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권
새로운 시작
아침이라 하기에는 조금 늦은 시각, 무거운 몸을 억지로 일으킨 장씨 부인은 약간 초췌한 표정으로 머리를 매만지는 궁녀들의 시중을 받고 있었다.
원래 건강한 체질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병자처럼 마냥 연약한 몸도 아니었는데, 웬일인지 요즘 들어 계속 손발을 움직이기가 귀찮고 몸이 나른해서 상태가 별로 좋지 않았다.
“마님, 상 올리겠습니다.”
“그러게나.”
그다지 입맛이 없었기에 식사를 거를까 생각했지만 장씨 부인은 이내 마음을 고쳐먹고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나이가 지긋한 상궁 한 사람과 어린 궁녀 둘이 상을 들고 안으로 들어와 앞에 차려 놓았다.
“마님, 최근 계속 밥을 잘 못 드신다기에 오늘은 특별히 죽을 쑤어 왔습니다.”
그러면서 상궁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전복죽 그릇의 뚜껑을 열고 앞으로 내밀었다.
전에 아기를 잃은 이후로 방에 칩거하며 계속 침울해하고 있을 때도 식사를 거르는 일은 잦았지만 전복죽만큼은 매우 좋아해서 잘 먹었기 때문에 그때의 기억을 떠올려 일부러 신경을 써 준 것이다.
“그래? 어디 한번 먹어 볼까.”
장씨 부인은 그제야 조금 식욕이 도는 듯 숟가락을 들고 전복죽을 떠먹기 시작했다.
하지만 세 숟가락도 못 먹고 금방 얼굴을 찡그린 채 급히 고개를 돌리며 손을 입에 가져다 댔다.
“우욱……!”
“마님! 왜 그러십니까!”
순간적으로 깜짝 놀란 상궁이 급히 물었지만 장씨 부인은 속이 불편한 듯 아무 말도 못 하고 손만 내저었다.
“혹시 음식에 무슨 문제가 있는 건……?”
“설마…….”
갑작스러운 사태에 겁먹은 어린 궁녀가 울먹거리면서 그리 묻자 상궁은 그제야 퍼뜩 음식에 독이 들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떠올리고는 은수저를 들어 변색이 되는지 확인했다.
하지만 은수저의 색깔은 그대로였고,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조심스레 그릇에 남은 전복죽을 조금 떠서 맛을 봐도 별다른 이상은 느껴지지 않았다.
“후우, 속이 메슥거리는구나. 물 좀 다오.”
“네, 마님.”
찬물을 마시고 조금 진정한 장씨 부인이 자세를 고쳐 앉자, 상궁이 머리를 조아리면서 말했다.
“괜찮으시옵니까?”
“고개를 들게. 내 잠시 속이 불편하여 그랬던 것뿐이니 너무 소란 피우지 말게나.”
“다행입니다. 저는 혹시 음식에 독이 있을까 우려되어…….”
눈물을 글썽거리며 말을 잇지 못하는 상궁에게 장씨 부인은 씁쓸한 미소로 답했다.
“독은 무슨, 자네가 상을 들고 들어오기 전에도 항상 독이 있는지 없는지 그 은수저로 확인을 하지 않나.”
“그렇긴 하옵니다만…….”
“내가 요즘 몸이 허한 탓인지 음식 냄새만 맡아도 속이 울렁거리고 토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네. 전복죽이라면 좀 먹을 수 있을 줄 알았네만 아무래도 무리였던 모양이야.”
건강하지 못한 자신의 몸이 원망스러운지 작게 한탄하는 장씨 부인의 말에 상궁이 돌연 고개를 들고 말했다.
“그러고 보니 요 며칠 계속 기분이 안 좋다며 방에만 계셨지요?”
“그랬네.”
“기분이 좋았다 나빴다 하고 몸도 이유 없이 무겁고요.”
“아니, 자네가 그걸 어찌 다 아는가?”
속을 빤히 들여다본 것처럼 상궁이 말하자 장씨 부인은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마님, 혹시…… 아기씨를 잉태하신 건 아니십니까?”
“뭐라?”
뜻밖의 말에 장씨 부인이 말을 잇지 못하는데, 상궁이 재빨리 말을 이었다.
“마님이 보이신 증상들은 모두 아이를 임신한 사람의 것과 흡사하지 않습니까. 마님께서도 아기씨를 출산하신 경험이 있으니 잘 아실 것입니다.”
“설마…….”
그러고 보니 짚이는 데가 아주 없지는 않았다.
아기를 잃은 이후 도현과 잠시 동안 소원해지긴 했지만 요 근래엔 다시 신혼 시절로 돌아간 듯 아주 가깝게 지내지 않았던가.
게다가 몇 번이고 밤을 함께한 적도…….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장씨 부인은 볼이 빨갛게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마님, 틀림없습니다. 지금 당장 의원을 불러오지요.”
“아! 그, 그러게나.”
아직도 뭐가 뭔지 어리둥절한 표정을 하고 있는 장씨 부인을 뒤로하고 방을 나온 상궁은 날 듯한 발걸음으로 단숨에 뛰어가 별채에 따로 상주한 의원을 데려왔다.
“실례하겠습니다.”
오는 동안 이미 상궁에게 귀띔을 받은 의원은 장씨 부인의 손목에 얇은 비단을 하나 덮고 그 위에 손가락을 올렸다.
“음…….”
의원이 몇 번이고 위치를 바꿔 가며 신중하게 진맥을 하는 동안 숨죽이고 그 모습을 바라보던 장씨 부인은 마침내 그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급하게 물었다.
“어떤가?”
그러자 의원은 돌연 얼굴에 가득 미소를 머금더니 한 발짝 뒤로 물러나 크게 절을 올렸다.
“축하드립니다, 마님. 아기씨가 들어서셨습니다.”
“뭐! 그게 정말이냐?”
“네, 마님. 아직 임신 초기라 맥이 약해서 진찰하기가 좀 힘들긴 했습니다만, 확실합니다.”
“세상에! 마님, 경하드리옵니다.”
평소에는 의젓한 상궁마저 뛸 듯이 기뻐하며 눈물을 훔치자, 장씨 부인은 감격해 차마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아직 배도 부르지 않았는데 임신이라니.
“첫째 딸을 그렇게 떠나보내고 다시는 아이를 갖지 못할 줄 알았는데…….”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마님께선 아직 젊고 어여쁘신데요. 대군마마께서도 이 소식을 들으면 매우 기뻐하실 겁니다.”
“그래, 그렇겠지?”
“그럼요.”
“내 아이라…….”
장씨 부인은 무의식적으로 배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면서 남편인 도현의 얼굴을 떠올렸다.
“마님, 경사스러운 일인데 빨리 대군마마께 전해 드려야 하지 않을까요?”
상궁의 물음에 잠시 생각하던 장씨 부인이 말했다.
“그럼 자네가 직접 가서 말씀드리게나. 너무 소란 피우지는 말고.”
“예.”
남아 있는 다른 두 궁녀에게 장씨 부인의 수발을 맡긴 상궁은 날아갈 듯 가벼운 발걸음으로 도현이 있는 곳을 찾았다.
한편 이 소식을 전혀 모르고 있는 도현은 평상시처럼 새벽같이 일어나 가볍게 몸을 풀고 수련장에서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웃통을 벗고 잠시 숨을 고르고 있자니 저 멀리서 종종걸음으로 다가오는 상궁이 보여 도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른 데면 몰라도 거친 사내들이 주로 머무는 수련장은 궁녀들이 좀처럼 얼씬거리지 않는 곳인데 어쩐 일인가 싶었다.
“대군마마, 마님께서…….”
장씨 부인의 이름이 튀어나오자 수건으로 땀을 닦고 있던 도현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부인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겼느냐?”
그러자 상궁은 깜짝 놀란 표정을 짓더니 이내 호호 의미 모를 웃음을 지었다.
“아니요, 그게 아니라……. 축하드리옵니다. 마님께서 회임하셨습니다.”
“뭐…….”
진지한 얼굴로 상궁의 말을 듣고 있던 도현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소식에, 손에 들고 있던 수건을 떨어뜨린 것도 깨닫지 못하고 멍하니 입을 벌렸다.
“회, 회임이라니. 아기가 생겼단 말인가!”
“네에, 그렇사옵니다.”
상궁이 고개를 숙이며 끄덕이자마자 도현은 얼굴에 활짝 미소 짓고는 장씨 부인의 처소로 달려가려고 했다.
“마, 마마! 옷은 입고 가셔야죠.”
“아차.”
당황하는 상궁의 목소리에 이미 수련장 입구까지 갔던 도현은 우뚝 멈춰 서서는 허둥지둥 돌아와 서둘러 옷을 챙겨 입었다.
“칠현아! 빨리빨리 이것 좀 묶어 봐라.”
“움직이지 마세요, 마마. 계속 풀어지지 않습니까!”
얼마나 마음이 급한지 계속 재촉하면서 괜히 애꿎은 타박만 맞은 칠현이 뭐라 구시렁대긴 했지만, 지금 거기에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마침내 금방 옷을 갈아입고 장씨 부인의 처소까지 달려온 도현은 궁녀들이 장지문을 열어 주는 것도 기다리지 못하고 바로 성큼성큼 방 안으로 들어섰다.
“부인!”
“오, 오셨어요.”
도현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내심 긴장하고 있던 장씨 부인은 급하게 달려오느라 숨을 허덕거리는 모습을 보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왜 그러십니까? 어머, 이렇게 땀까지 흘리시고…….”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소.”
도현은 손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닦아 주려는 장씨 부인의 손목을 탁 붙잡고 물었다.
“부인이 회임했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그게 정말이오?”
그러자 장씨 부인은 자기 입으로 직접 말하기가 부끄러운지 조금 망설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까 의원이 다녀갔는데 확실하답니다.”
그 순간 도현은 장씨 부인의 몸을 번쩍 안아 들고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하! 그래, 진짜란 말이지!”
도현은 시중들고 있던 궁녀와 내관들이 놀란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몇 번이나 장씨 부인을 끌어안고 볼에 입맞춤을 했다.
“고맙소, 정말 고마워. 세상에, 아기라니!”
“그, 그렇게 좋으세요?”
“당연하지. 너무 기뻐서 웃음이 멈추지를 않는구려.”
몇 년을 같이 살았지만 이렇게 기뻐하는 도현의 모습은 처음인지라 장씨 부인은 약간 어리둥절하면서도 슬며시 흘러나오는 미소를 감출 수 없었다.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간다는 소리가 있듯 그날 점심때는 이미 장씨 부인의 회임 소식이 돌고 돌아 소현세자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정말 경사스러운 일이로구나. 네가 올해 복이 많은가 보구나. 한동안 소식이 없던 아이까지 덜컥 들어서고 말이야.”
“하하, 감사합니다.”
소현세자의 진심 어린 축하를 듣고 도현은 쑥스럽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부부 관계를 하면서 아기가 생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데, 막상 일이 닥치고 보니 하늘 위를 나는 듯 마냥 기분이 좋기만 했다.
이제야 진짜로, 자신이 이 세계에서 봉림대군이라는 이름의 인간으로서 제대로 뿌리를 내리게 된 것만 같았다.
“네 부인에게도 잘된 일이지. 배 속에 아이를 가지게 되었으니 그간 마음에 응어리져 있던 것도 풀리지 않겠느냐.”
“네. 저도 그리 생각합니다.”
연약한 여인의 몸으로 심양까지 가는 긴 여정 하나만도 견디기 벅찬데 어린 딸마저 세상을 떠났으니 그때 장씨 부인의 상태는 그야말로 말이 아니었다.
항상 기운 없는 표정으로 축 늘어져선 딸이 몸에 지니고 있던 장신구만 하루 종일 쓰다듬던 장씨 부인의 모습이 아직도 기억 속에 남아 있었기에 소현세자는 마치 자기 일처럼 기뻐해 주었다.
“아침에 잠깐 얼굴 보고 왔는데 표정이 많이 밝아졌더군요.”
“그렇겠지. 참, 관저에 머무르고 있는 의원에게는 내가 벌써 일러두었으니 걱정하지 마라. 상에 올리는 음식 역시 각별히 몸에 좋은 것으로만 준비하라고 말해 두었다.”
“형님께서 그렇게 신경 써 주시다니……. 감사합니다.”
“뭘, 당연한 걸 가지고.”
기분 좋게 대꾸한 소현세자는 차가 식겠다며 얼른 들라고 손을 내저었다.
점심때가 지난 제물포 포구는 새벽 일찍 바다에 나갔다가 선창 가득 고기를 싣고 돌아온 배들로 붐볐다.
바닷가 특유의 짠내와 비린내가 코끝을 자극하는 가운데 굶주린 배를 채우려고 한 떼의 갈매기들이 어선 주위에 내려앉았다가 어부가 기다란 장대를 휘두르자 푸드덕 날갯짓을 하며 하늘로 날아올랐다.
수도인 한양으로 들어가는 관문답게 어선 말고도 덩치 큰 조운선(남부 지방에서 세금으로 거둬들인 곡식을 운반하는 배)과 무역선도 심심치 않게 눈에 띄었다.
그중 한 척에서 눈에 익은 사람이 일행들과 함께 땅에 내렸다.
중인中人들이 쓰는 챙이 좁은 갓에 두툼하게 솜을 넣은 두루마기를 걸친 장 총관은 크게 숨을 들이쉬며 감격한 얼굴로 말했다.
“고국에 돌아와서 그런지 공기부터 다른 것 같군.”
“저도 그렇습니다.”
고개를 돌린 장 총관은 옆에 있던 서상수 행수를 보며 물었다.
“자네도 병자호란 때 잡혔다고 했지?”
“네.”
“가족들은 어떻게 됐나?”
서 행수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난리 통에 헤어지고 아직 소식을 모릅니다.”
“이런, 내가 실수를 했군.”
“아닙니다. 저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다 겪은 아픔인데요. 그래도 대군마마 덕분에 이렇게 자유의 몸이 되어 상단에서 일까지 할 수 있게 됐으니 언젠가는 가족들을 다시 만나겠지요.”
노예로 끌려올 당시 아내와 열 살짜리 아들을 잃은 장 총관은 서 행수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어깨를 부드럽게 두드려 줬다.
“그래, 꼭 좋은 날이 올 걸세.”
“감사합니다.”
“그건 그렇고, 이제 여기서 다시 한강을 타고 조금만 더 내륙으로 들어가면 한양에 도착하니까 마지막까지 사고 나지 않도록 선원들 관리를 잘하게.”
“알겠습니다, 총관 어른.”
그렇게 대화를 나누며 관청을 찾아간 장 총관은 책임자에게 도현이 적어 준 편지를 보여 줬다.
친필로 직접 쓴 편지에는 장 총관과 일행의 신분을 보장하고 교역을 하는 데 도움을 주길 부탁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는데 마지막에 도현과 소현세자의 수결(서명)이 있었다.
도현 혼자였다면 약발이 약했을지 몰라도 차기 국왕인 소현세자의 수결을 본 관리는 거만하던 태도가 싹 사라지고 최대한 편의를 봐줬다.
장 총관이 심양을 떠나 이곳에 온 이유는 후궁 조씨의 행동에 경각심이 생긴 도현의 지시를 받아 조선 내부 사정을 파악할 지부를 설립하기 위해서였다.
관리의 도움을 받아 호패(조선시대 신분증)와 교역 허가증까지 받은 장 총관은 다음 날 제물포를 떠나 한강을 거슬러 올라갔다.
마포 나루에 도착해서 가져온 짐을 내린 장 총관은 도성 안에 지부로 쓸 작은 기와집과 가게 그리고 창고를 차례로 매입했다.
가게는 사람이 구름처럼 많이 몰려든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한양에서도 가장 번화한 곳인 운종가雲從街에 냈다.
판매하는 물건은 비단이나 보석, 고급 벼루 같은 사치품들이었다. 모두 해적들한테 빼앗은 것들로, 정보도 수집하고 더불어 장물도 처리하는 그야말로 꿩 먹고 알 먹고, 도랑 치고 가재 잡는 일이었다.
고급스러운 옷차림의 중년 부인이 하녀 두 명을 거느리고 가게 안으로 들어오자 점원이 재빨리 옆으로 다가왔다.
“어서 오십시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없더니 새로 가게를 열었나 보군.”
“예. 이틀 전에 장사를 시작했습니다.”
“흐음.”
부인은 흥미롭다는 듯 가게를 둘러보더니 앞쪽에 놓인 비교적 싼 물건은 쳐다보지도 않고 제일 안쪽 벽에 장식용으로 걸어 둔 비단에 눈길을 주었다.
“이게 맘에 드는군.”
“예? 아! 손님, 죄송하지만 이건 파는 게 아니라서…….”
중년 부인이 가리킨 비단을 본 점원은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해적들의 보물 창고에서 가져온 비단들은 모두 상급품이었지만, 이건 그중에서도 최상급으로 분류될 만큼 품질이 좋아서 가격이 엄청 높게 책정되었다. 그래서 손님에게 팔기보다는 눈길을 끄는 용으로 전시해 놓았던 것이다.
“파는 게 아니야? 그럼 왜 가게에 내놓은 겐가.”
“저, 그게…….”
“주인장을 불러오게. 내 그 사람하고 말을 해야겠어.”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만만치 않아 보이는 성격의 중년 부인이 단호하게 말하자 점원은 어쩔 수 없이 안으로 달려 들어가 점장을 불러왔다.
“제가 여기 점장입니다만 이 비단을 사려고 하신다고요?”
“그러네.”
이미 점원에게 자초지종을 들은 점장은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머릿속으로 재빨리 주판알을 튕겼다.
지금까지 간혹 비단을 사려고 문의하는 손님이 있긴 했지만 일단 가격을 듣고 나면 다들 너무 비싸다며 한발 물러서곤 했다.
이 부인도 꽤 돈은 있어 보이지만…… 과연 어떨까.
속으로 생각한 점장은 헤실거리는 웃음을 얼굴에 띠고 말했다.
“물론 가게에 내놓은 물건인 만큼 가격만 맞으면 팔 수 있지요.”
“처음 보는 순간 내 마음에 쏙 들었으니 반드시 가져가야겠네. 그래서 가격이 얼마인가?”
“한 필에 백 냥입니다.”
“백 냥?”
생각보다 더 비싼 금액에 중년 부인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백 냥이라면 일반 사 인 가족이 반년은 족히 호의호식하며 살 수 있다.
그런데 고작해야 비단 한 필에 백 냥이라니, 아무리 최상급품이라 해도 과도하게 비싼 금액인 것은 사실이었다.
“호오, 꽤 비싸군.”
“예. 그래서 사겠다는 손님이 몇 분 계셨지만 아직도 팔리지 않고 있는 게죠. 창고에 그냥 넣어 두기도 뭐하니 이렇게 전시용으로 걸어 놓는 거랍니다.”
짐짓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점장이 말했다.
이쯤 해서 이야기를 마무리 지을까 생각하고 있는데 중년 부인이 불쑥 말을 내뱉었다.
“좋아. 내가 사지.”
“아, 예 그러십……. 네에?”
이번에 놀란 것은 점장 쪽이었다.
“사, 사시겠다고요?”
“그러네. 한번 말을 꺼낸 이상 물릴 수는 없지. 이래 봬도 그렇게 쪼잔한 사람은 아니라네.”
흥! 코웃음을 치며 중년 부인은 하녀에게 손짓을 했다.
“배달할 장소는 이 아이가 가르쳐 줄 걸세. 아무리 나라고 해도 그렇게 큰돈을 매일 들고 다니는 건 아니니, 비단을 가져오면 준비하고 있다가 대금을 치러 주겠네.”
그렇게 말한 중년 부인은 치맛자락을 휘날리며 가게를 나갔다.
“허어…….”
뜻밖의 사태에 떡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는데, 남겨진 하녀가 새침하게 말을 걸었다.
“저기요, 계속 그렇게 서 계실 건가요?”
“어? 아아, 미안하네.”
점원에게 비단을 상자에 넣어 고이 포장하라는 지시를 내린 점장은 은근슬쩍 하녀에게 물었다.
“대체 자네가 모시는 주인은 어느 고관댁 마나님이신가? 백 냥이란 거금을 한 번에 쓰시다니, 깜짝 놀랐네그려.”
“훗, 운 좋은 줄 아세요. 우리 마님이 여기서 물건을 사셨으니 앞으로 소문이 쫙 퍼져서 손님이 많이 늘어날걸요.”
“마님의 영향력이 그렇게 강한가?”
“그럼요. 지난겨울엔 우리 마님께서 모란꽃 자수 무늬를 끝단에 새긴 치마를 입고 나가셨는데, 그해 한양에 있는 사대부집 마나님들이나 아가씨들께서 모두 다 따라 하는 바람에 모란꽃이라면 지긋지긋하다며 진저리를 치는 어르신들까지 생겨났을 정도인걸요.”
자랑스럽게 가슴을 펴고 얘기하는 걸 보니 없는 일을 지어내는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한번 입이 트인 하녀를 슬슬 구슬려서 마님이 지체 높은 사대부집 출신이고, 주인어른은 한양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거부라는 정보까지 빼낸 점장은 대어를 잡았다는 생각에 좋아서 팔짝팔짝 뛰었다.
실제로 그 이후, 하녀의 말대로 한양 안에 입소문이 쫙 퍼졌는지 한동안 가게 문턱을 넘는 부유한 집 마님들의 행렬이 끊이질 않았다.
게다가 명나라 사치품은 사대부와 일부 부유한 중인 계층을 중심으로 원하는 사람은 아주 많았으나 청이 길을 막고 있어서 구하기 힘들었기 때문에 이런 물건들을 많이 그것도 상급의 품질로만 구비해 놓고 있다는 얘기가 돌면서 여자들뿐 아니라 남자들까지 일부러 찾아오기에 이르렀다.
물론 그만한 재력을 가지고 있는 손님들은 소수에 불과했기 때문에 다른 가게처럼 매일 손님들이 붐비지는 않았지만 워낙 비싼 물건만 팔다 보니까 하루에 한두 명만 와서 구입을 해도 그날 하루 매상을 올리는 건 쉬운 일이었다. 말 그대로 창고에 있는 물건을 꺼내 놓기 무섭게 모두 팔려 나갔다.
그동안 판매된 물건 내역을 천천히 훑어본 장 총관은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전표를 내려놨다.
“이거 잘못하면 물건이 모자랄 수도 있겠군.”
“생각보다 사치품에 대한 수요가 큰 것 같습니다. 그동안 상품이 제대로 공급되지 않았던 것에 대한 일시적인 현상일 수도 있지만 어찌 됐든 빨리 물건을 들여와야겠습니다.”
앞에 앉은 서 행수의 말에 장 총관은 머리를 끄덕였다.
“물건이 없어서 가게 문을 닫는 일이 벌어지면 안 되니 내가 돌아가자마자 다시 배를 보내도록 하겠네.”
“이왕이면 넉넉하게 보내 주십시오.”
“그러지. 세 척 정도 분량이면 되겠나?”
“예.”
그동안 이리저리 처분을 했지만 아직도 웅도 창고에 해적들한테 빼앗은 노획품이 한가득 쌓여 있었기에 물품을 공급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봉황상단은 어느 국가의 간섭도 받지 않고 자유로운 해상 교역이 가능하여 만약 웅도에 있는 노획품이 떨어지면 명나라에 가서 필요한 물품을 가지고 올 수도 있었다.
이야기를 나누던 장 총관이 갑자기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물건이 잘 팔려서 좋기는 하지만 아직 청국에는 몸값이 없어 지옥 같은 노예 생활을 하고 있는 백성들이 무수히 많은데 소위 지도층이라는 작자들이 그런 건 관심도 없고 이따위 사치품을 구입하는 데 물 쓰듯 돈을 내다니 참 답답하고 화가 나는군.”
“그렇지요.”
“이런 걸 보면 봉림대군께서 정말 대단하시지 않나.”
“맞습니다. 왕족이면서도 저희 같은 아랫것들과 쉽게 어울리실 정도로 소탈하시고 청국에 끌려간 백성들을 구해 내기 위해서 이렇게 상단까지 만들어 노력하시다니 그런 분이 없습니다.”
“그래.”
서 행수의 말에 장 총관도 같은 생각이라는 듯 크게 머리를 끄덕였다.
처음에는 몰랐지만 상단 일을 맡아 하면서 장 총관을 비롯한 간부들은 소현세자가 아니라 도현이 모든 걸 주도적으로 이끌어 가고 실질적인 주인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대군마마께 은혜를 갚기 위해서라도 지부가 빨리 자리 잡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될 게야.”
“물론입니다.”
“그렇다고 너무 세게 나가지는 말고. 나중엔 몰라도 아직은 기존 상인들과 마찰을 일으켜서 좋을 것이 없어. 알겠지?”
“예.”
한양 상권을 장악하고 있는 기존 육의전 상인들의 눈 밖에 나면 자리를 잡는 것 자체가 어려워질 수도 있기에 이런 충고를 하는 것이다.
물론 육의전 상인을 두려워하는 건 아니었지만 다른 데 신경 쓸 일이 많은데 괜한 분란이 일어난다면 골치가 아프기에 일단은 어느 정도 거리를 두려는 생각이었다.
서 행수도 공납을 독점하며 관청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는 육의전 상인들의 힘을 알기에 별다른 말 없이 수긍했다.
“그럼 자네만 믿겠네.”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목에 힘을 주고 자신에 찬 얼굴로 대답하는 서 행수를 보며 장 총관은 살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다음 날 장 총관은 배를 타고 웅도를 거쳐 심양으로 돌아갔고 한양에 남은 서 행수는 지부를 안착시키고 정보망을 구성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도현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압록강 근처에 위치한 의주에도 거점을 만들어 한양과 심양을 연결했다.
여기도 만상灣商이라는 큰 상인 세력이 존재하지만 임경업 장군의 입김이 미치는 곳이라 한양보다는 쉽게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한편 조선 조정은 청국 황제가 요구한 병사와 군량미를 준비하느라 크게 애를 먹고 있었다.
탕!
“필요한 수량을 다 채울 수가 없다니, 그게 무슨 소리요!”
앞에 놓인 서탁을 손바닥으로 세게 내려치며 인조가 언성을 높이자 호조판서인 이명李溟이 머리를 숙이며 말했다.
“이미 한차례 지원군을 보낸다고 군량미를 많이 소모한 데다 작년에 흉작이 들어 제대로 세곡이 걷히지 않아 창고에 보관된 양이 육만 섬밖에 안 됩니다. 여기서 국가를 운영하는 데 필요한 경비를 제하면 여유분은 오천 섬뿐입니다.”
“허어.”
거듭된 전란과 흉년 그리고 청국의 조공 요구에 재정이 안 좋다는 건 짐작하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심각할지는 몰랐기에 인조는 낮게 침음성을 흘렸다.
대전에 모여 있던 다른 대신들도 인조와 마찬가지로 크게 충격을 받은 얼굴로 술렁거렸다.
“오천 섬이라니……. 저쪽에서 요구한 것은 오만 섬인데 턱도 없이 부족한 양이 아닙니까?”
“지금 그게 문제요! 이 상태라면 올해 또다시 흉년이라도 들었다가는 국정을 제대로 이끌어 가지 못할 정도로 재정이 무너질 수도 있소.”
호조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대신의 질책에 처음 말을 꺼냈던 사람은 찔끔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도대체 어쩌다가 나라가 이 꼴이 됐는지…….”
한탄 어린 인조의 말에 재정을 맡고 있는 호조의 책임자인 이명이 다시 한 번 머리를 숙이며 죄를 청했다.
“면목이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이 호조판서인 저의 잘못이니 벌을 내려 주십시오.”
다른 신하들 같았으면 당장 불호령이 떨어지며 책임 추궁을 했겠지만, 이명은 선왕 때부터 벼슬을 하며 능력이 뛰어날 뿐 아니라 인조의 측근으로 온갖 궂은일을 성실히 수행했기에 국왕의 신임이 두터웠다.
오죽했으면 작년에 칠십일 세가 되자 고령을 이유로 조정에서 물러나려고 했지만 극구 만류하고는 정헌대부正憲大夫라는 칭호와 함께 사저에서 업무를 볼 수 있는 특혜를 내릴 정도로 그를 총애했다.
“어찌 경 혼자만의 잘못이라고 할 수 있겠소. 그것보다 당장 청에 보낼 군량미를 마련할 방법이 없으니 이를 어쨌으면 좋겠소?”
“전하, 현재 우리의 재정 상태로는 도저히 청의 요구를 들어줄 방도가 없으니 심양에 사신을 보내 처한 상황을 이야기하고 이번에는 출정에서 제외시켜 달라고 하는 것이 유일한 해결책 같습니다.”
“그렇게 하시옵소서.”
안 그래도 상국인 명나라를 치기 위해 출정하는 걸 탐탁지 않게 여기던 대부분의 대신들은 전쟁에서 빠질 좋은 명분이라고 생각했는지 이구동성으로 청 황제에게 사신을 보낼 것을 건의했다.
인조도 자꾸 명과 청의 전쟁에 휩쓸리는 것이 썩 내키지 않았기에 솔깃한 모습을 보였다.
그때 한쪽에 앉아 있던 김자점金自點이 끼어들며 반대 의견을 냈다.
“이미 심양에 계시는 세자 저하께서 청국 조정과 협상을 해서 한차례 요구 조건을 낮췄는데 또다시 못하겠다고 이야기하면 오히려 역효과가 날 것입니다, 전하.”
인조의 총애를 받는 신하였지만 절개를 지키고 병자호란 때 병사를 끌고 와 결사 항전을 주장했던 이명과 달리 김자점은 서북쪽을 방어하는 도원수로서 청군을 저지할 막중한 책임이 있는데도 전투를 회피했고 후에는 대표적인 친청인사가 된 전형적인 기회주의자였다.
이런 이유로 가뜩이나 아니꼽게 여기는 김자점이 사신 파견을 반대하자 친명파가 대다수인 대신들은 날을 세웠다.
“그럼 병판은 어떻게 하자는 거요?”
경쟁 관계에 있는 우의정 심기원沈器遠의 퉁명스러운 물음에 김자점은 태연한 얼굴로 앞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병법에도 한창 기세를 올리는 적은 건드리지 말라고 했습니다. 지금 청이 바로 그런 때이니 어려운 상황이지만 요구한 걸 그냥 들어주는 것이 나을 겁니다.”
“나라 살림이 거덜 날 판인데 무작정 퍼 주자는 말이오!”
대신 중 한 명이 노한 목소리로 따지듯 말하자 김자점도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
“사신을 보낸다고 해서 청국이 사정을 봐줄 거라는 보장이 있소이까? 괜히 상대의 심기만 거스르는 꼴이 될 거요.”
“그건…….”
금방 대꾸를 못 하고 우물거리는 상대에게서 시선을 돌린 김자점은 왕좌에 앉아 있는 인조를 보며 말을 이었다.
“전하, 저라고 국고가 바닥나고 힘들게 키운 병사들이 청군의 화살받이가 되는 게 달갑겠습니까? 하지만 병자년의 치욕이 반복돼 강토가 유린되고 종묘사직이 위태로워지는 걸 막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사옵니다.”
진정 나라를 걱정하는 충신이라도 되는 양 김자점이 열변을 토하자 대전에 모여 있던 대신들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눈가를 찡그렸다.
그런 가운데 청에 대한 두려움이 컸던 인조는 김자점의 이야기에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중원 정복이라는 대업을 앞두고 있는데 청 황제가 절호의 기회를 버리고 우릴 공격하려고 할까?”
“그래서 더 위험한 겁니다.”
“……?”
“큰일을 벌이는데 뒤가 불안하면 되겠습니까. 아마 조금이라도 낌새가 이상하면 산해관을 넘기 전에 우리부터 정리하려고 들 겁니다. 지난 병자호란도 따지고 보면 명나라와 싸우기 전에 후방을 안정시키기 위해 쳐들어온 것 아니겠습니까?”
다른 이유도 있지만 청 황제인 홍타이지가 수십만 대군을 일으킨 가장 핵심은 김자점이 말한 것이기에 인조는 무겁게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지.”
사실 청나라 입장에서 조선은 자신의 등 뒤에 있는 날카로운 비수나 마찬가지였다. 명나라와 한창 싸우고 있을 때 갑자기 후방을 공격해 온다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 아무리 청군이 강하다고 해도 앞뒤로 끼여 명과 조선군의 협공을 받는 건 절대 피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홍타이지가 본격적인 중원 공략에 나서기 전 미리 후방을 정리해 두는 의미로 조선을 친 것이다.
하지만 그 빈틈을 노리고 명나라가 쳐들어올까 봐 홍타이지는 조선을 완전히 정복하지 않고 남한산성에서 인조의 항복을 받는 걸로 만족하고는 급히 군대를 회군시켜야만 했다.
손가락으로 팔걸이를 툭툭 두드리며 고심을 거듭하던 인조는 이내 어떻게 할지 결정을 내렸는지 머리를 들며 말했다.
“병판의 말대로 이미 한차례 세자가 요구 조건을 낮췄는데 또다시 사신을 보내는 건 괜히 양국 간에 분란을 만들 수도 있고 시간도 촉박하니 이번에는 어렵더라도 원하는 대로 해 주도록 합시다.”
“요구를 들어주고 싶어도 쌀이 없습니다.”
이명의 말에 인조는 약간 짜증 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창고가 비었다고 한탄만 할 게 아니라 특별 세금이라도 한시적으로 거둬 어떻게든 수량을 채워야 될 것 아니오!”
“가뜩이나 춘궁기라 백성들의 생활이 팍팍한데 곡식을 오만 섬이나 내라고 하면 반발이 클 것이옵니다.”
이번에는 우의정 심기정이 반대 의견을 내자 인조는 손바닥으로 팔걸이를 세게 내려치고는 호통쳤다.
“이것도 안 되고 저것도 안 되면 나보고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거요! 세금을 걷든지 아니면 경들의 곳간에 쌓아 둔 곡식을 내오든지 무조건 다음 달까지 수량을 다 채워서 심양으로 보내시오!”
얼굴을 찡그리며 화를 쏟아 낸 인조는 더는 앉아 있기 싫다는 듯 왕좌에서 일어나 대전을 나가 버렸다.
그러자 대신들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밖으로 나가는 인조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졸지에 문제를 떠안게 된 대신들은 오후 늦게까지 머리를 싸매고 갑론을박을 벌였다.
그렇지만 아무리 이야기를 나눠도 명쾌한 해결책이 나오지 않자 인조가 말했던 것처럼 특별 세금을 거둬 부족한 부분을 충당하기로 했다.
대신들도 조금씩 자발적으로 쌀을 내놓기로 했지만 이건 말 그대로 일부분에 불과했고 결국 모든 부담을 힘없는 백성들에게 떠넘기겠다는 것이다.
조정의 결정에 따라 곡식을 거둬들이기 시작하자 가뜩이나 춘궁기에 하루 한 끼도 제대로 못 먹고 있던 백성들은 그나마 있는 것마저 빼앗기고 이제는 밥 먹는 날보다 굶을 때가 더 많아졌다.
이러자 자연스럽게 국왕인 인조에 대한 원성이 더 커졌고 굶어 죽지 않기 위해 정든 고향을 버리고 산으로 들어가는 유민들이 급속히 늘어났다.
한편 영원성이 함락되고 산해관이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아직 친명배금親明排金(명나라와 가깝게 지내고 금(청)나라를 배척한다는 것) 사상을 버리지 못한 대부분의 대신들은 명을 치려는 청국을 돕는 걸 탐탁지 않게 여겼다.
“지난 병자년의 치욕이 아직도 머릿속에 생생히 남아 있는데 복수는 못 할망정 오랑캐들의 요구에 병사와 군량미를 바쳐야 한다니 정말 개탄스럽기 그지없습니다.”
젊은 관리가 분한 듯 주먹을 꽉 움켜쥐며 하는 말에 척화파의 일원으로 대사헌 벼슬에 있는 이명한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나도 마찬가지일세. 하지만 주상 전하께서 요구를 들어주기로 결정하셨고 관계가 악화되면 당장 심양에 계신 세자 저하와 봉림대군마마의 안위가 위협받게 되니 어쩔 수 없지 않나.”
소현세자와 도현의 이름을 거론하자 모여 있던 관리들은 하나같이 이맛살을 찡그리며 낮게 앓는 소리를 내뱉었다.
“끄으응…….”
왕위 계승 서열 일, 이 위의 왕족이 상대편에 볼모로 잡혀 있다는 건 그만큼 여러 가지로 조선의 선택권을 제약하는 요소로 작용했는데 바로 이런 점을 노리고 청 황제가 둘을 강제로 데려간 것이다.
“지금도 이렇게 무리한 요구를 해 대는데 정말 명을 무너뜨리기라도 한다면 그때는 어떨지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어떻게든 막아야지.”
“무슨 묘책이라도 있으십니까?”
그러자 정색하며 주위를 둘러본 이명한은 혹시 누가 엿들을까 봐 목소리까지 살짝 낮추고는 이야기했다.
“지금부터 하는 말은 절대 외부로 새어 나가서는 안 되네.”
“염려 마십시오.”
“실은 며칠 전에 북경으로 은밀히 사람을 보내 청이 오월에 군사를 일으키려 한다는 걸 알렸다네.”
“그게 정말입니까!”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뜬 관리들을 보며 이명한은 크게 머리를 끄덕였다.
“사실이네.”
“잘하셨습니다.”
“임진왜란 때 명이 우릴 도와준 걸 생각하면 당연히 알려줘야지요. 큰일을 하셨습니다.”
관리들이 이야기하는 걸 들으며 이명한은 차분히 입을 열었다.
“그렇게들 알고 이미 결정된 일을 계속 왈가왈부하면 주상 전하의 심기를 건드릴 수도 있으니 당분간은 자중들 하게.”
“알겠습니다.”
이명한은 젊고 혈기 왕성한 관리들이 행여나 사고를 치지 않도록 잘 다독이고는 자리를 정리했다.
입단속을 시켰지만 척화파끼리 모여 술자리를 하며 울분을 토하는 과정에서 소문이 조금씩 퍼져 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임경업 장군의 귀에도 이러한 이야기가 흘러들어 갔고 바로 비선을 통해 도현한테 사실을 알렸다.
장 총관이 건네준 쪽지를 꼼꼼히 읽어 본 도현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게 사실이야?”
“예. 의주에 설치한 지부를 통해 임경업 장군이 직접 보낸 겁니다.”
“젠장!”
척화파 내에서도 상당한 위치에 있는 임경업 장군이 비선까지 써 가며 급히 알려 줄 정도라면 사실일 가능성이 아주 컸기에 도현은 자기도 모르게 욕설이 튀어나왔다.
“이걸 청이 알기라도 하면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이딴 짓을 벌인 거야. 고리타분한 사대주의에 빠져 국제 정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나라를 위기에 빠뜨리다니, 어리석은 사람들 같으니라고…….”
“이제 어쩌지요?”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장 총관의 물음에 잠시 쪽지를 보던 도현은 이내 한쪽에 놔둔 화로에 그걸 집어넣었다.
화르륵.
불이 붙은 쪽지가 순식간에 시커먼 재로 변해 버렸다.
“그냥 놔둬.”
“에?”
“이미 명나라에 밀서가 전해졌을 테고 우리한테 소문을 완전히 차단할 능력도 없는데 뭘 어쩌겠어.”
“그렇군요.”
현실적으로 지금 역량을 가지고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기에 장 총관은 수긍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 문제는 당분간 제쳐 두고, 웅도에 있는 호위대의 훈련은 다 끝났어?”
“네. 지난겨울 내내 입에서 단내가 날 정도로 굴려 당장 전투에 투입해도 될 정도로 단련시켰습니다.”
시선을 받은 박영식이 씨익 한쪽 입꼬리를 위로 올리면서 대답하는 것이 안 봐도 얼마나 혹독한 훈련을 받았을지 짐작이 됐다.
“수고들이 많았겠군.”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는 노예로 지내는 것보다 낫지요.”
“전문적인 기술이 필요한 포수는 훈련시키기 어려웠을 텐데 빨리 끝났군.”
“임경업 장군이 본국으로 철수하며 궁병과 포수 서른 명을 남겨 두고 가서 큰 도움이 됐습니다.”
“아 참, 그랬지.”
호위대 대부분이 병사 출신이라 빨리 적응하기도 했지만 임경업이 자발적 지원자를 받아서 남겨 둔 인원들 덕분에 훈련 기간을 단축시킬 수 있었다.
“앞으로 상단이 뻗어 나가는 데 큰 힘이 될 이들이니까 대우를 확실히 해 주도록 해.”
“예.”
“다음 달에 새로운 판옥선과 화포를 넘겨받기로 돼 있지?”
“그렇지 않아도 보고를 드리려고 했는데 그 일 때문에 제가 호위대 삼백 명과 함께 사흘 뒤 황해도로 가 봐야 될 것 같습니다.”
“이거 한양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또다시 먼 길을 다녀와야 한다니 자네한테 미안하군.”
“아닙니다. 오히려 이렇게 일을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행복합니다.”
“그렇게 말해 주니 고맙네.”
도현은 신뢰가 가득 담긴 시선으로 앞에 있는 장 총관을 바라봤다.
며칠 뒤 도현한테 이야기했던 대로 장 총관은 호위대와 함께 바다를 건너 황해도 몽금포夢金浦에 도착했다.
몽금포는 장산곶長山串 동북부 해안가에 위치한 포구로, 예전부터 수군 병영과 만호 벼슬의 무장이 배치될 만큼 군사상 요지였다.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장 총관 일행은 일반 포구가 아닌 군영 선착장에 배를 댔다.
하얀 모래가 그림처럼 아름답게 펼쳐진 해안에 내린 장 총관이 잠시 감탄한 얼굴로 주변 경치를 둘러보고 있을 때 일단의 무리가 가까이 다가왔다.
경계의 눈빛을 보내던 장 총관은 이내 익숙한 얼굴을 발견하고는 황급히 허리를 숙여 먼저 인사했다.
“장군님.”
그러자 제일 앞에 서 있던 중년 무장이 미소 지은 얼굴로 알은척을 했다.
“장 총관, 오랜만이군. 그간 무탈했나?”
“예. 염려해 주신 덕분에 잘 지냈습니다. 장군님께서는 평안하셨습니까?”
“나야 뭐 언제나 똑같지.”
“지난번 전쟁에서 세우신 전공을 인정받아 많은 상금을 하사받으시고 평안병사에 임명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늦었지만 감축드립니다.”
“고맙네. 이거 별로 한 것도 없이 나만 상을 받은 것 같아 좀 그렇군.”
“아닙니다. 장군님 덕분에 이렇게 저희들이 마음 놓고 바다를 건너올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하하. 그렇게 말해 주니 불편했던 마음이 조금 풀리는 것 같군.”
“그런데 장군님께서 여기까지 나오시다니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겁니까?”
평안병사의 임지는 여기가 아니라 평양이었기에 반갑기는 했지만 임경업 장군을 보며 장 총관은 의아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있기는 하지.”
“혹시…….”
장 총관이 놀란 표정으로 얼굴을 굳히자 임경업 장군은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놀라기는. 사실 주상 전하께서 한양으로 호출을 하셔서 가는 길에 자네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잠시 들른 거라네.”
“아, 그러셨군요.”
그제야 장 총관은 마음을 놓았다.
사실 장 총관 입장에서는 모든 일이 긴장되고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가 몽금포에 온 건 교역을 하려는 게 아니라 판옥선과 화포를 몰래 가져가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조선 수군의 주력 군선이자 무기인 판옥선과 화포는 외부로 유출되는 걸 엄격하게 금지하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해상 교역을 위해 배와 강력한 화약 무기가 필요했던 도현은 웅도에서 인연을 맺은 임경업 장군과 수군 장수들에게 도움을 청했고, 봉황상단의 자금으로 몰래 판옥선 세 척과 여러 구경의 화포 구십 문을 제작했다.
아무리 봉림대군이라고 해도 이런 사실이 외부에 그중에서도 권좌에 집착이 강한 인조의 귀에 들어가기라도 한다면 큰일이었기에 장 총관은 신경이 바짝 곤두섰다.
“한양에는 갑자기 왜 가시는 겁니까?”
임경업 장군이 약간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아직 교지敎旨(왕이 신하에게 내리는 명령서)를 받은 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이번에 출병하는 지원군 지휘를 내가 맡을 것 같네.”
“아, 역시…….”
뭔가 알고 있는 듯한 반응에 임경업 장군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뭐 들은 거라도 있나?”
“실은 청국 관리들 사이에 장군님을 지원군 지휘관으로 지목해서 부르자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왜지?”
“이리저리 핑계를 대며 싸움을 피한 다른 장수들과 달리 장군님은 적극적으로 움직이고 전공까지 세우셨으니 청국에서 좋게 본 거지요.”
설명을 들은 임경업 장군은 약간 허탈한 얼굴을 했다.
“황당하군.”
“이번 전쟁에는 세자 저하와 봉림대군께서도 출정하시는데 장군님이 오시는 걸 알면 크게 기뻐하실 겁니다.”
“그거라도 위안을 삼을 수밖에. 두 분께서는 잘 지내시지?”
“예.”
“귀하신 분들이 먼 이국땅에 외로이 계신 것도 마음이 아픈데 다른 나라가 치르는 전쟁터까지 억지로 가셔야 한다니 정말 뵐 면목이 없군그래.”
임경업 장군의 이야기에 장 총관뿐 아니라 주위에 서 있던 다른 장수들도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분위기가 가라앉자 임경업 장군은 일부러 밝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여기까지 왔으니 배가 얼마나 잘 만들어졌는지 봐야지. 함께 가세.”
“그러시죠.”
임경업 장군은 장 총관과 나란히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선착장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위치한 모래사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 시대에는 지금과 달리 조선소라고 거창하게 각종 설비를 세워 놓은 장소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바닥이 평평하고 재료를 구하기 쉬운 해변에 목재로 틀을 세우고는 거기서 배를 건조했다.
모래사장에는 건조가 다 끝나 마무리 도색 작업이 한창인 판옥선 세 척이 웅장한 모습을 드러내며 세워져 있었다.
“보통 배들하고 좀 다른 것 같은데?”
임경업 장군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판옥선을 쳐다보자 지금까지 존재감 없이 뒤에 서 있던 몽금포 만호 유상헌이 앞으로 나서 설명을 했다.
“봉림대군마마의 지시에 따라 기존 판옥선보다 반 배가량 크기를 키우고 돛대도 한 개 더 설치해서 약간 다르게 보이실 겁니다.”
“어쩐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임경업 장군이 흥미를 보이자 유상헌은 묻지도 않은 걸 계속 술술 이야기했다.
“선체가 커진 만큼 화력도 세져서 화포를 총 삼십육 문이나 장착할 수 있습니다.”
“호오, 새로 만든 판옥선에 탑재한 화포를 일제히 발사한다면 정말 정관이겠군.”
“그렇지요. 멋도 모르고 달려들었다가 십자포화에 걸리면 상대는 지옥을 경험하게 될 겁니다.”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닌 게 이 정도 화력이라면 어떤 배든 상대가 난전을 시도하기도 전에 원거리에서 모두 침몰시킬 수 있다.
그때 가만히 대화를 들으며 판옥선을 살피던 장 총관이 입을 열었다.
“다 만들어진 겁니까?”
“도색을 마무리하고 내일 바다에 띄워 이상이 없는 것만 확인하면 되네. 그런 다음에 화포를 탑재하면 모든 작업이 끝나는 거지.”
“그럼 늦어도 사나흘 뒤에는 배를 가져갈 수 있겠군요.”
“그렇지.”
가까이 가서 작업장을 둘러보자 그제야 일행을 본 인부들이 일을 멈추고 황급히 허리를 숙였다.
사다리를 이용해 직접 배 위로 올라간 임경업 장군은 선체 크기에 다시 한 번 감탄성을 내뱉었다.
“정말 멋지군. 우리 수군도 이런 배를 가지면 좋을 텐데 말이야.”
천생 무인이었던 임경업 장군은 재물보다 이렇게 뛰어난 무기를 보면 욕심을 내며 가지고 싶어 했다.
하지만 계속된 전란과 흉년 그리고 청의 조공 요구로 재정이 바닥난 조선은 신형 판옥선 건조는 고사하고 기존 병력과 군영을 유지하기에도 벅찼다.
그나마 청나라의 위협이 없었다면 벌써 부족한 재정을 메우기 위해 군사력을 감축시켰을 것이다.
공식적으로 병사 수를 줄이지는 않았지만 악화된 재정 때문에 중앙에서 제대로 지원을 해 주지 않아 각 군영들은 훈련보다는 주변 둔전屯田(군영이 자체적으로 군량을 충당하기 위해 만든 토지)에 가서 농사를 짓는 시간이 더 많을 정도로 상황이 안 좋았다.
몽금포에 주둔한 수군도 만약 도현이 배를 건조해 주는 대신 충분한 식량과 피복을 지원해 주지 않았다면 뒤편 논에서 한창 농사를 짓거나 바다에 나가 고기를 잡고 있었을 터다.
이건 임경업 장군도 마찬가지였는데 판옥선에 탑재할 화포 구십 문을 제작해 주는 대신 쌀 천 섬과 철괴 사백 개를 지원받았다.
물론 화포 제작에 들어가는 재료는 따로 공급받았고, 이걸로 병사들에게 봉급을 지급하고 병장기를 만들어 무장시켰다.
충분하지는 않았지만 몽금포 군영과 평안도 병사들에게 도현의 지원은 그야말로 가뭄 끝에 단비와도 같았다.
“상황이 나아지면 이런 배들을 건조해 함대에 배치할 수 있을 겁니다.”
부관인 박도치의 말에 임경업 장군은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게 돼야지.”
다짐하듯이 그리 읊조리긴 했지만 씁쓸한 어조를 지울 수는 없었다.
그런 심정은 모두가 마찬가지인지 잠시 어색한 기운이 맴도는 가운데 장 총관이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손뼉을 치며 나섰다.
“이런! 제가 깜빡 잊고 있었군요.”
“무슨 일인가?”
“다름 아니라 대군마마께서 여러분에게 격려 차원차 내주신 술과 고기가 잔뜩 있는데, 말씀드리는 걸 깜빡했습니다.”
장 총관의 목소리를 들은 장수들이 순간 눈을 반짝거리며 뒤돌아보았다.
부대를 유지하는 데 꼭 필요한 물자도 제대로 공급이 안 되는 상황에서 하물며 평상시에도 쉽게 손에 넣기 힘든 술과 고기를 입에 댈 수 있을 리가 없다.
“아니, 그런 게 있었으면 진작 말을 했어야지.”
임경업 장군도 그런 부하들의 심정을 절절히 알기에 우울했던 얼굴 표정을 싹 지우고 밝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장군, 마침 배 건조 작업도 거의 다 끝난 참이니 오늘 밤엔 크게 잔치를 벌이는 게 어떻습니까.”
“그거 좋은 생각일세.”
임경업 장군이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하자 언제 분위기가 가라앉았냐는 듯 왁! 커다란 함성이 터져 나왔다.
그 후 몇 시간이 지나 해가 서쪽으로 뉘엿뉘엿 지기 시작하자 약속대로 장 총관이 타고 온 배에 잔뜩 싣고 온 술과 고기, 그 외에 먹을 것도 다 풀어놓고 병사들이 마음껏 가져갈 수 있도록 했다.
“와아! 고기다, 고기!”
“크아! 이게 얼마 만에 먹는 술이야? 아주 입에 짝짝 달라붙는구만!”
병사들은 각자 삼삼오오 모여 입속에 술과 고기를 연신 번갈아 집어넣느라 정신없이 손을 놀렸다.
“너희들! 먹는 것도 좋지만 이게 다 대군마마의 은혜 덕분임을 잊지 마라!”
“네!”
“아무렴요. 대군마마 천세!”
이미 반쯤은 술에 취한 듯 기세 좋게 목소리를 드높이는 병사들의 대꾸에 임경업 장군도 뭐라 하지 못하고 피식 웃기만 했다.
“장군, 한잔 드시지요.”
임경업 장군을 비롯한 장수들과 장 총관은 신 나게 먹고 마시는 병사들 바로 옆에 배를 만들고 남은 자투리 목재를 모아 불을 피워 놓고는 모여 앉아 있었다.
장 총관이 권하는 술을 단숨에 들이켠 임경업 장군은 일렁이는 불꽃 너머로 흥에 겨워하는 병사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병사들이 저렇게 좋아할 줄이야. 보는 나도 기분이 절로 들뜨는군.”
“군역이 힘들고 고된 일이니만큼 가끔은 이렇게 풀어 주고 놀게 하는 것도 괜찮지 않습니까.”
“자네 말도 맞지만, 그렇다고 노는 기분이 마냥 이어져선 안 돼.”
“걱정하지 마십시오. 내일이 되면 다들 일상으로 돌아갈 겁니다. 뭐, 대군마마께서 각별히 신경 써 주신 거니 오늘은 장군께서도 아무 생각 말고 그냥 즐기시지요.”
다독거리는 장 총관의 말에 임경업 장군도 살짝 풀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빈 술잔을 내밀었다.
“자네도 한 잔 받게. 이번엔 내가 따라 주지.”
“하하, 이거 감사합니다.”
멀리서 이름 모를 병사가 부르는 구성진 노랫가락에 귀를 기울이며, 사람들은 깊어지는 잔치 분위기 속에서 주거니 받거니 술잔을 이어 나갔다.
혼자 술을 다섯 병이나 비운 임경업 장군은 다음 날 늦게 한양으로 길을 떠났고, 배를 바다에 띄워 이상이 없는 걸 확인한 장 총관은 나흘 뒤 화포가 다 탑재되자 몽금포를 출발해 웅도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