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반 닦기 2 (6/104)

기반 닦기 2

다음 날 아침 해가 뜨는 것과 동시에 본격적인 사냥 대회가 시작됐다. 수백 명의 몰이꾼이 북과 징을 치며 시끄럽게 사냥감을 몰아오자 가벼운 무복으로 갈아입은 홍타이지가 친왕들과 함께 천막을 나왔다.

“구름 한 점 없이 햇볕이 따뜻하게 내리쬐는 것이 날씨가 아주 좋군.”

“하하하! 그러게 말입니다. 사냥을 하기에 딱 알맞은 날입니다.”

도르곤의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이던 황제는 한쪽에 활을 들고 서 있는 도현을 발견하고는 반갑게 말을 걸었다.

“봉림대군도 나와 있었군.”

“밤새 잘 주무셨습니까.”

정중히 허리를 숙이면서 도현이 인사를 하자 황제는 활짝 미소를 지었다.

“덕분에 푹 쉬었네. 어떤 활 솜씨를 보여 줄지 기대가 크네.”

“괜히 실망이나 시켜 드리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겸손하기는.”

도현의 어깨를 살짝 툭 치고 걸음을 옮긴 황제는 흙바닥에 엎드린 내관의 등을 발판으로 삼아 준비된 애마에 올라탔다.

눈처럼 잡티 하나 없이 하얀 말은 황금으로 장식된 안장이 올려져 있어 황제의 권위와 위엄을 나타냈다.

“자! 그럼 가 볼까.”

“출발!”

따각따각!

선두에 선 황제가 움직이자 친왕들과 근위 기병대가 얼른 뒤를 따랐고, 도현도 그 속에 끼어 있었다.

처음에는 완보로 움직이던 것이 몰이꾼을 피해 온 동물들이 하나 둘 눈에 띄자 어느새 전력 질주 비슷하게 말을 달리며 본격적인 사냥을 시작했다.

땡땡땡!

“저기 사슴이다!”

기병의 외침에 껑충껑충 사람들을 피해 도망가는 사슴을 발견한 홍타이지는 달리는 말 위에서 얼른 화살을 꺼내 있는 힘껏 시위를 당겼다가 놨다.

하지만 날아간 화살은 아슬아슬하게 빗맞아 땅에 박혔고 사슴은 놀리듯이 엉덩이를 흔들며 숲 쪽으로 뛰어갔다.

“젠장!”

나름 활쏘기에 자신감이 있던 홍타이지는 첫발부터 빗나가자 인상을 쓰고는 바로 뒤를 쫓아갔다.

한편 도현은 튀지 않으려고 큰 동물보다 작은 것들을 노렸다.

푸드드득!

요란한 소리와 함께 풀숲에서 꿩 한 마리가 날아오르자 도현은 재빨리 등에 메고 있던 대나무 통에서 화살을 하나 꺼냈다.

퉁! 쉬이이익!

바람 가르는 소리를 내며 일직선으로 쭉 날아간 화살은 도망치는 꿩의 몸통에 명중했다.

그 뒤로도 도현은 꿩이나 토끼 같은 작은 동물만 사냥했고 그마저도 여섯 마리를 넘겼을 때부터는 일부러 살짝 빗나가게 하면서 실력을 숨겼다.

그렇게 아침부터 시작된 사냥은 오후 늦게까지 계속됐다.

“해가 슬슬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했군.”

하루 종일 계속된 몰이꾼들의 함성도 점점 잦아들고, 동물들 역시 제 둥지로 돌아가는지 눈에 띄는 숫자가 줄어들었다.

이쯤에서 천막을 친 야영지로 돌아가는 게 낫겠다고 판단한 도현이 말 머리를 돌렸을 때 숲 한쪽에서 황제 일행이 나타났다.

“아! 봉림대군이 아닌가.”

“황제 폐하.”

안장 양쪽으로 사냥한 동물들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것도 모자라 뒤에 따르는 시종들이 사슴과 멧돼지 등을 운반하고 있는 것을 보고 도현이 손을 모아 인사했다.

“실력이 대단하시군요. 오늘 사냥에 나선 사람들 중 폐하보다 더 많이 잡은 사람은 없을 겁니다.”

“하하! 과찬일세.”

손을 내저으면서도 황제는 자기가 잡은 사냥감들을 보며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아직 사냥의 흥분이 채 가시지 않아 약간 들뜬 얼굴을 하고 있던 황제는 스윽 몸을 기울여 도현 쪽을 관찰했다.

“이런!”

황제 같으면 거들떠도 안 볼 토끼나 작은 동물들만 옆에 매달고 있는 도현을 보고 황제가 혀를 쯧쯧 찼다.

“대체 어찌 된 건가? 자네 활 실력이 매우 좋다고 들었는데.”

“오늘은 운이 안 따르는 모양입니다.”

“그럴 리가. 몰이꾼들이 제 역할을 다 못 한 모양이니 벌을 주어야겠군.”

엄한 표정을 짓는 황제의 말에 도현의 뒤에 있던 몰이꾼들의 안색이 새파래지며 바닥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죄, 죄송합니다, 폐하!”

“저희가 실력이 없어서……. 다신 이런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고개도 들지 못한 채 거듭해서 용서를 구하는 몰이꾼들을 곁눈으로 힐끗 쳐다본 도현은 웃으면서 말했다.

“저 사람들 실력이 모자라서라기보단 폐하의 솜씨가 너무 뛰어나서겠지요. 황제께서 사냥터의 쓸 만한 동물들은 모조리 다 잡아가시니 어찌 제 몫이 남아 있겠습니까.”

“응? 하하! 그게 그렇게 되나.”

도현의 능수능란한 말솜씨에 황제는 금세 다시 기분이 좋아졌다.

“어쨌든 이제 슬슬 돌아가시지요. 금방 날이 어두워질 겁니다.”

“안 그래도 그럴 참이었네. 여봐라! 오늘 사냥은 끝이라고 모두에게 알려라.”

“네, 폐하!”

뿌우!

뿔피리 소리가 숲 전역으로 퍼져 나가는 사이 도현은 황제 일행과 나란히 걸음을 옮겼다.

아예 못 잡은 것도 아니지만 눈에 띄게 큰 놈을 잡은 것도 아니니 이만하면 중간, 아니 중하쯤 될까.

황제 역시 도현의 사냥 결과를 보고 소문이 조금 과장된 것 같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니 대충 원하던 바는 이룬 셈이었다.

도현이 황제와 함께 야영지에 도착하고 나서, 곧이어 숲 여기저기에 퍼져 있던 친왕들도 속속 돌아왔다.

그날 밤 저녁 만찬 자리에는 황제가 직접 잡은 멧돼지 통구이와 사슴 고기가 올라왔는데, 살이 통통하게 오른 모양을 보고 너 나 할 것 없이 칭찬하기에 바빴다.

동행한 무희들의 가무와 음악을 즐기며 술을 마시던 황제는 얼큰하게 취기가 올랐는지 붉어진 얼굴로 말했다.

“하하! 오늘은 정말 좋은 날이로세. 미녀와 술 그리고 우리 청의 든든한 신하들이 함께 있으니 세상에 이보다 더 좋은 게 있겠나.”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폐하!”

황제의 말에 연회 자리에 함께 있던 대신들이 모두 입을 모아 답했다.

“어디 보자……. 그래, 거기 봉림대군과 소현세자에게도 술을 따라 주어라.”

그 말에 곁에 있던 시녀가 술병을 기울여 잔을 채워 주었다.

소현세자는 술을 그리 즐기지 않고, 도현 역시 신경을 날카롭게 세워야 하는 자리에서 술에 취하고 싶진 않았던 터라 두 사람 앞의 술잔은 반 이상 차 있었지만 황제가 권하는 술을 감히 거부할 수는 없었다.

“감사합니다, 폐하!”

두 사람이 포권을 하고 일어서자 황제는 유쾌한 듯 웃음을 터트렸다.

“앞으로도 우리 청과 조선이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길 바라는 기원주네. 쭉 들이켜게!”

“예, 폐하!”

잔이 넘칠 정도로 가득 따라 준 술잔을 두 사람이 단숨에 비워 버리자 황제는 껄껄 웃었다.

“좋아, 역시 사내답구만! 그럼 다음은 우리 청의 기개를 보여 줄 때인가.”

황제의 말에 대충 분위기를 파악한 친왕과 대신들이 호기롭게 일어나 너 나 할 것 없이 술잔을 비워 대기 시작했다.

그렇게 밤새도록 이어진 연회가 새벽에서야 겨우 끝나고, 다음 날 그리고 그다음 날도 사냥이 계속되어 이레가 지난 후에야 겨우 일행은 심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사냥 대회를 무사히 잘 넘기고 몇 달이 지나 밤마다 모기가 극성을 피우는 어느 여름날 갑자기 들이닥친 황제의 칙사로 인해 조선 관저의 평화가 깨졌다.

“세자는 나와 황명을 받으라!”

만월개의 외침에 도현이 먼저 마중을 나가 세자전으로 안내하는 사이에 관복을 다 차려입은 소현세자가 마당으로 나왔다.

“고귀하신 황제 폐하의 말씀을 전할 테니 세자는 엎드려서 들으시오.”

소현세자는 물론이고 도현과 관저에 머무는 관리들이 모두 무릎을 꿇고 앉자 만월개는 비단 두루마리를 꺼내 좌우로 펼쳤다.

“천신天神의 뜻을 이어받아 저 간악한 명나라를 멸하고 청국의 깃발을 대륙 곳곳에 휘날리려고 한다. 이에 신하의 나라인 조선은 당연히 이 영광스러운 행진에 뒤를 따라야 할 것이다. 그래서 올가을까지 만리장성을 넘어 대륙으로 진군할 정병 오천을 보내 대업에 참가할 것을 황명으로 지시하는 바이다.”

“……!”

칙사의 말을 듣는 순간 소현세자와 관리들은 커다란 돌덩이로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것처럼 다들 충격에 빠졌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비록 청에 굴복했지만 유교적 관념을 버리지 못한 왕실과 양반들은 명나라를 하늘처럼 떠받들며 군신의 예를 다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임진왜란 때 지원군을 보내 주어 왜병을 물리칠 수 있었다고 생각하는데 사실 명나라 지원군은 식량만 축냈고 실제로 왜군을 격퇴한 것은 이순신 장군의 수군과 각지에서 궐기한 의병들 덕분이었다. 그런 명을 치는 일에 군사를 보내라니 이건 조선 입장에서 엄청난 폐륜이었다.

소현세자와 관리들의 반응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만월개는 미간을 찌푸리며 버럭 고함을 질렀다.

“뭘 하고 있는 거요!”

“아, 예. 황제 폐하의 명을 충심으로 받들겠나이다.”

정신을 차린 소현세자가 황급히 이마를 땅에 박으며 대답하고는 조심스럽게 두 손으로 칙서를 건네받았다.

그런 소현세자를 보며 만월개는 짐짓 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지원군은 두 달 안에 심양으로 와야 될 것이오. 만약 이를 어긴다면 황상의 분노가 명이 아니라 조선으로 향할 수도 있으니 명심하시오.”

“예.”

말을 안 들으면 조선으로 쳐들어가겠다며 아예 대놓고 협박했다.

소현세자와 관리들의 얼굴은 자연히 딱딱하게 굳었고 관저를 뒤집어 놓은 만월개는 황명을 전하고는 곧장 돌아가 버렸다.

즉시 세자전에서 비상 회의가 열렸지만 모여 앉은 사람들은 아무런 해결책을 내놓지 못하고 다들 어두운 얼굴로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명나라를 공격할 지원 병력을 내놓으라니 이런 곤혹스러운 경우가…….”

“아무리 형세가 궁핍하다지만 이백여 년간 군신 관계를 유지해 온 나라에 칼을 겨누라니 이건 아니 될 일입니다.”

“그것도 그렇지만 아직 병자호란의 피해도 다 복구하지 못했고 한창 농사를 지어야 될 시기인데 오천이나 되는 군사와 군수물자를 마련하는 것이 가능할지나 모르겠습니다.”

정뇌경의 말에 훗날 이조참판까지 지내는 대빈객 박황이 걱정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청의 요구를 다 들어준다면 조정의 살림이 피폐해지는 건 물론이고 올해 농사도 크게 힘들어질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니…….”

어떻게 지원군을 보낸다고 해도 잘해야 화살받이가 될 것이 뻔한 전쟁에 정예병을 내줄 수는 없고, 그럼 농민병뿐인데 기계가 없는 이 시대에 오천 명이나 되는 장정이 빠져나가면 농사에 큰 타격을 입는 건 불가피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요구를 거절할 수도 없는 노릇이지 않소이까?”

상석에 앉은 소현세자의 한탄 섞인 말에 좌중의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솔직히 지원군이 온다고 해도 걱정입니다. 청이 이걸 핑계로 세자 저하를 또 전쟁에 끌고 가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설마 그렇게 하겠소.”

박황이 애써 아닐 거라 부정했지만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이미 한 차례 경험을 했는데 두 번이라고 못 할까요.”

“이것 참…….”

한참이 지나도 해결책은 고사하고 걱정거리만 잔뜩 쌓아 가는 한심한 모습에 보다 못한 도현이 입을 열었다.

“형님.”

“왜 그러느냐?”

자신을 쳐다보는 소현세자와 관리들의 얼굴을 스윽 한번 훑어본 도현은 차분히 이야기를 했다.

“우리가 여기서 아무리 이야기를 나눠도 결국 어떻게 할지 결정을 내리는 건 한양에 계시는 아바마마가 아닙니까.”

“그렇지.”

“그럼 괜히 시간을 흘려보내기보다 조금이라도 빨리 이 사실을 알려 드리고 대책을 강구하도록 하는 것이 현명하지 않을까요.”

이야기를 들은 소현세자와 관리들은 머리를 끄덕였다.

“네 말이 맞구나. 이것 보시오, 대빈객.”

“하교하십시오.”

박황이 고개를 숙이는 걸 보며 소현세자는 근엄한 목소리로 지시를 내렸다.

“아바마마께 올리는 글을 적어 줄 테니 내일 날이 밝는 대로 황제의 칙서와 함께 한양으로 최대한 빨리 보내도록 하시오.”

“알겠사옵니다.”

그렇게 갑작스러운 황명으로 열린 비상 회의는 별다른 소득 없이 끝났고, 다음 날 소현세자가 지시한 대로 일단의 기마가 관저를 나와 한양으로 달려갔다.

지원군 파견 때문에 관저 분위기가 어수선한 가운데 한동안 방 안에 틀어박혀 뭔가를 고심하던 도현은 칠현을 시켜 새로 설립한 봉황상단 총관을 맡고 있는 장태범을 은밀히 불러들였다.

“마마, 저 칠현이옵니다.”

“들어와.”

도현의 허락이 떨어지자 칠현이 장태범과 함께 안으로 들어왔다.

“부르셨사옵니까, 마마.”

바닥에 공손히 무릎을 꿇고 앉은 장태범을 보며 도현은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어서 오게. 바쁜데 부른 건 아닌지 모르겠군.”

“아닙니다. 마침 대군마마께 보고드릴 일도 있어서 저녁쯤에 찾아뵈려고 했습니다.”

“그래? 뭔지 말해 보게.”

장태범은 소매에서 반으로 접힌 봉투를 하나 꺼내 서탁 위에다가 올려놨다.

“지난번에 지시하신 대로 중심가에 있는 포목점과 쌀가게를 하나씩 매입했습니다.”

봉투를 열어 보자 가게 매매 계약서 두 장이 들어 있었다.

내용을 천천히 살펴본 도현은 흡족한 얼굴로 머리를 끄덕였다.

“예상했던 것보다 더 싼 값에 매입했군.”

“운이 좋았습니다.”

“이게 다 장 총관의 능력이지. 수고 많았네.”

도현의 칭찬에 장태범은 황공하다는 듯이 머리를 숙였다.

사냥 대회 이후 용골대를 비롯해 죽은 정명수한테 뇌물을 상납받던 청국 관리들에게 은밀히 값비싼 선물을 보내 먼저 화해의 손길을 내민 도현은 상대의 견제와 압박이 수그러들자 정식으로 상단을 출범하고 이처럼 조금씩 세를 늘려 가는 중이었다.

계약서가 든 봉투를 칠현에게 건넨 도현은 진지한 얼굴로 용건을 이야기했다.

“어제 관저에 황제의 칙사가 왔는데 소식을 들었나?”

황제가 거론되자 장태범은 자세를 바로 하며 대답했다.

“청국이 지원 병력을 요구한 것 말씀이십니까?”

“맞아.”

“지원군을 보내라는 것이 걸리기는 해도 명과 청의 전쟁은 거의 연례행사처럼 계속되어 온 일 아닙니까.”

유교적 가르침을 들먹이면서 펄쩍 뛰는 양반들과 달리 장태범의 담담한 태도에 도현은 살짝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자네 말대로 크게 놀랄 일은 아니지만 이번에는 아무래도 규모가 꽤 커질 것 같아.”

“얼마나 말씀입니까?”

“확실하지는 않지만 황제가 직접 움직일 가능성이 커.”

“……!”

도현의 말에 장태범은 물론이고 한쪽에 서 있던 칠현도 깜짝 놀라 눈을 치켜떴다.

친정親征에 대해서 칙사가 한마디도 꺼낸 것이 없었지만 도현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건 지난번 사냥 대회 중에 홍타이지가 친왕과 여러 대신들을 앉혀 놓고 그런 낌새가 풍기는 말을 했기 때문이다.

당시 소현세자를 비롯해 함께 있던 사람들은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겼지만 황제인 홍타이지가 대륙을 정벌하는 것에 얼마나 열망을 가지고 있는지 역사적인 사실을 통해 잘 알고 있던 도현은 놓치지 않고 조만간 뭔가 큰일이 벌어질 거라고 짐작했다.

“예친왕이나 다른 친왕들을 보내지 않고 직접 친정에 나선다는 말씀입니까?”

“그럴 거야.”

“이거 보통 일이 아니군요.”

황제가 직접 군을 이끄는 만큼 다른 때보다 많은 군대가 동원될 것이 분명했고 그럼 안팎으로 큰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말인데, 이번 전쟁을 한몫 단단히 잡는 기회로 활용했으면 하는데 자네 생각은 어떤가?”

“전쟁만큼 큰 장사판도 없지요. 하지만 군납은 대부분 청국 귀족이나 관리와 연결된 대형 상단들이 꽉 잡고 있어 우리 같은 신참은 끼어들기 어려울 텐데요.”

실제로 큰돈이 오가고 떨어지는 콩고물도 많았기에 상위 다섯 개 상단이 서로 뭉쳐 군납을 거의 독점하고 있어서 봉황상단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다.

괜히 기웃거리다가 다섯 개 상단의 눈에 걸리면 집중 견제를 받아 그나마 있는 가게들마저 문을 닫게 될 수도 있다.

이런 상황을 알기에 회의적인 장 총관과 달리 도현은 뭔가 생각해 둔 한 수가 있는지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면서 이야기를 이어 갔다.

“전쟁이 나면 값이 치솟는 게 뭘까?”

“그야 병장기를 만들 철과 병사들을 먹일 식량이지요.”

“철이야 군대에서만 대량으로 쓰는 거고 군납업자들이 생산과 유통까지 꽉 틀어쥐고 있으니 우리가 끼어들기 어렵지만 식량 특히 쌀은 예외지. 군량을 조달한다고 시중에 있는 쌀을 대량으로 징발하면 한창 추수가 진행 중인 가을에 전쟁이 벌어진다고 해도 일반인들도 밥을 먹어야 되니까 가격이 올라갈 수밖에 없지 않겠어?”

“그렇지요.”

“미리 쌀을 준비해 놨다가 가격이 오르면 풀어서 이익을 내는 거야. 어때?”

이야기가 끝나자 장 총관은 복잡한 표정을 짓고는 도현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말씀대로만 된다면 분명 큰 이익을 거둘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제일 중요한 쌀을 어디서 확보하실 겁니까? 청국은 애초에 생산량이 적은 데다 전쟁을 앞두고 대형 상단들이 선점해 놨을 테고 설마 조선에서 들여올 생각은 아니시겠지요.”

최근 백 년 사이에 거듭된 전란과 흉년으로 농작물 생산량이 대폭 줄어들었고, 이번에는 황제의 명령에 따라 지원 병력과 함께 대량의 군수품도 같이 챙겨 와야 했기에 조선의 사정도 최악이었다.

이런 상태에서 도현이 쌀을 매점매석한다면 돈에 눈이 멀어 조선 백성들을 굶어 죽게 만드는 것이기에 처음 상단을 세운 취지에 완전히 위배되는 일이었다.

“조선도 사정이 어려울 텐데 그럴 수는 없지.”

혹시나 하며 내심 걱정하던 장 총관은 도현이 고개를 좌우로 내젓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의아한 얼굴로 머리를 갸웃거렸다.

“그러면 어디서……?”

그러자 도현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전쟁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으면서도 매년 쌀이 풍부하게 생산되는 곳이 있잖아.”

“…….”

살짝 귀띔해 줬지만 장 총관은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광동성과 절강성 같은 양자강 이남 지역에 가면 쌀을 아주 싸게 그리고 많이 구매할 수 있지 않겠어.”

이들 지역은 예전부터 수량이 풍부하고 날씨가 좋아 굶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식량이 풍부했는데 특히 아열대 기후에 속하는 광동성은 일 년에 벼농사를 두 번씩 지었다.

얼핏 듣기에 상당히 그럴싸한 계획이었지만 문제점이 많았다. 노련한 장 총관은 바로 그걸 지적했다.

“괜찮은 생각이십니다만 기본적으로 거리가 멀고 전쟁 때문에 육로가 막혀 있어서 어쩔 수 없이 해로를 이용해야 되는데 우리한테는 그럴 만한 배가 없지 않습니까? 그뿐만 아니라 해적과 풍랑 등 위험 요소가 너무 많습니다.”

우려를 나타내는 장 총관과 달리 도현은 강하게 자신의 주장을 밀어붙였다.

“어려움이 없다면 다른 상단에서 왜 여태껏 손을 대지 않았겠어. 위험을 감수하는 만큼 성공했을 때 거둘 이익이 크니까 난 충분히 해 볼 만하다고 생각해. 잘만 하면 상단을 단번에 크게 키울 뿐 아니라 교역량을 늘려 굶주리는 조선 백성들에게 식량을 공급해 줄 수도 있으니 이거야말로 일석이조 아니겠나.”

여전히 불안감을 지울 수 없었지만 조선에 있는 백성들을 굶주림에서 구할 수 있다는 말에 마음이 흔들린 장 총관은 고심한 끝에 머리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마마의 뜻이 그러시다면 분부대로 실행하겠습니다.”

“하하하! 잘 생각했어. 배는 요녕성에 가면 명나라 수군이 버려두고 간 전선이 많다고 하니까 그걸 이용하면 될 거야.”

단순히 충동적으로 결정한 것이 아니라는 걸 보여 주기라도 하듯 구체적인 방법까지 알려 주자 장 총관의 얼굴도 진지해졌다.

일단 결정이 내려지자 장 총관은 머뭇거리는 것 없이 아주 신속하게 움직였는데 제일 먼저 요녕성으로 가서 적당한 배가 있는지부터 알아봤다.

다행히 도현이 이야기한 대로 청군에 요녕성이 함락되자 명나라 수군이 허겁지겁 후퇴하면서 미처 파괴하지 못하고 버린 전선이 제법 남아 있었다.

몇 년 동안 아무도 관리를 해 주지 않고 그냥 방치해 두는 바람에 목재가 썩거나 부서져 도저히 쓸 수 없는 것이 태반이었지만 장 총관은 그중에서 상태가 괜찮은 배 여섯 척을 찾아내는 수완을 발휘했다.

소유권은 지방 관리에게 적당히 뒷돈을 찔러주는 것으로 깔끔하게 해결했는데, 결과적으로 새로 건조하거나 다른 사람이 쓰던 걸 구입했을 때보다 절반도 안 되는 가격에 배를 구할 수 있었다.

그다음은 실제로 배를 움직일 선원을 모으는 것이다.

이것도 걱정과 달리 쉽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조선인 노예 중에 수군이나 고기잡이로 생계를 잇던 어촌 출신이 의외로 많아 이들을 사들여 선원으로 쓴 것이다.

광동성과 절강성까지 가는 바닷길을 잘 아는 한족 다섯 명도 고용해 길잡이로 삼았다.

만반의 준비가 다 갖춰지자 도현은 바로 선단을 띄웠다. 첫 거래이고 상단 자본금의 절반에 달하는 막대한 돈이 투자되는 아주 중요한 임무인 만큼 장 총관이 직접 인솔했다.

“지금쯤 출발했겠지?”

정자 위에 서서 바다가 있는 남쪽 하늘을 한참 동안 바라보던 도현의 말에 칠현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예. 아침 일찍 항구를 떠난다고 했으니 벌써 먼 바다에 나가 있을 겁니다.”

“잘되겠지?”

언제나 자신만만한 모습을 보여 주던 것과 달리 도현이 좀처럼 걱정을 떨쳐 내지 못하고 노심초사하자 뒤에 있던 칠현이 그를 안심시켰다.

“최선을 다해 준비했고 장 총관이 직접 선단을 이끌고 갔으니까 분명 무사히 잘 다녀올 겁니다.”

“그래야지. 이제 주사위는 던졌으니 결과는 하늘에 맡기는 수밖에.”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잠시 남쪽을 바라보던 도현은 이내 몸을 돌려 정자를 내려갔다.

한편 소현세자가 보낸 급보를 받은 조선 조정은 청국 황제의 지원 병력 요구에 발칵 뒤집혔다.

갑론을박 이야기가 많았지만 재침략을 할 수도 있다는 협박에 겁을 먹은 인조는 중신들 대부분이 반대함에도 불구하고 청의 요구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조야에 명망이 깊은 인물인 임광任絖을 주장으로 삼고 뛰어난 무신인 유림을 부장에 임명해 군사 오천을 이끌고 청국에 가라는 왕명을 내렸다.

하지만 곧 곤혹스러운 상황에 부딪쳤다. 주장인 임광이 명과 조선은 오랜 세월 인연을 맺어 온 군신지간으로 지난 임진왜란 때도 큰 도움을 받았는데 사람 된 도리로 어찌 그걸 저버리고 칼을 들이밀 수 있겠냐는 내용의 상소를 올리고는 건강이 안 좋다는 핑계를 대고 출정 명령을 거절한 것이다.

이건 명백한 항명이었다.

다른 때 같으면 삭탈관직은 물론이고 극형을 내려 엄벌했겠지만 병자호란이라는 치욕스러운 일을 겪고도 아직 국제 정세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제대로 상황 판단을 못 하고 꽉 막힌 양반들 대부분이 임광의 행동에 적극적으로 동조했기에 인조는 그저 속으로 화를 삭일 수밖에 없었다.

다급해진 인조는 어쩔 수 없이 임광 대신 무장인 이시영李時英으로 주장을 교체했고 항명에 대해서도 크게 벌을 내리지 못하면서 국왕의 체면만 깎였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고 이 사건을 계기로 그동안 수면 아래 살짝 가라앉아 있던 주화파와 척화파의 갈등이 불거지며 조정의 혼란은 점점 더 심화됐다.

“국난을 헤쳐 나갈 노력은 하지 않고 도의를 저버린 채 오랑캐와 손을 잡고 자신의 안위만 챙기는 간신배들을 조정에서 몰아내셔야 하옵니다.”

“맞사옵니다. 이런 때일수록 명과 관계를 더욱 공고히 해서 서로 힘을 합쳐야 될 것입니다.”

척화파에 속하는 대신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맞은편에 앉아 있던 주화파가 발끈해서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다가 지난 병자년의 치욕이 재현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러는 거요! 전하, 비바람이 거세게 불 때는 잠시 몸을 낮추고 피하는 것이 상책입니다. 어리석은 저들의 말을 듣지 마시옵소서.”

“흥! 선비의 도리와 절개를 버리고 겁쟁이처럼 뒤로 숨는 걸 어찌 사대부라 할 수 있겠소.”

“그럼 공은 심양에 계시는 세자 저하와 봉림대군의 안위는 어찌 되든 상관이 없다는 거요!”

“그건…….”

“아무런 대책도 없이 청국을 오랑캐라 배척하고 명만 바라보다가 지난날 그 치욕을 당한 것 아니오!”

“그래서 바짝 엎드려 오랑캐들이 시키는 대로 하는 개가 되자는 거요?”

“개라니 말이 너무 심하지 않소이까!”

“왜, 찔리는 거라도 있는가 보오?”

“뭐요!”

언성이 높아지다 못해 금방 멱살이라도 잡을 것처럼 험한 말이 오고 가자 상석에 앉아 있던 인조는 팔걸이를 손바닥으로 탕 내리치며 고함을 질렀다.

“그만하시오! 다들 신성한 대전에서 이게 무슨 추태요!”

“흐흠.”

“송구스럽사옵니다, 전하.”

호통을 들은 대신들은 뜨끔한 표정으로 괜히 헛기침을 하거나 머리를 숙였다.

그런 대신들을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본 인조는 짜증을 내며 자리에서 일어나 대전을 나가 버렸다.

“경들을 믿고 어떻게 나라를 운영해야 될지 정말 한심하오!”

이렇게 인조가 크게 화를 냈지만 주화파와 척화파의 갈등은 시간이 갈수록 더 깊어졌고 그런 가운데 이시영이 이끄는 오천 명의 지원 병력이 한양을 출발해 심양으로 향했다.

<2권에서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