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불타는 자금성 (20/104)

불타는 자금성

소현세자가 인조에 대한 야속한 마음을 안고 북행길에 올랐을 때 명나라의 수도인 북경은 남쪽에서 전해진 소문에 분위기가 갈수록 흉흉해졌다.

“자네, 소문 들었나?”

“뭘?”

“글쎄 제남이 반란군들에게 점령당했다는 거야.”

친구의 말에 안주를 집어 먹던 대머리 사내는 깜짝 놀라 젓가락을 내려놨다.

“그게 정말이야?”

“표국에서 일하는 친구한테 직접 들은 이야기야.”

“저런, 제남이라면 북경 바로 코앞이잖아.”

“그러니까 큰일이라는 거 아닌가. 그 뭐라더라…… 아! 맞다. 이자성이라는 반란군 두목이 봄이 오기 전에 북경을 함락시키겠다고 공언을 했다는군.”

“여길!”

“그래.”

“아무리 반란군의 기세가 거세다고 하지만 설마 여기까지 쳐들어오려고…….”

그러자 함께 술을 마시고 있던 친구는 답답하다는 듯이 주먹으로 자기 가슴을 가볍게 때리며 이야기를 했다.

“태평한 소리 하고 있네. 반란군 숫자가 수십만 명이나 돼서 토벌을 하러 보낸 군대가 오히려 박살이 나 쫓겨 올 정도라는데 북경이라고 무사하려고.”

“그럼 큰일이잖아!”

대머리 사내가 요란스럽게 몸을 뒤로 젖히며 말하자 친구는 이쪽을 쳐다보는 다른 손님들에게 미안하다는 듯이 고개를 숙여 보이며 얼른 입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쉿! 소리가 너무 커.”

“미, 미안.”

괜히 포두들 귀에 들어가면 유언비어를 유포했다며 잡혀 갈 수도 있었기에 대머리 사내는 아차 하는 얼굴로 목소리를 낮췄다.

“이거, 빨리 피난이라도 떠나야 되는 것 아냐?”

“그래서 난 식구들 데리고 석가장에 있는 처갓집에 잠시 가 있으려고 하네.”

“거긴 남쪽이라 반란군이 여기보다 먼저 덮칠 텐데.”

대머리 사내가 걱정스러운 듯이 말하자 친구는 잔을 들어 술을 한 모금 마시고 입을 열었다.

“그럴지도 모르지만 자금성이 있는 북경을 우선적으로 공격할 테니 잘하면 반란군을 피할 수 있지 않겠어?”

“하긴.”

전쟁이 길어진다면 모르겠지만 상식적으로 석가장보다는 북경이 더 먹음직스러운 먹이였기에, 대머리 사내는 머리를 끄덕이며 수긍하는 표정을 지었다.

“자네는 어떻게 할 텐데?”

“난 성밖에 별다른 연고가 없어서…….”

“마음 같아서는 함께 가자고 하고 싶지만 나도 처갓집에 얹혀 지내야 되는 처지라…… 이거, 미안하네.”

“아니야. 이런 정보를 알려 주는 것만 해도 고맙지.”

“아무튼 언제 반란군이 몰려올지 모르니까 빨리 대책을 세우는 것이 좋을 걸세.”

“알겠네.”

대머리 사내는 불안한 얼굴로 술을 들이켰다.

이처럼 북경 성안은 반란군에 대한 소문이 빠르게 퍼지면서 주민들을 극도로 불안하게 만들었다.

차라리 반란군에 대해 정확한 정보를 알고 있다면 이렇게까지 혼란이 급속도로 확대되지는 않았겠지만, 명 조정이 일부러 숨기고 통제하는 통에 점점 소문에 살이 붙으면서 오히려 백성들을 공포에 빠뜨렸다.

타 지역에 연고가 없다면 하루 벌어 먹고사는 백성들은 두려워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성에 남아 있어야 했고, 부자나 권세 있는 사람들은 위험을 느끼고 짐을 싸 하나둘 피난을 떠나기 시작했다.

이런 가운데 제남을 함락한 이자성이 국호를 대순이라 하며 스스로 황제 자리에 올라 북경으로 진격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화들짝 놀란 백성들은 부랴부랴 피난길에 올랐고 삽시간에 도성을 빠져나가는 성문은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빨리, 빨리!”

객잔에서 친구들과 함께 소면을 먹다가 이 소문을 접하게 된 사내는 허둥지둥 집으로 뛰어들어 와 동작이 늦은 아내를 재촉했다.

아내 역시 빨래를 하러 우물가에 갔다가 친하게 지내는 옆집 아낙네한테서 반란군이 쳐들어온다는 말을 들은 터라, 서둘러 옷이며 장롱 밑에 숨겨 놓은 비상금 따위를 챙기긴 했지만, 그대로 놔두고 가기엔 아까운 물건들이 자꾸만 눈에 밟혀 쉽게 발길이 떨어지질 않았다.

“여보, 이것도요.”

부엌에서 뭘 하나 싶었더니 커다란 놋쇠 냄비를 들고 수레에 실으려는 아내를 보고 사내가 호통을 쳤다.

“아니, 밖에서 밥해 먹을 일도 없는데 냄비는 왜 들고 가!”

“그래도 이거 일주일 전에 시장에서 산 거란 말이에요. 완전 새건데 그냥 버리고 가자고요?”

“쓸데없이 자리만 차지하잖아. 이런 건 나중에 얼마든지 사 줄 테니까 얼른 도로 갖다 놓고 와!”

사내가 큰 소리로 고함을 치자 아내는 불만스러운 듯이 입술을 삐죽이면서 냄비를 수레에서 치웠다.

“갈아입을 옷가지 몇 개랑 당장 쓸 돈만 챙겨 가면 돼. 당신 시집올 때 가져온 패물은 다 챙겼어?”

“네.”

패물이라고 해 봤자 아무런 장식도 없는 옥가락지 한 쌍과 원앙이 수놓아져 있는 베게가 전부다.

옥가락지는 나중에 팔아서 처분한다고 쳐도, 베게는 아무 쓸데도 없으니 그냥 놓고 가자고 사내가 말했지만, 친정어머니가 있는 돈 없는 돈 다 끌어다가 솜씨 좋은 삯바느질꾼한테 맡겨서 만들어 준 거라며 아내가 고집을 피우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그것도 수레 한 귀퉁이에 싣고야 말았다.

“좋아. 빙빙아, 이리 오렴.”

사내가 손짓하자 어른들한테 방해되지 않도록 멀찌감치 떨어져 있던 어린 딸이 쪼르르 쫓아와서 안겼다.

그는 어린 딸을 번쩍 안아 들고선 주근깨처럼 작은 점이 나 있는 볼을 귀여운 듯이 한 번 꼬집고서, 아내에게 넘겨주었다.

“여기 위에 올라타라. 그리고 엄마한테서 떨어지지 마. 알았지?”

“응. 근데 아부지, 우리 어디 가요?”

“성 밖으로 여행을 떠날 거란다. 오늘은 집이 아니라 바깥에서 잠을 잘 거야.”

“와아, 신 나라!”

아무것도 모르고 마냥 집이 아닌 다른 곳으로 간다는 말에 좋아하는 딸을 착잡한 얼굴로 바라본 사내는 부인에게 뒤처지지 않도록 잘 따라오라고 신신당부 한 뒤 손잡이를 잡고 끌었다.

대로변까지 나와 보니 이미 주위는 피난을 가는 사람들로 정신이 없었다.

사내처럼 수레를 끌고 나온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깨며 손에 짐 보따리를 짊어지고 어딘가로 뛰어가는 자도 있었고, 그 와중에 아이를 잃어버렸는지 큰 소리로 애 이름을 외치며 허둥거리는 여편네도 눈에 띄었다.

수레를 끌고 마침내 성문 근처에 당도하자 상황은 더욱 심각해서, 갑자기 몰려든 사람들로 인해 앞이 거의 안 보일 지경이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갑자기 성문을 나가려고 하니 막히기도 하겠지 하면서 침착하게 기다려 보려고 했지만, 한 시진이 지나도 도통 앞에서 움직일 기미를 안 보이니 사내가 분통을 터트렸다.

“대체 앞에서 뭘 하는 거야? 누가 나자빠지기라도 했나?”

그러자 아까부터 옆에서 함께 차례를 기다리고 있던 초췌한 얼굴의 다른 사내가 아직 몰랐냐는 듯 말했다.

“성문을 지키고 있는 병사들이 나가려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검문하느라 그렇소. 난 두 시진이나 전에 도착했는데, 이대로 가다간 언제 성을 빠져나갈 수 있을지…….”

“뭐요? 아니, 꾸물거리다간 사람이 다 죽게 생겼는데 무슨 검문을 한다고!”

“그야 나도 모르지. 몇몇이 항의를 하긴 했는데, 규정이라며 반항하면 체포해서 옥에 처넣는다고 위협하니 다들 찔끔하고 물러설 수밖에 없지 않소.”

“에라이, 썅!”

사내는 복장이 치민 나머지 누런 가래침을 바닥에 뱉었다.

“아빠아, 여기 더워. 그리고 배고파아.”

게다가 설상가상으로 딸까지 칭얼거리기 시작하는 바람에 사내는 머리를 벅벅 긁고 말했다.

“뭐 먹일 거 없어?”

“가는 길에 먹으려고 아까 주먹밥 만들어 놓은 게 있긴 한데…….”

“그럼 그거라도 먹여. 나중엔 밥 먹을 시간도 없을지 모르니까 당신도 조금 먹고.”

“어디 가게요?”

“앞에 잠깐 상황 좀 보고 올게.”

그렇게 말하고 사내는 빽빽한 군중들 사이로 파고 들어가 병사들이 진을 치고 있는 성문 앞에 힘겹게 얼굴을 내밀었다.

“자, 다음!”

거기에는 성문을 경비하는 병사들이 좌우로 서 있었으며, 줄을 선 백성들의 짐을 하나하나 확인하면서 느릿느릿하게 사람들을 통과시키고 있었다.

주위에 서 있는 사람들의 얼굴엔 불만이 팽배했으나, 간혹 가다 병사들이 한 번씩 허리에 찬 칼을 집어 들어 날을 슬쩍 보여 주면서 위협하듯 노려보면 아무도 덤빌 생각을 하지 못했다.

“비켜, 비켜!”

그때 누군가가 사람들을 마구 헤치면서 앞으로 튀어나왔다. 평민들은 평생 한번 손에 넣기도 힘든 비단 옷에, 열 손가락엔 휘황찬란한 반지와 팔찌를 주렁주렁 매단 그는 사내 또한 익히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바로 동네에서 손꼽히는 부자 상인이었는데, 이름이 뭔지는 몰라도 마차에 올라타 거만한 자세로 거들먹거리며 지나가는 것을 몇 번 본 적이 있었기에 얼굴만은 낯익은 자였다.

고위 관리 쪽에 연줄이 있어 그 덕분에 부를 쌓았다는 소문도 있는데, 그 역시 아직 성문을 빠져나가지 못했구나 싶어서 쳐다보고 있으려니 병사들 중 대장인 듯한 자가 나와서 앞을 가로막았다.

“무슨 일인가?”

“아! 이거 수문장님, 아니십니까. 설마 제 얼굴을 잊어버리진 않으셨겠죠? 헤헤.”

상인은 두 손을 비비면서 친한 척 말을 걸더니 뒤에 오는 마차와 수레를 손으로 가리켰다.

“다름이 아니오라 제가 오늘 급한 거래가 있는데 미처 짐을 다 옮기지 못해서 말입니다. 수문장님께서 좀 도와주시면 안 될까요?”

그 말에 수문장이 마차를 바라보니 따라오는 짐수레만 족히 세 대가 넘었고, 짐꾼들이 지고 있는 보따리도 스무 개는 되는 듯했다.

“안됐지만 성문을 나가려면 차례를 지켜야 하오.”

“에이, 그러지 마시고요. 석가장에 사는 제 누이에게 보낼 짐도 있는데 얼마나 재촉을 하는지, 하루라도 늦어지면 제가 아주 혼쭐이 납니다요. 그럼 토라진 누이를 달래느라 형님도 아주 애를 먹지 않겠습니까.”

아무래도 고위층에 연줄이 있다는 소문은 사실이었는지, 상인이 누이 운운하면서 형님을 들먹거리자 수문장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주위에 지켜보는 눈이 한두 개가 아닌지라 쉽사리 움직이지 않는 수문장을 보고 상인이 슬쩍 소매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는데, 그 순간 황금색으로 번쩍거리는 금원보가 상인에게서 수문장에게로 넘겨지는 것이 똑똑하게 보였다.

그 모습을 본 것이 사내뿐만은 아니었는지 술렁거리는 소리가 더욱 커졌지만 이때까지는 그래도 괜찮았다.

하나.

“으음, 어쩔 수 없지. 그렇게 크고 중요한 일이라면 먼저 통과시켜 줄 수밖에.”

하면서 수문장이 상인의 짐수레와 마차를 앞으로 나오게 명령하자 안 그래도 땡볕에 계속 기다리느라 지친 백성들이 사방에서 야유를 퍼부었다.

“닥쳐라! 조용히 해!”

병사들이 창을 휘두르면서 진정시키려고 했지만 오랫동안 기다린 짜증과 뒤에서 반란군이 언제 쳐들어올지 모른다는 불안까지 겹쳐져 사람들의 원성은 좀처럼 그치질 않았다.

게다가 상인이 마차에 짐을 얼마나 많이 실었는지, 말이 앞에서 끄는데도 불구하고 움직이는 게 느려 중간에서 길을 막고 있는 형국이 되자 백성들이 욕하는 소리가 하늘을 뒤덮었다.

“얼른 꺼져!”

“늦게 왔으면 뒤에서 줄을 서야지! 어디서 새치기야?”

“배에 기름만 두른 욕심쟁이 같으니라고!”

상인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 얼른 하인들을 재촉해 문을 빠져나가려고 했지만 그때 군중들 사이에서 누군가가 던진 돌이 날아와 발치에 떨어졌다.

그가 기겁해서 뒤로 물러나자 그 모습이 우스웠는지 웃음이 터져 나왔고, 이윽고 봇물 터지듯 여기저기서 돌팔매질이 날아들었다.

“이 녀석들, 그만해!”

보다 못한 수문장이 병사들과 함께 백성들을 위협하면서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 댔다.

하지만 이미 흥분한 군중 앞에선 무용지물.

한 발짝만 더 다가오면 찔러 버리겠다고 병사들이 창을 휘두르는데 한 남자가 앞에 나와서 침을 튀기며 배를 드러내 보였다.

“죽일 테면 죽여, 이 자식들아! 어차피 반란군이 쳐들어오면 죽는 건 매한가지야!”

“옳소!”

“잘한다!”

뒤에선 박수 소리까지 터져 나왔고, 당황한 병사들이 수문장을 힐끗 쳐다보면서 우왕좌왕하고 있는데 이에 기고만장한 남자가 창끝에 몸을 갖다 대면서 더욱 약을 올렸다.

그런데 그 순간, 길가에 튀어나와 있던 돌부리에 발이 걸렸는지 아니면 누군가에게 떠밀렸는지 몰라도 그가 앞으로 몸을 휘청거렸다.

“어, 어?”

“위험해!”

‘푹!’ 하고 고기를 찌르는 듯한 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창에 몸이 꿰여 버린 형국이 된 남자의 몸에서 분수같이 피가 쏟아져 나왔다.

“꺄아아악!”

“사, 사람이 죽었다!”

앞에서 그런 비명 소리가 터져 나오자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뒤쪽의 사람들은 크게 당황했고, 이윽고 누구랄 것 없이 성문을 향해 돌진했다.

“어, 어이 막아!”

“하지만 어떻게요!”

수문장이 소리쳤지만 이미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진 상태였다.

뒤의 사람들이 꾸역꾸역 앞으로 나가려고 하자 앞과 중간에 있던 사람들은 자기 의사와는 상관없이 인파에 떠밀렸고, 한꺼번에 밀고 쏟아져 들어오는 백성들을 고작 수십 명에 불과한 병사들이 막아 낼 순 없었다.

게다가 군중은 이미 피를 본 상태.

병사가 선량한 백성을 죽였다는 말이 나돌기 시작하자 분위기가 흉흉해지면서 서슴없이 돌팔매질을 하는 사람들까지 나오기 시작했다.

아무리 칼을 차고 있어도 몇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한꺼번에 달려들면 도저히 당해 내지 못한다.

“처, 철수! 다들 안으로 대피해.”

이런 상황에선 남은 병사들을 이끌고 초소 안에서 성난 군중들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리며 벌벌 떠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한편 일련의 사태를 모조리 지켜본 사내는 일이 더 커지기 전에 가족들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하며 인파를 거슬러 아까 있던 자리로 돌아왔다.

“여보, 무슨 일이에요? 사람이 죽었느니 어떠니 하던데!”

“나중에 설명할게. 지금은 피신하는 것만 생각하자고!”

그러면서 사내는 어린 딸을 들쳐 업고 수레에서 패물과 비상금을 모은 주머니를 아내에게 건넸다.

“수레는 포기해. 이건 못 가지고 가.”

“예에?”

이렇게 혼란스러운 와중에 수레까지 챙길 여력 따위 없다.

사내는 단호한 표정으로 아내의 한 손을 붙잡고는 뒤에서 인파가 더 몰려오기 전에 서둘러 앞을 헤치고 피난민들 틈에 뒤섞였다.

이자성이 이끄는 반란군 수십만 명이 북경으로 올라오고 있다는 급보에 숭정제는 황급히 대신들을 대전으로 불러 모았다.

“금방 토벌할 수 있으니 반란군쯤은 걱정하지 말라고 장담하더니 이제 어떻게 할 거요!”

화가 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숭정제의 노호성에 허둥지둥 모인 대신들은 다들 눈치만 보며 고개를 푹 숙였다.

특히 병권을 책임진 병부상서는 자라처럼 목을 움츠리고 황제의 시선을 피하기 바빴다.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런 말이 없는 대신들을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쳐다보던 숭정제는 왼편에 서 있는 병부상서에게 시선을 멈췄다.

“병부상서.”

“예. 옛.”

“제남이 함락되고 역도들이 북경까지 노린다니 이걸 어쩔 거요!”

“그게 계속된 흉년에 굶주린 농민들이 계속 반란군에 가담하며 세를 급속히 불리는 바람에…….”

어떻게든 책임을 회피하려고 횡설수설 변명을 늘어놓는 모습에 눈썹이 치켜 올라간 숭정제는 손바닥으로 팔걸이를 세게 내려쳤다.

꽝!

“그걸 지금 변명이라고 하는 건가! 그럼 농민군 따위에게 패해 제남까지 빼앗긴 장군들은 바보 멍청이들이오!”

“소, 송구하옵니다.”

땀을 삐질삐질 흘리면서 허리를 숙였지만 노기가 치밀어 오른 숭정제는 손가락으로 병부상서를 가리키며 싸늘하게 소리쳤다.

“당장 저놈을 끌고 가 처형해라!”

“옛!”

황제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좌우에 있던 금의위 위사들이 걸음을 옮겨 다가오자 얼굴이 하얗게 질린 병부상서는 바닥에 엎드리며 애원했다.

“폐하, 용서해 주십시오!”

“듣기 싫다. 어서 데려가지 않고 뭣들 하느냐!”

“제발 살려 주십…… 읍읍.”

떠들지 못하도록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금의위 위사들은 버둥거리는 병부상서의 팔을 양옆에서 잡고 질질 강제로 끌고 나갔다.

육부의 수장 중 하나가 허무하게 끌려 나가는 모습에 대신들은 바짝 얼어붙었고 대전 안 분위기는 무겁게 가라앉았다.

“다들 병부상서 꼴이 되고 싶지 않으면 뭐라도 좋으니까 해결책을 이야기해 보시오!”

숭정제의 으름장에 북경 방어를 책임진 중군 도독부 도독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결연한 어조로 말했다.

“반란군이 쳐들어온다고 해도 저희가 목숨을 걸고 막아 내 절대 북경 성벽을 넘지 못하게 할 테니 염려 마십시오.”

다른 때 같으면 그 기개에 흡족한 얼굴로 칭찬을 했겠지만 숭정제는 번번이 토벌에 실패하고 이제 도성마저 위험에 빠뜨린 군부가 전혀 미덥지 않았다.

“그렇게 자신이 있으면 역도들이 북경을 넘보기 전에 무찌를 것이지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고 그딴 말이 나오는가!”

“그건…….”

“입에 발린 소리 말고 진짜 해결책을 내놓으란 말이오!”

황제의 언성이 다시 높아지자 눈치 없이 나섰던 중군 도독은 찔끔한 얼굴로 들어갔고, 이부상서가 조심스러운 어조로 이야기를 꺼냈다.

“폐하,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비바람이 거세게 몰아칠 때는 맞서 싸우기보다 피하는 것이 상책이라고 했습니다. 지금은 세가 불리하오니 잠시 남쪽으로 천도를 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천도라는 말에 노老대신들이 정색을 하며 반대했다.

“황상께서 자금성을 버리고 피난을 떠나시다니요. 그건 절대 안 됩니다.”

“맞사옵니다.”

그러자 천도 이야기를 꺼낸 이부상서가 바로 반박했다.

“예전에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가 쳐들어왔을 때 송宋도 수도인 개봉이 함락되자, 남쪽으로 천도해 그 뒤로도 이백 년 가까이 사직을 이어 갔는데, 우리라고 그렇게 못할 것이 뭐가 있소이까?”

“이부상서 말은 남송처럼 양자강 이북 땅을 모두 포기하자는 거요!”

“포기가 아니라 잠시 물러섰다가 전열을 재정비한 다음에 다시 되찾자는 겁니다.”

“그게 그거 아닌가!”

어느새 대신들이 두 패로 나뉘어 서로 대립하자 가만히 듣고 있던 숭정제는 미간을 찌푸리며 호통을 쳤다.

“그만! 조용히 못하겠나.”

“흐흠.”

“죄송합니다, 폐하.”

대신들을 보며 한심하다는 듯이 짧게 혀를 찬 숭정제는 천도를 반대하는 노대신들에게 시선을 주고는 짜증스럽게 물었다.

“천도를 하지 않고 그냥 이대로 반란군의 손에 나라를 끝내란 말인가?”

“아니옵니다.”

“설마 그럴 리가 있겠사옵니까.”

“그럼 반란군을 막을 해결책이 있다는 건데, 그게 뭔지 말해 보게.”

숭정제의 말에 반대파 대신 중 한 명이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산해관을 지키고 있는 오삼계 총병에게 휘하 병력을 이끌고 와 반란군을 토벌하게 하는 겁니다.”

황좌에 앉아 심드렁한 표정을 짓고 있던 숭정제는 뜻밖에 괜찮은 의견이 나오자 자세를 바로 했다.

“오 총병한테?”

“그렇습니다. 산해관 병력이라면 오랜 세월 청과의 전쟁에서 단련된 정예이고 병력도 삼십만 명이나 되니 충분히 반란군을 물리칠 수 있을 겁니다.”

“음.”

한쪽 손으로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숭정제가 솔깃해하는 반응을 보이자 천도를 주장했던 이부상서가 다급히 말했다.

“폐하, 그건 안 됩니다.”

“왜 그렇지?”

“산해관 병력은 청군의 남하를 막는 핵심인데 아무리 급하다고 해도 이들을 빼 온다면 자칫 늑대를 막기 위해 호랑이의 침입을 허용하는 꼴이 될 겁니다.”

기껏 좋은 방법이 나왔다고 생각했던 숭정제는 반란군 때문에 잠시 잊고 있던 청군의 존재를 떠올리고는 이마에 깊은 주름살을 만들며 앓는 소리를 냈다.

“끄으응.”

“당장 북경이 함락될 상황인데 그게 문제요! 그리고 청국도 황제가 갑자기 급사하는 바람에 그 뒷수습을 하느라 정신이 없을 테니, 우리한테까지 신경 쓰지 못할 것이오.”

“답답한 말씀하시지 마십시오. 청국은 이미 섭정에 오른 예친왕이 정국을 완전히 장악한 상태입니다.”

“그래도 얼마 전에 대군을 일으켰다가 패했기 때문에 잠시 산해관을 비운다고 해도 바로 쳐들어올 여력이 없을 것이오. 행여 그런 조짐이 보인다면 토벌을 빨리 끝내고 산해관 병력을 바로 돌려보내면 되지 않소.”

그러자 이부상서는 답답하다는 시선으로 반대파를 봤다.

“우리와 달리 청군 팔기는 군대를 모으고 이동시키는 데 시간이 얼마 안 걸린다는 걸 아셔야지요. 그리고 반란군 토벌이 예상과 달리 빨리 안 끝나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그건…….”

순간 말문이 막힌 노대신은 우물쭈물하며 제대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몸을 황제 쪽으로 돌린 이부상서는 재차 반대를 표명했다.

“나중에 반란군을 몰아내고 다시 화북 지역을 되찾기 위해서라도 산해관 병력을 건드려서 아니 되옵니다.”

이부상서의 말에 공감을 하면서도 솔직히 자금성이 있는 북경을 이대로 포기하기 싫었던 숭정제는, 노 대신들의 의견에 더욱 마음이 끌렸다.

“산해관은 천혜의 요새이니 일부 병력을 남겨 놓는다면 청군이 쳐들어온다고 해도 충분히 시간을 끌며 버틸 수 있지 않겠소?”

“폐하!”

뜻밖의 말에 깜짝 놀라는 이부상서와 달리 천도를 반대했던 측은 반색을 했다.

“맞사옵니다. 북경에도 금군 십만 명이 있으니 오 총병이 절반만 데려온다고 해도 충분히 승산이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이부상서가 다급히 뭐라고 말하려는 걸 한쪽 손을 들어 막은 숭정제는 단호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이부상서가 뭘 우려하는지 짐도 잘 알고 있소. 하지만 북경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있는데,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써야 되지 않겠소? 올지 안 올지 불분명한 청군의 위협 때문에 정예 병력 수십만 명을 그냥 묶어 두는 건 정말 어리석은 일이니 다른 말 하지 말고 내가 지시한 대로 하시오. 이건 황명이오!”

황명이라고 딱 못을 박아 버리자 이부상서도 더 이상 반대를 할 수 없었다.

“……알겠습니다.”

이부상서가 머리를 숙이자 숭정제는 만족한 표정을 지으며 회의를 끝냈다.

내전으로 돌아간 숭정제는 산해관 병력을 데려오기로 했지만 그래도 불안한 마음이 가시지 않는지 최측근인 태감 왕승을 은밀히 불렀다.

“왕 태감.”

“하교하옵소서, 폐하.”

“오 총관이 오기로 했지만 전투라는 것이 어찌 될지 모르니, 만약을 대비해서 신료와 백성들 모르게 은밀히 천도를 준비해 두게.”

“……!”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치켜뜬 왕승은 이내 얼굴을 바로 하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알겠사옵니다.”

“괜히 소문이 나면 혼란이 벌어질 수 있으니 동창에서 주도적으로 처리하게.”

“예.”

“상황이 악화됐을 때 모두 빠져나가려면 어려움이 많을 테니 황태자님과 황실 식구들은 미리 안전한 곳으로 보내 놓는 것이 어떻겠사옵니까?”

확실히 여자인 황후와 비빈들은 이동하는 데 많은 시간이 걸렸기에 자칫 이걸로 반란군에게 발목이 잡힐 수도 있었다.

“그렇군. 하지만 황태자가 보이지 않으면 당장 신료들 사이에 이런저런 말이 나올 테니까 황후와 비빈들만 먼저 피난을 시켜 놓게.”

“그러하겠사옵니다.”

내전을 물러나온 태감 왕승은 지체 없이 동창을 움직여 피난 준비에 착수했다.

제일 먼저 북경에서 가까운 천진 순무인 풍원양한테 황제의 인장이 찍힌 칙서를 보내 유사시 반란군을 피해 남쪽으로 내려갈 수 있는 배들을 준비해 놓도록 했다.

그리고 황후와 비빈들 그리고 황제의 어린 자식들을 아무도 모르게 천진으로 보냈다.

한꺼번에 황실 식구들이 다 사라졌으니 신료들이 눈치챌 만도 했지만 외부인의 출입이 엄격하게 금지된 내궁에 거처했고, 왕승이 용의주도하게 적당한 대역을 세워 방 안에 머물도록 했기에 당분간은 속일 수 있었다.

무엇보다 반란군을 막아 낼 대책 마련에 바빠 신료들이 내궁에서 일어나는 일에 신경을 쓸 여력이 없었다.

하지만 이런 황궁의 움직임을 유일하게 알아차린 곳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봉황상단 북경 지부였다.

도현의 지시를 받고 황궁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던 지부장 김하방은 늦은 밤 수하가 가져온 정보에 눈을 반짝였다.

“확실한 정보야?”

“네. 황후를 측근에서 모시는 상궁이 알려 온 겁니다.”

“으음.”

황후전에서 나온 정보라면 신뢰도가 아주 높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김 지부장은 쉽게 믿기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아무리 형세가 어렵다고 하지만 황제가 이렇게 빨리 북경을 포기한다니…….”

“이자성이 이끄는 대순군이 무려 백만 명이 넘는다고 하니까 싸울 의지를 잃은 거 아니겠습니까.”

제대로 무장을 갖추지 못한 오합지졸이라고 해도 그 수가 백만이 넘으면 전투를 시작하기도 전에 압도당할 것이다.

그리고 반란군은 연전연승을 거두며 기세가 오를 대로 올라 있었기에 상대적으로 사기가 낮은 관군이 승리하기는 더 어려워 보였다.

콧잔등을 살짝 찡그린 채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천천히 생각을 정리한 김 지부장은, 이내 굳은 목소리로 지시를 내렸다.

“황궁에 심어 놓은 끈을 모두 동원해서 이 정보가 사실인지 알아보고 확실하다면 피난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도 다 파악해.”

“옛.”

김 지부장과 마찬가지로 무관 출신인 수하는 묵직한 음성으로 고개를 숙이고는 조용히 방을 나갔다.

집무실 안에 홀로 남은 김 지부장은 소매 주머니에서 도현이 자금성에 변고가 생겼을 때 풀어 보라고 했던 비단 주머니를 하나 꺼냈다.

손에 들린 비단 주머니를 잠시 물끄러미 쳐다보며 김 지부장은 이런 사태를 미리 예상한 도현이 새삼 대단해 보였다.

단단히 묶여 있는 매듭을 풀자 주머니 안에서 여러 번 접힌 종이가 하나 나왔다.

종이를 펼치자 뜻밖에도 아무것도 없는 백지였다.

하지만 김 지부장은 당황한 기색 하나 없이 한쪽에 있는 촛대를 가까이 끌어와서는 조심스럽게 종이를 촛불 위에 그슬렸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종이에 글자가 하나씩 나타났고 내용을 꼼꼼하게 읽어 내려간 김 지부장은 짧게 감탄성을 내뱉었다.

“역시!”

종이에는 황제가 천도를 시도할 때 어떻게 해야 되는지 지시가 적혀 있었다.

상인도 아니고 장사를 해 본 경험이 전혀 없는 무관 출신인 자신을 뜬금없이 북경 지부장에 임명한 것이 도통 이해가 안 되었는데, 이제야 그 모든 게 도현의 치밀한 안배였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혹시 빠뜨린 것이 있는지 한 번 더 내용을 살펴본 김 지부장은 바로 종이를 촛불에 태워 증거를 없애 버렸다.

한편 급히 산해관에 원군을 청하는 칙사를 보낸 숭정제는 중군 도독에게 명령을 내려 반란군에 맞서 싸울 준비를 했다.

황제에게 보검을 하사받고 북경 방어 사령관에 임명된 중군 도독은 바로 도성을 오가는 모든 성문을 닫아걸고는, 열여덟 살부터 마흔 살까지 무기를 쥘 수 있는 남자들을 보이는 족족 강제징병을 했다.

이렇게 끌어모은 병력으로 급히 성 밖에 해자를 파고 성벽을 보강하는 등 전투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하지만 사방에서 반란군이 날뛰고 만리장성 너머에 청군이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데도 설마 북경에 적이 쳐들어오겠냐며 방심하고 있던 명군은 강제 징집한 병력에게 나눠 줄 병장기조차 부족한 형편이었다.

그나마 무기는 급히 죽창을 만들거나 던질 수 있는 돌을 가져와 대신한다고 해도, 군량미 부족은 해결할 방법이 없었다. 호부와 병부에 비치는 장부를 보면 분명 성안 창고에 오십만 섬의 쌀이 보관되어 있어야 했지만, 실제로 확인해 보자 대부분 절반도 안 채워져 있었다.

이걸 가지고는 아무리 아껴도 이백만이 넘어가는 병사와 북경성 주민이 보름도 버티기 어려웠다.

이런 가운데 스스로 황제에 오른 반란군 수괴 이자성이 자금성에 항복을 요구하는 사신을 보냈다.

“목숨이라도 보존하고 싶으면 나더러 맨발로 성문 앞에 나와 무릎을 꿇고 항복하라고? 이런 건방진 놈이 있나!”

끓어오르는 분노에 편지를 든 손을 부들부들 떨던 숭정제는 이내 대전이 쩌렁쩌렁 울리는 노호성을 터트렸다.

“당장 이따위 서신을 가져온 놈의 목을 잘라 성문 위에 효수梟首해 반란군에게 진정한 황제가 누구인지 똑똑히 보여 줘라!”

“폐하, 고정하시옵소서.”

“이런 능멸을 당했는데 내가 진정하게 됐소!”

“화가 나시겠지만 자고로 사신은 손을 대지 않는 법입니다.”

그러자 숭정제는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리고는 말을 꺼낸 신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호통을 쳤다.

“그건 국가 사이에나 통용되는 이야기고 반란군 놈들한테 그따위 규칙을 지킬 이유는 없어!”

“하지만…….”

“뭐야? 자꾸 반란군을 싸고도는 것이 수상한데 혹시 네놈도 한통속 아냐.”

“오, 오해십니다.”

“흥! 말을 더듬는 걸 보니 수상한데. 여봐라, 저자를 끌고 가서 옥에 가두고 적과 내통을 했는지 알아내라.”

“옛.”

명령이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대기하고 있던 금의위가 달려들어 입을 잘못 놀린 신하를 끌고 나갔다.

원래 의심이 많고 성격마저 급한 숭정제였는데 반란군이 시시각각 다가오며 위기감이 고조되자, 신경이 바짝 날카로워져 더 포악하게 행동했다.

최근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해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숭정제가 대전을 쓸어보자 신하들은 행여나 그와 시선이 마주칠까 봐 고개를 숙이기 바빴다.

“귀찮으니까 어서 썩 꺼져!”

신경질적으로 소리치자 신하들은 허둥지둥 대전에서 물러났다.

그러자 숭정제는 한쪽에 조용히 시립해 있는 태감 왕승을 손짓으로 불렀다.

“왕 태감.”

“예, 폐하.”

“내가 지시한 일은 잘 진행되고 있겠지?”

“물론입니다.”

찡그린 얼굴을 편 숭정제는 약간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명의 앞날이 자네 손에 달려 있다는 걸 명심하고 실수 없이 처리해야 될 것이야.”

“명심하겠사옵니다.”

“그래.”

허리를 숙이고 있는 왕승의 어깨를 두드려 주며 숭정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자성이 보낸 사신의 목이 잘려 성문 앞에 효수된 날 밤 자금성 문이 열리며 족히 스무 개는 됨직한 짐마차들이 뭔가를 가득 싣고 밖으로 나왔다.

덜컹덜컹!

통행금지가 실시돼 텅 빈 밤거리를 달려가는 짐마차 행렬은 수상한 냄새를 잔뜩 풍겼는데, 황제의 친위부대 격인 금의위 수백 명이 말을 타고 호위하고 있어 그런 느낌을 더 강하게 만들었다.

이런 짐마차 행렬을 은밀히 숨어서 지켜보는 눈이 있었는데, 바로 봉황상단 북경 지부 소속 직원들이었다.

객잔 건물 옆 그늘진 곳에 몸을 숨긴 채 날카로운 시선으로 전방을 살피던 사내는 동료를 돌아보며 낮게 말했다.

“저거 맞지.”

“요즘 같은 상황에 저렇게 금의위가 잔뜩 달라붙어서 옮길 만한 물건은 하나밖에 없잖아.”

“하긴.”

담담한 동료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사내는 이제 시야에서 거의 사라진 짐마차 행렬을 슬쩍 쳐다보고는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놓치기 전에 쫓아가자고.”

“잠깐만.”

작은 쪽지에 뭔가를 빠르게 갈겨쓴 동료는 골목 안에 묶어 둔 말안장 뒤에서 전서구를 꺼냈다.

구구구.

“착하지.”

낮게 우는 전서구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동료는 다리에 쪽지를 단단히 묶고 하늘로 날려 보냈다.

푸드드득.

요란하게 날갯짓을 하며 날아오른 전서구는 머리 위를 한 바퀴 빙글 돌고는 어딘가로 사라졌다.

재빨리 말에 올라탄 두 사람은 어둠 속으로 사라진 짐마차 행렬을 성문까지 뒤쫓아 갔다.

미리 약속이 되어 있는지 성문을 지키고 있던 군관은 검문도 하지 않고 굳게 닫아 놓은 성문을 열어 줬다.

며칠 전부터 바깥출입이 엄격히 통제되고 있었기에 두 사람은 더 이상 쫓아갈 수 없었지만 성 밖에 있던 동료들이 전서구로 연락을 받고 임무를 넘겨받았다.

그 시각 심양 관저에 있는 도현은 밤이 늦었지만 잠자리에 들지 않고 방에 앉아 난을 치고 있었다.

시커먼 먹을 듬뿍 찍은 붓이 한지 위를 지나갈 때마다 고고한 분위기를 풍기는 난 그림이 조금씩 제 모습을 드러냈는데 취미로 그리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돼서 세련미는 없었지만 나름 봐줄 만했다.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온 호위대 대장 박영식은 그림에 집중하고 있는 도현을 방해하지 않으려는 듯 조심스럽게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렇게 얼마쯤 시간이 흘렀을까 난 주위를 날아다니는 나비를 마지막으로 그림을 완성한 도현은 옆에 있는 칠현에게 붓을 건네주고는 고개를 들어 박영식에게 눈길을 줬다.

“이거,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군.”

“아닙니다.”

“얼마 전부터 시작한 취미인데 자네가 보기에 어떤가?”

슬쩍 난 그림을 쳐다본 박 대장은 그의 상징 같은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감히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게 송구스럽지만 상당히 잘 그리신 것 같습니다.”

“그래?”

입가에 살짝 미소를 지어 보인 도현은 어느새 먹물이 다 마른 그림을 접어 한쪽으로 치우면서 말했다.

“해 줘야 될 일이 하나 있어.”

도현이 이렇게 진지한 태도를 보일 때면 항상 엄청난 일을 벌였기에 박 대장은 약간 긴장한 눈빛으로 고개를 들었다.

“뭐든 명령만 내려 주십시오.”

“오늘 밤 부하들을 데리고 천진으로 가. 배편은 장 총관이 준비해 놨을 거야.”

“거기서 뭘 하면 되는 겁니까?”

“도착하면 북경 지부장이 알려 줄 거야.”

역시 짐작한 대로 철저하게 보안을 유지해야 되는 비밀 임무였다.

“알겠습니다.”

“조심하고. 이틀 뒤에는 배를 타야 될 테니 이만 나가 봐.”

“예.”

고개를 숙이며 대답한 박 대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조심스럽게 방을 나갔다.

미닫이문이 닫히자 도현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새 한지를 깔고는 붓에 먹물을 가득 묻혀 난을 치기 시작했다.

한편 숭정제의 칙서가 도착하자 산해관을 지키고 있던 오삼계 총병은 어떻게 해야 될지 망설이다가 결국 황명을 따르기로 결정하고 약간의 수비병만 남겨 둔 채 이십만 대군을 이끌고 급히 북경으로 남하했다.

하지만 오삼계의 군대가 오기 전에 이자성이 지휘하는 반란군들이 먼저 북경성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말이 쉬워 백만 대군이지 실제로 눈앞에 맞닥뜨리자 끝도 없이 몰려오는 사람의 바다에 그대로 압도당할 정도였다.

보고를 받고 급히 성루로 달려온 숭정제는 성 앞을 온통 뒤덮은 적군을 보고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오 총병은 언제 도착하는 거야!”

두려움을 감추기 위해 숭정제가 일부러 더 크게 고함을 지르자 옆에 있던 태감 왕승이 허리를 살짝 굽히며 달래듯이 말했다.

“산해관을 출발했다는 전갈이 왔으니 늦어도 삼사일 안에 도착할 겁니다.”

“내가 칙서를 보낸 것이 언제인데 이제야 떠나? 혹시 딴생각을 품고 있는 거 아닐까?”

또 의심병이 도졌는지 숭정제가 하는 말에, 왕 태감은 얼른 그를 안심시켰다.

“지난 수년간 묵묵히 변방을 지키며 폐하께 충성해 온 장수이니 절대 그럴 리 없을 겁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늦게 오는 거야?”

“무작정 산해관을 비워 둘 수는 없으니 대비책을 세워 둔다고 시간이 조금 지체되는 거겠지요. 그리고 원래 대군이 움직이려면 준비할 것이 많은 법 아니겠습니까.”

“으음.”

논리적인 설명에 숭정제는 약간 수그러들었지만 그래도 불신에 찬 눈빛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런 황제의 모습에 태감 왕승은 의심병 때문에 전 영원성 성주 원숭환을 비롯한 수많은 충신들을 멀리 귀향 보내거나 죽여 나라를 엉망으로 만들어 놓고도, 이 위기 상황에 또 유일한 희망인 오삼계 총병을 못 믿는 것에 한숨밖에 안 나왔다.

옆에서 충언을 하면 더 엇나가는 숭정제의 성격을 잘 아는 왕 태감은 어떻게든 사고를 치지 못하도록 잘 다독이는 것 말고는 달리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오 총병이 올 때까지 시간을 벌기 위해 명군 측은 사신을 보내며 거짓 협상을 하려 했지만 이자성은 속지 않았다.

오히려 황제가 자신이 보낸 사신의 목을 쳐 효수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협상을 하러 온 관리를 죽여 버리고는 지체 없이 바로 성을 공격했다.

작정을 했는지 사방을 포위하고 총공격을 펼치자 명군은 크게 흔들렸다.

도성답게 성벽이 높고 튼튼하다고 해도 기본적으로 평지에 지어진 성이라 공격에 취약했는데, 반란군은 노획한 홍이포 수십 문을 끌고 와 포격까지 가했다.

명군도 상당한 숫자의 홍이포를 보유했지만 비축해 놓은 화약이 거의 없어 무용지물이었다.

그러자 반란군은 아예 성 바로 앞까지 홍이포를 끌고 가서는 포탄을 쏴 조금씩 성벽을 부숴 나갔다.

꽝! 꽝! 꽝!

슈우우웅! 쿠쿵!

“으아악!”

“크흑.”

오후부터 시작된 전투는 밤을 새우고 그다음 날 아침까지 계속 이어졌다.

비명이 난무하고 피가 강을 이루는 가운데 끝없이 밀려오는 반란군을 상대로 명군은 필사적으로 싸웠다.

하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었는데 포격에 성문이 부서지자, 명군의 사기가 급격히 떨어지면서 억지로 끌고 온 강제 징집병들부터 무기를 버리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공포는 빠르게 확산돼 정규군과 군관 들마저 하나둘 도망 행렬에 가담하며 어느새 통제 불능 상태가 되어 버린 명군은 모래성처럼 허무하게 무너져 내렸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성벽을 넘어 들어온 반란군은 피에 굶주린 승냥이 떼처럼 성내를 마구 유린했다.

“바, 반란군 놈들이 온다!”

“어서 도망쳐.”

“끄아악!”

“성문이 뚫렸다.”

동아시아 최대의 도시답게 화려하고 번성한 북경 시내는 한순간 아수라장이 되며 지옥으로 변해 버렸다.

언제나 위압감을 풍기며 고고하게 서 있던 자금성도 성문이 뚫렸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대혼란에 빠졌다.

“폐하!”

문이 벌컥 열리며 창백하게 질린 태감 왕승이 뛰어 들어오자 평소 같으면 호통부터 쳤겠지만, 숭정제는 머리를 번뜩 스치는 불길한 생각에 떨리는 시선으로 그를 봤다.

“역도들이 성안으로 들어왔사옵니다!”

순간 숭정제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으며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결국 가장 우려하던 최악의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절망과 분노도 잠시 이제 다 끝났다고 생각하니 숭정제는 어느새 마음이 홀가분해지면서 아주 편해졌다.

“수백 년간 이어온 명국이건만 이렇게 끝나고 마는 건가?”

모든 걸 포기한 듯한 숭정제의 모습에 왕 태감은 굳은 얼굴로 말했다.

“정신 차리십시오, 폐하. 여기서 포기하시면 안 됩니다.”

“이제 곧 반란군이 자금성으로 들이닥칠 판인데 뭘 더 할 수 있겠나?”

“비록 북경이 역도들에게 넘어가겠지만 아직 폐하를 따르는 수많은 신료와 병사 들이 남아 있지 않사옵니까. 천진에서 배를 타고 강남으로 가신다면 다시 힘을 키워 오늘 당한 치욕을 되갚아줄 수 있을 겁니다.”

천진 순무에게 명령해 직고구에 대기시켜 놓은 배를 떠올린 숭정제는 무기력하게 가라앉던 정신이 번뜩 들었다.

“그래, 자네 말이 맞아. 이대로 죽을 수는 없지!”

이글이글 분노에 찬 눈빛으로 아랫입술을 꽉 깨무는 황제의 모습에 왕 태감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다급히 이야기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서 여길 빠져나가야 됩니다.”

“알았네.”

머리를 끄덕인 숭정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내전 깊숙한 곳에 숨겨 두었던 옥쇄를 꺼내 품에 챙겼다.

그러고는 왕 태감이 데려온 동창 대원과 금의위 위사들의 호위를 받으면서 급히 내전을 나섰다.

바깥은 이미 아수라장이었는데 내시와 궁녀 들이 공포에 질린 얼굴로 이리저리 도망 다녔고, 전각마다 문이 활짝 열어 젖혀진 채 약탈을 당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숭정제는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폐하, 이쪽입니다.”

왕 태감의 재촉에 숭정제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옮겼고 뒷문으로 가는 그의 등 뒤로 시뻘건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누군가의 방화로 시작된 불은 때마침 부는 바람을 타고 삽시간에 번지며 기울어 가는 명나라의 운명을 보여 주듯이 팔백 채의 크고 작은 건물로 이루어진 자금성을 활활 불태웠다.

자금성을 나오기는 했지만 시내 곳곳에서 반란군과 명군이 뒤엉켜 난전을 벌이고 있는 상태라 황제 일행은 북경을 빠져나가는 것이 쉽지 않았다.

특히나 급하게 나오는 바람에 미처 옷을 갈아입지 못한 숭정제의 금색 곤룡포는 눈에 너무나도 잘 띄었다.

당장 얼마 가지 않아 반란군 병사들이 고함을 지르며 쫓아왔다.

“저기 황제가 도망친다!”

“잡아라!”

연신 채찍질을 가하며 말을 달렸지만 곳곳에서 적들이 튀어나와 앞을 가로막는 바람에 시간이 계속 지체됐고 그때마다 호위들이 필사적으로 길을 뚫었다.

“제기랄! 길을 열어라.”

채챙! 챙! 챙!

“크아악.”

“컥!”

위사 십여 명이 앞으로 뛰쳐나가 반란군 병사들과 맞붙어 싸우면서 피가 튀고 비명이 터져 나왔다.

말 그대로 혈로血路를 헤치며 도주했지만 황제 일행은 좀처럼 시가지를 벗어날 수 없었다.

그렇게 쫓겨 다니다 보니 어느새 오십 명이 넘던 호위는 왕 태감을 포함하고도 채 십여 명이 남지 않았다.

그런 데다 동문으로 향하던 골목길에서 일단의 반란군 병사들과 딱 마주치고 말았다.

“흐흐흐. 이것 봐라. 용돈이나 좀 챙기려고 했더니 월척이 걸려들었군.”

커다란 양손 도끼를 턱하니 어깨에 걸친 적장은 탐욕스러운 시선으로 곤룡포를 입고 있는 숭정제를 아래위로 훑어보며 기분 나쁜 웃음을 흘렸다.

도망치려고 해도 말들이 연신 거친 숨을 내쉴 정도로 지쳤고 어느새 뒷길도 적이 막아선 상태였다.

“이런.”

주위를 둘러본 숭정제는 낭패한 표정을 지었고 왕 태감도 이번에는 힘들다고 판단했는지 어두운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폐하를 끝까지 지켜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아닐세. 왕 태감은 최선을 다했어. 난 운명이 여기까지인 것 같지만 황태자와 황실 식구들이 안전하게 피난을 떠났으니 그걸로 위안을 삼을 수밖에…….”

“폐하…….”

그렇게 숭정제가 마지막까지 옆을 지킨 왕승과 회한에 찬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누자 적장은 바닥에 누런 가래침을 뱉으며 아니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퉤엣! 기근과 전란에 백성들이 죽어 나가는데도 혼자 으리으리한 황궁에서 미녀들을 끼고 신선놀음이나 한 폭군 주제에 웃기고 있군. 뭣들 하냐! 어서 저놈을 잡아 와라.”

“옛!”

통일성 없이 제멋대로 복장을 입은 반란군 병사들이 눈을 희번덕거리며 가까이 다가오자, 호위들도 숭정제와 왕승을 가운데 두고 동그란 원진을 치고는, 지친 와중에도 마지막 힘을 쥐어짜 손에 든 검을 들어 올렸다.

바로 그 순간 기적처럼 날카로운 파공음과 함께 양쪽 건물 지붕에서 화살 비가 쏟아져 반란군 병사들을 죽였다.

슈슉! 쉬이익!

“으윽!”

“꾸엑!”

“뭐, 뭐야?”

“지붕에 적이다!”

“커헉.”

갑작스러운 화살 세례에 화들짝 놀란 반란군은 허둥지둥 몸을 숨겼지만 좁은 골목길에 밀집해서 모여 있었기에 공격을 피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서 궁수부터 잡…… 끄윽.”

도끼를 휘두르며 부하들을 닦달하던 적장도 몸에 화살이 세 발이나 박힌 채 말에서 굴러 떨어졌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숭정제 일행이 얼어붙어 있는데 불쑥 머리 위에서 사내의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기, 괜찮으시오?”

고개를 들어 보니 바로 등을 기대고 있는 이 층 건물의 창문에서 누군가가 얼굴을 내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잠시만 기다리라는 듯이 손을 흔들고 나서 안으로 사라졌다 싶더니 이내 계단을 쿵쾅거리며 내려오는 소리와 함께 봉황상단의 북경 지부장인 김하방이 뒤를 따르는 장정 대여섯 명과 함께 숭정제의 눈앞에 나타났다.

숭정제를 감싸듯이 뒤로 숨기고 앞으로 한 발 나선 왕승은 갑자기 나타난 이들이 적인지 아군인지 알 수 없어 경계심 어린 눈빛으로 쏘아보다가 김하방의 얼굴을 보고 이내 반색을 했다.

“아니, 자네는……?”

“이런 누군가 했더니 왕 태감님이셨군요!”

김하방은 왕승을 보고 의외라는 듯이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북경에서 상단을 꾸려 나가려면 황궁 내부에 있는 사람과 어느 정도는 연줄이 닿아야 하는 법. 봉황상단도 예외는 아니어서 막대한 돈과 시간을 들여 여러 가지 경로로 인맥을 틔어 놓으려고 했는데, 그중에서도 왕승은 황제의 최측근이나 마찬가지였으므로 김하방이 얼굴을 아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왕승 역시 김하방에게서 소소하게 뒷돈을 받아먹은 경험이 있어 그를 기억하고 있었는지 안심한 눈빛으로 말했다.

“아까 놈들에게 화살을 쏜 게 자네들인가?”

“네. 반란군이 성안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저희도 약탈을 피해 상단 사무실을 버리고 은신처로 피신하던 참입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 싸우는 소리가 들려 내다보니 놈들이 행패를 부리고 있지 뭡니까. 그래서 냅다 쏘아 버렸지요.”

김하방이 약간 과장된 몸짓과 함께 침을 튀기며 말하자 왕승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잘했네. 자네들 덕분에 목숨을 건졌어.”

“아닙니다.”

왕승과 대화를 나누면서도 김하방은 숭정제에게서 눈길을 떼지 못했다.

장소에 어울리지 않는 금색 곤룡포에 호화로운 장식 등이 도저히 일반 평민이라고는 볼 수 없었던 탓이다.

“그나저나 왕 태감, 뒤에 계신 분은 설마……?”

그 말에 왕승은 곤란한 표정으로 살짝 뒤를 돌아보았다.

숭정제가 고개를 살짝 끄덕이자 그는 크흠 헛기침을 한 뒤 허리를 꼿꼿이 펴고서 말했다.

“자네 짐작대로네. 여기 계신 이분은 대명의 천자이신 황제폐하이시네.”

“아!”

평소 같았으면 이렇게 얼굴을 들고 쳐다보는 것도 허용되지 않을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자 김하방은 서둘러 땅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뒤에 있던 부하들 역시 덩달아 따라 하려던 찰나, 숭정제가 괜찮다며 억지로 그를 일으켰다.

“지금은 한시가 급한 때이니 예의를 차릴 것 없다.”

“하오나, 폐하…….”

“폐하의 말씀을 듣지 못하였는가? 얼른 일어나시게.”

왕승까지 옆에서 거들자 김하방은 어쩔 수 없이 바닥에 꿇은 무릎을 일으켰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손으로 포권을 하고 인사한 김하방은 사방에 널브러진 시체들을 쭉 둘러보고서 말했다.

“그런데 왜 이런 곳에 계십니까? 호위무사들은요?”

황제 일행이 황궁을 나왔을 때부터 쭉 뒤에서 미행을 해 어찌 된 사정인지 다 알고 있었지만 김하방은 짐짓 아무것도 모르는 양 물었다.

그러자 왕승은 침통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급하게 빠져나오느라 호위를 많이 데리고 오지 못했네. 그나마도 오는 길에 반란군 병사들과 맞서 싸우느라 겨우 이 정도밖에 남지 않았어.”

“그렇습니까?”

김하방이 사정을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주억거리는데 근처에서 망을 보고 있던 부하가 급하게 달려와 속삭였다.

“지부장님, 여기 오래 있으면 안 되겠습니다. 사방이 온통 반란군 천지라 우물쭈물하다가 잡히는 건 시간문제예요.”

“알겠다.”

김하방은 고개를 돌려 숭정제와 왕승에게 말했다.

“이 근처에 잠깐 몸을 숨길 만한 은신처가 있습니다. 일단 따라오시죠.”

그렇게 말하고 김하방이 서둘러 앞장서자 숭정제와 왕승도 황급히 그 뒤를 따랐다.

골목길 사이사이로 움직이기엔 폭이 너무 좁고 또 양쪽에서 협공이라도 당하면 곤란하므로 김하방은 자신이 뛰쳐나왔던 건물 안으로 들어가 뒷문에서 뒷문으로 움직이며 반란군을 교묘하게 피해 신속하게 나아갔다.

북으로 가는지, 서로 가는지 방향도 모른 채 정신없이 김하방의 등만 보고 따라가던 숭정제와 왕승은 일행이 한 장원 앞에서 멈춰 서자 겨우 숨을 고르고 물었다.

“여긴?”

“몇 년 동안 사는 사람 없이 버려져 있던 장원입니다. 저희 봉황상단 쪽에서 사들이긴 했지만, 안이 제대로 정리가 안 되어 있어서 지저분하니 발밑을 조심하십시오.”

김하방은 서슴없이 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면서 말했다.

가구라고는 거의 없이 뜯어지고 지저분한 벽지만 가득한 텅 빈 방에, 문은 다 벌컥 열려 있고 마당은 짐승의 배설물과 버려진 자재 들이 흩어져 있어 반쯤은 폐가나 다름없었다.

“이쪽으로.”

그 사이를 헤치고 거침없이 나아간 김하방은 방을 직선으로 가로질러 후원 쪽으로 일행을 이끌었다.

과거에는 꽤나 멋들어진 정원이었을지 몰라도, 지금은 아무도 돌보는 이 없이 잡초만이 무성하게 우거져 있었는데 김하방은 무언가를 찾듯이 두리번거리더니 바닥에 떨어진 나뭇가지들을 치우고 손으로 흙을 밀어내면서 쪼그려 앉았다.

“웃차!”

흙더미 아래 묻혀 있던 정 사각형 모양의 통로 입구를 찾아낸 김하방은 고리를 잡고 기합 소리를 내면서 문을 들어 올렸다.

후드득 하며 흙이 아래로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성인 남성 한 명이 겨우 통과할 만한 입구가 드러나자 왕승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아래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이게 뭔가?”

“값나가는 물건을 보관하려고 파 놓은 창고입니다. 저도 이게 이런 용도로 쓰일 줄은 몰랐군요. 어이, 누가 아래로 내려가서 불을 좀 켜 봐.”

김하방이 부하에게 명령하자 활을 든 사내 한 명이 조심스럽게 계단을 내려가서 부산하게 움직였다.

“됐습니다.”

어두컴컴했던 지하실에 등잔불이 켜지고, 겨우 주위를 분간할 수 있게 되자 김하방이 아래를 가리키며 말했다.

“지금 성 밖으로 나가는 건 불가능합니다. 누추하지만 당분간 주위가 조용해질 때까지 저희와 함께 계시지요.”

왕 태감이 시선을 돌리자 이미 도망 다니느라 지친 숭정제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황제 일행이 지하실 안으로 들어가자 김하방은 슬쩍 비웃음을 짓고는 옆에 선 부하를 보고 낮게 물었다.

“챙겼어?”

그러자 부하는 빙긋 미소를 지으며 품속에서 황금색 비단에 싸여진 물건을 하나 꺼내 보여 줬다.

“제가 누굽니까?”

바로 황제를 상징하는 옥쇄였는데 숭정제 일행을 이쪽으로 데려오면서 예전에 소매치기 생활을 한 적이 있는 부하가 슬쩍 훔쳐 낸 것이다.

“잘했어.”

옥쇄를 건네받아 챙긴 김하방은 부하의 어깨를 가볍게 툭 쳐 주고는 지하로 내려가지 않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거기서 미리 준비해 놓은 비단 두루마리에 인주를 듬뿍 묻힌 옥쇄를 찍었다.

순식간에 가짜 칙서를 하나 만들어 낸 김하방은 잘못된 곳이 없는지 꼼꼼하게 살펴보고는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완벽하군.”

그러고 나서 그는 다른 천으로 옥쇄에 묻은 인주를 박박 닦아 사용한 흔적을 없앤 후 도로 황금색 비단으로 감쌌다.

“들키지 않도록 잘 돌려놔.”

“걱정하지 마십시오. 꿈에도 눈치채지 못할 겁니다.”

자신만만하게 단언하는 부하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인 김하방은 황제 일행의 호위 겸 감시 역으로 몇 명을 남겨 놓고서 서둘러 어딘가로 떠났다.

성을 함락한 이자성은 부하들에게 사흘간 약탈을 허락했고 수백 년 동안 동아시아의 패자로 군림하던 명나라의 영광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북경은 비명성과 피가 난무하는 지옥으로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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