 지나가고 있었다. 모래바람에
가려진 별빛처럼 메이런의 생각도 가려져 있는 듯 했다.
"물... 물..."
얼마나 지났을까? 잭이 깨어나면서 이렇게 말했다. 체액이 빠져나가
서 갈증을 많이 느끼는 모양이었다. 메이런은 손수건을 이용해 조심스
럽게 물을 잭의 입에 흘려 넣어 주었다. 대 여섯 번 정도 수건으로 물
을 주자, 잭은 다시 잠이 들었다.
메이런은 시계를 보았다. 시침이 조이스가 일어날 시간임을 말해주
고 있었다. 메이런은 조이스를 깨우기 전, 조이스의 얼굴에 손을 대 보
고 싶다는 욕망과 싸우느라 교대 시간을 5분이나 넘기고 말았다.
결국 메이런은 조이스의 어깨를 흔들어 깨웠다.
"가운데 불침번은 정말 싫어."
조이스가 약간 부은 얼굴을 하고서 이렇게 말했다. 메이런은 조금
전까지 조이스가 누워있던 침낭 속으로 들어갔다. 침낭에는 조이스의
살냄새가 배어있었다. 메이런은 들키지 않게 조심스럽게 마른침을 삼
켰다.
"오늘밤을 넘길 수 있을까?"
눈을 비비며 조이스가 메이런에게 물었다. 메이런은 처음에는 조이
스가 무슨 말을 했는지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그러다가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잭의 이마를 보고 나서야 조이스가 잭을 걱정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넘길 거에요."
메이런 스스로 생각해 보아도 자신감이 없는 목소리였다.
"그래. 넘길 거야. 넘기겠지."
조이스는 걱정으로 가득 찬 눈초리를 하고서 잭을 내려다보면서 말
했다. 피아노 건반 위를 활주하던 조이스의 하얀 손이 어둠 속에서 빛
을 낸다. 그 손은 한 줄기 서늘한 기운을 어둠속에 남기며 잭의 이마
에 올려진다. 메이런은 조이스의 손이 잭의 이마에 닿는 순간 가슴 한
구석 타오르는 불씨를 느낄 수 있었다.
"잭은 날 여기로 이끌어 줬어요. 피아노를 잃고, 아무 것도 할 수 없
게 되어버린 나를요. 방송국 공채 시험도 보게 했고, 비록 40명 중 한
명으로 무대에 서는 합창단원이지만 무대에 설 수 있게 해 주었죠."
메이런은 조이스의 말이 이어지자 팀을 바라보았다. 팀은 완전히 잠
들어 있었다. 그러고 보내 메이런도 눈동자가 따가웠다. 아무리 헬멧을
쓰고 행군을 했다고 하더라도 헬멧은 모래바람을 막아줄 수 있을 뿐
피곤함을 막아 줄 수는 없었던 것이다.
"잭이 눈동자 이야기를 했었어요?"
"예. 전상, 이라고."
메이런은 피곤 때문에 마치 무거운 추가 달려 있는 듯한 입술을 움
직여 이렇게 답했다.
"불쌍한 휴먼 레이스. 잭은 부인이 죽었어요. 전쟁에서. 같은 부대에
속한 전우였다고 해요. 그 때, 부인은 죽고 자신은 한 쪽 눈을 잃었다
더군요. 그래서 부인의 눈동자와 같은 색깔로, 그렇게 맞추었다고 해
요. 그렇게라도 부인과 함께 있고 싶었다고, 그렇게 말했어요."
조이스의 목소리는 점점 잦아들고 있었다. 메이런은 그런 조이스의
목소리를 듣자 질투가 불꽃처럼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조이스는 잭에
게 남다른 감정을 품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메이런이 트랜서가 아
니라고 해도 감지해 낼 수 있을 거였다. 불현듯, 예전에 조이스의 아파
트에서 보았던 조이스의 나신이 떠올랐다. 메이런은 얼굴이 화끈 달아
올랐고, 행여 그것을 조이스가 눈치 챌까봐 침낭 속에 얼굴을 묻었다.
침낭에 남아 있는 조이스의 살냄새가 더욱 짙게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이런 분위기에서 이런 사적이고 은밀한 대화를 조이스
와 나누어 본 적은 없는 것 같다고 느꼈다. 아니, 어쩌면 군에 가기
전, 일루젼에 취했을 때도 이런 분위기였을지 몰랐다.
"이제 저 두 눈동자는 같이 잠들겠죠, 메이런?"
"잭은 오늘밤을 넘길 거에요. 잭은 강하니까."
메이런은 갑자기 터져나온 목소리에 스스로 깜짝 놀랐다. 메이런은
이 목소리가 자신의 목소리인지, 아니면 강제 트랜스 했던 호야미의
목소리인지 스스로 분간해 낼 수 없었다.
"고마워 하겠네요, 잭이."
조이스는 이렇게 말했다. 둘 사이에 정적이 맴돈다. 메이런에게는 긴
장으로 가득찬 정적이다. 가슴이 방망이질치고 피가 몸을 도는 게 직
접 느껴진다. 하지만 조이스는 아무렇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그저 쓸쓸
한 표정을 짓고서 잭을 내려다 보고 있을 뿐이었다.
"나, 예전에 나이 많은 남자와 살았어요."
불쑥 조이스의 목소리가 정적을 깨뜨렸다. 그리고 그 목소리는 메이
런의 심장도 터트려버린듯 했다.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밝아오는 듯
했고, 가슴 한 구석에서 타오르던 불꽃이 일순간에 불타올랐다.
"나한테 피아노를 가르쳐 줬지요. 그 아파트에서. 예. 그래요. 그 남
자는 피아노를 남기고 죽었어요. 그 데쟈뷰, 라는 곡, 그 남자를 그리
며 작곡한 곡이었어요."
메이런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아
니, 어쩌면 메이런은 생각하는 걸 스스로 거부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잭이 오늘밤을 넘긴다고 해도 그리 오래 버틸 수는 없어요. 나, 냉
정해야 할 때는 꽤 냉정해 져요. 지금처럼. 구급상자에 들어있는 약품
으로 지혈은 가능했지만 그것뿐이에요. 감염되었을 수도 있고, 내출혈
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몰라요. 지금 당장 2차 포스트인 마을에 도착한
다면 모를까, 일주일씩이나 버티는 건 불가능해요. 우리가 그곳에 도착
할지도 의문이고요."
조이스가 이렇게 잭을 걱정하고 있는 사이, 메이런은 멍한 상태가
되어 자신이 느끼고 있는 감정과 조이스가 지금 느끼고 있는 감정을
비교하고 있었다. 사랑? 이런 걸 사랑이라고 하는 걸까? 아니, 어쩌면
나는 지금껏 사랑같은 거 한 번도 해 보지 못했는지 모른다. 이런 감
정을 아이라에게 느낀 적도 있었다. 호버카 앞좌석에 앉아 있던 아이
라의 가늘고 긴 머리카락. 메이런은 아이라를 떠올리자 마자 아이라와
함께 있었던 소령을 생각했다. 아마 로스 소령이라고 불렸던 것 같다.
제대하지 않았다면 중령이나 대령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탈영으로 군
생활을 마친 상병인 메이런에게 영관급 장교의 존재는 마치 거대한 성
벽보다도 더욱 높게 느껴졌다.
"잭에게는 동질감을 느꼈는지 몰라요. 그런 거, 중요하잖아요. 비슷
한 체험. 비슷한 기억."
메이런은 생각에 열중한 덕분에 조이스의 이 말이 어떤 맥락에서 나
온 말인지 잡아내지 못하였다. 메이런은 자신이 생각하던 걸 이어서
생각해 본다. 비슷한 체험. 비슷한 기억. 나와 비슷한 체험이나 비슷한
기억을 가지고 있는 휴먼 레이스가 있을까? 아이라는 어렸을 때의 기
억을 공유하고 있을 뿐,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아왔다. 메이런은 하이어
드로. 아이라는 공무원으로.
어쩌면 트랜서 중에서 찾아야 할지도 몰랐다. 나와 같은 트랜서라
면? 메이런은 트랜스 된 공간에 같이 갇혀 있는 여자 트랜서를 상상해
보았다. 서로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의 기억을 공유하고 경험을 공유
하는 둘. 메이런은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뛰었다. 그랬다. 어쩌면 조이
스의 말처럼, 메이언도 자신과 같은 기억과 체험을 공유하고 있는 여
자를 찾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잭은 그렇지 않았어요."
조이스의 말에 메이런은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은 충격을 느꼈다. 그
랬다. 트랜서라면 트랜서를 사랑하고 싶지 않을지 모른다. 언제 사라져
버릴지 모를 상대와의 사랑은 불확실하기 그지 없을 것이었고, 하이어
드도 아닌 반란군이라는 직업은 아무 메리트도 없는 직업일 수 있었
다. 메이런은 풀이 죽어버렸다. 다만 메이런은 트랜스된 공간에서 조이
스와 대화를 나누는 상상을 할 수 있을 뿐이었다. 이루어지지 않을 모
든 것들은 상상할 마음을 준다. 그리고 그 상상은 상당히 서글픈 일이
었다.
메이런은 팀과 조이스가 불침번 교대를 마칠 때 까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메이런은 조이스를 바라보았다. 조이스는 팀이 누워있던 침낭
속으로 들어갔다. 메이런은 묻고 싶었다. 나와 트랜스 하지 않을래요?
나, 당신과 이야기 하고 싶어요. 이런 말이 메이런의 입가에서 맴돌았
다. 조금만 일찍 떠올랐더라면. 지금은 팀이 깨어있었다. 그런 말은 함
부로 입밖에 낼 수 없었다.
메이런은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다. 잭의 숨소리가 다시금 거칠어
졌다. 잭은 물수건을 적서려다 말고 조이스를 불렀다.
"조이스, 물통이 비었어."
"아, 미안. 내가 채우는 걸 잊었나봐."
조이스가 잠긴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팀은 투덜거리면서 물통을
들고 나갔다. 기회가 온 것이다.
"저, 조이스."
메이런은 이렇게 말하곤 할 말을 찾았다. 오늘 밤 밖에, 오늘 밤 밖
에는 기회가 없을 것 같았다. 다시는 이런 말을 꺼낼 용기도 없을 것
같았고, 꺼낼 기회도 찾아오지 않을것만 같았다. 하지만 어떻게 말해야
할까. 메이런은 이런 종류의 말은 해 본 적도 없었고, 하고 싶었던 적
도 없었다.
"조이스. 아직도 저는 당신 타입이 아닌가요."
메이런은 오랜 시간에 걸쳐서 팀이 들어오기 전에 겨우 정제해 낸
문장을 이렇게 내뱉었다. 대답은 없었다. 그리고 한 참 후에야 메이런
은 조이스가 잠들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날 밤, 메이런은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내라는 자학 속에서 제대로 잠을 이
루지 못하였다. 세상의 모든 불운이 자신에게 쏟아지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세상에서 자신이 가장 불행하다고 느낄 수 있는 휴먼 레이스
는 단 하나뿐이지만, 절반의 휴먼 레이스가 그렇다고 느낀다는 농담처
럼, 메이런 역시 그렇지는 않았다. 사실 메이런은 세상에서 가장 운좋
은 사내였을지도 모른다. 다음 날 새벽, 메이런과 조이스는 팀의 목소
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살았어, 살았다고."
팀의 목소리는 잔뜩 들떠있었다. 메이런은 뻐근한 어깨에 힘을 주면
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잭?"
조이스는 잠에서 깨어나면서 이렇게 말했다. 메이런은 약간 부은 듯
한 조이스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간밤에 보았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
워진 조이스의 얼굴을 기억해 보려 애썼다.
"잭은 괜찮은 거야, 팀?"
조이스가 말했다. 메이런은 지난 밤에 있었던 모든 일들이 어쩌면
잠시 꿈을 꾼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어쩌면 정말 꿈이었
는지도 몰랐다. 자신이 했던 말, 조이스가 했던 말 모두가 현실에서는
일어나지 않는 것인지도 몰랐다.
"마을에서 보낸 수색대를 보냈어."
"낯이 익군요."
메이런은 잠에서 깬지 얼마정도 시간이 흐른 후에야 천막 안에 팀
말고 다른 얼굴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휴먼 레이스였
다. 얼굴에 살짝 얽은 자리가 많이 남아 있는 사내였다. 메이런은 낯이
익은 얼굴이라고 생각했지만 누구인지는 얼른 떠오르지 않았다.
제 목:[하이어드] Who wants to live forever? - 10
"메이...런?"
얼굴에 살짝 얽은 자리가 남아있는 사내가 실눈을 뜨고 메이런을 보
며 말했다. 메이런은 누구인지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그리고 기억을
찾을 수 있었다.
"아루밀? 경비대 아루밀?"
얼굴에 여드름 투성이었던 경비대원. 만티드 레이스가 마을을 공격
해 들어왔을 때 만났던, 바로 그 경비대원이었다.
"그래. 맞구나. 맞아. 기억나. 망루에서 친구하고 놀곤 했었지. 지금
은 경비대원이 아니지만, 하여간 그 아루밀이 맞아."
"그런데 여긴 무슨 일이죠?"
메이런이 물었다.
"당연히, 잭을 찾으러 온 거지."
"잭을?
아루밀은 고개를 끄덕였다.
"잭은 우리 마을 장로잖아. 잭이 도망치고 있다는 말을 듣고, 이렇게
찾으러 나온 거라고. 시에서 여기 오는 길에 있는 오아시스들을 둘러
보던 중에 이렇게 찾았지. 메이런. 이 일에 마을에 두 대 뿐인 호버카
하고 경비대원이 총동원되었어. 어찌되었건 찾아서 다행이야."
"잭이 부상이라고 말 해 줬어. 지금 호버카에서 의료팀이 대기 중이
야. 자! 하여간 빨리 서두르자고."
팀이 한껏 기대에 부푼 목소리로 힘차게 외쳤다. 조이스와 메이런은
그 목소리만으로도 힘이 나는 것 같았다.
호버카로 온 경비대원들이 천막을 철수하고 잭을 옮기고 야영지를
정리하는 동안, 메이런 일행은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좀 쉬어, 메이런. 잭은 걱정하지 말고. 우리 의사 말이, 걱정하지 않
아도 좋다네."
아루밀이 메이런에게 컵에 담겨 있는 차 한잔을 내밀면서 말했다.
아루밀이 컵에 붙어 있는 작동 버튼을 누르자, 순식간에 차는 뜨겁게
데워졌다. 메이런은 두 손으로 컵을 감싸안았다.
"어쩌면 어제 밤 모든 불운을 다 써버린 건지도 몰라."
컵에서 올라오기 시작하는 김을 바라보고 있는 데 불쑥 목소리가 비
웃는 듯한 음성으로 치밀어 올라왔다. 메이런은 목소리의 말에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아마 목소리의 말이 맞을 것이다. 맞았으면 좋겠다. 그
런 생각이었다.
도보로 마을까지 갔다면 일 주일은 걸렸겠지만, 호버카로는 반나절
만에 도착할 수 있었다. 메이런은 다시는 볼 수 없을 줄 알았던 마을
의 풍경이 눈에 들어오자 가슴이 벅차올랐다. 마을은 전혀 변하지 않
았다. 새로 생긴 건물도 없었고, 새로운 간판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래간만이지?"
아루밀이 감탄하고 있는 메이런에게 말했다. 메이런은 대답 없이 고
개만 끄덕였다. 마을에 사는 주민들은 누구나 도시를 동경한다. 불현듯
치미는 죄책감. 메이런은 마을을 버리고 도시로 도망쳤다.
"도시에서 돌아온 친구는 너 하나 뿐인 것 같은데, 메이런?"
아루밀이 환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메이런은 그 가식 없는 웃음이
무척 천박하다고 느끼면서도 정겨웠다. 메이런은 갑자기 목구멍이 작
아지는 느낌이 들어서 함부로 말을 이어갈 수가 없었다. 호버카 역시
말없이 마을로 들어서고 있었다. 해는 중천에 걸려 있는 시각이었다.
마을에 들어섰을 때, 메이런은 학생들을 먼저 보게 되었다. 막 하교
를 서두르고 있는 학생들이었다. 메이런도 16살 때까지는 저렇게 학교
를 다니고 있었다. 저렇게 작았던가. 저렇게 어렸던가. 경계의 눈초리
와 호기심의 눈초리로 아이들은 호버카 뒷좌석에 타고 있는 메이런 일
행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도 그랬겠지. 나도 저런 눈초리로 외지인들을
바라보곤 했겠지. 메이런은 이런 생각을 하며 마을에 도착하였다.
잭의 치료는 생각보다 금새 이루어졌다. 마을의 의료진들이 총동원
된 탓도 있었지만, 워낙 잭의 체력이 좋은 게 가장 큰 원인이었다. 총
알이 관통하고 지나가면서 다행히도 큰 상처는 남기지 않았고, 때문에
잭은 일주일만에 목발로 일어설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그 사이 메이런과 조이스, 팀은 정말 오래간만에 맞는 여유로운 생
활을 할 수 있었다. 마을 장로들은 메이런 일행을 귀한 손님으로 맞이
해 주었고, 숙소도 마을에서 가장 좋은 여관으로 잡아 주었다. 마치 긴
휴가를 즐기는 기분이었다.
아침이 되면 여관 주인이 차리는 식사를 즐기고, 점심시간까지 마을
주민들과 잡담을 나눈다. 도시에 대한 이야기. 반란군의 근황. 통합정
부의 정치. 세금. 이런 것들이 주 화제다. 그러다 보면 점심 시간이 된
다. 점심은 빵과 우유. 혹은 국수와 감자다. 점심을 먹고 나면 메이런
일행은 마을을 돌아다닌다. 팀은 아이들과 공놀이를 한다. 조이스는 도
시에서 벌어지는 끔찍한 통합정부의 만행을 아이들에게 들려준다. 메
이런은 간만에 보는 돔이 없는 하늘을 바라보며 하늘을 즐긴다. 그러
다가 해질녘이 되면, 메이런은 팀과 조이스를 이끌고 망루에 오른다.
예전의 그 망루는 무너졌지만, 그 자리에 새로 새운 망루다. 셋은 그
자리에 앉아 해가 지는 것을 바라본다. 메이런은 꿈을 꾸는 것 같다고
느꼈다. 이대로 영원히. 이대로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았으면. 메이런은
이런 바램을 가졌다. 그리고 그 날 밤. 메이런은 지독한 두통과 악몽에
시달려야 했다.
잭은 하루가 다르게 회복이 되어가고 있었다. 출혈이 심하기는 했지
만 그 외에는 별다른 이상이 발견되지 않았다.
"괜찮아요, 잭?"
"보여요? 보이세요? 저 조이스에요."
"알아보겠어요?"
잭이 처음으로 의식이 회복되었을 때, 잭의 주변에는 메이런과 조이
스, 팀이 있었다. 잭은 눈을 뜨고 주위를 살폈다.
"마을이로군."
잭은 이렇게 입을 열었다. 의료진은 서로의 얼굴을 보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잭은 소생에 성공한 것이었다. 조이스는 잭의
손을 꼭 잡았다.
"...고맙다."
잭은 이렇게 말하고는 슬쩍 옆으로 돌아누웠다. 누구하고도 눈을 마
주치기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메이런은 그런 잭의 모습이 전혀 엉뚱하
게도 귀엽다고 느껴졌다. 잭은, 딱딱하기 때문에 딱딱한 말을 쓴다기
보다는, 달리 표현할 방법을 모르는 것 같았다.
잭이 조금씩 움직일 수 있을 무렵, 메이런 일행은 마을 주민으로 동
화되었다. 동화되는 과정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메이런과 팀은 농사를
지었고, 조이스는 아이들을 가르쳤다. 잭은 농사를 짓다가 크게 다친
환자로 위장했다. 그리고 통합정부 경찰과 연방경찰이 몇 번의 검문과
검색을 마을에 실시했지만 모두들 빠져나갈 수 있었다. 의심하는 경찰
은 아무도 없었다.
사실 모든 일이 순조롭게 흘러가는 것만 같았다. 조이스도, 메이런
도, 팀도, 잭도, 모두들 다시 도시로 돌아가 반란군의 임무에 충실해야
한다고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일단은 느긋하게 지금 상황을 즐기고 싶
은 마음뿐이었다.
다만 잭은 조금 달랐다. 건강은 회복되었지만, 탄두가 뚫고 지나간
다리는 좀처럼 아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초기에 감염된 부위 때문
에 조직이 고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일주일이 지난 후, 잭의 오른
쪽 다리 무릎 밑 부분은 절단하지 않을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잭. 절단해야 겠어. 미안하네."
의사가 잭에게 말했을 때 잭은 예의 그 무표정한 얼굴로 이렇게 대
꾸했다.
"그렇게 하죠."
의사는 나중에 메이런에게 남의 다리를 절단한다는 이야기라고 해도
그렇게 감정에 변화 없이 말하기는 어려울 거라고 했다.
"잭은 대단해. 이곳에 교사로 부임해 왔을 때만 해도 다들 잭을 불
신했었어. 하긴. 마을 주민들은 외지인에 대해서는 기본적으로 불신감
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말이야. 그런데 교사 일을 하면서 하나 둘 친
구를 만드는가 싶더니 만티드 레이스 공습 때는 선봉에 서서 맹활약을
하더란 말이야. 그리고는 장로자리까지..."
의사가 메이런에게 말했을 때, 메이런은 고개를 끄덕였다. 잭은 분명
신뢰감을 주는 휴먼 레이스였다. 하지만 메이런은 마음 한 구석 껄끄
러운 것이 남아 있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온전한 마음으로
잭에 대해 감탄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메이런은 목발을 쓰는 연습
을 하고 있는 잭의 뒷모습을 의사와 함께 바라보고 있었다.
잭은 이제 다리 하나가 없다. 그리고 다리 대신 목발을 짚는다. 인조
다리를 장착하려면 도시에 나가야 하지만 당분간 도시로 돌아가는 건
어려울 거였다.
어디선가 조이스가 나타나 잭의 팔짱을 낀다. 잭은 뒷모습만으로도
어색한 표정을 읽을 수 있을 만큼 몸이 굳는다.
"누구나 잭을 좋아하지. 저 분도 마찬가지인 모양이군."
의사가 팔짱을 끼면서 말했다. 메이런은 한숨을 내쉬었다.
"전상은 남겨 둔다죠."
메이런이 말했다. 잭이 다리를 절단한 날의 기억은 조이스와 잭의
뒷모습이다.
그리고 또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다. 마을의 농사는 일정대로 진행되
고 있었고, 팀과 메이런도 농사에 어느 정도 익숙해 질 즈음이 되었다.
수소융합기를 돌려 물을 만드는 일이나 유기비료를 만들어 땅을 옥토
로 바꾸는 일, 그리고 날씨에 민감해 하며 하늘을 바라보는 원시적인
일 따위에도 어느 정도 익숙해 질 즈음이 되었을 때였다.
점심 시간과 저녁 시간에 정치에 대한 토론을 벌이는 것은 꽤나 유
익한 일이었다. 무엇보다도, 도시를 자주 왕래하는 아루밀로부터 듣는
푸우순 시의 소식은 꽤나 흥미로운 정보를 제공해 주곤 했다.
"푸우순 시 시장이 마을 주민 강제 이주 정책 법안을 통과시키려고
하고 있어요."
저녁 식사를 마치고 아루밀이 말했다. 장로들과 메이런 일행은 아루
밀의 말을 흥미롭게 듣고 있었다.
"강제 이주? 무슨 말이지?"
장로 중 하나가 아루밀에게 물었다.
"농사를 포기하겠다는 것 같아요. 곡물은 로즈웰 레이스로부터 수입
해 오고, 마을 주민들은 노동력으로 쓰겠다는 거겠죠."
아루밀의 목소리는 흥분되어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또 다른 장로가 책상을 내리치면서 말했다.
"여긴 우리 터전이야! 모래 뿐이었던 이곳을 개간하고, 도시민들을
먹여 살려 온 게 누군데!"
"맞아. 땅을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지. 우리가 여길 떠나면 여기 땅
은 어떻게 하라고."
"비판보다는 원인을 생각해 보는 편이 건설적일 것 같습니다."
잭이 공손한 목소리로 흥분해 있는 장로들에게 말했다. 장로들은 고
개를 끄덕였다.
"잭. 자네는 시장이 왜 그렇게 한다고 생각하는데?"
장로 중 하나가 잭에게 물었다.
"망명객들이 빠져나간 도시는 이제 생산을 시작해야 합니다."
잭이 자신의 생각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락벳 전쟁 이후, 수많은 원자재들이 수입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원자재를 조립하고 가공하는 일은 상당한 인력을 필요로 합니다. 그리
고 곡물은 수입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시에서 원하는 건 마을에서
생산되는 곡물이 아니라 인력입니다."
잭이 명쾌하게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하지만 곡물이 언제까지 수입될지 어떻게 아는가? 만약 로즈웰 레
이스가 수출을 중단한다면? 그렇다면 어떻게 할 건데?"
장로 중 하나가 흥분으로 떨리는 목소리를 간신히 억누르면서 잭에
게 물었다.
"그만큼 로즈웰 레이스에 대한 행성 어스 통합 정부의 의존도가 높
아지는 것이겠지요. 아마 그것은 로즈웰 레이스가 원하는 방향일 겁니
다."
"빌어먹을! 말도 안돼!"
"정말 막막하구먼."
장로들이 떠들기 시작했지만, 이제 더 이상 논의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메이런은 어렴풋하게 나마 이제 곧 휴가가 끝날 것이라는 것
을 짐작할 수 있었다. 메이런은 잭을 바라보았다. 잭은 무표정한 얼굴
로 생각에 잠겨 있었다. 아마 잭 또한 메이런이 느끼는 것과 별반 다
르지 않은 감정을 느끼고 있는 모양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잭은 목발을 쓰는 데에 익숙해 졌다. 그리고 조
이스와 함께 교사가 되어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잭은 날이 갈수
록 활기가 넘쳐나고 있었다. 메이런은 그런 둘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책이 없어서 그래?"
팀이 메이런에게 물었다. 아마도 메이런이 풀이 죽어 있는 것을 책
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책이 없어서 그래."
메이런은 이렇게 대답했다. 그러지 않으면 더 캐어물을 게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팀은 뭐라고 말하려다가 그만 두었다. 아마도 메이런의 불
편한 마음을 눈치채고 있었으리라.
저녁이 되면 수업도 끝나고 농사일도 끝이 난다. 메이런은 홀로 망
루에 올라 노을을 바라보았다. 예전에 보았던 노을과 다를 바 없는 노
을. 노을은 늘 그대로이지만 보는 이의 마음을 반사한다. 슬픈 이에게
노을의 붉은 빛은 우울한 붉은 빛이고, 기쁜 이에게 노을의 붉은 빛은
환한 붉은 빛이다.
"메이런."
망루에 앉아 있는 데 귀에 익은 목소리가 메이런을 부른다. 메이런
은 깜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잭이었다.
"목발은...?"
잭은 한 쪽 다리로 망루의 난간을 잡고 메이런 쪽으로 다가왔다.
"밑에."
잭은 이렇게 대답하고는 아무 말 없이 메이런의 옆에 앉았다.
"노을이다."
잭이 말했다.
"나도 알아요."
메이런이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노을은 짧다."
그랬다. 노을은 정말 짧았다. 봄과 가을이 짧은 것처럼, 청소년기가
짧은 것처럼, 들숨과 날숨의 사이가 짧은 것처럼, 변화의 순간은 늘 짧
은 것이었다.
"직접 얘기하려고 왔다."
잭의 말에 메이런은 긴장하지 않는 것 처럼 보이기 위해서 노을에
시선을 집중했다.
"고민이라도 있는 건가?"
잭이 메이런에게 물었다. 메이런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차마 잭에게
당신이 고민거리라고는 말할 수 없었다.
"16자 유격전술을 기억하나?"
"예. 모택동이 썼다는 유격전술. 하지만 우리는 그런 전술을 따르지
않죠."
메이런이 말했다. 잭은 아무 반응도 없이 메이런의 말이 이어지기를
기다리는 모양이었다. 어쩌면 그저 노을을 바라보고만 있을 뿐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메이런은 말을 잇지 않을 수 없었다. 뭔가 뜨거운 것이
속에서 북받쳐 오르는 기분이었다.
"적이 진격해 왔다. 그래서 우리는 후퇴했다."
하지만 잭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리고 이제 적이 피로해 있다. 우리가 공격할 차례다."
메이런은 잭의 말뜻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했다. 해는 어느 새 지
평선 너머로 사라져 버렸고, 하늘의 끝자락부터 밤이 밀려 내려오고
있었다.
"푸우순 시에서 전투가 있었다. 이제 다시 활동을 시작할 때라는 신
호다."
메이런은 라디오도 없는 마을에서 어떻게 소식을 들을 수 있었는지
는 묻지 않았다. 아루밀이나 장로들은 어떻게든 소식을 얻어내고 있었
으리라.
"요인 암살. 정부 청사 테러. 납치. 이게 우리의 전투다."
잭의 말은 메이런의 긴 휴가가 끝났다는 걸 뜻했다. 메이런은 이제
모두 같이 떠나야 하는지를 물었다.
"내일, 나는 시로 떠난다. 그곳에서 임무를 받을 계획이다."
잭이 말했다.
"그럼 나머지는?"
"대기한다."
잭이 몸을 일으키면서 말했다.
제 목:[하이어드] Who wants to live forever? - 11
"우리는 그들을 교란시킨다. 그리고 피로한 곳을 찾아내 공격한다.
퇴각하면 추격할 것이다. 메이런. 네 일은 그런 일이 아니다. 곧 카니
데 레이스의 남작같은 친구들이 우리를 돕기 위해서 올 것이다. 그 때
까지 대기한다. 그게 나머지의 임무다."
잭이 말했다.
"조이스하고 팀도요?"
사실 메이런은 조이스가 함께 할지가 가장 궁금했다. 하지만 팀을
같이 묻지 않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같이 대기한다."
잭은 팔로 몸을 의지하여 사다리가 있는 곳까지 몸을 움직였다. 메
이런도 자리에서 일어나 잭을 도우려고 했다. 하지만 잭은 손을 내저
었다. 혼자 갈 수 있다는 뜻이었다.
"왜 가야 하죠?"
메이런은 묻고 있었다. 왜 이 평화를 끝내야 하는지. 왜 이 싸움을
끝낼 수 없는 것인지. 왜 이 시간을 계속 보낼 수는 없는 것인지.
"노을은 끝났다."
잭이 말했다. 그리고 잭은 팔의 힘으로만 사다리를 내려갔다. 메이런
은 사다리를 내려가고 있는 잭의 모습을 망루 위에서 한참동안 내려다
보고만 있었다. 잭의 모습은 평소보다 몇 배는 작아 보였다.
잭은 다음 날 떠났다. 잭답게 작별인사도 짧았다.
"곧 돌아온다. 그 때까지 대기한다."
잭이 이렇게 말했을 때, 메이런은 조이스의 표정을 살폈다. 조이스는
뭔가 각오를 새롭게 하는 듯한 표정이었고, 동시에 슬퍼 보이는 얼굴
표정이기도 했다. 메이런은 그 표정 뒤에 무엇이 숨겨져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알고 싶지 않았다. 알고 싶지 않았을 뿐
이었다.
"민심을 잃으면 전부를 잃는 다는 걸 명심하도록."
이렇게 마지막 말을 남기고서 잭은 떠났다. 하지만 그럼으로 해서
평온한 날들이 바로 끝나지는 않았다. 잭이 사라졌을 뿐, 나머지 일과
는 매우 정상적으로 진행되었던 것이었다. 다만 조이스는 기운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그것이 정말로 기운이 없는 것인지 아니면 메이런이
스스로 그렇게 판단하고 있을 뿐인지는 확인하기 어려웠다.
잭이 떠난 후 첫소식을 가지고 온 것은 아루밀이었다. 호버카로 도
시까지 다녀온 아루밀은 몹시도 흥분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아루밀. 좋은 소식이라도 있어?"
팀이 아루밀에게 물었다. 아루밀은 고개를 끄덕였다.
"시장이, 암살 됐어!"
아루밀은 흥분된 소리로 말했다.
"일단 마을 주민 강제 이주계획은 무기한 연기 됐어. 무슨 말인지
알아? 우리가 다시 활동을 시작했다는 뜻이라고!"
아루밀은 꽤나 즐거워 보였다. 하지만 조이스는 걱정이 되는 모양이
었고 팀도 그렇게 보였다. 그리고 메이런은 이제는 정말 더 이상 쉬고
있을 수만은 없을 거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날 밤, 회의가 있었다. 장로들과 메이런 일행, 아루밀이 회의에 참
석했다.
"이제 우리의 해방전사들이 활동을 다시 시작했소."
장로가 입을 열었다.
"시장이 죽었으니 마을 주민 강제 이주 계획은 늦추어질 것이오. 하
지만 그건 시간을 늦춘 건 이상의 의미는 없소. 법안은 곧 통과 될 것
이고, 저들의 반격 또한 당연히 시작될 것이오. 그렇다면 우리의 일은
정해져 있소. 적이 진격해오면 우리는 후퇴할 것이오. 적이 주둔해 있
으면 우리는 그들을 교란시킬 것이오. 적이 피로해있으면 우리는 공격
할 것이며, 적이 퇴각하면 우리는 추적할 것이오."
장로의 목소리는 16자 유격전술을 담고 있었다. 하지만 메이런의 귀
에 그 목소리는 공허하게 울리기만 할뿐이었다.
"일단 잭과의 연락이 시급하오. 우리의 정책을 알아야 도울 수 있으
니까. 잭과 연락 할 수 있는 게 누구요?"
장로가 물었다.
"접니다."
조이스는 밝은 얼굴로 말했다. 조이스는 어쩐지 활력이 넘치는 듯
보였다.
"저도 가죠."
팀이 말했다. 하지만 조이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팀은 남아. 메이런을 지켜야지."
"그럼 내가 갈게. 조이스가 남아 있어."
팀이 말했지만 조이스는 여전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내가 가야 해. 포스트에는 내가 가 있어야 한다고. 잊었어?
내가 핵이야."
조이스는 단호하게 말했다.
팀은 메이런을 바라보았다. 팀의 얼굴에는 근심이 가득했다.
"3일이야. 늦으면 7일. 그 사이에 꼭 돌아 올 게."
조이스가 연이어서 말했다. 팀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이, 메이런은 여기 지하실에 숨어 있어요. 장소는 내가 봐 뒀
어. 아마 녀석들이 마을을 뒤지겠지. 하지만 완벽하게 숨기에는 딱 좋
은 곳이에요."
조이스는 미리 사태를 짐작하고 있었는지 말하는 데에 막힘이 없었
다. 메이런은 조이스를 바라보았다. 어쩌면 노려보고 있었는지도 모른
다. 조이스에 대한 분노. 자신에 대한 실망. 이런 감정들이 어지럽게
메이런의 머릿속을 떠돌고 있었다.
"며칠이야. 별 문제 없을 거야."
조이스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지만, 메이런은 그 미소를 온전하게 받
아들이기 어려웠다.
"돌아오면 한 잔 하지. 술은 내가 준비 해 놓을 게."
팀이 말했다.
"일루젼? 지금 일루젼을 구할 수 있을 것 같아, 팀?"
"피아노 바의 바텐더를 우습게 보지 말라고."
팀이 농담투로 말했다. 그리고 그 때까지만 해도, 메이런은 팀의 말
을 믿지 않았다.
그리고 며칠이 흘렀다. 메이런은 조이스가 말한 지하실에서 숨어 지
냈고, 팀은 그 사이 몇 번의 수색이 있었다고 메이런에게 귀뜸 해 주
었다. 하지만 메이런은 그런 것을 느낄 여력이 없었다. 어두운 지하에
갇혀 지내다보면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알 수가 없다. 잠을 자지
않으면 특별히 할 일이 없었고, 그나마 시간 맞춰 팀이 식사를 가지고
오는 것으로 대충 시간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었던 것이다.
메이런은 그렇게 며칠을 지하실에서 보내야 했다.
"마시지 않을 거야?"
팀이 일루젼 잔을 흔들며 메이런에게 물었다. 메이런은 잠시 팀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의미를 알지 못했다. 팀이 메이런의 잔에 자신
의 잔을 부딪쳤을 때가 되어서야 메이런은 팀이 건배를 제의했다는 걸
기억해 낼 수 있었다.
"정신 차려. 이제 다시 시작이라고. 한 참 동안 한가했지만, 이제 무
슨 일이 생길지 몰라. 우리는 공격을 시작했고, 녀석들도 반격을 시작
했어."
"무슨 말인지 알아, 팀."
메이런은 이렇게 말하면서 잔을 기울였다. 달콤한 일루젼은 순식간
에 메이런의 몸에 흡수되었다. 어지러운 듯 뜨겁게 온 몸으로 퍼지는
일루젼의 기운을 느끼며, 메이런은 고개를 숙였다. 이렇게 하면 조금
더 어지럼증을 즐길 수 있었다.
"무슨 소리 들리지 않아?"
팀이 말하자 그제서야 메이런은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 보니 아주
작은 소리였지만 분명 연속적으로 들려오는 소음이 있었다.
"총성같은데?"
메이런은 자신이 카니데 레이스의 귀를 가지고 있었다면 지금의 소
음이 총성인지 아닌지를 가려낼 수 있는 건 물론이고 몇 명이 교전을
벌이고 있는지 까지 알아 낼 수 있었을 텐데, 하며 아쉬워했다.
"아니면 굴착기 소리일지도 모르지. 어찌되었건, 조심하자고."
팀이 말했다.
일루젼 병에서 몇 잔을 더 마셨을 때, 팀은 일루젼 병의 뚜껑을 닫
았다.
"조이스 몫은 남겨 놔야지."
하지만 말하는 팀의 얼굴에도 아쉬움이 드러나고 있었다. 사실 일루
젼 한 병은 셋이 나누어 마시기에는 턱없이 적은 양이었다.
"잠깐."
메이런이 말했다. 발걸음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발소리는 매우 불규
칙했고, 때문에 몇 명이 내는 발소리인지 알기가 힘이 들었다. 팀은 품
에서 45구경 권총을 뽑아 들었다. 마을로 오던 날, 자신들을 죽이려는
하이어드로 부터 빼앗은 45구경이었다. 메이런도 침대 위에 던져 두었
던 K-5를 집어 들었다. 팀은 문가에 몸을 기대었고, 메이런은 벽에 세
워 둔 조명 기구의 옆 쪽으로 몸을 기댔다.
이윽고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메이런, 나야."
조이스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메이런, 나야'라고 말하는 것은 신호였
다. 메이런과 팀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곤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음 순간, 팀은 힘껏 문을 당겨서 열었고, 메이런은 조명기구를 켰다.
거의 한 순간에 이루어진 동작이었다.
문이 열리자 조이스의 모습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뒤에
낯선 사내가 무장을 하고서 총구를 들이밀고 있었다. 하지만 조명등이
내 쏘는 강한 조명에 눈이 부셔 사내는 1초 동안 아무 것도 하지 못하
였다. 그리고 그 1초가 승부를 갈랐다. 그 1초 동안 팀은 조이스의 팔
을 잡아 끌어당겨 낯선 사내의 엄폐물을 없애 버렸고, 메이런은 사내
를 향해 두 발을 발사하였다. 사내는 9밀리 탄의 충격을 이기지 못하
고 들고 있던 총을 떨어뜨리면서 뒤로 나자빠졌다.
메이런은 재빨리 사내의 무기를 발로 걷어 찬 다음, 사내의 미간에
총구를 들이밀었다.
"하이어드인가?"
메이런이 물었다. 사내는 휴먼 레이스였다. 하지만 질문은 별 의미가
없었다. 메이런이 가슴을 향해 두 발 발사하는 것보다 약간 빠르게 사
내는 몸을 반사적으로 숙였고, 메이런의 총탄은 사내의 목을 관통했던
거였다. 사내의 목과 머리는 거의 분리되어 있었다. 엄청난 양의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고, 아직 폐에 남아 있는 공기 때문인지 피에서는 거
품이 일고 있었다. 메이런은 소름이 끼쳤다. 피가 흐르고 있는 이 휴먼
레이스의 목은, 그 짧은 시간 사이에 총알을 피하기 위해서 몸을 반사
적으로 움직였다는 증거였던 것이다. 만약 메이런이 가슴 한 복판을
노렸다면 사내는 총알을 피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메이런은
왼쪽 가슴을 노렸고, 운 좋게도 목에 명중되었던 것이다. 이 정도의 반
사신경을 가진 적이라면 결코 녹록한 상대가 아니었으리라.
"저런 꼴을 해가지고서는 대답하지 못하겠군요, 메이런."
조이스가 옷매무새를 바로하면서 말했다.
"그래요."
메이런은 숨을 고르면서 말했다. 흥분이 가시지 않은 탓이다.
"나한테 누구인지는 밝혔어요. 오진 시의 마스빈이라고 했어요. 연방
수사국이 연방 수사관 자격으로 고용했다던데. 실력은 있었지만, 떠버
리였어."
조이스는 죽어 있는 사내의 시체에 침이라도 뱉을 기세로 이렇게 말
했다. 메이런은 그런 조이스를 물끄러미 바라만 볼뿐이었다.
"어쩌다가 이런 꼬리를 달고 온 거야, 조이스?"
팀이 물었다. 조이스는 조금 부끄러운지 팀의 시선을 피하며 입을
열었다.
"포스트에서 잭은 못 만났어. 대신 이 친구를 만났지. 벌써 녀석들의
정보망이 좁혀 들어오고 있는 모양이었어. 이 녀석이 하이어드였으니
까 망정이지 만약에 경찰이었다면 우리는 모두 죽었을 거야."
조이스가 말했다.
"하긴. 하이어드는 주로 혼자 일하니까."
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잭은요?"
메이런이 조이스에게 물었다. 조이스는 대답 대신 아직도 빛을 발하
고 있는 조명을 껐다.
"그래, 그럼 잭은 어떻게 되는 거야?"
"웨이팅하우스 시로 간 것 같아. 포스트에 암호로 된 메시지가 남아
있었어."
"웨이팅하우스 시면... 그 라디오로 유명한 도시? 거기 시장 포레스
트를 암살이라도 하려는 걸까?"
팀이 물었다.
"몰라. 일단 가 봐야지. 웨이팅 하우스 시 마을에도 연락책이 있으니
까. 잭은 우리한테 일단 대기하라고 했지만, 지금은 상황이 바뀌었어.
이곳 마을도 언제 단속이 닥칠지 몰라. 이미 몇몇 마을에서 수색이 있
었다는 정보도 있어."
조이스의 말에 메이런은 언젠가 메이런이 잭에게 했던 말을 기억할
수 있었다. 마을이 문제가 된다면 모두 죽여버리면 되지 않겠느냐는...
메이런은 애써 자신이 했던 말을 부정하려 해 보았다. 하지만 지금 메
이런의 상상이 실현되고 있다는 건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러면 어떻게 할거야?"
"녀석들이 반격해 오고 있어."
조이스가 말했다.
"적이 진격해오면 우리는 후퇴한다."
메이런이 말하자 조이스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전까지 생
사의 기로에 놓여있던 인질이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여
유 있는 태도였다.
"아루밀이 호버카를 한 대 내어주기로 했어.."
"호버카로 사막을 건너서 웨이팅하우스 시까지?"
팀이 물었다.
"그럼 셔틀로 갈까?"
"호버카로 푸우순 시까지 가는 건, 바다를 건너가는 거나 다를 바가
없어."
"나도 알아."
조이스의 목소리는 침착했다.
"하지만 바다를 건너는 건 누구도 단속하지 못해. 항구가 있다면 모
를까, 도시는 어디든 항구가 될 수 있다고. 마을이 있고, 오아시스가
있으니까."
"가서 뭘 어떻게 할 건데?"
팀은 이렇게 묻기는 했지만 스스로도 쓸데 없는 부언을 하고 있구
나, 싶은 마음마저 들게하는 질문이었다.
"잭을 찾아가야 해."
조이스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메이런도 그런 조이스를 이해하지 않
을 수 없었다. 이건 사적인 게 아니었다. 잠시 쉬고 있었을 뿐, 메이런
도 조이스도 팀도 모두 해방전사였다. 그리고 이제 본연의 임무에 충
실하려고 하는 참인 것이었다.
제 목:[하이어드] Who wants to live forever? -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