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여긴 어디? (2/104)

여긴 어디?

대학 서고에서 깜빡 잠이 들었다가 엉뚱한 곳에 떨어진 지 정확히 일주일이 흘렀다.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지만 가장 극복하기 어려웠던 건 자신이 시간을 거슬러 올라왔다는 걸 인정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말도 안 된다며 부정했지만 꿈치고는 너무 생생하고 몰래 카메라라고 생각하기에는 너무 스펙터클했기에 결국 현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된 건지 몰라도 서기 1637년 바로 남한산성에서 인조가 삼전도三田渡의 치욕을 당한 그해에 도현이 눈을 뜬 것이다.

여기까지만 해도 현기증이 날 지경인데 더 어처구니가 없는 건 자신의 이름이 ‘이호’이고 훗날 왕이 되는 봉림대군이라는 사실이었다.

현대와 달리 철저한 신분제 사회에서 노비나 천민보다 그래도 풍족하게 생활할 수 있는 왕족이 훨씬 낫다고 생각하겠지만 봉림대군, 아니 앞으로 효종이라고 불릴 사람의 앞날이 얼마나 가시밭길인지 잘 알고 있는 도현은 자신의 이름을 알고 한숨밖에 나오지 않았다.

“마마, 약 드실 시간이옵니다.”

상념을 깨는 목소리에 머리를 든 도현은 칠현이라는 이름의 젊은 내시가 두 손으로 공손히 들고 있는 한약 그릇을 보고 대번에 인상을 찡그렸다.

“그거 꼭 먹어야 돼?”

“요즘 들어 자꾸 깜빡깜빡하시는 것이 다 몸이 허虛하셔서 그러는 거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싫으시더라도 챙겨 드셔야 합니다.”

그 말에 도현은 노골적으로 얼굴을 찌푸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평범한 대학생이었는데 갑자기 조선의 봉림대군이 되어 생활하려니 주위의 모든 것이 낯설고 생활 습관도 달라 이만저만 고생이 아니다.

그 탓에 도현이 이상한 행동을 하거나 실수를 해도 일단 왕족인지라 뭐라 할 사람은 없었지만 문제는 가까운 사람의 얼굴이나 이름을 몰라보는 것이다.

그럴 때마다 머리를 다친 탓에 건망증이 생겼나 보다고 변명을 해 댔더니 칠현이란 놈이 의원을 불러와서 내린 결론이 바로 이거다.

‘그러니까 이게 다 내 탓이란 거지.’

속으로 한숨을 푸욱 내쉬고 곁눈으로 슬쩍 옆을 쳐다보니 이걸 마시지 않으면 계속 서 있겠다는 듯 칠현이 한약 그릇을 들고 장승같이 떡 버티고 있었다.

‘그냥 못 먹겠다고 버틸까? 아냐, 그래도 제 딴에는 내 생각 해서 들고 온 걸 텐데…….’

속으로 이랬다저랬다 한참이나 오락가락하던 도현은 마침내 결심을 하고는 고개를 들었다.

“알았다, 알았어. 먹으면 되잖아!”

“마마.”

“그놈의 마마 소리 집어치우고 얼른 그릇이나 이리 내놔.”

내가 무슨 여자도 아닌데 말끝마다 마마 타령이야.

일단 한약 그릇을 손에 쥐고 뚜껑을 열자 특유의 독한 약 냄새가 후욱 코를 찔렀다.

“크윽…….”

이거 진짜 사람이 먹는 거 맞아?

안에 무슨 재료가 들어갔는지 색깔은 온통 거무죽죽하고, 이상한 가루 같은 것도 둥둥 떠 있는 게 한 입 먹으면 완전 골로 갈 것 같잖아.

“칠현아.”

“네, 마마.”

“몸에 좋은 거…… 맞지?”

독약 아니지? 너 나한테 원한 있는 거 아니지?

“머리를 맑게 하고 기의 흐름을 안정시키는 약재들만 달여서 만든 것입니다. 이걸 드시면 마마의 건강도 좋아지실 겁니다.”

“아니, 근데 색깔이랑 냄새가…….”

“원래 몸에 좋은 건 입에 쓴 법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이 하수구 물을 팔팔 삶아서 걸쭉하게 만든 것 같은 모양새의 한약이 맛도 지지리 없다 이거렷다?

무슨 철천지원수를 보는 것처럼 손에 들린 그릇을 노려보던 도현은 결국 숨을 꾹 참고 냄새를 맡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사약, 아니 한약을 입에 들이부었다.

꿀꺽꿀꺽!

“크하!”

“마, 마마. 괜찮으십니까?”

너무 뜨겁지 않게 살짝 식히긴 했지만 그래도 갓 달여 온 것을 단숨에 삼켰으니 행여 입천장이라도 데지 않았는가 싶어 칠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칠현아.”

“네, 마마. 말씀하십시오.”

“약이 쓰다…….”

지금 내 눈가에 눈물 맺힌 거 보이니.

뜨거운 건 둘째 치고 너무 써! 혀에 감각이 없다고!

“자,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도현의 말에 칠현이 기다렸다는 듯 옆에 놔둔 쟁반에서 뭔가를 꺼냈다.

“이걸로 일단 입가심을 하시지요.”

그렇게 말하고 칠현이 내민 것은 하얀 엿가락이었다.

“칠현아.”

“네.”

“나한테 엿 먹으라는 거니.”

“어? 예. 입안이 쓰다고 하셔서 일단 단맛이 나는 과자를 준비했습니다만.”

“그래, 엿이 달긴 달지…….”

근데 뭐지, 이 엿 같은 기분은.

뭐라 표현할 수 없는 표정으로 엿을 받아 든 도현은 입안에 넣고 우물거렸다.

그래도 단것이 들어오자 혀에 가득 느껴지던 쓴맛이 어느 정도 가셨다.

비단을 덧댄 목침에 한쪽 팔을 기대고 비스듬하게 누운 도현은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칠현을 보며 말했다.

“그건 그렇고, 내가 시킨 건 준비해 왔어?”

도현의 물음에 칠현은 약간 머뭇거리면서 입을 열었다.

“꼭 그걸 하셔야 되겠습니까.”

“당연하지. 지금 내 지시에 반항하겠다는 거야?”

“아, 아닙니다.”

당황한 얼굴로 손사래를 치는 칠현을 향해 도현은 사악한 미소를 지으면서 손을 내밀었다.

“어서 꺼내 봐.”

“후우, 여기 있습니다.”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내민 보따리를 풀자 여진족 남자들이 입는 옷이 나왔다.

“좋았어.”

“아무리 잠행譧行을 위해서라지만 고귀하신 조선의 왕자님께서 오랑캐 복장을 하시다니요. 재고해 보십시오.”

신기한 눈으로 옷을 이리저리 살펴보고 있는 도현에게 칠현이 울상을 지으며 간절한 시선을 보냈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잠깐인데 뭐 어때. 답답한 소리 하지 말고 너도 어서 옷 갈아입어.”

도현의 고집에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칠현은 고개를 끄떡였다.

“알겠습니다.”

주저하는 칠현과 달리 도현은 사모관대를 벗고 여진족 전통 복장에 담비 털로 만든 모자까지 머리에 뒤집어썼다.

“어때, 어울려?”

거울을 이리저리 비춰 보면서 도현이 묻자 칠현은 무성의하게 대답했다.

“예, 멋지십니다.”

“너 자꾸 이럴래?”

뒤로 몸을 돌린 도현은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면서 칠현을 째려봤다.

“왜 그러십니까?”

“몰라서 그래? 이왕 나가기로 했으면 싫은 티 좀 그만 내란 말이야. 자꾸 그러면 나 혼자 간다.”

이런 복장으로 잠행을 나가는 것도 불안해 죽겠는데 혼자 가겠다고 하자 칠현은 화들짝 놀라 얼른 양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아, 아닙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진작 그럴 것이지. 준비 다 됐으면 이제 가자.”

“……예.”

의기양양하게 문을 열고 나가는 도현과 달리 칠현은 머리를 푹 숙인 채 뒤를 따랐다.

사람들 몰래 장원을 빠져나가는 것이라 두 사람은 벽에 몸을 딱 붙이고 까치발을 한 채 누가 봐도 수상한 모습으로 종종걸음을 쳤다.

“잠깐!”

“왜, 왜 그러십니까?”

도현이 갑자기 멈춰 서자 뒤에서 따라오던 칠현도 긴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조용히 해 봐.”

사박사박 가벼운 발소리가 그늘에 숨어 있는 두 사람의 귀에 들렸다.

여기서 들키면 꼼짝없이 방으로 돌아가야 할 뿐만 아니라 망신도 이런 개망신이 따로 없었다.

다행히 발소리는 두 사람이 있는 쪽이 아니라 반대쪽으로 사라졌고, 그동안 숨을 꾹 참으며 기척을 숨기고 있던 도현과 칠현은 동시에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휴우, 들키는 줄 알았네.”

“그러게 제가 뭐랬습니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얼른 방으로 돌아가시죠.”

“사내대장부가 칼을 빼 들었으면 무라도 썰어야 할 것 아냐.”

단호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한 도현은 억지로 칠현의 등을 떠밀어 앞장세웠다.

“여기서부터는 네가 길 안내를 해. 나보단 네가 더 잘 알 것 아냐?”

“예이.”

뭐라 말해도 도현을 말릴 수 없다는 걸 깨달은 칠현은 이젠 아예 다 포기한 표정으로 어쩔 수 없이 길 안내를 맡았다.

항상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행선지가 정해져 있는 도현보다 내시인 칠현이 훨씬 더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건 당연한 사실.

익숙한 발걸음으로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 길로만 안내해 준 덕분에 목적한 담벼락까지는 아주 손쉽게 도착할 수 있었다.

“여깁니다.”

덤불 사이에 쭈그려 앉은 칠현이 손으로 담벼락을 툭툭 쳤다.

아침이면 나팔꽃이 활짝 피는 덩굴들 사이로 살짝 갈라진 틈이 보였고, 땅이랑 맞닿아 있는 아래쪽에는 작게 뻥 뚫린 개구멍이 있었다.

도현이 생각했던 것보다는 좀 작아 보였지만 밑에 부드러운 흙을 파내면 어떻게 통과할 수 있을 것 같긴 했다.

“호위 무사들은 다들 뭘 하는 거야. 정문만 지키면 뭐해? 이런 구멍이 있으면 아무나 다 들어오겠네.”

자기 처지도 잊고 장원의 보안 상태를 책망하던 도현은 문득 생각난 듯이 칠현을 돌아보았다.

“그런데 넌 이런 게 있는 줄 어떻게 알았냐?”

“저번에 이 근처를 지나가는데 낑낑거리는 소리가 나서 들여다보니 개 한 마리가 사이에 끼어 있지 뭡니까. 부엌에서 종종 먹을 걸 얻어먹는 모양인데 대체 어디로 들어오는 걸까 했더니 여기에 이런 구멍을 파 놨더군요.”

“흐음, 다음에 그 개를 보게 되면 과자라도 하나 던져 줘야겠는걸.”

낄낄거리면서 웃은 도현은 이내 양팔을 걷어붙이고 배를 땅에 붙인 채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전하! 옷이 더러워집니다.”

“시끄러. 이렇게 안 하면 어떻게 밖으로 나가?”

도현은 끄응 소리를 내면서 개구멍으로 머리를 들이밀었다.

어깨에서 조금 걸리긴 했지만 키가 큰 대신 운동을 별로 안 해서 호리호리한 체구라 비교적 쉽게 개구멍을 통과한 도현은 칠현에게 얼른 따라오라며 손짓을 했다.

“빨리빨리!”

우거지상을 하고 머뭇거리던 칠현은 눈을 딱 감고 도현처럼 바닥에 엎드려서 땅을 기었다.

누가 볼까 봐 초조해진 도현이 반대쪽에서 손을 잡고 끌어당겨 준 덕분에 머리, 어깨를 비롯한 상반신은 빨리 밖으로 나왔지만 문제는 하반신이었다.

“끄응!”

“힘을 줘. 조금만 더 하면 돼.”

“끄으으응!”

새빨개진 얼굴로 칠현이 이리저리 몸을 뒤틀었다.

“허억, 허억. 요즘 몸이 허해서 밥을 좀 많이 먹었더니…….”

“그것도 변명이라고 하는 거야? 너 인마, 돌아가면 바로 다이어트 해!”

“다, 다이어트가 뭡니까?”

“아, 살 빼라고! 엉덩이에 살만 뒤룩뒤룩 쪄서는. 으이구, 진짜!”

“아야야야! 어깨 빠져요. 살살 잡아당기세요!”

“야! 조용히 안 해.”

“……훌쩍.”

그렇게 한참을 씨름한 뒤에야 겨우 개구멍을 빠져나온 두 사람은 근처 골목까지 달려와 잠시 힘겹게 숨을 몰아쉬었다.

특히 난산(?)의 고통을 겪은 칠현은 여기저기 옷이 더러워지고 찢어져 거의 상거지 꼴이나 다름없는 모양이었다.

“하하하! 드디어 나왔다.”

“좋으십니까?”

“당연하지!”

이쪽 세계에 적응하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그동안 좁은 방 안에만 틀어박혀 지내느라 보통 갑갑한 것이 아니었다.

비록 원래 살던 곳은 아니지만 높은 담장에 둘러싸인 감옥 같은 장원을 벗어나 사람들이 붐비는 저자로 나오니 그야말로 숨통이 확 트이는 기분이었다.

이런 도현과 달리 어렸을 때부터 같이 지내온 전담 내시인 칠현은 호위 무사 한 명 없이 단둘만 잠행을 나온 것이 못내 불안한지 연신 안절부절못하는 표정을 지었다.

“예의범절을 모르는 오랑캐 놈들이 사는 곳이니까 행여나 시비에 휘말리지 않도록 조심하셔야 됩니다.”

“하여튼 간은 콩알만 해 가지고. 알았으니까 어서 따라오기나 해.”

“후우…….”

도대체 뭘 믿고 저러는 건지, 여기 지리도 잘 모르면서.

성큼성큼 앞서 걸어가는 도현의 모습에 칠현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자! 오늘 아침에 잡은 노루 고기가 한 근에 단돈 열 냥!”

“잘 말린 생선 있습니다!”

대로를 따라 자연스럽게 형성된 시장으로 가자 물건을 팔려는 장사치와 손님들로 북적이는 것이 두 사람도 덩달아 들뜬 기분이 들었다.

“이야, 이게 뭐야?”

긴 나무 꼬챙이에 동글동글한 나무 열매 같은 것이 쭉 꿰여 있는 걸 보고 도현이 달려가 신기한 표정으로 쳐다보자 가판 주인이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꿀을 듬뿍 넣은 빙당호로氷糖胡虜인데 하나 줄까?”

산사나무 열매에 꿀을 넣고 잘 반죽한 후 찜통에 넣고 쪄서 동그란 조각을 만들어 하나하나 꼬챙이에 꿰어 파는 간식거리로, 달고 향기가 좋아 어린아이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말로만 듣던 빙당호로를 직접 보게 된 도현은 냉큼 꼬챙이 하나를 뽑아서 한입 크게 베어 먹었다.

“어디!”

아싹!

입안 가득 퍼지는 달콤함에 도현은 눈을 반달 모양으로 만들며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크으, 바로 이거야.”

“도련님, 단 걸 너무 많이 드시면 이빨 다 썩습니다.”

“괜찮아.”

한 손을 휘휘 내저으며 그 자리에서 빙당호로 한 개를 다 먹어 치운 도현은 또 새로운 걸 발견하고는 쪼르르 달려갔다.

그런 도현을 놓칠까 봐 칠현이 황급히 따라나서려는 찰나 누군가 그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이봐, 젊은이. 음식을 먹었으면 돈을 내야지.”

도끼눈을 뜨고 쳐다보는 주인아줌마의 시선에 칠현은 짧게 한숨을 내쉬며 허리춤에 차고 있던 돈 주머니를 꺼내야 했다.

“얼마예요?”

“한 냥만 내.”

“여기 있습니다.”

칠현이 주는 돈을 냉큼 챙긴 주인아줌마는 얼굴 가득 접대용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호호호! 또 사 먹으러 와.”

아줌마의 살가운 배웅을 뒤로하고 두 사람은 다시 시장 한복판을 종종걸음 치며 돌아다녔다.

입안 가득히 단 과자를 물고 양손에는 꼬치며 불에 구운 떡 같은 걸 들고선 아무튼 눈에 보이는 건 죄다 한 입씩 먹어 보겠다는 태도로 사방팔방 종횡무진하는 도현을 말리느라 칠현은 눈코 뜰 새 없었다.

“휴우! 배부르다.”

빵빵해진 배를 탁탁 두드리고 이쪽을 바라보며 도현이 하는 말에 칠현은 오늘만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그 정도로 많이 드셨으니 당연히 배가 부를 수밖에요. 나중에 탈 나셔도 모릅니다.”

“걱정하지 마. 이 정도쯤이야 조금만 돌아다니면 금방 꺼질 텐데, 뭘.”

뱃속에 거지가 들었나.

경악하는 칠현의 표정을 본체만체 도현은 다시 그의 손을 잡고 이끌었다.

아까는 배가 고팠는지라 먹거리들만 눈에 불을 켜고 찾았지만 지금은 구경거리에도 한눈팔 여유가 생겨 발걸음이 절로 느릿해졌다.

항상 조용했던 장원과 달리 오가는 사람들의 목소리, 손님을 불러 모으는 상인들과 깎아 달라는 아낙네들의 실랑이 등 볼거리는 얼마든지 많았다.

내시로 들어오기 전까지는 칠현도 이런 저잣거리에서 자랐기 때문에 도현에게 이끌려 다니면서 어느덧 그의 눈에도 그리움 비슷한 것이 묻어났다.

그렇게 거리를 걷던 두 사람의 눈에 문득 구경꾼들이 왁자지껄하게 모여 있는 장소가 보였다.

또 어딘가의 약장수가 재주를 피우나 싶어 한달음에 달려간 도현은 빽빽하게 들어차 있는 어른들 틈바구니를 요리조리 파고들어 가 재빨리 앞자리를 차지했다.

사람들이 둥글게 둘러서 있는 가운데 인상이 더러운 털보 사내가 중앙에 서서 징을 두드려 대며 큰 목소리로 외쳤다.

“자, 자! 다음 상품은 산맥 너머, 강 너머에 있는 아주 먼 곳에서 잡아 온 튼튼한 일꾼입니다! 이 덩치하며 근육을 보세요! 잔병치레할 걱정도 없으니 힘들고 궂은 일을 시키기에는 제격이지 않습니까?”

그러고는 익살맞게 덧붙였다.

“아! 하지만 마나님한테는 안 보이는 게 좋을 겁니다. 이놈이 밤일도 무척 잘하거든요!”

“와하하하!”

그리 재밌는 이야기도 아닌 것 같은데 주위에서 웃음이 마구 터져 나왔다.

“칠현아.”

“네.”

“이게…… 다 뭐냐?”

도현은 입을 딱 벌리고 어벙한 표정으로 물었다.

털보 사내가 상품이라고 부른 것은 바로 사람이었다.

키가 크고 몸이 단단해 보이는 체구의 그는 상반신이 벗겨져 있고 도망치지 못하도록 발과 손목이 쇠사슬로 묶여 있었다.

“노예시장이네요. 매일 열리는 게 아닌데, 마침 상인이 와 있었나 봅니다.”

도현은 아무렇지도 않게 답하는 칠현이 마치 낯선 사람처럼 느껴졌다.

얘가 지금까지 나랑 웃고 놀던 칠현이 맞나? 아니, 어떻게 사람이 사람을 사고판다는 소리를 이렇게 태연하게 할 수가 있어?

미래에서 온 도현에게는 너무나 충격적인 일이라 눈앞의 풍경을 제대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칠현뿐 아니라 주위의 사람들은 이게 일상적인 일 인 양 웃고 떠들고, 상품으로 내세워진 사람을 보고 이리저리 품평까지 하면서 즐기고 있었다.

아무리 가깝게 지내도 지금 시대 사람들과 자신 사이에는 도덕관념이나 풍습적으로 깊은 골이 있다는 걸 깨달은 도현은 자기도 모르게 우울해져서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왜 그러세요?”

도현의 낌새가 이상한 걸 눈치챈 칠현이 옆에서 물었으나 그는 아무 말 하지 않고 고개만 절레절레 흔들었다.

앞에 서 있는 키 큰 사내는 그사이에 다른 누군가한테 낙찰됐는지 어딘가로 사라졌고, 이번엔 웬 어린아이 두 명이 중앙으로 끌려왔다.

“어, 저건!”

이런 자리에 어린애가 나왔다는 것도 충격이지만 그 둘이 입고 있는 복장을 보고 도현은 눈을 크게 치켜떴다.

때가 껴서 꼬질꼬질하고 지저분하긴 했지만 저건 틀림없이 한복이다.

설마 이런 자리에서 한복을 보게 될 거라곤 상상도 못 한 도현은 무의식적으로 그 두 사람을 가리키며 칠현에게 말했다.

“야, 칠현아! 쟤네들 조선 사람 아니야? 한복 입고 있잖아.”

“아…… 그러네요.”

“그러네요가 아니지! 어째서 조선 사람이 저기에 노예로 나와 있는 거야?”

명明처럼 막강한 강대국은 아니지만 그래도 조선 하면 어엿한 하나의 나라다.

분명 부모도 있고 친척도 있을 텐데 대체 어떻게 하다 낯선 타국까지 끌려와서 노예로 팔리고 있는 건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설마하니 멀쩡한 여염집 자식을 납치해서 노예로 갖다 파는 건가.

그렇다면 절대 용서할 수 없는 일이라며 도현이 분개하고 있을 때 찬물을 뿌리듯 칠현이 설명했다.

“얼마 전 큰 전쟁이 있었잖아요? 그때 나라가 혼란한 틈을 타서 노예 상인들이 조선으로 많이 갔다더니, 아마 그때 데리고 온 모양이죠.”

전쟁.

그 말을 듣자 도현의 머릿속에 병자호란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칠현의 말대로다.

노예로 팔아도 아무도 항의해 줄 사람이 없는 전쟁고아들.

목구멍에 풀칠하기 힘들어서 자식을 내다 파는 부모.

당연히 노예 상인들로서는 노다지도 이런 노다지가 없었을 것이다.

도현이 충격에 휩싸인 가운데 어느새 사람들 사이에서는 경매가 한창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액수를 부른 사람은 보기만 해도 혐오감이 느껴지는 한 상인으로, 뚱뚱한 체구에 탐욕으로 번들거리는 눈동자를 하고는 오누이 중에서도 특히 여자아이 쪽을 노골적으로 훑어보는 것이 엄청 기분 나빴다.

그런 상인의 눈빛에서 누이를 지키려는 듯 남자아이가 여자아이를 자기 등 뒤로 숨기려고 했지만, 경쟁하던 다른 사람들이 모두 다 떨어져 나가서 결국 그 뚱보의 손아귀에 떨어지는 건 시간문제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안 되겠어.”

도현이 결연한 표정으로 벌떡 일어나자 칠현이 당황해서 말했다.

“뭐, 뭘 하시게요?”

“은 서른 냥!”

막 낙찰이 되려는 찰나에 도현이 갑자기 큰 소리로 끼어들자 경매장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됐다.

경매를 주관하던 털보 사내는 아직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어린놈이 경매를 방해하자 미간을 찌푸리며 꺼지라고 호통을 치려다가 도현이 입고 있는 옷이 돈푼깨나 나가는 옷감으로 만들어진 걸 보고는 약간 누그러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어느 댁 도령인지 모르겠지만 여긴 아이들이 노는 곳이 아니니까 다른 데로 가시오.”

“경매에 참여하는 데 나이 제한이 있나요?”

“그건 아니지만…….”

양팔을 허리에 척 올리고는 고개를 빳빳이 들고 당돌하게 말하는 도현의 모습에 털보 사내는 짜증이 난 표정을 지었다.

“이것들을 살 돈은 있소?”

만약 없다고 하면 단단히 혼쭐을 낼 작정이었지만 도현이 허리춤에서 누런 금원보 하나를 꺼내자 털보 사내의 태도가 바로 바뀌었다.

“이 정도면 충분할 거라 생각하는데요.”

금원보 하나가 은자 백 냥의 값어치가 있으니 몸값을 치르고도 거슬러 줘야 되는 돈이 한참 남았다.

“금원보를 가지고 다니다니 어디 부잣집 도련님인 모양이군.”

“그러게. 옆에 시종도 있잖아.”

사람들이 술렁거리는 가운데 가장 놀란 사람은 칠현이었다.

“그건 어디서 나셨습니까?”

“그래도 명색이 한 나라의 왕자인데 이 정도 비상금은 항상 가지고 있는 것이 정상 아니겠어.”

무슨 공깃돌처럼 금원보를 위로 던졌다가 받으며 씨익 미소 짓는 도현의 모습에 칠현은 낮게 한숨을 내쉬고는 살짝 고개를 저었다.

“후우, 어련하시겠습니까.”

누가 사든 비싸게 팔기만 하면 그만인 털보 사내는 도현이 노예값을 지불할 능력이 있다는 걸 확인하자 탐욕스러운 얼굴로 양손을 비비며 저자세를 보였다.

“아이고, 제가 귀한 댁 도련님인 걸 몰라 뵙고 실수를 했습니다.”

“됐고, 경매나 계속 진행해요.”

아랫사람을 대하는 듯한 도현의 말투에 살짝 빈정이 상했지만 돈을 듬뿍 안겨 줄 호구였기에 털보 사내는 별말 하지 않고 잠깐 중단된 경매를 재개했다.

“자! 다들 들었다시피 여기 도련님이 은자 서른 냥을 부르셨습니다. 가격을 더 높이실 분이 있으면 어서 말씀을 하십시오.”

털보 사내의 말에 다들 수군거리기만 할 뿐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남매를 노리던 뚱보 상인도 은자 서른 냥이라는 가격에 도현을 쏘아보기만 할 뿐 돈을 올리지는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 돈이면 쌀 열 가마나 당장 써먹을 수 있는 건장한 남자 노예 한 명을 살 수 있었다.

한마디로 노동력이라고는 거의 없고 식량만 축내는 어린 남매를 사는 값으로 너무 비쌌다.

“자! 그럼 셋을 셀 때까지 나서는 분이 없으면 이대로 경매를 끝내겠습니다. 하나! 둘! 셋!”

결국 서른 냥 이상 부르는 사람이 없자 털보 사내는 한쪽에 놓인 북을 치며 크게 외쳤다.

둥!

“이 녀석들은 은자 서른 냥에 저기 있는 도련님한테 팔렸습니다.”

잠시 뒤 경매장 인근 객잔으로 안내된 도현은 노예 상인한테 낙찰받은 액수의 돈을 주고 매매 계약서를 받는 걸로 간단히 거래를 마무리 지었다.

“이제부터 이 노예들은 도련님 겁니다. 앞으로도 필요하신 것들이 있으시면 언제든 절 찾아 주십시오.”

장사꾼답게 돈 냄새를 맡고 살갑게 대하는 털보 사내의 말에 혹시나 잘못된 것이 없는지 계약서 내용을 꼼꼼히 살펴본 도현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그럼 전 이만.”

털보 사내가 돈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나자 도현은 어미 잃은 아기 새들처럼 애처로운 모습으로 한쪽에 덩그러니 서 있는 남매한테 시선을 줬다.

그동안 제대로 씻지도 못했는지 땟물이 줄줄 흐르고 여기저기 해져 거의 누더기에 가까운 옷을 걸치고 있는 걸 보고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낮은 한숨을 내쉰 도현은 손을 까딱였다.

“거기 서 있지 말고 이리 와서 앉아.”

“……!”

도현의 입에서 조선말이 나오자 남매는 놀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머리를 위로 들어 그를 쳐다봤다.

“나도 조선 사람이야.”

그러자 남매는 약간 안도하는 표정을 보였지만 노예로 잡혀 여기까지 끌려오면서 무슨 고초를 겪었는지 여전히 경계를 풀지 않았다.

“안 잡아먹으니까 이리 와.”

두 번이나 말을 했지만 남매가 쉽게 다가오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옆에 있던 칠현이 버럭 호통을 쳤다.

“이놈들! 도련님께서 말씀하시는데 어서 따르지 않고 뭣들 하는 거야! 몽둥이찜질을 당해 봐야 정신을 차리겠어!”

“자, 잘못했습니다.”

누나로 보이는 여자애가 두려운 얼굴로 대답하고는 황급히 동생의 손을 끌고 의자에 앉자 도현은 고개를 옆으로 돌려 칠현을 째려봤다.

“왜 애들을 겁주고 그래?”

“이 녀석들이 감히 도련님의 말씀을 듣지 않아서 그랬습니다.”

“그러는 너도 가끔 내 지시 씹잖아.”

“예? 오해십니다. 제가 어찌 감히 그런 행동을 하겠습니까.”

억울하다는 듯이 몸동작을 크게 하며 칠현이 항변하자 도현은 피식 미소 지으면서 말했다.

“내가 바깥에 나간다고 하니까 형님한테 일러바친다고 계속 딴죽 걸었잖아.”

“그건…….”

“큭큭.”

방금 전까지 무섭게 야단을 치던 칠현이 말을 더듬거리며 당황하는 걸 본 남매는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 모습에 칠현이 눈을 부라리다가 도현한테 꿀밤을 얻어맞고는 불만 가득한 얼굴로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한심하다는 듯 칠현을 보며 짧게 혀를 차다가 다시 미소 띤 얼굴로 고개를 돌린 도현은 남매를 향해 부드럽게 말을 했다.

“고향이 어디지?”

“평안도 초산이에요.”

아무리 만주와 붙어 있는 국경에 위치한 지역이라지만 초산에서 후금의 수도인 심양까지는 수천 리나 되는 먼 거리였다.

“멀리서도 왔네. 부모님은 어떻게 되고 너희들만 여기에 있는 거야?”

부모님 이야기를 하자 남자아이가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더니 기어코 울음을 터트렸다.

“우앙! 어머니! 아버지!”

“컥.”

갑자기 울어 대는 바람에 당황한 도현이 기겁한 표정을 짓자 옆에서 칠현이 히죽거리며 말했다.

“아니, 왜 애를 울리고 그러세요?”

“시끄러!”

밉살맞게 구는 칠현을 노려본 도현은 애꿎은 차만 벌컥벌컥 들이켰다.

“죄, 죄송합니다. 동생이 아직 어려서 그래요.”

몇 번이고 허리를 꾸벅 숙이며 사과한 여자아이는 남동생을 감싸 안고 열심히 달래 주었다.

머리카락을 쓸어 주면서 꼬질꼬질한 얼굴에 흘러내린 눈물 자국을 소맷자락으로 닦아 주는 모습이 참으로 의젓해 보였지만, 눈시울이 살짝 붉어진 채로 입술을 꼭 깨물고 있는 걸 보면 동생 앞이라서 억지로 참고 있는 기색이 역력했다.

남동생이 겨우 울음을 그치자 여자아이는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더니 침착하게 말했다.

“오랑캐가 쳐들어왔을 때 사방에서 불이 나고 모두 도망치느라 바빠서 정신이 없었어요. 아버지랑 어머니는 아침 일찍 밭에 일하러 나가셨는데 그 후론…… 뵌 적이 없습니다.”

예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지만 병자호란 이후 조선의 국력이 크게 쇠하며 국경을 제대로 지킬 수 없게 되자 거란과 여진족 무리가 수시로 강을 넘어와 노략질을 하고 사람까지 납치해 노예로 팔아 버렸다.

“한 번도 소식을 들은 적이 없어?”

“예. 노예로 잡힌 이후에도 같은 조선인들한테 물어봤지만 다들 모른다고 했어요.”

여자아이는 치맛자락이 구겨지도록 꽉 쥐면서 순간 고개를 치켜들었다.

“하지만 분명히 어딘가에 살아 계실 거예요. 전 그렇게 믿어요.”

아직 어리지만 심지가 굳은 그 눈빛에 도현은 자기도 모르게 감탄했다.

그렇게 험한 일을 겪었는데도 절망하거나 체념하는 기색 없이 희망을 가지고 있다는 건 대단하다.

꼬르르륵.

“으잉?”

심각한 순간에 이게 뭔 소리야.

도현이 도끼눈을 뜨고 칠현 쪽을 홱 돌아보았다.

“저, 전 아닙니다! 생사람 잡지 마세요!”

세차게 도리질을 하면서 칠현이 소리쳤다.

그럼에도 쉽사리 의혹(?)을 거두지 못하는 도현의 눈에 입술을 삐죽 내밀고 배를 문지르고 있는 꼬맹이와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는 소녀의 모습이 보였다.

“뭐야, 배고프냐? 그럼 진작 말을 하지.”

도현이 팔꿈치로 칠현을 쿡 찌르고 턱을 까딱거렸다.

“끄응……. 어이! 잠깐 이리 와 보게.”

칠현의 부름에 하얀 머릿수건을 두른 점소이가 쏜살같이 다가와 헤헤거렸다.

“나리, 주문하시려고요?”

“음, 이 가게에서 제일 비싸고 맛있는 요리로 사 인분 부탁하네.”

“예이! 알겠습니다!”

비싼 걸로 가져오라는 말에 점소이가 눈을 반짝거리면서 떠나가자 도현이 의외라는 듯 귓속말로 소곤거렸다.

“웬일로 선심을 다 쓰고 그래?”

“저 애들만 먹는 거면 모르겠지만 도련님도 같이 드실 거 아닙니까. 그럼 아무거나 함부로 주문할 수 없지요. 뭐, 객잔 수준을 보아하니 별로 기대는 안 됩니다만.”

한숨을 푸욱 쉬면서 인상을 찡그리는 칠현의 모습에 도현은 히죽 미소 지었다.

“짜식, 눈치는 빠르다니까.”

잠시 후 점소이가 음식들을 들고 오자 주눅이 든 듯 앉아 있던 남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궁에서 살던 도현과 칠현은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못했지만 오리통구이, 게살죽, 고기야채볶음 등 생전 한 번도 보지 못한 요리들이 눈앞에 좌르륵 차려지니 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가 귀에 생생히 들릴 정도였다.

하지만 금방이라도 허겁지겁 달려들 것 같던 아이들이 좀처럼 음식에 손을 대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걸 보고 도현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왜 그래?”

“저어…… 나리께서 먼저 드셔야…….”

“아!”

엄청 배가 고플 텐데 자기 때문에 먹고 싶은 걸 꾹 참고 있었다는 걸 깨달은 도현은 쓴웃음을 지으며 젓가락을 들었다.

“됐지?”

입에 음식을 넣고 우물거리면서 도현이 그렇게 말했지만 그래도 아이들은 몸을 꼼지락거리며 서로 눈치만 보았다.

“도련님이 허락하셨으니 먹어도 된다.”

흥 가볍게 콧방귀를 뀌면서 칠현이 말하자 그제야 두 남매는 와아 하며 요리에 달려들었다.

“뭐야, 왜 나보다 칠현이 네 말을 더 잘 듣는 건데?”

“제가 무섭나 보죠, 뭐.”

“네가 인상 쓰고 있으니까 그러지.”

“오냐오냐하면 아랫것들이 자꾸 기어오릅니다. 누군가는 군기를 잡아야죠.”

고집스러운 얼굴로 말하는 칠현에게 도현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알았다, 알았어. 네 맘대로 해.”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남매들 쪽으로 눈을 돌렸다.

“호야, 체할라. 천천히 먹어.”

“아라떠. 웅, 근데 이것도 맛있고 저것도 맛있는걸!”

볼이 미어져라 고기를 쑤셔 넣는 남동생을 보고 여자아이는 마냥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차를 갖다 주었다.

한 입이라도 더 먹이려는 마음에 반찬을 이것저것 집어 그릇 위에 올려 주는 모습이 마치 남매가 아니라 아들을 돌보는 어머니 같았다.

하지만 소매 사이로 드러난 앙상한 팔뚝을 본 도현은 저러다가 여자애가 먼저 쓰러지겠다는 생각에 무심코 말을 걸었다.

“너도 좀 먹지그래?”

“아, 아뇨. 전…….”

“사양하지 말고. 자, 앙!”

도현이 게살죽을 푼 숟가락을 앞으로 내밀자 여자아이의 볼이 새빨개졌다.

홍당무가 된 소녀의 얼굴과 어이없다는 눈빛으로 이쪽을 보고 있는 칠현을 번갈아 보면서 도현은 당황해 소리쳤다.

“뭐, 뭐야. 내가 뭐 잘못했어?”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저, 저, 죄송해요…….”

“으잉?”

아니, 배고픈 애 밥 한 숟갈 주는 게 뭐 그리 이상한 일이라고!

“나 팔 아프다. 얼른 받아먹어.”

“네에…….”

기어들어 가는 소리로 대답한 소녀는 눈을 꼭 감고 도현이 내민 숟가락을 입에 앙 물었다.

“좋아. 잘 먹네. 많이 먹어.”

“예, 감사합니다.”

그럼그럼.

자고로 애들은 많이 먹고 쑥쑥 자라야 하는 법이지.

비록 겉모습은 십 대 소년이지만 정신적으로는 이십 대 청년이었기에 도현은 마치 조카들을 돌보는 삼촌이라도 된 기분으로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시장에서 이것저것 군것질을 많이 했기 때문에 도현은 요리를 몇 점만 집어 먹고 계속 따뜻한 차만 홀짝였다.

옆에 앉아 있던 칠현이 그를 보며 진지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도련님, 애들을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당연히 집에 데려가야지.”

그러자 칠현이 답답하다는 듯이 주먹 쥔 손으로 자기 가슴을 살짝 치며 이야기했다.

“그런 뜻이 아닌 걸 아시지 않습니까?”

칠현의 말은 이 두 남매를 궁녀와 내시로 만들 건지 물어보는 것이다.

“글쎄. 거기까지는 생각을 안 해 봤는데.”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그냥 궁인宮人으로 만들면 이런저런 신경을 쓸 필요가 없어 편하지만 21세기에서 살다 온 도현은 아직 앞길이 창창한 어린아이들을 평생 답답한 궁 안에서만 살게 만드는 것이 그다지 탐탁지 않았다.

정신없이 음식을 집어 먹는 남동생과 달리 귀를 종긋 세우고 이야기를 듣고 있는 소녀와 눈이 마주친 도현은 살짝 미소를 지으면서 결정을 뒤로 미뤘다.

“그건 조금 더 생각을 해 보자고.”

“후우, 그렇게 하십시오. 어차피 궁인으로 만든다고 해도 한양이 아니라서 제대로 절차를 밟아 교육시키기도 어려우니까요.”

칠현의 말대로 원래 임금과 왕실 가족을 제일 가까운 곳에서 보좌하는 궁인이 되려면 어린 시절부터 까다롭고 체계적인 교육을 받아야 하지만 머나먼 오랑캐 땅에 볼모로 잡혀 있는 상황이라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골치 아픈 일은 나중에 생각하고 음식 다 식기 전에 어서 밥이나 먹자고.”

“예.”

도현의 말에 네 사람은 다시 식사를 시작했는데 쪼그만 배에 어찌나 많이 들어가는지 남매가 테이블 위에 있던 음식을 반 이상 먹어 치웠다.

개구리처럼 볼록 튀어나온 배를 내밀며 의자에 기대앉아 있는 꼬맹이의 모습이 너무 귀여웠는데 여자애는 그래도 누나라고 옆에 붙어서 소매 끝으로 양념이 묻어 더러워진 동생의 입 주위를 닦아 줬다.

“이제 배가 좀 불러?”

“네.”

“그럼 차로 입가심해야지.”

그러면서 도현인 한 손을 들자 계산대에 서 있던 점소이가 쪼르르 달려왔다.

“뭐 필요하신 거라도 있으십니까?”

“여기 용정차 네 잔 갖다 줘.”

값비싼 음식에 이어서 용정차까지 주문을 하자 점소이는 반색하며 허리를 굽혔다.

“금방 대령하겠습니다.”

“이제 슬슬 관저로 돌아가셔야죠.”

칠현의 말에 얼굴에 싫은 티를 팍팍 내며 도현이 말했다.

“자주 나오지도 못하는데 조금 더 있다가 들어가자.”

“애들까지 있는데 어딜 가신다고 그러십니까?”

“쩝. 그것도 그러네.”

말똥말똥 눈을 뜨고 맞은편에 앉아 있는 남매를 슬쩍 쳐다본 도현은 입맛을 다시면서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다음에 또 나오면 되지.”

“예에?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뭘 그렇게 놀라. 가끔씩 이렇게 콧구멍에 바람을 넣어 줘야지 안 그러면 답답해서 어떻게 살아.”

“자꾸 그러시면 제가 크게 혼난다니까요.”

“안 들키면 되잖아. 하여튼 간이 좁쌀만 하다니까.”

“끄으응.”

앓는 소리를 내며 칠현이 얼굴을 구기든지 말든지 신경 쓰지 않고 도현은 때마침 나온 용정차의 향을 음미하면서 호호 불어 한 모금 마셨다.

“역시! 너희들도 마셔. 기름진 음식을 먹고 난 다음에는 이렇게 차로 입가심을 하는 거야. 뜨거우니까 조심하고.”

“예.”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남매가 대답하는 순간 객잔 밖 대로에서 소란이 일어났다.

두두두두!

“이런! 어서 피해!”

“어이쿠!”

지축을 울리는 말발굽 소리에 깜짝 놀란 행인들이 얼른 옆으로 피하려고 했지만 애꿎은 사람의 어깨를 치거나 발을 밟는 등 갑자기 혼잡스러워지면서 여기저기서 고함 소리와 비명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말을 타고 달려오는 무리는 사람들이 피하거나 말거나 상관없다는 듯 전혀 속도를 줄이지 않은 채 앞으로 돌진했다.

“꺅!”

“조심해, 저기 밟히면 죽어!”

“옆으로 비켜!”

대로라고 불릴 만큼 양옆으로 폭이 꽤 넓은 길이었지만 수십 명, 아니 족히 백 명은 넘을 듯한 사내들이 한꺼번에 말을 타고 몰려들자 건물 처마 밑으로 피한 사람들은 서로 밀려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며 벽에 딱 붙어서 식은땀을 흘렸다.

탁!

“어떤 놈들이 도시 한복판에서 저렇게 말을 몰고 다니는 거야?”

뿌옇게 피어오른 흙먼지가 일행이 있는 객잔 이 층 안으로 날아들자 기분이 상한 도현은 마시던 찻잔을 내려놓고 뚜껑을 딱 덮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고개를 돌려 밖을 내다봤을 땐 이미 말을 탄 무리는 사라진 뒤였다.

미처 다 치우지 못해 말발굽에 으스러진 좌판 조각들과 찢어진 비단, 으깨진 과일 등이 바닥에서 나뒹굴고 졸지에 장사 밑천을 다 잃어버린 상인들이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울상을 짓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린 행인들 역시 혀를 쯧쯧 차며 동정해 주긴 했지만, 다들 어찌해 줄 도리가 없어 그냥 지나쳐 가기만 했다.

“뻔하죠, 뭐. 대낮에 말을 타고 도성 내의 대로를 질주할 수 있는 녀석들은 딱 하나밖에 없어요.”

“그게 누군데?”

“만주팔기요.”

칠현의 입에서 나온 말에 도현은 바로 얼굴을 구기며 낮게 침음성을 내뱉었다.

팔기군八旗軍은 청나라 시조인 누르하치가 만든 만주족 특유의 군사 제도로, 이와 동시에 행정 편제이기도 해서 각 부족별로 한 기씩 맡고 평상시에는 목축이나 농사 등 생업에 종사하다가 전쟁이 터지면 바로 군대로 변신한다.

바로 이 팔기군으로 누르하치는 만주를 거쳐 광활한 중국 대륙을 지배했다.

각 기에서 제일 기초가 되는 단위가 약 삼백 명의 병사로 이루어진 우록牛錄인데 이들이 방금 대로를 엉망으로 만들고 지나간 범인이었다.

“선두에 백색 깃발을 들고 있는 걸 보면 정백기正白旗 소속 부대인 모양입니다.”

“젠장! 팔기면 다야!”

“아이고, 목소리 좀 낮추십시오. 그러다가 누가 관아에 신고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내가 뭐 틀린 말 했어? 백성을 지키고 보호해야 되는 군인들이 저러면 안 되잖아.”

그러자 칠현은 살짝 고개를 내젓고는 달래듯이 말했다.

“요즘 명나라와 충돌이 자주 일어나 신경이 잔뜩 곤두서 있어서 그런 거니까 마마께서 참으십시오.”

“…….”

순간 무슨 일인지 도현이 정색하며 물었다.

“그게 사실이야?”

“예.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내년 봄쯤 대군을 일으켜 만리장성을 공격할지도 모른다고 합니다.”

“젠장할!”

얼굴을 와락 구긴 도현은 팔기군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며 짧게 욕설을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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