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장
며칠 뒤 해적들을 심문해 본거지를 알아낸 도현은 직접 판옥선 열 척과 병사 사백 명을 이끌고 쳐들어갔다.
진태룡이 주요 전력들을 다 이끌고 나갔기 때문에 섬에는 고작해야 수십 명 남짓한 조무래기들만 남아 있을 뿐, 방어 능력은 이미 상실한 상태였다.
조선 수군이 멀찍이서 대포로 위협사격을 몇 번 가하자 순식간에 항복을 뜻하는 백기가 올라왔고, 도현 일행은 손쉽게 해적 본거지를 점령할 수 있었다.
얼마 안 남은 해적 잔당들을 한데 몰아서 포박한 뒤 도현은 부하들을 이끌고 섬 곳곳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호오! 대단하군.”
창고에 산더미처럼 쌓인 물건들을 보고 그는 자기도 모르게 감탄하는 말을 내뱉었다.
본거지 안에는 몇 개나 되는 창고가 있었는데 그것들은 다 용도가 달랐다.
어떤 곳에는 최고급 비단이 천장에 닿을 정도로 쌓여 있는가 하면 또 다른 창고에는 멀리 대식국(아라비아) 상인들이 들여오는 각종 향신료나 산호, 보석을 박은 장신구 등이 가득했다.
그간 얼마나 노략질을 했는지 조선 제일의 거부라 해도 쉽게 모을 수 없는 귀한 물건들을 이리 모아 놓고 있는 것을 보고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섬을 샅샅이 뒤져서 이런 보관 창고들이 더 있는지 알아내. 그리고 옮길 수 있는 만큼 배에 실어 나르도록.”
“예!”
일반 보물고는 병사들에게 맡기고 도현은 진태룡이 머물던 거처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디 보자.”
포로가 된 모문척을 직접 심문해서 알아낸 정보에 따르면 진태룡은 상인들에게 뺏은 물품들 중 가장 중요하고 값비싼 것은 자기 거처 안에 있는 비밀 장소에 숨겨 둔다고 했다.
도현은 호랑이 모피가 등받이에 걸쳐져 있는 진태룡의 의자를 조사하다가 오른쪽 팔걸이가 다른 쪽보다 더 무거운 것을 알아채고는 씨익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이거로군.”
쿠구궁!
오른쪽 팔걸이를 젖혀 올리자 등 뒤에서 톱니바퀴가 돌아가는 큰 소리가 나며 기관이 작동해 뒤편 돌 벽이 갈라지면서 숨겨진 방이 드러났다.
“일개 해적 주제에 이런 장치까지 만들어 놓다니 용의주도한 놈이네요.”
“그 정도로 신경을 써야 할 만큼 숨겨야 할 게 많다는 소리겠지.”
이런 건 또 처음 본다는 듯 칠현이 감탄하면서 말하자 도현은 아무렇지도 않게 답하면서 방 안을 탐색했다.
철제 상자와 자루에는 흘러넘칠 듯이 많은 금화와 은화가, 그리고 최고의 장인이 만든 도자기는 물론이고 보석을 박아 넣은 장식용 보검, 금실로 수놓은 망토하며 투명하게 하늘거리는 비단 등 세상의 모든 보물이란 보물은 여기에 다 모아 놓은 것 같았다.
여기 있는 것들만 팔아 치워도 삼대가 아니라 아래로 십대는 흥청망청 풍요롭게 살 수 있을 정도였다.
“진태룡이란 놈은 이런 보물들을 가지고 있으면서 왜 해적질을 계속했을까요. 어디든 가서 남부럽지 않게 살 수 있었을 텐데.”
번쩍거리는 보물들을 앞에 두고 눈이 휘둥그레지면서도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칠현에게 도현은 가볍게 답했다.
“사람의 욕심이란 끝이 없는 법이니까.”
“흐응……. 이해가 안 되네요. 저라면 위험한 해적질은 당장 때려치웠을 텐데.”
“그래서 네가 크게 한탕 하는 거하곤 거리가 먼 거지.”
“예이, 전 어차피 가늘고 길게 사는 게 목표니까요.”
칠현은 입술을 삐죽거리다가 도현에게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할까요?”
“여기 있는 것들은 다른 화물들이랑 섞이지 않게 따로 보관해서 챙겨 놔. 그리고 배에 싣는 작업이 다 끝나면 섬을 떠난다.”
“알겠습니다.”
뒷일은 칠현에게 맡겨 놓고 도현은 먼저 한 발짝 벗어나 배에 올라탔다.
갑판 위에서 병사들이 바쁘게 움직이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길 얼마 후, 작업이 다 끝났다는 말에 돌아서서 말했다.
“좋아. 이제 섬에 남은 사람은 없겠지?”
“예!”
“그럼 다시는 해적들이 여기를 사용하지 못하게 다 불태워 버려.”
도현의 명령이 떨어지자 병사들은 사방으로 돌아다니면서 손에 든 횃불로 건물마다 불을 붙였다.
화르르륵!
미리 기름을 흠뻑 뿌려 놓은 덕분에 건물은 불을 놓자마자 시커먼 연기를 피워 올리면서 무섭게 타올랐다.
불길은 순식간에 해적 소굴 전체로 번졌고 도현과 병사들은 판옥선을 타고 유유히 섬을 떠났다.
뒷짐을 진 채 함교에 서서 불타오르는 건물과 선착장을 웃음 띤 얼굴로 바라보던 도현은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짧게 말했다.
“웅도로 돌아가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큰 소리로 대답한 이혁민 초도현감이 손짓을 하자 병사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판옥선의 속도를 올렸다.
하지만 워낙 해적들이 모아 놓은 물건들이 많다 보니까 위험할 정도로 홀수선이 올라온 판옥선들은 좀처럼 속도를 내지 못하고 느릿느릿 이동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발해만을 주름잡고 다니던 수룡단은 이렇게 도현과 조선 수군에 의해 기억 저편으로 완전히 사라지게 됐다.
십 년 넘게 해적질을 해 온 만큼 수룡단 본거지에서 나온 재물은 어마어마했는데 도현은 급히 연락해서 불러들인 봉황상단을 통해 이 중 일부를 처분했다.
그렇게 생긴 돈으로 돼지 예순 마리와 소 스무 마리 그리고 술을 대량으로 구입해서는 수군 병사들과 함께 승리를 자축하는 잔치를 벌였다.
이걸로 입을 싹 닦아도 되지만 도현은 병사 한 명당 은자 다섯 냥씩 상금을 나눠 줬다. 물론 장수는 그것보다 많은 금자로 포상금을 주었다.
아무튼 예상치 못한 돈을 받게 된 병사들이 크게 기뻐하며 그에 대한 충성심도 높아졌다.
“허허허, 저까지 챙겨 주시는 겁니까?”
“장군이야말로 이번 승리의 일등 공신 아니오.”
도현의 말에 아니라는 듯이 손을 내저으면서도 기분은 좋은지 임경업 장군의 양쪽 눈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저보다는 대군마마께서 더 애를 쓰셨지 않습니까.”
“아니오. 임 장군이 없었다면 해적들을 물리칠 수 없었을 거요.”
그러면서 도현은 순금 단검을 스윽 앞으로 내밀었다.
중동에서 만들어진 반달 모양의 단검은 검신 전체가 순금으로 되어 있고 손잡이는 루비, 사파이어 같은 귀한 보석을 써서 아주 화려하게 장식됐다. 한눈에도 엄청 비싼 물건인 걸 알 수 있었다. 실제로 순수하게 금과 보석 값어치만 해도 조선 돈으로 천 냥이 넘었다.
“그래도 제가 받기에는 너무 과분한 물건 같습니다.”
“장군이 아니면 누가 이걸 가지겠소. 다른 장수들에게도 적당한 포상을 해 줬으니까 부담 가지지 않아도 되오.”
재차 권하자 계속 사양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었기에 임경업 장군은 못 이기는 척 단검을 챙겼다.
“정 그리시면 감사히 받겠습니다.”
임경업 장군이 단검을 허리춤에 꽂아 넣는 걸 보고 흡족한 표정을 지은 도현은 상대가 부담을 느끼지 않도록 자연스럽게 화제를 바꿨다.
“듣자 하니 청군이 보급 선단을 출발시킨다고 통보를 해 왔다던데 사실이오?”
“그렇지 않아도 그것 때문에 당분간 해적 토벌은 중단해야 될 것 같습니다.”
조선 수군이 바다로 나온 원래 목적이 영원성으로 가는 해상 보급로의 안전을 확보하는 것이니 보급 선단이 출항하면 그걸 호위하는 건 당연하기에 도현은 별말 없이 머리를 끄덕였다.
“조금 아쉽기는 하지만 발해만에서 제일 큰 해적단을 괴멸시켰고 괜한 의심을 받지 않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니 장군이 알아서 하시오.”
“예.”
“아! 그리고 이번에 해적한테 빼앗은 재물은 일단 봉황상단에 귀속시키기로 형님과 이야기를 끝냈으니 임 장군도 그렇게 알고 이해해 주시오,”
원칙대로 한다면 한양에 있는 인조에게 보고를 해야 하지만 차기 국왕인 소현세자가 사실을 알고 있고 자칫 소문이 나면 몽땅 청국에 빼앗길 가능성이 컸기에 임경업은 도현의 말대로 그냥 조용히 처리하는 것에 동의했다.
“그렇게 하십시오.”
“왜 그러는지 이유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거라고 생각하오.”
“예. 저희들이 목숨 걸고 해적과 싸워서 노획한 것들인데 애먼 놈들 좋은 일 시킬 수는 없지요.”
잘못하면 분란의 요인이 될 수도 있는 걸 임경업 장군이 시원스럽게 수긍해 주자 도현은 안도한 표정을 지었다.
“이해해 줘서 고맙소.”
그 뒤로도 두 사람은 아주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향후 함대를 어떻게 운용할 것인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다.
며칠 후 임경업 장군은 판옥선 서른 척을 이끌고 요동 반도에 위치한 영구營口로 가서, 기다리고 있는 보급 선단과 합류해 호위 임무를 수행했다.
영원성 전투가 한창 절정으로 치닫고 있었기에 필요한 물자가 많았던 청군은 이걸 시작으로 보름에 한 번꼴로 보급 선단을 띄웠고 덩달아 조선 수군도 바빠졌다.
그때쯤 광동성으로 떠났던 장 총관이 곡식을 가득 실은 선단을 이끌고 웅도에 도착했다.
“어서 와.”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보다시피 편히 있었어. 이번에도 성과가 좋았다고?”
맞은편 의자에 앉아 있던 장 총관은 도현의 물음에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예. 괜찮은 가격에 거래를 끝낼 수 있었고 해적들이 두세 차례 습격을 해 왔지만 호위로 붙여 주신 판옥선들이 어렵지 않게 모두 물리쳤습니다.”
“다행이군. 이번에 가져온 쌀이 얼마나 되지?”
그러자 장 총관은 미리 준비해 왔는지 물품 목록과 거래 장부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놨다.
“삼천오백 석입니다. 그리고 비단이 싸게 나와서 오백 필을 함께 구입했습니다.”
전쟁 통에 물가가 천정부지로 뛰어오른 상황에서 쌀 삼천오백 석은 큰돈이 됐기에 도현의 입술 끝이 자연스럽게 위로 올라갔다.
“정말 수고 많았어. 그러면 이번에도 화물을 모두 심양에서 처분할 거야?”
“아닙니다.”
“그럼?”
도현이 의아한 시선으로 쳐다보자 장 총관은 자세를 바로 하고는 진지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무리 오름세를 유지하고 있다지만 계속해서 이만한 물량을 시장에 풀어놓는다면 값이 크게 떨어질 겁니다.”
“그렇지.”
시장경제의 법칙에 따라 공급이 많아지면 가격이 하락하는 건 당연한 이치였기에 도현은 머리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가격 하락은 어쩔 수 없다고 해도 너무 가파른 폭락은 자칫 이익은 고사하고 오히려 우리가 손해를 보는 일이 벌어질 가능성도 있기 때문에 절반은 청이 아닌 조선으로 가져가 팔려고 합니다.”
“조선이라…….”
아직 가을 추수가 이루어지지 않아 식량이 귀할 시기고 무엇보다 청 황제의 요구에 군량미를 대거 보내 주는 바람에 조선도 쌀 가격이 크게 오른 상태였다.
이득은 둘째 치고 이런 때 천 석이 넘는 쌀이 풀린다면 완전 해결은 어려워도 어느 정도 백성들이 굶주리는 걸 막을 수 있었다.
이야기를 들은 도현은 왜 진작 이런 생각을 못 했는지 내심 자책하면서 장 총관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좋은 생각이야. 이번 기회에 아예 지속적인 거래가 가능하도록 한양에 지부를 하나 내는 건 어때?”
일이 생길 때마다 물건만 갖다 파는 것과 지부를 만들어서 상시적으로 운영하는 건 전혀 다른 문제였기에 장 총관은 살짝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지부를 말씀입니까?”
“그래. 형님과 내가 계속 청에 머물 것도 아니고 어차피 나중에는 조선으로 돌아가야 되는데 그때를 대비해서 미리 기반을 닦아 놓는다고 생각하면 되잖아. 그리고 이번 일도 단순히 쌀만 판다면 대부분 큰 상단 창고로 흘러들어가 버릴 가능성이 높지만 우리가 나선다면 백성들에게 직접 도움을 줄 수 있지 않겠어?”
“…….”
잠시 고심하던 장 총관은 이내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하지만 기존에 상권을 쥐고 막강한 힘을 휘두르는 상단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니까 이번에는 그냥 도매상들에게 물건을 넘기고 현지 분위기를 파악한 뒤에 조금씩 일을 진행시켜 나가겠습니다.”
조선에는 오랜 시간 동안 각 지역 상권을 장악하고 서로 뭉쳐 외부 세력을 배척하는 상인 집단들이 있었다. 대표적으로 부산 동래의 내상, 개성 송상, 의주 만상, 한양 시전 상인 그리고 한강 유역 조운선을 움직이는 경강상인 등이었다.
이들은 각자의 영역에서 확고한 기반을 구축하고 시장 전체를 주도했다. 예를 들어 동래 내상은 일본과의 무역 그리고 송상은 인삼, 경강상인은 조운을 독점해 조선 곡물 시장을 좌지우지하는 것이다.
조선 경제를 이끌어 가는 이들 상단의 영향력을 잘 알고 있는 도현은 장 총관의 말에 수긍했다.
“아쉽기는 하지만 괜히 기존 상단과 충돌해서 쓸데없는 문제를 만들 필요는 없겠지. 그건 자네가 알아서 처리하게.”
“예.”
이틀 뒤 물과 신선한 채소를 보충하고 짧지만 휴식을 취한 교역 선단은 영구를 향해 다시 길을 떠났다.
출발 전에 장 총관은 조선에 가져갈 쌀 천오백 섬을 따로 빼서 최근 완성된 창고에 보관해 두고 대신 도현의 지시에 따라 수룡단 본거지에서 털어 온 향신료와 비단 등 각종 사치품을 선창에 채워 넣었다.
그렇게 가져간 물품이 금자로 이십만 냥이 넘었지만 여전히 웅도 창고에는 노획품이 가득 쌓여 있고, 죽은 진태룡의 비밀 금고에서 나온 재물은 아직 개봉도 하지 않았다.
웅도에 들어온 지 넉 달이 넘어가면서 이제 거점 공사가 거의 마무리되어 처음 계획한 대로 각 시설물들이 속속 들어섰다.
제일 먼저 선착장은 판옥선 여섯 척이 한꺼번에 들어와 사람과 물건을 싣고 내릴 수 있을 정도로 크게 확장했고, 병사들이 묵는 숙소와 무기고 그리고 상단 창고는 모두 흙을 가마에 구워서 만든 벽돌을 사용해서 건설했다.
벽돌을 만들기 위해서는 그냥 나무를 잘라 오는 것보다 손이 상당히 많이 갔지만 목재보다 화재가 적고 외부 충격에 강했다.
무엇보다 섬이라 충분한 목재를 구하기가 어려운 상황이었기에 벽돌은 아주 훌륭한 대체품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거점 외부를 둘러싼 방어선도 전부 벽돌을 쌓아 만들고 싶었지만 시간과 인력이 부족해 아쉬운 대로 목책을 세웠다.
“빨리빨리 움직여!”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면 잔업만 더 늘어나게 될 거야.”
공사 현장 한쪽 구석에서는 가마에서 쉴 새 없이 벽돌이 구워져 나왔고, 그것들을 달구지에 실어 운반해 오면 흙을 발라 벽돌을 차곡차곡 쌓아 올리는 작업이 계속 이어졌다.
곳곳에 흩어져 있는 병사들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작업 진행 상황을 지켜보다가 간혹 요령을 피우거나 농땡이를 부리는 사람을 발견하면 즉각 달려가 반협박 조로 으름장을 놓았다.
작업 인부의 태반이 포로로 잡힌 해적들인지라 칼을 들고 노략질을 하거나, 뺏은 돈으로 흥청망청 놀 줄만 알았지 생전 이런 노동은 해 본 적이 없었기에 다들 울상을 짓고 억지로 움직이는 모양새였다.
“포로들이 말은 잘 듣나?”
“예에. 꾀를 피우려는 나쁜 버릇이 들어서 그렇지 조금만 겁을 주면 알아서 설설 깁니다요. 게다가 다들 젊은 사내들뿐이라 작업 진행 속도도 꽤 빠릅니다.”
“음, 너무 험하게 다루지는 말게. 밥은 삼시 세끼 꼭 챙겨 먹이고, 휴식 시간도 알아서 잘 챙겨 주도록 해.”
아무리 과거에 나쁜 짓을 했다고 해도 기본적인 인권은 지켜 줘야만 한다.
도현으로서는 당연한 생각이었지만 이 시대엔 그런 발상 자체가 없었기 때문에 감독관은 의외라는 눈빛으로 얌전히 고개를 숙였다.
“언제쯤이면 다 끝날 것 같은가?”
“이레면 충분할 겁니다.”
감독관의 말에 도현은 턱을 끄덕이며 짧은 격려의 말을 남기곤 처소로 돌아왔다.
그러자 이번엔 잠시 쉴 틈도 없이 칠현이 다가와 봉황상단의 사람이 와서 기다린다는 소식을 알렸다.
“지금 방 안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알았어.”
도현이 칠현을 뒤에 거느리고 방으로 들어서자 얌전히 자리에 앉아서 차를 마시고 있던 중년 남자 한 명이 일어서서 인사했다.
“소인 유돌석이 마마를 뵙습니다.”
“앉게나. 그나저나 꽤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군.”
“아닙니다. 마마께 방해가 될까 봐 제가 일부러 연락을 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는걸요. 부디 괘념치 마십시오.”
유돌석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보이곤 도현이 자리에 앉자 그제야 뒤따라 앉았다.
키는 그다지 크지 않지만 돌처럼 단단해 보이는 근육질의 몸에 우직한 인상이라 상인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무인이란 표현이 더 어울리는 사람이다.
“차가 식었군. 칠현아, 새 차를 갖다 다오.”
“예.”
칠현이 따뜻하게 우린 차를 잔에 따라 주자 향긋하면서 진한 향기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청나라 황실에 납품되는 것보다는 못하지만 그래도 마실 만할 걸세.”
“용정차로군요. 해마다 생산되는 양이 정해져 있어서 손에 넣기가 힘들죠.”
“호오. 자네, 차에 대해서 좀 아는가?”
“하하, 취미라고 할 정도는 아닙니다만 제 직업상 이것저것 잡다한 것들을 좀 알고 있는 편입니다.”
“그렇겠군.”
상인이라면 자신이 사고파는 상품에 대해 정통해야 하는 법이다.
유돌석은 봉황상단의 간부인 데다 장 총관이 신임하는 부하이기도 한 만큼 값어치가 나가는 상품도 여러 가지 다루어 봤을 터.
게다가 전쟁 통에 포로가 되어 청국에 끌려오기 전에는 개성 송상에서 일하며 쌓은 상인으로서의 경력도 꽤 긴 편이니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장 총관 대신 자네가 오다니, 무슨 일이라도 있나?”
“아닙니다. 사실은 요즘 계속 총관님이 밖을 돌아다니며 교역을 하다 보니 상단 내부적으로 처리해야 할 일이 많이 쌓여서 말이지요.”
“아아, 그렇군. 장 총관이 고생 좀 하겠는걸.”
“지금쯤 미뤄 두었던 서류와 보고서들을 읽느라 정신없을 겁니다.”
책상머리 앞에서 곤욕을 치르고 있을 장 총관을 생각하니 절로 웃음이 나는지 유돌석이 작게 미소 짓고는 말했다.
“사정이 이러하니 앞으로는 제가 역할을 대신하게 되었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머리까지 숙이며 정중하게 예를 올리는 유돌석의 모습에 도현은 손을 내저었다.
“알았으니 그만하게. 자네는 다 좋은데 너무 뻣뻣한 게 흠이란 말이야.”
“하하, 알겠습니다.”
“상단 이야기는 이쯤 하고, 뭐 다른 소식은 없나?”
화제를 돌릴 겸 가볍게 꺼낸 말에 유돌석이 살짝 얼굴을 굳히고 답했다.
“안 그래도 말씀드리려고 했습니다만……. 마마, 심양을 떠나신 지 이제 얼마나 되셨습니까.”
“음, 한 넉 달 되나. 그러고 보니 꽤 오래 자리를 비웠군.”
그간 정신없이 바쁘게 지낸지라 날짜를 세어 볼 생각도 하지 못했는데, 새삼 떠올리니 심양에서 지냈던 나날이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지금 청나라 쪽에서 마마의 행적에 대해 슬슬 말들이 나오고 있는 추세입니다.”
“말이라니, 어떤?”
“그것이…….”
유돌석은 입 밖으로 꺼내기가 거북한 듯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
“마마께서는 조선의 왕자이시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청나라에, 그…… 신분을 의탁하고 있는 형편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몇 달 동안 심양을 떠나 계시니 혹시 다른 생각을 품고 있는 게 아닌가 하고 의심하는 세력들이 있는 모양입니다.”
“그래서?”
얼굴을 굳히며 도현이 묻자 유돌석은 곤혹스러운 얼굴로 이야기를 계속했다.
“얼마 전 황궁에서 칙사가 나와 세자 저하께 그만 대군마마를 심양으로 불러들이라는 통보를 해 왔습니다.”
“으음.”
우려하던 말이 나오자 도현은 미간을 찌푸리면서 자신도 모르게 침음성을 내뱉었다.
“알았으니까 더 할 이야기 없으면 이만 숙소로 가서 쉬게.”
“그럼.”
도현의 말에 자리에서 일어난 유돌석은 꾸벅 허리를 숙이고는 방을 나갔다.
문이 닫히고 둘만 남자 한쪽에 서 있던 칠현이 그를 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어쩌실 겁니까?”
그러자 도현은 양쪽 어깨를 으쓱였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황제가 오라는데 별수 없잖아.”
“그렇지요.”
황제의 명을 거역했을 때 조선에 불어닥칠 후폭풍이 얼마나 거셀지 칠현도 잘 알고 있기에 금방 수긍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나저나 일을 다 마무리 짓지도 못했는데 이렇게 떠나게 돼서 아쉽군.”
찻잔을 만지작거리다가 내려놓은 도현은 약간 경직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가서 임봉기를 데려와.”
“예.”
임봉기는 경기도 출신으로, 약간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였다.
원래는 농사를 짓다가 병자호란 때 청군에 잡혀 노예 신세가 됐는데 우직하고 근면 성실한 성격 덕분에 주인한테 신임을 얻어 비단 가게 책임자까지 될 수 있었다.
그렇게 잠시 봄날이 오는 것 같았지만 주인이 무리하게 벌인 사업이 실패하고 빚 청산을 하면서 다시 노예시장에 팔렸다가 우연찮게 도현의 눈에 띄어 자유를 얻을 수 있었다.
이런 사연 때문인지 처자식이 없는 임봉기는 도현이 약간의 돈을 주며 고향으로 돌아갈 기회를 줬지만 거절하고 잔심부름이라도 좋으니 이곳에 남아 은혜를 갚겠다고 봉황상단에 눌러앉았다.
처음에는 이러다가 말겠거니 하며 가볍게 생각했던 도현은 몇 달이 흘러도 계속 남아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고 열심히 상단 업무를 돕는 모습에 그를 수하로 받아들였다.
얼마쯤 지났을까, 문이 열리면서 칠현이 임봉기를 데리고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대군마마.”
꾸벅 허리를 숙이면서 임봉기가 인사를 하자 도현은 미소 띤 얼굴로 빈자리를 가리켰다.
“그쪽에 앉아.”
“네.”
“심양에서 교역 선단이 도착한 건 알고 있지?”
“그러지 않아도 교역선에 식수를 보충하는 작업을 감독하다가 오는 길입니다.”
“유 서기가 오면서 전갈을 하나 가져왔는데 아무래도 내가 심양으로 가 봐야 될 것 같아.”
도현의 말에 임봉기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고개를 살짝 들었다.
“상단에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겁니까?”
“그건 아니고, 황제가 이제 그만 심양으로 돌아오라는군. 자네도 알다시피 내가 볼모로 잡혀 있는 몸이잖아.”
대충 상황을 파악한 임봉기는 볼모라는 단어에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돌아가실 수 있게 준비를 하겠습니다.”
“그런데 자네는 여기에 남아 줘야겠어.”
“예?”
의아한 얼굴로 쳐다보는 임봉기와 시선을 마주치며 도현은 차분히 이야기를 이었다.
“어렵게 마련한 거점을 이대로 버리고 갈 수는 없잖아. 누가 한 명은 남아서 나 대신 여길 관리해야 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자네밖에 없어. 해 줄 수 있겠나?”
고대부터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어려운 일을 떠맡길 때 쓰던 상투적인 수법인 ‘너뿐이다’ 신공(?)을 쓰자 잠시 고심하던 임봉기는 이내 머리를 끄덕였다.
“제가 잘해 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마마께서 필요하시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역시 자네뿐이야.”
흡족한 얼굴로 임봉기의 어깨를 부드럽게 두드려 준 도현은 그 뒤로 한참 동안 자신이 떠나고 난 뒤에 어떻게 거점을 운영해야 될지 이야기를 해 줬다.
다음 날 임봉기를 이곳 교역 거점 책임자로 공식 임명한 도현은 서둘러 업무를 정리한 뒤 귀환길에 올랐다.
“이렇게 갑자기 떠나시게 돼서 정말 섭섭합니다.”
“황제가 오라고 하니 어쩌겠소. 하지만 어떻게 해서든 수를 써서 최대한 빨리 돌아올 테니까 걱정 마시오.”
“그럼 그때까지 해적 놈들한테 빼앗은 백화주를 안 따고 잘 보관해 두겠습니다.”
임경업 장군의 말에 도현은 약간 과장되게 입맛을 다셨다.
“이거 백화주를 맛보기 위해서라도 어서 와야겠군.”
“하하하!”
웃음으로 마지막 인사를 한 도현은 군례를 취하며 환송하는 임경업 장군과 여러 장수들을 뒤로하고 판옥선에 올랐다.
영구에서 하룻밤을 쉰 도현은 이레 뒤 심양에 도착했다.
서두르면 더 빨리 갈 수도 있었지만 급히 갈 이유도 없고 내려왔을 때와 달리 이번에는 가져갈 짐(?)이 많아서 이동속도가 늦어졌다.
내용물을 알 수 없게 천을 덮어씌운 짐수레 다섯 대를 끌고 도현 일행이 관저에 도착하자 정문을 지키고 있던 위사 두 명이 말을 타고 제일 앞에 서 있는 그를 알아보고는 얼른 인사를 해 왔다.
“어서 오십시오, 대군마마.”
“오랜만이군. 그동안 잘들 지냈나?”
무예를 배운다고 위사들과는 아주 친하게 지냈기에 도현은 반가운 얼굴로 말을 걸었다.
“예. 세자 저하께서 기다리고 계시니 어서 들어가시지요.”
“알겠네. 나중에 돌아온 기념으로 술자리를 마련할 테니 회포는 그때 풀자고.”
술을 산다고 하자 위사 한 명이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그래.”
웃는 낯으로 대답한 도현은 위사들을 뒤로하고 정문을 통과해 안으로 들어섰다.
포석이 깔린 돌길을 걷고 있자니 도현은 마치 오랜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듯 그리운 마음이 들었다.
새장에 갇힌 새처럼 억지로 고국을 떠나 살게 된 곳이지만 그간 알게 모르게 정이 든 모양이라며 도현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대군마마!”
“돌아오셨군요.”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들어 보니 돌길 끝, 넓은 앞마당에서 도현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맨 앞에는 소현세자가, 그리고 그 옆에는 좀처럼 바깥출입을 하지 않는 장씨 부인이 서 있고, 그 뒤로 관저에 있는 시강원 관리들이 나란히 모여 있었다.
“형님!”
오랜만에 만나는 얼굴들을 보자 도현은 반가운 나머지 한 달음에 달려가 소현세자 앞에 다가섰다.
“어서 오너라.”
“그동안 잘 계셨습니까?”
종친이라는 체면도 잊고 서로 얼싸 안은 소현세자와 도현은 얼굴에 함박웃음을 매달고 등을 툭툭 두드리며 형제간의 끈끈한 우애를 드러냈다.
“나야 뭐 항상 똑같지. 그것보다 네 얼굴을 보니 바깥에서 아주 잘 돌아다닌 모양이구나. 햇볕에 많이 타서 처음엔 못 알아볼 뻔했다.”
“하하, 형님도 참.”
“풍문에 상선을 습격해서 재물을 빼앗던 흉악한 해적들을 모조리 소탕했다며? 대단하구나. 정말 큰일을 해냈어.”
“큰일은요 무슨. 임경업 장군과 수군 병사들이 도와주지 않았으면 못해 냈을 겁니다.”
쑥스러운 듯 볼을 긁적이는 도현의 모습에 소현세자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다. 네가 가서 모두를 이끌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지.”
“세자 저하의 말씀이 맞습니다.”
“마마가 아니었으면 임경업 장군과 병사들은 아직도 영원성에서 청군의 화살받이 노릇이나 하고 있었을 겁니다.”
소현세자는 물론이고 옆에 있던 관리들까지 도현을 치켜세우자 그는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그저 미소만 지었다.
유교 사상을 신봉하고 아직도 명을 상국으로 섬기는 관리들은 압력을 받아 어쩔 수 없이 파병을 결정했지만 조선군이 청과 함께 명에 칼끝을 들이미는 걸 탐탁지 않게 여겼다.
그러던 차에 도현이 기지를 발휘해 명이 아닌 해적 토벌을 맡게 됐다고 하자 크게 기뻐하면서 침이 마르도록 그를 칭찬하며 호의적인 시선을 보냈다.
“부인.”
소현세자 등과 인사를 나눈 도현은 얌전히 한 발짝 뒤로 물러나 있는 장씨 부인을 발견하고 다정하게 말을 걸었다.
“부인도 나와 있었구려.”
“낭군께서 돌아오시는데 당연히 제가 마중을 나와야지요.”
비록 다른 사람들 앞이라 정중하게 예의를 차리긴 하나 그 눈빛에서 진정으로 도현의 귀환을 기뻐하는 마음이 느껴졌다.
“나누실 말씀이 많으실 텐데 전 이만 물러나 보겠습니다. 그럼.”
소현세자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한 장씨 부인은 시녀들을 데리고 처소로 돌아갔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은 건 장씨 부인도 마찬가지일 테지만 지금은 자신이 나설 때가 아님을 깨닫고 현명하게 물러서는 모습이 자연스레 높은 기품과 교양을 느끼게 했다.
세자의 거처로 자리를 옮기고 나서도 박황을 비롯한 시강원 관리들은 연신 도현을 칭찬했다.
“처음 전투를 독려하러 가신다고 했을 때만 해도 대군마마의 행동을 불편하게 생각하는 이들이 많았지만 이제는 다들 크게 감탄하고 있습니다.”
“맞습니다. 그런 깊은 뜻이 있는 줄도 모르고 오해한 것이 정말 부끄럽습니다.”
“나와 대빈객이 은밀히 써서 올린 서신을 받아 보고 조선에 계신 아바마마께서도 네가 큰일을 해냈다고 칭찬을 하셨단다.”
조선 병사들의 목숨을 살린 것보다 상국인 명나라와 싸우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 더 흡족해하는 관리들의 모습이 도현은 내심 한심하면서도 굳이 여기서 좋은 분위기에 초를 쳐서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었기에 겸손한 태도를 보이며 대충 맞장구를 쳐 줬다.
“다들 계속 이러니 이거 제가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한참 더 엉덩이를 붙이고 떠들어 대던 관리들이 나가자 비로소 도현은 소현세자와 독대를 할 수 있었다.
“히유. 어떻게 바다에서 병장기를 든 해적과 싸울 때보다 관리들을 상대하는 게 더 힘든지 모르겠습니다.”
“교육을 맡은 시강원 선생들이다 보니까 다들 말이 좀 많지.”
“좀 많은 정도가 아닌데요. 저런 사람들과 매일 몇 시간씩 앉아 공부를 하다니 정말 형님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 같으면 절대 못 해요.”
도현이 질렸다는 듯 한 손을 내밀며 흔들자 마주 앉아 있던 소현세자는 입을 크게 벌리며 한바탕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녀석 엄살은.”
“진짜예요. 시강원 학사들한테 시달리느니 차라리 해적하고 칼싸움을 벌이는 것이 백번 나아요.”
그만큼 시강원에서 이루어지는 세자 교육이 빡빡하다는 뜻이었는데 소현세자는 공감한다는 얼굴로 고개를 살짝 끄덕이면서도 동생에게 훈계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네가 학문보다는 무예에 더 관심이 있는 건 알지만 조선의 왕자로서 공부를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는 걸 항상 명심하고 수시로 책을 읽도록 해라.”
“전 그냥 무예만 익히면 안 될까요?”
“어허!”
“후우, 알았어요.”
크게 한숨을 내쉬는 도현을 보며 피식 미소 지은 소현세자는 이내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방금 돌아온 너한테 이런 이야기를 해서 미안하다만 한 가지 의논할 일이 있다.”
“뭔데 그러세요?”
“너도 알다시피 지금까지는 심양 관저 운영에 필요한 경비 대부분을 청국 조정에서 대 주지 않았느냐.”
“그렇지요.”
시강원 관리와 시중을 들어 줄 궁인 그리고 호위 병력까지 포함해 상주 인원만 백여 명이 가뿐히 넘어가는 관저는 그 운영에 필요한 돈이 상당했다.
한양에서 매년 돈을 보내왔지만 그걸로는 턱없이 부족했고 운영비의 거의 대부분을 청국 조정에서 주는 재화로 충당했다.
생활하는 데 필요한 비용은 애초에 청국에서 모두 내 주기로 하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볼모로 데려왔기 때문에 조선 입장에서는 당연히 받아야 되는 걸 받는 거지만 명과의 싸움에 전력을 다하고 있는 청국 입장에서는 약간 부담이 되면서도 귀찮은 일이었다.
“며칠 전에 만월개가 와서 통보를 해 왔는데 앞으로는 돈 대신 심양성 밖에 토지를 줄 테니 그걸 직접 개간해서 운영비로 쓰라고 하는구나.”
“…….”
걱정이 가득한 소현세자와 달리 도현은 이야기를 듣고 나서도 큰 표정 변화가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미 이럴 거라는 걸 역사를 통해 알고 있었고, 또 이걸 계기로 소현세자가 많은 돈을 벌게 되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청국이 내준 땅에 조선인 노예들을 데려와 농사를 지은 소현세자는 수확물로 자급자족은 물론이고 남는 걸 팔아 큰 이득을 챙기고 그걸 바탕으로 장사까지 손을 댄다.
유교를 신봉하는 시강원 관리들이 그런 소현세자의 행동을 마땅치 않게 보며 학업에 전념하라는 이야기를 하지만 볼모로 잡혀 와 청국이 명을 누르고 욱일승천의 기세로 성장하는 걸 지켜본 그는 눈썹도 까딱하지 않았다.
결과론적인 말이지만 나중에 소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 여러 가지 이유 중에 유교를 멀리하고 실리적인 입장을 취한 것도 한 부분을 차지했다.
“형님은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도현의 물음에 소현세자는 고민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대답했다.
“글쎄다. 상대가 워낙 강압적으로 밀어붙이니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겠지만 갑자기 직접 농사를 지어야 된다고 하니까 솔직히 막막하구나.”
“뭘 걱정하는지 알지만 전 차라리 잘된 것 같습니다.”
“뭐?”
의아한 얼굴로 쳐다보는 소현세자와 시선을 맞추며 도현은 차분히 이유를 설명해 줬다.
“지금까지처럼 경비를 청국 조정에서 받아 쓰면 편하기는 하지만 여유가 없고 상대의 눈치를 봐야 되지 않습니까?”
“그렇지.”
“그런데 이제부터 우리가 자급자족을 한다면 청국의 간섭에서 벗어날 수 있는 거지요.”
이해를 했는지 크게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관저에 딸린 수백 명의 사람들을 책임지고 있는 만큼 소현세자는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그랬다가 농사가 잘 안되면 오히려 더 큰 부담을 안지 않겠느냐?”
“그래서 몇 가지 안전 조치를 취해야지요.”
“안전 조치?”
“네. 우선 심양 근처에 농사를 짓기 적합한 비옥한 토지를 충분히 확보해야겠지요. 관저 경비를 다 충당하려면 한 팔백 정보町步는 필요하겠네요.”
“……!”
정보는 땅의 넓이를 나타내는 단위 중 하나로, 일 정보는 약 삼천 평 정도다.
이걸 가지고 계산하면 이백사십만 평이 넘는 어마어마한 넓이가 나오는데 관저 경비로 쓰기에는 너무 많은 땅인데도 도현은 태연하게 말했다.
“거기다가 농사를 지으려면 인력도 필요하니까 노예를 이백 명 정도 넘겨받아야겠지요. 물론 모두 조선인들로 말이에요.”
이야기가 끝나자 소현세자는 약간 황당한 표정으로 그를 보며 입을 열었다.
“요구가 너무 과하지 않아?”
“과하긴요. 저놈들이 병자호란 때 조선에 들어와서 난장판을 치고 가는 바람에 피해를 입은 것이 얼마나 되는지 아시잖아요. 기회가 왔을 때 확실히 뜯어내야죠.”
“그렇기는 한데, 청국 조정이 요구를 들어줄지 모르겠구나.”
자신 없어 하는 소현세자와 달리 도현은 눈을 반짝 빛내며 씨익 입가에 미소까지 지어 보였다.
“걱정 마세요. 평상시라면 모르겠지만 이번에는 자신들의 필요에 의해서 먼저 약속을 깨는 거니까 우리가 강경하게 밀어붙이면 웬만한 건 다 수용할 거예요.”
“네 말대로 된다면 좋겠지만 이거 괜히 일을 크게 만드는 건 아닌지…….”
“그렇게 걱정되신다면 제가 직접 저들과 담판을 짓겠습니다.”
도현의 말에 소현세자는 기꺼운 표정을 지었다.
“그래 주겠느냐?”
“예.”
“그럼 전권을 줄 테니 협상을 잘해 보아라.”
“알겠습니다.”
어려운 일을 동생에게 떠맡기는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면서도 소현세자는 도현이 나서 주는 것이 정말 고마웠다.
그렇게 한참 있다가 도현은 겨우 세자의 거처를 나올 수 있었다.
밖으로 나오니 어느덧 늦은 오후였다.
담장 밖으로 보이는 서쪽 하늘에 뉘엿뉘엿 해가 저무는 것을 보면서 도현은 불현듯 배가 출출했다.
심양까지 먼 길을 온 데다 잠시 쉴 틈도 없이 바로 소현세자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바람에 차로 목만 축였을 뿐 변변한 식사라고는 입에 대지도 못한 것이 그제야 생각났다.
해가 더 저물기 전에 발길을 재촉해 자신의 처소로 돌아온 도현은 장씨 부인이 다소곳이 앉아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부인, 먼저 돌아간다더니 계속 이렇게 기다리고 있었소?”
“그럼요.”
장씨 부인은 도현이 겉옷을 벗는 걸 손수 도와주면서 말했다.
“많이 피곤하시죠? 아랫것들에게 목욕물을 데워 놓으라 했으니 바로 들어가시면 될 겁니다.”
“아, 고맙소.”
무심결에 대답을 하면서도 도현은 행여나 자신의 몸에서 땀 냄새가 나지 않는지 은근히 신경이 쓰였다.
웅도에 있을 때는 해야 할 일도 많고 주위에 항상 사내들뿐이라 겉모습에 별 신경을 쓰지 않았는데 장씨 부인이 곁에 다가서자 갑자기 의식이 되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딱 좋을 정도로 따끈하게 데워진 목욕물에 몸을 담근 도현은 근육이 천천히 풀어지는 것을 느끼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 같아서는 몇 시간이고 이렇게 있고 싶지만 장씨 부인이 방에서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대충 목욕을 하고는 옷을 갈아입었다.
방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식욕을 자극하는 맛있는 냄새에 도현은 싱글벙글 웃으면서 앉았다.
“이게 다 뭐요? 평소 식단보다 훨씬 호화롭군.”
“서방님이 좋아하시는 요리로만 차리라고 미리 말을 해 뒀지요.”
장씨 부인은 손수 도현의 찻잔에 차를 따라 주면서 말했다.
대추와 인삼을 가득 넣어 삶은 오리고기, 게살을 넣은 맑은 국에 양념을 넣고 졸인 고기완자 등 보기만 해도 입에 군침이 도는 요리들이라 도현은 입맛을 다셨다.
“고맙소, 부인.”
“천만에요. 그간 바깥에서 많이 힘드셨을 테니 몸에 좋은 음식들을 드시고 원기 보충을 하셔야 합니다.”
그러면서 장씨 부인은 젓가락을 들어 반찬을 도현 앞으로 가져다주었다.
마치 신혼부부 같은 행동에 내심 쑥스러우면서도 또 기분이 좋아져서 도현은 배가 잔뜩 부를 때까지 식사를 계속했다.
“하하, 더 이상은 못 먹겠소.”
도현이 손을 내저으면서 수저를 내려놓자 장씨 부인이 눈짓을 해서 상을 치우게 했다.
“맛있는 걸 많이 먹어서 좋긴 하지만 매일 이렇게 먹다간 통통하게 살이 찔 거요.”
“사내는 덩치가 어느 정도 있는 편이 좋다 하지 않습니까. 그런 걱정 하실 필요 없어요.”
“흐음, 그럼 내 배가 이만큼 불러도 부인은 좋단 말이오?”
“호호, 그럼요.”
도현이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뚱뚱보 흉내를 내자 장씨 부인은 소매로 입을 가리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 모습이 또 보기 좋아 도현이 가만히 미소만 지은 채 지그시 바라보자 장씨 부인은 볼에 홍조를 띠고 시선을 돌렸다.
“민망하게 왜 그리 보십니까.”
“아니, 부인과 함께 이리 시간을 보내니 좋아서 그러오.”
“새삼스럽게 별말씀을…….”
하루 이틀 얼굴 보고 지낸 사이도 아닌데 도현이 가끔씩 이런 말을 불쑥 꺼내면 마치 처녀 때로 돌아간 것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런 장씨 부인을 다정하게 보듬어 안고 곁눈질로 주위를 살피자 이미 분위기를 파악한 시녀들과 칠현이 어느 틈에 사라지고 방 안에는 두 사람밖에 없었다.
서로의 심장 박동 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장씨 부인을 번쩍 안아 든 도현은 한 손을 뻗어 방 안을 밝히고 있던 등불을 꺼 버리고는 이부자리로 향했다.
그동안 청국의 압박이 심했는지 아직 여행의 피로가 다 풀리지 않았지만 도현은 소현세자의 부탁을 받고 만월개와 만났다.
“어서 오시오.”
황궁에 마련된 협상장으로 들어선 도현은 만월개를 보고 청국 방식대로 포권을 취하며 인사를 했다.
“반갑습니다.”
“자! 이쪽으로 앉으시죠.”
“예.”
도현과 만월개가 의자에 앉자 양쪽 수행원들도 각자 자리를 잡았다.
“듣자 하니 전장에서 활약이 대단하셨다더군요.”
“제가 뭐 한 일이 있겠습니까. 다 임경업 장군과 장졸들이 목숨 걸고 싸워 준 덕분이지요.”
“하하하! 겸손하시기는. 어찌 됐든 조선군을 독려해 해적과 싸우게 만든 건 대군 아니시오. 황제 폐하께서도 보고를 받으시고 아주 흡족해하셨소이다.”
“감사한 일이군요.”
다른 사람 같으면 황제가 관심을 보였다는 것이 황공하겠지만 결국 앞으로도 이번처럼 알아서 기라는 뜻이었기에 도현은 대충 넘기고 바로 본론을 꺼냈다.
“내년부터는 관저 운영비를 지원해 줄 수 없다고 하셨다는데 사실입니까?”
단도직입적인 물음에 살짝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던 만월개는 이내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흠흠, 뭔가 오해가 있는 모양인데 지원해 주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라 토지를 줄 테니 그걸로 대신하자는 것이오.”
“그게 그거 아닙니까! 심양에서 생활하는 걸 모두 책임지겠다고 해 놓고 이제 와서 땅 덩어리 하나 떼어 주고 알아서 하라니 대국大國이라 자처하는 나라가 이럴 수 있는 겁니까?”
“그건…….”
머뭇거리며 제대로 대답을 못 하자 도현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계속해서 강하게 상대를 몰아붙였다.
“우리한테는 약속을 지키라고 해서 군대도 파병하고 심지어 지난 전쟁 때 포로가 된 백성들이 도망쳐 와도 모두 붙잡아서 돌려보냈는데 그 결과가 이거라니 정말 실망스럽군요.”
“흐흠, 일단 그 점에 대해서는 미안하게 됐소이다. 하지만 이백 명이 넘는다니, 관저에 있는 인원이 너무 많은 건 아니오?”
선수를 빼앗긴 만월개는 어떻게 해서든 주도권을 되찾아 오려고 관저 인원 문제를 걸고넘어졌지만 도현은 이럴 걸 미리 예상이라도 했는지 당황한 모습 하나 없이 아주 당당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일반 사대부도 시중을 드는 하인들이 필요한데 일국의 왕세자와 왕자 가족이 머무는 곳에 그 정도 인원은 당연한 것 아닙니까? 오히려 세자 저하를 교육하는 시강원 학사와 경비 인력이 부족하지만 청국 조정에서 숫자를 줄이라고 해서 처음 함께 왔던 이들을 절반 넘게 돌려보내 운영이 힘든 실정입니다. 말이 나온 김에 이 부분도 해결을 해 줬으면 좋겠습니다.”
혹 떼려다 오히려 더 큰 혹을 붙인 꼴이 되어 버린 만월개는 곤혹스러운 얼굴로 연신 식은땀을 흘렸고 다른 청국 인사들도 이야기가 자꾸 엉뚱하게 흘러가자 많이 당황스러워했다.
반면 도현과 함께 온 조선 측 인사들은 항상 목에 힘을 주고 윽박지르던 상대가 꼼짝 못 하고 쩔쩔매는 모습에 그동안 쌓인 체증이 한꺼번에 내려가는 느낌을 받으면서 자꾸 피식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참느라고 힘들어했다.
특히 관저에 상주하는 관리들의 우두머리로 소현세자를 대신해 청국을 상대하며 항상 약자의 위치에 서야 했던 박황은 저절로 눈이 반달 모양으로 휘었다.
“그 문제는 오늘 주제와 상관이 없으니 다음에 이야기합시다.”
“먼저 말을 꺼낸 건 그쪽입니다.”
지나가듯 도현이 툭 던진 말에 만월개와 청국 인사들의 얼굴이 살짝 구겨졌다.
이걸로 대화의 주도권은 완전히 도현에게 넘어왔다.
더 구석으로 몰 수도 있지만 상대가 악감정을 가져서 좋을 것이 없었기에 도현은 이쯤에서 적당히 한발 뒤로 물러서 줬다.
“뭐, 좋습니다. 그건 제쳐 두고 이번 문제만 해도 너무 일방적인 통보가 아닙니까?”
“명과의 전쟁 때문에 어려운 우리 쪽 사정도 이해해 주시오. 그리고 자급자족을 하면 때에 따라 풍성한 수확도 있어 그만큼 관저의 살림도 넉넉해지는 거니까 조선 측에도 나쁠 것이 없지 않소.”
만월개가 은근한 말로 꼬드겼지만 도현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흉작이 되어 버리면 허리띠를 졸라매야 되는데 너무 무책임한 것 아닙니까.”
“그거야…….”
상대가 뭐라고 말을 하려고 했지만 도현이 잘라 버렸다.
“백번 양보해서 그쪽에서 제안한 대로 토지를 받는다고 해도 당장 농사를 지을 사람이 없는데 우리보고 어떻게 하라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설마 관저에 있는 내관과 위사들을 데리고 땅을 일구라는 겁니까?”
“그럴 리가 있겠소.”
미처 예상하지 못한 문제를 거론하자 만월개는 황급히 손을 내저으며 일단 부정했다.
“그럼 뭡니까?”
“흠흠, 농사는…….”
추궁하듯 도현이 묻자 만월개는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면서 금방 대답을 못 하고 우물쭈물했다.
그러자 도현은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고는 손바닥으로 앞에 있는 탁자를 내려치면서 버럭 화를 냈다.
탕!
“지금 그런 기본적인 것들도 생각하지 않고 무턱대고 우리한테 땅을 주며 자급자족하라고 한 겁니까!”
“그 문제는 차차 의견을 나누려고 한 거니까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소.”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만월개가 꺼낸 말에 도현은 마치 먹잇감을 발견한 맹수처럼 눈을 반짝 빛냈다.
“그러면 말이 나온 김에 지금 이야기를 합시다. 농사를 짓는 데 능한 조선인 노예 이백 명을 관저 소유로 넘겨주십시오.”
“……!”
이백 명이라는 말에 만월개가 깜짝 놀라 눈을 치켜떴지만 도현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요구 조건을 늘어놨다.
“기존 인원에 새로 추가되는 노예들까지 다 먹여 살리려면 땅은 최소한 팔백 정보는 있어야겠군요. 물론 황무지가 아니라 농사를 짓기에 적합한 곳으로 말입니다.”
갈수록 태산이라고, 이어진 요구에 만월개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살짝 벌리며 도현을 쳐다봤다.
“너무 과하지 않소. 땅도 방금 말한 것의 반의반만 있어도 충분한 것 아니오.”
“아까도 이야기했다시피 흉작이 됐을 때를 대비하려면 이 정도는 있어야 하고 또 농사를 지으며 추가로 먹여 살려야 되는 입이 늘어나니, 그만큼 비용이 커지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그래도…….”
만월개가 곤란하다는 태도를 보이자 도현은 팔짱을 낀 채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는 딱딱하게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 조건이 아니라면 우리도 자급자족을 하라는 청국 조정의 제안을 따를 수가 없습니다.”
“지금 청국 조정의 결정을 거부하겠다는 것이오!”
극단적인 발언에 만월개가 얼굴을 구기고는 발끈해서 소리치자 도현도 물러서지 않고 당당하게 맞받아쳤다.
“그쪽에서 먼저 약속을 깼지만 양국의 관계를 생각해서 어떻게든 수용을 하려고 했는데도 최소한의 요구도 들어주지 않겠다면 우리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 아닙니까.”
교묘하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된 만월개와 청국 관리들은 인상을 쓰며 낮게 앓는 소리를 내뱉었다.
“끄으응.”
“우리는 더 할 말이 없으니 결정은 그쪽에서 알아서 하십시오.”
쐐기를 박듯 말하고 도현이 일어서자 함께 온 관리들도 냉큼 그 뒤를 따랐다.
붙잡을 틈도 주지 않고 협상장을 빠져나가 버리는 도현의 뒷모습에 남은 만월개와 청국 관리들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망연자실 바라보기만 했다.
“이, 이제 어떻게 합니까?”
설마 진짜로 자리를 박차고 나가 버릴 줄은 몰랐기에 동석해 있던 관리가 당황해서 그리 묻자 만월개는 똥 씹은 듯한 표정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할 수 없지. 일단 재상님께 보고를 드리고 처분을 기다리는 수밖에.”
결국 아무 소득 없이 물러나게 된 만월개는 그길로 재상의 자택으로 향했다.
황궁의 바로 옆에 있는 범문정 재상의 저택은 심양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넓은 부지를 차지하고 있었다. 대문에 내걸린 현판도 황제가 직접 써서 하사한 것으로 누구나 그 밑을 지나갈 때마다 예를 표해야만 했다.
조정 대신들 가운데 제일가는 권세를 자랑하듯이 저택 앞을 지키고 있는 경비 무사들의 복장 역시 황궁의 정식 근위병들 다음으로 호사스러워서 심양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아보고 길을 비켜 줄 정도였다.
“호오, 그랬단 말이지.”
부랴부랴 범문정을 찾은 만월개가 협상장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자 그는 흥미롭다는 듯이 턱수염을 쓸어내렸다.
“하늘 모르고 날뛰는 것이 아주 고약한 자입니다.”
이미 단단히 체면이 상한 상태였기에 도현에 대한 악평을 내뱉는 만월개와 달리 범 재상은 살짝 손을 흔들어 그의 의견을 부정했다.
“아니지. 그 나이 대의 젊은이만이 내보일 수 있는 패기와 담력 아니겠나. 오히려 나는 그렇게 행동할 수 있는 그자가 부럽기만 하군.”
“재상.”
“됐네. 더 말하지 말고 그자가 요구한 것들을 들어주도록 해.”
“그래선 우리 체면이…….”
“어차피 우리 쪽에서 보면 그다지 무리한 요구도 아니지 않나. 괜히 사소한 것 가지고 기 싸움 할 필요 없네. 그리고 우리가 먼저 약속을 깬 건 사실이니 대국의 체면이 상하지 않으려면 어느 정도 피해는 감수해야지.”
“아, 알겠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권력의 정점에 있는 재상의 명인지라 만월개는 얌전히 고개를 조아리고는 일어섰다.
“그럼 지시하신 대로 일을 마무리 짓겠습니다.”
“음, 가 보게.”
범문정이 손을 흔들자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총관이 나타나 만월개를 이끌고 나갔다.
“봉림대군이라…….”
범문정은 차의 향기를 느긋하게 즐기며 혼자 중얼거렸다.
“오래간만에 눈에 띄는 녀석이 나타났군. 아직은 새끼에 불과하지만…… 장차 커서 범이 될지 아닌지는 더 지켜봐야겠군. 하하, 재밌게 됐어.”
느릿느릿하게 읊조리는 범문정의 말투에 총관은 가볍게 몸을 떨었다.
얼핏 보면 마음씨 좋은 할아버지 같은 풍모와 말투지만 그 속에 누구보다 날카로운 칼이 숨겨져 있음을 익히 알고 있는 탓이었다.
다음 날 만월개를 통해 제시한 요구 조건들을 모두 수용하겠다는 청국 조정의 결정을 전달받은 관저는 축제 분위기가 됐다.
“설마 했는데 저들이 정말 요구를 다 들어주다니 놀랍습니다.”
박황의 말에 소현세자도 미소 띤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말이오. 봉림대군 네가 수고 많았다.”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소현세자가 말을 건네자 옆자리에 앉아 있던 도현은 살짝 머리를 숙이면서 겸손하게 대답했다.
“다 형님께서 믿고 일을 맡겨 주신 덕분입니다.”
이쯤 되면 조금 우쭐댈 만도 한데 그러지 않고 공을 자신에게 돌리는 도현의 태도에 소현세자는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그건 그렇고, 저들이 내준 땅이 어디라고 했소?”
소현세자의 질문에 박황은 두루마리 하나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으며 대답했다.
“심양 동쪽으로 십오 리쯤 떨어진 곳에 위치한 농지 팔백 정보입니다. 원래는 청국 조정의 소유인 것을 이번에 우리한테 완전히 양도를 해 줬습니다.”
박황은 양도라는 단어에 특히 힘을 줘서 말했다. 처음에는 단순히 땅을 빌려 주기만 하려고 했던 걸 도현이 강력히 상대를 몰아붙인 덕분에 아예 소유권을 넘겨받은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소현세자는 상당한 거부가 됐다.
“그리고 농사지을 조선인 노예 이백 명도 이레 안에 모두 보내 준다고 했습니다.”
“그럼 이제부터 준비할 것이 많겠구려?”
“예. 우선 노예들이 머물 거처부터 마련해야 됩니다.”
그때,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도현이 못마땅한 얼굴로 끼어들었다.
“죄송하지만 제가 잠깐 말을 해도 되겠습니까?”
“뭔데 그러느냐?”
“지난 병자호란 때 청군한테 붙잡혀 억울하게 노예 생활을 하고 있는 조선의 백성들인데 그들을 따뜻하게 보듬어 주지는 못할망정 상대의 주장처럼 노예라고 지칭하는 건 잘못됐다고 생각합니다.”
정색하며 도현이 하는 말에 소현세자와 관리들은 자책하는 표정을 지었다.
“미처 거기까지는 생각을 못 했구나.”
“죄송합니다, 대군마마.”
“그래서 앞으로는 직영지에서 농사를 짓게 될 이들을 노예라는 치욕적인 말 대신 소작농이라고 불렀으면 합니다.”
도현의 제안에 소현세자는 소작농이라는 단어를 작게 몇 번 되뇌다가 이내 머리를 끄덕였다.
“소작농이라. 훨씬 듣기 좋군. 괜찮은 것 같은데, 대빈객 생각은 어떻소?”
“저도 적당한 것 같습니다. 진작 왜 이런 생각을 못 했는지 부끄러울 뿐입니다.”
관리들의 우두머리인 박황까지 찬성하자 소현세자는 웃는 얼굴로 좌중을 둘러보면서 말했다.
“그럼 봉림대군의 의견대로 소작농이라는 말을 쓰도록 합시다.”
“예, 저하.”
작은 부분에서나마 지난날 병자호란 때 입은 치욕을 씻어 내는 일이었기에 관리들은 밝은 얼굴로 머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소작농들이 머물 거처를 마련하는 일은 대빈객의 도움을 받아 봉림대군이 맡아 처리하도록 해라.”
“제가 말입니까?”
“그래.”
“저보다는 다른 경험 많은 관리들이 맡아서 하는 것이 더 낫지 않겠습니까?”
도현의 말에 소현세자는 고개를 살짝 내저었다.
“봉림대군이 시작한 일이니까 마무리까지 짓도록 해. 앞으로 옆에서 날 도와주려면 이런저런 경험을 해 두는 것이 좋지 않겠어?”
“…….”
향후 자신이 왕좌에 오른다면 도현을 측근에 두고 중용하겠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종친이 정치에 참여하는 것이 엄격하게 제한되는 조선에서 방금 전 소현세자의 발언은 자칫 큰 파장을 일으킬 수도 있기에 순간 좌중은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저하.”
박황이 뭐라고 말을 하려는 걸 한 손을 들어서 막은 소현세자는 단호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뭘 우려하는지 잘 알고 있소. 하지만 종친이라는 이유 때문에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도 평생을 초야에 묻혀 술이나 벗하며 살아야 된다는 것이 너무 안타깝지 않소. 청국 왕실만 봐도 황제를 중심으로 많은 친왕들이 힘을 합쳐 국가를 함께 이끌어 가는데 동방의 보석인 우리 조선이 이들보다 못할 것이 뭐가 있겠소?”
소현세자의 말에 완전히 승복한 건 아니었지만 솔직히 최근 들어 보여 준 도현의 능력이 아까운 건 사실이었고 얼마 전 새로 왕비와 후궁을 받아들였을 정도로 아직 인조가 정정해 이 문제를 가지고 갑론을박 설전을 펼치는 건 너무 앞서 나가는 것이기에 박황과 관리들은 일단 그냥 넘겼다.
“당장 내일부터 봉림대군은 성 밖에 있는 토지를 둘러보고 내가 지시한 걸 실행하도록 해라. 알겠느냐?”
괜한 말을 하는 바람에 입장이 난처해졌으나 이 상황에서 싫다고 거절할 수도 없었기에 도현은 울며 겨자 먹기로 대답했다.
“부족하지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래. 너라면 잘해 낼 수 있을 거다.”
이런 도현의 마음도 모르고 상석에 앉은 소현세자는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날 도현은 소현세자가 지시한 대로 양도받은 토지를 살펴보기 위해 관저를 나섰다. 쓸데없이 귀찮은 일을 떠맡아서 그런지 뚱한 얼굴이었다.
“여기서부터 저 끝에 보이는 돌산까지가 이번에 넘겨받은 땅입니다.”
안내인이 손으로 가리킨 땅은 정말 어마어마하게 넓었는데 말을 타지 않으면 다리가 아파서 제대로 둘러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게다가 영양분이 많은 시커먼 색깔을 띠는 흙이 깔려 있어 농사를 짓기에도 딱 좋았다.
“휘유. 팔백 정보라고 말로만 들었지 실제로 보니까 정말 엄청 넓네요.”
“그러네.”
연신 감탄성을 내뱉는 칠현과 달리 도현은 건성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러자 대번에 도현의 심기가 불편하다는 걸 알아차린 칠현은 슬쩍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했다.
“뭐 마음에 안 드시는 거라도 있으십니까?”
“아니야.”
귀찮다는 듯이 한 손을 내저은 도현은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입을 열었다.
“저기 보이는 숲도 농장 부지에 들어가는 거야?”
“그렇습니다.”
“잘됐네. 그럼 목재는 저 숲에서 베어다 쓰고, 마을은 저쪽 실개천 옆에 세우면 되겠군.”
대충 아무렇게나 지목한 것 같지만 도현이 가리킨 곳은 식수로 이용할 작은 강이 흐르고 뒤로 바람을 막아 줄 언덕이 병풍처럼 서 있어 주거지로 알맞았다.
“언제 저길 보셨습니까? 역시 대단하십니다.”
기분을 풀어 주기 위해 칠현이 엄지손가락을 치켜들고 다소 과장되게 호들갑을 떨자 도현은 짧게 혀를 차며 그의 머리에 꿀밤을 먹였다.
딱!
“아부도 적당히 해야지 그렇게 티 나게 하면 더 기분 나빠.”
“우씨!”
“너 방금 뭐라고 했어?”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자신도 모르게 속마음이 튀어나온 칠현이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주춤 뒷걸음질을 치자 도현은 가재미눈을 뜨며 노려봤다.
“방금 욕한 것 같은데?”
“에이, 그럴 리가요! 잘못 들으셨겠죠.”
칠현이 정색하고 도리질을 쳤다.
“제가 어찌 감히 마마 앞에서 상스러운 말을 내뱉을 수 있겠습니까. 간이 배 밖에 나와도 유분수지!”
“그도 그렇군.”
도현이 수긍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이때를 놓칠세라 칠현은 옆에 바짝 붙어서 눈웃음을 흘렸다.
“헤헤, 요즘 너무 신경을 많이 쓰셔서 기가 허하신가 봅니다. 보양식이라도 드시는 게 좋겠어요.”
“하하하.”
칠현과 마주 보며 웃음을 터트린 도현이 팍 뒤통수를 후려쳤다.
“아얏!”
“어디서 꾀를 부려? 내가 그것도 못 알아차릴 줄 알았냐?”
“으으으…… 마마, 너무하세요.”
칠현이 울상을 짓자 도현은 흥 코웃음을 쳤다.
“엄살 부리지 마. 그만 깐죽거리고 얼른 말고삐나 잘 잡아. 떨어질라.”
“히잉.”
축 늘어진 어깨로 칠현이 대답했다.
“훗. 이제 좀 스트레스가 풀리네.”
“스트레…… 그게 뭔데요?”
“넌 몰라도 돼.”
그렇게 살짝 삐친 얼굴을 하고는 한 손으로 뒤통수를 문지르는 칠현을 앞세우고 도현은 땅을 마저 둘러봤다.
이틀 뒤에는 약속한 대로 청국 조정이 조선인 노예 이백 명을 보내 줬다.
모두 건강하고 젊은 남녀로, 개인이 아니라 관청에서 데리고 있던 이들이라 이렇게 빨리 모을 수 있었고 땅처럼 소유권까지 전부 넘겼다.
당장 지낼 곳이 필요했기에 도현은 급한 대로 마을 부지 옆에다가 몽골족 특유의 이동식 주택인 파오 쉰 개를 지었다.
보기에는 허름해도 의외로 튼튼하고 따뜻할 뿐 아니라 바람까지 잘 막아 줘서 임시 숙소로 쓰기에 충분했다.
그렇게 숙소 문제를 해결한 도현은 준비한 연장을 사람들에게 나눠 주고는 숲에서 나무를 베어 와 앞으로 자신들이 머물 집을 짓도록 했다.
그 전에 소작농들의 근로 의욕을 고취시키기 위해 임시 숙소 앞 공터에 전부 다 모아 놓고 소현세자와 이야기를 나눠 결정한 사항을 말해 줬다.
“마마, 전부 다 모였습니다.”
“알았어.”
자신에게 배정된 파오 안에서 쉬고 있던 도현은 이제 거의 전담 호위가 된 김덕술의 말에 의자에서 일어났다.
입구를 가리고 있던 휘장을 걷고 밖으로 나가자 넓은 공터에 이백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허름한 옷을 입고 약간 불안한 얼굴로 서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갑자기 아무런 이야기도 없이 일하던 곳에서 차출되어 여기까지 끌려왔기 때문에 불안하고 두려운 마음이 가득했다.
그나마 인솔해 온 청국 관리가 모두 돌아가고 새로 감독을 맡은 자들이 같은 조선 사람이고 앞으로 관저 소속이 되어 일을 하게 될 거라는 이야기를 들어서 조금은 안심이 됐지만 그동안 워낙 고생을 해서 그런지 쉽게 마음을 놓지는 못했다.
“이쪽입니다.”
김덕술의 안내를 받아 도현이 앞으로 걸어가자 모여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됐다.
쏟아지는 수백 쌍의 눈길에 살짝 위축될 만도 하건만 도현은 어깨를 편 자세로 당당하게 걸어가 미리 준비된 단상 위에 올라갔다.
허리를 펴고 서서 아래에 모여 있는 사람들을 천천히 훑어본 도현은 또박또박하고 힘이 가득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난 조선의 둘째 왕자인 봉림대군이라고 한다.”
평범한 무복 차림인 도현이 자신을 소개하자 하급 관리쯤으로 생각했던 사람들은 크게 놀란 표정을 지으면서 웅성거렸다.
“저분이 왕자님이라니, 진짜야?”
“글쎄…….”
“주위에 관리들이 있는데 설마 왕족을 사칭하겠어?”
“하긴.”
잠시 가만히 서서 사람들의 반응을 지켜보던 도현은 다시 말을 했다.
“먼저 이 먼 타국 땅에서 같은 조선 사람을 만나게 되어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안타깝고 그대들에게 너무나 죄스럽다. 왕족이 되어 백성들을 보살피고 지켜 줘야 하는데 나라가 힘이 없어 노예로 끌려가는 걸 막지 못했고 그 뒤로도 고생하는 걸 알면서도 구해 줄 수가 없었으니 얼굴을 제대로 들고 다닐 수 없을 정도로 부끄럽고 미안할 뿐이다.”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도현이 고개를 숙이자 사람들은 당황해서 어찌할 바를 몰라 했고 옆에 있던 김덕술과 칠현도 눈을 동그랗게 떴다.
“대군마마!”
“호들갑 떨지 말고 다들 가만히 있어.”
가까이 다가가려는 걸 도현이 한 손을 들어 제지하자 두 사람은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끙끙대며 얼굴 가득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놀란 건 단상 앞에 모여 있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애써 모르는 척 눈을 감기만 했지 지금까지 누구 하나 노예로 끌려가는 걸 막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을 건네지 않았다. 한데 말단 관리도 아니고 가장 높은 신분인 왕자가 직접 머리까지 숙이면서 사과를 하자 지금까지 버림받았다는 원망과 마음속에 응어리져 있던 무언가가 풀리는 느낌을 받았다. 오히려 사람들은 송구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도현을 위로했다.
“대군마마가 무슨 잘못이 있겠습니까.”
“청국 오랑캐 놈들이 죽일 것들이지요.”
“고개를 드십시오, 마마.”
뜻밖의 반응에 도현은 마음 한구석이 먹먹해지는 걸 느끼며 말을 이어 갔다.
“안타까운 마음을 간직하고 있던 차에 적지만 고통받는 백성들을 구해 줄 수 있는 기회를 만들었다. 오늘부터 너희들은 관저 소속이 되어 이곳에서 농사를 짓게 될 텐데 성실하게 일을 해 준다면 매달 일정액의 돈을 지급해 주고 이 년 뒤에는 노예 문서를 없애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 주겠다. 이건 나뿐 아니라 세자 저하께서도 약속하신 것이다!”
말 그대로 폭탄선언이었다.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바로 이해가 안 돼서 어정쩡한 얼굴로 앞을 보고 있던 사람들은 이내 자신도 모르게 양손을 번쩍 올리고 기쁨에 찬 함성을 내지르거나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 오열했다.
“이, 이럴 수가.”
“어머니, 드디어 고향에 돌아갈 수 있게 됐어요.”
“흑흑흑.”
서럽게 울어 대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그동안 타국에 끌려와서 겪은 온갖 멸시와 고초가 그대로 다 느껴졌기에 지켜보던 관리들도 눈시울을 붉혔다.
도현도 감정이 올라와 눈물이 나오려는 걸 억지로 참았다.
울음을 내뱉던 사람들은 잠시 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천세(만세는 황제만 쓸 수 있었고 왕국인 조선은 대신에 천세를 사용했다)를 부르며 소현세자와 도현을 연호했다.
“천세!”
“세자 저하! 천세!”
“대군마마, 감사합니다.”
다음 날부터 도현은 두 무리로 인원을 나눠 주거지를 만드는 공사와 농경지 개간을 동시에 진행했다. 미래에 대한 희망과 목표가 생겨서 그런지 사람들은 꾀 한번 부리지 않고 다들 구슬땀을 흘리며 열심히 일했다.
그렇게 농장 조성을 맡아서 하면서도 도현은 명과 청의 전쟁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는데 주로 봉황상단을 통해 정보를 입수했다. 이제 설립된 지 얼마 안 되는 상단이라 아직 중요한 정보는 알아내기 어려웠지만 상계만큼 소문에 민감하고 빨리 퍼지는 곳이 없었기에 비교적 전쟁 상황을 상세히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명나라 수군이 영원성을 지원하려고 함대를 보냈다가 오히려 대패를 당했다는 거지?”
“예. 이신(명에서 청으로 귀순한 인물들을 지칭하는 말) 출신인 공유덕과 경중명 같은 수군 장수들이 지휘를 잘한 것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반년 넘게 포위된 채 항전하고 있는 영원성에 물자와 병력을 보충해 주려고 명나라가 너무 급하게 싸움을 벌였다가 스스로 무너졌다고 봐야 될 겁니다.”
장 총관의 차분한 설명에 도현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어느 정도는 예견된 패배였는데 지금까지 기마민족이라는 태생적 한계 때문에 땅과 달리 바다에서는 청군이 제대로 힘을 쓰지 못했다.
하지만 억울한 누명을 쓰고 명나라의 명장인 모문룡이 처형되자 휘하에 있던 많은 수군 장수들이 병선과 부하들을 데리고 대거 청에 투항하면서 이런 약점은 어느 정도 사라졌다. 특히나 뼈아픈 것은 그동안 청군을 막아 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홍이포의 제조 기술과 조작법까지 같이 넘어갔다는 것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수군이라는 단어조차 없던 청국은 명과 비교해도 결코 뒤처지지 않는 함대를 보유하게 됐고 결국은 영원성 앞바다에서 벌어진 해전에서 승리했다.
예전 같으면 포위당해도 바다를 통해 병력과 물자를 수시로 보급받을 수 있었지만 이제 그것마저 끊겨 영원성은 말 그대로 고립무원孤立無援의 위기에 처했다.
“이렇게 되면 영원성도 오래 버티기 힘들겠군.”
“아무리 성벽이 높고 튼튼해도 먹고 마시지 않으면 병사들이 싸울 수가 없으니까요. 거기다가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예친왕이 조만간 대대적인 공격을 하려고 준비 중이랍니다.”
“그게 정말이야?”
“네. 군부에 곡식을 납품하는 업자가 몰래 귀띔을 해 준 정보인데 조만간 새로 주조한 홍이포 사십 문과 상당한 양의 화약이 팔기군 일만과 함께 전장에 투입될 거라고 합니다.”
팔기군은 둘째 치고 홍이포 사십 문은 팽팽한 승부를 단번에 뒤집어 버릴 수 있는 강력한 한 수였다.
“이번에는 영원성을 함락시키려고 황제가 단단히 마음을 먹은 모양이군.”
“그런 것 같습니다.”
의자 팔걸이를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리며 잠시 뭔가를 고민하던 도현은 이내 약간 굳은 얼굴로 앞에 있는 장 총관을 봤다.
“그러면 우리도 서둘러서 수군이 회군할 때를 대비해야겠어.”
“영원성이 함락되면 그 여세를 몰아 바로 만리장성을 넘으려고 할 텐데 급하게 움직일 필요가 있겠습니까?”
타당성 있는 이야기였지만 앞으로 전쟁이 어떻게 진행될지 역사를 알고 있는 도현은 바로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지금 청국의 사정상 곧장 만리장성을 노리는 건 어려울 거야. 거기다가 조금 있으면 병력을 움직이기 곤란한 겨울이잖아.”
무슨 근거로 이렇게 확신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빠르든 늦든 임경업 장군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이 철수했을 때를 대비해서 자체적인 호위선을 갖출 필요가 있었기에 장 총관은 머리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전투함을 새로 건조하려면 시간이 많이 걸리니까 임 장군한테 도움을 청하도록 해.”
“임경업 장군님 말씀이십니까?”
“그래. 가서 내가 보냈다고 말하면 판옥선 네 척을 내줄 거야.”
심양으로 오기 전에 도현은 임경업 장군과 만나 은밀히 대화를 나눈 끝에 판옥선과 병기 일부를 양도받기로 합의했다.
그 대신 본국에서 보내 주는 걸로는 부족한 보급품을 전쟁이 끝날 때까지 봉황상단에서 책임져 주기로 했다.
도현과 봉황상단 입장에서는 전투함을 건조하는 데 필요한 시간을 줄일 수 있어서 좋고 임경업 장군은 보급 때문에 골치를 썩지 않아도 되니 서로에게 이득이 되는 일이었다.
그리고 판옥선과 무기가 비는 건 전투 중에 파손됐다고 보고를 올리면 간단히 끝낼 수 있었다.
모종의 이야기가 있었다는 걸 눈치챈 장 총관은 눈을 살짝 빛내면서 대답했다.
“바로 웅도에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가는 김에 장졸들한테 나눠 줄 술과 고기도 넉넉히 실어 보내게.”
“예, 마마.”
그 뒤로도 장 총관은 도현에게 몇 가지 지시를 더 받고는 상단으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