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권
해적 토벌 1
전쟁을 앞두고 심양 안팎에 긴장감이 감돌자 알아서 바깥출입을 자제하고 관저에서만 지내던 소현세자와 도현은 황궁에 들어오라는 갑작스러운 연락에 황급히 길을 나섰다.
따각따각!
“갑자기 무슨 일일까요?”
마차를 탄 소현세자는 맞은편에 앉아 있는 도현의 물음에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글쎄다. 나도 왜 그러는지 도통 감이 잡히지 않는구나.”
“이거 괜히 불안한데요.”
“그러게 말이다. 그저 큰일이 아니길 바랄 수밖에…….”
말끝을 흐린 소현세자는 답답한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몇 가지 짐작되는 것이 있는 도현은 그런 소현세자를 보며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이건 제 생각인데 혹시 지원 병력 때문에 이러는 것 아닐까요?”
“지원 병력이 왜? 청국에서 요구한 대로 군대와 물자를 보냈잖아.”
“그렇긴 하지만 아직 심양에 도착한 건 아니잖아요.”
“……!”
이시영 장군이 지휘하는 지원 병력 오천 명은 압록강을 넘은 지 한참 됐지만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계속 행군을 미적거리고 있었다.
“벌써 지시한 날짜에서 보름이나 지난 상황입니다. 제가 황제라고 해도 화가 날 만하지요.”
“끄으응.”
뭣 때문에 이시영 장군이 그런 행동을 하는지 짐작하고 있는 소현세자는 미간을 찌푸리며 낮게 앓는 소리를 냈다.
“네 말이 맞다면 황제의 분노를 어찌 감당해야 될지 걱정이구나.”
“필요 없으니 돌아가라고 호통을 치더라도 나중에 보복을 당하지 않으려면 무조건 버텨야 됩니다.”
자존심이 상하는 이야기였지만 소현세자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수밖에 없겠지.”
“내키지 않으시면 제가 대신 사정을 하겠습니다.”
왕족으로서 상당히 굴욕적인 일을 도현이 자청해서 맡겠다고 하자 소현세자는 따뜻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며 머리를 내저었다.
“아니야. 그래도 세자인 내가 해야지.”
그걸 끝으로 마차 안은 무거운 침묵에 빠져들었다.
언제나 시끌벅적하던 황궁 앞 거리는 전쟁의 여파로 상당히 경직된 분위기를 풍겼다.
두 사람이 탄 이두마차 옆으로 전장을 향해 떠나는 병사들과 군수품을 가득 실은 수레 행렬이 줄을 지어 지나갔다.
높다란 성문을 지나 들어간 황궁 안도 사뭇 공기가 달랐는데 중무장한 근위병이 곳곳에 서 있고 궁인들도 경직된 얼굴로 발걸음을 옮겼다.
마차에서 내린 소현세자와 도현은 함께 온 박황과, 박석이 깔린 황궁을 가로질러 조회가 열리는 숭정전 앞에 도착했다.
규모가 그리 크지 않지만 돌계단이 세 개 있고 앞쪽에 흰색 난간이 있는 숭정전은 황제가 정무를 보고 신하들과 나랏일을 처리하는 곳이기에 황궁에서도 아주 중요한 건물이었다.
그걸 보여 주기라도 하듯 건물 여기저기에 황제를 뜻하는 용 조각과 그림이 보였고 근위병들이 눈을 날카롭게 뜨고 경비를 서고 있었다.
가벼운 몸수색 뒤에 실내로 들어간 세 사람은 예상대로 대전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걸 보고 얼굴을 살짝 굳혔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두 줄로 서 있는 청국 대신들 사이로 걸어간 세 사람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사배를 했다.
황제인 홍타이지는 옥이 깔린 삼단 대석 위, 황금과 보석으로 치장한 황좌에 앉아 있었다. 양쪽 기둥에 마치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생생하게 조각된 황금 용 두 마리가 발톱을 잔뜩 곧추세운 모습으로 걸려 있어 위압감을 줬다.
한 팔로 턱을 괸 채 부복해 있는 소현세자와 도현을 잠시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홍타이지는 손바닥으로 팔걸이 끝을 세게 내려치며 호통을 쳤다.
탕!
“지시한 날짜가 벌써 보름이나 지났는데 조선군의 머리털도 볼 수 없으니 이게 어찌 된 일인가! 감히 내 말을 무시하는 건가!”
노기에 찬 황제의 말에 소현세자는 황급히 머리를 숙이며 변명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오해이십니다.”
그러자 한쪽에 서 있던 용골대가 불쑥 끼어들어서는 바짝 날이 선 목소리로 소현세자를 추궁했다.
“그럼 왜 아직도 도착하지 않는 거요! 조선군 때문에 벌써 만리장성을 향해 떠났어야 될 선발대가 움직이지 못하고 아직도 성 밖에 머물고 있지 않소. 명을 치려는 계획이 시작부터 어긋나게 생겼으니 이 책임을 어떻게 질 거요.”
용골대가 성난 얼굴로 마구 윽박지르자 소현세자는 미리 마음의 준비를 했는데도 기세에 눌려 식은땀을 흘리며 살짝 당황했다.
“그건…….”
“지난날 명군이 도움을 요청할 때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전장으로 달려오더니 폐하께서 직접 지시를 내리셨는데도 이렇게 미적거리는 건 뭔가 불순한 마음을 품은 것이 분명합니다. 조선군을 부른 건 우리의 군세가 부족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황제 폐하를 섬기는지 알아보려고 한바 이제 속마음을 알았으니 그냥 돌려보내십시오.”
같이 부복해 있던 도현은 자신들에게 무슨 억하심정이 있는지 얄미운 소리만 골라서 하는 용골대의 모습에 몰래 이를 악물었다.
그런 가운데 소현세자는 황제가 용골대의 말대로 할까 봐 급히 마차를 타고 오면서 도현과 짜 맞춘 이야기를 했다.
“저희가 딴마음을 먹다니, 절대 아닙니다. 그저 얼마 전 내린 비 때문에 강이 불어나고 바닥이 온통 진창으로 변해 행군이 지체되었을 뿐입니다.”
“흥! 고작 그걸 변명이라고 하는 건가.”
콧구멍을 벌렁거리며 용골대가 고함을 지르자 어느새 마음을 추스른 소현세자가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
“변명이 아니라 사실입니다.”
“태연히 거짓말을 늘어놓다니 정말 얼굴이 두껍군.”
비아냥거리는 용골대를 무시한 소현세자는 황제를 보며 진심 어린 얼굴로 말했다.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지만 황명을 어긴 건 사실이니 제대로 관리하지 않은 저에게 죄를 물으시고 조선군이 전장에서 오해를 풀 수 있는 기회를 주십시오.”
그러자 무조건 몸을 낮춰 사정하라는 도현의 방법이 통했는지 잠시 소현세자를 바라보던 황제는 처음보다 화가 많이 가라앉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좋아. 세자가 그렇게까지 이야기를 하니 한 번 더 기회를 주지.”
“감사하옵니다, 폐하.”
“하지만 황명을 어긴 죄를 그냥 넘길 수는 없으니 군대를 더 보내 잘못을 덮도록 하라.”
이어진 말에 몸이 굳어 버린 소현세자는 황제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는 걸 보고 황급히 대답했다.
“그렇게 하겠사옵니다.”
“이번에도 날 실망시킨다면 그때는 오늘 일까지 합쳐서 내 분노를 고스란히 다 감당해야 될 것이야.”
황제가 직접 최후통첩을 하자 소현세자는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면서 머리를 숙였다.
“명심하겠사옵니다.”
“이제 원정에 대해 대신들과 논의를 해야 되니 더 할 말이 없다면 세자 일행은 그만 가 보도록.”
“예.”
홍타이지가 손을 살짝 내저으며 말하자 소현세자와 도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숙이고는 뒷걸음으로 대전을 나왔다.
숭정전을 나올 때까지 아무런 말이 없던 소현세자는 대기하고 있던 마차에 올라타자마자 바닥이 꺼져라 한숨을 내뱉었다.
“후우, 이 일을 어찌해야 될지 모르겠군.”
소현세자가 함께 타자고 해서 동승한 박황이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이시영 그 사람이 괜한 짓을 해 가지고 상황을 더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일단 일이 벌어졌으니까 한탄을 하기보다 최대한 빨리 수습부터 해야 됩니다.”
“그렇지.”
소현세자와 박황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하는 가운데 도현은 이야기를 이었다.
“우선 제일 급한 건 이시영 장군이 지휘하는 병력을 하루라도 빨리 심양에 입성시키는 거니까 제가 직접 가서 데려오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주겠느냐.”
“위급 상황인데 뭐라도 해야지 그냥 있을 수는 없지요.”
“고맙구나.”
“아닙니다.”
“그럼 난 한양에 계신 아바마마께 상황을 설명하고 추가로 병력을 보내 달라는 서신을 써야겠구나.”
“예. 조선에 있는 대신들이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고 오판해 일을 그르칠 수도 있으니까 힘들겠지만 이왕이면 대빈객이 직접 서신을 들고 가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왕복 천 리가 넘는 아주 먼 거리지만 상황의 다급함을 잘 알고 있는 박황은 도현의 이야기에 두말하지 않고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지요.”
마차가 관저에 도착하자 도현은 숨 돌릴 틈도 없이 칠현과 위사 두 명을 데리고 조선군이 있는 동쪽으로 말을 달려갔다.
그렇게 꼬박 하루를 달린 끝에 작은 시냇물이 흐르는 평원에 숙영지를 세우고 한가로이 머물고 있는 조선군을 발견할 수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대군마마.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도현이 왔다고 하자 이시영 장군은 휘하 장수들을 데리고 허둥지둥 마중을 나왔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말을 타고 달려오느라 온통 먼지투성이가 된 도현은 아무리 전장이 아니라고 하지만 군대를 이끄는 장수가 갑옷이 아닌 가벼운 무복만 입고 있는 모습에 눈가를 찡그렸다.
이들이 늦장을 부리는 바람에 심양 관저는 난리가 났는데 그것도 모르고 너무나도 태평스러워 보이는 모습에 짜증이 난 도현이 잔뜩 가시 돋친 투로 말했다.
“다들 아주 재미가 좋은 것 같소.”
“예?”
“복장들이 전장으로 떠나는 장수가 아니라 어디 사냥이라도 나온 한량들 같아서 하는 말이외다.”
따끔한 질책에 무안해진 이시영과 장수들이 괜히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했다.
“흐흠.”
“그게…….”
그렇게 도현이 상대를 한참 동안 째려보자 옆에 있던 칠현이 나서 어색해진 분위기를 풀었다.
“마마, 보는 눈이 있으니 일단 막사로 들어가서 이야기를 나누시지요.”
그 말에 주위를 둘러보니 근처에 있던 병사들이 잔뜩 긴장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게 보였다.
괜히 병사들에게 불안감을 심어 줘서 좋을 게 없다고 판단한 도현은 끓어오르는 화를 겨우 눌러 참고 말했다.
“지휘 막사가 어디요?”
“아, 예. 이쪽으로 오시죠.”
이시영 장군과 장수들의 안내를 받아 도현은 숙영지 한복판에 있는 커다란 막사로 들어갔다.
도현에게 상석을 양보하고 이시영과 휘하 장수들이 자리를 잡자마자 도현은 이것저것 잴 거 없이 바로 본론부터 꺼냈다.
“심양에 도착할 때가 한참 지났는데 대체 이런 곳에서 뭘 하고 있는 거요?”
“저, 그게…… 길이 멀다 보니 병사들도 지쳤고, 말도 먹이를 줘야 해서 쉬고 있었던 것뿐입니다.”
“지쳤다고?”
말 같지도 않은 변명에 도현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하루에 이십 리도 채 전진하지 않는데 지쳤다니! 지금 그걸 변명이라고 늘어놓는 건가!”
서슬 퍼런 호령에 이시영과 장군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헛기침만 해 대며 시선을 피했다.
씨알도 안 먹힐 핑계를 대는 것도 기막힐 노릇인데 반성의 기미라곤 전혀 보이지 않고 그저 이 자리만 모면하면 된다는 기색이 역력해 도현은 부아가 치민 나머지 반대로 머리가 차갑게 식는 것을 느끼며 꽉 다문 잇새로 딱딱 끊어지듯이 말을 이었다.
“지금 심양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고 있소?”
도현은 일부러 장수들과 눈을 하나하나 맞춰 가며 말했다.
“아무리 기다려도 군대가 도착하지 않아 황제가 크게 노했고, 그 바람에 세자 저하와 내가 황궁에까지 가서 머리를 조아리면서 용서를 빌어야 했소. 게다가!”
쾅!
도현이 탁자를 손바닥으로 내려치자 장수들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청국 대신들이 명나라와의 전쟁보다 조선을 먼저 치는 게 더 나을 것 같다는 말까지 했단 말이오! 그게 무슨 뜻인진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
청천벽력과도 같은 말에 장군들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특히 책임자인 이시영 장군은 이마에 식은땀까지 흘리며 허둥거렸다.
만약 이번 일이 빌미가 되어 진짜 청나라와 전쟁을 벌이게 된다면 그 결과는 불 보듯 뻔했다.
더 이상 큰 전쟁을 치를 여력이 없는 조선은 다시 한 번 청나라의 군대에 유린당할 것이고, 아예 조선이라는 나라 자체가 사라질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리되면 그 책임을 누가 질 것인가?
아니, 책임을 따지기 전에 자신은 물론이고 한양에 남아 있는 가족들까지 청군의 말발굽 아래 목숨을 잃을 가능성이 컸다.
사태가 자신의 손을 벗어나 너무 커져 버린 것을 깨닫자 이시영 장군은 전신을 사시나무 떨 듯 부들거리며 도현을 향해 매달렸다.
“그,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마마?”
이시영 장군과 장수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은 도현은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툭 내던지듯 말했다.
“세자 저하와 내가 황제에게 간곡히 부탁한 끝에 겨우 유예 기간을 얻어 놨소. 그 안에 심양까지 도착하지 못하면…….”
꿀꺽.
도현이 매서운 눈빛으로 장수들을 노려보았고, 침묵이 가라앉은 천막 안에 누군가 침 삼키는 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이제 대충 사태 파악이 되시오, 장군?”
“예, 예에!”
도현에게 지목을 받자 퍼뜩 고개를 쳐든 이시영 장군이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병사들과 말을 모조리 불러 모아라! 서둘러 숙영지를 치우고 심양으로 출발한다!”
땡땡땡땡!
요란한 종소리와 고함 소리가 울려 퍼지고, 나른하게 늘어져 있던 병사들은 허둥지둥 사방을 뛰어다녔다.
하지만 장수들이 아무리 재촉을 해도 풀밭에 풀어놓았던 말들을 억지로 끌고 와 안장을 채운 뒤, 사방에 흩어져 있던 천막을 모조리 걷고 출발 준비가 완료되기까지는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
그 광경을 무표정한 얼굴로 보고 있던 도현은 준비가 다 끝났다는 소식을 듣고 이시영 장군에게 말했다.
“지금 당장 출발해야 하오! 서두르시오!”
“네, 마마!”
이시영 장군이 고개를 끄덕이고, 신호를 받은 병사가 깃발을 힘차게 세워 올림과 동시에 말들이 내달리기 시작했다.
‘흥! 진작 이럴 것이지.’
지금도 황제의 진노를 가라앉히려고 노력하며 노심초사 조선군이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을 소현세자를 떠올리며 도현은 고삐를 쥔 손에 더욱 힘을 주어 박차를 가했다.
이런 도현의 노력 덕분인지 거의 속보로 뛰며 강행군을 한 조선군은 이틀 뒤 심양성에 도착할 수 있었다.
성 밖에 도착한 군대를 보고 황제인 홍타이지는 흡족한 표정을 지었지만 용골대를 비롯해 조선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이들은 병사들이 허약해 보인다는 둥 괜히 이런저런 흠집을 잡아 조선군을 폄하했다.
그런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조선군은 혹시 있을지 모르는 불미스러운 일에 대비해 심양성 안으로는 들어가지 못하고 성벽 아래 숙영지를 만들고 머물러야 했다.
물론 이시영을 포함한 장수들은 관저에서 숙식을 해결할 수 있었지만 청군 지휘부는 의도적으로 이들을 작전 회의에서 배제하는 등 여러 가지 차별을 가했다.
청국도 나름 이러는 이유가 있었는데 비록 지원 병력을 보내왔지만 전통적으로 명과 가까운 만큼 조선이 작전 계획을 적에게 누설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병사를 지휘하는 장수들이 청보다는 명나라에 우호적인 것이 사실이었기에 이런 청국의 의심이 아예 근거가 없는 건 아니었다.
아무튼 건물 안이 아니라 야외에서 비바람을 고스란히 맞으며 지냈지만 보름간 휴식을 취한 조선군은 용골대가 지휘하는 선봉 부대 오만과 함께 만리장성을 넘기 위해 출정했다.
그때쯤 박황이 소현세자의 친필 서한을 가지고 한양에 도착했다.
“이런! 이게 사실인가?”
편지를 읽고 깜짝 놀란 인조가 눈을 크게 뜨며 묻자 앞에 엎드려 있던 박황은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저도 그 자리에 동석했는데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사실이옵니다. 세자 저하께서 청국 황제에게 사죄하고 간절히 부탁하지 않았다면 신이 아니라 청국 사신이 선전포고장을 들고 전하를 찾아왔을 것이옵니다.”
상황의 심각성을 인식시키기 위해 박황이 조금 더 과장해 심양 황궁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자 왕좌에 앉은 인조는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고, 동석해 있던 대신들도 하나같이 하얗게 얼굴이 질렸다.
“이런 일이…….”
“이것 보시오! 청국을 괜히 자극해서 좋을 것이 없다고 하지 않았소이까!”
“흐흠.”
주화파에 속하는 대신의 핀잔에 척화파는 괜히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회피했다.
“일단 시간을 벌어 놨지만 빨리 추가 병력을 올려 보내지 않으면 황제가 칼끝을 우리 쪽으로 돌릴 테니 어서 움직여야 됩니다.”
양쪽 간에 신경전이 벌어져 자칫 이번 문제가 뒷전으로 밀리는 것을 우려한 박황이 결정을 재촉하자 인조는 대신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영상.”
인조의 부름에 대표적인 주화파이자 영의정인 최명길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예, 전하.”
“화를 피하기 위해서는 저들이 요구하는 대로 병력을 추가로 보내야 될 것 같은데 영상의 생각은 어떻소?”
“현명하신 판단이옵니다. 청 황제의 분노를 잠재우려면 한시라도 빨리 병사들을 보내야 될 것입니다.”
원하는 대답이 나오자 인조는 시선을 돌려 편을 가르듯 왼쪽에 늘어서 있는 척화파 신하들을 봤다.
“경들도 같은 생각이오?”
“뜻대로 하시옵소서.”
평소 주장대로 한다면 추가 병력 파견에 반대해야 하지만 박황의 위기감 조성이 통했는지 청나라가 당장 군대를 몰고 쳐 내려올지도 모른다고 하자 척화파는 강경한 자세를 버리고는 슬쩍 한발 뒤로 물러섰다.
오랜만에 대신들의 뜻이 하나로 통일되자 인조는 굳은 표정을 조금 풀며 한쪽에 앉아 있는 병조판서에게 지시를 내렸다.
“병판은 지금 즉시 평안 병사 임경업林慶業에게 수군을 이끌고 출정해 청국을 도우라고 하라!”
“알겠사옵니다, 전하.”
사안이 급한 만큼 바로 그 자리에서 출전을 지시하는 교서敎書가 작성되어 병조판서가 직접 평안도 감영이 위치한 평양으로 올라갔다.
충청북도 충주 출신인 임경업 장군은 인조 시대를 대표하는 무장 중 하나로 이괄의 난을 진압하면서 이름을 알렸다.
그 뒤로 우림위장과 낙안 군수 등 여러 관직을 거쳤는데 정묘호란 이후 북방에 배치되어 나날이 세를 키워 가는 청국을 막아 내는 중책을 맡았다.
병자호란 때 조정이 항복했음에도 돌아가는 청군 부대를 공격해 기병 삼백을 죽이고 포로가 되어 끌려가던 백성 천여 명을 구출해 냈을 정도로 대표적인 친명배청파親明排淸派 무장이었다.
당연히 청군을 도와 명나라를 치라는 지시를 임경업 장군은 탐탁지 않게 생각했지만 지엄한 왕명인 데다 직속상관인 병조판서까지 직접 와서 출정을 재촉하자 어쩔 수 없이 병사를 움직였다.
하지만 억지로 떠나는 길이라 적극적으로 행동하지는 않았는데 그나마 이끌고 가던 백스무 척의 병선 중에 마흔 척은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중간에 그냥 되돌려 보내 버렸다.
그래도 이시영이 너무 대놓고 싫은 티를 내다가 청국의 분노가 터졌다는 걸 들었기에 빠르지는 않지만 꾸준히 이동해 대릉하를 거쳐 개주에 도착했다.
그 상태에서 적극적으로 전투에 참여하지는 않고 그저 양쪽 군대의 싸움을 멀리서 구경만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한편 심양 관저에 있던 도현은 자신의 방에서 청나라 전통 복장을 한 사내와 은밀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가끔씩 배를 띄워 바다에 나가기는 하지만 대부분 주변 해역을 돌아보는 시늉만 하지 전투에는 전혀 참가를 안 하고 있단 말이지?”
“그렇습니다.”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사내는 무관 출신에 장태범과 함께 도현을 따르기로 맹세한 인물로, 이름은 박영식이었다.
올해 서른세 살인 그는 도와 검을 잘 쓰고 칠척장신에 커다란 덩치를 가진 장사로 맨손 박투술도 뛰어났다.
역사적으로 임경업 장군의 행동 때문에 조선이 더 큰 손해를 입는다는 걸 알고 있던 도현이 혹시 몰라 박영식을 몰래 개주로 내려 보내 조선 수군의 동태를 살펴보도록 한 것이다.
역시나 예상한 대로 결과가 나오자 도현은 미간에 내 천 자를 그렸다.
“먼 길 오가느라 수고했네.”
“아닙니다.”
“이만 돌아가서 쉬도록 해.”
“예.”
꾸벅 절을 한 박영식이 방을 나가자 잠시 턱을 괴고 앉아 고심하던 도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딜 가십니까?”
“형님을 만나 뵈어야겠어.”
방을 나선 도현은 곧장 관저 반대편에 위치한 세자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저하, 봉림대군 왔사옵니다.”
얼마 전 필선 정뇌경이 구해 온 명나라 시인들의 문집을 읽으며 쉬고 있던 소현세자는 문밖에서 들리는 소리에 반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들라 하라.”
“예.”
도현이 문을 열고 들어오자 소현세자는 미소 띤 얼굴로 그를 맞이했다.
“이 시간에 네가 웬일이냐?”
“쉬고 계신데 제가 방해를 한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아니다. 너라면 언제든 환영이니 그런 소리 마라.”
방석이 깔린 자리에 도현이 앉자 궁녀가 간단한 다과와 수정과를 가져와 둘 사이에 내려놨다.
“오후에는 매일 후원 연무장에서 위사들과 어울려 무예 수련을 하는 걸로 아는데 정말 어쩐 일이냐?”
“긴히 드릴 이야기가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도현이 정색하며 말하자 소현세자도 약간 긴장한 얼굴로 자세를 바로 했다.
“내가 그런 말을 할 때마다 큰일이 터져서 그런지 괜히 긴장되는구나. 그래, 뭔지 이야기를 해 봐라.”
“아무래도 제가 개주에 내려가 봐야겠습니다.”
“뜬금없이 거긴 왜 간다는 거지?”
“수군을 이끌고 있는 임경업 장군이 지난번 이시영 장군이 한 것처럼 전투에 가담하지 않고 태업怠業을 하고 있답니다.”
이미 한차례 크게 데서 그런지 소현세자는 화들짝 놀라 자신도 모르게 언성을 높였다.
“그게 정말이냐?”
“네. 지난번 일도 있어서 혹시 몰라 알아봤더니 아니나 다를까, 염려하던 대로였습니다.”
“끄으응. 어리석은 사람들 같으니라고.”
탄식을 내뱉는 소현세자를 보며 도현이 말을 이었다.
“이대로 내버려 두면 분명 청국 황제가 진노할 테니 어서 빨리 손을 써야 됩니다.”
“백번 맞는 이야기지만 네가 심양을 떠나는 걸 청국 조정이 허락하겠느냐?”
“그건 염려 마세요.”
“뭔가 묘수가 있는 게냐?”
소현세자가 상체를 앞으로 살짝 숙이며 묻자 도현은 자신 있게 이야기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수군이 전투에 더 적극적으로 나서도록 독려하기 위해 간다면 청국 조정도 반대하지 않을 거예요.”
명쾌한 해결책에 소현세자는 무릎을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생각이야. 그럼 언제 떠날 것이냐?”
“머뭇거리는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까 황제의 허락이 떨어지면 바로 갈 겁니다.”
“그러면 내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김 내관, 밖에 있느냐?”
소현세자의 말에 연륜이 묻어나는 중년 내관이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와 허리를 숙였다.
“저하, 부르셨사옵니까?”
“황제를 알현할 일이 생겼으니 지금 바로 황궁에 갈 채비를 하도록 해.”
“알겠사옵니다.”
갑작스러운 지시였지만 차기 국왕인 세자를 측근에서 보필하는 내관답게 뭔가 다급하고 중요한 일이 생겼다는 걸 직감하고는 아무런 질문 없이 대답했다.
“너도 함께 가자꾸나.”
“예, 형님.”
잠시 뒤 관저를 나선 두 사람은 황궁으로 가서 알현 요청을 했다.
평소 같으면 선약 없이 이렇게 갑자기 황제를 만나기가 어렵지만 마침 휴식을 취하고 있던 중이라 바로 팔각형 지붕을 가진 대정전으로 안내됐다.
홍타이지를 만난 자리에서 도현은 전투를 독려하기 위해 개주로 내려갈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했다.
청군보다 수전水戰에 능숙한 조선군이 적극적으로 전투에 나서 준다면 큰 도움이 될 게 분명하고 무엇보다 제일 중요한 소현세자는 심양에 남아 있고 도현 혼자 내려가는 것이기에 홍타이지는 크게 기뻐하며 승낙했다.
따로 요구를 하지 않았는데도 이렇게 두 사람이 알아서(?) 나서 주자 기분이 좋아진 황제는 앞으로도 지금처럼 청국을 충심으로 섬기라며 금 다섯 관과 황실 마장에 있는 명마名馬를 각각 한 필씩 하사했다.
다음 날 소현세자의 친필 편지까지 챙긴 도현은 위사들의 호위를 받으면서 심양성을 떠나 개주로 내려갔다.
지난번처럼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노숙을 하며 급히 달려가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서둘러 움직인 덕분에 사흘째 되는 날 도현 일행은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조선군이 머물고 있는 포구에 도착해 제일 먼저 도현의 눈에 들어온 건 바다를 가득 메우고 있는 익숙한 모양의 전투선들이었다.
네 모퉁이에 기둥을 세워 사면을 가리고 마룻대를 얹은 것이 특징인 판옥선은 조선 수군의 주력 전투선으로 명종 때 처음 만들어졌다.
지붕을 덮어 이 층 구조로 된 배에는 노를 젓는 사부가 아래층에 그리고 병사들이 위층에 배치됐다.
이렇게 전체적으로 배가 높았기 때문에 백병전이 벌어졌을 때 아주 유리했는데 적이 쉽게 아군 배 위로 기어 올라올 수가 없었다.
또 하나의 강점은 튼튼한 구조 덕분에 예전보다 많은 화포를 탑재할 수 있고 포좌가 높게 만들어져 명중률도 아주 좋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전설적인 무패 기록을 세운 것처럼 원거리 교전이 벌어지면 강한 화력을 활용해서 거의 일방적으로 상대를 두드렸다.
게다가 여느 나라 배와 달리 쇠못을 사용하지 않고 판자에 흠을 파 서로 끼워 맞추거나 같은 재질인 나무못을 써서 선체가 쉽게 부식되지 않아 유지 보수에도 탁월한 이점을 보였다.
마지막으로 바닥이 평평한 평저선이라 수심이 낮은 곳에서도 손쉽게 운용할 수 있고 방향 전환이 아주 빨라 화포를 운영하기에 최적의 조건을 갖췄다.
그림만 봐 왔지 실제로 판옥선을 본 적이 없는 도현은 상상했던 것보다 더 크고 웅장한 선체를 보고 자신도 모르게 감탄성을 내뱉었다.
“정말 대단하군.”
“저도 이렇게 많은 전선들이 모여 있는 건 처음 봅니다.”
호위로 따라온 김덕술의 말에 도현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평안도와 전라 좌수영의 배들을 모조리 다 끌고 왔다고 하더니 정말인 모양이군.”
박황이 너무 겁을 줬는지 인조는 역사와 달리 전라 좌수영 전선들까지 출동시켰고, 덕분에 임경업 장군의 부대는 아주 강력한 전력을 갖추었다.
숙영지 안으로 들어가자 병사들의 모습이 보였는데 지난번 이시영 장군이 지휘하는 부대와 분위기부터 많이 달랐다.
가장 기본적인 경계조차 제대로 세우지 않고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던 것과 달리 임경업 장군의 부대는 포구 입구에서부터 여기까지 무려 다섯 번이나 검문을 통과해야 될 만큼 군기가 바짝 살아 있었다.
또한 병사들은 무질서하게 쉬는 것이 아니라 소부대별로 모여 훈련을 받거나 아니면 전선과 각종 무기들을 점검하며 전투에 대비했다.
이런 모습을 본 도현은 임경업 장군에 대해서 상당히 긍정적인 느낌을 받았다.
그때 연락을 받은 임경업 장군이 휘하 장수들과 함께 마중을 나왔다.
“이렇게 누추한 곳까지 오시다니, 먼 이국땅에서 대군마마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처세술과 정치적 수완이 뛰어난 임경업 장군은 절도 있는 자세로 군례를 올리면서도 상대가 듣기 좋은 말로 인사를 했다.
다른 사람이 이랬다면 아첨을 한다고 탐탁지 않게 여겼겠지만 역사를 통해 임경업이 치부를 한 것이 아니라 유연한 태도로 군영을 튼튼히 하고 보호하에 있는 백성들을 편안히 살 수 있도록 잘 돌봤다는 걸 알고 있는 도현은 호의적인 시선을 보냈다.
“임 장군, 반갑소. 조선이 아닌 청에 있으면서도 장군의 명성은 익히 들어 왔소이다.”
“변방을 지키는 일개 장수에 불과한 소인에게 무슨 명성이 있겠습니까. 과찬이십니다.”
“아니오. 이괄의 난도 그렇고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백성들을 노예로 삼기 위해 강제로 끌고 가는 청군을 습격해 물리친 이야기를 듣고 얼마나 통쾌했는지 모른다오.”
도현이 손까지 잡으며 진심으로 반가워하자 임경업 장군은 어리둥절한지 약간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마마께서 제 얼굴에 금칠을 해 주시는군요. 이럴 것이 아니라 일단 지휘소로 가시지요.”
“그럽시다.”
갑작스러운 도현의 등장에 바짝 긴장했던 장수들은 걱정과 달리 화기애애한 분위기에 내심 안도하며 뒤를 따랐다.
포구에서 제일 큰 민가를 통째로 빌려 설치한 지휘소 내부는 화려하지 않고 아주 소박하여 작전 지도와 갑옷 등 부대를 지휘하는 데 필요한 물품들만 갖춰져 있었다.
평소에는 지도를 펼치고 장수들과 함께 전략을 논의하는 데 사용하는 긴 탁자의 상석에 두 사람이 각각 마주 앉고, 그 뒤를 이어 나머지 사람들도 자연스럽게 편을 나눠 양쪽에 자리를 잡았다.
“이거 삭막한 전장이라 대접할 것이 변변치 않습니다.”
임경업 장군의 말에 도현은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면서 미소를 지었다.
“군영에 와서 대접받길 바라는 것이 더 이상하겠지요.”
우문현답이라고 허례허식을 따지지 않는 도현의 대답에 임경업은 눈을 반짝 빛내면서 의외라는 듯이 새삼스럽게 그를 바라봤다.
“이해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잠시 이런저런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며 긴장을 푼 도현은 진지한 얼굴로 여기까지 찾아온 용건을 꺼냈다.
“갑자기 내가 찾아와서 많이 놀랐을 것이오.”
“솔직히 아니라고는 못 하겠습니다.”
“이곳에 도착한 지 한참 됐는데 전장에 나서지 않고 계속 미적거리는 이유가 뭐요?”
“아시다시피 갑자기 출정을 하게 돼서 아직 병사들의 훈련이 부족해 그걸 보충하느라 시간이 조금 지체되고 있습니다.”
이야기를 들은 도현은 상대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임 장군, 우리끼리 있을 때는 솔직하게 이야기를 합시다. 명에 대한 의리 때문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고 태업을 하는 것 아니오?”
단도직입적인 물음에 임경업 장군은 잠시 당황하다가 이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면서 일부러 전투를 회피하고 있다는 걸 순순히 인정했다.
“이거 못 당하겠군요. 맞습니다.”
“장군!”
그러자 부장인 유림이 깜짝 놀라 목소리를 높였고 임경업 장군은 한 손을 들어 그를 제지했다.
“괜찮네. 이미 다 알고 오신 것 같은데 어찌 더 거짓말을 하겠나.”
“하지만…….”
다시 시선을 돌려 앞에 있는 도현을 쳐다보며 임경업은 이야기를 이어 갔다.
“명과는 대를 이어 가며 인연을 맺어 온 사이인데 어찌 청국 오랑캐들에게 등 떠밀려 칼끝을 들이밀 수 있겠습니까.”
당당하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임경업 장군의 모습에 도현은 양반들 사이에 너무나도 뿌리 깊게 박혀 있는 숭명사상崇明思想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는 자신도 모르게 긴 한숨을 내뱉었다.
“휴우, 정말 그렇게 생각하시오?”
“예.”
“그래도 임 장군은 다를 줄 알았는데 역시나 숭명사상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니 너무 실망스럽소.”
“…….”
“임진년에 명이 우리나라를 도와준 건 풍신수길(도요토미 히데요시)이 천명한 것처럼 조선을 지나 왜병이 중원으로 건너오는 것을 두려워해서요. 우릴 방패로 삼아 조선 땅에서 전쟁을 끝내려고 한 거라 이 말이오. 백번 양보해서 명이 조선을 멸망에서 구해 준 빚이 있다고 해도 그건 광해군 때 수차례 명의 요청을 받아 군대를 파병하고 청을 배척하다가 정묘년과 병자년에 호란을 겪은 것으로 이미 다 갚았다고 생각하지 않소이까?”
논리 정연한 도현의 주장에 임경업은 물론이고 함께 있던 장수들마저 말문이 막혔다.
“일리 있는 말씀이지만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칼부림을 하며 피 터지게 싸우던 오랑캐들과 손을 잡는다는 것이…….”
“누가 정말로 목숨 걸고 전투에 임하라고 했소?”
“그럼?”
“전장으로 가서 청군과 합류하되 전투가 벌어지면 요령껏 싸우는 척만 하고 뒤로 한 발짝 물러서 있으면 될 것 아니오. 그냥 여기서 뭉그적거리고 있으면 앞서 이시영 장군이 그랬던 것처럼 청나라에게 괜한 빌미만 줘서 아국이 곤란해질 뿐인 걸 왜 모르는 거요.”
그때서야 도현이 원하는 게 뭔지 눈치챈 임경업 장군은 짧게 감탄성을 내뱉었다.
“아! 그런 방법이 있었군요.”
“그렇다고 명을 몰래 도와주거나 아예 공격을 하지 말라는 건 아니오.”
“예?”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는 임경업 장군과 장수들에게 도현은 또박또박 힘을 줘서 이유를 설명했다.
“명은 이제 기력이 쇠해 서서히 지는 노을이고 청은 힘차게 떠오르는 해인데 나중에 우리가 뒤로 은밀히 상대를 돕고 있었다는 것이 밝혀지면 청 황제가 어떻게 나오겠소? 보나 마나 우리가 감당하기 어려운 요구를 해 오거나 재침공을 해올 텐데 그 뒷감당을 임 장군이 할 수 있소?”
“으음.”
도현의 시선을 받은 임경업 장군은 아무런 대답을 못 하고 와락 얼굴만 구겼다.
실제로 전장에 나간 조선군이 촉을 제거한 화살을 쏘거나 괜히 멀쩡한 배를 파손시켜 전투에서 빠지고 한술 더 떠서 아예 청군의 작전을 알려 주는 등 은밀히 명을 도와주다가 전세가 안 좋아지면서 명나라 병부상서가 청에 투항하자 이런 사실이 밝혀져 큰 곤욕을 치렀다.
이때 많은 대신들이 죽거나 청에 끌려가 고생을 했는데 이런 걸 알고 있던 도현은 임경업 장군이 또다시 실수를 반복하지 않게 미리 단단히 못을 박아 뒀다.
“지금도 병자호란 때 잡혀간 수십만의 조선 백성들이 노예로 지옥 같은 삶을 살고 있는데 또 그런 일이 벌어지게 해서는 안 될 것 아니오.”
꽉 막힌 고집불통이 아니라 어느 정도 융통성을 가진 인물인 임경업은 도현의 이야기에 잠시 고심을 거듭하다가 이내 머리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잘 알겠습니다.”
“그러면 함대를 출진시키는 거요?”
“대군께서 이렇게까지 말씀을 하시는데 계속 엉덩이를 깔고 앉아 있을 수는 없지요.”
“잘 생각했소.”
머릿속에 한번 박힌 생각이라는 것이 웬만해서는 바뀌지 않는 것이기에 임경업이 계속 고집을 피우면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이 많았던 도현은 의외로 쉽게 일이 풀리자 뛸 듯이 기뻤다.
여전히 불안 요소가 많이 남아 있지만 이걸로 일단 큰 고비는 하나 넘겼다.
그날 밤늦게까지 도현은 임경업 장군과 깊은 대화를 나누면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영원성에 가면 어떻게 대처해야 되는지 이야기해 줬다.
알고 있는 역사 기록을 바탕으로 두고 현대적 지식을 몇 가지 첨가해 말을 해 주었는데 임경업 장군은 그동안 크게 신경 쓰지 않았던 봉림대군이 이렇게 놀랄 정도로 병법에 뛰어나고 국제 정세에도 아주 해박하다는 것에 몇 번이나 놀라며 새삼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봤다.
일부러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이날 일로 임경업 장군은 물론이고 파병을 나온 장수들의 머릿속에 봉림대군이라는 이름이 선명히 각인됐다.
이틀 뒤 준비를 모두 끝마친 조선 함대는 임경업 장군이 약속한 대로 그동안 머물고 있던 포구를 떠나 한창 명과 청의 군대가 맞붙어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영원성을 향해 출발했다.
뿌우우웅!
길게 울려 퍼지는 뿔고둥 소리와 함께 대장선 지휘대 위에 올라선 임경업 장군이 큰 소리로 출항 명령을 내렸다.
“출발하라!”
둥! 둥! 둥! 둥!
크게 울리는 북소리에 맞춰 격군들이 일제히 노를 젓기 시작하자 포구에 있던 팔십여 척의 판옥선이 병사를 가득 태운 채 거친 물살을 가르며 앞으로 나아갔다.
위풍당당한 모습의 함대는 앞바다에서 잠시 멈춰 진형을 갖춘 다음 천천히 영원성이 있는 서쪽으로 움직였다.
“순풍이라 계속 이대로 바람이 불어 준다면 내일 오후쯤에는 영원성에 도착할 수 있을 겁니다.”
함장의 말에 임경업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다행이군. 그럼 격군들이 힘을 비축할 수 있도록 돛만 가지고 이동하지.”
“옛.”
지시를 내린 임경업 장군이 함대를 한번 둘러보고는 몸을 돌려 점점 멀어지고 있는 포구를 한참 동안 물끄러미 바라보자 옆에 있던 부장이 의아한 얼굴로 말을 걸었다.
“뭘 그렇게 보고 계십니까?”
힐끗 부장을 쳐다본 임경업은 다시 시선을 바로 하며 진지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봉림대군 말일세.”
“네.”
“아직 어린 나이인데 그런 혜안을 가지고 계신다니 정말 대단하지 않나?”
임경업의 말에 부장은 동의를 하면서도 약간 불만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확실히 뛰어난 것 같긴 하지만 심양에서 오래 볼모 생활을 해서 그런지 생각이 너무 청 쪽으로 치우쳐 보였습니다.”
그러자 고개를 돌린 임경업은 입가에 묘한 미소를 지으면서 부장을 봤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장군님은 다르게 보신 모양입니다.”
“그래. 자네처럼 오해할 수도 있겠지만 내가 보기에는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지지 않고 딱 가운데 서서 오직 조선과 백성들만을 위하시는 분이었네.”
“그러고 보니 전장에 가되 적극적으로 싸울 필요는 없다고 하셨지요.”
“바로 그거야. 청국에 마음이 돌아선 거라면 절대 그런 말씀을 하지 않으셨겠지. 앞으로 얼마나 큰 인물이 되실지 기대가 되는군.”
“장군님!”
부장이 깜짝 놀라 주위를 둘러보자 임경업은 걱정 말라는 듯이 한쪽 눈을 살짝 감았다.
“물론 방금 한 말은 비밀일세.”
“예.”
군대를 지휘하는 장수가 임금이 아닌 다른 왕족에게 관심을 가지는 건 자칫 역모를 꾸미는 걸로 오해를 받을 수도 있었기에 임경업은 더 이상의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임경업 장군의 함대를 떠나보낸 도현 일행은 바로 심양으로 돌아가지 않고 피로도 풀 겸 며칠 더 그곳에 머물렀다.
그때 들린 반가운 소식에 도현은 일행을 모두 이끌고 말을 타고 반나절 거리에 위치한 한 포구로 달려갔다.
이히히힝!
“여깁니다.”
고삐를 당겨 말을 멈춰 세운 도현은 스무 척이 넘는 배가 돛대에 봉황상단의 깃발을 꽂고 정박해 있는 걸 보며 감격한 표정을 지었다.
“장태범이 돌아왔다고 하더니 정말이었군.”
“떠났을 때보다 배가 더 늘어난 것 같습니다.”
옆에 있는 칠현이 놀라 말하는 것처럼 분명 떠날 때는 여섯 척이었는데 지금은 숫자가 몇 배로 불어나 있었다.
“장 총관을 만나면 어찌 된 건지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겠지.”
포구는 하역 작업을 하는 사람들로 정신이 하나도 없었고 눈 돌리는 곳마다 쌀가마가 한가득 쌓여 있었다.
양이 얼마나 많은지 선원들 가지고는 일손이 부족해서 마을 사람들까지 임시로 고용해 배에 실린 쌀가마를 내리고 있었다.
“으싸! 으싸!”
“물에 빠뜨리면 못 먹으니까 조심들 해!”
“예.”
장부를 손에 들고 이리저리 움직이며 큰 소리로 지시를 내리는 장 총관의 모습을 발견한 도현은 말에서 내려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장 총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무심코 몸을 돌린 장 총관은 얼굴 가득 활짝 미소 지으며 서 있는 도현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라 얼른 허리를 숙였다.
“마마!”
“오랜만에 다시 보는군. 거의 한 달 만이지?”
“예. 그동안 건강히 잘 계셨습니까.”
“보시다시피 너무 건강해서 탈이야. 그것보다, 보아하니 갔던 일이 아주 잘된 것 같군?”
주위를 둘러보며 도현이 하는 말에 장 총관은 어깨를 펴고는 살짝 목에 힘을 주면서 대답했다.
“운이 좋았습니다. 오가는 동안 풍랑과 해적을 만나지 않고 가져간 말을 비싸게 판 데다 마침 풍년이라 가격이 폭락해서 쌀을 충분히 구입할 수 있었습니다.”
그냥 빈 배로 가는 것이 아까웠던 도현은 만주 지역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말 백 필을 배에 실어서 보냈는데 그게 의외로 짭짤한 수입을 올린 모양이었다.
“그래서 잘만 하면 시세 차익을 크게 낼 수 있겠다는 판단에 배를 추가로 사들여서 쌀을 최대한 많이 싣고 왔습니다.”
한 번에 가진 돈을 모두 쏟아부었다가 중간에 풍랑이라도 만나 배가 침몰하면 큰 손해를 입을 수도 있었기에 평소 무리하게 일을 벌이지 않는 장 총관의 성격과 상반되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위험을 감수하는 만큼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었고 고심 끝에 내린 판단은 결과적으로 상회에 큰돈을 안겨 줬다.
칭찬받기를 원하는 아이처럼 잔뜩 흥분해서 장 총관이 무용담을 늘어놓자 도현은 아주 흡족한 얼굴로 그의 어깨를 두드려 줬다.
“역시 자네를 믿은 보람이 있군.”
“이게 다 대군마마의 선견지명 덕분입니다.”
장 총관이 공을 자신에게 미루자 도현은 바로 고개를 가로 저으면서 말했다.
“아니야. 총관이 없었다면 이런 건 생각조차 못 했을 거야. 열심히 일해 준 만큼 내가 잊지 않고 포상금을 챙겨 줄 테니까 기대해도 좋아.”
생각지도 못했던 포상금 이야기에 장 총관은 기쁜 얼굴로 넙죽 허리를 굽혔다.
“감사합니다, 마마.”
임시 숙소로 쓰기 위해 통째로 전세를 내 놓은 객잔으로 자리를 옮긴 도현과 장 총관은 보다 깊은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니까 전쟁 기간 동안 임시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정기적으로 중국 남부와 청 그리고 조선을 잇는 무역 선단을 운용하자 이거지?”
“예. 확보한 배들을 그냥 놀리는 것도 아깝고 이번에 직접 중국 남부 지역을 돌아보니 중계 무역으로 돈이 될 게 아주 많았습니다.”
내심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던 도현은 직접 현장을 둘러보고 온 장 총관이 아주 적극적으로 건의를 하자 귀가 솔깃해졌다.
“구체적으로 어떤 물건을 가지고 교역을 하자는 건지 말해 봐.”
그러자 장 총관은 배를 타고 오면서 계획해 둔 것들을 상세히 풀어 놨다.
“일단 중국 남부에서는 쌀을 비롯한 곡물 가격이 낮으니 그걸 가져와서 팔고, 반대로 청과 조선에서는 말, 인삼, 모피 같은 특산품을 싣고 가는 겁니다. 인삼은 중국에도 그 약효가 널리 알려져 있어 없어서 못 팔 정도고 말은 청국에서 은자 열 냥인 것이 광동성에 가면 몇 배로 뛰어 금원보 두 개는 받을 수 있었습니다.”
“흐음.”
듣고 보니 나쁘지 않은 계획이었다. 이 시대의 해상 무역이라는 것이 열 척이 나가면 두세 척은 침몰하는 아주 위험한 도박이었지만, 방금 장 총관이 말한 것만큼 이윤이 보장된다면 풍랑이나 해적을 만나 선단의 절반을 잃는다고 각오해도 나머지 배가 도착하면 그걸 충분히 만회하고도 남을 정도로 큰돈을 벌 수 있었다.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이제 까실까실 수염이 나는 턱을 매만지면서 잠시 생각을 정리한 도현은 이내 결정을 내렸다.
“좋아. 한번 해 보자고.”
“정말이십니까?”
장 총관이 되묻자 도현은 머리를 끄덕이면서 아주 진지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실패할 게 두려워 머뭇거리다가 앞에 있는 노다지를 놓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겠지.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을 테니 계획한 걸 추진해 봐.”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장 총관은 눈을 반짝이며 머리를 숙였다.
“오늘 결정하신 건 절대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자넬 믿네.”
“예,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나저나 교역을 하자면 거점이 필요한데 어디가 좋을까?”
“이걸 보시죠.”
도현의 질문에 장 총관은 통이 넓은 소매 안에서 여러 번 접힌 종이를 하나 꺼내 탁자 위에 펼쳤다.
“광동성과 이곳을 오가는 해로를 기록해 놓은 겁니다.”
종이에는 요동반도에서 출발해 등주(산동반도)를 거쳐 연안을 따라 중국 남부 지방으로 내려가는 해도가 그려져 있고, 바람 방향과 걸리는 시간 그리고 주변에 뭐가 있는지까지 장 총관이 아주 상세하게 기록해 놓은 걸 볼 수 있었다.
“언제 이런 걸 만들었어?”
“배에서 딱히 할 일도 없고 혹시 필요한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틈틈이 기록을 해 둔 겁니다.”
“그냥 심심풀이치고는 정말 잘 만들었는데.”
지도를 천천히 살펴보며 도현은 연신 감탄성을 내뱉었다.
“여길 보시면 묘도열도廟島列島라는 곳이 있는데 요동과 등주 사이에 북동 남서로 길게 크고 작은 섬 수십 개가 마치 징검다리처럼 늘어서 있습니다.”
“정말 그렇군.”
“지리적으로 아주 중요해서 뱃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서해를 건너려면 무조건 여길 지나쳐야 된다고 할 정도로 요충지이기도 합니다.”
당시에는 항해 기술이 부족해 배를 이용해도 먼 바다를 곧장 건너는 것이 아니라 연안을 따라 이동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래서 조선에서 중국으로 가려면 마포나루를 출발해 요동반도로 북상했다가 묘도열도를 따라 서해를 건너 등주에 도착하는 항로를 주로 이용했다.
“이 중에서 웅도라는 섬이 있는데, 중간 정도 크기에 지형도 평평해서 거점으로 삼기에는 딱입니다. 섬 안쪽에는 물이 솟아나는 샘도 있고요.”
“그래?”
장 총관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분명 괜찮은 곳이겠지. 하지만 결정을 내리기 전에 내가 직접 가서 보고 싶은데, 어떤가?”
“예. 하역 작업은 하루 이틀 만에 끝날 테니 그 뒤에 저와 함께 가시지요.”
“음.”
그렇게 대화를 마무리 짓고 이틀 뒤, 약속대로 도현은 장 총관과 함께 배에 올라탔다.
만약을 위해서 평복을 입고 위장한 위사들을 대동하긴 했지만 적은 숫자라 별다른 이목을 끌지 않고 무사히 포구를 출발할 수 있었다.
짭짤한 소금기를 머금은 바람을 맞받으면서 눈부신 듯 한쪽 눈을 찡그리고 갑판 위에 서 있던 도현은 곧 섬이 보일 거라는 장 총관의 말에 앞을 바라보았다.
푸른 지평선 너머, 크고 작은 섬이 바둑판의 돌처럼 사방에 흩어져 있는 가운데 초록색 숲으로 덮여 있는 섬 하나가 유독 눈에 띄었다.
“접안 시설이 없어 배를 안전하게 댈 데가 없으니 여기서 부터는 작은 배로 갈아타야 합니다.”
장 총관이 지시하자 선원들 몇 명이 모여 물에 쪽배를 내렸다.
도현과 장 총관 그리고 위사 둘이 타자 크게 출렁거릴 정도로 공간이 좁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그대로 배에서 대기하기로 했다.
얼마간 노를 저어 마침내 웅도에 발을 내디딘 도현은 기지개를 펴듯이 양팔을 벌리고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휴우! 역시 하루 종일 흔들리는 배에 있다가 땅으로 내려오니 좋군.”
“하하, 뱃멀미를 안 하셔서 다행입니다. 예전에 어느 양반 집안 자제를 배에 태운 적이 있는데 30분도 안 돼서 토하고 난리를 피우는 바람에 아주 애를 먹었던 기억이 있거든요.”
“몸 하나만큼은 튼튼하니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되네. 그건 그렇고, 섬 전체를 둘러보고 싶은데 어디 올라갈 만한 데가 있을까?”
“저 언덕 위는 어떻습니까. 너무 멀지도 않고, 경사도 완만하니 금방 올라갈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장 총관은 키 작은 수풀과 덤불 들이 우거진 숲 너머로 보이는 언덕을 가리켰다.
“좋아. 해가 떨어지기 전에 다시 여기로 돌아와야 하니 길을 서두르지.”
그렇게 말한 도현은 성큼성큼 숲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사람의 손을 전혀 타지 않은 무인도답게 숲에는 제멋대로 자란 나무와 풀들이 울창하고, 새와 동물들은 난데없이 나타난 이방인들을 경계하는 기색 없이 태연하게 이쪽을 바라보다가 곧장 어디론가 사라지곤 했다.
“여기엔 위험한 맹수 같은 건 없어 보이는군.”
“섬이니까요. 날짐승이야 그렇다 쳐도 곰이나 호랑이 같은 건 지느러미가 달려서 헤엄쳐 오지 않는 이상 이곳에 사는 게 불가능한 일이지요.”
‘하긴 그렇겠군.’ 하고 도현은 맞장구를 쳤다.
게다가 어찌어찌해서 이곳까지 흘러들어 왔다 해도 짝짓기를 할 만한 상대가 없으니 자연히 번식하지도 못할 것이다.
가는 길은 평탄했지만 꼭대기까지 올라가는 덴 의외로 시간이 꽤 많이 걸려서 제일 높은 곳에 올라왔을 땐 이미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호오! 이렇게 보니 장관이로군.”
도현은 허리에 손을 올리고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장 총관의 말대로 섬의 대부분은 평지였고, 크고 작은 구릉과 언덕이 있긴 했으나 올라가기 힘들 만큼 높은 곳은 아니라 보통의 젊은 청년이라면 손쉽게 왔다 갔다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잡초와 나무를 베는 데 시간이 좀 들긴 하겠지만 목재는 땔감이나 건설 자재로 활용할 수 있으니 별문제는 안 된다.
“저 옆에 마실 수 있는 물이 흘러나오는 샘도 있습니다. 한번 가 보시겠습니까?”
오기 전에 선원들을 통해 섬에 대해 대략적인 정보를 알아 둔 장 총관의 말에 도현은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 안내해 주게.”
장 총관은 몇 걸음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바위 틈새로 도현을 이끌었다.
바위와 바위 사이엔 마치 누군가 일부러 만들어 놓은 것 마냥 움푹 파인 곳이 있었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중간에 물이 퐁퐁 샘솟는 것이 보였다.
“섬 여기저기에 이런 곳이 있습니다. 저 숲 안쪽으로 더 들어가면 작은 폭포도 있고, 강처럼 물길이 나 있는 곳도 있지요.”
장 총관의 설명을 한 귀로 들으면서 도현은 양손으로 물을 떠 한입 머금었다.
안 그래도 목이 말랐던 터라 시원하고 깨끗한 물이 그리 맛있을 수가 없었다.
“후우, 물이 마치 얼음장처럼 차갑군.”
“신기하지 않습니까. 바다 한복판에서 이런 담수가 흘러나오다니.”
“훗. 이건 지하수라고 하는 걸세.”
“지하수요?”
“그래. 뭍에서도 땅을 파면 물이 나오는 지점이 있고, 그걸 우물로 쓰지 않나. 똑같은 거야.”
“허어, 그렇습니까.”
원리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알아들었다는 표정으로 장 총관이 고개를 끄덕이자 도현은 일어서 소매로 입 주위를 훔치고는 말했다.
“어쨌든 대충 볼 건 다 봤으니 배로 돌아가지.”
“아, 결정하셨습니까?”
“음, 자네 말대로 여긴 최적의 조건을 갖춘 섬이야.”
여태까지 다른 상인들의 눈에 띄지 않고 남아 있었다는 게 신기할 정도로 완벽한 곳이라며 도현은 속으로 만족스럽게 생각했다.
직접 답사까지 다녀온 결과 교역 거점을 세우기에 여기만큼 좋은 곳이 없다는 판단을 내렸지만 막상 일을 추진하려고 하자 해결해야 될 큰 문제점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교역 항로 한가운데 있다 보니까 무역선을 노리는 해적들이 수시로 주변 해역에 출몰해 노략질을 하거나 웅도에 정박해 물을 보충하고 잠시 쉬어 가는 용도로 썼다.
바로 이게 살기 좋은 웅도가 무인도로 그냥 버려져 있는 이유였다.
먼저 이 문제를 정리하지 않고 거점을 세운다면 해적들의 먹잇감이 되어 버릴 가능성이 컸다.
며칠을 고심하던 도현은 아주 기막힌 해결책을 하나 떠올리고는 그날로 장 총관과 헤어져 한창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영원성으로 갔다.
영원성은 만리장성 밖에 있는 유일한 명국 영토이자 산해관과 더불어 청군의 남하를 저지하는 최전선 요새였다.
모함을 받아 억울하게 죽은 원숭환이 수년간 성벽을 보강하고 곳곳에 홍이포(붉은 머리를 한 오랑캐가 쓰는 대포라는 뜻으로, 명나라가 네덜란드인들이 사용하던 것을 들여와 복제한 대포)를 쏘는 포대까지 설치해 그야말로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바로 여기서 청 태조 누르하치가 처음으로 대패를 당하고 부상까지 입어 결국 목숨을 잃었다.
일 년 뒤 청을 세우고 스스로 황제에 오른 홍타이지가 아버지의 복수를 하기 위해 대군을 이끌고 영원성을 공격했지만 역시 패하고 말았다.
이런 이유로 영원성은 청국 입장에서 상처 입은 자존심을 다시 세우기 위해서라도 어떻게 해서든 최우선적으로 무너뜨려야 되는 목표가 됐다.
도현이 도착한 날도 전투가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공격!”
우와아아!
꽝! 꽝! 꽝!
청군 병사들이 함성을 지르며 성벽을 향해 새까맣게 돌격해 들어가는 것과 동시에 청군 홍이포가 수십 문이 일제히 불을 뿜었다.
영원성에 있는 명군도 지지 않고 대포와 화살을 쏴 접근하는 적을 살육했다.
“으아악!”
“커헉!”
어렵게 포격과 화살 세례를 뚫고 성벽 아래에 도착한 청군이 나무 사다리를 걸치며 위로 올라가려 했고 명나라 병사들은 창과 칼을 휘두르며 그걸 막았다.
바다와 접한 동쪽에서도 치열한 접전이 벌어지고 있었는데 이곳에서는 조선 수군이 청군과 함께 함대를 이뤄 성벽을 깨기 위해 쉬지 않고 함포 사격을 가했다.
하지만 연신 단단한 쇠구슬을 날려 보내는 청군과 달리 조선군은 대포에 화약만 채우고 심지를 댕겨 소리만 요란하지 아무것도 발사되지 않는 말 그대로 뻥포만 쏘고 있었다.
펑!
“화약 아까우니까 조금만 넣어.”
“그려. 어차피 흉내만 내는 거잖아.”
포구에 화약을 채우던 병사는 동료들이 하는 말에 정량의 반만 넣고 뒤로 물러섰다.
그 상태에서 포수가 불을 붙이자 요란한 소리를 내며 빈 대포가 발사됐다.
날아가는 포탄에 일일이 누가 쐈는지 이름표를 붙여 놓지는 않았기에 이런 조선군의 행동을 청군 지휘부가 전혀 눈치채지 못한 가운데 전투는 점점 절정으로 치달았다.
한편 영원성 앞에 있는 야트막한 언덕 위에 말을 타고 선 도현은 양군이 치열하게 맞붙어 싸우는 걸 내려다보며 짧게 감탄성을 내뱉었다.
“이야! 대단한데.”
“저도 이렇게 많은 대군이 전투를 벌이는 건 처음 봅니다.”
호위로 따라나선 내금위 위사 김덕술의 말에 도현은 동감이라는 듯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이번에 청국이 동원한 병력이 이십만이라고 했지?”
“네.”
“그런 대군을 아무렇지도 않게 일으킬 수 있는 청국의 저력도 무섭지만 그에 꿀리지 않고 맞서 싸우는 영원성 방어군도 대단하군.”
“맞습니다. 벌써 몇 년째 청군의 파상 공세를 번번이 격퇴하고 청 태종은 여기서 입은 부상 때문에 결국 목숨까지 잃었을 정도니 말 그대로 난공불락의 요새라고 부르는 것이 전혀 부족함이 없을 정도입니다.”
“맞아. 하지만 그것도 이제 약발이 다했다는 것이 명나라 입장에서는 뼈아픈 실책이야.”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김덕술뿐 아니라 일행들 모두가 의아한 시선으로 바라보자 도현은 담담한 목소리로 이유를 설명해 줬다.
“영원성이 지금까지 청군의 거센 공세 속에서도 꿋꿋하게 버틸 수 있었던 건 높고 두터운 성벽과 홍이포라는 화약 무기도 큰 역할을 했지만 무엇보다 원숭환이라는 뛰어난 무장의 지도력이 컸어. 그런 중요한 인물을 자금성에 있는 대신들이 자신에게 뇌물을 잘 갖다 바치는 모문룡을 마음대로 처단한 것에 앙심을 품고 모함해 죽여 버렸으니 예전 같은 힘을 발휘하기는 어려울 거야. 거기다 투항한 명군 장수들 덕분에 이제 청군도 홍이포로 무장을 했으니 성벽 말고는 어느 것 하나 상대편에 유리한 것이 없잖아.”
“그렇군요.”
이야기를 다 듣고 나자 앞에 보이는 영원성이 더 이상 난공불락의 요새가 아니라 바람 앞에 선 촛불처럼 위태롭게 느껴졌다.
전투는 머리 위에 있던 해가 서산 너머로 뉘엿뉘엿 질 때쯤 끝이 났다. 청군이 성벽 한쪽을 점령했지만 곧 이어진 반격에 밀려나면서 별다른 소득 없이 후퇴했다.
청군이 물러난 성벽은 양측 병사들이 흘린 피로 시뻘겋게 물들어 있고 주위에는 족히 천여 명은 넘을 것 같은 시신이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었다.
근처 바위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흥미진진한 얼굴로 전투를 지켜보던 도현은 후퇴를 알리는 징소리와 함께 청군 병사들이 물러나자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다 끝났군.”
약간 채신머리없게 보이지만 굳은 몸을 풀기 위해 도현은 앓는 소리를 내며 크게 기지개를 폈다.
“으갸갸갸!”
그러고는 칠현이 고삐를 잡고 있는 말 위에 올라타며 입을 열었다.
“김 위사.”
“예, 마마.”
“괜히 적으로 오인받아 곤란한 일을 겪기 싫으니까 여기서 부터는 준비해 온 깃발을 눈에 잘 띄게 들고 있도록 해.”
“염려하지 마십시오!”
크게 대답한 김덕술은 긴 장대에 둘둘 말아 안장 옆에 달아 둔 깃발을 꺼내 높이 치켜들었다.
삼각형의 커다란 깃발에는 붉은 바탕에 조선군을 상징하는 봉황이 마치 살아 꿈틀거리는 것처럼 생생하게 수놓여 있었다.
따각따각!
언덕을 내려간 도현 일행은 곧장 넓은 벌판에 자리를 잡고 있는 청군 본영으로 향했다.
신분을 확인하는 절차를 거친 후 도현은 군영 한복판에 위치한 지휘 막사로 안내됐다.
성인 남성 서른 명이 한꺼번에 들어가도 비좁은 느낌이 없을 정도로 넓은 지휘 막사에는 갑옷을 걸친 예친왕 도르곤이 휘하 장수 다섯 명과 지도를 펼쳐 놓은 탁자를 가운데 두고 의자에 앉아 있었다.
도현이 들어서자 도르곤은 뜻밖이라는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반겼다.
“아니, 자네가 여긴 어쩐 일인가?”
“지원 병력으로 온 조선군을 격려하기 위해서 왔습니다.”
“그래? 아무튼 잘 왔네.”
전투가 생각대로 잘 풀리지 않아 저기압이었던 도르곤은 도현의 말에 살짝 미소를 지으면서 비어 있는 의자를 가리켰다.
“여기 앉게.”
“감사합니다.”
지난번 만리장성 공략 때 소현세자와 함께 참전한 덕분에 청군 장수들과 약간 친분이 있던 도현은 다른 사람들과도 가볍게 눈인사를 나눴다.
대부분의 장수들이 호의적으로 대하는 것과 달리 도르곤 옆자리에 있던 용골대는 은근슬쩍 그를 노려보며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다.
물론 도현은 그런 용골대의 행동에 당황하거나 기죽지 않고 그냥 상대를 무시해 버리는 걸로 응수했다.
“전황은 좀 어떻습니까?”
말을 꺼내자마자 도르곤은 미간을 팍 찌푸렸다.
“공성전을 시작한 지 벌써 한 달이 다 되어 가는데 아무런 성과도 없이 이러고 있네.”
목소리가 딱딱하게 굳어 있는 것이 성을 함락시키지 못해 자존심이 크게 상해 있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저들이 지금은 높고 튼튼한 성벽에 기대 공격을 막아 내고 있지만 병법에 능한 예친왕 전하께서 직접 지휘를 하고 계시니 쉴 새 없이 두드리다 보면 결국 틈이 생기면서 무너질 수밖에 없을 겁니다.”
“하하하! 말이라도 그렇게 해 주니 기분이 조금 풀리는 것 같군. 하지만 전투가 길어지면 우리도 좋을 것이 없으니 걱정일세.”
사실 시간이 갈수록 유리한 것은 청이 아니라 영원성에 틀어박혀 있는 명나라 군대였다.
일단 이십만 명이나 되는 대군을 유지하려면 매일 짐수레로 수백 대분에 달하는 엄청난 양의 보급품이 필요했는데 아무리 청이 강대국이라고 해도 이걸 계속 감당하는 건 상당한 부담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계절이 바뀌어 추운 겨울이 되면 따뜻한 성안에 있는 명군과 달리 야외에서 키 높이까지 쌓이는 눈과 뼈를 에는 삭풍을 고스란히 다 맞아야 하는 청군은 전투를 계속 이어 가기 어려웠다.
억지로 병사들을 몰아붙인다면 공성전을 계속할 수는 있지만 문제는 눈 때문에 길이 막혀 원활하게 보급을 받기 어렵다는 것이다.
“보급 때문에 그러시는 겁니까?”
“이제 보니까 봉림대군이 병법에도 일가견이 있는 모양이군. 맞네. 지금도 제때 물자가 도착하지 않아서 어려움이 많아.”
실제로 화약이 떨어져 며칠간 홍이포의 지원 사격 없이 그냥 병사들만 돌격시킨 일도 있었다.
불만 어린 도르곤의 말에 도현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그럼 육로만 이용해서 보급할 것이 아니라 한꺼번에 대량의 물자를 옮길 수 있는 바닷길을 적극 활용하는 게 어떨까요?”
“바닷길이라…….”
“그렇게 되면 겨울이 되더라도 큰 어려움 없이 보급로를 원활하게 유지할 수 있을 겁니다.”
도현의 말에 도르곤이 관심을 보이자 옆에 있던 용골대가 툭 끼어들어 훼방을 놨다.
“얼핏 그럴듯해 보이지만 바다 역시 날씨가 안 좋아지면 며칠씩 배들이 꼼짝달싹 못하고 발이 묶이는 경우가 많고 무엇보다 해적들 때문에 안정적으로 보급로를 유지하기 어렵습니다.”
한마디로 아무것도 모르고 지껄이는 헛소리라는 이야기였지만 도현은 전혀 동요하지 않고 차분히 반박했다.
“용골대 장군의 말처럼 가끔 날씨나 파도가 나쁘면 배를 움직이기 어렵기도 하지만 한꺼번에 옮길 수 있는 물량을 고려하면 그 정도는 충분히 감수할 만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뭔가 오해를 하시는 것 같은데 제 말은 바닷길로만 보급을 하자는 것이 아니라 양쪽을 다 활용해서 물자가 부족해지는 일을 막자는 겁니다.”
“하긴 그러면 만약의 경우 한쪽이 막혀도 보급이 끊길 일은 없겠습니다.”
“당장만 해도 바닷길을 이용할 수 있다면 보급 물자 공급이 더 원활해질 거고요.”
용골대를 제외한 다른 장수들과 도르곤이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자 도현은 내심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해적 문제는 청국 같은 큰 나라가 고작 그런 놈들 때문에 바다를 포기한다면 주변의 웃음거리가 될 겁니다. 차라리 이번 기회에 연안을 어지럽히는 해적단을 모두 토벌해 버리시지요.”
은근히 자존심을 건드리자 도르곤이 발끈하며 입을 열었다.
“흥! 명을 치느라 미처 신경을 쓰지 못해서 그렇지 그까짓 놈들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쓸어버릴 수 있지.”
“맞습니다.”
그걸 보며 도현이 쐐기를 박듯 말했다.
“그럼 망설일 이유가 없겠군요. 내일이라도 당장 수군 일부를 빼내 보급로 확보에 투입하시죠.”
잠시 머뭇거리던 도르곤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렇게 하자고. 그러면 이 임무를 누구한테 맡길까.”
결정을 내린 도르곤이 모여 있는 장수들을 스윽 훑어보며 적임자를 찾자 다들 딴청을 피우면서 은근슬쩍 시선을 피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순수 청국 출신들은 수전에 익숙하지 않은 데다 그나마 경험이 있고 현재도 수군을 맡고 있는 공유덕과 경중문 같은 한족 투항 장수들은 힘만 들고 전공은 거의 인정해 주지 않는 해적 토벌을 맡지 않으려고 했다.
이런 부하 장수들의 속마음을 짐작한 도르곤이 살짝 이맛살을 찡그리며 뭐라고 호통을 치려는 순간 처음 말을 꺼냈던 도현이 나섰다.
“제가 맡으면 안 되겠습니까?”
“봉림대군이 말인가?”
“예.”
지시를 내리면 어쩔 수 없이 듣기는 해도 명과의 싸움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 조선군이었기에 도현이 먼저 나서 임무를 맡겠다고 하자 도르곤과 청국 장수들은 깜짝 놀란 얼굴로 그를 봤다.
“해적 토벌을 맡겠다는 이유가 뭐지?”
상대가 눈을 가늘게 뜨며 묻자 도현은 순간 대충 둘러댈까 하다가 능구렁이 같은 도르곤이라면 뭔가 숨기는 것이 있다는 걸 바로 눈치챌 거라는 생각에 그냥 과감하게 정공법을 썼다.
“알고 계시다시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상국上國으로 섬기던 명을 향해 칼끝을 들이대는 걸 많은 조선 장수들이 불편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명 대신 아무런 부담이 없는 해적들을 토벌하겠다 이건가?”
“네.”
자칫 남한산성에서 인조가 황제에게 직접 항복을 하고서도 딴마음을 품는다고 크게 화를 낼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도현은 담담한 얼굴로 머리를 끄덕였다.
“…….”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흐르고 날카로운 시선으로 도현을 바라보던 도르곤은 이내 천막이 떠나가라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솔직하게 말해 주니 고맙군. 아마 다른 이유를 들었다면 사실인지 의심부터 했을 거야. 이봐, 공 장군.”
“예.”
“조선군이 빠져도 동쪽 성벽을 공략하는 데 문제가 없겠지?”
청나라 수군 지휘관인 공유덕은 바로 대답했다.
“아무래도 화력이 조금 줄어들기는 하겠지만 공격이 어려울 정도는 아닙니다.”
“그럼 해적 토벌은 봉림대군이 조선 수군을 이끌고 처리하는 걸로 하지.”
“좋은 생각이십니다.”
“저희도 찬성입니다.”
귀찮은 일을 떠넘길 기회였기에 장수들은 너도 나도 찬성했고 그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용골대도 도현과 별 도움이 안 되는 조선군을 멀찌감치 떼어 놓을 수 있었기에 별다른 반대를 하지 않았다.
“해상 보급로 확보에 대한 전권을 줄 테니 잘해 보게.”
“예. 저, 그런데 한 가지 부탁드릴 것이 있습니다.”
“뭔가?”
“너무 오래 심양을 비우면 걱정하실지도 모르니까 제가 조선 수군 지휘를 맡게 됐다는 걸 심양에 계신 황제 폐하께 알려 주셨으면 합니다.”
전투를 독려하러 간다고 청국 조정에 허락을 받았지만 괜히 나중에 꼬투리를 잡히지 않기 위해서 미리 손을 써 두려는 것이다.
도현의 의도를 단번에 눈치챈 도르곤은 입가에 미소를 짓고는 흔쾌히 부탁을 들어줬다.
“안 그래도 황도에 육지와 바다로 보급을 나눠서 해 달라는 요청을 해야 하니까 그때 장계에 자네 이야기를 같이 써서 보내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이걸로 도현은 당분간 서해 바다라는 한정된 공간이기는 해도 볼모의 신분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게 됐다.
지휘 막사를 나온 도현은 본진에서 뒤쪽으로 십 리쯤 떨어진 곳에 위치한 조선 수군 주둔지로 안내를 받았다.
해안에 세워진 주둔지는 야습을 막기 위해 주변 숲에서 나무를 베어 와 목책을 세우고 바다 쪽에는 배를 댈 수 있는 임시 선착장 시설까지 만들어져 있었다.
전령을 통해 미리 도현이 왔다는 걸 전해 들은 임경업 장군은 휘하 장수들을 모두 데리고 목책 입구까지 나와 그를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대군마마.”
“며칠 안 지났지만 다시 만나게 되어 반갑소, 임 장군.”
“저 역시 그렇습니다.”
두 번째 만남이라 그런지 두 사람은 전보다 더 친근하게 인사를 나눴고 곧 지휘 천막으로 자리를 옮겼다.
“전장이라 많이 부족합니다만 그래도 정성껏 마련한 음식이니 한번 드셔 보십시오.”
때마침 저녁 시간이라 식사를 같이 하게 됐는데 도현은 차려져 있는 음식들을 보고 불만은커녕 오히려 크게 만족했다.
“이 정도면 진수성찬인데 뭘 그러시오. 이거 내가 괜히 와서 임 장군과 병사들을 귀찮게 한 건 아닌지 모르겠소이다.”
“당치도 않습니다. 대군마마께서 직접 오셔서 위로를 해 주시니 병사들의 사기가 크게 올랐습니다. 자, 이쪽으로 앉으시죠.”
“하하하, 그래요.”
도현이 상석에 앉자 다른 사람들도 긴 탁자 좌우에 각자 자리를 잡았다.
수군답게 고기나 조개 같은 각종 해산물이 주를 이루는 가운데 숯불에 통째로 구운 아기 돼지 한 마리도 노릇노릇 맛있는 냄새를 풍기며 떡하니 탁자 위에 올라 있었다.
“자! 한 잔 하시죠.”
임경업 장군이 한쪽에 있던 술병을 들어 도현의 잔에 따랐다.
봉림대군의 어중간한 나이 때문에 자신의 뜻과 아무런 상관도 없이 관저에서 금주禁酒를 했던 도현은 코끝으로 파고드는 향긋한 술 내음에 군침을 삼켰다.
“전장에서 고생을 하는데 힘내라는 의미로 내가 한 잔씩 따라 주겠소.”
“아이고, 영광입니다.”
술병을 손에 든 도현은 옆에 앉은 임경업 장군뿐 아니라 자리에서 일어나 모여 있는 장수들 한 명마다 직접 잔에 술을 따라 주며 격려를 했다.
그렇게 잔이 모두 채워지자 도현은 좌우를 둘러보며 건배 제의를 했다.
“자! 조선의 안녕과 여기 있는 장수와 병사들이 전부 무사 귀환할 수 있기를 바라며 건배.”
“건배!”
큰 소리로 건배를 외친 도현과 장수들은 단번에 잔에 든 술을 깨끗이 다 비웠다.
“크으!”
식도를 타고 넘어가는 화끈한 알코올 느낌에 도현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었다.
다시 술잔이 채워지고 그들은 차려진 음식을 젓가락으로 집어 먹으며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식사를 했다.
그렇게 접시가 하나 둘 비워지고 식사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어 가자 임경업 장군이 자연스럽게 물었다.
“곧장 심양으로 돌아가실 줄 알았는데 여기까지 어쩐 일로 오신 겁니까?”
오랜만에 들어간 술 때문에 얼굴이 살짝 붉어진 도현은 고개를 돌리고는 차분히 이야기를 했다.
“아무리 적극적으로 전투에 나서지 않는다고 해도 명과 싸우는 게 껄끄러울 것 같아 장군과 병사들을 편하게 해 주려고 왔소.”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뜬금없는 말에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보는 임경업 장군에게 도현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내일이면 정식으로 명령이 떨어지겠지만 여기로 오기 전에 예친왕 도르곤과 이야기를 해서 조선군을 뒤로 빼내 해상 보급로를 확보하는 일에 투입시키기로 했소.”
“해상 보급로요?”
“그렇소이다, 아무래도 명군보다는 해적들을 격퇴하는 것이 마음도 편하고 청군 지휘부의 간섭에서도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으니 좋지 않겠소.”
“…….”
잠시 멍한 얼굴로 도현을 보던 임경업과 장수들은 진짜 이유는 눈치채지 못했지만 이내 그가 표면적으로 내세운 의도를 파악하고는 크게 감탄했다.
“그거 아주 좋은 생각이군요.”
“확실히 명군보다는 해적을 토벌하는 것이 백번 낫지요.”
다들 드러내 놓고 불만을 토하지는 않았지만 청을 도와서 영원성에 있는 명군을 공격하는 것이 꺼림칙했는지 도현의 말을 반겼다.
“그러면 대군마마께서 저희를 지휘하시는 겁니까?”
노련한 장수답게 금방 흥분을 가라앉힌 임경업 장군이 예민한 지휘권에 대해 묻자 도현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형식은 그렇게 하지만 아무래도 난 병법에 대해 아는 것이 부족하니 지금처럼 임 장군이 실질적으로 함대를 맡으시오.”
애초부터 지휘권에 대한 욕심이 전혀 없었기에 도현은 시원스럽게 양보해서 자칫 갈등이 생길 수도 있는 부분을 차단했다.
그러자 임경업 장군도 다시 얼굴을 활짝 폈다.
“자질이 충분하신데……. 그럼 제가 도와 드린다는 생각으로 옆에서 보필하겠습니다.”
“고맙소.”
그렇게 지휘권 문제가 정리되자 다시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도현과 임경업 장군은 술잔을 나눴다.
다음 날, 날이 밝자마자 도현이 말한 대로 해적들을 토벌해 해상 보급로를 확보하라는, 도르곤의 직인이 찍힌 명령서가 도착했다.
전투에 아무런 미련이 없었던 조선 수군은 서둘러 준비를 끝내고는 이틀 뒤 바로 주둔지를 떠났다.
그렇다고 조선군이 영원성 공략전에서 완전히 손을 뗀 건 아니었는데 이시영 장군이 지휘하는 보병 오천 명이 남아 여전히 전투를 이어 갔다.
해적을 토벌하기 위해서는 물자를 쌓아 두고 잠시 병사들에게 휴식을 줄 수 있는 거점이 필요했다.
처음 임경업 장군은 보급선이 출발하는 요동반도에 기지를 세우려 했지만 도현이 적극적으로 설득해서 교역 거점을 만들려는 웅도로 함대를 끌고 갔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조건이 좋군요.”
휘하 장수들과 함께 상륙해 섬을 둘러본 임경업이 만족한 얼굴로 말하자 옆에 있던 도현은 그것 보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까 내가 여길 거점으로 삼아야 된다고 고집을 피운 거요.”
“이럴 줄 알았으면 바로 찬성했을 텐데 이거 죄송스럽습니다.”
“뭐, 실수할 때도 있으니 이번 한 번은 봐 드리겠소.”
도현이 농담처럼 말을 던지자 임경업과 장수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고맙습니다, 마마.”
“그럼 이곳에 주둔지를 세우는 거요?”
“예.”
지휘부의 결정이 내려지자 그다음부터는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됐다.
제일 먼저 섬에 있는 아름드리나무를 베어 약 십 장 길이의 선착장을 만들어서 배를 댈 수 있게 했다.
동시에 다섯 척씩 짝을 지어 주변 해역을 순찰하면서 보급로를 확보하는 임무도 조금씩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