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상 그리고 즉위
도현에 의해 국상을 관장하는 총호사가 된 영의정 김류는 다른 두 정승과 함께 인조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는 전각으로 가서 진짜로 숨이 멈췄는지 확인했다.
그리고 바로 궁중 예법에 따라 장례 절차를 시작했다.
제일 먼저 내시 한 명이 평소 인조가 입던 겉옷을 하나 가지고 지붕 위로 올라가 북쪽을 보고 상위복이라 외치며 죽은 왕의 혼백이 다시 돌아오기를 기원하는 초혼의식을 행했다.
세자와 신하들도 흰색 상복을 입고 머리를 풀어 헤친 채 아무것도 먹지 않고 애도를 했는데 이게 무려 사흘간 이어졌다.
닷새 동안 기다린 뒤 그래도 왕이 깨어나지 않으면 본격적인 장례 절차가 진행되는데, 먼저 깨끗이 염을 하고 시신을 관에 넣었다.
그리고 엿새째 되는 날 사위嗣位라고 해서 상복을 입은 도현이 인조의 시신이 모셔진 빈전 바깥에서 즉위식을 거행했다.
문무백관들이 모두 모인 가운데 도승지가 비단 보자기에 싸인 옥쇄를 건넸다.
도현은 뒤에 모셔진 인조의 위패에 큰절을 하고는 국왕의 상징인 옥쇄를 넘겨받았다.
이제 그가 명실상부한 조선의 17대 국왕이 된 것이다.
일련의 의식이 끝나자 대전 앞뜰에 모인 문무백관들은 일제히 두 손을 들어 천세를 외치며 새로운 국왕의 탄생을 축하했다.
“천세! 천세!”
즉위식을 끝낸 도현은 종묘로 가서 조상들에게 자신의 등극을 고하고, 이제 대비가 된 장렬왕후를 찾아가 인사를 드렸다.
그렇게 한 바퀴를 돌고 나니 어느덧 밤늦은 시간이 됐지만 도현은 쉬지 못하고 인조의 시신이 안치된 전각에 들어가 한 식경이 넘게 곡을 해야 됐다.
겨우 앞으로 그가 거처할 대조전에 돌아왔을 때는 이미 새벽 첫닭이 울고 있었다.
“저희는 물러가겠사옵니다.”
“그래.”
문이 닫히고 방 안에 혼자 남게 된 도현은 땅이 꺼져라 크게 한숨을 내뱉고는 비단 금침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후우. 세자 때도 장난 아니었지만 이건 더하네. 이러다가 부국강병이고 뭐고 내가 먼저 과로로 뒈지겠어.”
국상과 즉위식을 같이 치르느라 많이 힘들었는지 한참을 투덜거리던 도현은 이내 크게 화려하지는 않지만, 정갈하게 꾸며진 침소를 한차례 둘러보고는 뭔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 여기까지 와 버렸네. 날 여기로 보낸 하늘의 뜻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된 이상 내가 꿈꾸던 강하고 큰 대조선제국을 이뤄 내고 말겠어.”
처음 소현세자가 죽고 국왕이 되기로 결심했을 때 먹은 마음가짐을 다시 되새기며 도현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다음 날 대비에게 아침 문안을 드리고 간단하게 조반을 먹은 도현은, 편전인 선정전으로 삼정승과 판서들을 불러들였다.
선정전은 창덕궁에서 유일하게 청색 기와를 올린 전각이었는데 임금이 대신들과 나랏일을 의논하는 곳이란 상징성에 당시에는 값비쌌던 청색 기와를 여기만 올린 것이다.
“영상.”
“예, 전하.”
“아바마마께서 머무실 왕릉 조성은 어떻게 되고 있소?”
도현의 물음에 영의정 김류는 얼른 대답했다.
“산릉도감에서 길지를 찾고 있으니 조만간 좋은 소식이 들어올 것이옵니다.”
“내가 듣기로 파주목이 풍수상 길지가 많다고 하던데 거기도 한번 왕릉 자리를 잘 찾아보도록 하시오.”
실제로 훗날 장릉長陵이라고 불리는 인조와 인열왕후 한씨의 무덤이 경기도 파주에 있었는데, 그걸 알기에 슬쩍 귀띔을 해 주는 것이다.
“알겠사옵니다.”
“그리고 이번 반란을 계기로 대궐과 도성 수비 체계를 일신할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경들의 의견은 어떻소?”
예상치 못한 이야기에 대신들은 약간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그를 봤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기존 체계 가지고는 도성을 지키는 데 역부족하다는 뜻이오. 그래서 새롭게 근위대라는 부대를 만들어 종묘사직을 수호하도록 할 생각이오.”
근위대라는 명칭에서 알 수 있듯 국왕이 통솔하는 군대가 생기면 그만큼 신하들의 힘이 줄어드는 것이기에 대신들의 얼굴이 살짝 구겨졌다.
아니나 다를까 김자점이 몰락하자, 이제 가장 큰 세력의 수장이 된 심기원이 바로 반대를 하고 나섰다.
“필요성은 인정하지만 나라 재정이 텅텅 빈 상황에서 새로운 군영을 만드는 건 어려운 일이옵니다.”
그러자 딱히 심기원과 손을 잡은 건 아니지만 재정을 책임진 호조판서 이명도 고령의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낭랑한 목소리로 의견을 보탰다.
“우상의 말이 맞사옵니다. 지금은 때가 아닙니다. 도성의 수비가 불안하시다면 기존 군영을 보강하는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되옵니다.”
“저희도 같은 생각이옵니다.”
어느 정도 반발은 예상했지만 마치 서로 짜고 들어온 것처럼 대신들이 모두 반대하자, 이마에 주름살을 만든 도현은 손바닥으로 앞에 있는 서탁을 세게 내려치며 호통을 쳤다.
탕!
“불과 며칠 전에 역도들이 대궐 바로 앞까지 쳐들어온 것을 보고도 그런 말을 하는 거요!”
“하지만 재정이 따라 주지 않는데 무리하게 일을 추진한다면 오히려 기존 군영까지 약화되는 부작용이 생길 것이옵니다.”
적당한 핑계거리가 있어서 그런지 심기원은 당분간 조용히 지내겠다는 결심을 깨고 적극적으로 반대를 했다.
그러자 잠시 말이 없던 도현은 대신들을 한차례 훑어보고는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했다.
“그럼 돈만 있다면 근위대 창설에 반대하지 않는다는 뜻이오?”
“……그렇습니다.”
뭔가 찝찝한 기분이 들었지만 도현의 물음에 심기원은 머리를 끄덕였다.
“재정이 없다는데 억지로 일을 진행시킬 수는 없지.”
“현명하신 판단이시옵니다.”
“나중에 형편이 좋아지면 그때 다시 논의를 하셔도 늦지 않을 겁니다.”
도현이 뜻을 꺾는 것 같아 보이자 반색을 하며 위로의 말을 건네던 대신들은, 이어진 도현의 이야기에 눈을 크게 치켜떴다.
“나라에 돈이 없다면 내수사의 자금으로 근위대를 창설하겠소.”
“예?”
“그게 무슨…….”
“내 개인 돈을 쓰겠다는데 이것까지 막지는 않겠지?”
살짝 입꼬리를 위로 말아 올리는 도현과 달리 심기원은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얼굴을 구겼다.
“으음.”
내수사內需司는 호조와 엄연히 분리된 국왕 직속의 독립 기구로 개국 초 고려 왕실로부터 물려받은 재산과 함경도 지역에 있는 이성계 가문의 재산을 관리하는 곳이었다.
오랜 세월 형성된 재산은 상당한 규모를 자랑했고 정확한 액수는 오직 국왕만이 알며 일종의 비자금처럼 사용됐다.
재산이 커지면서 여러 가지 폐해가 발생했지만, 왕권을 유지하는 데 핵심적인 것이었기에 조선 말기까지 계속 유지되며 왕조의 운명과 같이했다.
재정 핑계를 대고 반대하던 대신들은 도현이 자기 돈을 써서 군영을 만들겠다고 하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이렇게 되면 오히려 반대를 안 하는 것만 못하게 됐는데, 군영을 창설하고 유지하는 비용이 모두 내수사에서 나간다면 대신들이 근위대 운영에 간섭할 여지가 하나도 없게 되는 것이다.
즉, 국왕에게만 충성하는 일종의 사병이 만들어지는 거였고 이건 왕권 강화로 이어질 것이 불을 보듯 뻔했다.
신하들 입장에서는 결코 달갑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이미 앞에서 뱉은 말이 있었기에 반대할 수가 없었다.
결국 이번에도 도현의 노련한 말장난에 대신들이 속아 넘어간 것이다.
이게 충격이 커서인지 바로 이어서 신철을 포함해 몇몇 측근들에게 정식 관직을 내리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지만, 신하들은 별다른 반대 없이 고개를 끄떡였다.
이것 역시 도현이 미리 다 계산하고 일을 진행한 것인데, 자칫 출신 문제로 논란이 벌어질 수도 있던 걸 이렇게 얼렁뚱땅 넘겨 버렸다.
그날 신철은 정식으로 옥쇄가 찍힌 임명장을 받았고, 박영식과 흑치영을 비롯한 호위대 간부들도 무관의 벼슬을 받았다.
국왕이 된 도현이 신철한테 처음으로 내린 명령은 바로 인조의 유교로 품계를 잃은 숙원 조씨를 대궐에서 쫓아내 의금부로 압송하는 것이다.
예전 주군이었던 소현세자와 강빈 문제로 개인적인 원한을 가진 신철로서는 꼭 하고 싶던 일이었다.
꽝!
문짝이 떨어져 나갈 정도로 세게 열어젖히고 숙원 조씨가 머무는 전각에 들어선 신철은 우렁찬 목소리로 함께 온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죄인과 시중을 들던 상궁 나인들을 하나도 빼놓지 말고 모두 끌어내라!”
“옛.”
크게 대답한 위사들은 곧장 전각 안으로 들어가 지시를 수행했다.
“꺄아아악!”
갑자기 들이닥친 위사들의 등장에 화들짝 놀란 궁녀들은 비명을 내지르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런 가운데 신철이 신발도 벗지 않고 방 안으로 들어가자, 김자점이 역모로 잡힌 후 급히 대궐로 돌아온 효명 옹주를 옆에 끼고 보료 위에 앉아 있던 숙원 조씨가 표독스럽게 소리를 질렀다.
“무엄하다! 감히 여기가 어딘 줄 알고 더러운 발을 들이미는 것이냐!”
예전 같으면 시선조차 마주치지 못하고 머리를 숙여야 했지만 신철은 가소롭다는 듯이 그녀를 내려다봤다.
“아직도 본인이 숙원 자리에 앉아 있는 줄 아시오?”
그 말에 숙원 조씨의 초승달처럼 곱게 휘어진 눈썹 끝이 파르르 떨렸다.
“선왕 전하의 어명으로 당신은 숙원 직위를 박탈당한 것은 물론, 내명부에서도 이름이 지워진 지 오래요. 비단옷을 입고 궁궐 안에 들어앉아 있긴 하지만, 지금은 저잣거리의 평범한 아낙네와 같은 처지인 것을 본인만 모르는군!”
“헛소리!”
숙원 조씨는 관자놀이에 핏대를 세우고 신철의 말에 반박했다.
“전하께서 나를 그리 대하실 리가 없어. 이건 모두 세자의 음모야! 형편없는 유언비어에 불과하다고!”
“어허, 세자라니! 이미 즉위식까지 마치신 주상 전하께 그 무슨 무례한 말투요!”
신철이 크게 으름장을 놓으며 눈을 부라리자, 숙원 조씨 역시 눈초리를 매섭게 치켜뜨고선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맞섰다.
버젓한 사내라도 대번에 꽁지를 말고 도망갈 법한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저리 당당한 것을 보면 과연 보통 여인네는 아니었다.
하지만 아무리 간이 큰 사람이라 해도 이미 판세가 기울어질 대로 기울어진 것을 알고 있는 이상 언제까지나 침착함을 유지할 수는 없는 법.
숙원 조씨의 눈빛이 일순 흐트러진 틈을 타 신철이 두 사람 쪽을 향해 한 발짝 걸음을 내딛었다.
그 순간 숙원 조씨는 효명 옹주의 팔을 잡아끌어 방패처럼 앞에 내세우고선 바락바락 소리를 질렀다.
“이놈, 아무리 방약무인하다지만 여기 나와 함께 있는 옹주가 눈에 보이지도 않는단 말이냐!”
더 이상 대궐 안에서 자신의 권위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숙원 조씨가 재빠르게 선왕의 딸인 효명 옹주를 끌어들이자 어쩔 수 없이 신철은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숙원 조씨는 아무런 힘이 없다 해도 효명 옹주는 다르다.
직책을 박탈당하고 내명부에서조차 이름이 지워진 조씨와는 달리 효명 옹주는 엄연히 선왕의 친자식 중 하나였기 때문에, 적어도 신분상으로는 신철이 함부로 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 어머니, 아파요!”
남의 집으로 시집까지 보낸 딸이라고는 하나 아직 효명 옹주는 스무 살도 채 되지 않은 소녀다.
시집인 김자점 가문이 역모로 패가망신하자 의지할 곳을 찾아 대궐로 돌아왔건만, 또 이런 변을 당하게 될 줄 몰랐던 효명 옹주는 거의 울 듯한 표정이었다.
“가만있어!”
치기 어린 목소리로 칭얼거리는 효명 옹주에게 짧게 말을 내뱉은 숙원 조씨는 이제 어떻게 할 거냐는 얼굴로 신철을 바라보았다.
“흥. 제법 머리를 굴리시는군. 하지만 아직 한참 멀었소이다. 이보게!”
신철이 눈짓을 하자 복도 뒤편에서 대기 중이던 상궁 서넛이 일제히 방 안으로 난입해 억지로 효명 옹주를 숙원 조씨에게서 떼어 내려고 했다.
“안 된다! 어딜 함부로 손대느냐!”
“어머니! 어머니!”
끌려가지 않으려는 효명 옹주가 손을 뻗자 숙원 조씨가 소맷자락을 붙잡고 매달렸다.
그러나 이미 무슨 수를 써서라도 두 사람을 떨어트리라는 명을 받은 상궁들이 손가락을 억지로 떼어 냈고, 효명 옹주는 거의 보쌈을 당하다시피 해서 방 밖으로 끌려 나갔다.
최후의 방패라고 생각했던 효명 옹주를 잃어 악다구니가 받힌 숙원 조씨는, 매끄럽게 잘 다듬은 손톱을 날카롭게 세우고 상궁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꺄악!”
“이 못된 년들! 천벌을 받을 년들 같으니라고!”
입에 담지도 못할 막말을 퍼부으면서 달려든 숙원 조씨는 상궁들의 머리카락을 쥐어뜯고 얼굴을 손톱으로 할퀴는 등 포악하게 날뛰었다.
이에 아무것도 거리낄 게 없어진 신철이 재빨리 부하들을 투입해 숙원 조씨의 양팔과 양다리를 붙잡고 마당으로 내치게 했다.
“아악!”
숙원 조씨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데굴데굴 나뒹굴었다.
최고급 비단으로 지은 고운 한복은 흙먼지가 묻어 엉망이 되었고, 단아하게 틀어 올린 머리칼은 마구잡이로 흩어져 옥비녀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귀신처럼 산발이 된 머리칼 사이론 이미 악밖에 남지 않은 숙원 조씨의 핏발 선 눈동자만이 희번덕거렸다.
“의금부로 끌고 가라!”
“예!”
숙원 조씨가 끌려간 의금부에는 국상 중이었지만 역모 관련자들이 옥사를 가득 채운 채 강도 높은 심문을 받고 있었다.
그중 김자점을 비롯한 핵심 인물들은 도현이 직접 친국親鞫을 진행했다.
“죄인은 세자였던 날 독살하려 음모를 꾸미고 김자점 일파와 공모해 역모를 꾸민 걸 인정하느냐!”
긴 머리를 풀어 헤친 채 마당에 놓인 나무 의자에 손발이 묶여 있던 숙원 조씨는 단 위에 있는 도현을 노려보며 차갑게 대답했다.
“터무니없는 모함이오. 아무리 세상이 바뀌었다고 하지만 선대왕의 총애를 받았던 날 이렇게 험하게 대하다니, 너무한 것 아닙니까!”
인조를 치마폭에 감싸고 나라를 좌지우지했던 여인답게 의금부에 끌려와 심문을 받는 상황인데도 숙원 조씨는 아주 당당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자 도현은 입술을 살짝 비틀어 웃고는 가지런히 두 손을 모으고 한쪽에 서 있는 의금부 도사를 보며 말했다.
“끌고 오게.”
“예.”
잠시 뒤 군졸들이 심하게 고문을 당했는지 행색이 엉망인 여인 두 명을 끌고 왔는데, 바로 숙원 조씨의 측근인 김소화와 수라간을 맡고 있던 상궁이었다.
김소화는 몰라도 수라간 상궁의 등장은 전혀 예상을 못 했는지 숙원 조씨의 안색이 살짝 굳었다.
도현은 차가운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두 상궁을 잠시 내려다보다가 묵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여기 있는 조씨의 사주를 받아 동궁전에 들어가는 음식에다가 독을 넣은 일이 있느냐!”
“그, 그게…….”
숙원 조씨의 눈치를 보는지 수라간 상궁이 바로 대답을 못 하고 머뭇거리자, 도현은 미간을 찌푸렸다.
“아직 정신을 못 차린 모양이군. 뭣들 하느냐? 실토를 할 때까지 매우 쳐라!”
“옛.”
군졸들이 두툼한 몽둥이를 손에 들고 다가가자 수라간 상궁은 기겁을 하며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살려 주십시오. 뭐든 물으시는 건 다 말씀드리겠습니다.”
“정말이냐?”
“네.”
“좋아. 그럼 아까 한 질문에 대답을 해 보아라.”
힐끗 의자에 묶여 있는 숙원 조씨를 쳐다본 수라간 상궁은 두 눈을 질끈 감으며 이야기를 했다.
“마마님께서 직접 제게 비상이 든 비단 주머니를 주시고는 전하께 올릴 음식에 몰래 넣으라고 하셨습니다.”
“이년! 내가 언제 그랬다고 그러느냐!”
다급히 끼어든 숙원 조씨가 악을 쓰듯 소리치자 도현은 눈가를 찡그리고는 시립한 의금부 도사를 쳐다봤다.
“조용히 시키지 않고 뭐 하나.”
“죄송하옵니다.”
황급히 허리를 조아리며 대답한 도사가 눈짓을 하자, 대기하고 있던 다모茶母가 손바닥으로 숙원 조씨의 입을 틀어막았다.
“읍읍.”
다모는 포도청과 의금부 정식 직책에 나오지는 않았지만, 남녀의 구분이 엄격한 조선 사회에서 여성 죄인을 조사하고 처벌하기 위해 만든 일종의 비밀경찰이었다.
“방금 한 말들이 분명한 사실이냐?”
“예.”
작게 머리를 끄덕인 도현은 시선을 옆으로 옮겨 초취한 표정을 한 김소화를 봤다.
“김자점과 조씨가 사전에 역모를 모의했다고 하던데, 맞느냐?”
도현의 추궁에 김 상궁은 잠깐 갈등하는 것 같더니 이내 모든 걸 포기한 듯한 어투로 대답을 했다.
“……네.”
“구체적으로 진술을 해 봐라!”
“선왕 전하께서 쓰러지시자 병판 대감과 함께 무력으로 대궐을 장악한 뒤에 당시 세자이셨던 주상을 폐하고 대신 숭선군 마마를 보위에 올리시려고 하셨습니다.”
“저런. 천인공노할 일이 있나!”
“허어.”
김 상궁이 사실을 모두 실토하자 국문을 참관하던 신하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도현은 숙원 조씨를 보며 노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런데도 아무런 죄가 없다고 거짓말을 할 테냐!”
“흥! 저년들이 나한테 무슨 억하심정으로 이러는지 몰라도 난 모르는 일이오.”
여기서 무너지면 끝장이라는 걸 아는지 숙원 조씨가 끝까지 아니라고 우기자 도현은 짧게 혀를 찼다.
“쯧. 그래도 한때나마 내명부에 적을 뒀던 인연을 생각해 순순히 실토를 하면 힘들게 하지는 않으려고 했는데, 안 되겠구나. 여봐라!”
“예.”
“죄인이 지은 죄를 인정할 때까지 주리를 틀어라!”
지시가 떨어지자 군졸 두 명이 밧줄로 묶어 놓은 숙원 조씨의 가랑이 사이에 긴 나무 작대기를 두 개 집어넣어 양옆으로 힘껏 당겼다.
“아아아악!”
생살이 찢어지는 고통에 숙원 조씨는 비명을 내질렀다.
계속된 고문에 실핏줄이 터져 가랑이 사이는 시퍼렇게 멍이 들고 몇 번이나 까무러쳤지만 숙원 조씨는 끝까지 죄를 부인했다.
촤아아악.
“흐윽.”
차가운 물을 뿌리자 겨우 정신을 차린 숙원 조씨가 힘겹게 고개를 들자 도현이 정색을 하며 물었다.
“이제 실토를 하겠느냐?”
그러자 숙원 조씨는 독기 어린 시선으로 그를 마주 보며 말했다.
“으음. 지은 죄가 없는데 뭘 말하라는 겁니까?”
“정말 지독한 년이구나.”
얼굴을 찡그린 도현은 잠시 앞에 있는 숙원 조씨를 노려보다가 차갑게 입을 열었다.
“이미 드러난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지금까지 저지른 악독한 죄가 증명됐으니 더 심문을 해 볼 필요도 없다. 날 시해하려하고 역도들과 음모를 꾸며 종묘사직을 위험에 빠뜨린 것은 용서할 수 없는 중죄이니, 죽음으로 이를 벌하도록 하라!”
도현의 판결에 숙원 조씨는 절망에 찬 표정으로 소리를 쳤다.
“나한테 이럴 수는 없소.”
“뭣들 하느냐? 어서 죄인을 옥사로 끌고 가라!”
“옛,”
양팔을 붙잡은 다모 두 명이 악에 받친 듯 발버둥을 치는 숙원 조씨를 억지로 끌고 국문장을 나갔다.
조선이 효를 중시하는 유교사회였지만, 인조의 후궁인 숙원 조씨가 저지른 죄가 워낙 크고 악랄했기에 신하들도 도현의 결정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김자점을 비롯한 역도들의 심문도 계속 이어졌는데 숙원 조씨와 달리 반란을 일으킨 현장에서 붙잡혔고, 봉황상단을 통해 그동안 역모를 꾸민 증거들이 상세하게 확보되어 있어 아무런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도현이 내민 증거에 김자점은 자신이 그의 손바닥 위에서 놀고 있었다는 걸 깨닫고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이미 가문이 풍지박살 난 상황에 더 무슨 미련이 있겠소. 죽이시오.”
모든 걸 체념한 듯한 김자점의 모습에 도현은 작게 고개를 끄떡였다.
“역도의 수괴로 대궐을 범하려했던 죄인에게는 오체분시五體分屍형을 내리고, 식솔들 중에 남자는 모두 죽이고 여인들은 노비로 삼도록 하라!”
오체분시는 머리와 양팔, 다리에 밧줄을 묶고 소나 말이 당기게 해서 몸을 찢어 죽이는 것으로, 반역이나 그에 준하는 큰 죄를 저지른 자들한테만 행하는 형벌이었다.
판결이 내려지자 김자점은 힘없이 머리를 아래로 떨궜다.
이렇게 반란 관련자들에 대한 심문과 처벌이 속속 이루어지고 있는 가운데, 도현은 박영식과 봉황상단 총관인 장태범을 시켜 역도들의 재산을 모두 몰수하도록 했다.
돈에 밝은 장태범은 죄인들이 숨겨 놓은 것까지 하나도 빼놓지 않고 다 찾아냈는데, 다들 대대로 떵떵거리며 살아온 사대부들인 데다 지난 수년간 권력을 누리며 여기저기서 끌어모은 것들이 많아 재산 규모가 상상을 초월했다.
대조전에서 장 총관이 올린 보고서를 읽은 도현은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다.
“몰수한 재산이 오백만 냥이 넘는다고?”
도현의 물음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던 장 총관은 살짝 머리를 숙이면서 대답했다.
“네. 일단 드러난 것이 그 정도고 앞으로 뒤져 보면 일이백만 냥 정도는 더 찾아낼 수 있을 것 같사옵니다.”
“허어. 일개 사대부들이 가진 재산이 나라의 일 년 예산보다 많다니. 도대체 그동안 얼마나 많이 해 먹었다는 거야.”
몰수를 진행하면서 끝없이 나오는 재산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던 장 총관은 도현을 보며 이해한다는 얼굴을 했다.
“뭐. 어찌 됐건 국고가 비어서 걱정이었는데, 이걸로 한시름 놨군.”
“그런데 재산의 절반 정도는 당장 현금화가 어려운 토지입니다.”
아직 산업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농경사회였기에 이 시대에는 부자 하면 대부분 넓은 농지를 소유한 지주였다.
“상관없어. 어차피 거기서 농사를 지으면 계속 수익을 올릴 수 있으니 더 좋지. 나머지를 가지고도 당장 급한 일들은 충분히 추진할 수 있겠어.”
어느새 백성들은 굶주리는데 엄청난 재산을 가지고 호의호식한 김자점 일파에 대한 분노는 사라지고, 도현은 개혁을 추진할 자금이 생겼다는 것에 아주 흡족해했다.
자고로 무력과 함께 돈을 쥐고 있는 자가 세상을 지배하는 법이었는데, 이걸로 도현은 양쪽을 모두 다 가지게 됐다.
물론 김자점 일파한테서 몰수한 재산이 없어도 봉황상단이 보유한 막대한 금력이 있었지만, 그건 도현이 가진 숨겨진 한 수였고 돈은 많을수록 좋았다.
“그럼 몰수한 재산을 모두 호조로 넘기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도록 해. 그리고 지금부터 찾아내는 숨겨진 돈은 내가 쓸 곳이 있으니 따로 빼내 보관하게.”
“알겠사옵니다.”
백만 냥이 넘을 것으로 추정되는 숨겨진 재산은 근위대 창설과 기존 군영을 재정비하는 데 쓸 생각이었다.
“그리고 북경 지부에서 들어온 소식이 있사옵니다.”
“뭔가?”
청국의 움직임은 조선에 상당한 민감한 문제였기에 도현은 상체를 살짝 앞으로 기울이며 관심을 보였다.
“섭정인 예친왕이 심복 장수인 야골타에게 대서국大西國 정벌을 명령했다고 합니다.”
“강남으로 내려간 숭정제를 치는 것이 아니라 대서국을 노린다고?”
“예.”
대서국은 이자성과 비슷한 시기에 반란을 일으킨 장헌충이 사천성을 중심으로 세운 국가인데, 조정을 구성해 과거 시험을 보고 화폐를 제작하는 등 제법 나라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아무래도 본격적으로 강남을 정벌하기 전에 배후를 깨끗이 정리하려는 것 같습니다.”
장 총관의 의견에 잠시 생각을 해 본 도현은 머리를 끄덕였다.
“하긴 비록 북경을 버리고 도망쳤다고 하지만 물산과 인구가 풍부한 강남이 남아 있는 명국에 비하면 아직 여러 가지로 부족한 대서국이 더 손쉬운 상대겠지.”
“그렇습니다.”
“청나라의 세력이 커지는 건 껄끄럽지만, 이걸로 당분간 우리한테 신경을 쓰지 못할 테니 잘됐군. 북경 지부에 연락해서 예친왕과 청국 조정의 움직임을 더 면밀하게 지켜보고 조금이라도 이상한 것이 있으면 바로 알리라고 하게.”
“알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강남으로 내려간 숭정제는 어떻게 하고 있어?”
“남경을 새로운 도읍으로 선포하고 나라를 추스르고 있지만 기존에 있던 네 곳의 왕부와 지방 토호들이 적극적으로 움직이지 않아 어려움이 많은 모양입니다.”
자신이 알고 있던 역사와 달리 숭정제가 죽지 않고 무사히 강남으로 빠져나갔는데도 중심을 잡지 못하고 헤매고 있다는 이야기에 도현은 미간을 찌푸리며 짧게 혀를 찼다.
“쯧. 명국의 운도 이제 다한 것 같군.”
손가락으로 서탁을 툭툭 두드리며 잠시 고심을 하던 도현은 시선을 들며 말했다.
“김 행수는 지금 어디에 있나?”
“김하방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웅도에서 상단 일을 보고 있사옵니다.”
“잘됐군. 그럼 김 행수를 남경으로 보내도록 해.”
“거긴 왜……?”
“이대로 명국이 허무하게 멸망하면 득 될 것이 없어. 최소한 내가 자리를 완전히 잡고 개혁을 어느 정도 마무리 지을 때까지는 계속 명맥을 유지해 청국을 견제하도록 만들어야 돼. 숭정제가 북경을 탈출할 때 도와준 인연이 있으니 김 행수가 남경에 가서 그 일을 해 줘야겠어.”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바로 웅도에 연락선을 띄우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보부상들을 흡수하는 작업을 어떻게 되고 있나?”
일이 잘 풀리지 않는지 장 총관은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애를 쓰고는 있습니다만 워낙 배타적이고 거친 무리라 일이 쉽지가 않습니다.”
“그럴 거야. 하지만 가지 않는 데가 없고 어디든 돌아다니는 보부상만큼 정보 수집에 용이한 무리도 없으니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꼭 휘하에 끌어들여야 하네.”
“명심하겠사옵니다, 전하.”
앞으로 그가 추진해 나갈 개혁은 기존 기득권 계급의 강한 반발을 불러올 수밖에 없어 이들을 적절히 통제하고 불온한 움직임을 미리 알아내야 되는데, 그 일에 보부상들을 이용할 생각이었다.
봉황상단과 호위대가 정보 수집을 하고 있지만 따로 하는 일이 있고 기반이 약해 도성을 벗어나면 크게 힘을 못 쓰는 것과 달리, 전국을 무대로 돌아다니는 보부상을 흡수한다면 능력을 비약적으로 향상시킬 수 있었다.
정보 조직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는 도현은 나중에는 이들을 합쳐 정보 수집만 전문적으로 하는 기관을 만들 계획도 가지고 있었다.
다음 날 대전 회의에서 도현이 몰수한 김자점 일파의 재산을 공개하자 신하들은 예상한 것보다 훨씬 많은 액수에 깜짝 놀랐다.
“오백만 냥이라니…… 그게 사실이옵니까?”
새로 좌의정에 임명된 박황이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되묻자 도현이 정색을 하며 말했다.
“그렇소. 이게 다 백성들의 고혈을 짜고 매관매직을 통해 쌓은 부가 아니겠소.”
이번 역모 관련자 대부분이 전통 있는 사대부들인 만큼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재산도 상당했지만, 도현은 그걸 싸잡아서 모두 부정적인 돈으로 만들었다.
조금 과한 측면이 있다는 걸 신하들도 알았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상황이 아니었기에 그냥 모르는 척 넘어갔다.
“호조판서.”
“예, 전하.”
“여기 몰수한 재산 목록이 있으니 모두 국고에 넣어 관리토록 하시오.”
“알겠사옵니다.”
만성적인 재정 적자에 한시도 주름살이 펴질 날이 없었던 호조판서 이명은 도현의 지시에 반색을 하고는 상선이 건네주는 재산 목록을 받았다.
“영상, 명국에 보내는 고명사신은 정해졌소?”
“네. 예판이 직접 사신단을 이끌고 남경으로 갈 예정이옵니다.”
고명사신이란 조선시대 국왕이 바뀌었을 때 상국인 명이나 청국 황제에게 즉위를 인정받기 위해 보내는 외교관을 뜻했다.
이미 명운이 기울어진 명나라 황제에게 고명을 받는 것이 썩 내키지 않았지만, 유교 사상이 뿌리 깊게 박힌 사대부들의 반발을 피하려면 어쩔 수 없었다.
대신 도현은 이걸 가지고 청국이 트집을 잡는 걸 피하기 위해 북경에도 고명사신을 보내기로 했다.
처음 이야기를 꺼내자 신하들이 반발했지만 북경을 함락하고 강남으로 명을 밀어낸 청나라가 고명사신을 보내지 않은 걸 가지고 다시 침략을 해 오면 어떻게 할 거냐며 도현이 강하게 나오자, 다들 슬그머니 꼬리를 내렸다.
“그럼 청나라에는 누가 가기로 했소?”
“아무래도 청국 사정에 밝은 사람이 가는 게 좋을 것 같아, 예전에 세자관 부빈객으로 있었던 박노가 맡기로 했사옵니다.”
이건 핑계였고 오랑캐한테 고명사신을 보내야 된다는 것이 불만이었던 신료들이 일부러 한양에 돌아온 이후 별다른 벼슬을 받지 못한 박노를 선정해, 예조판서를 보내는 명나라와 비교해 격을 떨어뜨린 것이다.
이걸 모를 리가 없던 도현은 대범하지 못하고 편협적인 신료들의 행동에 내심 혀를 차고는 입을 열었다.
“명나라에는 예조판서를 보내는데 아직 새로운 관직을 하사받지 않은 박노가 북경에 가면 자칫 황제의 노여움을 살 수도 있으니, 마침 비어 있는 예조참판에 임명하면 되겠군.”
“그, 그건…….”
“왜, 문제라도 있소?”
심양 관저 출신으로 도현과 뜻을 같이하는 인물이 조정의 중요 관직에 오르는 것이 껄끄러웠지만, 청국 황제를 거론하자 심기원은 딱히 반대할 명분이 없었다.
“아닙니다.”
“학식이 뛰어나고 부빈객으로 심양 관저를 잘 꾸려 나간 전적이 있으니, 참판 직책도 무리 없이 수행할 수 있을 거요.”
고개를 살짝 옆으로 돌린 도현은 도승지를 보며 지시를 내렸다.
“북경에 가려면 시간이 촉박할 테니 오늘 안에 교지를 써서 보내도록 하시오.”
“알겠사옵니다, 전하.”
“그리고 말이 나온 김에 국가의 병권을 책임지는 병조판서 자리를 오래 비워 둘 수 없지 않겠소?”
“…….”
도현의 말에 순간 대전 안은 묘한 분위기가 형성되면서 대신들은 서로 눈치를 보며 선뜻 이야기를 꺼내지 못했다.
그때 좌의정 박황이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지당하신 말씀이시옵니다. 역모와 국상으로 나라가 어수선한 만큼 빨리 병조판서를 임명해 조정을 안정시켜야 될 것입니다.”
영의정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만 인조가 죽자 뒷방 늙은이가 되어 밀려난 김류가 눈치를 보며 가만히 있는 것과 달리, 심기원은 마치 짜고 치는 고스톱처럼 이야기를 주고받는 둘을 보며 굳은 얼굴로 이야기를 했다.
“생각해 둔 인물이라도 있으십니까?”
“임경업 장군 정도면 적당할 것 같은데, 경들의 의견은 어떻소?”
예상했던 이름이 나오자 심기원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고는 반대 의견을 냈다.
“불가합니다.”
그러자 눈가를 찡그린 도현은 약간 화가 난 목소리로 물었다.
“이유가 뭐요?”
“뛰어난 무장이기는 하지만 청나라가 상국인 명을 치는 데 앞장서서 도운 죄가 있는 자를 어찌 군부의 수장으로 세울 수 있겠습니까?”
말이 끝나기 무섭게 도현은 옆에 있던 팔걸이를 주먹으로 세게 내려치며 호통을 쳤다.
탕!
“우의정의 말대로라면 과인은 청군과 함께 북경성에 들어갔으니 용상에 앉아 있을 자격이 없겠구려!”
아차 하며 말을 잘못 꺼냈다는 생각이 든 심기원은 황급히 고개를 조아리며 변명을 했다.
“그런 것이 아니오라…….”
“됐소! 과인도 그렇지만 임경업 장군도 청의 강요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나선 것인데, 지금에 와서 그따위 말도 안 되는 소리로 죄인 취급을 하다니 부당한 일이오. 그리고 두 번에 걸친 출전은 모두 선대왕 전하와 조정 신료들의 승인을 받고 이루어진 건데, 그럼 여기 있는 사람들 전부가 죄인이겠구려?”
인조까지 거론하면서 몰아붙이자 딱딱하게 얼굴이 굳은 심기원은 바짝 엎드리며 얼른 잘못을 인정했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전하.”
꼬투리를 잡아 좀 더 많은 양보를 얻어 내려고 했던 도현은 역시 노련한 정치인답게 심기원이 재빨리 대처하자, 아쉬운 듯 살짝 입맛을 다셨다.
하지만 이걸로 자꾸 하는 일마다 훼방을 놓으려는 심기원의 기를 보기 좋게 눌러 버린 도현은 마치 크게 선심을 쓰듯이 말했다.
“이번 한 번은 그냥 넘어가겠지만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시오.”
“예, 전하.”
“다른 의견은 없소?”
“…….”
괜히 한마디 꺼냈다가 본전도 못 찾고 왕창 깨지는 걸 본 신료들은 불만이 있어도 감히 나설 수가 없었다.
그러자 한차례 신료들을 쓸어본 도현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다들 이의가 없는 것으로 알고 병조판서에 임경업 장군을 임명하겠소.”
결국 이번에도 신료들은 도현이 의도한 대로 끌려만 가다가 회의를 끝내고 말았다.
도현이 모든 비용을 대는 조건으로 새로 창설한 근위대는 김자점이 일으킨 반란에 동조해 거의 와해되다시피 한 용호영 건물에 자리를 잡았다.
“어험.”
새로 지급받은 무관복을 차려입은 박영식은 빳빳하게 풀을 먹인 옷깃을 세웠다가 눕혔다가 하며 매무새를 다듬기에 여념이 없었다.
예전에도 한번 입었던 옷이기에 낯설 리가 없건만, 그간 이런저런 우여곡절을 겪다 보니 다시 걸치게 된 무관복이 마냥 새롭고 좋기만 했다.
“뭐 하십니까?”
뒤에서 불쑥 들리는 목소리에 박영식이 깜짝 놀라 돌아보았다.
“아니, 자네 어쩐 일인가?”
“안에서 사람이 움직이는 기척만 들리고 도통 나오실 기미가 없기에 궁금해서 들어와 봤지요.”
그러면서 흑치영은 박영식을 아래위로 쭉 훑어보더니 웃으며 말했다.
“그나저나 관복이 잘 어울리시는군요. 역시 원래 무관이었던 분은 다르십니다그려.”
“자네도 마찬가질세.”
“하하, 그래도 제가 군호님보다는 못하지요.”
흑치영의 칭찬에 박영식은 별말 다 한다는 듯 손사래를 쳤지만 입가에는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군호라…… 아직 그 호칭에는 영 익숙해지지 않는군.”
“그야 벼슬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까요.”
“음.”
박영식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만에 다시 관복을 걸치니 내 젊은 시절 생각이 떠오르는군. 그때는 패기 넘치던 청년이었던지라 이왕 무관직에 진출한 거 좀 더 높은 자리에 올라 병사들을 호령하는 장군이 되고 싶었지. 하지만 설마 그게 정말로 이루어질 줄은 몰랐어.”
“저도 그렇습니다. 군호님이야 원래 무관 출신이시지만 저는 그냥 별 볼일 없는 놈이었으니까요. 지금의 주상 전하를 만나지 못했다면 지금도 어딘가에서 대장간이나 하며 낮이고 밤이고 철을 두드리고 있었겠죠.”
두 사람은 감개무량한 듯이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다가 문득 흑치영이 고개를 들고 말했다.
“이런, 깜박하고 있었습니다.”
“뭔가?”
“이번에 새로 뽑은 신병들을 밖에 모아 놨습니다. 얼른 보러 가시지요.”
“아, 그런가. 그럼 함께 가지.”
박영식과 흑치영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밖으로 나왔다.
평소 병사들이 훈련을 하거나 사열을 받는 군영 내 넓은 공터에는 후줄근한 복장의 젊은 장정 이백여 명이 어정쩡한 자세로 서 있었다.
모두 내수사에 속한 노비로 십구 세에서 이십삼 세 사이의 젊고 튼튼한 사내들이었는데, 십 년간 군역을 마치면 자신과 가족을 면천시켜 준다는 도현의 약속에 스스로 근위대에 지원한 이들이었다.
불안한 얼굴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돌쇠는 함께 온 꺽쇠의 옆구리를 살짝 찌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서 십 년을 버티면 정말 면천을 시켜 줄까?”
“임금님이 직접 약속을 했다는데 지키겠지. 그리고 마을에서 늙어 죽을 때까지 흙만 파는 것보다 번쩍이는 무기를 들고 다니는 병사가 훨씬 낫지 않냐?”
“하긴.”
이맘때의 젊은이들이 다 그렇듯 두 사람은 앞날에 대한 불안감보다 좁고 답답한 고향 마을을 나와 번화한 도시에 왔다는 호기심과 흥분이 더 컸다.
그때 앞에 서 있던 군관이 두 사람을 째려보며 주의를 줬다.
“거기 잡담하지 말고 조용히 있어.”
“이크.”
찔끔한 표정을 지은 두 사람은 얼른 자세를 바로 했다.
그렇게 얼마쯤 시간이 흘렀을까 지휘소를 나온 박영식과 흑치영이 연병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차렷!”
처척.
군관의 외침에 신병들은 많이 어설프지만 배운 대로 발뒤꿈치를 붙이면서 차렷 자세를 취했다.
도열해 있는 신병들을 천천히 훑어본 박영식은 묵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반갑다. 난 앞으로 너희들의 지휘관이 될 군호 박영식이라고 한다. 아는지 모르겠지만 우리 근위대는 주상 전하를 지근거리에서 모시며 지키는 부대이다. 이런 임무를 맡은 걸 영광스럽게 생각하고 내 목숨을 버려서라도 주상 전하를 보위한다는 신념으로 복무해 주길 바란다.”
아직까지는 별로 납득이 되지 않는 말이었지만, 신병들은 박영식의 말에 크게 대답했다.
“옛!”
“오늘부터 한 달간 훈련을 받게 되고 거기에 합격하면 정식으로 근위대 병사가 된다. 그러면 십 년 뒤에 주상 전하께서 약속하신 것처럼 면천이 되고 복무 중에는 일반 병사들과 같이 매달 스무 냥의 봉록이 지급될 것이다.”
이어진 이야기에 신병들은 하나같이 눈을 크게 뜨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종구품 관리의 한 달 봉록이 쌀 한 섬에 불과한데, 두 섬을 살 수 있는 스무 냥을 지급한다고 하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믿기지 않는 사실에 돌쇠가 자신도 모르게 질문을 했다.
“저, 정말이십니까?”
그러자 박영식이 그를 유심히 쳐다보며 말했다.
“자네 이름이 뭐지?”
“돌쇠라고 합니다.”
노비 주제에 감히 하늘같이 높은 관리한테 함부로 말을 걸었다는 생각에 돌쇠는 사색이 된 얼굴로 황급히 머리를 숙였다.
“고개를 들어라.”
“……예?”
“먼저 훈련을 통과해야겠지만 너희들은 주상 전하를 측근에서 보위하는 근위대다. 그러니 앞으로는 출신이 무엇이든 간에 어깨와 허리를 곧게 펴고 어디서든 당당하게 행동해라.”
“에, 옛.”
“녹봉은 방금 이야기한 대로 매달 스무 냥씩 분명히 지급한다. 또 노력해서 공을 세우면 신분에 관계없이 군관도 될 수 있으니, 항상 자신을 갈고닦아 적을 만나면 용감하게 싸우도록 해라.”
면천을 해 주는 대신 녹봉은 언감생심 꿈도 꾸지 않았던 신병들은, 다른 군영보다 훨씬 많은 돈을 주고 거기다가 군관까지 될 수 있다고 하자 가슴이 세차게 뛰었다.
돌쇠도 앞에 서 있는 박영식처럼 멋진 무관복을 입고 허리에 장검을 찬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며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다음 날부터 본격적인 훈련이 시작됐는데 신병들은 새벽 일찍 일어나 군영에서 도성 밖 마포나루까지 왕복 수십 리가 넘는 길을 뛰고 교관에게 근위대 특유의 총검술과 박투술을 배웠다.
숙소로 돌아오면 옷을 입은 채 그대로 곯아떨어질 정도로 힘들었지만, 신병들은 이게 자신한테 주어진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에 누구 하나 불평을 하거나 낙오하는 사람 없이 의욕적으로 최선을 다해 훈련에 임했다.
“이게 뭔가?”
근위대 운영 상황의 보고를 받던 도현은 박영식이 비단 보자기에 싼 상자를 하나 내밀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웅도에 있는 박호 병기장이 보내온 물건입니다.”
“그래?”
박영식의 말에 도현은 뭐가 들어 있을지 기대에 찬 얼굴로 보자기 매듭을 풀었다.
그러자 옻칠이 된 나무 상자가 하나 나왔고, 뚜껑을 열자 안에는 손잡이 부분을 자개로 화려하게 장식한 권총이 들어 있었다.
“이건!”
“전에 전하께서 말씀하신 물건이 이제 완성됐다고 합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서양의 수석식 권총 구조에 대해 말해 주고 한번 만들어 보라고 했지만, 정말 해낼 줄은 몰랐던 도현은 약간 들뜬 모습으로 권총을 꺼내 이리저리 살펴봤다.
재질은 나무와 금속을 함께 썼는데 구경은 이십 밀리미터 정도 되어 보였다.
비록 연사가 불가능하고 한 발을 쏜 뒤에 다시 장전해야 된다는 단점이 있었지만, 상당히 유용한 무기였다.
사실 웅도에 있는 장인들이 이렇게 빨리 수석식 권총을 만들어 낸 건 다 이유가 있었는데,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임진왜란 전부터 조선에는 마상총이라는 권총 형태의 소형 화승총이 있었다.
마상총 제작 기술을 알고 있던 장인이 우연찮게도 웅도 병기창에 있었고 거기다가 도현이 알려 준 권총 구조와 서양식 무기에 밝은 로사리오가 합쳐지자, 단시간 안에 꽤 쓸 만한 권총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성능이 어떻게 되지?”
“백 보까지 총탄을 날릴 수 있고 유효사거리는 오십 보라고 하옵니다.”
만족스러운 성능은 아니었지만 처음치고는 괜찮았다.
“직접 쏴 보고 싶군.”
“그렇지 않아도 후원에 성능을 시험해 보실 수 있도록 준비를 해 뒀습니다.”
“그럼 어서 가 보세.”
“예.”
반색을 한 도현은 곧장 몸을 일으켰다.
대궐 후원에는 미리 연락을 받았는지 신철의 지휘하에 용호영 소속 위사들이 아무도 들어올 수 없도록 주위를 둘러싸고, 한쪽에 화살을 쏠 때 쓰는 과녁이 하나 세워져 있었다.
“여기서 쏘시면 됩니다.”
발걸음을 멈춘 도현은 오십 보 정도 밖에 있는 과녁을 쳐다보고는, 칠현이 들고 있는 상자에서 권총을 꺼내 직접 총탄과 화약을 장전했다.
처음 만지는 거였지만 무기에 관심이 많아 조총 사격을 많이 해 봤고 옆에서 박영식이 자세히 설명을 해 줘서 큰 어려움은 없었다.
준비가 끝나자 양발을 어깨너비만큼 벌리고 권총을 들어 올린 도현은 앞에 보이는 과녁을 신중히 조준한 뒤 방아쇠를 당겼다.
타앙!
정적을 깨는 커다란 총성과 함께 권총이 발사됐다.
일직선으로 날아간 총탄은 과녁을 뚫고 뒤에 있던 소나무에 깊숙이 박혔다.
주위를 지키고 있던 신철과 위사들은 조그만 쇠뭉치가 낸 소리와 위력에 깜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쳐다봤다.
도현도 예상했던 것보다 강한 위력에 흡족한 얼굴을 했다.
“훌륭하군.”
“이 정도면 위기에 충분히 효용성이 있을 것 같습니다.”
“맞아. 이 권총의 이름이 뭐라고 했지?”
“웅오식입니다.”
“웅도와 같은 곰 웅熊 자를 쓰는 건가?”
“그렇습니다.”
“이름도 멋지군. 병기장한테 지시를 내려서 이걸 대량생산할 수 있도록 해.”
“알겠습니다.”
시선을 돌린 도현은 손에 들린 권총을 내려다보며 이걸 어떻게 활용하면 좋을지 머릿속으로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호위대를 근위대로 바꿔 지근거리에 두는 것과 함께 도현이 제일 먼저 손을 댄 건 바로 대궐 내에 있는 궁인들을 정리하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자객이나 반란보다는 주위에서 수발을 들던 궁인들에 의해 독살을 당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당장 소현세자만 해도 그랬기에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대궐 안에는 궁인들이 각자 이해관계에 얽혀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대표적인 것이 인조를 치마폭에 가두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숙원 조씨였다.
역모에 휩쓸려 우두머리인 숙원 조씨와 측근들이 의금부에 하옥됐다고 해도 여전히 많은 궁인들이 남아 있었다.
숫자가 워낙 많고 대부분 가장 밑바닥인 나인들이었기에 도현은 전부 숙청해 버리기보다는 대궐 사정에 밝은 김남생을 시켜 신중하게 옥석을 가려 회유하도록 했다.
이미 도현이 대궐의 주인이 됐고 숙원 조씨마저 역모로 끌려간 상황이라 끈 떨어진 연 신세였던 궁인들인 손을 내밀자 생각해 볼 것도 없이 머리를 조아리며 충성을 맹세했다.
그러면서도 감생과 박필선처럼 숙원 조씨의 충복 노릇해 도저히 신뢰할 수 없는 자들은 과감하게 쳐 내는 강수를 뒀다.
“곧 마마님한테 사약이 내려진다고 하는데 그럼 우린 어떻게 되는 겁니까?”
불안한 듯 연신 두 손을 만지작거리는 감생의 말에 박 상궁은 미간을 찡그리면서 짜증을 냈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아나? 그리고 괜한 오해를 받을 수 있으니까 당분간 찾아오지 말라고 하지 않았나?”
“불안해서 견딜 수가 있어야지요.”
“이런 한심한 사람을 봤나. 자네나 나나 마마님의 사람인 걸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그렇게 쪼르르 쫓아오면 어쩌자는 거야!”
“으음. 죄송합니다.”
실책을 깨달은 감생이 낮게 침음을 흘리는 모습에 측은해진 박 상궁은 화가 약간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를 달랬다.
“벌써 마마님이 의금부에 잡혀간 지 닷새가 넘었는데 아직 별다른 낌새가 없는 걸 보면, 우리 둘은 무사히 넘어가는 걸 수도 있으니까 너무 걱정 하지 말게.”
“정말 그럴까요?”
살 구멍이 생겨난 듯 감생이 눈을 반짝이 되묻자 박 상궁은 정색을 하며 이야기를 이었다.
“제발 그러길 바라야지. 이럴 때일수록 괜히 눈에 안 띄게 쥐 죽은 듯이 바짝 엎드려 있어야 되네. 알겠나?”
“예.”
“잠잠해지면 내가 따로 연락할 테니까 그때까지 찾아오지 말게.”
“알겠습니다.”
그때서야 마음의 안정을 찾은 감생이 머리를 숙여 인사하고 몸을 뒤로 돌리는 순간 갑자기 우렁찬 목소리가 두 사람이 있는 공터를 울렸다.
“꼼짝 마라! 둘이서 무슨 모의를 꾸미는 것이냐?”
바로 김덕술과 내금위 위사들이었다.
검을 뽑아 들고 어느새 주위를 포위한 위사들의 모습에 감생과 박 상궁은 그대로 몸이 얼어붙었다.
“오, 오해십니다. 저희는 그냥 예전에 심양 관저에서 함께 지낸 적이 있어, 오랜만에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을 뿐입니다.”
“맞습니다.”
박 상궁이 급히 생각해 낸 변명에 감생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김덕술은 콧방귀를 뀌었다.
“흥! 씨알도 안 먹히는 소리 하지 미라. 이미 너희 둘이 역모로 잡힌 조씨의 사주를 받아 심양 관저 시절부터 주상 전하께 위해를 가하려고 했다는 걸 다 알고 있다.”
“헉. 아닙니다.”
헛바람을 삼킨 박 상궁과 감생이 양팔을 내저으며 부인했지만 김덕술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차갑게 말했다.
“어서 죄인들을 포박해라!”
“옛.”
“이거 놓으시오.”
“살려 주십시오.”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박 상궁과 감생이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무술로 단련된 위사들의 완력을 이길 수는 없었다.
“험한 꼴 보기 싫으면 얌전히 오라를 받아라!”
“으윽.”
밧줄에 묶인 두 사람은 위사들한테 둘러싸인 채 의금부로 끌려갔고, 갑작스러운 소란에 몰려든 궁인들은 감히 가까이 오지 못하고 멀찌감치 떨어져서 그걸 봤다.
두 사람을 시작으로 이날 하루 동안 숙원 조씨의 수족 노릇을 하던 궁인 서른 명이 위사들에게 붙잡혔고 대궐은 다시 긴장감에 휩싸였다.
숙원 조씨뿐만 아니라 대궐에는 또 하나의 껄끄러운 세력이 있었는데, 바로 죽은 소현세자의 아내인 강빈을 따르는 무리였다.
내명부 서열로 보면 대비인 장렬왕후가 더 위협적인 존재여야 했지만, 나이도 어린 데다 입궐하자마자 숙원 조씨가 철저히 고립시켜 시중을 드는 궁인 몇몇을 제외하고는 이렇다 할 세력이 없어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강빈은 심양 관저 시절 궁인들을 다 휘어잡고 그 큰살림을 꾸려 나갈 만큼 대단한 여장부였다.
귀국 후 소현세자가 죽고 대궐에서 쫓기듯 나가면서 숙원 조씨의 노골적인 숙청에 세력이 상당히 줄어들었지만, 그래도 아직 꽤 많은 이들이 그녀를 따르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숙원 조씨라는 공동의 적이 있어 손을 잡았지만 차후에 후계 문제로 관계가 꼬일 가능성이 충분했다.
이걸 어떻게 풀지 며칠을 고심하던 도현은 대신들을 선정전으로 불렀다.
“오늘 경들을 보자고 한 건 의논할 것이 있어서요.”
도현이 부를 때마다 큰일이 터지거나 본전도 못 찾고 나오는 경우가 많았기에 대신들은 약간 긴장한 얼굴을 했다.
“그게 무엇이옵니까?”
잠깐 뜸을 들이며 대신들을 쓸어본 도현은 특유의 묵직한 음성으로 용건을 꺼냈다.
“세상 그 무엇도 끊을 수 없는 것이 부모와 자식 간의 정이라고 하는데, 어린 조카들이 어미를 그리워하는 모습을 더 두고 보기 힘들구려. 그래서 형수님께 군부인郡夫人의 칭호를 내리고 조카들과 사가에서 함께 모여 살 수 있게 해 주고 싶은데, 경들의 의견은 어떻소?”
군부인은 정일품에 해당하는 외명부 품계로 대궐 밖에 있는 여인한테 내릴 수 있는 최고의 품계였다.
숙원 조씨의 간계에 모든 작위를 박탈당한 강빈을 다시 종친으로 인정해 준다는 뜻이기도 했다.
거기다가 다시는 볼 수 없을지도 몰랐던 자식들과 함께 살게 해 주겠다니 도현이 상당히 배려를 해 주는 것이다.
워낙 당한 것이 많아서인지 갑자기 이건 또 무슨 이야기인지 대신들은 선뜻 대답을 못 하고 머리를 굴렸다.
그러자 상석에 앉은 도현은 이맛살을 찡그렸다.
“왜들 말이 없소?”
“흠흠. 틀린 말씀은 아니온데…….”
“어서 뒷말을 해 보시오.”
재촉에 영의정 김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궁궐 밖으로 아직 어린 대군들을 내보내시는 건 조금 생각을 해 보시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더 함께 살도록 해 줘야 되지 않겠소. 아직 부모의 보살핌이 필요한 나이인데, 조카들이 얼마나 외롭겠소.”
대답이 궁해진 김류가 머뭇거리자, 함께 심양 관저에 있어서 소현세자 부부와 친분이 깊었고 평소에 강빈 모자가 떨어져 지내는 걸 안타깝게 여기던 좌의정 박황이 끼어들었다.
“자고로 천륜은 끊을 수 없는 일이지요. 현명하신 생각이십니다.”
중립적 성향이 강한 호조판서 이명도 박황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찬성했다.
“맞습니다. 처음부터 잘못된 일인 만큼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바로잡아야지요.”
명망 높은 두 대신의 말에 다른 신하들도 동조했지만, 유일하게 우의정 심기원은 뭔가 찝찝한 얼굴로 입을 닫고 그를 봤다.
“그럼 다들 내 결정에 이의가 없는 것이오?”
“예.”
“뜻대로 하소서.”
신하들의 대답에 도현은 흡족한 표정을 짓고는 이야기를 이었다.
“형수님과 조카들이 함께 사는 데 불편하지 않도록 몰수한 김자점의 저택을 하사하고 수발을 들 궁인 서른 명과 매년 쌀 삼백 섬을 내수사에서 내주도록 하시오.”
일반 사람들 입장에서는 상당히 많은 재물이었지만, 아흔아홉 간이나 되는 대저택과 딸린 식구들을 생각하면 허튼짓(?)을 할 여유 없이 딱 생활만 할 수 있을 정도의 지원이었다.
물론 그것도 일반 사대부들에 비하면 훨씬 여유 있고 종친으로서 체면을 지키며 살 수 있는 수준이었다.
“알겠사옵니다.”
며칠 뒤 강빈을 따르는 궁인들은 궁관 신분을 내놓고 조카들과 함께 대궐을 나와 하사받은 저택으로 갔다.
도현은 이걸로 큰 잡음 없이 강빈의 세력을 내보내며 대궐 내에 불순 세력을 완전히 정리해 편히 두 발을 뻗고 지낼 수 있게 됐다.
“군부인 마님, 안에서 기다리시지요.”
정 상궁이 대문 앞에 서 있는 강빈을 보고 걱정스레 말했다.
오늘은 바로 궁궐에 두고 온 강빈의 자식들, 즉 죽은 소현세자의 아들들이 도현이 하사한 저택에 도착하는 날이었다.
전날 밤부터 안절부절못하며 잠도 못 이루던 강빈은, 아침 해가 뜨자마자 일어나 몸단장을 하고 아이들이 도착하기만을 이제나저제나 기다렸다.
“아닐세. 내 어찌 방 안에 들어앉아 소식만을 기다리고 있을 수 있겠나?”
“하지만 바람이 찹니다.”
“이 정도론 끄덕없네.”
정 상궁이 더 이상 군소리를 하지 못하도록 단호히 말한 강빈은 차갑게 식은 손끝을 만지작거리며 얼굴을 들어 올렸다.
저만치 쭉 뻗은 길 너머엔 이리저리 나다니는 행인이 몇몇 있긴 했으나 강빈이 찾는 행렬은 아직 보이지 않았다.
대체 언제 궁을 나섰기에 아직 도착하지 않는 것일까.
강빈은 점점 초조해지는 마음을 달래려는 듯 정 상궁을 바라보았다.
“방에 불은 잘 때고 있는가? 특히 셋째는 해마다 고뿔에 걸려서 항상 몸을 따듯하게 해야 하는데…….”
“제가 아랫것들에게 다 일러뒀습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자네가 직접 가서 보고 오게나. 아, 아이들이 도착하면 배가 고플 테니 간식거리 준비하는 것도 잊지 말고.”
“예.”
정 상궁이 총총걸음으로 자리를 뜨자 강빈은 수심이 섞인 표정으로 작게 한숨을 짓고 새로 하사받은 저택을 새삼스러운 눈빛으로 살펴보았다.
간악한 숙원 조씨의 모함에 내쫓기 듯 대궐을 떠나온 후 살았던 사가는, 매우 작고 초라해 도저히 세자빈이 살 만한 집으론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그때는 조씨의 세력이 하늘을 찌를 때라, 쌀이며 생활에 필요한 물품들을 공급해 주는 자들 역시 강빈을 무시하기 일쑤였기에 인내심이 강한 정 상궁조차 분통을 터트릴 정도였으니,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그렇게 매일매일 굴욕적인 시간을 보내는 동안 강빈이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하나.
새벽마다 정한수를 떠 놓고 궁궐에 두고 온 아이들의 무사와 안전을 비는 것밖에 없었다.
그 정성이 하늘에 통했는지, 이윽고 정세가 급변해 도현이 왕위를 이어받게 되자 거짓말같이 주위 환경이 뒤바뀌었다.
거만한 태도로 강빈을 대하던 관리들은 얼굴을 들지도 못하고 허리를 숙이기 바빴고, 낡은 집 대신 번듯하고 넓은 저택으로 처소도 바뀌었다.
처음에는 이 집의 내력이 어떤지 생각할 시간도 없었는데, 나중에 원수인 김자점 소유의 저택이었다는 말을 듣고 나선 이 어찌 얄궂은 운명이냐며 강빈은 무릎을 쳤다.
“사람의 인생이란 피고 지는 꽃과도 같은 것이라 하더니…….”
한때 인조를 등에 업은 숙원 조씨의 세력은 그야말로 대단해, 대궐 전체가 그녀의 치마폭에 감싸여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김자점도 마찬가지, 조정의 관리들을 한 손에 쥐락펴락했던 대단한 권세가 아니었던가.
하지만 지금은 그 모두가 과거의 일.
정말이지 사람의 앞일은 그 누구도 모른다는 말이 딱 들어맞는다.
강빈 또한 소현세자만 살아 있었다면…….
“안 되지. 이미 다 끝날 일이야.”
강빈은 부질없는 생각을 떨쳐 버리려는 듯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지금은 아이들만을 생각하자.’
대궐은 세상 사람 모두가 탐을 내는 권력의 중심부지만, 그만큼 위험하고 쉽사리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장소이기도 하다.
말 한마디, 행동거지 하나에 목이 붙었다 달아났다 일쑤이니 그리 생각하면 차라리 사가에 나와 아이들을 키우는 데만 신경 쓸 수 있는 지금이 더 행복한 것인지도 몰랐다.
“아!”
멀리서 들려오는 징과 꽹과리 소리.
사람들이 허겁지겁 길을 비켜 주는 가운데 가마를 태운 행렬이 점점 모습을 드러냈다.
“마님, 드디어 도착했나 봅니다!”
어느새 달려온 정 상궁이 그리 말하자 강빈은 그녀의 손을 붙잡고 겨우 떨리는 몸을 진정시켰다.
“이게 꿈은 아니겠지?”
“아무렴요. 진짜입니다, 마님!”
“아아!”
체통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두 눈 가득 차오르는 눈물을 막을 길이 없었다.
그렇게 강빈과 정 상궁이 저택 앞에 서서 행렬을 맞이하는데 가마에서 불쑥 작은 얼굴이 튀어나와 두 사람을 발견하고 마구 손을 흔들었다.
“어머니! 어머니!”
강빈의 세 사이들 중 가장 어린 막내의 외침에 강빈은 휘청휘청 앞으로 나아가려는 발길을 겨우 눌러 참았다.
그리고 마침내 가마가 바닥에 내려지자, 허겁지겁 발을 내리고 밖으로 나온 막내는 강빈의 품에 쏙 안겨 엉엉 울음을 터트렸다.
“어머니, 어디 가 계셨어요? 흑. 제가 얼마나 보고 싶었는데요.”
“울지 마라, 사내대장부가 눈물이 많으면 못쓴단다.”
그러나 막내를 끌어안고 등을 두드리는 강빈의 얼굴 역시 눈물범벅이었다.
뒤이어 가마에서 내린 첫째와 둘째도 지금껏 억눌러 왔던 감정이 북받치는 듯, 괜히 하늘만 바라보며 눈물을 훔치기 바빴다.
뿔뿔이 흩어졌던 아이들과 어머니가 다시 재회한 그 모습이 얼마나 짠했는지, 행렬을 호위하기 위해 따라온 말 탄 무관도 쉽사리 말을 걸지 못하고 눈시울을 붉혔다.
소현세자의 자식들이 출궁하고 얼마 있지 않아 역모 사건에 연관된 자들의 처벌이 진행됐는데, 거기에는 김자점과 소숙원 조씨도 포함됐다.
의금부에서 숙원 조씨의 형이 집행되는 날, 하늘은 유독 맑고도 청명했다.
“죄인을 대령하라!”
붉은 관복을 입은 의금부의 관리가 준엄한 목소리로 명령을 내리자, 곧 부하들이 옥에 수감되어 있던 숙원 조씨를 데리고 왔다.
“이거 놔라, 무례한 놈들!”
양팔을 단단히 붙잡힌 숙원 조씨는 반항을 하며 몸을 뒤틀었지만, 사내들의 억센 힘을 이기지 못하고 곧 질질 끌리다시피 하여 형장에 억지로 무릎 꿇려졌다.
백옥처럼 뽀얗고 하얗던 얼굴은 옥에 갇혀 있는 동안 조금 수척해졌으나, 한때 국왕을 치마폭에 감싸고 조정을 뒤흔들었던 희대의 요녀답게 미모는 전혀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그 아름다운 미색을 모두 다 덮어 버리고도 남을 정도로 악에 받힌 표정을 한 숙원 조씨는 대뜸 고개를 치켜들고 관리를 쏘아보았다.
“네가 오늘 이 자리에 끌려온 이유를 아느냐?”
관리의 물음에 조씨는 흥, 콧방귀를 뀌고선 오만하게 답했다.
“모른다. 혹시 정신 나간 세자가 드디어 제 실수를 인정했느냐? 아니면 삼일천하가 끝나고 왕 자리에 올라앉을 재목감이 아닌 것을 알아챈 다른 대신들에 의해 왕위에서 끌어내려지기라도 했나 보지.”
“이런 오만방자한!”
노기가 치솟아 오른 관리가 삿대질을 했지만 숙원 조씨는 그따위 것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것처럼 딴청을 부렸다.
“그만하시지요.”
그때 옆에 있던 다른 사내가 관리를 조용히 만류하며 말했다.
“죄인과 더 말을 섞어 봐야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크흠.”
그러자 관리는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노기로 붉어진 얼굴색을 겨우 가라앉혔다.
한편 숙원 조씨는 불현듯 나타난 그 사내를 보고 뭔가 심상찮은 기색을 느낀 듯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내가 입고 있는 관복과 인상에서 느껴지는 분위기는 의금부의 사람들과는 약간 달랐으며, 어딘가 이질감이 들었다.
게다가 일반적인 심문을 하는 자리치고는 묘하게 침착하고 주위가 정돈되어 있다.
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가슴이 술렁거렸지만 숙원 조씨는 상대가 누구든 얕보이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얼굴 표정을 단단히 굳혔다.
그러나 문득 돌린 시선 한편에 소반 위에 곱게 흰 천으로 덮여 있는 사발을 보자, 숙원 조씨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저것이 의미하는 바가 뭔지 모를 숙원 조씨가 아니다.
‘하지만…… 설마!’
심장이 두근두근 두 방망이질을 치면서 순식간에 혈압이 오르고 몸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그런 그녀를 한 눈으로 힐끗 곁눈질한 사내는 한 발 앞으로 나서서 그 자리에 멈춰 서고는 옆으로 손을 뻗었다.
비단 줄로 묶인 굵은 두루마기를 손에 들고 쫙 펼친 그는 꼿꼿하게 허리를 세운 자세로 크게 소리쳤다.
“죄인은 어명을 받들라!”
사내의 입에서 어명이란 말이 나온 순간, 의금부의 관리는 물론이고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허리를 숙이고 무릎을 꿇었다.
“죄인은 선대왕의 후궁으로서 하해와 같은 승은을 입고 숙원이라는 봉호까지 수여받았으나, 그 은혜에 감사할 줄 모르고 도리어 간사한 계획을 꾸며 조정을 어지럽혔으며, 수많은 악행을 저질러 상소가 끊이질 않으니…….”
사내의 말이 담담하게 계속 이어지는 동안, 숙원 조씨는 그제야 어딘지 눈에 익은 듯 보이던 그의 관복이 왕명 출납을 담당하는 승정원의 것임을 깨닫고 멍한 표정을 지었다.
‘어명이라고? 설마하니 전하께서 나를 내치시는 것인가.’
숙원 조씨는 물에 젖은 솜인 양 축 늘어진 손발을 겨우 움직여 바닥의 흙을 그러쥐었다.
아니다. 그녀가 지아비로 모셨던 전하는 이미 죽은 지 오래였다.
지금 왕위에 올라앉아 있는 것은 가증스러운 봉림대군이었으며, 그녀의 목숨을 뺏어 가기 위해 사약을 내린 것이다!
“……그리하여 민간의 인심을 다스리고 흐트러진 질서를 다잡기 위해 조씨에게 사약을 내리노라!”
두루마기의 끝까지 다 읽은 사내는 눈짓으로 사약을 든 부하를 가까이 오게 했다.
“적어도 선대왕 전하의 총애받는 후궁이었으니 마지막으로 선택권을 주겠다.”
그러면서 그는 손짓을 해 사약을 받친 소반을 숙원 조씨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스스로 사약을 마셔 품위를 지킬 것을 권하는 몸짓이었으나, 숙원 조씨의 눈에는 그녀를 우롱하는 짓거리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에잇!”
와장창!
숙원 조씨가 손을 휘둘러 소반을 밀치자 사발이 땅에 부딪혀 요란한 소리를 내며 깨졌다.
“이 무슨!”
“죽으란다고 내 순순히 사약을 먹을 줄 알았더냐! 내가 무슨 죄가 있어 죽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야!”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울부짖는 그녀의 외침이 사방 천지에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나는 선대왕의 후궁이다! 붕어하실 때까지도 나를 총애하고 예뻐하셨는데, 감히 봉림대군 따위가 나를 모함해 이 지경에 이르게 하다니 부끄럽지도 않느냐!”
“요망한 것, 닥치지 못할까!”
“장남을 제치고 둘째가 보위에 오른 것만 해도 예의에 어긋나는 일인데, 감히 선대왕의 후궁을 그 자식이 해하다니 어디 그런 법도가 있다는 말이더냐! 나는 못 먹는다, 사약 따위 입에 댈까 보냐!”
숙원 조씨가 마구 몸부림을 치며 독기가 뚝뚝 흘러넘치는 눈동자로 주위 사방을 노려보았다.
어찌나 그 기세가 흉악한지, 날고뛴다는 중범죄자들을 다루는 의금부의 병사들이 순간 주춤거리며 쉽사리 다가가지 못할 정도였다.
“에에이, 뭣들 하느냐! 당장 저년을 붙잡아라!”
참다못한 의금부의 관리가 삿대질을 하고 소리치자 그때서야 퍼뜩 정신을 차린 병사들이 화급히 움직였다.
그래도 명색이 선대왕의 후궁인지라 일반 병사들 대신 급하게 소집된 의금부 소속 다모들이 한꺼번에 달려들어 숙원 조씨의 양 어깨를 억지로 눌러 움직이지 못하게 철저히 구속했다.
“이익!”
혀를 깨물어 자해라도 할까 봐 얼른 입안에 천을 쑤셔 넣은 다모들은 ‘다음엔 어떻게 할까요?’ 하고 묻는 듯 사내를 쳐다보았다.
“이런, 이런. 어쩔 수 없군.”
사약을 받는 죄인이 반항하는 것은 자주 있는 일이라, 승정원에서 나온 관리는 크게 놀라지도 않고 혀를 찼다.
“입을 벌려라.”
“예!”
명령을 받은 다모들은 숙원 조씨의 턱을 붙잡아 입을 열게 한 후, 천을 빼고 그 자리에 숟가락을 넣어 함부로 입을 다물지 못하게 고정시켰다.
“으응! 으으으으!”
강제적으로 벌려진 입 사이에서 미처 삼키지 못한 침이 턱을 타고 흘러 흉한 몰골이 되었다.
숙원 조씨는 수치감에 휩싸여 필사적으로 몸을 움직여 벗어나려 했으나, 다모들이 워낙 단단하게 팔다리를 붙잡고 있어서 그저 들썩거리기만 할 뿐, 오히려 몸의 힘을 빼는 결과만 되었다.
예비로 준비되어 있던 사약이 대령되자, 다모들 중 한 명이 사발을 손에 들고 관리를 힐끗 곁눈질했다.
그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숙원 조씨의 벌려진 입으로 검은 빛깔의 사약이 벌컥벌컥 부어졌다.
“크읍! 으으!”
입을 다물지 못하는 와중에도 사약을 마시지 않으려고 억지로 숨을 참았지만, 다모가 코를 잡고 고개를 위로 들어 올리자 그것마저 소용이 없었다.
삼키는 것 반, 다 마시지 못하고 흘러내리는 것이 반.
옷자락을 홍건하게 적시고 눈물 콧물로 얼굴이 더렵혀진 숙원 조씨는 사약을 두 사발이나 마시고서야 겨우 다모들한테서 풀려났다.
“커헉! 컥, 으윽.”
격렬하게 기침을 하며 바닥에 엎드린 숙원 조씨는 무언가를 찾는 듯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도와줄 사람은 하나 없고, 주변엔 모두 그녀가 죽기만을 기다리는 차가운 얼굴의 관리들뿐.
숙원 조씨는 억울하고 원통한 듯 가슴을 치며 뭐라 말하려 했지만 입을 벌리자 기침과 함께 울컥 핏물이 속에서 치솟아 올랐다.
“네, 이놈! 봉림대구우우운!”
폐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몇 번 입술을 달싹이던 숙원 조씨는 마지막으로 도현을 향해 저주를 퍼부으려 했지만, 그마저도 채 끝맺지 못한 채 풀썩 옆으로 쓰러졌다.
인조의 총애를 받으며 궁궐을 마구 활개치고 다녔던 숙원 조씨의 허망한 최후였다.
후에 그녀의 시신을 수습한 한 말단 관리가 회고하길, 눈은 부릅떠서 흰자위에 핏줄이 마구 서 있었고 괴로워할 때 몇 번이나 입술을 깨문 듯 피멍이 들어 있었으며 표정은 마치 철천지원수를 앞에 둔 것처럼 표독하고 원한에 찬 것이, 평생 다시 보고 싶지 않은 흉한 얼굴이었다고 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