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동반도
병력을 보존하려고 최선을 다했지만 소모전이 이어지며 몇 번이나 전투에 투입되자 조선군의 피해도 계속 누적됐다.
“총 사상자는 사백팔십 명이고 그중 쉰 명은 부상이 약해 며칠 뒤에는 다시 전투에 나설 수 있을 겁니다.”
“사백팔십 명이라. 피해가 크군.”
도현의 중얼거림에 보고를 하던 부장 박도치는 송구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하필 오늘 우리가 맡은 지점에 상대편 궁수대가 집중 배치되어 있어서 피해가 컸습니다.”
“운이 나빴던 게지.”
씁쓸하게 말한 소현세자가 손짓하자 박도치는 허리 숙여 읍을 하고는 막사를 나갔다.
막사 안에는 소현세자와 도현 그리고 임경업 장군까지 세 사람이 앉아 있었다. 다들 긴 전투에 지쳤는지 얼굴이 좋지 않았다.
“지금까지 죽은 병사가 몇 명인가?”
소현세자의 물음에 임경업 장군은 굳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천 명이 넘었습니다.”
“후우. 전쟁은 끝날 기미가 안 보이는데 벌써 이 할이나 잃었군. 이러다가 병사들을 모두 여기다가 묻는 건 아닌지 걱정이야.”
“그런 일은 없을 거예요.”
애써 위로를 하면서도 상황이 너무 암울했기에 도현의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당장 내일은 또 얼마나 죽어 나갈지……. 임 장군.”
“말씀하십시오, 저하.”
“아까 경상을 입은 병사들을 치료가 끝나는 대로 다시 전투에 투입한다고 했지 않소?”
“그렇습니다.”
“그러지 말고 의원들한테 말해 부상병들의 복귀를 최대한 늦추라고 하시오.”
“……!”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던 임경업 장군은 이내 꼼수를 써서라도 전투에 참여하는 병사의 숫자를 줄이려는 소현세자의 뜻을 알아차리고는 머리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거 괜찮은 방법인데요.”
도현의 말에 소현세자는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이런 수까지 써야 한다니 참 한심스럽구나.”
“병사들의 목숨을 살리는 건데 뭐 어때요.”
“봉림대군마마의 말씀이 맞습니다.”
“그건 그렇고, 내일 또 공격을 한다고?”
“예. 다행히 몽고족 병력이 선봉에 선다고 합니다.”
대답을 들은 소현세자가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나마 다행이군.”
그때 입구를 가리고 있던 휘장을 젖히며 방금 전 나갔던 부장 박도치가 다급한 얼굴로 뛰어 들어왔다.
“저하! 급보이옵니다.”
“세자 저하 앞에서 어찌 이 호들갑인가?”
옆에 있던 임경업 장군이 꾸짖듯 질책하자 박도치는 그제야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는 자세를 바로 했다.
“급한 마음에 제가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저하.”
“아닐세. 그것보다 무슨 일이라도 있나?”
용건을 떠올린 박도치는 얼른 입을 열었다.
“청 황제가 도착했습니다.”
“뭐라고!”
황제인 홍타이지가 후군을 이끌고 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예정보다 그 시기가 빨랐기에 세 사람은 깜짝 놀랐다.
“다음 달에나 올 줄 알았는데 벌써 왔다고?”
도현의 물음에 박도치는 바로 대답했다.
“예. 지금 어가 행렬이 군영으로 들어오고 있습니다.”
시선을 돌려 도현이 쳐다보자 소현세자는 복잡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가 보자꾸나.”
“네.”
세 사람이 서둘러 천막 밖으로 나가자 어느새 소문을 듣고 병사들이 잔뜩 몰려나온 가운데 화려한 어가 행렬이 들어오는 걸 볼 수 있었다.
황제의 등장에 전투로 지쳐 있던 청군 병사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기뻐했다.
“황제 폐하시다!”
“폐하께서 지원 병력을 이끌고 오셨다!”
“만세! 만세!”
그걸 보며 도현은 쓰게 웃었다.
“밑바닥이던 사기를 단번에 끌어올리다니, 황제의 힘이 대단하긴 하군요.”
“그러게 말이다.”
“괜히 트집 잡히지 않으려면 우리도 가 봐야 되지 않겠습니까?”
도현이 눈짓으로 가리키는 곳을 본 소현세자는 예친왕과 청국 장수들이 도열해서 마중 나가 있는 걸 보고 머리를 끄덕였다.
“그게 좋겠지.”
어쩐지 청 황제의 위세를 높이는 광대놀음에 끼어드는 것 같아 썩 내키지 않았지만 상대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기에 세 사람은 서둘러 예친왕과 장수들이 있는 곳으로 갔다.
황금과 온갖 진귀한 보석으로 장식돼 실용성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오직 황제의 권위를 세우는 용도로 제작된 갑옷을 입고 눈처럼 하얀 백마에 올라탄 홍타이지는 커다란 지휘 막사 앞에 예친왕을 비롯한 장수들이 한쪽 무릎을 꿇고 있는 걸 보고 말에서 내렸다.
황제가 앞으로 다가오자 예친왕의 선두에서 장수들이 큰 소리로 예를 갖췄다.
“폐하를 뵙습니다.”
“다들 반갑소.”
얼굴 가득 넉넉한 미소를 지으면서 황제가 한 말에 장수들은 더욱 머리를 조아렸다.
“대업을 이루기 위해 이 먼 산해관까지 나와 적과 싸우느라 수고가 많소.”
“아닙니다. 산해관 안에서 폐하를 맞이하지 못해 송구스러울 뿐입니다.”
“짐도 아쉽기는 하지만 천하제일관이라 불리는 산해관을 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니 너무 자책하지 마시오.”
괜찮다는 듯 허허거렸지만 황제의 눈이 차갑게 굳어 있는 걸 본 도현은 상당히 화가 나 있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당장 불호령을 내리고 싶지만 병사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일부러 연극을 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도현뿐 아니라 예친왕 도르곤도 그런 황제의 마음을 알아차렸는지 이마를 땅에 찧으며 말했다.
“기필코 폐하의 깃발을 산해관 성문 위에 나부끼도록 하겠사옵니다.”
“하하하! 암, 그래야지. 예친왕만 믿고 있겠네.”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린 황제는 손수 예친왕을 일으켜서는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고 지휘 막사로 발걸음을 옮겼고 다른 장수들과 도현 일행도 조용히 뒤를 따랐다.
수십 명이 들어가도 넉넉하게 자리가 남을 정도로 큰 지휘 천막 안에는 언제 가져다 놨는지 황금을 씌워서 만든 황좌가 제단 위에 놓여 있었다.
황제인 홍타이지는 성큼성큼 걸어가 황좌에 앉았고 제단 바로 밑에 예친왕이 섰다.
소현세자와 도현은 몽고 족장들과 함께 왼편에 자리를 잡았고 반대편에는 청군 장수들이 긴장한 얼굴로 늘어서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천막 안으로 들어온 황제는 미소를 싹 지우고 무표정한 얼굴로 비스듬히 황좌에 기대앉아 장수들을 쓸어 봤다.
한겨울 바람보다 더 차가운 눈빛이 스치고 지나갈 때마다 장수들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몸을 경직시켰다.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팽팽하고 무거운 분위기에 도현과 소현세자는 물론이고 몽고족 족장들도 입을 꾹 다물고 눈치를 살폈다.
그렇게 얼마쯤 지났을까, 황제가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직까지 산해관에 명나라 깃발이 걸려 있는 이유가 뭔가?”
“…….”
어느 누구 하나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어색한 침묵만이 흐르는 가운데 황제는 오른편 앞쪽에 서 있는 용골대를 지목하며 재차 물었다.
“용 장군이 말해 봐. 왜 아직 함락시키지 못했지?”
“그, 그게 적들의 저항이 워낙 강해…….”
퍽!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황제가 던진 찻잔이 용골대의 이마를 때렸다.
“큭.”
신음과 함께 살이 찢어진 이마에서 시뻘건 피가 흘러내렸지만 용골대는 닦아 낼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자세를 바로 했다.
“다시 말해 봐.”
“저희가 제대로 공격을 하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그래. 자금성으로 가는 길을 열어 놓겠다고 호언장담해 놓고 아직도 이러고 있다니 정말 실망이야.”
“죽여 주시옵소서.”
황제의 말에 용골대는 털썩 그 자리에 엎드려 죄를 청했다.
시선은 용골대를 보고 있지만 모여 있는 사람들 모두 황제가 선봉대를 지휘한 예친왕을 야단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 고개를 살짝 숙인 예친왕의 얼굴은 치욕감에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런 예친왕을 힐끗 쳐다본 황제는 황좌에 등을 기댄 채 다시 용골대를 내려다봤다.
“죽어 마땅하지만 그동안 제국을 위해 헌신한 노력을 생각해 이번 한 번은 죄를 용서해 주겠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손짓을 해서 바닥에 머리를 대고 있는 용골대를 일어나게 한 황제는 좌중을 쓸어 보고는 특유의 묵직한 음성으로 이야기를 했다.
“답답한 현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묘책이 있나?”
그런 묘책이 있었으면 벌써 썼지 지금까지 지루한 소모전만 벌이고 있지는 않았을 터이기에 사람들은 하나같이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숙였다.
선뜻 나서 말하는 사람이 없자 심기가 불편해진 황제는 미간에 내 천 자를 그리다가 소현세자 옆에 있는 도현을 보고는 입을 열었다.
“호오! 봉림대군도 있었군. 지난번 영원성을 공략할 때 좋은 계책을 내서 큰 공을 세웠다고 하던데 이번에는 뭐 떠오른 생각 없나?”
튀지 않고 가만히 있으려던 도현은 황제가 자신을 콕 집어서 지목하자 살짝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황제가 묻는데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기에 한 발짝 앞으로 나왔다.
“아둔한 머리로 괜히 폐하의 심기를 어지럽힐까 두렵습니다.”
“조개처럼 입을 꾹 다물고 있는 이 쓸모없는 것들보다는 낫겠지. 뭐든 괜찮으니 어디 생각해 본 것이 있으면 말해 보게.”
재차 물어보자 내심 작게 한숨을 내쉰 도현은 평소 자신이 생각한 걸 적당한 수준에서 편집해 이야기했다.
“바다와 연결된 만리장성의 시발점인 산해관은 예전부터 북방 민족이 중원으로 들어오는 걸 막아 온 천혜의 요새입니다. 그만큼 오랜 세월에 걸쳐 보수와 증축이 계속 이루어져 지금에 와서는 가히 난공불락의 요새라고 불러도 모자람이 없지요.”
산해관이 공략하기 어렵다는 건 장수들뿐 아니라 황제도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기에 다들 머리를 끄덕이며 수긍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지.”
“비록 명이 전성기에 비해 많이 쇠락했다지만 그래도 중요한 전략 요충지인 만큼 산해관에는 정예 병력을 집중하고 지휘관인 요동총병에게 자율권을 주어 방어를 공고히 하고 있습니다. 그런 곳을 힘으로 함락시키려면 적잖은 희생을 감수해야 될 겁니다.”
“그래서 결론이 뭔가?”
“북경을 치려면 산해관을 뚫고 가는 것이 정석이지만 굳이 상대가 유리한 곳에서 힘든 전투를 벌여 피해를 키울 이유는 없지 않습니까. 차라리 바닷길을 이용해 산동에 상륙하거나 지난번처럼 산해관을 우회한 다음 만리장성 중 약한 곳을 무너뜨리고 북경으로 진격한다면 훨씬 피해도 적고 빨리 전쟁을 끝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도현의 설명에 좌중이 크게 술렁거렸다. 실제로 몇 년 전에 청군이 장자령을 넘어 들어가 화북 일대를 쑥대밭으로 만든 일이 있었기에 가능성이 더욱 커 보였다.
“하긴 굳이 산해관을 고집할 이유는 없지.”
“맞소. 거리로 따지면 승덕이나 조양을 통과하는 것이 산해관보다 더 가깝지 않소.”
평소 예친왕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눈을 반짝 빛내며 찬성 의견을 냈다.
“폐하, 제 생각에도 봉림대군의 계책이 타당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탐스럽게 자란 수염을 손등으로 쓸어내리며 고심하던 황제는 도현을 내려다보며 문제점을 지적했다.
“방어가 허술한 만큼 만리장성을 통과하면 수레 하나 지나가기 힘든 험준한 산악 지대가 나와서 보급에 어려움이 있는데 그건 어떻게 해결할 거지?”
핵심을 찌르는 질문이었다. 수십만 대군이 움직이는 만큼 보급은 전쟁의 승패를 결정할 정도로 중요했다.
“산악 지대라 보급이 어렵지만 밑으로 조금만 내려가면 풍족한 화북 지역이 나오니 휴대할 수 있는 만큼만 물품을 가져가고 나머지는 현지에서 조달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위험이 크지만 제대로 진행된다면 명나라의 북쪽 방어선을 완전히 붕괴시키고 대비가 허술한 북경을 단번에 함락시킬 수 있다.
잠시 생각을 해 보던 황제는 뭔가 마음에 안 드는 것이 있는지 이내 고개를 좌우로 내저으며 말했다.
“봉림대군의 계책도 괜찮지만 천하의 주인이 되려는 자가 어찌 꼼수를 써서 대업을 이루겠는가! 저 산해관 성문 현판에 적힌 천하제일관이라는 글처럼 희생이 크더라도 당당히 관문을 뚫고 자금성까지 내려가 진정한 황제가 누구인지 만천하에 보여 줄 것이다.”
선언하듯 말한 황제는 단 밑에 있는 예친왕을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예친왕.”
“예, 폐하.”
“사흘간 쉬면서 병력을 재정비한 뒤 새로 가져온 공성 무기와 화포를 총동원해 산해관을 무너뜨린다. 이번에는 내가 직접 전투를 지휘할 것이야.”
“알겠사옵니다.”
황제의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예친왕뿐 아니라 천막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허리를 숙이며 크게 복명했다.
그날 밤늦게까지 황제가 이끌고 온 본진 병력 십만이 계속해서 줄 지어 도착했고 예친왕은 근처에 있는 숲으로 병사들을 보내 공성 병기를 만들 목재를 대량으로 베어 왔다.
이런 상대편의 움직임에 대규모 공격을 예상한 오삼계는 서둘러 무너진 성벽을 보수하고 부족한 병기를 채워 넣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그런 가운데 북경에서 산해관으로 지원 병력을 보내는 걸 차단하기 위해 황제는 도현이 낸 계책을 일부 받아들여 소수의 병력을 산동반도에 상륙시켜 명 조정을 흔들기로 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별동대는 몽고와 조선군으로 구성되었다. 그동안 계속된 전투로 병력이 줄어든 데다 몽고족 전사들이 약탈전에 능하다는 이유를 들어 반 강제로 집어넣어 버린 것이다.
보병이라 몽고족과 달리 기동성이 떨어지는 조선군을 굳이 별동대로 편성한 건 이번 기회에 조선과 명 사이를 확실히 갈라놓으려는 홍타이지의 꼼수가 숨어 있었다.
당연히 도현과 조선군 지휘부는 이런 걸 알아차렸지만 그렇다고 황명을 거역할 마땅한 핑계가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해안으로 이동해 급히 부른 청국 수군 함대를 얻어 타고 산동반도로 향했다.
쏴아아!
뱃전에 부딪쳐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사라지는 파도 소리를 들으면서 도현이 함교 위에 서 있을 때 갑옷을 입은 임경업 장군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여기 계셨군요.”
“임 장군, 어서 오시오.”
“이제 두 시진만 더 가면 육지에 도착한답니다.”
“이틀 전에 배를 탔는데 금방이군.”
“때마침 불어온 순풍을 탄 덕분이지요.”
고개를 돌려 자신들이 떠나온 북쪽을 바라보며 도현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혼자 남겨진 형님이 잘 지내실지 걱정이오.”
조선군을 떠나보내면서 혹시나 그길로 달아날 것을 염려한 홍타이지는 가장 중요한 볼모인 소현세자는 계속 본진에 남도록 했다.
“최 내관도 있고 따로 호위 병력 일백을 남겨 뒀으니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적진 깊숙이 들어가는 우리보다 황제와 있는 세자 저하께서 더 안전하시지 않겠습니까?”
“하긴 그것도 그렇군.”
피식 미소를 지어 보인 도현은 바닷바람에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임경업 장군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작전은 지난번에 이야기한 그대로지요?”
“예. 하지만 명예로운 무인이 마적 떼처럼 성과 마을을 털고 불태워야 한다니 썩 내키지 않습니다.”
임경업 장군의 불평에 도현은 양쪽 어깨를 으쓱였다.
“나도 마찬가지요. 그렇지만 청군 장수가 직접 따라다니면서 감시를 한다니까 어쩔 수 없잖소. 대충 흉내라도 내야지.”
“몽고족은 아주 신이 난 모양입니다.”
“걔네야 약탈이 어색한 게 아닌 데다 예전부터 농사가 잘되고 무역이 발달해 부유한 지역인 산동반도에서 한몫 단단히 챙겨 갈 수 있게 됐으니 좋을 수밖에.”
“솔직히 약탈은 둘째 치고 명나라 토벌대가 몰려와서 불리한 상황이 되면 청 수군이 약속대로 우리를 데려갈지 걱정입니다.”
만약에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별동대로 온 조선군은 꼼짝없이 다 목숨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조선은 명과 사이가 좋으니 그냥 항복해 버리면 되지 않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강요에 의해 어쩔 수 없었다고 해도 본토까지 들어와 분탕질을 한 병사들을 자존심 센 명 조정이 그냥 내버려 둘 리 없다.
아마 많이 봐줘도 노예로 모두 팔아 버릴 것이 분명했다.
심양에서 노예로 끌려와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는 조선인들을 너무 많이 봐 온 도현은 그런 일이 벌어지는 걸 막기 위해 황제가 권유하지 않았는데도 스스로 별동대를 따라온 것이다.
최소한 왕자인 도현이 있으면 청도 쉽게 조선군을 버리는 패로 쓰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마냥 청군만 믿을 수 없었던 도현은 떠나기 전 봉황상단에 은밀히 연통을 넣어 모종의 대비책을 세워 두었다.
“내가 있는데 설마 자기들끼리 도망치겠소? 그리고 최악의 상황이 벌어지면 따로 생각해 둔 것이 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감사합니다.”
무슨 생각으로 도현이 별동대에 합류했는지 잘 알고 있는 임경업 장군은 진심 어린 표정으로 머리를 숙였다.
“쑥스럽게 왜 그러시오. 그럼 나도 갑옷으로 갈아입고 올 테니 나중에 봅시다.”
“예.”
임경업 장군의 대답을 들으며 도현은 밑에 있는 자신의 선실로 내려갔다.
대군이라는 특별한 신분 덕분에 독실을 배정받은 도현은 시중을 들기 위해 따라온 칠현과 함께 방을 쓰고 있었다.
독실이라고 해도 침대와 협탁 그리고 작은 탁자뿐인 협소한 곳이지만 나름대로 지내기에는 괜찮았다.
새파란 얼굴을 하고 엎어져 있는 저 녀석만 제외하면.
“끄응, 끄응. 아이고, 나 죽겠다…….”
“야, 나 왔다.”
분명히 문 열리는 소리를 들었을 텐데도 꼼짝없이 누워 있는 칠현을 향해 도현이 툭툭 발길질을 하자 그제야 고개를 스르륵 위로 들어 올렸다.
“마마, 오셨습니까아.”
“켁. 어째 아까보다 더 안색이 안 좋아진 것 같다.”
도현이 슬쩍 한발 뒤로 물러서자 칠현은 세상만사 다 산 표정으로 혼자 주절주절 떠들어 댔다.
“속을 얼마나 게워 냈는지 이젠 손가락 하나 까딱일 힘도 없어요. 흐어어…….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보겠다고 이런 꼴을 당해야 하는지. 흑흑…….”
“사내자식이 볼썽사납게 훌쩍거리지 말고 그만 일어나.”
다 죽어 가는 몰골로 누워 있기에 측은한 마음이 든 것도 잠시, 금세 입을 쫑알거리는 꼴을 보니 아직 힘은 남아 있구나 싶어 도현이 이리 오라고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왜요오?”
“두 시진 있으면 뭍에 도착한다니 슬슬 갑옷으로 갈아입어야지.”
“헉! 정말요? 얏호!”
팔을 위로 번쩍 들어 올리는 칠현을 보고 도현이 툭 한마디 던졌다.
“너 인마, 계속 골골거리던 거 다 엄살이지? 다신 안 속는다.”
“예? 아니, 진짠데요! 보세요. 지금도 속이 울렁거려서 금방이라도 토할 것 같……!”
“아 씨, 더러워! 어따 얼굴을 들이대? 얼른 가서 손이라도 씻고 와!”
도현이 버럭 성질을 내며 칠현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아야! 왜 맨날 때리세요. 저만 미워해!”
“네가 맞을 짓을 하니까 그러지. 휴우, 너랑 말싸움하니까 벌써 지친다. 아, 그만하고 얼른 갑옷이나 꺼내.”
“예이.”
칠현은 방 한편에 놔두었던 궤짝의 뚜껑을 열고 끙차 하며 갑옷을 꺼내 도현의 옆에 하나씩 늘어놓았다.
창과 화살을 막기 위해서 비늘 같은 모양의 쇠를 이어 만든 갑옷은 무게가 꽤 나가서 아무래도 혼자 입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도현이 팔목에 아대를 착용하는 동안 칠현은 매듭을 꽉 죄어서 갑옷을 단단히 고정했다.
“더 세게 묶어도 돼. 한창 싸우는 도중에 갑옷이 흐트러지면 안 되니까.”
“알겠습니다. ……으차!”
몇 번 해 봐서 손에 익은 작업이었기에 순조롭게 갑옷을 착용해 나가고 있는데 순간 파도가 높게 쳤는지 배가 흔들거리는 느낌이 났다.
“우웁!”
“헉! 너 설마 여기서 토하려는 건 아니지? 참아, 참아!”
갑옷 위에다 토해 버리면 죽여 버리겠다는 기세로 도현이 협박하자 칠현은 다급히 양손으로 입을 막고 도리질 쳤다.
“휴우. 넌 대체 왜 그러냐. 배 조금 흔들린 것 같고.”
“마마께선 이해하지 못하세요! 뱃멀미가 얼마나 고통스러운데요.”
억울하다는 듯이 소리치는 칠현과 달리 도현은 태연한 얼굴로 맞받아쳤다.
“그러게 진작 체력단련 좀 해 놓으라고 몇 번이나 누누이 말했잖아. 앞으로 나 따라서 어딜 가게 될지 모르는데 벌써부터 이래서야 되겠어.”
“헉! 설마 절 계속 여기저기 끌고 다니실 건……?”
“당연하지. 넌 전속 내관 아니냐. 어딜 가든 내 시중을 들러 따라와야지.”
“제, 제발 살려 주세요, 마마…….”
지금도 충분히 험한 꼴을 당하고 있는데, 앞으로 무슨 일을 겪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진저리를 치는 칠현을 보고 도현은 쌤통이라며 큭큭 웃었다.
“장난은 이쯤 하고, 어때? 다 끝났어?”
“예, 완벽합니다요.”
“좋아. 그럼 이제 도착하기만 기다리면 되겠군.”
정확히 두 시진 뒤, 별동대를 태운 청 함대 쉰 척은 산동반도 북부에 위치한 제법 커다란 규모의 포구에 도착했다.
끼룩끼룩.
갈매기들이 떼로 날아다니는 포구에는 수십 척의 배들이 정박해 있었다. 예전부터 물산이 풍부하고 무역이 발달한 곳인 만큼 종류도 고깃배와 상선 등 아주 다양했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 중 새벽에 작업한 고기 상자를 내리고 있던 중년 사내 한 명이 제일 처음 청국 함대의 출현을 발견했다.
“어? 저게 뭐지?”
“왜 또 꾀를 피워.”
일을 하지 않고 멍하니 바다 쪽을 바라보고 서 있는 모습에 동료가 눈가를 찌푸리며 타박하자 중년 사내는 놀란 얼굴로 황급히 소리쳤다.
“저, 저길 봐!”
“봐 봐야 바다지……. 헉!”
바쁜데 뭘 보고 이 호들갑이냐는 표정을 지으며 퉁명스럽게 말하던 동료는 수평선 가득 나타난 수십 척의 배를 보고는 헛바람을 삼켰다.
“왜, 왜구다!”
산해관 쪽에서 전쟁이 났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설마 청군이 여기까지 나타날 거라고는 생각조차 못 한 남자는 수시로 명나라 해안에 출몰해 노략질을 해 대는 왜구라고 단정 지어 고함을 질러 댔다.
뭐, 사실 청군이나 왜구나 쳐들어오면 약탈당하고 목숨을 잃기에 일반 백성들 입장에서는 둘 다 똑같은 존재였다.
순간 포구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집중됐고 이내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청 함대를 보고 혼란에 빠졌다.
“흐익!”
“정말 왜구 놈들이 나타났어.”
“어서 도망쳐!”
악랄한 왜구들의 행태에 대해 귀가 따갑게 소문을 들은 데다 실제로 몇 년 전에 습격을 당한 경험도 있었기에 사람들은 공포에 질린 얼굴로 하던 일을 모두 내팽개치고 안쪽으로 달아났다.
그렇게 난리가 난 가운데 제일 먼저 몽고족 전사들을 태운 배들이 텅 빈 포구에 도착했다.
쿠웅!
두꺼운 널빤지를 이어 붙여서 만든 잔교가 신속하게 내려지자 몽고족 전사들은 말을 탄 채 그대로 하선했다.
“큭큭큭! 마음껏 빼앗고 다 불태워 버려라.”
“옛.”
대족장인 야율수이의 외침에 큰 소리로 호응한 전사들은 탐욕에 찬 눈을 번득이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마치 물 만난 고기처럼 몽고족 전사들은 열 명씩 몰려다니며 약탈을 시작했다.
“히야!”
“사, 살려 줘.”
슈각!
“크윽.”
“꺄아악!”
말을 타고 달리던 전사들은 남자가 보이면 그대로 칼을 휘둘러 죽이고 아녀자들은 낚아채 옆구리에 꼈다.
인구도 많고 상선들이 수시로 드나드는 포구였기에 현령이 상주하는 지방관청이 있지만 누구 하나 병사들을 이끌고 나오지 않았다.
소식을 듣자마자 현령과 포졸들이 제일 먼저 짐을 싸서 줄행랑을 쳤고, 관리한테 버림받은 백성들만 가족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 저항하다가 칼에 찔려 죽거나 짐승처럼 질질 끌려 나왔다.
그렇게 한바탕 난장판이 휩쓸고 지나간 포구에 조선군이 상륙했다. 그들은 앞서 도착한 몽고족 전사들과 달리 오와 열을 맞춰 질서 있게 하선하고 함부로 흩어져 약탈도 하지 않았다.
배에서 내린 도현은 마을 쪽에서 들려오는 비명 소리와 시커먼 연기를 보며 씁쓸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예상은 했지만 보기 좋지는 않군.”
그때 붉은색 갑옷을 입고 머리에 두건을 쓴 칠현이 고삐를 잡고 안장이 씌워진 갈색 말 두 필을 끌고 왔다.
“마마, 오르십시오.”
“그래.”
깍지를 껴서 내민 칠현의 손바닥을 밟고 말에 오른 도현은 마침 옆으로 다가온 임경업 장군을 보며 말했다.
“임 장군, 행여나 병사들이 분위기에 휩쓸려 약탈에 가담하지 않도록 다시 한 번 단단히 주의를 주시오.”
“그렇지 않아도 잘 챙기라고 군관들한테 일러두고 오는 길입니다.”
“잘했소. 그럼 우리도 슬슬 출발해 볼까.”
“예.”
임경업 장군의 손짓에 부관이 뒤를 돌아보며 큰 소리로 외쳤다.
“출발!”
척척척! 척척척!
앞에 선 도현과 임경업 장군을 따라 행군하는 조선군 병사들의 움직임에는 군기가 가득 느껴졌다.
그런데 병사들의 숫자가 적은 것이 대충 봐도 이천 명 정도 밖에 안 됐다.
처음 오천 명이 조선을 출발해 그동안 산해관에서 격렬한 전투를 치르며 사상자가 많이 발생했다고 해도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원래는 삼천 명가량이 남아 있었지만 상황에 따라 산해관보다 훨씬 더 위험해질 수도 있는 산동반도로 가는 인원을 줄이려는 도현의 지시에 따라 약간이라도 다친 병사들은 다 남겨 놓고 온 것이다.
이미 몽고족 전사들이 한바탕 휩쓸고 지나갔는지 대로에는 가재도구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고 군데군데 피를 흘리며 죽어 있는 시신이 보였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약탈을 중지시키고 싶지만 그랬다가는 명군과 싸우기도 전에 자중지란이 일어날 수도 있었기에 애써 참으며 도현은 눈살을 찌푸린 채 말을 몰았다.
그렇게 마을을 가로질러 가던 도현은 왼편 골목 안에서 들리는 병장기 부딪는 소리에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가 누군가 몽고족 전사들과 어울려 싸우는 걸 보고 말을 멈춰 세웠다.
“왜 그러십니까?”
옆에서 같이 말을 몰던 임경업 장군이 의아한 얼굴로 쳐다보자 도현은 묘한 표정을 지으며 턱으로 골목 안을 가리켰다.
“저길 좀 봐.”
시선을 돌린 임경업 장군은 건장한 덩치의 사내 한 명이 거칠기로 유명한 몽고족 전사 세 명과 어울려 싸우는 모습에 제법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관군은 아닌 것 같은데 몸놀림이 예사롭지 않군요. 하지만 숨소리가 여기까지 들릴 정도로 거칠어진 걸 봐서 오래 버티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임경업 장군이 하는 이야기를 듣기라도 했는지 몇 합을 더 부딪치던 사내는 상대가 휘두르는 검에 옆구리를 깊게 베이는 부상을 입고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몽고족 전사들이 득의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사내에게 다가갔다.
“내 손에 잡히면 아주 포를 떠 주마.”
사내는 이를 악물고 손에 든 검을 들어 올렸지만 지치고 부상까지 입어서 그런지 아까보다는 기세가 확실히 죽어 있었다.
지금 다시 싸운다면 사내의 패배가 불을 보듯 뻔했다.
몽고족 전사들이 살기를 뿌리며 막 앞으로 달려들려는 순간 화살 한 대가 날아와 가운데 꽂혔다.
피슝- 퍽!
“어떤 놈이야!”
왼쪽 뺨에 긴 자상이 있는 전사가 신경질적으로 뒤를 돌아보자 도현이 활을 든 채 차갑게 말을 내뱉었다.
“거기까지. 셋이서 한 명을 핍박하는 건 너무 비겁하잖아.”
버럭 욕을 쏟아 내려던 전사들은 양옆에 서 있는 호위 무사들과 임경업 장군을 보고는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경계 어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가만히 있으면 될 걸 말을 듣지 않고 칼을 뽑아 들어서 저항하는 바람에 조금 혼을 내 주고 있는 것뿐이니 신경 쓰지 말고 갈 길이나 가시오.”
“싫다면?”
“지금 같은 편끼리 싸우기라도 하자는 거요!”
근처에 있는 동료들을 불러들이려는 듯 상대가 일부러 크게 고함을 치자 도현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여기서 괜히 분란을 일으켜 봤자 좋을 것이 없었지만 한쪽 구석에 어린아이를 껴안고 덜덜 떨고 있는 여인과 가족을 지키려고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몸을 억지로 지탱하고 선 사내의 모습이 계속 눈에 밟혀 외면할 수가 없었다.
“쯧.”
자신의 오지랖에 짧게 혀를 찬 도현은 품에서 은자 여섯 냥을 꺼내 바닥에 던졌다.
쨍그랑!
“이자들은 내가 데려갈 테니까 그거나 챙겨서 꺼져.”
“…….”
잠시 서로 눈빛을 교환한 전사들은 냉큼 은자를 주워 들고는 골목 반대편으로 사라졌다.
마지막 순간까지 은자를 주지 말고 싹 살인멸구를 해 버릴까 고심하던 도현은 고개를 살짝 흔들고는 아직도 검을 들고 경계 어린 시선을 보내고 있는 사내에게 멋있게 한마디를 해 줬다.
“이봐, 여긴 위험하니까 어서 가족들 데리고 다른 곳으로……. 어?”
아니, 해 주려고 했지만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동공이 풀린 사내가 힘없이 앞으로 털썩 쓰러졌다.
“뭐야?”
“기절한 것 같은데요.”
“누가 그걸 몰라서 묻는 거야!”
퍽!
“으윽.”
가뜩이나 황당한데 칠현이 뺀질뺀질한 얼굴로 속을 긁자 도현은 손바닥으로 뒤통수를 한 대 세게 갈겼다.
“여보!”
“아버지.”
가족으로 보이는 여자와 아이가 쓰러진 사내를 붙잡고 울음을 터트리자 도현은 입맛을 다시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귀찮게 됐군.”
현청은 함대를 이끌고 있는 청군 장수인 공유덕이 차지했기에 도현과 조선군은 마을 부호富豪의 장원에 임시 숙소를 차렸다.
마을뿐 아니라 근방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부잣집답게 앞뒤로 널찍한 정원이 있고 방만 쉰 개가 넘어 조선군 전체가 머물기에 충분했다.
칠현과 호위 무사들을 대동하고 안채로 들어간 도현은 신발을 신은 채 미닫이문을 열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아예 돈으로 쳐 발라 놨구만.”
스무 명은 들어와서 잘 수 있을 만큼 넓은 방은 도현의 말처럼 온갖 값비싼 물건들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고 바닥에는 귀한 백호피 가죽 깔개까지 있었다.
투구를 벗어 칠현에게 건네준 도현은 비단으로 만든 침상 위에 엉덩이를 대고 앉았다.
“임 장군은 뭐하고 있어?”
“정원에 숙영지를 세우는 걸 둘러보고 잠시 현청에 지휘소를 설치한 공유덕 장군을 만나 보러 간다고 했습니다.”
“거긴 왜?”
“아무래도 청 수군의 행보가 중요하니 분위기를 한번 보러 간 거겠지요.”
“쳇.”
청군의 눈치를 봐야 된다는 것이 살짝 짜증이 났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었기에 도현도 더는 트집을 잡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쯤 앉아 있었을까, 개인적으로 데리고 다니는 호위대 대장인 박영식이 작은 궤짝을 하나 가지고 안으로 들어왔다.
“이게 뭐야?”
탁자 위에 내려놓은 궤짝을 보며 도현이 묻자 박영식은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금 대인이라는 놈이 가지고 도망치는 걸 가져왔습니다.”
“그래?”
금 대인은 조선군이 차지한 장원의 주인으로, 포구 근처 땅을 다 가지고 있을 정도로 대지주이면서 고리 사채업으로 악명이 자자한 인물이었다.
교역 때문에 산동 지역을 자주 드나드는 봉황상단을 통해 필요한 정보를 입수한 도현은 이런 사실을 알고 피해를 주더라도 양심에 걸리지 않는 금 대인의 장원을 콕 찍어서 주둔지로 정했던 것이다.
그런 과정에서 떨어질 콩고물도 기대했는데 알아주는 부자인 만큼 창고에 쌓아 둔 재산도 많을 테니 기병 쉰 명과 호위대 일부를 먼저 상륙시켜 몽고족이 건들기 전에 장원을 선점하도록 했다.
그래서 다른 부자들과 달리 금 대인은 값비싼 패물을 챙겨 달아나기도 전에 포구에서 곧장 달려온 기병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난리 통에 급히 챙겨서 가져갈 정도면 아주 귀한 물건이 들어 있을 게 분명했기에 도현은 기대 섞인 시선으로 궤짝을 보며 말했다.
“열어 봐.”
“옛.”
퍼석!
단단한 검 손잡이로 자물쇠를 부수고 뚜껑을 열자 눈이 부시도록 환한 광채와 함께 온갖 값비싼 보석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우와! 엄청난데요.”
칠현은 눈이 부시다며 과장된 태도로 놀라움을 표했다.
한 점의 흠도 없이 완벽하게 둥근 유백색의 진주, 청색의 옥과 비취 등 누구나 그 반짝거림에 시선을 빼앗길 정도로 화려한 보석들이 많았지만 그중에서도 도현의 눈길을 끈 것은 유리처럼 투명한 금강석이었다.
동양에서는 금강석이라 부르고 서양에서는 다이아몬드라 칭하는 보석 중의 보석.
“뜻하지 않은 수확이로군.”
해적 소굴에서 챙겼던 재물들에 비하면 양으론 달리지만 질적으론 전혀 부족함이 없었다.
“좋았어. 칠현아, 이거 챙겨라.”
“알겠습니다!”
도현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칠현은 시시덕거리며 뚜껑을 도로 닫고는 궤짝을 안아 들었다.
“우왁! 이거 꽤 무거운데요.”
“징징거려도 안 도와줄 거다.”
“애초에 기대도 안 했습니다.”
궤짝 말고도 집 안에서 상당한 재물이 나왔다. 특히 다섯 채나 되는 창고에는 곡식과 비단이 한가득 쌓여 있어 도현을 흡족하게 만들었다.
곡식이 얼마나 많은지 이걸로 당분간 보급 걱정은 안 해도 될 정도였다.
장원의 한구석, 간소하지만 깨끗하게 정돈된 방 안에 커다란 덩치를 누인 흑치영은 고열로 신음하며 몸을 뒤척였다.
“으음…….”
이마에 와 닿는 차가운 감촉에 가까스로 눈을 뜨자 곁에서 간호를 하고 있던 부인이 급하게 말을 걸었다.
“여보, 정신이 드세요?”
“음……. 여기가 어디지.”
아직 반쯤 몽롱한 정신으로 낯선 천장을 바라보던 흑치영은 순간 정신을 잃기 전의 상황을 떠올리고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크윽!”
그러자 옆구리를 인두로 지지는 듯한 격한 통증이 느껴졌고, 이마에선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갑자기 움직이시면 안 돼요. 의원이 절대 안정이라고 몇 번이나 당부하고 가셨는데…….”
“다, 당신 괜찮소? 아이는?”
“밥 먹고 금방 잠든 참이에요. 당신 쉬시는 데 방해될까 봐 옆방에서 자라고 했으니 내일 아침이면 볼 수 있을 거예요.”
“그, 그렇다면 다행이고.”
흑치영은 귀신에라도 홀린 듯한 표정으로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히 정신을 잃기 전까지만 해도 아내를 겁탈하려고 한 나쁜 몽고족 놈들하고 맞서 싸우고 있었는데 지금은 또 낯선 방 안에서 이렇게 태연히 이야기를 하고 있다니.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요? 난 도무지 이해가 안 가는군. 여긴 또 어디고.”
“당신이 쓰러지기 바로 직전에 우릴 구해 주신 분이 계셨어요. 기억 안 나세요?”
아내의 물음에 흑치영은 혼란스러운 기억을 떠올리려고 애썼다.
그러고 보니 이제 다 끝났다 싶은 상황에서 갑자기 화살이 날아왔고, 어떤 젊은 사내가 나타난 것까지는 생각이 났다.
하필이면 그때 긴장이 풀렸는지 눈앞이 흐려지면서 쓰러지는 바람에 얼굴까지는 자세히 기억 안 나지만, 무척이나 젊은데 저런 말을 타고 있다니 뭔가 특별한 신분의 사람인가 보다는 인상만이 남아 있었다.
“그 사람인가, 말에 타고 있던?”
“그래요. 당신이 쓰러지는 바람에 어쩔 줄 몰라 하는 우리를 거둬 주시고, 이렇게 방까지 내주셨답니다.”
아내는 무척이나 감격스러운지 두 손을 꼭 붙잡고 말했다.
“그분이 안 계셨으면 길바닥에서 무슨 꼴을 당했을지 몰라요.”
“그래……. 그거 다행이로군.”
이런 최악의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살아날 길은 있는가 보다고 흑치영은 길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비록 직접 만나 보질 못했으니 뭐라 판단할 순 없지만 다 죽어 가는 사람을 이렇게 구해 준 걸 보면 나쁜 사람은 아니겠지.
게다가 아내가 저리 싱글벙글 웃으며 은인이라고 극찬하는데 어떻게 수긍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정신도 차렸는데 마냥 이렇게 누워 있을 순 없지. 은인께 감사하다는 인사라도 직접 드려야……. 윽!”
살짝 몸을 움직인 것만으로 날카로운 고통이 밀려들자 깜짝 놀란 아내가 달려와서 그를 억지로 눕혔다.
“여보, 괜찮아요?”
“으…….”
흑치영은 손을 아래로 내려 상처 부위를 만져 보았다.
깨끗한 붕대로 빈틈없이 감겨 있긴 했지만 흑치영이 움직인 탓인지 살짝 피가 배어 나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다행히 칼날이 안에 내장까지 닿진 않았지만 그래도 꽤 깊은 상처라 한동안은 요양이 필요하대요.”
“면목이 없군. 지금 우리한테 재산이라곤 튼튼한 몸밖에 없는데…….”
몽고족 전사들이 포구를 약탈하면서 그렇게 요란하게 지나갔으니 지금 와서 집에 돌아가 봤자 남은 게 없다.
다행히 세 가족 모두 목숨이라도 부지했으니 그나마 낫다고 할 순 있지만 몸이 이래서야 아내와 아이를 부양하기는커녕 오히려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 지경이 되어 앞길이 막막하기만 했다.
은인이라는 그 젊은 사내가 은혜를 베풀어 주었다곤 해도 언제까지나 계속 신세를 질 수도 없는 노릇.
“그런 말 하지 마요. 일단 은인께서 당신 몸이 나을 때까지 여기에 머물러도 좋다고 하셨으니, 지금은 그것만 생각해요. 네?”
“그게 정말이야?”
이런 척박한 세상에 아직도 선행을 베풀 줄 아는 사람이 있다니.
흑치영은 내심 감탄하며 아내가 권하는 대로 이부자리에 누웠다.
“으윽……. 후.”
가슴에 꽉 막혀 있던 근심거리가 사라지자 몸도 편해진 건지 베개에 머리를 대자마자 바로 곯아떨어졌다.
밤새 포구 마을을 분탕질한 몽고족 전사들은 그거 가지고는 성에 차지 않는다는 듯이 날이 밝자마자 뿌연 먼지구름을 피워 올리며 각 부족별로 흩어져 주변 고을을 약탈하러 떠났다.
이렇게 제 세상처럼 신이 나서 움직이는 몽고족과 달리 조선군은 거처로 정한 장원에서 대부분 머물며 조용히 둘째 날을 맞이했다.
임경업 장군과 함께 아침 식사를 한 도현은 상을 물리고는 칠현이 끓여 낸 녹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눴다.
“어제 공 장군을 만나러 갔다고 들었는데 뭐라고 하던가?”
차를 몇 모금 마시고 내려놓은 도현의 물음에 임경업 장군은 담담한 얼굴로 대답했다.
“당분간은 여길 거점으로 삼고 머물 생각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도현이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내려만 놓고 당장 요동으로 돌아갈 것처럼 하더니만 어쩐 일이지?”
“여기 있으면 떡고물이 짭짤하게 떨어진다는 걸 안 거지요.”
“떡고물?”
쓰게 웃으며 임경업 장군이 이유를 설명했다.
“약탈품을 요동까지 실어다 주는 대신 삼 할을 받기로 몽고족 족장들하고 약조를 했답니다.”
“그게 정말이야?”
“예. 어제 갔더니 넌지시 이야기를 해 주며 저한테도 생각이 있냐고 떠보더군요.”
“허어, 참. 그래서 뭐라고 했어?”
그러자 임경업 장군은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고는 태연히 이야기를 했다.
“거기서 뭐라고 합니까. 그냥 우리는 몽고족과 달리 노골적으로 약탈할 생각은 없지만 처치 곤란한 전리품이 생기면 도움을 받겠다고 했지요.”
잠깐 멍하니 쳐다보던 도현은 이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잘했어.”
“어찌 됐든 청군이 떠나지 않고 남아 있는다니 다행이지 않습니까.”
“그렇지.”
상황이 변하면 또 어떻게 될지 몰라도 일단 퇴로가 확보되어 있다는 것만큼 든든한 건 없었다.
특히나 지금처럼 적진 한복판에 있을 때는 그 가치가 더 크고 병사들의 사기에도 직접 영향을 끼친다.
“이제 우리도 슬슬 움직여야 될 텐데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안 그래도 그 이야기를 꺼낼 참이었어.”
도현이 턱짓을 하자 한쪽에 서 있던 칠현이 품속에서 두루마리 하나를 꺼내서는 임경업 장군 앞에 내려놨다.
“이게 뭡니까?”
“펼쳐 봐.”
끈을 풀고 두루마리를 옆으로 펼치자 산동반도 지도가 나왔다.
“이건……!”
“명 조정에서 제작한 군사지도야.”
“이걸 어떻게 구하셨습니까?”
임경업 장군이 놀란 얼굴로 묻자 도현은 피식 미소를 지었다.
“나라가 얼마나 썩었는지 돈만 조금 찔러주면 병부 관리가 직접 필사해서 뒤로 빼돌려 준다는군.”
“허어.”
최고 극비로 취급되는 군사지도가 이렇게 쉽게 유출되어 나돌아 다닌다니 임경업 장군은 기가 막히는지 헛웃음을 지었다.
시선을 내려 지도를 살펴보자 군사용답게 지형이 아주 상세히 그려져 있고 거리도 정확하게 표시되어 있었다.
“거기 보면 파란색으로 표시된 곳이 있을 거야.”
“…….”
무심코 표시된 곳을 확인한 임경업 장군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도현을 쳐다봤다.
“여긴 세곡 창고 아닙니까.”
“맞아. 명나라 후방을 흔들려면 좀스럽게 양민들이 사는 고을을 약탈하는 것보다 세금으로 거둔 곡식을 보관하는 세곡 창고들을 터는 것이 더 충격이 크지 않겠어? 물론 그러면서 부수입도 짭짤하게 올리고 말이야.”
“대군마마한테 졌습니다. 언제 이런 계획을 다 세우셨습니까.”
황제의 지시를 따르는 것과 동시에 한몫 단단히 챙겨 갈 생각을 하다니 정말 도현다운 행동이었다.
“머리를 좀 굴렸지. 일단 창고를 점령하면 봉황상단 배가 와서 곡식을 가져갈 테니 운송 걱정은 할 필요 없어. 물론 곡식을 우리가 챙겼다는 증거를 없애기 위해 떠날 때는 건물을 불태워야겠지.”
원활한 운송을 위해 세곡 창고는 배가 다닐 수 있는 큰 강 옆에 위치하는 것이 보통이었기에 도현의 말처럼 봉황상단이 소유한 교역선을 불러오기 좋았다.
“하지만 우리가 계속 세곡 창고를 노리면 명군도 대비를 할 텐데요.”
“그러면 다른 목표를 노리면 되지. 병력을 보존하는 것이 최우선이니까 굳이 무리할 필요는 없어.”
혹시나 도현이 욕심을 부려 병사들을 위험하게 할까 봐 살짝 염려했던 임경업 장군은 그의 대답을 듣자 그런 생각을 털어 냈다.
“알겠습니다.”
“장수들과 상의해서 우리한테 가장 유리한 경로를 찾아서 보고하도록 해.”
“옛.”
눈을 반짝이며 대답한 임경업 장군은 어느새 다 식은 차를 단숨에 비우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둘러 방을 나서는 임경업 장군의 뒷모습을 보며 도현이 미소 짓고 있을 때 가까이 다가온 칠현이 귓속말을 했다.
“봉황상단에서 사람이 도착했습니다.”
“들어오라고 해.”
“네.”
잠시 뒤 미닫이문이 열리며 보통 키의 중년인 한 명이 들어와 넙죽 절을 했다.
“대군마마를 뵙습니다.”
“누군가 했더니 박 행수였군. 그동안 잘 지냈나?”
“예.”
공손히 머리를 조아리는 중년인은 의주 출신 박춘동이라는 사내로, 봉황상단에서 행수로 일하고 있었다.
“지시하신 대로 교역선 열 척과 무장을 갖춘 판옥선 여섯 척을 언제든지 연락만 주시면 한 시진 안에 올 수 있도록 포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무인도에 정박시켜 놨습니다.”
“수고했어. 그런데 선원들은 데려왔나?”
“네. 하온데 배도 없이 선원은 왜 데려오라고 하셨는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의아한 얼굴로 묻자 도현은 한쪽 입꼬리를 위로 말아 올렸다.
“이제 곧 있으면 여길 떠날 텐데 이 집 주인이 사 놓은 재물을 그냥 놔두고 가기 아깝잖아. 적당히 값나가는 걸 골라서 웅도로 옮겨 놓으려고.”
상인답게 바로 말귀를 알아들은 박춘동이 씨익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그럼 선단에 연락을 넣어 배를 가져오라고 하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어.”
“에?”
“알아보니까 금 대인이라는 놈이 기특하게도 커다란 교역선을 두 척이나 가지고 있더라고. 뭐, 보나 마나 고리대를 놔서 반 강제로 빼앗은 거겠지만 말이야.”
그제야 선원 마흔 명을 차출해서 오라고 한 이유를 깨달은 박춘동은 무릎을 치며 감탄성을 터트렸다.
“아! 그래서 선원들을…….”
“맞아. 그 배를 써서 재물을 웅도로 가져가.”
“알겠습니다.”
“임 장군한테 일러서 병사 이백 명을 내줄 테니까 청군의 시선을 피해 오늘 밤에 작업을 하게.”
“네.”
대답을 들으며 시선을 돌린 도현은 한쪽에 서 있는 칠현에게 지시를 내렸다.
“저녁까지 박 행수와 선원들이 쉴 수 있도록 숙소를 구해 줘.”
“예, 마마.”
“밤에 작업하려면 피곤할 테니 이만 나가 봐.”
도현의 말에 박춘동은 자리에서 일어나 절을 하고는 칠현을 따라 방을 나갔다.
“그럼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그래.”
그날 밤 지시한 대로 창고에 쌓아 둔 비단과 곡식 일부, 그리고 장원에 있던 값비싼 장식품들을 수레에 실어 은밀히 포구로 옮긴 박춘동은 자신이 타고 온 판옥선까지 총 세 척의 배에 물건을 나눠 싣고는 웅도로 떠났다.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 몰랐기 때문에 십인대 다섯 개를 장원에 남겨 둬 청국 수군 함대의 동태를 감시하도록 한 도현은 다음 날 군대를 이끌고 포구를 출발했다.
첫 목표는 동쪽으로 이틀 거리에 위치한 세곡 창고였다.
드넓게 펼쳐진 평야 한가운데, 조선군이 행군을 멈추고 잠시 쉬고 있을 때 앞쪽에서 다섯 기의 기마가 뽀얀 먼지를 피워 올리며 달려왔다.
이히히힝!
“워워.”
고삐를 당겨 말을 멈춰 세운 부관 박도치는 능숙한 동작으로 안장에서 내려와 나무 그늘 밑에 앉아 있는 도현과 임경업 장군에게 다가가 군례를 취했다.
“다녀왔습니다.”
제일 안쪽에 있는 도현이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는 입을 열었다.
“수고했어. 그래, 분위기가 어땠어?”
“백인대 세 개 정도가 세곡 창고를 지키고 있지만 아직 우리가 오는 걸 모르는지 경계는 허술했습니다.”
“몽고 애들이 워낙 난리를 쳐 대서 비상이 걸려 있을 줄 알았더니 의외군.”
“그러게 말입니다.”
임경업 장군도 의외라는 듯이 머리를 갸웃거렸다.
사실은 피란 온 주민들을 통해 연태煙臺포구에 변고가 생겼다는 것이 알려졌지만 청군이 아닌 수시로 출몰해 해안 마을을 노략질하는 왜구로 소문이 잘못 나 있었다.
사방으로 흩어져 마구 노략질을 해 대고 있는 몽고족 때문에 왜구가 아니라는 것이 조금씩 퍼지고 있었지만 아직 여기까지는 전달되지 않은 상태였다.
배를 타고 움직이는 왜구는 토벌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딱히 토벌을 한다고 해도 이익이 되는 것도 없기에 부패한 지방관들은 주민들의 고통을 그냥 못 본 척 넘기는 일이 많았다.
지금이 그런 경우로, 불과 이틀 거리에 있는 포구가 정체 모를 무리에 습격을 받았는데도 세곡 창고를 책임진 관리는 토벌대를 보내기는커녕 설마 여기까지 오겠냐는 안일한 생각을 하며 경계조차 강화하지 않았다.
“혹시 함정을 파 놓은 것 아니야?”
도현으로서는 당연한 의심이었지만 박도치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
“저도 그걸 염려해서 주위를 샅샅이 살펴봤지만 그런 낌새는 전혀 없었습니다.”
“그렇단 말이지.”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놓치기 아까운 기회입니다.”
습관처럼 턱을 매만지며 고심하던 도현은 임경업 장군의 말에 마침내 결정을 내렸다.
“좋아, 공격하자고. 혹시 모르니까 백인대 다섯 개는 예비로 빼 놓도록 해.”
“알겠습니다.”
그 자리에서 나무 작대기로 흙바닥에 그림을 그리며 간단히 공격 계획을 짠 도현은 잠시 뒤 병사들을 출발시켰다.
해안에 위치한 세곡 창고는 해적과 도적 떼의 습격에 대비해 굵은 통나무로 만들어진 목책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그 안에는 곡식을 보관하는 창고 열 채와 병사들의 숙소로 쓰는 건물이 여러 채 들어서 있었다.
목책 끝에 세워진 망루 위에는 창을 든 병사 두 명이 번을 서고 있었지만 임무는 뒷전이고 기둥에 등을 대고 자기들끼리 농담 따먹기를 하느라 바빴다.
“연태포구가 습격당했다는 이야기 들으셨죠?”
“왜구가 쳐들어온 거라며.”
“그게 왜구라는 이야기도 있고 어떤 사람들은 몽고족이라고도 하더라고요.”
그러자 고참병은 심드렁한 얼굴로 주방에서 챙겨 온 육포 쪼가리를 입에 넣고 질겅질겅 씹었다.
“여기가 산해관도 아니고 만리장성 너머에 있는 몽고족이 어떻게 와. 헛소리하지 말고 근무나 똑바로 서.”
“역시 아니겠지요?”
“당연하지.”
바로 그때 날카로운 파공성과 함께 목책 밖에 있는 풀숲에서 화살이 날아와 병사들의 가슴에 박혔다.
쉬익!
“컥.”
“으……윽.”
가래 끓는 소리를 내며 입을 뻐끔거리던 병사들은 그대로 바닥에 털썩 쓰러졌다.
반대편 망루에서도 똑같은 일이 벌어졌고 그렇게 경계병들이 모두 제거되자 풀숲이 흔들리더니 숨어 있던 조선군 병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시작해!”
임경업 장군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전투에 직접 나선 도현이 낮게 소리치자 병사들이 앞으로 나서 끝에 밧줄이 매달린 갈고리를 집어 던졌다.
휘리리릭- 탁!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갈고리는 정확히 목책 끝에 걸렸다.
제대로 걸렸는지 몇 차례 힘껏 당겨 확인한 뒤 허리에 검을 찬 병사들이 대기하고 있다가 재빨리 달려가 줄을 잡고 위로 올라갔다.
그렇게 안으로 들어간 병사들은 입구를 지키고 있던 적병을 순식간에 제압하고는 지체 없이 빗장을 풀고 문을 열었다.
퍼퍽!
“으악.”
“끄헉.”
“어서 서둘러!”
“예.”
끼이이익.
통나무를 잘라서 만든 문이 활짝 열리자 초조한 얼굴로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도현이 검을 뽑아 들며 크게 소리쳤다.
“공격!”
우와아아!
그러자 돌격 태세를 취하고 있던 조선군 병사들은 목이 터져라 함성을 내지르며 목책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뒤에서 명령만 내리는 것이 아니라 병사들을 따라 도현도 호위와 함께 앞으로 달려갔다.
“저, 적이다!”
충격과 놀람이 그대로 담긴 고함 소리가 터져 나오는 것과 거의 동시에 비상종 소리가 시끄럽게 울렸다.
땡땡땡!
“뭐, 뭐야?”
세곡 창고 관리 책임자인 주천석은 당황해서 관사 밖으로 뛰어나왔다가 조선군이 새까맣게 몰려오는 걸 보고 그대로 몸이 얼어붙었다.
며칠 전 근처 포구에 변이 생겼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설마 정규군이 지키는 이곳까지 쳐들어올 거라고는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진작 지원 병력을 요청해 두지 않은 걸 후회하던 주천석은 선두에서 나부끼는 조선군 군기를 보고 눈을 치켜떴다.
“저건!”
우방인 조선군 군기가 왜 여기에 있단 말인가?
그러고 보니 왜구라고 하기에는 병사들의 덩치도 크고 무엇보다 통일된 복장과 무장을 갖추고 있는 것이 해적이 아니라 정규군 같았다.
하지만 주천석의 생각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는 수십 발의 화살을 보며 그의 눈동자는 절망과 공포로 물들었다.
쉬이이익!
비처럼 쏟아진 화살 세례에 비상종 소리를 듣고 막사 밖으로 뛰어 나온 적병들은 고슴도치가 되어 무더기로 흙바닥에 쓰러졌다.
바로 이어서 정신없이 덮친 조선군의 공격에 적들은 힘없이 휩쓸려 버렸다.
“크아악!”
“커헉!”
“다! 쓸어버려라.”
“죽어!”
“흐억. 살려 줘!”
미처 방어 진형을 갖추지도 못한 상태에서 쐐기 대형으로 돌격해 오는 조선군의 공격은 공포 그 자체였다.
조선군이 휘두른 병장기에 적들은 비명과 피를 뿌리며 쓰러졌고 순식간에 바닥은 만신창이가 되어 널브러진 시신으로 가득 찼다.
기선을 제압당한 상태에서 숫자마저 조선군이 훨씬 많으니 애초에 상대조차 되지 않았다.
여기저기서 광기에 찬 울부짖음과 비명이 터져 나오는 가운데 도현은 비호 같은 몸놀림으로 일 검에 상대의 목을 쳐 냈다.
츄악!
“끄어억.”
베고 찌르고 걷어차며 그동안 익힌 무예를 아낌없이 쏟아 냈는데 그의 손에 들린 검이 한 번 스치고 지나가면 어김없이 피를 뿌리며 적병이 허물어져 내렸다.
도현과 함께 다니는 호위 무사들도 실력을 발휘해 병장기에 피가 마를 새 없이 상대를 거침없이 베어 나갔다.
입구가 뚫리고 채 일각도 지나기 전에 절반 이상이 죽어 나가자 더 이상 저항할 의지가 사라진 적들은 분분이 무기를 버리며 항복했다.
챙그랑. 챙.
“하, 항복합니다.”
“살려 주십시오.”
창을 바닥에 떨어트리고 두 손을 들어 올린 적군 병사를 향해 도현이 손을 휘둘렀다.
퍽!
“윽!”
“으으…….”
거꾸로 든 검 손잡이의 끝부분으로 관자놀이를 타격하자 적병은 신음을 흘리면서 힘없이 옆으로 쓰러졌다.
그와 동시에 도현은 주위를 둘러보며 크게 외쳤다.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면 목숨만은 살려 주겠다!”
그것이 기폭제가 된 듯 여기저기서 병장기를 떨어트리는 쇳소리가 나며 순식간에 싸움이 끝나 버렸다.
“마마! 다친 덴 없으십니까?”
“멀쩡하니까 걱정할 것 없소.”
피로 더러워진 칼날을 쓰러진 적군 병사의 옷에 슥슥 닦으며 도현이 돌아보자 어느새 다가온 임경업 장군이 서 있었다.
“다행이군요. 하지만 앞으로 이런 일은 삼가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왜?”
“왜라뇨……. 대군께선 귀한 신분 아니십니까. 그런데 괜히 이런 작은 전투에까지 일일이 나서시다가 부상이라도 입으면 어쩌시려고요.”
“하하! 나도 명색이 무인인데 어떻게 뒷짐이나 지고 물러나 있을 수 있겠소.”
도현은 곤란해하는 임경업 장군에게 큰 소리로 웃어 보이고는 검을 칼집에 집어넣었다.
“원래 성격이 이래서 말이오. 계속 잔소리나 하면서 나를 설득하려는 것보다 차라리 포기하는 게 더 빠를 거요.”
“마마…….”
“그리고 내 뒤는 임 장군과 우리 병사들이 지켜 줄 텐데 뭐가 걱정이오. 안 그렇소?”
장난스럽게 눈을 찡긋하는 도현의 말을 듣고 임경업 장군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마마께서도 참……. 그런 말을 들으니 더 이상 뭐라 할 수가 없군요.”
“물에 빠져도 입만 동동 뜰 칠현이 놈하고 항상 투덕거리며 지내다 보니 내가 말솜씨 하나만은 끝내주게 늘었거든.”
그렇게 말한 도현은 임경업 장군의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갔다.
전투가 일단락되자 항복한 적병들은 모두 한군데 모아 무릎을 꿇려 놓았고, 사용하던 무기들은 함부로 손을 대지 못하게 반대쪽으로 치워 놓았다.
겁에 질린 눈으로 부들부들 떨고 있는 적병들을 도현이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 임경업 장군이 곁에 다가와 물었다.
“저들은 어찌 처리할까요?”
“음…… 그냥 풀어 주시오.”
“예에?”
방금 전까지 목숨 걸고 싸우던 적군을 그대로 풀어 주라니,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말에 임경업 장군은 깜짝 놀랐다.
“풀어 주다니요, 비록 무기를 빼앗긴 했지만 적군 진영에 돌아가면 동료를 데리고 다시 올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그 전에 우리가 재빨리 자리를 뜨면 놈들도 더 이상 쫓아오진 못할 거 아니오. 안 그래도 귀한 사람 목숨이 개만도 못하게 픽픽 죽어 가는 판인데, 더 이상 쓸데없이 사람을 죽이긴 싫군. 그리고 우리 처지에 포로를 주렁주렁 데리고 다닐 수도 없잖소.”
단호하게 잘라 말하는 도현을 보고 임경업 장군은 뭐라 말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지금까지 봐 온 도현의 성격상 한번 입 밖에 내뱉은 말은 번복하지 않으리란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병사들이 주변을 정리하는 사이 도현은 호위 무사들과 함께 직접 세곡 창고를 둘러봤다.
철컥!
관사 앞에서 화살에 맞아 죽은 주천석의 품을 뒤져 찾아낸 열쇠 꾸러미로 칠현이 어린아이 머리통만 한 자물쇠를 풀자 호위대 무사 두 명이 커다란 나무 문을 양옆으로 열었다.
끼이이익.
세곡을 보관하는 창고답게 폭이 일 장이 넘을 정도로 실내는 엄청 넓었는데 그곳이 꽉 찰 만큼 많은 곡식 포대가 가득 쌓여 있었다.
“못해도 오백 섬은 넘겠는데요.”
칠현이 호들갑 떠는 걸 들으며 창고 안을 살펴본 도현은 흡족한 얼굴로 말했다.
“다른 곳도 열어 봐.”
“예.”
신이 나서 대답한 칠현은 재빨리 나머지 창고 문도 열었다.
모두 열 채나 되는 창고마다 곡식이 가득 채워져 있고 얼추 봐도 오천 섬은 족히 될 것 같았다.
잠시 뒤 연기로 약속된 신호를 보내자 근처 바다에서 대기 중이던 봉황상단 소속 선단이 재빨리 다가왔다.
세곡을 실어 나르기 위해 커다란 선박 두 척이 한꺼번에 정박할 수 있는 선착장이 설치되어 있어서 화물선은 쉽게 배를 댔다.
곧바로 잔교가 설치되고 일부 경계 병력을 제외한 모든 병사들이 달려들어 창고 안에 보관되어 있던 곡식을 배로 실어 날랐다.
“빨리 움직여!”
“으싸! 으싸!”
“해 떨어지기 전까지 작업 끝내야 된다.”
감독관으로 변신한 장수들의 호통에 병사들은 무거운 곡식 포대를 두 사람이 나눠 들고는 일개미처럼 쉴 새 없이 옮겼다.
이천 명이나 되는 인원이 한꺼번에 달라붙어서 작업하자 곡식 포대는 금방 눈에 보일 정도로 푹푹 줄어들었다.
얼마 뒤 홀수선이 물밑으로 깊숙이 내려갈 만큼 화물칸을 가득 채운 배들이 밧줄을 풀고 나가자 그 빈자리를 바로 다른 배가 채웠다.
그런 작업을 여러 번 반복한 끝에 오후 늦게야 작업을 모두 끝낼 수 있었다.
“이게 마지막 배입니다.”
임경업 장군의 보고에 막 선착장을 벗어나는 배를 보며 도현이 입을 열었다.
“그럼 창고를 다 비운 거야?”
“아닙니다. 워낙 보관되어 있는 곡식이 많다 보니 창고 하나는 그대로 남았습니다.”
“그래?”
배가 부족해 곡식을 다 가져가지 못하는 건 전혀 생각하지 않았기에 도현은 약간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양이 얼마나 돼?”
“오백 섬 정도 됩니다.”
팔짱을 낀 자세로 잠시 고심하던 도현은 이내 고개를 들어 임경업 장군과 시선을 맞추면서 말했다.
“그건 우리가 가져가서 군량미로 쓰고 남는 건 공 장군한테 싼 값에 넘겨주자고.”
“알겠습니다.”
밤이 늦었기에 세곡 창고에서 머문 조선군은 다음 날 아침 일찍 노획한 곡식을 가지고 연태포구로 돌아갔다.
떠나면서 창고와 건물에 불을 질러 여기서 조선군이 곡식을 얼마나 가져갔는지 모르게 만들었다.
짐수레 가득 실린 곡식 때문에 돌아가는 데 사흘이나 걸렸지만 도현이 풀어 준 포로들로 인해 세곡 창고가 습격당했다는 사실이 알려졌을 텐데도 쫓아오는 적군은 하나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