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한양 (26/104)

한양

상단 창고와 병기창, 사병 훈련소를 차례로 방문해 소속된 인원들을 격려해 준 도현은 수행원들을 다 떼어 내고 혼자 조용히 웅도를 둘러봤다.

그동안 몰라볼 정도로 많이 변한 모습에 도현은 감탄과 자부심을 느꼈는데, 나무판자로 어설프게 지어 놓았던 건물들은 이제 모두 섬 안에 있는 벽돌 공장에서 구워 낸 벽돌로 튼튼하게 새로 만들어졌다. 주민도, 꾸준히 청나라에 잡혀 있는 조선인 노예들을 구해 내서 데려와 이제 오천 명에 육박하는 대식구가 됐다.

“와아아!”

“이쪽으로 차.”

“여기야!”

산책하듯 천천히 걸어가던 도현은 창고 옆 공터에서 어린아이 한 무리가 짚으로 만든 공을 차며 놀고 있는 걸 보고 자신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췄다.

골대고 뭐고 아무것도 없었지만 서로 몸을 부딪쳐 가며 공을 주고 뺐고 하는 것이 재밌는지, 아이들 사이에선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옛날에 학교 운동장에서 친구들과 함께 점심 내기 축구를 하곤 했던 추억이 떠올라 흐뭇한 얼굴로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시야 한편, 무리에서 떨어져 혼자 앉아 있는 아이가 눈에 띄었다.

이제 예닐곱 살쯤 되었을까.

곱슬곱슬한 머리카락을 뒤로 질끈 묶고 어디서 주워 왔는지 길쭉한 나뭇가지를 손에 쥐고선 흙바닥에 뭔가를 그렸다가 지웠다가 하고 있었는데 꾹 다문 입술이 꽤나 고집스러워 보였다.

뭘 그리고 있나 싶어 뒤로 슬쩍 다가가 훔쳐보려는데 사람의 기척을 눈치챈 소년이 홱 돌아보는 바람에 움찔했다.

“뭐예요?”

경계심이 가득한 목소리로 불퉁하게 말한 소년은 재빠르게 발로 그리고 있던 그림을 슥슥 지우고 도현을 노려보았다.

“아니, 뭘 그리 열심히 그리고 있는지 궁금해서 말이야.”

“그냥 낙서예요.”

그러고 나서 소년은 쪼그려 앉은 자세 그대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한참이 지나도 도현이 자리를 떠날 생각을 하질 않자, 소년은 그를 힐끔 쳐다보더니 입술을 삐죽거렸다.

“아직 볼일이 남았어요?”

“딱히 볼일은 없단다. 나도 너처럼 애들 노는 걸 구경하고 있을 뿐이야.”

“한가하네. 일 안 해요? 멀쩡한 어른이 낮에 빈둥거리다니 한심해요.”

“입이 맵구나, 너.”

꼬맹이가 제법 맹랑하다고 생각하며 도현은 아예 소년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어디 다치기라도 한 거냐, 아니면 공놀이를 싫어해?”

“아저씨가 상관할 일이 아니잖아요.”

말하기 싫다는 티가 팍팍 나는 소년의 태도에도 도현이 아무 말 않고 그냥 바라만 보고 있자, 결국 마지못한 듯 입을 열었다.

“쟤들이 날 싫어하니까 놀이에 안 끼워 주는 거예요.”

“뭐야?”

“그렇지만 나쁜 애들은 아녜요. 딱히 날 괴롭히는 건 아니니까.”

“흐음. 다투기라도 한 거냐?”

“아뇨.”

소년은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내가 무섭대요. 괴물이라고, 같이 놀면 병이 옮을 거래요.”

“병이라니…….”

또래 아이들에 비해 햇볕에 많이 타지 않은 듯 피부가 좀 하얀 편이긴 했지만, 어느 모로 보나 평범한 소년이었다.

혹시 말하기 힘든 집안 사정이 있나 싶어서 도현이 머뭇거리는데 소년이 길게 자란 앞머리를 쓱 걷어 올렸다.

“……!”

“봐요. 아저씨도 놀랐죠?”

소년은 항상 있는 일이라는 듯 아무렇지 않은 말투로 다시 앞머리를 내려 푸른 눈동자를 가렸다.

“말해 두지만 이건 병이 아니에요. 우리 엄마는 다른 사람들이랑 똑같이 검은 머리, 검은 눈동자지만 아빠가 눈이 파래요. 그래서 나도 그런 거라고요.”

그 말에 짚이는 게 있던 도현은 소년에게 물었다.

“혹시 네 아빠 이름이 로사리오니?”

“어? 아저씨, 우리 아빠를 알아요?”

‘역시나.’

로사리오에게 어린 자식이 둘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하니 이런 고충을 겪고 있을 줄은 몰랐다.

하긴 서양인과 동양인의 혼혈이니 외모가 다른 사람들과 다른 것은 당연하다.

그런 식으로 따지면 오히려 이 소년은 어머니의 피를 짙게 물려받은 듯 동양인과 비슷한 외모였다.

게다가 콧대가 높고 이목구비가 큼직큼직해서 나중에 나이를 더 먹으면 여자깨나 울릴 미남으로 자랄 가능성도 충분했다.

다만 차별을 받는 이유는 딱 한 가지, 눈동자색이 푸르다는 것.

만약 현대였다면 연예인 못지않은 인기를 누렸을 수도 있겠으나, 지금은 남들과 다르다는 것만으로 차별을 받고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게 당연한 시대다.

안쓰러운 마음에 도현이 손을 뻗어 머리칼을 쓰다듬자 홱 뿌리칠 것 같던 소년도 왜인지 얌전한 기색으로 가만히 있었다.

그때 와 하고 함성이 울리더니 하늘 높이 뜬 공이 데굴데굴 굴러 와 도현의 발치에서 멈췄다.

“죄송해요!”

아이들 몇 명이 공을 쫓다가 도현과 함께 있는 소년을 보고 우뚝 멈춰 섰다.

곤란한 표정을 하고 있는 아이들과 소년을 번갈아 본 도현은 문득 입가에 장난스러운 미소를 띠고 공을 툭 차올렸다.

“와아!”

도현이 무릎으로 공을 툭툭 차다가 가슴으로 쳐 올려 오른발 왼발 번갈아 가면서 트래핑을 하자, 아이들이 신기한 듯 입을 헤벌리고 쳐다보았다.

한 번도 공을 바닥에 떨어트리지 않은 채 발끝에서 무릎으로 그리고 머리로 통통거리며 묘기를 부리자, 아이들은 물론이고 소년조차 그를 바라보는 시선에 존경심이 섞이는 게 느껴졌다.

“웃차.”

한때 여학생들한테 잘 보이려고 친구들이랑 공 다루는 재주를 연습한 게 이렇게 쓰일 줄이야.

“훗, 내 솜씨도 아직 녹슬지 않았군.”

괜히 혼자 좋아서 중얼거리는데 순식간에 아이들이 주위에 몰려들어 소란을 부렸다.

“아저씨, 최고!”

“또 해 줘요! 네?”

옷자락을 이리저리 잡아당기며 졸라 대는 아이들을 겨우 달랜 도현은 공을 들고 공터 한복판으로 가 말했다.

“좋아. 우리 편을 나눠서 노는 게 어때? 날 상대로 공을 뺏을 수 있으면 나중에 맛있는 과자를 사 주마.”

“우와아아!”

“대신에 조건이 있어.”

도현은 한쪽 눈을 찡긋하고 아직 아이들 무리에 섞이지 못하고 떨어져 있는 소년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너희들은 열 명도 넘는데 나는 혼자잖아. 그건 불공평하겠지? 그러니까 난 쟤랑 같이 한편을 먹으마.”

도현은 소년의 손을 잡고 끌어다가 자기 옆에 세웠다.

아이들은 어쩔 줄 몰라서 주춤거리다가 결국 놀고 싶다는 욕심이 더 강했는지 고개를 끄덕거렸다.

“좋아요.”

“하나 둘 셋 하면 시작이야!”

다시 즐거운 환성이 하늘을 뒤덮었고, 도현은 나이도 신분도 잊은 채 아이들과 어울려 땀을 흘렸다.

모래 먼지를 흩날리며 뒹구는 사이 아이들은 금세 친해져서 서로 꺼리던 것도 잊은 채 소년과 어깨동무를 하거나 넘어진 걸 일으켜 주기도 하면서 몇 년 지기 친구처럼 손을 맞잡았다.

그렇게 실컷 논 뒤에 약속했던 대로 아이 몇 명에게 돈을 쥐여 주고 먹을 걸 사 오라고 시킨 도현은, 킬킬 웃으며 우물가에 앉아 시원한 물을 떠먹었다.

“역시 애들은 체력이 대단하다니까.”

그렇게 놀았는데 아직도 부족한지 이젠 나뭇가지로 전쟁놀이를 하고 있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도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물에 뜬 기름처럼 겉돌던 소년 역시 지금은 완전히 융화되어 얼굴에 진흙을 치덕치덕 바르고 까르륵 맑은 웃음소리를 터트리고 있었다.

“이젠 걱정할 것 없겠지.”

딱히 큰 싸움을 했던 것도 아니니 사소한 계기만 있으면 금방 친해질 수 있었을 것이다.

역시 애들은 어른들의 사정 따위 상관없이 저렇게 노는 게 제일 보기 좋다고 생각하며 그는 옷에 묻은 흙먼지를 툭툭 털고 슬쩍 자리를 떠났다.

다음 날 도현은 판옥선을 타고 웅도를 떠나 압록강 하구에 위치한 안동(지금의 단둥)으로 갔다.

그곳에서 며칠을 머문 뒤 육로를 이용해 드넓은 만주벌판을 가로질러 온 관저 식솔들과 합류한 도현은 강을 건너 조선 땅으로 들어갔다.

일 년 전 소현세자 부부와 함께 잠시 귀국을 했었던 도현과 달리 부인인 장씨를 비롯해 대부분의 관저 식솔들이 짧게는 이 년부터 길게는 칠팔 년까지 조선 땅을 떠나 있다가 돌아온 거였기에 다들 감격에 찬 표정을 지었고, 일부는 땅바닥에 입을 맞추며 뜨거운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이번에도 가는 길마다 백성들이 몰려나와 열렬히 귀환을 환영해 줬는데, 수년간 청나라에서 힘든 볼모 생활을 한 측은감과 많은 의혹을 남기고 급사한 소현세자의 일까지 겹쳐 관심이 더 뜨거웠다.

인조는 이런 백성들의 반응을 상당히 거슬려 했지만 청나라 조문단의 시선을 의식해서인지 소현세자 때와 달리 제지하지 않았고 한양에서는 작지만 환영 행사까지 열어 줬다.

대궐에 들어간 도현은 이제 세자빈이 된 부인 장씨와 함께 대전으로 가서 아버지인 인조에게 인사를 드렸다.

“아바마마, 그동안 강녕하셨사옵니까?”

절을 하고 무릎을 꿇고 앉은 도현의 말에 인조는 불편한 마음을 그대로 보여 주듯 퉁명스러운 어투로 입을 열었다.

“왜, 내가 빨리 뒈졌으면 좋겠느냐?”

“그런 것이 아니오라…….”

“됐다. 너야말로 청나라에서 잘 먹고 편히 지냈는지 얼굴에 기름기가 자르르 흐르는 것이 아주 좋아 보이는구나. 세자 자리에 오르니 세상을 다 가진 것 같더냐?”

“아바마마.”

“인사는 이 정도면 됐으니까 이제 그만 나가 보거라.”

싸늘하게 말한 인조가 보기 싫다는 듯이 몸을 살짝 옆으로 돌리자 대전에 있던 신하들과 장씨 부인은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런 가운데 도현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의연하게 자세를 똑바로 하고 앉아 앞에 있는 인조를 보며 말했다.

“어떤 이유에서건 제가 아바마마의 심기를 거슬렸다면 죄송합니다. 부모의 바다처럼 넓은 마음으로 용서해 주시옵소서.”

“…….”

항상 뻣뻣해서 정이 안 가던 소현세자와 달리 도현은 바짝 엎드리며 먼저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자 인조는 이것 봐라 하는 표정으로 돌렸던 몸을 바로 했다.

그걸 본 도현은 속으로 자신의 계획이 먹혀들어 간다고 쾌재를 부르면서 일부러 침통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이었다.

“불초 소자, 아바마마께 드릴 것이 있사옵니다.”

“그게 뭐냐?”

도현이 손짓을 하자 입구 쪽에 서 있던 칠현이 양손에 비단 두루마리를 받쳐 들고 조심스럽게 앞으로 걸어 나와 상선한테 건네줬다.

상선은 그걸 다시 인조에게 내밀었는데 묶여 있는 끈을 풀어 보고는 깜작 놀라 눈을 동그랗게 치켜떴다.

“아니, 이건 청국 황제의 옥쇄가 찍힌 세자 책봉서가 아니냐!”

“그렇습니다.”

책봉서를 앞에 있는 서탁에 내려놓은 인조는 눈을 가늘게 뜨며 도현을 쳐다봤다.

“이걸 왜 나한테 주는 거지?”

그러자 도현은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갑작스럽게 자금성으로 불려 가 청 황제에게 세자 책봉서를 받기는 했지만, 조선의 지존은 아바마마이시니 넘겨 드렸다가 다시 정식으로 하사받는 것이 옳지 않겠습니까. 아마 청 황제도 그렇게 하라고 조선으로 돌아가는 제게 책봉서를 잠시 맡긴 것이라 생각합니다.”

황제가 그럴 생각이었다면 먼저 도착한 조문단이나 따로 사절을 보내도 됐기에 이건 인조가 듣기 좋으라고 하는 이야기였다.

인조도 바보가 아니었기에 그걸 눈치 못 챌 리 없었지만 순서가 거꾸로 된 것이 아니라 잠시 맡아서 가져온 거라며 도현이 자신의 체면을 세워 주자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안 그래도 책봉 문제 때문에 대궐 분위기가 살얼음판이었는데 도현이 단번에 그걸 풀어 버리자, 모여 있던 신하들은 반색을 하며 말했다.

“역시 그런 사정이 있었군요.”

“저희가 오해를 했었나 봅니다.”

“아무리 청 황제라도 전하의 권위를 무시할 리가 있겠사옵니까.”

짜고 치는 고스톱처럼 신하들까지 동조를 해 주자 가운데 앉은 인조는 헛기침을 하며 굳어 있던 표정이 풀어졌다.

“흠흠. 그런가?”

“아바마마께서 첩지를 내려 주시지 않는다면 그게 어찌 진정한 세자라고 할 수 있겠사옵니까.”

이 말이 결정적이었다.

풀어서 이야기하면 아무리 청나라 황제가 책봉을 해 준다고 해도 인조가 승인을 하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뜻이었는데, 이건 자신의 위치를 불안하게 생각하는 인조의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내가 세자의 마음을 오해한 것 같구나.”

말투가 눈에 띄게 부드러워졌을 뿐만 아니라 인조가 봉림대군이 아닌 세자라고 도현을 지칭하자, 신하들은 놀란 얼굴로 둘을 바라봤다.

“아니옵니다. 오히려 그런 생각을 하시게 만든 제가 송구스럽사옵니다.”

모든 것을 자기 잘못으로 돌리며 고개를 숙이는 도현의 모습에 인조는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비록 얼마 전 슬픈 일이 있었으나 나라의 후계를 세우는 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니, 세자 자리는 잠시라도 비워 둘 수 없다. 경들은 영의정을 중심으로 하루빨리 세자 책봉식을 거행할 수 있도록 준비를 서둘라!”

인조의 지시에 신하들은 일제히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알겠사옵니다, 전하.”

다시 도현에게 시선을 돌린 인조는 인자한 얼굴로 말했다.

“그동안 나누지 못한 이야기가 많으니 세자 부부는 나와 함께 내전으로 가자꾸나.”

“예.”

이것 또한 얼굴조차 보지 않고 동궁전에 감금하다시피 한 소현세자에 비하면 상당히 다른 대우였다.

자리에서 일어난 인조를 따라 도현과 장씨 부인이 대전을 나갔고, 그걸 보며 신하들은 약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대부분 책봉에 관계된 일이 잘 마무리되어 다행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대전에서 물러난 신하들은 친분이 있는 사람들끼리 삼삼오오 모여 방금 있었던 일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눴는데 김자점도 의정부 건물 회의실에 측근들과 함께 앉아 있었다.

“갈모 형제라고 하더니 봉림대군이 저렇게 똑똑하고 체세에 밝은 줄은 몰랐습니다.”

“그러게 말이오. 한번 고집을 피우면 당해 낼 사람이 없는 주상 전하를 단번에 설득해 버리다니, 옆에서 보고 있자니 정말 소름이 돋더이다.”

위에서 덮어 쓰는 우모(비가 올 때 쓰는 모자)를 갈모라고 하는데, 모양이 위가 좁고 아래가 넓게 만들어져 있었다.

즉 갈모 형제란 형보다 아우가 낫다는 말로 죽은 소현세자보다 도현이 더 뛰어난 인물이라는 뜻이었다.

팔짱을 끼고 앉아 있던 김자점은 딱딱하게 굳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 상황에서 책봉서를 넘겨줘 주상 전하의 마음을 돌리다니, 아무래도 우리가 생각을 잘못한 것 같군.”

“예? 그게 무슨 말씀인지……?”

아들인 김련의 물음에 김자점은 답답하다는 듯이 눈썹을 살짝 찡그리며 말했다.

“고양이인 줄 알았는데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을 가지고 머리까지 똑똑한 호랑이란 말이다.”

“아. 예.”

“그런 줄도 모르고 세자 자리에 오르도록 하다니 큰 실수를 한 것 같군.”

“그럼 지금이라도 막는 것이…….”

숙원 조씨의 아버지로 딸의 후광을 받아 정삼품 우승지를 맡고 있는 조태징의 말에, 김자점은 손바닥으로 탁자를 내려치며 짜증을 냈다.

탕!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되시오! 이미 청나라 황제에게 책봉서를 받았고 방금 대전에서 주상 전하도 재가를 한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어떻게 제동을 건다는 말이오!”

“그렇기는 하지만 숙원 마마께 말씀을 드리면…….”

“딱하오이다. 숙원 마마라고 뭐든지 다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거요?”

“주상 전하의 총애가 크시니 잘 이야기를 드린다면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이보시오, 우승지.”

“네.”

“아무리 주상 전하께서 숙원 마마를 아끼시지만 이미 신하들이 다 모여 있는 자리에서 결정을 내리신 걸 쉽게 번복하실 수 있다고 생각하시오? 그리고 설사 그렇게 하신다고 해도 청나라의 반발은 어떻게 할 거요? 아마 모르긴 해도 당장 한양에 와 있는 사신들이 황명을 거역하는 거냐며 따지고 들 것이오.”

“그건…….”

그런 것까지 하나하나 깊이 생각을 하지 못한 조태징은 김자점의 지적에 우물거리며 꼬리를 내렸다.

다른 측근들도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하고 다들 얼굴을 굳혔다.

그걸 보며 김자점은 정색을 한 채 이야기를 했다.

“이미 벌어진 일은 어쩔 수 없지만 봉림대군 아니, 세자가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라는 걸 알았으니 지금부터라도 바짝 긴장하고 행동을 예의 주시해야 될 것이오.”

“알겠습니다.”

김자점의 말에 측근들은 다들 긴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승냥이를 피하려다가 더 무서운 범을 깨운 건 아닌지 김자점은 시종일관 찝찝한 기분이 가시지 않았다.

인조의 지시에 따라 세자 책봉식은 신속하게 준비되어 도현이 귀국한 지 이레가 되는 날 성대하게 거행됐다.

“저하, 이제 가실 시간이옵니다.”

왕실 예법에 따라 왕세자의 예복인 칠장복과 칠류관을 갖추고 방에 앉아 있던 도현은 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긴장을 풀고는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대기하고 있던 동궁전 소속 궁인들이 일제히 허리를 숙이며 도현에게 예를 갖췄다.

“오르시지요.”

내관의 말에 도현은 마당에 내려져 있는 연(임금이나 세자가 타고 다니는 가마)으로 걸어가 설치된 의자에 앉았다.

“출발!”

도현을 태운 연은 동궁전을 나와 오늘 책봉식이 열리는 인정전으로 향했다.

원래 세자 책봉이나 즉위식 같은 국자적인 중요 행사들은 정궁인 경복궁 근정전 앞에서 열렸지만, 임진왜란 때 왜군에 의해 경복궁이 불타 잿더미가 되었기에 어쩔 수 없이 인정전에서 거행되었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인정전으로 들어가는 대문인 인정문이었다.

붉게 칠한 기둥에 커다란 지붕을 얹힌 인정문은 존재만으로도 상당한 위압감을 줬다.

연에서 내린 도현은 입장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의관을 살펴보고는 활짝 열린 대문 사이로 보이는 행사장을 향해 역사적인 발걸음을 옮겼다.

“세자 저하, 납시오!”

수문관의 커다란 외침을 들으며 대문을 통과하자 이 층으로 지어진 인정전 앞에 국왕인 인조가 높다란 월대에 왕비인 장렬왕후와 앉아 있는 것이 보였고, 좌우에는 품계석을 따라 관복을 입은 문무백관들이 잔뜩 늘어서서 도현을 바라봤다.

쏟아지는 수많은 시선에 위축이 될 만도 했지만, 도현은 어깨를 쫙 펴고 당당하면서도 위엄 넘치는 걸음으로 가운데 깔린 박석을 밟으며 나아갔다.

대전에서 꼬장꼬장한 인조를 순식간에 구워삶는 걸 보고 범상치 않은 인물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신하들은, 긴장이 될 텐데도 의연하고 차분함을 잃지 않는 도현의 모습에 다시 한 번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한쪽에 있던 종친들도 세자로서 전혀 손색이 없는 도현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반면 도현 때문에 자기 아들을 세자 자리에 올릴 절호의 기회를 놓친 숙원 조씨는, 도현이 걸어가는 내내 표독스러운 얼굴로 그를 째려봤다.

따가운 시선에 도현은 힐끗 숙원 조씨를 보다가 이내 고개를 바로 했다.

그러자 숙원 조씨는 세자 자리를 빼앗긴 것도 분한데 자신이 무시를 당했다는 생각에 치맛자락을 꽉 움켜쥐고는 이를 부드득 갈았다.

“이익.”

“마마, 왜 그러십니까?”

뒤에 서 있던 김 상궁이 눈치를 보며 묻자 숙원 조씨는 찬바람이 쌩하고 부는 목소리로 짜증을 냈다.

“아무것도 아니야.”

급히 준비된 행사라 여러 가지로 부족한 것이 많은 데다 얼마 전 소현세자가 급사하는 슬픈 일까지 있어 상당히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 치러지는 책봉례였다.

하지만 이미 청국 황제의 재가를 받았고 인조에게도 인정을 받아 도현이 세자가 되는 것에 어느 누구도 시비를 걸 수 없을 정도로 정통성을 완벽하게 인정받았다.

이건 향후 도현의 행보에 큰 도움이 됐는데, 힘없는 둘째 왕자라는 어중간한 위치에서 벗어나 명실상부한 조선 국왕의 후계자이자 이인자로 거듭나게 됐다.

단순히 신분만 바뀐 것이 아니라 이제 제한이 있기는 하지만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있는 명분과 힘을 가지게 된 거였다.

이건 도현 개인뿐만 아니라 그를 따르는 무수히 많은 수하들한테도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듯 도현에게도 약점이 있었는데, 바로 조카들의 존재였다.

원래 세자가 죽었을 경우 그 아들이 자리를 계승하는 것이 원칙이었는데, 소현세자와 강빈 사이에 자식이 아예 없다면 또 모르겠지만 엄연히 똑똑하고 신체 건강한 아들이 두 명이나 있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신하들 사이에 세손 중 한 명이 세자위를 이어야 된다는 이야기가 나왔지만, 숙원 조씨의 방해에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갑론을박 논의를 하고 있는 사이, 엉뚱하게도 청나라에서 도현한테 책봉서를 하사해 버린 거였다.

때문에 청국과 인조의 승인을 받아 전통성을 확보했다지만, 도현은 정상적인 계승 서열을 무시하고 세자가 됐다는 큰 약점을 가지고 시작하게 된 것이다.

이건 실제 역사에도 효종이 죽을 때까지 아킬레스건이 됐고 소현세자의 자식과 아내인 강빈이 비참한 죽음을 당하게 되는 원인이었다.

어느새 월대 앞에 다다른 도현이 허리를 숙였다가 펴자 인조의 손짓을 받은 도승지가 큰 소리로 책봉 교서를 읽었다.

“모두들 들으라. 과인이 하늘을 뜻을 이어받아 왕좌에 오른 지 벌써 어언 이십여 년이 흘렀다. 그동안 수많은 외침과 사건을 겪으며 백성들을 위해 노력했지만 과인의 덕이 부족하여 아직도 힘들게 사는 이들이 많다고 하니, 그저 부끄러울 뿐이다. 이럴 때 사대부와 백성들을 이끌어 줘야 될 왕실이 얼마 전 소현세자의 급사로 오히려 걱정과 우려를 안겨 주고 있으니, 민망하고 죄스럽도다. 그래서 오늘 봉림대군을 세자로 삼아 문무백관과 만백성의 근심을 덜고 아울러 종묘사직을 튼튼하게 하고자 한다. 세자는 학문을 갈고닦아 성군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고 경들과 백성들은 과인의 뜻을 따라 세자가 바른길을 가게 인도하고 최선을 다해 보필하도록 해야 될 것이다.”

낭독이 끝나자 도승지는 내관들의 도움을 받아 죽책문과 고명문 그리고 세자인을 비단 천이 깔린 쟁반에 들고 아래에 있는 도현에게 건네줬다.

도현은 정면에 앉아 있는 인조에게 큰절을 올리고는 조심스럽게 세 가지 물건을 받아 들었다.

세자인은 세자의 권위를 상징하는 도장이고, 죽책문은 대나무를 줄로 엮어 만든 책에다가 세자로 책봉한다는 내용을 적은 일종의 임명장이었다.

마지막으로 교명문은 세자가 되면 주의해야 될 것들이 적힌 훈계문이었다.

이 세 물건을 가져야만 진정한 조선의 세자가 됐다고 할 수 있었는데, 도현이 그것들을 손에 쥐자 늘어서 있던 신하들이 일제히 천세를 외쳤다.

“주상 전하. 천세!”

“세자 저하. 천세!”

뒤로 돌아선 도현은 두 팔을 들어 올리고는 목이 터져라 천세를 외치는 신하들을 굽어보면서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생각에 입술을 꽉 다물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렇게 책봉식이 끝나자 도현은 곧바로 종묘宗廟로 가서 선조들에게 새롭게 조선의 세자가 되었다는 걸 고했다.

이곳 역시 임진왜란 때 불에 타 버린 것을 광해군이 중건한 것이다.

참배를 하고 다시 대궐로 돌아와서는 인조와 종친들에게 훈계를 듣고 청에서 온 사신을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하루가 금방 가 버렸고 도현은 자정이 넘어서야 동궁전으로 돌아와 파김치가 된 몸으로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세자가 됐다고 해서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는데, 욕심 많은 인조가 실권을 혼자 꽉 틀어쥐고 하나도 내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도현은 부인과 함께 아침 일찍 일어나 인조와 왕실 어른들에게 문안 인사를 하고 오후 늦게까지 시강원 학사들에게 학문을 사사받는 아주 따분하면서도 바쁜 생활을 이어 갔다.

갑시부터 시작해 해시까지 이어지는 강행군은, 무예를 익혀 나름 체력에는 자신이 있었던 도현을 녹초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특히나 몇 시진이나 똑바로 정좌를 하고 앉아 유교 경전을 배우는 강론 시간은 그의 정신세계를 황폐하게 만들었다.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오늘 강론을 맡은 학사가 서책을 덮으며 말하자 도현은 공손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수고들 했소.”

“아닙니다. 그럼 내일 또 뵙겠사옵니다.”

학사들이 인사를 하고 방을 나가고 얼마쯤 지났을까 의젓하게 자리에 앉아 있던 도현은 양팔을 위로 쫙 뻗으며 앓는 소리를 냈다.

“으갸갸갸. 지겨워 죽는 줄 알았네. 이거 뭐 현대의 고3 수험생은 저리 가라 할 정도잖아. 지금도 이렇게 힘든데 왕이 되면 밤을 새워도 모자랄 정도로 업무가 많다니…… 이런 힘든 자리를 어떤 미친놈들이 반란까지 일으켜서 가지려고 하는지 정말 모르겠다니까.”

한두 번도 아니고 앞으로 쭉 이런 생활을 해야 된다고 생각하자 도현은 벌써부터 막막한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피곤이 몰려와 보료 위에 축 늘어져 있을 때 칠현이 달달한 수정과를 가지고 들어왔다.

“또 그러고 계십니까?”

“너도 내 처지가 돼 봐.”

힘이 쏙 빠진 도현의 말에 칠현은 측은하단 표정을 지으며 들고 있는 쟁반을 서탁 위에 올려놨다.

“하긴 저 같으면 벌써 지쳐서 나가떨어졌을 겁니다.”

“그것 봐.”

“일어나셔서 이건 좀 드셔 보세요.”

“귀찮아.”

누워서 한쪽 손만 까닥까닥 내젓는 도현의 모습에, 칠현은 한숨을 푹 내쉬고는 어질러져 있는 서책을 정리하며 말했다.

“조금 이따가 저녁 문안을 가셔야 되잖아요.”

“에구. 그렇지.”

비실비실 상체를 일으킨 도현은 사발을 들어 수정과를 벌컥벌컥 마셨다.

“그래도 단 게 들어가니까 좀 살 것 같네.”

“그렇죠.”

빈 사발을 쟁반에 내려놓은 도현은 무의식적으로 주변을 둘러보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동궁전 정리는 다 끝났어?”

“예. 김 내관의 도움을 받아서 궁인들을 다 회유했습니다.”

“이제 좀 마음 놓고 움직일 수 있겠군.”

세자 교육과 대궐 생활에 적응하는 데 바쁘기도 했지만, 도현이 책봉식 이후 조용히 엎드려 있었던 이유는 바로 곳곳에 깔려 있는 숙원 조씨와 김자점의 눈 때문이었다.

뭘 하나 하려고 해도 그의 일거수일투족이 하루도 안 돼 모두 두 사람한테 보고가 되니 마음껏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리고 소현세자는 말할 것도 없고 역사를 살펴봐도 대부분의 황제와 왕이 바로 옆에서 시중을 드는 궁인들에 의해서 독살되는 경우가 많았기에, 도현은 자신과 가족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주변을 청소할 필요성을 느꼈다.

마음 같아서는 대궐 전체를 정리하고 싶었지만 현재로써는 그럴 여력이 없었기에 일단은 동궁전부터 손을 댔다.

다행히 지난번 잠시 귀국했을 때 같은 편으로 끌어들인 김남생이 있어서 예상했던 것보다 작업이 쉬웠는데, 상황에 따라 돈을 쥐여 주거나 궁 밖에 있는 가족을 돌봐주는 식으로 회유를 하자, 거의 대부분의 궁인들이 넘어왔다.

물론 회유가 안 되는 자들도 몇 명 있었지만 이미 주변이 모두 이쪽 편이라 물 위에 뜬 기름 같은 존재가 됐다.

오히려 도현은 이들을 통해 역정보를 흘려 숙원 조씨와 김자점을 혼란에 빠뜨릴 음흉한 계획을 세웠다.

그건 나중 일이고 당장 새벽부터 일어나서 해야 되는 문안 인사와 지겨운 유교 공부에 치여 진이 다 빠질 지경이었다.

얼마나 힘드냐면 숙원 조씨가 이런 방법으로 자신을 과로로 죽이려는 음모가 아닌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공부를 하기 싫다고 하면 난리가 나겠지?”

“그걸 말씀이라고 하십니까.”

“끄으응.”

얼굴을 구긴 채 앓는 소리를 내는 도현을 보면서 칠현이 바깥소식을 전달했다.

“박 대장한테서 연락이 왔는데 서 지부장의 도움을 받아 도성 밖에 거점을 마련했다고 합니다.”

“잘됐군.”

대궐에는 함부로 사람을 들일 수 없었기에 그동안 호위를 맡았던 박영식과 떨어져야 됐다.

대신 도현은 다른 임무를 맡겼는데 호위대 대원들과 함께 도성 근처에 머물고 있다가 유사시에 바로 달려와 그를 돕도록 했다.

“대원들은 몇 명이나 들어왔어?”

“아직은 거점을 확보하는 단계라 얼마 안 되고 다음 달에 웅도에서 백 명이 두 패로 나눠 올 거랍니다.”

김자점이 집에서 부리는 젊은 남자 노비 숫자가 오십이 넘는 걸 생각할 때 적게 느껴지지만, 모두 전문적인 전투 훈련을 받았고 강력한 조총으로 무장해 만약의 경우 큰 도움이 될 수 있었다.

“더 데려오는 건 무리겠지?”

“아무리 포도청이 허술하다고 하지만 깊은 산골도 아니고 도성 근처에 장정 수백 명이 우글거리는 걸 들키지 않고 속이기는 어렵겠지요.”

“하긴.”

아무리 세자라고 해도 무장한 사병 수백을 몰래 키우는 건 충분히 반역으로 몰릴 수 있는 일인 데다 숙원 조씨와 김자점이 호시탐탐 자신을 물어뜯으려고 기회를 보고 있었기에 도현은 아쉽지만 생각을 접었다.

“이제 슬슬 일어나셔야 될 시간입니다.”

창밖으로 붉게 노을이 지고 있는 걸 본 도현은 짧게 한숨을 내쉬며 일어났다.

“알았어.”

한편 귀국 첫날 대전에서 인조를 상대하던 모습이 워낙 강렬했기에 동궁전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던 숙원 조씨와 김자점은 벌써 한 달이 다 되어 가는데도 도현이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 않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아무런 낌새도 안 보인다는 거야?”

“오늘도 새벽에 일어나 왕실 어른께 문안 인사를 드리고 시강원 학사들과 공부를 하시는 것이 다였습니다.”

“은밀히 찾아오는 사람도 없고?”

“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제대로 감시를 하고 있는 것 맞아?”

숙원 조씨가 짜증을 내면서 소리치자 동궁전 소속 내관인 송말호는 이마에서 식은땀을 삐질 흘리며 머리를 숙였다.

“물론입니다. 세자 저하의 행동을 모두 살피고 있지만 정말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게 말이 되냐고!”

사실을 이야기하는데 못 믿겠다고 억지를 피우는 숙원 조씨의 모습에 송말호는 억울했지만, 그렇다고 덤벼들 수는 없었기에 화를 참으며 애써 항변했다.

“다시 돌아가서 게으름 피우지 말고 두 눈 똑바로 뜨고 확실히 세자를 감시해!”

“예.”

계속 앉아 있으면 무슨 불벼락이 떨어질지 몰랐기에 송말호는 숙원 조씨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대답을 하고는 서둘러 방을 나갔다.

탁!

문이 닫히자 숙원 조씨는 마음에 안 든다는 듯이 말했다.

“하여튼 하나같이 쓸모가 없다니까.”

그러다가 시선을 옆으로 돌려 함께 있는 김자점을 쳐다봤다.

“병판이 보시기에는 어때요?”

“뭐가 말씀이십니까?”

뭘 묻는지 다 알고 있으면서도 시치미를 떼는 김자점의 모습에 숙원 조씨는 눈썹을 살짝 치켜 올렸다.

“세자 말이에요. 금방이라도 뭔 일을 벌일 것 같더니 이렇게 조용한 것이 더 수상하지 않아요?”

“가만히 있어 주면 저희한테는 좋은 것 아닙니까.”

“정말 몰라서 그러는 거예요!”

짜증이 난 숙원 조씨의 언성이 살짝 높아지자 김자점은 그때서야 상대와 시선을 맞추며 진지하게 이야기를 했다.

“뭔가 찝찝하지만 세자가 움직이지 않는 이상 저희가 먼저 일을 벌이는 건 여의치 않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대로 계속 있자는 말입니까?”

“당분간은 그러는 것이 좋다고 봅니다.”

늙은 너구리답게 신중한 태도를 보이는 김자점과 달리 숙원 조씨는 뭐가 그렇게 초조한지 못마땅한 얼굴로 그를 다그쳤다.

“그러다가 덜컥 주상의 건강에 문제라도 생기면 어쩌려고 그럽니까!”

“아직 정정하시니 삼사 년은 끄떡없으실 겁니다.”

“주상의 나이 때는 하루하루가 다른 법인데 그때까지 자리를 지키고 계신다고 누가 보장을 한답니까!”

“…….”

자꾸 인조의 건강을 걱정하는 숙원 조씨의 모습에 심상치 않은 낌새를 챈 김자점은 정색을 하며 말했다.

“전하의 몸 상태가 안 좋으신 겁니까?”

순간 멈칫하며 바로 대답하지 못하는 숙원 조씨를 보고 김자점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함께 일을 헤쳐 나가려면 서로 감추는 것이 없어야 되는데, 마마께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시는 것 같군요.”

섭섭하다는 듯이 말하자 숙원 조씨는 요부답게 금방 표정을 바꾸고는 태연하게 거짓말을 했다.

“오해예요. 진작 이야기를 해 주려고 했는데 기회가 없었을 뿐이에요.”

“그럼 지금 말씀해 주십시오.”

가능하면 혼자 알고 싶었지만 김자점이 눈치를 챈 이상 더 숨기는 것도 어려웠고, 어찌 됐건 당분간은 둘이 손을 잡아야 했기에 숙원 조씨는 비밀을 알려 줬다.

“주상께서 예전부터 가지고 계신 지병이 있다는 건 병판도 알고 있을 거예요.”

“예.”

인조의 지병은 오래된 것으로 가끔씩 원인을 알 수 없는 두통과 가려움증에 며칠씩 국정을 중단하기도 했었다.

“그동안 보약과 침술로 그럭저럭 건강을 유지했었는데, 얼마 전부터 급격하게 상태가 안 좋아지고 있어요.”

그러고 보니 최근 들어 대전에서 열리는 어전회의를 거르는 경우가 많고, 열린다고 해도 예전에 비해 빨리 끝내고 인조가 쉽게 피로한 기색을 보인 것이 떠올랐다.

여러 가지 징후가 있었는데도 그걸 눈치채지 못한 걸 자책하며 김자점은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많이 안 좋으신 겁니까?”

“어의 말로는 길어 봤자 일 년이라고 했어요.”

숙원 조씨의 말에 김자점은 둔기를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이걸로 그동안 숙원 조씨가 조급해하면서 도현을 빨리 끌어내리려고 한 것이 모두 다 설명됐다.

“큰일이군요.”

“그러니까 남 좋은 일을 시키지 않으려면 세자를 없애 버려야 된다는 겁니다.”

이제 세자를 죽이자는 이야기를 아무런 거리낌 없이 내뱉는 숙원 조씨의 모습에 김자점은 머리가 아팠지만, 자신이 살기 위해서라도 도현을 제거해야만 됐다.

“하지만 딱히 방법이 없으니…….”

“지난번처럼 독살을 하는 것이 어떻겠소이까?”

“쉿! 누가 듣기라도 하면 어쩌시려고 그럽니까?”

“다 내 측근들이니 염려하지 않아도 돼요. 그것보다 청나라에서 온 사신들도 모두 돌아갔으니 지금이 일을 벌이기 딱 좋은 때인 것 같은데 병판 생각은 어때요?”

예친왕에게 소현세자의 죽음을 조사하라는 지시를 받고 온 청국 사신들은 여러 가지 의혹을 발견했지만, 열쇠를 쥐고 있는 내의원 소속 의원 이형익이 불의의 사고를 당해 죽었고 숙원 조씨와 김자점의 뇌물 공세에 넘어가, 어영부영 시간만 때우다 자연사로 결론을 내리고는 얼마 전 북경으로 돌아갔다.

“깔끔하고 확실한 방법이기는 하지만 연이어 급사로 죽는 건 좀 그렇지 않습니까?”

김자점이 별로 내켜 하지 않자 숙원 조씨는 눈가를 찡그리며 다그치듯 말했다.

“그럼 이대로 넋 놓고 있다가 세자한테 모든 다 빼앗기자는 거예요!”

“그건 아닙니다만…….”

“아직 상황 파악이 안 되는 모양인데, 남들 눈치를 보며 머뭇거릴 여유가 없어요. 주상의 병세가 알려지기 전에 어떻게든 세자를 끌어내리고 어서 우리 숭선군을 왕좌에 앉혀야 된단 말입니다.”

숭선군 이징은 숙원 조씨의 자식이자 인조의 다섯째 아들이었는데, 위로 누이인 효명 옹주가 있었다.

아무런 대비도 없이 권력의 원천인 인조가 사라지고 척진 도현이 왕위에 오른다면, 김자점으로서도 좋을 것이 하나도 없었다.

아니, 즉위와 동시에 제일 먼저 숙청 대상에 올라갈 것이 불을 보듯 뻔했기에 어떻게든 막아야 될 처지였다.

고심을 하던 김자점은 꺼림칙한 것이 없지 않았지만 손에 쥐고 있는 권력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좋습니다.”

그러자 숙원 조씨는 반색을 했다.

“잘 생각했어요. 어차피 우리는 한 배를 탄 운명이잖아요.”

“맞습니다. 그럼 어떤 방법으로 손을 쓰실 생각이십니까?”

김자점의 물음에 숙원 조씨는 독사 같은 눈을 번득이며 이야기를 했다.

“이 의원이 살아 있었다면 일이 쉬웠을 테지만 아쉽게도 불의의 사고를 당해 죽었으니 이번에는 내명부 사람을 써서 처리를 할 생각이에요.”

“내명부라면?”

“이미 수라간水刺間에 손을 써 뒀으니 병판은 아무 염려 말고 나중에 신료들이 엉뚱하게 죽은 소현세자의 자식들을 거론하지 못하도록 미리 정리를 해 주세요.”

수라간은 국왕과 왕실 식구들이 먹는 모든 음식을 만드는 곳이었는데, 숙원 조씨의 말은 곧 식사에 독을 넣어 죽이겠다는 뜻이었다.

“세자 저하께도 기미 상궁이 있는데, 가능하겠습니까?”

“후후후. 내가 그것도 생각하지 않고 일을 벌일 것 같아요? 동궁전에 있는 궁인들은 다 내 입김이 들어간 아이들이니 그런 염려는 할 필요가 없어요.”

자신만만해하는 숙원 조씨를 보며 김자점은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내명부의 수장은 계비인 장렬황후였지만 인조의 총애를 등에 업고 숙원 조씨가 대궐을 쥐락펴락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왕비인 장렬황후는 아무런 실권도 없이 지아비인 인조도 거의 만나지 못하고 거의 유폐되다시피 경춘전景春殿에 앉아 허수아비처럼 자리만 지키고 있는 실정이었다.

이런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김자점은 숙원 조씨의 계획이 성공할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전 마마님만 믿고 있겠습니다.”

하루가 급했던 숙원 조씨는 그날 오후 바로 수라간을 책임진 상궁을 불러서 소현세자 때처럼 비상이 든 주머니를 건네줬다.

단번에 약을 다 털어 넣어서 죽인다면 사람들의 의심을 피할 수 없고 뒤처리 또한 골치 아파지기에, 숙원 조씨는 도현이 먹을 음식에 조금씩 비상을 넣어 중독시키도록 했다.

물론 여유가 많이 없었기에 그 기간은 한 달을 넘기지 않을 생각이었는데 계획대로 일이 진행될지는 미지수였다.

탁탁탁!

치이이익.

인조와 왕실 식구들이 먹는 음식을 만드는 수라간은 새벽부터 밤늦은 시간까지 한시도 조용할 날이 없었는데, 오늘도 어김없이 재료를 조리하는 소리와 맛있는 냄새가 밖에서부터 진동을 했다.

하얀 김이 솟아오르는 냄비 앞에서 국자를 휘젓는 궁녀가 있는가 하면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열심히 아궁이를 지피는 어린 궁녀까지 다들 모여 손을 바쁘게 놀리는데, 그중에서도 키가 크고 뱃살이 두툼한 상궁이 허리에 손을 딱 댄 자세로 서서 여기저기 지시를 내리고 다녔다.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수라간에서 마치 대장군인 양 궁녀들을 진두지휘하는 그녀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주위를 살펴보다가, 조금이라도 요령을 피우고 눈치를 살피는 사람을 발견하면 단번에 불호령을 내렸다.

갖가지 색깔의 야채로 멋을 내고 그릇 위에 가지런히 담아 준비된 상에 올리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상궁은, 주르륵 늘어선 칠첩반상들 중 하나를 찍어 물었다.

“그게 동궁전으로 가는 것이냐?”

“그렇습니다만…….”

이제 갓 어린 티를 벗은 궁녀 하나가 고개를 끄덕이자 상궁은 상 위에 놓여 있는 찬들을 주의 깊게 살피더니, 크고 작은 반찬 그릇들 중 하나를 집어 올렸다.

“이건 빼고 다른 걸 내오너라. 세자 저하께선 입맛이 까다로운 분이 아니셔서 특별히 가리시는 게 없지만, 저번에 보니 이 나물은 거의 손도 안 대셨더구나.”

“알겠습니다.”

매일 하루 세끼 상을 준비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누가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정도는 꿰게 된다.

이런 식으로 중간에 찬을 바꾸는 것쯤이야 자주 있는 일이었기에 별반 의심도 하지 않고 궁녀가 그릇을 받아 들어 물러가자, 상 주위에는 상궁 하나만이 남게 되었다.

저마다 제 할 일이 바빠 아무도 이쪽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것을 확인한 상궁은, 저고리 안쪽에 숨긴 작은 향낭을 꺼내 하얀 가루를 국 안에 솔솔 뿌려 넣었다.

숙원 조씨가 동궁전에 들일 음식에 타라고 명령하며 건넨 비상은 따끈한 국물에 섞여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아무렇지도 않게 향낭을 도로 품속에 넣은 상궁은 빨리빨리 움직이라며 궁녀들을 재촉하고선, 약간의 죄책감이 섞인 눈빛으로 동궁전에 올려 보낼 상을 힐끔 쳐다보다가 모질게 고개를 돌려 버렸다.

“저하, 진지 드실 시각이옵니다.”

수라간에서 올려 보낸 상이 도착하자, 밖에서 내관이 알렸다.

무료한 표정으로 서책을 읽고 있던 도현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표지를 덮고 자세를 바로 했다.

궁녀들이 조심스러운 몸짓으로 방 안에 상을 들고 들어와 제일 먼저 기미상궁에게 보였다.

젓가락으로 반찬들을 하나씩 먹으며 맛을 보던 기미 상궁은 제일 마지막으로 따끈한 김이 피어오르는 국에 수저를 대었다.

하지만 국물을 약간 떠서 입술만 축였을 뿐, 삼키지 않고 재빨리 입가를 훔친 기미 상궁은 도현에게로 몸을 돌려 허리를 굽혔다.

“이상 없사옵니다.”

“이리 가져오너라.”

도현이 손짓하는 것과 동시에 기미 상궁의 허락을 맡은 궁녀들이 차례차례 상을 내려놓았다.

밥 먹을 때만큼은 마음 편하게 있고 싶다는 도현의 뜻에 따라 궁녀들과 기미 상궁까지 모두 자리를 물러가자, 방 안에는 믿을 수 있는 측근이자 말 상대도 겸해서 항상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칠현만이 남았다.

“어디 보자.”

보기만 해도 먹음직스러운 음식들을 앞에 놓고 수저를 손에 든 도현은 아직 끼니를 챙겨 먹지 못한 칠현을 향해 가끔씩 약 올리는 말장난까지 치며 맛있게 배를 채웠다.

어느 것 하나 정성이 들어가지 않은 게 없어 혀가 호강을 하는 듯했으나, 유일하게 국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

“혼자 드시면 맛있으세요?”

“아, 맛있다. 사람 사는데 제일 중요한 도락 중에 하나가 바로 먹는 거라고 하지 않느냐.”

“치잇.”

아침에 눈뜨고 일어나서 잠자리에 들 때까지 도현 곁에서 시중을 드니 한양에 돌아오고 나서부턴 자유 시간이라곤 거의 없는 칠현인지라, 안 그래도 까칠한 성격이 더욱 도를 더하는지 입술을 삐죽이며 눈을 실쭉하게 떴다.

“맘 같아선 따로 네 상도 차리라고 하고 싶지만, 궁중 법도가 엄한 걸 어쩌겠어.”

“처음부터 그런 거 바라지도 않았거든요?”

“계집애처럼 삐치지 말고.”

도현은 고기를 다져 만든 산적 그릇과 식후 입가심용인 약과를 칠현 쪽으로 밀었다.

“순 반찬뿐이잖아요. 이래 가지고 어디 제대로 밥 먹었다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럼 내일부터 밥을 곱절로 달라고 하든가.”

“됐습니다. 저하께서 남달리 밥을 많이 먹는다고 이상한 소문이라도 나면 안 되니까요.”

그러면서 못 이기는 척 약과를 입에 문 칠현은 소맷자락에서 가느다란 은침을 꺼내 들었다.

미지근하게 식어 버린 국에 은침을 담그니 끝이 새까맣게 변색되는 걸 보면서, 도현과 칠현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전혀 놀라지 않은 표정으로 묵묵히 밥을 먹었다.

“역시나.”

“그러네요.”

칠현은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면서 물었다.

“그런데 이걸 어쩌죠?”

“알아서 처리해. 그렇다고 아무 데나 갖다 버리지 말고.”

그러면서 도현은 묵묵히 젓가락을 놀렸다.

“저쪽이 계속 이런 식으로 귀찮게 구니 나도 가만히 있을 순 없겠군. 호락호락 당할 상대가 아니라는 걸 똑똑히 깨우쳐 줘야겠어.”

“전 그냥 아무 생각 안 하고 밥만 먹을 수 있게 되어도 좋겠습니다.”

“넌 머릿속에 밥 생각밖에 없지?”

“저하께서 좀 전에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도락 중에 하나라고 하셨잖아요!”

“알았다, 알았어.”

버럭 하는 칠현에게 계속 밥이나 먹으라며 젓가락을 까딱거리는 도현의 얼굴엔 미소가 서렸지만, 그 눈빛은 무언가를 깊게 생각하는 듯 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숙원 조씨는 꿈에도 모르겠지만 독이 든 음식이 올라오기 전에 이미 도현은 상대가 꾸민 음모를 낱낱이 다 알고 있었다.

바로 아까 수라간에서 음식이 들어왔을 때 검사를 했던 기미 상궁이 그에게 독이 들어 있다는 걸 귀띔해 주었다.

세자가 되자마자 제일 먼저 지근거리에서 자신을 보필하는 동궁전 궁인들을 회유한 효과가 바로 나타난 것이다.

숙원 조씨 입장에서는 비상을 먹이기 위해 독을 검사하는 사람한테 그냥 모르는 척 넘기라고 은밀히 지시를 내린 거였는데, 그게 모든 사실이 도현에게 알려지는 치명적인 결과를 냈다.

아무튼 수라간에서 독이 든 음식을 올리는 족족 모두 시궁창에 버려지고 있는 줄도 모르고 숙원 조씨는 도현이 언제 발작을 일으킬지 초조하게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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