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영원성 함락 (11/104)

영원성 함락

매일 꼬박꼬박 몇 시간씩 유교 공부를 하는 것도 지긋지긋하고 다 마무리 짓지 못한 교역 거점 건설 작업도 끝내기 위해 도현은 여러 곳에 선을 넣으며 웅도로 가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지난번엔 조선군의 출병을 독려하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고 해도 중요한 볼모인 도현이 자꾸 심양 밖으로 나가는 것이 꺼려진 황제와 청국 조정은 요청을 거절했다.

“어떻게 됐어요?”

황궁에 갔다가 돌아온 소현세자는 방 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도현의 물음에 씁쓸한 표정을 지으면서 겉옷을 벗어 내관에게 줬다.

“잠시 나가 있게.”

“예, 저하.”

허리를 숙이면서 대답한 내관이 방을 나가자 도현은 상석에 앉은 소현세자를 보며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잘 안된 모양이군요.”

“황도에 와 있는 손님을 어떻게 매번 위험한 곳에 보내겠냐면서 한번 다녀왔으니 됐다는구나.”

“쳇. 손님이라. 말은 좋군요.”

“아무튼 저쪽의 태도로 봐서 심양을 떠나는 건 어려울 것 같으니 너도 이제 포기해라.”

소현세자의 말이 아니더라도 볼모로 잡혀 있는 이상 웅도로 돌아가기는 힘들게 됐다는 걸 알았지만 도현은 쉽게 미련을 버릴 수 없었다.

“범문정한테 청탁을 넣어 보는 건 어떨까요?”

“오늘 청국 대신들 중에서 제일 강하게 반대한 사람이 범문정이었다.”

“끄으응.”

도현은 바로 앓는 소리를 냈다.

예친왕 도르곤이 없을 때 청국 조정에서 황제 다음으로 발언권이 센 인물이 재상인 범문정인데, 그가 반대를 한다면 심양성 밖으로 나가는 건 물 건너간 것이다.

“더 늦기 전에 꼭 가 봐야 되는데…….”

말끝을 흐리며 도현이 아쉬워하자 소현세자는 가재미눈을 뜨고는 수상하다는 듯이 쳐다보면서 말했다.

“우리의 처지가 이러니 힘들 거라는 건 이미 예상한 일 아니냐. 그런데도 포기하지 못하고 자꾸 나가려고 하는 걸 보니 조금 수상하구나? 혹시 상단 일은 핑계고 공부가 하기 싫어서 웅도에 가려는 것 아니야?”

소현세자의 추궁에 도현은 그런 마음이 없지는 않아 약간 뜨끔했지만 양손을 내저었다.

“에이, 설마 제가 그러겠어요.”

“정말이냐?”

“그렇다니까요. 단지 얼마 안 있으면 성이 함락될 텐데 그러면 더 웅도에 가 보기 힘드니까 적당한 핑곗거리가 있을 때 현장을 둘러보고 오려는 것뿐이에요.”

평소 나이에 안 어울리게 어른처럼 행동하던 동생이 당황해서 살짝 허둥거리는 걸 재미있는 시선으로 쳐다보던 소현세자는 이내 고개를 갸웃거렸다.

“선대 황제 때부터 지금까지 수차례 청군의 공격을 막아 낸 영원성인데 그렇게 쉽게 무너지겠느냐? 이번에도 지금까지 버티는 걸 보면 이대로 전투가 끝날 것 같은데.”

“그건 원숭환이라는 명장이 영원성을 지키고 있을 때지요. 구심점 노릇을 하던 장수가 없고 본국의 지원도 제대로 못 받는 상태에서 예친왕 도르곤이 화포 수십 문을 앞세워 총공격을 펼친다면, 그동안의 전투로 방어력이 약화된 성벽이 무너지는 건 시간문제예요. 아니, 오히려 이런 최악의 상태에서도 반년 넘도록 버틴 것이 대단할 정도죠.”

논리적이고 확신에 찬 도현의 설명에 소현세자는 한 손을 들어 제법 길게 자란 턱수염을 천천히 쓰다듬으면서 낮게 침음성을 내뱉었다.

“으음.”

확실히 예전보다 지금 영원성의 상황이 안 좋은 건 사실이었고, 그에 반해 예친왕이 이끄는 청군은 그 어느 때보다 막강한 전력을 자랑했다.

단적인 예로 처음 청 태조인 누르하치가 만주를 제패하고 영원성에 쳐들어갔을 때는 공성전의 지식이 전무했지만 지금은 전투를 통해 쌓은 경험과 이신이라고 불리는 명 출신 투항 장수들을 통해 부족한 부분을 채운 상태였다.

무엇보다 청군을 괴롭히고 누르하치를 죽게 만든 홍이포까지 보유하고 있었기에 오히려 불리한 건 명군이었다.

“청이 중원으로 들어오는 걸 막던 양대 축인 영원성이 끝내 함락된다면 다음은 산해관이겠구나.”

“이제 원숭환 같은 충신과 만리장성이라는 장벽 덕분에 근근이 유지되던 명나라의 운명이 다해 간다고 보면 될 겁니다.”

명의 몰락이 거스르기 힘든 대세라는 걸 소현세자도 알고 있었지만 막상 현실로 다가오자 착잡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이걸로 무조건 명을 상국으로 숭배하는 사대부들의 사고가 좀 바뀌었으면 좋겠지만 어렵겠지?”

자금성이 불타는 순간까지도 명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다가 굳이 겪지 않아도 될 온갖 어려움을 감수했던 조선 조정과 사대부들의 행동을 잘 알고 있는 도현은 고민도 하지 않고 머리를 끄덕였다.

“고리타분한 성리학에서 벗어나지 않는 이상 현실을 직시하기 어려울 거예요.”

사대부들이 들으면 자칫 탄핵까지 받을 수 있는 아주 위험한 발언이었지만, 심양에 와서 청국의 힘과 급박하게 움직이는 국제 정세에 눈을 뜬 소현세자는 화를 내지 않고 굳은 얼굴로 조용히 머리를 끄덕였다.

그때 문밖에서 동궁전 내관의 말이 들렸다.

“저하, 대빈객 왔사옵니다.”

함께 황궁에 들어갔다가 나와 헤어진 지 얼마 안 되는 대빈객 박황이 찾아왔다는 말에 소현세자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들라 하라.”

“예.”

허락이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미닫이문이 열리면서 약간 당황한 얼굴을 한 박황이 안으로 들어와 무릎을 꿇고 앉았다.

“저하.”

“무슨 일이라도 생겼소?”

뭔가 심상치 않은 모습에 소현세자가 긴장해서 묻자 박황이 침통한 목소리로 방금 들어온 급보를 알렸다.

“영원성이 청군에 떨어졌다고 합니다.”

“그게 사실이오!”

너무 놀라 소현세자는 물론이고 도현도 눈이 크게 치켜뜨였다.

“예. 전장에서 승전보를 알리는 전령이 도착했다 하옵니다.”

“허어, 이런.”

방금 전까지 이야기를 나누던 것이 진짜 현실로 닥치자 소현세자는 허탈한 탄성을 내뱉으며 어깨를 늘어뜨렸다.

도현도 당황스럽기는 했지만 세 사람 중에 제일 먼저 평정심을 회복하고는 박황을 보며 물었다.

“그것 말고 다른 이야기는 없었소이까?”

“현재로써는 이게 다입니다만 청국 관리들과 황궁에 선을 대고 있으니 조만간 더 자세한 소식을 알 수 있을 겁니다.”

“아무래도 제가 직접 황궁에 들어가 봐야겠습니다.”

“네가?”

“예. 그동안 아슬아슬하게 유지되던 명과 청의 전쟁이 이걸 계기로 해서 한쪽 방향으로 기울어질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면 당연히 조선에도 영향이 오겠지요. 이 중요한 시기에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도록 최대한 빨리 그리고 많은 정보를 알아내 한양에 알려 줘야 되지 않겠습니까.”

이야기를 들은 소현세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나도 같이 가자꾸나.”

“형님께서도요?”

“아무래도 혼자보다는 둘이 낫지 않겠느냐.”

“좋습니다.”

이게 얼마나 큰일인지 잘 알고 있었기에 둘이 나누는 대화를 듣고 있던 박황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입궁 준비를 하라고 지시하겠습니다.”

“그래 주시오.”

허리를 굽힌 박황은 서둘러 방을 나갔고 도현과 소현세자는 향후 정세 변화에 대해 심도 깊은 이야기를 나눴다.

얼마 뒤 말을 타고 급히 들어간 황궁은 영원성이 함락됐다는 소식에 온통 축제 분위기였다.

거기서 조선통인 만월개를 찾아간 도현과 소현세자는 소문이 사실이라는 걸 확인하고 조금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닷새 전에 예친왕 도르곤이 새로 보충된 병력과 홍이포를 앞세워 총공격을 펼쳐 사흘 밤낮 격렬한 전투를 치른 끝에 철벽같았던 영원성을 무너뜨렸다는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큰 전공을 세운 도르곤이 전장 정리를 끝내고 조만간에 심양으로 개선을 한다는 것이다.

이건 청군이 이 기세를 몰아 산해관까지 공격하지 않고 일단 여기서 전투를 멈춘다는 뜻이었다.

이제 곧 겨울이고 그동안 영원성을 함락시킨다고 엄청난 재물과 병력을 쏟아부었기에 전쟁을 계속 이어 갈 여유가 없다는 여러 가지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이지만 어찌 됐든 명나라는 패전의 충격에서 벗어나 급히 군대를 추슬러 방어선을 보강할 귀중한 시간을 얻었다.

그리고 조선도 이제 상황을 직시하고 너무 한쪽으로만 치우친 외교 노선을 실리에 맞게 바로잡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하지만 성리학을 신봉하는 조정 대신들이 이 소식을 듣고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미지수였다.

황궁까지 들어왔는데 황제를 알현하지 않고 그냥 돌아간다면 자칫 나중에 괜한 시빗거리가 될 수도 있었기에 도현과 소현세자는 알현을 신청하고 대전으로 갔다.

팔각형의 지붕이 일품인 대정전에는 이미 소식을 듣고 입궐한 대신들로 가득 차 있었다.

“승전을 축하드리옵니다.”

도현과 함께 재단 아래에 선 소현세자의 말에 황제인 홍타이지는 기분이 좋은지 얼굴 가득 미소를 지었다.

“고맙네. 이번 전쟁에서 조선군도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고 하던데 중원을 공략할 때도 공을 세워 주길 바라네.”

웃는 얼굴로 말을 받으면서 당연하다는 듯 다음번 전쟁에도 파병을 요구하는 황제의 모습에 소현세자와 도현은 약자의 설움을 온몸으로 느끼며 고개를 숙였다.

“예.”

흡족한 얼굴로 머리를 작게 끄덕인 황제는 시선을 옆으로 돌려 함께 서 있는 도현을 보며 입을 열었다.

“봉림대군.”

“예, 폐하.”

“자네는 특히 먼 전장까지 직접 가서 전투를 독려하느라 수고가 많았네.”

“그저 양국이 아무런 오해 없이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고자 나섰을 뿐입니다.”

“바로 그거야. 예전의 앙금을 툴툴 다 털어 버리고 함께 싸우니 얼마나 좋아. 앞으로도 불필요한 마찰이 생기지 않도록 세자와 봉림대군 두 사람이 가운데서 가교 역할을 잘해 줘야 될 게야.”

“…….”

말은 그럴듯해 보여도 결국 주제를 알고 똘마니 노릇을 잘 하라는 뜻이었기에 도현은 욕지거리가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르는 걸 겨우 참았다.

명석한 머리를 가진 소현세자도 금방 속뜻을 알아차리고는 얼굴을 굳혔다.

그렇게 말이 없자 재단 바로 아래 있던 범문정이 살짝 언성을 높여 둘을 다그쳤다.

“폐하께서 말씀을 하셨는데 왜 아무런 대답이 없소!”

그러자 소현세자가 얼른 표정을 바꾸며 입을 열었다.

“부족하지만 양국의 친선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허리를 숙이고 대답하는 소현세자를 보며 황좌에 앉은 홍타이지는 입꼬리를 살짝 말아 올렸다.

“기대하겠네. 그리고 파병된 조선군에는 귀국해도 좋다는 지시를 내렸으니 그렇게 알게.”

“감사하옵니다.”

그러고도 황제와 몇 마디 더 이야기를 나눈 후 도현과 소현세자는 겨우 대전을 나올 수 있었다.

따각따각!

대전에서 들은 이야기 때문인지 관저로 돌아가는 마차 안은 무거운 침묵만이 흘렀다.

한쪽 벽에 등을 기대고 있던 소현세자가 시선을 들고는 약간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영원성이 함락된 것도 큰일이지만 당장 임경업 장군이 지휘하는 수군 함대가 철군하면 봉황상단에서 추진 중인 해상 교역에 심각한 차질이 생기겠구나?”

“어쩔 수 없죠. 대비를 해 놓긴 했지만 이렇게 빨리 영원성이 함락될 줄은 몰랐습니다. 당분간은 교역 물량을 축소시킬 수밖에 없겠군요.”

“그래. 상단에 관한 일은 너한테 일임했으니 알아서 잘할 거라 믿는다.”

“네.”

두 사람 다 좀처럼 얼굴을 펴지 못한 채 입을 닫고 있는 사이 마차가 관저에 도착했다.

소현세자와 헤어져 자신의 처소로 돌아온 도현은 칠현을 불러서 말했다.

“봉황상단으로 가서 장 총관을 불러와.”

“지금 당장 말입니까?”

“음. 내가 긴히 할 얘기가 있다고 해.”

황궁에 들어갔다 나오더니 갑자기 장 총관을 찾는 도현의 모습에 칠현은 뭔가 일이 터졌구나 생각하고는 얌전히 고개를 숙인 뒤 재빨리 움직였다.

혼자 방에 앉아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밖에서 칠현이 장 총관의 도착을 알렸다.

“들어와서 앉아.”

도현이 맞은편 자리를 가리키자 이미 관저까지 오는 동안 칠현에게 살짝 귀띔받은 장 총관은 그의 안색을 살피며 조심스레 말했다.

“혹시 황제가 조선군에 철군 지시를 내린 겁니까?”

힐끗 문 쪽에 서 있는 칠현을 쳐다본 도현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영원성이 함락됐다는 소식에 어느 정도 짐작은 했지만 결국 이렇게 되는군요.”

“호위함들의 준비 상황은 어때?”

도현의 물음에 장 총관은 어두운 얼굴로 대답했다.

“억지로 한다면 못 할 건 없지만 이제 전투함과 무기를 넘겨받아서 훈련을 받고 있는 상태라 당장 교역선 호위에 투입시키는 건 무립니다.”

대충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장 총관의 이야기에 도현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한참 거래를 늘려 가고 있는데 갑자기 일이 이렇게 돼서 아쉽지만 상단 직원들의 목숨을 걸고 돈벌이를 할 수는 없지. 당분간 해상 교역은 중단하도록 해.”

아쉬운 마음은 장 총관도 마찬가지였지만 무리해서 좋은 결과를 얻기 힘들다는 걸 알고 있기에 별말 없이 머리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해상 교역을 포기한 건 아니니까 웅도에 거점을 만드는 작업은 중단 없이 계속 추진해.”

“예. 그런데 해적 출신 포로들은 그대로 놔두실 겁니까?”

미처 거기까지는 신경을 못 썼던 도현은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웅도에 몇 명이나 있지?”

“사백 명 정도가 이런저런 토목 공사에 투입되어 있습니다.”

“으음…….”

한 손으로 턱을 매만지면서 잠시 고심하던 도현은 이내 고개를 들며 말했다.

“임경업 장군의 군대가 빠져나가면 현재 웅도에 있는 상단 인원만 가지고 녀석들을 통제하는 건 어렵겠지?”

“해적 출신이라 다들 거친 데다 인원마저 절반도 안 될 정도로 적으니 쉽지 않을 겁니다.”

“그럼 어쩔 수 없지. 함대가 철수하기 전에 모두 심양으로 데리고 와서 노예로 팔아서 귀환하는 병사들의 노잣돈이나 좀 챙겨 주도록 해.”

“그러면 웅도에 인력이 너무 부족해지지 않겠습니까?”

얼마 전 마부대에게 잡혀 있던 사람들을 보냈지만 수군 병력과 해적이 빠져나가면 웅도에 상주하는 인원은 오백 명 아래로 줄어든다.

그나마도 교역선을 호위해야 되는 전투선 인원을 빼면 채 이백 명이 안 됐기에 이걸로 웅도를 지키고 운영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건 노예로 잡혀 있는 조선인들을 구해서 보내 주면 되니까 걱정하지 마.”

“그러려면 돈이 상당히 많이 들어갈 텐데요.”

장 총관이 약간 걱정스러운 얼굴로 쳐다보자 도현은 염려하지 말라는 듯이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애초에 상단을 세운 목적이 돈을 벌어 청국에서 고통받는 조선인들을 구하는 것이잖아. 그리고 이번에 해적 토벌을 하며 생긴 부수입도 있고 해상 교역으로 짭짤하게 수익을 올렸으니까 그걸 쓰면 되지. 그래도 부족하다면 마부대를 혼내 준 것처럼 노예 상인들을 털지, 뭐.”

대수롭지 않은 도현의 말투에 장 총관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되겠군요. 하하.”

설마하니 왕족인 도현이 진짜로 노예 상인들을 털고 다닐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 않은 장 총관은 그저 농담으로 흘려들으며 맞장구를 쳤다.

“상단에 여유 자금이 얼마나 있나?”

상단의 재정 내역을 머릿속에 통째로 넣고 다니는 장 총관은 지체 없이 대답했다.

“얼마 전에 광동성으로 가는 교역 선단이 물품을 잔뜩 싣고 떠나서 금자로 오만 냥 정도밖에 없습니다.”

이 정도면 설립한 지 얼마 안 되는 상단치고 상당한 자금을 보유한 거지만 최근 해상 교역을 통해 큰 이득을 남긴 걸 생각하면 적은 액수였다.

“그거 가져와.”

도현이 눈짓을 하자 문 앞에 서 있던 칠현이 한쪽에 놔둔 작은 나무 궤짝을 하나 들고 와서 탁자 위에 내려놨다.

“금자 만 냥이야. 우선 이걸로 군인 출신 조선인 노예들을 최대한 모아서 웅도로 보내게.”

“어디서 이런 거금이…….”

“해적 소굴에서 찾아낸 거야. 이럴 때를 대비해서 따로 챙겨 뒀지.”

“그러셨군요. 이거면 인력 문제를 상당 부분 해결할 수 있을 겁니다.”

상단 자금을 건드리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 장 총관은 크게 기뻐했다.

이것은 죽은 진태룡이 가지고 있던 보물의 일부분에 불과했고, 나머지는 도현이 모처에 은밀히 숨겨 두었다.

얼마 뒤 웅도에 있던 조선 수군이 모두 본국으로 철수했다. 도현은 장수들한테는 비단 열 필 그리고 병졸은 베 열 필을 나눠 주며 그동안의 노고를 치하했다.

뜻밖의 선물에 병졸은 물론이고 장수들까지 크게 기뻐했고 이들의 머릿속에는 도현에 대한 호감이 깊게 새겨졌다.

그렇게 전쟁이 끝나고 북방의 차가운 바람이 몰아쳐 대지를 꽁꽁 얼리는 추운 겨울이 심양성을 찾아왔다.

가을 수확을 했지만 전쟁의 여파가 남아 물가는 여전히 높았는데 도현은 그 틈을 이용해 토벌한 해적들이 노략질해 놓은 물품을 아주 비싼 값에 처분했다.

휘이이잉!

“어우, 추워.”

털외투를 꽁꽁 껴입고 종종걸음으로 밤새 내린 눈이 하얗게 덮인 후원을 지나가던 칠현은 자신과 같이 궁에 들어온 감생이라는 이름의 내관을 보고는 반가운 마음에 가까이 다가갔다.

“야, 감생…….”

막 이름을 부르려던 칠현은 감생이 굳은 얼굴로 좌우를 둘러보는 것을 보고 뒷말을 흐렸다.

“저 녀석 대체 뭐하는 거야.”

누가 보기에도 수상쩍은 모양새로 신중하게 주위를 살펴본 감생은 다시 어디론가 종종걸음을 쳤다.

칠현은 어딘지 모르게 미심쩍은 기운을 느끼고는 잠시 고민하다가 이윽고 그 뒤를 쫓았다.

동기이긴 하지만 도현을 모시는 칠현과 달리 감생은 동궁전 소속의 내관으로, 심양에서도 세자 저하를 모시고 있었기에 혹시 그쪽으로 가나 싶었지만 방향을 달리해 반대쪽, 즉 사람들이 잘 지나다니지 않는 건물 뒤편으로 향하는 걸 보고 의심은 더욱 깊어졌다.

어지간히도 다른 사람들 눈에 띄고 싶지 않은 듯 감생은 몇 걸음 가다가 휙 돌아보고 또 서너 발짝 걸어가다 돌아서곤 했다.

그럴 때마다 요령 좋게 숨어서 감생의 눈길을 피한 칠현은 추위로 손끝이 얼어붙는 것도 느끼지 못하고 미행에 열중했다.

감생이 잡동사니들을 모아 놓는 창고 쪽으로 향하는 게 확실해지자 칠현은 의아한 듯 눈썹을 치켜올렸다.

딸린 식구가 많은 심양 관저에는 여기저기에 크고 작은 창고가 흩어져 있고, 그중에서도 여기는 일 년에 몇 번 쓸까 말까 한 도구들만 모아 놓는 곳이라 사실상 올 일이 거의 없는 곳이다.

그런 곳에 감생이 왜?

호기심이 치솟아 오른 칠현은 감생이 창고 뒤편으로 쓱 사라지자 침을 꿀꺽 삼키고는 바짝 다가섰다.

“왜 이렇게 늦었나.”

“죄송합니다. 몰래 빠져나오느라 시간이 좀 걸렸습니다.”

칠현이 귀를 쫑긋 세우자 추궁하는 여자의 목소리와 사과하는 감생의 목소리가 번갈아 들려왔다.

무슨 일인가 했더니 여자와 밀회인가.

뭐 한창 때의 젊은이니 그럴 수도 있지 하고 애늙은이처럼 고개를 주억거리던 칠현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속으로 혀를 찼다.

일반적인 남성이라면 이상할 것도 없는 상황이지만 감생은 내시다.

역시 아무래도 이상하다며 고개를 갸웃거린 칠현은 뒤이어 들려오는 목소리에 자기도 모르게 숨을 흡 들이켰다.

“보고해 보게.”

“지난 이레 동안 특별한 일은 없었습니다. 세자 저하께오선 여느 때처럼 오전엔 책을 읽으며 학문에 정진하셨고 오후엔 대군마마와 함께 가끔씩 산책을 하거나 차를 마시며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신 게 답니다.”

“바깥에서 누가 찾아오진 않았느냐? 낯선 사람이나, 아니면 청나라 관리 같은.”

“으음. 아니, 별로요.”

“그럼 봉림대군 쪽은 어떤가.”

“그쪽은 제 관할이 아니라 잘 모르겠습니다만, 친하게 지내는 궁녀에게 슬쩍 물어보니 활달하신 대군마마께서도 요 며칠 계속 얌전히 지내신다 합니다.”

“그래?”

여자는 뭔가 생각하는 듯 잠시 말이 없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알겠네. 자네는 앞으로도 계속 두 사람을 감시하며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놓치지 않고 내게 보고해 줘야 하네.”

“아무렴요.”

“좋아. 자네의 충성심에 마마께서도 감복하실 게야.”

그러고 나서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가 났다.

“이건 약속했던 수고비네.”

“감사합니다. 저, 그리고…….”

“뭔가?”

“겨울이 지나면 꼭 한양으로 돌려보내 주시는 거죠?”

“흥! 물론이지. 우리 마마께서 손짓만 한 번 하셔도 자네 한 사람 이동시키는 것쯤이야 아무 문제 없어. 누가 감히 우리 마마께서 하는 말을 거역한단 말인가.”

“자, 잘 부탁드립니다.”

이윽고 용건이 다 끝난 듯 말소리가 뚝 끊기고 사박사박 눈 위를 걷는 발소리가 들렸다.

감생이 이쪽으로 오는 것을 알아차린 칠현은 이크 하며 서둘러 창고 옆에 비스듬하게 기대 세워져 있던 짐 더미 뒤에 숨었다.

그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점점 멀어져 가는 감생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칠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저나 감생 녀석, 큰일을 저질렀군.

모시는 주인의 동태를 외부에 발설하다니 이건 완벽한 배신행위다.

그것도 세자 저하의 곁을 지키는 내관이 그랬으니 당장 멍석말이를 당해 초주검이 되도록 쳐 맞아도 할 말이 없는 큰 죄.

지금이라도 뒤를 쫓아가서 대체 왜 그런 짓을 했냐고 묻고 싶지만 칠현은 꾹 참았다.

이 사실을 빨리 대군마마께 알려야 해.

그렇게 생각하고 일어나려는 찰나 아까 감생이 나왔던 곳에서 또 작은 발소리가 들려왔다.

혹시라도 의심을 사지 않도록 시간 차를 두고 따로따로 가기로 한 모양인지, 이번엔 여자였다.

칠현은 숨어 있는 곳에서 나오지 않고 최대한 자세히 여자를 관찰했는데 처음엔 잘 몰라봤지만 눈여겨보니 상당히 낯익은 얼굴인 것을 깨달았다.

바로 수라간에서 일하는 고참 상궁이 아닌가.

칠현은 간담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끼며 주위에 아무도 없어질 때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렸다.

“후아!”

오랫동안 쪼그려 앉아 있어서 피가 잘 안 통하는 바람에 다리가 저렸지만 칠현은 ‘큰일이다, 큰일이야.’ 하며 종종걸음으로 도현의 관저를 향해 열심히 내달렸다.

눈이 깨끗하게 치워진 연무장에서 검술 수련을 하고 있던 도현은 칠현의 이야기를 듣고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그게 정말이야?”

“예. 제가 이 두 눈과 귀로 똑똑히 확인했습니다.”

칠현이 잔뜩 흥분해서 대답하자 도현은 낮게 침음성을 흘리며 미간에 내 천 자를 만들었다.

“으음.”

“수라간 박 상궁과 감생이 웃전을 계속 언급했는데 그게 누굴까요?”

“보나 마나 뻔하지.”

뭔가를 알고 있는 듯한 도현의 태도에 칠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누군지 알고 계시는 겁니까?”

잠시 아무 말 없이 앞에 서 있는 칠현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도현은 지금 관저에서 자신이 가장 믿고 의지할 수하는 칠현 하나뿐이라는 생각에 약간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얼마 전 새로 왕비가 되신 중전마마(장렬왕후)께서는 아직 궁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셨고 무엇보다 세력이 미미하니 이런 일을 벌일 능력이 안 되지.”

“그럼…….”

“중전이 아니시라면 딱 한 명밖에 없지 않으냐. 현재 아바마마의 총애를 받고 있는 후궁 조씨지.”

심양에 오기 전까지 칠현도 대궐에서 생활했기에 후궁 조씨가 어떤 인물인지 잘 알고 있어 이야기를 듣고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온갖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궁궐이니 차기 국왕 후보에 대한 견제 차원에서 벌인 행동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하는 칠현과 달리 도현은 이번 일을 아주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청국에서 오랜 볼모 생활을 끝내고 다시 조선으로 돌아간 소현세자가 인조의 의심과 미움을 받아 억울한 죽음을 당하는 데 바로 후궁 조씨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을 알고 있는 도현 입장에서는 소현세자야 차기 후계자이니 그러려니 해도 자신까지 견제를 한다는 사실에 충격과 위기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지시를 받고 멀리 떨어져 있는 궁녀들을 힐끗 쳐다본 도현은 약간 목소리를 낮추면서 말했다.

“나에 대한 정보가 샌다면 형님뿐 아니라 내 곁에도 첩자가 있다는 뜻이겠지.”

“당장 조사를 해서 배은망덕한 쥐새끼를 잡아내겠습니다.”

도현보다 더 흥분한 칠현이 한쪽 주먹을 불끈 쥐며 이야기하자 그는 고개를 살짝 내저었다.

“아니야. 그냥 놔둬.”

“예?”

“괜히 섣불리 건드렸다가 오히려 더 큰 화를 뒤집어쓸 수도 있으니까 일단은 놔두라고.”

“하지만 그러다가 마마께서 하시는 일이 한양에 알려지면 어쩌시려고…….”

봉황상단을 운영하고 노예로 잡힌 조선인들을 구출하는 일은 분명 선의로 하는 것이지만 대궐은 아무것도 아닌 걸 가지고 한순간에 대역죄로 바꿀 수도 있는 무서운 곳이었기에 칠현이 걱정을 하는 것이다.

확실히 이런 큰일을 벌이면서 조정이나 하다못해 인조에게도 알리지 않고 은밀히 움직인 것은 보는 시각에 따라 의심의 눈길을 보낼 충분한 여지가 있었다.

“물론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있으라는 건 아냐.”

“그럼…….”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후궁 조씨에게 넘어간 첩자가 누구인지 밝혀내도록 해. 할 수 있겠지?”

“물론입니다. 맡겨만 주십시오.”

칠현이 한쪽 주먹으로 가슴을 팡팡 치며 대답하자 도현은 입가에 살짝 미소를 지었다.

“중요한 일이니까 서두르지 말고 신중하게 움직여.”

“예.”

“그리고 여유가 된다면 세자전에 있는 첩자도 알아내 봐.”

“알겠습니다.”

“네가 옆에 있어서 든든해.”

진심 어린 목소리로 말을 하며 도현은 칠현의 어깨를 부드럽게 두드려 줬다.

“마마.”

평소와 달리 속마음을 살짝 드러내자 칠현은 감동받은 얼굴로 다시 검을 들고 연무장 가운데로 걸어가는 도현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이번 일로 주위에 믿을 수 있는 측근이 너무 부족하다는 걸 느낀 도현은 그동안 상대적으로 등한시했던 관저 내부 일에 더욱 신경 쓰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후궁 조씨의 입김이 미치기 어려운 위사들부터 휘하로 끌어들였다.

심양 중심가 거리는 새로운 제국의 수도답게 항상 각 지방에서 올라온 물건이 넘치고 사람들로 붐볐지만 밤이 되면 곳곳에 화려한 등이 밝혀지며 더 활기차게 변했다.

대로 한쪽에는 눈이 번쩍 뜨일 만한 어여쁜 미녀들이 웃음과 기예를 파는 고급 술집이 거리에 주욱 늘어서서 남자들을 유혹했다.

그중 한 곳에 밤외출(?)을 나온 도현이 자신에게 무술을 가르쳐 준 김덕술과 박태철을 데리고 들어섰다.

“어서 오십시오, 나리.”

“술 한잔 마시려고 왔는데 자리가 있나?”

“물론입죠. 절 따라오십시오.”

언제 이런 데를 다녔는지 어색한 것 하나 없이 아주 능숙한 도현의 행동에 가만히 뒤를 따르던 김덕술과 박태철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처음 오신 게 아닌 것 같지?”

“그러게.”

“캬아! 아무튼 여기가 별세계네그려.”

마치 지방에서 살다가 한양에 갓 상경한 촌놈처럼 김덕술이 헤벌쭉한 얼굴로 연신 지나가는 기녀와 내부를 두리번거리자 옆에 있던 박태철이 눈가를 살짝 찡그리고는 팔꿈치로 그의 옆구리를 쳤다.

“윽! 왜 그래?”

“애먼 데 눈 돌리지 말고 대군마마 호위하는 거나 신경 써.”

“내가 뭘 어쨌다고.”

“입가에 묻은 침이나 닦아.”

“흐흠.”

박태철의 핀잔에 김덕술은 황급히 소매로 입을 닦고는 무안한지 괜히 헛기침을 했다.

그러는 사이 도현은 삼 층에 위치한 방으로 안내됐다.

“여깁니다.”

“나쁘지 않군.”

실내를 둘러본 도현은 자연스럽게 상석에 앉았다.

“두 사람도 이리 와서 앉아.”

“저희가 어떻게…….”

“괜찮으니까 두 번 말하게 하지 말고 어서 와.”

재차 도현이 권하자 김덕술과 박태철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맞은편 자리에 나란히 앉았다.

“술은 뭘로 갖다 드릴까요?”

“금존청이 좋겠군. 그리고 우리끼리 잠시 할 이야기가 있으니까 기녀들은 나중에 들여보내.”

“알겠습니다.”

잠시 뒤 술이 나오자 도현은 술병을 집어 들며 말했다.

“일단 한 잔씩들 받아.”

“아닙니다. 저희가 어찌 대군마마와 대작을 하겠습니까?”

박태철이 황급히 손사래를 쳤지만 도현은 미소 띤 얼굴로 이야기를 했다.

“혼자 마시면 내가 심심해서 그래.”

“…….”

“어허. 팔도 무거운데 계속 이러고 있게 만들 거야?”

도현의 말에 박태철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앞에 있는 잔을 들었다.

“그럼 받기만 하겠습니다.”

“하여튼 깐깐하기는. 김 위사도 한 잔 받아.”

세 사람뿐이었기에 도현은 호칭을 편하게 했다.

“예, 마마.”

정중히 사양하던 박태철과 달리 아까부터 금존청을 보고 군침을 삼키고 있던 김덕술은 말을 하기 무섭게 냉큼 잔을 내밀었다.

그러자 박태철이 못마땅한 얼굴로 눈을 흘겼지만 애주가인 김덕술은 비싸서 평소에 맛을 보기 힘든 금존청을 마실 수 있다는 생각에 모르는 척 딴청을 피웠다.

그런 두 사람의 모습에 도현은 웃음을 터트리며 한 손으로 잔을 들었다.

“자, 건배하자고. 물론 원 샷이야.”

“원……샷이 뭡니까?”

처음 듣는 말에 김덕술이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묻자 자기도 모르게 실수한 도현은 아차 하며 대충 얼버무렸다.

“나도 어디서 들은 건데 요즘 한창 유행하는 말로, 이렇게 잔을 부딪치고 단숨에 다 비우자는 뜻이라더군.”

“오! 그렇습니까.”

역시 애주가답게 김덕술이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감탄성을 터트렸다.

“자! 사설은 그만하고 어서 건배하자고. 아 참! 박 위사도 마시는 거야.”

“하지만…….”

“한 잔 정도는 괜찮아. 아님 설마 그걸로도 취할 만큼 술이 약한 건 아니겠지?”

살짝 자존심을 건드리자 박태철은 정색하며 말했다.

“아닙니다.”

“그러면 문제없네. 자! 건배.”

쨍!

가볍게 잔을 부딪친 세 사람은 술을 단번에 죽 들이켰다.

“캬! 역시 좋네요.”

목을 넘어가는 달콤하고 화끈한 느낌에 김덕술은 감탄성을 내뱉었고 박태철도 나쁘지 않았는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빈 잔을 채워 주며 도현은 일단 가벼운 이야기로 분위기를 풀었다.

“그동안 나한테 무예 전수해 주느라 수고들이 많았어.”

“아닙니다. 예상과 달리 무재가 아주 뛰어나셔서 가르치면서 저희가 더 배우는 것이 많았습니다.”

“맞습니다.”

“그러면 내가 술을 사는 것이 아니라 얻어먹어야 되는 게 아닌가.”

“그게 또 그렇게 되는 겁니까?”

도현이 농담을 하자 김덕술이 넉살 좋게 받았다.

“저희는 돈이 없으니 이런 고급 술집은 못 가고 닭요리에 화주 정도는 얼마든지 사 드리겠습니다.”

“하하하! 두 사람 주머니 사정을 내가 뻔히 아는데 어찌 그걸 털어 먹을 수 있겠나. 술 생각이 나면 언제든 사 줄 테니 말만 하게.”

그러자 김덕술이 제일 반겼다.

“약속하셨습니다.”

“그래.”

그렇게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술을 몇 잔 더 주거니 받거니 한 도현은 슬슬 이 자리를 만든 진짜 용건을 꺼냈다.

“두 사람은 날 어떻게 생각하지?”

“……?”

김덕술과 박태철이 선뜻 아무런 말도 못 하고 쳐다보자 도현은 정색하며 재차 질문을 던졌다.

“왜, 아무런 감정이 없어? 그냥 웃전이니까 시키는 대로 따르는 거야?”

도현의 말에 박태철이 들고 있던 잔을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제가 느낀 대군마마는 정의롭고 아랫사람들을 잘 대해 주시는 따뜻하신 분입니다.”

무뚝뚝하고 빈말을 못 하는 평소 박태철의 성격을 생각할 때 이 정도면 최고의 찬사를 보낸 것이다.

하지만 도현은 고개를 살짝 내저었다.

“그런 걸 물은 것이 아니라 그대들의 진정한 주인으로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 질문한 걸세.”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짓던 두 사람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눈을 크게 치켜떴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단순히 지시에 따라 내 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는 두 사람이 진심에서 우러나 날 주군으로 따랐으면 좋겠어.”

“설마…….”

뭔가를 떠올렸는지 박태철이 얼굴을 굳히자 도현은 손을 살짝 내저으며 말했다.

“아! 그렇다고 내가 형님이나 아바마마께 해가 되는 일을 하려는 건 아니니까 이상한 생각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럼 왜?”

“알고 있다시피 형님이 앞으로 왕위에 오르실 때까지 내가 봉황상단을 맡아 운영하며 보필해야 되는데 믿고 함께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부족해.”

그동안 도현을 따라다니며 보고 들은 것이 있기에 두 사람은 바로 무슨 이야기인지 알아들었다.

행여나 그가 왕위에 관심이 있는 건 아닌지 우려하던 둘은 일단 그게 아니라는 것에 안도하면서도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그저 칼만 쓸 줄 알았지 상단 일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데 저희가 도움이 되겠습니까?”

“아니야. 자네들이 날 도와준다면 큰 힘이 될 거야. 많이 부족하지만 믿고 따라 주지 않겠나.”

멀쩡한 관직을 버리고 조선 사회에서 가장 천시하는 상단에 들어오라니 솔직히 두 사람 입장에서는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제안이었다.

하지만 도현은 실력을 떠나서 믿고 곁을 내줄 수 있는 사람이 절실하게 필요했기에 힘든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이야기를 꺼냈다.

“혹시 제안을 거절한다고 해도 불이익을 가하지는 않을 테니까 마음 편히 결정하도록 해.”

인생이 바뀔 수도 있는 중요한 결정이었기에 방금 전까지 허허거리며 떠들던 김덕술마저 입을 꾹 다문 채 깊은 고심을 거듭했다.

괜한 부담을 주기 싫었던 도현은 가만히 앉아 혼자 술을 조금씩 마시며 결정을 내릴 때까지 기다려 줬다.

그렇게 얼마쯤 시간이 흘렀을까, 의외로 신중한 성격인 박태철이 침묵을 깨고 먼저 입을 열었다.

“제가 지금까지 지켜봐 온 대군마마시라면 대의를 지키고 저희들을 버리지 않고 끝까지 책임져 주실 분이니 제안을 받아들이겠습니다.”

“저도 대군마마를 따르겠습니다.”

확률이 반반이라고 생각했는데 두 사람이 다 원하던 대답을 해 주자 도현은 희열에 찬 표정을 지으며 덥석 손을 잡았다.

“고맙네. 오늘 한 결정을 절대 후회하지 않도록 해 주겠네.”

도현의 말을 들으며 자리에서 일어난 두 사람은 진지한 얼굴로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빼서 앞에 내려놓고는 공손히 무릎을 꿇었다.

“대군마마, 앞으로 마마를 주군으로 모시며 목숨을 다 바쳐 충성하겠습니다.”

충성 맹세를 한 박태철과 김덕술은 이마를 바닥에 박으며 절을 했다.

“나도 그대들을 내 몸처럼 아끼겠네.”

“충!”

“하하하! 이 좋은 날 술이 빠지면 안 되지. 다시 한 번 건배하세.”

“예.”

크게 웃음을 터트린 도현은 두 사람에게 술을 넘치도록 따르고는 잔을 위로 들어 올렸다.

“우리 세 사람이 가는 길에 영광만이 있기를. 건배!”

“건배!”

술을 단번에 다 털어 넣은 도현은 이제 완전히 자신의 수하가 된 박태철과 김덕술을 든든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며칠 뒤 칠현은 그동안 은밀히 조사한 걸 도현에게 보고했다.

“여기 적힌 놈들이 다 후궁 조씨에게 포섭됐다는 거지?”

“예. 지난 이레간 감생과 수라간 박 상궁을 몰래 미행해서 혐의가 확실한 이들만 골라 놓은 겁니다.”

다시 한 번 종이에 적힌 이름과 직책을 천천히 훑어본 도현은 명단을 접어 서탁에 내려놨다.

“그래도 걱정했던 것과 달리 숫자가 적군.”

“아무래도 관저에 있는 궁인들 대부분이 한양에서부터 세자저하와 대군마마를 모시던 이들이니까요.”

“그러면 뭐해, 일부지만 이미 이렇게 배신한 사람이 나왔잖아.”

“…….”

도현의 지적에 칠현은 딱히 대꾸할 말이 없는지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이들 중에 후궁 조씨와 직접 연결된 인물이 있을 텐데, 누구야?”

“수라간 박 상궁입니다.”

“박 상궁?”

“네. 관저에 있는 궁인들 중에 꽤 직책이 높고 무엇보다 수라간 상궁이라는 것 때문에 세자전은 물론이고 내전까지 아무런 제약 없이 들어갈 수 있지 않습니까. 그걸 이용해서 여기저기 박아 놓은 첩자들에게 정보를 건네받고 있었습니다.”

칠현의 말이 사실이라면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었다.

이런저런 정보가 외부로 새어 나가는 건 둘째 치고 최악의 경우 소현세자 부부는 물론이고 도현과 부인인 장씨의 식사를 만드는 박 상궁이 음식에다 독을 넣어 살해를 시도할 수도 있는 것이다.

실제로도 조선 왕조의 역사를 살펴보면 독살을 당한 걸로 추정되는 왕과 왕족이 많았기에 도현의 우려는 절대 지나친 것이 아니었다.

“제기랄. 앞으로는 밥도 마음 놓고 못 먹겠군.”

“예?”

혼잣말에 칠현이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보자 도현은 한 손을 내저었다.

“아무것도 아냐. 그것보다 여기에 적힌 이들만 해도 열 명이나 되는데 너 혼자 다 살필 수 없잖아?”

“얼마 전에 장 총관이 관저에 넣어 준 일꾼들과 함께 감시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러고 보니 호위대 대원들을 일꾼으로 위장시켰다고 했지?”

“예. 박 대장도 들어왔습니다.”

“그래? 지금 어디에 있어?”

“대군마마의 거처에 땔감을 대는 일을 하고 있는데 불러올까요?”

“아니야. 괜히 정체가 탈로 날 수도 있으니까 그냥 놔둬.”

“알겠습니다.”

조선인 노예 출신으로 구성된 호위대 대장이자 무예가 뛰어난 박영식이 지근거리에 있다고 하자 도현은 그제야 굳어 있던 얼굴을 조금 풀었다.

“박 상궁과 첩자들의 움직임을 하나도 놓치지 말고 철저히 감시해. 그리고 나와 부인의 수발을 드는 궁인들 중 아직 저쪽에 넘어가지 않은 자들을 포섭해 우리 편으로 만들어 놔.”

“그럼 저들을 그냥 이대로 놔두실 겁니까?”

칠현의 물음에 도현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지금 정리를 해 봤자 다시 또 첩자를 심으려 들 거고 상대편에 우리가 감시를 눈치챘다는 걸 알려 주는 것밖에 안 되잖아. 완전히 박멸하기 어렵다면 시야에 두고 저들을 이용해 먹는 것이 더 현명하지 않겠어.”

도현의 의도를 깨달은 칠현은 짧게 감탄성을 내뱉으며 머리를 숙였다.

“역시 마마이십니다.”

“알았으면 이제 그만 나가 봐.”

“예.”

칠현이 나간 뒤 서탁에 내려놓은 명단을 펼쳐 이름을 확인한 도현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수천 리나 떨어진 심양 관저에까지 자기 사람을 심어 놓다니, 어떻게 생각하면 후궁 조씨 이 여자도 대단한 사람이야. 초반에 발각해서 다행이지 이런 것도 모르고 계획한 일들을 진행시켰다면……. 으으, 생각만 해도 끔찍하군.”

지금이야 소현세자에게 이목을 집중하고 있지만 계속 권력을 유지하고 자신이 낳는 아이에게 조선의 왕위를 물려주는 것이 후궁 조씨의 목표인 이상 도현도 마냥 마음을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이렇게 되면 형님한테도 사실을 알려 줘야겠지.”

지금 상황에서 제일 위험한 사람이 소현세자였고 도현을 위해서라도 세자가 방패막이로 남아 있어 주는 것이 좋았다.

결정을 내린 도현은 명단을 접어 소매 주머니 깊숙이 집어넣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시간 서재에서 한창 책을 읽고 있던 소현세자는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저하, 봉림대군 마마 왔사옵니다.”

“들라 해라.”

양옆으로 문이 열리고 도현이 안으로 들어서자 소현세자는 손에 들고 있던 책을 덮고 밝은 목소리로 반겼다.

“이 시간에 웬일이냐. 지금쯤이면 한창 연무장에서 수련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아직 아무것도 모른 채 동생이 찾아왔다는 것에 마냥 기뻐하는 소현세자였지만 도현은 반대로 얼굴을 살짝 굳혔다.

“형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주위에 엿듣는 사람이 없는지 살펴보는 도현의 모습에 소현세자는 의아한 얼굴을 했다.

“무슨 일이라도 생겼느냐.”

평소 책을 읽을 때는 집중하는 데 방해가 된다며 시중드는 사람들을 모두 내치는 소현세자였기에 다행히 방 안에는 두 사람 외에 아무도 없었다.

문밖에 경비를 서는 위사와 내관이 있긴 했지만 제법 큰 방이었기 때문에 목소리를 낮춰서 얘기하면 잘 들리지 않을 것이다.

“일단 앉아서 얘기해 봐라.”

“예.”

소현세자가 그리 말하자 도현은 탁상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아선 몸을 앞으로 바싹 기울여 속닥였다.

“형님, 일단 이걸 한번 봐 주십시오.”

도현은 소맷자락에서 명단을 꺼내 다짜고짜 내밀었다.

얼떨결에 그걸 받아 든 소현세자는 사람들의 이름이 쭈욱 나열되어 있는 것을 보고 도무지 짐작이 안 간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름만 봐서는 조선 사람 같은데……. 이게 다 뭐냐.”

“한양에 있는 후궁 조씨가 형님과 제 곁에 심어 놓은 첩자들입니다.”

“뭐야?”

탕!

청천벽력 같은 말에 소현세자가 명단을 내던지며 탁자를 내리쳤다.

“그게 무슨 말이냐!”

“형님, 진정하십시오. 밖에 다 들리겠습니다.”

흥분해서 목소리가 커진 소현세자를 도현이 억지로 달랬다.

명단과 문 쪽을 번갈아 보며 눈짓하는 도현의 모습에 첩자가 혹시 이야기를 엿들을까 봐 염려하는 것을 깨달은 소현세자는 심호흡을 하며 간신히 진정했다.

“확실한 거냐?”

신분의 차이는 있지만 고향을 떠나 먼 타국에서 몇 년 동안 한 지붕 아래 살았던 자들이다.

정이 많은 소현세자라 내심 나중에 조선으로 돌아가면 그동안 고생했던 것에 대한 보상으로 후한 상을 내릴 생각까지 했던 그이기에 배신감은 더더욱 컸다.

그런데 그 안에 첩자가 있다니!

참담한 소현세자의 마음을 헤아리듯이 안타까운 표정을 지은 도현은 다시 얼굴을 굳히고 얘기했다.

“네. 아직 얼마나 더 있는지는 모릅니다만 적어도 이 명단에 있는 자들은 제가 직접 조사한 것이니 확실합니다.”

“그래…….”

눈썹을 파르르 떨며 주먹을 세게 쥔 소현세자는 마음을 가다듬으려는 듯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한 일이라면 의심의 여지가 없지. 어쩔 수 없구나.”

아무리 슬프고 안타까워도 죄를 지었으니 그냥 넘어갈 수는 없다.

잠시 눈을 감고 마음을 안정시킨 소현세자는 다시 도현에게 물었다.

“그럼 하루라도 빨리 이자들을 색출해서 처리해야겠구나.”

“아닙니다, 형님. 너무 서두르면 일을 그르치게 됩니다.”

“곁에 첩자가 있는 것을 알면서도 그냥 놔두란 말이냐?”

“네.”

가만히 고개를 끄덕인 도현은 소현세자에게 자신의 계획을 자세히 이야기했다.

“관저에서 우리를 시중드는 사람은 모두 한양에 있는 궁에서 선발하여 보내지요. 만약 첩자를 색출해서 없애 버린다 해도 지금 궁에서는 후궁 조씨의 입김이 세니 분명히 또 자기편을 섞어서 보낼 겁니다. 그래서는 아무리 해도 끝나지 않아요.”

“음…….”

듣고 보니 도현의 말이 일리가 있기에 소현세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장차 어떻게 할 생각인 거냐?”

“일단 우리가 첩자가 있는 사실을 눈치챘다는 걸 모르게 해야죠. 그리고 나중에 어떤 식으로든 이용해 먹을 겁니다.”

도현은 소현세자가 내던진 명단을 다시 주워 주며 말했다.

“여기에 이름이 올라와 있는 자들을 주의하십시오. 일단 누가 첩자인지 알고 있으면 중요한 정보가 흘러가는 것을 막을 수 있을 테니까요. 그리고 몇몇은 수라간에서도 일하고 있으니 먹는 것에도 신경을 쓰시는 게 좋겠습니다.”

“알았다. 당분간은 네 말대로 하지.”

피곤한 듯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던 소현세자는 도현의 손을 꼭 붙잡고 손등을 가볍게 톡톡 두드렸다.

“네 덕분에 큰 위험을 피하게 됐구나. 고맙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인걸요. 그럼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몸조심하세요.”

“그래.”

도현은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하고는 소현세자의 서재를 나왔다.

형제간의 평범한 대화를 하고 나온 듯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하고 심지어 문밖에 서 있던 궁인들에게 수고한다며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기까지 하면서 도현은 처소로 돌아왔다.

명明의 몰락을 예견하고 실리적인 외교를 펼쳤을 정도로 명석한 머리를 가진 소현세자는 도현에게 첩자가 있다는 귀띔을 받자마자 측근 내관인 최형외를 시켜 은밀히 세자전 내부 인원들을 감찰했다.

최형외는 세자전 소속 내시로, 정삼품 당하관에 해당하는 관직인 상다尙茶로 있는데 칠현처럼 소현세자가 어렸을 때부터 시중을 들어 그가 크게 의지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첩자를 가려내면서도 도현이 충고한 것처럼 잡아서 치도곤을 내지 않고 일단 모르는 척하며 그냥 내버려 뒀다.

또한 대신전보다 보안을 더 철저히 하면서 최형외를 시켜 첩자들을 감시하는 것과 동시에 주변 관리에 신경을 썼다.

이렇게 심양 관저는 겉으로는 조용한 가운데 물밑에서 어떻게든 꼬투리를 잡아 세자를 끌어내리려는 후궁 조씨와 빌미를 주지 않으려는 도현과 소현세자의 치열한 머리싸움이 계속 이어졌다.

한편 영원성을 함락시킨 것에 크게 고무된 청국 황제와 대신들은 이 기세를 몰아 산해관을 넘어 자금성까지 단숨에 밀어붙이기로 결정을 내렸다.

꿈에도 그리던 중원 정복을 위해 황제인 홍타이지는 대규모 원정군 편성을 명령했는데 조선에도 병력 일만과 군량미 이십만 섬을 내놓으라는 요구를 했다.

“병력 일만과 군량미 이십만 섬이라고 하셨습니까?”

깜짝 놀라 자신도 모르게 언성을 높인 소현세자와 달리 황궁에서 나온 만월개는 태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눈이 녹고 언 땅이 풀리는 내년 오월에 산해관으로 진격할 계획이니 그 전까지 병력과 군량미를 모두 심양으로 보내야 할 것이오.”

마치 맡겨 놓은 물건을 받아 가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만월개의 모습에 소현세자는 물론이고 옆에 있던 도현도 어처구니가 없고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여기서 열을 내 봤자 불리한 건 이쪽이었기에 소현세자는 애써 마음을 진정시키고는 입을 열었다.

“본국의 사정이 어려운 가운데도 무리해서 지난번 전쟁에 병력과 물자를 보냈는데 또다시 이런 요구를 하면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완곡한 거절에 만월개는 정색하며 손바닥으로 가운데 있는 탁자를 세게 내려쳤다.

탕!

“지금 황제 폐하의 명령을 거부하겠다는 거요!”

“그런 것이 아니라 저희 사정을 생각해서 요구를 조금 줄여 달라는 겁니다.”

“흥! 그게 그거 아니오. 만약 오월 전에 병력과 군량미가 오지 않는다면 황제 폐하의 분노가 명이 아닌 조선으로 향할 테니 알아서 하시오.”

협박하듯 소리를 내지른 만월개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서는 옷자락을 펄럭이며 몸을 돌렸다.

“이, 이보시오!”

“만 대인!”

동석해 있던 박황과 박노가 황급히 그를 붙잡았지만 만월개는 냉정하게 손을 뿌리치며 밖으로 나가 버렸다.

두 대신이 어떻게든 다시 데려오려고 허둥지둥 만월개를 뒤따라가는 걸 보며 소현세자는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갑자기 이게 무슨 날벼락인지…….”

“일단 대신들을 다 소집해 대책을 세우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래.”

소현세자가 도현의 말에 머리를 끄덕일 때 밖에 나갔던 박황과 박노가 낭패한 얼굴로 돌아왔다.

“어떻게 됐소?”

“저희가 붙잡았지만 더 할 이야기가 없다며 그냥 마차를 타고 가 버렸습니다.”

“이런…….”

“어차피 만월개는 청 조정의 결정을 전하러 온 전령에 불과하니 협상을 하려면 예친왕 도르곤이나 범문정을 만나야 될 겁니다.”

도현의 지적에 소현세자는 박황을 보며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비상 회의를 소집하시오.”

“알겠습니다, 저하.”

고개를 숙이며 대답한 박황은 박노와 함께 서둘러 방을 나섰다.

박황을 비롯한 관리들 모두 관저 안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얼마 지나지 않아 속속 세자전으로 모여들었다.

중간 문을 활짝 열어 넓힌 방 안에는 소현세자와 도현 형제 외에 스무 명의 관리들이 꽉 들어찼는데 오면서 갑자기 회의가 소집된 이유를 들었는지 다들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방금 만월개가 와서 청 황제의 말을 전하고 갔는데 산해관 공략을 위해 내년 오월까지 병사 일만과 군량미 이십만 섬을 보내라고 하오. 이걸 어떻게 했으면 좋겠소?”

상석에 앉은 소현세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여기저기에서 탄식과 한숨이 터져 나왔다.

“허어.”

“이십만 섬이라니…….”

“병력은 둘째 치고라도 수확을 하는 가을도 아니고 보릿고개를 넘는 오월에 그 많은 쌀을 조달하는 건 무리입니다.”

“맞습니다. 청이 치르는 전쟁을 뒷받침한다고 백성들을 굶겨 죽일 수는 없습니다.”

김종일을 시작으로 요구가 지나치다는 말이 봇물 터지듯 쏟아지자 소현세자는 이맛살을 찡그리고는 답답하다는 얼굴로 호통을 쳤다.

“누가 그걸 몰라서 이러는 거요! 거절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그랬다가는 청 황제의 보복이 걱정되니 이러는 거 아니오.”

“…….”

이미 두 차례나 국토가 유린당한 경험이 있고 심양에 와서는 하늘처럼 여기던 명나라가 속수무책으로 밀리며 만리장성을 최후 방어선으로 삼아 청군을 막기에 급급한 걸 봤기에 보복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나마 한양에 있는 대신들이나 사대부처럼 상황 파악도 못 하고 명을 도와 청과 일전을 벌이자는 헛소리를 하지 않았지만 다들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고 있는 모습에 소현세자는 절로 한숨이 나왔다.

그런 가운데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박황이 입을 열었다.

“저하, 제가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말해 보시오.”

“본국이 처한 상황을 고려할 때 이번 청국의 요구를 들어주는 건 확실히 무리입니다.”

“그래서 어쩌자는 거요?”

“저하의 말씀대로 청국 황제의 말을 거절할 수 없는 것도 현실이니 어떻게든 성의를 보여 줘야겠지요. 하지만 조정에 저들의 요구를 알리고 사신이 와서 다시 협상을 하려면 오월까지 시간이 너무 촉박하니 우선 우리가 심양에서 수용 가능한 수준까지 조건을 낮춰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나름 논리적인 박황의 의견에 소현세자는 물론이고 모여 있던 관리들 모두 수긍하는 표정을 지었다.

소현세자 바로 옆에 앉아 있던 도현도 현명한 판단이라 생각했는데 심양과 한양 사이의 거리를 고려한다면 조정에서 직접 협상을 하는 건 무리였다.

조선이 경거망동하지 못하도록 볼모로 잡혀 있지만, 양국 사이에서 지금처럼 중요한 일이 생겼을 때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가교가 되는 것도 심양 관저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였다.

뭔가 회의가 진전되는 것 같아 보이자 목소리를 살짝 낮춘 소현세자가 박황을 보며 말했다.

“그럼 대빈객은 누굴 찾아가서 이야기를 해야 된다고 생각하오?”

“아무래도 최고 결정권자인 황제를 만나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도현이 불쑥 대화에 끼어들며 반대했다.

“그건 안 됩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

소현세자와 관리들이 의아한 시선으로 쳐다보자 도현은 정색하며 이유를 설명했다.

“다른 경우라면 모르겠지만 이번에는 황제를 직접 찾아갔다간 오히려 역효과가 날 가능성이 큽니다.”

“왜 그렇지?”

“잘 생각해 보십시오. 대신들이 모두 모여 있는 가운데 결정을 내린 걸 본국 조정에서 보낸 사신도 아니고 우리가 알현을 요청해 너무 과한 요구라며 수정을 요청한다면 자칫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으로 잘못 받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까지는 아니더라도 자존심 때문에 조건을 철회하지 않을 겁니다.”

“으음…….”

국가 간의 일은 명분이 중요한데 황제가 조선의 사정을 이해한다고 해도 도현이 말한 것처럼 얼마 지나지도 않아 대전 회의에서 결정 내린 사항을 스스로 뒤집는다면 권위에 상처가 생길 수도 있기에 바로 거절당할 가능성이 컸다.

최고 결정권자인 황제가 거절해 버리면 다른 사람들에게 부탁할 여지 자체가 없어져 버리는 것이기에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되지?”

“영원성 함락으로 발언권이 더 커졌고 전쟁의 주체인 군부를 총괄하는 인물인 예친왕 도르곤을 설득하는 것이 해답일 겁니다.”

“예친왕?”

“예. 황제인 홍타이지와는 피를 나눈 형제지간이고 우리와의 관계도 나쁘지 않으니까 잘만 설득한다면 충분히 이번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을 겁니다.”

이야기를 다 들은 소현세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지 않은 것 같은데 경들의 생각은 어떻소?”

주위를 둘러보며 묻자 좌우에 앉아 있던 관리들도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괜찮은 생각입니다.”

“저도 찬성입니다.”

“좋소. 그럼 대빈객이 최대한 빨리 예친왕과 면담 자리를 만들어 주시오.”

소현세자의 지시에 박황은 머리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자리가 마련되면 봉림대군도 함께 가자꾸나.”

또다시 귀찮은 일을 떠맡는 것 같아 싫었지만 이번에는 조선 백성들의 목숨이 달린 아주 중요한 문제였기에 도현은 내색하지 않고 바로 대답했다.

“예.”

다급한 사안인 걸 감안해 발 빠르게 움직인 박황은 다음 날 오후에 예친왕과 만나는 자리를 만들었다.

따각따각.

땅을 차는 말발굽 소리와 함께 덜컹거리는 마차의 흔들림에 몸을 맡기고 있던 소현세자는 맞은편에 앉은 도현을 향해 말을 걸었다.

“예친왕과 만날 약속을 잡는 것까지는 성공했지만, 그를 잘 설득할 수 있을지 모르겠구나.”

힘든 부탁을 하러 가는 길인지라 불안과 걱정이 교차하는 표정이었다.

“일단은 정중하게 말을 꺼내 보고, 안 되면 비장의 수를 써야지요.”

“비장의 수?”

“자세한 건 말씀 못 드립니다만 그를 움직이게 할 계책이 있으니 크게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러냐.”

한번 말을 꺼내면 절대 실패하는 법이 없는 동생인지라 소현세자의 얼굴이 살짝 밝아졌다.

그때 바깥에서 마부가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곧 있으면 왕부에 도착합니다!”

그 말에 도현이 마차 창에 드리워진 휘장을 살짝 걷어 올리자 앞으로 쭉 뻗은 대로 저편에 위풍당당한 자태를 뽐내고 있는 예친왕부가 눈에 들어왔다.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길게 이어진 높은 담벼락 안에는 수십 채에 달하는 전각과 별채가 있고 정원은 황궁의 후원과 비견될 정도로 넓어서 가끔가다 그 안에서 길을 잃는 사람도 있다는 소문까지 나돌았다.

지금의 황제가 직접 하사한 현판에는 사내다운 기개가 넘치는 필체로 ‘예친왕부’라 적혀 있었는데 그 역시 당대에 손꼽히는 명문가가 쓴 것이라 보는 사람마다 감탄을 금치 못했다.

문 앞을 지키고 있는 사병에게 일행의 신분을 밝히자 두 사람은 즉시 안쪽 객당으로 안내되었다.

손님을 맞이하는 장소답게 의자 하나에도 신경을 쓴 티가 역력했다. 속에 솜을 채워 넣은 뒤 비단을 덧대었고 또 그 위에 섬세한 문양이 수놓인 것이 고관대작의 집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호사스러웠다.

그러나 도자기나 접시 같은 자잘한 장식품 대신 넓은 초원에서 자유롭게 뛰노는 말의 무리를 표현한 그림을 걸어 놓은 것으로 보아 정작 주인의 성품은 남성스럽고 호방함이 은연중에 물씬 풍겨 났다.

“어서들 오시오.”

두 사람이 객당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바로 예친왕이 모습을 드러냈다.

자색 비단에 금색의 화려한 자수가 장식되어 있고 통이 넓은 예복을 입고 있었으나 육척장신의 장대한 기골을 가릴 수는 없었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방이 꽉 차는 느낌이 들 정도로 존재감이 대단한 예친왕을 보고 도현은 역시 그가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내가 조금 늦었군. 자, 앉으시게.”

“실례하겠습니다.”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한 두 사람은 옆에 마련된 의자에 나란히 앉았다.

시녀들이 차를 내오는 동안 도현은 조심스럽게 예친왕을 살펴보다가 마침 이쪽을 바라보던 그와 시선이 마주치고 말았다.

이목구비가 크고 선명해 그저 바라만 보고 있어도 노려보는 것 같다는 평을 자주 듣는 예친왕은 한순간 도현이 시선을 내리깔 줄 알았으나 의외로 덤덤하게 맞받아치자 속으로 흥미가 돋는 것을 느끼며 물었다.

“그래, 오늘 나를 찾아온 목적이 무엇이오?”

눈치 빠른 시녀들이 방을 나가자마자 느닷없이 본론부터 꺼내는 예친왕의 태도에 소현세자는 살짝 놀라면서도 이내 침착하게 대응했다.

“왕야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서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두 사람이 이렇게 내 집까지 온 걸 보니 아주 중요한 이야기인 모양이오.”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올리며 예친왕이 하는 말에 소현세자가 입을 열었다.

“내년 봄에 다시 산해관을 공략하신다고 들었습니다.”

“그렇소. 이번에야말로 만리장성을 넘어 북경으로 들어가 자금성에 우리 깃발을 꽂을 것이오.”

내심 속이 뒤틀렸지만 아쉬운 입장이었기에 소현세자는 자신 가득한 예친왕의 말에 맞장구를 쳐 주며 슬쩍 용건을 꺼냈다.

“왕야와 강맹한 청군이라면 분명 대업을 이루실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어제 황제 폐하께서 칙사를 보내 저희 조선에 병력 일만 명과 군량미 이십만 섬을 요구하셨는데 알고 계십니까?”

“물론이오. 황제 폐하의 군대와 함께 중원을 제패하는 길을 같이하게 됐으니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이오.”

“물론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연이은 전란과 지난번 지원군 파병으로 힘들어진 본국 사정상 황제께서 요구하신 걸 다 들어 드리기는 어렵습니다.”

그 순간 손에 든 찻잔을 내려놓은 예친왕이 정색하며 소현세자와 도현을 노려봤다.

“지금 황명을 거역하겠다는 것이오!”

“그런 것이 아니라 저희 사정을 고려해서 요구 조건을 조금 줄여 주셨으면 하고 부탁을 드리는 겁니다.”

“상황이 여의치 않은 것이 아니라 명을 공격하는 게 싫어서 이러는 거 아니오?”

예친왕 도르곤이 의심에 찬 시선을 보내자 소현세자는 양손을 내저으며 부정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정말 사정이 안 좋아서 이러는 겁니다.”

“정색하며 아니라고 하니 더 의심이 가는군.”

그냥 부탁을 들어주기 싫어서 꼬투리를 잡는 거지만 실제로 영원성 전투 이전에 조정 대신과 장수들이 명과의 전쟁을 회피하는 모습을 보였기에 소현세자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게 아니라…….”

노련하게 대화의 주도권을 틀어쥔 예친왕은 소현세자의 말을 중간에 끊고 차가운 어투로 이야기를 했다.

“아무튼 그 이야기는 내가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니 황제 폐하께 알현을 요청해서 직접 하시오.”

예상과 달리 상대가 부탁을 딱 잘라 거절하자 소현세자는 이제 어떻게 해야 되냐는 눈빛으로 옆에 있는 도현을 봤다.

그러자 지금까지 가만히 앉아 대화를 듣고만 있던 도현이 나서며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 왕야께서는 저희 조선을 보고 아우의 나라라고 하셨는데 그게 다 거짓이었습니까?”

도현의 말에 예친왕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말이오?”

“무릇 형제라고 하면 서로 힘든 일이 있으면 챙기고 보듬어 줘야 하는데 그게 아니고 이렇게 무리한 요구를 하시니 거짓이 아니고 뭡니까.”

“보, 봉림대군.”

기겁한 소현세자가 말까지 더듬으면서 예친왕의 눈치를 살폈지만 도현은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는 당당하게 이야기를 이었다.

“이처럼 동생의 어려움 하나 제대로 헤아리지 못한다면 어찌 대국이라 자처할 수 있고 중원 정복이라는 대업을 이루겠습니까?”

당돌한 것을 넘어서 자못 무례하기까지 한 도현의 발언에 예친왕은 눈에 띄게 인상을 찡그렸고 소현세자는 이제 부탁을 들어 달라고 설득하는 건 다 물 건너갔구나 하는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하지만 도현은 언제 터질지 모를 시한폭탄 같은 예친왕의 험악한 얼굴을 마주하고서도 전혀 거리낄 게 없다는 듯 홀짝홀짝 차만 마셔 댔다.

묵직한 침묵이 가라앉은 가운데, 자기가 어떻게든 나서서 상황을 수습해야겠다는 생각이 든 소현세자가 막 입을 열려는 순간 예친왕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하! 봉림대군의 배포가 크다는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제 보니 입담도 대단한 것 같소이다. 좋소. 내가 직접 폐하께 진언을 올리도록 하겠소.”

숨죽인 상태로 예친왕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던 소현세자의 얼굴이 활짝 펴지는 것과 동시에 도현이 고개 숙여 예를 표했다.

“감사합니다, 왕야.”

“그게 정말이십니까?”

믿기지 않는 듯 소현세자가 되묻자 예친왕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난 한 입으로 두말을 하지 않소이다.”

“이 은혜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이인자인 예친왕이 나서 준다면 이미 반은 해결된 것이나 다름없었기에 소현세자는 크게 기뻐했다.

다음 날 약속대로 황궁에 들어간 예친왕은 조선의 어려운 사정을 설명하고 요구 조건을 줄여 주자고 건의했다.

약간의 논쟁이 있었지만 황제는 아우인 예친왕의 말을 받아들여 병사는 삼천 그리고 군량미는 오만 섬만 가져오라는 지시를 내렸다.

여전히 부담스러웠지만 처음 요구한 걸 생각하면 이 정도는 충분히 감수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3권에서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