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이어드-45화 (45/52)

4.암살

리퍼는 항상 혼자 행동했다. 언젠가 포레스트 시장이 부하들을 놓아

두고 왜 혼자 행동하냐고 물었을 때, 리퍼는 '하이어드는 원래 혼자 행

동한다'는 말로 대신했다.

혼자 일을 하면 일단 계약이 간단해 진다. 그리고 보안에 신경을 덜

써도 되며 동료를 의심하는 일도 없어진다. 간혹 형제나 자매가 하이

어드 일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지만, 그들 역시 계약문제와 의심에 휩

싸이지 않는 건 아니었다.

시장이 정한 목표물은 카니데 레이스의 남작이었고, 남작에 대한 정

보량은 그리 많지 않았다. 외모를 알 수 있는 홀로그램 한 장과 간단

한 인적사항이 시장으로부터 건네 받을 수 있는 전부였다. 하지만 리

퍼에게 그것이면 충분했다. 카니데 레이스 남작이 웨이팅하우스 시에

속해 있는 마을에 들어 온지 얼마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덧붙여져 있

기 때문이었다. 목표의 위치만 안다면 실행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

었다. 남작을 왜 죽여야 하는지, 그것이 시장에게 어떤 이득이 되는지,

남작의 죽음이 어떤 의미를 가지게 되는지 따위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

다.

리퍼는 먼저 남작의 정확한 위치를 찾았다. 역할은 리퍼가 직접 고

른 기동대의 발빠르고 영리한 대원들이 맡았다. 결과는 의외로 금새

나왔고, 다음은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남작이 있는 곳은 변두리 마을의 작은 여인숙이었다. 리퍼는 부근에

있는 작은 식당을 골랐다. 그리고 그 식당 2층으로 숨어 들어간 뒤, 그

곳에서 기다렸다. 식당의 이름은 '줌페이의 아줌마 식당'이었다. 이곳을

고른 이유는 숨어 들어가기 좋기 때문이었다. 식당이 허름해서 별다른

보안장치 따위가 없었고, 손님들이 많이 드나들기 때문에 몰래 2층으

로 가는 일은 아주 간단했다. 그리고 누구도 이곳을 눈여겨보지 않는

다는 점도 한몫했다. 정체를 숨길 수 있다면 일의 뒷처리는 더욱 깔끔

해 질 거였다.

리퍼는 기다렸다.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그러면서 남작의 행동을 예

의 주시했다. 언제 밖으로 나가는가, 어떻게 가는가, 누구와 함께 다니

는가, 언제 틈이 나는가. 이런 것들을 파악하는 것이 리퍼가 준비해야

할 사항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결행의 날이 다가왔다. 리퍼는 연락책이 매일 한 번

씩 여인숙에 드나든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경찰의 최신 감청장비

를 이용해 암호도 알아내었다. 계획이 서면 가능한 빠른 시일 내에 실

행을 해야 했다. 작전의 성공확률을 높이기 위해서, 보안을 위해서, 무

엇보다도 감정이 생기지 않기 위해서 그랬다. 잠시라도 머뭇거리면 머

릿속에서는 전혀 의도하지 않은 생각들이 생겨나곤 한다. 역사 속의

암살자들을 돌이켜보면 그런 예는 숱하게 찾아 볼 수 있었다. 목표에

대한 감정이 생겨나는 순간, 목표도 부모가 있고, 자식이 있고, 친구가

있고, 사랑하는 이가 있다는 걸 아는 순간, 암살자의 손은 흔들리기 마

련이다. 리퍼는 그런 사사로운 감정 때문에 1초를 허비하고 싶지 않았

다. 승패는 1초에 갈린 다는 걸 리퍼는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연락책은 늘 오던 길로 오지 않았다. 매번 루트를 바꾸었던 것이다.

하지만 리퍼는 목적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굳이 미행을 할 필요

는 없었다. 연락책이 근처에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여인숙에 같이

들어가기만 하면 되었던 것이다.

연락책은 마른 사내였다. 연락책은 리퍼를 수상한 눈길로 바라본 다

음 2층으로 올랐다. 리퍼는 연락책의 옆을 지나치는 척 하다가 계단의

중간에서 연락책의 팔을 잡아 비틀며 다른 한 손으로 입을 막았다. 억

센 힘때문에 연락책은 제대로 저항 한 번 해 보지 못했다.

"2층에 있지?"

리퍼가 물었다. 연락책은 버둥거렸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몇 명이지?"

연락책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자 리퍼의 팔이 비틀고 있는 팔을

더욱 강하게 비틀었다.

"괜찮아. 조금만 더 힘이 들어가면 부러질 테니까. 그러면 다른 쪽

팔을 꺾어 주지. 그 편이 나도 더 쉬워."

리퍼가 힘을 주며 말했다. 연락책의 입술이 움직이는 것이 리퍼의

손에 느껴졌다. 리퍼는 손을 풀었다.

"비명을 지르고 싶으면 질러. 이런 신원확인도 하지 않는 변두리 여

인숙에서 비명을 지르는 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면 말이야."

"셋..."

연락책이 간신히 말을 이었다. 리퍼는 비틀고 있던 팔을 풀어주었다.

대신 니들건을 보여 주었다. 그것도 아주 잘 보이도록 연락책의 이마

에 대면서.

"니들건이다. 잘 알고 있지? 내 말을 잘 들으면 살 수 있어. 어차피

내 목표는 네가 아니니까."

공포에 질린 얼굴을 하고서 연락책이 말했다.

다음 일은 간단했다. 연락책의 팔을 비튼 채 2층의 문 앞까지만 가

면 되는 일이었다.

"나야, 아쳐. 나야."

노크를 한 뒤 연락책이 말했다. 리퍼는 암호를 잘 알고 있었다. 때문

에 연락책이 말을 마치자마자 문을 향해서 방아쇠를 세 번 당겼다. 문

안쪽에서 니들건의 폭발음이 연속해서 들려왔다. 다음은 문을 여는 차

례였다. 리퍼는 문을 열자마자 붙잡고 있던 연락책을 안으로 던져 넣

었고, 연락책은 힘없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예상했던 반격은 없었다. 리퍼는 확인을 위해서 안으로 들어간 뒤

재빨리 문을 닫았다.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남작이었다. 남작은 다리에 니들탄을 맞은

상태였다. 다리는 잘려 나가 있었고, 밑으로 피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

다. 벌어진 입으로 혀가 길게 나와 있었고 침이 잔뜩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으로 확인 한 것은 아쳐라고 불린 휴먼 레이스의 시체였

다. 아쳐는 문에 몸을 기대고 있다가 니들탄에 맞은 모양이었다. 가슴

한 복판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었고, 그곳을 통해서 아쳐의 생명은

모조리 빠져나간 상태였다.

다음으로 확인 한 것은 낯선 휴먼 레이스였다. 아마도 아쳐의 뒤편

에 서 있다가 리퍼의 니들탄에 맞은 것 같았다. 그 휴먼 레이스는 옆

구리 부분이 터져 나가 있었다. 두 손으로 그 부위를 감싸고 필사적으

로 저항하려고 하고 있었지만 역부족이었다. 일단 니들탄에 맞은 충격

도 충격이었지만 피를 많이 흘려서 기력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던 것

이다.

방에 있었던 셋의 상태를 확인한 리퍼는 던져 넣었던 연락책의 등에

니들건을 발사했다. 퍽, 하는 둔탁한 폭음과 함께 연락책의 등에서 피

가 마치 붉은 폭죽처럼 뿜어져 올라왔다.

"너, 너는..."

옆구리를 두 손으로 감싸고 있던 휴먼 레이스는 여전히 필사적으로

뭔가 말을 하며 저항을 하려 하고 있었다. 리퍼는 그 휴먼 레이스의

머리를 니들건으로 겨냥했다. 오른 쪽 다리가 의족이라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다리가 의족이라는 것과 리퍼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

었다.

"개인적인 건 아니야."

리퍼는 이렇게 말하면서 이제 곧 죽게 될 운명의 희생자를 겨냥하였

다.

니들탄은 약실에 장전되어 있었다.

이제 방아쇠를 당기면 탄은 총신을 따라 초속 650미터의 속도로 목

표물을 향해 날아갈 것이다. 니들탄의 탄두가 그리는 탄도는 언제나

일정하다. 따라서 탄도를 조정하여 목표물에 명중되도록 하는 일은 오

직 사수에게 달려있을 뿐이었다.

리퍼는 이것이 자신이 맡고 있는 소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탄

두가 정확하게 목표물에 닿게 만드는 거였다. 그것은 사내가 오랫동안

해 온 일이었으며 실패란 있어서도 안되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니들탄은 매우 날카로운 바늘의 모양을 하고 있다. 그것은 상대의

장갑이나 외골격을 뚫고 지나간다. 니들탄의 끝에는 생명에 반응하는

뇌관이 장착되어 있고, 상대의 체내에 그 뇌관이 닿는 순간 폭발한다.

뇌관은 옆구리를 감싸고 있던 휴먼 레이스의 두개골을 뚫고 들어갔

다. 그리고 니들탄의 끝이 뇌수에 닿는 순간, 니들탄은 폭발을 일으켰

다. 폭발의 압력은 휴먼 레이스의 머리통을 통째로 날려 버렸고, 머리

가 있던 자리에는 텅 빈 공간만이 남게 되었다.

한 때는 희생자의 눈을 보지 않으려고 했던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닭의 눈을 본다고 해서 닭고기를 먹을 수 없는 휴먼 레이스가 그리 흔

치 않은 것처럼, 리퍼도 희생자의 눈을 바라보며 일을 하는 데에 곧

익숙해 졌다. 마지막으로 남작을 쏘기 전, 리퍼는 머리통이 날아가버린

시신을 바라보았다. 시신의 한 쪽다리가 있어야 할 자리에는 텅 빈 옷

자락만이 남아 있었다. 리퍼는 마지막으로 보았던 대상의 눈을 기억했

다. 두 개의 눈동자는 의안인 듯, 서로 다른 빛을 하고 있었다. 아마도

왼쪽 눈은 검은 색이고 오른쪽 눈은 푸른색이었던 것 같았지만 분명하

진 않았다.

"군인이었던가..."

리퍼는 이렇게 중얼거리며 남작에게 나가갔다. 남작은 가쁜 숨을 몰

아쉬며 죽음의 그림자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

러나 소용없었다. 리퍼의 니들탄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남작의 몸에

박혀 들어갔고, 남작은 이제 더 이상 의미 없는 살덩이가 되어 버렸다.

리퍼는 여유 있는 걸음으로 여관을 빠져나갔다. 아무도 리퍼를 눈여겨

보지 않았다. 만약 카니데 레이스가 있었다면, 리퍼의 몸에서 풍기고

있는 피냄새를 맡을 수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카니데 레이스는 없

었고, 그 어떤 휴먼 레이스도 리퍼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리퍼는 시장실로 가지 않았다. 포레스트 회장은 리퍼를 시장 관사

지하에 위치하고 있는 실험실로 불렀다. 이곳은 시장의 개인적인 병실

인 동시에 시장의 질병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는 곳이기도 했다.

연구실로 향하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옅은 소독약 냄새가 풍긴

다. 리퍼는 이 냄새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휴먼 레이스는

소독약 냄새에 대한 편견이 없을 것이다. 아무리 예민한 휴먼 레이스

라고 해도 소독약 냄새 때문에 병원에 가는 걸 꺼리지는 않는 법이다.

하지만 병실에 들어서기 전, 소독약을 전신에 뒤집어 써야 한다면 사

정은 다르다. 시장의 개인 병실에 들어서기 위해서는 전신 소독을 해

야만 했고, 리퍼역시 예외가 될 수는 없었다.

리퍼가 전신 소독을 마치고 위생복으로 갈아입자, 안내원이 리퍼를

시장의 개인 병실로 인도했다. 시장을 위해서 지하 병동은 모두 어두

운 조명을 쓰고 있었다. 가끔 보이는 붉은 조명등도, 시장이 지나갈 때

면 꺼지곤 하였다. 리퍼는 안내원을 따라 걸으며 어둠 속에 도사리고

있는 악마를 만나러 가는 기분에 빠져들었다.

벽면에 투명한 원통형의 실험관 안에 갇혀 있는 클론의 셈플들이 눈

에 들어왔다. 시장의 모습을 본뜬 것도 있었고, 난생 처음 보는 형태의

클론들도 있었다. 그들이 최후의 순간을 어떻게 맞이하였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표정은 평온해 보였다. 모두 눈을 감고 있는 클론들은 붉은

조명등 아래, 마치 꿈틀거리는 듯 느껴졌다. 리퍼는 그들 중 하나가 혹

시라도 눈을 뜨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클론의 셈플들은 하나같이

보존 상태가 양호해서 당장 움직인다고 해도 별로 이상할 것이 없을

것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하지만 리퍼는 오랜 경험으로, 죽은 것이 다

시 살아오는 일 따위는 없다고 믿고 있었다.

마침내 시장의 개인 병실의 문 앞에 다다랐다. 리퍼는 안내원의 지

시에 따라 문 안으로 들어섰다. 안내원은 조용히 뒤돌아섰다.

시장은 어둠 속에 숨을 죽이고서 누워 있었다. 어둠 속에서 리퍼는

어렴풋하게나마 시장이 침대에 몸을 기대고 누워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포레스트 시장의 침대 옆에 휠체어가 하나 놓여있

다는 사실도 알 수 있었다. 그건 리퍼의 신경을 자극했다. 그건 리퍼가

휠체어에 대한 편견이 있어서가 아니라, 휠체어 위에 누군가 앉아 있

기 때문이었다. 어둠때문에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휴먼

레이스라는 것만큼은 윤곽으로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리퍼는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아, 걱정 말게, 리퍼. 이 분은 내 동료야."

포레스트 회장이 갈라지는 음성으로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리퍼는

잠자코 그 목소리를 듣고만 있었다.

"절대 보안은 유지될 걸세. 이 분이 입을 여는 일은 없을 테니까 말

이지."

포레스트 회장은 이렇게 말하면서 웃음소리를 내었다. 하지만 기능

을 잃어 가는 성대에서 나오는 웃음소리는 마른 금속을 비비는 듯 한

소리일 뿐이었다.

"끝났습니다."

리퍼는 간략하게 보고 했다.

"그래야지, 암. 그래야지."

포레스트 회장은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듯 했다.

"누구도 죽음으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어. 그렇지 않은가, 리퍼."

포레스트 회장이 물었다. 하지만 대답을 원하는 물음은 아니었다. 리

퍼는 잠자코 시장의 말을 듣기로 마음먹었다.

"삶은 덧없는 것. 삶은 짧은 것. 삶은 의미 없는 것. 고전을 보면 휴

먼 레이스들 중에는 이런 생각을 가지고 살았던 휴먼 레이스가 있었다

는 걸 알 수 있게 되지. 그들은 삶의 덧없음을 강조하면서 아이러니하

게도 삶의 소중함을 강조했다네. 이를테면, 이 짧은 살아있는 날 동안

타인을 사랑하고, 타인을 도우며, 타인을 아껴야 하지 않겠는가, 이런

말이었지."

꽤 긴말이었다. 시장은 숨이 차는지 한 참 동안 심호흡을 하고 나서

야 말을 이을 수 있었다.

"그래서 모두 죽었던 거야. 나약했기 때문에. 죽음과 싸울 생각을 해

보지 않았기 때문에. 휴먼 레이스의 문명이 한 번 무너졌던 이유가 바

로 그것 아니었겠나, 리퍼? 아무도 죽음과 싸울 생각을 하지 않았어.

산을 무너뜨려 집을 짓고, 바다를 말려 농지를 개척하고, 나무를 뽑아

책을 만들고, 짐승을 잡아 길들였던 휴먼 레이스가, 죽음 앞에 그렇게

무력했다는 걸, 나는 믿을 수가 없네."

포레스트 회장의 목소리는 조금씩 떨림이 줄어 들고있었다. 아마도

힘이 솟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리퍼는 그 이유가 무엇이건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휴먼 레이스의 문명이 멸망한 이유는, 산을 무너뜨리고 바다를 말

렸기 때문입니다, 회장 님."

휠체어 위에 앉아 있던 휴먼 레이스가 말했다.

"그래. 자네라면 그렇게 말하겠지, 로웰 박사. 나에게 죽음을 강요하

고 싶겠지. 그렇지?"

회장이 낮은 쇳소리같은 음성으로 휠체어 위의 사내를 로웰 박사라

고 불렀다. 그 목소리는 로웰 박사를 조롱하는 듯 했다. 리퍼는 그제야

휠체어 위의 사내가 끔찍한 몰골을 하고 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죽음을 강요받고 싶을 뿐입니다, 포레스트 회장님."

로웰 박사라고 불린 휴먼 레이스는 사지가 없었다. 마치 토르소 인

형처럼 보이는 로웰 박사의 몸통은 휠체어 위에 가죽끈으로 고정되어

있을 뿐이었다. 어둠 때문에 제대로 확인 할 수는 없었지만, 남아있는

머리와 몸통도 그리 온전한 상태는 아닐 것 같았다.

"걱정 말게, 로웰 박사. 자네는 틀림없이 죽었으니까. 거짓말 같나?

리퍼. 군부대에 가서 협조를 좀 요청하게. 로웰 중령이 락벳 전선에서

어떻게 사망했는지 기록을 좀 얻어다 줘. 그 기록을 봐야 자신이 죽었

다는 걸 믿을 모양이야, 저 친구는."

포레스트 회장은 아주 재미있는 농담을 했다고 생각하는 모양인지

지금까지 들었던 웃음소리 중에서 가장 커다란 웃음을 터트렸다.

"계약하실 겁니까?"

리퍼가 무뚝뚝하게 묻자 포레스트 회장은 웃음을 그쳤다.

"농담이라면 재미없는 농담이군, 리퍼."

포레스트 회장이 말했다.

한참 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리퍼는 빨리 대화를 끝마치고 싶어했다.

포레스트 시장도 그런 리퍼의 마음을 느끼는 것이다. 하지만 시장은

뭔가 재미있는 대화를 이끌어가고 싶어하고 있었다. 시장은 뭔가를 기

다리고 있는 듯 보였다.

"나는 봤어. 포레스트 회장."

로웰 박사가 말했다. 로웰 박사의 목소리는 지금까지의 목소리와는

사뭇 달랐다. 계시를 받은 광인처럼, 영감을 얻은 시인처럼, 로웰 박사

의 목소리는 어딘가에 몰입되어 있는 듯 들렸다.

"그 폭격 속에서 나는 봤어. 죽음 뒤의 세계를. 그건, 암흑이었어. 그

암흑은 사방에서 밀려 들어 오지. 아무도 거기에서 벗어나지 못해. 암

흑은 내 두 팔과 두 다리를 앗아갔어. 그리고 남아있는 이 몸통과 머

리통도 가져가 버리겠지. 포레스트 회장. 당신도 결코 거기에서 자유로

울 수 없어."

로웰의 말이 끝나자 포레스트 회장은 다시금 큰 웃음을 터트렸다.

"잘했어, 내 귀여운 장난감."

포레스트 회장이 말했다. 리퍼는 포레스트 회장의 목소리에서 섬뜩

함을 느꼈다. 포레스트 회장의 목소리는 마치 어린아이의 그것처럼 천

진난만했던 것이다.

"당신도 결코 자유로울 수 없어!"

로웰의 모습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틀림없이 침을 흘리고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당신은 그 어둠에서 벗어났어요, 로웰 박사."

리퍼는 어린아이가 얼마나 끔찍한 일을 할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었

다. 어린아이는 천진한 웃음을 지으며 잠자리의 날개를 뜯어낼 수 있

다. 어린아이는 천진한 미소를 지으며 휴먼 레이스의 사지를 뜯어낼

수 있다. 어린아이는 천진하게 웃으며 휴먼 레이스를 장난감이라고 부

를 수 있다...

로웰 박사는 대답이 없었다. 아마도 잠시 정신을 잃은 게 아닐까 싶

었다.

"장난감이지만, 정말 장난감은 아니라네, 리퍼."

포레스트 회장이 리퍼에게 말했다.

"제 눈에는 휴먼 레이스로 보입니다."

리퍼가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억양 없는 목소리로 답했을 때, 포레

스트 회장은 아마도 미소를 지은 모양이었다.

"그리고, 날 영원히 살 게 해 줄 거야. 영원히."

리퍼는 광인과 대화를 나누는 게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만약

계약만 아니었다면 이 자리를 지키고 있을 이유도 없었다.

"다시 부탁이 있어, 리퍼."

포레스트 회장은 침대에서 서류봉투를 집어들어 리퍼에게 내밀었다.

리퍼는 그것을 받아들었다.

"해결하겠습니다."

"부탁해. 또 다른 장난감이 필요하거든. 장난감은 소중히 다룰 수록

가치가 높아지는 법이지... 안 그런가, 리퍼?"

리퍼는 대답하지 않음으로 해서 시장이 뭘 원하는지 따위에는 관심

이 없다는 뜻을 전했다. 이제 포레스트 회장은 모든 게 다 시들해진

모양이었다. 포레스트 회장은 말도 없이 손짓으로 리퍼에게 나가보라

는 신호를 보냈다.

"피할 수 없어, 그 암흑을..."

로웰이 이렇게 중얼거리는 듯 했지만, 리퍼가 병실을 나서며 마지막

으로 들은 목소리는 포레스트 회장의 목소리였다.

"닥쳐!"

리퍼는 문을 닫았다. 어두운 복도였고, 소독약 냄새도 고약했지만,

리퍼는 어딘가로 부터 해방되었다는 느낌을 감출 수가 없었다. 꽤 홀

가분한 기분이었다. 새로운 일이 손에 들려있다고 해도, 그 느낌이 사

라지는 건 아니었다.

제 목:[하이어드] Who wants to live forever? -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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