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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투 1 (16/104)

암투 1

몽고족 패잔병과 조선군을 가득 태우고 연태포구를 출발한 청군 함대는 산해관이 아니라 요동반도로 길을 잡았다.

원래대로라면 산해관으로 가야 했지만 갑자기 경로가 바뀐 이유는 청 황제인 홍타이지가 전투를 지휘하던 중에 피를 토하고 쓰러졌기 때문이다.

어의가 급히 치료를 했지만 이레가 넘도록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하자 전쟁을 포기하고 군대를 심양으로 물렸다.

배에 타고 나서야 이런 소식을 들은 도현은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치켜떴다.

“그게 정말이야?”

“네. 그래서 몽고족이 제남에서 패하지 않았더라도 조만간 철수하려고 했답니다.”

임경업 장군의 이야기를 들으며 도현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일이 있었다니…….”

홍타이지의 죽음을 예상하고 있었지만 시기와 원인이 원래 역사하고 달랐다.

“군대를 물릴 정도면 황제의 상태가 심상치 않은 모양입니다.”

“그렇겠지.”

“이번 일로 우리 조선에 불똥이 튀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아주 영향이 없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을 거야. 어찌 됐든 홍타이지 덕분에 지긋지긋한 전쟁을 끝낼 수 있게 됐군.”

“그러게 말입니다.”

황제가 중병을 앓는 건 청국 사정이고 이제 휘하 병사들을 데리고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됐으니 임경업 장군의 표정이 밝아졌다.

반면 도현은 자신이 한 일에 대한 나비 효과인지, 갑자기 발생한 돌발 변수에 어떻게 대처해야 될지 깊은 고민에 빠졌다.

복잡한 도현의 마음과 달리 잔잔한 파도와 순풍 덕분에 함대는 항해를 시작한 지 닷새 만에 목적지인 요동반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선착장에 내리자 뜻밖에도 청국 조정에서 보낸 관리가 도현과 임경업 장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젊은 청국 장수의 안내를 받아 도현과 임경업 장군이 관청 내에 있는 객사로 들어가자 관복을 차려입은 중년 남자가 공유덕 제독과 뭔가 이야기를 속닥이다가 급히 말을 끊었다.

“어서 오시오. 이분은 예부시랑인 홍백민 공이시오.”

공유덕 제독의 소개에 도현은 그를 따라 일어선 홍백민의 얼굴을 잠시 응시하다가 먼저 입을 열었다.

“반갑소이다.”

“대군마마의 명성은 심양에서부터 많이 들었습니다. 옆에 계신 분은 조선이 자랑하는 명장인 임경업 장군이시겠군요.”

“처음 뵙겠소이다. 부족하지만 이번에 파병된 조선군을 이끌고 있는 임경업이라 하오.”

약간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인사가 끝나자 네 사람은 각자 준비된 의자에 앉았다.

시녀가 차와 간단한 다과를 내놓고 나가자 홍백민은 맞은편에 있는 도현을 힐끔 쳐다보며 말했다.

“이렇게 두 분을 청한 이유는 청국 조정의 결정을 전해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예민한 시기였기에 도현은 살짝 얼굴을 굳히고는 홍백민과 시선을 맞췄다.

“그게 뭐요?”

“소문으로 들어 알고들 계시겠지만 황제 폐하께서 중병에 걸리시는 바람에 안타깝게도 전쟁을 급히 끝내게 됐습니다. 그래서 조선군도 이만 본국으로 귀환하라는 지시입니다.”

귀환 명령이 있으리라는 건 예상했지만 병부도 아니고 예부 관리가 나와 이런 일을 전달한다는 것에 도현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이야기라면 예부가 아닌 병부에서 해야 되는 것 아니오?”

그러자 홍백민은 살짝 손을 내저으며 두루뭉술하게 핑계를 댔다.

“전쟁 뒤처리로 병부가 정신이 없기도 하고 청국을 위해 싸운 군대를 돌려보내는 데 성의껏 예를 갖춘다는 의미에서 제가 온 겁니다.”

그러면서 비단 두루마리를 하나 꺼내 쫙 펼쳤는데 거기에는 조선군에 귀환을 명령하는 내용이 적혀 있고 하단에 재상인 범문정의 직인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병부상서가 아닌 범문정의 직인이 찍힌 걸 보고 도현은 대충 내막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황제가 위중해지자 경쟁자이자 군부를 장악한 예친왕 도르곤이 부상하는 걸 막기 위해 범문정이 선수를 쳐서 병부를 찍어 누르며 견제하는 것이다.

명령서를 챙겨 옆에 앉아 있는 임경업 장군에게 건네준 도현은 진지한 어투로 이야기를 이어 갔다.

“그럼 심양으로 가지 않고 여기서 바로 귀환하라는 것이오?”

“그렇습니다. 아시다시피 사정이 여의치 않아 황성에 다른 나라 군대를 들일 여유가 없습니다. 대신 그동안 조선군이 고생한 것에 대한 답례로 황제께서 내리시는 하사품을 가져왔습니다.”

도현이라도 비상 상황에 타국의 군대가 수도 부근에 있는 건 꺼려지는 일이니 충분히 이해가 됐다.

그리고 굳이 심양까지 갔다가 다시 조선으로 가는 것보다 여기서 바로 귀환하는 게 훨씬 가까웠기에 오히려 기꺼운 마음이 들었다.

“알겠소이다. 임 장군과 병사들을 여기서 돌려보내겠소.”

“상황을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대군께서는 저와 함께 바로 심양으로 올라가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웃는 얼굴로 이야기를 했지만 이건 제안이 아니라 명령이었다.

그동안 고생한 장졸들과 회포를 풀 시간도 없이 바로 헤어져야 한다는 것이 조금 아쉬웠지만 빨리 심양으로 돌아가 상황이 어찌 돌아가는지 파악하고 그에 맞춰 대책을 세워야 하기에 잠시 고민하던 도현은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겠소. 대신 나도 정리해야 할 것이 있으니 이틀 정도 시간을 주시오.”

“이틀은 곤란하고 하루 드리지요.”

“알겠소.”

그 뒤로 건성건성 이야기를 조금 더 나눈 도현과 임경업 장군은 이내 자리를 정리하고 방을 나왔다.

객사를 벗어나자 계속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임경업 장군이 주위를 슬쩍 둘러보고는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벌써부터 줄 서기가 시작된 모양입니다.”

“임 장군도 그걸 느꼈소?”

“제가 둔해 보여도 눈치는 빠르답니다.”

임경업 장군의 말에 도현은 살짝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누가 차기 황제가 되느냐에 따라 여러 사람들의 위치가 뒤바뀔 테니 민감해질 수밖에 없겠지.”

“이러다가 내분이 일어나는 건 아니겠지요?”

“어쩐지 그걸 기대하는 것 같군.”

그러자 임경업 장군은 눈을 빛내고는 목소리를 낮춰 대답했다.

“솔직히 아니라고는 말씀 못 드리겠습니다.”

“나도 저들끼리 치고받고 싸웠으면 좋겠지만 양쪽의 핵심 축인 범문정과 예친왕의 성격으로 볼 때 극단적인 상황까지는 가지 않을 거요.”

“그럼…….”

“아마 적당한 선에서 합의를 보겠지. 예를 들어 황제는 다른 사람이 되는 대신 실권을 예친왕이 가지는 정도로 말이오.”

“그걸 자존심 강한 예친왕이 받아들이겠습니까?”

“당연히 화가 나겠지. 하지만 범문정이 다른 친왕들을 부추겨서 압박한다면 어쩌겠소. 아무리 독불장군이라도 친왕들이 가진 힘을 무시하기는 어려울 거요.”

워낙 예친왕이 특출했기에 상대적으로 다른 친왕들이 약해 보여도 그들이 개인적으로 가진 힘은 절대 무시할 수 없었다.

당장 청국의 가장 강력한 무력 단체인 팔기군만 해도 황제 직속을 빼면 친왕들이 각기 하나씩 장악하고 운영할 만큼 영향력이 있었다.

그런 것들을 떠올린 임경업 장군은 이내 머리를 끄덕이고는 도현의 이야기에 동의했다.

“대군마마의 말씀을 들으니 내전이 벌어지는 건 어렵겠군요.”

“아쉽소?”

“예.”

조금의 망설임도 없는 단호한 대답에 도현은 우뚝 걸음을 멈추고는 정색하며 임경업 장군을 바라봤다.

“임 장군.”

“말씀하십시오.”

“지난날 남한산성에서 당한 치욕과 울분은 내가 꼭 몇 배로 되갚아 줄 테니 그때까지 기다려 주시오.”

한양에 있는 대신들처럼 그냥 말로만 떠드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이루겠다는 결의가 가득 담긴 도현의 말에 임경업 장군은 심장이 뜨거워졌다.

“믿습니다. 그날이 오면 제가 맨 앞에 서서 청군의 목을 베겠습니다.”

“말만 들어도 든든하군. 그러니 이번에 귀환해서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상심하지 말고 견뎌야 하오.”

“알겠습니다.”

머리를 숙이며 대답하는 임경업 장군의 어깨를 부드럽게 두드려 준 도현은 다시 객사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날 오후 하사품을 실은 짐수레 한 대가 조선군 주둔지에 전해졌다.

하사품이라고 해 봐야 비단과 수달 가죽, 사금 그리고 향신료 같은 것들로 이번 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병사들을 생각하면 다 갖다 버리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기에 도현은 받자마자 바로 임경업 장군에게 넘겨줬다.

황제가 병환 중이라 술을 마실 수 없었던 도현은 급히 구한 돼지와 소를 잡아 저녁에 병사들을 배불리 먹이며 이별의 아쉬움을 달랬다.

그는 병사들의 손을 하나하나 잡아 주며 위로한 뒤 일인당 은자 서른 냥을 나눠 주며 그동안의 고생을 조금이나마 보상해 줬다.

은자 서른 냥이면 쌀 열다섯 섬을 살 수 있는 거금이었기에 돈을 받자 병사들은 크게 기뻐했다.

한두 명도 아니고 산해관에 남겨 뒀다가 다시 합류한 부상병들까지 합쳐 무려 삼천 명 가까이 되는 인원에게 돈을 주려면 엄청난 거금이 들어간다.

하지만 산동반도를 돌아다니며 세곡 창고에서 나온 쌀을 조선에 가져가 팔아서 번 돈이 무려 금자로 십만 냥이 넘기에 그다지 부담이 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주변 시선 때문에 조금 더 나눠 주지 못한 것이 미안할 뿐이었다.

임경업 장군과 장수들한테도 비단과 귀한 향신료를 듬뿍 챙겨 줬다.

다음 날 귀환길에 오른 조선군을 떠나보낸 도현은 바로 예부시랑인 홍백민과 함께 심양으로 갔다.

홍백민의 재촉에 역참에서 말을 바꿔 타며 빠르게 움직인 일행은 사흘 만에 심양 황성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직 황제와 원정군이 돌아오지 않았기에 황궁에 들르지 않고 관저로 간 도현은 이제 출산이 임박한 아내를 볼 새도 없이 칠현을 보내 은밀히 장 총관을 불러들였다.

무릎을 꿇고 앉아 절을 하는 장 총관을 보며 도현은 부드럽게 말했다.

“그동안 혼자 봉황상단을 이끌어 가느라 수고 많았어.”

“아닙니다. 저보다는 전장에 나가 계신 대군마마께서 더 힘드셨지요.”

“나야 그냥 구경만 하고 왔는데 뭘.”

가볍게 이야기를 하지만 장 총관은 도현이 전투가 벌어지면 항상 앞에 서서 싸우고 실제로 조선군을 지휘했다는 걸 알고 있기에 작게 미소를 지었다.

“그건 그렇고, 요즘 황궁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건 잘 알고 있겠지?”

“안 그래도 황제가 오늘내일한다는 소문에 성내 민심이 흉흉합니다.”

뜻밖의 말에 도현의 눈썹이 살짝 치켜 올라갔다.

“그냥 아프다는 정도가 아니라 위중하다는 소문이 퍼졌다고?”

“그렇습니다.”

“으음.”

낮게 침음성을 내뱉으며 도현은 습관처럼 한 손으로 턱을 매만졌다.

보통 이런 일이 생기면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 소문을 막거나 축소시키는 것이 보통인데 그러지 않고 상세히 퍼졌다는 게 뭔가 찝찝했다.

“혹시 누가 목적을 가지고 일부러 소문을 퍼트리는 거야?”

얼굴을 굳힌 도현의 물음에 장 총관은 살짝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 기미는 보이지 않지만 소문이 나는 걸 그냥 방치하는 건 확실합니다.”

“설마 범문정 재상이…….”

“맞습니다.”

“무슨 이익이 있다고 이러는 거지?”

머리를 갸웃거리면서 도현이 의아해하자 장 총관은 차분한 태도로 짐작되는 걸 이야기했다.

“친왕들의 불안감을 자극해서 서로 뭉치게 하려는 것 같습니다.”

“호오, 이제야 이해가 되는군.”

“그것 때문인지 몰라도 최근 친왕들이 빈번하게 만나 회합을 가진다고 합니다.”

“이거 일이 점점 재미있어지는군.”

비단으로 만들어진 팔걸이를 손끝으로 툭툭 두드리던 도현은 시선을 들어 앞에 앉아 있는 장 총관을 보며 말했다.

“이 사실을 예친왕 쪽도 알고 있을까?”

“핵심 인물들이 대부분 이번 전쟁에 출정했다지만 그래도 심양에 눈과 귀를 남겨 뒀을 테니 지금쯤이면 이곳 상황을 다 파악하고 있을 겁니다.”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이 좋겠지. 일단 정보 수집 능력을 총동원해서 양쪽의 움직임을 하나도 놓치지 말고 감시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목이 타는지 도현은 앞에 있는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다른 보고 사항이 있나?”

“지시하신 대로 웅도에 화약 공방이 완성됐습니다.”

“그거 정말 기쁜 소식이군. 생산량은 얼마나 되지?”

“원료만 원활하게 공급되면 한 달에 여든세 근(50kg)은 거뜬히 만들어 낼 수 있다고 합니다.”

웅도가 독자적인 세력으로 성장하려면 기본 무기인 화약의 자체 생산이 꼭 필요했는데 그게 가능해졌다니 도현의 얼굴에 저절로 미소가 그려졌다.

“안 그래도 화약을 구하는 것이 어려워서 걱정이 많았는데 한시름 덜었군. 화약 장인들에게 포상금을 넉넉히 지급해 주게.”

“예. 그리고 이번에 노획품을 처리하며 자금이 넉넉해진 김에 북경과 왜국에 지점을 추가로 설치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지금도 인원이 부족한데 여기서 지점을 더 늘리는 건 과잉 투자 같은데.”

도현이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자 장 총관은 얼른 이유를 설명했다.

“명나라가 쇠퇴하면서 위상이 추락했지만 그래도 북경만큼 큰 도시가 없으니 미래를 위해서는 조금이라도 빨리 진출하는 것이 좋습니다. 또한 화약의 주재료인 유황을 원활하게 확보하려면 왜국에 지점 설치가 꼭 필요합니다.”

듣고 보니 장 총관의 말도 일리가 있는지라 도현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흠…… 그럼 자네 말대로 하지. 하지만 다른 지점의 운영도 소홀해지지 않도록 신경 써야 하네.”

“여부가 있겠습니까.”

이야기가 대충 마무리되자 도현은 씨익 웃음을 머금고 장 총관을 바라보았다.

“지금부터 더 바빠질 텐데 왠지 즐거워 보이는군.”

“저는 천성이 장사꾼이라서요. 가만히 현상 유지를 하는 것보다 여기저기 바쁘게 돌아다니는 것이 더 적성에 맞나 봅니다.”

“하하, 그래. 그런 기세로 앞으로도 잘 부탁하네.”

장 총관과 이야기를 끝내고 안채로 들어간 도현은 문턱을 넘자마자 바로 장씨 부인의 처소를 찾았다.

“부인, 나 왔소.”

“어머!”

방에서 자수를 놓고 있던 장씨 부인은 도현을 보고 일어서려 했지만 그가 급히 만류했다.

“어허, 몸도 무거운데 그냥 앉아 있으시오.”

도현은 장씨 부인의 어깨를 다정하게 쓰다듬고 불룩 튀어나온 배를 바라보았다.

“배가 많이 불렀군. 무겁진 않소?”

“무겁긴요, 이 안에 아기가 들어 있다고 생각하면 그저 좋기만 한데요.”

“그런가.”

도현은 몸을 수그려 장씨 부인의 배에 귀를 살며시 가져다 대었다.

두근두근.

가볍게 맥이 뛰는 소리와 함께 따뜻한 체온이 전해지자 저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후훗, 간지러워요.”

“조금만 더 이러고 있읍시다.”

허리를 끌어안고 도통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는 도현을 보고 장씨 부인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건강해 보이셔서 다행입니다.”

“음, 내가 없는 동안 걱정 많이 했소?”

“당연하죠.”

장씨 부인의 대답에 도현은 기쁜 표정을 지었다.

“나도 빨리 돌아오고 싶었지만 이런저런 일이 많아서…….어쨌든 당분간은 조용히 지낼 수 있을 거요. 적어도 출산은 지켜볼 수 있겠지.”

사실은 아이가 태어나는 순간을 놓칠 수 없다는 생각에 심양으로 돌아오는 발길을 더 재촉했지만 구태여 그런 말까지 할 필요는 없었다.

“예정일은 언제요?”

“의원의 말로는 이달 말이나 다음 달 초쯤이라고 하네요.”

“얼마 안 남았군. 아들일까 딸일까, 궁금한걸.”

“아들을 낳아야죠. 그래야 대를 잇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도현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이 말했다.

“아들이면 어떻고 딸이면 어떻소. 사내아이면 집안에 활력이 넘칠 테고, 여자아이면 애교가 많아 좋을 테니 어느 쪽이든 부족할 게 없지.”

“……전 사내아이였으면 좋겠어요. 당신을 닮아 건강하게 자라서 오래도록 곁에 있어 줬으면 좋겠습니다.”

하늘로 떠나 버린 딸이 떠오른 듯 장씨 부인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난 부인을 닮은 예쁜 여자아이도 좋소만.”

그런 장씨 부인이 애처롭게 느껴져 가볍게 입을 맞추고, 도현이 말했다.

“양손에 꽃이라니, 세상 모든 남자들이 부러워할 일 아니오.”

“후후, 농담도 잘하셔요.”

자신의 기분을 달래 주려고 일부러 장난스럽게 말하는 도현의 배려가 고맙게 느껴졌다.

“참, 세자빈마마께 인사는 하고 오셨습니까.”

“아, 그러고 보니 깜빡했군. 부인 얼굴이 너무 보고 싶어서 그만.”

“안 돼요. 아무리 급해도 예를 잊어서야 되겠습니까. 얼른 다녀오셔요.”

“끄응……. 알겠소.”

떠나기가 싫은 듯 느릿하게 일어선 도현은 장씨 부인의 손을 잡고 말했다.

“나중에 식사라도 함께합시다. 해가 져서 선선해지면 정원에 산책도 하러 가고.”

“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쉽게 움직일 수 없는 몸인지라 앉아서 배웅하는 장씨 부인을 다시 한 번 끌어안은 도현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방을 나섰다.

그날 저녁 아직 귀환하지 못한 소현세자를 대신해 관저에 있는 관리들을 소집한 도현은 황제인 홍타이지의 병환을 두고 벌어지는 후계자 다툼에 대해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눈 뒤 괜히 난장판에 휘말려 분란거리를 만들지 않기 위해 당분간 외부 활동을 자제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현재 청국 상황을 자세하게 설명한 편지를 적어 긴급으로 전령을 한양에 보냈다.

황제에 대해 온갖 소문과 추측이 난무하며 민심이 뒤숭숭한 가운데 보름 뒤 드디어 원정 병력이 심양에 도착했다.

산해관을 돌파하지 못한 데다 황제까지 중병을 얻어 실려 와서 그런지 입성하는 행렬은 어쩐지 초라하고 음울한 분위기를 풍겼다.

아무런 귀환 행사도 없이 예친왕 도르곤은 황궁 앞 광장에서 황제를 대신해 군대를 해산시켰다.

도현은 관리들과 함께 관저 대문 앞까지 마중 나와 있다가 돌아오는 소현세자 일행을 반갑게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형님.”

“이러지 않아도 되는데 다 나와 있었구나.”

“관저의 주인이 돌아오는데 식솔들이 마중을 나오는 건 당연한 일 아닙니까.”

능청스러운 도현의 말에 소현세자는 피식 미소를 지으면서 그의 어깨를 두드려 줬다.

“이런, 대빈객께서도 나와 계셨구려.”

“세자 저하의 무사 귀환을 감축드리옵니다.”

허리를 굽혀 인사하는 박황을 일으켜 세운 소현세자는 주위에 있는 관리와 관저 식솔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다들 반갑게 맞이해 줘서 고맙소.”

간단히 인사를 나눈 뒤 안채로 자리를 옮긴 소현세자는 도현과 중요 인물 몇 명만 모아서 회의를 가졌다.

궁녀가 차를 내려놓고 나가자 바로 옆에 앉아 있던 도현이 진지한 목소리로 먼저 입을 열었다.

“어쩌다가 황제가 쓰러진 겁니까?”

다들 궁금해하는 일이었기에 일순 시선이 소현세자에게 집중됐다.

찻잔을 들어 목을 축인 소현세자는 긴 한숨을 함께 이야기를 시작했다.

“후우, 온갖 방법을 다 써도 산해관이 무너질 조짐이 없자 마지막 수단으로 홍이포를 성벽 바로 앞까지 끌고 가서 포격을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본진에서 전투를 지휘하던 황제가 뒷목을 잡으면서 쓰러지더구나. 바로 어의가 와서 치료를 하고 침도 놨지만 도통 침상에서 일어날 기미가 안 보이고 정신마저도 오락가락하는 상태란다.”

“허어, 이것 참.”

“으음…….”

예상했던 것보다 더 심각한 상황에, 모여 있던 관리들은 낮게 침음성을 흘리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도현도 원래 역사에서 홍타이지가 죽은 원인인 뇌졸중과 증상이 유사하자 살짝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런 가운데 소현세자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내 생각에는 아무래도 오래 버티지 못할 것 같소.”

순간 좌중은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다들 잔뜩 경직된 표정을 짓는 가운데 가장 연장자인 박황이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했다.

“상태가 위중하다지만 너무 성급하신 판단 같습니다.”

평소 같으면 신중한 박황의 의견에 귀를 기울였을 테지만 소현세자는 바로 고개를 내저으며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오. 나뿐 아니라 예친왕도 다시 소생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는지 귀환하는 내내 노심초사하며 자기 세력을 규합하는 모습을 보였소.”

박황은 복잡한 표정으로 눈을 감았고 다른 관리들은 서로 귓속말을 속삭이며 앞으로 상황이 어찌 될지 의견을 교환했다.

그러자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도현이 허리를 펴며 입을 열었다.

“실은 저도 몇 가지 들은 정보가 있는데 그걸 종합해 볼 때 형님이 짐작하시는 대로 황제의 목숨이 경각에 달한 건 맞는 것 같습니다.”

“그 정보라는 것이 무엇이냐?”

소현세자가 상체를 앞으로 살짝 숙이며 관심을 보이자 도현은 장 총관한테 들은 걸 그대로 다 말해 주었다.

“재상인 범문정이 황제가 쓰러진 직후부터 대선, 아제격, 다택, 이 세 명의 친왕들을 빈번하게 만나고 다닌답니다.”

이 시점에서 재상이 황제의 형제이자 계승 서열이 높은 친왕들을 만난다는 것은 딱 한 가지를 뜻한다.

“아직 황제가 눈을 감지도 않았는데 벌써 물밑에서 후계 다툼이 벌어지고 있는 건가.”

정통 유학자인 박황은 탐스럽게 자란 수염을 한 손으로 쓸어내리며 한탄하듯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상석에 앉은 소현세자가 눈가를 찡그렸다.

“그럼 예친왕을 상대로 범문정과 다른 친왕들이 연합을 하는 거야?”

“아무래도 지금 이 상태라면 차기 황제로 예친왕이 가장 유력하니까요.”

그때 박황 다음 서열인 부빈객 박노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현 황제의 소생으로 두 명의 아들이 있는데 예친왕한테 황좌가 쉽게 넘어가겠습니까?”

심양 생활이 벌써 몇 년째인데 아직 제대로 청국 사정을 파악하지 못하는 관리들의 모습에 도현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고는 입을 열었다.

“유교 이념에 따라 장자 승계가 원칙인 조선과 달리 청국은 철저히 능력에 따라 자리를 물려준다는 걸 알아야 하오. 거기다 현 황제에게 아들이 있다고 하지만 장남은 후궁의 자식이고 황비에게 얻은 둘째는 이제 여섯 살도 안 됐는데 제대로 황위를 이어받을 수 있겠소? 그에 반해 예친왕은 비록 황제인 홍타이지에게 밀려났다지만 청 태조 누르하치가 자신의 후계자로 지목했다는 명분까지 가지고 있지 않소.”

그 정도 명분이라면 아무리 현 황제인 홍타이지에게 대를 이을 자식이 있다고 해도 충분히 황위를 넘겨받을 수 있다.

거기다 군부의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으니 가능성은 더 높아졌다.

다들 얼굴이 굳어 있는 가운데 말석에 있던 관리 하나가 조용히 의견을 내놨다.

“그러면 지금이라도 예친왕 쪽에 줄을 대는 것이 현명하지 않겠습니까.”

이미 대세가 기울었다는 생각에 다른 관리들은 물론이고 소현세자마저 동조하는 기색을 보였지만 도현은 단호한 어투로 잘라 말했다.

“그건 안 되오.”

“왜 그렇지? 네 스스로 예친왕이 차기 황제에 가장 근접해 있다고 말하지 않았느냐.”

“물론 그랬지요. 그러나 따로따로 놔두면 큰 힘이 안 되지만 재상인 범문정과 세 명의 친왕들이 서로 연합한다면 역시 만만치 않은 세력이 됩니다. 기본적으로 이 진흙탕 싸움에 끼어들어 봤자 우리가 얻을 것이 많지 않으니 차라리 한 발짝 뒤로 떨어져서 사태를 관망하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도현의 이야기가 끝나기 무섭게 부빈객 박노가 입을 열었다.

“반대편 세력이 결집하면 무시하기 어렵다는 말씀에는 동의하지만 후계자 다툼에서 생길 이익이 적다는 건 이해가 안 됩니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우리가 미는 자가 황제 자리에 오른다면 아무래도 조선에 대한 처우도 달라지지 않겠습니까?”

“맞습니다.”

관리들이 떠들어 대는 말에 도현은 답답하다는 듯이 살짝 미간을 찡그렸다.

“나중에 콩고물이라도 챙기려면 실질적인 도움이 돼야 하는데 무력이라고는 관저 경비 인원밖에 없는 우리가 저들에게 무슨 값어치가 있겠소. 물론 다른 방법으로 도울 수도 있겠지만 내부 다툼에 외부 세력이 끼어드는 걸 싫어할 테고 자칫 예친왕과 청국 조정의 경계심만 키워 나중에 골치만 아파질 것이오.”

단정적인 도현의 말에 관리들이 웅성거리자 양쪽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소현세자가 결론을 내렸다.

“내 판단에도 이번 사태에 어설프게 끼어들었다가는 오히려 화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으니 일단 조용히 관망만 하도록 합시다. 대신 누가 차기 황제가 되느냐에 따라 조선도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으니까 눈과 귀는 활짝 열어 두도록 하시오.”

“알겠사옵니다.”

소현세자의 말에 관리들은 일제히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했고, 그렇게 회의는 도현의 의견을 따르는 걸로 끝났다.

다음 날부터 조선 관저는 꼭 필요한 일이 아니면 외부 활동을 일절 자제했다.

황제의 상태를 직접 확인하기 위해 며칠 뒤 소현세자와 도현이 황궁으로 병문안을 갔지만 침소에는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그냥 물러 나와야 했다.

그렇게 심양에 돌아온 이후에도 황제의 병세에 차도가 없자 소문이 더욱 무성하게 퍼지며 청국 정가는 긴장감이 고조됐다.

이런 가운데 드넓은 예친왕부 안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도르곤의 거처에서 커다란 고성이 터져 나왔다.

꽝!

주먹으로 의자 팔걸이를 세게 내려친 예친왕은 목에 핏대를 세우며 소리쳤다.

“범문정 그놈이 날 제쳐 두고 다른 친왕들과 작당해 호격을 황제로 세우려고 한다는 것이 사실이야!”

살기마저 느껴지는 예친왕의 시선을 받은 만월개는 황급히 허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왕야. 거기다 폐하의 직속 부대인 양황기가 황성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상대편에서 명분을 세우기 위해 홍타이지의 장남인 호격을 내세우리라는 건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발 빠르게 팔기군 중 하나인 양황기를 움직였다는 말에 예친왕은 눈썹 끝을 치켜올렸다.

양황기는 태조인 누르하치의 직할 부대였고 홍타이지도 이들의 지지를 기반으로 황제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다른 팔기군 부대들이 산해관 전투에 참가해 기력이 많이 쇠한 것과 달리 양황기는 황도를 지킨다는 이유로 심양에 남아 있어서 전력을 그대로 보존했다.

이런 부대가 황성 안으로 들어온다면 뜻하는 건 딱 하나였다.

“이놈들이 결국 날 제거하겠다는 건가.”

이를 부드득 갈며 예친왕이 하는 말에 심복들 중 가장 성격이 급한 야골타가 앞으로 나섰다.

“이대로 가만히 앉아서 당할 수는 없습니다. 명령만 내려 주시면 제가 병사를 이끌고 가서 놈들을 싹 다 쓸어버리겠습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만월개가 기겁하며 만류했다.

“분하고 괘씸하지만 지금 움직이는 건 오히려 상대의 계략에 말려드는 겁니다.”

“그럼 아무것도 안 하고 선수를 빼앗기자는 거야!”

“저쪽에서 보란 듯이 양황기를 입성시킨 걸 보면 이미 모든 준비가 다 끝났다는 뜻 아니겠소. 거기다 아직 황제 폐하께서 살아 계신데 거사를 일으킨다면 그건 바로 반역이 된단 말이오.”

“…….”

반역이라는 단어가 주는 무게감에 성난 황소처럼 날뛰던 야골타도 입을 꾹 다물고 주춤거렸다.

용력뿐 아니라 대세를 읽을 줄 아는 머리와 통찰력을 가진 예친왕은 얼굴을 구긴 채 잇새로 말을 내뱉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원정군을 그렇게 빨리 해산시키는 것이 아니었는데.”

“황제 폐하의 병환을 핑계로 범문정을 위시한 조정 대신과 친왕들께서 함께 압박을 해 대니 어쩔 수 없었지 않습니까. 그런 걸 보면 처음부터 이럴 작정으로 사전에 계획을 세워 둔 것이 분명합니다.”

“쥐새끼 같은 놈들……. 그럼 앞으로 어떻게 해야겠나?”

예친왕이 시선을 주며 묻자 만월개는 짐짓 정색하고는 차분히 대답했다.

“우선 상대가 무력을 동원하는 것에 대비해서 왕부 경비를 강화하고 왕야께서 수령으로 있는 백기단을 서둘러 황도 안으로 데려와야 됩니다.”

“놈들이 입성을 허락할까?”

“시비를 걸면 양황기가 먼저 들어온 것과 황도의 치안이 불안해서 그걸 진정시키기 위한 거라고 둘러대면 저들도 어쩔 수 없을 겁니다.”

“그러다가 놈들이 먼저 움직이면 어쩌지?”

만월개는 자신 있게 말했다.

“아직 황제께서 살아 계신 이상 경거망동하지 못할 겁니다. 그래서 일부러 우리를 자극해 먼저 움직이도록 유도한 것 아니겠습니까?”

잠시 아무 말 없이 앉아 있던 예친왕은 차갑게 가라앉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 말이 맞아. 야골타.”

“말씀하십시오, 왕야.”

“당장 성 밖에 있는 백기단을 입성시키도록 해.”

“옛.”

힘찬 야골타의 대답을 들으면서 예친왕은 주먹을 세게 말아 쥐었다.

“억울하게 빼앗긴 황제의 자리를 이번에는 기필코 되찾고 말겠어.”

한편 기대와 달리 예친왕이 흥분해서 날뛰지 않고 차분히 대처하자 상대편은 계획을 급히 수정해서 자신들이 취약한 군부 쪽 인물들을 접촉해 회유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서로 세력을 결집시키며 수면 아래에서 치열한 다툼을 벌이는 가운데 어느새 황제가 쓰러진 지 한 달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각지의 명의를 다 불러와 치료하고 온갖 좋은 약재를 구해 와서 먹였지만 병은 전혀 차도가 없었고 갈수록 깨어 있는 시간보다 정신을 잃고 있을 때가 더 많았다.

오늘도 침대에 누워 거친 숨을 내쉬는 홍타이지의 입에 어의가 은수저로 탕약을 조심스럽게 떠먹이고 있었다.

먹는 것보다 옆으로 흘리는 것이 많았지만 그나마 이 약이 아니라면 생명을 유지하기 힘들었기에 어의는 비단 천으로 입 주위를 닦아 가며 한 사발을 다 먹이고는 은수저를 궁녀에게 넘겨줬다.

그러고는 홍타이지의 오른쪽 소매를 걷어 팔목에 손가락 두 개를 대고는 지그시 눈을 감은 채 맥을 확인했다.

그렇게 한참 뒤 어의는 살짝 눈가를 찡그리더니 홍타이지의 손을 다시 이불 안에 넣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약방에 가 있을 테니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부르게.”

“알겠습니다.”

숙직 내관에게 말을 하고 한 번 더 홍타이지의 안색을 살핀 어의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방을 나갔다.

그러자 밖에서 초조한 얼굴로 기다리고 있던 황비가 옆으로 다가와 어의를 붙잡고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차도가 좀 있으신가?”

어의가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얼굴이 굳어진 황비는 뒤에 있는 궁녀들을 보며 말했다.

“너희들은 뒤로 물러가 있어라.”

“예, 마마.”

궁녀들이 거리를 띄며 물러서자 황비는 어의를 똑바로 바라보면서 말했다.

“황궁의 안주인으로서 꼭 알아야 되니 한 치의 거짓도 없이 이야기를 해 보게.”

황비의 재촉에도 쉽게 입을 열지 못하고 망설이던 어의는 이내 굳은 얼굴로 상세를 설명해 줬다.

“최선을 다했습니다만 아무래도 더 이상 버티시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순간 너무나 큰 충격에 황비는 몸을 휘청거렸다.

“마마.”

“괘, 괜찮네. 그것보다 정말 가망이 없는 것인가?”

믿을 수 없다는 듯 황비가 되묻자 어의는 힘없이 머리를 끄덕였다.

“예.”

길어지는 병세에 어느 정도 각오는 했지만 막상 일이 닥치자 황비는 그야말로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온갖 음모와 귀계가 난무하는 황궁에서 황비 자리를 굳건히 지켜 온 여인답게 이내 평정심을 되찾고는 딱딱한 어투로 조용히 입을 열었다.

“얼마나 남았나?”

앞뒤 내용을 다 잘라먹은 말이었지만 뭘 묻는지 알아차린 어의는 정색하며 대답했다.

“짧으면 사흘, 길어 봤자 이레를 넘기기 어려우실 겁니다.”

“으음, 사흘이라.”

낮게 침음성을 내뱉은 황비는 살짝 인상을 쓰다가 이내 날카로운 시선으로 어의를 노려봤다.

“이 사실은 절대 다른 사람에게 알려져서는 안 되네.”

“알겠습니다.”

“만약 외부에 이 이야기가 떠돈다면 그때는 제일 먼저 자네의 목부터 칠 것이야.”

“예, 옛.”

싸늘한 말투에 어의는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고개를 숙였다.

“그럼 가 보게.”

“네.”

허리를 숙여 인사한 어의가 허둥지둥 도망치듯 약방으로 가자 고개를 돌린 황비는 달빛 아래 웅장하게 서 있는 침전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렇게 가시면 소첩은 어떻게 하란 말씀입니까.”

벌써부터 친왕들 간에 후계자 다툼이 벌어지고 있다는 걸 황비도 모르지 않았는데 여기서 황제가 죽는다면 엄청난 폭풍우가 몰아칠 것이 불을 보듯 뻔했다.

황제가 쓰러지지 않았다면 자신의 아들이 나이가 들어 자연스럽게 황위를 이어받겠지만 지금은 그게 아니었다.

오히려 적장자嫡長子(정실부인이 낳은 맏아들)라는 이유로 후계자 다툼에서 선두를 달리고 있는 예친왕과 배다른 자식인 호격의 표적이 될 가능성이 컸다.

거기다 둘 중 누가 승자가 되든 황비와 적장자인 복림은 눈엣가시였기에 언제든 숙청하려 들 것이 분명했다.

그러면 차라리 복림을 내세워 황위를 잇게 하면 되지 않느냐고 쉽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예친왕에 비해 세력이 약하고 이제 여섯 살도 안 된 아기였기에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완전히 사방이 꽉 막힌 상황, 자신은 그렇다고 쳐도 자식의 앞날을 생각하니 황비는 눈이 캄캄해졌다.

어린 자식을 위해서라도 어떻게든 살길을 찾아야 했기에 황비는 거처로 돌아와서도 잠자리에 들지 못하고 밤새 고민을 거듭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방법을 찾았는지 은밀히 어의를 불러들였다.

어젯밤 일 때문에 어의는 눈치를 보며 들어와 바닥에 엎드리며 절을 했다.

“찾으셨사옵니까, 마마.”

“어서 오게. 그래, 폐하의 상세는 좀 어떠신가?”

“별다른 차도가 없으시옵니다.”

“빨리 쾌차하셔야 되는데 큰일이군.”

“…….”

회복이 어렵다는 걸 다 알고 있으면서도 모르는 척 태연히 연극을 하는 황비의 모습에 어의는 가증스러웠지만 혓바닥을 잘못 놀렸다가는 바로 목이 달아날 수도 있기에 가만히 있었다.

길게 기른 손톱을 만지작거리며 잠시 조용히 있던 황비가 눈짓을 하자 재빠르게 궁녀와 내관들이 뒷걸음질로 방을 빠져나갔다.

문이 탁 닫히는 소리가 나자 황비가 말을 이었다.

“내 자네에게 하나 물어볼 게 있는데……. 아무리 다 죽어 가는 사람이라도 일시적으로 정신을 차릴 수 있게 하는 방도가 정녕 없을까?”

“그, 그것이…….”

황비가 무슨 의도로 그런 질문을 던지는지 깨달은 어의는 금방 대답을 하지 못하고 주저했다.

“내 앞에서 거짓을 고할 생각은 말게. 황궁엔 자네 말고도 뛰어난 의술 실력을 가진 자들이 많으니 말이야.”

대답하기 싫으면 다른 사람에게 물으면 그만이다.

하지만 그 대가는 톡톡히 치러야 할 터.

그런 의미를 담은 눈빛으로 황비가 차갑게 바라보자 어의는 그만 중압감을 견디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있습니다, 마마. 양귀비꽃에서 추출한 가루를 잘게 빻아 만든 환약을 먹이면 숨이 일시적으로 끊어진 환자라도 명부에서 불러올 정도로 강력하다고 하지요.”

“호오…….”

황비가 마치 먹잇감을 눈앞에 둔 맹수처럼 눈을 반짝였다.

“하, 하지만! 그 약은 너무 독해서 환자의 몸에 좋지 않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심신의 기력이 다해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될지도 모릅니다.”

“상관없네.”

“마마……!”

“자네, 고향에 두고 온 처자식이 있다지? 아이가 이제 겨우 다섯 살이라 했던가. 늦둥이라 무척 귀여워한다고 들었네만.”

어떻게 그 사실을?

어의는 몸에 소름이 쫙 끼치면서 등이 식은땀으로 축축이 젖었다.

“부인이 혼자서 어린아이와 늙은 시부모를 모시려면 참 힘들겠군. 갸륵한 일이야. 게다가 작년엔 그 지방에 흉년까지 들어서 더 사정이 어려워졌겠군. 그나마 자네가 궁중에서 받는 봉록이 아니라면 벌써 길가에 나앉고도 남았겠지.”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저리 뜸을 들이는지 알 수 없어 어의는 그저 창백해진 얼굴로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궁중에서 일하는 자의 운명이란 박복하지. 특히 황상의 건강을 책임져야 하는 어의라면 상대방이 명을 달리했을 때 어떻게 해도 벌을 피할 수는 없지 않나. 가장 약한 게 귀양이고, 심하면 사형까지 받을 수 있다고 하니……. 이렇게 자네와 이야기를 주고받을 날도 얼마 안 남았군. 슬슬 고향에 유서라도 써서 보내는 게 낫지 않으려나.”

단조롭게 읊조리는 황비의 목소리와 반대로 어의의 몸은 사시나무 떨 듯이 후들거렸다.

“마마, 마마! 살려 주십시오.…….”

황비가 하는 말은 그저 협박이 아니라 실제로 그런 관습이 존재했기에 더욱 효과적이었다.

공포에 사로잡힌 어의가 이마를 바닥에 찧으며 애걸하자 황비는 붉게 칠한 입술을 쓰윽 끌어 올리고 가볍게 미소 지었다.

“걱정하지 말게. 지금까지 충성을 바쳐 온 자네를 어찌 그리 차갑게 내치겠나. 응……? 어떤 부탁이라도 들어줬는데 말이야.”

황비가 부탁이라는 단어를 힘줘서 말하자 어의는 정신이 나간 표정으로 힘없이 머리를 조아렸다.

“예, 예. 알겠습니다. 황비마마의 말씀을…… 받들겠나이다.”

“호호. 자네가 말귀를 잘 알아듣는 사람이라 다행일세.”

황비가 비단 소매로 입가를 가리고 웃었다.

“이따가 오후에 또 황제 폐하께 탕약을 올려야 하니 그때 보도록 하지. 물러가게.”

“네…….”

휘청거리는 어의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황비는 아름다운 얼굴에 독사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탁탁.

대전에 깔린 네모난 돌을 가볍게 내디디며 궁녀들을 거느린 황비가 도착하자 입구에서 서성이던 어의가 황급히 허리를 굽혔다.

“늦어서 미안하네. 머리카락에 꽂을 장신구가 좀처럼 마음에 드는 게 없어서 말이야. 폐하를 뵙는데 흐트러진 모습을 보일 순 없지 않은가.”

“아, 아름다우십니다, 마마.”

“고맙네.”

그렇게 말한 황비는 노을이 지면서 붉게 물든 서쪽 하늘에 눈길을 주었다.

“해가 지는군……. 폐하께서 기다리실라. 얼른 들어가세나.”

“예.”

“너희들은 여기서 기다려라. 주위에 사람이 있으면 싫어하시니까.”

“네, 마마.”

침전 입구를 지키는 궁녀가 문을 열어 주자 안에서 서늘한 냉기가 확 뿜어져 나왔다.

뒤에서 문이 끼이익 닫히고, 함께 복도를 걸어가는 동안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황비마마.”

황제의 시중을 들고 있던 궁녀들이 황비를 보고 무릎을 굽혀 인사하자 그녀는 손을 내저었다.

“지금부터는 내가 직접 시중을 들 테니 물러나 있어라.”

매일 하루 두 번 황제에게 올리는 탕약은 어의가 아니면 항상 황비가 직접 먹였기에 궁녀들도 아무런 의심을 품지 않고 물러섰다.

이윽고 사방이 조용해지자 황비는 금색 실로 수놓인 두툼한 이불 위에 비스듬히 앉아 황제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열이 오를까 봐 일부러 불도 때지 말라 일렀는데 아직도 땀을 흘리시는군.”

짐짓 다정한 손길로 이마에 올려진 물수건을 갈면서 황비가 중얼거렸다.

환자의 몸이 불덩이 같을 땐 몸을 차갑게 해서 식히는 게 좋을 때도 있지만, 그렇다 해도 여기는 너무 추웠다.

이래서야 나을 병도 낫지 않을 지경.

하지만 누가 감히 황비의 지시에 토를 달겠는가.

어의는 새삼 그녀의 철두철미함에 치를 떨었다.

“그건 가져왔나?”

“예……. 여기 있습니다.”

어의는 탕약을 내려놓고 소매에서 검은색의 둥근 환약을 꺼냈다.

양귀비꽃에서 추출한, 마약 성분이 강한 환약.

사실 마약이라고 해도 마냥 나쁜 것만은 아니다. 분량을 잘 조절하면 마취제와 각성제로 뛰어난 효능을 보이는 약재지만 이 정도 크기의 환약이라면…… 사지가 멀쩡한 청년이라 해도 성하지는 못할 터. 심지어 이렇게 약해진 상태의 황제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뭘 망설이고 있는 겐가?”

차가운 황비의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린 어의는 죄송하다며 머리를 숙였다.

하지만 황비의 그 눈빛에 몸이 돌덩이로 변해 버린 듯 발은 한 발자국도 움직여지지 않았고 환약을 든 손은 부들부들 떨려서 머리가 어질거렸다.

“……유서는 잘 써 두고 왔는지 모르겠군.”

그 모습을 경멸 섞인 눈빛으로 바라보던 황비가 낮게 중얼거린 순간 거짓말처럼 떨림이 멈췄다.

어의는 쿵쾅대는 심장 소리를 애써 무시하며 천천히 황제가 누워 있는 침대로 다가갔다.

어차피 황제는 가망이 없다.

그렇다면 목숨을 부지하려고 아등바등하는 것도 결코 나쁜 일은 아니지 않은가.

어의는 속으로 자기 합리화를 하면서 눈을 꾹 감았다.

차갑게 굳은 입술을 벌리고, 그 속에 환약을 집어넣은 뒤 탕약을 흘려보내자 황제의 목울대가 아래위로 움직이며 꿀꺽하는 소리가 났다.

“……먹은 건가?”

“네. 이제 좀 있으면 효능이…….”

쉬익-!

조용한 가운데 약하게 숨을 내쉬는 소리가 두 사람의 귀를 크게 강타했다.

“폐하?”

“으…….”

눈꺼풀이 가늘게 떨리는 것을 보며 황비가 늙어 주름이 선명한 황제의 뺨을 가볍게 두드렸다.

“정신이 드십니까, 폐하?”

“끄으……흐…….”

황제가 힘겹게 눈을 뜨고 탁해진 눈동자를 드러내자 황비가 기쁜 표정을 지었다.

“접니다. 알아보시겠습니까?”

“아……. 황……비…….”

“힘들 테니 말하지 마셔요.”

황비는 황제의 입술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고 마치 아이를 어르듯이 말한 뒤 미리 준비해 뒀던 두루마리를 꺼내어 그 앞에 내밀었다.

의아한 듯이 눈동자만 움직여 그것을 바라보는 황제에게 황비가 말했다.

“자! 여기에 수결을 해 주세요, 폐하.”

“……?”

“이건 우리 이황자에게 황위를 양도한다는 칙서입니다. 이것만 있으면 앞으로 아무 문제도 없어요.”

“…….”

황제가 아무런 반응이 없자 황비는 초조한 듯 그의 손을 움켜쥐었다.

“어서요! 폐하와 저 사이에서 낳은 유일한 아들이지 않습니까. 둘째에게 황위를 물려주고 싶지 않으신 건가요!”

표독하게 변한 황비의 외침에 황제는 지친 듯이 눈을 감았다.

그리고 느릿느릿하게 손을 움직여, 황비가 억지로 쥐여 준 붓을 놀리기 시작했다.

이미 그 자신도 앞으로 생이 얼마 안 남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리라. 마지막 가는 길에 처절한 여인의 외침을 듣고 그 소원을 이루어 주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마치 벌레가 기어가는 것처럼 형편없긴 했지만 그래도 황제의 독특한 버릇이 남아 있는 필체로 그가 수결을 끝마치자 마침내 가는 생명의 실을 놓아 버린 것처럼 팔이 아래로 툭 떨어졌다.

“폐, 폐하!”

어의가 황급히 눈을 까뒤집고, 목의 맥을 짚어 봐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진짜로 황제가 승하한 것이다.

“폐하…….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힘없이 고개를 떨어뜨리고 굵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는 어의를 보고 함께 눈물짓기는커녕 득의만만한 얼굴이던 황비는 이내 표정을 가다듬고 고개를 빳빳이 세웠다.

끼익-!

“마마?”

혼자서 직접 문을 열고 나온 황비를 보고 위사와 궁녀들이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황제께서, 붕어하셨다.”

“…….”

짧고도 간략한 한마디였지만 그 파장은 일파만파 퍼져 나갔다.

“폐하!”

“이럴 수가! 폐하!”

놀란 궁녀들이 서둘러 침전으로 달려갔지만 이미 그곳엔 넋이 나간 듯한 어의와 싸늘한 주검으로 변해 있는 황제만이 있을 뿐이었다.

순식간에 울음바다로 변한 침전 앞에서 황비는 꼿꼿이 선 모습으로 서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붉게 타오르던 태양이 서서히 가라앉고, 그 뒤를 따르던 노을마저 사라져 어둠이 찾아오고 있었다.

“태양이 졌구나. 마침내…….”

황제가 붕어했다는 어의의 확답을 받은 후 황비의 행동은 재빨랐다.

그중에서도 가장 먼저 조치를 취한 것은 이 소식이 황궁 밖으로 퍼져 나가지 않도록 입단속을 하는 것이었다. 특히 침전에서 시중을 들고 있던 궁녀와 내관들은 집중 감시 대상이었다.

하지만 그 지시가 내려지기도 전에 발 빠르게 움직이는 자들이 있었으니, 시중을 들고 있던 궁녀들 가운데 봉황상단과 모종의 연결고리가 있는 상궁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다른 궁인들이 바닥에 엎드려 곡을 하는 사이 몰래 침전을 빠져나온 상궁은 황궁 경비병을 통해 황제가 승하했다는 급보를 봉황상단에 알렸다.

“그게 정말이야!”

눈을 동그랗게 치켜뜬 도현의 물음에 칠현은 흥분한 얼굴로 머리를 끄덕였다.

“네. 방금 장 총관이 보내온 정보입니다.”

“결국 이렇게 되는군.”

예상은 했지만 실제로 일이 닥치자 도현은 가슴이 세차게 뛰며 입술이 바짝 말랐다.

“정보 출처가 어디라고 했지?”

“침전에 속한 상궁이라고 합니다.”

병이 든 황제를 가장 가까이서 모시는 인물 중 하나인 침전 상궁한테서 나온 정보라면 신빙성은 입증이 된다.

“지금 바로 봉황상단에 연락해서 더 자세한 정보를 알아보라고 해.”

말을 하는 것과 동시에 도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형님을 찾아 봬야겠어.”

방을 나선 도현은 곧바로 소현세자의 거처로 갔다.

마침 서재에서 책을 보고 있던 소현세자는 동생의 방문을 미소 지으며 반겼다.

“어서 오너라.”

“형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하도 많이 놀라서 그런지 네가 그렇게 정색하고 말하면 겁부터 나는구나.”

읽고 있던 책을 덮은 소현세자는 시중을 드는 내관에게 눈짓을 해서 주위를 물린 뒤 입을 열었다.

“그래, 무슨 일인지 말해 보아라.”

그러자 잠시 호흡을 가다듬은 도현이 긴장된 목소리로 말했다.

“황제가 죽었답니다.”

순간 소현세자는 심장이 쿵 떨어지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확실한 정보야?”

“네. 봉황상단에서 황궁에 심어 놓은 세작을 통해 얻어 낸 겁니다.”

“으음…….”

침음성을 내뱉으며 잠시 입을 다물고 있던 소현세자는 이내 고개를 들어 도현을 쳐다봤다.

“우리가 알 정도면 다른 쪽에도 소식이 들어갔다고 봐야겠지?”

“황궁에 함구령이 내려졌다고 하지만 숨은 귀들이 많은 만큼 예친왕과 범문정도 알고 있다고 보는 것이 좋겠지요.”

“그럼 한바탕 충돌을 피할 수 없겠군.”

“일단 우리도 대비를 해야 되지 않을까요?”

“그래.”

무겁게 머리를 끄덕인 소현세자는 큰 소리로 최 내관을 불렀다.

“최 내관!”

“부르셨사옵니까, 저하.”

“지금 당장 신 위사장과 박황 공을 불러오게.”

“예.”

굳어 있는 소현세자의 목소리에서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한 최 내관은 얼른 허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외부 활동을 자제하라는 방침에 따라 관저에 머물고 있던 두 사람은 전갈을 받자마자 바로 달려왔다.

“찾으셨사옵니까.”

“이리 가까이들 오시오.”

두 사람이 안쪽으로 다가와 앉자 소현세자는 의식적으로 목소리를 살짝 낮추고는 그사이 조금은 진정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방금 확인한 소식인데, 황제가 죽었다고 하오.”

“…….”

금방 이해를 하지 못하고 멍하니 있던 두 사람은 이내 눈을 부릅뜨며 앞에 있는 소현세자를 쳐다봤다.

“지, 지금 청 황제가 승하했다고 하셨습니까?”

“그렇소.”

믿기지 않는지 재차 사실을 확인한 대빈객 박황은 청나라에 반감이 많은 사람답게 반색했다.

“지난 병자년에 조선 산천을 짓밟고 씻지 못할 치욕을 안긴 철천지원수가 죽었다니 역시 하늘이 무심치 않았습니다.”

그러자 옆에 앉아 있던 도현이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했다.

“대빈객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그렇게 좋아만 할 일은 아니오. 그리고 행여나 우리가 황제의 죽음을 기뻐했다는 말이 새어 나가면 곤란한 상황에 처할 수도 있으니 관리와 식솔들에게 주의를 주시오.”

“염려 마십시오, 대군마마. 그래도 자꾸 웃음이 피식피식 새어 나오는 건 어쩔 수가 없군요.”

박황의 말에 살짝 미소 짓던 소현세자가 다시 정색하며 입을 열었다.

“삼전도의 치욕을 안겨 준 청 황제가 죽었다니 본인도 속이 시원하지만 당장 황좌를 두고 예친왕과 범문정의 대립이 격화될 것이 뻔하오. 그러니까 괜히 싸움에 휘말려 들지 않도록 각별히 조심해야 될 것이오.”

“옛.”

“특히 신 위사장은 수고스럽겠지만 당분간은 관저 경비에 더 신경을 써 주게.”

시선을 받은 신철 위사장이 머리를 숙이며 크게 대답했다.

“목숨 걸고 관저를 지키겠습니다.”

“믿음직해서 좋소.”

소현세자의 이야기가 끝나자 도현이 바로 덧붙이듯 말했다.

“아직 청국 조정의 공식 발표가 없었으니 당분간은 꼭 알아야 되는 사람한테만 귀띔을 해 주고 비밀을 유지해야 될 거요.”

“명심하겠습니다.”

“그런데 한양에는 이 사실을 빨리 알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물론이오. 그 문제는 형님이 밀서를 적어 주시면 신 위사장이 믿을 수 있는 부하를 몇 명 뽑아서 보내는 걸로 처리하면 될 것 같은데 어떻습니까?”

“그게 좋겠군.”

고개를 끄덕인 소현세자는 좌중을 한차례 쓸어 보고는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제부터 몰아치는 거센 폭풍에 휩쓸려 가지 않게 다들 정신을 똑바로 차리도록 하시오.”

“알겠사옵니다, 저하.”

한편 도현의 예상대로 양쪽 진영에도 황제의 죽음이 알려졌다. 제일 먼저 반응을 보인 건 바로 범문정을 주축으로 하는 세력이었다.

자신을 따르는 문관과 이신 출신들을 저택에 불러 모아 대책을 논의하던 범문정은 황궁에서 전해진 급보에 얼굴을 굳혔다.

“하필이면 내가 잠시 자리를 비웠을 때 일이 터지다니. 예친왕의 독주를 막으려면 황궁을 장악하고 있어야 돼. 공 장군!”

“예.”

고개를 돌리고 대답하는 공유덕을 보며 범문정은 빠르게 지시를 내렸다.

“당장 휘하 병력을 모두 이끌고 황궁으로 가게. 절대 예친왕과 백기단에 선수를 빼앗겨서는 안 돼.”

“염려 마십시오.”

시급을 다투는 일이었기에 자신 있게 대답한 공유덕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갔다.

“홍 시랑.”

“네.”

“자네는 다른 친왕분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대비를 하라고 전하게.”

“알겠습니다.”

허리를 숙인 홍백민 예부시랑이 공유덕의 뒤를 따르자 범문정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계속 황궁에 있어야 했는데 내가 잠시 방심했어…….”

“이러고 계실 것이 아니라 재상께서도 어서 황궁으로 들어가셔야 되는 것 아닙니까?”

이신 중 한 명으로 공유덕과 함께 수군 장수로 있는 경중명의 말에 잠시 한 손으로 턱을 매만지며 고심하던 범문정은 이내 몸을 일으켰다.

“첫째 황자님은 어디에 계시지?”

“글쎄요. 이 시간이면 댁에 계시지 않겠습니까.”

“그럼 그리로 가지.”

“황궁에는 안 가시고요?”

경중명이 의아한 듯 묻자 범문정은 서둘러 문 쪽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폐하께서 돌아가셨다면 어서 새로운 황제를 세워 우리 쪽에서 먼저 명분을 가져야 돼.”

범문정은 적장자이지만 너무 어린 둘째 황자보다는 비록 후궁의 자식이라도 성년이 된 첫째 황자를 차기 황제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군요. 제가 모시겠습니다.”

의중을 알아챈 경중명은 벌써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는 범문정을 황급히 따라갔다.

두두두두!

“이랴!”

“시간이 없다. 더 빨리 달려라.”

최근 흉흉한 황도 분위기 때문인지 지나다니는 행인도 없고 가게 문을 일찍 닫아 텅 빈 거리를 한 떼의 기마들이 거친 말발굽 소리를 울리며 질주했다.

바로 공유덕 장군과 휘하 부하들로, 곧장 중심가에 위치한 황궁으로 향했다.

황궁의 정문인 대청문 앞에 도착한 공유덕은 급히 고삐를 당겨 말을 멈춰 세웠다.

“워워!”

이히히힝.

“뭔가 이상합니다.”

부관의 말에 주위를 둘러본 공유덕은 살짝 이맛살을 찡그렸다.

술시가 넘어 대문이 닫혀 있는 건 당연했지만 평소에는 금군들이 아래에 내려와 경비를 서던 것과 달리 지금은 모두 성문 위에 올라가 있었다.

어쩐지 찝찝한 마음이 들었지만 황제가 승하했기에 당연히 경계 상태가 강화된 것이라고 애써 좋은 쪽으로 생각한 공유덕은 천천히 말을 몰고 앞으로 나갔다.

“요동 수군절제사 공유덕이다. 재상 어른의 명을 받고 왔으니 어서 문을 열어라!”

공유덕의 외침에 성루가 약간 소란스러워지는가 싶더니 장수 한 명이 머리를 내밀었다.

“황명에 따라 당분간 황궁 출입이 금지됐으니 그렇게 알고 돌아가시오!”

이미 황제가 죽은 것을 알고 있는데 황명이라니, 공유덕은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기에 재차 성문을 열어 달라고 요구했다.

“황궁 경비를 강화하기 위해 재상께서 특별히 지시를 내리신 일이니 우릴 들여보내 주게.”

범문정의 위세를 빌려 소리를 질렀지만 수문장은 요지부동이었다.

“재상의 지시보다 황명이 우선한다는 걸 모르시오! 계속 억지를 부린다면 역도로 생각하고 공격할 테니 그렇게 아시오.”

그렇게 경고한 수문장이 한 손을 들자 성루와 양쪽 성벽에서 궁수들이 모습을 드러내며 활을 겨냥했다.

“이런.”

“장군, 이제 어쩌지요?”

뜻밖의 상황에 공유덕이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을 때 왼쪽 길에서 말발굽 소리와 함께 일단의 병사들이 나타났다.

“저길 보십시오. 백기단이 왔습니다.”

“끄으응.”

부관의 다급한 외침에 고개를 옆으로 돌린 공유덕은 이름 그대로 온통 하얀색으로 칠한 갑옷을 입은 기병들이 몰려오는 걸 보고 얼굴을 구겼다.

팔기군 중 하나인 백기단은 예친왕이 수장으로 있는 부대로, 오랜 세월 여러 전장을 거치며 단련된 청국 최정예였다.

그런 백기단이었기에, 중무장한 병사를 천 명 넘게 끌고 왔지만 공유덕은 바짝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원 전투준비!”

병사들이 황급히 전투대형을 갖추자 상대편도 이쪽을 발견했는지 말을 멈춰 섰다.

“흥! 누군가 했더니 범문정의 개들이었구나.”

선두에 선 야골타가 깔보는 듯한 어투로 입을 열자 공유덕은 표정을 딱딱하게 굳혔다.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니오!”

“하긴 개는 충성심이라도 있지 목숨을 연명하려고 이리저리 박쥐처럼 옮겨 다니는 것들한테는 그것도 과분한 말이지.”

명나라를 버리고 청에 귀부한 이신들을 싸잡아서 깔아뭉개는 야골타의 놀림에 공유덕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이익.”

이를 부득부득 가는 공유덕을 보며 야골타는 냉소를 지었다.

“이번에도 뭐 주워 먹을 것 없나 하고 왔나 본데 지금이라도 꼬리를 말고 물러서면 목숨은 살려 줄 테니까 어서 꺼져!”

“닥쳐라!”

참다못한 공유덕이 눈을 부라리며 소리치자 야골타는 한쪽 입꼬리를 씨익 말아 올리고는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아 들었다.

스르르릉.

“그럼 실력으로 몰아내는 수밖에. 쳐라!”

야골타의 외침에 백기단 병사들은 피에 굶주린 승냥이 떼처럼 우르르 앞으로 뛰쳐나갔다.

그러자 맞은편에서도 기병들이 마주 달려 나왔다.

“막아라!”

쿠콰콰쾅!

가운데서 맞부딪친 양쪽은 커다란 충돌음과 함께 한데 뒤엉켜서 치열한 난전을 벌였다.

채채챙! 챙! 챙!

“크악!”

“으윽.”

한순간 신성한 황궁 앞은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전쟁터로 변해 버렸다.

창에 꿰이고 칼날에 베이며 사방에서 구슬픈 비명이 터져 나오는 가운데 양쪽은 철천지원수라도 만난 것처럼 상대한테 덤벼들었다.

그중에서도 묵직한 검을 마치 장난감처럼 휘둘러 대는 야골타의 모습은 상대편을 주눅 들게 만들었다.

“으하아압!”

우렁찬 기합 소리와 함께 야골타가 내지른 검은 정확히 앞을 가로막은 기병의 머리를 으깨 버렸다.

퍼걱!

“끄허억.”

검이 아니라 마치 몽둥이로 내려친 것처럼 머리가 박살 난 기병은 힘없이 말에서 굴러떨어졌다.

야골타는 금방 다른 상대를 찾아 검을 휘둘러 댔다.

야골타뿐 아니라 백기단 병사들 전부가 뛰어난 실력으로 상대를 압도했다.

타고난 기병인 데다 여러 전투를 거치며 단련된 정예 부대인 백기단과 달리 공유덕이 끌고 온 병력은 실전 경험도 적고 기본적으로 팔기군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기에 처음부터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비명을 지르거나 피를 흘리며 낙마하는 건 거의 공유덕의 부하였다.

그 모습에 입술이 바짝바짝 타들어 간 공유덕은 남아 있는 보병들마저 전투에 투입시켰다.

와아아!

퍼퍽! 채챙!

“컥!”

보병들까지 합세했지만 승기를 잡기는커녕 계속해서 밀렸다.

“사, 살려 줘. 크억!”

어느새 병력 대부분이 죽거나 전투가 불가능할 정도로 큰 부상을 입고 쓰러지자 공유덕은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주위를 둘러봤다.

“이럴 수가.”

또다시 병사 한 명의 목에 검을 쑤셔 넣은 야골타가 득의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앞으로 말을 몰아왔다.

“흐흐흐. 좋게 말할 때 도망치지 그랬어.”

“으으…….”

두려운 표정으로 공유덕이 주춤거리는 순간 뒤편에서 시끄러운 말발굽 소리가 들리더니 한 떼의 기마가 달려왔다.

“멈춰라!”

“젠장!”

새롭게 나타난 무리를 확인한 야골타는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다른 친왕들이 거느린 팔기군 부대였는데 공유덕의 부하들처럼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기에 싸움을 중단하고 황급히 병력을 뒤로 물렸다.

덕분에 공유덕은 전멸 위기에서 가까스로 벗어나 목숨을 건질 수 있었고 대청문 앞은 야골타의 백기단과 범문정 측 병력 그리고 황궁을 지키는 금군까지 세 세력이 서로를 견제하며 묘한 대치 상태를 이뤘다.

“어떻게 됐느냐?”

황비의 물음에 금군 도독인 구천령이 긴장한 얼굴로 대답했다.

“말씀하신 대로 양쪽에서 다 병력을 이끌고 와서 잠시 충돌을 벌이다가 지금은 대청문 앞에서 대치 중입니다.”

일단은 한고비 넘겼다는 생각에 황비는 안도한 표정을 지었다.

“다행이군.”

“하지만 황궁을 지키는 금군 숫자가 천 명뿐이라서 저들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성문을 깨고 들어올 수 있습니다.”

명색이 장수라는 자가 여자인 그녀보다 더 겁을 내는 모습이 황비는 너무나 한심스러웠지만 사방이 적인 지금 그나마 믿을 수 있는 건 인척 관계인 구천령뿐이었기에 애써 화를 참으며 말했다.

“그 전에 상황이 정리될 테니 그때까지 구 장군은 황궁을 철통같이 지키도록 해.”

“알겠습니다.”

지금까지 뒷배를 봐주던 황비가 숙청당하면 자신도 같이 쓸려 나간다는 걸 잘 알고 있는 구천령은 결연한 얼굴로 머리를 숙였다.

“지금쯤 도착했겠지.”

옆에 조용히 서 있던 상궁이 황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럴 겁니다.”

그 시각, 비상 체제에 돌입해 무장한 병사들이 삼엄한 경비를 펼치고 있는 예친왕부에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다.

“황궁에서 사람이 왔다고?”

“그렇습니다.”

방금 전 황궁이 누군가에게 봉쇄됐고 백기단을 끌고 간 야골타는 다른 친왕들이 부리는 팔기군에 막혀 있다는 급보를 받고 노발대발 화를 냈던 예친왕은 의아한 얼굴로 앞에 선 만월개를 쳐다봤다.

“누가 보낸 거지?”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묻자 만월개가 얼른 대답했다.

“황비마마십니다.”

“…….”

그 한마디로 예친왕은 금군을 동원해서 재빠르게 황궁을 봉쇄한 사람이 황비라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이것 참, 호랑이가 없으니 여우가 활개를 치고 다니는 건가.”

“어찌할까요?”

“들여보내.”

예친왕의 허락이 떨어지자 잠시 밖으로 나갔던 만월개가 얼굴을 면사로 가린 여자를 데리고 들어왔다.

평범한 아낙네처럼 꾸미긴 했지만 소리를 내지 않고 걷는 모양새나 조심스러운 몸짓에서 궁에서 일하는 여자 특유의 버릇이 있어 출신을 파악하기가 어렵지 않았다.

황비가 아무 궁녀나 사절로 보낼 리는 없으니 적어도 상궁 정도는 되리라.

예친왕을 눈앞에 두고도 면사를 걷을 생각을 하지 않아 그가 조금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자 눈치 빠르게 여자가 손을 움직여 얼굴을 드러내었다.

“본 적이 없는 얼굴이로군.”

“왕야께서 내전에 들르실 일이 없으니 그야 당연한 일이지요.”

“흥. 그도 그렇군. 그래, 황비께서 내게 무슨 말을 전하라 하시던가.”

“이걸…….”

여자는 품속에서 곱게 접힌 비단 봉투 하나를 꺼내서 건넸다.

그걸 만월개가 받아 예친왕에게 전하자 그는 의심스럽다는 듯이 한쪽 눈썹을 치켜세웠다.

비단 봉투는 끈으로 엄중하게 봉인되어 있었지만 왠지 그 속에서 요사스러운 여인네의 독기가 퍼져 나오는 것 같아 내심 손으로 만지기도 꺼려졌다.

그래도 일단 사태가 여기까지 진행된 이상 무시할 수도 없었기에 예친왕은 어쩔 수 없이 비단 봉투를 펼쳤다.

얼굴에 가면을 쓴 것처럼 표정엔 아무런 변동이 없었지만 황비의 서신을 읽어 내려가는 동안 그의 눈빛은 마치 얼음처럼 싸늘하게 변해 갔다.

서신에는 황제가 죽으면서 지금의 황비 소생인 이황자에게 황위를 물려주겠노라 약속했다는 것, 그리고 그 증거로 친필로 수결한 칙서까지 있으니 정통성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황비의 주장과 함께 이황자가 아직 나이가 어리므로 그가 장성할 때까지 예친왕에게 섭정을 맡길 의향이 있다는 것이 황비다운 도도한 필체로 쓰여 있었다.

물론 섭정을 맡는 대가로 황비와 이황자의 신변을 보장해 줘야 한다는 조건이 달린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흐음…….”

예친왕은 손끝으로 팔걸이를 톡톡 두드리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마침내 그가 입을 열어 말했다.

“좋아. 황비마마의 제안을 받아들이도록 하지.”

“…….”

만월개가 놀란 얼굴로 예친왕을 돌아보았고, 줄곧 숨을 죽이고 있던 여자는 비로소 살짝 안도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왕야.”

하지만 인사를 올린 후에도 여자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자 답답해진 만월개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또 뭘 원하는 게냐? 볼일이 끝났으면 썩 물러가지 않고!”

“아뢰옵기 황송하옵니다만…….”

과연 황궁에서 오랜 기간 단련된 사람답게 움찔하는 기색도 없이 여자가 말을 이었다.

“마마께서 만약 왕야가 제안을 수락하신다면 그 증표로 서명을 받아 오라 이르셨습니다.”

“말로는 못 믿겠다 이거냐?”

“저는 그저 마마의 말씀을 전해 드릴 뿐이옵니다.”

“허어, 그것참.”

화를 내기는커녕 오히려 재밌다는 표정으로 턱을 쓰다듬던 예친왕은 팔을 뻗어 붓을 손에 잡았다.

“사내대장부의 말은 황금 백 냥보다 더 무겁다는 옛말도 있건만 네 주인은 꽤 의심이 많은 모양이로구나.”

“…….”

“하지만 미인의 부탁이니 못 들어줄 것도 없지.”

그렇게 말하며 종이 위에 거침없이 붓을 놀린 예친왕은 만월개를 돌아보고 말했다.

“여기 있네. 그리고 만월개 자네는 입구까지 함께 따라가서 배웅해 주고 오도록 하게나. 황비마마의 사람인데 내 허술하게 대우할 수는 없지.”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왕야.”

두 사람이 인사를 하고 방을 나가자 홀로 남은 예친왕은 한 팔로 몸을 비스듬하게 받치고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황궁에 있는 암여우가 꽤 하는 것 같지만 과연 언제까지 위세를 떨칠 수 있을까? 훗, 일이 참 재밌게 돌아가는군그래.”

그러고 나서 손바닥으로 무릎을 탁탁 치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형님, 그러게 여자는 잘 골라야 한다지 않습니까. 쯧쯧, 말년에 이게 웬 고생입니까그려. 어쨌든 이왕 가시는 길, 편하게 고통 없이 가신 거라면 좋겠군요.”

술병을 들어 직접 잔을 채운 예친왕은 아무도 없는 허공을 향해 건배하듯 들어 올린 후 독주를 단숨에 꿀꺽 삼켜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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