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초
방송국에 침입하고, 방송을 실행하는 일은 예상했던 것 보다 너무나
도 쉽고 간단하게 진행되었다.
야간 근무를 서고 있던 보안요원들은 하나같이 은퇴할 날이 멀지 않
은, 아니, 어쩌면 은퇴할 날이 훨씬 지났을지 모를 노인들이었다. 아마
도 야간 근무를 서겠다는 자원자가 없어서 그랬는지 몰랐다. 보안요원
들과 숙직을 서고 있던 방송국 근무자들을 밧줄로 묶으면서, 메이런은
어쩐지 미안하다는 감정마저 들고 말았다.
"이제부터 자동으로 방송 되게 해 놨어요. 방송은 새벽부터 계속해
서 나갈 거에요. 저 친구들이 밧줄을 풀지만 않는다면요."
시끄러운 소리를 내지 못하도록 입에 재갈을 물려놓기는 했지만, 표
정만 보아도 최선을 다해서 밧줄을 풀거나 하지는 않을 것 같은 표정
들이었다. 나이 때문인지, 아니면 원래부터 방송국에 목숨을 걸겠다는
사명감 따위가 없어서 그런지는 알 수 없었지만, 메이런은 그것으로
만족했다. 그리고 나머지들도 메이런과 같은 마음인 모양이었다.
일행은 들어올 때는 몰래 들어갔지만, 나갈 때에는 정문으로 나갔다.
그건 세론의 생각이었다.
"정문을 통과할 때는, 손을 번쩍 들어요."
세론이 말했고, 메이런은 그렇게 했다. 그러자 정문을 지키고 있던
보안요원 역시 손을 들면서 메이런 일행에게 인사를 보냈다.
"간단하죠? 어디나 나가는 건 쉽다니까요."
세론은 스스로가 대견한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방송국 앞에 섰을 때, 세론은 이제부터 갈라지자고 했다.
"난 호버카를 가질러 갈 거에요. 여러분은 지금부터 제가 갈 때까지
지하에서 기다리고 있어 줘요. 알겠죠?"
"한 가지만 정하죠."
팀이 세론에게 말했다.
"돌아올 때 노크를 하고 '메이런?' 하고 한 마디만 하세요. 만약에
미행이 있거나, 긴박한 상황이면 '나야, 메이런'하고 말하고요. 무슨 말
인지 알겠죠?"
팀의 말은 간결했기 때문에 세론은 아주 쉽게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그렇게 해요."
"장난치면 안됩니다. 우린 진짜로 쏠 거니까요."
"목숨을 걸고 장난을 치는 건 성인이 되기 전에나 하는 짓이죠."
세론은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짓고 방송국 뒤편으로 가면서 말했다.
모두 같이 가도 좋겠지만, 그렇게 하면 위험에 노출될 확률은 더욱 커
지기 마련이다. 일행은 세론이 마련한 1차 포스트를 향해 부지런히, 하
지만 서두르지 않고 걸음을 옮겨갔다.
"안개네?"
길을 걷고 있는 데 조이스가 이렇게 탄성을 내었다. 메이런은 조이
스가 왜 그랬는지 곧 이해할 수 있었다. 안개가 깔리기 시작한 거리는
가로등 빛 때문에 마치 누군가가 일부러 선홍빛 조명으로 거리를 장식
한 것 같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마치 노을빛 한 가운데에 들어서
있는 것 같았다. 노을. 메이런은 이 짧은 순간이 영원히 지속되었으면
하고 바랬다.
"이상해. 발이 가벼워. 안그래요, 메이런?"
조이스가 앞으로 달려나가면서 말했다. 조이스는 노을 빛 아래에서
춤을 추고 있는 듯 보였다. 그 동작은 무용수의 그것처럼 우아해 보이
기도 했고, 어린아이의 그것처럼 천진해 보이기도 했다. 팀과 메이런은
조이스가 기뻐서 그렇게 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붉
은 꽃잎처럼 빙글빙글 돌던 조이스의 얼굴에서, 메이런은 문득 조이스
의 눈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눈물을 본 것 같았다. 하지만 확신할 수는
없었다. 어쩌면 그저 안개에 젖어 그렇게 보였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거리의 가로등 빛은 마치 향기를 풍기는 것처럼 밤하늘로 흩어지고
있었다. 조이스는 그 향에 취해 끝없이 제자리를 맴돌고 있었다. 거리
는 이제 향기와 조이스로 꽉 차있었다.
셋은 포스트로 돌아가는 내내 더 이상 말이 없었다. 조이스는 기뻐
하고 있는 듯 보였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팀과 메이런의 무거운 마음
은 더해지는 것 같았다.
잭.
메이런은 잭을 생각했다. 잭의 존재가 이토록 커다란 존재였던가. 누
구나 죽음을 두려워한다. 그것은 한 존재가 사라진 공간은 생각보다
훨씬 넓기 때문인지 몰랐다. 게다가, 죽은 자에게는 더 이상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다. 오직 빈 공간만이 남을 뿐이다.
메이런과 팀은 잭이 남겨놓은 빈 공간을 조이스가 춤으로 수놓는 모
습을 끝까지 바라만 보고 있었다.
포스트에 도착했을 때, 조이스의 얼굴은 잔뜩 상기되어 있었다.
"텔레비전. 텔레비전을 켜 봐."
조이스가 가벼운 말투로 이렇게 팀에게 말했다. 아마도 흥분이 되는
모양이었다. 메이런은 그런 조이스의 태도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꾸
며내는 것 같았다. 트랜서는 상대방의 감정을 읽어 내는 데에는 누구
보다도 뛰어난 존재다. 조이스의 흥분은, 어쩌면 증오가 승화된 것인지
몰랐다.
팀은 방구석에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텔레비전을 켰다. 마침 텔레
비전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것은 조이스의 모습이었다.
"나야! 바로 나라고!"
조이스는 활짝 웃으면서 말했다.
"...지금 보신 이 영상은 얼마 전 마을에서 발생했다고 시에서 주장
하는 반란군과 시경 특수기동대의 총격전 영상입니다. 이 영상은 진실
입니다. 그리고 저는 지금 진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조이스는 분명 웃고 있었다. 하지만 화면 속의 조이스는 굳은 얼굴
이었다. 조이스의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얼마 전, 저는 제 소중한 친구 하나를 잃었습니다. 그 역시 시와 시
경의 폭력에 희생당하였습니다."
웃음과 울음은 얼마나 가까운 감정일까. 표정에는 거의 변화가 없었
지만, 조이스는 어느 새 울고 있었다.
"시민 여러분. 여러분은 탄압 당하고 있습니다. 공정하게 나누어져야
할 부는 일부 계층에 몰리고 있습니다. 언제까지 모두들 이렇게 당하
고만 있을 것입니까. 언제까지 이 학살이 계속되어야 합니까. "
복수심으로 불타고 있는 조이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이스의 목
소리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메이런은 그 힘은 메이런의 가슴을 뜨겁
게 달구고 있었다. 아마도 이 시간, 방송을 보고 있는 이가 있다면 누
구라도 가슴이 뜨거워질 것이었다.
"진실이야. 세론이 말한 진실의 힘이야."
목소리가 메이런에게 친절하게 알려 주었다.
"나도 알아."
메이런은 소리내어 이렇게 말했다. 조이스와 팀이 동시에 메이런을
바라보았다. 메이런의 진지한 얼굴 덕분에 메이런의 말은 꼭 조이스의
멘트에 호응하는 것처럼 들렸다.
"저는 이 한 순간, 진실을 말할 수 있는 한 순간을 위해서 제 목숨
을 걸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것을 결코 후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
러분. 지금 당장 거리로 나가십시오. 지금 밖에는 여러분의 동참을 기
다리고 있는 수많은 동지들이 있습니다."
조이스의 멘트가 끝나자, 팀이 조용히 박수를 쳤다. 긍정의 뜻인 것
이다. 메이런은 팀을 따라서 박수를 쳐야 할까 생각했지만 그러고 싶
지는 않았다. 박수를 치기엔 손이 너무 어색했던 것이다.
조이스는 손등으로 눈물을 훔쳐내었다.
"자. 이제 어떻게 하지?"
"일단 텔레비전을 끄고, 조용히 세론이 오길 기다리자고."
화면은 잠시 어두워졌다. 테이프가 끝난 것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갈 거야. 세론이 그랬어."
조이스가 말했다. 그리고 열 아홉살짜리 기자 휴란이 마지막으로 남
긴 영상으로 화면이 막 바뀔 즈음이었다.
노크 소리가 들렸다.
팀은 재빨리 미리 세워두었던 조명등 쪽으로 걸음을 옮겼고, 조이스
는 문 앞에 위치했다. 메이런은 K-5 9밀리 권총을 뽑아 들고 문 쪽을
겨냥하였다.
"나야, 세론."
억양이 없는 목소리였지만 기다리고 있던 셋은 동시에 긴장하지 않
을 수 없었다. 팀과 메이런 사이에 마음 단단히 먹으라는 눈빛이 오고
갔고, 조이스와 메이런 사이에 준비하라는 눈빛이 오고갔다.
이윽고 문이 열렸다.
먼저 세론의 얼굴이 어렴풋하게 보였다. 그리고 팀이 조명등을 켰다.
세론은 강렬한 조명빛을 피하기 위해서 고개를 돌렸고, 거의 동시에
두 번의 총성이 울렸다. 메이런의 총에서 난 총성이 아니었다. 문 저편
에서 들려온 총성이었다. 총성이 향한 곳은 조명등이었다. 두 개의 조
명은 순식간에 깨어져 버렸고, 당황한 메이런은 제대로 조준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방아쇠를 당길 수 없었다. 세론이 맞을 우려가 있었던
것이다.
1초.
메이런은 적에게 1초를 주어 버린 거였다.
다음 순간 연이어 총성이 들렸다. 첫 번째 총성이 들리자 팀은 가슴
에서 피를 뿜으며 벽으로 날아가 부딪쳤다. 두 번째 총성이 들리자 이
번에는 조이스가 가슴을 움켜쥐고 뒤로 나가떨어졌다. 세론은 메이런
을 향해 달려 들어왔다. 아마도 암살자가 뒤에서 민 것이리라. 메이런
은 세론을 안느라 또 한 번 1초를 내어주고 말았다. 그리고 그 1초 동
안 메이런이 일어나는 사이, 세론은 등에 두 발을 맞고 앞으로 고꾸라
졌다. 폐를 정통으로 관통했는지 세론의 입에서 피거품이 일었다.
"움직이지 마."
암살자가 문 밖에서 메이런에게 이렇게 명령했다. 메이런은 팔을 내
렸다. 완패였다. 메이런은 순식간에 동료 셋을 잃었고, 게다가 응사 한
번 제대로 해 보지 못하였다.
팀은 심장에 정확하게 맞은 모양이었다. 팀은 두 눈을 부릅뜬 채로
몸을 떨고 있었다.
조이스는 신음소리를 흘리며 꿈틀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역시 치명
상임에는 틀림없었다.
세론은 엎드린 채 사지를 떨고 있었다. 아무리 뛰어난 외과의사라고
해도, 세론을 살릴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메이런은 모든 것을 포기한 심정으로 문 밖을 응시하였다. 문밖에는
죽음이 메이런을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 막 쓰러진 셋과 같은 운명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메이런은 팔을 축 늘어뜨렸다. 힘이 빠진 손
에서 K-5 권총이 미끄러지듯 떨어졌다.
"꼬마야."
어둠 저편에 있는 암살자가 말했다. 메이런은 암살자를 바라보았다.
어렴풋하기는 했지만, 메이런은 암살자의 얼굴이 낯익었다.
"...쿨란?"
메이런은 이렇게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러자 암살자는 잠시 동안 머
뭇거리는 눈치였다.
"쿨란? 쿨란이에요?"
"움직이지 말라고 했지, 꼬마야."
암살자는 대답대신 메이런을 불렀다. 메이런은 입을 다물었다. 죽음
의 공포가 밀려 들어오고 있었다. 누구나 한 번은 죽는다. 하지만 그
순간이 이렇게 갑작스럽게 닥쳤을 때 초연할 수 있는 이가 얼마나 있
을까. 메이런은 자신이 죽였던 휴먼 레이스를, 또 다른 레이스들을 생
각했다. 그들이 어떤 기분이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중앙 공원으로 와라. 세론이 호버카를 밖에 세워 두었다. 호버카를
몰 줄은 알지?"
어둠 저편의 죽음이 말했다. 그 목소리는 억양이 없는 딱딱한 목소
리였지만, 메이런에게는 자비와도 같이 들렸다. 긴장이 풀리며 살아있
다는 사실 자체가 기쁘게 여겨졌다. 하지만 그리 길게 지속될 수 있는
기쁨은 아니었다. 바로 눈앞에는 동료 셋이 쓰러져 죽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꼬마아. 호버카 몰 수 있지?"
자비로운 죽음의 음성이 다시 한 번 들려왔다. 메이런은 고개를 끄
덕였다. 호버카 조종은 셔틀 조종과 마찬가지로 목적지만 입력되어 있
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었고, 도시에서 운행되는 호버카 중에
시의 중요 지명이 입력되어 있지 않는 호버카는 없었다.
"중앙 공원으로 와라."
죽음은 이렇게 말을 남기고는 사라져버렸다. 메이런은 한 참 동안을
멍하니 제자리에 서 있기만 했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아무 움직
임도 가질 수 없었다.
쓰러진 동료를 살펴야 한다는 생각이 든 건 한 참이 지난 뒤의 일이
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 메이런은 가장 먼저 바닥에 흘러 넘치고 있는 피
를 보았다. 조명이 어두운 방에서 바라본 피는, 검게 굳어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긴장이 풀려서였을까. 메이런은 문득 역하다는 생각이 들었
다. 보고 있는 광경 때문이 아니었다. 그건 순전히 피비린내 때문이었
다.
메이런은 먼저 팀을 살폈다. 팀은 확실히 죽어 있었다. 조금 남아 있
었던 몸의 떨림도 이제는 거의 멈추어 있었다. 메이런은 부릅뜨고 있
는 팀의 두 눈을 감겨 주었다.
다음은 세론이었다. 메이런은 엎드려 있는 세론을 돌려놓았다. 세론
의 두 눈은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고, 입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핏물에서는 아무런 생명의 징조도 찾아 볼 수 없었다. 메이런은 세론
의 눈도 감겨 주었다.
메이런은 조이스에게 다가가기 전에 텔레비전을 보았다. 텔레비전에
서는 끔찍한 살육의 현상이 생생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총성. 피. 떨
어져나가는 사지. 몸에서 흘러나오는 창자. 정말로 끔찍한 것은 그런
끔찍한 일을 행하고 있는 이들의 표정이 마치 무거운 짐을 나르는 셔
틀 노동자 처럼 무표정했다는 점이었다. 어떤 이들은 즐기고 있는 것
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어쩌면 그것은 메이런의 상상일지도 몰랐다.
"조이스?"
메이런은 조이스의 곁으로 다가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마치
큰 소리로 불렀다가는 꺼져버릴 것만 같은 여린 불꽃을 앞에 둔 것 같
은 태도였다.
이름을 부르자 조이스의 눈동자가 메이런을 향했다. 아직은 의식이
남아있다는 증거였다. 메이런은 조이스의 목뒤에 손을 넣고 고개를 똑
바로 들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혹시 핏덩이가 기도를 막았을지도 모
를 일이었다.
조이스의 입이 움직였다. 하지만 그 입에서는 핏물 뿐,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메이런은 알고 있었다. 이제 조이스는 죽을 것이라는 것을. 죽음이
메이런 대신에 조이스를 데리고 간다는 죄책감, 동료를 지키지 못한
자학, 죽어가는 이를 앞에 두고 있는 슬픔이 동시에 메이런에게 몰려
왔다.
조이스는 살고 싶어하고 있었다. 그 생에 대한 의지는 강렬했다. 하
지만 그 강렬함은 꺼지기 전에 마지막으로 환하게 타오르는 촛불과 다
를바 없는 것이었다.
"뭘 하고 있는 거야?"
목소리가 메이런에게 물었다.
"도망쳐. 도망치면 살 수 있어."
목소리는 하수도의 기억을 메이런에게 보여주었다. 목소리는 하수도
를 정신없이 뛰었다. 사방에서 총성과 폭음이 들려왔고 계속해서 동료
들이 죽어가고 있었지만 목소리는 살아 남았다.
메이런은 목소리를 듣자, 이대로 조이스를 보내지 않아야 겠다는 생
각이 들었다. 그리고 애타게 조이스이 생각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애를
썼다. 조이스 역시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자신의 억울한 심정을 전하
고자 애를 썼다.
텔레비전에서는 총성이 계속해서 들려오고 있었고, 죽음은 계속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메이런은 조이스와 트랜스했다.
조이스의 기억은 강렬했다. 메이런은 자신의 손을 확인해 보았다. 한
순간 메이런은 자신의 손이 마치 조이스의 손이 된 듯 느껴지기도 하
였다. 락벳에서 경험했던 것 처럼, 강제 트랜스는 격렬한 감정을 메이
런에게 불러 일으켰다. 메이런은 그 감정을 견디지 못하고 몸을 뒤틀
다가 이내 뒤로 쓰러졌다.
제 목:[하이어드] Who wants to live forever? - 23
메이런이 제 정신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건, 역한 피비린내 때문이
었다.
메이런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제는 조이스 마저도 죽어 있었다. 하
지만 텔레비전 속 조이스는 멘트를 잇고 있었다.
"...저는 이 한 순간, 진실을 말할 수 있는 한 순간을 위해서 제 목숨
을 걸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것을 결코 후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
러분. 지금 당장 거리로 나가십시오. 지금 밖에는 여러분의 동참을 기
다리고 있는 수많은 동지들이 있습니다."
메이런은 조이스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먼저 메이런은 땅에 떨어뜨린 9밀리 권총을 집어들었다. 피가 고여
있지 않은 곳에 떨어져 깨끗한 상태였다. 이어서 텔레비전을 끈 메이
런은 잡동사니들 사이에서 갈아입을 만한 옷을 찾았다. 어차피 피비린
내를 풍기며 나서야겠지만, 이렇게 피를 뒤집어 쓴 꼴로는 나갈 수 없
었던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메이런은 세론이 미리 준비해 둔 새 옷을
찾아낼 수 있었고, 그와 함께 휘발성이 강한 기름도 한 통 찾아 낼 수
있었다.
메이런은 기름을 바닥에 부었다. 이제는 피냄새와 휘발하고 있는 기
름 냄새가 섞여 견디기 어려울 만큼의 역겨움을 참아 내야만 했다.
메이런은 문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서 금속으
로 만들어진 부분이 어디에 있나 살펴보았다. 벽면의 파이프가 적당할
것 같았다. 메이런은 벽면의 파이프에 남아있는 휘발성 기름을 모조리
부었다.
건물 밖으로 나선 메이런은 우선 속에 있는 것을 모조리 게워냈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견디기 힘들었던 것이다. 속이 텅 비자 머리속
이 맑아졌다. 메이런은 주위를 살펴 보았다.
이제 안개는 도시 전체를 뒤덮고 있었다. 메이런은 안개 속을 사뿐
하게 걸어가, 건물 앞에 세워져 있는 호버카에 올랐다. 그리고 호버카
를 안전한 지점까지 몰고 나갔다.
차창문을 내린 메이런은 권총을 뽑아들고 파이프가 있던 자리를 겨
냥했다. 그리고 두 번 방아쇠를 당겼다.
파이프에 명중된 탄두는 불꽃을 피어 올렸고, 그 불꽃은 이내 휘발
성 기름에 불씨를 제공해 주었다. 공기중에 흩어져 있던 휘발된 기름
은 한 순간에 타오르며 폭발을 일으켰고, 곧이어 불은 건물 전체를 태
우기 시작했다.
"이제 어떻게 할 거지?"
목소리가 물었다.
"달려가는 거야."
메이런은 호버카에 입력되어 있는 좌표 중 중앙공원을 입력했다.
사실 중앙공원에 적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 달리 생각했어야
옳았는지 모른다. 공원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가운데에서 기다린 건
친구를 기다릴 때라면 모를까 적을 기다리기에는 적당한 장소가 아니
었다.
하지만 메이런은 생각해 놓은 구석이 있었다. 결국 그 살인자는 메
이런을 살려 준 것이고, 이곳으로 부른 이유는 뭔가 대화를 하기 위해
서라는 게 메이런의 생각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상대가 정말로 쿨
란일지 모른다는 거였다.
물론 쿨란이 클론 병사였고, 때문에 지금 저 살인자도 쿨란의 클론
일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살인자가 쿨란일 가능
성은 그리 높지 않다고 보아야 했다. 하지만 자신을 죽이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도, 메이런은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런데 상대가 만약 쿨란이 아니라면?
그렇다면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는지 메이런은 도무지 알 수가 없었
다. 당장 드는 생각은, 아마도 승부를 즐기는 미치광이이거나, 그냥 미
치광이이거나 둘 중 하나일지도 모르겠다 싶은 정도였다.
메이런은 안개의 저편을 응시하고 있는 조각상의 얼굴을 바라본다.
조각상은 고대의 한 영웅을 묘사하고 있었다. 조국을 지키기 위해
적장을 사살하고 자신은 죽었던 영웅. 메이런은 조각상에 새겨져 있는
이름을 살펴보았다. 음각이 되어 있었을 이름은 세월의 힘에 의해 지
워져 이제는 알아 볼 수가 없었다. 메이런은 어쩐지 이것이 자신의 운
명을 예견하는 것만 같아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침착해야 해요, 메이런."
마음 깊은 곳에서 조이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메이런은 쓴웃음을
지었다. 죽은 자의 충고를 듣는다는 건 그리 기분 좋은 일이 아니었다.
목소리를 듣자 먼저 조이스의 얼굴이 떠올랐다. 곧이어 팀과 잭의
얼굴이 떠올랐다. 세론의 얼굴, 메이런과 처음으로 트랜스 했던 키티-
본의 얼굴, 만티드 레이스 시크사의 얼굴... 그리고 아이라. 메이런은
아이라의 얼굴을 떠올리고는 잠시동안 머리 속이 텅비는 것 같은 기분
을 느꼈다. 메이런은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마치 그렇게 하면 상념
이 떨어져 나가기라도 할 것처럼.
어찌되었건, 메이런은 이제 곧 확인하게 될 거였다. 상대가 누구인
지. 또 무슨 목적으로 메이런을 불러내었는지.
"이젠 정말로 두려워하지 않는군."
목소리가 불쑥 메이런에게 말했다.
"두려움은 적보다 더 위험하니까."
메이런이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목소리도 알고 있었고,
또한 메이런도 알고 있는 일이었다. 이제 더 이상 메이런에게는 지키
고 싶은 것이 남아 있지 않았다. 끝없이 달려가던 동전은 이제 방향을
잃고 추락하고 있었다.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적이 진격해 오는데, 후퇴하지 않는 이유는 뭐지?"
목소리가 묻는다.
"이건 반란군의 전투가 아니야."
메이런이 말했다.
"이건, 결투야. 일대 일로 서로를 겨루는."
그것이 총솜씨가 될지, 아니면 배짱이 될지, 혹은 다른 그 무엇이 될
지는 모르지만. 하지만 말은 하지 않았다. 안개의 저 편에서 인기척을
느꼈던 것이다. 그러자 모든 상념은 한순간에 사라져버렸다. 군에서 익
힌 전장 감각이 순식간에 살아났다. 온몸의 감각 세포 하나하나가 일
어나 적의 작은 기척 하나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긴장하기 시작했
다.
메이런은 안개 저편의 기척을 향해 K-5권총을 겨누었다. 하지만 이
안개 속에서 기척만으로 상대를 명중시킬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는 일
이었다. 아니, 이 안개 속에서 상대를 명중시키는 일은 어쩌면 안개 속
에서 셔틀을 수동으로 무사히 착륙시키는 일 만큼이나 어려운 일일 거
였다.
적이 기척을 조금만 더 내준다면 명중시킬 수 있을 텐데.
메이런은 이렇게 생각했다.
1초.
예전에 메이런은 총격전에 있어서 1초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었
다. 1초의 틈이 생긴다면 총격전을 승리로 이끌 수 있다는 것이 그 가
르침의 전부였다. 그리고 메이런은 잊혀진 옛 영웅의 조각상 밑에 몸
을 숨기고 그 1초를 기다리고 있었다.
적이 실수하기를 바라는 것은 패배로 가는 첩경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 1초가 발생했을 때 그것을 놓치는 것은 패배 차제일 것이다.
메이런은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적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꼬마야!"
암살자가 외쳤다. 그리고 다음 순간, 메이런은 귀에 익은 소리를 들
을 수 있었다. 니들건의 발사음이었다. 전장에서 수도 없이 들어왔던
니들건의 소음은 메이런의 머리카락을 온통 곤두서게 만들만큼 충격적
이었다. 니들탄이 귀 바로 옆을 스치고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메이
런은 일단 몸을 낮추면서 니들탄이 날아오는 반대편으로 몸을 숨겼다.
니들탄이 조각상에 맞아 부서지는 소리, 박히는 소리, 뚫고 지나가는
소리가 메이런의 신경을 거슬렸다.
미친 놈이었어. 그냥 단순히 미친 놈이었어.
메이런은 9밀리 K-5 권총을 두 손으로 모아 잡으며 중얼거렸다. 니
들탄은 분명 메이런을 죽일 의도를 가지고 날아들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죽일 거였다면 부른 이유는 도대체 뭐였을까. 메이런은 짐작조
차 할 수가 없었다.
사격이 멈추었다. 아마도 메이런이 조각상을 엄폐물로 삼아 니들탄
을 피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적은 움직이고 있었다. 메
이런이 있는 방향을 찾아 조각상을 중심으로 돌고 있는 것 같았다. 메
이런은 모든 신경을 청각에 집중시켰다. 안개의 저편에서 움직이고 있
는 적의 위치를 눈으로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소리는 일정하게 횡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메이런은 눈을 감고 적의
발소리를 따라가다가 어느 한 순간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사격을 가
했다. 텅 빈 중앙 공원에 K-5의 총성이 울려퍼졌다.
"침착해야해요, 메이런. 실탄을 아껴요."
목소리가 충고했지만 메이런은 신경 쓰지 않았다. 적이 맞았는지 맞
지 않았는지가 지금 메이런에게 있어서 훨씬 더 중요한 일이었다.
다음 순간 적은 메이런의 의문을 풀어주었다. 마치 응답이라도 하듯
메이런을 향해 사격을 가한 것이다. 이번에는 화약식 총의 소음이 들
려왔다. 탄은 연속해서 조각상에 명중했고 조각상은 부서져 나가며 신
음을 토하고 있었다. 메이런은 맞받아서 응사했다.
"이렇게 나가면 소모전이야."
목소리가 말한다.
"실탄을 아껴야 해요."
목소리의 충고는 옳았다. 메이런은 적이 사격을 가하고 있는 방향이
어디인지 조금씩 고개를 들어 확인했다. 총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빛
이 안개 저편에서 깜빡이는 것이 보였다. 메이런은 그곳을 향해 조준
하려고 했지만 그건 힘든 일이었다. 날아오는 탄의 섬광과 귀를 스치
고 지나가는 탄의 소음을 들으며 정조준을 한다는 건 마치 목숨을 걸
고 주사위 놀음을 하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메이런은 그보다는
1초를 기다리는 쪽을 택했다.
탄은 계속해서 조각상을 맞추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리 한 쪽이
터져나간 조각상은 균형을 잃고 쓰러지기 시작했다. 메이런은 조각상
을 피해서 몸을 굴렸다. 조각상은 아슬아슬하게 메이런의 옆으로 쓰러
졌다. 그러자 사격이 멈추었다.
"누구지? 넌 누구냐고!"
사격이 멈춘 짧은 틈을 타서 메이런이 소리쳤다. 적이 대답을 한다
면 메이런의 작전에 말려 들어간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었다.
"나?"
대답 소리가 들려왔다. 메이런은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조준을 했다.
안개 때문에 정조준은 힘들었지만 일단 작전은 맞아 들어가는 것 같아
보였다.
"나는 하이어드였고, 지금은 용병이란다, 꼬마야."
"그리고 그 전에는 클론 병사였겠지?"
"락벳에 있었다. 나는 흔한 클론이지. 콜로니에서 락벳인들은 우리를
쿨란이라고도 불렀지."
메이런은 상대방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오직 소리만을 듣고 있
을 뿐이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다가온다면 한 방에 승부를 볼 수 있
을 것도 같았다.
"우리는 실패작이었다. 모두 미쳐서 부대를 탈영해 버렸지. 몇몇은
행성 어스로 돌아가 하이어드가 되었고, 몇몇은 락벳인들과 합류해 락
벳인의 용병이 되었다. 그래. 아주 오랜 전 일이지."
"지금은 시장의 개지. 시장의 개를 본 적이 있지? 침을 흘리면서 시
장이 만져주기만을 바라던 개. 맞지?"
메이런은 언젠가 들었던 소문을 응용해서 이렇게 물었다. 상대를 흥
분시키려는 생각이었다. 안개 저편의 윤곽은 아직은 움직이지 않고 있
었다. 땀방울이 이마를 타고 자꾸만 흘러 내려왔다. 메이런은 손등으로
얼른 땀방울을 훔쳐 내었다.
"맞아. 지금은 시장의 개지. 하지만 하이어드는 모두다 누군가의 개
야."
"뭐라고? 잘 안 들리는데?"
메이런은 이 말은 조금 지나치지 않았나 싶었다. 자신의 속셈을 뻔
히 눈치챌 수 있을 것 같았던 것이다. 하지만 상대는 별 반응을 보이
지 않았다.
"그러는 너는? 너는 누군가의 개가 아닌가? 넌 지금 반란군의 개야.
혁명전사라고 해야 하나? 그렇다면 혁명 전사의 개지. 너나 나나 똑같
은 하이어드야, 꼬마야. 우리는 누군가에게 하이어드 되어야만 살아남
을 수 있어."
"시장은? 시장은 그럼 누구의 하이어드지?"
메이런이 물었다. 하지만 정말로 궁금해서 물은 것은 아니었다.
"세상에는 딱 두 종류의 존재 밖에 없어. 하나는 하이어드고, 다른
하나는 하이어드를 사는 존재이지. 꼬마야."
"뭐라고?"
다시 한 번 물었을 때, 한 순간 안개 속에서 적의 윤곽이 뚜렸하게
드러났다. 몇 걸음을 앞으로 걸어 온 모양이었다. 메이런은 숨을 죽였
다. 1초. 그렇게 기다렸던 1초가 온 것이었다. 기회는 단 한 순간뿐이
다. 이 기회를 놓친다면 다시는 이런 기회가 오지 않을 것이다.
메이런은 사격을 가했다.
약실에 장전되어 있던 9밀리탄의 단두는 총신을 따라 오른 쪽으로
여섯 바퀴를 돌며 총구에서 튀어나와 초속 350미터의 속도로 목표물을
향해 날아갔다. 탄두가 그리는 탄도는 언제나 일정하다. 따라서 탄도를
조정하여 목표물에 명중되도록 하는 일은 오직 사수에게 달려있을 뿐
이다. 메이런은 언젠가 쿨란이 해 주었던 말을 기억할 수 있었다.
목표물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명중한 것이다. 메이런은 재빨리 일어
섰다. 쓰러져 있는 조각상을 밟고, 적을 겨냥하며 달려갔다. 쓰러져 있
는 적은 가슴에 두 발을 맞고 몸을 꿈틀 거리고 있었다.
"움직이지 마!"
메이런이 옆에 떨어져 있는 권총 한 정과 니들건 한 정을 발로 걷어
차면서 소리쳤다. 그러자 상대방은 고개를 돌려 메이런을 올려다 보았
다. 쿨란이었다. 상대의 얼굴을 쿨란과 완전히 같았다.
"내가 졌다."
무척 고통스러울 것이 틀림없었지만, 적은 엷은 미소를 억지로 지으
며 이렇게 말했다.
"왜 그랬지?"
메이런이 물었다. 상대는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입에서 한 줄기 핏
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왜 그 때 날 쏘지 않고 이렇게 싸우자고 한 거냐고!"
메이런이 물었다. 조금은 원망 섞인 음성이었다.
"전장의 감각을 기억하는 적에게 싸우는 이유를 묻는 건 바보같은
짓이지."
적은 대답하며 손을 천천히 위쪽으로 움직였다.
"움직이지 말라고 했지!"
"...너는 95%의 휴먼 레이스는 약간의 희망만 있어도 죽지 않는다.
그리고 나머지 5%는, 절대 절망하지 않을 휴먼 레이스야."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이었다. 적의 손은 계속해서 움직이고 있었다.
입에서는 계속해서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적의 손이 품속으로 들어
갔다. 메이런의 전투감각이 위험신호를 온몸에 전달하고 있었다.
"경고했다. 움직이지 마!"
"메이런. 너는 결코 절망하지 않을 휴먼 레이스야..."
메이런이라고 상대방이 자신을 부르는 것을 들었지만, 이미 때는 늦
었다. 입에서 피를 흘리고 있는 적의 모습은 처참하게 죽어간 동료들
의 모습을 떠올리게 했고, 그 모습은 메이런에게 걷잡을 수 없는 증오
와 복수심을 한 순간에 불타오르게 했던 것이다.
"움직이지 말라고 했지!"
이렇게 외친 것이 먼저였는지, 아니면 방아쇠를 당긴 것이 먼저였는
지는 알 수 없었다. 탄두는 머리를 뚫고 지나갔다. 뒤통수로 뇌수가 뿜
어져 나갔다. 한 순간 크게 고개를 젖힌 적은, 이내 고개를 다시 숙이
면서 앞으로 쓰러졌다.
그제야 메이런은 상대가 죽기 전,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는 걸 깨달
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알게 되기까지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움직이지 말라고 했잖아..."
메이런은 이렇게 말하며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이제 싸늘하게 식어
가고 있는 암살자는 죽음의 세계로 빠져 들어갔다. 하지만 그 뿐이었
다. 암살자가 죽었다고 해도, 아무도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통쾌하거나 기쁜 감정이 드는 것도 아니었다. 메이런은 주저 앉
아 바닥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세상의 그 무엇도 의미가 없었다. 전부
다 죽을 목숨이었다. 그것도 비참하게. 아마 언젠가 메이런도 이렇게
죽어갈지 몰랐다. 그렇다면 도대체 사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
가?
"복수에요."
목소리가 속삭였다.
"그리고 뛰어야 해."
다시 목소리가 속삭였다.
"기억나지 않아? 락벳에서. 넌 뛰었기 때문에 살아남을 수 있었어.
그리고 지금도 마찬가지야."
"복수에요."
그랬다. 동료를 죽인 건 쿨란이었지만, 정말로 동료들을 죽인 건 쿨
란이 아니었다.
포레스트 회장.
메이런은 이 이름을 떠올리고는 쿨란을 바라보았다. 쿨란은 품속에
손을 꽂고 있었다. 메이런은 쿨란이 무엇을 꺼내려고 했는지 확인해
보았다. 그것은 명함이었다. 그리고 그 명함이 표시하고 있는 위치는,
포레스트 회장의 안전가옥이었다.
"뛰는 거야."
메이런은 이렇게 말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른 건 생각하지 않겠어."
메이런은 공원을 벗어났다. 그리곤 호버카에 올랐다. 그 다음에 할
일은 명함을 호버카의 자동조종 장치에 꽂는 일이었다. 호버카는 명함
의 홀로그램을 인식하고는 천천히 움직여 나가기 시작했다.
"복수야. 그리고 뛰는 거야."
메이런은 이렇게 말했지만 이 목소리가 자신의 목에서 흘러 나오는
것인지, 아니면 목소리가 전하는 것인지 구분하지 못했다.
도시는 온통 안개였다. 이제 호버카는 안개 속을 질주해 나가고 있
었다. 도심을 지나며 메이런은 안개 저편에서 시민들이 거리에 모여들
고 있는 광경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것이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
지는 신경 쓰지 않았다. 복수와 뛰는 것. 오직 그것만이 메이런을 움직
이고 있을 뿐이었다.
제 목:[하이어드] Who wants to live forever? -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