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서 떨어진 별
오랜 볼모 생활을 끝내고 드디어 영구 귀국을 하게 된 소현세자 부부는 벅차오른 가슴을 안고 압록강을 건넜다.
하지만 그들을 맞이한 건 아버지인 인조의 차가운 냉대였는데 환영 행사는 고사하고 신하들이 돌아온 세자에게 인사를 하는 것까지 철저히 막았다.
거기다가 대궐에 들어오자마자 귀국 인사조차 받지 않고 바로 오랜 친우인 명나라를 버리고 청국에 협조했다는 죄를 물어 동궁전에서 근신하라는 벌을 내렸다.
천신만고 끝에 고국으로 돌아왔는데 동궁전이라는 창살 없는 감옥에 손발이 묶여 갇히게 됐으니 그야말로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하지만 이미 숙원 조씨와 김자점 일파가 충동질해 인조가 노골적으로 견제를 하는 상황이었기에 신하들도 너무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감히 나설 수가 없었다.
그렇게 소현세자 부부는 숙원 조씨에게 포섭된 궁인들한테 온통 둘러싸여 마치 넓은 바다 위에 홀로 떠 있는 섬처럼 고립무원의 처지에 놓였다.
심양을 떠나올 때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인조가 이렇게까지 철저히 냉대를 할 줄은 몰랐던 소현세자는 당혹스러우면서도 진심을 몰라주는 아버지가 너무 원망스러웠다.
부빈객 박노를 비롯해 함께 귀국한 시강원 관리들이 가혹한 처사라며 상소를 올렸지만, 인조는 콧방귀도 뀌지 않았고 오히려 심양에 있으면서 세자를 올바르게 이끌지 못했다며 좌천시키거나 벼슬을 거둬 갔다.
“후우.”
책을 읽으려고 펴 놨지만 도통 글자에 눈이 안 가는지 소현세자가 우울한 얼굴로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뱉자 한쪽에 서 있던 내관 최형외가 안타까운 시선으로 그를 바라봤다.
“저하.”
“꿈에서도 그리던 한양 땅에 돌아왔는데 어찌 심양에 있을 때보다 더 마음이 울적하고 외로운지 모르겠구나.”
“이런 때일수록 더 마음을 굳건하게 잡수셔야 됩니다.”
“나도 그러고 싶지만 아바마마께서 간신배와 여인의 치마폭에 둘러싸여 제대로 진실을 못 보고 계시니 너무 답답해.”
“지금은 오해를 하시고 계시지만 언젠가는 저하의 마음을 알아주실 겁니다.”
최 내관이 애써 좋게 이야기했지만 소현세자는 씁쓸한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그런 때가 정말 오기는 할까.”
“저하…….”
소현세자가 심양에서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잘 알고 있는 최 내관은 마치 자신이 냉대를 받고 있는 것처럼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졌다.
그때 문밖에서 젊은 내관의 목소리가 들렸다.
“남생이옵니다, 저하.”
“흠흠. 들어오게.”
남생이라고 이름을 밝힌 내관이 개다리소반을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소현세자와 최 내관은 그가 개다리소반을 내려놓는 동안 서로 눈도 마주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궁내의 인물들 중 숙원 조씨의 입김이 미치지 않은 자가 거의 없으니 사소한 꼬투리라도 잡히지 않기 위해서였다.
“출출하실까 봐 시원한 수정과와 약과를 준비했습니다.”
“음.”
하지만 소현세자는 고개만 살짝 끄덕일 뿐, 앞에 놓인 그릇엔 손 하나 대지 않았다.
“…….”
혹시 이상한 약이라도 섞었을까 싶어 남생이 방을 나간 후에 몰래 최 내관을 통해 버리려던 소현세자는 아무리 기다려도 그가 움직일 기미를 보이질 않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러고 있느냐?”
소현세자의 당연한 물음에 남생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침착한 얼굴로 답했다.
“다 드시고 나면 그릇을 치워 드리려고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
본래 상을 들이고 나면 바로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이 일반적인 순서다.
내관이 옆에서 먹는 걸 지켜보는 건 법도도 아닌 데다, 굳이 그러는 사람도 없다.
아무리 숙원 조씨의 힘이 강하다 해도 아랫것이 이리 무례하게 굴 정도로 얕보였나 싶어 소현세자가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면서 남생을 노려보는데 그는 전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굳이 먹여야 하겠다면 못 먹을 것도 없지.’
오기가 발동한 소현세자가 약과를 하나 손에 드는데 그 밑에 작게 접힌 종이가 부스럭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설마 종이가 제 발로 걸어 들어왔을 리는 없을 테고, 이게 뭔가 싶어 소현세자가 남생을 바라보니 그가 눈을 깜박이면서 슬쩍 머리를 숙였다.
의혹에 찬 눈길을 보내면서도 궁금증을 참지 못한 소현세자는 여러 번 접힌 종이를 펼쳐 내용을 읽었다.
그냥 안부를 묻는 평범한 글이었지만 소현세자는 종이를 쥔 손을 부들부들 떨며 자신도 모르게 헛바람을 삼켰다.
“이건……!”
놀란 이유는 바로 쪽지를 보낸 이가 봉림대군이었기 때문이었다.
“자네가 이걸 어떻게?”
눈을 동그랗게 치켜뜬 소현세자의 언성이 높아지려고 하자 김남생은 황급히 손가락을 입에 가져다 대고는 낮게 말했다.
“지난번에 잠시 귀국하셨을 때 봉림대군 마마께 큰 은혜를 입은 적이 있사옵니다.”
“그럼!”
“종종 이렇게 서신을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김남생이 도현의 사람인 걸 알게 된 소현세자는 답답하던 마음이 뻥 뚫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최 내관도 약간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대궐 안에 같은 편이 있다는 것에 크게 힘이 됐다.
잠시 뒤 김남생은 깨끗이 비워진 개다리소반을 가지고 나갔고 도현의 편지를 따뜻한 눈빛으로 몇 차례나 되풀이해서 읽은 소현세자는 불에 태워 증거를 없앴다.
이후로 소현세자는 김남생을 통해 바깥소식을 전해 듣고 자신을 지지하는 사람들과 은밀히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었다.
그런 가운데 숙원 조씨는 근신을 받게 만들어 소현세자를 좁은 동궁전 전에 가둬 놓은 정도로 만족하지 않고 보다 확실하고 근본적으로 걸림돌을 치워 버리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수상한 조짐은 없지?”
비단 보료 위에 앉은 숙원 조씨의 물음에 측근인 김 상궁은 머리를 조아리며 얼른 대답했다.
“예. 동궁전에 있는 궁인들이 모두 마마님을 따르는 이들로 채워져 있는데 어찌 감히 딴생각을 할 수 있겠습니까.”
흡족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숙원 조씨는 아랫것들이 방심하지 않도록 차갑게 말했다.
“영악한 소현세자가 이대로 가만히 있지는 않을 테니 더 철저하게 하도록 해.”
“알겠사옵니다, 마마.”
그때 바깥에서 궁녀가 손님이 왔다는 걸 알렸다.
“마마, 이 의원이 왔사옵니다.”
“오, 들라 해라.”
“그럼 전 나가 있겠사옵니다.”
“그래.”
고개를 숙인 김 상궁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과 동시에 미닫이문이 열리며 관복을 입은 이형익이 안으로 들어와 숙원 조씨 앞에 엎드렸다.
“부르셨다고 들었사옵니다.”
“어떻게, 내의원 생활은 할 만한가?”
“예. 마마님이 보살펴 주신 덕분에 편히 잘 지내고 있사옵니다.”
충청도 대흥 출신으로 침술에 일가견이 있던 이형익은 숙원 조씨가 추천을 해 준 덕분에 벼슬을 받고 내의원內醫院에 들어가 대궐에서 일할 수 있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의술만큼이나 눈치가 빠른 이형익은 대궐에서 숙원 조씨의 눈 밖에 나면 살아남기 어렵다는 걸 알았기에 더 쩔쩔맬 수밖에 없었다.
“그대를 부른 건 다른 것이 아니라 한 가지 시킬 일이 있어서네.”
은근한 말투에 불안감이 엄습했지만 거부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기에 이형익은 약간 굳은 얼굴로 조심스럽게 말했다.
“한낱 의원에 불과한 제가 마마님께 무슨 도움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자네만 할 수 있는 일이야.”
“…….”
뭔가 위험한 느낌에 이형익은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내가 듣기로 세자가 학질(말라리아) 때문에 고생이 많다고 하던데?”
“네. 그래서 내의원에서 학질에 효능이 좋은 소시호탕을 아침저녁으로 달여 올리고 침도 놔 드리고 있습니다.”
“어떻게, 괜찮아질 것 같나?”
소현세자와 숙원 조씨의 관계가 좋지 않다는 걸 잘 알고 있는 이형익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꾸준히 치료를 받으면 어렵지 않게 완쾌되실 겁니다.”
학질(말라리아)은 모기에 의해서 전염이 되는데 오한과 열이 나고 땀을 많이 흘려 갈증을 심하게 느끼고 주기적으로 발작까지 일어났다.
이러다가 심하면 사망에까지 이르는 아주 무서운 병이었다.
하지만 치사율이 높은 열대지방 말라리아와 달리 온대지방에 속하는 조선에서는 면역력이 약한 어린아이나 노인이 아니면 대개 치료가 됐다.
“그렇단 말이지.”
팔을 대고 있던 베개 끝을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리던 숙원 조씨는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이형익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오늘부터 세자의 병은 자네가 맡아서 치료하게.”
“예?”
이미 치료를 하고 있는 의원이 있는 갑자기 자신과 교체를 하라니 이형익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제가 말씀입니까?”
“그래. 세자가 병에 걸렸는데 의술이 뛰어난 자네가 맡아 빨리 완쾌할 수 있도록 해야 되지 않겠나?”
“그, 그렇지요.”
“그리고 이게 학질에 좋다고 해서 내가 특별히 구해 온 거니까 세자가 먹는 탕약에 넣도록 하게.”
말을 하며 숙원 조씨는 주먹만 한 비단 주머니 하나를 꺼내 바닥에 살짝 던져 줬다.
조심스럽게 끈을 풀고 비단 주머니 안에 든 내용물을 살펴본 이형익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그대로 몸이 굳어 버렸다.
“이건!”
그걸 보며 숙원 조씨는 차갑게 말했다.
“의원이니까 어떻게 써야 되는지 나보다 잘 알 거야. 이번 일만 잘 끝내면 뒤는 내가 책임질 테니 아무 염려하지 말도록 해.”
비단 주머니에 든 것은 바로 비상砒霜이라 불리는 독극물이었다.
비석砒石에서 채취하는 이 독극물은 치료용으로도 쓰이지만 자주 복용하면 소화기 장애, 피부염 등이 일어날 수 있고 한꺼번에 많은 양을 먹으면 언어장애와 혼수상태 그리고 복통을 일으키고 끝내는 사망에 이르게 하는 무서운 물질이었다.
이런 걸 줬다는 건 딱 한 가지 이유밖에 없었다.
손을 덜덜 떨며 이형익이 안절부절못하자 숙원 조씨는 눈썹을 위로 치켜 올렸다.
“왜 대답이 없어?”
“너무 엄청난 일이라…….”
“그래서 지금 못하겠다는 겐가!”
착 가라앉은 목소리에 이형익은 여기서 삐끗 말을 잘못했다가는 그대로 죽은 목숨이라는 걸 깨달았다.
“아, 아닙니다.”
“그저 탕약에 몰래 넣기만 하면 되니까, 그리 어려울 것이 없잖아.”
“하지만 세자 저하께 올리는 음식과 탕약은 모두 독이 없는지 검사를 하지 않습니까?”
어떻게든 올가미에서 벗어나 보려고 이형익이 애를 썼지만 숙원 조씨는 걱정 말라는 듯이 한쪽 손을 내저었다.
“동궁전에 있는 궁인들 대부분이 내 사람이니 그건 염려 말게.”
이쯤 되면 더 이상 핑계 댈 거리가 없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머릿속으로 수많은 생각을 거듭한 이형익은 한 십 년은 늙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뒤를 봐주신다는 말씀, 믿겠습니다.”
“일이 벌어지더라도 지금처럼 대궐에서 일할 수 있도록 해 줄 테니 아무 염려 말게.”
“알겠습니다.”
나중에 토사구팽을 당하는 건 아닌지 불안했지만 지금으로써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에 이형익은 비단 주머니를 다시 끈으로 묶고는 소매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러자 숙원 조씨는 입가에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그날 오후 숙원 조씨가 말한 대로 인조의 지시에 따라 소현세자를 치료하던 의원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이형익으로 교체됐다.
갑작스러운 조치에 신하들 사이에서 이런저런 말이 있었지만 이형익은 총애를 받아 인조의 몸을 살피는 자였기에 크게 의도를 의심하지 않고 다들 그러려니 하며 넘어갔다.
하지만 도현에게 지시를 받고 이형익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던 봉황상단 한양 지부장 서상수는 뭔가 심상치 않은 조짐을 느꼈다.
“담당 의원이 교체됐다고 했나?”
서 지부장이 놀란 얼굴로 쳐다보자 관복 대신 폭이 좁은 갓에 두루마리를 걸친 평상복 차림의 김남생이 작게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
“예. 주상께서 직접 그렇게 하라고 지시를 내렸다는군요.”
“이것 참, 일이 공교롭게 됐군.”
서 지부장은 신기하다는 얼굴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턱을 쓰다듬었다.
도현이 남다른 혜안을 가지고 있다는 건 이제 와서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지만 그래도 그가 얘기한 대로 일이 척척 진행되는 걸 보면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진작부터 이형익을 눈여겨보고 있었다는 내막을 아직 모르는 김남생이 그리 묻자 서 지부장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이야기하자면 기니 내 나중에 일러 줌세. 어쨌든 앞으로 자네가 더 신경을 써 줘야겠어.”
“이형익이란 자가 그리 위험한 사람입니까?”
“명확한 증거는 없지만…… 뭐, 그럴 소지가 다분하다고만 말해 두지.”
서 지부장은 물고 있던 담뱃대를 흔들어 재를 탁 털어 냈다.
“그자가 동궁전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일거수일투족을 다 감시해야만 하네. 특히 탕약 같은 걸 달일 때는 자네가 꼭 붙어 있도록 하고.”
“알겠습니다.”
“세자 저하께도 조심하라고 말씀드려 주게. 너무 과하다고 생각될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궁중에선 믿을 사람이 몇 없으니 최대한 몸을 사려야 해. 지금 병간호는 누가 하고 있나?”
“최 내관이 하루 종일 곁을 지키고 있습니다.”
“흠. 그분도 연세가 있으실 텐데 충심이 대단하시군.”
“덕분에 저도 안심하고 이렇게 밖에 나올 수 있었지요. 내관으로서 본받을 점이 많습니다.”
틈만 나면 물어뜯으려는 이리 떼로 가득한 궁중 안에서 홀로 고군분투하고 있는 소현세자에게 적어도 신뢰할 수 있는 측근이 한 사람은 있으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참, 그렇지. 이거 받게나.”
서 지부장은 무거운 엉덩이를 움직여 옆에 있는 궤짝에서 작은 비단 주머니를 꺼냈다.
“이게 뭡니까?”
탁자 위에 올려놓자 절그럭하는 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 김남생이 물었다.
“차후 이것저것 돈 들어갈 일이 많을 테니 미리 챙겨 주는 걸세.”
그리 말하며 서 지부장이 보라는 듯 주머니를 들어 손으로 탁탁 쳤다.
정확한 액수는 몰라도 제법 두둑하니 꽤 큰돈이란 것을 깨닫자 김남생은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마뜩지 않은 듯 말했다.
“그렇게 많은 돈은 필요 없습니다만…….”
“됐으니 그냥 받아 두게. 딱히 자네한테 주는 뇌물 같은 건 아니니까. 단순히 필요 경비일 뿐이야.”
사실은 김남생에게 주는 일종의 수고비의 뜻도 포함되어 있었지만 그리 말하면 조금 꺼려 하는 걸 알았기에 일부러 가볍게 돌려 말했다.
“알겠습니다. 남으면 거스름돈은 안 드려도 되겠죠?”
막상 돈을 주면 넙죽 받아 챙기는 주제에 또 노골적으로 쥐여 주는 건 싫다 하니 참 번거로운 성격이라 생각하면서 서 지부장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너무 오래 궁을 비울 수 없다 하며 김남생이 방을 나간 뒤, 반쯤 식은 차를 마시며 뭔가를 생각하던 서 지부장은 손뼉을 짝짝 쳐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던 수하를 불러들여 무언가 귓속말을 속닥거렸다.
여름의 불볕더위가 조금씩 물러가고 밤에 부는 바람이 서늘하다 느껴질 무렵의 동궁전은 매우 아름답다.
사시사철 푸른 소나무와 붉게 물들어 가는 단풍의 색이 어우러져 풍류를 즐기는 사람이라면 절로 시조 한 곡 정도는 읊을 정도로 멋진 경치였건만, 막상 동궁전에 가까이 가 보면 왠지 모르게 어수선하고 불안한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끄응.”
아직 낮에는 꽤 더운데도 불구하고 몇 겹이나 되는 이불을 겹쳐 덮고, 이마에는 물을 적신 수건을 올린 소현세자가 신음성을 흘리며 몸을 뒤틀었다.
“저하.”
낮이건 밤이건 잠도 자지 않고 곁을 지키는 바람에 깜박 잠이 든 최 내관이 그 소리를 듣고 반응했다.
“괜찮으십니까. 어디 불편하신 데라도 있으신지요?”
“후우. 방이 왜 이리 추운가? 불은 제대로 때고 있느냐?”
그 말에 최 내관은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었다.
소현세자가 학질에 걸려 앓아누운 뒤부터 계속 춥다고 하는 바람에 불을 너무 때워 방바닥이 화상을 입을 정도로 뜨거운 판인데 그걸 느끼지도 못하다니.
그만큼 몸 상태가 안 좋다는 뜻이라 최 내관은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
“네, 저하. 행여나 불씨가 꺼질세라 내관과 궁녀 몇이 지켜보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런데 어찌해서 이리 몸이 떨리는가? 혹시 창문 틈새로 바람이 들어오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 제가 직접 창을 닫고 오지요.”
말하지 않아도 창문은 며칠째 닫혀서 열어 본 적도 없다.
하지만 굳이 그렇게 말하고 일어서서 열려 있는 창문을 닫는 척 시늉을 한 최 내관이 돌아와 보니 소현세자는 이미 눈을 감고 다시 선잠에 빠져 있는 상태였다.
깊게 잠들지 못하고 하루에도 몇 번씩 이렇게 선잠을 자다가 깨곤 하니 몰라보게 얼굴이 수척해졌다.
게다가 이런 와중에도 열이 심하게 나서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랐는데 무의식적으로 춥다고 중얼거리니, 그 모습이 차마 보기 안타까울 정도였다.
최 내관은 조심스러운 몸짓으로 소현세자의 이마에 올린 수건을 꾹 짜고 다시 새 수건을 찬물에 적셨다.
그렇게 얼마쯤 지났을까 문밖에서 상궁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최 상다(내시부에 속한 당하관 정삼품 벼슬의 명칭) 어른.”
“무슨 일인가?”
“내의원에서 의원이 탕약을 가지고 왔사옵니다.”
시간을 가늠해 본 최 내관은 탕약을 올릴 때가 됐기에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들여보내게.”
“예.”
미닫이문이 열리고 의원 복장을 한 이형익이 나무 쟁반에 탕약이 든 사발을 들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걸 힐끔 쳐다본 최 내관은 양손으로 누워 있는 소현세자의 팔을 살짝 흔들어 깨웠다.
“저하.”
“으음. 왜 그래?”
“탕약 드실 시간이옵니다.”
“벌써 그렇게 됐어.”
“네.”
부축을 받으며 힘겹게 상체를 일으킨 소현세자는 처음 보는 의원이 앞에 서 있자 눈가를 살짝 찡그렸다.
“자넨 누군가?”
그러자 이형익은 허리를 살짝 숙이면서 대답했다.
“새로 저하의 병환을 돌보게 된 내의원 의원 이형익이라고 하옵니다.”
“이형익?”
“예.”
귀국하기 전에 도현한테 이형익이라는 의원을 조심하라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소현세자는 아픈 와중에도 눈을 내리깔며 상대를 봤다.
그러다가 이형익이 들고 있는 탕약에 시선을 주며 약간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건 뭔가?”
“소시호탕小柴胡湯이라고 하온데 발열과 오한에 좋은 탕약이옵니다.”
“그래.”
떨떠름한 표정을 지어 보인 소현세자는 퉁명스럽게 입을 열었다.
“거기 내려놓고 가게.”
“상세를 파악해야 되니 탕약을 다 드시는 걸 보고 괜찮으시면 맥을 한번 잡아 보겠사옵니다.”
“됐네. 피곤하니까 다음에 하게.”
“하지만…….”
말을 듣지 않고 이형익이 머뭇거리자 더 의심이 된 소현세자는 온화한 평소 성격과 달리 버럭 화를 냈다.
“싫다니까! 내 말이 우습게 들려!”
와장창!
언성을 높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소현세자가 팔로 쟁반을 치자 요란한 소리와 함께 탕약이 든 사발이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 났다.
약을 먹기 싫어하는 건 이해가 가도 이렇게까지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일 줄 몰랐기에 이형익은 물론이고 최 내관까지 깜짝 놀라 그 자리에 굳어 버렸다.
“윽.”
안 그래도 체력이 많이 떨어진 상태에서 갑자기 흥분한 탓인지 순간 소현세자가 몸을 휘청거리자 그때서야 정신을 차린 최 내관이 그를 황급히 부축했다.
“괜찮으십니까, 저하?”
“……조금 어지러운 것뿐이니 걱정 말게.”
하지만 소현세자의 안색은 창백하고 식은땀이 흘렀다.
도저히 안 되겠다고 생각한 최 내관은 바닥에 흩어진 사발 파편을 밟지 않도록 조심하며 그를 이부자리에 억지로 눕히고 아직도 멍하니 서 있는 이형익을 향해 돌아섰다.
“미안하지만 세자 저하께서 많이 예민해지신 듯하니 지금은 잠시 나가 있는 게 좋을 것 같소이다.”
“……예. 이만 물러가겠사옵니다.”
이형익 역시 지금 이 상태에선 아무것도 못 하겠다 싶었는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정중하게 인사를 올리고 방을 나갈 때까지 고집스럽게 등을 돌리고 있던 소현세자는 문이 탁 닫히고 발걸음 소리가 멀어지자 분한 듯 이를 갈았다.
“저하, 아무리 그래도 이번엔 너무 심하셨습니다.”
쪼그려 앉은 최 내관이 날카롭게 갈라진 사발 파편들을 하나하나 주워 담으면서 조심스럽게 말하자 소현세자가 홱 고개를 쳐들고 말했다.
“대체 뭐가 말인가? 저자가 바로 호淏(봉림대군의 이름)가 조심하라 일렀던 그놈 아니더냐!”
“저하.”
“뻔히 내 목숨을 노리러 온 줄 아는데 그 이상 뭘 어찌하란 말인가? 탕약 안에 약재를 갈아 넣었는지 독약을 넣었는지 아무도 모르지 않나!”
그러면서 소현세자는 아직도 분이 덜 풀린 표정으로 어깨를 들썩거렸다.
“내 비록 지금은 힘이 없어서 이러고 있다 하지만 정체도 모를 것을 주면 주는 대로 넙죽 받아먹을 정도로 어리석진 않네. 알아먹었으면 앞으로 저놈의 얼굴을 내 앞에 보이게 하지 말게!”
“하지만 그는 정식으로 명을 받고 배치되어 온 사람입니다. 함부로 그를 내쳤다간 또 무슨 소문이 돌지 모릅니다.”
원래 총명한 소현세자이기에 아무리 병 때문에 몸이 안 좋다고 해도 그 정도쯤 생각하지 못할 리가 없다.
하지만 그래도 못 참겠다는 듯, 그는 이불을 꽉 움켜쥐고 얼굴을 한껏 일그러뜨렸다.
소현세자의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심정을 아플 정도로 잘 아는 최 내관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설레설레 내젓고 말했다.
“일단 오늘 드실 탕약은 먼젓번에 있던 의원에게 부탁해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마음대로 하게.”
소현세자가 지친 표정으로 이불을 뒤집어쓰고 돌아눕자, 최 내관은 남은 파편들을 마저 다 주운 후 조용히 문을 닫고 사람을 시켜 의원을 불러들였다.
재료를 넣고 탕약을 달이는 모습까지 신중하게 지켜본 뒤 직접 사발을 들고 방으로 들어온 최 내관은 아무도 보지 않는 틈을 타서 소매에 감춘 은침으로 독이 있는지 없는지를 시험했다.
다행히 은침이 변색되지 않고 그대로인 것을 확인한 최 내관은 자리에 누운 채 뒤척거리고 있는 소현세자에게 새로운 탕약이라며 사발을 앞에 내려놓았다.
“꼼꼼하게 확인했나?”
“안심하십시오. 제가 처음부터 끝까지 다 지켜보았고, 독을 구별하기 위한 은침도 전혀 반응이 없었습니다.”
“그놈은?”
“저하께 단단히 혼이 났으니 일단 돌아간 것 같습니다.”
“흥. 그렇다면 됐어.”
꼬치꼬치 캐물어 본 뒤에야 안심한 듯 눈초리를 누그러뜨린 소현세자는 탕약을 받아 들어 단숨에 들이켰다.
“약이란 건 아무리 먹어도 익숙해지지 않는군. 쓰기만 하고 말이야.”
“단 약과라도 하나 올릴까요?”
“아니, 필요 없어. 오늘은 꽤 피곤하군. 잠시 눈을 붙여야겠어.”
“예, 쉬십시오.”
빈 사발과 상을 들고 뒤로 물러선 최 내관은 이불을 덮고 누운 모습이 왠지 모르게 쓸쓸해 보이는 소현세자를 잠시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본 뒤, 그가 편하게 쉴 수 있도록 등불을 끄고 조용히 문을 닫았다.
한편 큰 곤욕을 치르고 쫓겨나듯 밖으로 나온 이형익은 앞으로 일이 순탄치 않을 것 같은 느낌에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후우.”
그때 숙원 조씨의 심복인 김 상궁이 어디서 나타났는지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어떻게 됐죠?”
잠시 망설이던 이형익은 동궁전에도 숙원 조씨의 눈과 귀가 깔려 있어 얼마 지나지 않아 소현세자와 있었던 일이 알려질 것이기에 사실대로 이야기를 했다.
“그게…… 어찌 된 건지 저하의 경계가 너무 심해 탕약조차 올리지 못했소이다.”
그러자 김 상궁은 입술을 삐죽이며 차갑게 말했다.
“마마님께서 들으시면 아주 실망하시겠군요.”
“어떻게든 방도를 마련할 테니 조금만 참아 달라고 김 상궁이 옆에서 말을 잘 좀 해 주시오.”
“글쎄요.”
상대가 눈을 흘기며 말끝을 살짝 흐리자 뭔가 바라는 것이 있다는 걸 눈치챈 이형익은 재빨리 입을 열었다.
“내의원 약제실에 인삼 이십 년 근 스무 뿌리가 들어왔는데 요즘 김 상궁의 몸이 허한 것 같으니, 내 두 뿌리를 갖다드리겠소.”
이십 년 근 인삼 두 뿌리라면 족히 수백 냥의 가치가 있었다.
그걸 아는 김 상궁은 약간 누그러진 태도를 보였다.
“흠흠. 알았어요. 하지만 마마님께서는 참을성이 없으시니 하루라도 빨리 서두르는 것이 이 의원을 위해서라도 좋을 거예요.”
“고맙소이다.”
“그럼.”
마치 자신이 숙원 조씨라도 되는 것처럼 목에 뻣뻣하게 힘을 준 김 상궁이 몸을 돌려 사라지자 이형익은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제길!”
욕이 절로 나오고 아니꼬웠지만 자신이 숙원 조씨의 줄을 잡고 있는 이상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번 일을 해결해야만 했다.
하지만 잔뜩 신경을 곤두세우고 경계하는 소현세자 때문에 이형익은 비상이 든 탕약을 먹이는 건 고사하고 동궁전 출입조차 할 수 없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소현세자의 병세가 차츰 나아져 가자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던 숙원 조씨는 직접 인조에게 세자가 호의를 무시하고 그가 보낸 의원을 문전박대한다는 이야기를 했다.
안 그래도 세자에게 너무 가혹한 벌을 내렸다며 선처를 요구하는 상소가 계속 올라오고 있어 심기가 불편했던 인조는 크게 화를 내며 당장 소현을 불러들였다.
병세가 나아졌다고 해도 바깥출입을 하기에는 무리가 있었지만, 국왕이자 아버지인 인조가 부른다는 말에 소현세자는 아픈 몸을 이끌고 내전으로 갔다.
“전하, 세자 저하께서 오셨사옵니다.”
“들라 하라.”
“예.”
상선의 대답과 함께 미닫이문이 좌우로 열리자 병색이 완연한 소현세자가 힘겹게 발걸음을 옮겨 인조 앞에 섰다.
“아바마마, 그동안 잘 지내셨사옵니까.”
심양에서 돌아오고 거의 두 달 만에 부자가 만나는 거였지만 인조는 아픈 아들을 걱정하기는커녕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소현세자를 보며 노기 띤 목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듣자하니 내가 보내 준 의원을 내치고 다른 이를 데려와 치료를 받고 있다던데 사실이냐!”
“……예.”
대답과 동시에 인조는 서탁 위에 놓여 있던 찻잔을 집어 던졌다.
쨍그랑!
“저, 전하.”
다행히 소현세자가 맞지는 않았지만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가 뒤편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 났다.
한쪽에 시립해 있던 상선은 화들짝 놀라 인조를 바라봤다.
“왜, 내가 약에 독이라도 타라고 지시라도 했을까 봐 그런 거냐!”
“아닙니다.”
“그럼 이유가 뭐야?”
찻잔에 맞을 뻔했지만 전혀 동요하지 않고 의연하게 앉은 소현세자는 고개를 들어 인조와 시선을 똑바로 맞추며 대답했다.
“원래 있던 의원이 지어 주는 약이 저한테 더 잘 맞아서 그런 겁니다.”
“흥! 핑계는 좋군.”
인조가 느끼기에, 소현세자는 숙일 줄 모르고 매번 말대꾸를 하며 도전적인 눈빛을 보내는 것이 정말 마음에 안 들고, 어쩐지 잘난 아들에 비해 자신이 너무나도 초라해 보였다.
그래서 열등감과 반발심에 소현세자를 더 구박했다.
콧방귀를 낀 인조는 핏발이 선 눈으로 소현세자를 노려봤다.
“지금부터는 무조건 내가 보내 준 의원에게 치료를 받도록 해라. 이건 어명이야!”
“아바마마.”
“만약 또다시 내 말을 무시한다면 그때는 국왕을 능멸한 죄로 엄히 다스릴 테니까 알아서 하라!”
왕을 능멸한 죄는 죽음이었다.
너무한다는 얼굴로 쳐다보는 소현세자한테서 고개를 돌린 인조는 한쪽 손을 내저으며 차갑게 말했다.
“난 더 할 말이 없으니까. 그만 나가 봐라.”
그러자 인조의 앞이었지만 더 이상 참지 못한 소현세자는 서러움을 폭발시켰다.
“소자가 그렇게 미우십니까!”
“뭐야!”
“아무리 그러셔도 피로 이어진 부자지간인데 간신배의 말에 현혹되시어 절 이렇게 박정하게 대하시다니, 너무하십니다.”
“이놈이!”
인조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노발대발하며 소현세자를 향해 삿대질을 하고 소리쳤다.
이대로 놔뒀다가는 큰 사달이 날 것 같은 생각에 상선이 황급히 다가와 흥분한 인조를 말렸다.
“학질 때문에 세자 저하께서 정상이 아니시니 이해를 하십시오.”
“꼴도 보기 싫으니까 어서 저놈을 끌고 나가!”
“알겠습니다. 최 내관.”
방 안에서 들리는 고성에 안절부절못하고 있던 최 내관은 상선이 부르자마자 바로 문을 열고 들어왔다.
“어서 세자 전하를 동궁전으로 모셔 가게.”
“네.”
다급한 상선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 최 내관은 여전히 꼿꼿한 자세로 앉아 원망 어린 표정을 짓고 있는 소현세자를 부축해서 일으켰다.
“저하고 가시지요.”
“소자의 마음을 몰라주시니 정말 원망스럽습니다.”
“이런 고얀 놈이 있나!”
“뭐 하나!”
상선의 재촉에 최 내관은 억울하고 서러운 마음에 눈물을 흘리는 소현세자를 억지로 데리고 방을 나갔다.
소현세자가 갔지만 분을 쉽게 못 가라앉히겠는지 비단 보료 위에 앉은 인조는 씩씩 숨을 거칠게 내쉬며 연신 주먹으로 옆에 있는 팔걸이를 내려쳤다.
“감히…….”
나인들을 시켜 깨진 찻잔 조각을 깨끗하게 치운 상선은 그런 인조를 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몸이 안 좋으신 데다 감정이 격해지셔서 말이 잘못 나온 것일 테니 너무 마음에 담아 두지 마십시오, 전하.”
“세자를 두둔하려고 들지 마. 이걸로 그동안 평소 세자가 날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확실히 알게 됐어.”
“전하…….”
엉킨 실타래가 풀리기는커녕 오히려 더 감정의 골이 깊어져만 가는 부자의 모습에 상선은 안타까운 얼굴을 했다.
한편 소문이 빠른 대궐답게 인조와 소현세자 사이에 있었던 일은 순식간에 안팎으로 쫙 퍼졌다.
효를 최고의 덕목으로 생각하는 조선이기에, 평소라면 아무리 억울해도 아버지에게 대든 소현세자가 비난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숙원 조씨의 치마폭에 싸여 인조가 심할 정도로 아들을 냉대한다는 걸 다들 알고 있었기에, 여론은 오죽했으면 그런 말까지 했겠냐는 식으로 동궁전에 유리하게 형성됐다.
그러자 더 화가 난 인조는 소현세자의 근신 기간을 반년으로 늘리고 이형익 외에는 어떤 의원도 동궁전에 출입할 수 없도록 했다.
오한에 두꺼운 솜이불을 뒤집어쓰고도 몸을 부들부들 떨며 앉아 있던 소현세자는 그런 이야기를 전해 듣고는 한탄 섞인 한숨을 내뱉었다.
“하아. 정말 너무하시는구나.”
“이번에는 저하께서 실수하셨습니다. 억울하고 서러우신 건 알지만 그 자리에서 울분을 털어놓기보다는 참으셨어야지요.”
최 내관의 충언에 소현세자는 힘없이 어깨를 늘어뜨리며 말했다.
“나도 후회하지만 그때는 가슴이 터질 것 같아서 어쩔 수가 없었네.”
“옆에서 지켜보는 저도 답답한데 당사자인 저하께서는 오죽 하시겠습니까. 그래도 훗날을 위해서는 참으셔야 됩니다. 옛말에 참을 인忍이 세 개면 살인도 면한다는 이야기도 있지 않습니까.”
“알겠네.”
“그건 그렇고 앞으로 다른 의원이 동궁전에 들어올 수 없게 돼서 큰일입니다. 당장은 오늘 저녁부터 올릴 탕약조차 없으니…….”
최 내관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는 걸 보고 소현세자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힘없이 입을 열었다.
“어쩔 수 없지. 아바마마의 말씀을 따를 수밖에.”
그러자 최 내관은 깜짝 놀란 얼굴로 황급히 반대를 했다.
“이형익이 누군지 몰랐다면 모를까 숙원 조씨의 하수인이나 마찬가지인 자에게 저하의 몸을 맡길 수는 없습니다.”
“다른 방법이 없잖아.”
“차라리 제가 탕약을 구해서 올리겠습니다.”
최 내관의 말에 소현세자는 정색을 했다.
“그러다가 잘못되면 어명을 어겼다는 죄목으로 목숨을 잃을 수도 있어.”
“상관없습니다. 저하를 위험에 처하게 하는 것보다 낫습니다.”
허울뿐인 세자 자리에 앉아 있는 자신을 위해 목숨도 기꺼이 내놓으려는 최 내관의 모습에 소현세자는 뭔가 뜨거운 것이 올라오는 느낌이 들었다.
“그건 안 될 일이야. 최 내관마저 내 옆에 없다면 난 누굴 믿고 이 험난한 시간을 이겨 내라는 건가?”
“저하.”
“그냥 이형익 그자에게 치료를 받겠네.”
“하지만…….”
“허튼짓을 못하도록 자네가 옆에서 지켜보면 되지 않겠나.”
인조를 만난 이후 모든 걸 내려놓은 듯 약간 허허로운 소현세자의 태도에 최 내관은 안타깝고 가여운 마음이 들었다.
“제가 두 눈을 부릅뜨고 감시할 테니, 아무 걱정 마십시오.”
“그래. 자네만 믿겠네.”
최 내관이 결연한 얼굴로 말하자 소현세자는 입가에 살짝 미소를 지으며 따뜻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봤다.
그날 오후부터 이형익은 동궁전에 들어가 소현세자를 치료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동궁전에 발을 들이는 그 순간부터 최 내관이 마치 그림자처럼 따라붙어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니 마음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좀처럼 빈틈을 발견하지 못하는 가운데, 시간만 계속 흐르자 급기야 숙원 조씨의 울화통이 터지고 말았다.
“대체 뭘 하는 거야!”
와장창!
숙원 조씨가 던진 찻잔이 반대편 벽에 맞아 요란한 소리를 내며 깨졌다.
오른쪽으로 한 발만 더 움직였어도 저걸 정통으로 맞았을 이형익은 등에 식은땀이 주르륵 흐르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움츠린 채 납작 엎드려 호소했다.
“소, 송구합니다, 마마.”
“변명은 필요 없어! 내가 그렇게 고생해서 멍석까지 다 깔아 줬는데도 왜 아직까지 행동을 취하지 못하는 겐가!”
“하오나 마마, 최 내관의 감시가 너무 심해서…….”
“그깟 놈이 뭐라고 벌벌 떨어! 설마 나보다 일개 내관이 더 무섭다는 게야?”
뽀얗게 백분 가루를 뿌린 숙원 조씨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며 눈초리가 심상치 않게 매서워지자, 이형익은 벌벌 떨면서 마치 구원이라도 청하듯 옆을 힐끔 쳐다봤다.
웬만하면 아까 찻잔이 깨졌을 때 누구라도 놀라서 무슨 일인지 들여다보기라도 하련만, 숙원 조씨가 어지간히도 무서운 건지 아니면 이런 일이 하도 비일비재해서 무덤덤해진 건지 장지문 바깥은 조용하니 사람이 서 있는 기척조차도 느껴지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하늘 끝까지 치솟은 숙원 조씨의 분노를 혼자 감당하게 된 이형익은 바닥에 연신 이마를 찧으면서 애원했다.
“설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마마! 반드시 며칠 안에 해결책을 생각해 낼 테니 제발 용서해 주십시오.”
그러자 숙원 조씨는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듯 서탁에 손바닥을 탕 내리치고는 최후통첩을 내렸다.
“이틀이네. 딱 이틀간만 기다려 줄 테니 그 안에 처리하도록 해!”
그러고 나서 그녀는 돌연 눈을 빛내며 이형익을 차갑게 내려다보았다.
“만약 기일을 넘기면 그때는 내가 무슨 짓을 할지 나도 모르네.”
“……!”
의미심장한 숙원 조씨의 말에 이형익은 다만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이후 도망치듯이 거처를 뛰쳐나온 그는 그길로 곧장 내의원에 있는 방에 틀어박혀 하루 종일 머리를 쥐어뜯으면서 고심에 고심을 거듭했다.
하나 찰거머리 같은 최 내관이 탕약을 조제할 때는 물론이고, 내의원에서 들여오는 재료도 그 출처를 꼼꼼히 따지는 한편 다른 사람이 안 볼 때 몰래 은침으로 독성 검사를 하기까지 하니 도저히 소현세자에게 극약을 먹일 방도가 없었다.
밥도 먹지 않고 고민하다가 잠시 바람이나 쐬어 머리를 맑게 하면 좀 나아질까 싶어 비척비척 기어 나오는데 내의원에서 마침 약재 정리를 하고 있던 동료가 그를 보고 깜짝 놀라 말을 걸었다.
“아니, 자네 얼굴이 왜 그 모양인가?”
“어? 아아…… 최근 입맛이 없어 통 먹지를 않았더니.”
“동궁전 일이 힘든 모양이로군. 하긴 요즘 주상 전하와 세자 저하 사이에 심상치 않은 기류가 흐르고 있으니 나라도 숨이 턱턱 막힐 걸세.”
동료는 혀를 쯧쯧 차면서 그래도 밥은 잘 챙겨 먹어야지, 하고 괜한 오지랖을 떨었다.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내버려 두게나…… 이크.”
힘이 없어서 비틀거리던 이형익이 발을 살짝 헛디디면서 책상 위에 어질러져 있던 약재들 위로 손을 짚자 동료가 허둥거리며 다가왔다.
“자네, 진짜 괜찮은가?”
“끄응.”
“얼른 손이나 털게. 자칫 잘못하면 큰일 나! 설마 손바닥에 상처 같은 건 없겠지?”
예사롭지 않게 당황하는 동료의 모습을 보고 이형익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기껏해야 가루일 뿐인데 왜 그리 놀라나?”
“일반 약재가 아니라 독극물이니까 그렇지.”
“뭐? 아니, 그런 걸 위험하게 왜 사방에 늘어놓고 그래!”
이형익이 정색을 하면서 손을 탈탈 털자 동료는 그 모습이 우스운 듯 껄껄 웃었다.
“위험하니까 사람이 아무도 없는 이 시간에 한가한 틈을 타 정리를 하는 거지.”
그러면서 그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음흉한 미소를 띠며 말을 걸었다.
“요놈들이 이래 봬도 대단한 물건일세. 사람 몸속에 들어가면 순식간에 급성중독을 일으켜 미처 손을 쓸 틈도 없이 죽음에 이르게 되지만, 아주 소량만 쓰면 오히려 약이 되기도 한다네.”
“그건 나도 알고 있어. 그래서 내의원에서도 보관하고 있는 거 아닌가.”
“뭐 어쨌든 독극물을 다룰 땐 항상 주의해야 해. 얼마 전에도 저잣거리를 떠들썩하게 했던 살인 사건에 요게 사용됐다는 거 아닌가.”
동료는 흰색에 곱게 빻아진 가루를 가리키면서 몸서리를 쳤다.
“며느리가 유산을 노리고 시어머니를 독살했는데, 그 수법이 하도 악랄해서 관원들마저 치를 떨었다지.”
“이건 비상 아닌가. 된장국에 타서 먹이기라도 했나?”
“아니. 시어머니랑 며느리가 함께 삯바느질을 하고 살았는데, 이 시어머니가 원래 의심이 많은 사람이었는지 밥도 다 제 손으로 해 먹어서 좀처럼 비상을 먹일 수가 없었다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생각해 낸 게 바늘 끝에 독약을 발라 놓는 거였지. 왜, 바느질을 할 때 보면 아무리 일에 익숙해도 무의식적으로 엄지손가락을 자주 찌르게 되지 않나.”
“……그런 방법이!”
독약을 음식물에 타거나 섞어서 먹이는 방법밖에 생각해 내지 못했는데, 그런 식으로 직접 몸에 찔러 넣는 수도 있었나 싶어 이형익은 무릎을 치며 감탄했다.
“그럼 완전범죄 아닌가. 그런데 어떻게 들통이 난 겐가?”
“멍청한 남편이 술에 취해서 자랑거리 삼아 떠들어 댔다지 뭔가. 하하! 그러니까 사람은 죄를 짓고는 못 사는 게야.”
동료는 그저 재밌는 화젯거리라는 듯 말했지만 이형익의 눈은 형형하게 빛났다.
“뭐야, 이런 얘기에 관심 있나?”
“아니, 난 이만 밥이나 먹으러 가야겠네. 자네도 너무 오래 있진 말게나.”
“어차피 대충 다 정리가 끝났으니 나도 좀 이따 돌아갈 걸세.”
이형익은 등 뒤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머릿속에서 번뜩 스쳐 지나간 생각을 조심스레 곱씹었다.
“오늘 당직은 누구야?”
“아, 내가 하지. 어차피 집에 돌아가 봐야 애가 칭얼거려서 제대로 잠도 못 자니까.”
“그러고 보니 자네 집에 애가 벌써 셋이었지. 막내가 이제 돌을 갓 지났던가?”
“음. 어린애들만 있으니 장모님이 와서 많이 도와주고 그런다네. 그러니까 아내도 괜찮을 거야. 나도 하루 정도는 편안하게 발 쭉 뻗고 자고 싶고.”
“하하! 그 마음 이해하지.”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부지런히 약재를 정리해 서랍장에 집어넣은 동료는 힘내라며 등을 툭툭 두드려 주고선 내의원을 나갔다.
시간이 많이 늦었는지라 이미 반 이상은 집에 돌아간 뒤였고, 혹시 밤중에 의원이 필요할 가능성 때문에 돌아가면서 대기하고 있는 사람 몇 명이 남아 있긴 했지만, 다들 방에서 한숨 자거나 느긋하게 이야기를 하고 있지 굳이 나와서 일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이형익은 조심스레 문을 닫고서 지난날 숙원 조씨에게서 받은 비상을 품에서 꺼내 물과 함께 섞어 약간 희석시켰다.
“이거라면 틀림없어.”
비상은 사람 몸속에 조금씩 축적되어 중독 초기에는 그냥 움직이는 것이 무겁고 귀찮아지며, 입맛이 떨어질 뿐이지만 나중에 가서는 확실하게 죽음에 이르는 무서운 독약이었다.
민간에서는 쥐약 같은 데에도 많이 쓰이기 때문에 내의원에서 흘러나왔다고 출처를 정확히 짚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효과가 바로 나타나는 게 아니기에 누가 먹였는지 범인을 특정하기 힘든 것도 장점.
그러하기에 숙원 조씨도 이형익에게 비상을 건네준 것이지만 여태까지는 최 내관 때문에 한 번도 사용할 수가 없었다.
이것이야말로 하늘이 준 기회라고 생각하며 이형익은 비상을 희석시킨 액체를 항상 가지고 다니는 침구 끝에 살짝 묻혔다.
탕약에는 손을 쓸 수 없지만, 직접 몸속에 찔러 넣는 침에 독을 묻혀 중독시키는 발상은 최 내관도 미처 생각해 내지 못할 터.
이형익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동료들에게 수상하게 여기지 않도록 억지로 평정을 가장하며 잠을 청했지만, 결국 다음 날 아침이 올 때까지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야 말았다.
다시 날이 밝자 조심스레 비상을 묻힌 침을 챙긴 이형익은 비단 보자기에 약재와 치료 도구를 싸서 동궁전으로 갔다.
입구를 넘자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던 최 내관이 경계심 가득한 얼굴로 그를 맞이했다.
“오늘은 좀 늦었소이다.”
“이것저것 새로 챙길 약재가 있어서 지체가 됐습니다.”
“새 약재라…… 그게 뭔지 볼 수 있겠소?”
최 내관의 말에 이형익은 순순히 한쪽 손에 들고 있던 보자기를 풀어 가져온 약재를 보여 줬다.
“아무래도 원기가 부족하신 것 같아 인삼과 황기를 챙겨 왔습니다.”
의술을 잘 모르는 최 내관이었지만 두 약재가 몸에 좋다는 건 알았기에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갑시다.”
“예.”
소현세자를 간호하기 위해서 배치된 의녀에게 약재를 건네주고 탕약을 달이도록 한 이형익은 최 내관과 함께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사이 병세가 많이 호전돼 지난번처럼 솜이불을 두르고 있지는 않았지만 얼굴이 눈에 띄게 수척해진 소현세자는 최 내관을 따라 들어오는 이형익을 보고는 눈가를 찌푸렸다.
“벌써 침 맞을 시간이야?”
“네.”
“반갑지도 않은데 이런 일은 빨리도 찾아오는군.”
퉁명스러운 말에 이형익이 얼굴을 붉히며 서 있었지만 최 내관은 신경도 쓰지 않고 소현세자 옆으로 가 상의를 벗는 걸 도왔다.
“이쪽으로 누우십시오.”
“알겠네.”
윗도리를 벗은 소현세자가 비단 보료 위에 엎드리자 이형익은 터질 듯이 두근거리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키고는 옆에 앉아 침통에서 침을 꺼내 들었다.
“그럼 시침을 시작하겠습니다.”
“빨리 끝내도록 해.”
“예.”
짧게 대답한 이형익은 등에 위치한 혈자리를 따라 새끼손가락보다 긴 침을 하나씩 꽂아 갔다.
혹시 몰라 처음에는 정상적인 걸 사용하던 이형익은 세 번째부터 비상을 묻힌 침을 꺼내 들었다.
다른 것과 달리 비상 때문에 침 끝이 약간 푸르스름하게 변색되어 있었다.
힐끔 옆을 살핀 이형익은 다행히 최 내관이 눈치를 채지 못한 것 같아 보이자 재빨리 침을 혈자리에 찔러 넣었다.
“으음.”
서두르다 보니까 약간 통증이 생겼고 이맛살을 찌푸린 소현세자는 고개를 돌리며 짜증을 냈다.
“제대로 못 해.”
“죄송합니다.”
“에잉.”
“조심 좀 하시오.”
최 내관도 한 소리를 했지만 긴장을 한 이형익은 대충 머리를 끄덕이고는 얼른 다음 침을 놨다.
그렇게 모두 열두 개의 침을 꽂았는데 그중에 여덟 개가 비상을 묻힌 것이다.
바로 발작을 일으킨다면 범인이 누구인지 들키는 꼴이었기에 약간 희석을 시켰는데, 그래도 상당히 농도가 높아 이대로 몇 번 더 시침을 받는다면 중독 현상을 일으키며 사망에 이를 수 있었다.
평소보다 신경을 더 집중해서 그런지 이형익은 식은땀까지 살짝 흘렸다.
그러자 최 내관이 의심스러운 듯 그를 유심히 살피며 말했다.
“땀까지 흘리고 왜 그러시오?”
“아, 요즘 세자 저하의 치료에 신경을 쓰느라 조금 과로를 한 모양입니다.”
“…….”
뭔가 찝찝했지만 딱히 수상한 걸 발견할 수 없었기에 최 내관은 달리 추궁을 하지 않았다.
대신 이형익의 행동을 더 신경 써서 지켜봤다.
그렇게 일각이 지나자 이형익은 애써 태연한 얼굴로 등에 꽂아 둔 침을 하나씩 회수했는데, 이때는 이미 끝에 묻혀 놓은 독소가 몸속에 다 흡수되어 변색된 것도 사라지고 없었다.
바로 뜸까지 떠서 혈이 잘 돌게 한 이형익은 어느새 다 달여진 탕약을 소현세자가 마시는 것까지 보고는 동궁전을 나왔다.
돌담을 돌아 동궁전이 안 보이는 곳까지 온 이형익은 그 자리에 주저앉으며 땅이 꺼져라 한숨을 토해 냈다.
“후우. 됐어.”
얼마나 긴장을 했는지 입안에 침이 바싹 마르고 다리에 힘이 없을 정도였다.
이걸로 소현세자한테는 미안하지만 숙원 조씨의 압박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됐다.
다음 날도 이형익은 비상이 묻은 침을 놨고 저녁 무렵 혼자 식사를 할 수 있을 정도로 호전됐던 소현세자의 병세가 갑자기 악화됐다.
“헉헉.”
“저하, 왜 그러십니까?”
“수, 숨이 안 쉬어져.”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채 이불을 움켜쥐고 몸부림치는 소현세자의 모습에 최 내관은 기겁을 하며 소리쳤다.
“어서 의원을 데려와!”
“예, 옛.”
최 내관과 함께 들어온 김남생은 당황한 표정으로 허둥지둥 밖으로 뛰어 나갔다.
발작이 일어날 걸 예상하고 동궁전에 머물고 있던 이형익은 소란이 벌어지자 기다렸다는 듯이 바로 방 안으로 들어갔다.
“무슨 일입니까?”
고개를 돌린 최 내관은 하필 처음 도착한 의원이 이형익인 걸 보고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하지만 지금은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니었기에 다급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했다.
“나도 모르겠소. 갑자기 숨이 안 쉬어진다고 하시오.”
이리저리 상태를 살피는 척 한 이형익은 품속에서 작은 환약을 하나 꺼내 소현세자의 입으로 가져갔다.
그러자 다급한 상황에서도 본분을 잊지 않은 최 내관이 이형익의 팔을 붙잡으며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그게 뭐요?”
“숨구멍을 넓혀 호흡을 편하게 할 수 있도록 해 주는 약입니다.”
“혹시 모르니 검사부터…….”
최 내관의 말에 이형익은 일부러 정색을 하며 겁을 줬다.
“한시가 급한데 그럴 시간이 어디 있습니까. 저하를 살리고 싶으면 어서 팔을 놓으시오.”
“으음.”
어떻게 해야 될지 망설일 때 누워 있던 소현세자가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처럼 헐떡였다.
“커컥. 컥.”
그 모습에 최 내관은 팔에서 힘을 뺐고 가까이 다가가서 앉은 이형익은 환약을 소현세자의 입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목울대를 손으로 부드럽게 쓸어내려 소현세자가 환약을 삼키도록 했다.
“이제 살아나실 수 있는 거요?”
최 내관이 초조한 얼굴로 묻자 이형익은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땀을 손등으로 닦아 내며 말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습니다.”
“아직 저렇게 고통스러워하시는데 침이라도 놔 드려야 되는 것 아니오!”
“침은 위험할 수도 있고 급한 대로 약을 드셨으니까 곧 호흡이 좋아질 겁니다. 잠시만 기다려 보시죠.”
태평한 모습에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지금 당장 기댈 수 있는 의원이 이형익뿐이었기에 최 내관은 앓는 소리를 내며 소현세자를 쳐다봤다.
“끄으응.”
얼마 뒤 이형익이 처방한 환약이 정말 효과가 있는지 힘겹게 이어 가던 호흡은 편안해졌지만, 그것도 잠시뿐이고 고열과 구토 그리고 환각 증세까지 보이며 병세가 갈수록 심해졌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형익이 먹인 환약은 치료제가 아니라 비상과 아편을 섞은 걸로 몸속에 들어가 독성을 더 활성화시키는 역할을 했다.
이렇게 되자 겨우 인조의 허락을 받아 다른 내의원 소속 의원들까지 데려와 소현세자를 치료했지만 이미 손을 쓸 시기를 놓쳐 버렸다.
결국 소현세자는 고통에 몸부림치다가 새벽을 넘기지 못하고 끝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안 돼!”
얼마 전 선교사를 통해 구한 서양 기술 서적을 읽다가 깜빡 잠이 들었던 도현이 소리를 지르며 깨자 옆에서 같이 졸고 있던 칠현이 화들짝 놀라 그를 쳐다봤다.
“왜, 왜 그러세요?”
잠이 덜 깼는지 약간 멍한 시선으로 주위를 둘러보던 도현은 갑자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꿈이었네.”
“악몽이라도 꾸셨나 봐요?”
눈을 비비며 칠현이 하는 말에 도현은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식은땀을 닦아 내며 딱딱하게 얼굴을 굳혔다.
“형님이 산발을 한 채 나타나 날 부르시는데 얼마나 애처롭고 가여운지…….”
“세자 저하께서요?”
“아무래도 느낌이 이상해. 한양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것 같아.”
“설마요.”
아닐 거라고 이야기를 하면서도 워낙 꿈이 불길해 칠현도 표정이 좋지 않았다.
“아냐. 형님이 학질에 걸렸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찝찝했어.”
웅도를 거점으로 해상무역을 활발하게 하는 봉황상단 통해 한양에서 일어나는 일은 나흘 정도면 도현에게 다 전해졌다.
그 덕분에 소현세자가 병에 걸려 누워 있고 이형익이 치료를 맡았다는 걸 모두 알고 있었다.
아랫입술을 살짝 깨문 채 도현이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때 문 밖에서 박영식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마마, 잠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들어와.”
문을 열고 들어온 박영식은 인사도 대충하고 허둥거리며 입을 열었다.
“큰일 났습니다.”
안 그래도 불길한 꿈을 꿔서 기분이 찝찝하던 도현은 박영식의 말에 순간 심장이 털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큰일이라니?”
“세자 저하께서 급사를 하셨다고 합니다.”
“뭐!”
충격적인 소식에 도현은 자신도 모르게 언성을 높이며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게 사실이야!”
“예. 방금 봉황상단에서 지급으로 전해진 소식입니다.”
“학질에 걸렸다고 하지만 못 고칠 병도 아닌데 갑자기 어떻게 된 거야!”
“아직 자세한 내막은 모르지만 병세가 많이 호전됐었는데 갑자기 발작을 일으키시고는 하루를 넘기지 못하시고 그대로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그럴 수가.”
도현이 몸을 비틀거리자 옆에 있던 칠현이 깜짝 놀라 그를 부축했다.
“마마, 괜찮으십니까?”
“으음.”
“일단 좀 앉아서 안정을 취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혹시 도현도 잘못될까 봐 걱정이 된 칠현이 쉴 것을 권했지만 그는 괜찮다는 듯이 한쪽 팔을 내저으며 박영식을 쳐다봤다.
“형님이 돌아가실 때 치료를 한 의원이 누구지?”
“이형익이라는 자입니다.”
“확실해?”
“네. 마지막에는 다른 의원들도 합류를 했지만 그 전까지는 주상 전하의 지시에 따라 그자가 세자 저하의 치료를 전담했다고 하니 틀림없을 겁니다.”
대답을 들은 도현은 분노에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으로 이를 부드득 갈았다.
“그놈이 기어코 일을 저질렀군.”
그러면 배후는 숙원 조씨가 틀림없었고 인조는 소현세자를 헤치려고 한다는 걸 알면서도 모르는 척 방조한 거였다.
“내가 그렇게 조심하라고 일렀거늘 최 내관과 서 지부장은 도대체 뭘 하고 있었던 거야!”
속상한 마음에 괜히 애꿎은 박영식한테 화를 쏟아 낸 도현은 주먹을 꽉 쥐고 부들부들 떨었다.
하나 고함을 내지르며 울분을 폭발시킨 것도 잠시, 이내 이 모든 것이 다 부질없다는 것을 불현듯 깨달은 도현은 힘없이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모두 나가 있어. 혼자 있고 싶으니까.”
혈육을 잃은 도현의 마음을 이해하는지라 박영식은 말없이 뒤로 물러섰지만 칠현은 차마 발이 안 떨어지는 듯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마마, 진짜 괜찮으시겠습니까?”
비록 아랫사람이긴 하지만 도현과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칠현은 어찌 보면 형제 같은 사이이기도 했기에 이렇게 힘들 때 그를 혼자 놔두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도현은 그 어떤 연민과 이해도 거부한다는 듯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었다.
결국 칠현까지 방을 나가고, 혼자 남게 된 도현은 쓰러지듯이 휘청거리는 발걸음으로 의자에 걸터앉아 얼굴을 감싸 쥐었다.
처음에는 많이 어색하고 부담스러웠지만 함께 여러 가지 일을 겪으며 어느새 진짜 형제처럼 진한 정을 느낀 소현세자가 죽었다는 사실에 도현은 가슴이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지는 것 같았다.
자연히 숙원 조씨에 대한 원한과 분노가 뼈에 사무쳤고 어떻게든 복수를 해 주겠다고 다짐했다.
“형님의 그림자로 조용히 살고 싶었건만, 당신은 절대 건드리지 말았어야 될 맹수를 깨운 거야. 앞으로 땅을 치고 이번 일을 후회하게 만들어 주겠어.”
마치 숙원 조씨가 앞에 앉아 있는 것처럼 노려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도현의 눈에선 무시무시한 살기가 피어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