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안전가옥
아이라가 12군단 소속 특공 여단 사령부를 찾은 건 로스를 만나보기
위해서였다. 시를 빠져나와 마을을 거쳐, 사막을 건너 특공 여단 사령
부로 가는 내내 아이라는 말이 없었다. 로웰의 모습을 보고서 받은 충
격이 아직도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이라는 냉정함을 완전
히 잃은 것은 아니었다. 포레스트 회장을 만나기 위해서는 12군단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고, 아이라가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경찰 동기인 로스에게 의지하는 수밖에는 없었다.
부관인 틸트가 12군단 소속 특공 여단 위병소에 도착했다는 걸 알려
주지 않았다면 아마도 아이라는 언제까지고 멍한 상태로 있었을지 몰
랐다.
"총경님."
틸트가 아이라를 돌아보면서 말했다. 아이라는 마치 잠에서 막 깨어
난 것 같은 흐리멍텅한 눈을 해가지고는 틸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틸트가 창 밖을 보라는 신호를 보냈을 때가 되어서여 아이라는 위병
근무를 서고 있는 병사가 자신을 보고 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아이라는 병사가 얼굴에 시커먼 위장크림을 바르고 있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면서 주둔지에서 왜 위장을 하고 있는 걸까, 궁금해했다.
"로스. 로스 중령을 찾아왔어."
"예? 누구를 말씀하신 겁니까?"
병사가 짜증이 난다는 투로 말했다.
"로스 중령. 여기 작전 참모 로스 중령 말이야. 자네 이름이 뭔가?"
틸트가 이렇게 거들지 않았다면 아이라는 총경 계급장을 노름을 해
서 땄다는 소릴 들어도 아무 변명을 할 수 없었을지 몰랐다. 총경이
일개 병사에게 이런 질문을 들어야 할 이유는 없었던 것이다.
"포코스입니다."
"관등성명 똑바로 안 대!"
틸트가 눈을 부라리며 목청껏 소리쳤다. 이건 효과가 있었다. 병사는
몸을 움찔 하면서 부동자세를 취했던 것이다.
"예. 상병 포코스입니다."
하지만 우렁찬 목소리는 아니었다. 틸트는 그런 것까지 트집을 잡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목소리를 낮추고 천천히 다시 말을 이었다.
"이봐. 작전참모 실에 전화 한 통 넣으면 되는 거 아냐? 시경 아이
라 총경님께서 찾아오셨다고 말이야. 못알아 듣겠어?"
"예, 알겠습니다."
조금은 아니꼽다는 투로 대꾸한 포코스 상병은 위병소로 뒤돌아갔
다. 틸트는 아이라를 바라보았다. 칭찬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떤 지시가
이어질 거라고는 생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이라는 아무 반응이 없
었다. 틸트는 이런 아이라의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때문에 혹시 머리
가 어떻게된 게 아닐까 싶어서 겁이 더럭 나기까지 했다.
"총경님?"
이번에는 병사가 아니라 간부였다. 틸트는 역시 위장 크림으로 위장
을 마찬 장교의 어깨에서 소위 계급장을 확인 할 수 있었다.
"오늘 위병 장교 책임을 지고 있는 지르콘 소위입니다. 작전 참모
님께서는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지르콘 소위는 상당히 정중한 투로 이렇게 말했다. 아마도 포코스
상병의 이야기를 전해 들었기 때문이리라.
"날... 만나고 싶지 않다고 했어?"
아이라가 초점이 명확하지 않은 눈으로 지르콘 소위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이봐. 아이라 총경님께서 직접 찾아오셨다고 분명히 전했다는 거
야?"
아직 완전히 정상이 아닌 상관을 위해서 부관이 목청을 높여서 이렇
게 물었다. 하지만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예. 그렇습니다. 그리고, 포기하고 돌아가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틸트가 아마 문을 열고 나가서 멱살을 잡는다고 해도 변하지 않을
것 같은 정도의 침착한 말투였다. 어쩌면 냉정한 말투에 가까웠는지도
모른다.
"통화하게 해 줘."
아이라가 말했다. 틸트는 아이라의 눈이 생기를 찾아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매우 고무적인 현상이었다. 상관이 정신을 차린 다
는 건 일이 잘 풀린다는 하나의 신호와도 같은 것이기 마련이었다.
"분명히 전해 드렸습니다. 작전참모 님께서는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으셨다고 했고, 또한 그냥 돌아가시라고..."
지르콘 소위는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아이라가 갑자기 문을 열고
호버카에서 내려 버렸기 때문이었다. 아이라는 성큼성큼 위병소를 향
해 걸음을 옮겼다.
"정지!"
아이라는 지르콘 소위의 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지르콘 소위는 아
이라의 등뒤에서 E-1 라이플을 정조준하고 있었다.
"지금은 긴급조치 중입니다. 그리고 우리 부대는 비상 사태가 발령
되었습니다."
아이라는 그제서야 왜 병사와 간부들이 위장을 하고 있는지를 알아
차릴 수 있었다. 이 부대는 지금 작전 수행 중인 것이다. 어쩌면 그렇
기 때문에 자신을 피하고 있는지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 그럼 실탄도 지급됐겠네?"
아이라가 물었다.
"예, 그렇습니다."
"그럼 쏴."
아이라는 이렇게 말하고는 지르콘 소위를 완전히 무시하고 위병소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전화기를 집어들고 교환을 찾았다.
"작전 참모실."
아이라가 이렇게 말하고 있는 동안 지르콘 소위는 상당히 당황하고
있는 눈치였다. 비상이 발령되었으니 군인에게는 당연히 사격을 할 권
리와 의무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 전화를 걸고 있는 시경 총경은 적인
가 아군인가? 아군이라면 지금 하고 있는 행동은 불법적인 것인가 아
닌가? 이런 의문이 지르콘 소위의 사격을 막고 있었다.
"예. 작전참모입니다."
로스의 목소리였다.
"나야, 아이라야."
"아무도 만나지 않겠다고 분명히 전했을 텐데? 지금 우리는 비상령
이 떨어져 있어. 난 여기서 한 걸음도 못나가."
"꼭 할 이야기가 있어."
"나중에 하자고, 그 꼭 할 이야기. 그리고,"
로스의 목소리는 여기서 잠시 끊겼다. 아이라가 들고 있는 송수화기
저편에서 로스가 뭔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이라는
생각을 해 보았다.
"이미 늦었어. 내가 같이 일하자고 했을 때 같이 일을 하겠다고 했
어야지."
"무슨 소리야?"
아이라가 물었다.
"우리 부대에서 하는 일, 신경 쓰지 말라고 했지? 지금은 내 충고를
따를 때야. 아이라. 조심해서 돌아가."
"로스, 너..."
전화는 일방적으로 끊어졌다. 아이라는 황급히 교환을 다시 찾으려
고 했지만 포코스 상병이 아이라의 전화기를 빼앗아 들었고 또한 E-1
라이플을 겨누고 있는 지르콘 소위때문에 뜻대로 할 수는 없었다. 아
이라는 한숨을 내쉬면서 어깨를 으쓱했다.
"알았어. 시험은 그만 하지. 돌아가겠어."
"총경 님. 충고 하나 드려도 될까요?"
위병소를 벗어나 호버카로 향하고 있는 아이라의 등 뒤에 대고 지르
콘 소위가 말했다.
"별로 듣고 싶지는 않지만, 한 번 해봐."
아이라가 말했다.
"목숨은 소중한 것입니다."
지르콘 소위는 여전히 정중한 태도이기는 했지만 화가 치밀어 오르
는 것을 참고 있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래. 소위 말대로 야. 목숨은 소중한 거지. 그러니까 목숨은 걸어
야 할 때 걸어야 하는 거라고. 누구도 영원히 살 순 없으니까."
아이라는 이렇게 생각나는 대로 내뱉어 주고는 호버카에 올랐다. 아
이라의 표정은 일그러졌지만 눈만은 냉정한 빛으로 돌아왔다.
"이제, 어떻게 하실 겁니까?"
로스가 물었다.
"돌아가야지.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
"어디로 갈까요?"
"주둔지. 달리 갈 곳도 없어."
조종사의 물음에 아이라가 이렇게 말했고, 호버카는 사막의 저편으
로 사라져가는 모습을 지르콘 소위는 끝까지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 만약에 출동하게 되면 말야,"
지르콘 소위는 어금니를 악물었다.
"아주 좋지 않은 일이 많이 벌어질 거야. 아주 많이."
평소 같았으면 지르콘 소위의 말에 포스코 상병이 뭐라고 한 마디
덧붙일 법도 했지만, 포스코 상병은 아무 말도 덧붙이지 못했다. 농담
이나 지껄이기에 지르콘 소위는 너무나도 화가 나 있었던 것이다.
사막을 건너가는 동안 해는 기울어, 주둔지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노을이 지고 있었다.
"세워."
아이라가 조종사에게 말했고, 조종사는 즉시 호버카를 멈추었다. 아
이라는 멈추어 선 호버카의 차창 너머로 보이는 노을을 바라보고 있었
다.
"내가 할 일이 없고, 시간이 많아서 이러고 있다고 생각하면 곤란해,
틸트."
아무도 묻지 않았지만 아이라는 스스로 이렇게 먼저 말을 꺼내었다.
"노을은 아주 짧거든."
아이라의 눈은 노을을 향해 있었다. 노을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마음
의 평화를 찾을 수 있다. 마음이 평화로워지면 도대체 내가 왜 여기서
이런 일을 하고 있어야 하는지 의문이 들기 마련이다. 아이라는 자신
의 생각을 노을이 지는 동안 차근차근 정리할 수 있었다.
"노을이 왜 붉은지 알아, 틸트?"
아이라가 불쑥 물었다. 틸트는 멍하니 있다가 일격을 받은 싸움꾼
처럼 잠시 멈칫했다가 답변을 이었다.
"제가 배우기로는, 해가 질 무렵이 되면 빛의 산란현상 때문에..."
"알았어, 알았어. 그만 두자고."
아이라는 손을 내저었다.
로스에게 아이라는 종종 노을이 붉은 이유를 묻곤 했다. 그 때마다
로스는 그럴싸하게 들리는, 혹은 터무니 없게 들리는 이유를 대답해
주곤 했다. 그런 대답을 틸트에게 바란 것 자체가 무리였는지 몰랐다.
잠시 후, 노을이 졌고, 아이라 일행은 다시 주둔지를 향해 움직여가
기 시작했다.
주둔지에는 복귀한 기동대 병력들이 한창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작
전이 끝난 모양이었다. 세론은 리퍼를 찾았다. 리퍼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리퍼는 어디에도 없었다.
"개인적인 용무 때문에 시로 들어가셨습니다."
컨은 무뚝뚝하게 이렇게 말하고는,
"숙소에서 쉬십시오."
하고 냉정하게 대화를 끊어버렸다.
"이봐요, 컨. 내가 아무리 옵저버 자격밖에 없다고는 해도 계통상의
지휘관은 나에요."
아이라는 이렇게 대꾸했다.
"계약이 지속되는 한, 대장님이 없을 때 지휘관은 접니다."
"계약?"
아이라가 되물었다. 컨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지만, 아이라는 컨의
얼굴에서 해서는 안될 말을 했다는 듯한 기색을 읽어 낼 수 있었다.
"계약이라니. 누구하고 한 계약이지요?"
"우릴 고용한 건 시장님입니다."
컨은 이렇게 말하곤 돌아서버렸다. 아이라는 컨의 뒤에다 대고 뭐라
고 더 물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마땅히 떠오르는 말이 없었다. 그래
서 아이라는 결국 숙소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혹시 일루젼 같은 거 있어?"
아이라는 숙소로 돌아오자 마자 틸트에게 이렇게 물었다.
"일루젼이요?"
틸트는 되묻기는 했지만 사실 아이라가 정말로 일루젼이 먹고 싶다
는 뜻으로 한 말이 아니라 오늘 몹시 피곤하고 짜증나는 일을 겪었다
는 걸 표현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죄송합니다만, 저는 시에서 근무하는 바텐더가 아니라 경찰입니다."
틸트는 짐짓 진지한 투로 이렇게 말했다. 아이라는 피식 헛웃음을
내었다. 틸트가 이런 식으로 농담을 하고 있는 게 그다지 싫지 않았던
것이다.
"나, 괴롭히지 마. 손님은 일체 받지 않겠어. 포레스트 회장이 직접
찾아온다면 모를까. 하긴. 찾아 올 손님이 없기도 하군."
아이라는 틸트에게 말하는 건지, 아니면 중얼거리는 건지 분간하기
어려운 투로 말하고는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불을 켜지 않은 방은 어두웠다. 하지만 아이라는 불을 켤 생각도 하
지 않고 그대로 침대에 몸을 던져 누웠다. 고단한 하루였다. 이럴 때는
잠이 최고지. 다 잊어버리고 푹 자는 거야. 이런 저런 생각하다 보면
잠도 잘 오지 않고, 그렇게 되면 내일은 더 무거운 하루가 되지. 일단
잠이라도 잘 자 두면, 그거면 되는 거지. 아이라가 아무리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했어도 잠이라는 건 그렇게 간단하게 오는 게 아니었다. 눈
을 감자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로웰의 얼굴이었고, 곧이어 포레스트
회장의 얼굴과 헬멧을 쓰고 있던 리퍼의 얼굴이 차례로 떠올랐다. 아
이라는 이리 뒤척이고 저리 뒤척이다가 문득 린을 떠올렸다.
린.
군을 떠나 경찰로 되돌아오면서 린의 신병은 군에서 맡아주기는 했
지만 그 뒤로 알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가 없는 상태였다. 왜 린의 얼굴이 지금 이렇게 생생하
게 떠오르는 걸까. 죄책감? 그리움? 어떤 이유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었지만, 린의 얼굴이 떠오르는 것이 자꾸 불길한 징조처럼 여겨졌다.
한 참을 이런 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아이
라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틸트가 혹시 일루젼이라도 구해왔나 싶은 기
대가 들었다.
"아이라."
뜻밖에서 아이라를 찾아 온 것은 로스였다.
"저, 방해하지 말라고 하셨다고 했는데, 막무가내로..."
틸트가 로스의 뒤편에서 아이라에게 말했다. 아마도 말리는 틸트를
밀치고 들어온 모양이었다.
"로스?"
아이라가 확인을 위해서 이렇게 물었지만 로스가 분명했다. 로스는
조금 비틀거리면서 아이라 앞에 있는 화장대의 의자를 끌어 앉았다.
"막무가내로군."
아이라가 가볍게 눈을 흘기며 말했다. 불과 몇 시간 전에 그렇게 차
갑게 대해놓고는 이렇게 찾아오는 건 무슨 심산이람.
"뭐야. 작전 중에 막무가내로 나한테 전화 한 건 누군데?"
로스의 발음은 조금 불분명했다. 아이라는 틸트에게 나가라고 손짓
을 했고, 틸트는 문을 닫고 나가버렸다.
"어떻게 왔어?"
"또 놀러 오겠다고 했잖아.?"
로스는 취한 것처럼 보였다.
"한 잔 했구나?"
"딱 한 잔만."
붉어진 얼굴,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 술에 취했을 때는 몰라도
맨 정신에 맡기에는 역한 일루젼의 향. 아이라는 혀를 끌끌찼다.
"왜 온 거야?"
"할 말이 있어서. 사실, 나 지금 무단 근무지 이탈 중이야."
"자수하러 온 거라면 헌병대를 찾아가. 난 경찰이지 헌병이 아니라
고."
"농담하는 거 아냐!"
로스가 갑자기 화를 버럭 내면서 소리쳤다. 아이라는 깜짝 놀랐다.
로스가 자신에게 이렇게 대하는 걸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던 것이
다. 아이라는 잠시 동안 말문이 막혀있었다.
"우리 부대는 작전중이야. 비상이 걸렸다고, 비상이."
"알았어. 어서 부대로 돌아가, 그럼."
아이라의 말투는 조심스러웠다.
"내가 왜 왔는지 모르겠어?"
"모르지, 당연히. 난 트랜서가 아니야."
아이라는 이제 술주정을 받아줄 자세를 갖추고서 이렇게 말했다. 로
스는 그런 아이라를 한 참 동안 바라보다가 천천히 말을 시작했다.
"나, 우리 여단 작전 참모야."
"알아."
"우리 부대에서, 아니, 우리 군단이 이제 무슨 일을 하게 될지, 난
알아."
"그렇겠지, 당연히."
"아이라. 너무 늦었어. 너무 늦어버렸어."
"뭐가 늦었다는 거야?"
"...이젠 되돌릴 수 없어."
로스는 고개를 꺾고 있었다. 아이라는 그 모습이 마치 울고 있는 것
처럼 보였다. 아이라는 로스의 어깨에 손을 얹고는 토닥거렸다. 그러자
로스는 팔을 들어 아이라의 손을 치웠다.
"오늘, 명단에서 네 이름을 봤어."
로스가 고개를 들고 말했다.
"무슨 말이야? 명단이라니?"
로스의 얼굴은 울고 있지 않았다. 술에 취한 건 분명해 보였지만, 로
스의 얼굴은 냉정해 보였다.
"기무사에서 보내 온 요주의 인물 명단. 똑똑한 율리스 장군이 먼저
봤다면 내가 네 이름을 볼 수는 없었겠지. 기무사에 친구가 있어서 다
행이었어. 아이라. 오늘 포레스트 회장을 찾으려고 했었지?"
아이라는 소름이 끼쳤다. 머리카락이 곤두서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기무사에서 날 조사해?"
"아니. 시장과 접촉하려는 존재는 누구라도 조사하지."
"맞아."
아이라는 자신이 심문을 당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불쾌하
기는 했지만, 심문 당하지 않으려면 심문하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라
는 걸 알고 있는 아이라는 일단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말하고 정보를
얻어내는 방법을 쓰기로 했다. 로스는 경찰 동기였고, 그렇기 때문에
로스에게는 충분히 통할 만한 방법이었다.
"시장이 날 이 자리로 보냈다고 들었어. 그래서 시장을 찾아 나선
거야."
"내가 했던 충고 기억하니, 아이라? 우리 부대에서 하는 일, 간섭하
지 말라고 말야. 시장과 접촉하는 일은, 우리 부대에서 하는 일에 끼어
드는 거야. 그건 아주 위험한 일이야, 아이라."
로스는 묻지도 않은 말에 술술 대답을 해 나갔다. 아이라는 자신의
방법이 통하고 있다는 걸 느끼곤 기분이 좋아졌다.
"그리고 시장과 접촉해서 어쩌겠다는 거야? 여기 특수기동대의 진짜
대장이라도 하고 싶은 거야? 아이라. 말했지만 이 부대와는 거리를 유
지해야 해. 지금 옵저버 위치도 위험해."
로스의 목소리는 흥분되어 있었다. 아이라는 수많은 심문을 통해서,
이런 말투로 말하는 것은 자신의 죄를 실토하는 범죄자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로스의 말은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는 것들이었
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로스, 두 가지를 물어 볼
게. 먼저, 왜 그래야 한다는 거지? 그리고, 네 말대로 시장 찾는 일도
포기하고, 여기서 벌어지는 일에서도 신경을 끊으면 나는 어떻게 하라
는 거야?"
아이라는 마치 큰누나가 동생에게 묻듯이 친절하게 로스에게 물었
다.
"'왜'를 알려고 하지마. 왜는 아주 위험한 거야. 군대에서 배웠지? 이
유는 모르는 편이 훨씬 나아."
"그럼 날보고 어떻게 하라는 거야?"
아이라는 치밀어 오르는 짜증을 꾹 참으면서 다시 한 번 물었다. 만
약 이 번에도 제대로 대답하지 못한다면 당장 나가라고 할 참이었다.
"경찰 그만둬. 그리고 나랑... 결혼해."
로스의 말에 아이라는 잠시 동안 할 말을 잊고 말았다. 화를 내려는
계획도, 그리고 당장 나가라고 말하려던 것도 모두 잊었다. 로스의 태
도는 그만큼 진지했던 것이다.
"내가 말해 줄게. 이제 몇 시간 뒤면 우리 부대는 움직여. 기동훈련
이라고 보고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지."
"계엄?"
아이라가 물었다.
"그럼 군이 도시를 장악한다는 거야, 지금 그 말은?"
"그래. 제 7야전군 사령관이 계엄 사령관직을 맡게 될 거야. 실질적
인 지휘는 율리스 장군이 하게 되겠지만. 일단 시장은 일선에서 물러
날 거야. 그리고 다시 그 자리에 오르겠지. 시장 자리에 말이야."
로스는 술이 깨고 있는지 얼굴을 양손으로 마치 얼굴을 씻는 것처럼
비볐다.
"시장을 만나게 해 줘."
잠시 침묵을 지키고 있던 아이라가 말했다. 그러자 로스는 어이가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내가 한 말 못 들었어? 이제 경찰이고 시장이고 아무 짝에도
쓸 데 없는 허수아비가 된다니까!"
"시장을 만나 보겠어. 그리고 나서 결정해도 늦지 않아."
로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이라는 잠깐 로스가 그대로 문을
열고 나가버리는 게 아닐까 싶었지만 그렇지는 않았다. 로스는 다시
한 번 얼굴을 씻어내더니 도로 의자에 앉았다.
"좋아. 시장이 있는 곳을 알려 줄 게. 하지만 나하고 약속해줘."
"결혼해 달라는 것만 아니면."
아이라는 농담조로 말했지만 로스는 그 말에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먼저 어떤 일이 있어도 우리 부대와는 맞서지 말라는 약속을 지켜
줘. 그리고, 특수기동대의 지휘권을 쥐게 되면, 아니, 특수기동대의 옵
저버 역할만 하게 되더라도, 절대 특수기동대에서 하는 일에는 상관하
지마. 알고있겠지만, 특수기동대는 시장의 사병이나 마찬가지야. 그 미
친 포레스트 회장이 무슨 짓을 할 지 몰라."
"알았어. 나도 용병 몇 데리고 특공여단에 맞서는 일 따윈 하지 않
아. 난 미치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옵저버는 옵저버일 뿐이야. 걱정 안
해도 돼."
"사병들은 하이어드야."
로스가 말했다.
"하이어드는 계약에 따라서 움직이지. 계약조건만 바뀐다면, 얼마든
지 상황은 바뀔 수 있어. 네가 지휘관이 될 수도 있는 거라고. 난 그래
서 하이어드를 믿지 않아."
"충고, 잘 들었어."
아이라가 웃으며 대답하자 로스는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그리
고는 지갑 안쪽을 몇 번 살피더니 명함을 한 장 꺼내었다.
"회장이 있는 곳 홀로그램이야. 이것만 있으면 찾아갈 수 있을 거
야."
아이라는 명함을 받아들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로스는 명함
을 뒤로 뺐다.
"하나 물을 게."
로스의 표정이 다시금 진지해졌다. 아이라는 농담으로 무마시킬 수
없는 질문이 진지한 얼굴 뒤에 숨어있다는 걸 직감할 수 있었다.
"내 청혼을 받아주지 않는 이유가 뭐지?"
로스의 질문에 이번에는 아이라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너랑 결혼하면 좋은 점이 뭔데? 이야기했지만 너하고 내가 결혼한
다고 해서 휴가가 주어지지는 않아. 그리고 난 지급 받은 개인 호버카
로 출퇴근을 한다고."
아이라가 말했다.
"그 질문을 락벳에서 받았을 때, 난 이렇게 대답해야 했어. 네가 나
하고 결혼하게 되면 말이야, 너는 이 우주에서 너를 가장 사랑하는 휴
먼 레이스와 행복하게 살 수 있게 될 거라고 말이야."
로스의 표정이 진지했던 이유는 이 말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이라는 로스의 말이 진심이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하지만, 아이
라의 마음은 크게 흔들리지 않았다.
"미안하지만 그렇게 사는 건 행복하지 않아, 나에겐."
아이라의 말이 끝나자 로스는 뭔가 한 방 얻어맞았다는 듯한 얼굴이
되었다. 로스는 곧이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번에는 정말로 나갈 모양
이었다.
"오늘, 노을 봤어?"
문을 나서기 전, 로스는 아이라에게 이렇게 물었다.
"응. 너희 여단에서 여기로 오는 길에."
"노을이 붉은 이유가 뭔지 알아?"
"내가 늘 물었던 것 같은데, 그 질문은."
아이라는 로스와 함께 바라보았던 노을을 회상하면서 이렇게 대꾸했
다.
"노을이 붉은 이유는 말이야, 이제 곧 죽어갈 자들의 운명을 하늘이
슬퍼하고 있기 때문이야."
이게 로스의 마지막 말이었다. 로스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아
이라도 따라나섰지만 로스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이라의 숙소 앞에 대기하고 있는 호버카 조종사는 로스가 나오는
것을 보고 서둘러 엔진을 가동시켰다. 호버카에 타기 전, 로스는 아이
라를 한 번 바라보았다.
로스의 얼굴빛은 어두워 보였다. 호버카의 헤드라이트 빛을 뒤에서
받아서 그런지도 몰랐고, 아이라에게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한 걸 후회
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아이라는 그런 로스에게 따듯한 작별인
사라도 한 마디 하려했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로스는 그런
아이라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가 그대로 호버카에 올랐다.
다시 볼 수 없을지도 모르겠군.
아이라는 사라지는 호버카를 계속해서 바라보고 있었다. 어쩌면 시
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호버카를 바라보는 것이 아이라가 지킬 수 있는
로스에 대한 예의일지 몰랐다. 하지만 아이라는 그런 생각이 들자마자
냉정하게 뒤돌아섰다. 이미 떠난 호버카는 아무리 불러도 돌아오지 않
을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계속해서 바라보는 건 그저 시간낭비일
따름이었다.
"틸트!"
아이라가 부관을 불렀다. 틸트가 다가오자, 아이라는 로스에게서 받
은 홀로그램 명함을 틸트에게 건냈다.
"호버카 준비시켜. 지금 당장 떠난다."
"여기가, 어딘가요?"
"포레스트 회장을 만나러 간다."
아이라는 이렇게만 말하고 호버카가 오기를 기다렸다. 어두운 밤하
늘에는 붉은 구름이 몰려들고 있었다.
호버카가 홀로그램 명함에 표시된 곳까지 가는 동안 아이라는 잠을
잘 수 있었다. 아이라는 스스로 신기하다고 느꼈다. 침대위에서는 한참
을 뒤척여도 잘 수 없었던 아이라였지만, 포레스트 회장과의 만남을
앞두고는 잠을 쉽게 청할 수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뭔가 목적을 가지
고 움직이는 동안에는 마음이 편해지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지만 확신
할 수는 없었다.
"틸트?"
호버카의 속도가 줄어들자, 설풋 들었던 잠에서 깨어난 아이라는 먼
저 부관을 찾았다.
"무슨 꿈을 꾸었던 것 같긴 한데, 기억이 안나. 좋지 않은 꿈이었던
것 같은데."
아이라는 이렇게 말하면서 어깨를 움직였다. 그렇게 해야 조금이라
도 빨리 제정신이 돌아올것 같았던 것이다.
"아이라 총경 님. 혹시 초능력 같은 거 있으십니까? 예지력이라던가
요."
호버카가 멈추어섰을 때, 틸트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이라는 무슨 말
이냐고 묻기 전에 틸트의 말이 무슨 말인지 알 수 있었다.
호버카가 도착한 곳은 포레스트 회장 개인이 소유하고 있는 안전가
옥인 모양이었다. 웅장한 크기의 대 저택이 어둠 속에서 그림자를 드
러내고 있었다. 예전에 포레스트 회장의 집무실에서 보았던 고대의 양
식을 본 딴 것 같은 느낌의 건물이었지만, 아이라의 눈길을 끈 것은
안전가옥이 아니었다. 안가 정문 앞에는 보안 요원 둘이 쓰러져 있었
던 것이다. 아이라는 일단 호버카에서 내렸다.
보안요원 둘은 핏물 위에 쓰러져있었다. 아이라는 현장 수사관 시절
의 습관대로 피의 굳은 정도를 먼저 확인한 다음 시체를 살폈다.
보안요원은 둘 다 가슴에 총을 맞고 쓰러져 있었다. 구멍의 크기로
보아 9밀리나 아니면 그것보다 큰 구경의 권총일 것 같았다. 한 자리
에 두 방을 쏜 걸로 보아 상당한 실력을 갖춘 자에 의해 당한 것 같았
다.
"무장하고 있지?"
"물론입니다."
틸트가 말했다.
"빨리 저택 안으로 들어가지."
"지원요청은 하지 않습니까?"
아이라는 잠시 생각을 해 보았다. 지금 상황이라면 당연히 본청에
알리던가, 그것이 여의치 않다면 자신의 부대원들이라도 불러야 했다.
아무리 계통상의 지휘관일 뿐이라고 해도.
하지만 아이라는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포레스트 회장은 지
금 상황에서, 아이라의 적이었다. 적의 적이라면, 뭔가 협상의 여지가
있을 것 같았던 것이다.
"나중에. 지금은 일단 안으로 들어가자."
아이라는 이렇게 말하곤, 틸트와 함께 서둘러 호버카에 다시 올랐다.
호버카는 빠른 속도로 안전가옥 안을 질주해 들어갔다. 한 밤 중인
데다가 워낙 빠른 속도로 달렸기 때문에 저택의 어둠 속에 보이고 있
는 장식물들은 그저 그림자로 밖에는 여겨지지 않았다.
마침내 안전가옥 앞에 당도했을 때, 아이라는 틸트와 호버카 조종사
에게 대기하고 있으라고 말했다.
"만약에 지금부터 15분이 지나도 내가 나오지 않으면, 무전으로 지
원 요청해."
아이라가 단호하게 말했다.
"시경에 할까요? 아니면 특수기동대에?"
"둘 다 해."
아이라는 이렇게 말하고는 안전가옥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저택의 정문은 열려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마도 2층이나 혹은 다른 곳에 있는 모양이었다. 아이라는 무
기를 확인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불안감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아이라는 결전을 앞둔 기분으로 크게 걸음을 옮겨갔다. 그러자 위쪽
에서 대화하는 음성이 들려왔다.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아이라는 귀에
익은 음성이라는 사실에 안도하면서 한 걸음 한 걸음 저택으로 몸을
움직여갔다.
제 목:[하이어드] Who wants to live forever? -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