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이어드-48화 (48/52)

7.방송

푸우순 시를 빠져나가면서 메이런은 조명기구를 빼놓지 않고 호버카

에 실었다. 조이스와 팀은 그런 걸 싣고는 제 속도를 내지 못할 거라

고 말렸지만 메이런은 반드시 가지고 가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이건 우리 목숨을 살려 줄 거에요."

메이런의 강경한 태도에 결국 조이스도 팀도 물러서지 않을 수 없었

다.

웨이팅하우스로 떠나기 전, 조이스는 포스트에 들러 연락용 메시지

를 남겨 두었다. 조이스의 핵이 그것을 확인할 거였고, 그 메시지는 웨

이팅하우스의 핵으로 전달 될 것이었다.

"잭이 없는데, 누가 그 일을 하죠?"

메이런은 이렇게 물었지만 그건 조이스도, 팀도 가르쳐 주지 않았다.

"우리도 몰라. 그냥 잭이 없으면 메시지를 놓아두게 되어 있으니까

요. 하지만 걱정 할 건 없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메시지가 전달되지

않은 적은 없었어요."

조이스가 말했고, 메이런은 이 말이 진심이라는 걸 느꼈다.

호버카로 하는 여행은 며칠이 소요되었다. 셔틀로 간다면 하루면 갈

수 있는 거리였지만 여행은 며칠이 걸렸다. 사막을 여행하는 일 중에

서 가장 위험한 것은, 물론 연료와 식량이 떨어지는 일이겠지만, 일단

모든 풍경이 다 똑같아 보인다는 점이었다. 만약 호버카에 자동 네비

게이션 기능이 없었다면 지루한 운전을 참는 일은 그다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마을 망루에서 경계 근무를 서던 경비대원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

던가?"

팀이 조이스와 메이런을 향해 말한다.

"아니. 한 번 해봐, 팀."

조이스가 말한다.

"한 경비대원이 말야,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뭔가 반짝이는 게 움

직이고 있는 거야. 그래서 얼른 연락을 했지. 당장 마을에 비상이 걸리

고, 경비대원들이 쏟아져 나오고, 시에서 특수 기동대가 출동하고, 군

부대에서 비상 대기조가 출동했지. 마을 장로가 물었어. '자네 눈에는

저게 셔틀로 보이나?' 경비대원이 대답했지. '일루젼 두 병 먹을 때 까

지는 안움직이고 있었거든요.'"

팀이 농담을 한다. 허허 거리는 억지 웃음이 잠시.

"그러니까, 그게 달이었다는 말이지?"

메이런이 묻는다.

"일루젼 두 병 먹을 때까지는."

팀이 말한다. 이렇게 해서 금새 대화는 끊겨 버리고, 다시 대화가 이

어지려면 한 참이 더 흘러야 한다.

처음에는 재미있는 농담이 몇 번 오가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

시. 대화는 금새 끊겨 버리고 셋은 각자의 생각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생각은 곧 잠을 불러왔고, 자다가 깬 둘이 대화를 나누기도 하고, 또

혼자 잠에서 깨어 다시 생각에 빠져들며 잠을 청하기도 했다.

그렇게 시간은 꽤나 지루하게 흘러갔다.

메이런이 그나마 즐거웠던 순간은, 팀이 자고 있는 사이에 조이스와

함께 깨어있었던 순간이었다. 처음 그렇게 되었을 때, 메이런은 함부로

조이스에게 말을 걸지 못했다. 말을 걸었다가 조이스가 자신을 경박스

럽게 여길까 두려웠던 것이다. 그래서 메이런은 조이스가 깨었을 때

팀에게 말을 걸었던 것 보다도 적게 말을 걸었고 그 내용도,

"참 지루한 여행이에요."

"네비게이터에 얼마나 남았다고 나오나요?"

"에어컨디셔너가 없었다면, 다 말라죽었겠죠?"

"오아시스가 빨리 나왔으면 좋겠어요."

같은 너무나도 뻔한 이야기만을 했다. 물론 조이스의 대답은 메이런

의 질문만큼이나 뻔한 것이었다.

단 한 번, 대화다운 대화가 오가긴 했다. 그것은 조이스로부터 시작

되었다.

"메이런. 날 피하는 건가요?"

조이스가 메이런에게 물었을 때, 메이런은 가슴 깊은 곳을 차가운

칼바람에 베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뇨.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메이런은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척 이렇게 되묻기는 했지만, 메이런

은 트랜서였다. 조이스가 메이런이 품고 있는 어떤 마음의 흐름을 느

끼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물었다는 걸 모를 수가 없었다.

"그냥요. 그런 느낌이 들어서요."

상당히 모호한 말이었다.

그리고 한 참 동안 대화는 끊겼다. 메이런은 계속해서 아무 말도 하

지 않는 것보다는 먼저 말을 거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하

는 편이 자연스러울 것 같았던 것이다.

"조이스. 난, 락벳에서, 조이스를 생각한 적이 있었어요."

메이런의 시선은 창 밖을 향하고 있었다. 창밖에는 황량하기 그지없

는 메마른 사막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그래요? 뭘 생각했어요?"

"조이스가 연주했던 음악. 돌아오면 들려주겠다고 했던 음악이요."

조이스는 말이 없었다. 메이런은 조이스의 생각을 읽지 않으려고 애

쓰면서 사막에 일고 있는 작은 모래바람을 따라서 시선을 옮기고 있었

다.

"누군가가 절 기다려 준다고 생각했어요. 이곳, 행성 어스에서요. 그

건, 참으로 위안이 되는 일이었어요."

"아, 내가 데쟈뷰를 연주해 주겠다고 했던 일? 그걸 그렇게 기억했

어요?"

메이런은 대답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메이런. 오래 전부터 하고 싶었던 말인데요,"

조이스가 이렇게 말을 이었을 때, 메이런은 분명 뭔가를 기대하고

있었다. 조이스의 입에서 메이런이 듣고 싶은 말이 나올 것만 같았다.

메이런은 태연한 척 하기 위해서 가만히 창밖을 보고 있었지만, 실은

움직였다가는 어색한 동작이 나올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데쟈뷰, 연주해 주지 못해서 미안해요."

"아, 예."

메이런은 이렇게 멀뚱멀뚱 아무 의미 없는 대답만 내놓고는 말을 잇

지 못했다. 메이런은 그런 스스로를 바보같다고 생각했다.

"늘 미안했어, 그게. 꼭 지금 그 말을 들어서 그런 건 아니에요."

다시 한 번 아, 예, 하고 대답하려는데 네비게이션 시스템에서 경보

음이 울렸다. 오아시스가 근처에 있다는 신호였다. 조이스는 얼른 호버

카의 계기판들을 점검하기 시작했고, 경보음 때문에 팀도 자리에서 일

어났다.

"연료는 충분하지만, 혹시 모르니까. 여기서 채우는 게 좋겠지?"

눈을 비비고 있는 팀에게 조이스가 물었다.

"그렇게 하지. 남아있는 연료도 넉넉하니까 말야. 물도 조금 나눠줘

야 겠지?"

팀은 아무래도 잠이 덜 깬 모양이었다.

오아시스의 상인들은 사실 매우 위험한 존재였다. 사막을 호버카로

여행하는 존재라면 그리 부유할 리는 없었고, 가끔씩 그런 여행자들을

노리는 도적들도 얼마든지 존재 할 수 있는 게 사막이었다. 이런 사막

한 가운데에서 장사를 한다는 것은 그만큼 위험을 감수할 수 있는 능

력이 있다는 뜻이었고, 위험을 감수할 수 있는 존재가 위험하지 않을

리 없었다.

"현찰로. 카드나 수표밖에 없다면, 돌아가서 현찰로 바꿔 오시오."

사막의 거친 바람과 햇살 때문에 휴먼 레이스의 피부인지 랩타일 레

이스의 피부인지 알 수 없는 상인은 이렇게 말했다. 상인의 옆에는 덩

치 좋은 랩타일 레이스 경호원이 서 있어서, 언뜻 본다면 진짜 랩타일

레이스로 착각할 수도 있을 상황이었다.

"연료와 식량, 여기에. 다른 건 필요 없소?"

상인이 커다란 통 두 개를 내밀면서 말했다.

"물이죠, 필요한 건."

"물은 공짜요."

조이스의 말에 상인은 큰 인심을 쓴다는 듯한 얼굴을 하고서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보통의 가격보다 세 배는 비싼 연료와 식량 값에 물

값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고 한다면 그건 거짓말일 거였다.

"수소융합기로 증류수를 뽑아서 필터를 거친 물은, 오아시스의 물과

는 비교가 되지 않지. 이 물은, 무엇보다 살아있는 물이니까. 안 그렇

소?"

물을 호버카의 펌프를 이용해서 퍼담고 있는 조이스에게 상인이 물

었다.

"우리가 마시는 물도 죽은 물은 아니에요. 이 물은 그냥 비상용으로

떠 가는 거라고요."

조이스의 대꾸에 상인은 껄껄거리면서 웃었다. 메이런은 상인이 꽤

무안해 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좋은 여행이 되시길."

상인은 떠나는 메이런 일행에게 이렇게 인사했다.

"당신만 없다면 정말 좋은 여행이 되었을 거야."

호버카에 오르자 마자 조이스는 이렇게 내뱉었다. 사실 그건 메이런

도 마찬가지였다. 특별히 상인에게 유감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조이스와 나눌 수 있었던 대화가 아쉬웠을 뿐이었다. 메이런은 다시

그런 기회가 올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여행이 끝날 때까지, 그런 기

회는 찾아오지 않았다.

호버카가 웨이팅하우스 시의 외부 포스트가 있는 마을 부근에 도착

한 것은 출발한지 여섯 번째 맞는 밤이었다. 메이런은 여행을 하는 동

안 여섯 번의 노을을 보았고, 그것은 여섯 번 푸우순 시의 노을을 떠

올렸다는 말과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메이런은 어린 시절, 마을 망루에 올라 아이라와 바라보던 노을을

떠올렸다. 기억 속에서는 메이런도, 아이라도 모두 평화롭기만 했다.

세상의 그 어떠한 고통과 고난이 닥친다고 하더라도 자신과 아이라만

큼은 피해 갈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정말 아름답지 않아요?"

메이런은 조이스를 향해서 이렇게 말했다. 막 여행이 끝나가는 지금,

어쩐지 아쉬움이 드는 메이런이었다. 이런 말이라도 하지 않으면 두고

두고 후회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노을?"

조이스가 말했다. 메이런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저 노을을 바라보면서 영원히 살았으면 좋겠어요. 어떤 책을

보니까, 서 쪽으로 서 쪽으로 끝없이 달리면 끝없는 노을을 볼 수 있

다고 하던데요."

"그렇겠지. 하지만 그건 빨간 이불을 뒤집어쓰고 편안해, 편안해 하

고 말하는 거나 다를 바 없어요."

조이스의 목소리는 냉정했다. 아마도 이제 여행이 끝나가고 있었기

때문에 스스로에게 다짐을 하기 위해서 그렇게 했는지 몰랐다. 하지만

메이런에게 있어서 조이스의 냉정한 목소리는 참으로 가슴아픈 것이었

다. 문득 메이런은 잭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잭에 대한 분노가 치

솟는 걸 느꼈다. 메이런은 스스로의 감정을 이해할 수 없었다. 만약 누

가 왜 잭에 대해서 분노를 느끼냐고 묻는다면, 메이런은 아무런 대꾸

도 할 수 없을 것이었다.

"조이스."

팀이 재빨리 호버카의 네비게이터를 끄면서 말했다. 조이스는 숨을

죽였다. 어두워지는 하늘 아래 저 멀리 마을의 윤곽이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팀이 네비게이터를 끈 것은 마을의 윤곽이 보이기 때문이 아니

었다. 초록색으로 빛나는 유도등을 흔들고 있는 휴먼 레이스를 발견했

기 때문이었다.

"매복 대비해."

조이스가 말하며 품에서 K5권총을 꺼내 들었다. 팀과 메이런도 조

이스가 말하기 전에 이미 권총을 꺼낸 상태였다. 메이런은 발목에 차

고 있는 38구경 권총을 느꼈다. 지금까지의 모든 감정이 한 순간에 얼

어붙고, 메이런은 시각과 청각에 자신의 모든 신경이 집중되었다.

호버카는 유도등을 흔들고 있는 휴먼 레이스 근처에 닿자 천천히 속

도를 줄이다가 멈추어섰다. 휴먼 레이스가 여전히 유도등을 켜면서 다

가왔다. 메이런은 그 걸음걸이가 상당히 어색하다고 느꼈다. 평범한 휴

먼레이스의 발걸음은 아니었던 것이다.

"조이스? 그리고 팀과 메이런. 맞죠?"

여성 휴먼 레이스의 목소리였다. 조이스는 잠시 망설이다가 메이런

에게 신호를 보냈다. 조이스가 문을 열고 나가는 순간, 메이런은 반대

편의 문을 열고 호버카를 가운데에 둔 상태로 여성 휴먼 레이스와 대

치했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한 행동이었다.

"긴장하지 말아요. 미리 마중 나온 것뿐이니까. 반가워요. 나는 세론

이라고 해요. 저기서 날 겨냥하고 있는 메이런하고는 구면이죠. 메이

런. 날 기억해요?"

세론이 말하는 순간 메이런은 어이없게도 조준을 풀고서 세론의 얼

굴을 확인하였다. 물론 이내 곧 다시 K5를 고쳐 잡기는 했지만, 만약

세론이 적이었다면, 메이런은 적에게 1초의 시간을 준 셈이 되었다. 이

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1초의 시간을 준다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를 바

없다. 메이런은 이렇게 어리석은 행동을 한 스스로를 한심하게 여겼다.

"메이런?"

조이스가 메이런에게 묻는다. 진짜로 아는 얼굴인지를 묻는 것이다.

그제야 메이런은 다시 한 번 세론의 얼굴을 살필 수 있었다.

노을은 사라져 이미 사방은 어두워져 있었고, 조명이라곤 호버카에

서 나오는 빛과 세론이 들고 있는 유도등 빛뿐이었지만, 메이런은 세

론의 얼굴을 알아 볼 수 있었다.

"기자에요. 락벳에서 한 번 본 적이 있어요."

메이런이 말했다.

"그 뿐이야, 메이런?"

팀 역시 경계를 풀지 않은 상태로 이렇게 물었다. 메이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우리가 온다는 걸 어떻게 알았죠?"

"저 마을로 갈 예정이었죠?"

세론이 물었다. 조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메이런은 그제야 세론의 얼굴 반쪽이 인조피부라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시커먼 빛이 나는 인조피부는 군용 인조피부가 분명했다. 메이

런은 세론이 취재 도중에 부상을 입었을 것이고, 때문에 군 야전병원

에서 수술을 받았으리라는 것을 추측해 낼 수 있었다.

조이스는 다음 순간 세론의 왼팔을 붙잡아 뒤로 돌려 꺾었다. 순식

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하지만 조이스는 다음 순간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세론의 왼 팔은 분명히 세론의 몸 뒤로 넘어갔지만, 꺾이지 않

았던 것이다. 자유롭게 몸에서 떨어져 나온 왼 팔을 붙잡고서 조이스

는 멈칫했다.

"의수에요. 오른 팔을 잡아서 꺾었어야죠."

담담하게 세론이 말했을 때, 조이스는 때에 절은 듯 탁한 은색을 내

고 있는 세론의 왼 팔을 들고서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저 마을은 이제 더 이상 마을이 아니에요."

세론은 말을 이었다. 팀도 호버카에서 내렸고, 이렇게 해서 메이런

일행은 모두가 호버카에서 내려 서로의 얼굴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거, 계속 들고 있을 건가요?"

세론이 말하자 조이스는 어색하게 들고 있던 세론의 왼 팔을 내밀었

다. 세론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그 왼팔을 받아서 다시 원래 자리에

끼워 넣었다.

"락벳에서 그랬나요?"

메이런이 물었다.

"그래요, 메이런. 이 얼굴도 그렇고 내 왼다리도 그렇고. 아, 특별히

불편하지는 않아요. 우리 의료 기술은 생각보다 훨씬 발달해 있으니까.

가끔씩 가려울 때 긁어봐야 소용없다는 걸 빼면 불편한 점은 없어요."

세론은 이렇게 말하면서 조이스를 바라보았다.

"여기 온다는 메시지 받았어요. 오늘쯤 올 거란 소식을 듣고 미리

나와있었죠. 사실 이런 식으로 나타나면 의심받을 거라는 거 알고 있

었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이유를 듣고 싶죠?"

세론은 상대가 어떻게 생각하건 자신이 대화의 주도권을 쥐고서 그

대로 밀어붙이고 있었다. 조이스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했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메이런은 조이스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있을

것 같다고 느꼈다.

"안 좋은 이유와 아주 안 좋은 이유, 이렇게 두 가지가 있어요. 뭐부

터 듣고 싶은가요?"

"음..."

세론이 말하자 팀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듯이 이렇게 소리를 내었

다.

"안 좋은 소식부터 듣죠."

팀 나름대로는 유머감각을 발휘한 모양이었지만 별 소용은 없었다.

분위기는 여전히 어색하기만 했던 것이다.

"여기 포스트를 맡고 있던 핵은 죽었어요. 마을 주민들이 도시로 이

주되고 있다는 소식은 들었죠? 저 마을은 그 와중에 모조리 학살당했

어요."

"학살?"

조이스가 물었다.

"예.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반란군 포스트로 이용되고 있다는 정보

때문이었죠. 지금 저 마을은 시경 특수기동대의 주둔지에요."

세론은 가려운 건지 아니면 어색해서인지 얼굴의 시커먼 인조피부를

긁적이면서 말했다.

"그게 안 좋은 소식이라면 정말 안 좋은 소식은 뭐죠?"

조이스가 물었다. 조이스도 불길한 예감을 느꼈는지 묻는 목소리가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잭이 죽었어요. 그래서 내가 나온 거죠."

세론이 말했다. 아무도 말이 없었다. 메이런은 잭이 죽었다는 말을

제대로 실감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조이스도 팀도 마찬가지

인 모양이었다.

"일단 여길 빠져나가죠. 마을에서 해야 할 일은 다 끝냈으니까. 어서

타요."

이제 세론은 완전히 핵이 되어 있었다. 세론이 리더라는 사실은 누

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때문에 세론이 빠져나가자는 말을 하

면서 먼저 호버카에 오르자 아무도 토를 달지 않고 호버카에 올랐고,

세론이 끝냈다는 마을에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이었는지도 아무도 묻지

않았다.

호버카에 오르자 세론은 직접 호버카를 몰았다. 하지만 이 역시 아

무도 뭐라고 하지 않았다. 호버카 안에는 오직 에어컨디셔너의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그 흔한 라디오조차 아무도 켜지 않고 있었다. 조이스

는 깊은 생각에 잠긴 듯 보였고 팀도 마찬가지였다. 갑작스럽게 전해

들은 잭의 소식은 모두를 당혹스럽게 만든 모양이었다.

세론이 호버카를 몰아 도착한 곳은 시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자

리하고 있는 오아시스였다.

"내려요."

세론이 말하자 일행은 마치 명령을 받은 병사들처럼 질서정연하게

움직였다.

메이런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잭이 죽었다니? 어떻게? 왜? 하지만

이런 생각 보다 앞서고 있는 것은 메이런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

오고 있는 무거운 감정이었다. 메이런은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

었고, 때문에 그 감정을 견디지 못하고 있었다.

세론이 인도한 곳은 오아시스 부근에 마련되어 있는 작은 오두막이

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저 나무로 지어진 평범하다못해 허름한 집이

었지만 안으로 들어서자 보기와는 달리 신식 장비들이 많이 갖추어져

있었다. 발전소도 있는지 전기를 이용한 조명과 에어컨디셔너 시설까

지 갖추어진 곳이었다. 구석 자리에는 텔레비전도 한 대 놓여 있었다.

"여기 상인에게 빌린 거에요. 일이 끝날 때까지 묵으려고요. 아, 조

이스.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여기 상인들은 입이 무거우니까. 꽤 오래

전부터 거래해 온 친구니까, 믿어도 좋아요."

세론이 말했을 때, 메이런은 조이스의 눈치를 살폈다. 조이스는 고개

를 숙이고 있었다. 아마도 잭이 죽었다는 사실 때문에 충격을 받아서

그런 것이겠지만, 세론은 그것을 그저 보안을 걱정하고 있는 모습으로

느끼고 있는 모양이었다.

"어떻게... 죽었나요?"

조이스가 마침내 고개를 들어 세론에게 이렇게 질문했다. 세론은 무

슨 질문인지 잠시 생각하는 눈치였다.

"잭이요?"

세론은 이렇게 물은 다음, 진지한 얼굴로 조이스를 바라보았다. 시커

먼 인조피부로 덮여 있는 세론의 얼굴이 기괴한 형상으로 일그러졌다.

"죽은 자는 돌아오지 않아요. 잭과 아무리 친했다고 해도, 그걸 잊으

면 안되죠."

세론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하자 조이스의 낯빛이 굳었다.

"알아요. 하지만 나는 경위를 듣고 싶은 거에요.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됐는지."

"자세하게 듣고 싶다는 거에요?"

세론의 얼굴에 엷은 미소가 떠올랐다.

"지금까지 당신들은 마을에 피신해 있었죠? 시의 대대적인 단속을

피해서요.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였어요. 저를 제외한 거의 모든 인원들

이 마을로 피신을 했죠. 포스트로 사용하던 마을에 모여서 살기도 했

어요. 그건 잘못된 일이긴 했지만... 어찌되었건, 시에서 마을로 옮겨진

우리는 마을에서 시로 다시 돌아갈 계획을 짜고 있었어요. 그 계획에

잭이 필요했던 거죠. 그리고 남작도."

세론의 목소리는 냉정했다. 도무지 감정이라는 게 묻어나지 않고 있

었다. 메이런은 락벳에서 보았던 세론 소위를 생각했다. 전쟁이 바꾸어

놓은 것은 세론 소위의 겉모습뿐만은 아닌 것 같았다.

"잭은 마을의 여관에서 남작과 만날 계획이었어요. 그래서 향후 웨

이팅하우스 시에서 벌이게 될 전투에 대한 방향을 설정하려고 했죠.

그런데 계획은 누설되었어요. 여관방으로 녀석이 들이닥쳤어요. 니들건

으로 난사를 했고, 남작과 우리 요원 둘이 죽었어요. 잭은 머리에 맞았

죠. 안된 일이지만, 그렇게 된 거에요."

머리에 니들건을 맞았다는 말을 세론이 했을 때, 메이런은 조이스의

얼굴이 눈에 뜨일 만큼 심하게 굳는 걸 볼 수 있었다. 메이런은 그 말

을 듣는 순간 가슴속에서 무거운 감정이 역류해 올라오는 것을 느꼈

다. 그 감정은 메이런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메이런은 시선을 제대로

두지 못했고, 손을 어떻게 해도 어색하게만 느껴졌다.

제 목:[하이어드] Who wants to live forever? - 19

"...왜 체포하지 않고 사살했나요?"

한참이 지나서야 정신을 차린 조이스가 세론에게 다시 이렇게 물었

다. 세론은 고개를 저었다.

"상대는 경찰이 아니라 암살자였어요. 우리 요원들이 조사해 본 바

에 의하면 꽤 실력 있는 친구였던 것 같아요. 혼자서 넷을 순식간에

해치웠으니까요. 니들건으로 무장하고 있었던 걸로 미루어 봐서는 군

인이었을 것도 같지만 확실하지는 않아요."

"누가 보낸 암살자라고 생각하고 있나요?"

이번에는 팀이 물었다.

"아마 시에서 보냈을 것 같아요. 여기 시장은 그런 쪽으로는 꽤나

유명하지요."

조이스의 눈동자가 번득였다. 메이런은 그런 눈빛을 예전에도 본 적

이 있었다. 분노. 조이스는 분노를 표출할 대상을 찾고 있었고, 지금

세론이 적당한 대상을 이야기 해 준 것이었다.

"시장 암살 계획은 있겠죠? 푸우순 시에서 그랬던 것처럼."

세론은 다시금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전혀 없어요. 웨이팅하우스 시의 시장은 포레스트 회장이에

요. 라디오 그룹의 회장이기도 하죠. 하지만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내

지 않은지 몇 해가 된 걸요. 벌써 죽었다는 소문이 돌 정도죠."

"죽여야 합니다."

팀이 말했다. 팀도 역시 분노하고 있었다. 다만 조이스와는 다른 감

정의, 그러니까 조금 더 순수한 분노라고 메이런은 느꼈다.

"반드시 시장을 없애야 합니다."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네요, 팀."

세론이 말했다.

"아마 잭과 함께 했기 때문에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들 거라는 건

이해할 수 있어요. 하지만 지금 가지고 있는 감정은 어린아이하고 다

를 바가 없어요. 우리는 우리의 일을 해야 해요."

"아뇨. 전 반대에요, 세론."

조이스가 처음으로 세론의 이름을 불렀다. 조이스의 목소리는 심하

게 떨리고 있었다.

"시장을 죽여야 해요. 똑같이. 니들건으로. 니들건은 구할 수 있죠?"

세론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이스를 지켜보았다. 메이런은 세론이

침묵으로 웅변을 하는 걸 알 수 있었다. 세론은 기다리겠다고 말하고

있는 거였다. 조이스가 다시 평상시로 돌아올 때까지.

"그 시장을, 시장을..."

조이스는 결국 세론의 뜻을 알아차렸고, 고개를 숙이고 흐느끼기 시

작했다.

"잭은 화장했어요. 고통은 없었을 거에요. 머리에 맞았으니까."

조이스는 계속해서 흐느끼고 있었다. 세론은 가혹하게 울지 말라고

하지는 않았다. 팀이 조이스의 어깨에 손을 얹으려고 했지만 조이스는

팀의 팔을 거부했다. 메이런은 조이스의 마음을 알 수 있었다. 조이스

는 혼란스러워 하고 있었다. 잭을 잃은 슬픔과 어디로 향해야 할지 모

를 분노가 조이스의 마음 속을 어지럽게 떠돌고 있었다. 메이런은 고

개를 떨구고 있는 조이스의 하얀 목덜미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마음

속의 무거운 감정이 다시금 고개를 치들었다.

"죄책감이야."

목소리가 메이런에게 말했다.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거야, 메이런. 잭이 죽어서 기쁜 거지? 조이

스의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던 잭이 사라져서 말이야. 그리고 그런 자

신이 싫은 거지? 그래서 죄책감을 느끼는 거지?"

목소리가 메이런에게 말했다. 메이런은 하마터라면 소리를 내어 아

니라고 크게 소리칠 뻔 했다. 눈치 빠른 팀이 메이런이 뭔가 말하려고

했다는 걸 알아차리긴 했지만, 분노 때문에 그렇다고 생각했는지 별로

신경을 쓰지는 않았다.

"자. 그럼 이제부터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정리 해 보죠."

세론은 조이스가 울음을 그치길 기다렸다가 이렇게 말을 이었다.

"잭을 만나 본 적이 있어요. 잭은 병법에 밝았고, 고대 문헌들을 읽

고 공부하는 걸 좋아했죠. 잭이 이렇게 말한 걸 기억해요. 물자를 잃는

것은 조금 잃는 것이고, 땅을 잃는 것은 크게 잃는 것이고, 민심을 잃

는 것은 전부를 잃는 것이다. 락벳을 기억하나요, 메이런?"

세론이 불쑥 이렇게 물었다. 메이런은 기억한다고 했다.

"락벳인들이 싸워서 이길 수 있었던 건 순전히 국민들의 마음을 잃

지 않았기 때문이었어요. 락벳인들이 명예와 전통을 숭상하는 건 잘

알고 있을 거에요. 그렇기 때문에 모든 작전은 명예와 전통을 지키기

위해서 이루어졌죠. 예를 들자면 메이런이 공식적으로 전사한 걸로 되

어 있는 그 폭격 같은 것도 그렇고요."

세론이 생각했던 것 보다 자신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다는 것이 확

인되는 순간이었다. 메이런은 불쑥 불안감이 찾아 들었다. 세론이 위험

한 존재처럼 여겨졌던 것이다.

"아, 그런 표정 지을 것 까진 없어요, 메이런. 메이런이 전사자이고,

반란군이라는 걸 아는 건 나하나 뿐이니까요. 경찰 일을 했던 친구가

있었죠? 아이라. 그 친구도 당신이 죽은 줄 알고 있던 걸요."

아이라. 오래간 만에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메이런은 한참 동안 그

이름을 되뇌었다. 아이라, 아이라, 아이라.

"아이라는 잘 있나요?"

메이런이 물었다.

"예. 지금 총경자리에 올라 있어요. 아까 본 마을에 주둔하고 있는

특수 기동대의 지휘관을 맡고 있죠."

"메이런 친구가 경찰?"

팀이 의외라는 듯 메이런에게 물었다.

"그래요. 하지만 명목상 지휘관일 뿐이고, 실제 지휘권은 다른 친구

가 가지고 있어요. 자. 어찌되었건 그 이야긴 넘어가고, 우리가 해야

할 일 이야기로 들어가죠."

세론은 여기까지 말하고는 헛기침을 크게 한 번 해서 분위기를 환기

시켰다.

"저기 앉아 있는 메이런이 말한 것처럼, 저는 기자에요. 실은 푸우순

시에서 기자일을 하고 있죠. 얼굴이 이렇다 보니 텔레비전에 나오지는

않지만, 그래도 취재기자로는 꽤 유능하다는 평을 듣는 편이죠. 종군기

자 경력 때문에 주로 군 관련 기사를 취재하는 편이고요."

본론으로 들어가겠다던 세론은 자신의 이야기를 먼저 시작했다.

"저는 진실을 말하는 것이 가장 큰 힘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어요.

텔레비전을 보고 있다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일이겠지만, 텔레비전은

진실을 말하지 않아요. 가끔 사실을 말할 뿐이죠. 예를 들면 어디어디

에서 포미사이드 노동자들이 파업을 벌였고, 시위를 벌였고, 몇 명이

잡혀갔다. 이런 건 사실이죠. 하지만 포미사이드 노동자들이 인격체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다던가 포미사이드 레이스 대표의 말을 회장이

들어주지 않았다던가 하는 이야기는 하지 않죠. 그리고 진압하는 과정

에서 포미사이드 레이스들이 어떻게 비참한 꼴을 당했는가 하는 것도

이야기 하지 않아요. 사실, 락벳 전우신문 만도 못하더군요. 이곳의 텔

레비전이라는 게."

"좋은 말씀입니다만..."

세론이 자신의 개인적인 생각을 늘어놓는 일에 제동을 걸려는 팀을

세론은 손짓 한 번으로 막았다.

"예. 그러다가 저도 핵을 만났어요. 그건 여러분들과 다를 바 없는

과정이었을 거에요. 그리고 저는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어요. 오늘까

지. 그래서 반란군들이 마을로 쫓겨날 때에도 이렇게 시에서 멀쩡하게

취재를 할 수 있게 되었지요. 제가 기자일을 계속 하고 있었던 이유가

뭔지 아세요? 그건 단 한 번이라도 진실을 보도하기 위해서에요."

"그래서, 이제 우리가 기자 일을 해야 한다는 겁니까?"

팀이 물었다.

"아뇨. 그렇게 간단한 일이라면 제가 했을 거에요. 뭘 보도할 건지

먼저 이야기를 하죠. 마을 주민들을 시로 강제 이주시키고 있는 일 이

야기는 다들 알고 계실 거에요. 하지만 마을 주민들이 학살당한다는

이야기도요. 하지만 마을 주민들이 학살당하기도 한다는 건 소문만 무

성할 뿐이에요. 시 녀석들은 치밀하거든요. 강제 이주를 실시하면서 크

고 작은 충동리 벌어지지만, 이주 할 때는 절대 사상자를 내지 않아요.

그렇지만, 학살해야 하는 마을 주민들은 단 하나도 남기지 않고 모조

리 살해하고 말죠. 소문이 퍼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마을이니까 간단

해요. 마을은 고립되어 있거든요."

세론의 말을 듣는 순간, 메이런은 언제인가 자신이 잭에게 했던 말

을 떠올렸다. 메이런은 잭에게 '나같으면 모두 다 죽여버리겠다'고 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지금 그렇게 하고 있는 거였다.

"물자를 잃는 것은 조금 잃는 것이고, 땅을 잃는 것은 크게 잃는 것

이고, 민심을 잃는 것은 전부를 잃는 것이다. 이 말을 기억하나요? 잭

이 했던 말이에요. 시장이 죽는 일? 그건 아주 조금 잃는 일이에요. 시

장이 죽으면 다른 시장으로 대체되지요. 방송국 폭파? 역시 마찬가지

에요. 하지만 진실을 알린다면, 우리는 크게 얻을 수 있어요. 녀석들은

전부를 잃을 수 있지요."

세론은 이렇게 말하면서 뭔가를 꺼내었다. 그것은 자기로 기록되는

비디오 테이프였다.

"내가 푸우순 시에서 여기로 온 건, 혹시 이런 게 있지 않을까 해서

였어요. 내가 오게 된 이유는 동료가 여기서 실종되었기 때문이었죠.

휴란이라는 친구였어요. 젊고 경험은 적지만 아주 책임감이 강한 기자

였죠. 난 휴란이 실종 되었을 때, 마을에서 총격전이 벌어졌다는 소식

을 들을 수 있었어요. 그리고 예상했죠. 휴란이라면 틀림 없이 뭔가를

남겼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손에 넣을 수 있었어요."

"거기에 마을 주민들이 학살당하는 모습이 담겨 있다는 건가요?"

이번에는 메이런이 물었다. 세론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여기에 담겨 있어요."

세론은 자리에서 일어나 텔레비전을 켰다. 그리고 비디오 카메라를

들어 메이런 일행에게 보여주었다.

"이건 AI-14 비디오 카메라에요. 우리 라디오 방송국 기자가 가지고

다니는 기본장비이기도 하고요."

세론은 비디오 카메라에 테이프를 넣은 뒤 잭으로 텔레비전과 연결

하고 나서 비디오 카메라를 작동시켰다. 텔레비전 화면에 팀의 얼굴이

나타났다. 팀은 화면에 나타난 자신의 모습이 신기한지 손을 슬쩍 움

직였다. 만약 잭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다면 팀은 틀림없이 무

슨 장난을 치거나 농담을 했을 거였다. 하지만 지금 상황은 그렇게 여

유로운 상황은 아니었다.

이어서 세론이 비디오 카메라를 작동시키자, 화면이 바뀌었다.

화면에 먼저 나타난 것은 무장한 기동대의 모습이었다. 기동대는 마

을 주민들을 한 곳으로 모으고 있었다.

"저 친구들, E-1라이플로 무장하고 있지 않은데요?"

누군가 젊은 목소리가 말했다.

"휴란이에요."

세론이 설명을 덧붙였다.

"특수기동대니까."

이번에는 조금 나이 든 목소리.

"이 친구는 호버카 조종사고요."

세론이 다시 설명했다.

"장비가 멋대로군요. 곤봉을 든 친구도 있고, 화약식 총들을 들고 있

는 친구도 있고. 흠. 거기에 스피어를 든 친구도 있군요. 아, 저기 누가

다가오는데요?"

휴란이 말하자 화면은 호버카 바닥으로 바뀌었다. 카메라를 밑으로

숨긴 모양이었다.

"라디오 방송국의 휴란 기자입니다. 무슨 일이죠?"

휴란의 목소리.

"기자고 나발이고 주둥아리 닥치고 가던 길 가."

흥분된 어조였다.

"마을에서 시위라도 벌어진 건가요? 시경 특수기동대 소속 맞지요?"

"이 새끼가 귀먹었나. 꺼지라니까! 꺼져."

"이 챠량은 취재 차량이고, 저는 취재 기자입니다. 지금 말씀하시는

내용, 그대로 방송해도 되겠습니까?"

"이 새끼가."

잠시 침묵.

"올빈. 차 돌려요."

겁먹은 목소리였다. 아마도 욕설을 퍼부은 쪽이 무기로 위협을 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총성이 들려왔다. 바닥을 향하고 있던

카메라는 차창으로 향했고, 차창 밖에는 마을의 모습이 잡혔다. 카메라

는 순식간에 줌을 이용해 마을의 모습을 자세히 담아내고 있었다.

기동대원들이 마을 주민들에게 무차별 사격을 가하고 있었다. 주민

들은 필사적으로 도망치려고 하고 있었지만 횡대로 늘어서 효과적으로

사격을 가하고 있는 기동대원에게서 벗어날 수 없었다.

누군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가슴을 움켜쥔다. 다음 순간 고통스러

운 표정의 얼굴은 절반이 날아가 버린다. 그 옆에 있던 여자는 창백한

얼굴로 쓰러지고 있다. 여자의 가슴에는 커다란 구멍이 뚫려있다. 그

뒤로 노인의 모습이 보인다. 노인은 폐를 관통당했는지 피를 토하며

쓰러지고 있다. 그 옆으로 팔과 다리가 허공을 향해 잘려 나가고 있는

모습이 보이고, 그 바로 앞에서 머리 한 구석이 터져 나간 채로 쓰러

지는 꼬마의 모습도 보인다.

전쟁이다. 메이런은 생각했다. 이건 전쟁이야. 전투라고. 절대 민간인

을 향해 쏘는 게 아니야. 메이런은 락벳에서의 총격전을 떠올렸다. 미

린 시였던가? 그곳에서 메이런의 보윙 사단은 무장하지 않은 민간인에

게 저렇게 사격을 가했다. 메이런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꼭 쥐고 있

었다. 하얗게 긴장된 주먹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맙소사..."

휴란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리고 다음 순간 화면이 크게 흔들린다.

카메라는 아주 잠시 동안이었지만 머리가 날아가 버린 호버카 조종사

를 잡았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총탄이 호버카에 명중되는 소리들. 화면

이 꺼진다. 아마 카메라 작동을 중지한 모양이었다.

"여기가 끝이 아니에요."

세론의 말 그대로 화면은 바로 다시 이어졌다. 화면에 잡히고 있는

것은 마을의 전경이었다. 아마도 높은 곳에서 찍은 모양이었다. 마을은

완전한 도살장이었다. 대원들은 쓰러져있는 마을 주민의 시체들을 한

곳으로 모으고 있었다. 개중에는 팔과 다리를 들고 옮기는 대원들의

모습도 보였고, 머리를 들고서 히죽거리며 장난을 치고 있는 대원의

모습도 보이고 있었다. 바닥은 원래 붉은 빛이었던 듯 피로 뒤덮여 있

었다.

그곳에 군용 호버카가 도착한다. 아마도 장성급인 모양이다. 엄중한

호위속에 장성들이 호버카에서 내리는 모습이 보인다. 그 때 휴란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지금 이곳은 웨이팅하우스 시의 한 마을입니다. 기자는 지금 목숨

을 걸고 마을 2층 건물에서 이 광경을 찍고 있습니다. 저와 함께 동행

했던 호버카 조종사 올빈은 시경 특수기동대의 총에 사살 당했습니다.

이걸 찍고 있는 저도, 사실 언제 죽을지 모를 긴박한 상황입니다."

휴란의 음성은 담담한 멘트와는 달리 상당히 침착하게 들렸다.

"대원들은 마을 주민들을 무차별 학살했습니다. 보셨다 시피 어린아

이와 임산부, 노인을 가리지 않습니다. 저는 오늘 악마를 보았다고 생

각합니다."

휴란의 목소리가 잠시 멈추었다. 누군가가 휴란이 있는 건물로 달려

오는 모습이 보였다. 멀리서 잡았기 때문에 분명하게 볼 수는 없었지

만, 메이런은 그게 누구인지 상당히 눈에 익은 움직임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메이런은 곧 그게 누구였는지 떠올릴 수 있었다.

"쿨란..."

메이런은 소리 내어 이렇게 중얼거렸다. 그것은 쿨란이었다. 메이런

은 쿨란과 보낸 시간들을 떠올렸다. 아무리 짧게 나왔다고 해도 뛰는

모습이나 얼굴 생김은 쿨란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꼭 쿨란이라고 확신

할 수는 없었다. 푸우순 시에서 메이런 일행을 노렸던 시쟌 상병과 똑

같은 모습의 하이어드는 틀림없는 클론이었다. 그 뒤로 메이런 일행을

노렸던 오진 시의 마스빈이라는 하이어드도 클론이었을지 몰랐다. 쿨

란이 클론이라는 건 락벳으로 떠나기 전 웨이팅하우스 시의 라디오 방

송국에서 오래 전에 확인한 사실이었다.

화면은 휴란의 얼굴로 바뀌었다. 아마도 책상 위에 놓고 찍은 모양

이었다.

"사실, 지금 이 테이프가 방송 될 수 있을 거라고는 저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방송 될 수 있겠지요. 제가 하지 못하더라

도, 누군가가 꼭 이 광경을 행성 어스의 전 국민에게 전달할 것이라고

본 기자는 믿습니다. 만약 이 멘트가 그대로 방송이 된다면 저는 죽어

있을 겁니다."

휴란은 이렇게 말하고는 쓴 미소를 지으며 잠시 말을 멈추었다.

"진실이 전해지길 빕니다. 이 테이프가 진실을 전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자 손에 들어가길 빌겠습니다."

화면은 다음 순간 어둠으로 변했다.

세론은 비디오 테이프를 멈추고 텔레비전을 껐다.

"사실, 제가 이 테이프를 찾아 낼 수 있었던 확률은 1% 이하였을

거에요. 하지만 여러가지 요소가 동시에 작용했지요. 운도 좋았고, 제

노력도 많이 먹혀들어갔어요. 자. 과정이야 어찌되었건, 이제 우리는

이 테이프를 손에 넣었어요."

"이 테이프를 방송 할 생각인가요?"

조이스가 물었다.

"물론이죠. 휴란이 말한 것처럼, 이 테이프는 진실을 전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우리의 손에 들어왔으니까요."

"하지만 어떻게? 텔레비전은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고 했잖아요."

이번에는 메이런이 물었다.

"웨이팅하우스 시의 텔레비전 방송국에 대해서는 제가 이미 다 조사

해 뒀어요. 이 테이프를 방송하기 위해서는 먼저 웨이팅하우스 시에

있는 우리 거처로 옮겨야 해요. 거기서 텔레비전 방송국까지는 호버카

로 그리 멀지 않죠. 우리는 방송국으로 들어갈 거에요. 그리고 이 테이

프를 방송 할 거고요. 아. 방송 과정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말아요. 내

가 할 거니까."

세론의 목소리는 확신으로 가득 차 있는 듯 들렸다.

"그런데, 우리라고 했는데..."

팀이 말했다.

"맞아요. 방송은 나 혼자서도 준비할 수 있지만, 방송국으로 들어가

는 데에는 혼자 힘으로는 어려워요. 그래서 당신들의 도움이 필요한

거죠. 당연히 돕겠죠?"

"그렇게 해서 민심을 움직이겠다는 건가요, 세론?"

팀이 세론에게 물었다.

"민심을 움직일 수 있는지 없는지는 사실 중요하지 않아요. 저에게

있어서 중요한 건, 우리가 하는 일이 진실을 전하는 일이라는 거에요.

조이스. 하지만 이건 복수에요."

세론이 말했다.

"복수..."

"예. 복수요. 잭은 알고 있었어요. 진실의 힘이 무엇보다 강하다는

것을."

세론의 말에 조이스는 한참 동안 뭔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메이런은

조이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대충은 짐작할 수 있었다.

"이 일은 사실 위험한 일이에요. 지금까지 당신들이 해왔던 그 어떠

한 일 보다 위험한 일이죠. 방송국에는 무장한 경비병들이 있고, 그들

을 제압하는 건 아주 어려운 일이 될 거에요. 참. 그리고 메이런."

세론이 메이런을 불렀다. 메이런은 세론을 바라보았다. 세론의 얼굴

은 절반이 인조피부였기 때문에 표정을 읽기는 쉽지 않았지만 세론의

감정은 쉽게 읽어 낼 수 있었다. 세론은 메이런을 어린아이처럼 대하

고 있었다.

"메이런은 이 계획에서 빠져요. 왜 그런지는 알겠죠?"

세론의 말에 조이스와 팀이 동시에 메이런을 바라보았다.

"그래요. 전 트랜서죠. 트랜서는 아주 중요한 자원이고요."

하지만 메이런은 그것이 자신을 하찮게 여기기 때문이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여기서 빠져야 한다고? 그건 말도 안되는 일이지.

"하지만 남작은 죽었습니다. 트랜서 백 명이 있는 것 보다, 지금은

이 방송을 트는 게 더 중요해요. 이 테이프를 지니고 있는 건 시간이

지나면 지날 수록 위험해 지는 일이에요. 그렇다면 당장 방송을 해야

할 거고, 셋이 하는 것 보다는 넷이 하는 게 훨씬 성공 가능성이 높겠

지요. 다른 의견이라도 있나요?"

메이런이 세론에게 물었다.

"무리하지 말아요, 메이런."

조이스였다.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는데. 메이런은 앞으로 오랫동안 남

아서 우리 일을 도와줘야죠."

조이스의 말이 끝나자 메이런 속에 있는 목소리가 메이런에게 속삭

이기 시작했다.

"죄책감 때문이야."

목소리가 말했다.

"못이기는 척 빠져도 될 텐데. 굳이 위험한 길을 택하고 있어. 하지

만 그런다고 잭이 살아 돌아오는 건 아니야."

목소리는 비록 비꼬는 듯 말하고 있었지만 메이런을 걱정하고 있었

다.

"아니에요. 저는 꼭 가겠습니다."

메이런이 발목에 찬 38구경을 뽑으면서 말했다.

"조이스는 사격을 잘 못하고, 팀은 빨리 쏘지 못하죠. 지금 우리 중

에 저보다 화약식 권총을 잘 다룰 수 있는 휴먼 레이스는 없어요. 물

론 화약식 권총을 잘 다룰 수 있는 휴먼 레이스보다 트랜서가 더 귀하

다는 건 저도 인정해요. 하지만 지금 그런 조직원을 불러 올 수 있나

요? 마을에 숨어 있던 동지들은 다 죽어버렸고, 남작도 죽고, 잭도 죽

은 이 마당에요."

메이런의 말에 세론은 한 참 머뭇거리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본인이 이렇게까지 주장하는 데 메이런을 뺄 이유는 없었던 것이다.

제 목:[하이어드] Who wants to live forever? - 20

"그리고, 조이스. 도와주겠죠?"

"물론이죠. 잠입이라면..."

"아뇨. 그것보다 방송이요."

"방송은 혼자 한다고 하지 않았던가요?"

"예, 그렇게 할 거에요. 그런데 지금 이 테이프, 방송하기에는 뭔가

가 부족해요. 마지막 멘트가 필요하다는 거에요."

"멘...트?"

조이스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세론이 친절하게 설명을 덧붙였다.

"지금 당장 이 테이프를 방송용 마스터 테이프로 만들어야 해요. 그

런데 방송을 하려면 마지막 멘트가 필요하죠. 사실, 여기서 방송되게

되면 일생 동안 이 멘트는 당신을 따라다닐지 몰라요. 어때요? 그래도

하겠어요?"

"잠깐만요, 세론."

팀이 세론의 말을 끊었다.

"그건 무리한 부탁입니다, 세론. 지금 세론은 조이스에게 너무나도

엄청난 걸 강요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건..."

"아냐, 팀."

조이스는 팀의 말을 가로막았다.

"하겠어요. 세론이 멘트를 하는 것 보다는 제가 하는 게 낫겠죠."

"하지만 그건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잖아, 조이스. 이봐요, 세

론. 솔직히 말 해 보세요. 조이스의 멘트가 꼭 있어야 할 이유라도 있

나요?"

"이건 방송이에요, 팀. 당신은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멘트가 없는 방

송은 신뢰도가 떨어지기 마련이에요."

"맞아, 팀."

조이스가 다시 나섰다.

"제가 하겠어요."

메이런은 조이스가 무리하게 나서는 이유를 납득할 수 있었다. 조이

스는 복수심에 불타고 있었던 것이다. 복수심은 종종 이성을 마비시킨

다. 하지만 지금의 조이스는 이성이 마비된 상태는 아닌 것 같았다.

"그럼 복면이라도 써, 조이스."

팀은 세론을 노려보면서 말했다. 조이스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복면을 써서 될 일이었다면 세론이 해도 되지. 팀. 날 걱정해

주는 마음은 알겠는데, 난 괜찮아."

"하지만..."

"하지만이 아냐, 팀. 이건 시민들에게 하는 방송이야. 잭이 했던 말

을 생각해 봐. 지금 우리가 하는 일은 시민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일이

야. 거기에 내 얼굴이 필요하다면 나는 기꺼이 하겠어."

조이스의 얼굴에는 어느 사이 가벼운 미소마저 떠올라있었다.

"여기."

세론이 종이를 내밀었다. 종이 위에는 조이스가 읽어야 할 원고가

적혀 있었다. 조이스가 그것을 읽어보고 있는 사이, 조이스는 카메라는

놓고 촬영 준비를 했다.

메이런은 진지한 얼굴을 하고서 원고를 읽어보고 있는 조이스를 바

라보았다. 언젠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조이스의 목소리를 들었던

기억이 났다. 그 때 조이스의 목소리는 잔뜩 긴장되어 있었고 떨고 있

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의 조이스는 그렇지 않았다.

죄책감 때문은 아닐 것이다. 조이스는, 조이스라면 복수심에 불타고

있을 거였다. 사실 조이스의 마음에서 퍼져 나오고 있는 강렬한 기운

은 복수심이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조명이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스튜디오는 아니지만, 그래도 조명이

있으면 훨씬 나을 것 같아서요."

"조명은 있어요."

조이스가 말했다.

잠시 후, 메이런과 팀이 조명을 가지고 들어왔을 때, 세론은 몹시 의

아해 했다.

"조명을 가지고 다녀요?"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서."

팀이 말했다. 팀은 조이스가 멘트를 한다는 사실이 내키지 않을 뿐

만 아니라 일까지 덤으로 하게 되어서 불쾌한 모양이었다.

"만약 촬영이 있을 경우를 대비하시는 모양이죠? 혹시 호버카에 여

분의 해방전사 클론이라도 싣고 다니나요?"

"나중에 때가 되면 이 조명의 원래 용도를 알려 드리죠."

조이스는 이렇게 말하긴 했지만, 조명을 사용하기를 바라지는 않는

것 같았다.

잠시후 세론은 비디오 카메라를 작동시켰다. 조이스는 세론이 준 종

이를 옆으로 치워 두었다. 잠깐 동안에 내용을 다 외워버린 모양이었

다.

"시민 여러분. 지금 보신 이 영상은 얼마 전 마을에서 발생했다고

시에서 주장하는 반란군과 시경 특수기동대의 총격전 영상입니다. 이

영상은 진실입니다. 그리고 저는 지금 진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잠시 사이. 조이스의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얼마 전, 저는 제 소중한 친구 하나를 잃었습니다. 그 역시 시와 시

경의 폭력에 희생당하였습니다."

세론의 눈이 크게 떠졌다. 아마도 원고에 없는 내용인 모양이었다.

"시민 여러분. 여러분은 탄압 당하고 있습니다. 공정하게 나누어져야

할 부는 일부 계층에 몰리고 있습니다. 언제까지 모두들 이렇게 당하

고만 있을 것입니까. 언제까지 이 학살이 계속되어야 합니까. "

조이스의 목소리는 복수심으로 불타고 있었다. 마치 촛농처럼 조이

스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 내려오고 있었다. 조이스는 잠시 동안 아

무 말도 없었지만, 나머지 셋은 숨소리마저 죽이고 있었다.

"저는 이 한 순간, 진실을 말할 수 있는 한 순간을 위해서 제 목숨

을 걸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것을 결코 후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

러분. 지금 당장 거리로 나가십시오. 지금 밖에는 여러분의 동참을 기

다리고 있는 수많은 동지들이 있습니다."

세론은 카메라를 정지시켰다. 그리곤 비디오 테이프를 꺼내었다.

조이스는 눈물을 닦아내곤 세론을 바라보았다. 세론은 대답대신 고

개를 끄덕였다. 아무도 뭐라고 덧붙이지 않았다. 오두막에는 그 어떠한

웅변보다 설득력이 있는 침묵이 감돌고 있었다.

"이제부터 전 이걸 엔드리스 테이프로 만들 거에요. 끝까지 다 방송

되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도록 말이죠."

세론은 테이프를 분리해 냈다. 그리곤 테이프의 처음과 끝을 이은

다음 다시 조립했다.

"이제 시간이 없어요. 빨리 시작하죠."

"언제 시작할 건가요?"

조이스가 물었다.

"지금. 이 오두막은 다음 주 까지 빌려 놨으니, 만약의 경우를 대비

해서 2차 포스트로 정하죠. 3차 포스트는 푸우순 시에요. 푸우순 시에

서는 시장이 암살 당했으니까, 여기보다 방송국에 침입하기는 더 어려

울 거에요."

"여기도 쉽지 않을 겁니다. 지금은 긴급조치 상황입니다."

메이런이 말했다.

"그래요. 하지만 지금은 어렵고 쉽고를 논할 때가 아니라 빨리 행동

에 옮길 때에요."

조이스가 말했다.

호버카를 타고 이동할 수 있는 곳은 지하도의 입구까지였다. 폐쇄된

하수도는 어느 도시에고 있었고, 반란군의 유용한 통로가 되어 주었다.

경찰들이 하수도를 돌아가면서 매복을 서기도 했지만, 아무리 긴급조

치 중이라고 해도 그 많은 하수도를 다 감시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

었다. 게다가 하수도에서 근무를 서는 것은 상당히 힘든 일이었다. 악

취는 헬멧으로 어떻게 처리할 수 있다고 해도, 어둠 속에서 몇 시간이

고 기다린다는 건 누구에게나 쉽지 않은 일이었던 것이다.

"조심해요. 혹시 비디오 테이프를 떨어뜨리거나 하면 큰일이니까."

무거운 조명을 나르면서 팀이 세론에게 말했다. 메이런은 조명기구

만은 꼭 가지고 가야 한다고 주장했고, 그 주장은 이번에도 먹혀 들어

갔다.

"걱정말아요, 팀. 방송국 용 비디오 테이프에는 모두 일련번호가 붙

어 있거든요."

"아, 그렇다면 하수도에 떨어져 있을 수 많은 비디오 테이프 중에서

골라내기란 아주 쉬운 일이겠군요."

"비꼬지 말아요, 팀. 그 일련번호에는 짧은 단파 신호를 보내는 송신

기가 붙어 있어요. 그 단파 신호를 잡아내는 장비는 휴대하기 편하고,

지금 저도 가지고 있거든요. 그게 없었다면 그 넓은 마을에서 어떻게

비디오 테이프 하나를 찾아 낼 수 있었겠어요?"

조이스의 말에 팀도 유머 감각을 잃은 모양이었다. 팀은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수도에 흐르고 있는 하수에는 쓰레기와 오물이 가득했다. 메이런

은 휴대용 라이트 불빛을 받아 반짝거리고 있는 그것들을 바라보면서

반란군을 상상했다. 아무리 어둡고 더러운 것고 반짝일 수 있다. 그리

고, 지금 메이런 일행은 반짝이고 있었다.

웨이팅하우스 시에 잠입하자마자 세론은 일행을 임시 거처로 안내했

다. 도시는 한 밤 중이었다. 조명기구를 들고 움직이고 있는 일행은,

혹시 검문 경찰과 마주치게 된다면 세론이 기자증을 보이며 촬영팀이

라고 말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검문 경찰

을 만나지 못해 계획을 실행하지는 못했다.

세론의 임시 거처는 지하에 마련되어 있었다.

"좀 지저분하죠? 여긴 잘 쓰지 않는 곳이어서."

세론이 조명을 켜면서 말했다. 도시에 있는 건축물이라고는 믿어지

지 않을 정도로 어두운 조명상태였다. 게다가 안에는 잡동사니가 가득

했다. 바닥에는 폐지와 먼저 덩어리들이 가득해서 앉고자 한다고 해도

앉을만한 곳을 찾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괜찮아요. 지저분한 곳에는 익숙해져 있어요. 푸우순 시에서는 여기

보다 훨씬 더 한 곳에서 지냈으니까."

팀이 바닥의 잡동사니들을 발로 걷어차, 조명 기구를 내려놓을 자리

를 만들면서 빈정거렸다.

"다행이네요. 여기 말고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거든요. 혹시 치우고

싶으면 그렇게 하세요. 금방 떠나 버릴 테니까요, 우리는."

세론도 지지 않고 맞받았다. 메이런은 세론과 팀이 어쩐지 어린아이

같은 자존심 싸움을 하고 있는 것만 같아서 뭐라고 한 마디 거들면서

농담에 끼어 들고 싶었지만, 지금 상황은 농담을 즐길만한 상황은 아

니었다.

"바로 방송국으로 가나요?"

조이스가 세론에게 물었다.

"그래요. 여기서 방송국은 아주 가깝거든요. 이 날을 위해서 준비했

어요. 여기 책상 위에 있는 것들은, 우리가 쓰게 될 장비에요."

세론이 말하지 않았다면 누구라도 먼저 물었을 것이다. 전자장비처

럼 보이는, 하지만 용도를 알 수 없는 장비 몇 개와 내시경처럼 보이

는, 하지만 용도를 알 수 없는 장비, 또 밧줄처럼 보이긴 하지만 용도

를 알 수 없는 물건들 사이에 섞여서 정말 밧줄인지 아닌지 짐작하기

어려운 물건이 무엇인지.

"혁명 전사의 일이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일인 줄은 몰랐군요."

팀이 아직까지도 빈정거리는 투로 말하고 있었다. 메이런은 팀을 말

릴까 생각했지만 조금은 더 두고 보기로 했다.

"이 장난감들은 방송국의 감시 카메라의 작동을 멈추고, 잠겨 있는

문을 열 수 있게 해주는 장비에요. 그리고 이건 침투 시에 요긴하게

쓰이는 관측경, 그리고 만나게 되는 보안요원들을 기절시킬 스턴 건,

그리고 기절한 보안요원을 묶을 밧줄이고요."

세론은 물건을 하나 하나 들면서 이렇게 설명해 주었다. 팀이 세론

의 말에 뭐라고 빈정거리려고 했지만, 메이런이 얼른 팀의 말을 막았

다.

"어떻게 구했죠? 방송국에서 이런 걸 지급해 주지는 않을 텐데요."

"아무리 긴급조치 중이라고 해도 암시장은 돌아가기 마련이죠. 그리

고 기자 일을 하다 보면 그런 암거래 상인을 찾아내는 건 그렇게 어려

운 일이 아니죠."

세론은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어두운 조명 때문이었는지 몰라도,

세론의 인조피부도 그리 흉물스럽게 보이지 만은 않게 만드는 밝은 미

소였다.

"자. 이제 계획은 이래요. 우리는 방송국에 잠입해서, 이 엔드리스

테이프가 계속 방송되도록 할 거에요. 여기 이 장비는, 운만 좋다면 서

너 시간 정도 방송이 계속 될 수 있게 도와줄 거에요. 그리고 이 장비

는 우리가 안전하게 빠져나갈 수 있게 도와줄 거고요. 우리가 어느 문

으로 나갔는지 알 수 없게 해 줄 테니까요. 그리고 나면, 우리는 여기

로 돌아와서 호버카가 올 때까지 대기하면 되는 거죠."

"호버카가 온다고요? 우리 말고 계획을 알고 있는 친구가 더 있나

요?"

조이스가 꽤 예민하게 반응하면서 물었다.

"물론 우리뿐이죠. 그리고 호버카를 몰고 오는 건 나에요. 호버카는

내가 잘 아는 주차장에 숨겨 뒀어요. 도난신고된 차량도 아니니까 여

기서 마을로 향하는 하수구까지는 별 문제 없을 거에요."

"그 호버카를 타고 방송국으로 가면 안되는 겁니까?"

팀이 물었다. 다행스럽게도 이번에는 빈정거리는 투는 아니었다.

"방송국에 잠입하는 것도, 이런 은신처에 안전하게 숨어 있는 것도,

모두 호버카가 없을 때 가능한 이야기에요. 방송국 근처에 호버카를

타고 갔다가는 당장 검문을 당할 거거든요."

세론을 제외한 셋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이 끝나면 세론은 주차장으

로 가서 호버카를 가지고 올 것이고, 그 사이 나머지 셋은 여기에서

대기하고 있으면 되는 일이었다. 만약 일이 틀어지게 된다면 각자 알

아서 하수구를 통과해 2차 포스트로 정해진 오두막에 모이면 될 것이

었다. 물론 그렇게 된다면 호버카를 타고 움직이는 것 보다 훨씬 더

위험해 지겠지만.

"이 물건들, 작동 원리가 도대체 뭐요?"

팀이 물었다. 세론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요? 말해 주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당신..."

팀이 발끈하면서 조이스에게 따져 물으려고 했지만, 이번에도 메이

런이 빨랐다. 메이런은 팀의 정면에 서서 팀의 눈을 노려보았다.

"주도권 다툼이라면 제발 그만둬, 팀. 우리는 전사지 정치가가 아니

잖아?"

메이런의 이 말에 팀은 멋적은 듯 쓴웃음을 지으면서 뒤로 물러났

다. 팀 스스로도 그리 당당한 상황이 되지 못한다는 걸 눈치 챈 모양

이었다. 메이런은 조이스의 눈치를 살폈다. 조이스는 이런 광경을 아주

흥미롭다는 듯한 눈을 하고있었다.

"자. 그럼 일단 이걸 착용해요."

봉투 안에 담겨 있는 명찰을 꺼내면서 말했다.

"방송국 출입증이에요. 가짜라 약간 검색기계를 손봐야 하긴 하지만,

그럭 저럭 잘 통할 거에요. 자. 그럼 나가죠."

세론은 얼른 앞장을 섰다. 그리고 장비들을 챙기는 것은 팀과 메이

런의 몫이 되었다.

방송국으로 이동하는 동안 바라본 거리는 어둠에 잠겨 있었다. 가끔

지나는 호버카의 소음은 모두의 마음을 철렁 내려앉게 만들 만큼 소란

스럽게 느껴졌고, 가로등 불빛은 지나치게 밝아서 일행의 숨을 곳을

빼앗아 가고 있는 것만 같았다.

"이제 곧 이 거리가 시민들로 가득 차게 될 거야."

조이스가 말했다. 메이런은 조이스의 눈을 바라보았다. 조이스의 눈

은, 마치 꿈을 꾸고 있는 듯 느껴졌다. 메이런은 그런 조이스에게 '확

신은 위험해요'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차마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그

리고 메이런도 이 거리가 시민들로 가득 차길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도시에는 이제 안개가 차오르고 있었다. 메이런은 한 치 앞도 내다

볼 수 없을 만큼 안개가 짙어지기 전에 이 도시를 빠져나가고 싶었다.

어쩐지 돔 너머로 비쳐 보이는 별빛이 흩어지고 있는 듯 느껴지는 밤

이었다. 어둠 속을 걷고 있는 네 휴먼 레이스의 모습은 마치 탈주자

같다고 메이런은 느꼈다.

"한 때 라디오 방송국은 락벳 전쟁에 참전하기 위한 도구로 쓰였

지?"

목소리가 메이런에게 묻는다. 목소리의 말을 듣자 메이런은 어렴풋

하게 나마 길과 건물을 기억할 수 있었다. 그 사이에 새로 들어선 건

물들과 캡슐 스테이션, 넓어진 도로 때문에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그런 라디오 방송국에 지금 네가 돌아가고 있는 거야. 진실을 알리

기 위해서."

"방송은 도구일 뿐이에요."

목소리가 미처 다 그치기도 전에 세론이 말했다. 세론의 말에 메이

런은 잠시 혼동을 일으켰다.

"방송은 진실을 전할 수도 있고, 거짓을 전할 수도 있죠. 늘 거짓을

전해 온 방송국이지만, 이제 우리는 진실을 전하기 위해서 방송국으로

들어가고 있어요. 어쩐지 아이러니컬하지 않아요?"

상당히 흥분된 어조였다. 태연한 척 하고는 있었지만 아마도 일행중

에서 가장 흥분하고 있는 게 바로 세론일지 몰랐다.

"우리가 전쟁에서 이길 수 없는 건 당연한 거였어요. 그들은 진실을

말하고 있었고, 우리는 거짓을 말하고 있었으니까요. 진실의 힘이란,

그런 거에요."

세론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럼, 이 방송을 하면 우리가 이길까요?"

"결국에는 이길 거에요. 진실의 힘이란, 그런 거에요."

세론은 자신의 목소리에 조금씩 도취되어 가고 있는 듯 했다. 메이

런은 락벳에서 보았던 세론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 때 본 세론의 모습

은 순수하고 정열적으로 불타고 있는 젊은 기자였다. 지금의 세론은

비록 더욱 세련되어지고 강인해지기는 했지만, 근본적으로 그 때와 다

를 바 없어 보였다. 세론은, 여전히 젊고 순수해 보였던 것이다.

"다 죽어 버린다면요?"

메이런이 불쑥 이렇게 물었을 때, 세론은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

하는 것 처럼 보였다.

"다 죽어 버린다면요. 하나도 남김없이. 모조리 다 죽여버리면 어떻

게 될 까요? 그 비디오 테이프를 찾아낸 마을에서 있었던 일 처럼 말

이죠."

"그럴 수는 없어요, 메이런. 그들은 기본적으로 우리가 있기 때문에

존재하는 세력이에요. 그들은 강해 보이지만 우리를 밟고 서 있기 때

문에 강해 진 것이고, 그들은 많이 가진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 것을

빼앗았기 때문에 많아 보일 뿐이에요. 그리고..."

"우리는 모두 죽어요."

메이런이 말했다. 그리고 이 말은 메이런의 진심이었다. 메이런은 이

말이 자신의 말인지, 아니면 목소리의 말인지 구분하기 힘이 들었다.

메이런의 목소리는 알고 있었다. 누구나 다 죽는 다는 것을. 사랑하는

이도, 증오하는 이도, 모두 죽는다는 사실을. 그렇다면 도대체 지금 하

고 있는 일들은 무슨 의미가 있다는 말인가. 메이런은 내딛는 걸음걸

음이 무척이나 무겁게 여겨졌다. 마치 한 발을 내딛을 때마다 한 발이

깊은 수렁에 빠지는 듯했다.

"이제 토론은 그만 두죠. 누가 들으면 긴급조치 위반으로 당장 잡혀

가."

조이스가 모처럼 농담으로 대화에 끼어 들었다. 메이런은 그 모처럼

나온 농담이 대화를 그만두라는 내용인 것이 아쉬웠다.

"자. 그럼 이제부터 시작이에요."

세론의 말에 앞을 보자, 방송국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메이런은

가죽 홀스터에 차고 있는 K-5 9밀리 권총을 점거했다.

"아, 그걸 쓸 생각은 아니겠죠? 일단 정문에 있는 보안요원은 피해

가야 해요. 지금이 아마 막 졸고 있을 시간인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위험부담은 줄여야죠. 우리의 목적은 테러가 아니라 잠입이에요."

세론은 이렇게 말하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왜요? 잠입하는 게 아쉬운가요?"

팀이 팔짱을 끼고서 세론에게 물었다.

"아뇨. 이제 우리가 방송국을 점거하고, 이 비디오 테이프를 방송하

고 나면, 행성 어스 전체에 있는 방송국의 보안이 강화될걸 생각하니

까 한숨이 나온 것 뿐이에요. 우리야 쉽게 하겠지만, 앞으로는 결코 쉽

지 않은 일이 될 거니까."

"진실을 이런 식으로 전달하기 어려울 것 같아서 섭섭한가요, 세

론?"

조이스가 세론에게 물었다. 세론은 긍정의 뜻을 표했다.

"하지만 누구든 먼저 할 일이에요. 그리고 그 일을 우리가 하는 것

뿐이라고요."

"알아요, 나도 알아요."

조이스가 말하긴 했지만 기운이 빠진 듯한 투였다.

"중요한 건, 우리가 지금 진실을 알리려고 하고 있다는 거잖아요. 그

거면 되지 않나요?"

그런 기색을 눈치챘는지, 조이스가 이렇게 덧붙였다. 조이스는 그제

서야 조금은 수긍하는 눈치가 되었다.

"자, 그럼 이제 들어가요."

조이스가 팀과 메이런, 그리고 조이스를 번갈아 가면서 본 후에 말

했다.

"이제부터는 나한테 맡겨 둬요."

"믿어도 되겠죠?"

믿을 수 없다는 투로 팀이 말했다.

"내가 수집한 정보와 이 장비들이 어떻게 쓰이는지 보면 알 수 있을

거에요."

세론은 메이런이 들고 있던 가방에서 장비들을 꺼내면서 말했다.

웨이팅하우스 시에 내려앉기 시작한 안개는 점점 더 짙어만 가고 있

었다.

제 목:[하이어드] Who wants to live forever? -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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