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산해관 전투 (13/104)

산해관 전투

긴 겨울이 지나 생명의 기운을 머금은 새싹들이 하나 둘 기지개를 켜는 싱그러운 봄이 찾아왔지만 북방에 위치한 심양은 여전히 아침저녁으로 쌀쌀한 바람이 불어와 사람들을 움츠리게 했다.

이른 아침이었지만 관저 안은 평소와 달리 아주 부산스러웠다. 하인들은 물론이고 다른 때라면 아직 잠자리에 있을 관리들까지 의복을 다 갖춰 입고 굳은 얼굴로 나와 작게 이야기를 나누거나 서성거리고 있었다.

바로 오늘이 소현세자와 도현이 산해관을 치러 가는 청군을 따라 출정하는 날이었다.

그래서 전쟁터로 떠나는 두 사람을 배웅하기 위해 관저에서 지내는 모든 관리와 식솔들이 나와 있는 것이다.

어느새 배가 많이 불러 거동이 불편한 장씨 부인이었지만 오늘이 지나면 지아비를 두 번 다시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궁인들을 시키지 않고 직접 옷을 갈아입는 도현의 시중을 들었다.

괜히 걱정 끼칠까 봐 복받쳐 오르는 슬픔을 애써 참으며 옷고름을 묶어 주는 장씨 부인의 모습에 도현은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등을 쓰다듬어 줬다.

“지난번처럼 몸 건강히 돌아올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그러자 장씨 부인은 사슴처럼 크고 예쁜 두 눈에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꼭 그러셔야 됩니다.”

“내 약속하리다.”

도현은 장씨 부인을 안은 팔에 힘을 주고 단호한 말투로 약속했다.

처음에는 서먹서먹했지만 스스로 봉림대군이 된 걸 받아들이고 앞에 있는 장씨를 진짜 부인으로 인정한 다음부터는 조금씩 애틋한 감정이 생겨났는데 임신 소식을 듣고 나서는 이런 마음이 더 커졌다.

관저 식솔들의 배웅을 받으며 황궁으로 간 소현세자와 도현은 성대하게 열린 출정식에 참석한 뒤 도르곤이 이끄는 청군 지휘부를 따라 원정길에 올랐다.

선봉군으로 총 이십만 대군이 투입됐는데 이 중 오만 명이 조선과 몽고에서 보낸 지원 병력이었다.

몇 년 전 청에 복속된 몽고는 무려 사만 오천이나 되는 병력을 보냈는데 유목민족답게 전원 기병으로 이루어졌다.

그에 반해 조선군은 뿌연 먼지를 마시며 두 발로 쉴 새 없이 걸어야 되는 보병인 데다 병사들도 질이 떨어지는 속오군束伍軍 소속이었다.

속오군은 일종의 지방군대로 임진왜란 때 처음 만들어졌다.

병농일치제에 따라 속오군에 속한 인원은 평소 생업에 종사하며 가끔씩 훈련을 받다가 소집령이 떨어지면 모여서 부대를 이뤘다.

지금으로 치면 향토예비군과 같은 개념이었다.

청의 강압적인 요구에 어쩔 수 없이 파병하는 거라 정예가 아닌 전투에서 화살받이로 소모되더라도 별로 아깝지 않은 병력을 보낸 것이다.

이십만 대군은 긴 대열을 이루며 드넓은 초원을 가로질러 서쪽으로 이동했다. 피워 올린 흙먼지가 하늘을 가리고 끝이 어딘지 보이지도 않았다.

날씨가 약간 쌀쌀했지만 이동하는 데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었고 비도 전혀 내리지 않았다.

청군이 오는 걸 명나라도 분명 알고 있을 텐데 아무런 움직임이 없는 걸 봐서 천혜의 요새인 산해관을 방패막이로 수성전을 펼칠 모양이었다.

젖만 떼면 바로 말을 탄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타고난 기병인 청군과 몽고족을 상대로 사방이 탁 트인 평지에서 전투를 벌이는 건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일 테니 상대편의 선택도 이해가 됐다.

행군하는 동안 소현세자와 도현은 불편한 본진에서 떨어져 임경업 장군과 말을 나란히 하고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벌써 내일이면 산해관에 도착하네요.”

마치 시험 날을 앞둔 수험생처럼 도현이 떨떠름한 얼굴로 말하자 옆에 있던 소현세자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후우, 그러게 말이다.”

힐끗 고개를 돌린 소현세자는 뒤에서 따라오는 병사들을 보며 안타까운 목소리로 이야기를 이었다.

“여기 있는 병사들 중에 과연 몇 명이나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힘들겠지만 최선을 다해 봐야죠.”

“그래야겠지만 당장 산해관에 도착하면 보병인 조선군을 먼저 앞세우지나 않을지 걱정이구나.”

“저하, 나중에는 모르겠지만 처음부터 저희가 나서는 일은 없을 테니 너무 심려하지 마십시오.”

함께 있던 임경업 장군의 말에 소현세자는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그걸 어떻게 장담하는 거요?”

“오랜 전쟁 경험으로 산해관이 쉽게 뚫리지 않을 거라는 걸 예친왕도 잘 알고 있을 테니 초반에는 노예 병단을 앞세워 상대의 힘을 빼 놓으려고 할 겁니다.”

이야기를 들은 소현세자는 안장 위에 앉아 있는 자세로 무릎을 쳤다.

“아! 그렇지. 노예 병단이 있었군.”

전원 명나라 포로 출신들로 이루어진 노예 병단은 무장도 창과 나무 방패 하나로 아주 빈약했고, 평소에는 보급품을 옮기는 치중 부대로 쓰다가 전투가 벌어지면 앞에 세워 화살받이로 이용하는 일종의 소모품이었다.

노예 병단 병사들에게는 미안했지만 도착하자마자 조선군이 전투에 바로 투입되지 않으리라는 것에 소현세자는 안도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전투가 길어지면 언젠가는 공격에 투입될 테니 그때까지 한 명이라도 더 병사들을 살릴 수 있게 훈련을 시켜야 될 거예요.”

도현의 말에 소현세자와 임경업 장군은 정색하며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야지. 임 장군.”

“예, 저하.”

“수고스럽겠지만 장군이 책임지고 병사들을 조련시켜 놓으시오.”

훈련이 부족한 조선군의 상태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임경업 장군은 소현세자의 지시에 바로 대답했다.

“알겠사옵니다.”

그렇게 행군을 계속한 원정군은 심양을 떠난 지 정확히 이십 일째 되는 날 산해관 성문 앞에 도착했다.

넓은 평원 끝자락에 우뚝 서 있는 산해관은 가파른 산줄기 사이에 세워져 마치 높은 벽을 보는 것 같았다.

그런 산해관을 소현세자와 도현은 복잡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결국 여기까지 왔군요.”

“산해관을 넘으면 바로 자금성까지 밀고 내려가겠지?”

얼굴이 굳어 있는 소현세자와 달리 도현은 담담한 모습으로 말했다.

“날이 풀리면 황제가 직접 후속 부대를 이끌고 온다고 하니까 이번에 명을 무너뜨리고 중원에 청국의 깃발을 꽂으려고 단단히 마음먹었다고 봐야겠지요.”

“으음.”

지금 있는 병력은 선봉군이고 또다시 황제인 홍타이지가 직접 십만 명을 이끌고 오기로 되어 있었다.

병력도 엄청나지만 황제가 직접 친정親征에 나섰다는 것만으로 청나라가 지루하게 이어 온 명청 전쟁을 이번에 끝내려고 한다는 걸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도현의 눈에 산해관이 거센 태풍 앞에 선 등불처럼 초라하게 느껴졌다.

병력이 얼마나 많은지 다 도착하는 데 꼬박 하루가 넘게 걸린 청군은 산해관과 마주한 벌판에 군영을 짓고 주위를 목책으로 둘러쌌다.

한편 청군이 나타났다는 소식에 요동총병인 오삼계吳三桂는 급히 집무실을 나와 성벽으로 올라갔다.

적이 오리라는 걸 몇 달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막상 개미 떼처럼 새카맣게 몰려온 청군을 보자 오삼계는 자신도 모르게 침음성이 새어 나왔다.

“으음.”

그러자 옆에 있던 좌군장 임표가 굳은 얼굴로 분통을 터트렸다.

“적이 산해관에 도착했는데 조정에서는 빨리 지원 병력을 보내 주지 않고 도대체 뭘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임표의 말에 다른 장수들도 불만 어린 표정을 지었다.

이럴 수밖에 없는 것이 위험을 인지하고 벌써 수차례 지원 병력을 요청했지만 한 달 전 훈련도 제대로 안 된 잡군雜軍 오천 명을 보내 준 걸 제외하고 자금성에서는 아무런 조치도 취해 주지 않았다.

보급도 원활하지 않았는데 그나마 오삼계가 요동총병으로 주변 지역에서 나는 세금과 곡식을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권한이 없었다면 산해관은 벌써 무너지고 말았을 터다.

“보나 마나 오랑캐들이 쳐들어오는 건 뒷전이고 자기들끼리 권력 다툼을 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겠지요.”

부관인 왕추용이 자금성에 대한 미련을 일찌감치 버렸는지 퉁명스럽게 말하자 오삼계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뱉었다.

“후우, 나라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있는데 아직도 옛 영광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니. 이곳이 무너지고 자금성이 불에 타면 그 권력도 다 부질없어진다는 걸 왜 모르는 건지.”

“그러게 말입니다.”

안타까운 시선으로 북경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던 오삼계는 이내 정색하며 말했다.

“자금성에 있는 대신들이 하는 꼬락서니는 마음에 안 들지만 황제 폐하와 백성들을 위해 이곳을 무조건 사수해야 될 것이야.”

“하지만 우리만으로 이십만이 넘는 대군을 막아 낼 수 있을까요?”

압도적인 청군의 규모에 기가 죽었는지 장수 중 한 명이 약한 소리를 하자 오삼계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호통쳤다.

“대명국의 장수로서 어찌 그리 허약한 소리를 하는 겐가!”

“죄, 죄송합니다.”

말을 했던 장수가 당황한 얼굴로 머리를 숙이자 오삼계는 성루 위에 모인 부하들을 쓸어 보고는 비장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청군을 물리치고 보란 듯이 여길 지켜 낼 것이니 모두 산해관에 뼈를 묻는다는 각오로 목숨 걸고 적과 싸우는 거야. 알겠나?”

“예, 대인.”

“다시 말하지만 절대 후퇴는 없어.”

스스로 다짐하듯 그렇게 말한 오삼계는 몸을 돌려 정면에 있는 청군 진영을 뚫어질 듯 노려봤다.

그렇게 긴장 속에 첫날이 지나고 다음 날 아침이 되자 일찍 식사를 끝낸 청군은 산해관에서 사백 보쯤 떨어진 곳까지 군대를 진출시켜 진을 쳤다.

“준비가 다 끝났습니다.”

화려한 금장식이 들어간 갑옷을 입고 등 뒤로 길게 망토를 늘어뜨린 채 말에 올라탄 예친왕 도르곤은 심복인 야골타의 이야기에 슬쩍 하늘을 올려다보고는 입을 열었다.

“맑고 바람 한 점 없는 것이 전쟁을 하기에 딱 좋은 날씨군. 안 그런가?”

“맞습니다.”

야골타의 말을 들으며 시익 미소를 지어 보인 예친왕은 오른손에 쥔 지휘봉을 들어 앞을 가리키면서 크게 외쳤다.

“적들에게 청국의 무서움을 보여 줘라!”

“옛!”

공격 지시가 떨어지고 얼마 있지 않아 대형 곳곳에서 전투 시작을 알리는 뿔고둥 소리가 고요한 전장을 가득 울렸다.

뿌우우웅! 뿌우우웅!

그러자 제일 앞줄에 대기하고 있던 병사들이 대형을 갖춘 채 앞으로 움직였다.

청군 복장을 하고 있지만 다른 병사들에 비해 옷도 허름하고 둥근 나무 방패와 창 하나만 달랑 가지고 있는 것이 따 봐도 노예 병단인 걸 알 수 있었다.

스스로 화살받이라는 걸 알고 있기에 노예병들의 얼굴에는 두려움이 가득했지만 대형 뒤편에 살기 가득한 눈빛으로 서 있는 독전대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걸음을 옮겼다.

“빨리 움직여!”

“뒷걸음질 치거나 적을 앞에 두고 머뭇거리는 놈이 있으면 바로 목을 쳐 버릴 테니 알아서 해라!”

시퍼렇게 날이 선 검을 손에 든 독전대의 말에 노예병들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같은 편이었던 명나라 병사들과 싸우기 위해 앞으로 계속 나아갔다.

절반쯤 다가갔을 때 뒤편에 방열된 청군 화포들이 불을 뿜으며 지원 사격을 해 줬다.

“발사!”

꽝! 꽝! 꽝!

슈우우우웅- 꽈아앙!

“크헉.”

“으윽.”

폭음과 함께 날아간 어린아이 머리만 한 쇠구슬이 성벽 곳곳에 떨어져 적병들의 목숨을 앗아 갔다.

포격을 신호로 속보로 걸어가던 노예병들이 함성을 내지르며 일제히 성문을 향해 돌격했다.

“가자!”

우와아아아!

“적들이 성문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아라!”

그러자 성벽 위에 대기하고 있던 명나라 궁수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노예 병단을 향해 화살 세례를 퍼부었다.

“쏴라!”

슈슈슈슉! 슈슉! 슉!

수천 수백 발의 화살이 하늘을 새까맣게 뒤덮으며 날아오자 곳곳에서 고통에 찬 비명이 터져 나오며 노예병들이 무더기로 쓰러졌다.

“컥!”

“끄어억.”

각자 방패를 하나씩 들고 있었지만 쏟아지는 화살 비를 다 막아 내기에는 역부족이었고, 뒤에서 독전대가 정말로 머뭇거리는 동료를 즉결처분하며 마구 몰아붙이자 노예병들은 살기 위해 이를 악물고 성으로 달려갔다.

슈칵!

“허억.”

방패로 몸을 가린 채 꼼짝달싹 안 하는 노예병의 등을 가차 없이 검으로 베어 버린 독전대 대원은 큰 소리로 병사들을 다그쳤다.

“계속 앞으로 나가라! 멈추는 놈은 그 자리에서 죽여 버린다!”

“히익.”

이런 가운데 청군에서도 상대편의 공격에 맞서 궁수대가 진형 앞으로 나와 화살을 쏘며 엄호사격을 했다.

그러자 명군의 화살 공격이 약해졌고 그 틈에 성벽 아래까지 달려간 노예병들은 끝에 밧줄이 달린 갈고리나 준비해 온 공성용 사다리를 걸치고 위로 올라갔다.

“제일 먼저 성벽 위에 올라가는 자는 노예에서 해방시켜 주고 금원보 하나를 상금으로 준다!”

지휘관의 외침에 노예병들이 이를 악물고 필사적으로 성벽을 기어 올라가자 바로 명군이 반격을 해 왔다.

“어딜 기어 올라오려고!”

“이거나 먹고 뒤져라!”

창으로 노예병을 쑤시는 건 기본이고 뜨겁게 끓여 놓은 기름을 붓고 주먹보다 큰 돌을 던져 상대의 공격을 저지했다.

쏴아아아!

“뜨, 뜨거워!”

“으아아악!”

“살려 줘!”

적이 밀쳐 내는 바람에 공성용 사다리 하나가 뒤로 넘어가자 매달려 있던 노예병 다섯 명이 비명을 지르며 흙바닥에 그대로 내동댕이쳐졌다.

노예병들이 우수수 굴러떨어지면 또 그만큼의 병사들이 성벽에 달라붙었다.

그렇게 성 주위는 양쪽 병사들이 흘린 피가 강을 이루고 시체가 산처럼 쌓였다.

사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났지만 예친왕은 물러설 생각이 없는지 오히려 추가로 대기 중인 노예병들을 투입하며 공세를 강화했다.

채채챙! 챙! 챙!

“어서 성벽을 넘어라!”

하지만 명나라의 마지막 보루이자 지난 수년간 청국의 중원 진출을 막아 온 난공불락의 요새답게 산해관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시선 한번 돌리지 않고 말 위에 앉아 전장 상황을 날카롭게 살피던 예친왕은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지는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퇴각 명령을 내렸다.

“지난번에 왔을 때보다 화포 숫자가 늘고 병사들의 훈련 상태도 더 좋아진 것 같군.”

“오삼계가 산해관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제법 준비를 단단히 한 모양입니다.”

첫 공격에 산해관을 무너뜨릴 수 있을 거라 기대하지 않았던 예친왕은 피해가 생겨도 부담이 적은 노예 병단을 이용해 상대편의 방어 수준이 얼마나 되는지 알아보려고 했던 것이다.

충분히 목적을 달성한 예친왕은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는 고삐를 당겨 진영으로 말을 돌리며 고저 없는 목소리로 지시를 내렸다.

“이제 됐으니까 병사들을 뒤로 물려.”

“옛.”

군례를 취하며 대답한 야골타 장군이 손짓하자 한쪽에서 대기하던 신호수들이 나팔을 불어 후퇴를 알렸다.

그러자 악전고투를 벌이고 있던 노예병들은 이제 살았다는 표정을 짓고는 허겁지겁 성벽에서 물러났다.

썰물처럼 노예병들이 빠져나간 자리에는 시뻘건 피가 웅덩이를 이루고 땅이 안 보일 정도로 많은 시신이 널려 있었다.

“이거 공략이 쉽지 않겠습니다.”

함께 전투를 지켜보던 임경업 장군이 고개를 돌리며 하는 말에 도현과 함께 서 있던 소현세자가 무겁게 머리를 끄덕였다.

“그러게 말이오. 봉림대군 네가 보기에는 어떠냐?”

이번에야말로 대업을 이루기 위해 청나라가 대군을 일으켰지만 결국 산해관이라는 벽을 넘지 못하고 군대를 물린다는 걸 알고 있는 도현은 담담한 태도를 보였다.

“명나라뿐 아니라 대륙에 통일 왕조가 들어설 때마다 북방 외적들로부터 국가를 지키는 최후의 보루 역할을 해 왔는데 쉽게 뚫리겠습니까.”

“하긴…….”

수긍하는 표정을 짓는 소현세자를 보며 도현이 말을 이었다.

“오늘 전투는 이걸로 마무리 지을 것 같으니 이제 그만 군영으로 돌아가죠.”

퇴각 신호를 듣고 무질서하게 뒤로 물러서는 노예병들을 힐끗 쳐다본 소현세자는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게 가벼운 탐색전으로 첫날 전투를 끝낸 청군은 쉴 새 없이 산해관을 두드려 댈 거라는 예상과 달리 어찌 된 일인지 다음 날부터 거북이처럼 잔뜩 웅크린 채 가만히 있었다.

이러자 명군이 오히려 더 불안해졌는데 차라리 공격해 오는 것이 낫지 너무 조용하자 상대가 무슨 꿍꿍이를 가지고 있는지 몰라 초조하고 갈수록 긴장감이 높아졌다.

“오늘도 움직임이 없어?”

성루로 올라온 오삼계의 물음에 장수 하나가 군례를 취하며 바로 대답했다.

“예, 장군.”

“저러고 있는 것이 며칠째지?”

“나흘 됐습니다.”

정면에 위치한 청군 진영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오삼계는 미간을 찌푸렸다.

“분명 뭔가 있는데 도통 짐작이 안 되니 미치겠군.”

“적병들이 왼편에 있는 숲을 자주 들락거리는 걸 보면 혹시 공성 병기를 제작하는 것이 아닐까요?”

“일리 있는 말이야. 하지만 아무리 살펴봐도 흔한 공성탑 하나 보이지 않잖아.”

“그렇군요.”

한 손으로 성벽을 짚고 청군 진영을 가만히 응시하던 오삼계는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부관.”

“말씀하십시오.”

“별동대를 이삼십 명 뽑아서 오늘 밤 적진을 살펴보라고 해.”

“알겠습니다.”

그 뒤로도 한참 동안 오삼계는 굳은 얼굴로 성루에 서 있었다.

“준비가 다 됐습니다.”

“가능한 한 접전을 피하고 적이 무슨 꼼수를 부리고 있는지만 알아 오라고 했지.”

“예.”

대답을 들으며 고개를 정면으로 돌린 오삼계는 멀리 화톳불이 군데군데 피워져 있어 환한 청군 진영을 보고는 무겁게 말했다.

“좋아. 그럼 내보내.”

“옛.”

부관이 아래를 내려다보며 손짓하자 대기하고 있던 일단의 병사들이 성문 옆에 작게 나 있는 쪽문을 열고 몰래 성 밖으로 나갔다.

달빛에 반사가 될까 봐 검날과 얼굴에 검댕을 칠한 별동대 병사들은 발소리를 죽이며 조심스럽게 적진으로 접근했다.

바닥에는 첫날 전투에서 죽은 시신이 치워지지 않고 그대로 방치되어 있어 움직이는 데 걸리적거리고 악취가 코를 찔렀다.

퍼석!

“쉿!”

지휘관이 인상을 굳히며 노려보자 발을 헛디뎌 소리를 낸 병사는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죄송합니다.”

“조심해.”

“네.”

자세를 낮춘 지휘관은 턱으로 왼편에 보이는 숲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숲부터 살펴본다. 들키지 않게 최대한 소리를 죽이고 수상한 것이 있으면 바로 말해. 알겠지?”

“예.”

“가자.”

숲에 들어가자 진영에서 약간 떨어진 곳인데도 청군 병사들이 두 명씩 짝을 지어 군데군데 경비를 서고 있었다.

“확실히 이상하군.”

“백부장님, 저길 보십시오.”

부하의 말에 시선을 옆으로 돌린 지휘관은 오십 보쯤 떨어진 곳에 족히 천여 명은 넘을 적병들이 개미처럼 굴속을 들락거리며 흙을 나르고 있는 걸 발견하고 낮게 침음성을 내뱉었다.

“끄으응. 어쩐지 조용하다 했더니 성문을 무너뜨리려고 두더지처럼 굴을 파고 있었군.”

“옆에 쌓여 있는 흙무더기를 볼 때 이미 상당한 길이를 판 모양입니다.”

주위를 자세히 살펴보자 굴 옆에는 커다란 왕릉처럼 생긴 흙무더기가 여섯 개나 보였다.

나무들과 산해관 방향에 있는 작은 언덕이 절묘하게 시선을 가려 몰래 굴을 파는 걸 명군에 감출 수 있었다.

“이제 어쩌지요?”

“이 사실을 빨리 아군에 알려야지.”

돌아가려고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키는 순간 미처 파악하지 못한 경비가 있었는지 어둠 속에서 커다란 소리가 터져 나왔다.

“누구냐!”

“이런. 들켰다. 튀어!”

지휘관은 낭패한 표정을 지으며 황급히 부하들과 함께 성 쪽으로 달아났다.

“저기 있다!”

“잡아라.”

여기저기에서 횃불을 든 청군 병사들이 몰려오고 설상가상으로 한 무리의 적들이 정면을 막고 있자 별동대는 어쩔 수 없이 길을 우회했다.

잠이 오지 않아 호위와 함께 진영 주변을 산책하고 있던 도현은 갑자기 주변이 소란스러워지더니 병사들이 허겁지겁 무장을 챙겨 들고 숲 쪽으로 달려가는 걸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일이지?”

“제가 알아보고 오겠습니다.”

김덕술은 약간 긴장한 얼굴로 지나가던 병사를 하나 붙잡고 물었다.

“적이 야습이라도 해 온 거야?”

그러자 장비처럼 수염이 덥수룩하게 난 청군 병사는 귀찮다는 듯이 이야기를 해 주고는 동료들을 쫓아갔다.

“자세한 건 나도 모르겠고 숲 쪽에 침입자가 있는 모양이오.”

말을 들은 도현은 눈가를 살짝 찡그렸다.

“저기는 땅굴을 파고 있는 곳이잖아?”

“맞습니다.”

“골치 아프게 됐군.”

“마마, 여긴 위험하니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상황이 어찌 돌아가는지 궁금했지만 괜히 싸움에 말려들 수도 있기에 도현은 순순히 김덕술의 말을 들었다.

하지만 세상일이라는 게 원래 뜻대로 되지 않는 것처럼 숙소로 돌아가려고 몸을 돌리던 도현은 일단의 수상한 무리가 다급히 이쪽으로 뛰어오는 걸 보고 굳은 얼굴로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아 들었다.

스르릉.

“아무래도 오늘 밤은 조용히 보내기 틀린 것 같군.”

“예?”

고개를 갸웃거리며 도현이 보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린 김덕술은 그제야 적을 발견하고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제 뒤로 오십시오.”

김덕술의 말에 도현은 오히려 한 발짝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었다.

“배운 지는 얼마 안 됐지만 나도 한 칼 하는 거 알잖아.”

“그러다 다치기라도 하시면…….”

“됐어. 그리고 내가 피한다고 해도 저쪽은 여덟 명인데 김 위사 혼자 감당할 수 없잖아.”

도망치는 과정에서 뿔뿔이 흩어졌는데 도현과 맞닥뜨린 적은 지휘관인 백부장이 포함된 무리였다.

살기를 뿌리며 서 있는 상대를 쳐다본 김덕술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작게 머리를 끄덕였다.

“후우. 좋습니다. 대신 조심하셔야 됩니다.”

“염려 마.”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도현이 중단 자세를 잡자 상대편 지휘관은 한쪽 볼을 실룩이고는 차갑게 말했다.

“죽여!”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적들은 앞으로 달려들며 검을 휘둘렀다.

채챙! 챙! 챙!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날아오는 네 개의 검을 모두 쳐 낸 도현은 공격을 하느라 제일 오른쪽에 있던 상대의 옆구리가 비어 있는 걸 놓치지 않고 곧장 수평 베기를 펼쳤다.

슈각!

“크흑.”

길게 베인 옆구리에서 시뻘건 피와 함께 창자가 쏟아져 내렸다.

부상당한 상대의 가슴을 걷어차서 쓰러뜨린 도현은 섬뜩한 느낌에 상체를 살짝 옆으로 틀어 머리를 노리고 떨어지는 검을 피했다.

스치고 지나가는 검풍이 그대로 느껴질 정도로 간발의 차이였다.

쉬이익.

그러자 용수철처럼 튕기듯 앞으로 나와 거리를 좁힌 도현은 검을 있는 힘껏 사선으로 내리그었다.

“이익.”

당황한 적이 황급히 검을 들어 공격을 막으려고 했지만 그것보다 도현의 움직임이 더 빨랐다.

“으아악!”

갑옷으로 보호되지 않은 목 부위를 정확히 파고든 도현의 검은 상대를 일격에 죽여 버렸다.

순식간에 부하 두 명이 목숨을 잃자 지휘관은 이를 부드득 갈며 도현에게 덤벼들었다.

“이놈! 죽여 버리겠다!”

“할 수 있으면 해 봐.”

백인대장인 지휘관은 앞서 상대한 두 명과 달리 제법 뛰어난 실력을 보였지만 부하를 잃었다는 분노와 언제 청군 병사들이 몰려올지 모른다는 초조함에 싸움을 빨리 끝내려고 급하게 도현을 몰아붙였다.

반면 서두를 필요가 전혀 없었던 도현은 수비에 치중하면서 시간을 끌었다.

그러자 다급해진 지휘관은 무리수를 뒀다.

빈틈을 노리고 내지르는 도현의 검을 무시한 채 그의 가슴을 마주 찌른 것이다.

살을 내주고 뼈를 취하는 육참골단肉斬骨斷의 수법.

도현은 찔려도 부상만 입는 어깨를 노린 반면 상대는 그대로 목숨을 앗아 갈 수 있는 심장으로 검 끝이 향했다.

갑옷이라도 입고 있다면 피해가 덜하겠지만 산책을 나온 길이라 가벼운 무복만 입고 있던 도현은 검에 찔리면 잘해야 중상이었다.

하는 수없이 뒷걸음질을 치며 상대편 공격을 쳐 내려고 검을 맞댔다.

하지만 상대는 힘으로 밀고 들어왔고 결국 가슴 부위의 옷이 살짝 찢어지며 상처를 입었다.

“젠장!”

도현도 그냥 당하지만은 않고 바로 반격을 가했다. 팽이처럼 몸을 핑그르르 한 바퀴 돌려 왼쪽 팔꿈치로 상대의 안면을 세게 가격했다.

빠각!

“끄억.”

절묘하게 빈틈을 파고든 공격에 제대로 얻어맞은 상대는 뼈가 부러지는 섬뜩한 소리와 함께 피를 뿌리며 뒤로 벌러덩 넘어갔다.

“히익.”

믿었던 지휘관까지 당하자 혼자 남은 적은 싸우는 걸 포기하고 꽁지가 빠지게 달아났지만 몇 걸음 가지 못하고 소란을 듣고 몰려온 청군 병사들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검을 손에 쥔 채 거칠어진 숨을 고르자 어느새 상대하던 적병 네 명을 깔끔하게 처리한 김덕술이 옆으로 다가왔다.

“다치셨습니까?”

걱정이 가득한 김덕술의 물음에 도현은 왼손으로 상처 부위를 스윽 닦고는 별거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그냥 살짝 스친 거야.”

“피가 나오는 걸 보면 상처가 깊은 것 같습니다.”

“괜찮대도.”

“그래도 혹시 놈들이 무기에 독이라도 발라 놨는지 모르고 상처가 덧날 수도 있으니까 의원한테 가서 치료를 받으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중상이라도 입은 것처럼 김덕술이 호들갑을 떨자 도현은 짧게 한숨을 내쉬며 졌다는 듯이 고개를 내저었다.

“후우, 알았어.”

“어서 가시죠.”

상처가 걱정되기도 했지만 여기 계속 남아 있다가 또 싸움에 휘말리지나 않을까 염려한 김덕술의 재촉에 도현은 자신이 죽인 적들을 스윽 쓸어 보고는 천막으로 돌아갔다.

이렇게 별동대는 청군이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지 알아냈지만 경계망에 걸려 모두 목숨을 잃고 말았다.

결국 명군은 작전에 실패했지만 효과가 아주 없지는 않았다. 행여나 일을 벌이기 전에 명군이 땅굴의 존재를 눈치챌까 봐 청군 지휘부가 불안한 마음을 가지게 된 것이다.

“조금 따끔하실 겁니다.”

작은 사기그릇에 온갖 약재를 넣고 찧은 걸 상처 부위에 골고루 바른 의원은 깨끗한 붕대로 가슴을 여러 차례 감아 단단히 묶어 줬다.

색깔이 거무튀튀한 것이 보기에는 영 별로지만 효과는 좋은지 약을 바르자마자 잠시 따끔거리더니 통증이 완전히 사라졌다.

“상처가 벌어질 수도 있으니까 당분간 격렬한 운동은 하지 마십시오.”

“장담은 못 하지만 노력해 보지.”

도현이 의자에서 일어나자 옆에 있던 칠현이 새 무복 윗도리를 건넸다.

“바깥 분위기는 어때?”

질문을 받은 칠현은 허리를 살짝 숙이고는 얼른 대답했다.

“땅굴 근처에 명군이 침투한 것 때문에 지휘부가 발칵 뒤집혔습니다. 예친왕이 비상 회의를 소집해서 임 장군님과 세자 저하께서도 불려갔습니다.”

“까딱했다가는 그동안 준비한 일이 다 수포로 돌아갈 수 있으니까 그럴 수밖에. 이번 일로 괜히 우리한테까지 피해가 오는 건 아닌지 모르겠군.”

치료 도구를 다 챙긴 의원이 꾸벅 인사하고 천막을 나가자 도현은 탁자 위에 올려 둔 검을 뽑아 깨끗한 헝겊으로 날에 묻어 있는 피를 직접 닦아 냈다.

그때 입구를 가린 휘장에 젖혀지며 소현세자와 임경업 장군이 들어왔다.

“다쳤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괜찮은 거냐?”

걱정스러운 얼굴로 상태를 물어보는 소현세자의 모습에 도현은 닦고 있던 검을 집어넣고는 빙긋 미소를 지었다.

“보시다시피 멀쩡해요.”

“정말이냐?”

못 미더운지 재차 물어보자 도현은 양팔을 크게 움직여 보이며 말했다.

“보세요.”

“그럼 다행이구나. 네가 다쳤다는 이야기를 듣고 얼마나 놀랐다고.”

“걱정 끼쳐 드려서 죄송합니다.”

“그걸 알면 앞으로는 더 조심해. 알겠지?”

“예.”

말투와 행동에서 도현은 진심으로 걱정하는 소현세자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아무튼 이만하길 다행입니다. 앞으로는 어딜 가시든 호위를 충분히 데리고 다니십시오.”

“그래. 이번에는 잘 넘겼지만 다음에 또 운이 좋으리라는 법은 없지. 무예를 조금 배웠다고 그걸 과신하면 안 돼.”

어디 갈 때마다 호위와 시중을 주렁주렁 달고 다니는 것이 귀찮았지만 지금은 그런 이야기를 할 분위기가 아니었기에 도현은 건성으로 머리를 끄덕였다.

“네.”

“신 위사장, 말이 나온 김에 봉림대군한테 새로 위사 세 명을 더 붙여서 호위를 전담시키도록 하게.”

“알겠사옵니다.”

소현세자의 말에 작게 한숨을 내쉰 도현은 두 사람한테 자리를 권했다.

“서 있지 말고 이쪽으로 앉으세요.”

“그러자꾸나.”

세 사람이 자리에 앉자 칠현이 잽싸게 차를 가져와 탁자 위에 올려놨다.

“예친왕이 불러서 지휘 천막에 가셨다면서요?”

그러자 소현세자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이야기를 했다.

“안 그래도 말을 해 주려고 했는데 내일부터 우리 조선군도 땅굴 굴착 작업에 투입하게 됐다.”

“아니, 갑자기 왜요?”

“땅굴 주변에 적이 나타난 것 때문에 예민해져서 그러지. 명군이 눈치채고 대비하기 전에 작업을 빨리 끝내라는 거야.”

예친왕의 마음은 이해가 됐지만 뭐든지 급하게 처리해서 좋을 것이 없었기에 도현은 눈가를 살짝 찡그렸다.

“병사들이 고생을 하겠군요.”

“그래도 지금까지 해 놓은 것이 있어서 하루 이틀만 더 작업하면 땅굴을 다 팔 수 있다니 다행이지.”

“그렇게나 빨리요?”

현대처럼 기계의 힘으로 움직이는 중장비도 없는데 단 며칠 사이에 백 장이나 되는 땅굴을 뚫는다는 이야기에 도현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쳐다보자 옆에 있던 임경업 장군이 궁금증을 풀어 줬다.

“저희 말고도 몽고군 만 명이 작업에 투입돼서 주야 교대로 쉬지 않고 일을 할 겁니다.”

“아…….”

그제야 이해가 된다는 듯이 도현은 짧게 탄성을 내뱉었다.

기존에 땅굴을 파고 있는 인원이 오천 명이고 거기다가 추가로 투입되는 조선군과 몽고군을 합치면 무려 이만 명이나 된다.

완전히 쪽수로 밀어붙이는 것으로, 무식하지만 효과는 확실했다.

물론 많은 인원이 움직이는 만큼 들킬 가능성도 컸지만 이만 명이 개미 떼처럼 붙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땅굴을 판다면 충분히 이틀 안에 작업을 끝낼 수 있다.

“힘이야 들겠지만 대신 공성전을 벌일 때 전투에 참가하지 않아도 된다니 그게 어디냐.”

“맞습니다.”

전공을 넘겨주지 않으려는 청군 지휘부의 꼼수였지만 최대한 병사들의 희생을 줄이려는 조선군 입장에서는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그러네요.”

“아무튼 그렇게 알고 넌 당분간 움직이지 말고 상처 치료하는 데 전념해라.”

“괜찮다니까요.”

“어허! 또 그런다.”

평소와 달리 소현세자는 짐짓 엄한 표정을 지었고 임경업 장군도 옆에서 휴식을 취하라고 권했다.

“당분간은 전투에 나설 일이 없을 것 같으니 세자 저하 말씀대로 하십시오.”

“끄으응. 알았어요.”

앓는 소리를 내며 도현이 대답하자 소현세자는 만족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야지. 그럼 우린 이만 가 볼 테니 몸조리 잘하고 있어라.”

“벌써 가시게요?”

“오늘 새벽부터 당장 병사들을 작업에 투입하라고 해서 챙겨야 할 일이 많구나.”

그런 일은 임경업 장군이나 휘하에 있는 장수들한테 맡겨도 되지만 꼼꼼하고 인자한 성품을 가진 소현세자는 하루만이라도 고생할 병사들과 함께하며 다독여 주려는 것이다.

“너무 무리하지는 마십시오.”

“하하하! 걱정 마라.”

호탕하게 웃어 보인 소현세자는 임경업 장군과 같이 천막을 나갔다.

다시 의자에 앉은 도현은 팔짱을 낀 채 이맛살을 약간 찡그리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땅굴이라……. 제대로 성공만 하면 견고한 산해관 성문을 단번에 날려 버릴 텐데. 이게 실제 역사에도 있었는지 모르겠네.”

시간을 거슬러 오기 전에 역사 학도였지만 그렇다고 명과 청 사이에 있었던 전쟁을 모두 자세히 아는 건 아니었다.

그래도 청이 몇 번이나 대군을 동원해 산해관을 공격했지만 끝내 열리지 않았다는 건 알았는데 지금 예친왕이 진행하는 작전이 성공한다면 자신이 아는 것과 정반대의 결과가 나올 가능성이 컸다.

한마디로 예상이 완전히 빗나가는 것이다.

이게 자신의 존재로 인해 나비 효과처럼 역사가 조금씩 틀어지고 있다는 증거가 아닌지 도현은 불안했다.

만약 그렇다면 앞일을 다 알고 있다는 도현의 가장 큰 무기가 사라진다는 뜻이었기에 고민이 깊어졌다.

예친왕의 지시에 따라 새로 만 오천 명이 더 투입되자 땅굴을 파는 작업은 아주 빠르게 진행됐다.

수시로 예친왕과 청군 장수들이 찾아와 독촉을 해 댔기에 병사들은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어두운 땅속에 들어가 굴을 파야 했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상당한 양의 흙이 나왔고 그걸 그냥 쌓아 두면 땅굴을 파고 있는 걸 명군이 눈치챌 수도 있었기에 예친왕이 묘책을 냈다.

바로 청군이 장기전을 염두에 두고 진영 주변에 토벽을 쌓는 것처럼 위장해 흙을 처리한 것이다.

단순한 눈가림이었지만 효과는 확실해서 땅굴을 파면서 나온 흙을 대놓고 보여 주는데도 상대는 전혀 이상하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했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 뭔가 수상하다는 걸 감지하겠지만 어차피 이틀 안에 끝을 보려는 상황이었기에 그때까지 들키지 않으면 상관없었다.

그렇게 병사들을 몰아붙이며 밤낮을 가리지 않고 작업을 계속한 끝에 청군은 원하는 거리만큼 땅굴을 뚫는 데 성공했다.

“이백구십칠, 이백구십팔, 이백구십구, 삼백…….”

정확한 측정을 위해 차출된 병사 하나가 실타래 끝을 잡고 한 걸음씩 신중하게 수를 세며 앞으로 나아갔다.

마침내 거리가 표시된 실타래는 삼백 보를 넘기고 나서도 한참을 더 풀린 다음에 멈췄다.

이 사실을 병사가 보고하자 용골대가 직접 거리 측정을 보러 나온 예친왕을 돌아보며 약간 들뜬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삼백이십 보입니다, 전하.”

“그럼 성문 밑까지 정확히 도착했다는 뜻이군.”

“예. 오차를 고려하더라도 이 정도면 틀림없습니다.”

시선을 살짝 옆으로 돌린 예친왕은 땅굴 작업을 감독한 책임자인 이유정을 쳐다보며 말했다.

“방향이 틀어졌다거나 하지는 않았겠지?”

“물론입니다. 작업을 하면서도 제가 몇 번이나 확인을 했습니다.”

“일이 잘못되면 목숨으로 죄를 치러야 될 거야.”

“만약 그런 일이 있다면 전하 앞에서 직접 자결을 해서 용서를 빌겠습니다.”

확신에 찬 대답에 예친왕은 작게 머리를 끄덕였다.

“좋아. 길게 끌 것 없이 내일 날이 밝는 대로 산해관을 칠 테니까 성문을 한 방에 날려 버릴 수 있게 준비를 철저히 해 둬.”

“옛.”

수고했다는 듯이 이유정의 어깨를 부드럽게 두드려 준 예친왕이 휘하 장수들과 함께 지휘 막사로 돌아갔다.

격려를 받고 잔뜩 고무된 이유정은 부하들을 다그치며 마무리 작업을 시작했다.

“다들 들었지? 절대 실수해서는 안 된다. 어서 화약 설치 작업을 해!”

“알겠습니다.”

잠시 뒤 병사들은 짐마차에 실려 있던 나무 상자를 두 사람이 하나씩 들고 조심스럽게 땅굴 안으로 옮겼다.

“실수해서 터지면 끝장이니까 조심해서 다뤄!”

“예.”

병사들이 옮기는 상자에는 화약이 잔뜩 들어 있었는데 무려 마흔 개나 준비되어 있었다.

이걸 한꺼번에 폭발시킨다면 아무리 견고하게 쌓아 올린 산해관 성문이라도 단번에 무너뜨릴 수 있었다.

목까지 걸고 장담한 만큼 작은 실수라도 있으면 안 되기에 이유정은 여기에 화약 상자를 다섯 개나 더 가져와 설치했다.

순식간에 동굴 안은 화약 상자로 가득 찼고 폭발력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다섯 개나 되는 심지 길이를 조정해 격발이 동시에 이루어지도록 했다.

다음 날, 날이 밝자 예친왕이 지시한 대로 이레 만에 청군은 긴 침묵을 깨고 진영을 나와 산해관 앞에 대형을 갖추고 늘어섰다.

청군의 움직임을 보고받고 황급히 성루로 달려온 오삼계는 정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적병들의 모습에 긴장한 표정을 지으면서 마음 한편으로는 뭘 꾸미고 있는지 계속 걱정만 하다가 이렇게 전투가 벌어지자 차라리 속은 편해졌다.

“당장 비상종을 울리고 병사들을 모두 대기시켜!”

“예, 장군.”

땡땡땡! 땡땡땡!

비상종 소리와 함께 막사에서 쉬고 있던 병사들까지 모두 다 몰려나와 각자 맡은 위치로 달려갔다.

그렇게 첫 전투 이후 한동안 조용하던 전장은 다시 숨 막히는 긴장감으로 가득 찼다.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말에 올라탄 예친왕은 성벽 밑에서도 훤히 보이는 명나라 병사들의 당황스러운 움직임에 냉소를 흘렸다.

“오늘에야말로 산해관을 무너뜨리고 북경으로 진격할 수 있겠군.”

그러고는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지시를 내렸다.

“시작하라고 해.”

“예.”

대답과 함께 용골대가 손짓하자 사방에서 잘 보이도록 목재로 지은 망루 위에 올라가 있던 신호수가 붉은색 삼각 깃발을 들고 크게 좌우로 흔들었다.

설치한 화약을 폭파시키라는 신호였다.

예친왕이 있는 본진이 아니라 소현세자와 같이 대형 왼편에 위치한 조선군 진영에 있던 도현은 그걸 보고 약간 복잡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드디어 시작이군요.”

“그렇구나.”

“이대로 성문을 허물어뜨린다면 그동안 청군의 침입을 막는 방파제 역할을 해 온 산해관이 점령되는 건 시간문제입니다.”

임경업 장군의 말에 소현세자는 물론이고 도현도 머리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어찌 됐든 지금 우린 역사에 길이 남을 장면을 목격하고 있는지도 모르겠군요.”

“그래.”

이렇게 세 사람이 초조한 얼굴로 산해관을 바라보고 있을 때 오늘 전투의 승패를 틀어쥔 이유정은 초조한 얼굴로 땅굴 앞에 서 있었다.

“신호가 떴습니다.”

“확실해?”

“예. 망루에 적색 삼각 깃발이 올라왔습니다.”

부관의 말에 이유정은 크게 숨을 몰아쉬고는 약간 굳은 목소리로 지시를 내렸다.

“심지에 불을 붙여라!”

“옛.”

그러자 횃불을 들고 있던 십부장 하나가 지체 없이 땅굴 안으로 길게 이어진 심지 끝에 불을 붙였다.

치이이이익!

기름을 잔뜩 먹인 심지는 빠르게 타들어 갔고 불이 제대로 붙은 걸 확인한 이유정과 병사들은 곧 있을 폭발 충격을 피해 허둥지둥 뒤로 물러섰다.

땅굴 길이가 삼백 보나 됐기에 한참을 기다리고 나서야 엄청난 폭음이 울리면서 마치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땅이 크게 흔들렸다.

콰아아앙!

귀청이 나갈 정도로 커다란 폭음과 함께 뿌연 흙먼지가 피어올라 순식간에 산해관을 뒤덮었다.

느닷없는 대폭발에 처음에는 깜짝 놀라 주춤거리거나 바닥에 엉덩이를 찧으며 주저앉았던 청군 병사들은 이내 그동안 지휘부가 산해관 성문을 깨기 위해 준비한 작전이라는 걸 알고는 주위가 떠나가라 환호성을 터트렸다.

우와아아!

본진에 있던 지휘부도 기뻐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특히 몇 번이나 산해관을 넘지 못해 좌절을 맛봤던 예친왕은 주먹까지 불끈 쥐었다.

“보십시오. 화약이 제대로 터졌습니다.”

“하하하! 이제 산해관도 끝장입니다.”

“아직은 아니야. 먼지가 가라앉자마자 적이 정신을 차리기 전에 몰아붙여서 성을 함락시킬 수 있게 돌격 준비를 시켜 둬.”

“예.”

최고 지휘관답게 애써 침착한 태도를 보이며 휘하 장수들에게 지시를 내렸지만 예친왕도 입꼬리가 위로 말려 올라갔다.

이런 청군의 흥분과 환호는 시간이 지나 먼지가 가라앉으며 뿌옇게 가려져 있던 산해관이 다시 모습을 드러내자 거짓말처럼 싹 사라지고 대신 탄식으로 바뀌었다.

“뭐, 뭐야?”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처참하게 무너져 있어야 될 산해관 성문이 웅장하고 위압감 넘치는 모습 그대로 우뚝 제자리에 서 있었다.

아니, 피해가 완전히 없는 건 아니었다. 폭발 충격에 기와가 떨어져 깨졌고 성문 위에 있던 장졸들이 온통 뿌연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걸 제외하고 성문은 건재한 모습을 과시하며 서 있어 청군 병사들을 크게 실망시켰다.

거리는 맞았지만 급하게 서둘러 작업을 하는 바람에 방향이 살짝 틀어진 땅굴은 성문이 아니라 왼쪽에 있는 망루를 날려 버린 것이다.

그나마도 위치가 성 바깥쪽에 치우쳐서 큰 피해를 입히지는 않았다.

아무튼 수백 근에 달하는 화약을 일시에 터트리는 충격에 단단한 바위를 써서 차곡차곡 쌓아 올린 망루가 모래성처럼 허물어지면서 성벽에 십 장이나 되는 구멍이 뚫렸다.

“으윽…….”

“괜찮으십니까?”

폭발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바닥에 나동그라졌던 오삼계는 부관의 부축을 받아 겨우 몸을 일으켰다.

무의식중에 피해 상황을 살피기 위해 시선을 돌리던 그는 왼편에 있던 망루가 무너져 내린 걸 발견하고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젠장! 계속 찝찝한 마음이 가시지 않더니 두더지 새끼처럼 땅굴을 파고 있었군.”

“성벽이 박살 났으니 큰일입니다.”

“당장 예비대를 모두 동원해서 무너진 곳을 막으라고 해. 어서!”

“옛.”

짧게 대답한 부관은 지시를 전달하기 위해 급히 뒤편에 있는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흙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모습 그대로 두 팔로 성벽을 짚고 선 오삼계는 청군 진영을 노려보고는 이를 부드득 갈며 소리쳤다.

“곧 놈들이 쳐들어올 거다. 정신들 바짝 차리고 각자 위치에 서라!”

오삼계의 명령에 병사들은 무기를 챙겨 들고 전투에 대비했지만 폭발의 충격에서 쉽게 벗어나기 어려운지 행동이 굼떴다.

한편 계획대로 성벽 일부를 무너뜨리기는 했지만 원하던 결과를 내지 못하자 예친왕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지고 분노가 피어올랐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그, 글쎄요.”

“아무래도 땅굴의 위치가 잘못된 것 같습니다.”

“이런 멍청한 것들!”

얼마나 화가 났는지 얼굴이 야차처럼 변한 예친왕의 모습에 휘하 장수들은 괜히 불똥이 자신들한테 튀지나 않을까 전전긍긍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땅굴 작업을 맡은 놈을 잡아 와 목을 쳐 버리고 싶었지만 아직 전투가 끝나지 않았고 성에 차지는 않아도 성벽 일부가 무너지면서 산해관을 함락시킬 절호의 기회가 만들어졌기에 예친왕은 애써 화를 눌렀다.

그는 시선을 계속 정면에 고정한 채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용 장군.”

“하교하십시오.”

“당장 돌격 명령을 내려.”

“예? 아, 알겠습니다.”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던 용골대는 이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에 얼른 허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잠시 뒤 공격을 알리는 뿔나팔과 북소리가 울렸고 대기하고 있던 병사들이 함성을 지르며 돌격했다.

뿌우우웅! 뿌우우웅!

“공격!”

우와아아!

단번에 결판을 내려는 듯 무려 오만 명이 넘는 병력을 한꺼번에 투입했고 병장기와 깃발을 손에 든 병사들이 거센 파도가 되어 산해관에 몰아쳤다.

그와 동시에 미리 방열해 둔 홍이포 수십 문도 일제히 불을 뿜으며 돌격하는 병사들을 지원해 줬다.

“발사!”

꽝! 꽝! 꽝!

슈우우웅- 꽈꽝!

크게 포물선을 그리면서 날아온 수십 발의 포탄은 성벽 여기저기에 떨어져 내리며 아까 있었던 폭발의 충격에서 다 벗어나지 못한 명군 병사들을 괴롭혔다.

“으아악!”

“크흑.”

포격에 당해 부하들이 무더기로 죽어 나가는 모습에 오삼계는 분통을 터트리며 고함을 질렀다.

“아군 포대는 어서 반격하지 않고 뭘 하는 거야!”

그러자 오삼계의 말을 듣기라도 했는지 성벽과 망루에 설치되어 있던 명군 홍이포 포대가 하나 둘 포탄을 날리며 반격에 나섰다.

바로 이어서 궁수들도 화살을 날려 청군의 접근을 저지했다.

보이는 것이 다 적병이었기에 조준할 필요도 없이 막 쏘면 되지만 워낙 숫자가 많다 보니 포격과 화살 세례에도 청군은 물러서지 않고 계속 돌격해 왔다.

그들의 목표는 성문이 아니라 망루가 무너지면서 틈이 생겨 버린 지점이었다.

상대가 노리는 것이 뭔지 명군도 알고 있었기에 예비대를 총동원해 무너진 곳에 투입했다.

척척척!

“적들이 오기 전에 어서 대형을 갖춰라!”

급히 달려온 병사들은 좌군장인 임표의 지시에 따라 줄을 맞춰 섰다.

망루가 무너지면서 성인 남자 키만 한 돌무더기가 만들어져 있었는데 그 위에 올라선 병사들의 얼굴에는 당혹감과 긴장이 가득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성벽이라는 든든한 방패막이도 없이 이제부터 사납고 잔인하기로 유명한 청군과 온몸으로 부딪쳐야 하는 상황에 갑자기 내던져졌으니 침착하다면 그게 더 이상할 것이다.

특히나 제일 앞줄에 선 병사들은 정면에서 엄청난 수의 적병들이 병장기를 들고 무섭게 달려오는 걸 보고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제기랄! 이게 뭔 일이야.”

“어제 꿈자리가 사납더니만.”

“잡담들 하지 말고 정신 바짝 차려!”

백인장의 호통에 병사들은 입을 다물고 손에 든 방패를 고쳐 잡았다.

적군의 돌파를 허용하지 않기 위해 좌군장 임표는 예비대 중에서도 가장 힘이 좋고 무장이 충실해 아껴 둔 일 대를 방어에 투입했다.

“우리가 뚫리면 산해관이 함락된다. 모두 결사의 각오로 자리를 지켜라!”

“옛!”

병사들의 우렁찬 대답을 들으면서 임표도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아 들었다.

얼마 있지 않아 포격과 화살 비를 뚫고 성 앞까지 접근한 청군이 그 기세 그대로 달려왔고 임표는 그걸 노려보며 힘이 잔뜩 들어간 목소리로 외쳤다.

“온다!”

이윽고 청군이 거센 해일처럼 덮쳐 왔다.

콰콰쾅!

“으아악!”

“크흑.”

비명과 함께 뭔가 부서지고 깨지는 소음이 터져 나오며 양군이 강하게 충돌했다.

“버텨라!”

왼팔에 두꺼운 방패를 끼고 다른 손에는 날카롭게 벼린 검을 든 명군은 양다리에 힘을 꽉 주며 억지로 밀고 들어오려는 적군에 맞섰다.

양군이 부딪친 지점에서는 서로 뒤엉켜 죽고 죽이는 아비규환이 벌어졌다.

채챙! 챙! 챙!

“죽어!”

“사, 살려 줘.”

“끄어억.”

여기저기서 아우성과 비명이 속출했고 바닥은 어느새 병사들이 흘린 피로 질척거렸다.

상대가 쑤신 창에 찔린 동료가 쓰러지면 뒤에 있던 병사가 금방 그 자리를 메우면서 명군은 필사적으로 버텼다.

“이익! 죽어라, 오랑캐 놈아!”

“너나 뒤져라!”

“계속 밀어붙여!”

악을 쓰며 마구 다그치는 장수의 독려에 청군 병사들이 병장기를 휘두르며 달려들었지만 상대의 방진은 좀처럼 뚫리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더 단단해지는 느낌마저 들었다.

피해가 늘어나는데도 불구하고 청군은 상대가 막고 있는 곳을 돌파하기 위해 끊임없이 덤벼들었다.

찌르고 베며 사방에 피가 튀었지만 청군은 악착같이 공격하기를 주저하지 않았고, 명군도 이를 악물고 막아 냈다.

그렇게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이면서도 허물어진 부분은 돌파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좁은 곳에 병력이 몰리다 보니 청군은 수적 우위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

그러자 청군은 작전을 바꿔 무너진 곳을 공격하는 동시에 성문도 함께 두들겼다.

성벽에 걸쳐진 공성용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고 도끼로 성문을 찍어서 부수는 등 그야말로 파상 공세를 펼쳤다.

명군도 지지 않고 끓인 기름을 쏟아붓고 돌을 아래로 던지면서 방어전을 펼쳤다.

“이거나 먹고 꺼져라!”

휘이익.

퍼억!

“컥.”

성벽을 반쯤 올라온 청군 병사는 위에서 떨어뜨린 돌에 머리를 얻어맞고 그대로 비명을 지르며 추락했다.

성문 앞에 몰려 있던 병사들은 펄펄 끓인 기름을 뒤집어쓰고 몸부림을 쳤다.

쏴아아아!

“뜨, 뜨거워.”

“방패를 머리 위로 들어 올려서 공격을 막아!”

장수의 고함에 병사들은 허겁지겁 방패를 들어 지붕을 만들어서 명군의 공격을 막고는 도끼를 가진 도부수刀斧手 수십 명을 동원해 성문을 마구 찍어 댔다.

두껍고 단단한 목재에 얇은 철판까지 입혀 특별히 강화한 성문이었지만 계속되는 도끼질에 조금씩 부서졌다.

꽝! 꽝!

“조금 더 힘을 내서 도끼를 휘둘러라!”

그러자 성문 뒤에 있던 명군 장수가 얼굴을 구기면서 소리를 질렀다.

“목재를 더 가져와서 빨리 성문을 보강해!”

“옛.”

가뜩이나 성벽 일부가 무너진 상황에서 성문까지 뚫리면 그때는 정말 끝장이라는 걸 명군 병사들도 알고 있기에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부리나케 달려가 한쪽에 쌓아 둔 아름드리나무 목재를 낑낑거리며 들고 왔다.

그걸로 지지대를 세우고 부서져 벌어지는 곳이 있으면 바로바로 널빤지를 가져와 막았지만 이 상태라면 얼마 버틸 수 없을 것 같았다.

성루에서 전황을 살피던 오삼계는 그걸 보고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런.”

“성문이 위험합니다.”

부관의 다급한 보고에 미간을 찌푸린 오삼계는 지체 없이 명령을 내렸다.

“벌써 쓰기에는 아깝지만 어쩔 수 없지. 준비해 놓은 흑수黑水를 써서 놈들을 모조리 태워 버리게.”

“알겠습니다.”

잠시 후 일단의 병사들이 시커먼 액체가 가득 들어 있는 들통을 하나씩 가지고 성문 위로 올라와서는 아래로 쏟아 버리기 시작했다.

끈적끈적하고 토할 것 같은 냄새까지 풍기는 검은 액체는 명나라 병사들이 머리 위로 들고 있는 방패를 흥건히 적셨다.

“으윽. 이게 뭔 냄새야?”

“새끼들이 오물 뿌린 거 아냐.”

“이 자식들! 성문만 열리면 다 아작을 내 버리겠어.”

방패 틈 사이로 흘러내린 검은색 액체를 보고 청군 병사들은 잠시 뒤 무슨 일이 닥칠지 상상도 못 한 채 투덜거리며 빨리 성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바닥이 질척질척해질 정도로 정체불명의 액체를 뿌린 명군은 거북이처럼 방패를 올리고 있는 적을 향해 횃불을 집어 던졌다.

휘이익.

화르르륵!

그러자 갑자기 엄청난 불길이 솟아나 성문 앞에 몰려 있던 청군 병사들을 몽땅 다 집어삼켰다.

명군이 뿌린 흑수의 정체는 바로 만주 일대에서 가끔씩 발견되는 죽음의 물, 즉 원유였다.

기름보다 몇 배나 더 센 화력과 한번 몸에 묻으면 잘 씻기지 않는다는 성질을 우연히 알게 된 오삼계가 위기의 순간에 화공을 펼치려고 준비한 비장의 수였다.

그런 것도 모르고 흑수가 방패와 옷에 묻는데도 털어 내지 않고 그냥 놔둔 청군 병사들은 어떻게 해 볼 틈도 없이 온몸에 불이 붙었다.

불길은 모든 걸 태워 버리려는 듯 덩치를 키웠고 그 속에 갇힌 청군 병사들은 숯덩이가 되어 고통에 비명을 내질렀다.

온몸에 불이 붙은 병사들이 옆으로 튀어나와 땅바닥을 마구 굴러 댔지만 불은 꺼지지 않고 계속 살을 태웠다.

“끄아악.”

“사람 살려!”

불길이 얼마나 센지 높은 성루 위에 서 있는 오삼계도 후끈한 열기와 살 타는 냄새가 느껴질 정도였다.

시뻘건 화염과 함께 성문을 두들기던 병사 수백 명이 한순간에 불쏘시개가 되어 사라지자 본진에서 이를 지켜보던 예친왕의 눈썹이 위로 치켜 올라갔다.

“젠장할! 뭐하는 거야. 어서 병력을 더 투입해서 저것들을 다 쓸어버려.”

“아, 예.”

너무나도 충격적인 광경에 잠시 넋을 놓고 있던 용골대는 황급히 머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망루에 올라가 있는 신호수가 깃발을 흔들자 대기하던 몽고족 병력이 앞으로 나서 전투에 가세했지만 산해관은 좀처럼 함락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한편 도현이 있는 조선군 지휘부도 의외로 선전을 펼치며 공격을 잘 막아 내는 명군의 모습에 감탄성을 터트렸다.

“뭘 썼는지 모르지만 성문에 몰려 있던 병력을 한 번에 다 태워 죽이다니 명군도 대단하군요.”

도현을 만나고 나서 명을 무조건 떠받치는 생각을 많이 고쳤지만 그래도 청보다는 명에 더 마음이 가던 임경업 장군이 고소하다는 듯이 말하자 옆에 있던 소현세자도 맞장구를 쳤다.

“그러게 말이오. 이거 잘하면 청군이 패할 수도 있겠소이다.”

다른 눈이 있어 티 나게 좋아하지는 못해도 쌤통이라는 표정을 짓는 두 사람과 달리 도현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그렇게 좋아할 일은 아닌 것 같아요.”

“무슨 말이냐?”

“잘 생각해 보세요. 오늘 전투가 이대로 끝나고 싸움이 장기화되면 필연적으로 우리도 저 아수라장에 투입되지 않겠어요?”

도현의 말에 자신들의 처지를 떠올린 두 사람은 미소를 지우며 얼굴을 굳혔다.

“그렇구나.”

병력을 최대한 보존하려는 조선군 입장에서 공성전이 길게 이어지는 건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았다.

자신이 한 이야기 때문에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자 도현은 양쪽 어깨를 으쓱이고는 일부러 가벼운 어투로 말했다.

“뭐, 그래도 일단은 산해관이 무너지지 않고 명국이 계속 건재하면 청도 우리 조선을 너무 심하게 핍박하지는 못할 테니 꼭 나쁘기만 한 건 아니지요.”

“맞는 말씀입니다.”

임경업 장군이 얼른 동의하자 소현세자는 한창 전투가 진행 중인 산해관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순망치한脣亡齒寒이라는 건가…….”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는 뜻으로, 서로 호응하지 않으면 똑같이 망하거나 어려움을 겪는다.

지금 명과 조선이 처한 상황에 빗대기에는 조금 틀린 점이 있었지만 명이 멸망하고 청국이 대륙을 지배하게 되면 현재보다 조선의 위치가 더 어려워지는 건 틀림없었다.

소현세자의 말에 도현은 머릿속으로 자신이 알고 있는 역사를 천천히 되새겨 보며 지금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이익인지 고심했다.

굳이 역사를 알지 않더라도 돌아가는 상황을 볼 때 청이 대륙의 새로운 지배자로 우뚝 서는 건 시간문제, 지금이라도 명보다는 청과 친하게 지내는 것이 여러모로 이득이었다.

하지만 조선의 권력을 쥔 사대부 대다수가 벌써 이자까지 배로 쳐서 갚았을 재조지은再造之恩을 거론하며 하늘같이 명을 떠받들고 있었기에 도현이 조금이라도 청과 친하게 지내려는 낌새가 보이면 당장 온갖 비난이 빗발칠 것이 분명했다.

특히나 아버지인 인조의 총애를 받고 있는 후궁 조씨가 소현세자와 자신을 끌어내리기 위해 호시탐탐 노리는 상황에서 조금이라도 치고 들어올 수 있는 틈을 보이는 건 아주 위험한 행동이었다.

결국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가만히 있어야 하는 상황에 살짝 짜증이 난 도현은 이마에 굵은 주름살을 만들었다.

“아무래도 내가 마음 편히 움직이려면 한양에 있는 여우부터 처리해야겠어.”

“응? 방금 뭐라고 했느냐?”

자신도 모르게 생각이 입으로 튀어나온 도현은 소현세자가 고개를 돌리며 쳐다보자 약간 당황한 얼굴로 한 손을 내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래?”

의아한 표정을 짓던 소현세자가 이내 신경을 끄고 다시 전장에 집중하자 도현은 몰래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렇게 시간이 계속 흘러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지는 저녁이 됐지만 청군은 처음 땅굴을 폭발시켰을 때만 해도 금방 함락시킬 것 같았던 산해관 성문을 넘지 못하고 있었다.

“전하, 더 이상은 무립니다. 일단 병사들을 뒤로 물려 재정비를 한 다음에 내일 다시 공성전을 펼치시지요.”

용골대가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자 예친왕은 핏발이 선 눈으로 호통을 쳤다.

“이대로 꼬리를 말고 물러서자는 거야!”

찔끔했지만 이 자리에서 화가 난 예친왕을 상대할 수 있는 건 그나마 자신뿐이었기에 용골대는 애써 용기를 냈다.

“그게 아니라 병사들이 치쳤기에 잠시 휴식을 취하자는 겁니다.”

“이익…….”

마음 같아서는 이대로 명군을 계속 몰아붙여 승부를 보고 싶었지만 이미 피해가 크고 야간전투 준비도 전혀 되어 있지 않았기에 이 시점에서는 전투를 중지하는 것이 상책이었다.

이걸 알고 있었지만 분한 마음에 좀처럼 결정을 내리지 못하던 예친왕은 이를 부드득 갈면서 산해관을 한참 노려보다가 입을 열었다.

“병력을 뒤로 물려.”

얼마나 억울하고 화가 나는지 꽉 깨문 입술에서 피가 살짝 흘러내렸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혹시라도 마음이 변할까 봐 용골대는 서둘러 신호수에게 손짓했고 잠시 뒤 청군 본진에서 후퇴를 알리는 북소리가 울렸다.

둥! 둥! 둥!

그러자 격렬한 싸움을 벌이던 병사들은 이제 살았다는 표정으로 공격을 멈추고 천천히 뒤로 물러섰다.

아슬아슬한 위기를 몇 번이나 넘기며 성을 지켜 낸 명군은 무수히 많은 시체를 남기고 돌아가는 적군을 보며 환호성을 질렀다.

“우와아! 우리가 이겼다.”

“이 오랑캐 놈들아! 어디 한번 또 덤벼 봐라!”

“다시 오면 아주 개박살을 내 주마!”

“하하하!”

성루 위까지 기어 올라온 적병을 상대하느라 갑옷 여기저기에 피가 묻은 오삼계는 병사들이 소리치는 걸 들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겨우 버텨 냈군.”

그러자 오삼계 못지않게 갑옷이 더럽혀진 부관이 어디서 났는지 시원한 물을 한 대접 건네주며 말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마침 목이 말랐는데 고맙군.”

벌컥벌컥 냉수를 다 들이켠 오삼계는 입가에 묻은 물기를 손바닥으로 닦고는 폭발에 무너진 망루를 바라봤다.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어.”

“예. 놈들이 땅굴을 잘못 파서 다행이지 화약이 성문 아래에서 터졌다면……. 정말 상상하기도 싫습니다.”

성문이 박살 나는 것도 큰 충격이었을 테지만 그것보다 더 치명적인 건 오삼계를 비롯한 명군 지휘부 전체가 한곳에 모여 있었기에 자칫 잘못하면 전투를 시작도 하기 전에 머리를 잃고 모래성처럼 힘없이 허물어질 뻔했다.

그걸 생각하면 오삼계는 지금도 가슴이 서늘해졌다.

“그나저나 무너진 곳을 막느라 좌군장이 고생이 많았겠어.”

“나중에 피해 집계를 해 봐야겠지만 적과 정면으로 부딪친 일 대의 피해가 클 겁니다.”

“그렇겠지.”

아직 초반인데 예상치 못한 일로 정예 부대를 소모시켜 버린 것에 오삼계는 안타까운 얼굴을 하다가 이내 정색하며 말했다.

“그래도 일 대와 좌군장이 아니었다면 적들이 성안으로 몰려 들어와 우리가 버텨 내기 어려웠을 테니 어쩔 수 없지.”

“맞습니다.”

“분명 적들이 무너진 곳을 노리고 공격해 올 테니까 힘들더라도 가용 가능한 인력을 모두 동원해서 보수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부관도 망루가 박살 난 지점이 명군의 최대 약점이라는 걸 알기에 순순히 명령을 받아들였다.

이런 가운데 군영으로 돌아온 예친왕은 산해관에서 들리는 명군의 환호성이 마치 자신을 조롱하는 것 같아 물건을 손에 집히는 대로 집어 던졌다.

와장창!

쨍그랑!

“아아악! 이런 치욕이 있나.”

분노하는 예친왕의 모습에 용골대와 장수들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잔뜩 긴장한 얼굴로 마음을 졸였다.

도현 일행도 한쪽 끝에 서 있었는데 예친왕이 저렇게까지 화가 난 건 처음 봤기에 정색하며 가만히 있었다.

그렇게 한참 집기를 때려 부순 예친왕이 거칠게 숨을 쉬며 의자에 털썩 앉았다.

“후우. 용 장군.”

“말씀하십시오, 전하.”

“지금 당장 가서 땅굴 판 놈을 잡아 와!”

눈에 살기가 가득한 것이 여기서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는 뼈도 못 추릴 것 같다는 판단에 용골대는 갓 군대에 들어온 신병처럼 군기가 바짝 들어간 모습으로 얼른 대답했다.

“그렇지 않아도 전하께서 찾으실 것 같아 밖에 대기시켜 놨습니다.”

“끌고 와!”

“옛.”

용골대가 급히 손짓하자 입구 쪽에 서 있던 무장 하나가 밖으로 나가더니 잔뜩 겁에 질린 이유정을 끌고 들어왔다.

패대기쳐지듯 바닥에 무릎 꿇린 이유정은 야차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있는 예친왕을 발견하고는 황급히 몸을 엎드렸다.

“저, 전하. 살려 주십시오.”

“허어, 살려 달라……. 네놈이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 알고도 그딴 말이 나와!”

예친왕의 호통에 이유정은 하얗게 질린 표정으로 변명을 늘어놨다.

“빨리 작업을 끝내라는 지시에 서두르다 보니 방향이 약간 빗나간 겁니다. 제발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호오! 그러니까 작업을 재촉한 나 때문에 이렇게 된 거라는 말이지.”

“그, 그게 아니라…….”

“닥쳐라!”

꽝!

주먹으로 의자 팔걸이를 세게 내려친 예친왕은 이유정을 무섭게 노려보며 소리쳤다.

“애초에 너처럼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하며 눈치만 보는 이신(명나라에서 청으로 귀순한 신하를 가리키는 말) 놈을 믿는 것이 아니었어. 여봐라!”

“옛!”

“당장 이놈을 끌고 나가 능지처참한 뒤 그 목을 잘라 진영 입구에 걸어 오늘 죽은 병사들의 원혼을 달래 줘라!”

“예.”

대답과 함께 호위 무사 둘이 다가와 양팔을 잡자 이유정은 기겁하며 매달렸다.

“다시는 이런 실수를 하지 않겠습니다. 제발 살려 주십시오.”

“어서 끌고 나가지 않고 뭘 하느냐!”

강제로 질질 끌려 나가던 이유정은 이제 다 끝났다고 포기했는지 악이 받친 얼굴로 예친왕에게 저주를 퍼부었다.

“이 오랑캐 놈아! 초원에서 양젖이나 짜며 살던 천한 것들이 꼴에 나라를 세웠다고 거들먹거리는데 너희들은 절대 중원을 차지할 수 없을 거다!”

“저놈이!”

“저 주둥이를 막아라!”

만주족 출신들이 발끈하며 당장이라도 이유정을 때려죽일 듯 노려보는 것과 달리 명나라에서 귀순한 장수들은 아까 예친왕이 내뱉은 말 때문에 그런지 입을 꾹 다물고 굳은 얼굴로 가만히 서 있었다.

“읍읍!”

결국 이유정은 무사들에게 입이 막힌 채 짐승처럼 끌려 나갔다.

한바탕 소란이 지나가자 장수들은 얼굴을 붉힌 채 앉아 있는 예친왕의 눈치를 봤다.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놈 같으니라고.”

싸늘한 한기를 내뿜는 눈으로 좌중을 쓸어 본 예친왕은 입술을 살짝 비틀며 말했다.

“제 할 일을 제대로 못하는 놈이 나오면 오늘처럼 목숨으로 죄를 씻게 할 테니 알아서들 해. 알겠나?”

“예, 전하.”

“소현세자.”

고개를 옆으로 돌린 예친왕이 눈을 맞추자 소현세자는 한 발자국 앞으로 나오며 대답했다.

“네.”

“이거 귀한 손님을 앞에 두고 안 좋은 모습을 보여서 면목이 없군.”

“아닙니다.”

“내일 전투부터는 조선군도 참여했으면 하는데 괜찮겠나?”

“…….”

잠시 말이 없던 소현세자는 지휘 막사로 오기 전에 도현에게 들은 이야기가 있었기에 이내 머리를 끄덕였다.

“전쟁을 도우러 왔으니 당연히 싸워야지요. 임 장군에게 지시를 내려 놓겠습니다.”

“고맙네.”

다시 시선을 바로 한 예친왕은 휘하 장수들을 보며 날이 바짝 선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내일 다시 산해관을 공격할 테니 기필코 성을 함락시킬 수 있게 다들 준비 단단히 하도록 해.”

“옛!”

장수들이 군례를 취하며 천막이 떠나가라 크게 대답했다.

내일 어떻게 산해관을 공략할 건지 한참 이야기를 나눈 예친왕은 늦은 밤이 되어서야 회의를 끝냈다.

지휘 천막을 나온 도현 일행은 각자 숙소로 돌아가지 않고 소현세자의 막사로 함께 갔다.

“늦으셨습니다.”

내관인 최형외가 마중을 나와 있다가 허리를 숙이자 소현세자는 약간 지친 얼굴로 한 팔을 내저었다.

“그렇게 됐어. 차를 좀 갖다 주겠나?”

“금방 대령하겠사옵니다.”

“다들 앉지.”

“네.”

막사 가운데 있는 원형 탁자에 세 사람이 둘러앉자 최 내관이 미리 데워 놓은 찻물로 따뜻한 녹차를 내왔다.

“향이 좋군. 역시 최 내관 솜씨는 알아줘야 돼.”

한 모금 맛을 본 도현의 칭찬에 최 내관은 살짝 머리를 숙였다가 들었다.

“감사합니다.”

“칠현이가 만들어 주는 건 조금 텁텁한 맛이 나거든.”

“그렇습니까?”

“시간이 되면 최 내관이 차 끓이는 걸 좀 가르쳐 줘.”

“알겠습니다, 마마.”

그러자 상석에 앉아 있던 소현세자가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이거 깐깐한 최 내관한테 교육을 받으려면 칠현이가 고생 좀 하겠는데.”

“걘 그래도 돼요.”

“하하하!”

지휘 막사에서 있었던 일로 약간은 무거웠던 분위기가 도현 덕분에 풀어졌다.

“그나저나 내일부터는 우리도 전투에 참여하게 됐으니 큰일이구나.”

“청 황제의 요구를 받아들여 병력을 보냈을 때부터 예상했던 일이잖아요.”

“맞습니다. 그동안 훈련을 잘 시켜서 개죽음 당하지는 않을 테니 너무 심려하지 마십시오.”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아무튼 큰 피해가 없도록 장군이 잘 지휘해 주시오.”

“알겠습니다, 저하.”

살짝 고개를 숙이며 대답하는 임경업 장군을 보며 옆에 있던 도현이 얼른 입을 열었다.

“아까 봤다시피 예친왕의 신경이 곤두서 있으니까 너무 티 나게 싸움을 회피하면 안 될 것이오. 차라리 의심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첫 전투에서는 화끈한 모습을 보여 주시오.”

도현이 이야기한 대로 하면 사상자가 나오는 건 어쩔 수 없지만 땅굴 작전의 실패로 청군 진영 분위기가 안 좋았기에 소현세자와 임경업 장군은 별말 없이 수긍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아까 지휘 천막에서 이신들의 표정 봤어요?”

“다들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더구나.”

“장수들은 물론이고 우리와 몽고족 족장까지 모인 자리에서 아예 대놓고 명을 버리고 청으로 귀부(스스로 와서 복종하는 것)한 이신들을 기회주의자에 겁쟁이로 깔아뭉갰으니 기분이 좋을 리가 있겠어요.”

“힘을 합쳐도 부족할 판에 자중지란의 조짐이 보이다니 큰일입니다.”

임경업 장군이 약간 걱정스러운 얼굴로 이야기하자 도현은 한쪽 입꼬리를 위로 말아 올렸다.

“한동안 군영 분위기가 어수선하겠지만 이걸로 가뜩이나 불편했던 재상인 범문정을 중심으로 한 이신 세력과 예친왕의 사이가 더 안 좋아지면서 우리가 파고들 틈이 생겼으니 잘된 일이지요.”

미처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던 소현세자와 임경업 장군은 이야기를 듣고 작게 감탄성을 내뱉었다.

“아! 그렇구나.”

“확실히 청국 내부가 흔들리면 우리한테는 이익이겠군요.”

“그럼 우리는 어느 쪽에 줄을 대는 것이 좋겠느냐?”

동생의 총명함을 익히 알고 있는 소현세자는 이왕 말이 나온 김에 가장 중요한 걸 물었다.

그러자 도현은 바로 대답을 하지 않고 한 손으로 턱을 잠깐 매만지다가 이야기를 했다.

“글쎄요……. 물과 기름처럼 좀처럼 하나로 섞이기 힘들지만 두 사람 다 군부와 행정부를 장악하고 청국을 실질적으로 이끌어 가는 기둥이니 감정싸움 정도는 몰라도 정면충돌은 회피하려고 할 거예요.”

“왜 그러지?”

“원래 그러면 어떻게든 한쪽을 쓰러뜨려 권력을 쟁취하려는 것이 보통 아닙니까?”

고개를 갸웃거리며 두 사람이 의아한 시선을 보내자 도현은 빙긋 미소 짓고는 이야기를 이었다.

“일반적인 경우에는 그렇겠지만 일단 황제인 홍타이지가 어느 쪽에도 쏠리지 않고 균형을 잘 맞춰 주고 있는 데다 무엇보다 서로의 영역이 명확하게 나뉘어 있고 중원 정복이라는 큰 목표를 가지고 있는 이상 양쪽 다 쉽사리 칼을 들이밀지는 못할 겁니다. 거기다 한 가지 덧붙인다면 아무리 예친왕이 군부 실세라고 하지만 다른 친왕들이 가진 힘도 무시하기 어렵다는 거지요.”

소현세자와 임경업 장군뿐 아니라 시중을 들기 위해 한쪽에 서 있던 최 내관까지 도현의 설명에 머리를 끄덕였다.

“하긴 범문정이 다른 친왕들과 손을 잡으면 예친왕도 골치 아파지겠지.”

“그러면 우리도 범문정과 손을 잡아야 되는 것 아닙니까?”

임경업 장군의 말에 소현세자도 호전적인 예친왕보다는 그래도 말이 통하는 범문정 쪽에 더 마음이 가는지 동의하는 표정을 지었다.

요즘 와서 약간씩 어긋나는 경우가 있었지만 그래도 역사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알고 있는 도현은 생각해 볼 것도 없이 바로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주 위험한 선택이에요.”

“예?”

“아무리 황제의 총애를 받는다고 해도 범문정보다는 황족인 예친왕이 더 힘이 센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고 무엇보다 현 황제의 신변에 이상이 생겼을 때 후계를 이을 황자가 이제 겨우 열 살도 안 됐다는 점이 문제예요.”

“……!”

이 시대에는 황제의 안위에 대해 사사로이 이야기를 꺼내는 것 자체가 대역죄였기에 소현세자와 임경업 장군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깜짝 놀랐다.

구중궁궐에서 잔뼈가 굵은 최 내관은 재빨리 막사 밖으로 나가 혹시 엿듣는 사람이 없는지 살펴보고는 다시 돌아와 소현세자를 향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앉아 있던 소현세자는 도현과 시선을 맞추며 진지한 어투로 입을 열었다.

“내가 모르는 사실을 알고 있는 거냐?”

역사에 나와 있는 일이라고 사실대로 말해 줄 수 없었던 도현은 대충 이야기를 지어냈다.

“확실한 건 아니지만 황제의 건강에 문제가 있다는 걸 믿을 만한 소식통을 통해서 들었습니다.”

“정말이냐?”

“예.”

“으음.”

워낙 엄청난 일이라 재차 묻기까지 한 소현세자는 확신이 들지 않으면 이야기를 입 밖으로 내지 않는 도현의 성격을 알기에 낮게 침음성을 내뱉었다.

함께 있던 임경업 장군과 최 내관도 마찬가지로 표정이 심각해졌다.

“청을 일으킨 누르하치가 뛰어난 능력 때문에 후계자로까지 생각했던 예친왕입니다. 그런데 후계 구도가 제대로 안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만약 현 황제의 건강에 이상이 생긴다면 누가 황좌를 물려받겠습니까?”

“그럼 예친왕이…….”

“확률은 반반이지만 그럴 가능성이 크고 설사 범문정과 다른 친왕들의 반대로 황제가 되지 않더라도 어린 조카 뒤에서 모든 권력을 휘어잡고 대리 청정을 하겠지요. 한마디로 어떤 결과가 나오든 예친왕이 정국 운영의 주도권을 쥘 거라는 겁니다.”

반박할 수 없을 정도로 빈틈없고 정확한 분석에 두 사람은 그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이건 제 예상일 뿐이고 앞으로의 일이 어떻게 흘러갈지 모르니까 당분간은 괜히 양쪽의 권력 다툼에 피해를 보는 일이 없도록 적당히 거리를 두고 지켜보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해요.”

다 식어 버린 찻잔을 손에 들고 잠시 고심하던 소현세자는 도현의 말에 머리를 끄덕였다.

“그러는 것이 좋겠구나. 오늘 나눈 이야기가 밖으로 새어 나가면 큰 곤욕을 치를 수 있으니 다들 입단속을 하도록 해.”

“예.”

“알겠습니다, 저하.”

목이 타는지 남아 있던 차를 단번에 들이켠 소현세자는 마주 앉아 있는 도현을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복잡한 마음에 그냥 이야기나 좀 나누려고 했는데 더 심란해진 것 같구나.”

“죄송해요.”

“아니다. 오히려 일이 터지기 전에 그런 중요한 정보를 알게 돼서 다행이지.”

“맞습니다.”

“그건 나중 일이고 지금 당장은 전투에 신경을 집중하도록 합시다.”

“네.”

“오늘은 밤이 늦었으니 이만합시다.”

소현세자의 말에 임경업 장군과 도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살짝 머리를 숙였다.

“그럼 편히 주무십시오.”

“내일 봅시다.”

다음 날 아침 일찍부터 군영을 나온 청군은 기필코 오늘은 산해관을 함락시키겠다는 듯 파상 공세를 펼쳤다.

임경업 장군이 지휘하는 조선군은 몽고군과 함께 어제 전투로 지친 청군을 대신해 선봉을 맡아 성문을 공격했다.

하지만 밤사이 흙과 바위로 망루가 무너진 곳에 임시 토벽을 쌓은 명군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결국 시체 위에 다시 시신이 쌓이고 그 밑으로 시뻘건 피가 강을 이루며 흐르는 인세의 지옥이 펼쳐졌지만 독이 바짝 오른 예친왕은 물러서지 않고 병력을 계속 교대하며 산해관을 두들겼다.

무려 이틀 밤낮 쉬지 않고 이어진 전투에 명군은 몇 번이나 무너질 뻔했지만 필사적으로 버티며 성을 지켜 냈고 그 이후부터 싸움은 지루한 소모전으로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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