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반 닦기 1
“마마, 소인 칠현이옵니다.”
문밖에서 들리는 칠현의 목소리에 도현은 읽고 있던 책을 덮으며 말했다.
“들어와.”
안으로 들어온 칠현은 허리 숙여 절을 하고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래, 시킨 일은 다 처리했어?”
“예. 다들 잃어버린 노예라고 생각해서 그런지 예상했던 것보다 싸게 문서를 사들일 수 있었습니다.”
“그거 다행이군. 그러면 이제부터 자유롭게 밖을 돌아다녀도 괜찮은 거지?”
“네.”
돈이 들어오자 제일 먼저 도현이 한 일은 정명수의 저택에서 발견한 조선인 노예들의 주인을 찾아 소유 문서를 사들이는 것이었다.
그냥 풀어 주고 신경을 끌 수도 있지만 어두컴컴한 창고에 갇혀 두려움에 떨던 모습이 자꾸 눈에 밟혀 그럴 수가 없었다.
이렇게 몸값을 주고 소유권을 넘겨받은 뒤 노예에서 해방시켜 주면 마음대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고 국경에서 잡혀 다시 청국으로 보내질 일도 없었다.
다시 팔릴 뻔한 위기에서 구해 주고 노예 신분까지 벗어날 수 있게 해 줬으니 이 정도면 도현 입장에서는 할 만큼 했다고 볼 수 있었다.
“그럼 마무리를 지으러 가 볼까.”
자리에서 일어난 도현은 칠현을 대동하고 관저를 나와 정명수가 살던 저택으로 갔다.
저택은 다른 사람들의 이목을 속이기 위해 장 대인이라는 가공의 인물을 만들어 조금 분위기가 조용해지면 소유권을 넘겨 향후 설립할 상단 본점으로 쓸 계획이었다.
입구를 지키고 있던 위사들의 인사를 뒤로하고 도현과 칠현은 널찍한 마당을 앞에 두고 있는 본채에 서서 조선인들이 모여들기를 기다렸다.
잠시 후 도현이 왔다는 연락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둘씩 나타났고, 순식간에 마당을 꽉 채울 정도로 많은 숫자가 모여들었다.
정명수에게 교살형을 내려 죽인 이후 도현은 빈집이 된 저택을 조선인 노예들의 임시 처소로 사용하도록 허가했다.
본채를 제외한 별채만 해도 차고 넘칠 정도로 많은 방이 있었으니 그 많은 수의 사람들을 한꺼번에 재우고 생활하도록 하기엔 딱이었던 것이다.
“그동안 잘 지냈는지 모르겠군.”
도현의 말에 앞줄에 나와 있던 조선인들 중 사십 대 중반으로 보이는 사내가 허리를 굽실거리며 답했다.
“서, 성은이 망극하나이다. 대군마마의 은혜 덕에 그동안 아무런 부족함 없이 잘 지낼 수 있었습니다.”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자 뒤에 있던 사람들 역시 쭈뼛거리며 허리를 더욱 깊숙이 숙였다.
사람 같지도 않았던 첫인상과 달리 지금은 다들 어느 정도 봐 줄 만한 상태였다.
더럽고 차가운 땅바닥 대신 깨끗한 방에서, 오물 범벅이었던 옷은 도현이 보내 준 새 옷으로, 그리고 하루에 한 끼 먹기도 힘들었던 식사를 지금은 세끼 다 잘 챙겨 먹고 있으니 당연한 결과다.
하지만 은인과도 같은 도현을 사람들이 예전보다 더욱더 어려워하는 까닭은 바로 그의 신분을 알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몰라서 무례를 범했다지만 지금은 다들 도현이 조선의 왕자임을 알고 있는 상태.
아무리 여기가 타국이라고 해도 근본은 조선의 백성인 만큼 감히 고개 들어 그의 얼굴을 보거나 물음에 답하는 것조차 황송하다는 태도를 보였고, 공포와 폭력으로 그들을 지배하던 정명수보다 도현 앞에서 더더욱 행동거지를 조심하게 되는 것이다.
어디서 주워들었는지 어설픈 경어를 섞어 가며 말하는 사내의 모습이 우스웠던지 칠현이 풋 하고 작게 웃음을 터트렸지만 도현이 노려보자 재빨리 표정을 굳히고 먼 산을 바라보았다.
“크흠! 칠현아, 그거.”
“예.”
칠현이 소맷자락에서 끈으로 묶인 종이 다발을 꺼내 도현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이게 무엇인지 아느냐?”
손목을 까딱이며 종이 다발을 흔들자 사내의 시선이 저절로 그쪽으로 향했다.
“모, 모르겠습니다.”
“이건 너희들의 노예 문서다.”
도현이 말을 꺼낸 순간 헉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바로 저 종이 쪼가리 하나 때문에 억지로 그리운 고향을 떠나야만 했고, 먼 타국까지 끌려와 이 고생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핏발이 선 눈동자로 종이 다발을 노려보는 사람들을 순간 애처롭게 바라본 도현은 이내 그런 기색을 지우고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이걸로 무엇을 할 건지 아느냐?”
“…….”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앞에 두고 도현은 팔을 옆으로 쭉 뻗었다.
“이걸 태워 버릴 것이다.”
“……!”
화르륵!
도현이 망설임 없이 활활 불타는 화톳불에 종이 다발을 던져 버리자 사람들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크게 뜨였다.
한 움큼의 재만 남기고 노예 문서가 화톳불 안에서 사라져 가는 광경을 목도한 그들은 처음엔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짓다가 이내 기쁨의 환호성을 질렀다.
“만세! 대군마마 만세!”
“가, 감사합니다!”
“이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어!”
아낙네들은 눈물을 펑펑 흘리며 바닥에 주저앉았고, 사내들은 애끓는 목소리로 ‘연신 대군마마 만세!’ ‘감사합니다!’라고 외치며 서로 얼싸안았다.
도현 역시 그 모습을 보자 알 수 없이 가슴이 뿌듯하고, 왠지 모르게 허리가 쭉 펴지는 것을 느끼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너흰 이제 자유다.”
하늘을 올려다보고 선언하듯 그렇게 말한 도현은 그대로 발길을 돌렸다.
“어! 마마, 벌써 돌아가시게요?”
“그럼. 여기 더 있어 봤자 뭐하겠느냐.”
자기가 한 일도 아닌데 감사의 말을 더 듣고 싶었던 건지 칠현은 아쉬운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고, 서슴없이 앞으로 나아가는 도현의 뒤를 서둘러 쫓았다.
도현의 하루 일과는 쉴 틈이 거의 없을 정도로 아주 빡빡했다. 오전에는 시강원 사서인 김종일과 공부를 했고 오후가 되면 연무장에 가서 시위들에게 무예를 배웠다.
여기다가 틈틈이 상단 설립 준비도 해야 되니 보통 바쁜 것이 아니었다.
너무 힘든 나머지 형인 소현세자를 찾아가 공부를 이틀에 한 번으로 줄여 달라고 말했다가 차라리 상단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라는 핀잔에 얼른 입을 닫고 나와야 했다.
오늘도 어김없이 두 시진 동안 중간에 쉬는 시간도 없이 수업을 들어야 했던 도현은 말린 오징어처럼 서탁 위에 엎드린 채 축 늘어져 있었다.
“젠장. 수능 준비할 때도 이렇게 열심히 안 했는데……. 팔자에도 없는 한문학 공부라니, 이게 뭔 꼴이야.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김종일이 정명수의 비리를 고발했다가 누명을 쓰고 뒤지게 놔둘 걸 그랬어.”
얼마나 스트레스가 심했는지 도현이 헛소리까지 해 대며 지친 심신을 추스르고 있을 때 방 안으로 들어온 칠현이 그를 걱정스럽게 쳐다보았다.
“마마, 어디 아프십니까?”
“별거 아냐. 기운이 좀 빠져서 그래.”
도현이 자세를 바로 하자 칠현은 그의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보고드릴 일이 있습니다, 마마.”
“뭔데?”
“그게…….”
“답답해 죽겠네. 빨리 말 안 해!”
머뭇거리던 칠현은 도현의 재촉에 이야기를 했다.
“어제 마마께서 해방시켜 준 사람들이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합니다.”
“뭐? 팔려 갔던 집에서 목숨 걸고 도망까지 쳐 놓고 갑자기 왜 그러는 거야?”
“귀향을 해 봤자 반겨 주는 사람도 없고 오히려 차갑고 불편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데다 막상 가서 어떻게 생활해야 될지 막막하다는 겁니다.”
실제로 어렵게 귀향해도 이미 가족은 뿔뿔이 다 흩어져 생사도 모르고 아직 조선은 병자호란의 피해를 다 복구하지 못한 상태라 먹고살 방도를 구하기도 힘들었다.
그나마 남자들 같은 경우에는 사지 육신만 건강하다면 일도 할 수 있고 고향 사람들이 반겨 주지만 유교적인 사상 때문에 여자들은 정절을 잃었다며 멸시에 찬 시선을 보내고 환향녀還鄕女라고 그 가족에게까지 손가락질을 했기에 더 살기가 어려웠다.
그걸 알기에 도현은 황당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 상황이 이해가 되기도 했다.
“끄으응. 그래서 전부 남겠다는 거야?”
“그건 아니고 예순 명 정도는 고향으로 간다고 합니다.”
머리가 아픈지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누르며 살짝 눈썹을 찡그리던 도현은 이내 크게 한숨을 내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후우, 내가 구해 줬으니 뒤처리도 깔끔하게 해야겠지.”
“어딜 가십니까?”
“저택으로 가서 어쩔 생각인지 사람들한테 직접 이야기를 들어 봐야겠어.”
“아, 예.”
약간 퉁명스럽게 말을 내뱉고 방을 나서는 도현을 칠현이 얼른 뒤쫓아 갔다.
얼마 전까지 정명수가 쓰던 안채에 도현이 앉아 있자 이제 그의 무武사부이자 전담 호위 무사가 된 김덕술이 노예로 잡혀 있던 사람 다섯 명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왔다.
“마마, 데려왔습니다.”
“이 사람들이 대표야?”
“네.”
도현이 스윽 훑어보자 엉거주춤 서 있던 사람들은 감히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시선을 황급히 아래로 내렸다.
“다들 앉지.”
“아, 아닙니다. 저희처럼 미천한 것들이 어떻게…….”
전열에 서 있던 중년 남성 하나가 황공하다는 듯이 허리를 숙이며 말하는 걸 도현이 중간에 잘랐다.
“내가 불편해서 그러는 거니까 사양하지 말고 앉아.”
“…….”
그래도 사람들이 주저하자 한쪽에 있던 김덕술이 살짝 목소리를 높이며 말했다.
“대군마마께서 하신 말씀 못 들었나!”
그때서야 사람들이 미리 갖다 놓은 의자에 엉덩이를 붙였지만 여전히 불편한지 앉아 있는 품이 영 어색했다.
그걸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도현이 담담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듣자 하니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했다는데 사실인가?”
도현의 물음에 앉기를 사양했던 중년 남성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중년 남자가 노예에서 해방시켜 준 사람들의 대표 역할을 맡고 있다는 걸 알아차린 도현은 천천히 그를 살폈다.
약간 왜소한 체격에 턱수염을 기른 중년 남자는 말투와 태도가 다른 이들과 달리 어느 정도 학식을 쌓은 느낌이 들었다.
“이름이 뭐지?”
도현의 물음에 중년 남자는 고개를 숙이면서 얼른 이야기를 했다.
“장태범이라고 합니다.”
“노예로 끌려오기 전에는 뭘 했나?”
“개성에 있는 상단 서기로 일하다가 그만두고 고향인 평양에서 작은 서당을 열고 훈장 노릇을 했습니다.”
때마침 상단에서 일할 인재를 구하던 도현은 상대가 상단 서기 일을 했다는 말에 눈을 반짝였다.
하지만 상대가 어떤 인물인지 몰랐기에 내색하지 않고 일부러 무표정한 얼굴을 유지하며 질문을 이어 갔다.
“상단 서기와 훈장질을 했다면 글은 좀 알겠군?”
“사서 중에 대학大學만 간신히 뗐습니다.”
대학은 유교 경전에서 공자의 가르침을 나타내는 사서 중에 중요한 책으로, 여기까지 익혔다면 학문을 꽤 많이 쌓았다는 뜻이다.
“그렇군.”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상대를 유심히 바라보던 도현은 다시 본론으로 돌아갔다.
“대충 무슨 이유로 그러는지 알겠는데 그래도 먼 타향보다는 말도 같고 익숙한 조선 땅에서 새 출발을 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그러자 장태범은 얼굴 가득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저희라고 왜 그런 생각을 안 하겠습니까. 하지만 이번에 도망쳤다가 다시 잡혀 오면서 조선에는 더 이상 저희를 반겨 주는 사람이 없다는 걸 알았습니다.”
도현이 있어서 자세히 말하지 않고 대충 얼버무렸지만 백성들을 보호해야 될 관리가 앞장서 천신만고 끝에 도망쳐 온 조선인 노예를 잡아들이고 이웃들도 무슨 병자 보듯이 뒤에서 수군대며 멀리하는 것에 큰 상처를 받았다.
말투에서 느껴지는 서러움과 슬픔에 도현은 얼굴을 굳히고는 앞에 있는 사람들을 잠시 말없이 바라봤다.
이들이야말로 병자호란의 최대 피해자였다. 국가를 잘못 운영해 한순간 가족과 헤어져 노예로 끌려가 비참한 생활을 하도록 만들어 놓고는 천신만고 끝에 겨우 돌아와도 따뜻하게 맞아 주기는커녕 오히려 배척하며 밖으로 밀어내다니, 자신이 한 일은 아니었지만 도현은 너무나도 부끄러운 마음에 고개를 제대로 들 수 없었다.
“앞으로 어떻게 살지 계획은 세워 놓은 거야?”
“지옥 같은 노예 생활도 견디고 살아남았는데 무슨 일을 하든 입에 풀칠이야 못 하겠습니까.”
이야기는 그렇게 해도 아무런 연고도 없는 타국 땅에서 맨몸으로 던져지면 살아남기 어렵다는 걸 도현과 장태범 둘 다 잘 알고 있었다.
잠시 고민하던 도현은 고개를 들며 사람들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이번에 내가 상단을 하나 설립해 운영하려고 하는데 마땅히 할 것이 없다면 거기서 일을 하는 건 어때?”
“저희 전부 다 말씀이십니까?”
뜻밖의 이야기에 장태범뿐 아니라 의자에 앉아 있던 사람들 모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쳐다봤다.
“그래. 이제 시작하는 거라 돈은 적겠지만 그래도 상관없다면 일자리를 주지.”
도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장태범과 사람들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감격한 얼굴로 허리를 굽혔다.
“감사합니다. 솔직히 이제 어떡하나 걱정이 많았는데 기회를 주신다면 정말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예. 밥만 먹여 주셔도 좋습니다.”
“이 은혜를 다 어떻게 갚아야 될지…….”
울먹이면서 연신 감사 인사를 하는 모습에 도현은 약간 멋쩍은 표정을 짓고는 한 손을 들어 사람들을 진정시켰다.
“상단에서 일하기 싫은 사람도 있을지 모르니까 일단 돌아가서 의견을 나눠 본 뒤에 최종적으로 이야기를 해 주길 바라네.”
“말을 들으면 전부 제안을 받아들일 겁니다.”
“맞습니다.”
들뜬 사람들이 방을 나가자 도현은 저택 관리를 맡고 있는 관리를 불러 여기서 지내는 동안 불편한 점이 없도록 잘 보살펴 주라고 당부하고는 관저로 돌아갔다.
“마마.”
말을 타고 가던 도현은 칠현이 은근한 목소리로 자신을 부르자 애가 뭐 못 먹을 걸 먹었나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징그럽게 왜 그래?”
“어려움에 처한 백성들을 따뜻하게 감싸 주시고 호구책까지 마련해 주시다니. 카! 정말 멋있었습니다.”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며 말하는 칠현을 보며 도현은 피식 미소 지었다.
“내가 원래 좀 대단하지. 그나저나 얼떨결에 사고는 쳤는데 그 사람들을 다 먹여 살리려면 앞으로 골치깨나 썩게 생겼어.”
“마마시라면 충분히 해내실 수 있을 겁니다.”
“그런 믿음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거야?”
“정명수를 처리한 것도 그렇고 예전에는 안 그러셨는데 얼마 전부터 갑자기 영리한 여우가 된 것처럼 위기를 잘 극복하셨지 않습니까. 그런 대군마마의 능력을 믿는 거지요.”
이야기를 들던 도현은 살짝 이맛살을 찌푸리면서 칠현을 째려봤다.
“여우라니, 너 지금 날 놀리는 거지?”
“제가요? 설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입꼬리가 위로 올라가는 표정으로 칠현이 손사래를 치자 도현은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요즘 자꾸 기어오르는데 하여튼 너 한 번만 걸리면 그때는 아주 혼쭐이 날 줄 알아.”
“에이, 오해시라니까요.”
“됐어.”
안장 위에서 자세를 바로 한 도현은 지나가듯 툭 말을 내뱉었다.
“허드렛일을 시키더라도 믿을 수 있는 사람을 써야 되니까 혹시 문제 될 것이 있는지 네가 몰래 뒷조사를 해 봐. 특히 장태범이라는 자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상세하게 알아보도록 해.”
“그 많은 사람들을 저 혼자서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묻는 칠현의 모습에 한숨을 푹 내쉰 도현은 답답하다는 듯이 주먹으로 그의 머리를 살짝 쥐어박았다.
“야! 상식적으로 어떻게 그걸 너 혼자서 다 해.”
“그럼 어떻게 하라는 말씀이세요?”
“저택에 있는 위사들의 도움을 받으면 되잖아. 그리고 노예 문서를 매입하면서 원래 생활하던 곳에 가 봤을 테니까 거기서 수소문을 해 보면 더 쉬울 테고.”
“아! 그렇군요.”
이제야 알겠다는 듯이 감탄성을 터트리는 칠현을 보며 도현은 고개를 내저었다.
“저런 걸 측근이라고 데리고 다니려니까 내가 늙는다, 늙어.”
“에이, 또 왜 그러십니까.”
“정 드니까 저리 떨어져.”
“마마!”
그렇게 서로 티격태격하면서 두 사람은 관저로 돌아갔다.
정명수와 함께 온갖 비리를 저질러 재산을 모은 역관 김돌시는 심양으로 돌아오자마자 붙잡혀 관저로 압송됐다.
황제가 보낸 칙사勅使를 호종해 한양에 가서 조정과 관리들을 상대로 또 한몫 제대로 뜯어 온 그는 아무것도 모르고 황궁을 나와 저택으로 돌아가다가 도현이 보낸 위사들에게 체포된 것이다.
심양 한복판에서 그것도 청국 고위 관리들과 끈이 있는 인물을 조선 위사가 잡아간다는 건 예전 같으면 상상도 못 할 일이었지만 예친왕인 도르곤의 묵인 속에 이루어졌다.
이건 지난 전투에서 목숨을 구해 준 도현에 대한 배려도 있지만 더 큰 건 정명수와 김돌시가 천방지축으로 날뛰는 바람에 불만과 원한이 점점 커져서 청국이 조선을 관리하는 데 걸림돌이 된다고 판단을 내리고 둘을 버린 것이다.
어찌 됐든 심문을 해서 그동안 저지른 온갖 비리를 밝혀낸 도현은 정명수의 경우처럼 교살형을 선고하고 재산도 모두 몰수했다.
그 와중에 일련의 사건들을 불편한 시선으로 쳐다보는 청국 관리들이 일부 있었다. 특히 평소에도 수시로 관저를 찾아와 온갖 핑계를 대며 소현세자를 압박했고 죽은 정명수와 김돌시에게 꾸준히 상납을 받던 용골대는 아주 노골적으로 적대감을 표시했다.
꽝!
“시간이 갈수록 도망치는 조선인의 숫자가 줄어들지 않고 있으니 이건 조선 조정이 노예들을 붙잡아 돌려보내지 않고 은근히 조장하고 있는 것 아니오!”
아침부터 관저에 들이닥친 용골대의 호통에 마주 앉아 있던 소현세자는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얼른 입을 열었다.
“오해입니다. 이미 국경 지역에 있는 관리들에게 몸값을 내지 않고 무단으로 도망친 자들은 모두 체포해 청국에 인계하라는 지시를 내려 보낸 걸 아시지 않습니까.”
“흥! 장계 하나만 달랑 써 보내고 그냥 시늉만 하는 것 아니오.”
“당치도 않습니다. 지난달만 해도 저희 측에서 잡아 되돌려 보낸 인원이 쉰 명이나 됩니다.”
어떻게든 고향에 돌아가려고 천신만고 끝에 압록강까지 온 불쌍한 백성들을 따뜻하게 맞아 주지는 못할망정 중간에 붙잡아 다시 청국으로 돌려 보는 것이 너무 부끄럽고 가슴 아팠지만 상대편에 괜한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 소현세자는 이런 사실을 적극 피력했다.
“도망친 노예들의 숫자에 비하면 너무 적단 말이오.”
“본국에 연락해서 국경 경비에 더 신경을 쓰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니 용골대 장군도 이만 화를 푸십시오.”
굴욕적이었지만 소현세자가 머리를 살짝 숙이며 사정하자 그때서야 용골대는 굳었던 표정을 폈다.
“좋소. 세자가 이렇게 말을 하니 오늘은 이만하겠소. 하지만 추후 처리를 어떻게 하는지 두 눈 똑똑히 뜨고 지켜볼 것이오.”
“염려 마십시오.”
아무리 용맹이 뛰어나 황제에게도 인정을 받는 무인이라고 하지만 일개 장군한테 조선의 세자가 아랫사람처럼 질책당하는 모습에, 동석해 있던 도현은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은 분노와 모욕감을 느꼈지만 여기서 나섰다가는 자칫 일이 더 커질 수도 있었기에 속으로 화를 삭여야만 했다.
그런 도현을 용골대가 그냥 내버려 두지 않았다.
한껏 소현세자를 몰아붙이던 용골대는 방 한쪽에 관리들과 함께 조용히 앉아 있는 도현에게 시선을 주고는 삐딱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했다.
“요즘 봉림대군의 위세가 대단하더이다.”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군요.”
딱 봐도 시비를 거는 것이 분명한 상대의 말에 도현은 눈에 힘을 준 채 용골대와 시선을 맞추며 되물었다.
“청국 땅에서 속국 관리들이 설치고 다니다니, 지금은 예친왕 전하께서 귀엽게 봐주셔서 그냥 넘어가지만 언젠가 크게 후회할 날이 있을 거요.”
주제를 알고 까불라는 경고였다.
“아니, 그건 죄인이 조선인이었기 때문에…….”
분위기가 차갑게 얼어붙은 가운데 소현세자가 심양으로 갈 때 자청해서 호종했고 원 역사에서 김종일과 함께 정명수의 비리를 고발했다가 죽임 당할 정도로 강직하고 충성심이 강한 인물인 정뇌경이 나서 변명하려는 순간 도현이 한쪽 팔을 들어 그를 제지했다.
“무슨 이야기인지 알겠습니다. 앞으로는 자중을 하지요.”
작정하고 시비를 걸어오는 이상 괜한 변명은 이쪽만 초라해질 뿐이었기에 도현은 이 자존심 상하는 자리를 그만 끝내려고 상대가 원하는 대답을 해 줬다.
이렇게 도현이 선수 치고 들어가자 더 이상 이 문제를 걸고넘어지기 어려워진 용골대는 잠시 그를 노려보다가 입을 열었다.
“무사히 조선으로 돌아가려면 바짝 엎드려 있는 것이 좋을 거요.”
순간 눈썹을 꿈틀거리던 도현은 초인적인 인내를 발휘하며 말했다.
“용 장군이 절 그렇게 생각해 주시는지 몰랐군요. 아무튼 충고 고맙습니다.”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말투는 날이 바짝 서 있었다.
그런 도현의 태도에 가소롭다는 듯이 피식 미소를 지은 용골대는 소현세자에게 한마디를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난 병자년에 있었던 일을 잊지 마시오.”
“……!”
병자년은 청군이 쳐들어와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오랑캐의 수장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치욕을 당한 해로, 이건 언제든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시 조선을 침략할 수 있다는 강한 협박이었다.
용골대가 돌아가고 방 안에 사람들이 모인 가운데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마지막에 들은 말도 충격적이지만 세자가 용골대에게 수모를 당하는데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는 무력감이 사람들의 가슴을 짓눌렀다.
“이거 괜히 정명수와 김돌시를 건드린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제일 말석에 앉은 관리 한 명이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내자 정뇌경이 눈썹을 치켜올리면서 화를 냈다.
“그럼 자네는 청국 오랑캐들에게 붙어 조정을 능멸하고 온갖 패악질을 저지르는 매국노들을 그냥 내버려 뒀어야 된다는 건가!”
노기가 가득한 호통에 말을 꺼냈던 관리는 자라목이 되어 한발 물러섰다.
“그런 것이 아니라 제 말은 조금 더 조심해서 움직였으면 좋지 않았겠냐는 겁니다.”
“흥! 그게 그거지. 대군마마께서 매국노들을 벌하지 않으셨다면 내가 나서서라도 비리를 고발했을 걸세.”
원 역사에서 정뇌경의 행동을 알고 있는 도현은 자신도 모르게 슬쩍 고개를 끄덕였고 괜히 나섰다가 욕만 바가지로 얻어먹은 관리는 풀 죽은 얼굴로 머리를 숙였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사과는 내가 아니라 대군마마께 하게.”
“용서해 주십시오.”
그러자 관리가 도현을 보며 재차 머리를 숙였고 그는 ‘자식, 그러게 왜 나서냐’는 눈빛을 하면서 점잖게 말했다.
“괜찮소.”
그렇게 잠시 소란스러웠던 분위기가 진정되자 대빈객 직책을 가진 박황이 한쪽에 앉아 있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대군마마께서 옳은 일을 하셨다는 건 나도 동의하는 바이오. 하지만 죽은 매국노들과 끈을 맺어 오던 자들과 일부 청국 관리가 이번 일을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는 것도 사실이니 행여나 꼬투리를 잡혀 본국이 곤란해지는 상황이 벌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될 거요.”
박황은 병자호란 때 청나라가 화의에 반대한 척화신 열일곱 명을 내놓으라고 요구하자 격분해 일대의 명사들을 모조리 호구에 보낼 수 없다며 격렬히 반대한 경력이 있을 정도로 대쪽 같은 성품을 지녔기에 관리들 중에도 따르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 박황의 말이었기에 참석자들은 머리를 끄덕이며 동의하는 표정을 지었다.
“대빈객의 말이 맞소. 당분간은 다들 자중하며 가급적이면 관저 밖 출입을 자제해 괜한 구설에 오르지 않도록 하시오.”
상석에 앉은 소현세자의 말에 사람들은 일제히 고개를 숙이면서 대답했다.
“알겠사옵니다, 저하.”
“용골대와 상대를 했더니 피곤하구려. 오늘은 강의를 하루 쉬도록 하고 다들 그만 나가 보시오.”
“예.”
“봉림대군, 너는 잠시 남아 있어라.”
“……네.”
몸을 일으키려던 도현은 소현세자의 말에 다시 자리에 앉았다.
잠시 뒤 사람들이 다 나가고 넓은 방에 단둘만 남자 소현세자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도현을 바라봤다.
“용골대가 앙심을 단단히 품은 것 같은데 괜찮겠느냐?”
“말은 저렇게 해도 예친왕이 우리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는 이상, 당장 해코지를 하지는 못할 겁니다.”
“그렇긴 해도 안심이 안 되는구나. 주변이 조용해질 때까지 상단 설립은 잠시 중단하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느냐?”
“굳이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만……. 뭐, 괜찮겠죠. 형님께서 신경 쓰이신다면 잠시 일을 미뤄 두도록 하지요.”
도현의 대답에 소현세자는 기쁜 표정을 지었다.
“그래, 잘 생각했다.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옛말도 있으니 너무 성급하게 굴 필요 없지.”
상단 설립은 도현이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던 사업인 만큼 설득하는 데 꽤 애를 먹을 거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의외로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자 소현세자도 한 짐을 내려놓은 듯 홀가분한 마음이 되었다.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그 뒤로 잠시 가벼운 잡담을 나누다가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온 도현은 크게 기지개를 켰다.
“휴우!”
“왜 그러십니까, 마마?”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칠현이 따라와 묻자 도현은 어깨를 주물럭거리며 머리를 옆으로 이리저리 돌렸다.
“역시 방 안에 앉아 어려운 이야기만 해 대는 건 영 성미에 안 맞는단 말이야.”
“농담도. 공부는 항상 열심히 하시지 않습니까.”
“책 읽는 건 재밌으니까 상관없어. 겉으론 아무리 어려워 보여도 그 안엔 배울 점들이 많거든. 하지만 이것저것 재면서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생각하며 움직여야 하는 건 귀찮고 짜증 난단 말이지.”
“허어, 그렇군요.”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는 얼굴로 칠현이 무성의하게 맞장구를 치자 도현은 피식 웃었다.
“뭐, 너한테는 너무 어려운 얘기겠지.”
“아닙니다. 다 이해했거든요.”
“그래그래.”
도현은 대청마루 위에 서서 잠시 한낮의 햇살을 만끽했다.
볼일은 다 끝났으니 이대로 처소에 돌아가도 되지만 날이 너무 좋아서 왠지 모르게 아쉬운 느낌이 들었다.
그렇다고 딱히 바깥을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는 몸도 아니라 어떻게 할까 생각하던 도현은 칠현을 돌아보고 말했다.
“기왕 나왔으니 잠시 산책이라도 하고 돌아가자.”
“예. 마침 후원에 꽃이 활짝 피었다고 하니 그쪽으로 돌아가시지요.”
“그래?”
남자 둘이서 하는 꽃구경이라는 게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꽃 냄새나 풀냄새 같은 걸 맡다 보면 마음도 차분해지고 좋을 것 같아 도현은 흔쾌히 응했다.
소현세자가 있는 처소에서 나와, 왼쪽으로 빙 돌아가다 보면 크고 작은 돌로 바닥을 장식하고 꽃과 초목을 조화롭게 심어 놓은 정원이 있다.
말이 정원이지 상당히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관저에 있는 크고 작은 건물들 뒤로 숨은 듯이 조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통칭 후원이라고 불렀다.
“호오, 네 말대로 꽃이 상당히 많이 피어 있구나.”
별생각 없이 발걸음을 옮기던 도현은 생각보다 많은 꽃들이 피어 있는 광경을 보고 감탄하듯 말했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에 은은한 꽃향기가 실려와 코끝을 간질였고, 어디선가 들려오는 물소리가 청량감을 더했다.
“그러고 보니 후원에 있는 연못엔 잉어도 살고 있다고 그랬지?”
“예. 물이 썩지 않도록 물길을 터 놓은 덕분인지 아무리 더운 여름날이라도 그 근처는 서늘하고 그늘이 땀을 식히기에 딱 좋아서 명당이 따로 없지요.”
“좋아. 거기서 신선놀음이나 좀 해 볼까.”
정자를 이용할 만한 사람이라곤 도현이나 소현세자 정도밖엔 없는데 소현세자하고는 방금 만나고 나온 참이니 분명 비어 있을 터, 시원하게 바람이 통하는 곳에서 낮잠이라도 잘 생각으로 도현은 기운차게 발걸음을 옮겼다.
“음?”
하지만 연못 근처까지 왔을 때 이미 다른 사람이 와 있는 것을 보고 그는 눈을 가늘게 떴다.
“누구지? 먼저 온 사람이 있군.”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도현이 다가가자 그를 알아본 시녀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대군마마.”
“허어, 나를 아느냐?”
이름은 모르겠지만 어딘지 낯이 익다고 생각하며 도현이 말하는데 정자에서 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를 따르는 하녀인데 어찌 서방님의 용안을 못 알아보겠습니까.”
“아, 부인!”
그제야 정자에 와 있던 선객이 장씨 부인인 것을 알아챈 도현은 당황하며 다가섰다.
“어쩐 일로 밖엘 다 나왔소.”
“왜요, 저는 방에서 나오면 안 되는 몸입니까?”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새침한 부인의 대답에 도현이 더욱 당황하자 그녀는 쿡 웃었다.
“용서하세요. 서방님께서 저를 본 게 너무 의외라는 표정을 하고 계셔서 그만.”
장씨 부인은 바람에 살짝 흐트러진 귀밑머리를 넘기며 말했다.
“아무리 저라 해도 계속 방에 있으면 속이 답답해질 때가 있답니다. 그럴 땐 가끔씩 이렇게 나와서 바람을 쐬곤 하지요.”
나직하게 읊조리듯이 말하는 장씨 부인의 눈빛에서 깊은 슬픔을 발견한 도현은 가슴이 먹먹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아직도 자식을 잃은 슬픔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인가.
하긴 열 달 이상을 배에 품고 있다가 겨우 낳은 자식을 그리 허무하게 보냈으니 쉽게 떨쳐 내지 못하는 것도 당연하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그렇게 슬픔에 잠겨 있으면 그 슬픔이 독이 되어 부인의 몸을 해칠까 봐 두려웠다.
뭐라 할 말을 찾지 못한 도현은 살며시 손을 내밀어 장씨 부인의 가느다란 손끝을 살짝 잡았다.
“아…….”
잠시 놀란 듯 보이던 장씨 부인은 이내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도현의 손을 마주 잡았다.
그때 뒤에서 뭔가 움직이는 느낌에 도현이 흘낏 돌아보니 이미 대충 흘러가는 분위기를 눈치챈 칠현이 시녀들과 함께 정자 아래로 물러나 엄지손가락을 척 들어 올리고 있었다.
“끄응.”
“왜 그러십니까?”
“아니, 아무것도 아니오.”
그렇게 말하고 나서 도현은 황급히 정자 아래에 있는 연못을 가리켰다.
“아, 저것 보시오! 무슨 소린가 했더니 잉어가 물장구를 치는 소리로군.”
“어머! 정말요.”
햇살을 받아 투명하게 반짝이는 물 아래 통통하게 살이 오른 잉어 몇 마리가 유유히 연못을 헤엄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때마침 정자에 오기 직전, 칠현이 건네준 게 떠오른 도현은 서둘러 소매 옷깃을 뒤졌다.
“아, 여기 있군.”
“그게 무엇입니까?”
도현이 작은 주머니에서 쌀알 같은 것을 꺼내자 장씨 부인이 처음 보는 것이라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잉어 먹이라오. 이걸 놈들에게 던지면……. 자!”
도현이 휙 연못으로 먹이를 던지자 헤엄을 치고 있던 잉어들이 갑자기 한 군데로 모여들며 요란한 소리와 함께 물을 마구 튀기면서 뛰어올랐다.
“어머.”
정자 위로까지 연못물이 튀자 깜짝 놀란 장씨 부인은 이내 화색을 띠며 신기한 듯 잉어들이 서로 다투는 것을 쳐다보았다.
“부인도 한번 해 보시겠소?”
“제가요?”
정체도 모를 것을 맨손으로 만진다는 게 조금 꺼려지는 듯했지만, 이내 호기심이 더 앞섰는지 장씨 부인이 머뭇거리는 손길로 조금 쥐어서 연못으로 던졌다.
“세상에, 저것 보세요! 어쩜 저리 크게 튀어 오를까!”
먹이를 주는 행위 자체가 처음인지 마치 어린아이처럼 좋아하는 장씨 부인의 모습을 보니 도현 역시 기분이 좋았다.
흐뭇한 미소를 띠고 이쪽을 바라보는 도현의 시선에 처음엔 눈치채지 못했던 장씨 부인 역시 이내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혔다.
“죄, 죄송합니다. 서방님 앞에서 흉한 모습을 보여 드렸네요.”
“흉하다니, 무척 귀엽던데.”
무의식적으로 본심을 툭 내던진 도현의 말에 장씨 부인의 얼굴이 더더욱 빨갛게 달아올랐다.
“서방님도 참. 아랫것들이 듣습니다.”
“들으면 뭐 어떻소. 부부지간에 이런 말도 못 한단 말이오?”
도현은 장씨 부인이 너무 사랑스럽게 느껴져 자기도 모르게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전에는 한 번도 보지 못한 낯선 여자를 부인으로 대해야만 한다는 게 너무 부담스럽게 느껴졌고, 또 장씨 부인이 항상 우울해하고 있는 이유를 알고 나서는 그냥 안쓰럽다는 마음밖에 없었다.
하지만 정든 고향을 떠나 타지에 뚝 떨어진 것은 장씨 부인이나 도현이나 마찬가지, 비슷한 처지라는 생각과 함께 매일같이 한 공간에서 얼굴을 맞대고 살다 보니 정이라는 게 생겨났고, 또한 그 감정이 연정으로 발전하기에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장씨 부인을 향한 마음이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은 이미 자각하고 있었지만, 그 감정의 정체가 무엇인지 지금 불현듯 깨달은 도현은 머리를 망치로 강하게 맞은 듯한 느낌을 받았다.
‘내가 이 여인을 사랑하고 있는 건가?’
원래는 다른 사람의 아내였던 여자다.
그런 사람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느냐고 부정하려 했지만 그래도 도현은 끝내 장씨 부인의 손을 떼어 놓지는 못했다.
“당신은 내 부인이오. 그렇지?”
“예에. 당연한 것을 왜 물으십니까?”
영문도 모른 채 도현의 품에 안긴 장씨 부인은 첫날밤을 앞둔 처녀처럼 가슴이 갑자기 두근거리는 것을 느끼며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아니, 새삼 확인하고 싶어서.”
그래, 지금은 내가 봉림대군이다.
21세기에서 온 도현이자 동시에 이 여자의 남편이며, 소현세자의 동생이고, 조선의 왕족인 것이다.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자. 지금은 그저 이 상황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거다.
그렇게 마음을 가다듬은 도현은 장씨 부인을 품에서 떼어 놓고 싱긋 웃었다.
“미안하오, 부인. 갑자기 당황했소?”
“아, 아닙니다.”
“난 이만 처소로 가 볼 테니 부인은 여기서 좀 더 바람을 쐬다가 돌아가시오. 종종 바깥으로 나와서 이렇게 얼굴을 볼 수 있으면 좋겠군.”
도현은 장씨 부인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돌아서서 칠현을 찾았다.
“칠현아, 뭐하느냐? 어서 돌아가자.”
“아, 예예!”
장씨 부인을 따라온 시녀들과 멀찍이 물러나 있던 칠현은 갑작스러운 도현의 부름에 허둥지둥 따라붙었다.
정자를 뒤로하고 어느 정도 멀어지자 칠현이 넌지시 물었다.
“왜 갑자기 일어나셨습니까? 마님께서 아쉬워하시는 것 같던데요.”
“거기서 더 있으면 앞뒤 분간 못 하고 덮칠 것 같아서 말이야.”
“예엣?”
“농담이다, 농담.”
도현은 콧방귀를 뀌며 성큼성큼 걸어 나갔고, 칠현은 여전히 농담과 진담을 구분 못 할 정도로 종잡을 수 없는 분이라며 투덜거렸다.
하지만 도현의 귀가 새빨개진 것은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다.
흐드러지게 알록달록 예쁜 꽃이 핀 정원처럼 바야흐로 도현의 가슴에도 따스한 봄이 찾아왔다.
어쩔 수 없이 상단 설립은 잠시 뒤로 미뤄졌지만 그렇다고 그냥 시간을 무의미하게 보낼 도현이 아니었는데 일단 방 안에 틀어박혀 자신이 알고 있는 이 시대 정보를 끄집어내 하나씩 정리했다.
고고학 전공이라고 해도 모든 역사를 다 자세히 알 수는 없었는데, 다행히 도현은 병자호란과 그 이후 조선의 상황을 졸업논문으로 쓰고 있었기에 비교적 소소한 사건까지 기억에 담아 두고 있었다.
서탁 위에 백지로 된 책을 펼쳐 놓고 남들이 알 수 없도록 영어와 기호를 써서 향후 10년간 일어날 사건과 역사 속에 기록된 청국 내부 사정을 주욱 적어 놓은 도현은 붓끝으로 모서리를 두드리며 고심에 찬 표정을 지었다.
“황제인 홍타이지 아래 예친왕 도르곤과 범문정이 각각 군부와 행정을 나눠서 운영하며 청국을 이끌어 가고 있는 상태라 이거지.”
범문정은 심양 출신으로 호는 취악이었다.
병법과 모략에 밝은 지략가로 누르하치의 총애를 받아 조정의 여러 높은 관직을 거치며 실권자로 자리 잡았다.
싸움만 잘하는 청국 귀족들을 대신해 행정의 토대를 닦았는데 조세 감면과 과거 시험 실행 그리고 한족 지식인의 등용, 둔전 개간 등 여러 가지 업적을 세우면서 무려 네 명의 황제를 모시며 오랜 세월 청국 최고 권력자 중 하나로 남았다.
“상단을 꾸려 가려면 아무래도 행정권을 쥔 범문정과 친해지면 좋겠지만 그랬다가 괜히 경쟁 관계에 있는 도르곤의 심기를 거스를 수 있으니까 당분간은 자제해야겠군.”
어쩌다 목숨을 구해 주게 된 일로 도르곤과 친해지는 행운을 얻었는데 욕심을 부리다가 그나마 있는 뒷배마저 날려 버릴 수 있었기에 도현은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다음은 조만간 황제가 명을 치는 데 지원군을 보내라고 조선에 요구한다는 건데. 이건 적당히 압록강 근처에서 미적거리다가 오면 욕은 좀 듣겠지만 그냥 돌아가라고 하니까 넘어가고. 쩝, 무슨 일을 하려고 해도 밑에서 수족처럼 움직여 줄 사람이 없으니…….”
이렇게 푸념을 하고 있을 때 밖에서 칠현의 목소리가 들렸다.
“마마, 잠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그래.”
칠현이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오는 걸 보며 도현은 서탁 위에 펼쳐 놓은 책을 덮었다.
“뭐, 할 말이라도 있어?”
그러자 칠현은 소매 안에서 여러 번 접힌 종이를 하나 꺼내 앞으로 내밀었다.
“지난번에 말씀하신 것 중에 우선 장태범에 대한 조사가 다 끝나서 가져왔습니다.”
“어디.”
보고서를 건네받아 펼친 도현은 적혀 있는 내용을 꼼꼼하게 읽어 내려갔다.
일주일 만에 알아낸 것치고는 상당히 상세하게 조사가 되어 있었다.
“다행히 장태범이 잡혀 있던 집 노예 중에 같은 고향 사람이 있어서 어떤 사람인지 자세히 알아낼 수 있었습니다.”
“행수 중 한 명이 물품 매입 가격을 조작해 뒷돈을 챙기는 걸 고발했다가 오히려 상단에서 쫓겨났다 이거지?”
흥미로운 부분을 발견한 도현이 시선을 들고 묻자 칠현은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예. 그 행수가 선수를 쳐서 교묘히 증거를 조작해 장태범에게 죄를 뒤집어씌웠다고 합니다.”
“이건 장태범의 입장에서 그런 거고 진짜 뒷돈을 받아 놓고 고향에 쫓겨 와서는 쪽팔리니까 이렇게 둘러댄 거 아냐?”
섣부른 판단은 금물이었기에 도현이 신중한 태도를 보이자 앞에 앉아 있던 칠현은 자신 있게 머리를 내저었다.
“고향 사람의 말에 의하면 장태범이 낙향해 서당을 열고 일 년쯤 지났을 때 억울한 누명을 씌웠던 행수가 상단 자금을 몽땅 들고 도망가면서 그동안 몰래 해 먹었던 비리가 들통 났다고 합니다. 상단은 그 일로 완전히 망해 버렸고요.”
“확실해?”
“네. 꽤 규모가 있는 상단 하나가 완전히 망했을 정도로 큰일이어서 주변에 소문이 좍 퍼졌다고 합니다. 혹시나 해서 개성 출신들을 찾아 넌지시 물어봤더니 다들 똑같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정보 수집 방법이 제한된 상황에서 이 정도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검증한 것이고 장태범이 상단에 대한 소문을 조작할 이유도, 그런 능력도 없다는 걸 생각해 볼 때 사실일 가능성이 컸다.
나머지 부분도 마저 읽고 잠시 생각을 정리한 도현은 칠현을 보며 말했다.
“네가 보기에는 믿을 만한 사람인 것 같아?”
“다른 건 모르겠지만 상단에서 서기로 일했다고 하니까 어느 정도 능력과 경험이 있다는 거고 불이익을 감수하면서도 윗사람의 비리를 고발한 걸 볼 때 아주 정직하고 정의감도 있는 인물 같습니다.”
“그렇지.”
동의하는지 살짝 고개를 끄덕이던 도현은 마침내 결정을 내렸다.
“장태범 불러와.”
“예.”
얼마 있지 않아 부름을 받은 장태범이 칠현을 따라 방 안으로 들어와서는 상석에 앉아 있는 도현을 보고 바닥에 엎드려 꾸벅 절을 했다.
“대군마마를 뵙습니다.”
“저택에서 지내는 데 불편한 점은 없나?”
“마마께서 배려해 주신 덕분에 편히 잘 지내고 있습니다.”
굳이 묻지 않아도 몸에서 퀴퀴한 냄새가 나고 삐쩍 말라 있던 예전과 달리 비록 제일 싼 옷감이지만 깨끗한 옷을 입고 얼굴에 살이 제법 올라 있는 것만 봐도 잘 지내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 언제라도 좋으니까 뭐 부족하거나 필요한 것이 있으면 날 찾아와서 말하도록 해.”
“예.”
대답은 했지만 감히 왕족인 도현을 찾아와 뭘 요구한다는 건 생각조차 못 할 일이었고 사람들 모두 저택 생활에 아주 만족하고 있었다.
그렇게 가벼운 이야기로 어색한 분위기를 푼 도현은 진지한 목소리로 용건을 꺼냈다.
“갑자기 내가 자네를 왜 관저로 불렀는지 알겠나?”
“잘 모르겠습니다.”
“예전에 상단에서 서기로 일한 적이 있다고 했지?”
“……그렇습니다.”
의아한 표정을 짓는 장태범을 보며 도현은 이야기를 이었다.
“지난번에 말했던 것처럼 이번에 은밀히 내 개인 소유의 상단을 하나 설립할 생각인데 자네가 총관을 맡아 줬으면 하네.”
청국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가급적이면 소현세자가 관련되어 있다는 걸 숨겨야 했기에 도현은 그냥 개인 상단이라고 간단히 말했다.
아무튼 뜬금없이 총관이라는 막중한 자리를 제안하자 장태범은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제, 제가 말입니까?”
“그래.”
고개를 끄덕이는 도현을 보며 장태범은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
“절 좋게 봐주시는 건 감사합니다만 총관을 맡을 능력이 안 됩니다.”
“조선에 있을 때 상단에서 일을 해 봤으니 충분히 할 수 있을 거야. 모르는 것이 있으면 천천히 배워 가면 될 것이고. 무엇보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해.”
“하지만…….”
말끝을 흐리며 장태범이 부담스러워하자 도현은 단호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했다.
“이건 단순히 돈만 벌려고 하는 일이 아니야. 상단을 기반으로 청국에 대한 정보를 알아내 조선을 이롭게 하고 더불어 노예로 끌려와 힘겹게 생활을 이어 가고 있는 백성들을 구해 내려는 거니까 자네도 힘을 보태 주기 바라네.”
“…….”
다른 여러 말을 했지만 그중에서 상단을 통해 자신처럼 노예로 고생하는 사람들을 구해 내겠다는 이야기에 장태범의 마음이 크게 흔들렸다.
무릎을 꿇고 앉은 채 잠시 말이 없던 장태범은 고개를 들어 앞에 있는 도현을 보며 진지하게 물었다.
“조선인 노예들을 구하겠다는 그 말씀 정말이십니까?”
“내 이름을 걸고 명세하지.”
조선 시대에는 이름이 가지는 값어치가 엄청 컸다. 오죽했으면 양반들은 부모님이 지어 주신 이름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 일상생활을 할 때 호號를 대신 썼을 정도다.
양반들도 이런데 하물며 왕족이 이름을 걸고 맹세를 한다는 건 종이 쪼가리에 각서를 써 주는 것보다 더 큰 무게감이 있었다.
그걸 알고 있는 장태범은 도현의 말을 듣자마자 바로 머리를 숙이고는 제안을 받아들였다.
“부족하지만 최선을 다해 대군마마를 보필하겠습니다.”
원하던 대답을 들은 도현은 기분 좋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자네가 날 도와준다니 마음이 든든해지는군. 앞으로 할 일이 아주 많아.”
그러면서 도현이 눈짓을 하자 한쪽에 서 있던 칠현이 소매에서 작은 주머니를 꺼내 엎드려 있는 장태범의 앞에 내려놨다.
“이게 뭡니까?”
“돈이야. 이제부터 총관 일을 보려면 여기저기 돈 들어갈 데가 많을 거야. 넉넉하게 쓰고 부족하면 언제든지 여기 있는 칠현이한테 말하게.”
“예.”
일을 제대로 하려면 기본적인 활동비가 필요했기에 장태범은 별다른 말 없이 돈주머니를 챙겨 넣었다.
나중에 거처로 돌아가 액수를 확인하고는 깜짝 놀랐는데 주머니 안에는 무려 금자 서른 냥이 들어 있었다. 은자로 치면 삼천 냥이었는데 당시 심양에서 일반 가정의 한 달 생활비가 은자 스무 냥이 채 안 되는 걸 생각하면 얼마나 큰돈인지 알 수 있었다.
이처럼 도현은 한번 믿음을 주는 자에게는 뭐든 아끼지 않고 팍팍 밀어줘서 상대가 충성심을 가질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제일 먼저 할 일은 저택에 있는 사람들을 적성에 맞게 분류해 본격적으로 상단을 출범시키기 전에 업무를 가르치는 거야.”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잠시 머뭇거리던 장태범은 뭔가 할 이야기가 있다는 표정으로 그를 봤다.
“괜찮으시면 지금 의견을 하나 드려도 되겠습니까?”
“부담 가지지 말고 뭐든 말해 봐.”
“조선과 달리 땅이 척박하고 치안이 불안한 곳에서 상단을 운영하려면 자체적으로 호위대를 갖출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지.”
도현이 머리를 살짝 끄덕이며 관심을 보이자 힘이 난 장태범은 좀 더 자신 있게 이야기를 이어 갔다.
“마침 저택에 있는 사람들 중에 조선에서 무관이나 병사로 복무했던 이들이 제법 되니 상단 종업원이 아니라 호위대로 활용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설명을 다 들은 도현은 손바닥으로 무릎을 치며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거 괜찮은 생각이군. 인원이 몇 명이나 되지?”
“제가 알기로 열여덟 명입니다.”
“내가 왜 이걸 진작 생각하지 못했나 몰라. 돌아가는 즉시 제일 우선해서 추진하도록 해.”
“감사합니다.”
“박 내관.”
“예, 마마.”
허리를 숙이며 대답하는 칠현을 보며 도현이 말했다.
“적당한 병장기와 가죽 갑옷을 구해서 저택으로 보내 줘.”
“알겠습니다.”
그 뒤로도 상단 운영에 대해 이런저런 대화를 나눈 뒤 도현은 늦은 저녁이 되어서야 장태범과 헤어졌다.
장태범이 건의한 대로 군 출신들을 따로 뽑아 무장시키고 훈련을 실시하면서 도현은 자연스럽게 저택에 배치되어 있던 위사들을 철수시켰다.
그리고 일을 진행하는 김에 진 대인이라는 가공의 인물을 만들어 저택 소유권을 넘긴 것처럼 꾸몄다.
다른 사람들도 그저 노는 것이 아니라 장태범에게 산술과 글자 등 장사를 하는 데 필요한 기본적인 것들을 하나씩 배워 나갔다.
처음에는 남자들만 공부를 했고 여자들은 그저 음식과 빨래를 하며 집안일을 했지만 도현의 지시에 따라 모두 함께 참여했다.
다들 뭔가 하고자 하는 열망이 커서 그런지 가르치는 족족 지식을 습득했고 한 달쯤 지나자 당장 상단을 설립해도 될 정도로 준비가 갖춰졌지만 소현세자의 당부를 생각해서 성급하게 움직이지 않고 주변 분위기를 살피며 시기를 조절했다.
대신 중심가에 있는 삼 층짜리 객잔 건물을 하나 매입해 운영하면서 종업원들을 실전에 투입해 보고 조금씩 정보도 수집했다.
그러는 와중에 도현과 소현세자는 황제인 홍타이지가 개최하는 사냥 대회에 초대됐다.
사냥은 황제가 널리 권장한 놀이이자 행사였다. 먼저 중국 대륙을 지배했던 금나라가 한족의 문화를 지나치게 추종하다 자신들의 언어마저 잊어버리고 결국 동화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것을 경계하며 만주족의 전통을 지키기 위해 수시로 대회를 개최하고 뛰어난 실력을 보인 사람에게는 많은 포상을 내렸다.
전통을 유지하는 것도 있지만 대규모 사냥 대회는 병사들을 훈련시키고 위무하는 효과도 있었다.
이런 행사에 소현세자와 도현을 참석시키는 건 자신들의 강함을 보여 주고 앞으로 조선이 함부로 까불지 못하도록 기를 죽이려는 의도가 깔려 있었다.
같은 맥락에서 청국은 두 사람에게 강제로 만주어를 배우도록 하며 조선을 속국화하려는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심양에서 북서쪽으로 반나절 정도 떨어진 곳에 사냥터가 마련됐는데 한쪽에 수풀이 우거진 숲과 제법 넓은 개울이 있어 노루와 꿩 같은 사냥감이 아주 풍부한 곳이었다.
보통 한번 사냥을 나가면 짧게는 며칠에서 길게는 이십 일 넘게 이어진다. 말을 타고 드넓은 벌판과 숲을 헤치고 다니며 동물을 쫓는 일은 승마에 익숙하지 않은 소현세자에게 상당히 곤욕스러운 일이었다.
실제로 일부 무관들을 제외하고 조선 시대 말을 타는 건 마부가 고삐를 잡고 앞에서 천천히 끌어 주는 것이기에 세자와 수행원들은 사냥을 한 번 다녀오면 며칠씩 앓아눕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그나마 도현은 무예 수련과 함께 꾸준히 승마 연습을 했기에 청국 관리들 앞에서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지 않을 수 있었다.
이미 황제가 도착하기 전에 근위군 삼천 명과 수백 명의 몰이꾼들이 모여 사냥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주위가 상당히 시끄러웠다.
마치 황제가 친정이라도 나온 것처럼 곳곳에 근위병이 서 있고 수천 개의 크고 작은 천막들이 넓은 벌판을 가득 채운 가운데 말을 탄 소현세자 일행이 야영지에 도착했다.
“멈추시오!”
갑옷을 갖춰 입은 청군 장수가 길을 막고 크게 외치는 소리에 일행은 고삐를 당겨 말을 멈춰 세웠다.
“어디서 오는 무리인지 신분을 밝히시오.”
황제가 있기 때문인지 청군 장수의 목소리는 사뭇 엄중했다. 조금이라도 이상한 조짐이 보이면 바로 사살해 버리기 위해 주변에 있는 병사들은 활과 창을 들고 일행을 겨누고 있었다.
그러자 위사장인 신철이 말을 몰고 앞으로 나와 소리를 쳤다.
“조선국 세자 저하와 아우 되시는 봉림대군의 행차요!”
허리춤에서 초청자 명단을 꺼내 확인한 장수는 뒤편에 있는 소현세자와 도현을 스윽 한번 쳐다보고는 부하들을 보며 말했다.
“통과! 길을 열어라.”
“옛.”
창을 든 청군이 길에서 비키자 소현세자 일행은 천천히 야영지 안으로 들어갔다.
길게 늘어선 천막들을 지나 얼마쯤 갔을까, 익숙한 얼굴의 청국 관리가 맞은편에서 말을 타고 왔다.
“벌써 사냥이 시작된 지 한참 됐는데 왜 이제야 도착한 거요!”
얼굴을 보자마자 타박을 해 대는 사람은 만월개라는 이름의 관리로, 후금 시절부터 사신으로 오가며 조선 사정에 밝은 인물이었다.
이자 역시 용골대처럼 죽은 정명수와 김돌시에게 뇌물을 상납받아 왔기에 지난번 사건으로 도현과 소현세자에 대한 감정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그걸 아는 정뇌경이 세자 대신 나서 변명을 했다.
“초행길이라 조금 늦었습니다.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 주십시오.”
“흥! 그러면 더 일찍 관저를 출발했으면 됐을 것 아니오.”
콧방귀를 뀌며 계속해서 트집을 잡는 모습에 그냥 놔두면 상당히 피곤해질 것 같다고 판단한 도현이 나섰다.
“이렇게 좋은 날 서로 얼굴을 붉혀서 뭐하겠습니까.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테니 이번 한 번은 그냥 넘어가 주십시오.”
그러면서 금원보가 든 비단 주머니 하나를 품속에서 꺼내 상대의 손에 올려 줬다.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묵직한 느낌에 시익 미소 지은 만월개는 태연하게 주머니를 챙겨 넣고는 많이 누그러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앞으로는 조심하시오.”
“예.”
“폐하께서 기다리시니 어서 갑시다.”
앞장서 말을 타고 가는 만월개를 따라가면서 소현세자가 낮은 목소리로 옆에 있는 도현에게 물었다.
“그 주머니는 언제 준비한 거냐?”
“청국 관리들이 원래 뇌물을 엄청 밝히잖아요. 그래서 혹시 몰라 금원보가 든 주머니를 몇 개 준비해 왔어요.”
왼쪽 가슴을 손바닥으로 툭툭 두드리며 도현이 하는 말에 소현세자는 대견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네가 이 형보다 낫구나.”
“뭘요. 그냥 잔머리를 굴린 것뿐인데요. 형님께서는 앞으로 조선의 국왕이 되실 뿐이니 이런 것보다는 보다 큰일을 생각하셔야지요.”
그러자 소현세자는 어쩐 일인지 입가에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글쎄다. 요즘은 국왕 자리는 고사하고 살아서 고국에 돌아갈 수나 있을지 걱정이 되는구나.”
“그런 말씀 마십시오. 참고 견디다 보면 분명 좋은 날이 올 겁니다.”
도현이 힘을 줘서 하는 말에 소현세자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의 어깨를 부드럽게 두드려 줬다.
“그래. 우리 함께 그날까지 견뎌 보자꾸나.”
“예.”
그렇게 안쪽으로 얼마쯤 더 가자 다른 것들과 확연히 차이가 날 정도로 큰 천막이 눈에 들어왔다. 황제를 상징하는 용 문양이 화려하게 수놓여 있고 무장을 한 근위병 수십 명이 눈을 부라리며 삼엄하게 경비를 서고 있었다.
“여기요.”
말에서 내린 소현세자와 일행은 잠시 옷차림을 바로 하고는 만월개를 따라 천막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바닥에는 귀한 비단이 깔려 있고 삼 층으로 쌓은 단 위에 금과 보석을 써서 화려하게 치장한 의자가 놓여 있었는데 거기에 황제인 홍타이지가 비스듬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단 밑에 좌우로 청국 대소 신료들이 가지런히 손을 모은 채 도열해 있고 뒤편으로 소현세자 형제처럼 볼모로 잡혀 있는 몽골 부족 유력 인사들이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이 보였다.
“폐하, 조선국의 세자와 둘째 왕자가 도착했사옵니다.”
황제가 시선을 들자 단 앞으로 나온 소현세자와 도현은 청국 황실 예법에 맞춰 양팔을 턴 뒤 바닥에 무릎을 꿇고 네 번 절을 했다.
상당히 치욕적인 상황이었지만 나라가 힘이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형인 소현세자를 따라 바닥에 엎드린 도현은 자신도 모르게 가슴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분노에 이를 악물었다.
‘불과 수십 년 전까지만 해도 조선에 식량을 구걸하던 자들에게 이런 수모를 당하다니 이게 바로 약소국의 서러움인가. 세상이 빠르게 변하는데도 좁은 한반도에 안주해 공자 왈 서책이나 읊어 대는 양반들 때문이야. 약육강식의 법칙이 냉혹하게 적용되는 세상에서 조선이 살아남아 예전 영광을 되찾으려면 어떻게든 힘을 갖춰야 돼. 아무런 힘도 없이 자존심을 내세우는 건 그저 비웃음거리가 될 뿐이야.’
마음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며 도현은 청에 대한 적개심과 힘을 키워 부국강병을 이뤄야겠다는 다짐을 새롭게 다졌다.
황좌에 앉은 홍타이지가 아래를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고개를 들라.”
부복해 있던 소현세자와 도현이 머리를 들자 홍타이지가 약간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오랜만이군. 그동안 잘들 지냈나?”
“예. 황제 폐하의 보살핌 덕분에 편안히 지내고 있습니다.”
“그래. 적응을 잘하고 있다니 다행이군. 관저에만 있지 말고 황궁에도 자주 들어와 내 말벗을 해 주게.”
“알겠사옵니다.”
시선을 옆으로 돌린 홍타이지는 도현을 봤다.
“듣자 하니 활을 잘 쏜다고?”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조금 칭찬을 해 줬다고 우쭐대지 않고 겸손한 도현의 대답에 홍타이지는 약간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지난 전쟁에서 여기 있는 예친왕의 목숨을 구해 줄 정도로 실력이 뛰어나다고 들었네.”
“맞습니다. 적아가 뒤섞인 혼전 상황에서도 어찌나 침착하게 활을 쏘던지 그 강심장에 깜짝 놀랐습니다.”
한쪽에 시립해 있던 예친왕 도르곤이 한 발짝 앞으로 나와 말을 거들자 홍타이지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무에 일가견이 있는 예친왕이 그렇게 칭찬할 정도니 실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직접 보고 싶군. 내일은 나와 함께 사냥을 하도록 하세.”
뜻밖의 말에 도현은 물론이고 천막 안에 있던 사람들 모두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사실 황제와 함께 사냥을 할 수 있는 자는 친왕들과 범문정 같은 핵심 권력층이나 측근으로, 이 자리에 끼었다는 것만으로도 위상이 확 달라진다.
이내 정신을 수습한 도현은 애써 담담한 얼굴로 머리를 숙이면서 대답했다.
“예.”
“이거 벌써부터 내일 사냥이 기대되는군.”
크게 웃는 홍타이지와 달리 엎드려 있는 도현은 사람들 몰래 눈가를 찡그렸다.
잠시 뒤 알현을 끝낸 소현세자와 도현은 천막을 나와 사냥 대회 동안 자신들이 머물 숙소로 가서 짐을 풀었다.
두 사람에게는 총 네 개의 천막이 배정됐는데 소현세자와 도현이 하나씩 나눠 쓰고 나머지 두 개는 수행원들의 몫이었다.
“이거 좀 드십시오.”
의자에 앉아 있던 도현이 고개를 들자 나무 잔을 든 칠현이 서 있었다.
“뭔데?”
“수정과입니다.”
“그게 어디서 났어?”
여기서 수정과를 볼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던 도현이 약간 놀란 얼굴로 묻자 칠현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목마를 때 드리려고 관저에서 한 통 준비해 왔습니다.”
“자식, 오랜만에 제대로 일을 하는구나.”
잔을 받아 든 도현은 바로 한 모금 꿀꺽 삼켰다.
달콤하고 싸한 수정과 특유의 맛에 피로가 싹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카! 이 맛이지.”
단번에 남은 걸 다 마셔 버린 도현이 내미는 빈 잔을 받으며 칠현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마마.”
“왜?”
“아까 황제를 알현하고 나왔을 때 어째서 어두운 표정을 지으신 겁니까?”
“용케 알아봤구나.”
“다른 분들은 눈치채지 못하셨지만 전 철들 때부터 마마를 옆에서 모셔 왔지 않습니까.”
“하긴.”
평소에도 잠잘 때만 빼고 거의 하루 종일 붙어 있으니 미세한 도현의 감정 변화도 금방 알 수밖에 없었다.
“안에서 뭐 안 좋은 일이라도…….”
“그게 아니라 내일 사냥에 황제가 함께 다니자고 해서 말이야.”
수정과와 함께 나무 접시에 담아 온 말린 과일을 씹으면서 도현이 하는 말에 칠현은 반색했다.
“황제와 사냥을 함께 하다니 엄청 좋은 기회 아닙니까.”
그러자 도현은 앞에 있는 칠현을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쳐다봤다.
“넌 참 단순해서 좋겠다.”
“예?”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보는 칠현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툭 때린 도현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청나라 사람이라면 환호성을 지르며 좋아할 일이지만 너도 알다시피 나는 조선의 둘째 왕자잖아.”
“그게 어때서요?”
“조선과는 얼마 전까지 피 터지게 전쟁을 벌인 데다 남한산성에서는 아바마마가 치욕적인 삼배구고두(무릎을 꿇고 머리가 땅에 닿는 절을 세 번씩 총 아홉 번을 하는 것)까지 했는데, 그때 앞에 서서 절을 받았던 황제에게 내가 총애를 받는다면 조선에 있는 대신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어. 아니, 거기까지 생각할 필요도 없이 당장 아바마마께서 날 때려죽이려고 드실걸.”
그때서야 상황을 파악한 칠현이 얼굴을 굳혔다.
“확실히 곤란한 상황이기는 하지만 그렇게까지 하시겠습니까. 잘 말씀드리면 국왕 전하와 대신들도 다 이해할 겁니다.”
실제로 훗날 소현세자가 귀국 후에 죽임 당한 원인 중에는 원수인 청과 가까이 지냈다는 명목상의 이유와 더불어 아들을 경쟁자로 본 인조가 혹시 소현세자와 청이 손을 잡고 왕좌를 빼앗지는 않을까 두려워 먼저 손을 쓴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칠현의 위로가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과연 그럴까.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간다는데, 나중에 조선에서 사약을 든 사신이 오지 않기를 빌어야 될지도 몰라.”
“마마.”
애써 위로하려고 했지만 전혀 효과가 없자 칠현의 얼굴 역시 어두워졌다.
분위기가 침울해진 것을 느낀 도현은 갑자기 하하 웃으며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이런, 내가 실언을 했군. 아직 확실히 정해지지도 않은 미래인데 괜히 지금부터 걱정해 봐야 쓸데없지. 그렇지 않아?”
“그, 그럼요! 앞일이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겁니다.”
반색하며 답하는 칠현의 모습에 도현은 속으로 씁쓸한 마음을 감추고 밝게 말했다.
“어쨌든 내일 황제와 함께 사냥을 하러 가야 되는 건 사실이야. 이제 와서 이러이러한 사정이 있으니 좀 봐주십시오, 하고 청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예. 하지만 마마 말씀대로 너무 가까이해선 안 될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노골적으로 피하면 반대로 황제의 분노를 사겠지. 뭐, 적당히 거리를 두면서 친분을 유지하는 게 상책인가.”
도현이 중얼거린 말에 칠현도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황제 주위에는 권력에 아첨하려는 무리로 바글거릴 테고, 또 경호 인력도 한 부대 정도는 따라붙을 테니 그 사이에서 있는 듯 없는 듯 얌전히 구는 건 문제도 아니다.
그렇게 마음을 정한 도현은 천막에 있는 침상 위에 벌렁 드러누웠다.
“쉬시려고요?”
“그래. 너도 그만 나가 봐라.”
‘예.’ 하고 인사를 한 칠현이 천막을 나가는 기척을 한 귀로 들으면서 도현은 눈을 감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시각을 차단하면 반대로 다른 감각이 예민해진다는 말처럼 눈을 감고 있으니 지금까지 느끼지 못했던 여러 가지 것들이 머릿속으로 흘러들어 왔다.
바닥에서 올라오는 마른 흙 냄새, 천막 밖에서 병사들이 움직이는 기척, 옷이 스치는 작은 소리, 미세한 틈으로 불어오는 바람의 작은 흐름과 심지어 햇빛이 비치는 방향까지 모두 손에 잡힐 듯 느껴졌다.
‘이것도 시간 이동을 한 부작용인가.’
도현은 몸의 작은 이상에 대해 생각했다.
어느 순간부터 도현은 자연 속에 있는 기를 느낄 수 있었다.
처음에는 감각이 예민해진 거라고 생각했다가 무예를 익히면서 그게 바로 무인들이 이야기하는 기라는 걸 알았다.
심신을 맑게 해 주고 정신 집중에 좋다는 말에 첫닭이 우는 새벽 가부좌를 틀고 앉아 명상을 시작했는데 언제부터인가 몸이 가벼워지며 아랫배에 묵직한 느낌이 들었다.
그때부터 주먹을 내지르거나 창과 검을 휘두를 때마다 평소보다 더 강한 힘이 들어갔다.
활을 쏠 때는 목표물이 바로 앞에 있는 것처럼 크게 보이고 움직이는 물체는 정신을 집중하는 순간 마치 슬로비디오를 보는 것처럼 느리게 움직였다.
천천히 숨을 쉬면서 받아들인 기는 작은 시냇물을 이뤄 곳곳에 퍼져 있는 혈맥을 따라 움직였고, 그렇게 몸을 한 바퀴 크게 돈 뒤에 심장을 지나 아랫배에 위치한 단전으로 모여들었다.
기가 움직일 때마다 혈맥에 쌓인 노폐물이 씻겨 내려갔고 온몸의 근육을 자극해 강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기를 받아들이고 다시 혈맥을 통해 순환시키는 것을 반복하며 도현은 서서히 무아지경에 빠져들었다.
그때 식사를 가지고 다시 온 칠현은 얼마 전부터 자주 봐 오던 모습이었기에 방해하지 않고 조용히 다시 천막을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