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특임조장
아이라는 공보관 업무의 인수인계를 위해 인사과장실로 출근했다.
새로운 공보관에게 자신의 임무를 넘겨주기 위한 것이다.
후임 공보관은 먼저 인사과장실에 도착해 있었다. 한 눈으로 언뜻
보기에도 아이라 보다 키도 훌쩍 크고 피부도 아주 고운 미인이었다.
공보관은 이제 계속해서 여자가 맡게될 모양인가보다 싶었다.
"인사들 나누게. 이쪽은 아이라 경정. 총경 진급 예정자지. 그리고
이쪽은 알핀 경감. 경정 진급 예정자고."
아이라가 들어서자 밀라노 과장은 선임 공보관과 후임 공보관을 이
렇게 서로에게 소개시켜 주었다. 알핀 경감이 아이라에게 먼저 손을
내밀었다. 자신감이 넘쳐 보이는 태도였다. 아이라도 지지 않고 알핀
경감의 손을 맞잡았다.
"락벳에도 참전하셨던 아이라 경정 님이시죠? 소문은 많이 들었어
요. 초고속 승진을 달리신다더니, 정말이시네요."
그 나이에 벌써 총경 계급장을 달다니, 하고 비꼬는 듯한 말투였다.
초면에 다분히 도발적으로 대하는 걸 보니 만만한 상대는 아닐 성싶었
다.
"벌써 경정이시라니, 저보다 훨씬 빠른 진급을 하실 것 같은데요."
아이라는 이렇게 웃으면서 대응했다. 새로운 보직을 시작하는 아침
부터 인상을 쓰고 싶은 마음은 없었던 것이다.
"공보관 직을 그만 두셔서 섭섭하시겠어요.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요, 아이라 경정 님. 제가 최선을 다하겠어요."
"걱정 같은 건 안 해요. 워낙 쉬운 자리라. 저야 원래 하던 게 수사
니, 특임조 일이 훨씬 더 적성에 맞죠. 부디 공보감까지 승진하길 빌
죠."
아이라는 알핀 경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은근히 자신을 깔보는
듯한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인수인계는 어떻게 할건가?"
적당히 인사가 오갔다고 판단했는지 밀라노가 이렇게 대화에 끼어들
었다.
"인수인계 사항은 내 사무실, 아니 공보부 사무실에 있습니다. 거기
서 하죠."
아이라가 말했지만 알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알고 있어요. 일찍 출근해서 알아봤죠. 특별히 인수인계 해 주실 건
없어요, 아이라 총경 님. 저 혼자 충분히 할 수 있으니까요."
"그래도 몇 가지 직접 말로 전해야 할 게..."
"그 비서, 이름이 뭐였죠? 틸트였던가요? 그 친구한테 몇 마디 물었
죠. 그거면 충분해요, 아이라 총경 님."
아이라는 틸트 경장의 얼굴을 떠올리곤 쓴웃음을 지었다. 아마도 아
이라가 틸트 경장을 부관으로 데리고 간다는 사실이 틸트 경장은 마음
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알핀 경감에게 이것저것 전해 주었
겠지. 어쩌면 악담까지 섞어서. 하지만 아이라는 더 이상의 상상은 하
지 않기로 했다. 상상은 하면 할 수록 점점 더 커지기 마련이었다. 아
이라는 괜한 상상 때문에 좋은 부하를 미워하게 되고 싶지는 않았다.
"따로 인수인계 하지 않겠다는 건가, 알핀 경정?"
밀라노는 확인하듯 물었고 알핀은 당연하다는 듯한 얼굴로 대답을
대신했다. 인수인계는 생각보다 싱겁게 끝이 났다.
"아이라 총경. 진급 행사는 따로 없을 거야. 지금 바로 특임조 본부
로 향하게."
밀라노가 발령장을 내밀면서 말했다. 아이라는 발령장을 받아들었다.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아이라는 받아든 발령장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발령장이 꼭 그만한
크기의 쇠붙이라도 되는 듯 무게가 느껴졌다.
"특임조 본부는 라디오 그룹에 임시로 설치되어 있다네. 특임조에
대해서는 가서 들으면 될 거야."
아이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밀라노에게 뭔가를 더 묻거나 하지는 않
았다. 사실 밀라노도 더 아는 게 없을 거였다. 현재의 특임조는 시경
특수기동대라는 이름을 달고는 있었지만 실상 시경과는 상관없는 용병
집단이나 마찬가지였다. 아이라가 지휘관으로 임명된 것은 그저 계통
상 그럴 뿐이고, 실제 지휘권을 휘두를 수 있을지 없을지 조차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건, 어떻게 하죠?"
아이라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물었다. 발령장을 어디에 제출해야
하는 것인지, 무슨 절차가 필요한 건 아닌지 궁금해서였다.
"방에 장식해 두던지, 아니면 책상에 올려놓던지 알아서 하게."
밀라노는 꽤 사적인 투로 말했다. 단지 사무적이 아닌 말일뿐이었지
만, 아이라는 밀라노가 자신을 생각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
다. 아이라는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럴 상황은 아니었다. 그래서
아이라는 목례를 하고 인사과장실을 빠져나가기로 마음먹었다.
"참. 기자가 하나 붙었지요?"
막나가려는 아이라의 뒤통수에 대고 알핀이 말했다. 아이라는 멈추
어섰다.
"그 기자는 걱정하지 말아요, 아이라 총경 님. 시장 님 말씀이, 걱정
말라고 하셨거든요."
"포레스트 회장?"
아이라는 자신도 모르게 이렇게 내뱉고 말았다.
오랫동안 신경쓰지 않고 있던 이름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시장은
공식적으로 와병중이었고, 아이라가 락벳에서 돌아왔을 때부터 공식석
상에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때문에 죽었다는 소문도 돌고 있을
지경이었으니 아이라가 포레스트 회장을 신경 써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던 것이다.
"알핀 경정. 그럼 포레스트 회장을 만나봤다는 건가요?"
"글쎄요."
알핀 경정은 대답대신 미소를 지었다. 아이라는 그 미소의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더 알고 싶다면 고개를 숙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미소. 아이라는 그런 미소에 고개를 숙이고 싶지 않았다. 그
건 틀림없이 뭔가를 요구하는 것이었고, 그 뭔가가 손을 한 번 내미는
것이라고 해도 결코 응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건 아이라의 자존
심이었다.
아이라 역시 대답 대신 미소로 응답했다. 네까짓 것의 도움이 없어
도 잘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드러내는 미소였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알핀의 표정이 굳었고, 아이라는 그것으로 족했다.
방을 나서기 전에 아이라는 밀라노를 한 번 돌아보았다. 아이라와
알핀 사이에 흐르고 있는 미묘한 감정의 흐름을 읽었기 때문이었을까?
밀라노의 표정은 어두워 보였다. 아이라는 밀라노에게 뭔가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밀라노는, 여전히 밀라노
일 뿐이었다. 사적인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던 것이다.
인사과장실 문이 닫히는 소리는 큰 울림과 함께 오랫동안 아이라의
가슴속에 남게 되었다.
짐을 챙긴 아이라는 부관인 틸트 경장과 함께 총경에게 지급되는 방
탄 호버카에 올랐다. 아이라는 뒷좌석에 탔고, 틸트 경장은 조수석에
앉았다. 조종사는 경무원이었다. 어려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아
이라는 조종사에게 신경을 써 본 적이 없었다.
"특임조 본부로 가자. 시 밖. 마을이야."
틸트 경장이 조종사에게 말했다.
특임조 본부는 마을에 임시로 꾸려져 있었다. 시경과는 상관없는 단
체이니 만큼, 그 위치 또한 시경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아이라는
마을로 향하는 길 내내 생각에 잠겼다. 과연 계통상의 지휘관인 자신
을 그들이 반갑게 맞이할 것인가? 상황은 도대체 어떻게 전달해야 하
는 것일까. 밀라노는 무슨 생각으로 나를 이런 불편한 위치에 오르게
한 것일까? 내가 해야 하는 일은 뭘까. 그리고 그 일을 과연 잘 해낼
수는 있을 것인가...
아이라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호버카는 도시의 건물들 사
이를 지나 시 출입구를 지나서 마을로 향하고 있었다. 돔으로 덮여 있
는 도시를 빠져나가자, 황량한 모래벌판이 눈에 들어왔다. 아이라는 뒤
를 돌아보았다. 시 밖에서 바라보면 돔은 황금빛을 띄고 있다. 내부에
서 바라보면 아무 것도 볼 수 없고, 게다가 빗물도 통과하는 돔이었기
때문에 늘 존재감을 느낄 수 없었고, 이렇게 간혹 황금빛으로 빛나는
돔을 대하게 되면 돔은 도시를 생경하게 보이게 만든다. 아이라는 그
런 생각을 하면서 호버카를 스치고 지나가는 모래바람을 바라보고 있
었다.
호버카의 네비게이터는 조종사를 특임조 본부가 꾸려진 마을로 안전
하게 이동할 수 있도록 돕고 있었다. 아이라는 호버카 조종에 대해서
는 아는 바가 없었다. 때문에 조종에 대해서는 별다른 참견을 하거나
한 적 또한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경우가 달랐다.
"조종사?"
아이라가 조종사를 부르자 조종사의 어깨가 눈에 뜨일 만큼 경직되
었다.
"예. 총경 님."
조종사가 대답했다.
"조금 부드럽게 몰면 안되겠어? 좀 어지러운데."
도시를 벗어나자 호버카는 흔들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도시 밖은 거
의 셔틀로만 이동했던 아이라에게는 견디기 어려울 정도였다.
"사막에서는 원래 이렇습니다, 아이라 총경 님. 조금만 참으시면 익
숙해 지실 겁니다."
조종사의 말은 어쩔 수 없다는 말이었다. 아이라는 조종사의 충고를
듣기로 마음먹었고, 실제로 얼마 지나지 않아서 호버카의 흔들림에 익
숙해 질 수 있었다.
호버카는 마을에 당도하였다.
미리 연락이 되었는지 마을 어귀에는 시경기동대 전투복을 차려 입
고 있는 대원들이 아이라의 호버카를 맞이하기 위해서 나와있었다. 조
종사는 그들 곁에 호버카를 세웠다.
"오늘 지휘관으로 부임하는 아이라 총경이다. 어디로 가면 되겠나?"
아이라는 될 수 있는 한 가장 거만한 태도를 취하면서 이렇게 물었
다. 하지만 대원들은 그런 아이라의 태도에는 별 관심이 없는 모양이
었다. 아이라를 바라본 대원은 하나 뿐이었고, 그 대원마저도 제대로
아이라를 바라보고 있지는 않았다.
"저 쪽."
상당히 짧은 말이었다. 게다가 존칭도 아니었다. 대원은 마을 안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어디라고?"
틸트 경장이 물었으나 이번에는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그저 귀찮다
는 얼굴로 가리켰던 방향을 한 번 더 가리키고 말았을 뿐이었다. 틸트
경장이 다시 물으려고 했으나 아이라가 틸트 경장을 제지했다.
"그만 둬. 조종사. 차 몰지."
아이라는 앞으로 부딪칠 일이 많은 데 처음부터 좋지 않은 인상을
주고 싶지도 받고 싶지도 않았던 것이다. 아이라는 처음으로 대하는
부하의 무관심한 태도에 긴장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마을을 지나치는데 아이라는 주민들의 모습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여자나 아이, 노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간혹 보이는 것은 기강이
흐트러진 대원이 모습뿐이었다. 기강이 흐트러졌다는 건 너무나도 쉽
게 알 수 있었다. 규정된 복장이 아닌 것은 물론이고 웃옷을 벗고 있
는 대원이 있는가 하면, 바지를 걷어올린 대원, 모자를 거꾸로 쓴 대
원, 무기를 뒷주머니에 꽂고 이동하고 있는 대원도 눈에 들어왔다.
"세울까요?"
틸트 경장이 아이라에게 물었다. 내려서 주의를 주겠냐는 물음이었
다. 아이라는 그냥 계속 몰라고 했다. 한꺼번에 해결해야 할 문제 같다
고 판단해서였다. 아이라는 도대체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갈피를 잡기
가 힘이 들었다.
마을 한 가운데에 있는 커다란 집이 눈에 들어왔다. 글자를 읽을 수
만 있다면 그곳이 특임조 시경 특수기동대 본부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집에 간판이 걸려 있었던 것이다. 아이라는 호버카에서 내렸고, 틸트
경장이 그 뒤를 따랐다. 조종사는 호버카에서 대기했다.
아이라는 본부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아마도 이 집을 본부 겸 내무
반으로 쓰는 모양이었다. 대충이나마 정리가 된 침상이 눈에 들어왔고,
그 앞으로 책상 하나가 보였다. 책상에는 머리가 흰 대원이 앉아 있었
는데, 일직 경관인지, 아니면 그냥 앉아있는 건지는 판단하기가 쉽지
않았다. 대원은 단추를 모두 풀어헤치고 있었던 것이다.
"아, 오셨군요."
대원은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말했다. 상당히 완만한 동작이었다.
"저는 루덴스입니다. 여기서 일하고요."
루덴스라고 자신을 밝힌 하얀 머리의 사내가 말하자, 침상에 드러누
워있던 대원들 몇이 휘파람 소리를 올렸다. 아이라가 바보가 아닌 다
음에야 그것이 조롱의 뜻임을 모를 리 없었다.
"저희 대장님께서는 지금 자리에 안계십니다. 그래서 제가 대리로
임무를 수행하고 있지요. 오시면 이렇게 전해 달라고 하시더군요. 편하
게 쉬시라고요. 집에 온 것 처럼."
루덴스가 말하자 이번에는 폭소가 터져나왔다. 아이라의 인내심은
점점 극에 달하고 있었다.
"루덴스? 계급이 뭐지?"
아이라가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순경? 경장? 글쎄요. 이봐. 내 계급이 뭐지?"
능청스러운 미소를 지며 루덴스가 침상에 누워있는 병사들에게 물었
다. 누군가가 '용병한테 계급이 어딨어?'하고 대꾸하는 소리가 들렸다.
"지금 업무시간 맞지? 루덴스?"
계급은 생략하고서 아이라가 물었다.
"예. 그런 것 같네요. 저기 누워있지 않고 여기 앉아 있는 걸 보면."
"오다 보니까 전투복을 벗고 있는 대원들이 보이던데. 대장이 누군
지는 모르겠지만, 대장이 그러라고 시키던가?"
"아, 그 친구들은 비번입니다. 그래서 편하게 쉬고 있는 거죠. 쉴 때
는 집처럼. 우리 대장님의 지휘 방침입니다."
"그럼 근무 중에 복장을 그렇게 하는 것도 여기 방침인가?"
아이라가 묻자 틸트 경장이 긴장했다. 이제 곧 무슨 일이 터질 게
틀림 없었다.
"예."
루덴스는 가슴을 열어 젖히면서 말했다. 휘파람 소리가 야유소리와
섞여 들려왔다.
"털도 안 난 가슴, 자랑하는 건가?"
아이라가 말했을 때, 루덴스는 뭔가 심상치 않은 기분을 느꼈다. 하
지만 이미 늦었다. 아이라는 재빨리 루덴스의 발을 강하게 밟았고, 동
시에 오른 손으로 루덴스의 턱을 올려쳤던 것이다. 루덴스는 억, 하는
비명 소리 한 번 제대로 질러보지 못하고 뒤로 쓰러졌다. 대원 몇이
반사적으로 무기를 잡았다. 하지만 틸트 경장이 허리에 차고 있는 니
들건을 보여주자, 대원들의 동작은 멈추었다.
루덴스는 오른 손으로 턱을 만지면서 재빨리 일어섰다. 그러면서 왼
손으로는 침상에 있는 대원들을 제지했다.
"젠장. 부하를 때리는 지휘관이 어디있어?"
루덴스가 날카로운 눈초리로 아이라를 쏘아보면서 말했다.
"아마 지휘관을 우습게 보는 부하 앞에 있을 거야. 대장이라는 친구
는 어디갔는지 똑바로 보고해 봐, 루덴스."
아이라가 말했다. 루덴스는 인상을 찌푸렸지만 아이라의 눈을 똑바
로 바라보지는 못하고 있었다.
"시장님이 불러서 갔습니다."
루덴스가 말했다.
"...포레스트 회장?"
아이라가 묻자, 루덴스는 고개를 끄덕해보였다.
"가끔씩 시장님이 부릅니다. 알잖아요. 우린 시장의 용병들이라고
요."
루덴스의 목소리에는 힘이 빠져 있었다. 비꼴 기운도, 용기도 남아있
지 않은 모양이었다.
"좋아. 대장이 오면 대장하고 말하지. 그런데, 대장이 누구지?"
"리퍼."
루덴스가 말했다.
"우린 모두 대장을 리퍼라고 부릅니다."
"가명인가?"
"레죵 네임이겠죠. 우리는 모두 레죵 네임을 가지고 있다고요. 개중
에는 아닌 친구도 있지만."
"좋아. 그렇다고 해 두지."
아이라는 리퍼를 만나기 전에는 일이 제대로 풀릴 리가 없다고 판단
했다.
"그런데, 주민들은 하나도 보이지 않던데. 어떻게 된 거지?"
아이라가 물었다.
"아, 그건..."
루덴스가 대답을 하려고 하는데, 침상 쪽에서 누군가가 벌떡 일어섰
다. 피부가 매우 짙은 갈색인, 통나무 같은 목과 어깨를 지닌 건장한
사내였다. 사내는 웃옷을 완전히 벗고 있었는데, 탄탄해 보이는 근육질
의 상체가 어지간한 랩타일 레이스도 함부로 하지 못할 것 같은 느낌
을 풍기고 있었다. 머리는 삭발을 해서 몸과 완전히 같은 빛깔을 하고
있었다.
"주민들은 이주중입니다, 아이라 총경님."
사내가 말하자 모두들 긴장하는 듯 했다. 아이라는 저 사내가 진짜
선임자라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컨, 이라고 불러주십시오, 아이라 총경님."
사내는 자신을 컨이라고 밝혔고, 당당한 태도로 아이라 쪽으로 걸음
을 옮겼다. 아이라는 그 기세에 눌려 하마터라면 뒷걸음질을 칠 뻔 했
다. 하지만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물러서서는 안되었다. 아이라는 눈을
치켜뜨며 컨을 노려보았다.
"웨이팅하우스 시 방침은 마을 주민을 줄이고 도시로 이주시키는 것
입니다. 알고 계실텐데요."
컨이 말했다. 아이라는 컨의 눈을 피하지는 않았지만, 휴먼 레이스가
아닌 다른 레이스처럼 보이는 컨의 눈빛이 부담스럽지 않은 건 아니었
다.
"그래, 컨. 자네는 내가 누군지 알면서도 누워있었나?"
아이라가 따져 물었다. 아이라의 말에 침상에 누워있던 대원들도, 루
덴스도, 틸트도 모두가 긴장했다.
"자고 있었습니다."
컨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어느 사이, 컨은 아이라의 바로 앞까
지 다가왔다. 아이라는 컨을 올려다보지 않을 수 없었다. 아이라보다
적어도 머리통 두 개는 더 큰 키였다. 적어도 발을 밟고 턱을 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리퍼가 오면 그 때 이야기하지. 일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우리 숙
소는 마련했나?"
아이라는 한풀꺽인 기세로 이렇게 물었다.
"예."
컨은 간략하게 답하곤 손가락을 움직여 대원들을 불렀다. 대원들은
재빨리 복장을 갖추어 입고는 아이라 앞에 섰다.
"모셔드려라."
컨은 이렇게 말하곤 다시 침상을 향해 걸어갔다. 아이라는 컨을 불
러 세울까 하다가 그만 두었다. 컨 같은 사내를 마주하는 건 꿈속에서
라도 피하고 싶은 일이었다.
대원은 아이라는 숙소로 안내해 주었다. 아마도 촌장이나 장로가 쓰
던 집인 모양이었다. 방이 세 개나 있는 집은 마을에 있는 집치고는
고급이었고, 내부 장식들도 잘 꾸며져 있었다.
"이상해."
대원이 돌아가자 아이라가 중얼거렸다.
"뭐가요, 총경님?"
틸트가 물었다.
"도시로 이주해간다면 기본적인 세간은 가지고 갔을 텐데 말이야.
그릇이며 조리기구며 식기며... 모두 그대로란 말이야."
"혹시 총경님을 위해서 남겨 둔 건 아닐까요?"
틸트는 이렇게 말했다가 아이라의 따가운 눈총을 받고는 입을 꾹 다
물어 버렸다.
아이라가 이를 수 있는 결론은 매우 명확했다. 분명 이 집에 살고
있던 가족은 아주 갑작스럽게, 강제로 이 집에서 떠나게 된 것이 틀림
없었다.
그렇다면 이 마을에 살고 있던 모든 주민들 또한 그렇게 된 게 아닐
까? 그렇다면 이들은 지금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을까? 도시로 들어
갔다면 이들이 쓸 그릇이며 조리기구며 식기 같은 것은 전부 다 시에
서 지급을 하는 것일까? 아니면...
아이라는 여기에서 생각을 멈추었다. 리퍼라는 자가 돌아오면 그 때
생각해도 늦지 않으리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충분한 자료가 없는 상태
에서 마구 가설을 세우며 머리를 혹사시키기 보다는 조금 쉬면서 머리
를 식혀 두는 편이 나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틸트 경장."
아이라는 부관이라고 부르지 않고 일부러 관등성명을 불렀다.
"예, 총경 님."
"나, 좀 자겠어."
아이라는 이렇게 말하곤 방으로 들어갔다. 방에는 침구류도 바로 어
제까지 쓰다가 만 것 같이 정돈되어 있었다. 이 집 식구들은 침구류도
지급받으리라는 약속을 받았던 것일까? 이런. 아직도 가설을 세우고
있군, 아이라. 그만 두라고. 눈이나 좀 붙여 둬.
아이라는 침대에 몸을 깊숙하게 묻었다. 그리곤 금새 꿈도 없는 깊
은 잠에 빠져들었다.
제 목:[하이어드] Who wants to live forever? - 14
아이라가 일어난 것은 해가 진 뒤의 일이었다.
"총경 님. 아이라 총경 님."
틸트 경장의 목소리가 들려왔을 때, 아이라는 사방이 어둡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자 오래간만에 마을에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노을을 놓
쳐버렸다는 아쉬움이 먼저 다가왔다.
"총경님. 아이라 총경 님."
틸트 경장이 다시 한 번 아이라를 깨웠다. 아이라는 눈을 뜨고 허리
를 세웠다.
"리퍼가 왔나?"
아이라는 눈을 비비면서 말했다.
"아닙니다. 손님이 왔습니다. 군인입니다."
틸트 경장이 말했다. 군인? 아이라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군데? 여기 섹터 경비대장이라도 되나?"
"여기 특공여단 참모라던데요? 로스 중령이라고 했습니다."
"로스? 그 로스?"
아이라는 깜짝 놀라 이렇게 말했다.
"맞아. 그 로스."
빼꼼하게 열려있는 문틈으로 로스가 이렇게 대꾸했다. 아이라는 잠
이 확 달아나는 기분이었다.
"로스!"
아이라는 문을 활짝 열고는 로스의 손을 꼭 쥐었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환경에서 살게 된 첫날 밤, 오래된 친구를 오랜만에 보는
일 만큼 반가운 일은 세상에 없을 것만 같았다.
"반가워, 정말 반가워. 어떻게 된 거야?"
"여기, 우리 섹터거든. 오는 거 알고 있었어. 어차피 연락을 하긴 해
야 했으니까, 내가 자원했지. 여단장님도 허락하시더군. 아이라하고 나
하고 친구라는 걸 잘 알고 계시니까 말이야."
"여단장이라면..."
아이라는 말끝을 흐렸다.
"맞아. 율리스 장군님."
로스가 말했다.
"그 분하고 일하는 거야?"
아이라는 율리스 장군님이라고 부르기가 껄끄러워서 그분, 이라고
표현했다.
"응. 제7군 특공여단에 있으니까, 그렇다고 할 수 있지."
"정확하게 하는 일이 뭔데?"
"참모장."
아이라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로스는 특공여단이 거느리고 있는 직
할대의 지휘관 역할을 맡고 있는 것쯤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데 순수하게 내 얼굴만 보러온 건 아니겠지?"
아이라가 솔직하게 물었다.
"하지만 그게 가장 큰 이유였어. 좋은 쪽으로 생각해 줬으면 좋겠는
데."
"우리, 앉을까?"
아이라가 자리를 권하며 말했다. 로스는 응접실에 있는 작은 테이블
을 앞에 두고 앉았고, 아이라는 마주보았다. 부관인 틸트는 아이라의
눈치를 살피더니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아무래도 방해가 되겠
다 싶었던 모양이었다.
"그래. 여기까지 오느라고 고생 많았어. 내가 여기에서 근무해서 하
는 소리는 아니지만, 여긴 꽤 힘든 곳이야. 사막이고. 물도 귀한 편이
고. 수소융합기는 늘 말썽이고."
일 이야기를 하기 전, 로스는 이렇게 허두로 말문을 열었다. 아이라
는 미간을 찌푸렸다.
"일 이야기는 짧게 하는 게 좋겠지?"
쓸데없는 말은 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로스는 아이라의 말뜻을 알아
들었다.
"그래. 본론 먼저 말 할 게. 내가 전해야 할 이야기는 두 가지야. 먼
저 첫 번째는 우리가 하는 일에 간섭하지 말라는 거고, 두 번째는 이
부대와 거리를 유지하라는 거야."
로스가 말했다.
"너희가 하는 일에 우리가 간섭할 여지가 있나?"
"있을지도 모르지. 훈련 중에 충돌이 생길 가능성도 있고, 장비 운용
시에 일선 사병들끼리 부딪칠 수도 있는 거고, 또 너희 작전하고 우리
작전하고 겹칠 수도 있고..."
로스의 말은 어쩐지 해야 할 말을 빙빙 돌아가는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아이라는 고개를 저었다.
"경찰은 원래 군이나 정치에 간섭하지 않아.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야."
아이라는 율리스 장군이 왜 이런 쓸데없는 일에 다짐을 받고자 하는
지가 궁금했다. 하지만 일단은 접어두기로 했다. 두 번째 질문 내용이
더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나보고 이 부대를 장악하라는 건 무슨 뜻이야? 난 지금 특임조 조
장을 맡고 있고, 여기 병력은 내 부하들이야."
아이라가 말했다. 하지만 이 말 내용이 사실과는 다르다는 것은 아
이라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계통상 그렇지."
로스는 정곡을 찔렀다. 아이라는 토를 달지 않았다. 굳이 이야기 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율리스 장군님은 인재를 모으는 데에 열심이지. 여기 지휘관, 리퍼
라는 휴먼레이스야. 아직 못 만나 봤지?"
아이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율리스 장군은 상상보다 훨씬 넓
은 범위의 정보망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싶었다.
"장군님은 리퍼를 원해. 아. 그렇다고 해서 아이라, 널 무시하는 건
아니야. 장군님은 네가 장군님한테 호감이 없다는 걸 알고 있지. 그래
서 일단 제외한 것뿐이니까 그걸 기분 나빠하지는 않아 줬으면 좋겠
고."
"그러니까, 내가 이 부대를 장악해서 리퍼가 그 쪽으로 가게 되길
바란다는 건가?"
로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내가 원하는 바이기도 해. 그 분 한테 전해. 상당히 긍정적인
대답을 얻었다고."
아이라는 환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다분히 공적인 웃음이기는 했지
만 그것이 웃음의 가치를 희석시키지는 않았다. 로스도 웃음을 지었다.
"자. 이제 일은 끝이야."
"나도 하나 물을 게."
아이라가 말했다. 로스는 문제없다는 듯 한 제스쳐를 취했다.
"솔직히, 난 여기서 하는 일이 뭔지, 또 내가 해야 할 일이 뭔지도
모르겠어. 그래서 묻는 건데, 도대체 이 부대가 하는 일이 뭐야?"
아이라는 농담조로 물었다. 물론 내용은 농담이 아닌 사실이었지만
아이라는 정말로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농담조로 물은 것은 지휘관
이 지휘하고 있는 자신의 부대가 하는 일도 알지 못한다는 게 그다지
자랑스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이 부대가 하는 일은 간단해. 웨이팅하우스 시 주변에 있는 마을을
돌면서 마을 주민을 도시로 이주시키는 일이야.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
한 건 그 과정에서 반란군을 색출해 내고 체포하는 일이지."
"그건 나도 알아."
사실 정확하게 그렇게 알고 있지는 못했지만, 아이라는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뭐 그리 거창하게 말하냐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비공식 적인 충고 하나 할 게, 아이라."
로스의 목소리는 사뭇 진지했다.
"공식적인 충고도 좋아."
"공식적으로는 할 수 없는 말이야. 일단 율리스 장군님의 뜻과도 어
긋나는 거니까... 이 부대에서 하는 일에 신경 쓰지 마. 바로 특수기동
대 말이야."
"뭐라고?"
아이라는 어이가 없어서 되물었다.
"곧 알게 되겠지만, 이 부대는 가까이 하면 안되는 부대야. 이 부대
의 일에 깊게 관여했다가는 반드시 후회하게 될 거야. 무슨 말인지 알
겠어?"
"아니. 전혀."
아이라는 여전히 어이가 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나는 지금까지 어떤 임무도 다 완벽하게 소화해 냈어. 내 나이에
총경에 올랐다는 게 무슨 뜻인지 알아?"
"알아. 물론 잘 알고 있어."
로스의 눈빛은 아이라는 측은하게 내려보는 듯 했다. 물론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눈빛이겠지만 아이라는 그런 눈빛으로 누군가가 자신을 바
라보고 있다는 사실이 별로 불쾌했다.
"하지만 여기서 하는 일은 결국 네 경력에도 해가 될 거야..."
로스는 말꼬리를 흐렸다. 적당한 단어를 찾지 못하고 있는 모양이었
다. 하지만 결국 적절한 단어를 찾아내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미안해. 아무리 나라고 해도, 네 친구라고 해도 쉽게 말하지는 못하
겠어."
로스는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아이라는 캐묻지 않았다. 더 이상 로
스에게 뭔가를 묻는 다는 게 어쩐지 로스에게 신세를 지는 것처럼 느
껴졌기 때문이었다.
"리퍼를 만나 봐. 그러면 자세히 알게 될 거야."
로스는 이렇게 이야기를 마쳤다.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어. 그 충고,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릴
게."
로스는 아이라의 말에 웃음을 지었다. 그저 가벼운 농담이 오고갔다
고 생각하자는 무언의 암시였다. 아이라는 그 암시를 받아들였다. 그리
고 더 이상 업무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사실 내가 온 건 꼭 묻고 싶은 게 있어서야."
로스가 물었다. 아이라는 문제없다는 듯 여유로운 표정으로 로스의
질문을 기다렸다.
"나하고 결혼하지 않을래?"
로스의 말에 아이라는 잠시 동안 멍한 상태가 되었다. 그리고 정신
을 차렸을 때, 아이라는 어떻게 해야 로스의 말을 넘길 수 있을까 고
민했다. 그냥 농담으로 넘겨 버리기에 로스의 얼굴은 지나치게 진지했
다.
"너랑 결혼하면 무슨 좋은 점이 있는데?"
아이라는 이렇게 물었다. 그러자 로스의 입술에 씁쓸한 미소가 걸렸
다.
"전에도 그렇게 물었지..."
로스는 아이라의 눈을 피하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맞아. 그랬어. 그런데 그 때는 뭐라고 했더라? 매일 호버카로 출근
할 수 있다고 했고, 또 신혼여행을 휴양콜로니로 갈 수 있다고 했지."
아이라는 로스의 말을 넘겨버릴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찾아내었다.
"그런데 어쩌지? 지금은 그 두 가지 다 별 의미가 없는데 말야. 게
다가, 난 그 두가지도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었다고."
"그건..."
로스는 뭔가 이야기를 하려고 했지만 결국 말하지 못했다. 아이라는
마땅히 할 말이 없는 걸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 그만 두자."
로스는 이렇게 말하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이라도 따라서 일어
섰다.
"그래. 다음에는 조금 더 그럴싸한 장점을 이야기 해 줘. 만들어서라
도 말이야."
"그랬으면 좋겠어, 나도."
로스는 아이라에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아이라는 로스의 손
을 잡았다. 로스의 손은 조금 전 악수할 때에 비해서 훨씬 차고 딱딱
하게 느껴졌다.
"로스. 나 말고도 여자는 많아."
아이라는 로스의 말을 그냥 농담으로 흘려 보내기보다는 진지한 말
을 조금은 해 두어야 겠다고 마음먹었다. 로스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는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아직 결혼 같은 거 하고 싶지 않아. 내가 여기까지 오
를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 중에 하나는, 내가 독신이라는 거였어. 내가
기혼자였다면 결코 받지 못했을 보직이 몇 개나 되는 지 알아?"
"잘 모르지만 이해 해."
로스가 말했다. 아이라의 말은 진심이었고, 로스도 진심을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의 귀는 가지고 있었다.
"하긴. 나도 그랬으니까. 지금까지 나는 일이 그 무엇보다 중요했어.
경력 때문에 다른 모든 건 포기했고 말이야. 그런데..."
로스는 잠시 망설였다. 해도 좋은 이야기일까 고민하는 모양이었다.
"요즘에는 내가 잘못 생각한 게 아닐까 싶어. 사실, 난 네가 경찰 일
그만두고 나하고 함께 살면 어떨까, 그런 생각을 했던 거였어. 그래.
나도 알아. 그냥 나 혼자만의 생각이지. 그냥 그랬으면 좋겠다는. 미안
해. 쓸데없는 말로 부담을 준 게 돼버렸네."
로스는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아냐."
아이라는 달리 뭐라고 말하기가 곤란해서 그냥 이렇게 덧붙이고는
말았다. 로스는 집밖을 향해 걸어나갔고 아이라가 그 뒤를 따랐다.
문을 열자, 군용 호버카가 눈에 들어왔다. 아마도 로스가 타고 온 호
버카인 모양이었다. 호버카 조종사는 로스의 모습이 보이자 얼른 호버
카에서 내려 뒷좌석 문을 열고는 부동자세로 대기했다.
"넌 참 좋은 남자야. 늘 그렇게 생각했어."
아이라는 이렇게 말했다. 사실 별로 마음에도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어쩐지 로스가 상처받을 것 같다는 생각 때문에 이런 말이라도 해야만
했다.
"그 말이 진짜였으면 좋겠네."
힘없는 미소를 지으며 로스가 말했다.
"당연히 진짜지."
물론 이 말이 사실일지라도 진실은 아니라는 건 아이라도 로스도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아이라의 말이 끝나자 둘 사이에는 어색한 침묵
만이 감돌았다.
"또 놀러 올 거지?"
아이라가 어색하게 웃으며 로스에게 말했다. 로스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라는 로스를 다시는 볼 수 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할 게."
이 말은 진심인지 아닌지 구분하기 힘든 말이었다.
로스는 호버카에 올랐고 호버카의 조종사는 로스를 대신해서 문을
닫은 뒤 호버카를 몰기 시작했다.
호버카는 먼지를 날리며 어둠 저편으로 헤드라이트 불빛과 함께 천
천히 사라져갔다. 아이라는 호버카의 불빛이 사라질 때까지 가만히 서
있었다. 마침내 호버카의 빛이 완전히 시계에서 벗어나자, 아이라는 다
시 집으로 돌아왔다.
"괜찮으십니까, 총경 님?"
틸트 경위가 아이라에게 물었다.
"괜찮고 말고 할 게 뭐 있어."
퉁명스러운 대답이었다.
"저, 저녁식사가 준비되었습니다. 별로 맛있는 요리는 아닙니다만 저
하고 조종사하고 둘이서 준비를 좀 해 봤는데요."
아이라는 이 말에는 대꾸하지 않았다. 입맛이 전혀 없었다. 아이라는
도로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버렸고 틸트 경위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다시 침대에 누웠지만 잠이 통 오지를 않았다. 조금 눈을 붙인 탓도
있었지만 잠을 청하기에는 생각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았다. 아이라는
긴 밤을 뜬눈으로 보내고야 말았다.
"아이라 총경님. 총경님?"
새벽녘에 얼핏 잠이 든 것도 같았는데 틸트가 아이라를 깨웠다. 아
이라는 뻑뻑해진 눈을 비비며 몸을 일으켰다.
"뭐야?"
"리퍼가 복귀했습니다."
리퍼라는 틸트의 말에 아이라는 정신이 번쩍 나는 기분이었다. 아이
라는 옷매무새를 바로했고 머리를 정돈했다.
"먼지 털어."
아이라는 틸트에게 등을 보이며 이렇게 말했다. 아이라는 두 손을
옷매무새를 바로 하는 데 사용했다. 리퍼에게 조금이라도 얕보이고 싶
지 않았던 것이다.
"무장해. 당장. 조종사한테도 무장하라고 해."
아이라는 옷매무새가 대충 마무리되자 틸트에게 이렇게 지시했다.
틸트와 조종사가 무장을 마치자, 아이라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어제 들렀던 본부 쪽으로 발걸음을 서둘렀다.
본부 앞에는 기동대의 전 병력이 집결해 있었다. 작은 단상이 마련
되어 있었고, 그 앞에 병력들은 질서정연한 모습으로 정렬한 모습이었
다. 어제의 해이한 모습은 찾아 볼 수 없었다. 병령은 모두가 무장을
하고 있었고, 헬멧까지 착용한 상태였다. 때문에 누가 리퍼인지 쉽게
알아 볼 수가 없었다.
아이라가 다가가자 집결해 있는 병력의 시선이 아이라 쪽으로 쏠렸
다. 아이라는 일순 긴장했지만 태연한 척 허리를 꼿꼿이 펴고 눈을 피
하지 않았다. 아이라는 누가 리퍼일지 판단해 보았다. 단상 위에 서 있
는 둘 중 하나일 것이었다. 아이라는 리퍼가 누구일지 판단할 수 있었
다. 리퍼라고 판단되는 쪽이 아닌 나머지는 어제 본 컨이 틀림없었다.
그런 체격을 가진 휴먼레이스는 아주 드물었다. 아이라는 단상으로 성
큼 걸어 올라갔다. 틸트와 호버카 조종사는 차마 단상 위까지 따라 올
라가지는 못하였다.
"리퍼? 난 아이라 총경이에요."
아이라가 당찬 음성으로 말했다. 정확하게는 당찬 음성이라기 보다
는 큰 목소리였는데, 이럴 경우 큰 목소리로 말하는 편이 감정을 숨기
기 딱 알맞았다.
"그렇군요. 이야기 들었습니다."
일단 누가 리퍼인지 골라내는 데에는 성공한 모양이었다. 헬멧을 쓰
고 있는 사내가 아이라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아이라는 슬쩍 고개를
돌려 정렬해 있는 병사들의 눈치를 살폈다. 표정은 헬멧에 가려 보이
지 않았지만 일단 동요하고 있는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아이라는 이
자리에서 자신이 지휘관임을 분명히 할 생각이었다.
"헬멧을 벗어요."
"명령입니까?"
리퍼가 물었다.
"명령이에요. 특임조 조장으로 하는 명령."
잠시 동안 리퍼는 반응이 없었다.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가 궁금
했다.
"그 뒤에 서 있는 친구는 부관과 호버카 조종사인가요?"
잠시 후에 헬멧의 저편에서 리퍼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아이라는 그
렇다고 했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닐 텐데요."
아이라는 짜증이 난다는 듯 말했다. 이런 식으로 화를 내는 것이 주
도권을 잡는 데에 유리할 때가 있다. 아이라는 지금이 바로 그런 때라
고 판단하고 있었다.
"맞습니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죠. 중요한 건 우리가 누구인가입니
다."
리퍼의 목소리는 아이라를 조롱하는 듯 했다. 아이라는 조금 과장을
해서라도 자신의 위치를 각인시켜야 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제가 지휘관이고, 지휘관에게는 즉결심판이 가능하다는 건 알고 있
지요? 제 뒤에 있는 부관은 총솜씨도 좋고, 성질도 급하답니다. 다시
한 번 말하겠어요. 헬멧을 벗어요. 명령이에요."
아이라는 화를 참고 있다는 것을 확연하게 드러낼 수 있는 음색으로
말했다. 하지만 헬멧은 요지부동이었다.
제 목:[하이어드] Who wants to live forever? - 15
"먼저, 우리가 누군지 말씀드리죠. 우리는 시장님이 고용한 용병들입
니다."
리퍼는 아주 자상한 음성으로 말했다.
"따라서 우리는 시장님의 명령만 듣습니다. 아무리 우리가 시경에
계통상 속해있다고 해도 말이지요. 아이라. 당신은 옵져버 자격으로 여
기에 온 겁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하는 일을 잘 살펴보면 됩니다.
컨."
리퍼는 컨을 불렀다. 아이라는 뭐라고 대꾸를 해 주려고 했지만 리
퍼는 그럴 틈을 보이지 않았다.
"저기 세 분께 전투복을 드려."
"예, 알겠습니다."
리퍼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컨은 거대한 몸을 움직여 손수 전투복을
가지러 본부로 뛰어 들어갔다. 육중한 체구와 전투복 때문에 땅이 울
리는 기분이었다.
"이봐요!"
아이라는 허세를 부렸다. 하지만 리퍼에게 그런 것은 통하지 않았다.
"똑똑히 들어요, 아이라 총경."
리퍼의 음성에서 자상함이 사라졌다.
"여기서 당신이 지휘할 수 있는 병력은 딱 두 명 뿐이야. 그 총 잘
쏘고 성격 급한 부관과 호버카 조종수."
"리퍼, 지금 당신은 항명죄를 범하고 있어요, 그리고..."
리퍼는 아이라의 말을 끊었다.
"그리고 여기 지휘관은 나고. 나는 지금 여기에 떨어진 전투 명령을
수행하는 중입니다. 지휘관에게 불복종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고 있지
요?"
리퍼의 말이 끝나자마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컨이 전투복을 가지
고 단상위로 올랐다. 리퍼는 전투복을 집어 아이라에게 내밀었다.
"당장 착용해요. 헬멧까지. 명령입니다."
아이라는 비로소 이 리퍼라는 사내는 결코 호락호락한 사내가 아니
고, 또한 지금 상황이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좋지 않은 상황이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항의하겠어요. 똑똑히 들어요, 리퍼. 지금 당신이 한 행동은 모조리
보고 될 거에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쉽게 물러설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아이
라는 끝까지 이렇게 허세를 부리기로 했다.
"이해합니다. 계통상 이곳 지휘관으로 되어 있으니 그런 혼동을 일
으키실 수도 있지요. 아이라 총경. 내가 다음 번에 시장님을 뵐 때 지
휘관이라는 명칭 대신 옵져버라는 사실을 분명히 명시해 달라고 건의
하죠."
리퍼의 말이 담고 있는 내용은 분명 조롱이었지만, 리퍼의 목소리는
마치 어린아이를 달래는 부모와 같은 느낌을 주었다. 아이라는 그런
리퍼의 말이 몹시도 수치스럽게 느껴졌다.
아이라가 택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 뿐이었다.
아이라는 대꾸를 하지 않고 단상에서 내려와 오를 때와 마찬가지로
몹시 당당한 걸음걸이를 하고서 숙소로 돌아갔다.
"이봐, 부관. 챙겨드려. 자네 상관 아닌가?"
리퍼가 꼭 아이라 들으라는 듯 큰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컨이 전투
복과 헬멧을 부관인 틸트에게 내밀었다. 틸트는 아이라의 뒷모습을 잠
시 바라보았다가 그것을 받아 챙겼다.
"자네는 융통성이 있군. 그나마 다행이야."
리퍼는 이렇게 말하곤 병력들을 사열하기 시작했다. 아마도 출동준
비를 하는 모양이었다. 틸트는 컨이 내민 전투복과 헬멧을 챙겨가지고
아이라의 뒤를 따랐다.
아이라는 숙소에 돌아오자마자 자신의 방으로 들어간 뒤 있는 힘껏
방문을 닫았다. 가슴이 뛰고 있었고 얼굴은 화끈거리고 있었다. 분을
삭이기 위해서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소리를 지를
수는 없었다. 누구든 아이라가 소리를 지르는 걸 듣는다면 아이라가
스스로 패배를 인정했다고 여길 게 틀림없었던 것이다.
문이 살짝 열렸다.
"저, 총경님..."
"나가."
아이라는 화를 꾹 참으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 이런경우에 나오는
목소리는 아무리 낮고 조용하다고 해도 듣는 이에 따라서 얼마든지 오
싹해 질 수 있는 법이다. 틸트는 아이라의 명령에 그대로 복종했다.
아이라는 이불을 뒤집어썼다. 그리고 베개를 입에 물었다. 그런 다음
아이라는 숨이 막힐 때까지 소리를 질렀다. 물론 그 소리를 제대로 들
을 수 있는 건 아이라 뿐이었다.
한참이 지난 다음에야 아이라는 이불에서 나와 침대에 걸터앉을 수
있었다. 화가 풀린 건 아니었지만 목이 아파서 더 이상 소리를 지르고
만 있을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도대체 어쩌다가 이 꼴이 된 걸까?
아이라가 제일 먼저 떠올린 것은 밀라노의 말이었다. 특별히 자신이
이 자리에 추천했다는 밀라노의 말만 아니었다면 이렇게까지 화가 나
지 않을지도 몰랐다. 도대체 이런 허수아비 자리에 날 추천한 이유가
뭐지? 아이라는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지만 별다른 이유가 떠
오르지 않았다.
아이라가 멍하니 생각 속에 잠겨 있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아이
라는 문 쪽을 바라보았다.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틸트가 문밖에서 말했다. 문 밖에서 상사의 눈치를 살피는 것이리라.
그런데 누가 찾아왔을까? 로스? 로스말고는 찾아 올 만한 이라곤
아무도 없었다. 아이라는 로스가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곳
의 지휘권을 장악해 달라는 로스의 부탁을 들을 수가 있는 상황이 아
니라는 걸 밝히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식으로 자신이 무능하다
는 사실을 밝히고 싶지 않았다.
"누구야?"
아이라는 침대에 걸터앉아서 물었다. 만약 로스라고 한다면 돌아가
라고 말할 생각이었다.
"기자입니다. 전에 한 번 찾아 오셨분 분입니다. 세론이라고 하는데,
기억하십니까?"
세론.
아이라는 그 이름을 듣는 순간 머리속이 환하게 밝아오며 이름 하나
가 떠올랐다.
포레스트 회장.
아이라가 먼저 떠올린 것은 아이라 후임으로 공보관에 임명된 알핀
경정이었다. 알핀 경정은 틀림 없이 포레스트 회장을 만난 것으로 판
단되었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떠오른 것은 마지막으로 본 포레스트
회장의 얼굴이었다.
'후회하게 만들어 주겠어, 반드시.'
포레스트 회장은 휴먼 레이스의 것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싸
늘한 미소를 지으면서 아이라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이라는 등줄기를
따라서 소름이 돋아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들어오시라고 해."
아이라가 말하자 문이 천천히 열렸다. 세론이었다. 세론은 여유로운
웃음을 짓고서 아이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먼저, 진급 축하드려요."
세론이 웃는 얼굴로 말했다. 세론의 웃는 얼굴은 정확하게 절반만
웃는 얼굴로 보였다. 나머지 반은 마치 우는 것 같기도 했고 거친 숨
을 고르고 있는 듯 보이기도 했다.
"고마워요. 좀 앉아요."
아이라는 세론에게 자리를 권했다. 세론은 방에 있던 화장대 의자를
끌어와서 아이라의 앞에 앉았다. 다리를 꼬고 앉자 의족이 드러났다.
전에도 본 적이 있는 의족이었지만, 아이라는 그것이 몹시 신경에 거
슬렸다.
"일부러 그렇게 한 건가요?"
아이라가 의족을 가리키면서 물었다.
"전상은 남겨 두는 거죠."
세론이 인조피부 때문에 검게 보이는 얼굴의 반쪽을 만지면서 말했
다.
"전쟁의 기억은 상처와 같아요. 아프고, 따갑고, 치료를 필요로 하지
만 시간이 지나면 이렇게 되는 거죠. 보기 흉하고, 또 보면 생각이 나
기도 하지만, 사실 별로 아프진 않거든요."
세론의 태도는 당당했다. 아이라는 세론의 상처 문제는 자신이 무심
하게 보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렇군요. 오늘 찾아오신 이유는 뭐죠? 진급을 축하해 주기 위해서
인가요?"
좌천을 비웃기 위해서 온거라고 하는 게 더 걸맞게지만. 아이라는
이렇게 생각했다.
"거래를 위해서에요."
세론 소위가 말했다.
"거래라. 저는 기자하고 거래 같은 건 해 본적이 없어요. 당신이 원
하는 건 진실일테고, 진실은 거래를 필요로 하지 않지요."
아이라는 사무적인 태도로 말했다.
"아뇨. 제가 찾는 건 사실이에요. 진실이란 사실이 있어야 힘을 발휘
하거든요. 그리고 사실은 거래를 필요로 할 때도 있죠."
"처음 듣는 말이네요. 어떤 사실이 거래를 필요로 하죠?"
"예를 들자면 포레스트 회장이 있는 장소와 포레스트 회장의 근황
같은 거죠."
세론의 말에 아이라는 할 말을 잊고 말았다. 이 말 한마디로 아이라
는 알 수 있었다. 세론은 정확하게 자신의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자
신이 좌천된 것이라는 것도, 그리고 포레스트 회장에 대한 의문을 품
고 있다는 것도.
잠시 동안 아무 말도 오가지 않았다. 아이라가 생각을 하는 시간인
것이다.
"뭘 원하죠?"
한 참 만에 아이라가 패배를 시인했다. 이제는 거래를 해야 할 시간
이었다. 세론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고, 세론의 정보를 들어야했다.
"간단해요. 오늘 오후에 이 마을에 주둔해 있는 기동대는 다른 마을
로 반란군 토벌에 나서요. 제가 원하는 건, 그 사이에 마을을 돌아볼
수 있게 해달라는 거에요."
"글쎄요. 알고 있겠지만, 세론, 나는 그런 힘이 없어요."
거래는 거래다. 무슨 거래든 에누리가 있기 마련이었다. 이곳은 현재
준 군사시설이었고 당연히 취재는 불가능한 지역이었다. 자유로운 취
재를 원한다면, 그건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다. 아이라는 조금이라도 거
래 조건을 낮추기 위해서 노력해야 했다.
"제가 원하는 건 제 친구의 행방이에요. 기억하시겠죠? 제 친구, 휴
란이라는 기자요."
"그런데요?"
아이라는 꼭 거래에 흥미가 별로 없다는 듯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그건이 진심이 아니라는 건 세론도 잘 알고 있었다.
"그 친구가 사라지던 날, 이 마을에서 반란군과 기동대간의 총격전
이 있었어요. 아이라. 알고 계셨죠? 그 때 공보관으로 계셨으니까요."
"글쎄요. 워낙 오래된 일이라."
아이라는 능청을 떨었다. 하지만 이번 능청은 아이라에게도, 세론에
게도 나쁜 영향을 미쳤을 뿐이었다. 세론은 불쾌감을 표정으로 그대로
드러냈던 것이다. 시커먼 세론의 인조피부가 심하게 꿈틀거렸다.
"난 여기를 취재해야겠어요. 그리고 당신은 절 도와 줘야 하고요. 허
튼 소리는 그만 둬요, 아이라. 포레스트 회장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다
면 모를까."
아이라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자칫 주도권이 세론에게 넘어가버릴
판국이었던 것이다.
"좋아요. 우리, 서로 솔직하게 말하죠."
아이라는 일단 동등한 위치에서 거래를 시작해야 한다는 걸 직감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대화는 이어질 수 없는 상황이었다.
"먼저 세론, 당신이 뭘 알고 있는지 부터 확인하죠. 도대체 뭘 알고
있나요?"
"당신이 이곳에서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하고 있을 거라는 점. 그
리고 그 원인이 포레스트 회장에게 있는지 없는지 궁금해하고 있다는
점. 이정도는 알고 있죠."
"그건 나도 알고 있어요."
"그래요? 그럼 포레스트 회장을 만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알
고 있나요?"
세론의 말에 아이라는 말을 잇지 못했다. 일단 양보하는 수 밖에 없
을 것 같았다.
"좋아요. 그럼 당신은 정말로 알고 있나요?"
세론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군사령부에 친구들이 있답니다. 율리스 장군도 저한테 협조하
고 있지요. 참. 로스 중령과는 친구 사이죠? 로스 중령도 알고 있어
요."
"군에 있는 인물들 몇을 알고 있다고 해서 당신이 정말로 포레스트
회장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을 거라고는 믿어지지 않는데요."
아이라의 의문은 정당한 것이었다. 기껏 취재를 허락해 놓고는 얻고
자 하는 정보를 얻지 못한다면 그건 아이라가 바보라는 걸 증명하는
일밖에는 되지 않을 거였다.
"알고 있어요. 틀림없이. 그리고 아이라가 이곳에 오게 된 게 포레스
트 회장의 압력 때문이었다는 것도 알고 있죠. 인사과장이 그런 말 하
지 않던가요? 자신이 아이라는 추천했다고?"
"그랬던 것 같네요."
이 말로 미루어 보아 세론은 세부사항까지 파악하고 있는 게 틀림없
었다.
아이라는 고민에 빠졌다. 일단 세론에게 취재를 허락하는 일은 자신
의 소관도 아니었고, 세론에게 취재를 허락하려면 꽤 고생을 해야 할
게 틀림없었다. 그렇게 하면서 까지 포레스트 회장을 만나 봐야 하는
걸까?
"아이라. 여기서 실패한 지휘관의 오명을 쓰게 된다면 틀림 없이 억
울하겠죠? 게다가 지휘는 해 보지도 못한 지휘관이라면요."
"여기서 나는 옵져버의 자격을..."
"방송에 나가게 된다면, 그 말을 누가 믿겠어요? 공보관이었잖아요,
아이라는."
세론의 말은 설득력이 있었다. 아이라는 반론을 펼 수가 없었다.
"좋아요. 돕겠어요. 여기서 취재할 수 있도록."
아이라는 망설이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몇 마디 덧붙이는
것을 잊지는 않았다.
"약속을 지켜 줘요. 포레스트 회장이 있는 곳을 알려주는 거 말이에
요."
"기자의 생명은 취재원에 있어요. 그리고 추재원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기자의 생명은 끝나죠. 걱정 말아요."
세론이 말했고, 거래는 성립되었다.
거래는 간단하게 이루어졌다.
대원들이 출동하기 직전에 아이라는 리퍼를 찾았다. 리퍼는 완전 무
장한 상태로 아이라를 맞이했다. 아이라는 차분한 목소리로 리퍼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옵져버 자격으로 말하겠어요. 여기에 우리가 감추고 있는 건 아무
것도 없다는 걸 이 기자에게 설명해야 해요. 계통상 지휘관은 나니까,
그 부분은 내가 책임 질 수 있어요."
아이라는 이렇게 상황을 설명했다. 리퍼는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듯
보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이라의 말에 반대할 만한 이유도 없었다.
"좋습니다. 취재하는 동안 잔여 병력이 취재를 방해하지는 않을 겁
니다. 하지만 아이라, 인터뷰는 안됩니다. 내 부하들 얼굴이 화면에 나
가서도 안되고요."
리퍼가 말하자 아이라는 한 시름 놓을 수 있었다.
"들었죠? 인터뷰는 안돼요, 세론. 우리 기동대 대원의 얼굴이 화면에
나가도 안되고요."
"물론이죠. 그리고 저는 카메라도 가져오지 않았어요."
세론은 반갑다는 듯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리퍼가 부대를
이끌고 마을을 떠나자, 아이라에게 명함을 한 장 내밀었다. 포레스트
회장의 명함이었다. 명함을 받아 들자, 명함 위로 홀로그램 약도가 떠
올랐다.
"라디오 그룹 본사 건물이잖아요, 이건."
아이라가 말했다.
"맞아요. 그리고 그곳 지하에는 포레스트 회장을 위한 임시 병동이
마련되어 있지요. 포레스트 회장의 주치의 5명과 치료법을 연구하는
연구진 17명이 일하고 있어요. 그리고 포레스트 회장의 개인 병실도
거기에 있고요. 이만하면 됐지요?"
세론이 말했다. 아이라는 어쩐지 속았다는 기분이 들었다. 사실 아이
라가 마음먹고 라디오 그룹 본사로 갔다고 하면 이 정도 정보 쯤은 얻
을 수 있었을지 모른다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이라는 그런 생각은
하지 않기로 했다. 적어도 세론이 없었다면, 아이라는 포레스트 회장을
찾아가야 겠다는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게 틀림없었다. 사실 포레스트
회장이 소문처럼 정말로 죽었는지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는. 아이라는
세론에게 받은 명함을 품에 넣었다.
"그럼 전 취재를 하러 떠나죠."
"저도 시로 가 보죠. 포레스트 회장을 만나 봐야 하니까요."
"꼭 만나서 의문을 푸시길 바래요, 아이라."
"당신도 진실을 찾았으면 좋겠네요, 세론."
둘은 악수를 나누었다. 거래가 성공적으로 끝났음을 자축하는 악수
였다.
아이라는 호버카 조종사와 틸트를 불렀다. 그리곤 호버카를 출발시
켰다. 장소는 물론 명함에 나와있는 장소였다. 더 이상 시간을 끌만한
그 어떠한 이유도 아이라에게는 없었다.
제 목:[하이어드] Who wants to live forever? - 16
아이라가 라디오 그룹 본사 그룹에 들어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영
장과 신분증이었다. 하지만 영장은 있을 턱이 없었고, 신분증도 공보관
의 직함이 찍혀 있어서 새로 갱신되지 않은 것뿐이었다. 하지만 아이
라는 임명장을 가지고 있었고, 협조 때문에 반드시 들어가야 한다고
정문 보안요원을 설득했다. 정문 보안 요원은 그렇게 하라고 쉽게 말
했다. 나중에 문책 듣겠군. 아이라는 생각하면서 본사 건물로 들어섰
다.
"기다리고 있어."
본사 앞에 호버카가 정지하자, 아이라는 조종사에게 이렇게 말하곤
틸트와 함께 호버카에서 내려 다짜고짜 본사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저, 실례지만 어디서 오셨습니까?"
본사의 보안요원이 아이라에게 물었다. 아이라는 틸트에게 턱으로
신호를 보낸 다음 본사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이런 경우 대화로는 아
무런 진전을 볼 수 없다는 걸 아이라는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알 거 없어. 어느 안전이라고."
틸트는 매우 거만한 어조로 보안요원을 막아서면서 말했다. 보안요
원은 잠시 멈칫 했다. 그건 틸트의 말이 어느 정도 먹혀 들어가고 있
다는 증거였다. 물론 보안요원을 틸트가 정말 실력으로 쓰러뜨릴 수는
없을 거였다. 하지만 지금 상황은 무작정 뚫고 지나가야 하는 상황이
었다.
아이라는 예전에 본사 건물에 올라가 본 적이 있었다. 그래서 특정
한 층으로 가려면 특정한 엘리베이터를 타야 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
다. 아이라는 안내 프런트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최대한 자신감
넘치는 표정을 하고서.
"지하는 어디야?"
프런트에 앉아 있는 것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포미사이드 레이스였
다. 아이라는 포미사이드 레이스들이 보통 공무원들을 무서워하고 있
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지하로 가는 길은 계단 밖에는 없습니다."
틀림없이 교육받은 말 그대로 읊는 것 같았다. 아이라는 신분증을
꺼내 보여주었다.
"이거, 읽을 수 있나?"
"예?"
포미사이드 레이스 안내원은 당황한 듯 보였다. 뭔가 말을 하고는
싶어하는 것 같았지만 적절한 휴먼 레이스 어가 떠오르지 않는 것 같
았다. 아이라가 들고 있는 신분증은 갱신이 되지 않아서 효력이 없는
신분증이었지만 포미사이드 레이스 안내원이 그런 사실을 알 턱이 없
었다.
"난 경찰이야. 그것도 아주 높은 곳에 있지. 높은 곳에 있으면 성질
이 급해져. 빨리 말 해. 고향으로 추방당하고 싶지 않으면. 추.방."
아이라는 혹시 추방이라는 단어를 모를까봐 힘주어서 목을 자르는
제스처까지 섞어서 말했다.
"대답하지 마! 그럴 의무는 없어! 이봐요. 영장 좀 봅시다."
보안요원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틸트가 가로막지 않았다면 당장이라
도 아이라에게 달려 들 기세였다. 틸트는 힘이 부치는 모양인지 아이
라에게 다급한 눈초리를 보내고 있었다. 아이라는 포미사이드 레이스
안내원이 망설이고 있는 사이, 안내원의 뒤편으로 하얀 가운을 입은
사내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순간 보안요원은
틸트를 뿌리치고 아이라에게 다가왔고, 아이라는 더 망설일 여지가 없
었다.
"잠깐!"
내리고 있는 하얀 가운의 직원에게 소리치면서 아이라는 무작정 뛰
었다. 세론은 지하에 있는 개인 병실이라고 말했고, 그것이 아이라를
하얀 가운에 도박을 걸 게 만들었다. 아이라는 하얀 가운의 직원이 내
린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문이 닫히기 전, 아이라는 틸트가 보안요원의
다리를 붙잡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도와줘서 고맙군. 아이라는 이런
표정을 지으면서 엘리베이터에 있는 버튼을 눌렀다.
"어디로 가십니까?"
인터폰을 통해 여직원의 음성이 들렸다.
"지하 병실."
아이라는 지극히 사무적인 투로 대답했다. 인터폰에서는 아무 말도
이어지지 않았고, 엘리베이터는 곧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이라는 엘리
베이터가 움직이는 동안 역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입을 열기만
하면, 인터폰에서 거부와 불가의 부정적인 말이 흘러나올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아이라는 숨소리도 죽이고서 엘리베이터 문이 열
리기만을 기다렸다.
생각보다 훨씬 긴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엘리베이터의 문은 열렸다.
그리고,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을 때, 아이라는 자신의 노력이 아무
보람도 없이 사라져 버렸음을 느꼈다. 엘리베이터 앞에는 정복을 입고
있는 보안요원들이 무표정한 얼굴로 아이라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
다. 엘리베이터는 통제실에서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다는 걸 모르고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막상 이렇게 결과가 나오고 보니 기운이 쑥 빠
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보안요원 대기실인가요?"
아이라가 물었다.
"아닙니다, 아이라 총경 님. 이곳은 귀빈실입니다."
보안요원 중 하나가 아이라에게 말했다. 아이라는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보안요원이 농담을 하고 있는 건지 아닌지도 구분하기
힘들었던 것이다. 엘리베이터의 문은 닫히지 않았다. 아마도 통제실에
서 조종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영장과 신분증을 제시해 주십시오."
"일개 보안요원에게 그런 걸 제시할 이유는 없어요."
말 자체는 꽤나 도발적이었지만 아이라의 목소리는 반대로 기어들어
가고 있었다.
"영장이 없으신가요?"
"포레스트 회장을 불러와요."
"시장님께서는 예약된 분 외에는 손님을 맞지 않으십니다."
"아이라 총경이 왔다고 해요."
"안됩니다."
"아이라 총경이 왔다고 하라니까요."
"통합정부 의장이 온다고 해도 안됩니다. 일단 따라오시죠."
"지금 경찰 간부를 오라가라 하는 건가요?"
아이라는 마지막 힘을 짜내어 조금은 날카로운 음성으로 이렇게 말
했다. 하지만 효과는 없었다.
"정중하게 모셔."
보안요원은 대답을 하는 대신 다른 보안요원에게 이렇게 말했던 것
이다.
아이라는 보안요원에게 둘러 싸여 복도를 걸어야 했다. 그리고 오래
지 않아 아이라는 대기실이라고 쓰여 있는 커다란 문 뒤로 안내되었
다. 이곳에서 아이라는 두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다.
먼저 하나는 보안요원의 말대로 귀빈실은 아닐지 몰라도 접객실은
분명하다는 점이었다. 아이라가 요원들에게 인도된 곳은 고대 행성 어
스의 로마 장식이 되어있었고 포미사이드 레이스 종업원이 서서 아이
라의 시중을 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 벽면에는 작은 도서관에 버금갈
만한 책이 꽂혀 있었고, 그 옆으로는 간식용 셀러드 바가 마련되어 있
었다. 벽면에 설치된 스피커에서는 조용한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다른 하나는 아이라 뿐만 아니라 틸트도 접객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
었다. 틸트는 셀러드 바에서 막 당근주스를 만들어 먹으려던 참이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어이가 없다는 듯 아이라가 물었다.
"총경 님도 드시겠습니까?"
틸트가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아이라는 그저 한숨을 내 쉴
수밖에는 없었다.
"죄송합니다. 허기가 져서요."
아이라는 핀잔을 주는 대신 손을 저었다. 마음대로 하라는 거였다.
어차피 무리한 작전이었다. 그런 식으로 정면 돌파를 한다고 해서 될
가능성은 매우 희박했다.
"저, 총경 님."
틸트가 아이라에게 접시를 내밀면서 말했다. 접시에는 셀러드 바에
서 담아온 야채와 소스가 보기 좋게 올려져 있었다.
"상당히 신선하더라구요. 좀 드시죠. 저기 저 종업원이 담아 준 건데
요, 좀 드셔 두는 편이 좋지 않겠습니까?"
아이라는 틸트의 말에 짜증이 났다. 지금이 셀러드나 먹고 있을 때
인가? 아이라는 따끔하게 야단을 쳐야 하는 걸까 생각하다가 그만 두
었다. 어쩌면 여유있게 대처하고 있는 틸트의 태도가 그리 나쁘지 않
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군에 있을 때는 틸트처럼 행동하
고 나서 '전투력보존입니다'하고 대답하는 병사들을 종종 볼 수 있었
다.
아이라도 막 전투력을 보존할까, 생각하는 참이었다. 문이 열리며 보
안요원과 함께 포미사이드 레이스 안내원이 들어섰다.
"따라오시죠."
보안요원이 무뚝뚝한 말투로 말했다. 아이라와 틸트는 서로의 얼굴
을 바라보았다.
"설마 경찰을 감금할 생각은 아니겠죠?"
"아닙니다. 뵙고 싶어 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보안요원은 이렇게만 말하고는 등을 돌려 버렸다. 포미사이드 레이
스 안내원은 아이라와 틸트를 바라보았고, 결국 아이라와 틸트는 안내
원을 따라 나설 수밖에 없었다. 계속 이곳에 있는 것도 좋겠지만 셀러
드를 먹기 위해 이곳에 온 건 아니었다.
안내원은 틸트와 아이라를 엘리베이터로 안내했다.
"어디로 가는 거죠?"
아이라가 물었지만 보안요원은 대답대신 엘리베이터의 문을 닫아 버
렸다.
"말하기 싫은 모양입니다, 총경님."
틸트가 인상을 찌푸리면서 말했다.
"나도 마찬가지야, 틸트."
아이라는 입을 굳게 다물어 버렸고, 엘리베이터가 도착할 때까지 대
화는 이어지지 않았다.
이동하던 엘리베이터는 곧 멈추어섰다. 아이라는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릴 때까지 아주 잠시 동안 긴장했다. 아이라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무엇일까에 대한 두려움, 기대, 공포 같은 것이 아이라를 긴장하게 만
들고 있었다. 아이라는 근무중이었기 때문에 무장을 하고 있었고 그건
틸트도 마찬가지였지만 이런 상황에서 무기를 뽑아 들고 있을 수는 없
었다. 때문에 긴장감은 아이라가 차고 있는 니들건을 더욱 무겁게 느
껴지게 하고 있었다.
마침내 문이 열렸다. 하지만 아이라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어둠뿐이
었다. 엘리베이터 내부의 조명이 엘리베이터 밖을 비추어 주었지만, 그
빛이 어둠을 밝게 하지는 못하게 하고 있었다.
"내리지 마."
틸트가 막 발을 내 딛으려는데 복도 저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이라는 목소리가 상당히 이상하다고 느꼈다. 아마 울려서 그렇겠지
싶었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그냥 들어, 거기서."
"포레스트 시장님? 시장님 맞습니까?"
아이라가 큰 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복도 저 편에서는 대답 대신에
커다란 웃음소리만 들려 왔을 뿐이었다. 아이라는 그 웃음소리를 듣는
순간, 마치 지금껏 쓰다듬고 있었던 강아지가 실은 털뭉치였다는 걸
알아차렸을 때의 느낌과도 같은 생경함을 느꼈다. 목소리는 휴먼 레이
스의 언어를 말하고 있었지만, 그 웃음소리는 전혀 휴먼 레이스의 웃
음소리 같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가 글자로 하- 하- 하- 하고 반복적
으로 적어 놓은 것을 읽고 있는 것 같은 소리였다.
"시장 님?"
아이라는 조심스럽게 다시 한 번 물었다. 어둠의 저편에서 뭔가가
다가오고 있는 게 보이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그것은 희미하게 윤곽
이 드러나고 있었다. 처음에는 작은 상자와 같았지만 다가오면 다가올
수록 그것은 휠체어의 모습으로 분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마침내 엘리베이터의 강한 조명빛이 미치는 곳에 휠체어가 도착했을
때, 아이라는 휠체어에 앉아 있는 존재의 모습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그것은 휴먼 레이스였지만 동시에 휴먼 레이스처럼 보이지 않
았다.
일단 사지가 없었다. 몸통은 휠체어에 가죽끈으로 고정이 되어 있었
다. 그리고 얼굴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가죽으로 된 거대한 마스크가
자리하고 있었다. 마스크에는 작은 스피커가 입 부분에 자리하고 있었
는데, 아이라는 그것이 휴먼 레이스의 웃음 소리를 생경하게 느껴지게
만든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틀림 없이 이 휴먼 레이스는 성대를
잃고 인공 성대로 음성을 내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존재를 휴먼 레이스라고 알아보게 한 것은 목
과 쇄골이었다. 그것은 틀림없이 휴먼 레이스가 가지고 있는 신체적
특징 중 하나였다. 아이라는 아무런 말을 할 수가 없었고 틸트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난 시장이 아냐."
"...그건 알겠군요."
아이라는 침착을 유지하기 위해서 조금 지나치다 싶을 만큼 냉정하
게 말했다. 아이라는 일단 눈앞의 휴먼 레이스를 경멸해야겠다고 생각
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도저히 바라보고 있을 수도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누구도 시장이 아니지."
다시 한 번 휴먼레이스의 입에 달려 있는 스피커에서 기계음에 가까
운 웃음소리가 흘러 나왔다. 아이라는 틸트가 떨고 있다는 걸 알아차
리곤, 틸트의 등짝을 세게 한 대 후려쳤다. 그러자 틸트의 허리가 곧추
섰고, 아이라는 그 힘을 바탕으로 다시 대화를 이어나갈 수 있었다.
"그럼 누구시죠? 중역? 간부? 왜 우리를 불렀죠?"
"한 번에 하나씩 물어보지 그래, 아이라."
"좋아요. 먼저, 누구시죠?"
아이라는 자신이 완전한 평상심으로 상대를 대하고 있지 못하다는
걸 깨닫고는 다시금 말을 또박또박 하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하면서 이
렇게 물었다.
"나는 아무도 아니야. 나는 죽은 휴먼 레이스야. 기록상에는 그렇게
나와있지."
마치 벽과 대화하는 기분이었다. 그것도 흉물스러운 벽과.
"좋습니다. 그러면 당신을 뭐라고 부르죠?"
아이라가 인내력을 가지고 다시 물었을 때, 상대는 기괴한 웃음소리
를 다시금 내었다. 몇 번 듣고 보니 견디는 건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
니었다. 하지만 귀에 익숙해지면 질수록 상대가 휴먼 레이스가 아닌
기계나 물건으로 여겨지게 되는 것까지 어쩔 수는 없었다.
"부르고 싶은 대로 불러."
억양이 없는 목소리였지만 아이라는 어쩐지 상대가 화를 내고 있는
것 같았다. 왜 화를 내고 있는지 아이라는 알 수가 없었지만, 그래도
상대가 뭔가를 서운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은 어렴풋하게
나마 느낄 수 있었다.
"좋아요. 그냥 아무렇게나 부르기로 하죠. 그런데 왜 날 보자고 한
거죠?"
아무렇게나 부르라고 해서 당장 '지금부터 당신을 아이라라고 부르
죠'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뭐라고 불러야
할지를 고민하면서 시간만 보내고 있을 수는 더더욱 없는 일이었다.
아이라는지금의 대화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 호칭 따위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알려주려고."
밑도 끝도 없는 말이었다. 게다가 억양이 없는 말투에서 아이라는
상대의 진의를 파악할 수가 없었다.
"알려주고 싶어서. 아이라. 시장이 없다는 걸 말이야."
억양 없는 말투였지만 느리게 한 자 한 자 발음하고 있는 걸 보니
진지하게 뭔가를 전하려고 애쓰는 모습이었다. 아이라는 고개를 천천
히 끄덕였다. 말을 계속하라는 거였다. 가죽으로 된 마스크의 중앙에는
눈의 두 어 배는 됨직한 커다란 렌즈가 붙어있었다. 아마도 그것으로
사물을 볼 수 있을 것 같다고 아이라는 생각했다.
말이 이어지길 기다렸지만 상대는 말을 잇지 않았다. 아이라는 상대
가 뭔가를 듣고 싶어한다는 걸 감지해 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게 무
엇인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고, 결국 기다리다가 지친 아이라는 이렇
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포레스트 시장은 없나요?"
"린. 린은 어디로 갔지?"
갑작스러운 물음이었다. 억양 없는 목소리가 지금 물은 말의 의미는
한 참을 생각한 뒤에야 알아낼 수가 있었다. 적어도 지금 상대는 린과
아이라를 알고 있는 휴먼 레이스였다.
"린을 알아요?"
아이라가 물었다.
"린. 린은 어디에 갔지? 늘 같이 있었잖아. 안 그래?"
"그건..."
아이라는 말을 잇지 못했다. 차마 린을 버렸다고 쉽게 말할 수는 없
었던 것이다. 아이라는 행성 어스로 돌아오면서 린을 방치하였다. 누군
가에게 입양이 될 수 있도록 조치하기는 했지만, 그것이 어떤 결과가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생각 해 본 적도 없었다.
"당신, 날 알죠?"
아이라는 대답하는 대신 이렇게 되물었다. 그러자 다시금 억양 없는
웃음이 이어졌다.
"아이라. 너는 늘 수사가 전공이라고 말했어. 수사가 하고 싶다고도
했고. 하지만 그 결과는 별로 신통치 않은 것 같군."
이 말을 듣고서야 아이라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아이
라는 자신이 느꼈던 것과 들었던 말을 종합해 내었고, 그러 오래 지나
지 않아서 결론을 낼 수 있었다.
"로웰 중령님?"
"로웰 중령은 이제 없어. 말했잖아. 죽었다고."
아이라는 소름이 끼쳐왔다. 그리고는 성큼 걸음을 옮겨 휠체어에 다
가갔다. 그 모습을 틸트는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을 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못하고 있었다.
"로웰, 중령님?"
"전에는 그랬어. 하지만 이제는 죽었지."
아이라는 말을 잇지 못하고 뒷걸음질 쳤다. 비록 목과 쇄골만을 눈
으로 확인할 수 있을 뿐이었지만 로웰이라는 건 틀림없는 사실로 여겨
졌던 것이다.
"그렇게 겁내지 마, 아이라. 죽음은 누구나 지니고 있는 거야. 누가
영원히 살고 싶어하겠나?"
아이라는 로웰 중령의 시신을 상상해냈다. 아니, 시신은 아니었을 것
이다. 거의 생명이 끊어져 가는 상태였을 것이다. 포레스트 회장은 그
렇게 만진창이가 된 로웰의 시신을 군에 압력을 넣어 사망처리 한 다
음, 시신을 이런 모습으로 만들어 내었을 것이다. 팔을 떼어내고, 다리
를 떼어내고, 성대를 복원하고... 아이라는 엘리베이터의 닫힘 버튼을
미친듯이 눌러 대었다. 아이라는 그저 이 자리를 떠나고만 싶었을 뿐
이었다.
"나는 이제 영원히 사는 법을 알게 되었어."
아이라는 더욱 더 속도를 내어 닫힘 버튼을 눌렀다. 하지만 엘리베
이터의 문은 단 한 번도 닫힌 적이 없다는 듯, 아이라의 행동에 아무
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아이라. 이제 도시 외곽에는 도시가 들어서게 된다. 마을은 사라질
것이고, 그 역할은 하이어드가 대신 하게 되지. 아이라. 자네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바로 그 일이야."
로웰의 말은 이어지고 있었다.
"아이라 총경님?"
틸트가 미친듯이 버튼을 누르고 있는 아이라의 곁으로 조심스럽게
다가가면서 말했다.
"두려워하지 마. 날 겁내지도 말고. 나는 다만 죽고 싶을 뿐이야."
아이라의 머릿속에는 오직 이 자리를 떠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이곳에 온 목적 따위는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아이라 총경 님!"
틸트가 소리쳤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아이라는 틸트가 감히 자신
을 함부로 부르고 있다는 사실에 분노가 치밀었고, 덕분에 제 정신을
찾을 수 있었다. 아이라는 심호흡을 했다. 냉정을 되찾아야 했다.
"하지만 죽는 건 두려운 일이야. 매일 나는 이 꼴이 되어버린 나를
대해야 해. 하지만 이런 나 자신을 대하는 것 보다는, 죽음이 더 두려
워."
"...로웰 중령님. 그렇다면 제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아이라가 말했다. 로웰은 한 동안 말이 없었다. 그 침묵은 죽음만큼
이나 무겁게 아이라와 로웰 중령 사이에 내려앉고 있었다.
"싸워. 지금의 위치에서. 뛰어. 죽기 직전까지. 멈추지 마, 아이라."
로웰 중령이 말했다. 하지만 그 말은 아이라에게는 로웰과 아이라
사이에 놓여 있는 텅 빈 공간만큼이나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마을은 사라질지도 모르죠, 로웰 중령님. 그리고 그렇게 영원히 살
고 싶다면, 그렇게 하는 것도 나쁘진 않을 거에요."
아이라는 다시금 냉정을 되찾고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저는 물러서지 않아요. 절대로."
아이라는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지금 내가 왜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거지? 내가 왜 이런 말을 해야 하는 거지? 저
휴먼 레이스는 진짜 로웰 중령일까? 아이라는 이렇게 스스로에게 묻고
있었다.
"시장을 만나게 된다면, 알 수 있을 거야."
한 참이 지난 후에야 로웰은 이렇게 말을 했다. 그리고 말이 끝나자
로웰의 휠체어는 다시 어둠 속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시장은 어디있죠?"
아이라가 로웰에게 소리쳐 물었다.
"말했잖아. 시장은 이제 어디에도 없다고."
"로웰. 말장난하지 말아요, 제발."
아이라의 목소리는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로웰이 어둠 속으로 사라
져가면 사라져 갈수록 이대로 보낼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고 있었다.
아니, 이대로 보낼 수는 없었다.
"겁쟁이."
아이라가 말했다. 아이라의 말이 끝나자, 로웰의 휠체어가 멈추어 섰
다.
"로웰. 나는 당신이 이런 겁쟁이인줄은 몰랐어요."
아이라는 엘리베이터 밖으로 발을 내딛었다. 휠체어가 조금 움찔거
리면서 뒤로 물러섰다. 그 움직임은 아이라의 기세에 눌려 반사적으로
움직이는 것 같았다.
"당신은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어요. 그래서 제대로 말을 하지 못하
는 거에요. 그렇죠?"
"...내가 널 불렀어, 아이라."
억양 없는 로웰의 음성이었지만 아이라는 이 말에서 로웰이 제정신
이 아니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아이라는 이런 식으로 자신을 부르
는 로웰을 본 적이 없었다.
"시장이 알면 날 가만 두지 않을 거라는 걸 알면서 말이야. 날, 날
죽일 거야. 마을 주민들 처럼. 쓸모 없어지면 죽여 버리는 거지. 마을
을 불태우는 것처럼, 농경지를 갈아서 엎어 버리는 것처럼. 망명객들처
럼."
"말 해줘요."
"나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게 아니야. 나는 그저 기다리는 거야, 죽음
을. 세상에 있는 그 어떠한 생명체도 영원히 살수는 없어. 절대로."
"맞아요. 영원히 살 수는 없죠. 그러니까 보람있게 살아 봐요, 로웰."
로웰은 잠시 대답이 없었다. 아이라는 로웰의 입 부분을 주시하다가
마스크의 밑으로 흘러 내리고 있는 로웰의 침을 보았다. 로웰은 침을
흘리고 있었던 것이다. 아이라는 조금만 더 다그치면 정보를 얻어낼
수 있다는 수사관의 직감이 살아나는 걸 느꼈다.
"군."
로웰이 말했다.
"군이 알고 있어."
"군?"
아이라가 물었다. 로웰의 마스크를 쓴 얼굴이 천천히 아래위로 움직
였다.
"제7야전군. 12군단. 알잖아. 여기 주둔군. 거기서 도와주고 있어."
아이라는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그것은 12군단 소속 특공 여단을
지휘하는 율리스 장군이었다. 하지만 곧 율리스 장군의 참모를 떠올릴
수 있었다.
"로스..."
아이라는 중얼거렸다. 이제 로웰에게 더 이상 얻어낼 정보는 없을
것 같았다. 아이라는 로웰에게 가깝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맨손으로 로
웰의 목을 따라서 흘러내리고 있는 침을 닦아 주었다.
"...하지만 이제 시장은 더 이상 시장이 아니야."
"당신 같은 처지인 모양이군요. 중태죠?"
아이라가 물었다. 하지만 로웰은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그 기계음처
럼 들리는 웃음소리조차도 낼 수 없는 상황인 것 같았다.
"고마워요, 로웰."
"알게 될거야, 시장을 만나면."
로웰은 이렇게 말하고는 휠체어를 돌렸다. 아마도 로웰의 신경과 휠
체어의 제어기관은 연결이 되어 있는 모양이었다.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가는 로웰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아이라는 다시 엘리베이터에 올랐
다.
"손수건."
아이라가 틸트에게 말했을 때, 틸트는 아이라가 뭘 말하는지 몰라서
잠시 머뭇거리다가 얼른 주머니에 넣어둔 손수건을 꺼내어 아이라에게
내밀었다. 아이라는 손수건으로 자신의 손을 닦아 내었다.
그러는 사이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혔고, 문이 닫히자 마자 엘리베이
터는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제 어떻게 하실 건가요, 아이라 총경님?"
틸트가 아이라에게 물었다. 아이라는 대답대신 손수건을 돌려주었다.
아이라는 실은 주저앉고 싶었다. 너무나도 갑작스럽게 다가온 충격
에 아이라는 제대로 생각을 전개시킬 수가 없었던 것이다.
"총경 님?"
아이라의 표정이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틸트가 이렇게 물었다.
"로스."
아이라가 대답했다.
"로스를 찾아 갈 거야."
아이라는 말했다.
엘리베이터가 열렸을 때, 아이라는 불타고 있는 마을과 마을 주민을
강제로 이주시키고 있는 리퍼를 위시한 용병들을 떠올렸다. 어쩌면 그
들이 시장을 보호하는 임무를 띠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현재로서는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도대체 시장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아이라가 이런 의문을 품고 있
는 동안에도, 마을에서는 작전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제 목:[하이어드] Who wants to live forever? -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