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경 입성
화북성에 위치한 천진은, 예전에는 즈구直沽라고 불리던 수상 교통의 요지로 황도인 북경의 관문 역할을 하는 곳이었다.
천진 앞바다인 진고구에는 수많은 화톳불이 밝혀져 대낮처럼 환한 가운데 수백 척의 배들이 포구에 정박해 있었다.
황명을 받고 천진 순무 풍원양이 급히 모은 배들이었는데, 언제든 출발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아직 북경이 함락됐다는 소식이 전해지지 않았는지 진고구는 별다른 소란 없이 조용했다.
따각따각!
하지만 지척인 북경에 반란군이 쳐들어왔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잔뜩 긴장한 채 진고구 외곽을 지키고 있던 병사들은 어둠을 헤치며 일단의 기마가 달려오자 얼른 경계 태세를 취했다.
“멈춰라!”
“워워!”
이히히힝.
갑옷을 입고 허리에 검을 찬 백인장의 외침에 기마들은 고삐를 뒤로 당기며 목책 바로 앞에서 말을 멈춰 세웠다.
“누구냐! 정체를 밝혀라.”
그러자 우두머리로 보이는 사내 하나가 화톳불이 켜져 밝은 입구로 천천히 말을 몰아 왔는데 뜻밖에도 며칠 전 도현에게 밀명을 받고 심양을 떠난 박영식 대장이었다.
“황명을 받고 온 금의위 병력이오.”
최고 권력 집단 중 하나인 금의위라는 말에 지방군 군관인 백인장은 약간 기세가 죽은 얼굴로 상대를 살폈다.
“금의위가 이 야심한 시각에 무슨 일이오?”
“천진 순무께 급히 전해 드릴 칙서가 있어서 왔소.”
짜증스러운 대답에 백인장은 더 위축됐다.
“그럼 신분을 증명할 수 있는 걸 보여 주시오.”
백인장의 말에 박영식은 품속에서 손바닥보다 작은 금속 패를 꺼내 목책 위로 휙 던졌다.
신분패에는 금의위 천인장의 직책과 천위성이라는 이름이 선명하게 양각되어 있었다.
가짜가 아닌 진짜 금의위 신분패로 이번 작전을 위해 봉황상단에서 구해 준 것이다.
패를 확인한 백인장은 당황한 표정으로 부하들을 닦달했다.
“어서 문을 열어 드리지 않고 뭣들 해!”
“예.”
흥미로운 시선으로 상황을 지켜보던 병사들은 상관의 말에 들고 있던 무기를 거두고는 밑으로 내려가 빗장을 걸어 놓은 목책 문을 좌우로 열었다.
끼이이익.
귀에 거슬리는 경첩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자 내심 조마조마해하고 있던 박영식은 몰래 한숨을 내쉬고는 부하들을 데리고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다.
“높으신 분인지 모르고 무례를 저질러서 죄송합니다.”
백인장이 굽실거리며 다가오자 박영식은 무표정한 얼굴로 한쪽 손을 내저으면서 능숙한 중국어를 구사했다.
“임무를 수행하느라 그런 거니 신경 쓰지 말게. 그것보다 순무께서는 어디 계시나?”
“예. 포구에 있는 객사에서 머물고 계십니다.”
“그래?”
“제가 길을 안내할 병졸을 하나 붙여 드릴까요?”
“그래 주면 고맙지.”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무관이 되기는 했지만 대대로 역관을 지내 온 집안에서 태어나 중국어를 어렵지 않게 하는 박영식의 모습에 수상한 점을 찾지 못한 백인장은 부하 한 명을 불러 안내를 맡겼다.
“이 녀석이 객사까지 안내해 드릴 겁니다.”
“고맙네.”
“아닙니다. 당연히 편의를 봐 드려야지요.”
아무리 중국어를 잘 쓴다고 해도 계속 이야기를 하다 보면 어색한 부분이 나올 수도 있었기에 박영식은 얼른 대화를 마무리 짓고는 포구로 들어갔다.
예전부터 물류의 중심지였던 곳답게 진고구는 상당히 번화했는데 외국 사신들도 자주 드나들어서 따로 이들을 위해 객사까지 마련되어 있었다.
객사는 전각만 여섯 채가 넘는 상당한 규모로 현재는 천진 순무 풍원양이 임시 지휘소로 사용 중이었고 며칠 전 은밀히 도착한 황실 가족들도 안채에 머물고 있었다.
이때 천진 순무 풍원양은 황명에 따라 피난선을 준비해 놓기는 했지만 계속해서 들려오는 안 좋은 소식에 계속 숭정제를 믿고 따라야 되는지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이날도 늦은 시간이었지만 쉽게 잠을 이루지 못하고 집무실에 혼자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순무 어른.”
“무슨 일인가?”
풍원양이 신경질적으로 묻자 시선을 받은 부관은 찔끔한 얼굴로 용건을 이야기했다.
“북경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오호도독부 말이야?”
“아닙니다. 황제께서 보내셨습니다.”
황제라는 말에 풍원양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정말이야?”
“네. 금의위 천인장이 직접 칙서를 가져왔습니다.”
“이런, 어서 이리로 데려오게.”
“옛.”
군례를 올리며 부관이 나가자 풍원양은 당번 병사를 불러 술상을 치우고는 흐트러진 복장을 바로 했다.
잠시 뒤 부관과 함께 금의위 옷을 입은 박영식이 집무실로 들어왔다.
“천진 순무 풍원양은 황제 폐하의 칙서를 받으라!”
그러자 풍원양은 예법에 맞게 행동을 취하며 양쪽 무릎을 바닥에 꿇으며 절을 했다.
“만세. 만세. 만만세.”
박영식이 비단 두루마리를 손에 든 통에서 꺼내 내밀자 풍원양은 두 손으로 공손히 건네받아 봉인을 뜯고 내용을 확인했다.
힐끗 앞에 서 있는 박영식을 보며 적혀 있는 글을 다 읽은 풍원양은 칙서를 부관에게 넘겨주고는 몸을 일으켰다.
“금의위 소속이라고 했나?”
“그렇습니다.”
“일단 자리에 앉지.”
“예.”
집무실 한쪽에 있는 원형 탁자에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앉자 객사에 소속된 하녀가 차를 내왔다.
직책상 순무인 자신이 상관이었지만 황제를 지근거리에서 보필하는 금의위의 특성상 가진 힘으로 보면 오히려 상대가 위였기에 풍원양은 반공대를 하며 입을 열었다.
“혹시 칙서 내용이 뭔지 알고 있나?”
“예. 폐하께서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그럼 이야기하기 편하겠군. 화물을 실은 배를 먼저 출발시키는 건 문제가 아니지만 행여나 바다에서 해적을 만나면 큰일이니 호위를 붙여 주겠네.”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기껏 호의를 보였는데 박영식이 바로 거절하자 풍원양은 기분이 나쁜지 눈썹을 살짝 위로 치켜 올렸다.
“자네가 잘 모르는 모양인데 이 근처에는 해적들의 출몰이 잦아서 화물선만 움직이는 건 아주 위험해.”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내 말대로 하게.”
“걱정해 주시는 건 감사합니다만 바다로 나가면 전선 다섯 척이 호위를 하기 위해 따로 대기 중이므로 괜한 수고를 끼치기 싫습니다.”
호위를 준비해 놨다는 말에 풍원양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흐음. 그렇군.”
“미리 말씀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박영식이 살짝 고개를 숙이며 정중히 사과하자 풍원양은 한쪽 손을 내저었다.
“아닐세. 하긴 귀한 물건들을 옮기는데, 호위가 없다면 말이 안 되지. 이거 내가 괜히 오지랖을 떤 것 같군.”
풍원양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내일 날이 밝는 대로 떠날 수 있게 지시해 놓을 테니 그동안 푹 쉬도록 하게.”
“밤이라도 좋으니 준비가 되면 바로 출발하고 싶습니다.”
“밤에는 사고가 날 수 있어서 위험하네.”
“상관없습니다.”
“…….”
몇 시진밖에 차이가 안 나는 데도 불구하고 굳이 서둘러서 떠나려는 모습에 풍원양은 미간을 좁혔다.
“혹시 북경에 무슨 변고라도 있나?”
아주 많은 걸 내포하고 있는 질문이었으나 이미 북경성이 함락됐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박영식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태연하게 대답했다.
“아닙니다. 그저 황제 폐하께서 서두르라고 하셔서 지시를 따르는 것뿐입니다.”
뭔가 찝찝한 느낌이 들었지만 딱히 꼬투리 잡을 것이 없었던 풍원양은 잠시 상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하지만 아무리 서둘러도 새벽이나 돼야 떠날 수 있을 걸세.”
“괜찮습니다.”
“준비가 되면 알려 줄 테니 그동안 쉬고 있게. 부관, 자네가 거처를 마련해 주도록.”
“옛.”
절도 있는 자세로 군례를 취하고는 부관을 따라 집무실을 나가는 박영식의 뒷모습을 풍원양은 뭔가 떨떠름한 시선으로 쳐다봤다.
부관이 박영식을 데리고 안내해 준 방은 생각보다 깨끗하고 정리가 잘되어 있었다.
크기는 많이 넓진 않으나, 옷장과 침대 등 꼭 필요한 가구는 갖춰져 있었고 이불에서 나는 희미한 먼지 냄새만 제외하면 이런 상황에선 과분할 정도로 좋은 방이었다.
“더 큰 방을 드리고 싶지만 지금 내 드릴 수 있는 게 이것뿐이라…….”
“아니, 괜찮네. 충분해.”
박영식은 만족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 후 부관을 향해 물었다.
“내 부하들은 어디 묵게 되는가?”
“아, 같은 층의 바로 옆방을 준비해 놨습니다. 가구를 끌어내고 이불을 펴면 한 방에 다섯 명 정도는 잘 수 있을 테니까요.”
“배려에 감사하네. 그럼 이 층은 우리들이 완전히 전세 낸 거나 마찬가지로군.”
다른 사람 눈을 신경 써야 하는 부담이 조금은 덜어졌으니 마침 잘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되는군요. 아무튼 편하게 쉬십시오. 순무님의 지시대로 배가 출항할 준비가 되면 제가 알려 드리겠습니다.”
“부탁하네.”
돌아서는 부관의 뒤로 문을 탁 닫은 박영식은 의자에 앉아서 팔짱을 낀 자세로 기다렸다.
얼마 후, 복도를 지나다니는 사람의 인기척이 사라지고 주위가 조용해지자 똑똑 문을 두 번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박영식이 조심스럽게 일어나서 문을 조금 열고, 부하의 얼굴을 확인한 후 그를 안으로 들여 맞이했다.
“가신 일은 잘되었습니까?”
“음.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긴 했지만 그럭저럭 속여 넘긴 것 같아.”
“다행입니다. 호랑이 소굴에 맨몸으로 들어와 있으려니 심장이 벌렁벌렁해서 원.”
“그래도 긴장을 늦춰선 안 돼.”
식은땀을 닦는 시늉을 하는 부하에게 박영식이 따끔하게 일침을 놓았다.
“배를 타고 포구를 떠날 때까진 끝난 게 아니야. 언제 어디서 일이 뒤틀릴지 모르니 항시 주의하도록.”
“네, 알겠습니다.”
“어쨌든 시간이 될 때까지 조금이라도 쉬고 있어. 다른 녀석들한테도 그렇게 전해 주고.”
그렇게 부하를 돌려보낸 박영식은 긴 한숨을 내쉬고 다시 의자에 앉아 초조하게 벽을 바라보았다.
어슴푸레 창밖으로 날이 밝아 올 무렵 드디어 그렇게 기다리던 연락이 왔다.
똑똑!
“일어나 계십니까? 순무님께서 모시고 오라십니다.”
심부름을 맡은 병사가 밖에서 문을 두드리며 말하자 박영식은 느슨하게 풀어져 있던 몸의 근육을 팽팽하게 긴장시키고 일어났다.
복도에는 박영식과 비슷한 표정을 하고 있는 부하들이 이미 나와 있었는데, 열린 방문으로 언뜻 보이는 이불에는 잠깐 누운 흔적만 있을 뿐 누구 하나 깊게 잠을 잔 사람은 없는지 살짝 피곤한 기색이긴 했으나 눈빛만은 생생했다.
박영식과 부하들이 건물을 나오자 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부관이 살짝 목례를 하고 말했다.
“잘 쉬셨습니까?”
“덕분에. 배는 다 준비되었나?”
“예. 절 따라오시죠.”
그렇게 말하고 부관은 앞장서서 포구로 향하는 길을 걸었다.
새벽이라 포구에는 드문드문 화톳불을 피워 놓고 경비를 서고 있는 병사들 외에는 인적이 드물었는데 유일하게 가운데쯤 정박해 있는 배 앞에 선원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쪽으로 가자 갑옷 대신 간편한 무복을 입고 허리에 검을 차고 서 있던 천진 순무 풍원양이 박영식을 보고 알은척을 했다.
“어서 오시게.”
“안 나오셔도 되는데, 이거, 저희가 자꾸 귀찮게 해 드리는 것 같아 죄송합니다.”
군례를 취하며 박영식이 하는 말에 풍원양은 입가에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닐세. 황제 폐하께서 맡기신 물건을 옮기는 일인데 당연히 내가 직접 와서 감독을 해야지. 보시다시피 다섯 척의 배에 나눠서 실려 있네. 확인을 해 보겠나?”
“송구스럽지만 부탁드리겠습니다.”
“나도 확실한 것이 좋네. 이리 따라오게.”
앞장서는 풍원양을 따라 배에 오른 박영식은 갑판 아래에 위치한 화물칸으로 갔다.
“살펴보게.”
넓은 화물칸 안에는 나무 상자들이 가득 들어 있었는데, 하나같이 커다란 자물쇠가 달려 있고 열쇠 구멍에는 태감 왕승의 인장이 찍힌 봉인이 되어 있었다.
박영식은 등불을 손에 들고 꼼꼼하게 훼손된 인장이 없는지 살폈고 나머지 배들도 올라타서 직접 확인 작업을 했다.
“다 맞습니다.”
“그러면 여기 인수증에 서명을 해 주게.”
“네.”
부관이 내민 서류에 박영식이 붓으로 수결을 하자 풍원양은 약간 아쉬운 얼굴로 나무 상자들을 훑어봤다.
안에 황궁 보고에서 꺼낸 온갖 보물들이 가득 들어 있다는 걸 알기에 그도 사람인 이상 살짝 욕심이 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황제의 물건이었기에 감히 손을 댈 생각을 못 하고 그저 군침만 흘릴 뿐이었다.
아쉬움을 떨쳐 내려는 듯 시선을 돌린 풍원양은 앞에 있는 박영식을 보며 말했다.
“그럼 조심해서 가게.”
“예. 나중에 기회가 되면 다시 뵙겠습니다.”
인사를 나눈 풍원양은 부관과 함께 잔교를 내려갔고 박영식은 부하들을 다섯 척의 배에 골고루 나눠 태웠다.
잠시 뒤 돛을 올린 배들은 마침 수평선 위로 서서히 떠오르는 아침 햇살을 맞으며 포구를 출발했다.
발해만으로 나온 배들은 혹시 모르는 해적의 습격에 대비해 서로 바짝 붙어서 파도를 가르고 나아갔다.
그렇게 꼬박 하루가 지났는데도 곧 합류한다는 호위선들이 보이지 않자 선원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이제부터 해적들이 자주 출몰하는 위험지역인데 왜 호위선들이 안 오는 거지?”
“그러게.”
“그냥 이대로 남쪽으로 내려가는 거 아냐?”
“설마 그럴라고.”
이야기를 나누던 동료가 아닐 거라고 했지만 선원은 불안감을 지우지 못했다.
“그럼 왜 아직 호위선이 안 와?”
“이상하긴 하네.”
이렇게 선원들이 수군거리며 불안해하자 참다못한 선장이 선실로 박영식을 직접 찾아갔다.
똑똑똑.
“누구야?”
“선장입니다.”
“들어와.”
선장이 문을 열고 쭈뼛거리며 들어오자 깨끗한 천으로 검을 닦고 있던 박영식이 시선을 들며 딱딱하게 말했다.
“무슨 일이야?”
“저기, 하나 물어볼 게 있어서 왔습니다.”
“뭔가?”
“바다에 나오면 호위선들과 합류할 거라고 하셨는데 통 보이지가 않아서 말입니다.”
어렵게 이야기를 꺼내자 박영식은 검을 닦던 천을 한쪽에 치우고는 잠시 선장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아직 하루밖에 안 됐잖아.”
“그게 천인장님은 잘 모르시겠지만 조금만 더 가면 나오는 묘산열도 부근은 해적들이 자주 출몰하는 위험지역입니다.”
“해적들이 그렇게 무서운가?”
“한번 걸리면 배와 화물만 뺏어 가는 것이 아니라 사람까지 잡아서 노예로 팔아 버리니 두려울 수밖에요. 거기다가 이쪽 바다는 토착 세력뿐만 아니라 멀리서 왜구들까지 올라와 설치는 곳이라 더 위험합니다.”
설명을 들은 박영식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오늘 안에 호위선들과 만날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정말이십니까?”
“그래.”
그때 노크와 함께 문이 벌컥 열리며 선원 하나가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선장님, 전방에 정체불명의 배들이 나타났습니다.”
“해적선이야?”
“아직 그것까지는 모르겠지만 속도로 봐서 화물선은 아닙니다.”
“제기랄!”
선장은 해적이라고 확신하고는 자신도 모르게 욕설을 내뱉으며 풍원양이 내준다고 했던 호위선을 거절한 박영식을 원망스러운 눈으로 쳐다봤다.
눈에 띄게 당황하는 선장과 달리 박영식은 믿는 구석이라도 있는지 느긋한 얼굴로 의자에서 일어났다.
“이제 왔나 보군.”
“예?”
“내가 이야기했던 호위선 말일세.”
“그럼…….”
“어디 한번 올라가 볼까.”
검을 칼집에 집어넣은 박영식이 선실 밖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가는 걸 멍하니 보고 있던 선장은 이내 정신을 차리고는 허둥지둥 뒤를 따랐다.
갑판 위로 올라가자 선원들이 바짝 긴장한 모습으로 모여 있었는데 그에 반해 박영식의 부하들은 무표정한 얼굴로 뒤편에 서 있었다.
사람들을 헤치고 뱃머리 쪽으로 간 박영식은 손을 눈썹 위에 올리고 정면에서 다가오는 배들을 살폈다.
명나라나 왜선과 달리 확연한 특징을 보이는 조선 고유의 선박인 판옥선이라는 걸 확인한 박영식은 빙긋 입가에 미소를 짓고는 선장에게 지시했다.
“같은 편이니까 소란 떨지 말고 배를 붙여.”
“아. 네.”
호위선이라는 말에 안도의 한숨을 내쉰 선원들은 돛대를 조정해 속도를 천천히 멈췄다.
그렇게 바다 한가운데서 조유한 양쪽 선박은 밧줄을 이용해서 선체를 가까이 붙인 뒤 서로 왕래할 수 있도록 널빤지를 설치했다.
함교에서 잔교를 건너오는 병사들을 본 선장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박영식에게 고개를 돌렸다.
“저들은 명나라 병사들이 아니지 않습니까?”
“맞아. 여기까지 데려다 줘서 고마웠네. 그 보답으로 고통스럽지 않게 끝내 주지.”
“……?”
선장이 무슨 소리냐는 얼굴로 쳐다보는 것과 동시에 전광석화 같은 동작으로 검을 빼 든 박영식은 그대로 선장의 목을 베었다.
서걱!
“컥.”
허공에 피가 뿌려지며 자신에게 왜 검을 휘둘렀는지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은 채 숨이 끊어진 선장은 허물어지듯 주저앉았다.
“서, 선장님!”
“다 죽여!”
“우와아아!”
그걸 신호로 도현이 웅도에서 키운 사병들은 함성을 내지르며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선원들을 닥치는 대로 죽였다.
“으아악.”
“크흑.”
뒤늦게 선원들도 작살이나 각목 같은 걸 들고 맞서 싸웠지만, 제대로 전투 기술을 배운 데다 중무장한 사병들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갑판 위는 피로 시뻘겋게 물들었고 선원들의 구슬픈 비명이 계속 이어졌다.
“살려 주세요.”
사방이 바다라 도망칠 곳이 없었던 선원들은 구석으로 몰리자 손을 들어 올리며 항복했다.
하지만 황실 보물을 훔쳐 간 사실이 행여 외부에 알려지면 안 됐기에 철저히 증거를 없애라는 도현의 지시를 받은 사병들은 인정사정 보지 않고 무기를 휘둘렀다.
채 한 시진도 안 돼서 화물선을 모두 장악한 박영식과 사병들은 혹시 숨어 있는 자가 없는지 내부를 샅샅이 수색했다.
그런 뒤 죽은 선원들의 시신을 그대로 바다에 내버리고는 튼튼한 밧줄로 화물선과 판옥선을 연결해서 웅도로 견인해 갔다.
명나라 황실에서 모아 둔 보물을 도현의 부하들이 가로채 갔을 때쯤 직고구에 머물고 있던 천진 순무 풍원양은 갑자기 밀어닥치기 시작한 피난민들을 통해 북경이 반란군에게 함락됐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었다.
바로 하루 전에 금의위 천인장으로 위장한 박영식한테 관군이 잘 버티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풍원양은 그야말로 뒤통수를 한 대 세게 얻어맞은 충격이었다.
말을 타고 반나절밖에 안 걸릴 정도로 북경은 바로 지척인 데다 황태자를 포함한 황실 식구들이 모두 피신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반란군 수괴인 이자성이 당장 군대를 몰아올 것이 불을 보듯 뻔했다.
휘하 병력이 채 이만도 안 됐기에 백만이 넘는 반란군과 맞서 싸운다는 건 감히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순무라는 고위직에 있었던 만큼 반란군에게 잡히면 목숨을 보존하기 어려울 테지만 황태자와 황실 식구들을 잘 이용한다면 뭔가 방법이 생길 것도 같았다.
이대로 배를 타고 도망갈지 아니면 보호하고 있는 황태자를 내주고 항복할지 풍원양이 한참 고민을 거듭하고 있을 때 뜻밖의 인물이 직고구에 도착했다.
바로 봉황상단 북경 지부장인 김하방의 도움(?)을 받아 극적으로 성을 탈출한 숭정제 일행이었다.
죽었다고 생각한 황제가 살아 돌아오자 분위기는 급반전 됐는데 비록 북경이 함락됐지만, 아직 넓고 비옥한 강남 지역이 남아 있었기에 원래 계획대로 배를 타고 남하해 세력을 재정비한다면, 다시 재기할 가능성이 충분히 있었다.
최악의 경우라도 대륙을 가로지르는 양자강을 경계선으로 예전 남송처럼 반란군과 청군을 막아 내고 강남에서 새 출발을 할 수 있었다.
희망이 생기자 직전까지 갈등을 거듭하던 풍원양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숭정제에게 아부를 떨었다.
천진 순무와 합류해 한숨을 돌린 숭정제는 요동 총병 오삼계에게 전령을 보내 속히 반란군을 토벌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이미 북경이 함락됐다는 소식을 들은 오삼계는 급히 달려가던 걸음을 멈추고는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아무리 농민군이 주를 이루는 오합지졸이라고 해도 숫자가 백만이 넘고 무엇보다 든든한 방패막이인 북경성 안에 들어가 있는 상대를 절반도 안 되는 병력으로 먼저 공격하는 건 여러모로 무리였기에 당연한 행동이었다.
그렇지만 북경이 함락된 뒤 역도들에게 자금성이 마구 약탈당하고 불에 타 잿더미로 변했다는 소식을 듣고 자존심에 상처가 난 숭정제는 이런 오삼계의 모습이 겁을 먹고 전투를 회피하는 걸로 비춰졌다.
태감 왕승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화가 난 숭정제는 당장 토벌에 나서지 않으면 황명으로 오삼계의 벼슬을 박탈하고 죄를 묻겠다며 방방 뛰었다.
재차 전령을 보내기 전에 황제가 직고구에 있다는 걸 알게 된 이자성이 군사 오만을 빼내 쳐들어오자 화들짝 놀란 숭정제는 허겁지겁 배를 타고 강남으로 달아나 버렸다.
이렇게 원래 북경이 함락되자 어린 두 공주가 욕을 당하기 전에 칼로 찔러 죽이고 황궁 뒤편에 위치한 경산으로 올라가 자결하는 운명이었던 숭정제가 살아서 강남에 가는 것으로, 도현은 역사의 수레바퀴를 크게 바꿔 놓았다.
한편 봉황상단을 통해 계획한 대로 일이 순조롭게 끝났고 숭정제가 강남으로 피신했다는 걸 보고받은 도현은 바로 형인 소현세자를 찾아갔다.
미리 이목을 차단했는지 시중을 드는 궁인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가운데, 세자전 내관 최형외만이 홀로 문 앞에 서 있다가 도현을 보고는 허리를 숙였다.
“어서 오시옵소서, 대군마마.”
“형님께서는 안에 계시지?”
“예. 두 분 대감께서도 함께 계십니다.”
“그래.”
누군지 알고 있다는 얼굴로 살짝 고개를 끄덕이자 최 내관은 도현의 도착을 알리며 직접 미닫이문을 열어 줬다.
“저하, 봉림대군께서 오셨사옵니다.”
“들여보내게.”
“드시지요,”
“칠현이 넌 여기서 최 내관과 함께 잡인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지켜.”
“알겠습니다.”
방 안으로 들어가자 소현세자를 가운데 두고 박황과 박노가 심각한 얼굴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가 도현을 쳐다봤다.
이미 도현을 통해 반란군이 북경을 공격하고 있다는 걸 들은 소현세자는 그가 자리에 앉기도 전에 다급히 물었다.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괜찮아. 그것보다 새로운 소식이 들어왔다면서?”
“네.”
굳어 있는 도현의 표정에 소현세자는 안 좋은 이야기라는 걸 직감했다.
“뭔지 어서 말해 봐.”
“반란군에게 북경이 함락됐고 명 황제는 배를 타고 강남으로 도망쳤다고 합니다.”
“저런!”
“이럴 수가!”
소현세자는 물론이고 양옆에 앉아 있는 박황과 박노 역시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한탄을 쏟아 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하늘처럼 생각했던 명국이 청나라도 아니고 하찮은 농민 반란군 따위에게 도성을 빼앗기며 힘없이 무너질 줄은 전혀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었다.
말 그대로 충격이었다.
그런 세 사람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도현은 차분하면서도 냉철한 태도로 이야기를 계속 이어 갔다.
“오래전부터 아래위로 나라가 섞여 들어가고 있었던 걸 생각하면 여태 버틴 것도 대단하다고 봐야지요.”
“황제가 살아 있고 비옥한 강남 지역이 남아 있으니 아직 명국이 끝난 건 아니지 않습니까?”
심양에 와서 이것저것 많이 보고 도현이 옆에서 생각을 바꿔 줬지만 그래도 아직 고정관념을 완전히 깨지 못했는지 대빈객 박황이 명나라에 대한 미련을 보였다.
그러자 도현은 이제부터라도 박황이 현실을 바로 직시할 수 있게 만들어 주기 위해 고개를 내저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당장 천도를 통해 국가의 명맥은 이어 가겠지만 강남 역시 오랜 기근과 수탈에 피폐해져 있고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있으니, 오래 버티기는 힘들 겁니다. 무엇보다 예친왕이 이 좋은 기회를 그냥 보고만 있겠습니까?”
“그럼…….”
말끝을 흐리는 부빈객 박노를 보며 도현은 확신에 찬 얼굴로 이야기를 했다.
“당장 팔기군을 몽땅 소집해 북경으로 진격하겠지요.”
“하지만 산해관이 버티고 있는데 그게 쉽겠습니까?”
“아무리 천혜의 요새라고 해도 후방이 혼란에 빠지고 지휘관인 오삼계 총병이 대부분의 병력을 이끌고 자리를 비운 상태라면 예전 같은 힘을 발휘할 수 없을 겁니다.”
아무리 두 대신이 군사에 대해 지식이 적어도 이런 상태에서는 명군이 제대로 싸울 수 없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산해관이 뚫린다면 거친 늑대 같은 청군이 반란군을 밀어 내고 북경과 화북지역을 제패하는 건 시간문제였다.
여기까지 생각한 소현세자는 허탈한 얼굴로 긴 한숨을 내뱉었다.
“후우. 청이 대륙의 새로운 패자가 되면 지난 병자년의 치욕을 되갚기는 더 어려워지겠군.”
“저하…….”
애써 한 가닥 희망을 남겨 뒀지만 세 사람 모두 이제 복수가 불가능해졌다는 걸 확실히 깨달았다.
무겁게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 잠시 아무런 말없이 고심을 거듭하던 소현세자는 뭔가 결심을 내렸는지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화가 나고 안타깝지만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이제 청과의 관계를 새롭게 정리해야 될 것 같소.”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더 늦기 전에 명과의 사대 관계를 완전히 청산해야 된다는 거요.”
북경이 함락됐다는 것보다 더 충격적인 말에 두 대신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기겁을 했다.
“그러면 신료들뿐만 아니라 사대부들이 전부 들고일어날 겁니다.”
“맞사옵니다. 그건 신중하게 생각하셔야 됩니다.”
“지는 해가 아니라 기둥뿌리까지 다 무너진 명국을 계속 붙잡고 있어서 우리 조선에 무슨 득이 있겠소? 그러다가 청국의 미움을 받아 나중에 보복이라도 한다면 어쩔 거요? 이번 일에 대한 보고서를 아바마마께 보내면서 이제 명국 대신 청과 손을 잡아야 된다는 내 뜻을 확실히 알릴 것이오.”
폭탄 발언에 두 대신들뿐만 아니라 도현도 소현세자가 이렇게 위험한 행동을 할 줄은 몰랐기에 깜짝 놀랐다.
잘못하면 큰일이 나겠다는 생각에 도현이 급히 나서 만류했다.
“형님 생각은 저도 충분히 공감하지만 지금은 아닌 것 같습니다. 사대부들 사이에 뿌리 깊이 박혀 있는 친명 사상을 한순간에 바꾸기 어렵고 자칫 큰 반발을 불러올 수도 있으니까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사고를 변화시켜 나가는 게 좋을 겁니다.”
그러자 두 대신들도 도현의 말을 거들었다.
“대군마마의 말씀이 맞사옵니다.”
“가뜩이나 저하에 대한 소문이 좋지 않은데 이걸로 더 큰 오해를 받게 될지도 모르니 신중하셔야 됩니다.”
이쯤 되면 생각을 바꿀 만도 했지만 소현세자는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평소와 달리 계속 고집을 피웠다.
“그렇게 이것저것 다 따지다 보면 죽도 밥도 안 된다는 걸 왜 모르시오! 어차피 한번 부딪쳐야 된다면 명국이 무너지는 지금이 아바마마와 사대부들이 환상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틀을 깨 버릴 절호의 기회요!”
서탁 위에 올린 손으로 주먹을 꽉 말아 쥐고 있는 것이 단단히 결심을 굳힌 모습이었다.
확실히 소현세자의 주장처럼 현실을 바로 깨닫게 해 줄 좋은 기회인 건 맞았지만, 역으로 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조선을 도와준 제조지은과 병자년의 치욕을 잊고 원수인 청국에 빌붙으려 한다며 더 큰 반발을 불러올 수도 있었기에 도현은 미간을 찌푸렸다.
사대부들의 반응은 제쳐 놓더라도 호시탐탐 소현세자를 끌어내리려고 노리는 숙원 조씨에게 좋은 빌미를 제공하는 일이 된다.
앞으로 나서기보다는 소현세자를 방패막이로 삼아 조선을 개혁하길 원하는 도현 입장에서는 뜻을 펼치기도 전에 추잡한 권력 다툼에 휘말려 형이 다치는 일은 어떻게든 피하고 싶었다.
“어떤 결정을 내리시든 전 형님 편이지만, 너무 급하게 서두르지 말고 맑은 정신으로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도현이 정색을 하며 말하자 소현세자는 약간 누그러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고집스러운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하지만 결정이 변하지는 않을 것 같구나.”
절로 한숨이 나왔지만 지금 당장 서신을 적어 보내지 못하게 막은 걸 위안으로 삼으며 도현은 더 이상 이 문제 대해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총명하면서도 다른 사람의 의견을 잘 듣던 소현세자가 갑자기 이렇게 강경한 성격으로 바뀐 건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도현의 추측으로는 한양에 갔을 때 인조가 세자 부부를 괄시하며 편협적인 태도를 보인 게 영향을 끼친 것 같았다.
몇 년 만에 겨우 귀국을 했는데 그런 대우를 받았으니 당연히 화가 날 만도 했지만, 그래도 아직 국왕은 인조였기에 둘이 대립하는 상황이 만들어지는 건 여러모로 좋지 않았다.
다음 날까지 도현이 몇 번이나 찾아가 이야기했지만 소현세자는 좀처럼 고집을 꺾지 않았고 결국 중요한 정보를 언제까지 본국에 알리지 않고 쥐고만 있을 수는 없었기에 인조에게 보내는 서한을 작성해서 보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도현의 설득에 문구를 최대한 부드럽게 바꿔 적었다는 것이다.
그래 봤자 조정과 사대부들의 생각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뜻이 담겼기에 한차례 파란을 피할 수는 없겠지만, 최악의 상황만은 벌어지지 않게 하려는 작은 노력이었다.
그런 가운데 예상대로 섭정인 예친왕은 반란군이 북경을 함락하고 산해관이 비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팔기군에 비상 소집령을 내렸다.
다시 전쟁이 벌어진다는 소식에 얼마 전 있었던 내분의 흔적을 지우고 정상을 찾아가던 심양 거리는 다시 팽팽한 긴장감에 휩싸였다.
이런 분위기 속에 소현세자와 도현은 잠시 만났으면 좋겠다는 전갈을 받고 마차를 타고 예친왕부로 갔다.
따각따각!
말들의 움직임에 따라 좌우로 흔들리는 마차에 몸을 맡기고 근심스러운 얼굴로 앉아 있던 소현세자는 맞은편에 있는 도현을 보며 입을 열었다.
“이번에도 지원군을 요구하겠지?”
시선을 든 도현은 잠시 생각을 정리하고는 이야기를 했다.
“글쎄요.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겠지만 현실적으로 병력을 준비하고 전장까지 오려면 시간이 엄청 걸릴 테니 그것 때문에 저희를 부르지는 않을 거예요.”
“그럼 뭘 원하는 거지?”
소현세자가 의아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도현이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이건 순전히 제 생각인데요.”
“뭐든 좋으니까 짐작되는 것이 있으면 말을 해 봐.”
“이번 출정에 저희 두 사람을 데려가려는 것 같아요.”
“우릴 말이냐?”
“예.”
“그래서 무슨 이득이 있다고?”
“형님은 앞으로 조선의 국왕이 될 사람이니 상국으로 여기는 명국이 쓰러지는 걸 직접 보여 주고 청국을 알아서 잘 섬기라며 압박을 가하려는 것 아니겠어요.”
이야기를 들은 소현세자는 안색을 굳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도 있겠네.”
“피가 난무하는 전장에 가야 되는 것이 조금 꺼림칙하지만 가뜩이나 어려운 나라 살림에 병력과 물자를 요구하는 것보다 낫잖아요.”
“하긴…….”
양쪽 어깨를 으쓱이며 하는 도현의 말에 소현세자는 씁쓸한 미소를 입가에 지어 보였다.
그렇게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마차는 어느새 예친왕부 안으로 들어섰다.
미리 마중을 나와 있던 집사를 따라 익숙한 정원을 지나간 두 사람은 바로 작은 대전이라고 불리는 예친왕의 집무실로 안내되었다.
“어서들 오게나.”
책상 앞에 앉아 붓을 들고 뭔가를 쓰고 있던 예친왕이 고개를 들어 반갑게 맞이했다.
잠시 인사를 나누면서 도현과 소현세자가 각각 의자에 나눠 앉자 예친왕은 서예 연습을 하던 종이를 옆으로 치우고 본격적으로 말을 꺼냈다.
“두 사람 다 북경에 변고가 생겼단 얘기는 들었을 걸세.”
“예, 알고 있습니다. 반란군이 명국 황제를 몰아내고 자금성을 차지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형인 소현세자가 조심스럽게 대꾸했다.
“물론 큰일이긴 하지만 한편으론 어처구니가 없더군. 반란군 놈들에게 선수를 빼앗기다니 말이야.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우리로서도 가만히 있을 수 없지 않겠나.”
그렇게 말하고 예친왕은 앞에 놓은 찻잔을 들어 한입 마시면서 약간 뜸을 들인 뒤, 이어 말했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진정한 대륙의 패자가 누구인지 만천하에 알려야 한다는 의견이 많아서 출병을 결행하기로 했네.”
“그러시군요.”
아직 상대의 속내를 알 수 없어서 소현세자가 애매하게 맞장구를 치자 예친왕이 날카롭게 눈을 빛내며 말했다.
“그래서 말인데, 두 사람이 나와 함께 가 줬으면 좋겠네만.”
“함께 출병하자는 말씀이십니까?”
“그러네.”
순간 소현세자가 말문이 막힌 사이, 도현이 재빠르게 끼어들어 말했다.
“저희가 괜히 따라가 봤자 귀찮기만 할 텐데요.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아니, 젊고 능력이 출중한 자네들이 곁에 있는 것만으로 큰 도움이 된다네.”
허허허 웃으며 예친왕이 덧붙였다.
“명국이 멸망하고 우리 대청국이 대륙에 첫 깃발을 꽂는 영광스러운 순간을 직접 목도할 수 있도록 호의를 베푸는 걸세. 두 번 다시 없을 기회라고 생각하네만, 그렇지 않은가?”
거절을 용납하지 않는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한 말투를 들으니 보이지 않는 서늘한 칼날이 폐부에 꽂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럼 제가 가도록 하지요. 형님께선 최근 학문에 몰두하신 나머지 기력이 상하셔서 몸 상태가 좋지 못하니 심양에 남아 계시도록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아니, 그게 무슨 소리인가. 그런 이유라면 더더욱 멀리 떠나 바람을 쐬어야지.”
그러면서 예친왕은 사뭇 걱정하는 것 같은 눈빛으로 소현세자를 응시했다.
“오랜만에 말을 타고 몸도 좀 움직여 낯선 타지의 문물을 접하다 보면 시름시름 앓는 것 따위 싹 날아갈 걸세.”
“…….”
“이보게.”
예친왕은 한쪽에 시립해 있던 집사를 불러 말했다.
“얼마 전에 진상받은 귀한 환약이 있었지? 그걸 창고에서 꺼내 나중에 소현세자가 나갈 때 건네주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공손하게 허리를 숙이는 집사와 예친왕을 보며 도현은 속으로 당했다 하고 쓴물을 삼켰다.
이야기의 흐름을 보아하니 애초부터 소현세자와 도현, 두 사람을 다 데리고 가기로 작정한 듯 어디를 둘러봐도 빠져나갈 구멍이 없었다.
그물에 갇힌 물고기 같은 심정이 되어 소현세자를 슬쩍 곁눈질한 도현은 어쩔 수 없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가 다시 표정을 가다듬고 말했다.
“왕야의 호의를 감사히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럼 지금 당장이라도 돌아가서 언제라도 출발할 수 있도록 준비하지요.”
“음, 그러시게. 출정은 사흘 후니까 그렇게 알고 있게나.”
“예.”
도현은 벌떡 일어나서 포권을 한 뒤 소현세자를 눈빛으로 재촉해서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집사를 따라 밖으로 나가는 두 사람을 보며 의자에 앉은 예친왕은 얼굴 가득 득의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예친왕부에서 돌아와 이번 출병에 두 사람이 동행을 하게 됐다는 소식을 전하자 관저가 발칵 뒤집혔다.
“가뜩이나 주상전하께 보낸 서신에 명을 버려야 된다는 내용을 적어 보냈는데 북경을 공격하는 것에 참여한다니 그건 절대 안 됩니다.”
“맞습니다. 이 소식이 전해지면 세자 저하의 입장이 아주 난처해질 수도 있습니다.”
박황을 비롯한 관저 관리들이 이구동성으로 출정을 반대하자 상석에 앉은 소현세자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후우. 나도 가기 싫소이다. 하지만 섭정인 예친왕이 강력하게 요구하는 걸 어떻게 거절할 수 있겠소.”
황제보다 더 큰 권력을 휘두르는 예친왕의 힘을 모르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에 관리들은 안타까운 얼굴로 침음성을 흘렸다.
“하필이면…….”
“으음.”
그러자 소현세자 옆에 있던 도현이 묵직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이미 결정된 사항인데 이제 와서 왈가왈부해 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소. 그것보다 형님과 내가 전장에 나가 있는 동안 한양 조정에서 엉뚱한 일을 벌이지 않도록 여러분들이 힘을 써 줘야 되겠소.”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일 말석에 자리한 사서 김종일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묻자 도현은 좌중을 쓸어보고는 이야기를 이었다.
“다들 알다시피 한양에는 형님을 세자 자리에서 끌어내리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는 무리가 있소. 이들에게 최근 상황은 놓칠 수 없는 기회일 테니, 분명히 뭔가 움직임이 있을 거요. 그걸 막으라는 것이오.”
소현세자의 신변에 이상이 생기면 심양 관저에 있는 이들도 영향이 없을 수 없었기에 이 문제는 관리들한테도 민감한 일이었다.
“뜻은 알겠습니다만 심양에 있는 저희들이 한양에서 벌어지는 일에 관여할 방도가 없지 않습니까?”
대빈객인 박황의 말에 도현은 살짝 눈가를 찡그리고는 답답하다는 듯이 이야기를 했다.
“본국에 있는 지인들을 통해 영향력을 행사하면 되지 않겠소.”
관리들은 무릎을 치며 탄성을 내뱉었다.
“아! 그렇군요.”
박황만 해도 이조참의까지 지내며 조정 안팎에 지인들이 많았는데, 관저에 있는 관리 수십 명이 서신을 보내 소현세자를 지지해 줄 것을 부탁한다면 상당한 도움이 될 것이다.
“중요한 일이니 꼭 부탁하겠소.”
“밤을 새워서라도 편지를 적어 보낼 테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눈을 빛내며 결의(?)를 다지는 관리들의 모습에 도현은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상석에 있던 소현세자가 헛기침을 해서 주위를 환기시키고는 진지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우리 둘이 자리를 비우는 동안 대빈객 박황을 중심으로 모두들 하나로 똘똘 뭉쳐 관저를 잘 이끌어 나가 주길 기대하겠소.”
“최선을 다 하겠사옵니다, 저하.”
사흘 뒤 도현과 소현세자는 호위 서른 명과 함께 관저 식구들의 배웅을 받으면서 출병하는 청군 대열에 합류했다.
무기만 쥐여 주면 훌륭한 기병으로 변신하는 유목민족의 특성상 소집 기간은 짧았지만 섭정인 예친왕은 무려 이십만 명이 넘는 병력을 끌어모을 수 있었다.
전부 말을 탄 기병이었는데 홍타이지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산해관을 공격한 것이 얼마 안 됐기에 홍이포와 화약이 거의 바닥을 드러냈지만 예친왕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신속한 이동을 위해 홍이포는 최소한의 숫자만 가져갔고 보급품도 병사들이 예비로 끌고 다니는 말에 실은 걸 제외하고는 전부 현지 조달을 하기로 했다.
청국에서 현지 조달이란 곧 약탈을 의미했는데, 앞으로 화북 지역을 점령해 통치하려면 이런 행동을 삼가야겠지만 정치보다는 정복에 신경이 치우쳐 있는 예친왕은 괘념치 않았다.
이것만 봐도 청국이 유목국가의 한계를 벗어날 수 있도록 적절히 중심을 잡아 준 범문정과 이신들의 부재를 단적으로 보여 줬다.
아무튼 무거운 것들을 모두 내버리고 가볍게 출발한 청군은 예친왕의 계획대로 빠르게 이동해 심양을 떠난 지 닷새째 되는 날 산해관에 도착했다.
도현은 말 위에 앉아 벌써 세 번째로 보는 산해관의 웅장한 모습을 복잡한 시선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산해관이군요.”
“그렇구나. 평생 한 번 보기도 힘든 곳을 너와 난 세 번이나, 그것도 관문을 함락시키기 위해 오다니 정말 기구한 운명인 것 같구나.”
소현세자의 한탄 섞인 이야기에 도현도 수긍을 하는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정말 이번에는 여길 뚫을 수 있을까?”
막상 산해관 앞에 도착하자 눈빛이 흔들리는 소현세자와 달리 도현은 확신에 찬 얼굴로 말했다.
“저기 성벽 위에 있는 명나라 병사들이 당황하는 모습을 보세요. 저것만 봐도 청군이 번번이 공략에 실패했던 난공불락의 요새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잖아요. 지휘관인 오삼계가 아직 복귀하지 않았으니 그야말로 껍데기만 남아 있을 거예요.”
“확실히 지난번하고 분위기가 다르긴 하구나.”
도현이 지적한 것처럼 명군은 갑작스러운 청군의 출현에 크게 당황하고 있었다.
병력의 수도 적었지만 무엇보다 지휘관인 오삼계의 부재와 북경이 반란군에게 함락되고 황제가 강남으로 피난을 떠났다는 소식에 사기마저 바닥을 기는 중이었다.
청군은 안절부절못하는 명군에게 시위라도 하듯 산해관 바로 앞에 주둔지를 세우고 공성전 준비를 했다.
이번에는 조선군이 참전하지 않았기에 주둔지를 만드는 동안 배정된 천막에서 짐을 풀고 편히 휴식을 취하던 도현과 소현세자는 회의를 한다는 전갈에 갑옷을 갖춰 입고 중앙에 위치한 예친왕의 거처로 갔다.
오십 명이 한꺼번에 들어가도 넉넉할 정도로 커다란 지휘천막에는 이미 연락을 받고 온 청군 장수들이 가득 모여 있었다.
휘장을 걷고 도현과 소현세자가 들어가자 호피가 씌워진 의자에 앉아 측근인 야골타와 뭔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예친왕이 두 사람을 보고 손짓을 했다.
“이리 가까이 오게.”
“예.”
“강행군을 하느라 힘들었을 텐데 괜찮나?”
“그럭저럭 견딜 만했습니다.”
예친왕의 시선이 소현세자를 지나 자신에게 오자 도현도 대답을 했다.
“청국에서 지내다 보니 말을 타는 데 익숙해져서 많이 힘들지는 않았습니다.”
그러자 예친왕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그렇다니 다행이오.”
예친왕이 턱짓을 하자 옆에 선 야골타가 한쪽 손에 들고 있던 검집 끝을 바닥에 세게 찍으며 외쳤다.
쿵!
“지금부터 회의를 시작하겠소!”
그러자 삼삼오오 친분 있는 사람들끼리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장수들이 자세를 바로 하며 가운데 앉은 예친왕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도현과 소현세자도 왼쪽 편에 자리를 잡았다.
스윽 모여 있는 장수들을 한차례 쓸어본 예친왕은 묵직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다들 명국에 변고가 생겼다는 건 잘 알고 있을 거요. 지금이야말로 명을 멸하고 대륙에 대청국의 깃발을 휘날릴 절호의 기회일 것이오! 하지만 그러려면 먼저 저기 앞에 서 있는 산해관부터 무너뜨려야 하는데 좋은 계책이 있으면 말들 해 보시오.”
예친왕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좌우에 서 있는 장수들이 호기롭게 나섰다.
“저에게 선봉을 맡겨 주신다면 하루 안에 산해관을 함락시켜 보이겠습니다.”
“전 반나절이면 성문 위에 청국 깃발을 꽂을 수 있습니다.”
“절 보내 주십시오!”
앞을 다퉈 선봉을 맡겠다고 자청하는 장수들을 흡족한 얼굴로 바라보던 예친왕은 왼편에 소현세자와 함께 서 있는 도현이 표는 내지 않았지만, 한심하다는 시선을 보내는 걸 보고 눈썹을 살짝 좁혔다.
“봉림대군.”
“예.”
“뭔가 할 이야기가 있는 것 같은데 한번 해 보시오.”
“……아닙니다.”
도현이 고개를 내저었지만 예친왕은 눈을 샐쭉하게 뜨며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지난번에도 좋은 계책을 내놔 많은 도움을 줬지 않소. 내 귀를 열고 들을 테니 어서 말해 보시오.”
자연스럽게 좌중의 시선이 모두 도현에게 집중됐다.
예친왕의 태도에 속마음을 조금이나마 들킨 걸 눈치챈 도현은 노련하지 못하게 표정 관리가 미흡했던 걸 자책하며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그럼 부족하지만 한 말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다들 처음부터 무력으로 산해관을 함락시킬 생각만 하시는데, 자고로 전쟁에 나가 제일 좋은 건 싸우지 않고 상대를 굴복시키는 거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도현과 사이가 별로 좋지 않은 야골타가 못마땅하단 얼굴로 시비를 걸었다.
“흥! 말은 그럴듯하지만 지난 몇 년간 우리와 피 터지게 싸워 온 녀석들인데 상황이 조금 어려워졌다고 순순히 손을 들고 항복할 것 같소.”
야골타의 태도가 거슬렸지만 여기서 예친왕의 측근인 녀석과 대립각을 세워 봤자 좋을 것이 없었기에 도현은 슬쩍 시비를 받아 넘기면서 말을 이었다.
“뭐,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야골타 장군의 말대로 상대를 설득하는 것이 쉽지 않겠지만 지금은 특별한 경우지 않습니까.”
“……?”
“반란군 때문에 후방은 엉망이 되고 황제까지 화북을 포기하고 강남으로 달아났으니 그야말로 사면초가, 끈 떨어진 연 신세가 아니겠습니까.”
장수들은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야골타는 도현의 말을 인정하는 것이 싫은지 계속 꼬투리를 잡았다.
“그렇다고 해도 서로 감정이 깊게 쌓인 우리보다는 같은 한족인 반란군과 손을 잡으려고 들지 않겠소!”
“하긴, 명국 놈들이 원래 뭣도 없으면서 콧대만 높으니.”
“맞아.”
“이거 반란군과 연합하기 전에 서둘러 산해관을 쳐야 되는 것 아니오?”
분위기가 다시 자기 쪽으로 넘어오자 야골타는 득의만만한 얼굴로 도현을 봤다.
하지만 도현은 약간의 동요도 없이 오히려 입가에 살짝 미소를 짓고는 야골타를 똑바로 쳐다봤다.
“물론 그럴 수도 있지만 야골타 장군은 중요한 사실을 하나 잊고 있는 것 같군요.”
“그게 뭐요!”
도전적으로 쏘아보는 야골타를 보며 도현은 이야기를 했다.
“비록 산해관을 지키며 청국을 막아 내는 최후의 보루 같은 역할을 하고 있지만, 오삼계 총병이 가진 막강한 병력을 두려워한 명국 황제가 그의 가족을 반강제로 북경에 인질처럼 잡고 머물도록 해 왔습니다. 그런데 반란군 수괴인 이자성이 북경을 함락시키자마자 부하들에게 약탈과 살육을 허락했고, 그 과정에서 자금성이 불타는 건 물론이고 많은 고관대작들의 집이 털리고 식솔들은 처참하게 죽임을 당했다고 하더군요.”
여기까지 이야기하고 도현이 잠시 말을 끊자 모두 돌머리만 있는 건 아닌지 장수 중 하나가 짧게 탄성을 내뱉었다.
“설마…….”
“혼란 속에 오삼계 총병의 처자식과 부모도 반란군 병사들에게 목숨을 잃고 말았다더군요. 거기다 아내는 강간까지 당했다고 하니, 오삼계 총병이 원수나 마찬가지인 반란군과 손을 잡으려고 할까요?”
순간 천막 안이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고 야골타와 도현의 신경전을 흥미진진하게 지켜보던 예친왕은 무릎을 치며 말했다.
“아무렴 가족을 죽인 원수와 함께할 수는 없지. 역시 봉림대군은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셨다니 다행입니다.”
예친왕의 말에 승자가 결정 났고 도현은 담담한 얼굴로 머리를 살짝 숙여 보였다.
야골타는 패배감에 입술을 꽉 깨물었다.
“끄으응.”
자기가 봐도 도현의 예상이 틀리지 않다는 것을 아니 그렇게 될 거라고 생각됐지만 그냥 승복하기에는 자존심이 너무 상했다.
조선의 왕자 주제에 예친왕의 관심을 받는 것이 질투가 난 야골타는 애써 화를 참으면서도 사나운 눈빛을 굳이 감추려 하지 않고 앞에 있는 도현을 무섭게 노려봤다.
도현 역시 야골타의 시선을 느꼈지만 그대로 무시해 버렸다.
그러자 도현이 자신을 비웃는다고 생각한 야골타는 더 큰 반감을 가졌다.
둘 사이에 흐르는 묘한 분위기를 예친왕도 눈치채고 있었지만 일부러 모르는 척하며 장수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만주 전사들이 흘린 피로 붉게 채색된 산해관을 직접 무너뜨리는 것도 좋지만 더 큰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항복을 받아 내고 북경으로 진격하는 게 여러모로 이로우니 봉림대군의 의견대로 오삼계에게 사신을 보내도록.”
“알겠습니다, 왕야.”
청군 진영에서 예친왕의 말은 곧 법이었기에 장수들은 허리를 숙이며 크게 대답했다.
야골타도 도현이 낸 의견대로 하는 것이 불만이었지만 더 이상 반대를 하지 않고 고분고분 지시를 따랐다.
다음 날 아침 예친왕이 직접 쓴 서신을 받은 사신이 산해관으로 갔다.
언제 청군이 쳐들어올지 몰라 전전긍긍하고 있던 명군은 사신이 오자 약간 당황스러워하면서도 조금이라도 전투를 늦출 수 있다는 생각에 기뻐하며 즉시 건네받은 예친왕의 서신을 북경 인근에 가 있는 오삼계 총병에게 보냈다.
이때 오삼계는 직속 병력과 여기저기서 모여든 패잔병들을 합쳐 총 이십만 대군을 거느린 채 북경에서 북쪽으로 백 리쯤 떨어진 벌판에 머물고 있었다.
사실 오랜 세월 북방 영토를 지키며 청군과 싸워 왔던 오삼계는 황제가 달아나고 산해관에 적이 몰려왔다는 연락을 받자마자 이자성이 세운 대순국에 투신하려는 마음을 먹고 있었다.
이때 이자성이 조금만 똑똑하거나 주위에 상황을 넓게 볼 수 있는 책사가 있었다면 오삼계를 회유하려고 했겠지만, 북경을 함락시키며 승리감에 도취된 반란군은 그런 노력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오삼계에게 당장 항복하지 않으면 군대를 몰고 가 전멸시키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악수를 뒀다.
거기다가 북경에서 벌어진 끔찍한 약탈과 살육이 생존자들을 통해 전해지고 본가에 있던 노복 한 명이 기적적으로 도망쳐 와서 부모와 처자식이 반란군 병사들에 의해 처참하게 죽었다는 걸 알게 된 오삼계는 크게 분노했다.
당장 북경으로 진격해 이자성의 목을 베겠다며 이를 부득부득 갈고 있을 때 예친왕의 서신이 전해졌다.
서신에는 청국에 귀순해 온다면 부하들의 안전을 보장하는 건 물론이고, 산해관은 아니지만 한 지역의 왕으로 봉해 지위를 보장해 주겠다는 파격적인 제안을 담고 있었다.
명 황제에게 버림받고(?) 반란군한테 가족을 잃고 분노에 차 있던 오삼계는 예친왕의 제안을 보자마자 단번에 마음이 기울었다.
휘하 장수들도 공중에 붕 떠 있는 자신들의 위치에 불안감을 가지고 있었기에 오삼계의 결정을 듣고 약간의 실랑이가 있었지만 뜻을 따르기로 했다.
결정이 내려지자 오삼계는 신속하게 움직였는데 바로 항복 서한과 함께 진정성을 보이기 위해 자신의 애검을 풀어 예친왕에게 보냈다.
그리고 따로 전령을 보내 산해관을 지키고 있는 장수한테 청군에게 관문을 열어 주라는 지시를 내렸다.
끼이이익!
경첩 소리와 함께 이중으로 된 육중한 산해관 성문이 좌우로 열리자 오연한 자세로 안장 위에 앉아 있던 예친왕이 천천히 관문으로 말을 몰았다.
안쪽에는 오삼계 총병 휘하의 명나라 장수와 병사 들이 무기를 바닥에 내려놓은 채 양쪽으로 도열해 있었다.
태조 누르하치 때부터 줄기차게 두들겼지만 끝내 넘어서지 못하고 두 명의 황제가 목숨을 잃은 산해관을 자신이 열었다는 사실에 예친왕은 아찔한 희열을 느꼈다.
그 뒤로 팔기군 병사들이 말을 탄 채 줄을 지어 따라왔는데, 숫자가 얼마나 많은지 끝이 보이지 않는 행렬 위로 웅장하게 지어진 성루에는 천하제일관天下第一關이라는 현판이 초라하게 걸려 있었다.
도현과 소현세자도 청군을 따라 산해관에 입성했다.
천천히 앞 열을 따라 가던 소현세자는 눈앞에 보이는 천하제일관 현판을 착잡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철옹성 같았던 산해관이 이렇게 허무하게 뚫리다니…….”
그러자 옆에 있던 도현이 괜히 찔리는 마음에 뒷머리를 긁적였다.
“이거 제가 쓸데없는 이야기를 해서 청국을 도와준 것 같네요.”
“아니다. 아주 영향이 없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만큼 명국의 운이 다했다는 반증 아니겠느냐.”
“그렇지요.”
“한데 소문에 듣기로 북경을 점령하고 대순국이라는 나라를 세운 반란군의 군세가 무려 백만이 넘는다고 하는데 청군이 이길 수 있을까?”
소현세자의 말에 도현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백만이라고 하지만 대부분이 제대로 훈련받지 않은 농민들이고 병장기도 부족해 죽창이나 쇠갈퀴를 들고 있는 이들이 많다는데 겁낼 것이 뭐가 있겠어요. 지금이야 계속 승전을 거둬 기강을 유지하고 있지만 한 번이라도 패배를 당하거나 불리하다는 생각이 들면 한순간에 모래성처럼 흩어져 버릴 병력이에요.”
“그래도 무시할 수 없는 숫자 아니냐.”
“물론이죠. 자고로 싸움에서는 쪽수의 힘이 큰 영향을 끼치지만 기본적으로 청군은 엄청난 기동성을 지닌 기병이고 여기다가 정예인 산해관 병력까지 가세했으니 충분히 해볼 만하지 않겠어요?”
“으음.”
이야기를 들은 소현세자는 낮게 침음성을 흘리며 수긍하는 표정을 지었다.
지난 병자호란을 통해 청군의 무서움을 뼈저리게 느낀 소현세자는 초반에 승기를 잡는다면 도현의 말대로 반란군을 한순간에 제압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반대로 반란군이 북경성에 틀어박혀 농성전을 벌인다면 불리해지는 건 보급이 취약한 청군이었다.
원래 계획대로 청군이 현지 조달이라고 포장한 약탈을 실시한다면 보급은 충당할 수 있을지 몰라도 생활 기반이 화북에 있는 오삼계 휘하 병사들의 반발을 사게 될 테니 내분이 일어날 가능성도 있었다.
결국 시간 싸움이었는데 황당하게도 반란군은 계속된 승리에 도취된 나머지 성이라는 이점을 버리고 스스로 밖으로 나오는 악수를 두었다.
한편 산해관을 통과해서 화북 지역에 발을 들인 예친왕은 약간의 병력을 남겨 성을 지키게 하고는 기존 명나라 병력까지 흡수해 곧바로 북경을 노리고 남하했다.
산해관이 있는 산악 지대를 벗어나 북경까지 이어진 넓고 푸른 평야에 막 들어선 청군은 갑작스럽게 일단의 군대와 조우했다.
“저건 어디서 오는 군대지?”
소현세자의 말에 고개를 옆으로 돌린 도현은 뿌연 먼지를 일으키며 나타난 정체불명의 무리가 들고 있는 깃발을 확인하고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대순군이네요.”
“그럼 반란군이라는 말이냐?”
“예.”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도현과 달리 소현세자는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니, 반란군이 어떻게 여기에 나타난 거지?”
“보나마나 오삼계 총병의 뒤통수를 치려고 우회를 하다가 재수 없이 우리하고 맞부딪친 거겠지요.”
“……!”
청군과 조우한 부대는 명나라 장수였다가 이자성에게 투항해 한자리 차지한 당통唐通이라는 자가 지휘하는 병사들이었다.
도현의 짐작대로 오삼계의 후방을 치기 위해 오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급히 달려오다가 청군과 맞닥뜨린 것이다.
선두에 서서 병사들을 이끌고 있던 예친왕은 반란군의 출현에 마치 먹이를 발견한 맹수처럼 눈을 번득였다.
“후후후. 마침 잘됐군. 반란군 놈들의 실력이 얼마나 되는지 한번 볼까? 야골타.”
“옛!”
“적들을 쓸어버리고 와.”
머리를 숙인 야골타는 예친왕의 지시에 씨익 한쪽 입꼬리를 위로 말아 올리며 크게 대답했다.
“금방 정리하고 오겠습니다.”
잠시 뒤 본진에서 갈라져 나온 기병 삼만은 야골타를 따라 오른쪽 측면에 나타난 반란군을 공격했다.
“돌격!”
“우와아아!”
두두두두!
뜻밖의 상황에 우왕좌왕하고 있던 반란군은 청군 기병들이 함성과 함께 거친 말발굽 소리를 울리며 달려오자 크게 당황했다.
“이런! 어서 방어진을 갖춰.”
“창병 앞으로!”
그나마 고위 장수였던 당통이 정신을 차리고는 목에 핏대를 세우며 방어대형을 갖추라고 부하들을 다그쳤다.
하지만 대부분 농민 출신인 병사들은 무섭게 달려드는 청군의 모습에 겁을 집어먹고 그대로 얼어 버렸다.
“흐익.”
“어, 어떻게.”
“우린 다 죽었어.”
공포는 빠르게 병사들 사이로 번져 나갔고 혼란에 빠진 반란군은 명령이 전혀 안 먹히며 전투를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승패가 결정 났다.
양측의 거리는 순식간에 좁혀졌고 마침내 커다란 충돌음과 함께 맞부딪쳤다.
콰콰꽝!
“크악.”
“으윽!”
이히히힝.
“꾸억.”
뭔가 부딪치고 절단되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렸고 사이사이 비명이 울려 퍼졌다.
서걱!
“커허억.”
선두에 선 야골타는 산해관에서 도현한테 망신당한 걸 분풀이라도 하듯 묵직한 철퇴를 마구 휘둘렀다.
퍽! 퍽!
쇠사슬 부딪치는 소리를 내며 철퇴가 내려쳐질 때마다 반란군 병사들의 머리가 수박처럼 깨져 나갔다.
순식간에 주위는 피바다로 변했고 다른 청군 기병들도 반란군을 거세게 몰아붙였다.
반면 반란군들은 마치 늑대에게 습격을 당한 양 떼처럼 겁에 질린 채 이리저리 도망치기 바빴다.
대형은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흐트러졌고 양쪽이 뒤엉켜 난전이 벌어지자 반란군이 훨씬 숫자가 많은데도 추풍낙엽처럼 상대가 휘두르는 병장기에 목숨을 잃었다.
사기가 꺾이자 반란군은 훈련과 결집력 부족이라는 고질적인 문제점을 드러내며 스스로 무너졌고 벌판에는 피범벅이 되어 쓰러진 반란군들의 시체로 뒤덮였다.
벌써 절반가량이 죽고 나머지는 병장기를 내팽개치고 도망치자 더 이상 버티기 어렵다고 판단한 당통은 다급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후퇴! 후퇴해라.”
안 그래도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고 있던 반란군 병사들에게 당통의 명령은 촉매제 역할을 하며 이때부터 서로 먼저 달아나려고 같은 편끼리 밀치고 무기를 휘두르는 등 그야말로 아비규한의 상황이 벌어졌다.
“어서 달아나.”
“앞에 비켜!”
“아악.”
“같이 가.”
멀리서 형인 소현세자와 함께 전투를 지켜보던 도현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
“역시 이렇게 됐네요.”
“허 참. 그래도 어느 정도는 버틸 줄 알았는데 이건 아예 상대가 안 되니…….”
“애초에 주변 분위기에 휩쓸려서 모여든 이들이니 훈련받은 병사들처럼 움직이길 바라는 건 무리잖아요.”
“하긴.”
“어찌 됐건 이걸로 예친왕은 확실히 자신감을 가지게 되겠네요.”
“그렇겠구나.”
고개를 돌린 소현세자는 청군이 반란군을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는 걸 보고 흡족한 미소를 짓고 있는 예친왕을 봤다.
청국은 신흥 강국을 벗어나 대륙의 패자로 우뚝 서려 하는데 조선은 여전히 제자리걸음만 하고 있는 것 같아 소현세자는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 기색을 눈치챈 도현은 일부러 힘찬 목소리로 축 쳐진 소현세자의 기분을 북돋아 줬다.
“비록 지금은 청국이 앞서 나가고 있지만 최후에 웃는 사람은 우리가 될 테니 기죽을 필요 없어요.”
그러자 힘이 난 소현세자는 고삐를 쥔 손을 꽉 움켜쥐며 결의에 찬 얼굴로 말했다.
“그래. 만주 벌판에서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며 양이나 키우던 여진족도 제국을 세워 대륙의 패권을 노리는데, 우리라고 못할 것이 없지.”
“바로 그거예요.”
이렇게 두 사람이 새롭게 마음을 다잡고 있을 때 어느새 전투가 마무리됐다.
한마디로 청군의 완승이었는데 반란군은 수많은 시신을 남기고 겨우 수백 명만이 살아남아 흩어졌고 지휘관인 당통마저 호위들과 달아나다가 목이 잘렸다.
야골타는 잘린 당통의 머리를 창으로 찍어서는 자랑하듯 위로 치켜들고 돌아왔다.
예친왕은 야골타를 크게 칭찬했고 첫 승리에 사기가 크게 오른 청군은 다시 행군을 재개했다.
한편 항복을 하고 청군을 기다리고 있던 오삼계는 겁 없이 북경을 나와 북상한 이자성의 군대와 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공격!”
“크악!”
“윽.”
채챙! 챙! 챙! 챙!
서걱!
“끄허억.”
“와아!”
끝없이 펼쳐진 넓은 평원에서 충돌한 양군은 서로 뒤엉켜 죽고 죽이며 그야말로 혈전을 벌였다.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와 비명이 사방에서 울려 퍼지는 가운데 땅바닥은 흥건한 피와 시뻘건 육편으로 가득했다.
이미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고 차가운 바닥에 쓰러졌지만 전쟁의 광기는 아직도 피가 부족하다는 듯이 전장을 가득 채웠다.
순식간에 무너진 당통의 부대와 달리 나름 정예들로 이루어진 이자성군은 오삼계가 이끄는 산해관 주둔군에 밀리지 않고 거의 대등하게 싸웠다.
하지만 압도적인 숫자에 학익진을 펼쳐 상대를 반포위해 공세를 펼치는데도 오삼계군을 압도하지 못한다는 건 문제가 있었다.
그만큼 오삼계 휘하의 병사들이 전투에 능하고 뛰어나다는 반증이기도 했지만, 제대로 병법을 배우지 못한 이자성과 반란군 장수들이 효율적으로 공격을 못 하는 것도 한 이유였다.
“쏴라!”
슈슈슉! 슈슉! 슉!
“화살이다.”
“방패를 들어 올려.”
“컥!”
양쪽에서 쏴 댄 화살은 크게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와 가운데서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병사들을 덮쳤다.
방패를 가지고 있었지만 하늘을 새까맣게 뒤덮으며 쏟아지는 화살 비에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고 적아 구분도 없이 무차별적인 살육을 벌였다.
수많은 병사들이 몸에 화살이 박혀 비명을 내질렀는데 그렇게 머리 위로 화살 비가 떨어져 내리는 중에도 양쪽은 전투를 멈추지 않고 계속했다.
황제를 상징하는 황금색 곤룡포를 입고 본진에서 전황을 지켜보던 이자성은 쉴 새 없이 공격을 퍼붓는데도 좀처럼 상황이 좋아지지 않자 와락 인상을 찡그린 채 연신 휘하 장수들을 다그쳤다.
“한 줌도 안 되는 것들을 상대로 도대체 뭣들 하는 거야!”
“면목이 없습니다.”
“그게 오삼계가 이끄는 군대는 예전부터 정예로 유명한 놈들이라…….”
항복한 명나라 장수 출신 부하가 머뭇거리며 꺼낸 말에 이자성은 눈썹을 치켜 올리며 노호성을 터트렸다.
“그래서 어쩌라고? 이대로 군대를 뒤로 물려 북경으로 돌아갈까?”
“아, 아닙니다.”
“놈들이 정예라면 내 병사들도 여기까지 명군을 박살 내며 승리를 거둬 온 용사들이야! 알겠어?”
“예, 옛.”
이자성이 눈을 무섭게 부라리자 말을 꺼냈던 장수는 주눅이 든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숫자도 우리가 훨씬 많은데 이렇게 전투가 지지부진하다니 이게 말이 되냐고!”
“저희가 부족한 탓입니다.”
“맞아. 북경성 성문 앞에 효수된 놈들처럼 되기 싫으면 똑바로 하란 말이야!”
독려가 아닌 협박과 이자성의 스산한 눈빛을 받은 장수들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왜 대답이 없어?”
“아, 아닙니다.”
“당장 병사들을 더 투입해 적을 밀어붙이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그때서야 이자성은 만족했다는 듯이 표정을 풀었다.
이자성의 지시에 반란군 병력이 추가로 투입되면서 전투는 한층 더 치열해졌다.
뜨겁게 내려쬐는 태양 아래 양쪽 병사들이 목숨을 건 혈투를 벌이고 있을 때 갑자기 지축을 울리는 요란한 말발굽 소리가 울리더니 수많은 기병들이 불쑥 튀어나와 반란군 좌익을 통타했다.
두두두두!
이번에도 예친왕의 오른팔인 야골타가 선두에 서서 기병대를 이끌었다.
“돌격!”
“주제도 모르고 설치는 반란군 놈들에게 팔기군의 무서움을 보여 주자!”
“와아!”
“핫! 핫!”
아침부터 이어진 전투에 지쳐있던 반란군은 변발을 한 기병 수만이 이상한 소리를 내며 달려드는 모습에 혼비백산했다.
이자성도 청군의 출현에 큰 충격을 받았다.
“저놈들은 뭐야?”
“처, 청군 팔기입니다.”
아까 질책을 받았던 장수가 떨리는 목소리로 하는 말에 이자성은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부릅떴다.
“청군이 왜 여기에 있는 거야!”
이미 오삼계가 예친왕에게 항복했다는 걸 전혀 모르고 있던 반란군 지도부에게 청군의 존재는 엄청난 혼란을 일으켰다.
“설마 산해관이 함락되기라도 한 거야?”
그러자 부하 장수 중 하나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부정했다.
“아무리 오삼계가 병력 대부분을 빼냈다고 하지만 산해관이 어떤 곳인데 이렇게 단시간에 돌파할 수 있겠습니까?”
“그럼 저것들은 뭐야!”
“아무래도 오삼계가 청과 손을 잡은 것 같습니다.”
“젠장!”
이자성은 물론이고 주위에 있던 장수들 모두 얼굴을 구기며 침음성을 내뱉었다.
차라리 산해관이 함락된 것이 낫지 안 그래도 골치 아픈 상대인 오삼계가 청군과 손을 잡았다면 반란군에게는 그야말로 재앙이나 마찬가지였다.
어쩔 줄 몰라 하는 반란군과 달리 약간 지쳐 있던 오삼계 휘하의 병사들은 지원군의 등장에 크게 환호했다.
“지원군이 왔다!”
“조금만 더 힘을 내라!”
“죽여.”
용기백배한 오삼계군은 공격으로 재빨리 전환해 상대를 밀어붙였고 때맞춰 청군이 반란군 진형 좌익을 파고들었다.
“크아악.”
꽈꽈꽝!
무섭게 돌격해 든 청군은 병장기를 이리저리 휘두르며 반란군 병사들을 도륙했다.
말과 한 덩어리가 되어 달려드는 기병의 충격과 변발을 한 채 연신 요상한 소리를 내지르는 청군 자체가 주는 두려움에, 반란군 병사들의 움직임이 무뎌졌다.
보통 기병은 난전에 취약했지만 청군은 오히려 더 무서운 모습을 보이며 마치 피에 굶주린 악귀들처럼 상대를 유린했다.
이런 청군을 상대하기에 반란군 병사들은 훈련과 무장이 너무 부족했다.
반란군 좌익은 금방 시뻘건 피로 물들었고 오삼계군과 마주한 정면도 그다지 상황이 좋지 않았다.
드넓게 펼쳐진 평원이 좁게 보일 정도로 수많은 병사들이 한데 뒤엉켜 전투를 벌이고 있는 모습에 도현은 비록 관전자 입장이었지만 가슴속에서 뭔가 뜨거운 것이 끓어오르는 느낌이었다.
“후우. 정말 대단한데요.”
“그렇구나. 이렇게 많은 병사들이 건곤일척의 대결을 벌이는 걸 보고 있자니 절로 몸이 뜨거워지는 것 같아.”
소현세자도 흥분이 되는지 약간 붉게 얼굴이 상기되어 있었다.
“저도 그래요.”
“그런데 아까 오면서 부딪쳤던 무리와 달리 이번에는 반란군도 쉽게 무너지지 않는 것 같은데?”
슬쩍 반란군 본진을 쳐다본 도현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아무래도 수괴가 있는 본진이니까 나름 정예들일 테고 숫자까지 많잖아요.”
실제로 청군이 매섭게 파고들고 있지만 아무리 죽여도 거대한 바다에 내던져진 것처럼 계속해서 적병이 앞을 가로막았다.
“그럼 자칫 청군이 질 수도 있는 것 아니냐?”
청군이 패하면 함께 참전한 자신들도 영향이 있었기에 소현세자가 약간 걱정스러운 듯이 말하자 도현은 심드렁한 얼굴을 했다.
“조금 피해는 입겠지만 승패가 바뀌지는 않을 거예요.”
자신과 달리 너무나도 태평스럽고 확신에 찬 도현을 보며 소현세자는 살짝 고개를 내저었다.
“네가 그렇다면 맞겠지. 하여튼 배포가 두둑한 건 알아줘야 된다니까.”
“아직 형님 따라가려면 멀었습니다.”
“아부를 하는 거냐?”
“예. 나중에 국왕이 되셨을 때 한자리 얻으려면 지금부터라도 잘 보여야죠.”
“뭐? 하하하! 알았다. 내가 꼭 괜찮은 자리로 챙겨 주마.”
“약속했어요.”
“그래.”
양군의 대회전을 보며 바짝 긴장해 있던 소현세자는 도현의 농담에 크게 웃음을 터트리며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그사이 전투는 엄청난 피해를 입으면서도 나름 잘 버티고 있던 반란군 진형이 갑자기 허물어지며 상황이 급변했다.
계속된 전투에 지치고 공포와 두려움이 극에 달한 병사들이 한계점을 넘어가면서 전장을 이탈하기 시작한 것이다.
“도망치지 말고 적과 맞서 싸워라!”
장수들과 독전대들이 달아나는 병사들의 목을 베며 전투를 독려했지만 명령이 잘 먹히지 않았다.
오히려 전선이 뒤로 밀리며 청군과 오삼계군이 바로 앞까지 밀어닥치자 독전대들도 겁을 먹고 몸을 뒤로 돌려 도망쳤다.
“히이익.”
“사, 살려 줘.”
“으아악.”
병사들 전체가 겁에 질려 있는 상태라 질서정연하게 후퇴하는 건 기대할 수조차 없었고, 반란군은 서로 먼저 가겠다고 같은 편을 밀치고 넘어뜨리는 추태를 부렸다.
이 과정에서 수천 명이 깔리거나 밟혀 죽는 최악의 결과가 발생했다.
청군의 출현에 놀라기는 했지만 전투에서 질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던 이자성은 뜻밖의 사태에 크게 당황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병사들이 완전히 통제 불능 상태에 빠졌습니다.”
수하 장수가 어쩔 줄 몰라 하며 말하자 이자성은 들고 있던 지휘봉을 흙바닥에 내동댕이치며 소리쳤다.
“독전대를 더 내보내서 다시 싸우게 만들어!”
“이미 틀렸습니다.”
“그래서 이대로 도망치기라도 하자는 거야!”
이자성이 사나운 눈빛으로 노려봤지만 이대로 있다가는 꼼짝없이 개죽음을 당할 상황이었기에 장수도 물러서지 않았다.
“지금 물러서지 않으면 여기서 병력을 다 잃게 될 겁니다.”
순간 화를 내려던 이자성이 움찔하며 입을 다물었다.
군대를 잃으면 지금까지 어렵게 이룩한 모든 것들이 모래성처럼 모두 사라지기에 덜컥 겁이 난 것이다.
이자성이 얼굴을 와락 구기면서도 고함을 지르지 않고 가만히 있자 장수는 더 강하게 그를 설득했다.
“지금 패하더라도 북경에 가면 아직 폐하의 군대가 남아 있으니 그걸로 다시 재기를 하시면 됩니다. 하지만 계속 버틴다면 그 기회마저 사라지고 말 겁니다.”
북경에 남겨 둔 병력을 떠올린 이자성은 잠시 망설이다가 이내 아랫입술을 꽉 깨물며 말했다.
“제길! 후퇴 명령을 내려.”
그러자 주위에 있던 장수들은 모두 이제 살았다는 표정을 지으며 크게 대답했다.
“옛!”
“잘 생각하셨습니다.”
후퇴를 격렬하게 반대했지만 막상 물러서기로 결정하자 이자성은 제일 먼저 말 머리를 돌려 남쪽으로 달아났고 휘하 장수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반란군의 혼란은 더 심해졌고 청군과 오삼계군은 후퇴하는 적을 뒤쫓아 가면서 전과를 확대했다.
이날 전투로 북경을 함락시키고 스스로 황제 자리에 오르며 승승장구하던 이자성의 기세가 크게 꺾였고 예친왕은 전쟁에서 확실히 주도권을 쥐게 됐다.
훗날 화북회전이라고 불린 대전투에서 반란군은 무려 이십만 명이 죽거나 다치고 그 비슷한 숫자가 행방불명되거나 탈영해 사라졌고 이자성을 따라 후퇴한 병력은 채 십만이 되지 않았다.
청과 오삼계군도 육만이 넘는 사상자가 발생했다.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었지만 이자성의 대순군이 입은 피해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기에 누가 봐도 예친왕이 대승을 거둔 전투였다.
전투가 벌어진 벌판은 목숨을 잃은 병사들의 시신으로 새까맣게 뒤덮였고 근처에 흐르는 작은 실개천은 이틀이나 피로 붉게 물들었다.
허겁지겁 도망쳐 온 이자성은 청군이 곧 뒤 쫓아와 공격해 올 테고 그러면 버틸 수 없을 거라는 판단에 북경도 포기하기로 마음먹었다.
자신이 가질 수 없다면 알맹이를 몽땅 빼먹고 빈껍데기만 남겨 놓겠다는 생각에 이자성은 부하들에게 또다시 약탈을 명령했다.
이번에는 고관대작이나 부호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들까지 닥치는 대로 손을 댔다.
어차피 여길 떠날 거였기에 반란군 병사들은 인정사정 보지 않고 재물을 빼앗고 여자는 물론이고 젊은 장정들까지 잡아 강제로 끌고 갔다.
이 과정에서 조금이라도 반항하는 자가 있으면 가차 없이 병장기를 휘둘렀다.
“호오! 이게 뭐야?”
이제 열여덟 살쯤 됐을까 집 안을 뒤지다가 창고에 숨어 있던 곱상한 처녀를 발견한 반란군 병사들은 욕정에 찬 눈을 번들거렸다.
“고년 아주 실하게 생겼는데.”
“그러게.”
“꺄아악.”
수염이 덥수룩하게 난 털보가 처녀의 손목을 꽉 움켜쥐고 밖으로 끌어내자 아버지로 보이는 중년인이 다급히 뛰어왔다.
“이놈들아! 내 딸은 안 된다.”
“콱! 뒈지기 전에 저리 비켜.”
털보가 눈을 부라리며 손에 든 검으로 위협했지만 중년인은 필사적이었다.
“다른 건 다 가져가도 좋으니, 제발 딸만은 그냥 놔주시오.”
“귀찮게 하지 말고 꺼져.”
“아악.”
중년인을 밀쳐낸 털보는 이런저런 물건을 챙긴 보따리를 어깨에 멘 동료와 함께 겁에 질린 채 울먹이는 처녀를 데리고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그때 바닥에 쓰러졌던 중년인이 어디서 났는지 주먹만 한 돌을 들고 반란군 병사들에게 덤벼들었다.
“이 불한당 같은 놈들 죽어라!”
“이게 미쳤나!”
간발의 차이로 중년인이 휘두른 돌을 피한 털보는 욕설을 내뱉으며 검을 휘둘렀다.
서걱!
“끄으윽!”
가슴이 찔린 중년인은 가래 끓는 소리를 내며 뒤로 쓰러졌고 그걸 본 처녀는 기겁을 하며 애타게 외쳤다.
“아버지!”
“가만히 안 있어.”
털보가 손목을 붙잡고 놔주지 않자 처녀는 미친 듯 몸부림을 치며 울부짖었다.
“왜 죽였어! 이 나쁜 놈아!”
“이년이.”
눈물을 흘리며 달려들자 털보는 야차 같은 표정을 짓고는 처녀를 주먹으로 마구 때렸다.
퍽퍽! 퍽!
“아악.”
“그러다 죽겠다. 그만해.”
옆에 서 있는 동료의 말에 주먹질을 멈춘 털보는 얼굴이 엉망으로 뭉개진 채 피투성이가 된 처녀를 보며 씩씩 거친 숨을 내쉬었다.
“씨팔. 재수가 없으려니까.”
“끌고 가 봤자. 골치만 아플 것 같으니까 그냥 놔두고 다른 년이나 찾아보자고.”
“알았어.”
발로 쓰러진 처녀의 옆구리를 세게 걷어찬 털보는 바닥에 떨어진 쌀 포대를 집어 들고 동료와 함께 밖으로 나갔다.
“아, 아버지.”
두 명의 짐승이 사라지자 힘겹게 고개를 든 처녀는 앞에 있는 아버지에게 가려고 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겨우 바닥을 기어서 옆으로 간 처녀는 이미 숨이 끊어져 차갑게 식어 가는 아버지의 손을 붙잡고 오열했다.
“안 돼!”
이런 일이 북경 곳곳에서 벌어졌고 주민들은 밤새 약탈과 살인, 방화에 시달려야 했다.
그렇게 하루 동안 마음껏 약탈을 벌인 반란군은 청군이 올까 봐 날이 밝자마자 서둘러 자신의 근거지인 섬서성으로 후퇴했다.
멀리서 희미한 목탁 소리가 들려오는 고즈넉한 산사 한가운데, 주위를 오가는 이 아무도 없는 법당 안에 소연과 장씨 부인이 있었다.
평화롭고 한가로운 산사의 분위기와는 달리 소연은 어쩐지 안절부절못하는 눈빛을 하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바로 장씨 부인 때문이었다.
도현이 예친왕을 따라 출전한 이후 장씨 부인은 돌연 지아비의 무사귀환을 기원하는 삼천 배를 하겠다는 말을 꺼냈다.
당연히 그 말을 들은 세자빈은 몸에 무리가 간다며 말렸지만, 지아비의 안전과 무사를 빌기 위해서인데 어찌 말리시냐며 장씨 부인이 평소답지 않게 고집을 부리는 바람에 결국 허락하고야 말았다.
세자빈이 소개해 준 사찰은 심양 근처에 있는 작은 산사로, 규모가 크진 않지만 역사가 깊고 쓸데없이 오가는 사람이 적어 마음 편히 지낼 수 있을 거라 했는데 과연 그대로였다.
높은 신분에 있는 사람이라고 해서 딱히 특별 대우를 해 주는 것도 아니고, 필요 이상으로 굽실대지도 않아 좋긴 했으나 문제는 그게 아니다.
오늘로 벌써 사흘째.
말이 삼천 배지 가녀린 아녀자의 몸으로는 쉽게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비교적 체력이 남아 있던 첫날에도 밤에 끙끙 앓을 정도로 힘들었는데 지금은 서 있는 것조차 힘겨워 보였다.
산이라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데도 불구하고 장씨 부인의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고, 가지런히 모은 두 손끝은 가늘게 떨렸다.
잠시 쉬시면 어떻겠냐고 말하고 싶었지만, 이미 전날에 똑같이 그랬다가 불공을 드리는데 끼어드는 거 아니라며 야단을 맞은 기억이 있기 때문에 쉽게 말을 꺼내지 못했다.
“아.”
“마님!”
그런 생각을 하며 소연이 걱정 가득한 눈빛으로 지켜보는데, 돌연 장씨 부인의 몸이 휘청거렸다.
서둘러 장씨 부인을 부축한 소연은 옷 너머로 느껴지는 체온이 불덩이처럼 뜨거운 것을 알아차리고 깜짝 놀라 말했다.
“마님, 열이 나시잖아요!”
“괜찮다.”
장씨 부인은 얼른 안아 일으키려는 소연의 손을 가볍게 물리고 혼자 힘으로 힘겹게 일어섰다.
“하지만 마님, 이러시다간 몸 상하셔요.”
“삼천 배까지 얼마 안 남았어. 중간에 그만두면 안 하느니만 못하다.”
그렇게 말하고 고집스럽게 입술을 앙다문 장씨 부인은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는 소연을 보고 눈매를 부드럽게 휘었다.
“정말로 괜찮대도. 낭군님은 저 멀리서 목숨을 걸고 싸우고 계신데 아내인 내가 이 정도도 못 해내서야 되겠느냐. 게다가 아무리 온화한 부처님이라고 해도 불공을 드리던 걸 중간에 내팽개치면 엄청나게 화내실걸?”
“마님도 참.”
소연을 달래 주기 위해 일부러 장난스러운 말까지 하는 장씨 부인의 마음씨에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단정히 해 준 소연은 원래 자리로 돌아가는 대신, 장씨 부인의 대각선 옆에 서서 부처님께 절을 올렸다.
“뭐 하는 게냐?”
“마님께서 대군마마의 무사와 안녕을 비신다면, 저는 대신 마님의 건강을 부처님께 기원하겠어요.”
제대로 불공드리는 방법을 배우진 않았으나, 그동안 계속 장씨 부인이 절을 하는 모습을 지켜봐 왔기에 똑같이 따라 하는 것쯤이야 식은 죽 먹기였다.
“제가 원해서 하는 거니까 마님께선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만두게 하지 못할 바엔 차라리 곁에서 절이라도 함께하겠다는 소연의 태도에 장씨 부인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너도 참 어쩔 수 없는 애로구나.”
그렇게 말한 장씨 부인은 다시 두 눈을 감고 경건한 마음가짐으로 삼천 배를 올리기 시작했다.
‘자애로운 부처님이시여, 머나먼 전장에 가신 낭군님이 무사히 돌아오시기를 비나이다. 그분께 무슨 일이 생기면 전 살 수가 없어요.’
그렇게 되뇌며 장씨 부인은 쉬지 않고 정성을 담아 절을 했다.
삼천 배를 올리는 두 사람 뒤로 좋은 소식이 있으려는지 소나무에 까치 한 마리가 앉아 크게 울었다.
이자성이 떠나고 반나절 뒤에 청과 오삼계군이 뿌연 먼지를 피워 올리며 북경성 앞에 나타났다.
심양성도 컸지만 수백 년 동안 대륙을 지배해 온 제국의 수도답게 몇 배는 더 크고 웅장한 북경성의 모습에 도현과 소현세자는 감탄한 표정을 지었다.
특히 도현은 자신이 시간을 거슬러 오게 된 것이 북경 골동품 시장에서 구입한 반지 때문이었기에 혹시나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가슴이 살짝 떨렸다.
북경성을 앞에 두고 각자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정찰을 보냈던 척후병들이 돌아왔다.
말에서 내린 척후병들이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자 드디어 오랜 숙원을 이룬다는 생각에 약간 들뜬 예친왕이 급히 물었다.
“분위기가 어떠냐?”
“반란군 놈들이 다 도망쳐 버렸는지 성문이 활짝 열려 있고 성벽 위에도 적병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
이자성이 성문을 걸어 잠그고 버틸 줄 알았던 예친왕은 뜻밖의 보고에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러자 옆에 있던 야골타가 뭔가 수상하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이거 함정이 아닐까요?”
“함정?”
“네. 저희가 안심하고 성안으로 들어오게 해 놓고 기습을 가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였기에 예친왕은 시선을 들어 잠시 북경성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소현세자와 같이 있는 도현을 불렀다.
“봉림대군.”
“왜 그러십니까?”
“자네도 적이 매복해 있을 것 같나?”
자신이 이야기를 했는데도 예친왕이 도현을 불러 의견을 물어보자 야골타는 시기에 찬 눈빛으로 그를 쏘아봤다.
그걸 느꼈지만 도현은 그냥 무시해 버리고 질문에 대답했다.
“글쎄요. 그럴 가능성이 없지는 않지만 반란군이 전력을 수습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고 함락한 지 얼마 안 돼서 북경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했다는 걸 고려해 보면, 그냥 성을 포기한 것 아닐까요?”
이전부터 도현을 못마땅한 표정으로 보던 야골타는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빈정거리는 어투로 반박했다.
“아무리 그래도 황도라는 상징성이 큰 북경을 쉽게 포기할 것 같소?”
“황제가 머물러야 황도라는 것도 의미가 있는데, 이미 숭정제는 배를 타고 강남으로 피난을 가 버렸으니 그저 큰 도시에 불과할 뿐이죠. 뭐, 북경을 차지하고 있으면 어느 정도 위상을 세우는 효과가 있기는 하겠지만, 당장 목이 달아날 판인데 그런 것에 미련을 둔다면 바보 천치일 뿐이지요.”
양쪽 어깨를 으쓱이며 일부러 바보 천치라는 단어에 힘을 주자 마치 자신을 보고 하는 이야기 같아 야골타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런 야골타의 반응과 달리 예친왕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군.”
“하지만 매복의 위험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으니까 일단 오삼계군을 먼저 들여보내서 안전을 확인한 뒤에 입성하시지요.”
도현의 제안에 예친왕은 눈을 반짝였다.
“그거 괜찮은 생각이군.”
설사 함정이라고 해도 아군이지만 껄끄러울 수밖에 없는 오삼계군만 다치는 거니까 청군 입장에서는 손해 볼 것이 전혀 없었다.
아니, 오히려 나중에는 여러 가지로 골치 아파질 오삼계의 힘을 줄여 놓을 수 있으니 이익이었다.
“야골타.”
“옛!”
“오삼계 총병한테 전령을 보내서 먼저 입성하라고 해.”
결국 예친왕이 도현의 의견을 수용하자 야골타는 눈썹을 꿈틀거렸지만, 주군의 명령이었기에 불만을 애써 참고 머리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전령을 통해 예친왕의 지시를 전달받은 오삼계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나보고 화살 받이가 되어라 이거군.”
“이런 속이 뻔히 들여다보이는 수작은 거절하셔야 됩니다.”
“맞습니다.”
측근인 임표와 왕추용이 펄쩍 뛰는 것과 달리 뜻밖에도 오삼계는 예친왕의 지시를 순순히 받아들였다.
“입성할 준비를 시켜.”
“장군!”
“청국에 몸을 의탁하기로 한 이상 불필요한 신경전을 벌일 필요는 없어. 그리고 난 차라리 원수인 이자성을 직접 내 손으로 잡아 복수할 수 있게, 매복이 있었으면 좋겠네.”
“…….”
복수심에 이를 부드득 갈며 말하는 오삼계의 모습에 수하 장수들은 사랑하는 가족을 모두 잃은 그의 분노가 얼마나 큰지 잘 알고 있었기에 더 이상 만류를 하지 않았다.
잠시 뒤 오삼계가 지휘하는 산해관 주둔군은 혹시 있을지 모르는 매복에 대비해 바짝 긴장한 채 행군 대형을 만들어 성문으로 접근했다.
‘요동총병 오삼계’라 적혀 있는 깃발을 위풍당당하게 휘날리며 오삼계와 그 군사들이 성문을 지나 북경성 내 시가지로 향했다.
격한 전투의 흔적인지 성문 일부는 무너져 있고 지키는 병사 하나 없이 텅텅 비어 있었는데, 그 아래를 지나면서 오삼계의 마음에 여러 가지 복잡한 감정이 스쳤다.
“누구지?”
“또 반란군인가.”
“쉿! 눈을 마주치면 안 돼.”
갑옷을 입고 허리에 칼을 찬 병사들이 길을 지나가자 조심스럽게 속삭이는 소리들이 여기저기서 들렸다.
한때 대륙에서 가장 융성하고 화려했던 도시인 북경이지만, 지금은 마치 유령마을처럼 지나다니는 이 하나 없었고 건물 태반은 불에 그슬렸거나 반쯤 부서져 있는 모양새였다.
미처 피난 가지 못하고 북경에 남아 있던 주민들은 굳게 문을 걸어 잠그고 창문만 살짝 열어 오삼계 일행의 모습을 곁눈으로 훔쳐보았는데, 그간 얼마나 반란군한테 험한 꼴을 많이 당했는지 누구 하나 큰 소리를 내지 못하고 숙덕거리는 것이 전부였다.
그리고 얼마 후, 처음에는 공포와 혐오가 섞인 눈빛으로 바라보던 사람들 사이에서 조금씩 술렁거림이 퍼져 나갔다.
명나라 군대 복장을 한 산해관 주둔군의 모습이 가장 먼저 눈길을 끌었으며, 선두에서 병사들을 이끄는 오삼계의 늠름하고 당당한 풍모에 이어 마지막으로 결정타를 날린 것은 하늘 높이 치켜든 ‘요동총병 오삼계’라고 쓰인 깃발이었다.
“오삼계 장군이시다!”
“우리 명나라군이 반란군을 무찌른 거야!”
성질 급한 사람들 몇몇이 그렇게 외치며 밖으로 튀어나가자, 안에서 아이들을 돌보고 있던 아녀자들 역시 희망에 찬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그 모양을 보고 오삼계는 투구 아래로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일단 손짓을 해서 부하를 옆으로 불러 말했다.
“매복은 없는 모양이군. 뒤에 있는 본진에 얼른 이 사실을 알리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장군. 이랴!”
전령이 말머리를 돌려 뒤로 달려 나가자 오삼계는 큰 소리로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모두 당황하지 말고 침착해라. 주민들은 우리를 환영해 주는 것이니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손을 대서는 안 된다!”
우렁찬 고함 소리에 근처에 몰려든 북경 주민들은 모두 감격한 표정을 지었고, 너 나 할 것 없이 집을 박차고 뛰쳐나와 길가에서 열렬한 환호성을 내질렀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산해관 주둔군의 행렬이 거의 끝나간다 싶을 때쯤 뒤이어 들어오는 말 탄 병사들의 모습을 보고 사람들 사이에서 어리둥절한 말소리가 퍼져 나갔다.
“어라?”
“저 사람들도 우리 명군 병사들인가?”
“아냐, 잘 보라고. 저건…….”
꿀꺽 침을 삼키는 소리와 함께 한숨 같은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청군이다.”
명나라 군대와는 확연히 구별되는 복색.
나라의 강성함을 대변하듯 번쩍이고 튼튼해 보이는 두툼한 갑옷과 큰 대검, 우람한 덩치를 가진 군마는 보는 것만으로도 위압감이 느껴졌으며, 무엇보다 명군 병사들과 구별되는 변발을 한 모습은 흰 바탕에 검은 글씨로 크게 적어 놓은 ‘청’이라는 글자와 함께 사람들의 가슴을 아프게 찔러 왔다.
기름이 끓는 가마솥처럼 들썩이던 환호성이 순식간에 가라앉고 길가에 모여든 주민들의 표정이 어찌할 바 모르는 어린아이처럼 곤혹스러움으로 뒤덮이는 것을 느끼며, 소현세자와 도현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그들을 외면해 버렸다.
‘저 사람은 이런 상황에서도 당당하군.’
등허리를 꼿꼿하게 쭉 펴고 마치 원래 당연한 일인 것인 양 고개를 빳빳하게 쳐든 예친왕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도현은 생각했다.
물론 명나라의 수도인 북경에 군대가 입성하게 된 것은 청나라에 있어서 경사스러운 일이자 자랑스러운 승리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주위 분위기가 이런데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지을 수 있다는 건 역시 보통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확실히 역사에 이름이 남을 만한 인물이긴 하군.”
좋든 나쁘든 그릇이 큰 건 인정해야겠다고 속으로 고개를 끄덕이는데 돌연 예친왕이 한쪽 손을 들어 올리고 우뚝 멈춰 섰다.
무슨 일인가 싶어 앞을 살펴보니 스무 명 남짓한 인원의 사람들이 길 중간에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얼굴이 햇볕에 그을리지 않아 험한 일을 한 흔적이 없고, 수염을 길게 기른 것으로 보아 일반 백성 같아 보이진 않았는데, 그중에서 가장 연장자인 듯 보이는 노인과 뭔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오삼계가 뒤를 돌아보았다.
“무슨 일인가?”
행렬이 중간에 멈춘 것을 힐책하는 듯한 예친왕의 물음에 오삼계는 면목 없다는 표정을 짓더니 노인 일행을 가리키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이자들은 명나라 조정의 관리들인데, 저에게 갑자기 말을 걸어와서 그만…….”
“흐음?”
예친왕이 말에 탄 채로 아래를 내려다보자 노인을 위시한 관리들은 그제야 청나라 깃발을 알아보았는지 다가오던 자세 그대로 굳어선 말 한마디 벙긋하지 못했다.
“명의 관리들이라…….”
“저, 저희는…….”
오삼계를 보고 명나라 군대가 북경을 재차 탈환하러 온 것 인 줄 오해했던 관리들은 예친왕의 날카로운 눈빛에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 모습을 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은 눈동자로 바라보던 예친왕은 턱을 쓰다듬으며 느릿느릿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침 잘되었군.”
“네? 뭐, 뭐가 말입니까.”
관리들은 아직 상대의 신분도 제대로 알지 못하지만 어느새 경어를 쓰고 있다는 것조차 깨닫지 못했다.
“지금부터 자금성 안으로 들어갈 건데 내 직접 보진 못하였으나 소문으로 듣기엔 무척 크고 미로같이 복잡하다지. 오삼계 장군에게 부탁할 생각이었으나 이제 자네들이 있으니 길 안내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다는 말일세.”
“……!”
이보다 치욕적인 말이 또 어디 있을까.
하지만 칼을 허리에 찬 무시무시한 형상의 병사들에게 둘러싸인 관리들은 반항조차 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잠시 멈추었던 행렬이 다시 전진을 시작하고,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터덜터덜 걷는 흰 수염의 늙은 관리들을 착잡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도현은, 자금성으로 이어지는 탁 트인 대로가 나타나자 놀라서 숨을 멈추었다.
“여기가 자금성인가?”
옆에서 소현세자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지만, 도현의 귀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세계에서 손꼽히는 문화 유적지.
하늘의 아들이라 자칭했던 황제의 권세를 자랑하듯 양옆으로 쭉 뻗어 끝을 알 수 없는 긴 담장과 위로 한껏 치켜 올라간 처마, 붉은 칠을 한 지붕과 화려한 장식물.
발 디딜 틈도 없을 정도로 북적이는 관광객들 사이로 과연 대륙의 스케일은 다르다며 감탄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지금 이 모습은 어떠한가.
검게 그을려 보기 흉하게 변한 담장은 칠이 다 벗겨진 채로 허물어져 내렸고 네모반듯한 바닥의 포석은 더러운 발자국들과 까맣게 변해서 스며든 핏자국들로 어지럽혀져 있었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명나라 황제가 흐드러지게 피어난 꽃들을 감상하며 거닐었을 후원은 쑥대밭이 되었고, 장인들이 심혈을 기울여 만들었을 도자기는 산산조각 난 채 파편만 나뒹굴었다.
“화무십일홍이라 하더니, 옛말이 틀린 게 없구나.”
소현세자는 이런 참혹한 모습의 자금성을 앞에 두고, 풍문으로만 듣던 그 화려함이 도저히 연상되지 않는지 아련한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며 혀를 찼지만, 도현의 마음은 그보다 더 착잡했다.
비록 후대에 복원된 것이라 해도 멀쩡하고 번듯한 모습으로 고고하게 선 채 외국에서 온 관광객들을 내려다보는 듯했던 자금성의 모습을 아직 기억하고 있는 탓이다.
하지만 도현은 알고 있었다.
지금은 비록 흉하게 무너져 내린 모습이지만, 얼마 되지 않아 다시 새로운 주인을 맞이하고 언제 그랬냐는 듯 화려하게 부활할 것임을.
그리고 그 주인은, 새로운 대륙의 패자이자 어둠 속에 숨은 황제로서 활약할 인물은 바로 눈앞에 있었다.
<5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