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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 물든 밤 1 (29/104)

피로 물든 밤 1

짙은 구름에 달빛마저 모습을 감춘 어두운 밤 고래 등처럼 넓고 큰 김자점의 저택으로 측근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김응해와 기진흥 등 측근들만 모았는데도 널찍한 서재가 좁게 느껴질 정도로 인원이 많았는데, 이게 다 그의 권세를 나타내는 거였기에 김자점은 상석을 차지하고 앉아 흡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모종의 지시를 받고 수원에 내려갔다 온 황현을 마지막으로 올 사람이 모두 다 도착하자 김자점은 마시고 있던 찻잔을 서탁 위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거사일이 정해졌소.”

순간 서재에 모여 있던 측근들은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며 긴장했다.

“어의에게 은밀히 알아본 바에 의하면 겨우겨우 침과 약으로 버티고 있지만 이틀을 넘기기 어려울 거라고 했네.”

“으음.”

“이틀이라…….”

작게나마 인조가 다시 자리를 털고 일어날 거라는 희망을 품고 있던 측근들은 침음을 흘리며 허탈해했다.

“어차피 예상했던 일이고 이번 거사만 성공한다면 다들 지금보다 더 큰 권력을 쥐게 될 걸세.”

김자점의 달콤한 말에 측근들은 불안감을 모두 떨쳐 내고 거사 이후 얻게 될 보상을 기대하며 탐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걸 보며 피식 미소를 지은 김자점은 왼편에 앉아 있는 황현에게 시선을 줬다.

“갔다 온 일은 어떻게 됐나?”

물음에 황현은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미 병력을 다 소집해서 지시를 내리면 한나절 안에 한양으로 달려올 수 있도록, 훈련 핑계를 대고 경기병사가 군대를 청계산 지류인 국사봉 근처로 올려 보내 놨습니다.”

“병력이 얼마나 되지?”

“다른 이들의 시선이 있어서 경기 병영 전체를 다 데려오지는 못했고 병사 직속 병력 이천입니다.”

“수어청이 이천이 조금 넘으니까 도합 사천 명이군.”

김자점이 한쪽 손을 들어 정성 들여 기른 턱수염을 쓰다듬자 옆에 있는 김익이 그를 보며 입을 열었다.

“어차피 대궐만 장악하면 끝나는 거 아닙니까? 그 정도면 차고 넘칩니다.”

중병에 걸려 오늘내일하는 인조 때문에 대소 신료들이 모두 대궐에 모여 있어, 김익의 말처럼 크게 일을 벌이지 않아도 한꺼번에 휘몰아 쳐서 거사를 끝낼 수 있었다.

“수어청도 준비가 다 끝났겠지?”

“물론입니다.”

김익이 자신 있게 대답하자 김자점은 눈을 번득이며 말했다.

“내일 아침 해가 뜨는 걸 신호로 거사를 시작할 테니 그렇게들 알고 있게.”

“옛.”

측근들은 약간 긴장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움직일 건지 이야기를 나누며 최종 점검을 한 후 자정이 되어서야 저택을 나왔다.

어둠 속에 숨어 그 모습을 지켜보던 박영식은 살짝 미간을 좁혔다.

“왜 그러십니까?”

함께 있던 부하의 말에 박영식은 시선을 저택에 고정한 채 낮게 입을 열었다.

“뭔가 수상하지 않아.”

“글쎄요. 전하가 쓰러지신 이후부터 거의 매일 이런 모임을 가져서 그런지 전 별로 이상한 걸 못 느끼겠습니다.”

“아니야. 나오는 사람들의 얼굴이 하나같이 잔뜩 굳어 있잖아.”

“그거야 요즘 조정 상황이 안 좋으니까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느낌에 뭔가 있어.”

그때 굳게 닫혀 있던 저택 대문이 조금 열리더니 외출복 차림의 김익이 하인 두 명을 대동하고 밖으로 나왔다.

조심스럽게 좌우를 살핀 김익은 빠른 걸음으로 어딘가를 향했고 그걸 하나도 빼놓지 않고 숨어서 모두 다 지켜본 박영식은 씨익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역시 내 생각이 맞았어.”

부하도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꼈는지 약간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바로 꼬리를 붙일까요?”

“당연하지.”

박영익이 손짓을 하자 뒤에 있던 부하 둘이 재빨리 김익에게 따라붙었다.

종일 인조 옆을 지키고 있다가 잠시 중전과 교대한 도현이 밖으로 나오자, 기다렸다는 듯 칠현이 다가와 귓속말을 건넸다.

“방금 박 대장이 전해 온 소식인데 김자점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고 합니다.”

“자세히 말해 봐.”

“김자점의 저택에서 측근들이 전부 모여 장시간 회의를 가진 직후 장남인 김익이 진장방에 있는 수어청으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진장방鎭長坊은 조선시대 한양의 행정구역 명칭 중 하나로 현재의 삼청동과 팔판동, 화동 일대였다.

“흐음. 이 시간에 거길 가다니 확실히 수상하군.”

버릇처럼 턱을 쓰다듬던 도현은 시선을 들며 말했다.

“경기병사의 군대가 지금 어디에 있다고 했지?”

“국사봉이옵니다.”

“이거 아무래도 숙원과 병판이 거사를 벌일 모양이군.”

“그럼 저희도 빨리 대책을 세워야 되지 않겠습니까?”

안절부절못하는 칠현과 달리, 그는 마치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평정심을 유지하며 차분히 입을 열었다.

“이미 우리 쪽 준비는 다 끝났으니까 호들갑 떨 필요 없어.”

“그렇지만 당장 역도들이 대궐로 쳐들어오기라도 하면…….”

그러자 도현은 눈을 반달 모양으로 휘며 놀리듯 이야기를 했다.

“왜, 겁나?”

“흠흠. 누가 겁난다고 했습니까. 전 단지 저하의 신변에 안 좋은 일이라도 생길까 봐 염려를 하는 거지요.”

괜히 헛기침까지 하며 아닌 척하는 칠현의 모습에 그는 피식 미소를 지었다.

“뭐. 그렇다고 치지.”

“정말이라니까요.”

“알았어. 그것보다 저들이 치고 들어오기 전에 최소한의 방비는 해 둬야 될 테니, 신 위사장을 불러와.”

“예.”

허리를 숙이며 대답한 칠현이 서둘러 어딘가로 가자 도현은 몸을 돌려 인조가 누워 있는 전각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아바마마께서 놔둔 쓰레기들을 다 깨끗이 치워 버리고 내일부터 새 시대를 열 겁니다.”

오군영 중 하나인 용호영龍虎營은 국왕과 대궐을 지키는 일종의 근위대였는데 아래에 내금위와 우림위, 겸사복의 일명 삼위를 거느렸다.

임무의 특성상 국왕이 가장 신임하는 무장을 지휘관으로 삼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인조가 쓰러지기 몇 달 전에 숙원 조씨의 베갯머리송사로 김자점 측 인물인 박홍권이라는 자가 별장別將이 되어 병력을 통솔했다.

인조가 혼수상태에 빠진 비상 상황이었기에 박흥원은 퇴청을 하지 못하고 며칠째 대궐에 남아 있었다.

부장과 호위 두 명을 대동하고 박흥원이 거드름을 피우며 순찰을 돌고 있을 때, 내금위 소속 위사장인 신철이 그를 보고 앞으로 다가와 군례를 올렸다.

“여기 계셨군요.”

“날 찾았나?”

“세자 저하께서 잠시 오시라고 하십니다.”

“저하께서?”

“네.”

뜻밖의 말에 박흥원은 의아한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날 무슨 일로?”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시간이 꽤 흘렀으니 빨리 가시지요.”

약간 찝찝한 느낌이 들었지만 신철의 재촉에 박흥원은 얼떨결에 발걸음을 옮겼다.

신철이 안내한 곳은 인조가 누워 있는 내전에서 가까운 한 전각이었는데 약간 외진 곳에 있어 평소에도 인적이 드물었다.

“여기에 계신 건가?”

“예.”

신철의 대답에 박흥원이 미닫이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열 평쯤 되는 공간에 도현이 앉아 있었는데 뒤로 칠현과 위사 두 명이 장승처럼 서 있었다.

“찾으셨사옵니까?”

“어서 오시오.”

군례를 취한 박흥원이 미리 갖다 놓은 방석 위에 앉자 도현이 상대를 보며 차분히 말했다.

“차 한잔 하시겠소.”

“아닙니다.”

이렇게 둘이 마주 앉아 있는 것이 껄끄러웠던 박흥원이 약간 거리를 두며 거절했지만, 도현은 인상을 찡그리지 않고 이야기를 이어 갔다.

“며칠째 퇴청도 못 하고 고생이 많소.”

“아닙니다. 저보다는 전하를 간호하시는 마마님들과 저하께서 더 힘드시지요.”

“박 별장.”

갑자기 도현이 정색을 하며 쳐다보자 박흥원도 덩달아 긴장하며 대답했다.

“네. 말씀하십시오.”

“듣자하니 병판과 잘 아는 사이라고 하던데, 맞소?”

“……!”

도현이 김자점을 거론하자 박흥원은 눈을 이리저리 굴리다가 경계심이 가득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친분이 조금 있기는 하지만, 그렇게 가까운 사이는 아닙니다.”

경조사가 있을 때는 물론이고 거의 매주 김자점의 저택에 뇌물을 싸 들고 가 얼굴 도장을 찍는 걸 다 알고 있는데, 뻔뻔하게 오리발을 내밀자 도현은 내심 비웃음을 흘렸다.

“흐음. 그렇단 말이오?”

“그걸 물으시려고 절 부르신 겁니까?”

박흥원의 물음에 도현은 허리를 펴며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뭐. 아주 상관이 없는 건 아닌데…… 실은 한 가지 부탁이 있소이다.”

“부탁이라고 하셨습니까.”

“그렇소. 가능하면 박 별장이 꼭 들어줬으면 좋겠소.”

착 가라앉은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도현의 모습에 어쩐지 가슴이 싸늘해진 박흥원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뭔지 말씀해 보십시오.”

“지금 이 시간부로 지휘권을 내게 모두 넘기고 당분간 여기서 조용히 근신하고 있으시오.”

“그게 무슨…… 아무리 세자 저하시라고 하지만 주상 전하께서 내려 주신 권한을 마음대로 빼앗아 갈 권리는 없으십니다!”

잠시 당황해하던 박흥원은 이내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언성을 높였다.

그러자 무서울 정도로 담담한 표정을 지으며 도현이 차갑게 말했다.

“그래서 지휘권을 내놓지 못하겠다는 건가?”

“물론입니다. 더 하실 말씀이 없으시다면 전 이만 나가 보지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박흥원이 방을 나가려고 하자 뒤에 있던 신철이 그를 막았다.

“비켜!”

“저하의 허락이 없으시면 한 발자국도 여기서 나갈 수 없소이다.”

“뭐야!”

그때서야 자신이 함정에 빠진 걸 깨달은 박흥원이 와락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고개를 돌리자, 도현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가능하면 피를 묻히고 싶지 않았지만, 싫다니 어쩔 수 없지. 처리하게.”

“사, 살려 주…… 컥!”

서걱!

하얗게 겁에 질려 매달리려던 박흥원은 번개처럼 뽑아 휘두른 신철의 검에 피를 뿌리며 바닥에 쓰러졌다.

“신 위사장.”

“예, 저하.”

“계획대로 대궐을 장악하도록 해.”

“충!”

“지금부터는 내 허락 없이 개미 새끼 하나 밖으로 내보내서는 안 돼. 알겠나?”

“염려 마십시오.”

밖으로 나간 도현은 박흥원이 데려온 부장과 호위 두 명이 어느새 제압당해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걸 무심히 쳐다보고는 계속 발걸음을 옮겼다.

도현의 지시로 시작된 용호영 장악은 조용하면서도 빠르게 끝났는데, 박흥원과 연결된 군관 일부가 저항을 했지만 신철이 이끄는 내금위 위사들에 의해 금방 제압됐다.

“으윽.”

“큭.”

검에 베인 가슴을 두 손으로 움켜잡으면서 군관이 허물어지듯 주저앉자, 신철은 무기를 든 채 어쩔 줄 몰라 하며 서 있는 겸사복 병사들을 날카롭게 노려보며 일갈했다.

“더 덤빌 놈이 있느냐!”

“아, 아닙니다.”

병사들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말을 더듬으며 대답하자 신철은 검에 묻은 피를 털어 내고는 강압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시신을 치우고 당장 대궐 문을 닫아.”

“예, 옛.”

크게 대답하며 허둥지둥 움직이는 병사들을 가만히 보고 있을 때 위사 한 명이 황색 띠를 하나 가지고 와서 내밀었다.

“이제부터 황색 띠를 매지 않은 자는 모두 적으로 간주하라는 저하의 명령하셨사옵니다.”

“알았네.”

작게 고개를 끄덕인 신철은 황색 띠를 받아 들었고 주위에 있던 위사들과 방금 투항한 겸사복도 모두 나눠 준 띠를 머리에 질끈 동여맸다.

끼이이익.

쿵!

그렇게 용호영을 완전히 장악한 신철은 대궐 문을 모두 단단히 걸어 잠갔다.

바늘 떨어지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조용한 방 안에 도현이 팔짱을 끼고 앉았다.

자정을 막 넘긴 시각이라 바깥은 칠흑처럼 어두웠고, 주위를 밝히는 불빛이라곤 서탁 위에 놓인 작은 등 하나뿐이었다.

어른거리는 불빛이 도현의 옆얼굴을 비췄다 말았다 하며 깜박거리는데 칠현이 소리 없이 다가와 말했다.

“상선께서 오셨습니다.”

그리고 곧이어 칠현의 뒤로 얼굴에 주름이 자글자글한 내관 하나가 들어왔다.

노령에도 불구하고 허리는 꼿꼿하게 펴져 있었으나 그의 속내를 대변하듯이 발걸음이 불안정했고 안색은 창백했다.

상선은 도현의 좌우로 시립해 있는 위사들을 보고선 이내 체념한 듯 눈을 내리깔았다.

“부르셨사옵니까.”

“내 자네에게 긴히 부탁할 일이 있네.”

도현은 거두절미하고 바로 본론부터 꺼냈다.

“옥쇄를 내게 가져다주게.”

“……!”

상선은 머리를 망치로 얻어맞은 사람처럼 눈을 크게 뜨고 도현을 바라보았다.

“제가 어찌 감히!”

“아바마마의 침전과 내전에 자유로이 드나들 수 있는 사람은 자네뿐이지 않나. 그리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항상 곁에서 모셔 왔으니 당연히 옥쇄가 어디 있는지도 잘 알겠지.”

“하, 하지만 주상 전하께서 절대 허락하시지 않을 겁니다.”

“궁궐의 위사들은 전부 내 편이니 자네를 방해할 사람은 없을 게야.”

그러자 이미 궁내를 도현이 장악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달은 상선은 그래도 고집스럽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도현은 작게 한숨을 쉬고 말했다.

“사실 자네가 아니라도 얼마든지 옥쇄는 손에 넣을 수 있네. 하지만 아바마마께서 누워 계시는 자리에 위사들을 데리고 우르르 몰려가는 것도 자식 된 도리가 아니지 않나. 게다가 지금은 안정을 취하셔야 할 때니, 방 안을 뒤지는 소리로 내전을 소란스럽게 만들고 싶지 않아.”

꼭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무력을 쓸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으니 조용히 일을 처리하게 협조해라.

도현의 말에 담긴 속뜻을 알아차리지 못할 상선이 아니다.

그는 새치가 돋아나 있는 눈썹을 일그러뜨리며 잠시 고민하더니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 말을 남기고 상선이 방을 나가자 위사 한 명이 감시역으로 조용히 뒤에 따라붙었다.

시간이 느릿느릿하게 흘러가는 것을 느끼면서 도현이 잠자코 등불만 바라보고 있자, 칠현 역시 입을 꾹 다물고 상선이 돌아오기만을 초조하게 기다렸다.

이윽고 차 한 잔 마실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 때쯤, 상선이 돌아왔다.

상선의 손에는 길이와 너비가 손바닥 한 뼘보다 더 크고 묵직한 함이 들려 있었는데 그 순간 돌연 방 안의 공기가 팽팽해졌다.

붉은색으로 칠을 하고 사방 모서리에는 금으로 장식했으며 정면에는 역시 금빛으로 용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두꺼운 자물쇠 너머, 이 안에 들은 것을 차지하는 자가 조선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권력을 손에 넣게 되는 것이다.

“세자 저하께 바치옵니다.”

무릎을 꿇고 상선이 머리 위로 함을 들어 올리자 도현은 그것을 조심스레 받아 들었다.

딸칵, 하는 소리와 함께 뚜껑을 여니, 붉은색 비단 위에 아랫부분은 큼직한 사각형이며 손잡이는 금방이라도 승천할 듯 생생한 모습의 용이 순금으로 화려하게 조각되어 있었다.

도현은 옥쇄를 손에 쥐고 그 무게를 가늠하듯 한번 들어 보더니 한숨과도 같이 말을 토해 냈다.

“이게 바로 옥쇄로군.”

옥쇄를 손끝으로 살짝 쓰다듬다가 다시 함에 돌려놓은 뒤, 뚜껑을 닫고 조심스레 품에 안은 도현은 아직 무릎을 꿇고 있는 상선을 보고 그에게 일어나라 손짓했다.

“내 자네의 도움은 잊지 않겠네. 날이 밝으면 궁궐이 조금 시끄러워지긴 하겠지만, 곧 잠잠해질 거야. 이젠 자네도 나이가 찰 만큼 찼으니, 슬슬 고향에 돌아갈 때도 되지 않았나. 미리 짐을 꾸려 놓는 편이 좋을 걸세.”

목숨은 살려 주겠다는 도현의 말에 상선은 감지덕지한 표정으로 머리를 조아렸다.

“감사하옵니다.”

“그럼 나가 보게.”

“예.”

뒷걸음으로 상선이 방을 나가자 잠시 옥쇄를 손에 들고 쳐다보던 도현이 담담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가져와.”

“네.”

미리 작성해 놓은 명령서를 칠현이 서탁 위에 잘 보이도록 펼치자 도현은 인주를 듬뿍 묻혀 옥쇄를 찍었다.

쿵!

묵직한 소리와 함께 명령서에 옥쇄가 선명하게 찍혔다.

각기 다른 내용이 적힌 칙서 열 장을 만든 도현은 옥쇄를 한쪽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김자점이 눈치채지 못하게 최대한 빨리 전달해.”

“알겠습니다.”

한쪽에 시립해 있던 위사 박태철이 칙서를 챙겨 들고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숙원 조씨는 어떻게 했어?”

도현이 쳐다보자 살짝 머리를 숙이며 칠현이 대답했다.

“거처에 가둬 두고 허튼짓을 못하도록 위사들이 엄중히 지키고 있사옵니다.”

“잘했어.”

일을 벌이기도 전에 뒤통수를 제대로 얻어맞은 숙원 조씨가 얼마나 허탈하고 당황해할지 떠올린 도현은 살며시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마, 마마!”

인조 옆에 있다가 늦게 처소로 돌아온 숙원 조씨가 잠자리에 들려 하고 있을 때, 궁녀 하나가 창백한 안색을 하고 뛰어들어 왔다.

“무례한 것! 여기가 어느 안전이라고 그리 허둥거리느냐?”

머리카락을 가지런히 빗어 틀어 올리고 비녀 빼는 걸 도와주던 김 상궁이 냅다 호통을 쳤다.

“머리가 아프니 큰 소리 내지 마라.”

새침한 표정으로 관자놀이를 지그시 누른 숙원 조씨는 푸석푸석해진 얼굴을 거울에 비추어 보면서 궁녀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냐?”

“위, 위사들이 지금 처소 밖에 쫙 깔려 있습니다.”

“뭐라?”

목소리가 뾰족하게 올라가는 것과 동시에 숙원 조씨가 서탁을 손바닥으로 탕 내리쳤다.

“볼일이 있어 밖에 나가려 한다 해도 들은 척을 하지 않고, 아무도 밖으로 나갈 수 없다며 장승처럼 버티고 서 있습니다.”

“……!”

순간 숙원 조씨는 불길한 예감이 엄습해 오는 걸 느꼈다.

위사들은 궁궐을 지키는 임무를 맡고 있어, 함부로 다른 사람의 명령을 받지 않는다.

한데 인조가 병으로 앓아누운 지금 이들이 움직였다?

그것도 인조의 총애를 받는 후궁인 자신의 처소를 에워쌌다는 건 분명히 뭐가 잘못돼도 단단히 잘못됐다는 증거다.

“책임자가 누구라 하더냐? 내가 직접 얼굴을 보고 죄를 물어야겠다!”

숙원 조씨가 궁녀를 다그쳐 밖으로 내모는데 불쑥 걸걸한 사내의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홱 고개를 돌려 보니 키가 크고 덩치가 우람하며 위사 복장을 한 사내가 막 방 안으로 들어서는 참이었다.

숙원 조씨 휘하의 궁녀들이 들어가지 못하게 하려고 필사적으로 앞을 가로막았지만, 그가 위압적인 눈빛으로 노려보며 억지로 밀고 들어가자 아무도 그를 막을 수 없었다.

“대체 뭐 하는 놈이냐? 명색이 대궐 위사라는 놈이 예의와 법도도 모르는 후안무치한 상놈인 줄, 내 꿈에도 몰랐구나!”

인조 외에는 함부로 출입할 수 없는 후궁에 감히 흙발로 침입해 들어오다니.

숙원 조씨는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어 올라 체통도 잊고 마구 고함을 내질렀다.

하지만 그는 아무렇지 않은 듯 별 대꾸도 하지 않고 가만히 숙원 조씨의 얼굴을 뜯어보더니 이윽고 흥 코웃음을 쳤다.

“얼마나 대단한 미색이기에 나라를 말아먹을 뻔했나 했더니…… 별것도 아니로군.”

“뭐, 뭐!”

“실례했습니다. 예의범절도 모르는 무식한 놈의 헛소리라 생각하고 용서해 주시죠.”

그는 반쯤 비웃는 듯한 미소를 입가에 매달고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제 이름은 신철이라 하옵니다. 별것 없는 놈이긴 하오나, 여기 있는 위사들을 이끌고 있는 몸입지요.”

그러면서 그는 숙원 조씨가 한마디 대꾸할 틈도 없이 줄줄 말을 늘어놓았다.

“명령에 따라, 지금 이 시간부로 이곳에서 아무도 밖으로 나갈 수 없습니다. 숙원 마마는 물론이고, 상궁이든 일개 궁녀이든, 그 어떤 이유가 있다 한들 절대 출입을 허가할 수 없으니 그리 아시지요.”

“네, 네놈이 뭐라고! 나는 주상 전하를 곁에서 모시는 몸이다. 한데 일개 위사에 불과한 네깟 녀석이 감히 날 감금이라도 하겠다는 말이냐?”

“거참 거북한 말씀을 하시는군요. 전 다만 명령을 받고 움직이는 사람이라, 저한테 그리 말씀하셔도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럼 대체 명령을 누가 내렸단 말이냐! 설마하니 주상께서 하명하셨다는 말은 아니겠지?”

꼬리를 잔뜩 세운 고양이처럼 이를 드러내며 표독하게 외치는 숙원 조씨의 말에 신철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가타부타 말을 않고 신철이 그냥 뒤돌아서자 급기야 화를 이기지 못한 숙원 조씨가 그의 등 뒤로 달려들었다.

타악!

“악!”

“마, 마마!”

신철이 가볍게 팔을 휘두르는 것과 동시에 숙원 조씨가 휘청하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기겁하며 놀란 김 상궁이 서둘러 그녀를 부축하려 했으나 숙원 조씨는 세차게 손길을 뿌리치고는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신철을 쏘아보았다.

“가, 감히 나한테 폭력을 휘둘러? 그러고도 무사할 줄 아느냐!”

“숙원께서 저한테 덤벼들지만 않았어도 아무 일 없었을 겁니다. 자업자득이지요.”

인조의 총애를 받은 후에는 물론이고, 허드렛일을 하던 궁녀 시절에도 이렇게 험한 취급을 받은 적이 없던 숙원 조씨는 눈가를 파들거리며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뱃속이 시꺼먼지 어떤지는 제쳐 두고서라도, 힘없는 여자에게 거칠게 굴고 싶진 않으니 자중하시지요. 얌전히 구는 게 숙원께도 이로울 겁니다.”

신철은 거침없이 말을 뱉어 내고는 부하들에게 주변을 단단히 지키라 이른 뒤 이번에야말로 뒤돌아서 방을 나갔다.

‘드디어 이 순간이 왔습니다, 저하.’

신철의 마음속으로 소현세자를 생각하며 그리 되뇌었다.

그는 본래 죽은 소현세자의 신임을 받던 자로서, 언젠가는 그가 조선에 돌아가 왕위를 잇고 부국강병을 이루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소현세자가 유명을 달리한 후, 상심에 가득 차 우울한 나날을 보내던 그에게 이렇게나마 한을 풀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올 줄은 아무도 몰랐으리라.

신철은 눈을 치켜뜨고 악에 받친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던 숙원 조씨의 얼굴을 떠올리고선 차가운 비웃음을 흘렸다.

“업보를 쌓으면 언젠가는 반드시 그 대가를 치러야만 하는 법이지.”

그야말로 예로부터 당연하게 전해져 내려오는 진리가 지금, 현실로 이뤄지고 있는 중이었다.

한편 대궐 근처 안가에서 대기 중이던 흑치영은 도현이 보낸 전갈을 받고 눈을 반짝였다.

“뭐라고 하십니까?”

옆에 있던 윤형철이 초조한 듯 묻자 흑치영은 득의만만한 얼굴로 비단 두루마리로 만들어진 칙서를 보여 줬다.

“역시 주군이셔.”

윤형철 역시 칙서에 선명히 찍혀 있는 옥쇄를 보고는 굳어 있던 표정이 펴졌다.

“성공하셨군요.”

“주군께서 어떤 분이신데 당연하지. 그럼 우리도 슬슬 움직여 볼까.”

칙서를 품속에 집어넣은 흑치영이 손짓을 하자, 넓은 마당에 앉아 각자 무기를 손질하고 있던 호위대 대원들이 일사불란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들 눈빛이 초롱초롱하고 기합이 들어 있는 것이 한눈에 정예 병력임을 알 수 있었는데, 머리에는 예외 없이 황색 띠를 매고 있었다.

“가자!”

말에 올라탄 흑치영을 선두로 웅도에서 생산한 신형 소총으로 무장한 호위대 오백 명은 대오를 갖추고 질서 정연하게 안가를 나와 대궐로 향했다.

탕탕탕!

거칠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늙은 하인이 하품을 하며 나왔다.

“뉘시오?”

“대궐에서 나왔다. 어서 문을 열어라.”

“대궐이라굽쇼?”

“그래!”

“잠,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대궐이라는 말에 잠이 싹 달아난 하인이 서둘러 대문을 열자 붉은색 관복을 입은 선전관이 안으로 들어서며 물었다.

“대감께서는 안에 계시느냐?”

“예.”

성큼성큼 걸음을 옮긴 선전관이 임경업 장군의 처소에 도착하자, 다행히 아직 잠자리에 들지 않았는지 방에 불이 황하게 밝혀져 있는 걸 보고 하인이 급히 손님이 왔다는 걸 알렸다.

“대감마님, 대궐에서 선전관이 왔사옵니다.”

그러자 ‘드르륵.’ 소리와 함께 미닫이문이 열리면서 무슨 일인지 평상복이 아닌 무복을 갖춰 입은 임경업 장군이 밖으로 나왔다.

“대궐에서 왔다고?”

“네. 주상 전하의 칙서를 가지고 왔으니 어서 예를 갖추시지요.”

칙서라는 말에 임경업은 마당으로 내려와 무릎을 꿇었고 어느새 소식을 듣고 달려온 식솔들이 약간 굳은 얼굴로 바라봤다.

건네받은 칙서를 펼쳐 내용을 읽은 임경업이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는 가운데, 선전관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칙서를 받는 즉시 계획대로 움직이라고 세자 저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대궐은 정리가 다 끝났나?”

임경업의 말에 선전관은 작게 머리를 끄덕였다.

“예. 저하께서 용호영의 지휘권을 인수 받으셨습니다.”

“그렇군.”

칙서를 챙겨 들고 임경업 장군이 몸을 일으키자 한쪽에 서 있던 아들들이 다가와 물었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아버님?”

하지만 그는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갈 데가 있으니 말을 꺼내 오너라.”

“아니, 이 새벽에 어딜 가신다고 하십니까?”

“자세한 건 나중에 이야기를 해 줄 테니 어서 채비부터 해라!”

임경업 장군이 정색을 하며 다그치자 자식과 하인들은 더 이상 이유를 묻지 못하고 서둘러 외출 채비를 했다.

잠시 뒤 그는 아들 둘과 호위 세 명을 데리고 저택을 나와 한양의 방어하는 오군영 중 하나인 총융청摠戎廳으로 향했다.

비상령이 내려진 상태라 집에 가지 못하고 총융청 본청 숙소에서 머물던 이상규는 곤히 잠을 자다 부관의 부름에 깨어났다.

“총융사 어른, 일어나십시오.”

“으음. 뭔가?”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뒤척거리며 일어나 호롱불에 불을 붙인 이상규는 미간을 찌푸렸다.

“아직 첫닭도 울지 않은 시간에 누가 왔다는 건가?”

“그게, 임 장군님이십니다.”

“임경업 장군님을 말하는 건가?”

“예.”

“아니, 그분이 무슨 일로…….”

초급 군관 시절 임경업 휘하에서 근무하며 경력을 쌓았던 이상규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옛 상관이 찾아왔다는 이야기에 서둘러 의관을 갖춰 입었다.

숙소를 나와 불 켜진 집무실로 들어가자 회의용 탁자 한쪽에 임경업 장군이 꼿꼿한 자세로 앉아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장군, 이 시간에 여기까지 어인 일이십니까?”

“허허허. 반갑네. 안 보는 사이에 더 현양해지셨구먼.”

임경업의 말에 이상규는 쑥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장군에 비하면 아직 한참 멀었습니다.”

이상규가 주인이었기에 가운데 상석으로 가서 앉자, 총융청에 속한 여자 노비 하나가 차를 가져와 탁자에 내려놨다.

“드시죠.”

“그러세.”

차를 한 모금 마신 이상규는 왼편에 있는 임경업의 눈치를 살치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그러자 찻잔을 내려놓은 임경업 장군은 시선을 들어 이상규를 봤다.

“실은 자네한테 전해 줄 것이 있어서 이른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찾아왔네.”

“뭔지는 모르지만 장군님께서 이렇게 정색을 하시니 어쩐지 겁이 납니다.”

“읽어 보게.”

농을 했지만 임경업이 받아 주지 않고 품속에서 비단 두루마리를 하나 꺼내자, 이상규는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있다는 걸 깨닫고 살짝 얼굴을 굳혔다.

매듭을 풀고 두루마리를 펼친 이상규는 끝부분에 찍혀 있는 옥쇄를 보고 깜짝 놀라 눈을 치켜떴다.

“이, 이건!”

“세자 저하께서 보내신 거네.”

“저하께서 어떻게 옥쇄를 가지고 계신 겁니까?”

흥분한 듯 이상규의 언성이 높아지자 임경업은 한쪽 팔을 들어 상대를 진정시켰다.

“시끄럽게 떠들 일은 아니니 목소리를 낮추시게.”

“흠흠.”

그때서야 자신이 실수한 걸 깨달은 이상규는 헛기침을 하며 주위를 살폈고 임경업은 담담한 어조로 이야기를 했다.

“주상께서 혼수상태에 빠져 제대로 국정을 수행하기 어려우시니, 세자 저하께서 옥쇄를 관리하시는 건 당연한 일 아닌가?”

“하지만…….”

“일단 내용부터 읽어 보시게.”

“…….”

복잡한 시선으로 임경업을 바라보던 이상규는 크게 한숨을 내쉬고는 내려놨던 두루마리를 다시 집어 들었다.

그리고 천천히 내용을 읽어 내려갔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갔다.

마침내 마지막 한 자까지 다 읽은 이상규는 이마에 굵은 주름살을 하나 만들며 앓는 소리를 냈다.

“끄으응.”

고개를 든 이상규는 담담한 얼굴로 앉아 있는 임경업을 보며 말했다.

“아직 전하께서 살아 계신데 이러시는 건 반역입니다.”

“아까도 말했다시피 주상께서 부재중이실 때 세자 저하가 권한을 대행하는 건 당연한 걸세. 그러니 오군영의 지휘권도 세자께 있으시지. 오히려 혼란스러운 틈을 이용해 불측한 마음을 품는 자들이 역도가 아니겠나!”

크지는 않지만 힘이 가득 실린 임경업의 이야기에 이상규는 아무런 반박도 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자칫 선택을 잘못했다가는 역도가 되어 삼족이 멸할 수도 있는 엄청난 일이었기에, 이상규는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망설였다.

“백번 양보해서 장군의 말씀이 맞다 해도 병판과 숙원 조씨가 아직 변란을 일으킨 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자 임경업 장군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으며 입을 열었다.

“그건 두고 보면 알 테고 자네는 저하께서 명령하신 대로 저들이 어떤 방식으로 회유를 하더라도 절대 동요하지 말고 자리를 지키면 되는 걸세.”

“정말 그것뿐입니까?”

“그러네. 병판 쪽과 싸우라는 것도 아니고 그저 끼어들지 말라는 것이니, 크게 어려운 일도 아니지 않나?”

“으음.”

오히려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 것이 더 이상규의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김자점과 숙원 조씨가 거사를 일으킬 것을 미리 알고 있는 데다 도움은 필요 없으니 같이 역도로 몰리기 싫으면 싸움에 끼어들지 말라고 경고한다는 건,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뜻이었다.

거기다가 명령서에 선명히 옥쇄가 찍혀 있는 걸 볼 때 이미 대궐은 세자의 손에 들어갔다고 봐야 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이상규는 몸을 사릴 것이 아니라 나중을 위해서라면 오히려 적극적으로 세자 측에 가담해야 되는 건 아닌지 조바심이 들었다.

하지만 조정을 좌지우지하는 김자점과 숙원 조씨의 힘이 내심 걸린 이상규는 고심 끝에 임경업의 말대로 괜히 고래 싸움에 끼어들었다가 피를 보지 말고 한 걸음 물러서 지켜보기로 결정했다.

“좋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하지요.”

“잘 생각했네.”

태연히 말하긴 했지만 내심 이상규가 이야기를 거절할까 봐 염려했던 임경업은 입가에 살짝 미소를 지었다.

목적을 이룬 임경업은 잠시 더 대화를 나누고는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아 있었기에 이내 이상규와 헤어져 총융청을 나왔다.

이렇게 임경업뿐만 아니라 이완도 도현의 지시를 받아 수어청을 제외한 다른 오군영이 경거망동하지 못하도록 단속하고 다녔다.

아무리 김자점이 병권을 쥔 병조판서라고 하지만 조선을 대표하는 두 명장이 나서자, 일선 지휘관들은 크게 흔들렸고 거기다가 옥쇄가 찍힌 명령서까지 보여 주자 이상규처럼 대부분 사태를 관망하는 걸 선택했다.

이런 가운데 시간이 흘러 드디어 고즈넉한 새벽, 칠흑 같던 어둠이 가고 찬란한 태양이 떠올랐다.

동쪽 하늘이 밝아 오며 세상이 기지개를 켜자 밤사이 어떤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고 치렁치렁한 관복 대신 짙은 색 무복을 입은 김자점이 측근들과 함께 거사를 일으켰다.

넓은 저택 마당에는 적아를 구분하기 위해 붉은색 띠를 머리에 묶은 노비 수십 명이 칼과 창 같은 무기를 들고 모여 있었다.

“수어청 군사들도 병영을 나왔겠지?”

“형님이 직접 가셨으니 시간에 맞춰 대궐 앞으로 올 겁니다.”

“조금이라도 실수가 있으면 안 되니까 첫째한테 다시 전령을 보내도록 해.”

“예, 아버님.”

둘째 아들이자 효명 옹주의 시아버지인 김식의 말에 작게 머리를 끄덕인 김자점은 노비가 잡고 있는 말 위에 올랐다.

안장에 앉아 넓은 마당에 늘어서 있는 노비들을 쓸어본 김자점은 우렁찬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주상께서 쓰러지신 틈을 타 극악무도한 역모를 꾸민 세자와 강빈을 징벌하러 간다! 이 의로운 전투에서 목숨을 다 바쳐 싸우는 자는 면천을 시켜 줄 뿐만 아니라 큰 상금을 내리겠다.”

“우와아아!”

어차피 밑바닥 인생이라 누가 역모를 꾸몄든 말든 관심이 없는 노비들은, 신분의 족쇄를 풀 수 있는 면천과 돈을 준다는 이야기에 환호성을 질렀다.

이유야 어찌 됐건 노비들의 사기가 충천해진 것에 흡족한 미소를 지은 김자점은, 자신이 대장군이라도 된 것처럼 어깨에 잔뜩 힘을 주고는 양발로 말 옆구리를 가볍게 찼다.

“가자!”

김자점을 선두로 무장한 노비들이 흉흉한 기세를 마구 피워 올리면서 저택을 나와 큰길로 나왔다.

이번 거사에 가담한 측근과 양반들도 가문에 있는 노비를 무장시켜 끌고 나왔는데, 그 수가 무려 천 명이 넘었다.

제대로 훈련도 안 됐고 무장까지 빈약한 오합지졸이라고 해도 쪽수가 천이 넘어가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가 정규군인 수어청 병력까지 합세하니 미리 대비를 해 놓지 않았다면, 그대로 속수무책으로 당했을 것이 분명했다.

아무튼 해가 뜨자 생업에 나서기 위해 밖으로 나왔던 백성들은 무기를 들고 길을 지나가는 무리를 겁먹은 얼굴로 쳐다봤다.

“도대체 무슨 일이지?”

“글쎄.”

“예전처럼 또 정변이라도 나는 거 아냐?”

“정변이라니?”

함께 있던 친구가 의아한 얼굴로 쳐다보자 중년 사내는 목소리를 낮추며 속삭였다.

“거 있잖아. 지금 주상도 예전에 정변을 일으켜서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이 됐으니까, 또 그런 일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지.”

“그럼 큰일이 아닌가!”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뜬 친구와 달리 중년 사내는 의외로 담담한 태도를 보였다.

“한동안 시끄럽기는 하겠지만 어차피 위에 있는 양반님네들끼리 치고받고 싸우는 거니까 우리랑 뭔 상관이 있겠어.”

“듣고 보니 또 그렇군.”

“아무튼 당분간 장사는 그른 것 같으니까 괜히 엄한 놈들 옆에 있다가 불벼락 맞지 말고 어서 문 걸어 잠그고 집에 가세나.”

“그러세.”

두 사람은 바삐 물건들을 챙겨 가게를 닫고 집으로 가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비단 이 둘뿐만 아니라 주위에 있던 다른 사람들도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꼈는지 주섬주섬 자리를 치우고 일어서는 모습을 보였다.

한편 이런 김자점 일파의 움직임은 한양 곳곳에 깔아 놓은 탐보망을 통해 바로 도현한테 보고됐다.

“저하, 병판이 사병을 이끌고 대궐로 오고 있답니다.”

칠현의 다급한 보고와 달리 도현은 약간의 동요도 없이 차분한 얼굴로 살짝 입가에 미소까지 지었다.

“후후후. 드디어 움직였군. 숫자는 얼마나 돼?”

“얼추 천여 명은 넘는다고 합니다.”

“꽤 많군. 하긴 웬만한 집안이라면 부리는 노비 숫자가 오십은 넘으니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지. 수어청도 가담했겠지?”

도현처럼 강심장이 아니었던 칠현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예.”

“그럼 다 합쳐서 이천이 조금 넘겠군.”

“지금이라도 다른 오군영 병력을 부르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칠현이 불안해하며 건네는 말에 바로 도현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럴 필요 없어. 이천이 아니라 그 두 배가 몰려와도 철저히 대비를 해 뒀고 신형 조총으로 무장한 호위대가 있으니 충분히 물리칠 수 있어.”

뭐라고 설득을 더 하고 싶었지만 한번 결심을 굳히면 웬만해서는 바꾸지 않는 도현의 성격을 너무나도 잘 알기에, 칠현은 괜히 큰일을 앞두고 머리를 심란하게 만들기 싫어 그냥 입을 다물었다.

그런 칠현의 마음을 눈치챘는지 도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어깨를 부드럽게 두드려 주며 말했다.

“네 의견대로 다른 오군영 병력을 끌어들이면 당장은 더 쉽게 승리를 거둘 수 있겠지만, 나중에 내가 계획하는 군제 개혁이 어려워져. 그리고 다른 이들이 김자점처럼 불충한 마음을 품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내가 가진 힘만으로 완벽히 상대를 제압하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 필요해. 내 말 알겠어?”

설명을 듣자 어렴풋이나마 과도한 자신감에 무리를 하는 것이 아니라 다 철저히 계산된 행동이라는 걸 깨닫게 된 칠현은 아까보다 풀어진 표정으로 머리를 끄덕였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아니야. 나도 사람인 이상 항상 현명한 판단을 내리는 건 아니니까 지금처럼 옆에서 아니다 싶으면 언제든 이야기를 해 줘.”

“예, 저하.”

“자, 그럼 역도들을 때려잡으러 가 볼까.”

먹이를 앞에 둔 맹수처럼 매섭게 눈을 빛낸 도현은 거침없는 발걸음으로 방을 나섰다.

현재 정궁으로 쓰이는 창덕궁 정문인 돈화문敦化門에 가자 용호영과 새벽에 들어온 호위대 병사들이 질서정연하게 전투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거기에는 반가운 얼굴도 몇몇이 보였는데 흑치영과 박영식이 병사들을 지휘하고 있다가 그를 발견하고는 서둘러 달려와 군례를 취했다.

“충! 오셨사옵니까, 저하.”

“수고들 많군. 그래, 손님 맞을 준비는 다 끝났나?”

도현의 물음에 둘 중 서열이 높은 박영식이 자신 가득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예. 몇 명이든 오는 족족 다 박살 내 버릴 겁니다.”

“하하하! 박 대장이 그렇게 말을 하니 아주 든든하군.”

그러자 문루 위에 올라가 있다가 조금 늦게 내려온 신철 위사장이 지기 싫다는 듯 크게 말했다.

“저희 용호영도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습니다.”

“신 위사장과 용호영 병사들의 활약도 기대하고 있겠소.”

이렇게 양군이 약간의 경쟁심을 가지는 것은 여러모로 좋았기에 도현은 내심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신철의 기를 살려 줬다.

그때 문루에 있던 병사 한 명이 큰 소리로 적군의 출현을 알렸다.

“적이다!”

“드디어 나타나셨군.”

긴장하기는커녕 눈을 반짝인 도현은 전투 지휘를 하기 위해 신철 등과 함께 문루로 자리를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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