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권에서 계속>
4권
암투 2
“마마, 다녀왔사옵니다.”
예친 왕부에 보냈던 상궁이 문을 열고 들어오자 어린 둘째 황자를 데리고 있던 황후는 반색을 하며 반겼다.
“그래, 뭐라고 하던가?”
“예친왕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정말이야!”
“예. 여기 약속을 이행하겠다는 확약서입니다.”
품속에서 비단 봉투를 하나 꺼내 내밀자 황후는 얼른 개봉해 내용물을 확인했다.
안에는 어떤 상황에서도 황후와 둘째 황자의 안위를 보장해 주겠다는 글이 친필로 적혀 있고 끝부분에는 인장까지 찍혀 있었다.
섭정이 되고 나서 예친왕이 배신할 수도 있었지만 이걸로 최소한의 안전장치는 갖추게 됐다.
확약서를 곱게 접어 품속에 소중히 챙긴 황비는 한쪽에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어린 아들을 내려다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이제 우리 모자는 살았습니다.”
얼마 뒤 황비는 황제인 홍타이지의 죽음을 공식 발표하며 유언에 따라 둘째 황자 복림이 황위를 계승하고 성인이 될 때까지 예친왕 도르곤이 섭정에 올라 조정을 이끌어 갈 것임을 천명했다.
그리고 범문정과 그 일당을 황궁에 변고가 생긴 걸 틈타 첫째 황자 호격을 앞세워 반역을 도모한 죄인으로 지목했다.
황비는 이런 내용이 적힌 통문通文(여러 사람의 이름을 적어 돌려 보는 통지문)에 옥쇄를 찍어, 팔기군과 관리 들에게 돌렸다.
졸지에 반역도로 몰린 범문정과 친왕들은 펄쩍 뛰었지만 이미 대세는 예친왕 쪽으로 급격히 기울어졌다.
장 총관이 입수해서 가져온 통문을 천천히 읽어 본 도현은 담담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끝났군.”
“확실히 예친왕이 유리해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재상 쪽 세력도 만만치 않은데 이대로 순순히 무릎을 꿇겠습니까?”
신중한 태도를 보이는 장 총관과 달리 도현은 앞에 있던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고는, 예친왕의 승리를 확신했다.
“물론 목숨이 걸려 있는 만큼 마지막 발악이라도 하겠지만 역도로 몰리는 순간 이미 결과는 나온 거나 마찬가지야. 당장 휘하에 있는 부하들부터 동요하기 시작할 걸.”
“으음.”
도현의 날카로운 지적에 장 총관은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하고 낮게 침음성만 흘렸다.
실제로 친왕들이 장악한 팔기군은 아직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지만 황비가 뿌린 포고문을 읽고 공유덕 휘하의 백인대 하나가 통째로 항복해 버릴 만큼 일반 병사들의 동요는 컸다.
“아무튼 그 짧은 시간에 옥쇄를 챙기고 예친왕과 협상을 벌여 비록 허수아비지만 둘째 황자를 황위에 올리고 안위를 보장받다니, 황비도 대단한 여자군.”
“그러게 말입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변수였습니다.”
“뭐, 아무튼 이걸로 자칫 내전이 터질 수도 있었는데 의외로 빨리 마무리될 것 같군.”
그러자 장 총관이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저들끼리 피 터지게 싸우는 걸 봤어야 되는데 너무 아깝습니다.”
“그래도 이번 일로 내정을 전담하던 범문정이 제거되고 국력도 많이 깎여 나가게 됐으니 그걸로 위안을 삼자고.”
“예.”
“그럼 일이 마무리될 때까지 긴장 풀지 말고 계속 상황을 주시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고개를 숙이며 대답한 장 총관은 자리에서 일어나 조용히 방을 나갔다.
팔걸이에 손을 올리고 뭔가를 생각하던 도현은 밖에서 대기하고 있는 칠현을 불렀다.
“박 내관, 거기 있느냐?”
“찾으셨사옵니까?”
문을 열고 들어와 허리를 숙이는 칠현에게 도현은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지금 바로 박 대장을 이리 데려와.”
“예.”
잠시 뒤 칠현과 함께 박영식 호위대 대장이 들어와 예를 갖췄다.
“이리 가까이 오라.”
박 대장이 두세 걸음 더 다가와 무릎을 꿇고 앉자 도현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지금 동원할 수 있는 부하들이 몇 명이나 되지?”
“관저에 서른 명이 들어와 있고 더 필요하시면 그 정도는 더 불러들일 수 있습니다.”
“육십이라…….”
습관처럼 한쪽 손을 들어 턱을 매만지던 도현은 이내 눈을 번뜩이며 박 대장을 봤다.
“그중에서 무예가 뛰어나고 입이 무거운 자들을 가려 뽑아, 마흔 명을 데려와.”
“지금 말씀입니까?”
“그래. 이각 뒤에 나랑 갈 데가 있어.”
한쪽에 서 있던 칠현이 도현의 말에 깜짝 놀라 끼어들었다.
“아니, 이 난리 통에 어딜 가시려고 그러십니까?”
“처리해야 될 일이 생각났어.”
“그럼 상황이 진정된 다음에 나가시죠.”
“아니야. 지금이 아니면 안 돼.”
어쩐지 또 도현이 큰 사고를 칠 것 같은 느낌에 칠현은 절로 한숨이 나왔지만 한번 고집을 피우면 절대 다른 사람 이야기를 안 듣는 걸 알았기에 고개를 살짝 내저으며 그냥 입을 다물었다.
그와 달리 도현에 대한 믿음이 확고하고 무인 특유의 투박한 성격을 가진 박 대장은 시종일관 무표정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준비를 해 놓고 있겠습니다.”
“그래. 싸움이 벌어질 수도 있으니까 신분이 드러날 수 있는 건 다 놔두고 각자 무기를 확실히 챙겨서 오라고 해.”
“알겠습니다.”
담담히 대답하는 박 대장과 달리 싸움을 벌어질 수도 있다는 말에 칠현의 얼굴은 대번에 어두워졌다.
정확히 이각 뒤 검은색 야행복을 입고 복면까지 한 도현은 박 대장이 이끄는 호위대 대원 마흔 명과 함께 은밀히 관저를 빠져나와 모처로 향했다.
목적지에 도착한 박 대장은 뜻밖의 장소에 눈을 살짝 치켜떴다.
“여긴!”
“형부 옥사에 갇혀 있는 조정 대신들을 몰래 구해 낼 거야.”
현재 형부에 있는 조정 대신은 청국의 강력한 요구에 어쩔 수 없이 내준 김상헌과 최명길이었다.
명과 내통한 혐의로 붙잡혀 있었는데 원래는 벌써 심문을 끝내고 벌을 내려야 했지만, 그동안 산해관 정벌과 갑작스러운 황제의 병환으로 우선순위에서 밀려, 벌써 반년 넘게 옥사에 수감되어 있었다.
비록 방식은 달랐지만 두 사람 다 조선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고 사대부들에게 큰 영향력을 끼치는 인물들이었기에 이렇게 그냥 내버려 둘 수 없었다.
그 외에도 이런저런 이유로 조선인들이 상당수 갇혀 있었는데, 혼란스러운 이때를 노려 이들을 구출해 내려는 것이다.
“어수선한 지금이 기회야. 최대한 신속하고 조용히 끝낸다. 모두 알겠지?”
“옛.”
“좋아. 가자!”
도현의 지시가 떨어지자 호위대 대원들은 신속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슈슉! 슉!
“헉!”
“크윽.”
화살에 맞아 입구를 지키고 있던 경비병 네 명이 쓰러지자 검을 뽑아 든 도현과 호위대 대원들은 어둠 속에서 달려 나와 문을 열고 형부 안으로 진입했다.
“누, 누구냐?”
“죽여라!”
슈칵!
“아아악.”
“침입자다!”
비명을 듣고 관원들이 뛰쳐나왔지만 범문정 측에 가담한 형부상서가 병력 대부분을 빼 간 상태라 채 서른 명이 되지 않았다.
말 그대로 옥사를 지킬 최소한의 인원만 남겨 놓은 건데, 그나마도 대부분 늙거나 실력이 떨어지는 이들이었다.
이런 사정을 짐작하고 있던 도현은 상대편의 모습을 훑어보고는 차갑게 외쳤다.
“쓸어버려!”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대원들은 바람처럼 몸을 날려 당황해하는 관원들을 향해 가차 없이 검을 휘둘렀다.
“마, 막아!”
“흐이익.”
채챙! 챙! 챙!
형부 관원들도 다급히 병장기를 든 손에 힘을 주며 맞서 싸웠지만 애초에 실력 차이가 너무 많이 났다.
“끄엑.”
“컥.”
여기저기에서 비명이 터져 나오며 대원들은 마치 양 떼 사이에 뛰어든 늑대처럼 적을 마구 난도질했다.
속절없이 죽어 나가는 동료들의 모습에 몇몇 관원은 겁을 먹고 등을 돌려 달아나기까지 했다.
“도, 도망쳐!”
“어딜!”
쉬이익.
퍽! 퍼퍽!
하지만 몇 걸음 떼지도 못하고 약간 떨어져서 싸움을 지켜보던 도현과 박 대장이 날린 단검에 맞아 앞으로 꼬꾸라졌다.
그사이 대원들도 상대하던 관원들을 모두 처리했다.
푸욱!
“사, 살려…… 크억.”
마지막 관원이 검에 찔려 쓰러지자 도현은 무표정한 얼굴로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이쪽이다.”
널브러져 있는 시신들을 지나 뒤쪽으로 조금 더 가자 드디어 감옥이 나왔다.
옆으로 길쭉한 여섯 칸짜리 건물에는 어른 머리통만 한 작은 창마다 죄수가 도망치지 못하도록 창살이 설치되어 있었다.
간수 한 명이 입구를 지키고 있었지만 도현과 대원들이 오는 걸 보고는 허겁지겁 달아나 버렸다.
“부숴!”
도현이 손짓을 하자 박 대장이 직접 단단한 검 손잡이로 문에 달려 있는 자물쇠를 힘껏 내려쳐서 부숴 버렸다.
퍽!
쨍그랑.
끼이이익.
기름칠을 제대로 해 두지 않았는지 시끄러운 경첩 소리를 내며 문이 열리자 횃불을 든 대원 두 명을 선두에 세우고 안으로 들어갔다.
어두컴컴한 실내는 좁은 통로를 따라 양쪽으로 굵은 통나무로 창살이 쳐진 감방이 주욱 늘어서 있었는데 대충 봐도 족히 열 개는 되어 보였다.
밖에서 난 소란에 깨어 있던 수감자들은 도현과 대원들이 들어오는 걸 긴장한 눈으로 쳐다봤다.
소현세자를 따라 몇 차례 형부에 갇힌 김상헌과 최명길을 면회한 적인 있던 도현은 바로 안쪽으로 걸어갔다.
열 명씩 무더기로 들어가 있는 다른 감방과 달리, 두 사람은 맨 끝에 서로 마주 보는 위치의 감방을 하나씩 차지하고 있었다.
오랜 감옥 생활에 많이 지쳤을 텐데도 한 점 흐트러짐 없이 상투를 틀고 하얀색 한복을 입은 채 정자세로 앉아 있는 두 사람의 얼굴을 확인한 도현은, 옆에 있는 박 대장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박 대장은 즉시 대원들과 함께 자물쇠를 부수고 감방 문을 열었다.
“청음淸陰 대감, 저희와 함께 가시죠.”
박영식이 자신의 호를 부르며 하는 말에 김상헌은 감고 있던 눈을 뜨고는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자네들은 누군데 나에게 같이 가자는 건가?”
“저희는 봉림대군 마마의 수하들입니다.”
“그게 사실인가?”
작게 귓속말로 한 이야기를 김상헌이 못 믿겠다는 듯이 되묻자 박영식은 시선을 돌려 통로에 서 있는 도현을 봤다.
박 대장을 따라 김상헌이 자신을 쳐다보자 도현은 복면을 살짝 위로 들어 올려 얼굴을 보여 주고는 바로 다시 썼다.
“헉! 정말 대군께서…….”
설마하니 도현이 직접 와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던 김상헌은 깜짝 놀라 눈을 치켜떴는데 그건 맞은편 감방에 있던 최명길도 마찬가지였다.
“쉿! 목소리가 큽니다.”
“으음.”
질책하듯 박 대장이 낮은 목소리로 말하자 김상헌은 황급히 입을 닫았다.
조선의 왕자가 관청인 형부에 침입해 자신들을 구출해 갔다는 사실이 알려져서 좋을 것이 하나도 없다는 걸 두 사람도 충분히 알고 있었다.
“가시죠.”
“아, 알았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일어나던 김상헌은 오랜 수감 생활로 몸이 상했는지 중심을 잡지 못하고 휘청거렸다.
“저한테 기대십시오.”
“고맙네.”
옆에 있던 대원의 부축을 받아 밖으로 나온 김상헌은 자신처럼 힘겹게 발걸음을 옮기는 최명길을 보고는 애틋한 시선을 보냈다.
그건 최명길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조선에 있을 때는 서로 생각하는 것이 달라 원수처럼 다투며 상대를 경원시했지만, 함께 옥에 갇혀 시詩로 국가와 백성들을 걱정하는 속마음을 확인한 뒤부터는 십년지기처럼 가까워졌다.
할 이야기가 많았지만 두 사람의 상념은 도현의 이야기에 깨어졌다.
“고생들 많았소.”
“아닙니다.”
“저희들을 구하러 오신 건 감사하지만 이 일로 인해 괜히 어려운 상황에 처하시는 것은 아닌지 걱정입니다.”
얼떨결에 따라 나오기는 했지만 후폭풍이 염려되는지 최명길이 굳은 얼굴로 말하자 복면을 써서 보이지 않았지만 도현은 씨익 미소를 지으며 두 사람을 안심시켰다.
“문제가 생기지 않게 할 자신이 있으니 그건 걱정하지 마시오. 박 대장.”
“예.”
“두 분을 밖으로 모시게.”
“알겠습니다.”
허리를 살짝 굽힌 박 대장이 눈짓을 하자 대원들이 두 사람을 부축해 건물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그사이 나머지 대원들은 다른 감방을 하나씩 열고 조선인 수감자를 모두 꺼내 줬다.
“다 됐습니다. 그런데 저들은 어떻게 할까요?”
박 대장이 가리키는 곳으로 시선을 돌리자 조선인이 아닌 죄수 열다섯 명가량이 불안한 얼굴로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다 풀어 주고 싶었지만 그랬다가 김상헌과 최명길의 탈옥에 조선이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 밝혀질 수 있었기에 도현은 불안 요소를 남겨 두지 않기로 독하게 마음먹었다.
“없애라.”
“옛.”
도현이 인정에 이끌린 결정을 내릴까 봐 내심 염려하던 박 대장은 힘차게 대답하고는 남아 있는 대원들과 죄수들이 있는 감방으로 갔다.
그러자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낀 죄수들은 겁에 질린 얼굴로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왜 이러는 거요?”
“사, 살려 주시오.”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다. 처리해!”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박영식은 손에 쥐고 있던 검을 휘둘렀고 다른 대원들 역시 약간의 망설임도 없이 살수를 펼쳤다.
슈칵!
“으아악.”
“커헉.”
비명이 터져 나오며 순식간에 감방 안은 피바다로 변했다.
그 모습을 담담히 지켜보던 도현은 죄인들이 모두 죽자 가라앉은 목소리로 지시를 내렸다.
“시신을 비어 있는 감방에 골고루 옮겨 놔.”
“네.”
짧게 대답한 대원들은 서둘러 죽어 있는 죄인들을 한 명씩 들어 다른 감방으로 옮겼다.
굳이 귀찮게 이런 일을 시키는 건 나중에 청국 조정이 조사를 할 때 혼란을 주기 위한 도현의 꼼수였다.
도현은 마지막으로 감옥 건물에 불을 지르는 걸로 깔끔하게 뒤처리를 끝냈다.
화르르륵!
무섭게 타오른 불길이 건물 전체를 휘감는 것을 뒤로하고 도현은 구출한 이들을 데리고 빠르게 형부를 빠져나갔다.
형부를 나와 근처 골목길로 들어가자 대원 두 명이 타고 온 말들을 지키고 있었다.
“지금부터 말을 타야 되는데 괜찮겠소?”
“예.”
예친왕과 범문정의 싸움 때문에 치안이 공백 상태라고 하지만, 그래서 더 위험한 심양 거리를 누가 봐도 수상한 모습으로 걸어 다닐 수는 없었기에 힘들어도 말을 타고 가야 했다.
“힘들더라도 조금만 참으시오.”
“염려 마십시오.”
잠시 뒤 구출한 이들을 한 명씩 뒤에 태운 도현과 대원들은 이런 일이 있을 때를 대비해 봉황상단에서 마련해 둔 안가 중 한 곳으로 이동했다.
형부에 불이 났지만 양쪽의 싸움이 한창이라 감옥을 다 태우고 불길이 다른 건물로 번져 가는데도 관원들은 아무도 오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자신들이 죽느냐 사느냐 중대한 기로에 서 있는 상황에서 형부에 불이 난 것쯤은 아무런 관심도 끌지 못했다.
대신 화재에 놀란 인근 주민들이 나와 황급히 양동이에 물을 떠 와 뿌리며 진압에 나섰다.
한편 모종의 합의가 이루어진 후 당당히 황궁에 들어간 예친왕은 황비를 만나 직접 다시 한 번 약속을 지키겠다고 다짐하고는 섭정에 임명됐다.
이 자리에서 예친왕은 황제의 상징인 옥쇄를 넘겨 달라고 요구했지만, 아직 그를 완전히 믿을 수 없었던 황비는 둘째 황자가 대관식을 치르고 정식으로 황위를 이어받으면 주겠다며 거부했다.
대신 옥쇄를 찍은 명령서를 아직 중립을 지키고 있는 팔기군 부대와 황성 수비대에 보내 예친왕의 지시를 따르도록 했다.
만족스럽지는 않았지만 일단은 눈엣가시 같은 범문정부터 완전히 제거하는 것이 우선이었기에 예친왕은 더 다그치지 않고 이쯤에서 물러났다.
지휘권을 확보한 예친왕은 제일 먼저 반대 세력이 빠져나가지 못하게 심양성을 철저히 봉쇄하고는 정예인 팔기군을 앞세워 상대를 강하게 압박했다.
그와 동시에 유화책을 써서 범문정에 동조한 다른 친왕들에게 은밀히 사신을 보내 회유했다.
마음 같아서는 아무리 피를 나눈 형제라고 해도 자신을 쳐내려고 한 친왕들을 다 죽여 버리고 싶었지만, 쇠락했다고 해도 명이 건재하고 몽고와 조선이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는 상황에서 최정예인 팔기군을 내전으로 허무하게 소모시킬 수는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고육지책을 쓴 것이다.
애써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황비의 포고문이 발표된 이후 내심 크게 동요하고 있던 친왕들은 목숨뿐만 아니라 현재 가진 권력도 그대로 보장해 주겠다는 예친왕의 제안에 마음이 흔들렸다.
“예친왕께서 형제분들을 생각해 마지막으로 드리는 기회입니다.”
친필 편지를 가져온 장수가 마지막 기회라는 걸 강조하며 협박조로 말하자 은밀히 모인 세 명의 친왕은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알았으니 자네는 잠시 나가 있게.”
예친왕의 형이자 태조 누르하치의 장남인 대선이 한쪽 손을 내젓자 장수는 대답 없이 고개만 살짝 숙이고는 밖으로 나갔다.
무례한 행동에 절로 눈썹이 치켜 올라갔지만 당장 자신들의 목숨줄을 쥐고 있는 쪽이었기에 친왕들은 호통을 치지 못하고 그저 얼굴을 구긴 채 앓는 소리만 냈다.
“끄으응.”
“이제 도르곤 밑에 있는 장수들까지 우릴 무시하는군.”
“이런 수모를 당하면서 우리가 도르곤한테 머리를 숙여야 됩니까!”
분한 듯 소리치는 다택을 보며 대선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럼 이대로 범문정 패거리와 함께 역도로 몰려 패가망신을 당할 테냐?”
“그건 아니지만…….”
“나도 화가 나지만 황비가 도르곤과 손을 잡으면서 이미 승부는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야.”
“너무 성급하신 것 아닙니까? 상황이 불리해진 건 맞지만 아직 저희한테는 팔기군 세 개 부대와 삼천 명이 넘는 병력이 남아 있습니다.”
누르하치의 열두 번째 아들이자 영친왕英親王에 봉해진 아제격이 미련을 못 버린 듯 이야기를 하자, 대선은 냉정하게 고개를 저었다.
“조금 더 버틸 수는 있겠지만 명분도 빼앗기고 성문이 모두 봉쇄되어 독 안에 든 쥐처럼 꼼짝없이 갇힌 상황인데, 무슨 희망이 있겠느냐? 결국 끝은 마찬가지일 게야.”
“후우. 어쩌다가 이 꼴이 된 건지.”
“다 범문정 그자의 혀에 놀아나서 그런 것 아닙니까. 일을 벌이려면 제대로 할 것이지. 황비 하나를 제대로 휘어잡지 못해 이렇게 어이없이 뒤통수를 맞다니.”
“지금에 와서 후회해 봤자 뭐하겠느냐? 더 늦기 전에 우리가 살길을 찾아야지.”
“그러면 형님은 도르곤의 제안을 받아들이시겠다는 겁니까?”
아제격의 물음에 대선은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선택의 여지가 없잖아. 아우들도 잘 판단하게.”
“…….”
이미 모든 걸 포기한 듯한 대선의 이야기에 아제격과 다택은 입을 다물고 고심에 찬 얼굴을 했다.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뾰족한 수는 떠오르지 않았고 이미 대세가 기울어졌다는 생각만 굳어졌다.
결국 두 사람도 굴욕적이지만 대선처럼 예친왕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어쩔 수 없군요.”
꽝!
“젠장.”
착잡한 심정은 다 마찬가지였기에 주먹으로 테이블을 세게 내려치며 분해하는 다택의 등을 두드려 주며 대선이 부드럽게 다독였다.
“언제고 오늘 당한 치욕을 되갚아 줄 날이 있을 게다.”
그렇게 예친왕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의견을 조율한 친왕들은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장수를 다시 불러들여 뜻을 전했다.
“현명한 판단이십니다.”
득의만만한 표정을 지은 장수는 자리에 앉아 있는 친왕들을 보며 말을 이었다.
“그럼 믿음의 표시로 역도들을 처단하는 데 세 분께서 앞장 서 주셨으면 합니다.”
“우리보고 범문정과 싸우라는 건가?”
“이제 예친왕 전하와 손을 잡으셨으니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너무나도 태연한 장수의 이야기에 순간 세 사람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이건 항복이 사실인지 확인하는 것도 있었지만 양쪽을 충돌시켜 껄끄러운 친왕들의 세력을 줄여 놓으려는 속셈이었다.
오랜 세월 살벌한 중앙 정계에서 지낸 친왕들이 이런 눈에 뻔히 보이는 꼼수를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당장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다택이 뭐라고 고함을 치려 하는 걸 대선이 한쪽 손을 들어 제지하고는, 굳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원하는 대로 해 주지.”
“형님!”
아제격과 다택이 어찌 그럴 수가 있냐는 눈으로 쳐다보자 대선은 체념한 투로 말했다.
“우리가 한 일이 있으니 다시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감내할 수밖에 없지 않나.”
“끄으응.”
더 이상 반발을 하지 않고 아제격과 다택이 인상을 구기자 장수는 한쪽 입꼬리를 씨익 말아 올렸다.
“그러면 세 분께서 범문정을 벌하는 데 앞장서 주시는 걸로 알고 전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알겠네.”
장수가 돌아가고 얼마 있지 않아 세 친왕은 각자 휘하에 있는 팔기군을 움직여서 범문정의 저택을 공격했다.
높다란 담으로 둘러싸인 범문정의 저택에는 팔기군 중 하나인 양황기 병사 오백 명이 경비를 서고 있었지만, 아군이라고 생각한 친왕들이 병력을 이끌고 태연하게 안으로 들어와서 갑자기 돌변해 기습을 가하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채챙! 챙! 챙!
“크아악!”
“끄억.”
“이 배신자들!”
“닥치고 죽어라!”
“큭.”
양황기 병사들이 배신감에 이를 악물고 방어에 나섰지만 이미 상대가 담 안으로 모두 들어와 있는 데다 숫자도 월등히 많았기에 힘없이 뒤로 밀렸다.
“흐아압!”
서걱!
검을 내려쳐 앞을 가로막고 있던 적병을 양단한 대선은 상대편의 피로 더러워진 갑옷을 입은 채 크게 소리쳤다.
“역도들의 수괴가 안채에 있다! 모두 날 따르라.”
“와아아!”
팔기군들은 상대가 위축되게 일부러 더 크게 함성을 내지르며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는 양황기를 쫓아 안쪽으로 들어갔다.
꽈앙!
“큰일 났습니다.”
바깥채 쪽에서 들리는 싸움 소리에 안 그래도 불안해하고 있던 범문정과 첫째 황자 호격은 문을 부술 듯이 열어젖히며 뛰어 들어온 양황기 소속 천인장 야율타이를 보고 다급히 물었다.
“예친왕이 여기까지 쳐들어온 건가!”
“아닙니다.”
“그럼 뭔가?”
“친왕들이 배신했습니다.”
“뭐야!”
예상치 못한 말에 호격은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고 범문정은 낮게 침음성을 내뱉고는 두 눈을 감았다.
“황자님을 만나러 왔다며 속이고 저택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바로 병장기를 뽑아 들고는 저희를 공격했습니다.”
“이런 비겁한…….”
분노에 이를 부드득 가는 호격을 보며 야율타이가 급하게 말을 이었다.
“부하들이 최선을 다해 막고 있지만 병력 차이가 커서 오래 버티지 못할 겁니다. 어서 다른 곳으로 피하십시오.”
그러자 옆에 앉아 있던 범문정이 담담한 표정을 혼잣말처럼 입을 열었다.
“사방이 다 적인데 어디로 간단 말인가?”
“그럼 이렇게 앉아서 죽으실 겁니까?”
“결국 여기까지인 것 같군. 전 이대로 있을 테니 황자님께서는 뒷문으로 빠져나가십시오.”
“재상!”
“괜히 저 때문에 황자님이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신 것 같아 죄송할 따름입니다.”
마지막을 각오한 듯 초탈한 범문정의 말에 호격은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잠시 그를 쳐다보다가 몸을 뒤로 돌려 방을 나갔다.
아니, 나가려고 했지만 그 순간 문을 막아서며 들이닥친 일단의 무리 때문에 그 자리에 발이 묶이고 말았다.
“여기들 다 모여 있었구먼.”
“이런.”
채채챙!
대선을 선두로 아제격과 다택이 모습을 나타내자 야율타이와 방 안에 있던 양황기 병사들은 황급히 검을 뽑아 들고 호격을 둘러쌌다.
“함께 대업을 도모하기로 해 놓고 어찌 이렇게 등에 비수를 꽂을 수 있습니까!”
울분에 찬 호격의 외침에 대선은 무표정한 얼굴로 시선을 똑바로 마주치며 말했다.
“조카에게는 미안하게 됐지만 우리도 살아야 되니 어쩔 수 없지.”
“권력을 잡고 난 다음에도 예친왕이 세 분을 곱게 놔두실 것 같습니까! 만약에 그걸 믿는다면 정말 순진하시군요.”
호격이 아픈 곳을 찌르자 잠시 눈가를 찡그리던 대선은 이내 표정을 바로 했다.
“걱정해 주는 건 고맙지만 우리도 그렇게 만만한 사람들은 아니란다. 다시 힘을 키우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한데, 그걸 너와 범 재상이 벌어 줘야겠어.”
“이익.”
이미 예친왕 쪽에 붙어 자신들을 희생양으로 삼으려고 한다는 걸 확실히 깨달은 호격은, 주먹을 꽉 말아 쥐고는 상대를 죽일 듯이 노려봤다.
“괜히 아까운 부하들을 죽이지 말고 이쯤에서 항복하는 것이 어때?”
그러자 호격 대신 옆에 있던 야율타이가 매섭게 대선을 쏘아붙였다.
“헛소리 마라! 황자님, 저희는 괜찮으니 신경 쓰지 마십시오.”
“야율타이 장군.”
“흥! 권주를 마다하고 벌주를 택하다니 어리석구나.”
냉소를 지은 대선은 부하들을 보며 짧게 말했다.
“쳐라!”
“와아아!”
“길을 뚫어라!”
채챙! 챙!
“크악!”
“으윽.”
순간 양쪽 병사들이 서로 달려들어서는 한데 뒤엉켜 칼부림을 했다.
야율타이와 양황기 병사들은 필사적으로 상대를 막았지만 수적으로 너무 불리했다.
비명이 한번 울릴 때마다 양황기 병사들이 피를 뿌리며 쓰러졌고, 애병을 휘두르며 고군분투하던 야율타이도 얼마 버티지 못하고 가슴과 옆구리를 크게 베이고는 힘없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야율타이 장군!”
“그러게 순순히 말을 들을 것이지. 뭣들 하느냐? 죄인들을 포박해라!”
“옛.”
대선의 지시에 병사들은 망연자실한 표정을 짓고 있는 호격과 범문정 등을 붙잡았다.
“이거 놔라!”
“험한 꼴 보기 싫으시면 순순히 말을 듣는 것이 좋을 겁니다.”
“이런 발칙한!”
체념한 듯 조용히 따라나서는 범문정과 달리 호격은 손을 뿌리치며 격렬하게 저항했다.
“안 되겠다. 손 좀 봐 줘라!”
그러자 병사들은 단단한 검집으로 호격의 배와 등을 가차 없이 후려쳐서 제압했다.
퍽! 퍼퍽!
“크윽.”
그래도 조카가 병사들에게 마구 두들겨 맞는 것이 보기 싫었던지 대선은 한쪽 손을 살짝 들어 올리며 말했다.
“그만! 그 정도면 됐으니까 데리고 가라.”
“예.”
구타를 멈춘 병사들은 축 늘어진 호격을 양쪽에서 잡고 밖으로 질질 끌고 나갔고 그 모습을 보며 대선과 두 동생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호격과 범문정 외에도 저택에서 예부시랑 홍백민을 비롯한 수뇌부 거의 대부분이 붙잡혀 예친왕이 있는 황궁으로 압송됐다.
아직 공유덕이 이끄는 병력과 호격을 따르는 양황기가 건재했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오래 버티기 어려웠다.
결국 다음 날 정오가 되기 전에 심양성 탈출을 시도하던 공유덕이 생포되면서 홍타이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촉발된 후계자 다툼은 불과 하루도 안 돼 예친왕의 승리로 마무리됐다.
섭정 체제를 공고히 하기 위해서 예친왕은 약식 재판을 통해 역적으로 지목된 호격과 범문정에게 효수형을 선고했고 나머지 가담자들도 일괄적으로 사형을 시켰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거사에 직접 가담하지는 않았지만 범문정을 지지하는 이신들을 조정에서 대대적으로 숙청하고 빈자리를 심복들로 채워 넣었다.
그와 동시에 황비와 약속한 대로 둘째 황자 복림의 황위 승계를 일사천리로 추진해 자신의 정당성을 다졌다.
그렇게 상황이 정리되고 홍타이지의 장례가 진행되자 그동안 문을 걸어 잠그고 있던 세자관도 서서히 대외 활동을 재개했다.
“결국 대군마마께서 예상하신 대로 예친왕이 승리를 거뒀군요.”
박황의 말에 소현세자는 대견하다는 시선으로 도현을 보며 머리를 끄덕였다.
“이번에 정말 큰일을 해냈다.”
“아닙니다.”
“겸손할 필요 없다. 네가 아니었다면 갑작스러운 상황에 우왕좌왕하다가 큰 낭패를 봤을 거야.”
“맞습니다.”
박황과 다른 대신들도 칭찬에 가세하자 도현은 더욱 겸손한 태도로 공을 다른 사람들에게 돌렸다.
“저보다는 신속하고 현명한 판단을 내려 관저에 속한 식솔들을 통솔한 형님과 관리들의 공을 더 클 겁니다.”
“녀석. 이제 보니 입담도 많이 늘었구나.”
“그러게 말입니다. 그냥 하시는 말씀인 걸 알면서도 듣기는 좋군요.”
“하하하!”
한바탕 웃음이 터졌고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회의가 계속 진행됐다.
“아직 성내에 내려진 비상령이 해제되지 않았지만, 상황이 어느 정도 정리된 만큼 황궁으로 찾아가 조의를 표하는 것이 도리겠지?”
소현세자의 말에 박황이 얼굴을 들며 동의했다.
“나중에 꼬투리를 잡히지 않으려면 그러는 것이 좋을 거라 생각됩니다.”
“그럼 조문 사절로는 나하고 봉림대군 그리고 박 대빈객이 같이 가도록 합시다.”
세자인 소현은 말할 것도 없고 도현과 박황은 각각 왕족과 관저에 머무는 조선 관리 중 최고 높은 인물이기에 조문 사절로 부족함이 없었다.
“그리고 청국 조정에서 장례를 치르는 데 필요한 종이와 단목 그리고 괴화를 구해 달라는 요청이 있었습니다.”
“양이 얼마나 필요하다고 하오?”
소현세자의 물음에 박황 대신 옆에 앉아 있던 부빈객 박노가 대답했다.
“물량을 정해 주지는 않았지만 황제의 장례인 걸 감안하면 상당한 양이 필요할 겁니다.”
“그렇겠지.”
고개를 살짝 끄덕인 소현세자는 도현에게 시선을 주며 말했다.
“이 일은 네가 맡아서 처리하여라.”
봉황상단을 염두에 둔 지시라는 걸 눈치챈 도현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네.”
“부족한 것보다 조금 남는 것이 나을 테니 넉넉하게 준비해야 될 거야.”
“염려 마십시오.”
청국에서 요구한 것들을 마련하려면 상당한 돈이 들어가는데도 현명한 소현세자가 이런 지시를 내리는 건, 이렇게 조공을 바치면 받는 쪽에서 몇 배로 되갚아 주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였기 때문이다.
당장은 부족한 재정에 큰 부담이 되겠지만 금방 배가 되어 돌아올 테니 조선 입장에서는 체면도 세우고 꽤 짭짤하게 남기는 장사였다.
이런 걸 알기에 박황을 비롯한 관리들도 반대를 하지 않고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동조했다.
그날 오후 도현은 회의에서 이야기된 대로 형인 소현세자와 박황을 따라 흰색 상복을 입고 황궁으로 문상을 갔다.
아직 후계자 다툼의 여파가 남아 있는지 황궁에는 평소보다 배나 많은 경비 병력이 배치되어 날카롭게 눈을 빛내고 있었다.
내관의 안내를 받아 홍타이지의 시신이 안치된 전각으로 가자, 역시 상복을 입은 문무백관들이 도열해 있는 가운데 예친왕이 어린 둘째 황자 대신 제일 안쪽에 서서 상주 노릇을 하고 있었다.
소현세자를 앞에 세우고 중간에 깔아 놓은 붉은색 비단 천을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긴 일행은, 황제의 시신이 놓인 제단에서 다섯 발자국 떨어진 곳에 멈춰 서서 절을 했다.
그러고는 소현세자가 대표로 정면에 있는 커다란 향로에 향을 피운 뒤 예친왕한테 가서 조의弔意를 표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수십만 대군을 손수 지휘하실 정도로 정정하시던 분이 갑자기 이런 일을 당하시다니, 정말 뭐라고 위로의 말씀을 드려야 될지 모르겠습니다.”
이제 사실상 청국의 일인자로 올라섰기 때문인지 전보다 훨씬 여유로워지고 당당해진 예친왕은 담담한 얼굴로 말을 받았다.
“세상일이라는 것이 어찌 사람 뜻대로 되겠소. 이것도 다 운명 아니겠소이까.”
“그렇군요.”
자칫 불경죄로 큰 곤욕을 치를 수도 있는 발언이었지만 그걸 공개된 장소에서 거침없이 이야기하는 걸 보고, 소현세자와 도현은 새삼 달라진 예친왕의 권세를 실감했다.
“조선에서 장례에 필요한 물품을 보내 주기로 했다던데, 신경을 써 줘서 고맙소이다.”
“아닙니다. 상대가 슬픈 일을 당했는데 돕는 건 당연한 예의지요.”
“앞으로도 양국의 관계가 이처럼 좋게 이어진다면 얼굴을 붉힐 일이 없을 거요. 그리고 답례는 섭섭지 않게 하리다.”
“…….”
청국 내부가 혼란스러운 걸 기회로 삼아 뒤통수를 칠 생각은 하지 말라는 일종의 경고였다.
다른 사람 같으면 당황하거나 상대편의 분위기에 말려들 수도 있었지만, 도현 못지않게 정치적 감각이 뛰어난 소현세자는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차분히 대응했다.
“저희 조선은 상대편의 불행을 같이 슬퍼할 줄 아는 나라이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청과 싸울 생각이 없다는 걸 소현세자가 둘러서 표현하자 예친왕은 살짝 미소를 지어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조선의 예를 아는 국가요.”
“그렇게 생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야기를 끝낸 소현세자 일행이 몸을 돌려 나가려는 순간 예친왕이 뭔가 생각났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아! 어젯밤 역도들을 처단한다고 소란스러운 틈을 이용해서 형부에 수상한 무리가 쳐들어와 감옥에 불을 지르고 죄인들을 탈출시켰는데, 혹시 누가 그랬는지 아는 것이 있소?”
“형부 감옥에 불이 났다니, 그게 정말입니까?”
질문을 받은 소현세자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크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렇소.”
“설마, 옥에 갇혀 있던 두 분 대감은 무사하겠지요?”
소현세자가 급히 김상헌과 최명길의 안위를 묻자 탐색하듯 상대의 얼굴을 살피던 예친왕은 이내 눈가를 살짝 찡그리며 말했다.
“안타깝게도 행방불명 상태요.”
“예? 그게 무슨…….”
“습격자들이 죄인을 탈출시킨 건 맞는데 감옥에 화재가 나면서 남아 있던 사람들이 모두 불에 타 신원을 파악할 수 없어, 누굴 빼내 간 건지 확인하기가 어려운 상태라고 하더이다.”
“그런…….”
도현이 아직 두 사람을 탈출시킨 이야기를 해 주지 않았기에 소현세자는 진심으로 원망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앞에 있는 예친왕을 쳐다봤다.
형부가 습격당했다는 보고를 받고 조선을 의심하던 예친왕은 어색한 구석이 전혀 보이지 않는 소현세자의 반응에 자신이 잘못 짚었다는 생각이 살짝 들었다.
“난 조선에서 일을 벌인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었소?”
“그럴 리가요. 저흰 지난밤 내내 관저 문을 걸어 잠그고 괜한 오해를 사지 않기 위해 바깥출입을 일체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보나마나 제일 먼저 우리가 의심을 받을 텐데, 그런 위험천만한 일을 왜 하겠습니까?”
“하긴 그것도 그렇군. 이거, 문상을 온 손님에게 불쾌한 이야기를 꺼내서 미안하오.”
“그것보다 두 분 대감의 생존 여부를 알게 되면 바로 저희한테 알려 주셨으면 합니다.”
“그렇게 하리다.”
형부에서 벌어진 사건 진행 과정을 우선적으로 알려 준다는 다짐을 받은 세 사람은 그때서야 전각을 벗어났다.
대기하고 있는 마차를 타고 황궁을 벗어나자 한쪽에 앉아 있던 박황이 근심 가득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밤사이 그런 일이 있었다니 두 대감이 어떻게 됐는지 걱정입니다.”
박황의 이야기를 들으면 뭔가 골똘히 생각하던 소현세자는 이내 시선을 들어 도현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러자 도현은 대놓고 떠들 수는 없지만 두 사람은 알고 있어도 괜찮다는 판단에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제가 한 일입니다.”
“역시…….”
“헉! 대군마마, 그게 정말입니까?”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가만히 앉아 머리를 끄덕이는 소현세자와 달리 박황은 대경실색한 얼굴로 도현을 봤다.
“나라를 위해 애쓰신 분들이 청국에 끌려와 고초를 당하시는 걸 그냥 모르는 척 외면할 수는 없었습니다. 마침 기회가 생겨 두 분과 함께 감옥에 갇혀 있던 조선인들을 모두 탈출시켰습니다.”
“심정은 충분히 이해가 되지만 그러다가 행여 저들이 대군마마께서 하신 걸 알게 되면 그 뒷감당을 어쩌시려고 일을 벌이신 겁니까?”
걱정 가득한 박황의 질책에 도현은 염려하지 말라는 듯 차분히 말했다.
“꼬리가 잡히지 않게 깔끔하게 흔적을 지웠으니 형님이나 조정에 폐가 되는 일은 없을 거요.”
“그래도…….”
괜찮다고 하지만 여전히 박황이 근심 어린 표정을 짓고 있는 가운데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소현세자가 말을 끊으며 입을 열었다.
“대감들은 다 건강하시냐?”
“예. 하지만 감옥에 있는 동안 몸이 많이 쇠약해져서 당분간은 요양을 해야 된다고 하더군요.”
“저런…….”
소현세자는 측은하다는 표정을 지었고 박황도 마음이 아픈지 안색이 어두워졌다.
“나이도 적지 않은데 감옥에 반년 넘게 갇혀 있었으니 얼마나 힘들었을지 말을 안 들어도 상상이 됩니다.”
“다 나라가 힘이 없어서 그런 것 아니겠소.”
“저하…….”
“대감들을 만나는 건 어렵겠지?”
소현세자의 물음에 도현은 곤란하다는 듯이 고개를 살짝 좌우로 흔들었다.
“아까는 잘 넘겼지만 예친왕이 의심을 풀지 않고 감시를 할 수도 있으니 그건 가능하면 참으시는 것이 좋을 거예요.”
그동안 고생한 대감들을 직접 위로해 주고 싶었지만, 도현의 말대로 괜히 꼬투리를 잡힐 수도 있었기에 소현세자는 아쉽지만 마음을 접었다.
“그래. 쓸데없이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겠지. 그러면 두 대감을 언제 조선으로 보낼 생각이냐?”
“당장은 대감들의 몸 상태 때문에라도 어렵고 시간이 조금 지나 좀 잠잠해지면 은밀히 돌려보낼 계획입니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한양에 가면 세작과 청국에 동조하는 인물들이 많아 두 대감이 살아 있다는 사실이 탄로 날 수도 있지 않겠느냐?”
소현세자의 우려에 도현이 기다렸다는 듯이 이야기를 했다.
“그래서 한양이 아닌 다른 곳으로 보낼까 합니다.”
“어딜 말하는 거냐?”
“청국의 시선을 피하기에는 탐라(제주도)만 한 곳이 없지요. 한양에서 멀리 떨어진 외딴 지역이기는 하지만 거기라면 바깥출입도 자유롭게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탐라라…… 다소 불편하겠지만 괜찮은 선택 같구나.”
잠시 생각을 해 본 소현세자는 이내 긍정적인 태도를 보였고 옆에 있던 박황도 마찬가지였다.
“사방이 바다로 막힌 곳이라 소문이 새어 나갈 염려가 적으니 청국의 눈을 피해 지내기에는 최적의 장소 같습니다.”
“형님도 아셔야 될 것 같아서 이야기를 했지만 이런 일은 비밀이 어디서 노출될지 모르니까 당분간은 함구를 해 줬으면 합니다.”
“그럼 한양에 계신 아바마마께도 알리지 말라는 거냐?”
도현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거기는 눈과 귀가 많아 조심한다고 해도 누군가 알게 될 가능성이 크니까요.”
두 사람 다 궁궐 생활을 해 봤기에 도현의 우려를 금방 이해했다.
“후우. 어쩔 수 없지. 아무튼 어렵겠지만 탈이 나지 않도록 잘 처리하도록 해라.”
“염려 마십시오.”
소현세자의 당부에 도현은 자신 있는 말투로 대답했다.
마차가 관저에 도착하자 도현은 연락을 받고 와 있던 장 총관에게 청국 조정이 요구한 물품들을 최대한 빨리 구해 오라는 지시를 내렸다.
갑작스러운 지시였지만 장 총관은 수완을 발휘해서 의주에 있는 지점을 통해 급히 필요한 물품들을 웃돈까지 줘서 사들여서는 심양으로 가져왔다.
그때쯤 소식을 듣고 인조가 보낸 조문 사절단이 도착했다.
황제의 장례식답게 주변 여러 국가들의 사절이 모인 가운데 아주 성대하게 행사가 진행됐다. 이 자리에서 예친왕은 섭정 자격으로 사절들을 접견해 자신이 청국의 최고 권력자임을 과시했다.
그리고 이번 후계자 다툼으로 어수선해진 내부를 수습하고 명이 허튼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이례적으로 빨리 장례식을 끝낸 예친왕은, 바로 대관식을 열어 둘째 황자 복림을 황제로 옹립擁立했다.
여섯 살도 안 된 어린 복림은 그렇게 순치제順治帝로 불리며 홍타이지를 이어 청국 삼 대 황제가 됐다.
즉위식에 참석한 도현은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가 황비의 손을 잡고 나와 천진난만한 미소를 지으며 황좌에 앉아 있는 모습이 측은하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