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출정
관저까지 오는 내내 도현은 미간을 찡그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객잔에서 식사할 때까지만 해도 살짝 웃으면서 말문이 트였던 두 남매는 자기들한테 상냥하게 대해 줬던 도현이 침묵을 지키고 있자 의지할 곳을 잃은 것처럼 불안한 눈빛으로 다시 입을 꾹 다물어 버렸다.
도현의 뒤를 따르고 있던 칠현도 왜 갑자기 분위기가 어두워졌는지 짐작도 하지 못하고 눈치만 보다가 관저 앞에 서 있는 무관을 보고는 찔끔한 표정으로 발걸음을 멈췄다.
“대군마마! 대체 어딜 갔다 오시는 겁니까?”
도현 일행을 발견한 김덕술이 한달음에 달려와 책망하는 눈초리로 물었다.
그는 조선에서부터 도현의 호위를 맡은 내금의 위사 중 한 사람이었는데 키가 크고 덩치가 우람해서 다른 사람 두 배는 되는 덕에 어디서건 눈에 띄는 거한이다.
전립을 머리에 눌러쓰고 허리춤에는 장검, 그리고 붉은색과 검정색이 섞인 무관복을 입은 그가 가까이 다가오자 깜짝 놀라 겁을 집어먹은 두 남매가 도현의 허리춤을 잡고 뒤에 숨었다.
“마마를 찾느라 모두들 발칵 뒤집혀서 난리가 났습니다. 게다가 칠현이까지 동시에 사라져서 혹시 무슨 변고가 일어난 건 아닐까 하고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십니까.”
그렇게 말하면서 그는 한눈으로 두 남매를 흘낏 쳐다본 뒤 칠현을 잡아먹을 듯 쏘아보았다.
도현의 앞이 아니었다면 당장이라도 멱살을 잡고 흔들어서 대체 밖에서 무슨 짓을 하다 온 건지 추궁하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억지로 참는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미안. 잠깐 바람 쐬러 나갔다 온 것뿐이야.”
도현은 더 이상 말하기 귀찮은 표정으로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관저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러다 문득 생각난 듯 뒤를 돌아보고 말했다.
“아, 그렇지. 쟤네들은 내가 거둔 애들이니까 편안하게 쉴 수 있는 방 하나 내주도록 해. 나머지는 칠현이 네가 알아서 좀 보살펴 주고.”
“예.”
도현은 자신의 등 뒤로 따라붙는 두 남매의 시선을 알아차렸지만 지금은 머릿속이 복잡해서 거기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도현은 옷을 갈아입지도 않은 채 지친 얼굴로 침상에 앉아서 머리를 감싸 쥐었다.
“젠장! 재수 없는 놈은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더니. 이왕 과거로 올 거면 한 십 년 뒤에 왕이 되어 있을 때로 오지 왜 하필 이 시기냐고!”
뒤로 벌렁 드러누워선 데굴데굴 구르며 악을 쓰던 도현은 낮게 욕설을 내뱉고 이불에 얼굴을 파묻었다.
도현이 이렇게 괴로워하는 건 저자에서 팔기군을 보고 잠시 잊고 있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 시기는 대륙의 패권을 두고 후금과 명나라가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는 때였다.
자기들끼리 치고받는데 무슨 상관이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문제는 자의반타의반으로 세자인 소현과, 도현의 영혼이 들어간 봉림대군이 몇 년 뒤 후금 군대가 북경에 입성할 때까지 전쟁터를 전전한다는 것이다.
물론 왕자라는 신분 때문에 호위들의 보호를 받겠지만 살벌한 전장에 나가야 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칼 한번 휘둘러 본 적이 없는 지극히 평범한 현대인이었던 도현은 암담해졌다.
“이제 겨우 이곳 생활에 적응해 가는데 전쟁이라니. 도대체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자꾸 이러는 거야!”
울컥 화가 치밀어 오른 도현이 미친놈처럼 허공에다 삿대질을 하며 세상 모든 종교의 신神에게 분통을 터트렸지만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그러다가 허탈한 얼굴로 다시 침상에 주저앉아 한참 멍하니 있던 도현은 이내 한쪽 주먹을 꽉 움켜쥐고는 결연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고 했어. 어디 한번 갈 데까지 해 보자고.”
어느 역사서를 봐도 봉림대군이 전쟁 중에 큰 부상을 입었다는 기록은 없지만 자신이 과거로 온 것처럼 또 무슨 돌발 변수가 생길지 아무도 몰랐기에 도현은 전쟁터로 가기 전까지 최대한 대비를 해 두기로 결심했다.
일단 마음을 굳히자 1분 1초도 그냥 보내는 것이 아까워진 도현은 침상에서 벌떡 일어나 방을 나갔다.
덜컥!
방문이 열리며 도현이 나오자 혹시나 또 사고를 칠까 봐 앞을 지키고 있던 김덕술이 얼른 허리를 숙였다.
“마마.”
“안 그래도 자네를 부르려고 했는데 마침 잘됐군.”
“무슨 시키실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말은 하지 않고 아래위로 시선을 옮기며 잠시 김덕술의 몸을 훑어본 도현은 마음에 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김 위사.”
“예.”
“자네는 언제부터 무예를 익혔나?”
뜬금없는 물음에 의아한 마음이 들었지만 김덕술은 내색하지 않고 성심성의껏 대답했다.
“열세 살 때부터 기초를 닦았습니다.”
“꽤 빠르군. 무인 집안이었나 보지?”
“그건 아니고, 당시 고향 마을 뒷산 암자에 머물던 스승님을 우연히 알게 되어 그분께 선무도를 전수받았습니다.”
“선무도?”
“네.”
선무도라면 도현도 익히 알고 있는 무술인데, 한민족 전통 무예로 그 기원이 천 년 역사를 간직한 신라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삼국으로 나뉘어 치열한 전쟁을 벌이던 당시 상황에 맞춰 호국 불교가 융성했는데 당대 고승인 원광법사와 원효대사가 화랑들에게 심신 단련의 목적으로 가르치던 것이 기원이 됐다.
그 뒤 고려 시대를 거치면서 호국 무예로 퍼져 나갔다.
하지만 영화도 잠시, 고려가 망하고 억불 정책을 쓰던 조선 시대와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사라진 많은 전통 무예들처럼 사람들의 기억에서 점차 잊혀 경주 골굴사에서 겨우 명맥만 이어 오다가 최근 다시 조명을 받는 중이었다.
“잘됐군. 무예를 좀 배웠으면 하는데 괜찮겠어?”
“마마께서 말씀이십니까?”
“그럼 여기 나 말고 또 다른 사람 있어?”
“…….”
너무나도 태연한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는 도현의 모습에 살짝 당혹스러워하던 김덕술은 예전에도 왕자들이 건강을 위해 가볍게 활쏘기 같은 무예를 익히기도 했기에 봉림대군도 그러는 거라고 혼자 짐작하고는 머리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아! 조만간 써먹어야 될지도 모르니까 속성으로 좀 부탁해.”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직 확실한 건 아니지만 형님하고 같이 명나라와의 전쟁에 출전할지도 몰라.”
뜻밖의 말에 김덕술은 바로 얼굴을 굳혔다.
“정말이십니까?”
“물론 후금, 아니 이제 청이지. 아무튼 칸인 홍타이지가 호위를 붙여 주겠지만 그래도 일신一身을 지킬 수 있는 재주 하나쯤은 가지고 있는 것이 좋지 않겠어.”
1635년 내몽골을 평정하고 대원전국의 옥새를 얻은 걸 계기로 국호를 대청大凊이라 고치고 숭덕이라는 연호를 쓰기 시작했다.
“물론이지요.”
“말이 나온 김에 지금 가르쳐 줄 수 있어?”
“예. 그럼 일단 옷부터 갈아입으시지요.”
“그래.”
잠시 뒤 도현은 치렁치렁한 예복 대신 움직이기 편한 붉은색 무복으로 갈아입고는 김덕술을 따라 관저 뒤편에 위치한 공터로 자리를 옮겼다.
흙바닥에 쉰 평 정도로 공간도 그리 넓지 않았지만 관저에 따로 연무장이 없어서 두 왕자를 호위하기 위해 함께 온 내금위 위사들이 무예 수련장으로 쓰는 곳이었다.
“형形도 중요하지만 선무도를 제대로 익히기 위해서는 우선 몸속의 탁기를 깨끗이 몰아내고 순수한 자연의 기운을 단전에 쌓는 것이 먼저입니다. 바닥에 가부좌를 틀고 앉으십시오.”
김덕술의 말에 도현은 바로 자세를 잡았다.
고귀한 핏줄인 왕자인데도 흙바닥이라고 불평 한마디 하지 않고 시키는 대로 하는 걸 보고 김덕술은 눈에 이채를 띠었다.
아무래도 처음 가부좌를 하다 보니 상당히 어색한 도현의 자세를 바로잡아 준 김덕술이 진지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제 두 눈을 감고 천천히 들숨과 날숨을 반복하며 주위에서 들리는 새소리와 몸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을 느끼며 자연과 하나가 되어 무아지경으로 빠져드는 겁니다.”
그냥 주먹이나 검 쓰는 법을 알려 줄 것이지 이런 걸 왜 해야 되는지 불만스러웠지만 무예를 익히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과정이라는 말에 도현은 시키는 대로 호흡을 했다.
“크게 들이마시고 천천히 내뱉고, 계속해서 들이마시고 뱉고.”
처음 하는 걸 텐데도 도현이 상당히 안정적으로 호흡을 하자 김덕술은 만족한 표정을 지으면서 요체를 설명해 줬다.
“이 호흡법은 몸에 기를 쌓게 해 줄 뿐 아니라 형과 결합해 동작을 하나 취할 때마다 힘을 배가시켜 줍니다.”
가만히 이야기를 들으며 들숨과 날숨을 반복하던 도현은 어느 순간 스스로를 잊고 자연과 하나가 되는 무아지경에 빠져들었다.
앞에 서서 수련하는 걸 지켜보던 김덕술은 그런 도현의 모습에 눈을 치켜떴는데 아무리 자질이 좋아도 최소 여섯 달에서 일 년은 걸리는 경지를 단번에 이뤄 내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이건 당연한 결과였다.
시공간을 거슬러 과거로 오면서 도현의 영혼은 탁기라고는 티끌만큼도 없는 순수한 영체로 변했고 더불어 엄청난 영성을 가지게 됐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막혀 있던 임독양맥이 자연스럽게 뚫리면서 그야말로 기를 쌓고 무예를 익히기에 최적의 몸이 되어 있었다.
이런 상태에서 선무도의 호흡법을 하자 마치 둑이 터지듯 공기 중에 퍼져 있던 기가 도현의 몸속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과유불급이라는 말이 있듯 보통 이러면 한계를 넘어가는 기의 유입에 그대로 혈관이 터져 버려 목숨을 잃거나 주화입마에 빠지기 십상이지만 그 누구보다 크고 깊은 그릇을 가진 도현은 그것들을 모두 받아들여 단전에 차곡차곡 쌓았다.
그 과정에서 무의식중에 안으로 들어온 기를 왼쪽 허리 부근에 있는 혈도부터 시작해 가슴으로 올린 후에 명치와 반대편 가슴을 지나 다시 오른쪽 허리 혈도로 돌리는 소주천까지 이뤘다. 정말 경악할 만한 성취였다.
김덕술의 경지가 그리 높지 않아 도현의 변화를 눈치채지 못해서 다행이지 그러지 않았다면 심각한 자괴감에 빠질 정도였다.
거의 한 식경 넘게 무아지경에 빠져 있던 도현이 길게 숨을 내뱉으면서 번쩍 눈을 뜨자 순간적으로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가 사라졌다.
“후우……! 정신이 맑아지는 것 같아서 좋군.”
멍하니 쳐다보고 있다가 황급히 정신을 차린 김덕술은 혹시라도 도현이 자만심에 빠져 수련을 제대로 하지 않을까 봐 일부러 정색하며 말했다.
“원래 심신을 안정시키고 바른 정신과 집중력을 길러 주며 어떤 일이 닥쳐도 바위처럼 단단한 마음을 가질 수 있는 평정심을 가꾸는 효능이 있습니다. 그래서 선무도를 대성하기 위해서는 형과 함께 호흡법을 끊임없이 연마해 나가야 됩니다.”
“그렇군.”
“본격적인 형을 익히기 전에 하체를 단련시키는 마보 자세를 배우겠습니다. 이건 가장 기본이 되는 수련법으로, 하체를 단단하게 만들어 주는 겁니다. 처음이시니 일단 일각만 해 보겠습니다.”
설명을 하면서 김덕술이 양다리를 어깨 넓이만큼 벌리고 마치 말 위에 앉아 있는 것처럼 무릎을 구부리며 두 팔을 앞으로 들어 올렸다.
그걸 보고 도현도 바로 마보 자세를 취했다.
“나중에 내기를 운용할 수 있게 되더라도 마보 자세를 수련할 때는 호흡법을 하지 않고 순수한 근력만으로 버텨야 합니다. 그래야 하체의 힘을 기를 수가 있습니다.”
“알았어.”
“그럼 지금부터 일각을 버텨 보십시오.”
몸을 바로 한 김덕술은 한쪽에 있는 모래시계를 거꾸로 뒤집어 놓고는 옆에 서서 도현이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고 잘 유지하는지 지켜봤다.
가장 기초가 되면서도 무인들이 제일 힘들어하는 수련이라는 이야기대로 1분도 채 지나지 않아 다리 근육이 땅기고 팔이 저려 왔다.
“팔을 더 들어 올리셔야죠.”
자신도 모르게 양팔이 아래로 내려가거나 몸을 살짝 들면 여지없이 김덕술의 지적이 쏟아졌다.
“자세가 흐트러지면 힘들기만 할 뿐 근력이 안 붙습니다. 더 몸을 낮추십시오.”
“끄으응.”
근육이 끊어질 것처럼 고통스러웠지만 스스로 원하고 거친 전장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꼭 익혀야 하는 것이기에 도현은 이를 악물고 버텼다.
그렇게 영원히 계속될 것만 같은 시간이 흘러 모래시계의 모래가 다 아래로 떨어지자 김덕술의 입에서 그만하라는 말이 나왔다.
“됐습니다.”
“후아아…….”
말을 하자마자 얼마나 힘들었는지 도현은 길게 숨을 내쉬며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괜찮으십니까?”
“으음, 참을 만해.”
애써 웃음 지었지만 도현은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김덕술이 옆으로 다가와서 나중에 근육통이 생겨 고생하지 않도록 투박한 손으로 도현의 팔과 다리를 주물러 주며 말했다.
“뿌리가 깊은 나무는 아무리 거센 비바람이 몰아쳐도 끄떡없이 천 년을 버티는 것처럼 기초를 튼튼하게 해 두면 앞으로 무예를 익히는 데 큰 도움이 되니 힘들더라도 빼먹지 말고 매일 이각 이상 마보 수련을 꾸준히 하십시오.”
“그러지. 그런데 주먹이나 검을 쓰는 건 언제 가르쳐 줄 거야?”
언제 출전하게 될지 몰라 마음이 급한 도현의 물음에 김덕술은 잠시 생각을 해 보다가 이내 대답했다.
“원래는 한 달 이상 기초를 닦은 다음에 형을 익혀야 되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으니까 이레 뒤부터 초식과 검술을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더 빨리는 안 돼?”
도현이 조바심을 내자 김덕술은 바로 고개를 내저으며 단호히 선을 그었다.
“그것도 마마께서 잘 따라오셔서 최대한 줄인 겁니다. 너무 서두르시면 탈이 날 수밖에 없습니다.”
“후우, 그럼 어쩔 수 없지.”
“오늘은 처음이니까 마보를 일각 동안 한 번 더 하고 수련을 마무리 지으시지요.”
“그러지.”
그사이 기운을 차렸는지 도현은 힘차게 일어나서 다시 마보 자세를 취했다.
다음 날부터 도현은 오전에는 가부좌를 틀고 앉아 호흡법을 익히고 오후에는 마보 자세를 수련하며 몸을 단련시켰다.
그렇게 짧지만 나름대로 기초를 닦아 준 김덕술은 처음 말했던 대로 이레 뒤부터는 본격적으로 공격과 방어를 할 수 있는 형을 가르쳤다.
“이야압! 하압!”
예의 그 공터에 선 도현은 우렁찬 기합과 함께 날렵하게 몸을 움직였다.
앞차기, 옆차기 그리고 찌르기와 뒤돌려차기 등 부드러우면서도 강함이 숨겨진 선무도의 형과 품을 쉴 새 없이 펼쳐 냈다.
선무도를 익히기 시작한 지 이제 한 달도 안 됐다는 것이 절대 안 믿길 정도로 움직임이 매끄럽고 힘이 넘쳤다.
시간 터널을 지나 과거로 넘어오면서 뇌에도 뭔가 변화가 생겼는지 마치 물먹은 솜처럼 가르쳐 주는 족족 모든 걸 바로 흡수해 버리고 일단 시작하면 다른 것에는 시선도 주지 않는 무서운 집중력에 옆에서 지켜보는 김덕술이 감탄할 정도로 도현의 실력은 일취월장했다.
그중에서 축기는 놀라운 걸 넘어 경악할 만큼 빠른 성취를 보였는데 기를 느끼는 건 물론이고 벌써 단전에 틀을 만들고 좁쌀만 하지만 기를 모았다.
이건 자질이 뛰어난 사람도 최소 일 년은 수련에 매진해야 겨우 이룰 수 있는 경지였다.
너무나도 대단한 도현의 능력에 김덕술은 물론이고 관저에 있던 내금위 위사들이 좌절을 느낄 정도였다.
아무튼 그 덕분인지 관저에는 때아닌 무예 수련 열풍이 불어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근무시간이 끝난 위사들이 삼삼오오 도현이 있는 공터로 와서 함께 훈련을 했다.
격투술을 끝내고 곧바로 장검을 뽑아 들고 검술까지 펼쳐 낸 도현은 가쁜 숨을 내쉬면서 마무리 자세를 취했다.
그때 공터 한쪽에서 누군가 박수를 치며 다가왔다.
짝짝짝!
“대단하구나.”
“형님!”
미소 지은 채 걸어오는 사람은 바로 인조의 장남인 소현세자였다.
이름은 ‘이왕’이고 효종과 같은 인열왕후의 소생으로, 1625년에 세자 책봉을 받고 병자호란이 끝나자 청나라로 끌려가 구 년간이나 볼모 생활을 하다가 귀국하지만 결국 아버지에게 죽게 되는 비운의 인물이었다.
예복을 입고 있는 걸 봐서 황궁에 갔다 온 것 같은데 소현세자가 나타나자 주위에 있던 내금위 위사들은 황급히 허리를 숙이면서 예를 취했다.
원래 몸의 주인과 기억을 공유하면서 가족에 대한 감정을 함께 느끼게 된 도현도 반가운 얼굴로 소현세자를 맞이했다.
“여긴 어쩐 일이에요?”
“동생이 무예를 익힌다는 말에 한번 나와 봤지. 잠깐밖에 안 봤지만 꽤 자세가 나오던걸.”
“이제 겨우 흉내만 내는 수준인데요, 뭐.”
도현이 쑥스러운 듯 뒷머리를 긁적이며 겸손하게 대답하자 소현세자는 기특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심양에 볼모로 잡혀 왔다고 낙담하지 않고 뭐든 열심히 배우려는 모습이 보기 좋구나.”
도현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칭찬한 소현세자는 허리를 숙인 채 한 발짝 뒤로 물러나 있는 김덕술에게 시선을 돌렸다.
“김 위사, 아우를 잘 가르쳐 주게.”
“최선을 다하겠사옵니다.”
“그래. 잠시 아우와 이야기를 했으면 하는데 괜찮겠나?”
“물론입니다.”
“수련 중에 미안하네. 휘야, 내 거처로 가서 차나 한 잔 마시자꾸나.”
봉림대군이라는 칭호 대신 친근하게 이름을 부르며 소현세자가 하는 말에 도현은 얼른 대답했다.
“예, 형님.”
심양 관저 깊숙한 곳에 위치한 소현세자의 거처는 주인의 성품을 보여 주듯 화려하지 않고 검소하면서도 은근한 기품이 느껴지게 꾸며져 있었다.
“이번에 온 사신이 가져다준 인삼차다. 한번 마셔 보아라.”
소현세자의 말에 내관이 갖다 놓은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셔 본 도현은 인삼 특유의 향과 맛에 왠지 고향으로 돌아간 것 같아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정말 좋군요.”
“마음에 들면 내관을 시켜 조금 보내 주마.”
“아닙니다. 형님한테 보내온 건데 제가 어찌…….”
“괜찮다. 이 낯선 만주 땅에서 의지할 수 있는 건 우리 두 형제뿐인데 이까짓 차 조금 못 나눠 주겠느냐.”
그러자 도현도 더 이상 사양하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두고두고 잘 마시겠습니다.”
“그래. 그건 그렇고, 무예를 익히는 건 재미있느냐?”
“예. 바깥에 나와 땀을 흘리며 몸을 움직이니 상쾌하고 우울한 기분이 확 날아갑니다. 형님께서도 건강을 위해 한번 배워 보십시오.”
“글쎄, 난 워낙 몸이 둔해서 제대로 따라갈지 모르겠구나.”
그렇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오랜만에 동생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던 소현세자는 어느새 차가 다 식어 내관이 새로 가져다줄 때쯤 진지한 얼굴로 도현을 찾은 진짜 용건을 꺼냈다.
“실은 너한테 할 이야기가 있다.”
얼굴에 웃음기가 싹 사라진 소현세자의 모습에 도현은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걸 직감했지만 애써 내색하지 않고 말했다.
“그렇게 정색을 하시니 제가 다 긴장이 되는군요.”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청 황제가 조만간 군사를 보내 산해관을 공격할 계획이란다.”
“저잣거리에 흉흉한 소문이 떠돌고 팔기들의 움직임이 분주해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전쟁이 벌어지는군요.”
“한 산에 두 마리의 호랑이가 살 수 없듯이 홍타이지가 스스로 황제 자리에 오른 이상 명과 일전을 벌이는 건 어쩌면 당연한 결과라 하겠지.”
잠시 씁쓸한 표정을 짓던 소현세자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이번 출전에 너와 나더러 동행해 달라고 하더구나.”
“정말입니까?”
“연락을 받고 황성에 들어가서 황제에게 직접 들은 말이다.”
“제 놈들 전쟁에 우리는 왜 데려가려는 거죠?”
“뻔하지 않느냐. 조선이 상국으로 섬기는 명나라를 압박하는 자신들의 모습을 직접 눈으로 보고 덤빌 생각도 하지 말라는 뜻이겠지.”
“으음…….”
소현세자의 예상이 정확했는데 미래에 조선의 군주가 될 그에게 자신들의 힘을 보여 줘 겁을 먹게 하려는 수작이었다.
낮은 침음성을 내뱉으며 미간을 좁힌 도현은 마주 앉아 있는 소현세자와 시선을 맞추며 말했다.
“출전은 언제입니까?”
예상과 달리 너무나도 차분한 동생의 모습에 소현세자는 의외라는 표정을 지으면서 물음에 답했다.
“정확한 날짜는 아직 모르지만 나한테 이런 이야기를 해 준 걸 보면 조만간에 군대를 일으키지 않겠느냐.”
“그렇군요.”
“갑작스럽지만 아무튼 일이 이렇게 됐으니 너도 준비를 해 두어라.”
“예.”
그 뒤로 한식경 정도 더 대화를 나누고 소현 태자의 방에서 나온 도현은 수련장으로 걸어가면서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그러자 한 발짝 뒤에서 따라오던 칠현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마마, 무슨 걱정이라도 있으십니까?”
슬쩍 고개를 돌려 칠현을 쳐다본 도현은 약간 가라앉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했다.
“뭐, 어차피 조금 있으면 관저 내에 소문이 다 퍼질 테니까 미리 알고 있어도 상관없겠지. 조만간에 형님과 함께 청군이 산해관을 공격하는 데 따라가야 될 것 같아.”
“아니, 오랑캐 놈들의 싸움에 왜 세자 저하와 왕자님이 가셔야 되는 겁니까?”
화들짝 놀란 칠현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묻자 도현은 입가에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이게 바로 힘없는 나라 왕족의 서러움 아니겠어.”
“마마…….”
“하지만 아직 볼모로 가치가 큰 만큼 놈들도 호위를 잔뜩 붙여서 지킬 테니까 그렇게 세상 다 산 표정은 안 지어도 돼. 일단은 그렇다는 것만 알고 필요한 준비를 하되 여기저기 떠벌리고 다니지는 마.”
“예.”
대번에 잔뜩 얼굴을 굳힌 칠현의 모습에 도현은 긴장을 풀어 주기 위해 일부러 화제를 돌렸다.
“그건 그렇고, 지난번에 데려온 남매는 관저 생활에 잘 적응하고 있어?”
“네. 아직 어리지만 여기까지 끌려오면서 고생을 많이 했는지 눈치가 여간 빠른 것이 아닙니다. 별다른 말도 안 했는데 누나인 소연이는 알아서 부엌일을 돕고 동생 기철이는 내금위 위사들의 잔심부름을 하면서 제 밥값을 하고 있습니다.”
이야기를 들은 도현은 남매의 행동이 기특하긴 했지만 어린 나이에 주변 눈치를 보며 일을 하는 것이 안쓰러웠다.
“칠현이 네가 보기에 애들 성품이 어떤 것 같아?”
“아직 본 지 얼마 안 됐지만 둘 다 착하고 고생한 것에 비하면 크게 구김살도 없는 게 괜찮아 보였습니다.”
“그렇단 말이지…….”
말끝을 흐리며 잠시 뭔가를 생각하던 도현은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
“오늘부터 둘을 부인에게 보내 함께 머물게 하도록 해라.”
“군부인 마님께 말씀이십니까?”
“그래. 걔들이 옆에 있으면 죽은 큰딸 생각에 우울증을 앓고 있는 부인이 조금이라도 기운을 차릴지도 모르지 않느냐.”
효종의 큰딸 숙신공주는 얼마 살아 보지도 못하고 세 살 때 볼모지인 심양으로 끌려가다가 병을 얻어 죽었는데 이게 평생 그와 인선왕후 장씨에게는 큰 상처로 남았다.
군부인이 첫 자녀인 숙신공주를 얼마나 아꼈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칠현은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마마.”
“후우…….”
장씨 부인은 수를 놓다가 무심코 작은 한숨을 쉬었다.
단아하고 우아한 이목구비에 행동에도 기품이 가득한 미인이었지만 젊음의 생기로 넘쳐흘러야 할 그녀의 표정엔 왠지 모를 수심이 엿보였다.
수틀 위에 절반쯤 완성된 연꽃을 한동안 바라보던 장씨 부인은 아침부터 붙잡고 있던 수틀을 옆으로 치워 버리고 한 손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어디가 불편하십니까, 마마?”
시중을 들기 위해 조선에서부터 함께 따라온 나인이 걱정스레 묻자 장씨 부인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아무것도 아니다. 그냥 좀 속이 답답하구나.”
며칠 동안 정원을 산책하는 일도 없이 방 안에 틀어박혀 있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장씨 부인의 마음속에 응어리처럼 맺혀 있는 한 때문인 것을 누구나 다 알았다.
“기운을 맑게 하는 탕을 준비하라고 이르겠습니다.”
“그럴 것 없다.”
안 그래도 요즘 계속 입맛이 없어서 겨우 밥 몇 술만 깨작이는 판인데 쓴 탕약이 쉽게 넘어갈 리가 없다.
장씨 부인이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자 다시 방 안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그 모습에 나인이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는데 때마침 바깥에서 칠현의 도착을 알리는 말소리가 들렸다.
“군부인 마님, 대군마마께서 보내신 박 내관이 왔사옵니다.”
그 소리를 듣고 장씨 부인은 고개를 살짝 들어 올렸다.
박 내관이라면 최근 봉림대군이 항상 곁에 두며 신임하는 사람이다.
그런 자가 어쩐 일로 갑자기 방문했는지 궁금해하면서 그녀는 비스듬히 옆으로 기대앉아 있던 자세를 바로 하고는 말했다.
“들라 하라.”
장씨 부인의 허락이 떨어지자 문이 스르륵 열리며 칠현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 뒤에는 소연과 기철 남매도 있었는데 원래 같으면 평생 쳐다도 보지 못할 장소에 있는지라 몸 둘 바를 모르고 주눅 들어 눈을 밑으로 푹 내리깔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아무리 봐도 일반 평민인 남매의 모습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한 장씨 부인이 물었다.
“네, 마님. 이 아이들은 대군마마께서 바깥에 외출하셨다가 사정이 딱해 거둔 남매인데, 기질이 영민하고 성실하여 곁에 두고 시중을 들게 하면 여러모로 좋을 거라 하셨습니다.”
“대군께서?”
그 말을 듣고 장씨 부인은 새삼스레 남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거기 뒤에 있으니 잘 안 보이는구나. 가까이 오너라.”
장씨 부인의 말에 남매는 흠칫 몸을 떨었다.
도움을 청하듯이 칠현을 바라보았지만 얼른 명에 따르라며 눈짓하자 남매는 서로 손을 꼭 붙잡고 주춤주춤 앞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얼굴을 숙이고 있으면 볼 수가 없지 않느냐. 고개를 들어라.”
“네에…….”
잔뜩 긴장해 있던 소연이 조심스레 얼굴을 들었다.
도현과 처음 만났을 때처럼 피골이 상접한 몰골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원체 마르고 가녀린 몸집인지라 몸에 걸친 새 옷이 남의 것처럼 헐렁헐렁했다.
소연의 크고 새까만 눈동자와 시선이 맞부딪치자 장씨 부인은 자기도 모르게 일찍 떠나보낸 숙신공주를 떠올렸다.
얼굴 생김새는 하나도 닮지 않았는데 숙신공주가 그 맑고 까만 눈동자로 어머니 하고 부르며 졸라 대면 못 이기는 척 맛있는 걸 사 주거나 비단옷을 입혀 주었던 기억이 어째서 지금 생각나는 걸까.
“……눈매가 참 예쁘구나.”
“가, 감사합니다.”
장씨 부인의 칭찬에 소연은 당황해서 허둥지둥 다시 고개를 밑으로 떨궜다.
“대군께서 보내 주신 사람이니 감사히 잘 쓰겠다고 전해 다오.”
“네, 알겠습니다.”
다행히 소연 남매가 장씨 부인의 마음에 든 것 같아 속으로 안도하며 칠현은 그대로 그 자리를 떠났다.
이레 후, 평상시와 같은 시간에 일어난 도현은 돌연 장씨 부인이 나타나자 깜짝 놀랐다.
“부인?”
요 며칠간은 각자 자신의 처소에서 잠을 잤는지라 얼굴을 볼 일이 없었는데 웬일로 기별도 없이 찾아온 것일까.
“제가 도와 드리지요.”
눈짓으로 내관들을 물리친 장씨 부인은 손수 도현에게 겉옷을 입혀 주며 옷 갈아입는 것을 도왔다.
“부인, 무슨 일이시오?”
“왜요, 제가 곁에 있는 게 싫으십니까.”
“아니, 그런 말이 아니라……. 한동안 기분이 안 좋다며 당신 처소에만 있었지 않소.”
“저도 가끔은 바깥 공기를 좀 쐬어야죠. 그리고 부인이 남편의 수발을 드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닙니까.”
그렇게 말하며 장씨 부인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이 시대로 시간 이동을 해 온 후 처음 보는 그녀의 웃는 얼굴에 순간 넋을 잃은 도현은 크흠 헛기침을 했다.
“뭐, 기운을 차렸다니 다행이군.”
서로 숨 쉬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까이 있으니 코밑 아래에서 퍼지는 장씨 부인의 향내에 기분이 묘한지라 도현은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참! 그건 그렇고, 내가 보낸 그 남매는 어떻소?”
“아……. 둘 다 괜찮더군요. 작은 아이는 아직 나이가 많이 어려서 잔심부름밖에 못하지만, 큰 아이는 손재주가 아주 뛰어나요. 바느질을 참 잘하는데 나중에 시간이 나면 제가 수를 가르쳐 줄까 합니다.”
아무리 손재주가 좋다 해도 보통은 이불이나 꿰는 정도로 그치는데 장씨 부인이 직접 수를 가르쳐 주겠다는 건 무척 마음에 들었다는 증거다.
그러고 보니 장씨 부인이 이렇게 바깥출입을 하거나 나긋나긋하게 말을 붙여 오는 것도 그 남매를 보낸 이후의 일이라고 생각하니 도현은 새삼 자신의 판단이 옳았다는 생각이 들어 기분이 좋아졌다.
소현세자에게 곧 출전할 거라는 언질을 받은 뒤부터 도현은 식사 시간도 아껴 가며 수련에 집중했다.
김덕술도 뭔가 들은 이야기가 있는지 아무런 만류 없이 실전 위주로 무예를 가르쳤다.
다른 내금위 위사들도 평소에는 하지 않던 각궁角弓까지 꺼내 들고 궁술 연습까지 했는데 도현도 그 사이에 끼어 어설프지만 활 쏘는 법을 배웠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활을 쏠 때는 정신을 최대한 집중 하셔야 됩니다. 일단 목표를 발견하면 한 호흡 안에 화살을 재고 조준한 뒤 시위를 놓는 거지요. 아시겠습니까?”
심양 관저에 있는 내금위 위사 중에 가장 활을 잘 쏘는 박태철의 자세한 설명에 도현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제 앞에 세워 둔 과녁을 향해 화살을 쏴 보십시오.”
박태철이 한 걸음 옆으로 물러서자 삼십 보 앞에 세워 둔 과녁을 노려본 도현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는 그대로 멈춘 채 화살을 재운 활을 천천히 들어 올리면서 끝까지 뒤로 당겼다.
날카로운 시위에 베이지 않도록 손가락에 깍지를 꼈고 팔에는 힘이 잔뜩 들어갔다.
화살 끝을 오른쪽 볼에 딱 붙여 목표를 조준한 도현은 어느 순간, 팽팽하게 당기고 있던 시위를 놨다.
핑!
쉬이이익!
시위를 떠난 화살은 바람을 가르면서 일직선으로 곧장 날아갔다.
그리고 둔탁한 소리를 내며 과녁 정중앙에 있는 붉은색 원에 정확히 꽂혔다.
퍽!
“명중입니다. 정말 대단하신데요.”
“겨우 삼십 보 밖에 있는 과녁을 맞힌 것뿐인데, 뭐.”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기쁜 표정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도현이 겸손하게 말하자 박태철이 손을 내저었다.
“아닙니다. 처음 배우시는 것치고는 아주 훌륭한 실력입니다. 이거 잘하면 대단한 신궁이 되시겠는데요.”
김덕술과 달리 칭찬에 인색하지 않은 박태철의 말에 도현은 미소 지었다.
“신궁이라니, 하여튼 박 위사의 허풍은 알아줘야 된다니까.”
“그냥 하는 말이 아닙니다.”
“하하하! 알았네. 어찌 됐든 듣기는 좋군.”
“방금 느끼신 감각에 익숙해지는 것이 중요하니까 집중하셔서 화살 통에 든 것도 다 쏴 보십시오.”
“알았네.”
머리를 살짝 끄덕인 도현은 등에 메고 있는 통에서 화살을 한 개 뽑아 다시 시위에 걸었다.
그렇게 다섯 발을 더 쐈을 때 익숙한 얼굴의 내관 한 명이 허겁지겁 가까이 다가왔다.
“마마!”
“이 내관이 어쩐 일인가?”
“세자 저하께서 급히 찾으십니다.”
“나를?”
고개를 갸웃거리던 도현은 번뜩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에 얼굴을 찌푸렸다.
“혹시 황궁에서 사람이 온 거야?”
“예. 이틀 뒤 야골타 장군이 이끄는 팔기군이 산해관으로 출정한다고 합니다.”
“역시…….”
낮게 혼잣말을 한 도현은 옆에 서 있는 박태철에게 고개를 돌렸다.
“박 위사, 오늘 훈련은 여기서 끝내야 되겠는데?”
“알겠습니다. 세자 저하께서 기다리신다니 어서 가 보십시오.”
“그럼 나중에 보지.”
도현은 내관을 따라 황급히 소현세자의 거처로 갔다.
“전하, 봉림대군 왔사옵니다.”
방문 밖을 지키고 있는 내관의 말에 소현세자는 읽고 있던 서찰을 내려놓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들라 하라.”
방문이 열리고 무복을 입은 도현이 안으로 들어오자 소현세자는 약간 굳은 얼굴로 동생을 맞이했다.
“무예 수련 중이었구나.”
“예. 그런데 야골타 장군이 출정한다는 게 사실입니까?”
“일단 앉아라.”
급한 마음에 폭포수처럼 말을 쏟아 내던 도현은 그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는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소현세자가 따뜻하게 데워진 찻주전자를 들어 도현에게 한 잔 따라 주고는 차분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했다.
“네 말대로 황궁에서 기별이 왔다.”
“황제는 움직이지 않는 겁니까?”
“그래. 대신 황제의 이복동생인 예친왕 도르곤이 군대를 지휘한다고 하더구나.”
“그럼 야골타 장군은 선봉인 거군요.”
“그렇지.”
도르곤은 도현한테 낯선 이름이 아니었다. 병자호란 때 장수로 전쟁에 참가했고 훗날 황제인 홍타이지가 사망하면 청나라 최초의 섭정 자리에 올라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게 되는 인물이었다.
“도르곤이 움직인다면 정백기가 주력이겠군요.”
팔기군은 기본적으로 깃발과 갑옷의 색깔로 구분하는데 도르곤은 정백기의 수장이었다.
“정황기正黃旗 두 개 부대도 같이 출정한다더구나.”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팔기군 일 개 부대의 정원이 보통 육천 명 내외니까 대충 출정하는 군세가 가늠됐다.
“명나라를 공격하는 데 우리보고 같이 가라니 황제도 참 심술궂네요.”
“자신들의 강성함을 우리한테 자랑하려는 거겠지.”
일국의 왕세자이지만 볼모가 되어 이리저리 끌려 다녀야 되는 처지가 비참한지 소현세자는 입가에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걸 본 도현은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위사들은 얼마나 데려가실 겁니까?”
“직접 전투에 나설 일이 없고 여기 심양 관저에 남아 있는 가족들을 지킬 인원도 있어야 되니까 다섯 명 정도면 충분하지 않겠느냐.”
“아무리 그래도 왕세자의 체통이 있는데 너무 적은 것 같습니다.”
“다섯을 데려가든 열을 데려가든 어차피 저들이 보기에는 한 줌도 안 되는 숫자인 건 마찬가지일 게다. 오히려 우리의 사정을 뻔히 아는데 기죽지 않으려고 무리해서 위사들을 잔뜩 대동하는 것이 더 우습지.”
일찍이 고리타분한 사대주의 대신 청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실리를 취하려고 했던 현명한 인물답게 소현세자가 허례허식을 버리고 다분히 현실적인 선택을 하자 도현은 내심 감탄성을 내뱉으며 머리를 끄덕였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휘야.”
“예, 형님.”
잘 쓰지 않는 이름을 부른 소현세자는 걱정이 가득한 시선으로 도현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했다.
“얼마 전부터 익힌 무예 실력을 시험해 보고 싶은 마음이 들겠지만 출정을 하면 조선의 왕자라는 걸 되새기면서 항상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자중해라. 이건 청과 명의 전쟁이지 우리가 피를 볼 필요가 없는 싸움이야.”
“명심하겠습니다.”
그 뒤로도 한참 동안 소현세자는 젊은 혈기에 도현이 위험한 행동을 하지 않도록 당부의 말을 늘어놨다.
이미 소문이 다 퍼져 있는 상태였지만 소현세자는 도현과 이야기를 나눈 뒤 관저에 있는 관리들을 불러 황제의 지시를 공표했다.
출정 준비로 관저가 어수선한 가운데 도현은 자신의 방에서 얼마 전 무예를 배운다고 하자 소현세자가 친히 마련해 준 장검을 무명천으로 닦으면서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이런 날이 오리라는 걸 알고 있었고 무예를 익히며 나름 대비도 했지만 막상 피와 살이 튀는 살벌한 전장으로 떠나야 된다고 하자 설렘과 긴장감이 교차했다.
“후우, 내가 잘해 낼 수 있을지 모르겠네.”
그때 미닫이문이 열리면서 도현의 아내인 풍안부인 장씨가 들어왔다.
자식을 두 명이나 낳았지만 어린 나이에 시집을 와서 아직 앳된 모습이 남아 있었다.
“조용히 명상을 하고 계신데 소첩이 방해를 한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괜찮으니 이리 와 앉으시오.”
“예.”
온돌방이 아닌 청나라 방식으로 지어진 건물이라 동그란 탁자를 가운데 두고 양쪽 의자에 마주 앉은 도현은 장씨 부인을 보며 입을 열었다.
“어쩐 일이오?”
“다른 것이 아니라 내일 세자 저하와 함께 산해관으로 출정하신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도현은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찾아가서 이야기를 했어야 하는데 내가 정신이 없다 보니 미안하오.”
“아닙니다. 그럴 수도 있지요.”
한쪽 손을 작게 내저은 장씨 부인은 뒤에 선 몸종이 들고 있던 보따리를 건네받아 탁자 위에 올려놓으며 이야기를 이었다.
“내일 떠나시기 전에 이걸 전해 드리려고 왔습니다.”
“이게 뭐요?”
“풀어 보시지요.”
매듭을 풀자 비단으로 만들어진 청색 무복이 한 벌 들어 있었다.
“이건…….”
“무예를 익히신다고 하기에 부족한 솜씨지만 한번 만들어 봤습니다.”
최고급 비단을 썼는지 질감이 아주 부드럽고 왼편 가슴에는 호랑이가 멋들어지게 수놓여 있었다.
무엇보다 저 작고 여린 손으로 자신을 위해 며칠 밤을 새우면서 한 땀 한 땀 정성을 다해 이걸 만들었다는 생각을 하니 가슴이 푸근해졌다.
“정말 멋지구려.”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이에요.”
의자에서 일어난 도현은 윗도리를 한번 걸쳐 보고는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자로 잰 듯이 딱 맞소.”
“이 옷을 입고 부디 다치지 말고 무사히 돌아오셔야 됩니다.”
옷매무새를 만져 주며 하는 말에 도현은 그녀를 꼬옥 껴안아 줬다.
“염려 마시오. 부인을 위해서라도 꼭 건강히 다녀오리다.”
“믿습니다.”
다음 날 이른 아침, 굳게 닫혀 있던 심양 관저의 문이 양옆으로 열리자 이번에 출전하는 소현세자와 일행들이 말을 타고 가는 걸 모든 식솔들이 나와서 전송했다.
“저하, 조심해서 다녀오십시오.”
“몸 성히 오셔야 됩니다.”
아직 명에 대한 사대정신이 뿌리 깊게 남아 있는 관저 소속 조선 관리들은 공을 세우라는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고 그저 다치지 말고 귀환하라는 이야기만 했다.
원래는 호위를 다섯 명만 데려가려고 했지만 절대 안 된다는 관리들의 반대에 결국 열다섯 명으로 늘어났다.
관저에 있는 위사들의 숫자가 서른 명이 채 안 되는 걸 생각하면 절반이나 데려가는 것이지만 그래도 일국의 왕세자와 왕자를 지키는 호위대치고는 초라한 규모였다.
곧장 황궁으로 들어간 소현세자와 도현은 대전 앞마당에서 열린 출정식에 참여했는데 청국에서 그들이 차지하는 위치를 보여 주듯 황제가 있는 단 위는 고사하고 일반 신하들보다 못한 뒷줄에 서서 행사를 구경했다.
치욕스러웠지만 이게 현실이고 전쟁에 져서 볼모로 끌려 온 소현세자와 도현이 져야 되는 짐이었다.
도르곤이 황제인 홍타이지에게 보검을 하사받는 것으로 출정식이 모두 끝나자 장수들은 조정 관리들의 환송을 받으면서 황궁을 나섰다.
여기에 소현세자와 도현도 끼어서 함께 움직였다.
황제가 머무는 황도에 함부로 군대를 들일 수는 없었기에 출정하는 군사들은 심양성 밖 벌판에 집결해 있다가 도르곤이 이끄는 지휘부 장수들이 도착하자 목표인 산해관을 향해 이동했다.
끝도 없이 펼쳐진 드넓은 초원 위에 수만 대군이 이동하는 모습은 지금껏 도현이 보지 못한 장관이었다.
더운 김을 뿜어내는 말 위에 올라탄 기마병들이 질서 정연하게 대열을 갖춰 뿌연 먼지를 피워 올리면서 초원을 가로지르는 모습은 왜 청이 명을 무너뜨리고 대륙의 패자로 우뚝 설 수 있었는지 확실히 보여 줬다.
속으로 연신 감탄하던 도현은 부러움보다는 조선도 예전에 만주를 호령하던 고구려처럼 강한 국가로 만들고 싶다는 야망을 품었다.
일단 그건 나중 문제고, 당장은 눈앞에 닥친 일부터 해결해야 됐다. 말은 탈 줄 알지만 이번처럼 하루 종일 그것도 며칠간 계속해서 탄 적이 없었던 도현은 허벅지 안쪽 살이 까지고 엉덩이가 너덜너덜해지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
처음보다는 많이 나아졌지만 그래도 말이 움직일 때마다 엉덩이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도현이 살짝 미간을 찌푸리자 옆에 있던 김덕술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가까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괜찮으십니까?”
“그럭저럭 참을 만해.”
“무리하지 마시고 아프면 수레를 타고 가십시오.”
힐끗 뒤편에 있는 짐수레를 돌아본 도현은 바로 고개를 내저었다.
“됐어.”
모양이 빠지기는 해도 승마보다 편한 짐수레 위에 앉아서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주위에 있는 청나라 장수와 병사들한테 우습게 보이기 싫었기에 애써 괜찮은 척했다.
그걸 아는 김덕술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왕자로서 기개를 지키려는 도현의 모습에 감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애처로운 마음이 들었다.
자세를 바로 한 도현은 자연스럽게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도르곤에게 시선이 갔다.
비록 병자호란 때 한반도를 침략한 적장 중 하나로 조선 입장에서는 철천지원수지만 커다란 보검을 옆에 차고 붉은색 망토를 두른 채 말을 탄 도르곤의 모습에서 강한 카리스마가 느껴졌다.
“역시 한 카리스마 하네.”
“뭐라고 하셨습니까?”
“아무것도 아니야. 그것보다 숙영지까지 얼마나 남았어?”
도현의 물음에 김덕술은 하늘에 떠 있는 태양의 위치를 살펴보고는 얼른 대답했다.
“해가 질 때가 다 돼 가니까 곧 행군을 멈추고 숙영지를 만들 겁니다.”
“다행이네.”
김덕술이 이야기한 대로 얼마 있지 않아 작은 하천이 나타나자 도르곤은 행군을 멈추고 숙영지 건설을 지시했다.
유목 민족답게 수레에 싣고 온 재료를 써서 흔히 파오라고 불리는 천막 수백 개를 순식간에 세웠다.
몽골과 북방 유목민족들의 전통 가옥인 파오는 나무로 뼈대를 만들고 표면을 양모피 또는 짐승 가죽으로 덮어서 마감하는데 조립과 이동이 쉽고 필요에 따라서 크기를 자유자재로 조절할 수 있다.
보통 열 명이 파오 하나를 쓰지만 왕족이라고 배려를 해서 소현세자 일행에게는 네 채의 파오가 배정됐다.
소현세자와 도현이 하나씩 쓰고 나머지 두 채는 호위들 몫이었다.
파오에 들어간 도현은 바지를 내리고 나무 침대에 엎드려 하루 종일 말을 탄다고 시뻘겋게 헐어 버린 엉덩이부터 치료를 받았다.
“아야야! 살살 해.”
“이제 다 됐습니다.”
상처 부위에 준비해 온 고약을 붙여 주는 김덕술과 아프다며 도현이 울상을 짓는 걸 옆에서 보던 소현세자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러게 힘들면 수레를 타지 왜 사서 고생을 해.”
“명색이 왕자인데 말 하나 제대로 못 탄다면 쪽팔리잖아요.”
“체면을 지키는 것도 좋지만 그러다가 몸이라도 상하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왜 이렇게 무리를 하는지 충분히 알지만 동생을 생각하는 마음에 소현세자는 정색하며 그를 나무랐다.
“내일부터는 상처가 다 아물 때까지 아무 소리 하지 말고 수레를 타라.”
“정말 괜찮아요. 그리고 앞으로 갈 길이 먼데 빨리 승마에 적응을 해야지 계속 수레를 타고 다닐 수는 없잖아요.”
“여기서 이틀만 더 가면 산해관인데 그게 무슨 소리냐?”
소현세자가 의아한 얼굴로 쳐다보자 도현은 허리춤을 끌어 올리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도르곤의 목표는 산해관이 아닙니다.”
“뭐?”
“석년에 현 황제가 직접 십만 대군을 이끌고 반년 넘게 공성전을 벌였지만 결국 함락시키지 못한 곳이 산해관입니다. 그런데 고작 이만도 채 안 되는 팔기군만으로 그것도 공성 병기도 하나 없는 상태에서 성을 무너뜨릴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그렇기는 하지만 출정식에서 황제가 명을 무너뜨리라고 했고 이 길은 산해관으로 곧장 이어지잖아.”
도현이 손가락 하나를 들어 좌우로 흔들면서 말했다.
“명을 친다고만 했지 목표가 산해관이라고 직접 말한 적은 없지요.”
그때서야 소현세자도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다.
“그럼 청이 진짜 노리는 곳이 어디야?”
“아마 산해관의 방어를 약화시키기 위해 만리장성 주변 거점 지역이나 배후 군현들을 노릴 가능성이 클 겁니다.”
실제 역사에서도 홍타이지는 직접 공격보다는 주위를 초토화시켜 난공불락의 요새인 산해관을 조금씩 무너뜨리는 전법을 썼기에 도현의 목소리는 확신에 차 있었다.
설명을 들은 소현세자가 표정을 굳히면서 머리를 끄덕였다.
“그럴 수도 있겠구나.”
“우리 입장에서는 산해관을 치든 아니면 배후 지역을 공략하든 둘 다 마찬가지지만 제 생각이 맞다면 앞으로 한 곳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계속 이동을 할 테니까 조금이라도 빨리 승마에 익숙해지는 게 좋겠지요.”
“무슨 이야기인지 알겠다. 하지만 너무 무리하지는 마라.”
“예, 형님.”
“그래.”
도현의 예상대로 산해관을 하루 남겨 두고 갑자기 서쪽으로 방향을 튼 청군은 만리장성에서 취약한 부분을 기습 돌파해 들어갔다.
그러고는 마치 예전에 대륙을 제패하고 유럽까지 떨게 만들었던 몽고군처럼 한곳에 오래 머물지 않고 이리저리 빠르게 움직이면서 마을과 농경지를 불태우고 약탈해 산해관을 지원하는 배후 지역을 철저히 유린했다.
산해관을 믿고 방비를 소홀히 하던 군현들은 거센 파도처럼 밀려오는 청군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는데 마을을 불태우고 가축과 곡식을 약탈한 뒤 사람들까지 모조리 잡아 노예로 끌고 갔다.
“공격!”
우와아아!
두두두두!
사령관인 도르곤의 명령이 떨어지자 야골타 장군이 이끄는 팔기군 수천 명이 커다란 함성을 내지르며 앞으로 달려 나갔다.
“화살을 쏴라! 적들이 성벽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아!”
슈슈슈슉! 쉬익!
“컥!”
“으윽.”
“우엑.”
채챙! 챙! 챙!
성벽에서 날아온 화살에 팔기군 병사들이 두세 명씩 쓰러졌다.
하지만 상대에 비해 궁수의 숫자가 턱없이 적어 사납게 짓쳐들어 오는 팔기군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바로 밑까지 접근한 팔기군은 긴 사다리와 갈고리를 매단 동아줄을 이용해 성벽을 타고 올라갔다.
명군이 창과 검을 휘두르며 저항했지만 황량한 초원에서 싸움으로 단련된 팔기군을 이길 수는 없었다.
잠시 뒤 성문까지 뚫리자 팔기군은 굶주린 늑대 떼처럼 안으로 쏟아져 들어와 닥치는 대로 살인과 노략질을 했다.
“크하하하! 다 죽여라!”
“꺄아악!”
“어딜 도망가려고.”
“이놈들! 내 딸은 안 된다.”
아무 집에나 침입한 팔기군 병사가 방 안에 숨어 있던 처녀를 찾아내 머리채를 잡아끌고 나오자 아버지로 보이는 중년인이 필사적으로 한쪽 다리를 붙잡고 늘어졌다.
“이건 뭐야!”
그러자 팔기군 병사는 이맛살을 찌푸리고는 귀찮다는 듯이 손에 쥐고 있던 검을 휘둘렀다.
서걱!
“아버지!”
피가 튀며 목이 잘린 중년인이 옆으로 힘없이 쓰러지자 딸은 눈을 크게 뜨며 애처롭게 소리를 질렀다.
“이년이!”
그러나 반대편으로 끌어당기는 팔기군 병사의 억센 팔에 딸은 눈물을 흘리며 힘없이 끌려갔다.
“흑흑흑.”
시가지 곳곳에서 이런 장면이 펼쳐졌다. 지휘관인 도르곤이 휘하 병사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전리품 획득을 공식적으로 인정했기에 팔기군은 더 약탈에 열을 올렸다.
노예로 붙잡힌 사람들은 그나마 운이 좋은 경우였는데 상품 가치가 없는 노약자나 어린아이들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보이는 대로 가차 없이 죽여 버렸다.
아무리 전쟁 중이라고 해도 점령지를 관리하기 위해 약탈은 벌일 때 주민들은 잘 손을 대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애초에 목표가 배후지를 초토화시켜 산해관을 무력화시키는 것이기에 팔기군은 작정을 한 듯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고 가옥과 토지를 불태웠다.
본진에서 말 위에 앉아 시커먼 연기와 불길이 솟아오르고 비명이 끊이지 않는 성을 바라보던 도현은 착잡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끔찍하군요.”
처음 보는 전장의 참혹함과 비참함에 도현의 목소리가 작게 떨렸다.
소현세자도 비슷한 감정인지 굳은 표정으로 작게 머리를 끄덕였다.
“그러게 말이다. 비록 청군과 함께 움직이는 입장이지만 약탈을 당하는 명나라 백성들의 모습에서 병자년 조선의 모습이 겹쳐 마음이 편치 않구나.”
병자호란 때 조선은 이것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절대 덜하지 않았다. 그때 청나라로 끌려간 백성들의 숫자만 해도 수십만 명에 달했고 죽은 이는 그 몇 배나 됐다.
“언젠가 꼭 복수할 날이 있을 겁니다.”
“글쎄다. 대국이라는 명나라도 청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걸 보면 과연 그런 때가 올지 모르겠구나.”
“형님이라면 꼭 해내실 겁니다.”
동생이 자신을 믿어 주는 것이 싫지 않은지 소현세자는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 우리 함께 노력해 보자꾸나.”
“예.”
약탈은 밤새 계속됐고 지휘부는 도르곤의 커다란 막사에 모여 승리를 자축하는 술자리를 가졌다.
소현세자와 도현도 초대를 받아 참석했는데 국가를 세웠지만 아직 유목 생활을 하는 습관이 그대로 남아 있어 딱히 예의를 따지지 않고 마유주에 양고기구이를 뜯으며 왁자지껄 이야기를 나눴다.
“자! 청국의 영광과 황제 폐하의 만수무강을 위해 건배!”
“건배!”
뜨거운 화덕에 노릇노릇 익어 가는 양고기를 가운데 두고 동그랗게 둘러앉아 있던 장수들은 도르곤의 말에 술잔을 위로 치켜들며 건배를 외쳤다.
“크흐.”
마유주는 유목 민족들의 전통술로, 양유나 마유를 짜서 며칠 두었다가 걸러서 먹는데 알코올 농도가 낮고 맛은 막걸리와 비슷했다.
잔에 든 술을 단번에 들이켠 뒤 손등으로 입가에 묻은 걸 닦아 낸 도르곤은 왼편에 조용히 앉아 있는 소현세자와 도현을 발견하고는 말을 걸었다.
“소현세자도 이리 와서 한 잔 받지.”
“예.”
소현세자는 그다지 내키지 않았지만 자리에서 일어나 가까이 다가갔고 도르곤이 가죽 주머니에 든 마유주를 가득 잔에 따라 줬다.
그러고는 어서 마시라는 듯이 빤히 쳐다보자 소현세자는 어쩔 수 없이 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억지로 겨우 잔을 다 비우자 나무로 만든 팔걸이에 몸을 비스듬하게 기댄 도르곤이 묘한 시선으로 소현세자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오늘 전투를 어떻게 봤나?”
갑작스러운 질문에 약간 당황한 표정을 짓던 소현세자는 이내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대답했다.
“팔기군의 용맹성에 감탄했습니다.”
그러자 도르곤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그렇지. 우리 팔기군을 막아 낼 자는 아무도 없지. 다들 안 그런가?”
“맞습니다!”
천막 안에 둘러앉아 있던 장수들은 앞에 놓인 탁자를 손으로 치거나 잔을 들어 올리면서 맞장구를 쳤다.
“명은 지는 해이고 우리 청은 찬란하게 떠오르는 새로운 대륙의 주인이니 앞으로 조선은 황제 폐하와 우리를 깍듯하게 모셔야 될 걸세.”
아무리 전쟁에 져서 굴욕적인 항복을 했다지만 그래도 일국의 왕세자를 데려다 놓고 이런 말을 하다니, 상당히 모욕적인 행동이었다.
그렇지만 똑똑하고 스스로의 감정을 추스를 줄 아는 소현세자는 여기서 소란을 피워 봤자 득이 될 게 아무것도 없다는 판단에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
“네.”
“그렇지. 저항하지 않고 고분고분 아우의 예를 다한다면 또다시 우리가 조선을 혼내 주러 가는 일은 없을 게야.”
“…….”
웃으며 이야기를 했지만 이건 까불면 오늘 점령한 도시처럼 가만히 두지 않겠다는 명백한 협박이었다.
속뜻을 파악한 소현세자는 딱딱하게 얼굴이 굳었고 그걸 보며 한쪽 입꼬리를 위로 말아 올린 도르곤은 거만한 자세로 상대를 내려다봤다.
그러자 함께 초대를 받아 술자리에 참석한 도현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도르곤 앞으로 걸어갔다.
“저도 한 잔 주시지요.”
도현의 등장에 도르곤이 의아한 얼굴을 하자 옆에 있던 장수 하나가 얼른 귓속말로 누군지 알려 줬다.
“조선에서 온 또 다른 왕자였군. 그럼 당연히 따라 줘야지.”
도르곤이 자신의 잔을 내밀자 도현은 고개를 살짝 좌우로 저으면서 낮지만 힘이 가득 실린 목소리로 말했다.
“전 이걸로 마시죠.”
도현이 집어 든 건 잔보다 훨씬 큰 사발이었다.
그 모습에 도르곤이 의외라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아직 어린 것 같은데 술을 좀 하나 보지?”
“조금 즐길 줄 압니다.”
“우문에 현답이군. 좋아. 사내라면 말술을 마실 줄 알아야지.”
사내답고 당당한 도현이 마음에 들었는지 도르곤은 기분 좋게 웃으며 가죽 주머니를 들어 사발에 한가득 마유주를 따라 줬다.
“잘 마시겠습니다.”
꿀꺽꿀꺽!
아직 성장이 다 끝나지 않은 청소년기의 몸이라 살짝 부담이 됐지만 그래도 저쪽 세계에 있을 때 친구들에게 진정한 주당이라 불리며 소주 두세 병은 앉은자리에서 뚝딱 해치웠던 가락 덕분인지 도현은 대접에 든 술을 단번에 깨끗하게 비웠다.
탁.
거꾸로 뒤집어서 남은 술이 없다는 걸 보여 준 도현이 대접을 탁자에 내려놓자 도르곤과 주위에 있던 장수들은 감탄성을 내뱉었다.
“이야! 제법인데!”
“그러게.”
“어찌나 시원하게 마시는지 내가 다 속이 뻥 뚫리는 것 같구만. 어떻게 한 잔 더 하겠나?”
“그 전에 제가 드릴 말씀이 있는데 해도 되겠습니까?”
“뭔지 모르지만 해 보게.”
평소라면 청나라에서도 최고 권력자 중 하나인 도르곤과 말을 섞는 건 고사하고 함부로 앞에 나설 수도 없겠지만 전투에 승리하고 어리지만 호쾌하게 술을 마시는 도현에게 호감이 생긴 그는 흔쾌히 승낙했다.
도현은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자세를 바로 하고는 앞에 있는 도르곤을 똑바로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앞서 형제의 예를 말씀하셨는데 아우가 형에게 존경심을 가지려면 먼저 윗사람으로서 포용과 더불어 베푸는 마음을 보여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청국은 이런 일반 백성들도 아는 걸 제대로 실행하지 못하고 조선에 과도한 공물을 요구해서 나라를 힘들게 하는데 어찌 진심으로 우러나 황제를 받들 수 있겠습니까.”
도현의 발언에 천막의 분위기는 한겨울 찬 바람이 몰아치는 것처럼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이런 방자한!”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그딴 소리를 지껄이는가!”
발끈한 장수들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붉게 상기된 얼굴로 그를 노려봤고 옆에 있던 소현 세자도 크게 당황했다.
“휘, 휘야.”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됐지만 도현은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가슴을 펴며 오히려 당당하게 말했다.
“제 이야기가 거슬렸다면 사죄드리겠습니다만 북풍한설보다 따뜻한 한여름 햇볕이 외투를 벗기듯 자고로 대국이라면 그만한 아량을 베풀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잠시 아무런 말 없이 무표정한 얼굴로 도현과 시선을 맞추던 도르곤은 이내 기대고 있던 팔걸이를 손으로 살짝 내려치며 크게 웃었다.
“하하하! 이거 내가 한 방 먹었군. 맞아, 이제 황제의 나라가 됐으니 그에 걸맞은 행동을 해야지.”
자리에서 일어난 도르곤은 좌중을 둘러보고는 묵직한 음성으로 지시를 내렸다.
“오늘 챙긴 전리품 중 내 몫을 이 먼 만리장성 너머까지 우리와 함께 참전한 조선의 두 왕자에게 우정의 표시로 모두 주겠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도르곤의 발언에 휘하 장수들은 당황하며 서로를 쳐다보았다.
어쨌든 지휘관의 명령인지라 눈앞에서 대놓고 불만을 토로할 배짱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도르곤 자신의 몫을 떼어 주겠다고 하니 다른 장수들이 피해를 볼 일도 아니었기에 다들 순순히 허리 숙여 대답했다.
“뜻대로 하시지요.”
“하하! 좋아.”
무릎을 치며 흡족하게 웃는 도르곤의 모습을 보며 소현세자는 덜컥 내려앉았던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런 한편 아무 반응 없이 꼿꼿한 자세로 허리를 펴고 서 있는 도현을 곁눈질한 그는 마냥 어리기만 한 줄 알았던 동생이 언제 저렇게 대범한 사내로 성장했는지 속으로 감탄했다.
그러나 소현세자가 생각하는 것과 달리 도현 역시 의외라면 의외인 도르곤의 행동에 놀란 것은 마찬가지였다.
발끈하는 마음에 자신도 모르게 나서기는 했지만 험한 말 한두 마디가 오가는 것 정도는 각오했던 터였다.
아니, 어쩌면 큰 낭패를 당할 수도 있다고, 그 정도는 예측했다.
하지만 이렇게 호탕하게 받아들이다니, 역시 나중에 어린 황제를 앞에 세우고 청나라를 좌지우지하는 큰 인물답게 그릇이 크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잠시 경직됐던 분위기는 도르곤이 표정을 풀고 건배를 외치는 걸로 다시 화기애애해졌고 그렇게 밤늦게까지 술자리가 이어졌다.
술자리가 모두 끝나고 천막으로 걸어가던 소현세자는 고개를 돌려 옆에서 걸어가는 도현을 보며 꾸짖듯이 말했다.
“아까는 그게 무슨 짓이냐! 다행히 도르곤이 화를 내지 않고 좋게 넘어가 줘서 별일 없었지만 하마터면 큰 곤욕을 치를 뻔했잖아.”
“죄송합니다. 도르곤이 조선과 형님을 너무 무시하는 것 같아서 그만…….”
자신을 위해서 나섰다는 이야기에 소현세자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도현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쌌다.
“날 생각해 주는 건 고맙지만 그래도 때와 장소를 가려야지. 그러다가 만약 네가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그 죄책감을 평생 어떻게 지고 가란 거냐.”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 형님.”
“그래.”
도현의 대답을 들은 소현세자는 그때서야 굳어 있던 표정을 풀었다.
원정군 사령관이자 황족으로 청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권력자답게 도르곤의 몫으로 떨어지는 전리품은 상당했다.
특히나 오늘 함락시킨 장가구는 화북 평원에서 몽고로 가는 관문 도시로, 예전부터 교역과 광산업이 발달한 아주 부유한 곳이라 전리품이 평소보다 더 많았다.
다음 날 전해진 물품들은 금은보석과 비단, 도자기, 벼루 같은 각종 사치품들이었는데 큰 짐수레로 네 대를 가득 채우는 분량이었다.
도르곤을 위해 하급 장수들이 부잣집과 관청에서 나온 물건을 따로 챙겨 둔 것들로, 엉뚱하게도 소현세자와 도현이 가지게 됐다.
밖에 나와 도르곤이 보낸 전리품을 살펴본 도현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게 다 얼마야?”
“역시 소문대로 예친왕의 배포가 크구나.”
예친왕은 도르곤이 하사받은 작위였다.
도현과 같이 놀란 얼굴로 짐수레에 실린 물건들을 보던 소현세자는 옥으로 만든 벼루를 하나 꺼내 들며 말했다.
“난 이거면 되니까 나머지는 네가 다 가져라.”
“예?”
뜻밖의 말에 도현이 의아한 시선으로 쳐다보자 소현세자는 작게 미소 지으면서 이야기를 했다.
“네가 예친왕을 감복시켜서 받아 낸 재물이니까 너한테 소유권이 있지.”
“그래도 형님과 저, 둘한테 준 거잖아요.”
“됐다. 난 한양으로 돌아가면 국왕 자리를 물려받지만 넌 식구들을 데리고 대궐을 나와 생활해야 되지 않느냐. 그때를 위해서 챙겨 두아라.”
“정말 그거 하나만 가지고 되겠어요?”
“그래.”
보통 이러면 빈말이라도 한 번 더 공평하게 나눠 가지자고 권하겠지만 저쪽 세계에서 대학을 다니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몇 개씩 뛰며 경제적으로 쪼들리는 생활을 해서 그런지 은근히 돈 욕심이 많던 도현은 날름 소현세자의 양보를 받아들였다.
“나중에 후회하기 없기예요.”
“알았다.”
꼭 재물을 양보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부드럽게 웃으며 천막으로 돌아가는 소현세자의 뒷모습에서 도현은 동생을 생각하는 형의 따뜻한 마음이 느껴졌다.
장가구를 점령한 청군은 그곳에 본진을 설치하고 천인대 다섯 개를 사방으로 보내 주변 지역을 하나씩 초토화시켰다.
전원 말을 타고 빠르게 움직이는 데다 이들을 막아야 되는 명군의 저항마저 약해 하루에 마을 두세 곳이 노략질을 당하고 불에 타서 새카맣게 잿더미로 변해 버렸다.
그러자 아직 공격을 받지 않은 마을과 도시의 주민들은 들려오는 흉흉한 소문에 겁을 먹고 남쪽으로 피란을 떠나기 시작했다.
시간이 갈수록 점점 상황이 악화되자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마을 몇 곳을 불태우며 노략질을 하다가 청군이 물러갈 거라고 안이하게 생각하고 있던 산해관의 명군 지휘부는 크게 당혹스러워했다.
꽝!
“오늘까지 놈들한테 당한 도시와 마을이 서른 곳이 넘어. 이걸 어떻게 할 거야!”
산해관 총병인 오삼계가 앞에 있는 탁자를 주먹으로 세게 내려치며 호통치자 방 안에 모인 장수들은 잔뜩 긴장한 얼굴로 머리를 숙였다.
“임표!”
이름이 불린 장수 하나가 한 발짝 앞으로 나오면서 크게 대답했다.
“옛.”
“이대로 놔뒀다가는 자칫 산해관마저 흔들릴 수 있으니 자네가 정병 오만을 이끌고 가서 놈들을 만리장성 밖으로 몰아내도록 하게.”
오삼계의 측근으로 좌군장을 맡고 있는 임표는 지시가 떨어지자 바로 군례를 취하면서 머리를 살짝 숙였다.
“알겠습니다.”
피해를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 서둘러 출전 준비를 끝낸 임표는 그날 오후 오만의 군대를 이끌고 산해관을 출발했다.
이 소식은 산해관 주위를 감시하던 척후병을 통해 얼마 지나지 않아 청군 본진에 알려졌다.
“쥐새끼처럼 성안에 틀어박혀 안 나오나 했더니, 드디어 나타났군.”
청군보다 숫자가 많았지만 도르곤과 장수들은 긴장은커녕 오히려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동안 조무래기들을 상대하느라 지겨웠는데 이제 제대로 몸 좀 풀어 보겠군요.”
“하하하! 맞습니다.”
다들 패배는 생각도 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산해관 주둔 병력이 망조가 보이는 명나라 군대 중에서 그나마 정예라고 하지만 일반적으로 만주팔기로 대표되는 청군과 비교하면 전투력이 현저히 떨어진다는 게 정석이었다.
보통 팔기군 한 명을 상대하려면 명군 두 명이 필요했는데 그렇게 계산하면 오만도 부족한 숫자였다.
“언제 이곳에 도착하지?”
도르곤이 고개를 옆으로 돌리면서 묻자 왼쪽 뺨에 긴 자상이 있는 야골타 장군이 바로 대답했다.
“태반이 걸어서 이동하는 보병들이라 내일 오후나 돼야 모습을 보일 겁니다.”
“손님이 온다는데 그냥 앉아서 맞이할 수는 없지. 내일 아침 일찍 출전해 북동쪽에 위치한 벌판에서 전투를 벌일 테니 백기대를 준비시키게.”
“다른 부대는 부르지 않고 저희 본진만 출전하는 겁니까?”
장수 중 한 명이 묻자 호피를 씌운 의자에 앉은 도르곤은 얼굴 가득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쪽수만 많았지 제대로 싸울 줄도 모르는 오합지졸들을 상대하는데 괜히 호들갑 떨 필요가 뭐 있어. 본진에 있는 팔기들만으로 충분하니까 지시대로 실행해.”
아무리 그래도 이만이 채 안 되는 병력으로 무려 오만을 상대하겠다니 자신감이 넘치다 못해 무모해 보이기까지 했지만 지휘 천막에 모인 장수들까지 패배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태도를 보였다.
“옛!”
“제깟 놈들 오만이 아니라 십만이 와도 우리 상대가 안 되지요.”
이런 가운데 한쪽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소현세자와 도현은 청나라 장수들과 달리 살짝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드디어 제대로 된 전투를 구경하겠군요.”
“그래. 산해관에서 오는 병력은 지금까지 상대한 지방군이 아니라 제대로 훈련을 받고 실전까지 겪은 중앙군이니 쉽게 당하지는 않을 게다.”
소현세자의 이야기에 도현은 힐끗 상석에 있는 도르곤을 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아무리 자신이 있다고 해도 저렇게 상대를 얕봐도 될지 모르겠네요.”
“그렇긴 하지만 팔기군이 가진 전투력이라면 자신감을 가질 만하지 않겠느냐?”
“하긴…….”
도현은 이내 수긍하는 표정을 지으면서 머리를 끄덕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만리장성을 넘은 이후 아무리 허약한 지방군이라고 하지만 적게는 수백에서 많게는 수천의 명군을 상대하며 마치 양 떼 속에 뛰어든 늑대처럼 거침없이 연전연승을 거두는 팔기군의 모습에 도현은 청나라의 강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청나라가 공성전에 적응하고 산해관이라는 천혜의 요새가 없다면 명나라는 벌써 멸망하고 말았을 것이 분명했다.
“이번 전투는 우리도 함께 가야겠죠?”
“본진이 움직이는 거니까 아무래도 그렇겠지.”
대답하는 소현 세자의 얼굴에는 복잡한 감정이 그대로 드러났다.
어릴 때부터 전통적인 유교 교육을 받았고 본국 조선에서는 지금도 임진왜란 당시 도움을 준 일을 가지고 재조지은再造之恩이라며 명을 상국으로 섬기고 있는데, 세자인 자신은 청군과 함께 전장에 나와 있으니 착잡하고 머릿속으로 여러 가지 생각이 교차했다.
반면 현대를 살다 와서 그런 유교적인 사고방식에서 자유로운 도현은 다가오는 전투에서 팔기군이 어떤 모습을 보여 줄지 호기심과 기대에 찬 얼굴을 했다.
밤이 지나고 새로운 아침 해가 뜨자 일찍 음식을 지어먹은 팔기군 병사들은 도르곤이 지시한 대로 명군과 싸우기 위해 그동안 머물고 있던 장가구를 떠났다.
말을 타고 질서 정연하게 성문을 나선 팔기군은 곧장 북동쪽으로 방향을 잡고 이동했다.
소현세자와 도현도 갑옷을 갖춰 입고 도르곤이 있는 중군에 포함되어 함께 전장으로 움직였다.
곧 있을 전투에 대비해 말을 달리지 않고 천천히 움직였기에 청군은 정오가 돼서야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산이라고 하기에는 민망한 언덕이 듬성듬성 몇 개 있는 걸 제외하고 사방이 탁 트인 벌판에는 명군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과연 예친왕이 왜 여길 전장으로 결정했는지 알겠군요.”
도현의 말에 소현세자도 슬쩍 주위를 둘러보고는 머리를 끄덕였다.
“확실히 보병보다는 기병에 유리한 지형이구나.”
“그렇죠. 수성전에 익숙하지 않은 병사들을 데리고 성을 지키기보다는 이렇게 밖으로 나와 자신이 가진 장점을 최대한 살리는 것이 낫지요. 그에 비해 명군 장수는 기대와 달리 아둔한 자 같네요.”
“왜 그렇지?”
소현세자가 흥미로운 표정을 지으며 묻자 도현은 손에 들고 있던 채찍 끝으로 상대편 진영 뒤에 위치한 언덕을 가리켰다.
“장수라면 주변 지형지물을 최대한 이용해 전투를 아군에 유리하도록 만들어야 되는데 기병이 공략하기 힘든 언덕을 텅 비워 두고 아래에 진형을 세웠으니 최악의 판단 아니겠어요.”
도현이 지적한 대로 명군은 언덕 위가 아닌 벌판에 모여 있어서 기병 돌격에 아주 취약해 보였다.
“그런데 만약 저게 상대를 속이기 위한 거라면 청군이 큰 곤욕을 치르는 날이 될지도 모르겠네요.”
“그게 무슨 말이냐?”
“일부러 유리한 지형을 포기하고 자신들에게 불리한 평지에 진형을 갖췄다면 그걸 상쇄할 수 있는 뭔가가 있다는 뜻이니까요.”
“…….”
언제 병법을 이리 열심히 공부했는지 자신이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부분을 지적하는 도현의 모습에 소현세자는 새삼스러운 시선으로 동생을 바라봤다.
“곧 팔기군의 출전이 있으리라는 걸 예상했을 때부터 느낀 거지만 내가 그동안 너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었던 것 같구나.”
“그냥 심양에 와서 무료한 시간을 때우기 위해 이것저것 하다가 알게 된 지식을 늘어놓은 것뿐이에요.”
“녀석, 내 앞에서는 겸양 떨 필요 없다. 아무튼 힘든 볼모 생활을 네가 견디기 어려워할까 봐 걱정이 많았는데 이렇게 잘 커 가는 걸 보니 기분이 좋구나.”
그렇게 두 형제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청군도 전투 대형을 다 갖췄다.
말이 전투 대형이지 그냥 돌격하기 좋게 병력을 옆으로 길게 세우는 수준이었다.
그만큼 싸움에 자신이 있다는 소리였는데 실제로 말 위에 앉아 전방을 주시하는 팔기군 병사들의 얼굴에는 두려움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망토를 휘날리며 앞에 나와 있던 도르곤이 장검을 뽑아 들며 크게 소리쳤다.
“공격! 명군에 팔기군의 무서움을 보여 줘라.”
뿌우우웅!
뿔고둥 소리와 함께 도르곤의 공격 명령이 떨어지자 대기하고 있던 팔기군 병사들은 목이 터져라 함성을 지르며 타고 있는 말 엉덩이를 칼등으로 찰싹 때렸다.
“우와아아!”
만여 명에 달하는 기마가 일제히 땅을 박차고 앞으로 달려 나가는 광경은 정말 장관이었다.
거친 말발굽 소리가 사방을 진동시켰고 바닥을 타고 느껴지는 진동은 마치 지진이라도 난 것 같았다.
돌격해 들어가는 팔기군의 기세가 얼마나 강하고 거센지 정면에 있는 명군은 마치 풍랑을 만난 돛단배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바로 그때 명군 진영에서 변화가 생겼다.
진영 한가운데가 양옆으로 좍 갈라지더니 시커먼 무언가가 뿌연 먼지구름을 피워 올리면서 달려 나왔다.
처음에는 팔기군을 상대하기 위해 기병을 내보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뿌연 먼지구름 사이로 정체를 드러낸 상대는 바로 족히 백 마리는 넘어 보이는 황소 떼였는데 자세히 보니 꼬리에 불이 붙어 있었다.
그것 때문인지 황소 떼는 앞에 팔기군이 있는데도 피할 생각을 하지 않고 미친 듯이 달려왔다.
“저, 저게 뭐야?”
“이런 미친!”
말을 타고 달려가던 팔기군 병사들도 황소 떼를 발견하고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이미 탄력을 받아 한창 속도를 내고 있는 상태라 멈춰 서거나 방향을 돌리기도 어려웠다.
본진에서 느긋하게 상황을 지켜보던 도르곤과 휘하 장수들도 뜻밖의 상황에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며 허둥거렸다.
“소 떼라니?”
“젠장!”
시종일관 여유를 부리던 도르곤은 손에 든 지휘봉을 꽉 움켜쥐면서 부드득 이를 갈았다.
그리고 마침내 양쪽에서 달려오던 팔기군과 소 떼가 전장 한가운데서 만나 충돌했다.
퍼거걱!
음매!
“꾸에엑.”
“커헉.”
먼저 긴 창을 찔러 넣었지만 황소들은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날카로운 뿔과 육중한 몸통으로 팔기군 병사들이 탄 말을 들이받아 버렸다.
이히히힝.
“사, 살려 줘!”
“으아악!”
충격에 아래로 떨어지거나 말과 함께 넘어진 병사들은 그대로 뒤따라온 황소들에게 밟혀 피 떡이 됐다.
한순간 선두 열은 아수라장으로 변해 버렸다. 만주 벌판을 주름잡는 용맹스러운 팔기군이지만 병장기로 찌르고 베어도 쓰러지지 않고 더 미쳐 날뛰는 황소 떼 앞에서는 무력할 뿐이었다.
그동안 도저히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생각했던 팔기군이 비명을 내지르며 힘없이 무너지는 모습에 소현세자는 충격을 받은 얼굴로 입을 살짝 벌렸다.
“이럴 수가.”
“역시 숨겨 놓은 수가 있었네요.”
도현도 놀란 표정을 짓기는 했지만 사람들과 달리 황소 떼를 이용한 상대의 기발한 계책에 감탄한 것이었다.
그러다 퍼뜩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옆에 있던 소현세자를 돌아보며 다급히 말했다.
“형님, 적이 본진까지 밀고 들어올지 모르니 마음 단단히 먹으세요.”
“기발한 계책에 돌격이 저지되기는 했지만 아직 팔기군의 전력이 그대로 남아 있는데 설마 여기까지 위협을 받으려고?”
머뭇거리는 소현세자와 달리 도현은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빼 들며 만약의 사태에 대비했다.
“상대도 바보가 아닌 이상 달랑 소 떼만 준비했을 리가 없어요. 분명 또 뭔가 있을 겁니다.”
“으음.”
아니나 다를까, 도현의 이야기가 끝나기 무섭게 청군 본진 왼편에 위치한 언덕 뒤에서 뿌연 먼지구름이 피어오르더니 일단의 기마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두두두두!
“젠장! 좌측에 적이다!”
병사들의 외침에 고개를 옆으로 돌린 도르곤은 적 기마대를 보고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며 분노에 찬 목소리로 지시를 내렸다.
“당장 저 녀석들을 박살 내 버리지 않고 뭣들 하고 있어!”
“옛!”
근처에 있던 장수들은 도르곤의 지시에 서둘러 휘하 병력을 움직였다.
한편 정면에 위치한 명군 보병들도 때를 맞춰 움직이기 시작했는데 주위가 떠나가라 함성을 내지르면서 달려 나와 황소 떼에 막혀 주춤거리고 있는 팔기군을 덮쳤다.
기병이 말을 타고 자유롭게 달릴 때 보병은 그저 손쉬운 먹잇감에 불과하지만 지금처럼 발이 묶여 그 자리에 멈춰 있는 순간에는 입장이 완전히 달라진다.
두세 명씩 한꺼번에 달려들어 창을 내지르는 보병들의 공격에 크게 당황한 팔기군 병사들은 허둥대다가 부상을 입거나 말에서 끌려 내려와 죽임 당했다.
채챙! 챙! 챙!
“죽여!”
“으악.”
“큭.”
보통 이쯤 되면 전열이 벌써 무너지고도 남았지만 거친 만주 벌판을 호령하는 전사답게 팔기군 병사들은 곧장 정신을 차리고는 적과 맞서 싸웠다.
그러자 예상치 못한 작전에 일격을 당하고 수적으로도 밀렸지만 팔기군 병사들은 개개인의 뛰어난 전투력으로 싸움을 대등하게 이끌었다.
이렇게 되자 전투는 양쪽 병력이 한데 뒤엉켜서 서로 죽고 죽이는 치열한 혼전 양상으로 빠져들었다.
대부분의 병력이 적 보병과의 싸움에 발이 묶이자 도르곤이 있는 본진은 천 명이 겨우 넘는 인원만으로 측면을 기습 공격한 명군 기병대와 전투를 벌일 수밖에 없었다.
수많은 기병들이 본진으로 달려들자 황급히 주위를 둘러본 도현은 잔뜩 긴장한 채 말 위에 앉아 있는 소현세자 옆으로 다가서며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지휘관인 예친왕 근처에 있으면 호위병들의 보호를 받을 수 있을 테니 그쪽으로 가죠.”
“그, 그래.”
도현의 말에 소현 세자와 일행은 고삐를 당겨 도르곤이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나름 괜찮은 생각이었지만 상대가 팔기군의 전의를 꺾기 위해 지휘부를 집중 공격하면서 도현은 자신의 판단을 크게 후회했다.
“적장을 죽여라!”
동료들이 본진을 흐트러뜨리는 동안 백 명 정도 되는 명군 결사대가 도르곤과 청군 장수를 노리고 필사적으로 달려들자 호위 병력이 앞을 막아서면서 주위가 금방 아수라장으로 변해 버렸다.
호위들은 검을 이리저리 휘두르며 상대의 접근을 저지했고 명군 결사대는 창검에 찔려 피를 흘리면서도 말을 멈추지 않았다.
시뻘건 피가 허공에 뿌려지고 비명이 사방에 울려 퍼지는 가운데 도현 일행도 그 속에 휘말려 생사를 건 싸움을 벌여야 했다.
앞에 선 김덕술이 검을 내리그어 고함을 지르며 달려드는 명군 병사 한 명을 쓰러뜨리는 걸 본 도현은 자기도 모르게 욕설을 내뱉으면서 안장 옆에 묶어 둔 활을 빼 들었다.
검도 쓸 줄 알지만 배운 기간이 짧고 아직은 근력이 약해 직접 상대와 부딪치는 건 어려웠기에 원거리에서 적을 공격할 수 있는 활이 지금 도현의 상태에서는 가장 알맞은 무기였다.
“제기랄!”
배운 대로 재빨리 화살을 먹이고 시위를 당긴 도현은 제일 가까이에 있는 목표를 찾아 활을 쐈다.
쉬이익! 퍽!
“크악.”
바람 가르는 소리를 내며 일직선으로 날아간 화살은 말을 타고 김덕술에게 곤봉을 휘두르려던 적병의 가슴에 정확히 명중했다.
적병은 피를 뿌리며 말에서 굴러떨어졌고 흠칫 놀라 뒤를 돌아본 김덕술은 활을 들고 있는 도현을 발견하고 약간 놀란 표정을 짓다가 이내 고마움의 표시로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첫 살인이었지만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는 생각에 도현은 두려움도 모르고 정신없이 접근하는 적들을 향해 화살을 쏘며 내금위 위사들을 지원했다.
지축을 울리는 말발굽 소리와 거친 말들의 숨소리 그리고 양쪽 병사들의 처절한 비명이 도현의 귓가를 마구 때렸다.
얼마쯤 시간이 지났을까. 기계적으로 화살통에 손을 가져가던 도현은 어느새 그 많던 화살을 다 쓰고 달랑 세 개밖에 남지 않은 걸 확인하고 얼굴을 구겼다.
“이런!”
아직 사방에 적들이 가득한데 무기가 다 떨어졌으니 이런 낭패가 없었다.
당황해서 주위를 살피던 도현의 눈에 명군 결사대가 호위 병력을 뚫어 내고 왼편에 있는 도르곤과 청군 장수들을 덮치는 장면이 들어왔다. 자칫 지휘부가 이대로 전멸당할 수도 있는 아주 위험한 상황이었다.
초원의 전사답게 도르곤과 청군 장수들은 도망치지 않고 검을 뽑아 들며 용감히 맞서 싸웠지만 수적으로 너무 불리했다. 특히 화려한 갑옷을 입은 도르곤에게 적들의 공격이 집중됐다.
“저놈이 지휘관이다!”
평생을 전장에서 보낸 도르곤의 무위도 만만치 않았는데 그가 휘두른 장검에 덤벼들던 적병 두 명이 가슴과 목이 베여 쓰러졌다.
“버러지 같은 놈들! 다 덤벼라!”
슈각!
하지만 도르곤을 노리는 적들은 수없이 많았고 상대의 협공에 시간이 갈수록 여기저기 상처가 생겨났다.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적병 중 한 명이 도르곤이 타고 있던 말에 검을 찔러 넣었다.
이히히힝!
그러자 말은 가죽이 찢어지는 고통에 구슬픈 울음소리를 내며 마구 날뛰었고 도르곤이 고삐를 붙잡고 진정시켜 보려고 했지만 중심을 잃고 낙마하고 말았다.
“으윽.”
충격이 상당했지만 곧장 몸을 일으켜 세운 도르곤은 검을 고쳐 잡으며 수비 자세를 취했다.
그런 도르곤을 향해 적들이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근처에 장수와 호위병 몇몇이 남아 있었지만 저마다 적과 맞서 싸우느라 도르곤의 위기를 보고도 쉽사리 도우러 갈 수 없었다.
도르곤은 자신을 노리고 찔러 오는 칼날을 보고 슬쩍 몸을 옆으로 돌려 피하고는 말을 타고 지나치는 적병의 옆구리를 베었다.
서걱!
“아악.”
하지만 한숨 돌릴 틈도 없이 어느새 바로 앞까지 접근한 적병 세 명이 있는 힘껏 검을 내려쳤다.
“하얍!”
그러자 도르곤은 본능적으로 검을 피해 상체를 숙이며 바닥에 떨어져 있는 원형 방패를 집어 들어 공격을 막았다.
채챙! 챙!
첫 번째, 두 번째는 잘 방어해 냈지만 마지막 제일 왼편에 있던 적이 휘두른 검이 어깨를 훑고 지나갔다.
“크흑.”
답답한 신음을 토해 낸 도르곤이 왼쪽 어깨를 반대편 손으로 부여잡고 뒤로 넘어지자 공격에 성공한 적이 그대로 짓밟아 버리려고 고삐를 움직였다.
울음소리를 내며 앞발을 치켜든 말이 다리를 내리면 밑에 쓰러진 도르곤은 피 떡이 되어 숨이 끊어질 절체절명의 위기.
최후를 예감하고 도르곤이 두 눈을 질끈 감는 순간 바람을 가르는 날카로운 파공성이 들리며 어디선가 날아온 화살이 적이 탄 말의 목덜미에 꽂혔다.
쉬이익, 퍽!
그리고 연이어 날아온 화살에 그를 죽이려던 적병들이 가슴과 목이 꿰뚫려 목숨을 잃었다.
뜻밖의 상황에 놀란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던 도르곤의 눈에 이쪽을 향해 활을 들고 있는 도현의 모습이 들어왔다.
도르곤이 위기에 처한 걸 발견하고는 순간적으로 그의 신변에 이상이 생긴다면 팔기군이 더 큰 혼란에 빠져 자신과 일행이 위험해질 거라는 판단에 도현이 화살을 쏜 것이다.
호위병과 장수들이 상대편의 방해를 뿌리치고 달려와 도르곤을 둘러쌌고 이내 혼란을 추스른 팔기군의 거센 반격에 초반 기세가 한풀 꺾인 결사대는 급격히 힘을 잃고 지리멸렬했다.
뎅! 뎅!
후퇴를 알리는 징소리가 울리자 명군 병사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앞을 다퉈 도망쳤다.
임시로 깨끗한 천을 써서 상처 부위를 묶고 말 위에 올라타 병사들을 지휘하던 도르곤은 그걸 보고 즉각 추격 명령을 내렸다.
“놈들이 달아난다. 한 명도 살려 보내지 말고 다 죽여라!”
원래 적이 후퇴할 때 가장 큰 피해를 입힐 수 있고 무엇보다 상대편의 계략에 당해 자칫하면 목숨을 잃어버릴 뻔했다는 분노와 치욕감이 도르곤을 더 호전적으로 만들었다.
팔기군은 말을 타고 도망치는 적을 뒤쫓아 가며 마치 사냥이라도 하듯이 눈에 띄는 족족 창과 검으로 상대를 주살했다.
아까 당한 걸 복수라도 하듯 팔기군은 손 속에 인정사정이 없었고 순식간에 청군 병사들이 흘린 피가 드넓은 전장을 붉게 물들였다.
“휴우, 이제 다 끝났군.”
팔기군이 적을 몰아붙이는 걸 보고 도현이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쉴 때 김덕술이 가까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마마, 괜찮으십니까?”
그러면서 혹시나 다친 곳이 있는지 유심히 살피는 김덕술을 보며 도현은 살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
“보다시피 멀쩡해. 나보다 자네가 먼저 의원을 찾아가 봐야겠는데.”
그의 말대로 뒤에서 활만 쏴서 비교적 깨끗한 도현의 복장과 달리 직접 상대와 몸으로 부딪치며 치열한 접전을 벌인 김덕술은 입고 있는 갑옷 여기저기에 누구 건지 모를 피가 잔뜩 묻어 있고 왼팔이 길게 찢어져 있었다.
하지만 김덕술은 별거 아니라는 듯이 태연하게 말했다.
“이 정도 상처는 그냥 헝겊으로 묶어 놓고 이삼일 지나면 낫습니다.”
“그러다 덧나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아무 소리 하지 말고 의원한테 가서 치료를 받아. 내가 나중에 확인할 거야.”
자신을 아끼고 생각해 주는 도현의 말에 김덕술은 내심 감동을 받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겠습니다.”
도현은 살짝 입가에 미소를 짓고는 품속에서 비단 손수건을 꺼내 상처 부위를 손수 감아 줬다.
“이 먼 타국까지 와서 볼모 생활을 하는 것도 억울한데 목숨까지 잃어서야 되겠어? 한양에서 애타게 기다릴 가족들을 위해서라도 몸 건강히 돌아가야지.”
“……예.”
풀어지지 않도록 단단히 매듭을 묶어 준 도현이 그의 어깨를 가볍게 툭 쳤다.
“팔기군이 전장 정리를 할 동안 다른 일행들과 함께 쉬자고.”
근처에 있던 소현세자와 합류한 도현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호위들이 원진을 구성하고 주위를 경계하는 가운데 휴식을 취했다.
다행히 전사자는 없었지만 생명이 위독한 중상자가 두 명이나 있어 소현세자와 도현의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다.
무예를 배운다고 설치면서 정이 든 위사들이 이대로 죽는 걸 그냥 지켜만 볼 수 없었던 도현은 군영 내에 있던 종군 의원 한 명을 억지로 끌고 와서 중상자들을 치료하도록 했다.
무자비하게 계속된 소탕전은 늦은 저녁이 되어서야 끝났다. 초반 계략이 성공을 거둬 팔기군을 위험에 빠뜨렸지만 지휘부를 무력화시키고 혼란을 극대화하는 것에 실패하자 결국 전투력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명군은 무려 이만이 넘는 사상자를 남겨 두고 허둥지둥 산해관 쪽으로 달아나는 대패를 당하고 말았다.
그나마 중간에 해가 져서 이 정도였지 기병의 뛰어난 기동성과 명군 대부분이 보병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걸 생각하면 자칫 전장을 빠져나가지 못하고 모두 여기서 전멸당할 뻔했다.
아무튼 패잔병들을 상대로 분풀이를 실컷 한 팔기군은 시신이 널려 있는 곳에서 약간 떨어진 벌판에 숙영지를 세웠다.
병사들이 불을 피우고 저녁 준비를 하는 동안 도현은 그들에게서 떨어져 나와 근처에 있는 바위에 툭 걸터앉았다.
해가 뉘엿하게 질 때라 서쪽 하늘은 벌써 반 이상 붉게 물들었고, 멀리서 까마귀의 울음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허공을 높게 선회하던 까마귀 무리가 차례차례 벌판에 내려앉더니 마치 잘 차려진 만찬을 음미하듯 사방에 널브러진 시체들 곁을 떠나질 않았다.
한창 전투를 치르고 있을 때는 미처 느끼지 못했지만 흥분이 가라앉고 침착함을 되찾자 공기 중에 떠다니는 썩은 내를 느낄 수 있었다.
아직 한여름이 아니라곤 하지만 실온에 방치된 사람의 시체는 생각 외로 빨리 부패한다.
원래대로라면 전염병이 발생하는 걸 막기 위해 시체를 한데 모아 태워 버려야 했지만 어차피 점령하고 다스릴 땅이 아니었기에 팔기군은 그냥 이렇게 방치해 뒀다.
그나마 아군의 시체는 일단 보이는 대로 수거해서 나름대로 합동 장례 비슷한 것을 치르긴 했다.
하지만 똑같은 사람인데 누구는 유족에게 자신의 죽음을 전할 유품이라도 건진 반면 누구는 이렇게 쓸쓸히 벌판에서 까마귀에게 살이나 뜯어 먹히는 신세가 되었으니 참으로 씁쓸한 장면이 아닐 수 없었다.
도현이 그런 생각을 하며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는데 등 뒤, 숙영지 쪽에서 병사들이 웃음을 터트리는 소리가 들렸다.
너무나도 극명한 생과 사의 대비에 저도 모르게 울적한 기분이 되어 있는 도현의 어깨를 누군가 가만히 두드렸다.
“형님.”
“피곤할 텐데 쉬지 않고 왜 이런 데 나와 있는 거냐.”
소현세자가 희미한 미소를 띠고 도현의 옆에 나란히 앉았다.
“그냥요. 이상하게 진정이 되질 않네요.”
소현세자가 위로하듯 도현의 손등을 톡톡 두드렸다.
“그럴 만도 하지. 우리 둘 다 전쟁터에 직접 나와서 싸워 본 건 난생처음 아니냐.”
“형님은 아무렇지도 않으세요?”
“설마.”
그는 낮게 웃으며 자조하는 말투로 말했다.
“나라고 어찌 무섭지 않았겠느냐. 봐라, 지금도 손이 뻣뻣하게 굳어서 잘 펴지질 않는단다.”
그렇게 말하며 도현의 눈앞에 쫙 펴서 보여 주는 소현세자의 손가락은 하루 종일 책만 읽어 마치 여인네의 손처럼 하얗고 가늘었다.
“하지만 너와 나는 조선의 왕족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나는 장차 보위를 물려받을 세자라는 신분인 만큼 저들에게 절대 약한 모습을 보여 줘선 안 되지.”
마냥 유약하고 전형적인 선비인 줄 알았던 소현세자가 의외로 심지 굳은 모습을 보여 주자 도현은 새삼 그를 다시 평가하며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감탄하는 눈길로 오해한 듯 소현세자가 쑥스러운 얼굴로 어깨를 으쓱거렸다.
“왜 이래. 아까 예친왕 앞에서는 나보다 더 대담하게 의견도 내놓고 할 말 못 할 말 다 하더니, 이제 와서 그런 눈빛으로 쳐다보지 마라.”
“하하. 저도 그때는 제가 무슨 생각이었는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잘됐어. 그자의 태도를 보아하니 네가 맘에 든 모양이더라.”
아무래도 타국에 볼모로 잡혀 있는 신분이니 적보다는 아군이 많은 편이 더 이득이다.
소현세자 역시 그 이치를 아는지라 도현이 청나라 황실에서도 중요한 인물의 호감을 샀다는 걸 다행으로 여겼다.
“그래도 방심하지 말고 계속 주의해야 한다. 괜히 튀게 행동해서 주목받는 것도 그리 좋진 않아.”
“네, 알고 있어요.”
“그래.”
소현세자는 바위에서 일어나다가 추운 듯 살짝 몸을 떨었다.
“밤이 되니 제법 쌀쌀하구나. 넌 계속 여기 있을 거냐?”
“조금만 더 있다가 돌아갈게요.”
전투 중에 어쩔 수 없었다고 하지만 도현이 활로 적을 죽여 오늘 첫 살인을 경험했다는 걸 알고 있는 소현세자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는 그가 복잡한 마음을 조용히 정리할 시간을 줬다.
“그래라. 바람을 쐬는 것도 좋지만 감기 걸리지 않게 조심하고.”
“네에.”
도현이 가볍게 손을 들어 소현세자를 배웅하려고 할 때, 숙영지 쪽에서 위사 한 명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저하.”
두 사람이 고개를 돌리자 위사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으며 입을 열었다.
“예친왕이 두 분을 급히 찾고 있습니다.”
“무슨 일로 우릴 찾는 거지?”
“그건 저도 모르겠습니다.”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소현세자가 고개를 갸웃거릴 때 옆에 있던 도현이 엉덩이를 털고 바위에서 일어났다.
“가 보면 알겠죠.”
“하긴.”
피식 미소를 지은 소현세자는 도현과 함께 숙영지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숙영지 정중앙에 세워진 예친왕의 대형 파오에는 비록 승리를 거뒀지만 상대편의 계략에 빠져 큰 피해를 입었기에 평소와 달리 분위기가 아주 무거웠다.
안에는 천인장 이상 청군 장수들이 전부 모여 있었는데 도현과 소현세자가 휘장을 걷고 들어가자 시선이 집중됐다.
“전하,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왔습니다.”
심복인 야골타의 말에, 상체를 벗은 채 호피 가죽을 씌운 의자에 앉아 의원에게 부상당한 왼쪽 어깨를 치료받고 있던 도르곤이 머리를 들었다.
“이리 가까이 오게.”
“…….”
평소와 달리 살갑게 대하는 도르곤의 태도에 두 사람은 살짝 어리둥절한 얼굴로 몇 발자국 앞으로 다가갔다.
“아까는 전투 중이라 미처 이야기를 못 했는데 적병들한테 둘러싸여 위험할 때 활을 쏴 줘서 고맙네.”
도르곤의 목숨을 구해 줬다는 걸 깜빡 잊고 있던 도현은 상대가 하는 말에 그를 왜 불렀는지 알아차리고는 긴장한 마음을 약간 풀며 대답했다.
“그런 상황이라면 저 말고 다른 사람이라도 응당 그렇게 행동했을 겁니다.”
“설사 그렇다고 해도 내가 자네한테 목숨을 빚졌다는 건 달라지지 않는 사실이야. 우리에게는 은혜와 원한은 두 배로 갚는 전통이 있지. 언제든 힘든 일이 있으면 날 찾아오도록 하게.”
일부러 의도한 일은 아니었지만 청 황실에서도 알아주는 실력자인 도르곤의 환심을 얻은 건 큰 행운이었다.
도현은 바로 조선의 왕자로서 체통이 깎이지 않는 범위에서 살짝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감사해야 될 쪽은 나지. 그런 의미에서 내가 술 한 잔 따라 주겠네.”
옆에 있던 하인이 건네주는 가죽 주머니를 받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난 도르곤은 도현에게 다가가서는 대접 같은 잔에다가 마유주를 한가득 따라 줬다.
“자! 들게.”
시간을 거슬러 팔자에도 없던 봉림대군 노릇을 하느라 얼떨결에 금주를 해야 했던 그는 며칠 전 먹었던 마유주의 맛을 떠올리며 자신도 모르게 입맛을 다셨다.
“그럼.”
꿀꺽꿀꺽!
목울대를 움직이며 잔에 든 술을 단번에 다 들이켠 도현은 주당처럼 카아 하고 숨을 크게 내뱉었다.
그걸 보며 소현세자는 혹시나 동생이 실수라도 하지 않을까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쳐다봤고 도르곤은 도현의 행동이 마음에 드는지 파오 안이 떠나가라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자네가 술을 마시는 걸 보면 화통해서 아주 마음에 든단 말이야.”
그러면서 스스럼없이 어깨를 두드린 도르곤은 도현을 옆으로 데려와 앉혔다.
동생 덕분에 소현 세자도 좋은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그런데 활을 아주 능숙하게 다루던데 언제부터 배웠나?”
“어렸을 때부터 심신 수련을 위해 익힌 겁니다.”
“취미 삼아 배운 실력이 아니던데.”
그러자 도현은 상대가 조선을 우습게 보지 못하도록 살짝 뻥을 쳤다.
“옛 고구려의 기상을 이어받아 유교를 배우는 선비들도 말 타기와 활쏘기를 즐겨 다들 저 정도는 할 수 있습니다. 여기 계신 형님도 저보다 실력이 좋으시죠.”
도현이 말한 대로 왕실은 물론이고 일반 사대부도 활쏘기를 많이 했지만 기본적으로 문文을 숭상하고 무武는 천시하는 경향이 컸기에 본격적으로 활을 익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유흥처럼 즐기는 것이다.
“호오, 그건 몰랐구만. 언제 시간 나면 노루 사냥을 함께 나가 두 사람과 실력을 겨뤄 보고 싶군.”
눈치 빠르게 도현의 의도를 알아차린 소현세자는 두근거리는 속마음과 다르게 태연한 얼굴로 맞장구를 쳤다.
“심양 관저에서만 지내느라 갑갑했는데 초대해 주시면 저희야 감사하지요.”
“저도 기대가 됩니다.”
“좋아. 나중에 꼭 함께 즐기도록 하세.”
그 뒤로 한참 동안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도르곤과 이야기를 나눈 도현은 고마움의 표시로 순금으로 만들어진 단검과 명마名馬 한 마리를 선물로 받고 파오를 나왔다.
자신들이 머무는 파오 근처에 왔을 때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던 소현세자가 낮게 한숨을 토해 내며 말했다.
“후우, 널 정말 어쩌면 좋으냐.”
“그게 무슨 말입니까, 형님?”
그러자 소현세자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을 하고 있는 도현을 오히려 이상한 듯 쳐다보았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도르곤과 덜컥 그런 약속을 잡은 거냐.”
“뭐 어때서요. 형님이나 저나 어느 정도 활을 쏠 줄 알고 한양에 있을 때 아바마마와 사냥을 나간 적이 있지 않습니까.”
“그야 그렇지만 그건 말 그대로 쏘기만 할 줄 아는 수준이지. 전쟁터에서 잔뼈가 굵은 도르곤의 눈에는 어린애 장난으로밖에 보이지 않을 거다.”
그는 답답하다는 듯이 고개를 가로젓고 덧붙여 말했다.
“네가 무슨 의도로 그런 말을 했는지는 알겠다만, 허세로 거짓말을 한 게 들통 나면 그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어차피 심양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전투 중에 입은 부상 때문에 당장 사냥을 하러 가자고 말을 꺼내진 못할 겁니다. 게다가 그도 꽤 바쁜 몸이고 하니, 어느 정도 몸이 낫고 여유가 생기려면 최소 한 달은 걸리겠지요.”
도현은 이미 다 생각해 놨다는 얼굴로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그러니까 그사이 위사들에게라도 부탁해 활 솜씨를 연마하면 어떻게든 되지 않겠어요.”
“너는 정말…….”
소현세자는 그런 도현을 못 말리겠다는 듯 한번 쳐다보고는 이내 가볍게 웃으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그래, 이미 엎질러진 물인데 더 이상 뭘 어찌하겠느냐. 네 맘대로 해라.”
그렇게 말한 소현세자가 자신들에게 배정된 파오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 도현도 얼른 뒤를 따라갔다.
비록 승리는 거뒀지만 상당한 피해를 입은 데다 지휘관인 도르곤까지 부상을 당한 팔기군은 추가로 근처 도시와 마을 열 곳을 노략질해 분풀이를 하고는 만리장성을 넘어 심양으로 철수했다.
돌아가는 팔기군은 엄청난 재물을 빼앗아 수레마다 가득 실었고 노예로 팔기 위해 삼만 명이 넘는 주민을 강제로 끌고 갔다.
어찌 됐든 패배를 당했어도 명군이 원하는 대로 팔기군을 만리장성 밖으로 내보내는 데 성공했지만 장가구를 포함한 주변 지역은 한동안 정상적인 생활이 어려울 만큼 말 그대로 황폐해져 버렸다.
이런 걸 보면 지금처럼 혼란스러운 시기에 가장 고통받는 사람은 권력자나 부자가 아닌 바로 일반 백성들이었다.
전리품과 노예로 잡은 사람들을 끌고 가느라 팔기군은 왔을 때보다 보름이나 더 걸려서 심양에 도착했다.
명군은 팔기군이 만리장성을 다시 넘어갈 때까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는데 빼앗긴 재물과 주민들을 되찾기보다는 행여나 상대가 말 머리를 돌려 공격을 계속할까 봐 겁내며 철수 행렬을 그냥 내버려 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