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수
심양 관저는 청나라 황궁 근처에 위치했는데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쓰는 건물을 넓은 회랑을 사이에 두고 동서로 분리하여 전체적으로 상당히 크고 넓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거느리는 식솔과 궁인들 그리고 함께 따라온 여러 관리까지 물경 이백여 명이 넘어가는 대인원이 모두 머물기에는 모자란 감이 있었다.
그래서 일부는 관저 밖에 별도의 거처를 마련해야 됐다.
관저에 남아 있던 사람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전장에서 돌아온 지 보름쯤 됐을 때 오늘도 어김없이 위사들과 연무장에서 무예를 수련한 도현은 소현세자의 부름을 받고 세자의 거처가 있는 동쪽 건물로 갔다.
“저하, 봉림대군 왔습니다.”
“들라 하라.”
방 앞에 서 있던 궁녀들이 열어 주는 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간 도현은 소현세자가 관복을 차려입은 관리 다섯 명과 함께 있는 걸 보며 왕실 법도에 맞게 예를 갖췄다.
“부르셨습니까, 형님.”
“그래. 한양에서 시강원 학사들이 새로 와서 인사를 시켜 주려고 불렀다.”
“아, 예.”
시강원은 조선시대 세자의 교육을 담당하는 관청으로, 경서와 사서를 강의하여 유교적 가르침을 익히고 배운다.
치욕적인 항복으로 인해 세자가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 있으니 어쩔 수 없이 시강원도 한양이 아닌 심양에 차려졌다.
최근 들어 무예 수련을 한다고 자주 빠졌지만 도현도 소현세자와 함께 시강원 수업을 받고 있었다.
“앞으로 일 년 동안 배움을 받게 될 선생들이니 미리 인사를 나누도록 해라.”
“네.”
소현세자의 말에 관리들과 도현은 서로 인사를 나눴다.
“대군마마를 뵙습니다.”
“이 먼 곳까지 오느라 고생이 많았소. 부족하지만 열심히 할 테니 많은 가르침을 주시오.”
“최선을 다하겠사옵니다.”
그리고 한 명씩 이름을 말했는데 도현은 그중 아주 익숙한 이름이 나오자 고개를 갸웃거리며 기억을 더듬다가 뭔가를 떠올리고는 눈을 크게 떴다.
“지금 김종일이라고 했소?”
도현의 물음에 점잖게 생긴 중년인이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그렇사옵니다.”
“혹시 고향이 경상도 안강 아니오?”
“……맞습니다.”
“으음.”
김종일은 유명하지는 않지만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에 휘말려 아깝게 목숨을 잃은 인물이다. 신시제와 정경제, 장현광 같은 남인계 안사들에게 사사하고 성균관 전적을 거쳐 시강원 사서로 임명되어 심양 관저로 온 그는 역관인 정명수의 부정을 고발했다가 오히려 누명을 뒤집어쓰고 먼 타국 땅에서 억울하게 죽임 당했다.
“왜 그러는 거냐?”
소현세자가 의아한 시선을 보내며 묻자 도현은 별거 아니라는 듯이 손을 살짝 내저으면서 말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김 사서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것 같구나?”
재차 질문을 하자 도현은 생각나는 대로 대충 이야기를 둘러댔다.
“대궐에 있을 때 학식이 뛰어나고 성격이 올곧은 인물이 성균관에 새로 들어왔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오호, 그렇구나.”
당시 용골대 같은 청나라 권력자들을 등에 업고 온갖 비리를 저지르던 정명수를 겁 없이 고발할 정도면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성격이 얼마나 대쪽 같은지 알 수 있고 과거도 장원급제를 했으니 도현의 이야기가 거짓은 아니었다.
동생이 너무 무예 수련에만 치중하고 한문은 등한시하는 것 같아 내심 걱정이던 소현세자는 새로 온 시강원 사서에게 도현이 관심을 보이자 마침 잘됐다고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그럼 봉림대군의 공부는 김 사서가 맡으면 되겠구나.”
“예?”
눈을 동그랗게 뜬 도현이 이건 또 무슨 소리냐는 표정으로 쳐다보자 소현세자는 짐짓 딴청을 피우며 말을 이었다.
“무예도 좋지만 왕실 가족으로서 옛 성현들의 말씀을 배우고 심신을 수양하는 것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지 않겠느냐. 김 사서, 봉림대군을 잘 부탁하네.”
“미력하나마 최선을 다하겠사옵니다, 저하.”
“…….”
뭐라고 말도 하기 전에 얼렁뚱땅 소현세자가 김종일을 개인 선생으로 붙이는 걸 기정사실로 만들어 버리자 도현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괜히 아는 척을 했다가 앞으로 꼼짝없이 머리 아픈 유교 경전을 배울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렸다.
“끄으응.”
낮게 앓는 소리를 내며 살짝 미간을 찌푸린 도현을 보며 소현세자는 입꼬리를 위로 말아 올렸다.
그러고는 도현이 싫다고 하기 전에 대화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아바마마께서는 잘 지내시오?”
소현세자의 물음에 새로 온 관리들 중 가장 직급이 높은 찬선(정삼품)이 고개를 들며 대답했다.
“근래 들어 많이 좋아지셨지만 처음 세자 저하와 대군마마께서 심양으로 떠나셨을 때는 두 분 걱정에 끼니를 거를 때가 많으셨습니다.”
“저런.”
시간이 꽤 흘렀지만 아직도 남한산성에서 치욕스러운 일을 당하고 실의에 빠져 있던 아버지의 모습이 머릿속에 선명히 남아 있는 소현세자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짧게 탄식을 내뱉었다.
“그러다 옥체라도 상하면 어쩌시려고…….”
“다행히 지금은 안정을 찾으셨습니다.”
“그것참 반가운 소식이구려. 한시라도 빨리 한양으로 돌아가 아바마마를 보필해야 되는데 이렇게 만리타향에 떨어져 문안 인사도 제대로 못 드리고 있으니 이 불효를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소이다.”
“송구스럽사옵니다, 저하.”
유교를 중시하는 조선시대에서 불효는 큰 죄였기에 소현세자의 말을 들은 신하들은 바닥에 몸을 엎드리며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한편 옆에서 소현세자와 신하들이 하는 걸 다 보고 있던 도현은 내색하지 않았지만 속으로 한심하다는 듯이 한숨을 푹 내쉬고 있었다.
물론 효孝도 중요하지만 수십만 명의 백성들이 억울하게 끌려와 타향에서 온갖 수모를 겪으며 노예 생활을 하고 있는데 고작 한양에 있는 인조에게 아침 인사를 못 하고 밥 몇 끼 안 먹은 걸 가지고 이 난리를 피우다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사고 관념이 다른 현대에서 왔기 때문인지 몰라도 도현은 한 국가의 벼슬아치나 왕세자라면 당장 지옥 같은 고통을 겪고 있는 백성들을 귀향시킬 방법이 없는지 머리를 싸매고 고민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물론 청국에 끌려온 사람들을 돌려받으려는 노력을 아예 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그것도 대부분 몸값을 낼 수 있는 양반이나 일부 부유한 장사치들에게 해당되는 것이지 일반 백성들은 논의조차 되지 않았다.
특히나 유교적인 정조 관념에 따라 타의에 의해 오랑캐 사내들에게 몸을 버린 여인들의 경우에는 양반집 출신이라고 해도 더럽다고 여기며 아예 없는 사람 취급을 했다.
백성과 여인들이 그런 고초를 당하는 건 어찌 보면 다 지배층인 양반들이 무武를 천시하며 국제 정세의 변화를 따라가지 않고 고집스럽게 명明국만 쳐다보고 있다가 치욕을 당한 것인데도 공자 왈 맹자 왈이나 외우며 이들을 돌볼 생각을 하지 않으니 정말 한심스러울 뿐이었다.
그런 씁쓸한 기분을 가지고 소현세자의 거처를 나온 도현은 때마침 뭐가 그렇게 좋은지 둘이 손을 꼭 잡고 싱글벙글 웃으며 걸어가는 박 씨 남매를 발견하고는 걸음을 멈췄다.
“오랜만이구나.”
도현의 말에 남매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냉큼 앞으로 달려와 꾸벅 허리를 숙였다.
“대군마마를 뵙습니다.”
전장에 나가 있는 동안 칠현이 교육을 시켰는지 제법 궁궐 예법에 맞춰 인사를 하는 모습이 귀여웠던 도현은 피식 미소 지었다.
“그래, 관저에서 지내는 데 불편한 건 없어?”
“예. 신경 써 주신 덕분에 편안히 잘 지내고 있습니다.”
확실히 잘 먹어서 그런지 볼 살이 통통하게 올라 있고 표정도 많이 밝아 보였다.
“이제 너희들도 앞으로 뭘 하고 살 건지 생각해 볼 때가 된 것 같은데, 하고 싶은 일이 있느냐?”
그냥 가볍게 던진 말이었지만 자신들이 관저에서 나가야 될지도 모른다고 오해한 남매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뭐든지 시키시는 건 다 열심히 할 테니까 제발 나가라는 말씀만 하지 마세요.”
“훌쩍. 저도 밥 조금만 먹을게요.”
예상치 못한 반응에 도현은 약간 당황한 얼굴로 황급히 입을 열었다.
“이런, 내 말을 오해한 것 같구나. 절대 너희들을 쫓아내는 일은 없을 테니 안심해도 돼.”
“정말이세요?”
“그럼. 이럴 게 아니라 어디 앉아서 이야기할까?”
근처에 있는 작은 정자로 자리를 옮긴 도현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남매를 달랬다.
“다시 말하지만 너희 남매를 내보내려는 것이 아니라 그저 하고 싶은 일이 있는지 궁금해서 물어본 거야.”
“하고 싶은 일요?”
이제 조금 진정된 것처럼 보였지만 소연이 아직 물기가 남아 있는 얼굴로 묻자 도현은 마치 자신이 나쁜 놈처럼 느껴져서 괜히 뒤통수를 긁적였다.
“그래. 소연이 너 같은 경우에는 이대로 궁녀가 되는 것도 나쁠 게 없지만 챙겨야 될 동생이 있고 또 네 미래를 내 마음대로 결정해서는 안 될 것 같아서 말이야.”
돈을 넉넉하게 받지는 않아도 좋은 옷을 입고 매끼 배부르게 먹을 수 있는 궁녀 자리라면 아주 감지덕지지만 소연은 동생을 흘낏 쳐다보고는 바로 고개를 흔들었다.
“동생하고 헤어질 수는 없어요.”
“그렇겠지.”
함께 궁인이 되려면 동생인 기철이 남근을 자르고 내시가 돼야 하는데 그건 아직 어린 남자아이에게 너무 잔인한 짓이었기에 도현은 아예 이야기도 꺼내지 않았다.
남매를 잠시 바라보던 도현은 차분하게 말을 했다.
“그럼 내 식솔이 되어 사는 건 어떠하냐?”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말 그대로 나하고 함께 살자는 거야. 궁인보다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명색이 왕자이니 다른 데서 일하는 것보다는 나을 거다.”
“저희를 하인으로 써 주신다는 건가요?”
소연이 조심스럽게 묻자 도현은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
제대로 입고 먹지도 못하고 거의 매일 맞으면서 지내야 했던 노예 시절과 비교해 지금은 천국이나 마찬가지였고 무엇보다 동생과 함께 지낼 수 있다는 생각에 소연은 간절한 목소리로 얼른 대답했다.
“할게요. 아니, 제발 저희를 받아 주세요.”
힘든 상황 속에서도 끝까지 동생을 챙기는 마음이 기특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부모의 보호를 받으며 한창 뛰어놀아야 될 나이에 벌써 온갖 고초를 다 겪은 남매가 너무 측은했다.
“알았다. 그런데 뭐 배우고 싶은 게 있느냐?”
“예?”
“아직 어린데 허드렛일만 하며 살면 안 되지. 공부도 좋고 뭐든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내가 책임지고 도와주마.”
관저 내에서 자유롭게 살고 있지만 실상 남매는 돈을 주고 사들인 노예 신분이라는 걸 생각하면 도현의 제안은 정말 파격적인 것이다.
소연이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고 있을 때 옆에 있던 기철이 냉큼 나서며 말했다.
“저, 전 위사 아저씨들처럼 잘 싸우는 법을 배우고 싶어요.”
“무예를 익히고 싶다고?”
“네!”
다부지게 대답하는 기철의 모습에 도현은 싱긋 미소를 지었다.
기철 또래의 남자아이라면 칼과 창을 휘두르며 무예를 수련하는 위사들이 멋있어 보이는 것이 당연했다.
“위사들이 멋있었나 보구나.”
“위사 아저씨들처럼 싸움을 잘하는 어른이 돼서 부모님을 죽인 오랑캐를 혼내 주고 내가 누나를 지켜 줄 거예요.”
“…….”
단순히 좋아 보여서 그런 것이 아니라 누나를 생각하는 마음과 청군에 대한 미움으로 무예를 배우고 싶어 한다는 걸 깨달은 도현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아직 어린 꼬마 아이가 저런 생각을 하도록 만든 조선이라는 나라가 너무 초라하게 느껴지는 것과 동시에 상황을 이렇게 만든 양반 계층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비록 의도치 않게 시간을 넘어왔지만 어찌 됐든 조선의 왕자가 되어 있었기에 약간의 책임감마저 들었다.
“알았다. 무예를 배울 수 있도록 해 주마.”
“정말이세요!”
“내가 언제 한 입으로 두말한 적이 있더냐.”
“와아!”
신 난 기철이 두 손을 들고 방방 뛰자 옆에 있던 소연이 당황한 표정으로 애써 뜯어말렸다.
“얘가, 예의 없게! 죄송합니다.”
“아니, 괜찮다.”
아직 어린 나이에도 침착하고 어른스러운 건 좋지만 때로는 소연도 제 또래 여자아이들처럼 솔직하게 자기 기분을 나타내면 좋을 텐데 하고 도현은 속으로 잠시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넌 뭔가 하고 싶은 게 있느냐?”
“네?”
갑작스러운 질문에 소연이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하자 도현이 부드러운 얼굴로 말했다.
“넌 여자아이니까 교양을 쌓아 보는 것도 괜찮겠지. 실용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거라면…… 아, 수예는 이미 배우고 있으니 됐나. 아니면 그림 같은 것도 괜찮고.”
“제가 감히 어찌.”
이 시대의 여성은 신분이 적어도 양반이나 귀족층 정도는 되어야 뭔가를 배운다는 게 가능했다.
그마저도 대부분은 좋은 집안에 시집가기 위해 소위 말하는 신부 수업이 그 목적이었는데 고작 해 봐야 소작농의 딸인 소연으로선 상상조차 해 볼 수 없는 별나라 이야기였던 거다.
“그런 말 하지 말고, 어때?”
“…….”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일을 답하려니 대답이 궁해진 소연이 말없이 가만히 있자 도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뭐, 갑자기 말해 보라고 하니 곤란하겠지. 그럼 천천히 생각해 보고, 뭔가 떠오르면 그때 나한테 말하도록 해.”
“……예.”
그 뒤로도 도현은 한동안 남매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더 나눴다.
다음 날부터 새로 온 시강원 관리들이 업무를 넘겨받아 세자 교육을 시작했다. 소현세자의 지시에 따라 도현도 사서인 김종일에게 개인 교습을 받아야 했다.
“견리사의見利思義라는 말을 아십니까?”
서책이 펼쳐진 탁자 두 개를 가운데 두고 마주 앉은 김종일의 물음에 도현은 시간을 거슬러 오기 전에 대학 교양 수업에서 배운 내용을 겨우 끄집어내 대답했다.
“눈앞의 이익을 보거든 먼저 그것을 취함이 의리에 합당한지를 생각하라는 것 아닙니까.”
“맞습니다. 그럼 거기에 들어맞는 해석을 한번 해 보시죠.”
“자신이 넓은 농지를 가진 만석꾼이라면 조상의 은덕으로 많은 부를 얻게 됐지만 직접 농사를 짓는 소작농들이 끼니를 때우지 못하고 굶주릴 때 혼자 창고 가득 쌀을 쌓아 놓는 것이 이치에 맞는지 생각해 보라는 것 같습니다.”
대답이 마음에 드는지 김종일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큰 이득에 눈이 멀어 부도덕하게 행동하거나 남을 해하지 말고 주위를 살피며 바르게 살아가라는 것이지요. 이건 거창한 일뿐 아니라 일상생활 하나하나 다 해당되는 것이고 군자대로라는 말과 일맥상통하는 겁니다. 대군마마께서도 이 말씀을 항상 새겨 두시기 바랍니다.”
“예.”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내일도 논어에 나오는 성현들의 말씀을 가지고 수업을 계속하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책을 들고 일어선 김종일은 허리를 살짝 굽혀 인사를 하고는 방을 나섰다.
그때까지 점잖은 표정을 짓고 있던 도현은 문이 닫히고 얼마 있지 않아 방석에 털썩 주저앉으며 바닥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휴, 저쪽 세계에서 이십 년이 넘도록 책만 팠는데 또 공부야? 그것도 전부 한자로 적힌 걸. 정말 미치겠네.”
그렇게 도현이 신세 한탄을 할 때 미닫이문이 열리며 칠현이 나무로 만들어진 쟁반에 대접을 하나 담아 가지고 들어왔다.
“마마, 고생하셨습니다.”
“그건 뭐야?”
“기분 좀 푸시라고 달달한 수정과를 가져왔습니다.”
“자식, 역시 너밖에 없다.”
“헤헤헤. 자, 드십시오.”
칠현이 쟁반을 내밀자 도현은 대접을 집어 들어 숨도 한 번 쉬지 않고 꿀꺽꿀꺽 다 들이켰다.
“캬! 달달하니 좋네.”
“그렇지요?”
단것이 들어가자 기분이 조금 풀린 도현은 방 안에 아무도 없는데 주위를 살피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알아보라고 한 건 어떻게 됐어?”
“예전부터 소문이 안 좋았는데 정말 구린내가 진동하다 못해 아주 뼛속까지 썩은 놈이었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저지르고 다니는지 말해 봐.”
“청국 고위 관리들과 연결된 뒷배를 믿고 안하무인처럼 행동하는 건 물론이고 본국에서 보내는 물건들까지 빼돌려 돈을 챙기고 있었습니다.”
“으음.”
역사서를 통해 역관인 정명수의 패악질이 얼마나 심했는지 잘 알고 있던 도현은 그게 과장된 것이 아니라 모두 사실이라는 걸 확인하자 침음성과 함께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 도현의 눈치를 보며 칠현은 이야기를 계속 이어 갔다.
“거기다 노예장사까지 한다는 소문입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노예라는 말에 도현의 언성이 높아졌다.
“천신만고 끝에 도망쳐 나와 조선으로 돌아오는 사람들이 종종 있는데 글쎄, 이 죽일 놈이 국경 지역 관리들을 협박해 그 사람들을 붙잡아 모두 넘겨받아서는 심양에서 다시 노예로 팔아먹는다고 합니다.”
꽝!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분노한 도현은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서탁을 주먹으로 세게 내려쳤다.
“인두겁을 쓰고 어떻게 그런 천인공노할 짓을 할 수 있는 거야!”
“그러게 말입니다.”
“단죄를 하지는 못할망정 관리들까지 동조해서 백성들을 잡아다 바친다니.”
“의주 현감이 요구를 거절했다가 앙심을 품은 정명수가 조정에 압력을 넣어 파직시켜 버린 일이 있어서 지방 관리들이 더 꼼짝을 못 하는 겁니다.”
설명을 들은 도현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허어, 고작 역관에 불과한 매국노의 세 치 혀에 조정과 관리들이 갈대처럼 휩쓸리다니 아주 망조가 제대로 들었군.”
아무리 화가 났다지만 살짝 위험한 발언에 칠현은 당황한 얼굴로 도현을 진정시켰다.
“아이고, 마마. 그러다 남 말하기 좋아하는 놈들의 입방아에 오르면 어떻게 하시려고. 일단 마음을 가라앉히십시오.”
아무리 왕자라도 입 한번 잘못 놀리면 그날로 목이 달아날 수도 있었는데 특히 현 국왕인 인조의 의심병은 유명했다.
시작부터 반정을 통해 국왕 자리에 올랐고 그 뒤로 이괄의 난까지 겪고 지지 기반이 취약해 언제든 자신도 연산군처럼 쫓겨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신하들은 물론이고 자식들까지 의심할 정도였다.
이런데 망조라는 이야기가 인조의 귀에 들어가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아무도 예측하기 어려웠다.
도현도 그런 사정을 잘 알기에 짧게 헛기침을 하며 흥분을 가라앉혔다.
“흠, 내가 조금 흥분한 것 같군.”
그러면서 다시 정명수 문제로 돌아온 도현은 한 손가락으로 서탁을 톡톡 규칙적으로 두드리며 고심에 찬 표정을 지었다.
“정명수 이놈을 어쩐다.”
“괜히 건드렸다가 마마께서 다치실 수도 있습니다.”
딴에는 걱정해서 한 말이었지만 그게 도현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상관없어. 다른 건 다 눈감아 준다고 해도 같은 민족을 노예로 팔아먹는 그런 파렴치한 녀석을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어!”
단순히 여러 가지 비리를 저지르고 김종일 등 일부 충신들이 희생되는 것이라면 나서는 걸 망설였겠지만 박 씨 남매를 통해 강제로 끌려온 백성들이 얼마나 큰 고초를 겪고 있는지 알게 된 도현은 노예장사까지 하는 정명수를 이대로 내버려 둘 수 없었다.
하지만 청국에 만만치 않은 뒷배를 가진 정명수였기에 무작정 건드렸다가는 역사서에서 김종일 등이 당한 것처럼 오히려 역풍을 맞게 될지도 몰랐기에 신중하게 움직일 필요가 있었다.
어떤 방법이 좋을까 고심하는 도현을 보고 칠현은 그를 뜯어말리고 싶었지만 최근 들어 한번 마음을 정하면 절대 고집을 꺾지 않았기에 내심 크게 한숨을 내쉬며 걱정스럽게 쳐다봤다.
도현에게 찍혔다는 것도 모르고 정명수는 평소처럼 값비싼 비단옷에 하인까지 데리고 거들먹거리면서 심양 저잣거리를 활보했다.
“정 대인, 오랜만이오.”
“마 대인, 그동안 잘 지냈소.”
중심가에 있는 객잔으로 들어간 정명수는 만주족 전통 복장을 한 배불뚝이 사내와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원래 대인이란 관직에 있거나 신분이 높은 사람을 높여 부르는 말이지만 딱 봐도 이들은 거기에 아무것도 해당되는 게 없었다.
미리 준비해 놓은 자리로 가서 앉은 마 대인이 앞에 있는 정명수를 보며 은근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듣자 하니 국경 쪽에 다녀왔다고 하던데 성과가 좀 있었소이까?”
상대가 뭘 원하는지 알고 있는 정명수는 씨익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지난번에 혼쭐을 내 줬더니 현감들이 정신을 차렸는지 도망친 노예들을 많이 잡아 놨더군요.”
“호오, 그래요?”
“건강한 녀석들로만 삼백 명 정도 됩니다.”
그 정도면 꽤 큰 거래였기에 마 대인은 눈을 번뜩였다.
“이거 노잣돈을 제대로 벌어 오셨구만.”
“전부 다 마 대인에게 넘길 테니 가격을 잘 좀 쳐주시죠.”
앞에 놓인 잔을 들어 차를 한 모금 마신 상대가 오른쪽 손가락을 두 개 들어 올렸다.
“두당 은자 스무 냥씩.”
정명수는 바로 이맛살을 찌푸렸다.
“경매장에 내놓으면 두당 서른 냥은 족히 받을 수 있는데 셈이 너무 박한 것 아니오.”
“그건 한 달 전 이야기고, 얼마 전에 예친왕께서 만리장성을 넘어 명을 공격하고 돌아오시면서 잡아 온 한인 노예들 때문에 가격이 떨어진 것도 모르시오. 거기다 한 번 주인집에서 도망쳐 나온 전력이 있는 것들이니 값이 더 낮아지는 건 당연하지 않소.”
“하지만…….”
“뭐, 싫으면 그만두시오. 그렇지만 다른 데 찾아가더라도 이 이상 돈을 받기는 어려울 거요.”
노예가 대량으로 풀렸다면 당분간은 가격이 오르기 힘든 데다 그렇다고 자신이 떠안고 있기에는 여러 가지로 문제가 많았기에 잠시 머릿속으로 계산을 해 본 정명수는 머리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좋소이다. 대신 다음 거래 때는 제대로 값을 쳐줘야 하오.”
“그건 그때 가서 이야기합시다.”
정명수의 말에 마 대인은 노련한 장사꾼답게 두루뭉술하게 넘어갔다.
마 대인이 눈짓을 하자 한쪽 벽에 서 있던 덩치가 밖에 나갔다가 다시 들어오면서 작은 궤짝을 들고 와 탁자 위에 올려놨다.
“확인해 보시오.”
“그럼.”
정명수가 궤짝 뚜껑을 열자 누런빛을 내며 반짝이는 금원보가 한가득 들어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개당 은자 백 냥짜리로 모두 서른 개였다.
“나머지는 물건을 넘겨받을 때 주겠소.”
탐욕이 가득한 얼굴로 금원보를 쓰다듬던 정명수는 마 대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누가 훔쳐 갈세라 뚜껑을 닫고 얼른 챙겨 넣었다.
“내일 다시 봅시다.”
“살펴 가시오.”
예상했던 것보다 돈을 덜 받았지만 그래도 한몫 제대로 챙긴 정명수는 기분 좋은 얼굴로 객잔을 나왔다.
들어가는 돈은 하나도 없이 그냥 국경 지역에 가서 조선 관리들이 잡아 놓은 귀향민들을 넘겨받아 다시 심양으로 끌고 오면 되니 이거야말로 땅 짚고 헤엄치기보다 더 쉬운 장사였다.
저잣거리를 벗어난 정명수는 황궁 근처에 위치한 자신의 저택에 도착했다.
조선의 기와집이 아니라 철저히 청국 양식으로 지어진 저택은 방만 오십여 개가 넘었는데 도현과 소현세자가 머무는 관저보다 조금 작을 정도로 아주 크고 화려했다.
아무리 조선 시대 역관이 많은 부를 가졌다고 하지만 이건 도가 한참 넘은 것으로 그만큼 용골대와 청국 고위 관리들을 등에 업은 정명수의 위세가 대단하다는 방증이었다.
커다란 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심복이자 심양 저택 집사로 있는 박치술이 뛰어와서 허리를 숙였다.
“어서 오십시오, 마님.”
마님이란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나 상전을 높여 부르는 말로 중인中人인 정명수에게 써서는 안 되지만 역시나 아무 거리낌 없이 불렀다.
“그래. 그동안 별일 없었고?”
“예.”
하인들의 인사를 받으며 안채로 들어간 정명수가 비단 방석이 깔린 의자에 앉아 곰방대를 꺼내자 박치술이 얼른 부싯돌로 불을 붙여 줬다.
“앞으로 다른 놈을 시키든지 해야지, 매번 국경까지 갔다 오려니까 힘들군.”
“원기를 보충하실 수 있도록 약방에 말해 보약을 준비시키겠습니다.”
“힘 빠진 데는 인삼이 좋으니까 지난번에 선물로 받은 걸 내줘서 약 만들 때 듬뿍 집어넣으라고 해.”
“알겠습니다.”
곰방대를 입에 물고 담배를 두세 모금 빤 정명수는 살짝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마 대인과 거래 끝냈으니까 창고에 넣어 둔 노예들을 내일 넘겨주고 잔금 받아 와.”
“네.”
“금원보 서른 개니까 실수하지 말고.”
“염려하지 마십시오.”
앞에 선 박치술은 잠시 정명수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마님.”
“왜? 무슨 할 말이라도 있어?”
“실은 며칠 전에 이 대인이 인삼을 구할 수 있냐고 연통을 넣어 왔습니다.”
“인삼?”
“예.”
“못 구할 건 아니지만 조선에 연락해서 가져오려면 시간이 꽤 걸릴 텐데.”
“관저에 한양에서 보낸 인삼 백 근이 있다고 합니다.”
박치술의 말에 정명수는 머리를 번쩍 들었다.
“그게 정말이야?”
“이 대인이 알려 온 정보에 의하면 얼마 전 시강원 학사들이 새로 왔는데 그때 가져왔다고 합니다.”
시강원 학사를 따라 상당한 숫자의 수행원들이 함께 도착했기에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였다.
“학사들이 용돈 벌이를 하려고 가져온 물건인 거야?”
“그건 아니고 임금님께서 심양에 있는 두 분 왕자님들의 건강을 생각해 보내신 거라고 하더군요.”
“그렇단 말이지.”
예전부터 인삼은 만병통치약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는데 중국에서도 아주 고가로 거래되는 약재였다.
한 손으로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잠시 생각하던 정명수가 이내 시선을 들며 말했다.
“얼마나 필요하다고 하던가?”
“가격은 섭섭지 않게 쳐줄 테니 가능한 한 많이 가져다 달라고 했습니다.”
“하긴 인삼은 돈이 있다고 해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니 기회가 있을 때 가능한 한 많은 양을 확보해 두려고 하겠지.”
정명수의 말대로 인삼은 생산량이 적고 재배가 되는 조선과 심양 사이의 거리도 먼 데다 무엇보다 국가에서 거래를 엄격히 통제하고 있었다. 이번처럼 공식적인 업무로 관리들이 오갈 때 조금씩 보따리에 넣어 가지고 오는 것이 아니면 구경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희소성이 더 높아져 비싸게 거래되는 것이다.
“팔십 근 줄 테니 돈을 준비하라고 해.”
“그렇게나 많이요?”
절반인 오십 근 정도를 생각하고 있던 박치술은 깜짝 놀라 그를 쳐다봤다.
하지만 정명수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곰방대를 입으로 가져가 담배를 피웠다.
“뭘 그리 놀라. 아직 나이도 젊은데 세자와 봉림대군한테 인삼 같은 약이 뭐가 필요하겠어. 팔십 근은 이 대인한테 넘기고 나머지 이십 근은 용골대 장군과 여러 청국 고위 관리들한테 선물로 줘서 이번 기회에 점수를 좀 따 둬야지.”
대범한 건지 아니면 겁을 상실한 것인지 정명수는 인조가 두 아들을 위해 보낸 하사품을 통째로 꿀꺽 삼키려 했다. 하지만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지 박치술은 이내 눈을 반짝이며 동조했다.
“인삼은 여기서도 귀한 물건이니 용골대 장군님도 흡족해하실 겁니다.”
“그렇지. 오늘은 시간이 늦었으니 내일쯤 자네가 하인들을 데리고 가서 물건을 꺼내 오게.”
“알겠습니다, 마님.”
허리를 숙이며 대답한 박치술이 방을 나가자 혼자 남은 정명수는 탁자 위에 있는 재떨이에 곰방대를 털면서 탐욕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큭큭큭. 먼 타향에서 고생한다고 임금님이 내 주머니를 묵직하게 채워 주시는구먼.”
다음 날 정명수가 지시한 대로 박치술은 건장한 체격의 하인 네 명을 데리고 소현세자의 관저로 갔다.
“어서 열라니까!”
“감히 세자 저하의 창고에 손을 대려고 하다니, 하늘이 무섭지 않느냐!”
창고 관리를 맡고 있는 하급 관리가 문을 막고 핏대를 세우며 호통치자 박치술은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이 작자가 아침에 뭘 잘못 먹었나. 우리 어르신께서 필요한 물건이 있다니까 무슨 말이 이렇게 많아! 애들아, 시끄러우니까 이놈부터 치워라.”
“예, 잡사 어른.”
앞으로 나선 하인들은 저항하는 관리를 거칠게 붙잡아 뒤로 밀쳐 냈다.
“이거 놔! 여긴 절대 안 된다!”
“이 양반이 정말!”
신분제가 엄격하게 적용됐기에 정상적이라면 감히 얼굴조차 마주할 수 없는 사이지만 정명수의 위세를 등에 업은 하인들은 어떻게든 창고를 지키려는 관리를 밀쳐 내고 슬쩍 주먹질까지 했다.
퍽!
“아이고!”
관저에 속한 일꾼들이 주위에 있었지만 보복당할까 봐 감히 나서지 못하고 관리가 당하는 걸 안타까운 얼굴로 지켜만 봤다.
“낄 때 안 낄 때를 가려서 나서야지. 그나마 이 정도로 끝내는 걸 다행으로 아쇼.”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한마디 툭 내뱉은 박치술은 엉망이 된 채 넘어져 있는 관리의 허리춤을 뒤져 창고 열쇠를 꺼냈다.
“문 열어.”
“네.”
공손히 두 손으로 열쇠를 건네받은 하인 하나가 얼른 문에 달린 자물쇠를 풀었다.
끼이이익.
경첩 소리를 내며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좌우로 열리자 박치술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성큼성큼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실내였지만 채광창이 설치되어 있어서 밝은 창고 안은 그다지 넉넉하지 않은 관저 살림살이를 단적으로 보여 주듯 채 반도 채우지 못하고 곳곳이 텅 비어 있었다.
보관된 물건을 하나씩 확인해 보던 박치술은 비단 보자기에 싸인 나무 상자 안에 인삼이 든 걸 찾아내고 눈을 반짝였다.
“여기 있군.”
슬쩍 인삼 두 뿌리를 품이 큰 소매 속에 챙긴 박치술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보자기를 싸고는 하인들을 보며 말했다.
“꺼내 가.”
“옛.”
하인들은 인삼이 가득 담긴 나무 상자 두 개를 미리 준비해 온 지게에 올리고는 밖으로 나왔다.
“이 죽일 놈들! 너희들이 그러고도 무사할 줄 아느냐!”
일꾼들의 부축을 받아 힘겹게 몸을 일으킨 관리가 그걸 보고 고함을 지르자 박치술은 콧방귀를 뀌었다.
“우리 어르신 비위에 거슬리면 명을 제대로 못 채우고 타국에서 쓸쓸히 객사할 수도 있으니까 입조심하는 것이 좋을 거요.”
“이, 이런!”
“하하하! 그럼 우린 이만 돌아가겠소. 애들아, 가자.”
분노에 몸을 부들부들 떠는 관리를 한껏 비웃어 준 박치술은 마치 개선장군처럼 하인들을 거느리고 관저를 떠났다.
벌컥!
“마마!”
수업 시간에 야단을 듣지 않기 위해 논어 책을 펴 놓고 팔자에도 없는 공부를 하고 있던 도현은 허겁지겁 뛰어 들어오는 칠현을 보며 살짝 눈썹을 찡그렸다.
“점잖게 행동하라고 나한테 시도 때도 없이 잔소리를 해 대더니 웬 호들갑이야?”
도현의 핀잔을 못 들었는지 앞에 무릎을 꿇고 앉은 칠현은 숨을 헐떡이며 황급히 이야기를 늘어놨다.
“노, 놈들이…….”
“알아들을 수가 없잖아. 더듬지 말고 차분히 말을 해.”
“정 역관이 미끼를 물었습니다.”
칠현의 말에 도현은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확실해?”
“네. 방금 정 역관의 오른팔인 박치술이 하인들을 끌고 와 강제로 창고를 열고 안에 넣어 둔 인삼을 모조리 꺼내 가는 걸 제가 두 눈으로 직접 봤습니다.”
흥분한 칠현은 팔을 이리저리 흔들며 상황을 설명했다.
“그렇단 말이지.”
일개 역관이 왕실 물건에 마음대로 손을 댄 어처구니없고 아주 치욕적인 상황이었지만 무슨 일인지 도현은 화를 내기는커녕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바로 나서실 겁니까?”
기대에 찬 칠현의 물음에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지. 원래 이런 일은 상대가 정신을 못 차리도록 한 번에 몰아쳐야지 질질 끌어서 좋을 것이 없어.”
잠시 말을 멈춘 도현은 먹잇감을 앞에 둔 맹수처럼 눈을 매섭게 번뜩였다.
“당장 위사들 불러와.”
“알겠습니다.”
지시를 받은 칠현은 아주 신이 난 얼굴로 방을 나갔다.
사실은 이 모든 것이 정명수를 잡기 위해 도현이 파 놓은 함정이었다. 인삼도 시강원 관리들이 가져온 하사품이 아니라 지난번 출정에서 공을 세워 도르곤이 준 전리품의 일부를 팔아 은밀히 마련한 것이다.
그냥 청국 조정에 정명수를 고발하거나 자체적으로 처벌하려고 하면 분명히 뒷배를 써서 미꾸라지처럼 요리조리 빠져나갈 것이 틀림없었기에 아예 그런 수작조차 못 부리도록 촘촘한 그물을 준비했다.
물론 이 모든 일은 형님인 소현세자의 허락하에 실행했다. 처음에는 자칫 도현이 다칠까 봐 만류했지만 도를 넘은 정명수의 패악질에 지치고 노한 그도 결국 승낙했다.
잠시 뒤 창고에서 그 난리를 피우는데도 모습을 보이지 않던 위사들이 연무장에 모두 집합했고 도현은 허리에 검을 찬 채 칠현을 대동하고 나왔다.
“대군마마를 뵙습니다.”
위사장인 신철을 선두로 서른 명의 위사들이 일제히 허리를 숙이며 군례를 올렸다.
“지금부터 나라를 배신하고 같은 민족의 고혈을 빨아 자기 배만 불리는 매국노를 처단하러 간다. 오늘 벌이는 일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내가 모두 질 테니 아무런 걱정 하지 말고 가차 없이 징벌을 가하도록. 알겠나!”
“옛!”
우렁찬 위사들의 대답에 도현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한쪽에 있는 말 위에 올랐다.
“가자!”
그렇게 도현과 위사들은 날카로운 기세를 내뿜으면서 관저를 나섰다.
탕탕탕!
시끄럽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저택 하인 한 명이 귀찮은 얼굴로 걸어 나왔다.
“누구시오?”
“조선 관저에서 왔다. 어서 문을 열어라!”
“무슨 일이지.”
하인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약간 굼뜬 동작으로 빗장을 풀었다.
덜컹!
그러자 위사들이 거칠게 하인을 밀치면서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빨리 안 열고 뭘 한 거야!”
“아이고!”
“정명수는 어디 있나?”
엉덩방아를 찧으며 바닥에 넘어진 하인은 멱살을 잡고 무섭게 윽박지르는 김덕술의 물음에 겁에 질려서는 한 팔을 들어 안쪽을 가리켰다.
“아, 안채에…….”
신 위사장의 호위를 받으며 안으로 들어온 도현은 내부를 스윽 훑어보고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다른 사람들의 피눈물로 자신은 고랫등 같은 집을 짓고 호의호식하며 살고 있군. 한 놈도 도망치게 놔두지 말고 모조리 다 잡아들여라.”
“예.”
크게 대답한 위사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정명수와 식솔들을 잡기 위해 움직였다.
퍽! 퍽!
“컥.”
“사, 사람 살려!”
“어이쿠!”
그동안 당한 걸 분풀이라도 하듯 위사들은 손에 든 곤봉을 마음껏 휘두르며 눈에 띄는 족족 상대를 때려잡았다.
여기저기서 곡소리가 나는 가운데 얼마 있지 않아 뭘 하다가 잡혔는지 상체를 벗고 아래만 겨우 가린 정명수가 박태철에게 질질 끌려 나왔다.
“이놈들! 내가 누군지 알고 이런 짓을 벌이는 거야!”
“거참, 곧 뒤질 놈이 말 많네.”
푹!
“끄윽.”
이미 한차례 얻어맞았는지 이마가 깨져 피를 흘리면서도 정명수가 바락바락 악을 써 대자 박태철은 곤봉 끝으로 옆구리를 세게 쑤시고는 바닥에 무릎을 꿇렸다.
도현은 무표정한 얼굴로 정명수를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이자가 정명수인가?”
“그렇습니다, 마마.”
“하고 다니는 행실대로 얼굴에 탐욕이 덕지덕지 붙어 있군.”
낯익은 목소리에 머리를 든 정명수는 도현을 발견하곤 무섭게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봉림대군! 날 이렇게 겁박하다니 후한이 두렵지 않소?”
제발 살려 달라고 엎드려 빌지는 못할망정 오히려 고개를 뻣뻣이 들고 협박을 해 대는 모습에 도현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헛웃음을 내뱉었다.
“허허허. 아무리 간땡이가 부었다고 해도 분수를 알아야지. 용골대가 뒷배를 봐주니 세상이 다 네 것 같으냐! 위사장.”
“옛, 마마.”
시뻘겋게 상기된 얼굴로 정명수를 노려보고 있던 신철이 대답하자 도현은 단호한 어조로 지시를 내렸다.
“관저로 압송하기 전에 늘씬하게 두들겨 패서 못된 버릇을 고쳐 주도록!”
“알겠습니다.”
내심 바라던 일이었기에 신철은 화색을 띤 얼굴로 부하들을 봤다.
“손을 봐 줘라!”
“네.”
그러자 주위에 서 있던 위사 두 명이 손에 든 곤봉을 까딱이면서 가까이 다가갔고 정명수는 겁먹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왜, 왜들 이래.”
“그동안 잘도 까불었겠다.”
“네놈이 설치고 다니는 것이 얼마나 눈에 거슬렸는지 모를 거야.”
“가까이 오지 마!”
퍽! 퍽! 퍽!
“으악!”
정말 쌓인 것이 많은지 위사들은 독하게 곤봉을 휘둘러 정명수를 때리고 팼다.
그걸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을 때 김덕술이 다급한 얼굴로 달려왔다.
“마마, 저쪽 창고에 한번 가 보셔야 될 것 같습니다.”
“뭐 때문에 그러지?”
“그게……. 직접 눈으로 보시죠.”
당황과 분노가 뒤섞인 김덕술의 표정에 도현은 살짝 얼굴을 굳히고는 그가 가리킨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김덕술이 안내한 곳은 바깥채 한쪽에 세워 놓은 창고 건물이었는데 쌀가마니를 집어넣으면 족히 이백 섬은 보관할 수 있을 정도로 크기가 컸다.
이런 창고가 옆으로 네 채나 더 병풍처럼 늘어서 있으니 정명수가 얼마나 큰 부를 가지고 있는지 단적으로 알 수 있었다.
입구를 지키고 있던 위사들을 지나 안으로 들어서자 순간 고약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이게 무슨 냄새지?”
대낮인데도 창살이 박힌 손바닥만 한 창문 하나밖에 없어서 안은 무척 어두웠다.
김덕술이 위사들에게 등잔을 하나 빌려 불을 밝히자 그제야 드러난 광경에 도현은 눈을 크게 떴다.
차디찬 바닥에 족히 백여 명은 되어 보이는 사람들이 손과 발을 결박당한 채 제대로 몸을 누일 공간조차 없이 빽빽하게 모여 앉아 있었다.
개중에는 남자들뿐 아니라 여자들도 섞여 있었는데 얼마나 핍박을 받았는지 몸이 성한 사람이 드물었고, 다들 절망과 공포에 질린 눈동자를 하고 있었다.
제대로 씻지 못한 몸에서 나는 체취와 땀 냄새, 그리고 똥오줌 냄새가 섞여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할 정도로 악취가 허공을 떠돌았다.
옆에서 설명을 해 주지 않아도 상투를 튼 머리와 행색으로 보아 도망쳐 나온 조선인 노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이런 악독한……!”
도현이 분노로 몸을 떨자 사람들은 그의 정체도 모른 채 겁먹은 표정을 지었다.
“어서 풀어 줘!”
도현의 명령에 김덕술이 서둘러 동료들과 함께 밧줄의 매듭을 풀어 주었다.
하지만 아직 제대로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사람들은 피가 잘 통하지 않아 비틀거리는 몸으로 한데 뭉쳐서 한쪽 벽면에 등을 딱 붙이고 두려움이 섞인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굵은 동아줄로 꽁꽁 포박당한 정명수와 식솔들은 개처럼 질질 끌려 관저로 갔다.
숨 돌릴 틈도 없이 관저 앞마당에 죄인을 심문하는 형틀이 설치됐고 정명수는 상투를 풀어 헤친 채 거기에 묶였다.
“끄아아악!”
위사 두 명이 양쪽에 서서 교차하여 끼운 굵은 나무를 있는 힘껏 잡아당기자 정명수는 가랑이가 찢어지는 고통에 목이 터져라 비명을 내질렀다.
“그만. ”
도현의 말에 위사들은 동작을 멈췄다.
“으으…….”
“그동안 진상품과 관저 물건에 마음대로 손을 대 부정하게 부를 축적하고 왕실을 능멸한 걸 인정하느냐?”
마당이 내려다보이는 정자 위에 의자를 갖다 놓고 앉아 있는 도현의 추궁에 여기저기 피멍이 든 정명수는 악이 받친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나에게 이렇게 하고도 무사할 거라 생각하오!”
“저놈이 아직 정신을 못 차렸구나. 입에서 바른말이 나올 때까지 주리를 틀어라.”
“예.”
도현의 말에 위사들은 손에 침을 퉤 뱉고는 정명수의 다리 사이에 끼워 놓은 나무를 다시 양쪽에서 잡아당겼다.
“아악!”
그렇게 한참 정명수를 심문하고 있을 때 문이 벌컥 열리면서 용골대가 무장한 부하들을 데리고 들이닥쳤다.
“멈춰라!”
당연한 행동이었지만 위사들이 앞을 막아섰고 양쪽이 대치하면서 서로 가지고 있는 무기를 뽑지는 않았지만 금방이라도 칼부림이 일어날 것처럼 분위기가 살벌해졌다.
이런 상황을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던 도현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태연한 얼굴로 정자에서 내려와 위사들 앞에 섰다.
“아니, 용골대 장군이 연락도 없이 여긴 어쩐 일이시오?”
그러자 용골대는 거만한 얼굴로 주위를 스윽 쓸어 보고는 도현을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청국 땅에서 조선인들이 함부로 사람을 잡아간다고 해서 와 봤더니 사실이었군. 당장 정 역관을 풀어 주시오!”
아직 나이가 어려 키 차이가 많이 나는 도현을 내려다보며 마치 상전이 명령을 하듯 용골대가 이야기를 하자 좌우에 있던 위사들이 발끈했다.
“이익!”
하지만 도현이 손을 들어 화가 난 위사들을 진정시켰고 내심 충돌을 바라던 용골대는 그걸 보고 아쉬운 듯 슬쩍 입맛을 다셨다.
도발을 잘 넘긴 도현은 용골대의 요구를 어림도 없다는 듯이 당당하게 거절했다.
“조선인이 왕실 물건에 손을 대서 벌어진 일이니 우리가 알아서 법도대로 처리할 것이오!”
“그래도 심양 땅에서 벌어진 일이니 대청국의 법으로 다스려야 하오.”
용골대도 물러설 생각이 없는지 계속 고집을 피우자 도현은 딱딱하게 얼굴을 굳히고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후에 일어나는 일은 용골대 장군의 책임이오.”
도현의 말에 용골대는 가소롭다는 듯이 콧방귀를 뀌었다.
“흥! 조사를 해 보고 무고였다는 것이 밝혀지면 그 죗값을 철저히 물을 테니 봉림대군이나 각오를 단단히 해 두는 것이 좋을 거요.”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대신 해 주시는군.”
용골대의 협박에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꼿꼿한 태도를 유지하는 도현의 모습에 두 사람은 허공에서 날카로운 눈빛을 맞부딪쳤다.
보이지 않는 힘겨루기를 하듯이 한참을 그렇게 노려보던 용골대가 한 손을 들어 올려 부하들에게 움직이라는 신호를 보냈다.
“뭐하고 섰느냐. 정 역관을 얼른 풀어 주지 않고!”
명령을 받은 용골대의 부하들이 정명수에게 달려들어 밧줄을 풀기 시작하자 도현의 양옆에 서 있던 위사들이 어떻게 해야 좋으냐는 듯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도현은 그냥 내버려 두라는 식으로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고, 마침내 정명수가 결박에서 풀려났다.
“크큭……. 것 보시오. 내 이렇게 될 거라고 이미 말하지 않았소이까.”
머리는 산발로 마구 흐트러졌고, 핏발이 선 눈동자를 하고선 정명수가 가래 끓는 목소리로 기분 나쁘게 웃었다.
“저놈이!”
감히 일국의 왕족을 대하는 태도라고는 볼 수 없는 불경한 말투에 시위들이 발끈하자 도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놔두어라. 입만 살았지 속 알맹이라곤 하나도 없는 비열한 밥버러지에 불과한 놈인데 뭣하러 화를 내느냐?”
“마마.”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혼자서는 제대로 일어서지도 못하는 정명수를 부하들이 부축하고 뒤로 물러서자, 용골대는 이제 이곳에 볼일은 없다는 듯 소맷자락을 펄럭이며 홱 돌아섰다.
“이번 일은 기억해 두겠소. 언젠가 반드시 후회할 날이 올 것이외다.”
한바탕 풍파를 일으키고 떠나는 용골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도현은 낮게 중얼거렸다.
“과연 누가 후회하게 될지, 두고 봐야 아는 일이지.”
“마마, 정명수 저자의 성격으로 볼 때 절대 그냥 있을 놈이 아닌데 어서 대책을 세워야 되지 않겠습니까.”
옆으로 다가온 신철 위사장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하는 말에 도현은 무슨 생각인지 한쪽 입꼬리를 위로 말아 올렸다.
“후후후. 이번 일로 땅을 치고 후회하는 건 우리가 아니고 용골대가 될 테니 두고 보게.”
“…….”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건지 알 수가 없었지만 지금까지 지켜본 결과 아직 나이는 어려도 생각이 깊고 신중한 도현이었기에 신철 위사장은 내심 안도하는 마음이 들었다.
용골대 일행이 관저를 떠나자마자 도현은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예친왕 도르곤의 저택을 찾아갔다.
지난 원정 때 목숨을 구해 준 인연이 있었기에 미리 연락을 하지 않고 갑자기 찾아온 것이지만 도르곤은 도현을 아주 반갑게 맞이했다.
“어서 오게.”
“바쁘신데 제가 괜히 방해를 한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아니야. 안 그래도 한번 불러서 식사라도 함께하려고 했는데 잘 왔네.”
“감사합니다.”
“자, 이쪽으로 앉지.”
“예.”
친근하게 손을 마주 잡고 등까지 두드려 준 도르곤은 도현을 방 한쪽에 있는 의자로 손수 안내했다.
마주 보고 앉아 가벼운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하녀 한 명이 쟁반에 고급스러운 찻잔을 들고 와 두 사람 앞에 내려놨다.
“황상께서 하사해 주신 보이차普洱茶라네.”
“향이 아주 좋군요.”
“듣기로 오십 년 동안 숙성시킨 찻잎이라는군.”
자랑하듯 도르곤이 설명을 하자 도현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십 년이라. 대단합니다.”
“갈 때 조금 싸 주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중국 운남성에서 만들어지는 보이차는 세계적으로도 알아주는 명차로, 운남 대엽종 찻잎으로 만들어 발효시키는데 보관 기관이 길수록 상품으로 쳐준다.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잔을 탁자 위에 내려놓은 도르곤은 앞에 있는 도현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냥 안부나 물으려고 여기까지 온 건 아닐 테고. 그래, 용건이 뭔가?”
역시 청국의 이인자답게 그가 뭔가 할 말이 있어서 찾아왔다는 걸 단번에 알아차린 도르곤의 물음에 도현은 살짝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예친왕 전하를 속일 수가 없군요. 실은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은근슬쩍 띄워 주는 도현의 말에 도르곤은 기분 좋은 얼굴을 했다.
“뭔지 말해 보게.”
“얼마 전 한양에서 황제 폐하와 예친왕 전하께 드릴 인삼을 보내왔습니다.”
“오! 인삼이라면 죽은 사람도 벌떡 일으킨다는 조선의 명약 아닌가?”
도르곤이 아는 척을 하자 도현은 머리를 끄덕이며 이야기를 이어 갔다.
“예. 죽은 사람까지는 모르겠지만 효능이 아주 뛰어난 약재인 건 맞습니다. 특히 자양 강장 효과가 있어 남성에게 아주 좋지요.”
“허허허, 그래.”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생겼습니다.”
“문제라니?”
“수일 안에 진상을 하려고 관저 창고에 보관하고 있었는데 무뢰배들이 들이닥쳐 물건을 싹 훔쳐 가고 말았습니다.”
진상품을 잃어버린 엄청난 사건이었기에 도르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아니, 관저에 있는 위사들은 도대체 뭘 하고 있었기에 진상품을 빼 나가는 것도 모르고 있었단 건가.”
자칫하면 관저 경비를 맡은 위사들이 화를 당할 수도 있었기에 도현은 얼른 초점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다행스럽게도 진상품은 무사히 다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구만. 그럼 문제가 다 해결된 것 아닌가?”
그때서야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챈 도르곤이 의아한 시선을 보냈다. 하지만 지금부터가 승부였기에 도현은 내심 마음을 가다듬고는 자못 심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범인이 조선인이라 직접 잡아들여 심문을 하고 있는데 용골대 장군이 와서 죄인을 데려가 버렸습니다.”
“그게 정말인가?”
“제가 감히 누구 안전이라고 거짓을 아뢰겠습니까.”
“으음…….”
용골대라면 청국에서도 유명한 장군이었고 개인적으로 친분도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황제한테 바치는 진상품과 연관되어 문제를 일으켰다면 용골대가 아니라 자신이라도 큰 벌을 피하기 어려웠기에 도르곤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용골대 장군이 왜?”
“이런 말씀을 드리기 그렇지만 범인이 오래전부터 청국 관리들에게 뒷돈을 바치며 온갖 패악질을 저질러 왔는데 용골대 장군이 뒷배를 봐주는 사람 중 하나였습니다.”
자칫하면 대형 비리 사건으로 번질 수도 있는 일이었기에 도르곤은 정색했다.
“방금 한 말에 책임을 질 수 있나!”
“예.”
약간의 망설임도 없이 도현이 단호하게 대답하자 도르곤은 신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진상품을 훔치고 관리들에게 뇌물을 뿌렸다는 자가 도대체 누군가?”
“역관으로 있는 정명수라는 자입니다.”
“……!”
도르곤도 정명수를 알고 있는지 이름을 듣자마자 흠칫 눈을 치켜떴다가 이내 표정을 바로 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따로 친분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때마다 용골대를 통해 값비싼 선물을 보내왔기에 정명수가 거론되자 내심 뜨끔했고, 도현이 자세히 설명을 해 주지 않아도 대충 상황이 어떻게 된 건지 파악이 됐다.
턱수염을 매만지며 도르곤이 잠시 생각을 정리하는 동안 도현은 여유로운 얼굴로 차를 마시면서 결과를 기다렸다.
찻물이 식을 때쯤 도르곤이 굳게 닫혀 있던 입을 열었다.
“내가 어떻게 해 주기를 원하나?”
“조선인이 저지른 범죄이니 저희가 알아서 처리할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도현이 조선인이라는 단어에 힘을 줘서 이야기를 하자 도르곤은 눈에 이채를 띠었다.
처벌 권리를 조선 관저에 넘겨주면 정명수가 청국 관리에 뇌물을 준 것과 진상품 도난에 대해서 더 이상 거론하지 않겠다는 제안이었다.
도르곤 입장에서는 일이 커져서 용골대를 포함한 청국 관리들이 화를 당하는 것보다 조선인 역관 하나를 내주는 것이 백번 남는 것이기에 두 번 생각할 필요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선 관저에서 일어난 사건이고 범인도 조선인이라면 당연히 그쪽에서 처리를 해야지. 용골대한테는 내가 말을 해 둘 테니까 알아서 하게.”
“부탁을 들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아닐세. 앞으로도 이런 일이 있으면 날 찾아오게.”
“네.”
대답을 하면서 도현은 슬며시 입가에 승리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얼마 뒤 예친 왕부를 나온 도현은 위사들과 함께 용골대를 찾아갔다.
그사이 도르곤이 보낸 전갈을 받은 그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순순히 데리고 있던 정명수를 내줬다.
관저로 다시 끌려온 정명수는 닷새에 걸쳐 온갖 고문을 다 받은 끝에 결국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지금까지 저지른 죄를 모두 실토했다.
“죄인은 알량한 재주를 이용해 감히 왕실 물건에 사사로이 손을 대는 불경을 저질렀고 온갖 부정한 방법으로 부를 축적한바 재산은 모두 국고로 귀속시키고 목숨으로 죗값을 치르게 하라!”
“옛!”
도현이 판결을 내리자 산발을 한 채 형틀에 묶여 있던 정명수는 눈에 핏발을 세우며 소리를 질러 댔다.
“제, 제발 살려 주시오!”
“뭣들 하느냐? 어서 놈을 끌고 가서 형을 집행해라!”
“알겠습니다.”
“안 돼! 이럴 수는 없어!”
위사들은 끌려가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는 정명수의 팔을 양쪽에서 하나씩 잡고 마당 밖으로 데려갔다.
관저 후원 으슥한 곳으로 끌려간 정명수는 튼튼한 줄에 목이 졸려 교살당했다.
한편 판결을 끝낸 도현은 곧바로 형님인 소현세자의 거처로 가서 결과 보고를 했다.
“말씀드린 대로 교살형을 내렸습니다.”
서탁을 앞에 두고 앉아 있던 소현세자는 도현의 말에 무겁게 머리를 끄덕였다.
“잘했어. 그자가 저지른 죄에 비하면 교살형도 자비로운 거지. 여기가 심양이 아니라 조선이었다면 오체분시五體分屍를 당해 목을 숭례문 앞에 며칠이고 걸어 뒀을 거야.”
오체분시는 머리와 양쪽 팔다리를 소나 말에 묶어 당겨서 찢어 죽이는 형벌로 고통이 교살형에 비할 것이 아니었다.
성격이 유순한 소현세자의 입에서 이런 이야기가 나올 정도니 그동안 정명수가 얼마나 패악을 저질렀는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만에 하나 일이 잘못되면 그 뒷감당을 어떻게 해야 될지 조마조마했는데 정말 네가 고생이 많았다.”
“아닙니다. 다 형님이 절 믿고 밀어주신 덕분입니다.”
“그저 뒷짐을 지고 가만히 있었을 뿐인데, 내가 뭘 한 게 있다고.”
“그렇게 제 뒤에 계신 것만으로도 얼마나 든든했는지 모릅니다.”
혹시라도 이번 일로 시기나 질투를 할까 봐 도현이 알아서 기자 소현세자는 빙긋 미소를 지었다.
“하하하. 빈말이라도 기분은 좋구나.”
“제 진심입니다.”
“녀석. 그건 그렇고, 예친왕에게 한 말이 있으니 되찾은 인삼은 진상품으로 올려야겠지?”
“그래야지요. 마침 내일 황궁에 들어가는 날이니까 그때 가져가시죠.”
청국 조정에서는 배후의 비수와도 같은 조선을 속국으로 완전히 복속시키기 위해 보름에 한 번씩 소현세자와 도현이 황궁에 들어와 황제에게 문안 인사를 하도록 했다.
“괜히 꾸물거리면 이상한 소문이 날 수도 있으니 그러자꾸나. 그런데 인삼을 구한다고 네가 큰돈을 썼는데 손해가 크겠구나.”
“괜찮습니다.”
아까워서 속이 엄청 쓰렸지만 도현은 애써 내색하지 않았다.
“그러지 말고 이번에 압류한 정명수의 재산 중 일부를 인삼값 대신 네가 가져라.”
“안 그러셔도 됩니다.”
“아니야. 위험을 무릅쓰고 옳은 일을 했는데 큰 상을 주지는 못할망정 손해를 보게 할 수는 없지. 내 말대로 해라.”
거듭해서 소현세자가 이야기를 하자 도현은 못 이기는 척 받아들였다.
“그럼 감사히 받겠습니다.”
“그래.”
“그리고 이건 이번에 압류한 정명수의 재산을 정리한 겁니다.”
도현이 품속에서 두세 번 길게 접은 종이를 꺼내 내밀었다.
종이를 펼쳐 천천히 읽어 내려가던 소현세자는 상상을 초월하는 금액에 놀란 표정을 짓다가 이내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도대체 그동안 얼마나 많은 백성들의 고혈을 짜고 탐관오리들에게 뇌물을 받아 챙겼으면 이런 재산을 모을 수 있었던 거야.”
“저도 보고를 받으면서 침통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건 정명수의 비밀 금고에서 찾아낸 뇌물 장부입니다.”
새로 꺼내 놓은 건 표지에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얇은 책이었는데 안에는 뇌물을 바친 조선 관리의 이름과 금액 그리고 청탁 내용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개중에는 당상관정(삼품 이상의 고위 관리로 조정에서 회의를 열 때 당상에 있는 교의에 앉을 수 있는 벼슬아치를 지칭하는 말) 벼슬을 가진 고위 관리마저 이름을 올리고 있어 소현세자를 경악하게 했다.
“이자는 청을 배척하고 조정의 권위를 바로 세워야 된다면서 만고의 충신처럼 행동하더니 뒤로 이런 꼼수를 부리고 있었군.”
“내용을 읽어 보시면 아시겠지만 상당수 조정 관리들이 은밀히 청국에 줄을 대고 있었습니다.”
“이런 개탄스러운 일이 있나.”
조정 대신들의 비열한 행태에 침통한 표정을 짓고 있는 소현세자를 보며 도현이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이런 때일수록 정신을 바짝 차리셔야 됩니다. 다행히 배신자들의 명단을 손에 쥐게 됐으니 형님께서 귀국해 왕위에 오르시면 제일 먼저 이자들을 모두 다 숙청해 버리면 되지 않겠습니까.”
“길게 끌 것 없이 이 책을 은밀히 한양에 계신 아바마마께 보내 죄인들을 처단하게 하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
소현세자의 말에 도현은 바로 고개를 내저었다.
“그랬다가는 일을 망칠 수도 있습니다.”
“아니,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거냐?”
“우선, 아직 청국이 조선에 대한 의심과 감시를 늦추지 않고 있는데 여기서 청과 가까운 관리들을 모조리 숙청해 버린다면 자칫 상대에게 다시 한 번 침략할 빌미를 제공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장부 하나 가지고 칼을 들이대기에는 이자들의 세력이 만만치 않습니다. 어설프게 움직였다가는 오히려 역풍을 맞아 아바마마와 형님의 입장이 곤란해 질 수도 있으니 신중해야 됩니다.”
구구절절 옳은 말이었다. 예전부터 조선은 신권이 강한 나라인 데다 병자호란의 충격으로 그나마 있던 왕실의 권위마저 바닥까지 추락한 이때 권력과 부를 쥔 양반 세력에 칼을 겨누는 건 아무리 명분이 있다고 해도 위험한 행동이었다.
무엇보다 소현세자를 주저하게 만드는 건 청국의 재침입이었다.
그동안 심양에 머물며 청국의 실체를 몸소 체험한 소현세자는 조정 관리와 양반들이 말하는 것처럼 오랑캐가 아니라 상국으로 떠받드는 명나라를 무너뜨리고 새롭게 떠오르는 태양이라는 걸 알았기에 아무런 대비도 없이 다시 전쟁이 벌어진다면 그때가 조선이 멸망하는 날이라고 생각했다.
“으음…….”
잠시 고심하던 소현세자는 낮게 침음성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대로 득보다 실이 많겠구나.”
“언젠가 꼭 죄인들을 처단할 날이 올 테니 그때까지 참으십시오.”
도현의 말에 소현세자는 애써 굳은 표정을 폈다.
“그래야지. 그건 그렇고, 이번에 압류한 정명수의 재산은 지난번에 네가 이야기한 대로 처리하도록 해라.”
“정말이십니까?”
반색한 도현이 되묻자 소현세자는 얼굴 가득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며칠 고민을 해 봤는데 그냥 관저에 놔두고 쓰기보다는 네 생각대로 은밀히 상단을 설립해 재물을 불리고 더불어 청국 내부 사정을 알아내는 탐보망으로 활용하는 것이 백번 낫다는 결론이 나오더구나.”
“잘 생각하셨습니다.”
도르곤과 담판을 지어 정명수의 처벌 권한을 모두 넘겨받은 결정적인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청국 형부가 재판과 처벌을 주관한다면 온갖 비리를 저지르며 조선 백성들의 피땀으로 이룬 정명수의 막대한 재산을 고스란히 빼앗길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그야말로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왕 서방이 챙기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는데 이런 상황을 배가 아파서라도 그냥 두고 볼 도현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관저 재산으로 소현세자에게 바치는 것도 은근히 아까웠기에 며칠 동안 잘 돌아가지도 않는 머리를 굴린 끝에 생각해 낸 것이 바로 상단 설립이었다.
앞서 말한 것처럼 그냥 창고에 넣어 두고 곶감 빼 먹듯이 돈을 쓰기보다 상단을 만들어서 운용하면 재물을 계속 불릴 수 있고 자연스럽게 정보를 모으는 탐보 조직 역할도 가능했다.
소현세자는 체면상 이런 조직을 관리하기 어려워 도현 그가 수장을 맡는다면 막대한 돈을 한 손에 쥐고 마음껏 쓸 수 있으니 도현 입장에서는 이것보다 좋은 일이 없었다.
복잡하게 이럴 것이 아니라 그냥 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몰래 재산 일부를 빼돌려도 되지만 아직 그런 일을 시킬 만한 측근도 없고 무엇보다 살짝 양심에 찔려 다른 대안을 찾은 것이다.
하지만 계획은 좋아도 큰 걸림돌이 하나 있었다. 아무리 생각이 깨어 있다고 해도 어린 시절부터 유교적인 사상을 교육받은 소현세자는 다른 사람도 아니고 대군 칭호까지 받은 왕족이자 자신의 동생인 도현이 직접 상단 수장이 되는 걸 탐탁지 않게 여겼다.
그래서 측근 중 한 명을 골라 새로 설립할 상단을 맡기려고 하는 걸 도현이 침을 튀겨 가며 적극적으로 설득한 끝에 겨우 승낙을 받아 낼 수 있었다.
물론 소현세자가 아무리 동생을 아낀다고 해도 도현이 그동안 보여 준 재능과 나이답지 않은 추진력이 아니었다면 어림도 없었다.
기뻐하는 도현과 달리 소현세자는 걱정스럽고 미안한 시선으로 그를 보며 입을 열었다.
“이 형이 못나서 어린 너한테 무거운 짐을 떠넘기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구나.”
“에이, 그런 소리 마세요. 미력하지만 제가 형님을 도와 드릴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
“그렇게 생각해 주니 정말 고맙다.”
손을 꼭 붙잡으며 소현세자가 너밖에 없다는 표정을 짓자 도현은 괜히 마음 한구석이 찔렸지만 애써 미소 지었다.
다음 날부터 도현의 주관 아래 뒷정리가 시작됐다. 우선 정명수에게 빌붙어 온갖 행패를 부리던 집사 박치술과 하인들은 조선으로 압송되어 강원도 두매 산골에 있는 철광산에서 평생 일하며 죗값을 치르게 했다.
그리고 금자로 오만 냥이 넘는 정명수의 재산은 모두 몰수해 관저 창고로 들어갔는데 이건 눈속임이었고 미리 그 두 배에 달하는 돈을 은밀히 빼돌려서 상단 설립 자금으로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