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치영
후원 한쪽 방을 차지하고 있던 흑치영은 상처가 어느 정도 아물고 기력이 회복되자 조금씩 몸을 움직였다.
오늘도 산책을 나온 흑치영은 정원에 천막을 치고 점심을 지어 먹는 조선군 병사들을 복잡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처음 아내의 부축을 받아 밖에 나왔을 때 자신이 포구를 습격한 군대의 도움을 받았다는 걸 알고 얼마나 기겁했는지 모른다.
이웃을 죽이고 포구를 쑥대밭으로 만든 자들과 함께 있을 수 없다며 당장 떠나려고 했지만 아내가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극구 만류하는 바람에 다시 짐을 내려놨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치밀어 오르는 적개심을 감추지 못했지만 아내를 통해 약탈한 자들은 몽고족 전사와 청군이고 조선군은 가담하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되자 조금은 감정이 누그러졌다.
“산책 나온 거요?”
누군가 말을 거는 소리에 흑치영이 몸을 돌리자 건장한 체격에 갑옷을 입은 사내 한 명이 반가운 얼굴로 다가왔다.
“김 형.”
상대가 누군지 확인한 흑치영도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친근하게 형이라고 불린 사내는 장원에 남겨진 백인대를 지휘하는 대장으로, 이름은 김종보였다.
“몸은 좀 어떻소?”
“신경 써 주신 덕분에 많이 좋아졌습니다.”
약간은 어색하지만 명나라 사람답지 않게 능숙한 조선말을 구사하는 흑치영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김종보가 호탕하게 말했다.
“잘됐구려. 그게 다 우리 대군마마 덕분이오.”
“안 그래도 구명지은에 감사하다는 인사라도 드려야 되는 것이 도리인데 도통 얼굴을 뵙기가 어렵군요.”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흑치영이 하는 말에 김종보가 걱정하지 말라는 듯 이야기를 했다.
“조만간 한 건 크게 올리고 돌아오실 테니 그때 만나 뵈면 될 거요.”
“다른 고을을 점령하러 가신 겁니까?”
이야기를 하는 흑치영의 표정이 어두워졌는데 뭣 때문에 그러는지 짐작한 김종보는 씩 웃으며 입을 열었다.
“뭐 비슷하지만 우린 거친 몽고족이나 청군과 달리 함부로 양민들 재산을 약탈하지 않으니 걱정하지 마시오.”
그러자 속내를 들킨 것 같아 찔끔한 흑치영은 황급히 포권을 해 보이며 사과했다.
“그런 분들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합니다.”
“아니오. 우리는 안 그랬다고 해도 함께 온 무리가 포구에서 한 짓거리가 있으니 그 마음 충분히 이해할 수 있소이다.”
그렇게 분위기가 약간 어색해졌을 때 빼빼 마른 병사 하나가 이쪽으로 뛰어왔다.
“백인장님!”
“귀청 떨어지겠다.”
김종보가 농을 했지만 병사는 듣는 둥 마는 둥 급히 말했다.
“지금 이러고 계실 때가 아니에요.”
“왜? 또 칠복이가 사고라도 친 거야?”
“그게 아니라 대군마마하고 임 장군님이 도착하셨습니다.”
“지금?”
“예.”
“그럼 어서 가 봐야지. 먼저 실례하겠소.”
“네.”
들뜬 표정을 지은 김종보가 손을 흔들고는 병사와 함께 황급히 장원 정문으로 달려갔고 그 모습을 보며 흑치영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한편 곡식 포대를 가득 채운 짐수레 수십 대를 끌고 조선군은 보무도 당당하게 줄을 지어 장원으로 들어섰다.
“어서 오십시오, 대군마마.”
군례를 올리며 예를 갖춘 김종보는 냉큼 도현이 탄 말의 고삐를 잡았다.
“별일 없었지?”
“그러믄입쇼. 여긴 제가 잘 지키고 있었습니다.”
허리를 직각으로 접으면서 크게 대답하는 모습에 도현은 미소 지으며 말에서 내렸다.
“하긴 자네처럼 범 같은 장수가 지키고 있는데 누가 감히 여길 넘보겠어.”
“아이고, 부끄럽습니다.”
“하하하. 임 장군, 내 말이 틀렸소?”
얼굴이 빨갛게 물들며 쑥스러워하는 모습에 도현이 웃음을 터트리며 묻자 임경업 장군도 거들었다.
“맞습니다. 자네가 있어서 든든하다네.”
“장군님까지 왜 그러십니까.”
“사실인걸, 뭐.”
울상을 짓고 어쩔 줄 몰라 하는 김종보 백인장의 어깨를 부드럽게 두드려 준 도현은 임경업 장군에게 시선을 주며 말했다.
“난 이만 들어가 볼 테니 뒤처리는 임 장군이 맡아 주시오.”
“알겠습니다.”
대답을 들은 도현은 칠현과 함께 안채로 발걸음을 옮겼다.
거처에 도착한 그는 제일 먼저 무거운 갑옷부터 벗었다.
“휴우, 이제 좀 살 것 같네.”
“날씨가 더워서 더 힘드시죠.”
“무게는 이제 익숙해져서 견딜 만한데 통풍이 전혀 안 돼서 땀이 차는 건 정말 못 참겠어.”
“바로 목욕물을 준비해 놓으라고 하겠습니다.”
“이럴 때는 또 눈치가 빠르구나.”
“에이, 또 왜 그러십니까.”
“기특해서 그러지.”
“헤헤헤.”
갑옷을 챙겨 든 칠현이 밖으로 나가자 도현은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잠시 휴식을 취했다.
그리고 목욕으로 시원하게 피로를 푼 뒤 이른 저녁을 먹고 차를 한 잔 마시고 있을 때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다.
“마마, 지난번 거리에서 구해 주신 사내가 마마를 뵙고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다는데 어떻게 할까요?”
구해 놓고 깜빡 잊고 있었는지 도현은 짧게 감탄성을 내뱉었다.
“아! 맞다. 부상이 심하다던데 많이 좋아졌나 보지?”
“그런가 봅니다.”
이야기를 들으니 살짝 만나 보고 싶은 마음이 든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들여보내.”
“예.”
잠시 뒤 칠현은 머리에 영웅건을 쓰고 깔끔하게 옷을 차려입은 흑치영을 데리고 들어왔다.
“이분이 봉림대군마마시오.”
칠현의 말에 흑치영은 한 발짝 앞으로 나와 도현을 보며 넙죽 허리를 숙였다.
“구명지은에 감사드립니다. 대군마마가 아니었다면 저와 제 가족은 그날 큰 곤욕을 치렀을 겁니다.”
그러자 도현은 흑치영을 쓸어 보며 점잖게 말했다.
“아닐세.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도와주는 건 당연한 일이지. 그것보다 큰 부상을 입었다고 들었는데 괜찮나?”
“네. 보내 주신 의원의 치료를 받아 이제 혼자 거동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이 좋아졌습니다.”
“다행이군. 이리 와서 앉게.”
흑치영은 황급히 손을 내저으며 사양했다.
“아닙니다. 제가 어찌 감히 고귀하신 왕족과 마주 앉을 수 있겠습니까.”
“환자를 세워 두는 것이 내가 불편해서 그래. 괜찮으니 이리 오게.”
재차 권유를 했지만 진짜 그래도 될지 망설이던 흑치영은 옆에 있던 칠현이 눈치를 주자 그제야 몸을 움직였다.
흑치영이 맞은편 의자 끝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자 칠현이 차를 가져와 두 사람 앞에 내려놨다.
“들게.”
“감사합니다.”
살짝 고개를 숙인 흑치영은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찻잔을 들어 몇 모금 마셨다.
예상과 달리 다도茶道를 정확히 알고 예법에 맞게 차를 마시는 모습에 도현은 흥미롭다는 눈으로 질문을 던졌다.
“다도를 배웠나 보군?”
“예. 선친께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다도를 알 정도면 귀한 집 자손 같은데 어쩌다가 그런 낭패를 당한 건가?”
도현의 물음에 흑치영은 손을 살짝 내저으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그냥 여기서 작은 철기점을 운영하는 장사치일 뿐입니다.”
“철기점이라면…… 대장장이라는 말인가?”
“예. 선대 때부터 내려온 가업을 물려받았습니다.”
“쇠를 다루는 대장장이와 다도라. 묘한 조합이군.”
재미있다는 표정을 짓던 도현은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고 보니 자네 이름도 모르는군.”
“흑치영이라고 합니다.”
“…….”
무슨 일인지 이름을 듣자마자 도현은 눈을 동그랗게 치켜뜨고는 앞에 있는 흑치영을 뚫어질 듯 바라봤다.
“지금 흑치영이라고 했나?”
“……예.”
“그러니까 이름이 영이고 성이 흑치黑齒라는 거지?”
“그렇습니다.”
어리둥절한 얼굴의 흑치영을 보며 도현은 자신도 모르게 크게 숨을 내쉬었다.
“허어!”
그러자 옆에 있던 칠현이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그를 봤다.
“마마, 왜 그러십니까?”
도현은 칠현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잠시 흑치영을 물끄러미 보다가 진지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혹시 흑치상지黑齒常之 장군의 자손인가?”
흑치영은 깜짝 놀란 표정을 짓다가 이내 약간 경계 어린 얼굴로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맞습니다.”
“하하하! 이런 곳에서 그분의 자손을 만나다니 정말 대단한 우연이군.”
짐작이 맞아떨어지자 도현은 얼굴을 활짝 펴며 방 안이 떠나가라 기분 좋은 웃음을 터트렸다.
흑치상지 장군은 백제의 명장으로, 황산벌 전투로 유명한 계백 장군에게 가려 유명하지는 않았지만 삼국사기와 중국의 역사서인 신당서에 언급될 정도로 대단한 인물이었다.
대대로 달솔 그러니까 지금으로 치면 국방부 차관직을 지내던 명문가 출신으로, 뛰어난 용력에 머리까지 비상하여 스무 살에 대를 이어 달솔 벼슬에 오를 정도였다.
하지만 찬란한 역사를 자랑하던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패망하면서 그의 인생도 큰 격랑에 휩싸였다.
왕도인 사비성이 함락되고 삼천궁녀가 낙화암에서 몸을 던져 죽자 흑치상지는 부하들을 데리고 임존성에 자리 잡은 채 부흥 운동을 전개했다.
또 다른 부흥군 장수인 복신과 손을 잡고 한때는 이백 개의 크고 작은 성을 탈환하며 꿈을 이루는 것 같았지만 내부분열과 나당 연합군의 강한 압박에 결국 무릎을 꿇고 말았다.
그의 재주를 아깝게 여긴 당 황제가 몇 번을 권유한 끝에 중국으로 건너간 흑치상지는 좌령군장군이라는 높은 벼슬까지 하며 승승장구했지만 끝내 그를 시기한 무리의 모함을 받고 사형당했다.
역사를 공부하다가 잊힌 영웅인 흑치상지 장군에 대해서 알게 되고 존경하는 마음을 품고 있던 도현은 그의 자손을 이렇게 우연히 만나자 무척 반가웠다.
“제 조상님에 대해서 아십니까?”
“암, 알다마다. 백제국의 명장이자 충신으로 나라가 망한 다음에도 목숨 바쳐 부흥 전쟁을 일으키셨고 힘이 약해 뜻을 이루지 못했지만 당 황제의 끈질긴 권유로 중국에 건너가 우리 한민족의 기개를 크게 떨치신 분 아닌가.”
이제는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 가문의 내력을 기억하고 있고 자신도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조상인 흑치상지 장군에 대해 진심으로 존경을 나타내는 도현의 모습에 흑치영은 의아하면서도 어쩐지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대군마마 같은 고귀하신 분이 저희 조상님을 기억하고 계시다니 영광입니다.”
“역사라는 것이 원래 승자의 입장에서 기록되다 보니까 흑치상지 장군님처럼 큰 인물이 잊힌 게 아쉬울 따름이야.”
잠시 씁쓸한 표정을 지어 보인 도현은 흑치영을 보며 친근하게 말했다.
“흑치상지 장군님의 자손이라고 하니 자네가 골목에서 보여 준 용력이 이해가 되는군. 따로 무예를 익혔나?”
질문을 받고 약간 망설이던 흑치영은 이내 사실대로 이야기했다.
“무예라고 할 것까지는 없고 그냥 집안에 내려오는 방법으로 몸을 단련시켰습니다.”
“그래? 흑치상지 장군의 무예라니 이거 대단하군.”
“세월이 흐르면서 수련법이 많이 실전되어 지금은 그저 건강을 위해 체력을 키우는 수준에 불과합니다.”
“그래도 한번 보고 싶군. 언제 기회가 되면 백제 전통 무예를 견식할 수 있도록 해 주게.”
“괜히 대군마마의 눈만 버리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겸손한 태도를 보였지만 지난번 골목에서 몽고족 전사 세 명을 혼자 상대한 걸 보면 무예 실력이 상당하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그냥 대충 감사 인사만 받고 돌려보내려던 처음 생각과 달리 흑치영이 평소 존경하던 흑치상지 장군의 자손이라는 걸 알게 된 도현은 문득 그를 자신의 휘하에 두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그럼 여기서 계속 철기점을 할 건가?”
도현의 말에 흑치영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
“아쉽지만 난리 통에 가게와 집이 모두 불타서 당분간은 위해威海성에 있는 처갓집에서 신세를 지려고 합니다.”
“흐음, 그런 일이 있었군. 이거 우리가 한 건 아니지만 어찌 됐든 미안하네.”
“운이 없었던 거지요. 조선군은 약탈에 가담하지 않았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일단 흑치영이 자신과 조선군에 별다른 악감정이 없는 것 같아 한 손으로 턱을 매만지며 뜸을 들이던 도현은 정색하고 입을 열었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나와 함께하는 건 어떤가?”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흑치영이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자 도현은 웃으며 말했다.
“내 휘하에 들어올 생각이 있냐는 걸세.”
뜻밖의 제안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던 흑치영은 이내 고개를 숙이며 정중히 거절했다.
“미천한 소인을 좋게 봐주신 건 감사합니다만 부양할 가족이 있고 괜히 대군마마께 누를 끼칠까 봐 걱정됩니다.”
“가족도 함께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 줄 것이니 염려 말게. 그리고 이건 한순간 기분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네의 능력을 높이 사서 그러는 거야.”
“…….”
“흑치상지 장군처럼 백성과 국가를 위해 헌신하는 큰사람이 되어 주게.”
두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열변을 토하는 도현을 보고 흑치영은 심장이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하지만 자신한테는 부양해야 될 가족이 있고 아무리 조선의 왕족이고 목숨을 구해 준 은인이라 해도 오늘 처음 본 사람의 말을 믿고 모험을 걸어도 좋을지 갈등이 됐다.
그런 흑치영의 마음을 짐작했는지 도현은 차분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물론 이런 일은 바로 결정할 수 없겠지. 이틀간 더 머물다가 장원을 떠날 계획이니까 그때까지 답을 주게.”
“떠나신다면 이제 다시는 안 돌아오시는 겁니까?”
“글쎄. 상황에 따라서 다르겠지만 아마 돌아오기 어려울 거야.”
“그렇군요.”
도현의 말에 흑치영은 머리를 끄덕이며 뭔가 깊은 생각에 빠졌다.
“자! 그 이야기는 이만하고, 오랜만에 기분 좋은 인연을 맺었는데 술을 빠뜨릴 수 없지. 박 내관.”
그러자 칠현이 허리를 살짝 숙이면서 눈치 빠르게 대답했다.
“주안상을 차려 오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래.”
칠현이 밖에 있는 호위 무사에게 말을 전하러 가자 도현은 흑치영을 보며 가볍게 물었다.
“아직 부상이 완쾌되지 않았지만 한 잔 정도는 괜찮겠지?”
“예.”
얼마 안 있어 원래 장원에서 일하던 하녀 두 명이 술상을 가지고 들어왔다.
고급스럽게 도자기로 만들어진 주전자를 집어 든 도현은 흑치영의 잔에 술을 가득 따라 주며 말했다.
“흑치상지 장군의 용맹과 앞으로 우리 두 사람이 맺어 나갈 인연을 위해여 건배하세.”
마치 상대가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일 것을 기정사실처럼 이야기하며 도현이 술잔을 들자 흑치영은 얼떨떨한 얼굴로 잔을 마주 들었다.
“캬아! 자네와 함께해서 그런지 오늘따라 술맛이 더 좋군.”
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 주거니 받거니 술잔을 비우며 밤늦게까지 대화를 나눴다.
다음 날, 흑치영은 하루 종일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전날 밤에 들은 도현의 말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아 도저히 다른 일에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여보, 무슨 일이에요?”
곁에서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부인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묻자, 흑치영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자신이 고민하고 있는 것을 털어놓았다.
“그래요? 은인께서 그런 말씀을…….”
도현의 제안은 흑치영의 아내에게도 역시 뜻밖인지 그녀는 잠시 생각하다가 이윽고 결단을 내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요. 만약 당신께서 은인을 따르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그렇게 하세요.”
“하지만…….”
“알아요. 저와 아이가 마음에 걸리는 거죠?”
아내는 상냥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함께 살을 맞대고 산 지가 몇 년인데 서로의 마음을 어찌 모르랴.
애초에 흑치영은 좋고 싫음이 확실한 사내라서 저렇게 우물쭈물 고민하는 성격이 아니다.
그런 그가 쉽게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는 건 도현의 제안에 마음이 끌리면서도 그의 발목을 붙잡는 게 있다는 소리다.
“당신은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니까 괜히 전쟁에 휘말렸다가 우리 모자를 지켜 주지 못할까 봐 걱정하는 거 아니에요?”
“……역시 못 당하겠군.”
여자의 감이란 날카롭다며 흑치영은 감탄했다.
겉으로 티를 안 내려고 했는데, 어느새 마음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것처럼 훤히 꿰뚫고 있었다.
“지금은 난세요. 어제까지 멀쩡히 살아 있던 사람도 내일이면 죽을지 모르는데, 지금까지 평범한 대장장이로 살아온 나로선 우리 가족을 지키는 것만 해도 벅차다고 생각했지. 하지만…….”
“은인의 말씀을 듣고 꿈이 생긴 거로군요.”
“음…….”
잠시 말을 고르던 흑치영은 입을 열었다.
“나도 한때는 수많은 병사들을 이끌고 전장을 질타하는 장수를 꿈꿨지. 어젯밤 대군마마와 말을 나누다 보니 젊었을 적 품었던 이상이 다시 떠오르더군. 사내로 태어나 넓은 세상에서 명성을 떨치고 내 실력을 시험해 보고 싶은 그런 꿈 말이오.”
“네, 저도 알아요.”
아내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따금 새벽에 잠을 깨어 보면 어두운 방 안에 앉아 검을 쓰다듬고 있는 흑치영의 뒷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가 손수 만든, 그리 비싸지도 않고 좋은 재료를 쓴 것도 아니지만 말로는 평범한 촌부라고 하면서 매일같이 검을 손질하고 있는 걸 보면 아직도 그의 마음속엔 옛날의 그 꿈이 살아 있음을 그녀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가족을 부양하고 생활해 나아가야 하는 일상생활 속에서 깊숙이 잠들어 있던 것을 도현이 건드려 버리자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어진 것이다.
“우리는 걱정하지 말고 당신 마음 가는 대로 하세요.”
“……정말 그래도 되겠소?”
“한 번뿐인 인생이잖아요. 후회 없이 당신의 길을 가세요.”
흑치영은 가만히 아내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이윽고 말없이 그녀를 꼭 껴안았다.
“고맙소. 당신은 정말 현모양처로군.”
“후후, 그걸 이제 깨달으시다니 너무하세요.”
마음의 결심이 서자 흑치영의 행동은 재빨랐다.
그날 오후 도현이 외출에서 돌아오자마자 만나고 싶다는 말을 전했고, 이윽고 어제 그 방에서 기다리고 있겠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가지고 있던 것 중에서 가장 깨끗하고 좋은 옷으로 갈아입은 흑치영은 이미 술잔을 준비해 놓고 기다리는 도현과 마주 앉아 다짜고짜 머리를 조아렸다.
“갑자기 왜 이러는가?”
깜짝 놀란 도현이 묻자 그는 결연한 표정을 하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어젯밤 하신 말씀, 아직 유효합니까?”
“…….”
흑치영이 진심이라는 걸 깨닫자 도현도 느슨하게 풀어져 있던 표정을 굳히고 허리를 꼿꼿이 편 후에 답했다.
“그러네.”
“그럼 받아들이겠습니다. 저 흑치영, 지금 이 순간부터 대군마마의 수족이 되어 목숨을 바치겠나이다.”
빙 둘러 가는 겉치레 말 없이 솔직하게 하고 싶은 말을 진심으로 토해 내는 흑치영의 모습에 도현은 잠시 아무 말이 없었다.
여전히 몸을 숙인 자세로 조마조마하게 도현의 답변을 기다리고 있던 흑치영은 뭔가를 끌러 내는 소리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흑치영, 고개를 들게.”
흑치영이 시선을 들어 올리자 한 손에 검을 든 도현이 그를 향해 앞으로 내밀었다.
“이건……?”
“우연한 기회에 얻은 것인데, 날이 잘 들고 단단한 것이 천하의 명검이라 해도 손색이 없지. 이걸 자네에게 증표로 주겠네.”
“그런……! 너무 과분합니다.”
대장장이 일을 해 왔던 만큼 웬만한 검은 한눈에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바로 판단할 수 있다.
도현이 그를 향해 내민 것은 화려한 장식 따위 없는 실전용 검이지만 어느 이름 없는 명장이 만든 것인지 몰라도 굉장히 공을 들인 상급품이었다.
무사에게 무기란 자신의 목숨줄과도 같은 것.
이만한 물건이라면 은자 수십 냥을 주고서라도 사려고 할 사람이 넘쳐 날 텐데 아무 대가도 없이 받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사양하지 말게나. 아무리 좋은 검이라 해도 쓰지 않으면 소용이 없지. 나한테는 너무 길고 무거워서 말이야, 제대로 쓸 수가 없다네. 하지만 자네에겐 딱 맞을 것 같군.”
그 말을 듣고 흑치영이 자세히 살펴보니 과연 일반적인 검보다 길이가 조금 더 길었다.
검날에 쓰인 재료를 어떤 독특한 소재와 섞었는지, 보통 은색이어야 할 것이 묵빛이었으며 폭도 넓어 흑치영 정도의 체구를 가진 장정이 아니면 쉽게 사용하지 못할 것처럼 보였다.
“자아, 얼른 받게나. 설마하니 하루 종일 이렇게 들고 있게 할 셈인가?”
장난스럽게 재촉하는 도현의 말에 흑치영은 쉽사리 손을 내밀지 못하다가 이내 조심스럽게 검을 건네받았다.
“이로써 자넨 내 사람이 된 거야. 이 검은 그걸 약속하는 증표일세.”
“네, 마마!”
흑치영은 감격해서 눈물을 숨기지 못했고, 도현은 그런 그를 향해 직접 술을 따라 주었다.
흑치영, 이후 후세에 이름이 길이 남을 장군의 탄생이었다.
노획한 곡식을 청군 수군 제독인 공유덕 장군에게 일부러 시세의 절반 가격만 받고 싸게 넘겨준 도현은 연태포구를 떠나 남쪽으로 내려갔다.
이미 몽고족 전사들이 한바탕 휩쓸고 지나갔는지 조선군을 막아서는 적군은 하나도 없었다.
이때쯤 연태포구에 상륙한 무리가 왜구들이 아니라 청군이라는 걸 알아차린 산동성 도지휘사는 급히 황제가 있는 자금성에 사실을 알리고 부랴부랴 병력을 집결시켰다.
눈에 띄는 건 다 약탈하고 불태우는 몽고족과 달리 도현은 일반 마을은 건드리지 않고 철저히 세곡 창고만 노렸다.
그사이 턴 창고만 다섯 곳이고 노획한 곡식은 삼만 섬이 넘었다.
배가 부족해 도저히 가져갈 수 없는 곡식은 불태우지 않고 부근에 사는 주민들에게 그냥 나눠 주었다.
이런 도현의 행동이 소문나자 무거운 세금과 탐관오리들의 수탈에 힘겨워하던 주민들은 은근히 조선군이 오기를 기다리기까지 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도지휘사는 벌써 수십 개의 고을과 성을 약탈하고 불태워 큰 피해를 입힌 몽고족 대신 황제에게 바치는 세곡을 빼앗긴 죄로 문책을 당할까 봐 겁을 내서 반개라는 장수에게 병력 오천을 내줘 조선군을 상대하도록 했다.
이 소식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방에 뿌려 놓은 척후병을 통해 도현에게 보고됐다.
세곡 창고는 아니지만 제법 큰 명군 거점 하나를 점령한 도현은 적 지휘관이 쓰던 방을 차지하고 앉아 휘하 장수들과 가볍게 술을 마시며 오늘 거둔 승리를 치하하고 있었다.
“다들 수고 많았어.”
“명나라 수군 분함대가 주둔하는 곳이라고 해서 잔뜩 긴장했는데 너무 쉽게 끝나서 이거 맥이 풀릴 지경입니다.”
“하하하!”
박도치의 말에 모여 있던 다른 장수들도 와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상석에 앉아 있는 도현도 쓴웃음을 지어 보일 만큼 이번 전투는 싱겁게 끝났다.
한바탕 격돌을 각오하고 쳐들어왔지만 막상 도착해 보니 명나라 수군은 조선군이 온다는 소식에 주둔지를 버리고 벌써 멀리 도망가 버린 후였다.
그래서 조선군은 화살 한 발 쏘지 않고 수군 주둔지 하나를 접수했다.
얼마나 급하게 달아났는지 창고에는 미처 챙겨 가지 못한 병장기와 물자들이 제법 많이 남아 있었고 선착장에는 군선까지 한 척 버려져 있었다.
“창고를 뒤져 보다가 귀한 화약이 무려 쉰세 관(200kg)이나 버려져 있는 걸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그건 아무것도 아니죠. 선착장에 정박해 있는 군선 안에는 홍이포까지 그대로 설치되어 있더라고요.”
그렇게 오합지졸인 명군을 안주로 삼아 즐겁게 분위기를 만끽하고 있을 때 노크 소리와 함께 군관 하나가 안으로 들어왔다.
“충! 급히 보고드릴 것이 있습니다.”
“뭔가?”
“명군 오천이 우리를 향해 빠르게 접근 중이라고 합니다.”
“그게 정말이야!”
“예.”
순간 방 안 분위기가 차갑게 얼어붙었다.
“몽고족 부대가 산동성 성도인 제남에 더 가까이 있는데 왜 하필 우리부터 먼저 공격하는 거야?”
그러자 옆에 앉아 있던 임경업 장군이 약간 굳은 얼굴로 말했다.
“세곡 창고를 집중적으로 노린 것이 아마 도지휘사의 신경을 건드린 모양입니다.”
“끄으응.”
미간을 찌푸린 도현은 모여 있는 장수들을 훑어보며 입을 열었다.
“오천이라면 만만치 않은 숫자인데 어찌했으면 좋겠나?”
“맞붙어서 지지는 않겠지만 그러면 우리도 피해가 만만치 않을 겁니다.”
박도치의 말에 다른 장수들도 같은 생각인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전투를 회피하자는 거야?”
“자존심이 상하지만 병력을 최대한 보존하기 위해서는 그게 좋지 않겠습니까.”
가장 현명한 방법이었지만 어쩐지 개운치 않은 느낌에 도현이 한 손으로 턱을 매만지고 있을 때 한쪽에 앉아 있던 흑치영이 조심스럽게 대화에 끼어들었다.
“제가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괜찮으니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면 마음껏 해.”
도현과 장수들의 시선이 집중되자 흑치영은 약간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이야기를 했다.
“상대의 목표가 우리라면 회피한다고 해도 끈덕지게 계속 달라붙지 않을까요.”
“그럼 어떻게 하자는 거지?”
흑치영은 도현과 시선을 맞추며 말을 이었다.
“여기서 북서쪽으로 오십 리쯤 가면 소천곡이라는 협곡이 하나 있습니다. 길이 아주 좁고 양옆으로 울창한 숲과 절벽이 있어 매복하기 딱 좋은 장소인데 명군이 제남에서 이쪽으로 오려면 꼭 거쳐야 되는 곳이죠.”
이야기를 듣던 도현은 눈을 반짝였다.
“거기서 매복 공격을 하자는 거야?”
“그렇습니다. 상대를 협곡 안으로 완전히 끌어들일 수만 있다면 손쉽게 전멸시킬 수 있을 겁니다.”
“흐음.”
손가락으로 팔걸이 끝부분을 톡톡 두드리며 잠시 고심하던 도현은 시선을 옆으로 돌려 임경업 장군을 봤다.
“임 장군이 보기에는 어떻소?”
“적을 유인하는 것이 관건이기는 하지만 괜찮은 작전 같습니다. 숲이 있다고 하니 가능하면 화공을 곁들이면 더 좋겠군요.”
긍정적인 반응에 도현은 머리를 살짝 끄덕이고는 결정을 내렸다.
“좋아. 적을 앞에 두고 도망치는 건 내 성격에도 안 맞아. 그럼 흑치영의 의견대로 소천곡에서 매복을 펼쳐 적을 격멸하도록 하지. 제장들은 한 시진 뒤에 흑치영과 함께 구체적인 작전을 짜서 내게 보고하게.”
“옛.”
“다들 나가 봐.”
도현의 말에 임경업 장군과 장수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군례를 취하고는 서둘러 방을 나섰다.
저녁에 다시 모여 작전을 점검한 도현은 다음 날 아침 일찍 병사들을 깨워 식사를 챙겨 먹이고는 소천곡으로 출발했다.
소천곡은 예상한 것보다 더 험준한 협곡으로, 높은 산 사이에 작은 시냇물이 흐르고 온통 울창한 원시림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 사이에 작은 길이 나 있는데 짐수레 두 개가 겨우 지나갈 정도로 아주 좁고 구불구불했다.
장수들과 함께 말을 타고 협곡을 둘러본 도현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거 기대했던 것보다 더 좋군.”
“그러게 말입니다. 마침 가뭄이 들어서 시냇물과 나무들이 모두 바짝 말라 있어 작은 불씨만 던져 놓아도 말 그대로 협곡 전체가 화로가 되어 불타오를 것 같습니다.”
“후후후. 이거 내일 있을 전투가 기대되는데.”
“그런데 정말 미끼가 될 기병대를 직접 지휘하실 겁니까?”
걱정스러운 듯 쳐다보며 임경업 장군이 묻자 도현은 태연히 머리를 끄덕였다.
“나처럼 확실한 미끼가 어디 있겠어. 아마 대장기를 보면 눈이 뒤집혀서 앞뒤 안 가리고 쫓아올 거야.”
“직접 나서실 필요 없이 아무나 적당한 군관을 지목해서 깃발만 대신 들게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도 되지만 내가 하는 것이 더 확실하지 않겠어?”
쓸데없이 위험을 자처하는 도현의 모습에 임경업 장군은 답답하다는 듯이 이야기를 했다.
“혹시 다치시기라도 할까 봐 염려되니까 그러지요.”
“내 한 몸 지킬 실력은 되니까 걱정하지 마.”
“후우, 대군마마의 고집을 누가 꺾겠습니까. 대신 절대 위험한 행동은 하시면 안 됩니다.”
“알았어.”
도현이 자신 있게 대답했지만 임경업 장군은 물가에 내놓은 어린애처럼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그나마 옆에 무예가 뛰어난 내금위 위사 두 명과 박영식이 이끄는 호위대가 있었기에 조금 안심할 수 있었다.
여하튼 협곡에 도착한 조선군은 임경업 장군의 지휘하에 나무를 잘라 은폐물을 만들고 곳곳에 함정을 설치하는 등 적군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시간이 흘러 정오가 갓 지났을 때 척후병 하나가 급히 말을 타고 달려와 적군의 도착을 알렸다.
“드디어 시작이군.”
“절대 무리하지 마십시오.”
“염려 마.”
아주 신이 나서 말에 올라타는 도현을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쉰 임경업 장군은 옆에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는 박영식 호위대장을 보며 당부했다.
“자네가 옆에서 잘 보필하게.”
“알겠습니다, 장군.”
잠시 뒤 도현을 선두로 기병 이백 명과 보병 오백 명으로 이루어진 병력이 협곡 입구로 이동했다.
협곡 앞에 진을 치고 얼마쯤 기다렸을까, 뿌연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명군이 모습을 드러냈다.
“호오, 제법 군기가 잡혀 있는 것이 정예병인 모양이군.”
그러자 옆에 있던 흑치영이 한 손을 들어 행렬 선두를 가리키며 말했다.
“깃발을 보면 도지휘사 직속의 부대 같습니다.”
“어쩐지.”
“군기와 함께 반般 자가 적힌 깃발이 있는 걸 볼 때 우군장인 반개 장군이 지휘하는 모양입니다.”
도현은 흥미로운 표정을 지으며 흑치영을 봤다.
“유명한 사람인가 보지?”
“몇 년 전에 쳐들어온 왜구 무리를 토벌하면서 큰 명성을 얻었는데 무력은 뛰어나지만 성격이 급하고 잘 흥분해서 병사들 사이에서 멧돼지라는 별명으로 불린다고 합니다.”
“그럼 의외로 쉽게 매복에 걸려들 수도 있겠군.”
“그렇지요.”
눈을 반짝 빛낸 도현은 허리에 찬 검을 뽑아 들며 차갑게 입을 열었다.
“어디 멧돼지 사냥을 시작해 볼까.”
조선군을 발견한 명군은 황급히 행군을 중단하고 전투 대형을 갖추기 시작했다.
“설마 했는데 정말 조선군이군.”
말 위에 앉아 정면을 살핀 반개의 중얼거림에 부관이 분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변방 제후국 주제에 감히 만주 오랑캐들과 작당해 황제께 반기를 들다니, 절대 용서해서는 안 됩니다.”
“맞아. 저런 것들은 대국의 무서움을 단단히 보여 줘야 해. 그런데 듣던 것보다 병력이 적은 것 같군.”
“세곡 창고를 지키던 놈들이 지레 겁먹고 병력을 부풀려 얘기한 것이겠지요. 만에 하나 조금 머리가 돌아가는 녀석이라면 뒤편 협곡에 매복하고 있을 수도 있고요.”
코웃음을 치며 부관이 깔보는 투로 말하자 반개가 답했다.
“제깟 것들이 매복을 하고 있든 말든 상관없어. 우리 앞을 가로막는 놈들은 모조리 다 짓뭉개 버리면 되니까 말이야.”
“역시 장군님이십니다.”
맞장구를 치는 부관의 말을 귓등으로 흘려들으며 반개는 조선군 쪽을 잠깐 쳐다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시간 끌 것 없이 대형이 갖춰지면 바로 공격하지.”
“알겠습니다.”
명령을 내린 반개 장군은 거만한 태도로 정면을 바라봤다.
병사들이 일렬로 늘어서며 전투 대형이 갖춰지자 반개 장군은 지휘봉을 치켜들며 큰 소리로 말했다.
“공격!”
우와아아!
많이 쳐줘 봤자 천여 명도 안 되는 상대와 달리 명군은 오천이 넘었기에 다들 거침이 없었다.
선두는 오백 기마군이었고 그 뒤를 나머지 보병들이 거센 파도처럼 따랐다.
“옵니다.”
첫 대규모 전투라 긴장한 듯한 흑치영의 말에 도현은 여유로운 얼굴로 정면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적이 백 보 안에 들어올 때까지 절대 쏘지 말고 기다려라!”
도현의 지시에 방패를 든 보병 뒤편에 있던 궁수들은 화살을 재고 조준만 한 채 쏘지는 않았다.
“박 위사, 궁수들을 잘 통제해.”
각궁을 든 박태철은 도현의 말에 얼른 대답했다.
“염려 마십시오.”
그사이 명군은 더욱더 속력을 올리며 달려왔다.
마침내 상대가 화살 유효 사정거리인 백 보 안에 들어오자 도현은 지체 없이 외쳤다.
“화살을 쏴라!”
슈슈슉! 슈슉! 슉!
궁수들이 팽팽하게 당기고 있던 시위를 놓자 날카로운 바람 소리를 내며 화살 수십 발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크게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진 화살 세례에 선두가 무더기로 쓰러지며 돌격 대형이 약간 흐트러졌다.
“커억!”
“으윽.”
하지만 적은 그 정도 피해는 개의치 않고 계속 다가왔다.
“앞에 선 기병을 집중해서 공격해라!”
궁수들을 지휘하며 박태철도 각궁으로 적 기병을 세 명이나 쓰러뜨렸지만 상대를 저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어느새 적이 오십 보 거리로 들어오자 박영식 호위대장이 약간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마마, 이제 뒤로 물러설 때입니다.”
“아직 아니야. 놈들을 확실히 끌어들이려면 한번 부딪쳐 줘야지.”
원래 계획은 화살로 상대를 자극한 다음 협곡 안으로 후퇴하는 것인데 걱정한 대로 도현이 위험한 행동을 하려 들자 박영식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다가 적에게 발목을 잡힐 수도 있습니다.”
“그냥 살짝 건드리기만 할 거야.”
상대편 얼굴을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거리가 가까워지자 도현은 큰 소리로 보병들에게 명령을 내리고는 말 옆구리를 발로 차며 앞으로 달려 나갔다.
“보병은 후퇴하고 기병은 날 따르라!”
지급받은 여섯 발의 화살을 다 쏜 궁병은 보병들의 보호를 받으며 신속하게 뒤편 협곡으로 물러섰다.
“적들에게 조선군의 무서움을 보여 줘라!”
“돌격!”
두두두두!
후퇴하는 보병과 반대로 기병 이백 명은 도현을 따라 적을 향해 달려갔다.
이렇게 도현이 위험을 감수하고 굳이 적과 맞부딪치려는 건 상대를 확실하게 속이기 위한 것도 있지만 말을 탄 기병보다 발이 느린 보병들이 안전하게 후퇴할 시간을 벌어 주기 위해서였다.
마침내 양쪽 선두가 충돌하며 서로 뒤엉켰다.
콰콰쾅!
이히히힝!
여기서도 앞에 선 도현은 검을 사선으로 크게 휘둘러 적 기병의 어깨를 베어 냈다.
서걱!
“으악.”
그런 도현을 보호해야 하는 호위대 대원들은 바짝 긴장한 얼굴로 접근하는 적을 쓰러뜨렸다.
비록 숫자는 적지만 대부분 군관급으로 이루어졌고 실전 경험도 풍부한 조선군 기병은 상대적으로 실력이 떨어지는 명군에 맞서 훌륭하게 싸웠다.
특히 새로 영입한 흑치영은 도현에게 받은 묵빛 검을 이리저리 휘두르면서 마치 물 만난 고기처럼 상대를 수도 없이 베어 넘겼다.
하지만 수적 열세는 어쩔 수 없었기에 후속 병력이 계속 밀려오자 조선군 기병들은 금방 수세에 몰렸다.
자칫 적에게 둘러싸여 그대로 전멸당할 수도 있는 상황이 되자 적병을 상대하면서 계속 주위를 살피던 도현은 미련 없이 퇴각 명령을 내렸다.
“후퇴! 후퇴하라!”
그러자 아군 기병들이 검을 크게 휘둘러 상대하던 적을 떨쳐 내고는 황급히 말 머리를 돌려 후퇴했다.
“적이 달아난다. 쫓아라!”
와앗!
그런 아군 기병들 뒤로 흥분한 적들이 함성을 지르며 쫓아갔다.
안타깝게도 쉰 명가량의 희생을 뒤로하고 기병들은 연신 칼등으로 말 엉덩이를 때리며 협곡을 향해 질풍처럼 내달렸는데 그 안에는 도현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랴!”
“협곡 안으로만 들어가면 된다! 다들 조금만 더 힘을 내라!”
마치 단거리 달리기 선수처럼 있는 힘을 짜내 달린 아군 기병대는 아슬아슬하게 적들을 떨쳐 내고 협곡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협곡 오른편 산 중턱에서 초조한 얼굴로 기다리던 임경업 장군은 거친 말발굽 소리와 함께 장군기를 휘날리며 아군 기병대가 나타나자 반색했다.
“다행히 무사하시군!”
“장군, 뒤에 적군이 보입니다.”
“적들이 협곡 안으로 완전히 들어오면 공격을 시작한다! 다들 준비해.”
“옛.”
한편 도현과 기병들을 한참 쫓아가던 반개 장군은 뭔가 이상한 느낌에 황급히 병사들을 멈춰 세웠다.
“왜 그러십니까?”
의아한 얼굴로 부관이 묻자 반개 장군은 표정을 굳히며 주위를 둘러봤다.
“아무래도 찝찝해.”
“뭐가 말씀이십니까.”
“꼭 놈들이 우릴 이 안으로 끌어들이는 느낌이 든단 말이야. 이렇게 울창한 숲이 좌우에 있는데 새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다는 게 수상하잖아.”
확실히 이상하기는 했지만 혈기 넘치는 젊은 부관은 애써 불길한 느낌을 무시하며 말했다.
“제깟 놈들이 매복을 해 봤자 우리가 힘으로 밀어붙이면 오히려 각개격파를 당할 겁니다.”
“으음.”
반개 장군이 약간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자 부관이 재차 추격을 종용했다.
“이미 협곡을 절반 이상 지났는데 아무런 움직임이 없는 걸 보면 매복 자체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하긴.”
“더 늦기 전에 어서 놈들을 쫓아가시죠.”
“좋아.”
고민하던 반개 장군이 막 결정을 내리려는 순간 후방에서 커다란 폭음이 터졌다.
꽈아아앙!
조선군이 미리 설치해 놓은 화약이 터지며 집채만 한 돌덩어리들이 쏟아져 내려와 협곡 입구를 막아 버렸다.
“이런!”
그걸 신호로 양쪽 숲 속에서 시뻘건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화르르륵!
가뭄으로 나무들이 바짝 말라 있는 데다 아군이 일부러 기름까지 군데군데 뿌려서 불길은 삽시간에 숲 전체로 번져 갔다.
무시무시하게 피어오르는 불길과 후끈한 열기에 적군은 크게 당황했다.
“화공입니다.”
“젠장! 어쩐지 찝찝하더라니.”
와락 얼굴을 구긴 반개 장군은 주위를 둘러보고는 검을 들어 앞쪽을 가리키며 크게 외쳤다.
“최대한 빨리 여길 빠져나간다. 서둘러라!”
반개 장군이 재촉하지 않아도 빠르게 다가오는 불길에 잔뜩 겁을 먹은 병사들은 앞을 다퉈 움직였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대형이 무너졌고 같은 편끼리 서로 뒤엉켜 밟혀 죽는 병사까지 생겨났다.
“저리 비켜!”
“빨리 가!”
“아악.”
그런 모습에 반개 장군은 화가 치밀었지만 스스로도 이글거리는 불의 공포에 마음이 급해져 병사들을 추스를 여유가 없었다.
“사, 살려 줘.”
몇몇이 화마에 휩싸여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지르며 불에 탔다.
그러자 병사들은 공포가 더 크게 번지며 혼란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허둥지둥 반대편 입구 쪽으로 나오자 기다리고 있는 건 반원 모양의 대형을 갖추고 길을 막고 있는 조선군이었다.
“하하하! 허둥지둥 도망쳐 나오는 꼴이 보기 좋구나.”
임경업 장군과 함께 말을 타고 앞에 나온 도현의 놀림에 반개 장군은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이것들이! 다 죽여 버리겠다!”
“뒈지는 건 너희들이지.”
“뭣들 하느냐. 어서 저놈들을 쓸어버려라!”
화가 치밀어 오른 반개 장군이 검을 휘두르며 목청을 높이자 적병들은 출구를 뚫기 위해 우르르 달려들었다.
“궁수 앞으로!”
도현의 말에 궁수들이 한 발짝 앞으로 나와 미리 화살을 재어 놓은 시위를 힘껏 당겨 상대를 겨냥했다.
“발사!”
바로 이어진 명령에 궁수들은 일제히 화살을 쐈다.
슈슈슉! 슈슉! 슉!
섬뜩한 소리를 내며 날아간 수백 개의 화살은 정확히 적병의 몸에 틀어박혔다.
퍼퍼퍽! 퍽! 퍽!
“끄아악.”
“우억.”
“헉!”
좁은 공간에 적들이 새까맣게 몰려 있었기에 오히려 빗맞는 것이 더 어려웠는데 비명이 터져 나오며 선두가 힘없이 무너졌다.
“제기랄! 밀어붙여!”
이를 부드득 갈아붙인 반개 장군은 연신 공격을 독려했고 빠르게 번지는 불길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병사들은 필사적으로 덤벼들었다.
궁수들이 쉬지 않고 화살을 날렸지만 아무래도 쪽수는 어쩔 수 없는지 거리가 급속하게 가까워졌다.
이대로 양군이 부딪친다면 자칫 조선군이 밀릴 수도 있는 급박한 순간이었지만 어쩐 일인지 도현은 느긋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지금이야!”
도현의 외침에 아군 대형 뒤편에서 시커먼 쇠공 같은 것이 날아와 적진에 떨어졌다.
쿵! 쿵!
둔탁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진 쇠공들은 곧바로 폭발을 일으켰다.
꽈아앙! 꽝! 꽝!
“커허억.”
“으윽.”
아무것도 모르고 주위에 있던 적병들은 폭발과 함께 사방으로 쏟아진 쇳조각에 말 그대로 피 떡이 됐다.
폭발을 일으키며 한꺼번에 수십 명의 적군을 쓸어버린 쇠공의 정체는 바로 조선이 자랑하는 화약 무기인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였다.
임진왜란 당시 화포 장인이었던 이장손이 개발한 비격진천뢰는 단단한 무쇠로 만들어졌고 모양은 둥근 공처럼 생겼다.
지름이 반 자가 조금 넘고 무게는 서른여섯 근 정도인데 안에 화약과 날카로운 쇳조각을 넣어서, 터트리면 현대의 클레이모어 지뢰 같은 역할을 한다.
비격진천뢰의 가장 무서운 점은 폭발과 함께 안에 넣어 둔 쇳조각들이 퍼지며 반경 삼 장 안에 있는 적들을 모두 살상한다는 것인데 죽지 않아도 큰 부상을 입고 전투 불능 상태에 빠질 가능성이 컸다.
안에 시관인 죽통을 집어넣고 거기에 나선형의 홈을 파서 도화선을 감았다.
도화선을 감는 횟수로 폭발이 일어나는 시간을 조절했기에 지금처럼 투척해도 되지만 상황에 따라서 땅에 묻고 지뢰나 시한폭탄처럼 사용할 수도 있었다.
임경업 장군이 혹시 몰라 본국에서 챙겨 온 비격진천뢰 쉰 개를 급히 만든 투석기를 이용해 적진에 던져 넣자 상대편은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꽈아앙!
이히히힝!
“으악!”
반개 장군 본인마저 바로 옆에서 터진 비격진천뢰 파편에 옆구리와 다리에 부상을 입고 말에서 굴러떨어졌다.
깜짝 놀란 부관이 황급히 말에서 뛰어내려 그를 부축했지만 이미 갑옷이 온통 피에 흠뻑 젖어 있었다.
“장군!”
“나 반개가 이렇게 허무하게 죽다니…….”
“정신 차리십시오.”
부관이 옷 한쪽을 찢어 상처를 지혈하려는 순간 반개가 한 움큼의 피를 토해 내며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우욱.”
“이런.”
낭패한 표정을 지은 부관이 다급하게 손을 놀렸지만 반개는 몇 번 더 피를 토해 내다가 이내 몸이 축 늘어졌다.
부관이 그의 몸을 마구 흔들었지만 손이 움직이는 대로 흔들릴 뿐 반개는 다시 깨어나지 못했다.
최고 지휘관의 죽음은 가뜩이나 혼란에 빠진 명군을 더 최악으로 떨어뜨렸다.
반면 커다란 사각 방패를 손에 든 보병들로 단단히 저지선을 세운 아군은 화살 세례를 계속 퍼부으며 상대를 공격했다.
악이 받친 적들이 매복을 벗어나려고 저지선에 덤벼들었지만 오 열로 늘어선 아군은 마치 태산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결국 더 견디지 못한 적들은 불에 타 죽지 않으려고 병장기를 버리고 항복했다.
“살려 주시오.”
“하, 항복합니다.”
처음 한 명이 항복하자 마치 도미노처럼 적병들이 차례로 손을 들었다.
그러자 도현은 승리의 미소를 지었고 병사들은 가지고 있는 무기를 위로 치켜올리며 환호성을 질렀다.
“우리가 이겼다!”
“천세! 천세!”
“봉림대군마마 천세!”
이날 전투에서 도현은 명군 이천 명을 포로로 잡고 그에 상당하는 병장기와 보급 물자를 노획할 수 있었다.
특히 그중에서도 보급 물자가 손에 들어온 덕분에 사정에 여유가 생긴 도현은 여태껏 고생해 온 부하들에게 술과 고기를 베풀어 승리를 자축하는 연회를 베풀었다.
말이 연회지 바닥에 퍼질러 앉아 먹고 마시는 게 다였지만 평소와 달리 기름진 안주에 마음껏 술을 마실 수 있는 것만으로도 병사들은 무척 만족한 눈치였다.
“대군마마다!”
“감사합니다, 마마!”
도현이 발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여기저기서 외침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런 병사들을 향해 손을 들어 주면서 화답한 도현은 화톳불 앞에 앉아 있는 흑치영을 발견하고 말을 걸었다.
“여어.”
“마마.”
벌떡 일어나서 인사하려는 흑치영을 손짓으로 제지한 도현은 그 옆에 풀썩 주저앉았다.
“오늘처럼 대규모 전투는 처음이었지? 자네 활약이 대단하던걸.”
“별말씀을요. 사실은 무척 긴장해서 손이 후들거릴 정도였습니다.”
“하하! 그런가.”
기분 좋게 웃으면서 등을 두드려 준 도현은 술병을 들고 흑치영의 잔에 넘실거릴 정도로 술을 따라 주었다.
“그래도 죽지 않고 살아 있으니 다행이지. 자, 받게나. 자네의 첫 승을 축하하는 뜻으로 내가 주는 걸세.”
“황공합니다.”
흑치영은 조심스러운 손길로 잔을 받아 들고는 단숨에 꿀꺽 삼켜 버렸다.
“크으-! 좋은 술이로군요.”
“오늘 얻은 전리품 중 하나야. 물이라면 모를까, 술은 들고 가 봤자 짐만 되니 차라리 여기서 다 마셔 버리는 게 낫지.”
“그래서 이런 축하연을 벌이시는 겁니까?”
“겸사겸사. 매일같이 생사의 고비를 넘고 있는데 술이라도 없으면 할 맛이 안 나지 않겠어.”
“그렇군요.”
“자, 그럼 나는 슬슬 일어나 볼까.”
“어딜 가십니까?”
도현은 병사들이 모여 있는 다른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할 일도 없는데 마냥 놀고 있으면 뭐하나. 이럴 때 자주 얼굴을 내비쳐야지.”
그렇게 말하고 도현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자리를 떠났다.
그 뒷모습을 눈으로 좇던 흑치영은 도현이 다가가자 일순 당황하던 병사들이 이윽고 천진난만한 웃음을 띠고 그에게 인사를 건네는 모습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작은 미소를 지었다.
세상에 어찌 저런 분이 계실까.
평생 목숨 바칠 주군이란 바로 저런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흑치영은 조용히 술잔을 기울였다.
이렇게 대승을 거둔 조선군과 달리 겁도 없이 산동성 성도인 제남성을 노렸던 몽고족 만 오천 명은 대패를 당했다.
방어전에 성공하며 자신감을 되찾은 도지휘사는 주변성에서 병력을 끌어모아 육만 대군을 만들어, 후퇴하는 몽고군을 쫓아갔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조선군도 어쩔 수 없이 청국 수군이 있는 연태포구로 황급히 물러서야 했다.
행군 대열 선두에 서 있던 도현은 멀리 연태포구가 보이자 짧게 혀를 찼다.
“결국 다시 돌아왔군.”
“아직 청군 함대가 그대로 남아 있는 것 같아 다행입니다.”
“저것들은 우리보다 잿밥에 더 관심이 많은 거고.”
퉁명스러운 도현의 말에 임경업 장군은 앞바다에 떠 있는 수많은 청군 군선들을 보며 쓰게 웃었다.
“어찌 됐든 안전하게 귀환할 수 있으니 된 거지요.”
“흥.”
도현이 이렇게 기분이 안 좋은 건 사실 청나라 수군 제독인 공유덕 때문이었다.
몽고족이 대패를 당하고 명나라 수군이 근처에 얼쩡거리기 시작하자 공유덕은 금방이라도 산동반도에서 철수할 것처럼 행동했고, 도현이 전령을 보내 조선군을 기다려 달라고 하자 뻔뻔하게도 포로로 잡은 명군 이천 명을 자신에게 넘기라고 요구했다.
동맹군으로서 당연히 조선군을 데려갈 의무가 있지만 그건 모른 척하고 욕심을 부리는 것이다.
화가 난 도현은 그냥 근처 바다에 대기시켜 놓은 봉황상단 배를 타려고 했지만 괜히 청군과 갈등을 일으켜서 좋을 것이 없고 무엇보다 지금 그가 가진 힘을 드러내면 엄청난 견제를 받을 것이 불을 보듯 뻔했기에 공유덕의 요구를 들어주기로 했다.
대신 봉황상단 배에는 그동안 노획한 것들을 가득 채워서 웅도로 보냈다.
손해 보는 걸 싫어하는 도현은 공유덕 제독과 협상해서 포로들을 넘겨주는 대신 청군 함대에 격군으로 있는 조선인 노예 삼백 명을 돌려받기로 했다.
그 인원을 제한다고 해도 이천 명이나 되는 포로를 받으면 훨씬 이익이었기에 공유덕은 흔쾌히 승낙했다.
이렇게 넘긴 포로 상당수는 노예로 팔려 공유덕의 개인 주머니로 들어갈 것이 뻔했지만 지금으로써는 어쩔 수 없었다.
“뭐, 그나마 병력을 최대한 유지할 수 있었으니 그걸로 위로를 삼아야지.”
뒤에 늘어선 병사들을 힐끗 돌아보며 한 도현의 말에 임경업 장군이 맞장구를 쳤다.
“솔직히 절반 정도는 잃을 각오를 했는데 거의 대부분 살아서 돌아가다니 이게 다 대군마마 덕분입니다.”
“내가 뭐 한 것이 있다고.”
쑥스러운 듯 시선을 돌리며 도현은 진지하게 말했다.
“임 장군과 장졸들이 열심히 싸워 줬기에 좋은 성과를 올릴 수 있었던 거요. 그나저나 산동반도에 상륙해서 명나라에 큰 피해를 입혔다고 귀환 뒤에 장군이 문책을 받는 건 아닌지 걱정이오.”
걱정스러운 얼굴로 바라보자 임경업 장군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전하께서 벌을 내리신다면 어쩔 수 없지요.”
군령에 의해 할 수 없이 실행한 거지만 친명파가 대다수인 조정 대신과 사대부에 이번 일은 엄청난 배반 행위였다.
분명 조선으로 돌아가면 이걸 가지고 시비 거는 자들이 있을 테고 최악의 경우 벼슬에서 물러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임경업 장군은 산동반도로 올 때부터 어느 정도 각오를 했는지 의외로 담담한 모습을 보이며 오히려 도현을 걱정했다.
“저야 그렇다 쳐도 대군마마께 화가 미치는 건 아닌지 걱정입니다.”
“세상이 어찌 돌아가는지 보지도 못하고 그저 공자 왈 책만 읽고 시끄럽게 목청만 높이는 샌님들 따위는 하나도 무섭지 않소.”
자칫 조정 대신들과 사대부 전체를 적으로 돌릴 수도 있는 아주 위험한 발언이었지만 임경업 장군은 어쩐지 마음 한쪽이 시원하게 뚫리는 것 같았다.
사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조금 처우가 나아졌다지만 기본적으로 조선은 유학자들의 나라로 무인을 천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오죽했으면 병부상서 같은 군부 고위직도 무인이 아닌 문관이 차지할 정도인데 왕족인 도현이 그런 불만을 해소시켜 주는 이야기를 하니 기분이 안 좋을 리가 없었다.
“마마, 행여라도 그런 말이 다른 사람들의 귀에 들어가면 입장이 곤란해질 수도 있으니 앞으로는 자제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짐짓 정색하며 임경업 장군이 충고를 하자 도현은 빙긋 웃는 얼굴로 한쪽 눈을 살짝 감았다.
“후후후. 아무 데서나 이런 이야기를 할 만큼 반푼이는 아니니 염려 마시오.”
“하여튼 대군마마는 정말 못 당하겠습니다.”
그제야 임경업 장군도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긴 조선군은 잠시 뒤 연태포구에 들어갔다.
조선군보다 더 먼 곳까지 진출했지만 전원 기병으로 이루어진 몽고족은 먼저 도착해서 벌써 배에 탑승해 있었다.
선착장으로 가자 공유덕 제독은 직접 나타나지도 않고 달랑 휘하 장수 하나를 보내 포로들만 데려가면서 해가 떨어지기 전에 출발해야 하니 서둘러 배에 타라고 재촉했다.
“정말 보자 보자 하니까!”
“참으십시오, 마마.”
저절로 손이 허리에 차고 있는 검으로 가는 걸 임경업 장군의 만류에 겨우 화를 가라앉힌 도현은 고개를 돌려 공유덕 제독이 넘겨준 조선인 노예 삼백 명과 오랜 행군에 지친 병사들을 보고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피곤하겠지만 급하다고 하니 일단 승선부터 시키시오.”
“알겠습니다.”
군례를 올리며 대답한 임경업 장군은 서둘러 장수들을 불러 모아 지시를 내렸다.
잠시 뒤 병사들은 각 백인대별로 질서 정연하게 대기 중인 군선에 올라탔다. 무거운 물품은 이미 봉황상단 배에 실었기에 큰 문제 없이 빠르게 철수가 이루어졌다.
마지막으로 도현과 지휘부가 탑승하자 청군 함대는 쫓기듯 서둘러서 포구를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