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이어드-47화 (47/52)

6.묘지

리퍼는 마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을 주민들은 줄을 서서 일렬로

호송차량에 오르고 있었다. 황량한 사막의 바람이 주민들 사이를 스치

고 있었다. 바람결에 주민들의 옷자락은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흔들리고 있었다.

"주민 철수 완료했습니다."

루덴스가 리퍼에게 보고했다. 이 마을은 이제 곧 불탈 것이고, 주민

들은 도시의 노동인력으로 흡수 될 것이었다. 작전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예정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래야만 했다. 남아 있는 마

을의 수가 얼마였던가? 어찌되었건 마을이 모두 사라지고 나면, 리퍼

와 시장과의 계약은 끝이 날 거였다. 그리고 나면 뭘 해야 할까. 리퍼

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지만 마땅하게 떠오르는 생각은 없었다.

"대장님."

리퍼의 옆에 서 있던 컨이 말했다. 리퍼는 컨이 자신을 걱정하고 있

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컨은 덩치가 크고 험악해 보이는 인상을

가지고 있기는 했지만, 가깝게 지내다 보면 누구 못지 않게 섬세한 마

음을 가지고 있는 사내였다. 하지만 표현을 하는 법은 잘 몰라서 이렇

게 그저 부르고 바라보는 것만으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곤 했다.

"괜찮아."

리퍼는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괜찮지 않다는 것은 리퍼도, 컨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마을은 이제 정리가 되어가고 있었다. 이제 곧 집들이 불타오를 것

이고, 이곳은 웨이팅하우스 시의 공장지대로 바뀔 준비를 하게 될 것

이다. 중장비들이 이곳에 토목공사를 시작할 것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라디오를 만드는 공장이 들어설 거였다. 리퍼는 자신이 하는 일이 가

지고 있는 의미는 될 수 있으면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아무

리 리퍼가 자신을 통제하려고 해도 그럴 수 없을 때가 있었다.

"대장님. 사소한 문제가 생겼습니다."

루덴스가 리퍼에게 보고했다. 리퍼는 '사소한'이라는 말을 강조하는

루덴스의 모습에서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닐 거라고 짐작했다.

"가지."

리퍼는 루덴스를 따라나섰다.

무슨 작전을 하건 크고 작은 문제들이 발생하곤 했다. 마을 주민들

이 집단적으로 반발하고 나서는 경우도 있었고, 몇몇 주민들이 지독하

게 저항하기도 했다. 하지만 결과는 늘 같았다. 행성 어스에 생명체가

살기 시작한 이래로 단 한 번도 변하지 않은 사실. 강자가 이기는 법

이다.

"저 친구입니다."

루덴스가 말했다.

리퍼는 집을 바라보고 있었다. 새로 지은 듯 다른 집에 비해서 매우

깨끗하고 깔끔해 보이는 집이었다. 그리고 그 집 앞에는 리퍼의 부하

들이 정렬해 있었다. 부하들은 머뭇거리고 있었다. 리퍼는 가까이 다가

가서야 부하들이 왜 머뭇거리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가! 가란 말야, 이 개자식들아!"

집 앞에는 청년이 웃옷을 벗고 쓰러져서 고래고래 고함을 치고 있었

다.

"가! 여기가 어딘지 알아? 나랑 우리 어머니가 일생동안 벌어서 겨

우겨우 마련한 집이야! 너희들이 이렇게 함부로 뺏을 수 있는 곳이 아

니야!"

청년은 눈매가 매서워 보였다. 대부분의 주민이 그렇듯 짙은 갈색의

피부를 하고 있었고, 웃옷을 벗어 던진 덕분에 비쩍 마른 상체가 마른

나뭇가지처럼 앙상하게 드러나 있었다.

"뭘 하고 있는 거지?"

리퍼가 묻자 부하들이 머뭇거렸다.

부하들은 거의 실신하다시피 한 여인네 하나를 부축하고 있었다. 아

마도 달려들어 항의의 뜻을 표하다가 지쳐 쓰러진 모양이었다. 리퍼는

실신하다시피 한 여인의 입에서 욕설이 흘러나고 있는 걸 보면서, 저

여인네가 집에 대한 애착이 꽤 강한가 보다 짐작할 수 있었다.

"아무도 다치게 하지 말라고 하신 지시 때문에..."

부하 중 하나가 중얼거리듯 답변했다. 리퍼는 더 부하의 말을 막았

다. 부하는 리퍼의 뜻을 알아차리곤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꼬마야."

리퍼는 쓰러져 있는 청년에게 다가가 나즈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난 꼬마가 아냐! 난 성인이야!"

청년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키는 리퍼와 거의 비슷해서 청년의

눈과 리퍼와 눈이 마주쳤다.

"내 이름은 리바르. 똑똑히 들어 둬. 내 이름을 리바르라고."

청년은 눈을 부릅뜨고서 말했다. 리퍼는 그 눈동자 뒤편에서 이글거

리고 있는 청년의 분노가 느껴졌다. 이렇게 완강하게 버틴다면 작전이

늦어질 건 분명한 이치였다.

리퍼는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리바르라고 자신을 밝힌 청년의 어

머니로 보이는 여자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리바르의 시선이

어머니 쪽으로 돌아갔다. 리퍼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오른 주먹을

리바르의 명치를 향해 날렸다. 리바르는 신음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하

고 바닥에 무릎을 꿇고 쓰러졌다.

"꼬마야."

리퍼가 청년에게 다시 한 번 다가가면서 말했다. 청년은 고통 때문

에 숨도 제대로 쉬고 있지 못했다.

"나이만 먹는다고 해서 누구나 다 어른이 될 수 있는 건 아니란다.

그리고, 너는 지금 내 일을 방해하고 있어. 방해하는 꼬마는 때려 줘야

지. 안그래?"

리바르는 고통을 참으며 고개를 들었다. 상당히 고통스러울 것임에

분명했지만 리바르의 눈동자는 여전히 분노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리퍼는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 눈동자다, 꼬마야."

리퍼가 말했다. 리바르는 욕설을 내뱉으려는 듯 숨을 고르고 있었지

만 여의치 않은 모양이었다.

"일어나! 일어나서 덤벼!"

리퍼가 갑자기 큰 소리로 소리쳤다. 그러자 리바르는 배를 움켜쥐고

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리바르의 다리는 이미 후들거리고 있었

다. 리퍼는 리바르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러자 리바르는 오른 손을

들어 리퍼에게 주먹을 날리려고 했다. 하지만 리퍼는 주먹을 가볍게

피하고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걷어찼다. 리바르는 다시 바닥에 쓰러졌

다.

한동안 침묵이 감돌았다. 리퍼의 부하들도, 부하들에게 이끌려 호송

차량에 오르는 주민들도 아무도 말이 없었다.

"...억울해."

이윽고 리바르가 정적을 깨고 이렇게 중얼거렸다.

"억울해. 너무 억울해."

리바르는 울지 않으려는 듯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이미 리바르의

두 눈동자에는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그러면 곤란하지, 꼬마야. 아까 그 눈은 어디로 갔지?"

리퍼가 말하자 리바르는 다시 한 번 리퍼를 노려보았다.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지만, 눈동자의 분노는 다시 불타오르고 있었다. 리퍼

는 그 눈을 보면서 다시금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래야지."

리퍼는 말을 이었다.

"강해 져라, 꼬마야. 나한테 이름으로 불리고 싶다면 말이지. 강해져

서 나같은 어른들과 싸워서 이겨라. 등뒤에서 쏴도 되고, 내 가족을 인

질로 잡아도 좋지.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같은 어른을 이길 수 없을테

니까 말이야."

리퍼는 손짓으로 부하들에게 리바르를 끌고가라고 지시를 내렸다.

부하 둘이 튀어나와 리바르의 양 팔을 잡았다.

"그리고 그렇게 해야지 어른이 될 수 있는 거란다, 꼬마야."

리퍼는 붙잡혀 가는 리바르에게 이렇게 마지막 말을 건네었다. 부하

들은 다시금 작전을 실행해 나갔다. 주민들을 호송차량에 태우고, 마을

의 집에는 폭발물이 설치되었다.

"완료했습니다, 대장님."

컨이 리퍼에게 보고했다. 리퍼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래. 출발하지."

리퍼가 말했다.

부대는 이제 마을을 소각할 준비가 끝났다. 호송차량과 함께 부대가

이동을 시작했고, 안전거리에 이르자 마을에서 폭음과 함께 불기둥이

솟아올랐다. 이제 라디오 공장을 지을 수 있는 준비가 끝난 것이다.

지휘용 호버카 뒷좌석에 앉아 있던 리퍼는 그 광경을 여유있게 지켜

보고 있었다. 타오르는 불꽃을 바라보면서, 리퍼는 숨을 크게 쉬었다.

허탈했다. 계약이 지켜지는 것을 바라보는 것은 늘 허탈한 일이었다.

약속은 지켜질 것이다. 포레스트 회장은 리퍼에게 정해진 대금을 치를

것이고, 부하들도 못지 않은 보상을 받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뿐이었

다. 그 이상의 어떠한 의미도 없었다.

"대장님. 아까, 그 청년 말입니다."

컨이 말했다. 리퍼는 컨을 바라보았다. 말수가 없는 컨이 이렇게 먼

저 말을 걸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아마도 자신을 걱정하고 있는

것이리라 싶었다.

"너무 심하신 것 아닙니까? 헬멧을 쓰고 계셨던 것도 아니고..."

"왜? 내 얼굴을 기억했다가 나중에 복수라도 할까봐서?"

컨은 대답하지 않았다. 리퍼의 말 그대로 였기 때문이었다.

"믿을지 모르겠지만 말야, 컨,"

리퍼는 호버카 뒷좌석에 목을 기댔다.

"그래줬으면 좋겠어."

리퍼의 말에 컨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번에는 대장의 말을 명확하

게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만약에 말이야."

리퍼는 말을 끊고는 한 참 동안 가만히 있었다.

"내가 죽게 된다면 누가 이 부대를 지휘하게 되지?"

"접니다, 대장님."

불편할만한 질문이었지만, 컨은 아무 감정 없이 리퍼의 말을 받아들

였다. 리퍼는 고개를 끄덕였다.

"난 자네가 우리 부대를 지휘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등뒤에서, 아

까 그 친구 같은 친구에게 당했으면 좋겠단 말일세. 무슨 말인지 알겠

지?"

"저는 그저 하이어드일 뿐입니다."

"계약만 지킬 뿐이라는 건가?"

"예."

컨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사실 리퍼가 컨을 믿고 의지하는 건 컨이

스스로를 충실한 하이어드라고 믿고 있다는 점이었다. 하이어드는 계

약을 지킨다. 용병이 되었건, 시시껄렁한 청부업자가 되었건, 아니 어

쩌면 공장에서 일하는 공원이나 공무원, 군인, 조종사... 모두가 하이어

드일지 몰랐다. 다만 하이어드라는 말은, 계약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이

들을 일컫는 말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리퍼는 어쩐지 자신을 믿고 있

는 포레스트 회장이 이해가 될 것도 같았다. 계약서가 있는 한, 그리고

그 계약이 이행되고 있는 한, 리퍼는 결코 포레스트 회장을 배신 할

수 없었다. 리퍼 역시 하이어드인 것이다.

"그래. 그냥, 그런 거라네."

리퍼가 이렇게 말하는 순간에도 마을에서는 불길이 솟구치고 있었

다. 마을 주민들이 몇 대에 걸쳐서 닦아 놓은 기름진 땅이 사라지고

있었다. 몇 대에 걸쳐 지은 집들이 재로 변하고 있었다. 이제 그들이

꾸었던 꿈은 라디오 공장의 꿈으로 바뀔 것이었다.

리퍼는 부대 복귀를 확인하고 점오를 받은 뒤, 휴식을 명령하고는

혼자 호버카를 몰고서 주둔지를 빠져 나왔다. 포레스트 회장에게 갈

때는 늘 혼자였다. 호위병력이나 조종사를 대동하지 않았다. 그것은 보

안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혼자 행동하는 게 편했던 것이다.

리퍼는 포레스트 회장이 오래 전에 건설해 놓은 안전가옥에 닿았다.

정문에 도착하자 경비실에서 근무를 서고 있던 보안요원이 리퍼의 신

분을 확인했다. 리퍼는 집사에게 얼굴을 보여주었고, 보안요원은 수동

으로 차단기를 열었다.

포레스트 회장은 옛것을 선호하는 편이었다. 누군가가 직접 확인을

하고, 누군가가 직접 문을 열어 주는 방식. 포레스트 회장은 그것만을

신용하는 듯 했다.

호버카는 정문을 지나, 본관까지 이어져 있는 긴 길을 따라 움직여

나갔다. 길은 하얀색 대리석으로 되어 있었고, 길옆에는 포레스트 회장

이 사 모은 고대의 조각상들이 줄지어있었다. 리퍼는 그 조각상을 바

라볼 때마다 죽은 자의 향기가 느껴지는 듯 했다. 어쩌면 그런 향기야

말로 포레스트 회장에게 꼭 어울리는 향기일지 몰랐다.

본관 앞에 호버카를 세워 두고, 리퍼는 긴 계단을 올라가 본관의 출

입문 앞에 당도했다. 안에는 의료진과 시종 몇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다. 안전가옥이 갖추어야 할 가장 큰 요건은 보안이었다. 아무리

겹겹으로 방어되고 있는 안전가옥이라고 해도 대규모의 부대가 덮쳐

온다면 무너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위치를 알지 못한다면 대규모의 부

대는 덮칠 수 없다.

그래서 안전가옥에 상주하는 인원은 최소로 되어 있었고, 이들은 외

부와의 접촉을 극히 삼가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만약의 경우가 발생

하게 되면, 리퍼가 지휘하는 특수기동대가 출동하게 되어 있었다.

리퍼는 문을 두드렸다. 문에는 그 흔한 초인종이나 인터폰 따위가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잠시 후, 비홀더가 열렸다. 포레스트 회장의 주

치의 겸 시종이 리퍼를 확인하고는 문을 열었다.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시종이 말했다. 리퍼는 대꾸하지 않고 2층에 마련되어 있는 응접실

로 향했다. 응접실에는 포레스트 회장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거였다.

응접실의 조명은 어두웠다. 이제는 더 이상 빛을 두려워 할 리 없는

포레스트 회장이었지만, 오랫동안 각인 된 빛에 대한 공포는 쉽게 지

워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어서와, 리퍼. 편하게 앉아. 오늘은 기분이 무척 상쾌하군."

포레스트 회장은 상당히 들떠 보였다. 리퍼는 포레스트 회장에게서

어린아이의 목소리를 느끼고는 두려움마저 들었다.

"일은 잘 해결되었습니다."

리퍼가 말했다.

"그래야지. 암. 그래야 하고 말고. 어서 앉아. 차라도 한 잔 들겠나?

아니면 술은 어때?"

회장은 찬장에서 술병을 꺼내면서 말했다. 어둠 속에서도 포레스트

회장의 움직임은 매우 빠르고 가벼워 보였다.

"사양하겠습니다."

리퍼가 대답하자 포레스트 회장은 그거 아쉽군, 하면서 술병을 다시

찬장에 집어 넣었다.

"아주 오래된 좋은 술이 한 병 있었는데 말이야. 맥주를 증류하면

위스키가 되고, 와인을 증류하면 브랜디가 되지. 이건 최고급 와인을

증류해서 만든 브랜디야. 아마 200년은 됐을 것 같아. 아는 친구가 구

해다 줬지."

"이 일을 시작한 후로 술은 마시지 않습니다."

리퍼의 말에 포레스트 회장은 웃음을 터트렸다.

"건강 때문인가? 역시. 자네도 오래 살고 싶은 게로군."

"아닙니다."

"건강 때문이 아니라면 왜지? 이 좋은 걸 마다하고 말이야. 흠. 미안

하지만 나 혼자 조금 마셔봐야겠어. 이거, 아주 좋은 술이라고 해서 말

이야. 사실 아직 맛도 못 봤다네. 워낙 귀한거라고 구해다 준 친구가

그래서 말이지, 뚜껑을 따기가 쉽지 않더라고."

"드십시오."

리퍼가 말하자 포레스트 회장은 뚜껑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하

지만 잘 따지지 않는 모양으로 포레스트 회장은 한 참을 끙끙거리며

힘을 쓴 다음에야 병뚜껑을 열 수 있었다.

"자. 그럼 나는 한 잔 하겠어."

포레스트 회장은 브랜디 잔에 가득 술을 따르고는 응접실 옆에 있는

커다란 피아노 앞에 앉았다. 포레스트 회장을 피아노의 덮개를 열고는

건반을 눌렀다. 피아노의 음이 길게 응접실을 메우다가 포레스트 회장

이 건반에서 손을 떼자 뚝 그쳤다.

"피아노라는 악기야. 역시 아주 귀한 거지. 이건 밑에서 올라온 거

야. 푸우순 시였던가? 거기서 누군가가 징발해 온 거라고 하더군. 거기

시장이 선물로 준 거지. 참. 죽었다고 했던가? 일일이 직원들이 하는

일에 신경 쓰지는 않지만 말이야, 하여간 안 된 일이야. 이런 좋은 선

물을 주고도 죽어야 했다니 말이지."

포레스트 회장은 이렇게 말하곤 건반을 몇 번 아무렇게나 두들겼다.

그 소리는 음악이 아닌 소음일 뿐이었다.

"인명 피해는 있었나?"

포레스트 회장이 연주를 멈추고는 리퍼에게 이렇게 물었다.

"없었습니다. 이건 모탈 작전이 아니었으니까요."

리퍼는 모탈이라는 발음을 입으로 뭉개면서 했다. 회장을 눈앞에 두

고서 모탈이라는 말을 쓰는 게 어쩐지 어울리지 않는 듯 했던 것이다.

"그래. 그래야지. 만약 누군가를 죽여야 한다면 완전히 다 죽여버려

야지. 그게 모탈들의 운명이야. 운명을 따라야 할 것들은 운명을 따라

야 뒷 탈이 없거든. 지금 주둔지로 삼고 있는 그 마을도 그렇지. 그것

참 생각해 보면 안된 일이야. 그 마을이 반란군 포스트라는 이유 하나

만으로 그렇게 모조리 다 죽여버릴 것까지는 없었는데 말이지. 안 그

런가?"

포레스트 회장의 말에 리퍼는 마을에서 보았던 리바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던 청년을 떠올렸다. 순간 속에서 뭔가가 울컥 치밀어 올랐

고, 그것은 리퍼의 입을 열게 만들었다.

"회장님이 주민들의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시는지는 몰랐습니다."

리퍼의 목소리는 흥분으로 약간 떨리고 있었다.

"나라고 생명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겠나? 그건 큰 오판이야, 리

퍼."

"영원히 살 분이 할 말 같지는 않군요."

리퍼가 말하자 포레스트 회장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리퍼는 그

가느다란 웃음소리가 너무나도 혐오스럽게 느껴졌다.

"자네도 영원히 살고 싶은 거지? 그런 거지?"

포레스트 회장이 마치 어린아이가 친구를 놀리듯 말했다.

"전혀요. 그렇게 영원히 산다면 저는 사양하겠습니다."

"오늘은 사양하는 것도 많군. 리퍼."

포레스트 회장의 목소리는 어느 사이 싸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죽고 싶어하지 않아. 누구나 말이지. 그리고 영원히 살 수만 있다면

누구나 그렇게 할 거야. 자네도 마찬가지야, 리퍼. 거짓말은 하지 말게

나."

"아뇨."

리퍼의 목소리가 다시금 흥분으로 떨려왔다.

"저는 영원히 살고 싶지 않습니다."

"거짓말."

회장의 목소리는 장난끼로 가득했다.

"아닙니다. 죽는 게 두렵냐고 물으시면 그렇다고 답하겠습니다. 하지

만 누구나 죽는 겁니다. 그리고, 그건 자연스러운 겁니다. 때문에 저는

어떻게 죽느냐는 게 중요하지, 어떻게 죽음을 피하느냐가 중요하다고

는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습니다."

리퍼는 말 사이사이를 끊지 않고 단숨에 이렇게 말했다. 포레스트

회장은 리퍼의 말에 한 참동안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리퍼는 자

신의 말에 불쾌감을 느낀 게 아닐까 싶었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포레

스트 회장은 이내 곧 활기찬 음성으로 웃음을 터트렸던 것이다.

"자네는 그럼 죽을 자리를 찾아다니는 거겠군."

리퍼는 말이 없었다.

"여길 좀 보게."

포레스트 회장은 응접실에 놓여있는 거대한 책꽂이를 가리키면서 말

했다.

"누구나 한 번 죽기 마련이야. 그래서 자식을 남기거나, 업적을 남기

려고 발버둥을 치는 게지. 그렇게 해서라도 자신의 흔적응 영원히 남

기고 싶어서 말이야. 실은 나도 그랬다네. 나는 결혼에는 관심이 없었

지만, 업적에는 관심이 컸어. 그래서 엉망으로 늙도록 라디오 공장과

시장 자리를 얻어내기 위해서 뛰어다녔지. 그런데 말이야, 자식도 업적

도, 모두가 다 죽음의 냄새가 풍기더란 말이야. 그래서 나는 죽음을 피

할 방법을 찾았던 거야."

포레스트 회장은 이렇게 말하면서 책꽂이에서 책을 한 권 꺼내었다.

"지금은 쓸모 없는 것이지만, 이건 그 연구를 위한 자료들이야. 트랜

서에 대한 자료들, 미싱에 대한 자료들, 뭐 이런 것들로 가득 차 있지.

아, 이걸 보관하고 있는 건 다른 의미가 있는 게 아닐세, 리퍼. 나는

죽음을 극복해 냈고, 여기에 있는 건 그 기념품들일 뿐이야. 그저 기념

품일 뿐이라네."

포레스트 회장은 책장을 몇 번 넘기다가 도로 책꽂이에 책을 꽂아

넣었다.

"내가 이렇게 구니까, 어린애 같나?"

포레스트 회장이 짐짓 진지하게 물었다.

"아닙니다. 시장님은 꼬마가 아니니까요."

리퍼가 말하자 포레스트 회장은 더 이상 재미있는 농담을 들을 수는

없겠다는 듯이 깔깔 거리면서 웃었다.

"그거 참 재미있는 말이군. 맞아. 나는 꼬마가 아니야. 아무리 키가

작고 팔이 짧다고 해도 말이지."

리퍼는 꼬마라는 말을 듣고 즐거워 하는 포레스트 회장을 보면서,

포레스트 회장은 정말로 꼬마가 아니라는 사실을 실감했다.

"피아노 위에 파일이 있네."

웃음을 멈춘 포레스트 회장이 다시 침착한 음성으로 리퍼에게 말했

다. 리퍼는 파일을 집어 들었다. 파일에는 사진과 인적사항이 들어 있

는 서류 등이 담겨 있을 것이었다.

"죽을 장소를 잘 찾아보게, 리퍼. 이건 어때? 임무에 실패해서 내가

리퍼를 죽이면 말이야. 그건 아주 잘 죽는 게 될까? 일하다가 죽는 건

직업인의 명예로운 죽음이라고들 하더군. 자네는 하이어드니까 그렇게

죽는 게 잘 죽는 걸까?"

포레스트 회장이 리퍼를 이렇게 비꼬면서 말했다. 리퍼는 파일을 열

어서 내용을 확인했다.

"제가 죽을 자리는 제가 찾을 겁니다."

리퍼는 이렇게 말하고는 돌아서서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등뒤로 웃

음소리와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는 소리가 동시에 들려왔다. 그리고 리

퍼는 묘지를 생각하고 있었다. 누구나 한 번은 죽는다. 누구나 한 번

은. 리퍼는 속으로 이렇게 되뇌고 있었다.

제 목:[하이어드] Who wants to live forever? -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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