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 귀국
매섭게 몰아치던 추위가 한풀 꺾이고 사람 키만큼 쌓인 눈이 조금씩 녹아내릴 때쯤 한양에서 전해진 급보가 조선 관저를 깊은 슬픔에 빠뜨렸다.
바로 세자의 장인이자 영중추부사인 강석기의 부음訃音이었다.
“그게 정말이냐?”
놀란 세자빈의 물음에, 소식을 전하기 위해 먼 길을 달려온 그녀의 친정집 집사가 침통한 얼굴로 대답했다.
“예. 갑자기 기침을 심하게 하시며 앓으시더니 보름 전에 그만…….”
“그럴 수가!”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충격에 세자빈은 가슴을 부여잡으며 그 자리에 쓰러졌다.
“부, 부인!”
“세자빈마마.”
연락을 받고 와 있던 도현은 세자빈을 부둥켜안고 어쩔 줄 몰라 하는 소현세자를 보고는 한쪽에 서 있는 궁인들에게 크게 소리쳤다.
“어서 의원을 불러오지 않고 뭣들 하고 있는 거야!”
“예, 옛.”
도현의 호통에 궁인들은 그때서야 정신을 차리고 허둥지둥 움직였다.
“형님, 일단 형수님을 안으로 옮기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래.”
소현세자가 직접 안아서 방으로 데려가려고 할 때 잠시 기절했던 세자빈이 다행스럽게도 정신을 차렸다.
“으음.”
“부인, 정신이 드시오?”
“저하.”
“그래, 나 여기 있소.”
소현세자가 손을 꼭 잡아 주자 세자빈은 서럽게 눈물을 흘렸다.
“흑흑. 아버님께서 그렇게 가시다니 믿을 수가 없습니다.”
“나도 그렇소. 얼마 전 사은사로 심양에 오셨을 때만 해도 정정하셨는데, 그런 일이 생기다니…….”
“형수님, 상심이 크시더라도 견뎌 내셔야 합니다.”
“항상 절 아끼고 걱정해 주셨는데 임종도 지키지 못하다니 너무 죄송스러워요. 흑흑흑.”
도현이 위로를 했지만 너무나도 큰 슬픔에 세자빈은 마음을 진정시키지 못했다.
그때 상궁 한 명이 의원을 데리고 오자 도현이 급히 말했다.
“세자빈께서 놀란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게 청심환이라도 드리게.”
“예.”
도현의 다그침에 의원은 약간 주눅이 든 얼굴로 세자빈의 상태를 살폈다.
여인의 몸인 데다 세자빈이라는 높은 지위에 함부로 손을 댈 수 없었던 의원은, 감히 진맥할 생각은 못 하고 일단 급한 대로 비상약으로 항상 가지고 다니는 청심환을 꺼내 상궁한테 건넸다.
그러자 상궁은 독이 있는지 확인해 볼 정신도 없이 얼른 청심환을 세자빈에게 먹였다.
약효가 있는지 얼마 있지 않아서 혈색이 약간 돌아왔다.
소현세자의 부축을 받으면서 힘겹게 몸을 일으킨 세자빈은 안절부절못한 얼굴로 서 있는 집사를 보며 말했다.
“장례는 다 치렀나?”
“작은마님께서 상주를 맡으셔서 잘 끝냈습니다.”
돌아가신 지 보름이나 지났기에 장례를 치른 것이 당연했지만, 아버지의 마지막 가는 모습마저 보지 못했다는 생각에 세자빈은 또다시 슬픔이 복받쳐 올랐다.
그 모습에 소현세자는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
“나 때문에 이런 큰 불효를 하게 되다니, 정말 부인 볼 면목이 없소.”
“아닙니다.”
괜찮다고 하지만 세자빈의 상심이 얼마나 클지 누구보다 잘 알았기에 소현세자는 착잡한 얼굴로 부인의 등을 쓰다듬어 줬다.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마음을 추스른 세자빈은 소현세자와 함께 안채로 들어갔다.
세자의 장인이라는 걸 떠나 우의정까지 지낸 아주 명망 높은 대신이었기에 강석기의 부음은 관저에 머물고 있는 관리들한테도 큰 슬픔이었다.
궁녀가 되지는 않았지만 도현의 식솔로 받아들여져 안채에서 시중을 들고 있는 소연이를 통해 이야기를 들었는지, 그가 들어가자 갓난아기를 안고 있던 장씨 부인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이야기를 했다.
“세자빈마마의 아버님께서 돌아가셨다고 하던데, 사실이에요?”
“후우. 그렇소. 충격이 컸는지 자리를 보존하고 누우셨다고 하오.”
한숨을 쉬며 도현이 해 주는 말에 장씨 부인은 남 일 같지 않은지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심양에 오셔서도 한 달에 한 번 편지를 주고받으실 정도로 남달리 사이가 좋은 부녀지간이었으니 그럴 수밖에요. 저러시다 병에 걸리시는 건 아닌지 걱정이에요.”
“그러기 전에 기운을 차릴 수 있도록 해야 되지 않겠소.”
“맞아요. 그런데 장례는 끝났다고 하지만 산소라도 가서 직접 보시면 조금 응어리가 풀리실 텐데, 어렵겠지요……?”
말을 꺼냈지만 볼모로 잡혀 있는 처지를 떠올린 장씨 부인은 끝을 흐렸다.
“흐음.”
부인의 이야기에 도현은 이 일을 계기로 소현세자 부부가 일시 귀국하는 것이 생각나 습관처럼 한쪽 팔로 턱을 쓰다듬었다.
자신의 존재 때문에 나비효과가 일어나 역사가 틀어지고 있지만 원래보다 섭정인 예친왕과 관계가 더 좋으니 잘만 하면 일시 귀국이 가능할 것 같았다.
그냥 말만 하는 거니까 손해 볼 것도 없고, 애처롭게 우는 세자빈의 모습에 그냥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는 생각에 도현은 결심을 굳혔다.
“잘 이야기해 줬소.”
“예?”
“형님 부부가 조선에 잠시 돌아가는 것 말이오.”
그때서야 무슨 말인지 알아들은 장씨 부인은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게 가능할까요?”
“어렵겠지만 형님 부부를 위해서 한번 노력해 볼 만한 가치는 있지 않겠소.”
언제나 바쁜 도현 대신 세자빈과 함께 어울리며 서로를 위로해 주는 일이 많았던 장씨 부인은 진심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잘됐으면 좋겠군요.”
“저들이 아무리 거칠고 예의에 무지한 오랑캐라고 해도 부모를 위하는 효심을 외면하지는 못할 테니, 좋은 결과가 있을 거요.”
“그렇게만 된다면 세자빈마마께서 정말 기뻐하실 겁니다.”
마치 자신의 일처럼 장씨 부인은 일이 잘되기를 간절히 바랬다.
시간을 끌 이유가 없었던 도현은 생각난 김에 그길로 칠현을 시켜 예친왕부에 방문해도 되는지 기별을 넣었다.
다행히 약속이 금방 잡혀 도현은 다음 날 아침 마차를 타고 예친왕부로 향했다.
권력을 한 손에 쥐고 흔드는 예친왕의 위치를 말해 주듯 왕부에는 황궁보다 오히려 더 대신들의 출입이 잦았고 거의 모든 업무가 여기서 이루어졌다.
그래서 백성들 사이에서는 예친왕부를 소황궁이라는 별칭으로 불렀다.
역모로 번질 수도 있을 만큼 엄청 불경스러운 소문이었지만 황궁에 있는 태황비는 일부러 모르는 척했다.
이처럼 황제의 생모인 태황비마저 눈치를 봐야 될 만큼 예친왕의 위세는 하늘을 찔렀다.
집사의 안내로 넓은 정원을 지나 집무실로 들어가자 고급스러운 탁자 앞에 앉아 뭔가를 잃고 있던 예친왕이 두루마리를 내려놓으며 그를 반겼다.
“어서 오게.”
변발을 한 머리를 뒤로 넘긴 예친왕은 섭정이 된 이후 더 자신감이 넘치는 모습이었다.
“갑자기 연락해 시간을 내 달라고 청해서 죄송합니다.”
“아닐세. 자, 일단 앉지.”
“네.”
두 사람이 자리에 앉자 집사가 재빨리 차를 가져왔는데 지난번처럼 특유의 향이 풍기는 인삼차였다.
“마음 같아서는 길게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보시다시피 일거리가 쌓여서 말이야. 그래, 하고 싶다는 말이 뭔가?”
탁자 한쪽에 놓인 두루마리 뭉치들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예친왕의 말에, 도현은 자세를 바로 하며 바로 본론을 꺼냈다.
“실은 어제 한양에서 세자빈마마의 아버지 되시는 강석기 공께서 돌아가셨다는 비보가 전해졌습니다.”
“저런!”
이야기를 들은 예친왕은 진심인지 몰라도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세자 부부의 상심이 크겠구먼.”
“예. 아프시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워낙 정정하셔서 설마 이렇게 돌아가실지는 모른 데다 임종을 지키지 못한 불효에 마음이 많이 아프신 모양입니다.”
“그렇겠지.”
고개를 끄덕인 예친왕은 탁자 한쪽에 있는 자개 상자를 열어 얼마 전 도현이 선물한 담배를 꺼내 곰방대에 집어넣고는 불을 붙였다.
“조만간 직접 만나 이야기를 하겠지만 내가 조의를 표한다고 전해 주게.”
“감사합니다.”
살짝 머리를 숙였다가 바로 한 도현은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이어 갔다.
“그래서 장례는 치르지 못했지만 저하와 세자빈마마께서 산소에 인사라도 드릴 수 있도록 두 분을 잠시 조선에 돌려보내 주실 수는 없겠습니까?”
“한양에 말인가?”
“예.”
“흐음.”
워낙 민감한 문제이다 보니까 순간 예친왕의 표정이 굳어졌다.
잠시 아무런 말없이 곰방대를 입에 물고 담배를 피우던 예친왕은 이내 고개를 들어 앞에 앉아 있는 도현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조선 조정의 뜻인가?”
“아닙니다. 전적으로 슬픔에 잠긴 세자 부부의 모습이 보기 딱해, 제가 어렵다는 걸 알면서도 이렇게 부탁을 드리는 겁니다.”
자칫 이 일이 양국의 외교 문제로 비화되는 걸 막기 위해 도현은 자신의 생각이라는 걸 강조했다.
능구렁이답게 그런 도현의 속마음을 짐작한 예친왕은 피식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고는 재떨이에 곰방대 끝을 탁탁 쳐서 담뱃재를 털어 내고는 입을 열었다.
“얼마 전 있었던 선황제 폐하의 장례식에서 조선이 보여 준 우의와 정성에 크게 감명을 받았소이다. 또, 다른 일도 아니고 부모가 돌아가신 일이니 당연히 가 봐야 되지 않겠소.”
의외로 쉽게 승낙을 해 주자 도현은 약간 놀란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럼 귀국을 허락해 주시는 겁니까?”
“그렇소. 단, 두 달 안에 다시 돌아와야 될 것이오.”
“여부가 있겠습니까. 어려운 부탁을 들어주시다니 정말 감사합니다.”
“이왕 가는 김에 봉림대군도 함께 귀국해서 조선 왕께 인사를 드리고 오시오.”
“저도 말입니까?”
“봉림대군도 한양을 떠난 지 벌써 몇 년이 지났으니 가족이 그리울 것 아니오. 그동안 명과의 전쟁에서 세운 공도 있으니 그거에 대한 포상이다 생각하고 함께 가서 회포를 풀고 오시오.”
뜻밖의 제안에 도현은 잠시 당황했지만 이내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저까지 생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출발 일정이 정해지면 알려 주시오.”
“예.”
섭정이 된 이후 국정을 도맡아서 책임지다 보니 바쁜 예친왕이었기에 용건이 끝난 도현은 오래 앉아서 대화를 나누지 못하고 바로 인사를 하고 집무실을 나왔다.
관저로 돌아온 도현이 일시 귀국 허락을 받았다는 걸 알리자 세자빈은 크게 기뻐했고, 소현세자도 그의 어깨를 두드려 주고는 역시 아우밖에 없다며 진심으로 고마워했다.
그날 오후 정식으로 일시 귀국을 허락하는 칙서에 황제를 상징하는 옥쇄가 선명히 찍혀 전달됐다.
세자빈의 슬픔을 안타까워하던 관저 식솔들은 한시라도 빨리 산소를 찾아가 볼 수 있게 즉시 귀국 준비를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세자 부부와 도현의 일시 귀국을 알리는 장계를 한양에 보냈다.
비록 금방 다시 돌아가야 했지만 소현세자 부부와 도현의 귀국은 조선 조정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탕!
장계를 서탁 위에 던지듯 내려놓은 인조는 앞에 엎드려 있는 대전 내관을 내려다보며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당장 우의정을 불러와라!”
“예.”
인조의 호통에 대전내관은 한달음에 우의정 김자점을 데려왔다.
희대의 간신 중 하나인 김자점은 인조반정을 일으킨 공신 중 하나로 눈치가 빠르고 욕심이 많은 인물이었다.
다른 사대부들과 달리 친청 주의자였는데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지 말고 청과 교류하며 이득을 취하자는 소현세자나 도현의 생각과 달리 청에 빌붙어 권력을 얻으려는 전형적인 기회주의자였다.
사사건건 하는 일에 반대하고 잔소리를 해 대는 다른 대신들과 다르게 입안의 혀처럼 구는 김자점을 총애해, 인조는 그를 몇 년 사이에 병조판서와 판의금부사를 거쳐 우의정에 임명하며 측근으로 삼았다.
나중에는 영의정까지 오르지만 거기에 만족하지 못하고 자신의 권력을 계속 이어 가기 위해서 인조의 후궁인 숙원 조씨와 공모해 소현세자를 죽이기까지 하는 간신배였다.
“찾으셨사옵니까, 전하.”
김자점이 들어와 머리를 조아리자 인조는 서탁 위에 놓여 있던 장계를 바닥에 내던지며 짜증을 냈다.
“세자와 봉림대군이 귀국한다는데, 자네도 알고 있나?”
“네. 오면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차분한 대답에 인조는 눈썹을 찡그리며 말했다.
“이 시점에서 갑자기 귀국을 허락하다니 청국 조정의 진의가 도대체 뭐야?”
필요 이상으로 예민하게 반응하는 모습에 김자점은 인조가 아들인 소현세자를 자신의 왕위를 위협하는 존재로 견제한다는 걸 알아차리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특별한 뜻은 없고 지난 문황제(홍타이지의 시호)의 장례 때 보여 준 조선의 호의에 답례를 하는 것 같습니다.”
“흥! 그러면 조공이나 줄여 줄 것이지 왜 원하지도 않는 일을 하는 건지.”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던 인조는 살짝 걱정스러운 얼굴로 김자점을 쳐다봤다.
“들리는 이야기에 새로 섭정이 된 예친왕과 세자가 친하다던데 혹시나 뭔가 술수를 꾸미려는 것 아닌가?”
“뭘 말씀이옵니까?”
“병자년 때도 날 볼모로 데려가려 했는데 그걸 원하는 것 아니냐 이 말이오!”
답답하다는 듯 인조는 버럭 화를 냈다.
그러자 김자점은 송구스럽다는 듯이 머리를 숙이며 이야기했다.
“이미 다 끝난 일인데 새삼스럽게 지금에 와서 그런 일을 벌이겠습니까? 심려하지 마시옵소서.”
“처음에는 세자를 박대하다가 어느새 후대하는 것이 수상하지 않다는 건가!”
“그것은 그동안 주상 전하께서 청국과 잘 지내시려고 노력한 걸 좋게 여겨 친절하게 돌봐 주는 걸 겁니다.”
“과연 그럴까?”
숙원 조씨가 옆에서 꾸준히 모함을 한 것이 효과가 있는지 인조는 좀처럼 의심을 풀지 않았다.
아버지가 아들을 의심하는 참으로 안타까운 상황이었지만, 약삭빠른 김자점은 자신과 사이가 좋지 않은 소현세자가 왕위를 이어받으면 여러 가지로 껄끄러웠기에 아닌 척하면서 슬쩍 인조의 신경을 건드렸다.
“그러지는 않겠지만 혹시라도 청국이 이상한 생각을 한다면 저뿐만 아니라 모든 신료들이 나서서 막을 것이옵니다.”
김자점은 자신의 충성심을 보이면서 은근슬쩍 청국이 인조를 폐하고 소현세자를 국왕으로 대신 세울 수 있다는 불안감을 심어 줬다.
아니나 다를까 인조는 낮게 침음성을 흘리며 딱딱하게 얼굴을 굳혔다.
“으음.”
그동안 숙원 조씨가 험담을 해도 설마하며 웃어넘기던 것이 소현세자와 도현의 일시 귀국을 계기로 의심이 확신으로 서서히 굳어져 갔다.
소식을 들은 신하들이 몇 년 동안 심양에서 고생한 소현세자 부부와 도현을 위해 대대적인 환영회를 벌이려고 했지만, 어려운 나라 살림과 죽은 강석기의 산소를 보러 오는 거니 요란을 떨지 말라며 일축했다.
한편 혹시라도 예친왕의 마음이 바뀌어 귀국을 막기라도 할까 봐 소현세자 부부와 도현은 서둘러 준비를 끝내고 심양을 떠났다.
얼마 전 태어난 갓난아이 때문에 부인 장씨가 함께하지 못하는 것이 아쉬웠지만, 시간을 거슬러 올라온 이후 처음으로 조선 땅에 간다는 생각에 도현은 마음이 설레었다.
드디어 눈보라를 헤치고 눈이 시리도록 푸른 압록강에 도착한 소현세자는 지난날 병자호란이 끝나고 볼모로 끌려가던 아픈 기억이 떠오르는지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형님,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십니까?”
뒷짐을 진 채 모래사장에 서서 바다로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던 소현세자는 옆으로 다가온 도현의 말에 고개를 돌렸다.
“강을 보니 예전 기억이 떠오르는구나.”
“처음 심양에 갈 때를 말씀하시는군요.”
“그래.”
다시 시선을 강 쪽으로 돌린 소현세자는 많은 감정이 뒤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강을 건너 황량한 만주 벌판을 가로질러 갈 때만 해도 생전 다시 조선 땅을 밟을 수 있을지 정말 절망스러웠는데, 이렇게 다시 압록강 앞에 서 있으니 감개무량하구나.”
“저도 그렇습니다.”
그렇게 둘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호위 책임을 맡은 신철 위사장이 옆으로 다가왔다.
“저하, 배가 준비됐습니다.”
신 위사장의 말에 시선을 돌리자 과연 제법 큰 배 세 척이 선착장에 들어와 있었다.
그러자 소현세자는 조금이라도 빨리 조선 땅을 밟고 싶은지 발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어서 가자꾸나.”
“예.”
잠시 뒤 소현세자 일행이 탄 배는 선착장을 출발해 반대편으로 천천히 나아갔다.
강이라고 하지만 폭이 상당히 넓고 아직 추위가 남아 있어 군데군데 제법 큰 얼음 덩어리가 떠다녔기에 뱃사공은 조심스럽게 배를 움직였다.
그렇게 얼마쯤 지났을까 마침내 의주가 눈에 들어왔다.
감개무량한 표정을 짓고 있는 소현세자와 함께 뱃전에 서서 조선 땅을 바라보고 있던 도현은 선착장에 어쩐 일로 사람들이 북적이는 걸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여보게, 사공.”
도현의 부름에 긴 작대기로 강바닥을 밀고 있던 늙은 사공이 얼른 허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예, 대군마님.”
“오늘 의주에 장場이라도 열리나?”
“오일장이 열리려면 아직 이틀은 더 있어야 됩니다요.”
“그럼 장날도 아닌데 무슨 일로 선착장에 사람이 저렇게 많이 모여 있는 겐가?”
의아한 듯 도현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힐끗 선착장 쪽을 쳐다본 사공은 미소 띤 얼굴로 이야기를 했다.
“저건 세자 저하와 대군마마께서 돌아오신다는 소문에 백성들이 환영을 해 드리려고 몰려온 겁니다.”
“그래?”
그러자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소현세자가 약간 놀란 얼굴로 말했다.
“그게 정말인가?”
“네. 새벽부터 여기 의주는 물론이고 주변 고을 백성들까지 두 분을 뵈려고 눈길을 마다하지 않고 찾아와 기다리는 걸 제가 똑똑히 봤습니다.”
“이런 고마울 데가…….”
자신들을 위한 환영 인파라는 말에 소현세자는 미안하면서도 감격스러운 표정을 지었고 도현도 뭔가 모를 오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사이 부지런히 움직인 배는 의주 쪽 선착장에 도착했다.
잔교가 설치되고 관복 위에 따뜻한 수달 가죽으로 만든 외투를 걸친 소현세자와 도현이 위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내려서자 주변을 가득 메우고 있던 백성들이 머리를 조아리며 큰 소리로 반겼다.
“흑흑. 어서 오십시오!”
“세자 저하, 대군마마, 오랑캐 땅에서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습니까.”
연이은 전란과 흉년으로 삶이 어려웠지만 백성들은 국왕인 인조를 원망할지 몰라도, 아비 대신 심양에 볼모로 끌려가고 거기서 고초를 겪고 있는 소현세자 부부와 도현에 대해서는 아주 호의적이었다.
복받쳐 오르는 마음에 환영 인파 대부분이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가여우신 세자빈마마를 어찌할꼬…….”
이미 강석기의 죽음에 대해서도 소문이 퍼졌는지 일부 백성들은 쓰개치마로 얼굴을 가린 세자빈을 보며 안타까운 시선을 보냈다.
백성들이 진심 어린 마음으로 반겨 주자 소현세자 일행도 이제야 고국에 돌아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영접을 나와 있던 의주부윤과 평안감사가 앞으로 와서 허리를 굽혔다.
“두 분의 귀국을 환영하옵니다.”
“고맙소. 이거 우리들 때문에 고생이 많소.”
소현세자의 말에 두 사람은 미래의 국왕에게 잘 보이려는지 연신 굽실거리며 말했다.
“아닙니다. 신하로서 당연히 해야 될 일입니다.”
“맞습니다. 부족하지만 의주 관아에 거처를 마련해 뒀으니 가시지요.”
“알겠소.”
의주부 소속 포졸들이 만들어 준 길을 따라 선착장을 벗어난 소현세자 일행은, 준비된 말과 가마를 타고 약간 떨어진 곳에 위치한 관아로 갔다.
시간이 늦었기에 의주에서 하룻밤을 머문 소현세자 일행은 발걸음을 재촉해 평양과 개성을 지나 한양으로 내려갔다.
중간에 생모인 인열왕후가 잠든 파주 장릉에 들러 잠시 참배를 하곤 다시 길을 떠났다.
어떻게 소문이 났는지 소현세자 일행이 가는 길마다 백성들이 몰려와 인산인해를 이루며 귀국을 환영했는데, 이런 이야기가 들릴수록 인조는 심기가 불편해졌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마치 백성들마저 자기 대신 소현이 왕위를 이어받길 바라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의주에서 한양으로 내려가는 길은 상당히 잘 정비되어 있어 불편함이 없었는데, 여기에는 웃지 못할 사연이 숨어 있었다.
이 시대의 길이 다 그렇듯 꼬불꼬불하고 비나 눈이 오면 쉽게 진창이 되기 마련이었지만, 매년 오가는 청국 사신들이 신고 있는 가죽신에 흙이 묻고 수레바퀴가 빠져 곤욕을 치른다고 투덜대자, 조정에서 부랴부랴 백성들을 동원해서 공사를 벌인 것이다.
가뜩이나 생활이 어려운 백성들을 강제로 데려다 청국 사신들을 위해 힘든 부역을 시키다니, 정말 씁쓸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처음 영접 나온 관리들에게 그 이야기를 듣고 도현은 입으로만 큰소리를 치고, 정작 청에 굽실대는 인조와 조정 대신들이 얼마나 한심스러웠는지 몰랐다.
아무튼 큰 사고 없이 한양으로 들어가는 마지막 관문인 임진강을 건넌 소현세자 일행은 무악재를 건너 돈화문에 도착했다.
여기서도 길 양쪽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나왔다.
하지만 인조의 지시로 의금부 포졸들이 소란을 피우지 못하도록 엄히 단속했기에 다른 곳처럼 요란하게 소현세자 부부와 도현을 반기지 못했다.
그래도 백성들은 일행이 지나갈 때마다 흙바닥에 엎드려 절을 하며 환영하는 마음을 표시했다.
임진왜란 때 경복궁이 불타 잿더미가 되는 바람에 임시로 인조가 머물고 있는 창경궁으로 곧바로 간 소현세자 일행은 양화당에 있던 왕을 알현했다.
“전하, 세자 저하 내외와 봉림대군 들었사옵니다.”
비단 보료 위에 비스듬히 앉아 있던 인조는 밖에서 들리는 대전 내관의 말에 심드렁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들라 하라.”
“예.”
대답과 함께 중요 신료들이 좌우에 모여 있는 가운데 미닫이문이 열리며 소현세자 부부와 도현이 예복을 입고 천천히 들어와 인조 앞에 섰다.
궁중 예법에 따라 세 번 큰절을 올린 뒤 소현세자가 대표로 인사를 여쭸다.
“아바마마, 그동안 강녕하셨사옵니까?”
“나라가 이렇게 어수선한데 내가 편할 리가 있겠느냐!”
“…….”
“넌 심양 생활이 편했는지 얼굴을 활짝 피었구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몇 년 만에 보는 아들과 며느리가 반갑지도 않은지 싸늘한 인조의 태도에 소현세자 부부는 크게 당황했다.
그건 모여 있는 신료들도 마찬가지였는데 민망하고 곤혹스러운 마음에 고개를 들지 못하고 인조의 눈치만 봤다.
그런 가운데 인조가 이렇게 나올 걸 짐작하고 있던 도현만 무덤덤한 얼굴을 했다.
어색한 분위기를 풀어 보려는 듯 영의정 심열沈悅이 나서며 말했다.
“겨울 끝자락이라고 하지만 그래도 아직은 길이 안 좋았을 텐데, 여기까지 오시느라 고생이 많았겠습니다.”
“영상 말대로 날이 풀리면 올 것이지. 뭐가 급하다고 청국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이렇게 쫄래쫄래 온 거냐?”
기가 막힌 소현세자가 굳은 얼굴로 가만히 있자 옆에 있던 도현이 행여 실수라도 할까 봐 대신 나섰다.
“강석기 공의 부음도 있었지만 지난 몇 년간 문안도 제대로 드리지 못한 불효를 조금이나마 씻을 수 있다는 생각에 힘든 길도 마다하지 않고 달려온 것이옵니다.”
유교를 신봉하는 조선에서는 효가 최고의 가치 중 하나였기에 그걸 다하기 위해 왔다고 하자, 인조의 표정이 다소 누그러졌고 대신들도 도현이 적절히 나서 준 것에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흐음. 그래.”
그러자 영의정 심열이 인조를 향해 입을 열었다.
“세자빈마마께서 멀리 심양에 계실 때 부친상을 당하시는 바람에 상심이 크실 테니, 강석기 공의 묘를 참배하게 하고 홀로 되신 모친을 위로해 드리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맞사옵니다.”
“윤허하여 주십시오.”
다른 신료들도 심열의 말에 동의하며 허락을 청하자 인조는 못마땅한 얼굴을 했다.
“세자빈의 사정은 딱하지만 함부로 움직일 수 있는 여염집 아낙이 아니지 않느냐!”
“그렇기는 하지만 전례가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사서를 보면 세자빈마마보다 더 지체 높으신 왕후와 대비께서도 친정 아비의 장례식장에 가셔서 곡을 하신 기록이 있사옵니다.”
재차 신하들이 청했지만 인조는 그 모습이 어쩐지 자신보다 소현세자를 더 위하고 두둔하는 것 같아, 괜한 고집을 피웠다.
“자고로 법과 예는 지키라고 있는 것인데 과거에 어긴 전례가 있다고 해도 과인까지 거기에 동참할 생각은 없네.”
예로부터 출가외인이라고 해서 친정에 상이 났어도 중궁전과 빈궁의 문상은 법으로 금지되어 있었다.
하지만 효를 중시하는 풍습에 따라 관례적으로 이런 일이 생기면 허용되어 왔는데, 인조가 뜬금없이 법을 내세워 그걸 막으려고 하니 이건 아무리 좋게 봐줘도 노인네의 심통이라고 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참다못한 소현세자가 항의하듯 말했다.
“심양에서 천리 길을 힘들게 왔는데 지척에 있는 사가와 장인의 산소를 가지 못하게 막다니, 너무하십니다.”
가뜩이나 소현세자에서 안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 인조는 바로 앞에 있던 서탁을 손바닥으로 세게 내려치며 언성을 높였다.
탕!
“그래서 지금 짐한테 반항이라도 하겠다는 거냐!”
“그런 것이 아니라…….”
“심양에 있더니 아래위도 없고 이제 내가 만만해 보이는 모양이구나.”
“아바마마.”
“듣기 싫다! 그냥 시키는 대로 따를 것이지 뭐가 이렇게 말이 많은 게야.”
순식간에 분위기는 차갑게 얼어붙었고 여기까지 와서 친정아버지 산소에 인사도 못 드리고 간다는 생각에 세자빈은 머리를 숙인 채 몰래 눈물을 흘렸다.
이대로 놔둬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한 도현이 작게 헛기침을 해서 주위를 환기시키고는 차분히 입을 열었다.
“아바마마, 제가 한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문상에 관한 거라면 내 생각은 변함이 없으니, 꺼내지 마라.”
인조가 선을 그었지만 도현은 그걸 살짝 무시하고 이야기를 했다.
“왕실에서부터 법을 지키는 모습을 보여 백성들에게 모범을 보여야 된다는 아바마마의 말씀은 저도 충분히 이해하고 옮은 일입니다.”
모두가 다 반대를 하는데 도현이 자신의 말을 거들고 나서자 인조는 살짝 의아하단 표정을 지으며 시선을 줬다.
“하지만 아예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면 모를까, 이미 청나라를 떠나올 때 섭정인 예친왕과 황제에게 세자빈마마의 부친이 돌아가셨다는 걸 알리고 문상을 한다는 이유로 일시 귀국을 허락받았는데, 산소를 찾아가 곡을 하지 않고 그냥 돌아간다면 청국 조정으로부터 신용을 잃게 될 것입니다. 이건 단지 이번 일뿐만 아니라 앞으로 아바마마께서 나라를 이끌어 가고 청과 외교를 하실 때 큰 부담이 될 게 분명하니, 사정을 잘 헤아려 다시 결정을 내려 주시옵소서.”
이야기가 길었지만 한마디로 청국에서 시비를 걸 수 있으니 그냥 문상을 허락해 달라는 것이다.
다른 일이라면 계속 고집을 피우겠지만 남한산성에서 굴욕을 당한 이후 청에 반감을 드러내면서도 은연중에 다시 쳐들어올까 봐 상당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던 인조의 안색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도현이 예전 기억을 통해 알고 있던 인조의 약점을 제대로 찌른 것이다.
인조가 동요하는 기색을 보이자 신료들은 기회라는 듯이 말을 쏟아 냈다.
“청국 조정에서 기껏 배려를 했는데 그걸 어긴다면 모욕을 당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사옵니다.”
“얼마 안 있으면 청국에서 사신이 올 텐데 봉림대군의 말씀처럼 그때 이걸 꼬투리 삼아 곤욕을 치를 수도 있사옵니다.”
“모든 것에는 예외라는 것이 있으니 이번 한 번은 그냥 넘어가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도현의 이야기에 마음이 흔들리던 인조는 곧 청국 사신이 온다는 말에 고집이 꺾였다.
실제로 이때 당시 인조가 가장 골치 아파 하는 것이 바로 매년 한 번씩 오는 청국 사신이었는데, 올 때마다 안하무인처럼 행동하고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피곤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자신이 섭정인 예친왕과 황제의 호의를 거절하고 문상을 막는다면 얼마나 시비를 걸어올지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렸다.
“으음.”
미간을 찌푸리며 잠시 고심하던 인조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문상을 허락했다.
“법에 어긋나는 일이지만 봉림대군과 여러 신료들이 청하고 청국과의 관계도 있으니, 이번 한 번만 특별히 허락하겠다.”
그러자 소현세자는 지아비로서 체면을 세울 수 있게 됐다는 생각에 얼굴을 활짝 펴며 머리를 숙였다.
“감사하옵니다.”
신료들도 입을 모아 결정을 반겼다.
“현명하신 판단이시옵니다.”
“하지만 법에 어긋나는 일이니 최대한 간소하고 소란스럽지 않도록 일을 처리해야 될 것이오.”
허락을 하면서도 마지막까지 조건을 다는 대범하지 않은 모습을 보였지만, 문상을 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것만도 감지덕지했기에 소현세자 부부와 신료들은 아무 말 없이 말을 따랐다.
“알겠사옵니다.”
그렇게 문상 문제가 일단락되자 소현세자는 심양을 떠날 때 받아 온 황제의 친서를 인조에게 건넸다.
친서에는 그다지 특별한 이야기가 없이 선황제의 장례 때 조선이 필요한 물품을 제때 보내 준 것에 대한 감사와 앞으로도 양국이 좋은 관계를 유지했으면 좋겠다는 의례적인 글이 적혀 있었다.
이제 여섯 살밖에 안 된 순치제가 이런 글을 쓸 수 없을 테니 분명 신하들 중 한 명이 대신 써서 보낸 것이리라.
건성으로 읽고 친서를 승지에게 넘겨준 인조는 피곤한 듯 한쪽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더 할 이야기가 없으면 그만 물러들 가거라.”
몇 년 만에 만나는 부자지간인데 살갑게 대해 주기는커녕 냉기만 도는 인조의 태도에, 소현세자는 야속한 마음이 들었지만 차마 입으로 꺼내지 못하고 인사를 했다.
“그럼 나중에 다시 찾아뵙겠사옵니다.”
양화당을 나온 소현세자 부부와 도현은 동궁전으로 향했다.
오랜 시간 주인 없이 비어 있던 동궁전이었지만 그동안 관리를 잘했는지 먼지 하나 없이 깨끗했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 말씀만 하십시오.”
“알겠네.”
차와 간단한 다과가 놓인 상을 내려놓고 상궁이 나가자 상석에 앉은 소현세자는 답답하다는 듯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꿈에도 그리던 고국에 돌아왔지만 어찌 된 것이 심양에서보다 더 답답한 마음이 드는구나.”
그러자 옆에 있던 세자빈도 시아버지인 인조에게 서운함을 표시했다.
“아무리 법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지만 예전부터 관습적으로 허용돼 오던 것인데, 갑자기 못하게 하시다니 너무하십니다.”
“많이 서운하셨지요.”
도현의 말에 세자빈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예전에는 안 그러셨는데 오늘 보니 전혀 다른 분을 뵙는 것 같았어요.”
“그만큼 숙원 조씨의 입김이 세졌다는 뜻이니 앞으로 한양에 계시는 동안 행여 꼬투리가 잡히지 않도록 조심하셔야 될 겁니다.”
심양에 있을 때부터 숙원 조씨에 대한 경고를 도현에게 계속 들어왔던 두 사람은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고는 무의적으로 목소리를 낮췄다.
“확실히 날 보는 아바마마의 눈빛에 경계심이 가득한 것이 심상치가 않더구나.”
“자신의 권력을 계속 이어 가려면 어떻게 해서든 형님을 세자 자리에서 끌어내려야 되니 점점 더 악랄한 수를 쓸 겁니다. 특히 그동안 숙원 조씨가 주인 행세를 해 온 대궐에서는 어디에 눈과 귀가 숨어 있을지 모르니 언행에 신경을 쓰십시오.”
한양에서마저 마음 놓고 지낼 수 없는 가여운 자신의 처지에 소현세자는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영명하신 아바마마이셨는데 한낱 후궁의 치마폭에 세상을 보는 눈이 흐려지셨다니 정말 안타깝구나.”
“이제 기력이 쇠잔하시어 국정을 올바로 돌보실 능력을 잃으셨다는 반증 아니겠어요. 그러시다면 형님께 왕위를 넘기시고 유유자적한 생활을 즐기시면 좋을 텐데, 왕관을 끝까지 놓지 않고 계시는 건 볼썽사나운 집착일 뿐입니다.”
자칫 대역 죄인으로 몰릴 수도 있는 위험한 발언에 소현세자 부부는 깜짝 놀라 당황한 얼굴로 주위를 살폈다.
“방금 네가 대궐 안에서 입을 조심하고 말해 놓고 누가 듣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거냐?”
자신을 걱정하는 소현세자의 모습에 도현은 빙긋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칠현이와 믿을 수 있는 자들로 주위를 지키게 했으니 너무 염려 마십시오. 설마하니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함부로 꺼내겠습니까?”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아무튼 너도 한양에서는 자중하여라.”
“예.”
“하마터면 여기까지 와서 문상도 못 하고 그냥 돌아갈 뻔했는데, 네가 나서 준 덕분에 세자빈한테 겨우 체면을 세울 수 있게 됐구나. 정말 고맙다.”
“뭘요. 그저 말 몇 마디 거든 것밖에 없는데요.”
“그래도 네가 아니었으면 안 됐을 거야.”
소현세자에 이어 세자빈도 웃는 낯으로 말했다.
“대군 덕분에 아버님 영전에 인사라도 드릴 수 있게 되어 다행입니다.”
“형수님까지…… 에이, 왜 이러세요?”
도현은 쑥스러운 듯 볼을 긁적이고 서둘러 화제를 전환했다.
“한양까지 급히 오느라 두 분께서도 피곤하실 텐데 얼른 쉬십시오. 저도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아, 그래.”
“내일 뵈어요.”
세자 부부의 인사를 뒤로하고 도현은 동궁전을 나와 심양으로 가기 전, 봉림대군의 처소였던 전각으로 향했다.
도현이 알고 있는 곳은 심양의 관저밖에 없었기 때문에 넓은 궁에서 길이라도 잃으면 어떡하나 걱정했지만 다행스럽게도 칠현이 자연스럽게 옆에 따라붙어 안내해 주었다.
대전이나 동궁전에서 살짝 떨어진 곳에 지어져, 호젓한 멋을 뽐내고 있는 전각을 앞에 두고 도현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전각 뒤편에는 소나무가 병풍처럼 가지를 뻗고 있어 사시사철 푸른 뾰족한 잎이 바람에 살랑거릴 때마다 솔향이 기분 좋게 풍겨 왔다.
화려하거나 기품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청렴한 선비가 마음을 수양하며 책을 읽을 법한 서당 또는 아담한 정자 같은 분위기였다.
실제 봉림대군은 우수한 수재였던 소현세자의 그림자에 가려 그다지 눈에 띄지 않고 얌전한 이미지였다고 하는데, 집도 주인의 성향을 따라가는지 그에 딱 어울리는 느낌이라고 도현은 생각했다.
“왜 그러십니까?”
앞마당에 서서 멍하니 있는 도현의 모습이 이상한지 칠현이 고개를 갸웃하며 묻자, 그는 꿈에서 깨어난 것 같은 얼굴로 살짝 눈을 치뜨더니 이내 머리를 흔들었다.
“아무것도 아냐. 안으로 들어가자.”
“예.”
도현이 전각 안으로 들어서자 시중을 들기 위해 미리 와 있던 궁녀며 내시 들이 그가 지나칠 때마다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반질반질하게 잘 닦인 마룻바닥을 지나 도현이 큰 방 앞에 서자 좌우로 대기해 있던 궁녀들이 소리 없이 장지문을 열어 주었다.
안으로 한 발 들어서면서 방에 배여 있던 익숙한 향을 맡는 순간, 긴장해 있던 어깨에서 힘이 스르륵 빠져나갔다.
금실과 청실로 수를 놓은 비단 방석에 한쪽 팔을 괼 수 있도록 옆에 놓여 있는 목침 그리고 옻칠을 한 탁자 위엔 벼루와 붓을 비롯한 문방사우가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었다.
“궁을 떠나신 이후엔 분부대로 환기를 하고 먼지를 치우기만 했을 뿐, 다른 것은 모두 그대로이옵니다.”
“분부대로?”
“예. 심양으로 가시는 당일 아침에, 반드시 돌아올 테니 정리 같은 건 할 필요 없다고 하셨다던데요.”
자기가 한 말인데 벌써 까먹으셨습니까, 하는 칠현의 눈초리에 도현은 고개를 돌리고 방 안을 둘러보았다.
“아, 그랬었지. 이제 기억이 나는군.”
이제야 왜 그런 기묘한 느낌이 들었는지 알겠다.
청소는 거르지 않고 꼬박꼬박했는지 바닥이며 창틀은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했지만, 자세히 둘러보면 마치 방금 전까지 누군가가 생활을 하다가 잠시 외출한 것 같은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떠나기 직전까지 읽고 있던 것인 듯, 탁자 위에는 책이 한 권 펼쳐진 채로 있었는데 그 부분만 햇빛에 바래 노랗게 변해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어쩌면 이 몸의 주인인 봉림대군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강한 사람이었을지도 모르겠다고 도현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심양으로 가는 것이 볼모로 잡혀 가는 것임은 그도 알고 있었을 터.
형인 소현세자는 왕위를 이을 사람이기에 청나라에서도 언젠가는 돌려보내 줘야 하지만 둘째인 봉림대군은 다르다.
어쩌면 한평생 심양에 갇혀, 조선으로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어찌 그라고 몰랐으랴.
하지만 반드시 돌아온다고 했다.
방 안의 물품들을 그대로 놔두라고 했던 건, 봉림대군의 그런 의지가 강하게 나타난 것이다.
만약 세간의 이미지대로 마냥 유약하고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일찌감치 손을 들고 자신의 운명에 순응했을 텐데, 그는 포기하지 않으려고 했다.
어지간히 마음의 심지가 굳지 않으면 그런 생각은 못 하겠지.
도현은 어쩐지 자꾸만 웃음이 터지려고 해 손으로 입을 가렸다.
“마마?”
“아, 아무것도 아니다. 이제 그만 쉬어야겠으니 너도 물러가 보거라.”
“예.”
손을 살짝 흔들어 칠현을 물린 도현은 예전에 봉림대군이 항상 앉았을 자리에 양반다리를 하고,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다음 날 해가 뜨자마자 소현세자 부부는 인조에게 문안 인사를 하고 바로 창경궁을 나서 도성 밖에 있는 친정아버지의 산소를 찾아갔다.
원래대로라면 성묘는 고사하고 귀국해 있는 동안 인조가 문안 인사조차 제대로 받지 않았지만, 도현에 의해 역사가 틀어진 것이다.
소현세자 부부와 아침 일찍 문안 인사를 드린 도현은 딱히 할 일이 없었기에 처소로 돌아와 책이나 읽고 있었다.
“마마, 부르셨사옵니까.”
귀국 행렬을 호위하기 위해 따라온 김덕술과 박태철이 방 안에 들어와 무릎을 꿇고 앉자 도현은 읽고 있던 책을 덮으며 고개를 들었다.
“두 사람 다 한양에 집이 있다고 들었는데, 식구들은 만나 봤나?”
“아직 가 보지 못했습니다.”
“저런. 여기까지 왔는데 그럼 쓰나. 오늘이라도 찾아가 보게.”
“하지만 마마를 호종하려면…….”
가족을 보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맡은 임무 때문에 망설이자 도현은 정색을 하며 말했다.
“심양이 아니라 조선 땅인데 나한테 위해를 가할 이가 어디 있겠나? 그리고 대궐에는 내금위 위사들이 철통같이 경계를 펼치고 있으니 날 나쁜 상전으로 만들지 말고 어서 다녀오게.”
그러면서 도현이 손짓을 하자 옆에 시립해 있던 칠현이 비단 주머니를 하나씩 나눠 줬다.
“그건 약소하지만 내가 주는 선물이니까 가지고 가서 유용하게 쓰도록 하게. 그리고 갔다가 바로 오지 말고 한 사흘 정도 푹 쉬고 와, 알겠나?”
일부러 불러서 가족과 만날 시간을 주고 이렇게 돈까지 챙겨 주는 도현의 자상함과 배려에 두 사람은 감격한 얼굴로 머리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마마.”
“자, 난 할 말 다 했으니까. 나가 봐.”
“예.”
방을 나서는 위사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있자니, 옆에서 칠현이 샐쭉하게 웃으면서 말을 걸었다.
“마마, 멋지시네요. 저 위사들, 모르긴 해도 아마 가족과 만나선 대군마마 칭찬밖에 안 할 겁니다.”
“또 쓸데없는 소리 한다.”
도현은 혀를 차면서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내가 알아보라고 한 건은 어떻게 됐어?”
그러자 칠현은 얼굴에서 웃음을 지우고는 주위를 이리저리 둘러보며 가까이 다가와 앉았다.
“말씀하신 대로 창경궁은 숙원 조씨가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그럴 거라고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사실을 확인하자 도현은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며 침음성을 흘렸다.
“으음.”
“중전마마께서 계시지만 숙원 조씨의 지시가 더 먹힌다니 말 다 한 것 아니겠습니까? 오죽하면 중궁전에 있는 나인과 상궁 들마저 숙원 조씨의 수족이라, 중전마마께서 제대로 말 한마디 마음 편히 못하신다고 합니다.”
“심각하군.”
실제로도 계비로 들어온 장렬왕후는 숙원 조씨의 계략에 인조가 아무런 관심을 주지 않아, 혼자 쓸쓸히 중궁전에서 폐위된 것이나 마찬가지인 생활을 했다.
“그리고 숙원 조씨 주위에 많은 신하들이 드나들지만 최근에는 우의정 김자점과 자주 만난다고 합니다.”
“김자점이?”
“예.”
익숙한 이름에 도현은 살짝 인상을 구겼다.
“하여튼 끼리끼리 잘도 어울리는군.”
“네?”
“아무것도 아니야. 그럼 동궁과 여기에도 숙원 조씨의 눈이 심어져 있겠군.”
“그렇다고 봐야지요.”
손가락 끝으로 서탁을 톡톡 두드리면서 한참 뭔가를 고심하던 도현은 이내 다시 고개를 들며 말했다.
“봉황상단 한양 지부장인 서 행수와 연락이 되나?”
“아직 해 보지는 않았지만 방법은 알고 있습니다.”
“좋아. 그러면 서 행수의 도움을 받아서 형님과 나한테 배치된 궁인들에 대해 샅샅이 조사를 해 봐.”
“알겠습니다.”
대답을 들은 도현이 그만 나가 보라는 듯이 한쪽 손을 살짝 내젓자 칠현은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그 시각 인조는 대낮인데도 불구하고 정사는 돌보지 않고 후궁에 있는 숙원 조씨의 처소에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문상을 허락해 주지 않았다고 감히 아버지께 눈을 똑바로 뜨고 대들다니, 세자 저하도 너무하시네요.”
숙원 조씨의 무릎을 베고 누워 한가로이 입에 넣어 주는 곶감을 우물거리고 있던 인조는 말 잘 듣는 아이처럼 고개를 끄덕거렸다.
“청나라에 오래 가 있더니 못된 버릇만 배워서 돌아온 것 같더군. 예전에는 말 잘 듣고 착한 녀석이었는데 말이야.”
“원래 환경이 사람을 만든다잖아요.”
“흐음, 그런가?”
“그럼요.”
그러면서 조씨는 배시시 웃으며 얼굴을 들이밀었다.
“저도 전하 곁에서 사랑을 받고 사니 전보다 더 예뻐지지 않았습니까.”
“하하! 그래, 그래.”
애교스러운 조씨의 행동에 인조가 기분 좋게 너털웃음을 터트리는데, 거기에 초를 치듯이 또 조씨가 말했다.
“그리고 봉림대군도 좀 그랬어요. 말은 빙빙 돌렸지만 결국 청국을 내세워서 전하를 협박한 것이나 다름없지 않습니까. 제가 그때 옆에 있진 않았지만 나중에 듣고 어찌나 분통이 터지던지.”
“그놈도 세자랑 한통속이야! 못 보던 새에 몰라보게 달라져선.”
“저잣거리에는 이참에 전하께서 왕위를 양위하시고 그만 물러나셔야 한다고 숙덕이는 자들도 많다 합니다.”
“뭐야! 대체 어떤 놈이 그래!”
“고정하셔요, 전하. 그저 소문이 그렇다는 겁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천것들이 그저 가볍게 입을 놀리는 것뿐이잖아요. 그런 것에 휘둘리시면 아니 됩니다.”
“고얀지고!”
그래도 화를 참지 못하고 부들부들 떠는 인조의 손을 조씨가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송구합니다, 전하. 제가 괜한 말씀을 드린 것 같아 마음이 아파요.”
“아니다, 어찌 네 잘못이겠느냐. 어디서건 간신배와 무뢰배가 넘쳐나는데, 직언을 해 주는 사람은 너밖에 없구나.”
인조가 조씨의 손등을 토닥거리며 말하는데 바깥에서 움직이는 사람 기척이 나더니, 측근이라고 할 수 있는 대전 내관이 조심스럽게 고했다.
“전하, 대전에 조정대신들이 모두 모여서 기다리고 있사옵니다.”
매일 정기적으로 행해지는 국사.
정승, 판서 등 높은 직책을 담당하고 있는 관리들이 모여 나라의 일을 논의하는, 빼먹을 수 없는 왕의 업무 중 하나다.
하지만 마침 심기가 불편해진 인조는 조씨의 무릎에 도로 머리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오늘은 내가 몸이 안 좋으니 나가지 못한다고 일러라.”
“하, 하오나…….”
“어허. 내 말을 못 듣겠단 것이냐?”
신경질 섞인 인조의 역정에 내관은 차마 말대꾸조차 하지 못하고 조용히 물러났다.
“전하,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상관없다. 어차피 또 시시콜콜 잔소리나 늘어놓을 게 뻔해. 그보다 너랑 이렇게 둘만의 시간을 보내는 게 더 좋구나.”
그렇게 말한 인조는 뽀얗게 분칠한 조씨의 뺨을 쓰다듬었다.
“너는 나날이 갈수록 더 아름다워지는구나. 피부도 보드라운 것이 꼭 어린 소녀 같아.”
“그야 전하의 사랑을 듬뿍 받아서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허허. 얼마 전에 보낸 경대는 잘 받았느냐? 한양에서 제일가는 장인을 불러다 특별히 주문한 것이다만.”
“네에. 오늘 아침에도 단장할 때 썼지요. 반짝거리는 자개가 너무 예뻐서 쓰기가 아까울 정도예요.”
“기껏 선물한 것인데 안 쓰면 아깝지. 다음번엔 내가 예쁜 옥가락지를 하나 선물해 주마.”
“아이, 좋아라!”
조씨는 인조의 품에 쏙 안겨서 뺨을 비비적거렸다.
“전하, 오늘 날씨도 맑으니 이따가 저랑 함께 후원을 산책해요.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서 향이 무척 좋답니다.”
“하하, 내가 언제 네 부탁을 거절한 적이 있었더냐.”
“그럼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바로 옷을 갈아입고 나가겠습니다.”
“무슨 옷?”
“전하께서 좋아하시는 연한 쪽빛으로 새 옷을 맞췄거든요. 그걸 꼭 보여 드리고 싶어서요. 사실 옥 노리개까지 다 갖추고 싶었지만 제가 맘에 들어 한 건 너무 비싸서…….”
조씨가 머뭇거리며 입을 삐죽거리자 인조가 저런, 하고 눈썹을 치켜 올렸다.
“그럼 안 돼지. 그 옥 노리개도 내가 사 주마. 당장 상인을 불러와서 몸에 걸치도록 해. 그리고 함께 산책을 했다가 다과를 먹는 게 좋겠군.”
“전하, 감사합니다.”
감격한 얼굴로 조씨가 허리를 숙여 인사하자 인조는 됐다는 듯 손을 흔들었다.
“뭘 이런 걸 가지고 그러느냐. 자, 얼른 예쁘게 차려입고 오도록 해라.”
“네에.”
날듯이 사뿐사뿐 걸어서 방을 나온 조씨는 해맑게 웃고 있던 얼굴 표정을 싹 바꿔 궁녀들을 차가운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뭐하느냐? 전하께서 후원으로 행차하신다니 얼른 준비하지 않고.”
“예, 마마.”
궁녀들이 재빨리 움직여 사방으로 흩어지자 조씨는 득의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전하께선 완전히 내 손아귀에 있어.’
설령 세자나 봉림대군이라 해도 지금 왕위에 앉아 있는 건 인조다.
그를 등에 업은 한 조씨가 서 있는 발판은 누구보다도 든든한 것이었다.
지금 누리고 있는 영화를 계속 이어 가기 위해서라도 걸림돌이 되는 소현세자는 제거되어야 했다.
한양까지 와서 계속 궁궐 안에서만 처박혀 있을 수 없었던 도현은 처갓집인 전 우의정 장유의 집을 방문한다는 핑계를 대고 밖으로 나왔다.
소현세자 부부와 달리 도현은 아직까지 인조와 숙원 조씨의 관심 밖이었기에 외출은 의외로 쉽게 허락됐다.
장인인 전 우의정 장유는 몇 년 전 세상을 떠났지만 장모와 처남인 장선징이 한양 집을 지키고 있었다.
도현이 저택 앞에 도착하자 미리 연락을 받은 처남이 의관을 갖추고 마중을 나와 있었다.
“대군마마, 어서 오십시오.”
당연히 도현은 처남인 장선징의 얼굴을 몰랐지만 대충 감으로 제일 앞에 갓을 쓰고 서 있는 선비한테 걸어가 반갑게 인사를 했다.
“반갑네, 처남.”
수염을 길러 원래 나이보다 더 들어 보이는 장선징은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어머님은 조금 편찮으셔서 안에 계십니다.”
“저런, 많이 아프신가?”
놀란 표정으로 도현이 묻자 장선징은 손을 살짝 내저으며 대답했다.
“심한 건 아니고 고뿔(감기)에 걸리셨습니다.”
“그래? 그럼 내가 괜히 찾아온 건가. 몸도 편찮으신데…….”
“아닙니다. 대군마마께서 도착하시기를 아침부터 기다리고 계셨는데요.”
웃으면서 장선징이 안채로 그를 안내했다.
“어머님, 저 선징입니다. 대군마마께서 오셨습니다.”
장지문 바깥에서 먼저 그렇게 고한 장선징이 도현과 함께 방 안으로 들어서자, 중년 부인이 두툼한 이불을 덮고 누워 있는 모습이 보였다.
“아, 괜찮습니다. 편하게 누워 계십시오.”
“그래도 어찌…….”
도현이 애써 만류했지만 장모는 머리를 흔들고 고집스럽게 일어나 자리에 앉았다.
“대군마마께서 직접 오셨는데 어떻게 제가 누워 있겠습니까.”
가끔씩 기침을 하는 것 외엔 전혀 병마의 기색을 엿볼 수 없는 또렷한 목소리로 장모가 말했다.
비록 비녀를 꽂아 틀어 올린 머리카락에 조금씩 흰 머리가 섞이긴 했으나 여성스러운 이목구비에 곱게 앉은 주름살만이 나이를 말해 주었을 뿐, 명망 있는 사대부 집안의 안주인답게 당차면서도 기품 있는 분위기가 몸에 자연스럽게 배어 있었다.
장씨 부인도 좀 더 나이가 들면 이런 모습이 될까, 생각하면서 도현이 잠시 생각에 빠진 사이 재빨리 흐트러진 귀밑머리를 정돈한 장모가 앉으라며 자리를 권했다.
“고뿔에 걸리셨다 하던데, 몸은 좀 어떠십니까?”
“걱정하실 정도로 심한 건 아닙니다. 그저 나이가 드니 회복이 좀 더딘 것뿐이지요.”
“곧 봄이라고 해도 아직 바람이 차니 조심하셔야 합니다.”
“예에.”
도현의 걱정 어린 말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긴 했어도 눈초리엔 살짝 불만스러운 기운이 섞여 있는 게 눈에 띄었다.
가장인 장유가 살아 있을 적엔 집안의 대소사를 완벽하게 처리하며 일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내조한 현모양처로 유명했고, 그가 타계한 뒤 장선징이 가장 자리를 물려받고 나서는 안채의 큰마님이라 불리며 여전히 장씨 집안의 든든한 어른 역할을 하고 있으니 만큼 방에만 갇혀 있는 게 사뭇 지루하고 답답한 모양이었다.
“제가 마땅히 나서서 대군마마를 맞이해야 하는데 하필이면 이럴 때 고뿔에 걸리는 바람에…… 죄송하기 짝이 없습니다.”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가족인데 굳이 그런 예를 차리실 필요는 없습니다.”
“아뇨, 가족이니 더욱 예를 철저히 지켜야 하는 법입니다. 선징아.”
“네, 어머님.”
“네가 대군마마를 잘 모셔야 한다. 알겠느냐?”
“아무렴요.”
자식 훈육을 엄하게 하는 어머니 밑에서 자라 이 정도 엄포는 아무렇지도 않은지, 긴장하는 기색도 없이 장선징이 웃는 낯으로 답했다.
그런 두 사람 사이에서 어쩔 줄 몰라 하던 도현은 크흠 헛기침을 하고 슬쩍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인사도 드렸으니,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편찮으신 분을 괜히 귀찮게 할 수는 없지요.”
“그리하시지요. 참, 오늘 하룻밤 묵고 가신다 했던가요?”
“아, 예.”
“선징아, 안채에 있는 동쪽 방이 제일 크고 볕이…….”
“잘 들지요. 어머님께서 그리 말씀하실 줄 알고 미리 준비해 놨습니다.”
웃으면서 고개를 숙여 인사한 장선징은 도현의 등 뒤로 장지문을 닫고 죄송하다며 쑥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어머님께서 여간 깐깐하신 분이셔야죠. 마마께서 오랜만에 저희 집에 들르셨으니 이것저것 챙겨 드리고 싶으신 게 많은가 봅니다.”
“환대를 해 주시니 나야 감사할 따름이지.”
눈앞에서 극진한 대접을 받으려니 조금 창피하긴 하지만 기분이 나쁜 건 아니었다.
“자, 그럼 내가 쓸 동쪽 방이 어떤지 궁금하네만.”
“이쪽으로 오시죠.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별채로 걸어가면서 처남이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말씀하신 대로 사람이 와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고맙네, 처남.”
“아닙니다. 대군마마를 도와 드리는 것이 제 누님을 위한 일이지 않습니까.”
도현은 담담히 말하는 처남의 어깨를 살짝 두드려 줬다.
안채와 바로 붙어 선 별채는 사람 어깨 높이밖에 안 오는 낮은 담으로 구분되어 있었는데, 작은 정원을 끼고 열 칸짜리 건물이 고풍스럽게 서 있는 것이 마치 한 폭의 수묵화 같았다.
“들어가십시오.”
“그래.”
처남과 헤어져 방 안으로 들어가자 폭이 좁은 갓을 쓴 중인 한 명이 앉아 있다가 도현을 보고는 벌떡 일어나 허리를 숙였다.
“대군마마.”
“서 행수, 아니, 이제 지부장이라고 불러야지. 아무튼 오랜만이군.”
반갑게 도현이 말하자 서상수는 황송하다는 듯이 연신 허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그냥 편하실 대로 불러 주십시오.”
“그래도 가진 직책이 있는데 그럼 안 되지. 자, 일단 자리에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세.”
“네.”
무릎을 꿇고 앉은 서 지부장을 보며 도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요즘 장사는 잘되나?”
“나라 사정이 어렵지만 저희가 취급하는 품목들은 주로 그런 것에 영향을 덜 받는 사대부나 부유층 들이 쓰는 것들이라 나날이 매상이 오르는 중이고, 최근 취급하기 시작한 남초로도 꽤 많은 이윤을 거둬들이고 있습니다.”
실제로 한양 지부는 만들어진 지 일 년 만에 매출과 순이익이 예상보다 두 배나 초과하는 성과를 냈다.
여기에는 남초 거래가 큰 기여를 했지만 기존 품목들도 주 소비 계층인 대가 댁 부인들을 적절히 파고든 서 지부장의 수완에 꾸준히 상승세를 기록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자부심이 가득 담긴 서 지부장의 설명에 도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기존 상인들의 견제를 이겨 내고 단기간에 그런 성과를 올리다니 정말 대단하군.”
“다 대군마마와 심양에 계신 장 총관님이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해 주신 덕분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현장에 있는 자네와 직원들이 제대로 일을 못 해낸다면 다 쓸모없었을 것 아닌가. 앞으로도 지금처럼만 해 주게.”
상단의 실질적인 주인이자 신분상으로도 하늘처럼 높은 왕족인 도현이 자신의 노력을 알아주자, 서 지부장은 약간 상기된 얼굴로 머리를 숙였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다과상이 들어가면 혹시라도 비밀 만남을 다른 사람들이 눈치챌 수 있기에 처남이 차 대신 미리 준비해 놓은 듯한 술병을 들어 서 지부장의 잔에 따라 준 도현은 아까와 달리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따로 지시한 건 어떻게 됐나?”
술은 받았지만 감히 마실 생각을 못 하고 잔을 상에 내려 둔 서 지부장은 덩달아 정색을 하고는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아직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지목하신 대신들의 집에서 일하는 일꾼 몇몇을 은밀히 포섭해 어느 정도 움직임을 파악할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시간이 얼마 없을 텐데도 수고가 많았군. 그래, 특이 사항은 없나?”
“얼마 전에 우의정 김자점 대감의 집사가 저희 가게에서 고급 비단 쉰 필을 구입한 적이 있는데, 그걸 모두 숙원 조씨의 사가에 보냈습니다.”
“흐음.”
칠현에 이어서 서 지부장까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걸 보면 숙원 조씨와 김자점이 서로 손을 잡기 시작한 것이 확실했다.
잠시 입을 다문 채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며 도현이 잔을 비우자 서 지부장이 얼른 다시 술을 채웠다.
그렇게 얼마쯤 지났을까 도현은 시선을 들어 앞에 있는 서 지부장을 보며 말했다.
“돈이 얼마가 들어가도 좋으니까 앞으로는 김자점과 숙원 조씨 주변에 간자를 더 심어서 둘이 뭘 하고 다니는지 하나도 빼놓지 않고 다 알아낼 수 있도록 해야 해. 알겠나?”
심각한 도현의 표정에 서 지부장은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걸 본능적으로 느끼고는 자신도 모르게 바짝 마른 입술을 혀로 살며시 축이며 머리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이건 대군마마 거처에 배치된 궁인들에 대한 자료입니다.”
여러 번 접힌 종이를 건네받은 도현은 그 자리에서 펼쳐 내용을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예상대로 심양에서 함께 온 수행원을 제외하고 자신이 머무는 전각에 배치된 궁인 열 명 전부가 숙원 조씨와 연결된 자들이었다.
한 명 한 명 꼼꼼하게 신상 내력을 살피던 도현은 뭘 봤는지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들었다.
“서 지부장.”
“예.”
“여기 쓰인 걸 보면 내관 김남생의 가족이 한양에 산다는데, 맞나?”
도현의 지시라 서 지부장이 직접 챙기며 자세히 조사를 했기에 그는 머뭇거림 없이 바로 대답했다.
“네. 부모와 여동생 한 명이 낙산 근처에 살고 있습니다.”
“낙산?”
처음 듣는 지명이라 도현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서 지부장이 얼른 보충 설명을 해 줬다.
“동쪽 편에 위치한 산인데 궁궐에 우유를 공급하는 유우소가 있습지요.”
“아! 이제 생각이 나는군.”
지금의 종로구와 동대문구, 성복구에 걸쳐 있는 낙산은 예로부터 산세가 좋아 유명 정자들이 많이 세워져 있었다.
“형편은 좀 어때?”
“아버지가 예전에 마포나루에서 일하다가 짐에 깔려 크게 다치는 바람에 한쪽 다리를 절어 일을 못하는 상황이라, 김 내관이 받는 봉록으로 먹고사는 모양입니다.”
이 시대의 궁인이라면 나름 전문 직종이라 일반 평민에 비해서 많은 돈을 받았지만 호의호식할 만큼은 아니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어머니가 천식에 걸려 걱정이 큰 것 같았습니다.”
“그렇단 말이지.”
한쪽 손으로 턱을 매만지던 도현은 서 지부장은 가까이 불러 낮은 목소리로 뭔가를 지시했다.
중간중간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를 듣던 서 지부장은 얼마 뒤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저택을 빠져나갔다.
마음 같아서는 임경업 장군도 만나고 싶었지만, 산동 반도에 상륙하며 청에 적극 협력했다는 이유로 관직을 박탈당하고 한양에 올라와 근신하고 있는 처지라 괜히 구설수에 오를 수도 있고, 둘 다 쉽게 움직이기 힘들었기에 그건 다음으로 기약했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극진하게 대접받으며 하룻밤을 푹 쉰 도현은 다음 날 오후 다시 궁궐로 돌아갔다.
그 시각 낙산 아래 위치한 김 내관의 초가집에는 낯선 사내들이 찾아왔다.
“계십니까?”
그러자 이제 스무 살이 갓 넘어 보이는 젊은 여자가 부엌에서 일을 하고 있었는지 앞치마에 젖은 손을 닦으면서 나왔다.
“누구세요?”
“여기가 김 내관님 댁이 맞지요?”
대번에 상대가 김남생의 여동생인 복녀라는 걸 알아차린 서 지부장은 얼굴 가득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뒤에 있는 일꾼들에게 손짓을 했다.
“물건들을 안에 들여다 놓게.”
“예, 지부장님.”
머리를 숙이며 대답한 일꾼 두 명은 소달구지에 실려 있던 물건들을 하나씩 등에 지고 집 안으로 날랐다.
쌀이며 옷감 같은 물건들이 차례차례 쌓이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란 복녀는 서 지부장의 소맷자락을 붙잡고 당황스러운 듯이 말했다.
“자, 잠깐만요. 대체 이게 무슨 일이에요?”
“아, 걱정 마십시오.”
서 지부장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복녀를 바라보았다.
“우린 대군마마께서 보내신 사람들입니다.”
“대군마마요?”
더더욱 영문 모를 소리에 복녀가 목소리를 높였다.
오라비가 궁궐에서 일하고 있긴 하지만 그래 봤자 수많은 궁녀과 내관 들 중 하나일 뿐이다.
그런데 대군마마 같은 높으신 분이 갑자기 사람을 보내 왔으니 어리둥절할 따름이었다.
“봉림대군 마마께서 우연히 김 내관 댁의 사정이 어렵다는 걸 아시고는, 저희를 시켜 한동안 생활에 어려움이 없도록 식량이나 옷가지 같은 것들을 보내 주라 명하셨습니다.”
“그, 그건 정말 황송한 일입니다만…….”
어머니가 천식에 걸리는 바람에 갑자기 집안 사정이 어려워진 건 사실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 주일 전에 딱 한 번 의원에게 보였을 뿐, 진찰비와 약재값을 대기가 버거워 탕약도 제대로 올리기 힘든 형편이라 서 지부장이 보내 준 물품들은 그야말로 호박이 넝쿨째 굴러 들어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돈 몇 푼이면 모를까, 갑자기 분에 넘칠 정도로 과분한 선물을 받게 되니, 오히려 경계하게 되었다.
그런 복녀의 마음을 간파한 것처럼 서 지부장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봉림대군 마마께서는 자애로운 분이십니다. 모처럼 보내 주시는 호의이니 잠자코 그냥 받아들이는 게 편하실 겁니다.”
그 말에 복녀는 우물쭈물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고 어머님의 용태는 좀 어떠시오? 천식에 걸리셨다고 하던데.”
“아.”
하지만 복녀가 말을 하기도 전에 얇은 장지문 너머에서 콜록콜록하는 마른기침 소리가 터져 나왔다.
한 번 기침이 시작되면 좀처럼 진정되지 않기 때문에, 복녀가 허겁지겁 문을 열고 어머니의 상태를 살폈다.
“어머니, 괜찮으세요?”
“쿨럭쿨럭!”
제대로 숨을 못 쉬는 듯 쌔액 하면서 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복녀의 팔을 붙잡은 앙상한 손가락이 눈에 띄었다.
환자일수록 영양 섭취를 잘해야 하는데, 약값도 못 대는 형편이니, 식사라고 제대로 된 것을 먹었을 리가 없다.
서 지부장이 눈짓을 하자, 의원이 재빨리 약함을 들고 다가가 맥을 짚었다.
“뉘, 뉘십니까?”
“저희랑 함께 온 의원입니다. 앞으론 이 사람이 이틀에 한 번씩 왕진을 다니며 어머님을 보살펴 드릴 겁니다.”
“네?”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복녀가 두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자 의원이 웃는 낯으로 말했다.
“비용은 선불로 받았으니 폐를 끼치는 일은 없을 겁니다.”
“하지만…….”
어쩔 줄을 몰라 하던 복녀는 그 짧은 사이 발작을 일으킨 어머니가 편안한 표정이 되어 다시 잠드는 것을 보고 결심했는지 고개를 푹 숙여 인사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예.”
어머니를 의원에게 맡기고, 복녀가 방을 나오자 일꾼들이 짐을 다 날랐는지 어디론가 사라지고 서 지부장만 남아 있었다.
“그럼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아, 정말 감사합니다.”
“뭘요. 저도 지시를 받고 일하는 몸인걸요.”
대군마마의 명이 아니었으면 이런 인연이 없었을 거라며 은근슬쩍 한 번 더 도현의 이름을 강조하는 서 지부장의 말솜씨에, 복녀는 그저 허리를 숙여 그들을 배웅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다음 날.
하룻밤 내내 고민한 끝에 결국 오라버니에게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물어보자고 결심한 복녀는 궁궐 쪽으로 향했다.
물론 일개 평민에 불과한 복녀가 궁궐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기에 바깥에서 김 내관이 나오기만을 하염없이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정문을 지키는 위병에게 전갈을 받은 김 내관은 한 시진 후에야 겨우 짬을 내 동생을 찾았다.
“복녀야.”
“오라버니!”
웬만해서는 일하는 도중에 찾아오지 않는 동생이었기에 김 내관은 혹시 집에 무슨 일이 생긴 줄 알고 굳은 얼굴로 급히 물었다.
“무슨 일이냐? 어머니 병이 심해지기라도 한 거니?”
“아뇨, 사실은 그게 아니라…….”
그리고 복녀는 어제 있었던 일을 차례대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잠자코 그 말을 듣고 있던 김 내관은 대군마마라는 단어가 튀어나오자 깜짝 놀라 되물었다.
“대군마마? 설마 봉림대군 마마를 뜻하는 것이냐?”
“네, 그 사람이 그렇게 말했어요.”
“흐음.”
미간을 찌푸리며 낮게 침음성을 내뱉는 오라버니의 모습에 복녀는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잘못한 거예요?”
김 내관은 얼른 표정을 풀며 한쪽 손을 살짝 내저었다.
“아니다. 의원이 다녀갔다면 어머니 병세는 좀 어떠시니?”
“침도 맞고 좋은 약재로 만든 탕약까지 드셔서 그런지, 기침도 많이 줄어들고 한결 나아지셨어요.”
“녀석.”
어머니의 병세가 좋아진 것이 기쁜지 밝은 얼굴로 이야기하는 모습에 김 내관은 살짝 미소를 지으면서 한쪽 손으로 여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잘됐구나. 시간이 나면 집에 갈 테니까 이만 돌아가 봐.”
“알았어요.”
소매주머니에 손을 넣었다가 뺀 김 내관은 엽전 스무 개를 꺼냈다.
“이거 얼마 안 되지만 가지고 가.”
“괜찮아요. 지난번에 준 것도 아직 남았어요.”
“그건 그거고.”
“오빠도 돈이 있어야지요. 이렇게 다 제게 털어 주면 어떻게 해요?”
“궁궐에 있는데 무슨 돈이 필요해.”
“그래도…….”
생활비에 보태기 위해 병간호를 하는 틈틈이 삯바느질을 하는 걸 알기에 양팔을 내저으며 괜찮다고 하는 여동생의 손에 김 내관은 억지로 엽전을 쥐어 줬다.
“어머니 기다리시겠다. 어서 가.”
“……네.”
김 내관의 재촉에 여동생은 미안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집으로 돌아갔다.
여동생의 모습이 사람들 사이로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김 내관은 몸을 돌려 대궐 안으로 들어갔다.
천천히 근무지로 걸어가는 동안 김 내관은 복잡한 얼굴로 도현의 행동에 대해서 머릿속으로 고민했다.
열 살밖에 안 되는 어린 나이에 집안 사정을 생각해 스스로 집 근처에 있는 유우소를 드나들던 내시에게 부탁해 성기를 자르고 궁으로 들어온 지 벌써 이십 년, 나름 산전수전 다 겪었다고 자부하는 김남생은 도현이 무슨 의도로 그랬는지 대충 짐작이 됐다.
봉림대군이 자신에게 손을 내미는 거였는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점이 떠올랐다.
대전내관이나 하다못해 종육품 이상의 내관이라면 모르겠지만, 밑바닥이라고 할 수 있는 종팔품 상문에 불과한 자신을 재물까지 몰래 갖다 주며 끌어들이려는 것이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면서 동시에 조용한 모습과 달리 며칠 사이 자신에 대해서 샅샅이 조사한 뒤 약점을 찌르고 들어온 봉림대군의 치밀하고 재빠른 행동에 김남생은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특히 지난 몇 년간 심양에 가 있었으니 한양에 아무런 세력이 없을 봉림대군이 무슨 수로 이 모든 일들을 다 해냈는지 무서운 생각마저 들었다.
확실한 건 봉림대군이 만만한 인물은 절대 아니라는 것이다.
어느새 전각 앞에 다 온 김남생은 잠시 머뭇거리며 고심하다가 이내 결심을 굳혔는지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는 도현이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대군마마.”
칠현에게 김 내관이 여동생을 만나러 잠시 자리를 비웠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제 슬슬 입질이 올 때가 됐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도현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시선을 들었다.
“무슨 일인가?”
“마마께 감사 인사를 드리러 왔습니다.”
“감사 인사?”
“예. 어제 저희 집에 생필품과 어머니를 치료할 의원을 보내 주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김 내관의 말에 도현은 그때서야 생각이 났다는 표정을 짓고는 별거 아니라는 듯이 이야기를 했다.
“우연히 사정을 알게 돼서 해 준 건데 도움이 됐는지 모르겠군.”
“덕분에 어머니의 병이 한결 좋아졌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다행이야.”
“…….”
서탁 한쪽에 칠현이 갖다 놓은 것이 분명한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고는 여유 있게 앉아 있는 모습에, 김 내관은 도현이 먼저 자기 밑으로 들어오라는 이야기를 꺼내지 않을 거라는 걸 눈치챘다.
그러면 이쪽에서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막 입을 떼려던 김 내관은 인조의 총애를 등에 업고 궁궐을 한 손에 쥔 숙원 조씨 대신, 조금 있으면 다시 수천 리 떨어진 심양으로 가서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봉림대군 밑에 들어가는 것이 과연 현명한 선택인지 망설였다.
하지만 고민은 길지 않았다.
수년 동안 숙원 조씨의 처소에 배치되어 성심을 다해 모셨지만, 돌아오는 건 엽전 한 푼도 없는 것과 달리 도현은 생필품과 의원을 보내 줘서 자기를 따르면 절대 홀대하지 않겠다는 걸 보여 줬다.
나중에 버려지는 패가 될지 몰라도 김 내관은 자신을 거들떠보지도 않는 숙원 조씨 대신 도현에게 목숨을 걸어 보기로 마음을 굳혔다.
결심을 하고 나니까 오히려 마음이 편해진 김 내관은 자세를 바로 하고는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부족하지만 소인을 수하로 받아 주신다면 충심으로 대군마마를 모시겠습니다.”
“내가 도움을 준 일 때문에 이러는 거면 아무 사심 없이 한 것이니 이럴 필요 없네.”
“아니라고는 말씀 못 드리지만 대군마마의 인자하고 너그러우신 성품에 이제야 제가 평생을 모실 주군을 찾은 것 같았습니다. 부디 절 받아 주십시오.”
다른 사람들의 귀가 있어 크게 소리를 내지는 못했지만 김남생은 진심을 담아 말하며 머리를 조아렸다.
그러자 도현은 살며시 입가에 흡족한 미소를 짓고는 이내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와 함께하면 힘든 일이 있을 수도 있는데 괜찮겠어?”
“그 정도 각오도 없었다면 애초에 이야기를 꺼내지도 않았을 겁니다.”
자못 결연한 어투로 김 내관이 대답하자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자네가 먼저 배신하지 않는 이상 절대 내가 먼저 버리는 일은 없을 거야.”
수하로 받아들이겠다는 말에 김 내관은 이마를 땅에 붙이며 절을 했다.
“충성을 다 바치겠습니다.”
드디어 적지나 마찬가지인 창경궁에 자신의 세력을 은밀히 뻗칠 교두보가 생겼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진 도현은 앞으로 걸어가 엎드려 있는 김 내관을 일으키고는 그의 어깨를 두드려 줬다.
앞으로 해야 될 일을 지시받고 김 내관이 방을 나가자 한쪽에 서서 조용히 있던 칠현이 한쪽 입꼬리를 위로 말아 올리며 다가왔다.
“한 건 하셨네요.”
“격 떨어지게 말본새가 그게 뭐야?”
“제 말투가 어때서요? 다 대군마마께 보고 배운 건데요.”
“쯧.”
짧게 혀를 찬 도현은 더 상대하기 싫다는 듯이 서탁 위에 덮어 놓은 서책을 들어 펼쳤다.
김남생이 돌아서면서 도현은 상당한 이득을 취할 수 있었는데, 우선 숙원 조씨에게 들어가는 정보를 이쪽이 유리하게 조작해 방심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김 내관을 앞세워서 추가로 그가 머무는 전각에서 일하는 궁녀와 내관 들을 손쉽게 포섭할 수 있었다.
도현은 주로 궁궐에서도 밑바닥 신분인 이들을 집중 공략했는데, 걱정했던 것과 달리 숙원 조씨가 이들은 부려 먹기만 했지 신경은 거의 쓰지 않아 약간의 정성(?)만 보이면 의외로 금방 넘어왔다.
간부급들은 숙원 조씨와 밀접하게 얽혀 있어 회유가 어려울 거라는 김 내관의 조언에 따라 처음에는 어쩔 수 없이 그랬지만, 잡일을 도맡아서 하는 이들 궁인들의 특성상 어디든 갈 수 있고 배치되지 않은 곳이 없었기에 생각 외로 쓸 만한 정보들이 많이 모였다.
얼마 되지도 않아 김 내관을 통해 숙원 조씨의 움직임이 세세하게 전해지자 바로 유용성을 알아차린 도현은 더 적극적으로 회유 작업을 해 이쪽 편으로 넘어온 궁인들을 관리했다.
이렇게 도현이 은밀히 궁궐 내 정보 조직을 만들어 가고 있는 동안 인조와 소현세자 사이는 나날이 악화되고 있었다.
신하들과 백성들 사이에 소현세자의 인기가 치솟는 것과 비례해 인조의 분노도 커졌는데 급기야 문안 인사마저 받지 않고 아들과 얼굴조차 마주하지 않았다.
그러자 신하들이 나서 설득했지만 이미 숙원 조씨에게 빠져 소현세자에 대한 오해가 깊어진 인조는 요지부동이었다.
오히려 너희들은 누구의 신하냐며 호통을 쳐 대고는 소현세자 부부에게 문상이 끝났으면 이제 심양으로 돌아가라는 명령을 내렸다.
두 달의 여유를 받고 귀국했던 소현세자 부부는 인조의 시기심에 채 보름도 안 돼서 다시 한양을 떠나야 되는 서러운 처지가 됐다.
신료들이 너무 가혹한 처사라면서 인조를 만류했지만 뜻을 꺾지 않고 어서 돌아가라며 소현세자 부부를 재촉했다.
이렇게 되자 아직 할 일이 많았지만 도현도 소현세자와 함께 한양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심양으로 가기 전 한양에 있는 수하들을 다독이고 행동 방향을 설정해 주기 위해 도현은 작별 인사를 하러 간다고 말하고 다시 처갓집에 갔다.
장모님께 인사를 드리고 예의 그 별채로 안내되어 가자 서 지부장과 임경업 장군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니, 임 장군이 어떻게?”
“이제 가시면 언제 또 뵐지 몰라 좀 무리를 했습니다.”
호탕하게 웃으면 말하는 임경업 장군의 모습에 도현은 반가운 미소를 지었다.
“그렇지 않아도 한양까지 와서 임 장군을 만나지 않고 그냥 가는 것이 아쉬웠는데 잘 왔소.”
인사를 나누고 도현이 상석에 앉자 임경업 장군과 서 지부장 그리고 한양에 와서 새로 얻은 김 내관이 각자 자리를 잡았다.
물론 그림자인 칠현도 빠질 수 없었기에 조용히 한쪽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네 명뿐이었지만 이들을 보고 있는 도현은 마음이 든든해지는 것 같았다.
짧은 휴가를 보내고 김덕술과 박태철 두 위사가 복귀했고 회유 작업이 성공해 현재 별채 주위에 있는 궁인들 모두 도현의 편이었기에 저번과 달리 아주 편안한 분위기에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이렇게 자네들을 보고 있자니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른 것 같군. 앞으로 내가 한양에 없더라도 긴밀하게 연락을 주고받으며 서로 돕도록 하게.”
“물론입니다, 마마.”
“염려 마십시오.”
“그런데 귀국하신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빨리 심양에 돌아가신다니 너무 아쉽습니다.”
서 지부장의 말에 도현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아바마마께서 숙원 조씨의 치마폭에 빠져 진실을 보지 못하고 형님을 오해하시니 어쩔 수 없지.”
숙원 조씨가 국정을 어지럽히고 있는 걸 잘 알고 있는 임경업 장군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예전에는 총명하고 심지가 굳은 분이셨는데 주상전하께서 왜 이렇게 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이게 다 조정에 있는 신하들이 제대로 보필을 하지 못해 생긴 일 같아 얼굴을 들 수가 없군요.”
“옛말에 여자 한 명이 잘못 들어오면 집안이 망한다고 하는데, 요즘 궁궐 안이 돌아가는 걸 보면 정말 걱정스럽습니다.”
“그래서 심양 관저와 한양 사이에 간격이 더 벌어지지 않도록 가교가 되어 줄 자네들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거야.”
잠시 말을 끊고 방 안에 모여 있는 수하들과 시선을 하나씩 맞춘 후, 도현은 진지한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북경 분위기가 심상치가 앉아.”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임경업 장군과 수하들은 의아한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소문을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명 황제의 실정과 계속된 전란에 지친 백성들이 곳곳에서 반란을 일으켜 상당히 혼란스러운 상황이네.”
“반란이야 몇 년 전부터 계속 이어져서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비교적 국제 정세에 밝은 서 지부장의 지적에 도현은 살짝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그렇지. 하지만 최근에는 규모와 퍼지는 속도가 심상치가 않단 말이야. 그냥 우발적으로 농민들이 낫과 갈고리를 들고 설치는 소동 정도가 아니라, 번듯한 지휘 체계를 갖추고 현청 무기고를 털어 무장까지 해서 오히려 자금성에서 내려 보낸 토벌대를 물리칠 정도라는군.”
그때서야 상황의 심각성을 알아차린 사람들은 표정을 딱딱하게 굳혔다.
“이런저런 소문을 듣기는 했지만 그 정도로 심각하단 건 처음 알았습니다.”
“그래도 명색이 제국인데 약간의 흔들림은 있겠지만 농민 반란 따위에 나라가 무너지겠습니까.”
도현을 만나 많이 교화(?)됐지만 그래도 명나라에 대한 막연한 숭상 의식이 남아 있는지 임경업 장군이 애써 현실을 부정하려 들자, 도현이 정색을 했다.
“조정 대신과 사대부 들이 하늘처럼 떠받드는 명국도 한낱 농민 반란군 수괴에 불과했던 주원장이 세운 나라인데, 명이라고 그렇게 되지 말라는 법이 있나? 이미 작년에 임 장군과 내가 상륙했었던 산동 반도마저 섬서에서 반란을 일으킨 이자성군에 의해 얼마 전 점령됐다는데, 이래도 내 생각이 과장된 것 같나?”
산동 반도라면 바로 자금성이 있는 북경 턱밑이나 마찬가지인데, 거기까지 반란군의 손에 들어갔다는 건 명국이 상황을 통제할 능력을 상실했다는 의미였기에 임경업 장군과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어떻게 그런…….”
“으음.”
다들 침음성을 흘리고 있는 가운데 도현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이런 명국 분위기에 청국도 조만간 다시 칼을 빼 들 것 같아.”
“작년에 산해관을 넘지 못하고 대패를 당했는데, 또 군대를 일으킨다는 말씀이십니까?”
임경업 장군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쳐다보자 도현은 확신에 찬 얼굴로 머리를 끄덕였다.
“예친왕이 섭정에 만족하고 황위 다툼을 서둘러 마무리 지은 것도 이걸 염두에 둔 것이라고 생각하네. 지금까지 청을 막아 내는 방파제 역할을 잘해 온 산해관이었지만, 이렇게 안팎으로 일이 벌어진다면 버텨 내기 힘들 거야.”
“그럼?”
긴장된 마음에 침을 꿀꺽 삼키며 서 지부장이 묻자 도현은 담담하게 말했다.
“팔기군이 북경에 들어가 자금성을 불태우겠지.”
“……!”
너무나도 엄청난 이야기에 사람들은 애써 부정하고 싶었지만 논리적인 설명에 그러지도 못하고 숨이 턱 막히는 표정을 지었다.
“급박하게 돌아가는 국제 정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껍데기밖에 안 남은 명나라의 환상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는 사대부들이 행여나 엉뚱한 짓을 벌여, 병자년 같은 치욕스러운 일이 다시 벌어지지 않도록 노력해 주게.”
도현의 시선을 받은 세 사람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후우. 저희들 힘으로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고맙네. 하지만 너무 무리하지는 말도록 해.”
“예.”
사실 말을 하면서도 도현은 명국에 대한 사대사상이 사대부 전체에 뿌리 깊게 남아 있었기에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단지 조선의 명장인 임경업 장군이 명을 도와주다가 들켜 낭패를 겪지만 않는다면 그걸로 만족했다.
잠시 뒤 처남이 준비해 준 술상이 들어오고 도현은 직접 잔에 술을 따라 주며 가벼운 이야기로 분위기를 풀었지만, 너무 엄청난 말을 들은 세 사람의 표정은 좀처럼 펴지지 않았다.
이튿날 도현은 소현세자 일행과 함께 한양을 떠나 심양으로 돌아갔는데 마음이 완전히 돌아선 인조는 마지막 작별 인사마저 받지 않았다.
소현세자 일행이 다시 심양으로 간다는 소식에 또다시 백성들이 길가로 몰려나와 눈물을 흘리며 환송했고, 숙원 조씨를 통해 이런 이야기를 전해 들은 인조의 경계심은 더욱 커져 아들이 아니라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는 요소로 여기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