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제 개편
해가 바뀌어 갑신년(1644년)이 되자 경기도 파주에 정성을 다해 조성한 왕릉에 인조의 시신을 묻는 걸로 모든 국상이 끝났다.
상복을 벗고 곤룡포를 입은 도현은 근위대 주둔지로 걸음을 해서 병사들이 그동안 갈고닦은 솜씨를 관전했다.
둥!
“이야압!”
날카롭게 벼려진 총검을 꽂고 나온 백인대는 시작을 알리는 북소리와 함께 기합을 내지르면서 달려 나가 신형 조총을 창처럼 휘둘러 앞에 세워 놓은 허수아비를 난도질했다.
그냥 마구잡이로 조총을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 그가 가르쳐 준 총검술에 따라 베고 찔렀다.
단지 총신에 긴 총검을 하나 장착했을 뿐이었지만 그동안 조총 부대는 근접전에 약하고 창병의 보호를 받아야 된다는 인식을 단번에 깨 버리는 장면이었다.
그렇게 총검술 시범이 끝나자 이번에는 근위대가 자랑하는 신형 조총 사격 시범이 이어졌다.
“하나. 둘. 하나. 둘.”
척척척.
군관의 구령에 마치 한 몸처럼 딱딱 발을 맞춰서 걸어 나온 백인대는 준비된 과녁 앞에 기본 사격 대형인 삼 열을 갖춰 섰다.
“장전!”
명령이 떨어지자 병사들은 허리끈에서 유지에 싼 화약 봉지를 꺼내 입으로 끝부분을 찢은 뒤 총구에 조심스럽게 쏟아 넣고 이어서 쇠로 만들어진 동그란 모양의 총탄도 집어넣고 긴 꼬챙이로 꾹꾹 눌렀다.
일종의 페이퍼 카트리지로 지금까지 화약이 든 주머니를 따로 가지고 다니다가 직접 적당히 집어넣는 것과 달리, 이렇게 미리 일정한 양을 덜어 휴대하다가 바로 꺼내 쓰는 것이 훨씬 장전 속도가 빨랐다.
“조준!”
이어진 지시에 조총을 들어 올린 병사들은 개머리판을 어깨에 단단히 대고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한쪽 눈을 감고 앞에 보이는 과녁을 쳐다봤다.
그러고는 가늠자와 과녁을 일치시켰다.
“일 열 발사!”
병사들이 방아쇠를 당기자 총구에서 불꽃이 솟으며 귀를 때리는 커다란 소음이 연이어 터져 나왔다.
타타탕! 타탕! 탕! 탕! 탕!
흑색화약 특유의 매캐한 냄새와 연기가 연병장을 가득 채우는 가운데 사격을 끝낸 일 열 병사들은 재빨리 뒤로 빠졌고 그 자리를 이 열이 메우며 바로 조총을 발사했다.
그사이 제일 뒤로 간 일 열 병사들은 능숙한 동작으로 재장전을 실시했고 자기 차례가 오자 다시 조총을 쐈다.
이런 식으로 병사들은 쉬지 않고 짧은 시간 동안 각 열마다 열 발씩을 발사하는 연사 능력을 보였다.
바로 이어서 삼 열이 동시에 일제사격을 가하는 것도 시범을 보였는데 백오십 보 밖에 있는 과녁이 그야말로 걸레가 됐다. 아무리 용맹한 팔기군이라고 해도 넓은 개활지에서 지금처럼 조총 부대가 일제사격을 가한다면 그대로 몰살시킬 수 있을 것 같았다.
모든 시범이 끝나자 의자에 앉아 있던 도현이 몸을 일으키고는 흡족한 얼굴로 박수를 치며 고생한 군관과 병사 들을 치하했다.
짝짝짝.
“다들 고생이 많았어. 이런 강병들이 내 곁에 있으니 무엇이 두렵겠나.”
“아직 여러모로 부족한 점이 많은데 마음에 드셨다니 다행이옵니다.”
칭찬에도 흐트러짐 없이 겸손한 태도를 취하는 박영식을 보며 작게 머리를 끄덕인 도현은 말을 이었다.
“멋진 시범을 보여 준 장졸들을 위해 짐이 고기와 술을 푸짐하게 가져왔으니, 오늘 하루는 모든 걸 잊고 마음껏 즐기도록 하라!”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와아아!”
환호를 하면서도 정예병들답게 대열을 조금도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병사들이 마음 편히 즐길 수 있도록 따로 자리를 옮긴 도현은 박영식에게 직접 술을 따라 주며 다시 한 번 치하를 했다.
“수고했네.”
“아닙니다, 전하.”
“용맹스러운 근위대의 모습을 보니 마음이 아주 든든해졌어. 안 그렇소, 병판?”
고개를 옆으로 돌린 도현의 말에 함께 참관을 한 병조판서 임경업은 아직 흥분이 가시지 않는지 약간 들뜬 목소리로 대답했다.
“맞사옵니다. 조선군을 모두 근위대처럼 조련하고 무장시킨다면 청군 팔기도 두렵지 않을 것입니다.”
“하하하! 나도 그렇게 생각하오.”
호통하게 웃음을 터트린 도현은 기분이 좋은지 앞에 놓인 술잔을 들어 한 번에 다 털어 넣었다.
그러고는 방 안에 모여 있는 사람들을 한차례 둘러본 뒤 정색을 하며 말했다.
“말이 나온 김에 기존 오군영 체계를 개편했으면 하는데, 병판의 생각은 어떠시오?”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참석자들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그를 봤다.
“어떻게 바꾸신다는 겁니까?”
“총융청과 훈련도감 등으로 나누어져 있는 도성 방위 임무를 근위대에 통합시켜 짐이 명령을 내리면 일사불란하게 움직일 수 있도록 지휘 체계를 단일화시키고, 함량 미달인 장졸을 추려 낸 뒤 무장과 훈련을 강화해 정예화시켰으면 하오,”
한마디로 중앙군을 근본부터 완전히 뒤엎어 버리겠다는 뜻이었다. 폭탄 발언에 다들 정색을 한 가운데 잠시 말이 없던 임경업은 딱딱하게 굳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군영이 하나로 뭉쳐지면 여러 가지 이점이 있지만 기존 근위대에 준하는 대우와 무장을 갖추려면 예산이 엄청나게 소요될 겁니다.”
“이미 필요한 자금을 계산해 다 준비해 뒀으니 그건 염려하지 마시오.”
신료들 중에 몇 안 되게 봉황상단의 존재를 알고 있는 무리에 속하는 임경업은 도현의 말에 머리를 끄덕였다.
하지만 여전히 우려 섞인 얼굴로 이야기를 이었다.
“돈이 해결된다고 해도 통합 과정에서 자리를 잃게 될 장졸들과 이런 말씀 드리기 송구스럽지만 왕권이 강화되는 걸 바라지 않는 신료들의 반발이 강할 것이옵니다.”
가장 걸리는 것이 바로 이 부분이었는데 자칫 잘못하면 반역 사건 이후 겨우 안정된 정국이 다시 크게 요동칠 수 있었다. 임경업이 뭘 걱정하는지 충분히 알았지만 도현은 이미 결심을 굳혔는지 단호한 어투로 이야기를 했다.
“구더기가 무서워서 장을 못 담그나. 난 아무런 도움도 안 되고 쓸데없이 밥만 축내는 것들을 억지로 안고 갈 생각이 없소. 그리고 북벌이라는 원대한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어차피 한번은 넘어야 될 산이오.”
도현의 뜻을 모르지 않았지만 불을 보듯 뻔한 엄청난 후폭풍에 망설여진 임경업은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마찰을 최소화시킬 수 있도록 조금 더 시간을 가지신 다음에 추진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러자 도현은 눈가를 찡그리면서 약간 화가 난 듯 언성을 높였다.
“북경을 함락시킨 청나라는 사천성에 세워진 대서국을 치기 위해 다시 수십만 대군을 일으키려고 준비하며 빠르게 화북 지역을 평정해 나가고 있는데 언제까지 머뭇거리고만 있을 거요!”
처음 듣는 이야기에 임경업 장군과 참석자들이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청이 사천성을 공략한다니 사실이옵니까?”
“그렇소. 이미 팔기군에 동원령이 떨어졌다고 하오.”
“이런…….”
북경을 비롯한 드넓은 점령지를 청나라가 이렇게 빨리 안정화시키고 다시 정벌에 나설 줄은 미처 몰랐던 임경업은 큰 충격을 받았다.
그건 도현의 부름에 특별히 참석한 이완도 마찬가지였는지 심각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몇 년은 여유가 있을 줄 알았는데 이거 큰일이군요.”
“대서국을 점령하면 다음은 어디겠소? 이렇게 숭정제가 도망친 강남땅까지 청나라가 모두 석권해 버린다면 그때는 우리가 아무리 애를 써도 지난 병자호란의 치욕을 되갚는 건 요원한 일이 될 것이오.”
도현의 뼈아픈 지적에 다들 침음을 흘리면서 표정을 굳혔다.
“으음.”
지금도 벅찬 상대인데 중국 대륙을 통일하면 청나라가 얼마나 더 강해질지 상상하기조차 힘들었다.
아예 복수를 포기한다면 모를까 더 이상 망설일 때가 아니라는 걸 깨달은 임경업은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그럼 내 뜻을 따르겠다는 거요?”
“예.”
“저희들도 성심을 다해 전하의 뜻을 받들 것이옵니다.”
임경업뿐만 아니라 방 안에 모여 있던 장수들이 모두 고개를 숙이며 하는 말에 도현은 머리를 끄덕였다.
“경들이 함께해 준다니 천군만마를 얻은 것처럼 마음이 든든하오.”
임경업과 측근 무관들의 지지를 확인한 도현은 급하게 서두르지 않고 반대를 최소화하기 위해서 대전 회의에 안건을 올리기 전에 은밀히 대신들을 한 명씩 불러들여 회유를 했다.
“전하, 영의정께서 오셨사옵니다.”
“들라 하라.”
“예.”
미닫이문이 열리자 영의정 김류가 안으로 들어와 예를 갖췄다.
“찾으셨사옵니까, 전하.”
“어서 오시오, 영상. 큰일을 연이어 겪으면서도 조정을 안정적으로 이끌어 줘서 항상 고맙게 생각하고 있소.”
“다 전하께서 믿고 맡겨 주신 덕분이옵니다.”
“아니오. 영상의 넓은 포용력과 현명함이 낳은 결과가 아니겠소.”
“과찬이십니다.”
“그런데 이번에 김자점 일파를 조사하면서 조금 불미스러운 이야기가 들려 걱정이오.”
뜬금없이 칭찬을 할 때부터 뭔가 찝찝하던 김류는 도현의 이야기에 얼굴이 살짝 굳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김자점에게 매년 명절 때마다 상당히 고가의 사치품을 선물로 받았다고 하던데 사실이오?”
심장이 철렁 내려앉은 김류는 상체를 숙이면서 다급히 말했다.
“오해시옵니다.”
“다 사실이 아니라는 거요?”
“김자점이 관직에 처음 나왔을 때 지인의 소개로 인사를 나누면서 몇 년간 집에 찾아오며 성의를 보인 적은 있지만 최근에는 선물은커녕 교류도 거의 없었사옵니다.”
김류의 변명에 도현은 한쪽 손으로 턱을 매만지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흐음. 어찌 됐건 선물을 받기는 했다는 말이군.”
“그냥 단순히 연장자에 대해 성의를 보인 것이지 뇌물은 절대 아니었습니다.”
“나야 영상을 믿지만 다른 이들도 그럴지 의문이구려. 어찌 알았는지 당장 사헌부에서 이걸 문제 삼으려고 한다는 이야기까지 있으니…….”
도현이 살짝 말끝을 흐르자 김류는 애가 달은 얼굴로 그를 쳐다봤다.
“전하, 전 정말 억울합니다.”
다른 때 같으면 크게 문제되지 않을 일이었지만 하필이면 역모 주모자와 관련된 일이었기에 자칫하면 김자점 일파와 같이 엮여 패가망신을 할 수도 있었다.
“알고 있소. 하지만 사안이 워낙 중하다 보니 내가 아닐 거라 해도 사헌부에서 말을 듣지 않는구려.”
처음 충격이 어느 정도 진정되자 노련한 정치인답게 김류는 머릿속으로 도현의 진짜 의중을 고민했다.
진짜로 그를 역도로 몰아 죽이려고 했다면 굳이 이렇게 자리를 만들어 귀띔을 해 주지도 않았을 테니 분명 뭔가 원하는 것이 있다는 뜻이었다.
최근 측근들을 조정에 밀어 넣으며 친정 체제 구축에 열심인 걸 볼 때 선대왕의 사람인 자신이 조용히 자리를 내놓고 사직하길 원하는 건지 아니면 다른 의도가 있는 건지, 좀처럼 감이 잡히지 않은 김류는 그를 똑바로 보며 진지하게 이야기를 했다.
“억울한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해 주신다면 뭐든 하겠사옵니다.”
그러자 비단 보료 위에 앉아 있던 도현은 작게 미소를 지었다.
“한 가지 영상의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는데 그걸 해 준다면 나도 사헌부의 상소를 무마시켜 주겠소.”
“그게 무엇이옵니까?”
“역모에 연관된 수어청을 해산하고 총융청과 훈련도감을 새로 만든 근위대에 통합시키는 군제 개편을 단행할 생각이오.”
“……!”
도현의 말에 김류는 눈을 치켜떴다.
이건 아주 노골적으로 왕권을 강화하겠다는 뜻이었다.
선뜻 대답을 못 하고 상대가 망설이자 도현은 몸을 뒤로 기대며 말했다.
“왜, 어렵겠소?”
“그것이…….”
“힘들다면 할 수 없지. 이번 상소를 사헌부 김 집의가 주도한다던데 알아서 잘해 보시오.”
은근한 협박에 김류는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특히 강직하고 한번 꼬투리를 잡으면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걸로 유명한 김종일이 탄핵과 상소를 주도할 거라고 하자 김류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머릿속으로 빠르게 득실을 계산한 김류는 군제 개편이 이루어지면 임금인 도현에게 날개를 달아 주는 격이었지만, 당장 자신과 집안의 안위를 생각해서 원하는 대로 해 주기로 결심했다.
물론 여기에는 자신이 찬성하더라도 심기원을 비롯한 다른 신하들이 극렬하게 반대할 것이기에 도현이 뜻을 이루는 것이 쉽지 않을 거라는 계산도 깔려 있었다.
“아닙니다. 전하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정말이오?”
“제가 어느 안전이라고 농을 하겠습니까.”
“하하하. 잘 생각해소. 영상이 그렇게만 해 준다면 이번 일은 시끄럽지 않도록 짐이 잘 덮어 주겠소.”
“망극하옵니다.”
떨떠름한 표정의 김류와 달리 도현은 한쪽 입술을 위로 말아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이런 식으로 도현은 봉황상단을 통해 알아낸 정보를 가지고 주요 대신 몇몇을 압박해 군제 개편에 찬성표를 던지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며칠 뒤 열린 조회에서 도현은 군제 개편 이야기를 꺼냈다.
“오늘 경들에게 한 가지 말할 것이 있소.”
무슨 말을 꺼낼지 대충 짐작한 영의정 김류와 몇몇 대신들의 얼굴이 살짝 경직된 가운데 그는 이야기를 계속 이어졌다.
“김자점 일파의 역모 사건도 그렇고 멀리는 병자호란까지 도성 수비 체계에 아무래도 구멍이 있는 것 같아, 이번 기회에 보다 효율적으로 손을 보려고 하오.”
아니나 다를까 말이 끝나기 무섭게 심기원이 정색을 하며 물었다.
“어떻게 하시겠다는 것이옵니까?”
“이름만 남은 수어청을 없애고 총융청과 훈련도감은 새로 만든 근위대 통합시킬 생각이오.”
“지금까지 잘 운영되어 온 군영들을 갑자기 통폐합하신다니, 다시 생각해 주시옵소서.”
심기원을 따라 신료들 상당수가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맡은 임무와 성격이 다른 세 군영을 합친다면 괜한 분란만 일고 득 될 게 없을 것이옵니다.”
“맞사옵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벌 떼같이 일어나 반대 의견을 쏟아 내는 모습에 이맛살을 찌푸린 도현은 손바닥으로 팔걸이를 세게 내려쳤다.
탕!
“문제가 없이 잘 운영되고 있다니, 불과 몇 달 전에 도성 한복판에서 역도들과 전투를 벌인 걸 다 잊은 거요!”
“흠흠.”
“그건…….”
엄연한 사실이었고 역모와 관련된 중차대한 일이었기에 신하들은 바로 반박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그리고 병자호란 때도 팔기군의 공격을 제대로 막아 내지 못하고 도성을 빼앗겼을 뿐만 아니라 남한산성에 들어간 선대왕께서 삼배구고두례라는 치욕적인 일까지 당했는데, 이래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거요!”
인조가 청 태종에게 세 번 절을 하고 머리를 땅에 아홉 번 찧으며 항복한 삼배구고두례는 조선 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사건 중 하나였다.
더군다나 몇몇을 제외하고는 대신들 거의 대부분이 당시 현장에서 굴욕적인 장면을 지켜봐야 했던 이들이었기에, 이걸 거론할 때마나 아픔이 크고 임금을 제대로 모시지 못한 죄인이 될 수밖에 없었다.
당시 팔기군의 빠른 진격을 예상하지 못했고 아무런 준비도 없이 남한산성으로 쫓기듯 들어가 장시간 항전이 어려웠다는 여러 가지 사정이 있었지만, 도현은 교묘하게 삼배구고두례만 부각시켜 주도권을 잡았다.
무서울 정도로 치밀한 도현의 행동에 심기원은 입을 꾹 다물고는 묵직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봤다.
“앞으로 다시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중앙군을 개편해 도성 수비를 튼튼히 해야 되지 않겠소?”
이야기는 그럴듯했지만 결국 자신의 입김이 미치는 근위대로 중앙군을 통합해 왕권을 강화하겠다는 것이다.
이대로 있다가는 도현의 의도대로 끌려가겠다는 판단에 심기원은 마지막 패를 빼 들었다.
“전하의 말씀은 저도 충분히 공감합니다. 하지만 얼마 전에 방어를 위해 증축한 성벽을 보고도 청국 사신들이 예민하게 반응하며 당장 다시 허물라고 하는 상황에서 저희가 대대적인 군제 개편을 한다면 가만히 있겠사옵니까? 아마 모르긴 해도 당장 황제의 불호령이 떨어질 것이옵니다.”
“그러니까 우상의 말은 청나라가 화를 낼 것이니, 괜한 분란거리를 만들지 말자는 거요?”
“그렇사옵니다.”
눈을 가늘게 뜬 도현은 심기원을 노려보며 버럭 고함을 질렀다.
“우상은 조선의 정승이오 아니면 청나라 황제의 신하요!”
“예? 그게 무슨……?”
“어찌 조선의 대신이 중차대한 국정을 논의하면서 국익보다 청나라의 눈치를 먼저 보냐 이거요. 모르는 사람이 보면 청국의 신하인 줄 알겠소이다.”
순간 당황한 심기원은 멈칫거리며 말했다.
“오해시옵니다.”
“듣기 싫소.”
차가운 어투로 심기원의 입을 막아 버린 도현은 고개를 돌려 한쪽에 조용히 앉아 있던 영의정 김류에게 시선을 줬다.
“영상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그러자 잠시 표정을 구기고 있는 심기원을 힐끗 쳐다본 김류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이야기를 했다.
“문제가 있다면 고쳐서 더 낫게 만드는 것이 옳지 않겠습니까.”
에둘러 표현했지만 결국 중앙군 개편을 찬성한다는 말이었다.
인조의 측근이었지만 도현과 약간 거리가 있어 이번 문제 관해서는 반대를 할 줄 알았던 김류가 뜻밖의 태도를 보이자 심기원은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그를 봤다.
“영상 대감.”
“흐흠.”
내심 껄끄러웠던 김류는 심기원의 시선에 괜히 헛기침을 하며 슬쩍 고개를 돌렸고, 이어서 왕당파로 분류되는 좌의정 박황과 병조판서 임경업이 찬성을 하고 나섰다.
“다시는 치욕적인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방비를 해야지요.”
“지휘 체계가 분산되고 서로 맡은 일이 겹치는 경우가 많아 중구난방이었는데, 주상 전하의 말씀대로 한다면 훨씬 체계적으로 군을 운영할 수 있을 겁니다.”
김류의 행동이 약간 의외였지만 그래도 여기까지는 어느 정도 예상했기에 심기원의 동요가 크지 않았다.
하지만 신권 주의자로 분류되는 공조판서와 형조판서까지 도현의 말에 동조를 하자 심기원은 크게 당황했다.
“필요하다면 군제 개편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요.”
“동감입니다.”
“추가로 재원이 들어가지만 않는다면 신도 반대할 생각은 없습니다.”
비록 조건부이지만 중립 성향인 호조판서 이명까지 긍정적인 태도를 보이자 대전 분위기는 급격히 찬성 쪽으로 넘어갔다.
그러자 다급해진 심기원이 황급히 입을 열었다.
“종묘사직과 도성의 안위를 좌우하는 중요한 문제이니만큼 성급하게 결론을 내리기보다는 좀 더 시간을 두고 생각해 보시지요.”
어떻게든 시간을 번 다음에 갑자기 입장을 바꾼 이들을 설득하고 사대부와 성균관 유생 들을 동원해 상소를 올려 군제 개편을 좌절시키려는 의도였다.
실제로 많은 국왕과 혁신적 사상을 가진 정치인들이 이런 식으로 유교적 사상에 꽉 막힌 사대부의 저항에 뜻을 꺾어야 했다.
주도권을 쥐고 있을 때 밀어붙이지 않으면 뜻을 관철시키기 어렵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도현은 심기원의 꼼수에 넘어가지 않고 단호한 어투로 말했다.
“대신들 대부분이 찬성을 하는데, 뭘 더 생각한단 말이오?”
“하오나…….”
“북경을 함락시킨 청나라의 국력이 하루가 다르게 커지고 있는 때에 한가하게 이야기나 하고 있을 여유가 어디 있소? 반대보다 찬성이 많은 것 같으니 군제 개편을 실시하는 걸로 결정하겠소. 이건 어명이오!”
“으음.”
더 이상 토를 달지 못하도록 아예 어명이라고 못을 박아 버리자 자칫하면 항명이 될 수도 있었기에 심기원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병판.”
“하명하시옵소서.”
“경이 직접 책임지고 오늘부터 당장 중앙군 개편에 착수하시오.”
“알겠사옵니다.”
완전히 번갯불에 콩 볶아 먹는 것처럼 일사천리로 일을 진행시켰는데, 괜히 미적거리다가 사대부들의 반대로 추진이 어려워질까 봐 미리 선수를 치는 것이다.
그날 밤 북촌에 위치한 심기원의 저택에 그를 따르는 측근들이 은밀히 모여들었다.
“이대로 주상이 독주하는 걸 그냥 계속 두고 보실 겁니까?”
광주 부윤을 지내고 지금은 호조참판 벼슬에 있는 권억이 흥분했는지 언성을 높이자, 상석에 앉아 있던 심기원은 살짝 미간을 찡그렸다.
“이미 어명이 떨어졌는데 항명이라도 하자는 건가?”
가뜩이나 대전에서 제대로 대응도 못 하고 또다시 도현한테 말렸다는 생각에 심기가 불편했던 심기원은 버럭 고함을 치며 짜증을 냈다.
“대, 대감.”
괜히 나섰다가 불벼락을 맞은 권억이 어깨를 움츠리며 당황한 표정을 짓자 함께 있던 이일원이 나서 분위기를 가라앉혔다.
“권 참판께서도 답답한 마음에 그러신 것이니, 너무 노여워하지 마십시오.”
“앞으로 말을 가려서 하시게.”
“죄송합니다, 대감.”
머리를 숙이는 권억을 보며 심기원은 마음에 안 든다는 듯이 짧게 혀를 찼다.
“그런데 영상을 비롯한 대신들이 중앙군 개편에 찬성하시다니, 정말 의외였습니다. 혹시 전하께 붙은 것이 아닐까요?”
우려 섞인 이일원의 이야기에 심기원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건 아닐 걸세.”
“그러면 갑자기 왜 그런 태도를 보인 걸까요?”
“보나마나 대전에서 안건을 꺼내기 전에 주상이 뭔가 약점을 잡고 은밀히 대신들과 물밑 협상을 한 것이 분명해.”
“언제 그런 일이…….”
“그게 아니라면 바보 천치가 아닌 이상 시간이 지나면 자기 발등을 찧는 일일 텐데, 대신들이 중앙군 개편을 찬성했을 리가 없지.”
확신에 찬 심기원의 말에 두 사람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대감의 말씀이 사실이라면 일이 더 어려워지겠군요.”
“그렇겠지. 나도 주상이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닌 걸 알면서도 설마 이 정도로 치밀하게 움직일 줄은 몰랐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되는 겁니까? 그냥 이대로 주상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게 내버려 둘 수는 없지 않습니까?”
이일원의 물음에 잠시 말이 없던 심기원은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일단은 정석대로 움직여야지. 권 참판.”
“하명하십시오, 대감.”
아까 일 때문인지 약간 의기소침해 있던 권억은 심기원이 부르자 머리를 들어 올리며 얼른 대답했다.
“성균관 책임자인 대사성하고 친분이 깊다고 했으니, 유생들을 충동질해서 이번 일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도록 하게.”
“예.”
“그리고 이 지사 자네는 경기 지역의 사대부들에게 통문을 돌려 상소에 동참하도록 손을 쓰게. 아예 상경해서 주상이 계신 대궐 앞에서 상소를 올리면 더 좋겠군.”
심기원이 뭘 하려는지 알아차린 이일원은 눈을 반짝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각 향교에 연락해 최대한 많은 인원을 끌어모아 보겠습니다.”
“그래. 자네들만 믿네.”
그 뒤로도 세 사람은 밤늦게까지 이번 일을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대책을 논의했다.
“전하, 도승지께서 오셨사옵니다.”
호조에서 올린 올해 예산안을 살펴보고 있던 도현은 상선의 말에 허리를 펴며 입을 열었다.
“들라 하라.”
“예.”
궁녀들이 열어 준 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오는 도승지를 본 도현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손에 든 것이 다 뭐요?”
그러자 양팔에 한 아름 들고 있던 종이봉투를 서탁 위에 올려놓은 도승지는 곤혹스러운 얼굴로 대답했다.
“상소문이옵니다.”
“이게 다 상소라고?”
“예.”
“무슨 일로 상소를 올린 거지?”
도현의 시선을 받은 도승지는 약간 머뭇거리다가 이야기를 했다.
“그게…… 중앙군 개편을 반대하는 상소이옵니다.”
“뭐야!”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린 도현은 제일 위에 올려져 있는 봉투를 집어 상소문을 꺼내 펼쳤다.
내용을 빠르게 읽어 내려가던 도현은 이내 종이를 구겨 바닥에 던졌다.
“성균관 유생이면 학문이나 갈고닦아야지, 이따위 글이나 쓰다니. 읽을 가치도 없으니 다 갖다 버리게.”
“저…….”
“어서 치우지 않고 뭘 하고 섰나!”
“아뢰옵기 송구스럽습니다만 이건 일부일 뿐이고 승정원에 수백 통이 더 들어와 있사옵니다.”
“끄으응.”
욕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르는 걸 겨우 삼킨 도현은 이를 부드득 갈다가 앞에 안절부절못하고 서 있는 도승지를 쳐다봤다.
“다 태워 버려.”
“예에?”
“부국강병을 이뤄 내 다시는 삼전도의 치욕을 겪지 않으려는 깊은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이따위 상소를 적어 올리는 소인배들의 글은 읽을 가치도 없으니, 다 태워서 없애 버리라는 말일세.”
“하, 하오나.”
“어허. 시키는 대로 하지 않고 뭘 하고 있나!”
“알겠사옵니다.”
“그리고 앞으로 중앙군 개편과 관련된 상소는 가져올 필요가 없으니 승정원에서 모두 폐기시켜 버리게.”
“네.”
허리를 숙이며 대답한 도승지는 상소문들을 챙겨 밖으로 나갔다.
하지만 이건 시작에 불과했는데, 그날부터 매일 수십 통씩 성균관 유생과 지방 사대부 들이 보낸 상소문이 승정원(국왕의 업무를 보조하는 곳으로 일종의 비서실)에 보내져 쌓였고 경기도 일대에서 상경한 양반 이백여 명이 대궐 문 앞에 멍석을 깔고 엎드려 시위를 벌였다.
“전하, 나라 살림이 어려운 이때에 무리하게 중앙군을 개편하면 민초들이 힘들어질 것이옵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머리에 갓을 쓰고 수염을 길게 기른 중년인의 말에 다른 양반들이 합창을 하듯 크게 소리를 지르며 소란스럽게 했다.
조회에 나가지 않고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거처인 대조전에 앉아 있던 도현은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오는 칠현을 보며 입을 열었다.
“아직도 그대로 있어?”
질문을 받은 칠현은 송구스러운 얼굴로 살짝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예. 오늘은 인원이 더 늘어났습니다.”
도현은 손바닥으로 앞에 있던 서탁을 세게 내려치면서 화를 냈다.
탕!
“이것들이 언제부터 나라를 걱정했다고 이 난리야!”
“고정하십시오, 전하.”
“내가 지금 화가 안 나게 됐어!”
말로는 삼전도의 치욕을 안긴 오랑캐에게 복수를 해야 된다고 떠들지만, 정작 뭘 좀 하려면 이렇게 벌 떼처럼 들고 일어나 방해하는 사대부들의 행태에 도현은 어처구니가 없고 너무 짜증이 났다.
“양반들의 시위도 문제지만 장 총관께서 전해 준 정보에 의하면 젊은 신하들이 여기에 동참할 조짐이 있다고 합니다.”
“이것들이 정말.”
지금도 골치가 아픈데 여기에 젊은 신하들까지 들고일어나면, 아무리 대전 회의에서 결정 났다고 해도 자칫 의욕적으로 추진하려는 중앙군 개편이 시작 단계에서 좌절될지도 몰랐다.
이건 단순히 한 번의 실패가 아니라 집권 초기 그가 주도권을 쥐고 국정을 운영해 가느냐 아니면 사대부들에게 끌려 다닐 것이냐를 결정하는 아주 중요한 갈림길이었다.
어느새 스스로 화를 누르고 차갑게 머리를 식힌 도현은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배후를 찾아내라고 해.”
“예?”
“아무리 민감한 문제라고 해도 대전에서 결정이 내려진 지 며칠도 되지 않아서 이 난리가 난 걸 보면, 분명 누군가 뒤에서 상황을 조정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어. 그놈을 알아내란 말이야.”
“아. 예.”
“그리고 좌상과 포도대장을 불러들여.”
칠현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를 봤다.
“설마 강제로 시위대를 해산시키실 생각이십니까?”
그러자 도현은 정색을 하며 말했다.
“갈 길이 급한데 이런 일로 발목이 잡혀 있을 수는 없어.”
합리적이고 타당한 반대 의견 제시는 도현도 언제든 들어 줄 용의가 있지만, 그런 건 안중에도 없고 오직 기존에 가지고 있던 걸 빼앗기지 않으려고 아니면 특정 인물이나 세력의 사주를 받아 의도적으로 벌이는 시위라면, 그냥 두고 볼 생각이 전혀 없었다.
상황이 심상치 않다 보니 혹시 몰라 대궐에 머물고 있던 좌의정 박황이 제일 먼저 달려오자, 도현은 그를 지지하는 인물들을 총동원해 어떻게 해서든 젊은 신하들이 동요하지 않도록 막으라는 지시를 내렸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좌의정 박황이 가진 명성과 인맥이라면 동요를 완전히 가라앉히지는 못해도 어느 정도 시간은 벌 수 있었다.
그사이 대궐 앞에서 시위를 벌이는 양반들을 쫓아내 버린 뒤 상황을 최대한 빨리 정리해 버릴 생각이었다.
“강제 해산이라고 하셨사옵니까?”
호출을 받고 달려온 포도대장 배용이 깜짝 놀라 고개를 드는 걸 보며 도현은 단호한 어투로 말했다.
“그러네.”
“다른 것도 아니고 성균관 유생과 양반 들을 시정잡배처럼 마구잡이로 쫓아낸다면 더 큰 반발을 불러올 것이옵니다.”
포도대장의 말에 도현은 이맛살을 찌푸리고는 살짝 언성을 높였다.
“그래서 저들을 이대로 놔두자는 건가!”
“그런 게 아니옵고 말로 잘 타이르시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야기를 채 끝내기도 전에 도현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이미 여러 차례 도승지를 보내 해산하라고 명했는데도 전혀 미동도 하지 않고 조정과 짐을 능멸하고 있는데, 포도대장은 그걸 이대로 놔두란 건가!”
“저, 전하.”
“일이 이 지경이 되기 전에 포도대장인 경이 알아서 정리를 했었어야 되는 것 아닌가!”
도성과 경기도 일대의 치안을 책임지는 것이 포도대장이 맡은 역할이었기에 도현의 강한 질책을 들어도 할 말이 없었다.
“송구하옵니다.”
“그러니까 책임지고 시위대를 해산시키도록 하게.”
추상같은 명령에 포도대장은 곤혹스러운 얼굴로 대답했다.
“……알겠사옵니다.”
배용이 수심 가득한 얼굴로 대조전을 나오자 포도청 종사관 손현석이 얼른 옆으로 다가와 서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무슨 안 좋은 소리라도 들으셨습니까?”
힐끗 고개를 돌려 뒤에 있는 대조전을 쳐다본 포도대장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엄청난 폭탄을 떠안았어.”
“예?”
“주상께서 대궐 앞에 진을 치고 있는 시위대를 강제로 해산시키라고 하셨네.”
의아한 표정으로 머리를 갸웃거리던 손현석은 이어진 이야기에 헛바람을 삼키며 동그랗게 눈을 치켜떴다.
“헉! 정말입니까?”
“그래.”
폭탄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날벼락을 맞은 꼴이었는데, 자칫 잘못했다가는 양반들의 분노를 몽땅 다 뒤집어쓸 수도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은밀히 심기원의 지시를 받아 대궐 앞 시위를 묵인해 주고 있었기에 입장이 더 곤란했다.
재빨리 주위를 둘러본 손현석은 누가 듣기라도 할까 봐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다.
“어쩌실 겁니까?”
잠시 말이 없던 포도대장은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면서 입을 열었다.
“괜히 고래싸움에 끼어 내가 화살받이가 될 필요는 없지.”
“그럼…….”
“아까부터 으슬으슬 추운 것이 아무래도 고뿔(감기)에 걸린 것 같군.”
대놓고 어명을 거역할 수 없으니 병을 핑계로 은근슬쩍 책임을 회피하려는 것이다.
눈치 빠르게 상관의 꼼수를 알아차린 손현석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면서 머리를 숙였다.
“몸이 안 좋으셔서 당분간 포청에 못 나오시는 걸로 해 두겠습니다.”
“역시 자네뿐이야.”
흡족한 얼굴로 손현석의 어깨를 두드려 준 포도대장은 휘적휘적 대궐을 나갔다.
다음 날이 됐는데도 여전히 시위대가 해산하지 않고 대궐 문 앞을 차지한 채 소란스럽게 하자 도현은 측근인 내관 김남생을 포도청으로 보냈다.
“다녀왔사옵니다, 전하.”
고개를 든 도현은 약간 노기 어린 어투로 말했다.
“뭘 한다고 포도청에서 꾸물거리고 있더냐?”
“저, 그게…….”
김남생이 바로 대답을 하지 못하고 어물거리자 도현은 뭔가 잘못됐다는 걸 깨닫고 정색을 했다.
“무슨 일이야?”
“포도대장이 심한 고뿔에 걸려 자리를 비우고 없었사옵니다.”
“허어. 지금 고뿔이라도 했나?”
어처구니가 없다는 얼굴로 되묻자 김남생도 민망한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예.”
대번에 꾀병이라는 걸 알아차린 도현은 얼굴을 와락 구겼다.
“이놈을…….”
“밑에 있는 종사관에게 다시 지시를 내리시겠습니까?”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묻는 말에 도현은 고개를 내젓고는 차갑게 이야기를 했다.
“윗대가리부터 제 안위만 살피고 꼼수를 부리는데, 명령을 제대로 실행하겠어.”
“그럼 시위대를 그냥 놔두시는 것이옵니까?”
“그럴 수는 없지.”
서탁 모서리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며 잠시 골똘히 고심하던 도현은 이내 날카롭게 눈을 번득이면서 입을 열었다.
“도성 치안을 제대로 확립하지 못하고 임무를 소홀히 한 죄로 배용을 파직하고 전 총융사 이상규를 새로운 포도대장에 임명하겠다. 즉시 도승지를 불러 교지를 작성하라 이르라.”
“예.”
허리를 숙이며 대답한 김남생은 도현의 지시를 전달하기 위해 방을 나와 서둘러 승정원으로 뛰어갔다.
그날 오후 아직 중앙군 개편이 이루어지기 전이라 총융청에 머물고 있던 이상규는 교지를 가지고 온 칠현의 방문을 받았다.
“총융사 이상규는 어명을 받으라.”
함께 있던 군관들이 한쪽에 모두 시립한 가운데 대궐 위사 두 명을 대동한 칠현은 앞에 무릎을 꿇고 앉은 이상규를 보며 가지고 온 교지를 펼쳐 내용을 읽었다.
“이 시간부로 총융사 이상규를 포도대장에 임명해 좌우포청을 모두 지휘하도록 하겠노라. 신임 포도대장은 도성과 경기도의 치안 유지에 만전을 다하라.”
낭독이 끝나자 이상규는 상체를 숙이며 세 번 절을 했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받으시지요.”
“고맙네.”
이상규는 칠현이 건네주는 교지를 조심스럽게 받았다.
“전하께서 따로 하명하신 말씀이 있사오니 잠시 주위를 물려 주시겠습니까?”
“알겠네.”
그가 눈짓을 하자 군관들이 자리를 비켜 줬고 미리 이야기가 되어 있는지 위사들도 밖으로 나갔다.
넓은 방에 둘만 남자 칠현은 진지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했다.
“갑자기 포도대장에 임명되셔서 의아하실 겁니다.”
“솔직히 그러네.”
“실은 원래 포도대장이었던 배용 대감께서 병을 핑계로 주상 전하의 지시를 수행하지 않으셔서 파직하고 장군께 중임을 맡기신 겁니다.”
이야기를 들은 이상규는 뭔가 집히는 것이 있는지 살짝 표정을 굳혔다.
“혹시 대궐 앞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는 유생들 때문인가?”
어차피 알게 될 사실이었기에 칠현은 숨기지 않고 머리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전하께서는 이들을 모두 강제 해산시키길 원하십니다.”
“으음.”
이빨 사이로 새어 나오는 침음이 지금 이상규의 마음을 모두 이야기해 줬다.
배용이 그랬던 것처럼 조선 사회의 지배층인 양반들을 건드린다는 게 껄끄러울 수밖에 없었다.
상대가 망설이는 것 같아 보이자 칠현은 얼른 다음 말을 했다.
“어려운 일이라는 걸 잘 알지만 북벌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행동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만약 장군께서 나라를 위해 나서 주신다면 주상께서도 결코 손을 놓지 않으실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전하께서 정말 그런 이야기를 하셨소?”
“물론입니다. 제가 어찌 감히 거짓을 말하겠습니까.”
상당한 부담감을 떠안아야 했지만 북벌이라는 대의명분과 임금인 도현이 뒤를 봐주겠다고 직접 약속했다는 말에 이상규는 마음이 크게 흔들렸다.
잠시 고심한 끝에 이상규는 약간 경직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신하 된 입장에서 어찌 전하의 뜻을 거역할 수 있겠나. 원하시는 대로 할 테니 아무 심려 마시라고 전해 드리게.”
“전하께서 크게 기뻐하실 겁니다.”
이상규의 결심이 서자 칠현은 마지막으로 도현이 내려 준 권한을 이야기해 줬다.
“이번 일을 잘 마무리 짓고 장군께서 지휘권을 확실히 장악하시라고, 한시적으로 포도청 관리들에 대한 인사권을 일임하고 필요한 사람이 있으면 함께 데려가셔도 좋다고 하셨습니다.”
상당히 파격적인 권한에 이상규는 부담감이 약간은 사라졌다.
“이런 망극한 경우가 있나.”
“전하께서는 한번 믿으시면 확실히 뒤를 봐주시는 분이시지요.”
“그런 것 같군.”
사실 총융사나 포도대장은 같은 종이품 벼슬로 품계가 같아 딱히 승진이라고 볼 수 없었지만, 중앙군 개편으로 이제 머지않아 총융청이 근위대에 흡수될 예정이고 좌우로 나누어져 있는 포도청을 합쳐 모두 지휘할 수 있다는 걸 생각하면 분명한 영전이었다.
칠현이 돌아가자 이상규는 수족이 돼서 움직일 측근 군관 열 명을 뽑아 곧장 포도청으로 갔다.
이로써 도현은 중앙군 개편으로 위치가 애매해진 총융사 이상규와 군관들을 포도청으로 보내 불만을 무마시키는 것과 동시에 이들을 휘하로 완전히 품을 수 있었다.
이상규는 제일 먼저 배용이 책임자로 있던 좌포청에 도착했다.
입구를 지키고 있던 포졸 두 명은 흙먼지를 일으키면서 군관 여러 명이 말을 타고 오자 약간 긴장한 얼굴로 앞을 막았다.
“멈추시오!”
이히히힝.
“어디서 오신 분들입니까?”
고삐를 당겨 말을 멈춰 세운 이상규는 창을 든 포졸들이 임무를 소홀히 하지 않고 절차에 따라 신분을 확인하자 화를 내지 않고 오히려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새로 임명되신 포도대장이시다.”
함께 온 부관의 말에 포졸들은 깜작 놀란 표정을 지었다.
“새 포도대장이시라고 하셨습니까?”
“그래. 여기 주상 전하께서 하사하신 신분패이다.”
교지와 함께 받은 신분패를 부관이 들어 보이자 포졸들은 황급히 허리를 숙이며 옆으로 비켜섰다.
“드, 들어가시죠.”
“자네들 이름이 뭔가?”
이상규의 물음에 포졸들은 치도곤을 내리는 줄 알고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포도대장님이신 걸 모르고 죽을죄를 졌습니다.”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그러자 이상규는 너털웃음을 터트리고는 앞에 있는 포졸들을 보며 부드럽게 말했다.
“혼을 내려는 것이 아니라 임무를 잘 수행해 상을 내리려는 것이니 긴장하지 말고 말하라.”
“최국이라고 합니다.”
“전 오방민입니다.”
“최국과 오방민이라, 그 이름들 기억하도록 하지 앞으로도 지금처럼 누가 됐건 예외를 두지 말고 맡은 바 소임을 다하게.”
“옛.”
“가세.”
말에서 내린 이상규는 포졸들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주고는 정문을 지나 포도청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상규 일행의 뒷모습을 힐끗 쳐다보며 포졸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신임 포도대장이라니, 갑자기 이게 뭔 일이야?”
“나도 모르지.”
“이거 한바탕 소란이 일겠군.”
“신경 끄고 우리 할 일이나 하자고.”
“그래.”
꾀병을 부리고 있는 배용 대신 포도청을 관리하고 있던 종사관 손현석은 뜻밖의 소식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신임 포도대장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저도 어찌 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만 분명 주상 전하께서 하사한 신분패를 가지고 이었습니다.”
수하인 포교가 안절부절못하며 하는 말에 손현석은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새로 온 자가 누구라고?”
“총융사로 계시던 이상규 장군이십니다.”
“으음.”
만만치 않은 인물의 등장에 손현석은 절로 침음이 흘러나왔다.
“어쩌실 겁니까?”
“일단 가 봐야지. 지금 어디 있다고?”
“집무실에 계십니다.”
포도청 안쪽에 위치한 집무실로 가자 이미 이상규와 함께 온 군관들이 마치 자기 집 안방처럼 떡하니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손현석이 문을 열고 들어오자 의자에 앉아 서류를 뒤적거리고 있던 이상규는 고개를 들며 약간 퉁명스럽게 말했다.
“뭔가?”
“좌포청 종사관 손현석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딱딱한 반응에 손현석은 얼굴을 굳히며 이야기를 계속 이었다.
“새로 포도대장에 임명됐다고 하시던데 사실입니까?”
“맞아.”
“한데 저희는 아직 그런 연락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이상규는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책상 위에 내려놓고는 앞에 선 손현석을 잠시 빤히 쳐다봤다.
“포도청은 신임 포도대장이 오면 미리 하급자한테 일일이 보고를 해야 되는 모양이지?”
“그런 것이 아니라…….”
뭐라고 변명을 하려는 걸 한쪽 팔을 들어 막은 이상규는 아까보다 더 차가워진 어투로 말했다.
“여기 주상 전하께서 직접 하사하신 신분패가 있으니 의심이 가면 확인해 보게.”
“…….”
신분패를 책상 위에 툭 올려놨지만 손현석은 감히 그걸 살펴볼 생각을 못 했다.
“아닙니다.”
“그럼 포졸들을 모두 불러 모으게.”
“무슨 일로 그러십니까?”
“주상 전하께서 지시하신 일이 있는데 아직 처리가 안 됐더군. 그것부터 해결할 생각이네.”
그 일이 뭔지 대번에 알아차린 손현석은 내키지 않는 표정을 지었다.
“장군께 큰 부담이 되는 일입니다.”
상관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인지 포도대장이라는 호칭대신 장군이라고 부르자 이상규는 살짝 미간을 찡그렸다.
“알고 있네.”
슬쩍 겁을 줬지만 전혀 흔들리는 모습 없이 단호한 태도를 보이자 손현석은 내심 침음을 내뱉었다.
“어서 포졸들을 집합시키지 않고 뭐 하나?”
이상규의 재촉에 잠시 어찌할지 망설이던 손현석은 이내 정색을 하며 말했다.
“죄송하지만 명을 받들 수 없습니다.”
그는 가만히 상대를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항명인가?”
“스스로 제 명을 당기고 싶지 않을 뿐입니다.”
“나라의 녹을 먹는 관리가 주상 전하의 명을 어기고 자기 안위만 챙기다니, 너 같은 쓰레기는 관복을 입을 자격이 없다! 여봐라.”
“옛.”
“당장 저놈의 관복을 벗기고 항명죄로 하옥시켜라!”
뜻밖의 전개에 손현석은 크게 당황했다.
“아무리 상관이라고 하지만 마음대로 이러실 수는 없소이다.”
군관들에게 양쪽 팔이 붙들린 손현석이 거칠게 저항하면서 외치는 말에 이상규는 코웃음을 쳤다.
“흥. 너 같은 놈들이 있을 줄 알고 주상 전하께서 명을 따르지 않는 자를 임의로 파직할 수 있는 권한을 주셨다.”
“그, 그런…….”
“뭣들 하느냐? 어서 끌고 가라!”
“네.”
손현석이 끌려 나가자 이상규는 혼자 엉거주춤 서서 어쩔 줄 몰라 하는 포교에게 시선을 줬다.
“자네도 저자와 같은 생각인가?”
“아닙니다.”
자기도 벼슬이 떨어질까 봐 겁이 난 포교는 황급히 양손을 흔들었다.
“좋아. 그럼 나가서 포졸들을 모두 소집하게.”
“분부 받들겠습니다.”
얼른 군례를 올리며 대답한 포교는 죽다 살아난 얼굴로 허둥지둥 집무실을 나갔다.
잠시 뒤 좌우포청 소속 관헌 사백여 명은 잔뜩 긴장한 얼굴로 포도청을 나와 시위대가 점거 중인 대궐로 향했다.
종사관 손현석이 새로 온 포도대장한테 까불다가 파직당하고 옥에 갇혔다는 소문이 그새 쫙 퍼져서 그런지, 다들 평소와 달리 눈을 번뜩이며 어물거리지 않고 빠릿빠릿하게 움직였다.
하옥까지 한 건 조금 심했다는 이들도 있었지만, 신임 포도대장이 초반에 군기를 잡으려고 눈을 부릅뜨고 있는데 괜히 걸려들어서 좋을 것이 없다는 생각에 관헌들은 입을 꾹 다물고 시키는 대로 했다.
척척척.
벙거지를 쓰고 한 손에 육모 방망이를 든 포졸들이 우르르 나타나자 대궐 문 앞에 거적을 깔고 시위 중이던 유생들이 크게 술렁거렸다.
“아니, 저들은 포도청 관헌들 아냐?”
“그러게.”
“여긴 왜 나타난 거지?”
“설마 우릴 해산시키려는 건가?”
옆에 있는 사람과 수군거리며 유생들이 약간 불안한 시선을 보낼 때 말을 탄 이상규가 앞으로 나오며 큰 소리로 외쳤다.
“유생들은 즉시 시위를 해산하고 각자 자리로 돌아가 본업에 전념하라는 전하의 어명이시오!”
그러자 우두머리로 보이는 염소수염의 중년인이 유생들 사이에서 나와 고집을 부렸다.
“주상 전하께서 명을 거두시지 않으면 우리는 여기서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소!”
“옳소!”
“전하, 명을 거두어 주시옵소서.”
유생들이 어명이라고 하는데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더 목청을 키우면서 시끄럽게 하자 아랫입술을 꽉 깨문 이상규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뒤에 늘어서 있는 부하들을 돌아보며 명령을 내렸다.
“시위대를 해산시켜라! 필요하다면 무력을 써도 상관없다.”
“옛.”
이미 포도청을 나오기 전에 무슨 일을 해야 되는지 지시를 받았기에 포졸들은 약간 불안한 표정을 지으면서 곧장 행동을 개시했다.
“뭐, 뭐야!”
“이놈들 어서 썩 꺼지지 못하겠느냐!”
유생들이 삿대질을 하면서 호통을 쳤지만 포졸들은 행동을 멈추지 않았다.
“말로 할 때 어서 일어나시오.”
“놔라. 차라리 날 죽여라.”
“이 천한 것들이 어딜 잡는 거냐? 에잇.”
잠시 당황하던 유생들이 이내 주먹을 쓰며 거칠게 반항하자, 양반이라고 살살 대하던 포졸들도 육모 방망이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다 때려잡아.”
퍼퍽! 퍽!
우당탕!
“아이고. 이놈들이 사람 잡는다.”
순식간에 난장판으로 변한 대궐 앞은 양쪽이 서로 뒤엉켜서 때리고 맞으며 곳곳에서 비명과 고성이 터져 나왔다.
“큭.”
“잡아!”
처음에는 상대가 양반이라 소극적으로 몸싸움을 벌였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자 감정이 격해진 포졸들은 평소 하던 대로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제압했다.
그러자 분위기가 급격하게 한쪽으로 기울어지면서 맞붙어 싸움을 벌이던 젊은 유생들부터 하나씩 강제로 끌려 나오거나 오랏줄에 포박됐다.
숫자는 유생들이 훨씬 많다고 하지만 전문적으로 체포술을 배운 포졸들을 당해 낼 수는 없었다.
“당장 이거 풀지 못하겠느냐!”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목청만 틔웠나. 방망이로 두들겨 맞기 싫으면 입 닥쳐.”
“이이.”
치욕감에 얼굴을 잔뜩 구긴 채 막 뭐라고 따지려던 유생은 근처에 있던 양반 한 명이 포졸 두 명에게 둘러싸여 마구 몰매를 맞는 걸 보고 슬며시 입을 다물었다.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심기원의 사주를 받아 시위를 주도했던 수원 지역 양반 김기철은 창백한 표정을 지으며 슬금슬금 꽁무니를 뺐다.
“김 진사, 주상이 마음을 독하게 먹은 것 같은데 이걸 어쩌면 좋소?”
“그, 글쎄올시다.”
“이러다가 유생들이 육모방망이에 다 맞아 죽겠소.”
“일단 상황이 안 좋으니 모두 해산을 했다가 나중에 다시 기회를 보는 걸로 합시다.”
김기철의 말에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도현의 강경책에 깜짝 놀라 당황해하던 주모자들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좋겠소.”
“그럼 나중에 봅시다.”
이야기를 끝내기 무섭게 김기철은 함께 온 양반 두 명과 함께 허겁지겁 반대 방향으로 사라졌고 다른 주모자들도 얼른 도망쳤다.
가뜩이나 역부족인 상태에서 지휘부까지 사라지자 시위대는 빠르게 와해됐다.
이 와중에도 잡혀 가는 건 뭣도 모르고 옆에서 바람을 넣으며 부추기자, 우르르 몰려 올라와 시위를 벌인 유생과 양반뿐이고 주모자들은 거의 다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갔다.
그렇게 닷새간 계속되며 대궐을 시끄럽게 만든 양반들의 시위는 결국 강제 진압으로 막을 내렸다.
이날 붙잡혀서 포도청 옥사에 갇힌 양반들의 숫자만 무려 팔십여 명이 넘었다.
“전하, 칠현이옵니다.”
“들어오너라.”
서탁 위에 커다란 종이를 펼쳐 놓고 뭔가를 하고 있던 도현은 손에 든 세필을 벼루에 올려놓고 시선을 들었다.
“어떻게 됐어?”
“방금 신임 포도대장이 관원들을 데려와 시위대를 모두 강제 해산시켰사옵니다.”
“진작 그렇게 했어야지. 속이 다 시원해지는 것 같군.”
그러자 칠현이 약간 어두운 얼굴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번 일을 가지고 사대부는 물론이고 신하들도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 괜찮겠습니까?”
시키는 대로 하기는 했지만 괜히 일을 더 크게 키운 건 아닌지 걱정이 태산인 칠현과 달리 도현은 느긋한 얼굴이었다.
“뭐, 한동안 시끄럽게 떠들어 대겠지만 얼마 안 가서 조용해질 테니까 신경 쓰지 마.”
“무슨 복안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후후후. 글쎄.”
오랜 시간 그를 보필해 온 칠현은 묘한 미소로 말을 얼버무리는 모습에 도현이 상황을 반전시킬 뭔가를 가지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할 건지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지만 칠현의 얼굴에서 근심이 모두 사려졌다.
그만큼 임금인 도현의 능력을 인정하고 신뢰한다는 뜻이었다.
그러자 여유가 생긴 칠현은 서탁 위에 펼쳐진 종이를 보고 살짝 관심을 나타냈다.
“뭘 하시고 계신 겁니까?”
“혹시 신기전이라고 들어 봤어?”
“들어 본 적은 있는 것 같습니다.”
신기전은 세종 때 만들어진 화약 무기로 기록으로 남아 있는 세계 최초의 로켓 병기였는데 영국 사람인 콩그레브가 제작한 육 파운드 로켓보다 무려 사백 년 가까이 앞섰다.
종류도 다양해서 대신기전大神機箭, 산화신기전散火神機箭, 중신기전中神機箭, 소신기전小神機箭으로 나누어지고 각기 다른 효과를 가져 상황에 맞춰 사용하도록 되어 있었다.
“한 번에 폭약을 가득 채운 화살 수십 발을 날려 적진을 엉망으로 만들 수 있는 병기지. 이걸 더 파괴적으로 개량할 생각이야.”
“어떻게 말씀이십니까?”
칠현이 흥미를 보이자 도현은 손가락으로 설계도면 한곳을 가리키며 이야기를 했다.
“여기 있는 발화 통이 핵심이야. 기존 신기전은 그냥 화살 자체를 이용해 적을 공격하거나 공중에서 단순히 폭발시켜 적을 혼란에 빠뜨리는 용도였지만, 나는 여기에다가 작은 쇠구슬 수십 개를 채워 넣을 거야.”
“쇠구슬요?”
“그래.”
“그게 무슨 효과가 있습니까?”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지 칠현이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묻자 도현은 시제품으로 만들어 본 손톱만 한 크기의 쇠구슬을 직접 보여 주며 설명을 이어 갔다.
“이거 보이지.”
“예.”
“조총 탄환을 약간 손본 건데 이런 것이 수십 개가 한꺼번에 터져 하늘에서 쏟아진다면 밑에 있던 병사들이 어떻게 되겠어?”
“…….”
머릿속으로 도현이 말한 상황을 잠시 상상해 본 칠현은 이내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살상 범위 안에 있던 자는 살아남기 어렵겠군요.”
“아무리 두꺼운 갑옷을 입고 있다 해도 화약의 폭발력을 생각하면 최소한 중상을 면하기 어렵겠지. 이걸 달려오는 적 기병대에 쓴다면 천하의 팔기군도 두렵지 않아.”
기대하는 것만큼 효과를 발휘해 준다면 확실히 어마어마한 비밀 병기가 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칠현은 뭔가 걸리는 것이 있는지 그의 눈치를 살피면서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원하는 시점에 쇠구슬이 든 통을 터트리는 것이 어렵지 않을까요?”
아무리 위력이 좋다고 해도 폭발 시점을 마음대로 조절하지 못하다면 효용성이 크게 떨어질 수밖에 없었는데, 그를 따라다니며 군사적인 지식을 상당히 쌓은 칠현은 그걸 놓치지 않고 지적했다.
그러자 도현은 제법이라는 눈빛으로 칠현을 보며 말했다.
“좋은 지적이야. 그래서 여기 발화통과 연결된 심지를 따로 달았지.”
도현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부분을 보자 정말 긴 심지가 그려져 있었다.
“거리에 따라 이 심지 길이를 조절해서 폭발 시점을 맞추는 거야.”
“그렇군요.”
고개를 끄덕이며 칠현이 감탄한 표정을 짓자 도현은 신형 신기전 도면을 내려다보면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앞으로 북벌이라는 꿈을 이루는 데 이게 큰 역할을 할 거야.”
다음 날 아침 대전에 들어가자 칠현이 걱정한 대로 모여 있는 신하들의 분위기가 상당히 무거웠다.
“주상 전하 납시오.”
상선의 외침과 함께 안으로 들어간 도현은 그런 신하들을 힐끗 훑어보고는 자리로 가서 앉았다.
“모두 앉으시오.”
“예.”
도현의 말에 일어서 있던 신하들이 좌정하자 우측에 앉은 심기원이 기다렸다는 듯 바로 입을 열었다.
“신 우의정 심기원, 어제 대궐 앞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아뢸 말씀이 있사옵니다.”
딱 봐도 이번 일을 꼬투리 잡아 도현의 기세를 꺾어 놓으려고 단단히 벼르고 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사대부들이 조선의 권력을 다 쥐고 있는 걸 생각할 때 사실 무력을 써서 시위대를 강제 해산시켜 버린 건 상당히 무리한 행동이었다.
김자점 일당의 역모 사건으로 주도권을 빼앗긴 신하들이 반격의 빌미로 써먹기 딱 좋았다.
하지만 호락호락 당해 줄 생각이 전혀 없었던 도현은 심기원이 말을 꺼내기 전에 먼저 선수를 쳤다.
“아! 그 전에 한 가지 논의할 것이 있소.”
“…….”
말이 끊겨 살짝 짜증이 났지만 조금 이따가 다시 해도 크게 상관이 없었기에, 심기원은 한쪽 뺨을 실룩이면서 입을 닫았다.
“말씀하실 것이 무엇이옵니까?”
김류의 물음에 도현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준비해 온 걸 터트렸다.
“지난 역모 사건에서 드러났듯이 김자점과 조씨의 흉계에 억울하게 독살당한 형님의 명예를 되찾아 주고 더불어 그에 합당한 예우를 했으면 하는데 경들의 의견은 어떻소?”
잠시 대전 안은 침묵이 감돌았다.
죽은 소현세자 문제는 여러 가지로 현재 정권을 쥐고 있는 서인 세력에 아주 껄끄러운 일이었다.
일단 독살에 가담하고 역모까지 꾸민 김자점이 공서功西라고 불리는 서인 세력의 하나였고 관련자 모두 서인들이었다.
거기다가 영의정인 김류를 포함해 대신들 상당수가 승하한 인조의 뜻을 받아 소현세자를 깔아뭉개고 강빈을 대궐에서 내친 일에 앞장서거나 묵인한 죄가 있었다.
순간 모두 벙어리가 된 것처럼 입을 꾹 다물고 있을 때 좌의정 박황이 침묵을 깨고 이야기를 했다.
“억울하게 돌아가신 정황이 드러난 만큼 다시 명예를 회복시키는 것이 마땅할 줄로 아옵니다.”
“맞사옵니다.”
서인에 속하지 않는 몇몇 신하들이 박황의 말에 찬성을 하고 나서자 김류가 조금 다급한 어조로 말을 꺼냈다.
“이미 독살에 가담한 자들이 모두 사형을 받고 죽었으니 소현세자의 억울함은 풀어 드린 것이 아니겠사옵니까? 더 이상 이 문제를 거론하는 건 적절치 않다고 생각됩니다.”
“영상 대감, 그건 아니지요. 조씨와 김자점의 모략에 살아생전은 물론이고 돌아가신 후에도 소현세자께서 얼마나 큰 고초를 겪었습니까? 묘만 해도 일국의 세자였다고 말하기 부끄러울 정도로 초라하오이다.”
병조판서 임경업의 이야기에 김류와 함께 서인을 이끌어 가는 쌍두마차인 심기원이 바로 반박을 했다.
“어찌 됐건 부모보다 먼저 세상을 버린 불효를 저질렀으니 당연한 것 아니오.”
“흥. 독살을 벌인 자들이 같은 서인이라고 감싸 주는 겁니까?”
“뭐요!”
심기원이 발끈하자 서인들 때문에 공을 세우고도 온갖 질타를 들으며 벼슬을 내놔야 했던 아픈 기억이 있는 임경업도 지지 않고 맞섰다.
“내가 없는 소리를 했소이까!”
“이익.”
심기원이 현재 서인의 핵심이자 자신들과 같은 공서에 속한 인물이라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기에 심기원은 이를 부드득 갈았고, 김류를 포함한 다른 신하들도 얼굴 가득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관련자들의 형이 모두 집행되어 이제 다 마무리가 됐다고 하지만 아직은 역모 사건이 벌어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았기에, 김자점의 이름이 거론되면 서인들이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여기서 물러서면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가 크게 흔들릴 수 있었기에 서인들은 필사적으로 반대했다.
“그런 식으로 따지면 승하하신 선대왕의 명예가 실추될 수도 있는데 그건 어떻게 되건 상관없다는 거요!”
인조를 꺼내는 초강수에 임경업이 멈칫하자 이야기를 듣고 있던 좌의정 박황이 정색을 하며 나섰다.
“우상이야말로 쓸데없는 이야기로 선대왕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것 같소이다.”
“말 다 하셨소!”
“아직 많이 남았소이다.”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점점 감정이 격해진 양쪽은 급기야 삿대질과 고성을 내뱉으면서 주먹만 오가지 않을 뿐이지 격렬한 싸움을 벌였다.
처음 이 분란의 씨앗을 던진 도현은 느긋하게 왕좌에 앉아 그런 모습을 내려다보며 살며시 미소를 지었고, 한쪽에 시립해 있던 칠현은 이것이 바로 어제 말했던 감춰진 패라는 걸 깨닫고 작게 감탄성을 흘렸다.
결국 이날 조회는 엉망진창이 되어 버렸고 심기원과 서인들이 반전의 기회로 생각하던 강제 해산 건은 입 밖으로 내보지도 못한 채 소현세자라는 큰 회오리에 휩쓸려 그대로 흔적도 없이 묻혀 버렸다.
소현세자 문제는 단숨에 조정을 넘어 사대부 전체로 번져 큰 논쟁거리가 됐는데, 인조반정을 주도하며 정권을 장악한 서인과 그들로 인해 지난 수십 년간 중앙정계에서 소외됐던 다른 붕당 간의 싸움으로 빠르게 확대됐다.
이렇게 조정과 사대부들이 서로 물고 뜯으며 다투는 동안 도현은 병조판서 임경업과 함께 중앙군 개편 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먼저 인조반정에 참가한 공신이자 서인 출신이었지만 지난 반란 진압 과정에서 도현한테 충성 맹세를 하고 막판에 이상규와 함께 큰 공을 세운 구인후를 현재 공석인 경기병사로 보직 이동을 시켰다.
구인후 역시 반란 진압 과정에서 와해된 경기 병영을 재건하기 위해 훈련도감에 있던 휘하 군관들을 대거 데려갔다.
이걸로 통합 과정에서 근위대와 두 군영 사이에 벌어질 수 있는 군관들의 보직과 연공서열 문제를 간단히 해결한 도현은 남한산성에 병사들을 모아 놓고 대규모 체력 시험을 치렀다.
병사로 쓰기 곤란한 이들을 걸러 내기 위한 조치였는데, 사십 킬로그램이나 되는 쌀 한 가마니를 어깨에 짊어지고 앉았다 일어서기 열 번을 하는 것과 연병장 열 바퀴를 일각 안에 뛰기 그리고 각자 맡은 병종 기술이 얼마나 숙련되어 있는지 모두 세 가지를 평가했다.
기본적인 체력만 갖추면 큰 무리 없이 통과할 수 있는 수준이었고 합격 인원도 딱히 정해져 있지 않았다.
간단히 이야기해서 시험을 치르는 병사들이 모두 기준을 충족시키면 전원 다 근위대로 편입되는 것이다.
하지만 왕실과 조선의 안위를 지키는 최일선에 선 중앙군이 그동안 얼마나 썩어 있었는지를 보여 주듯 상당수 병사들이 시험에 떨어졌다.
“시작!”
시험관의 구령이 떨어지자 웃통을 벗고 선 병사 열 명이 기합을 내지르며 쌀가마니를 들어 올렸다.
“으차.”
“아압.”
몇몇 끙끙거리며 용을 쓰는 병사도 보였지만 일단 전부 쌀가마니를 어깨에 올리는 건 성공했다.
그러나 바로 이어진 동작에서 무더기로 불합격자가 속출했다.
“어이쿠.”
“어어어.”
우당탕.
앉았다가 못 일어서는 건 양반이었고 어떤 병사는 무게를 이기지 못해 뒤로 벌러덩 나자빠졌다.
그걸 본 시험관은 한심하다는 얼굴을 하며 버럭 고함을 질렀다.
“그따위 체력으로 어떻게 주상 전하와 도성을 지키겠다는 거야! 쌀가마 떨어뜨린 놈들은 전부 뒤로 빠져.”
“……예.”
야단을 들으며 주섬주섬 일어난 병사들은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한쪽에 불합격자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겨우 쌀가마 들어 올리기를 통과했다고 해도 달리기에서 또 한 무더기가 떨어져 나갔는데, 전원 녹봉을 받는 직업 군인으로 이루어진 총융청과 훈련도감이 이러니 다른 지방 병영의 상태가 어떤지 안 봐도 알 수 있었다.
따가운 햇볕을 가리기 위해 쳐 놓은 천막에 앉아 시험을 지켜보던 도현은 탈락자들이 속출하는 걸 보고 걱정스러운 어투로 말했다.
“이거 생각보다 병사들의 체력이 엉망이군.”
“송구하옵니다, 전하.”
아까부터 계속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던 임경업이 고개를 숙이자 도현도 더 질책하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
“박 군호.”
“예.”
“지난번에 보내 준 신병들은 쓸 만하던가?”
“내수사에서 관리하던 노비들이라 그런지 다들 체력도 좋고, 무엇보다 면천이라는 확실한 목표가 있으니 훈련에 아주 적극적입니다.”
상당한 호평에 인원수를 늘리기 위해 시험 삼아 노비들을 신병으로 보내 봤던 도현은 의외라는 얼굴을 했다.
“그래?”
“앞으로 몇 달만 더 잘 가르치면 모두 한몫을 단단히 해낼 겁니다.”
“그렇단 말이지.”
북벌을 달성하기 위해 턱없이 부족한 병력 자원을 어디서 충당해야 될지 고민이 많았던 도현은 박영식의 말에 어렴풋이나마 뭔가 해결책이 보이는 것 같아 턱을 매만지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사이 시험은 계속해서 진행됐고 이틀 동안 두 군영에 속한 병사 삼천팔백 명 중에 절반이 조금 넘는 이천 명이 기준을 통과해 근위대로 편입됐다.
그러자 불합격된 나머지 천팔백여 명의 병사들은 저마다 자리에 모여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어쩐담? 이 나이에 일거리를 어디 가서 찾는단 말인가?”
“물려받은 땅이라도 있으면 밭이라도 갈겠네만…….”
“처자식한테 뭐라고 해야 할지 막막하군.”
“휴우.”
말을 하면 할수록 튀어나오는 것은 답 없는 신세한탄뿐이라, 막사 안 분위기는 점점 침울해져 갔다.
젊은 것들은 기운이 팔팔해서 대부분 체력 검사에 합격했지만 남은 천팔백 명은 대부분 서른을 훌쩍 넘긴 중년들이라 한 집안의 가장이거나 부모님을 모시고 사는 처지였다.
홀몸이 아니다 보니 어떻게든 딸린 가족들을 먹여 살릴 방법을 찾아야 하는데, 막상 어떻게 해야 할지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도통 뾰족한 수가 없었다.
아낙네라면 삯바느질이라도 얻어서 일을 하겠지만, 사내들은 내세울 수 있는 게 몸뚱이 하나밖에 경우가 태반이기에, 할 수 있는 거라곤 산에 올라가 나무라도 해서 팔거나 양반집에 가서 잡일을 해 주고 품삯을 받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해 봐야 손에 쥐게 되는 건 겨우 한 계절도 제대로 나기 힘든 푼돈뿐이다.
병사로서 매달 지급받는 안정적인 수입에 여태껏 의지해 왔던 자들로선 이처럼 순식간에 닥쳐온 고난이 깨지 않는 악몽처럼 느껴졌다.
“이보게들, 군관 어른께서 공터에 모이라고 하시니 얼른 자리 털고 일어나게나.”
동료들 중 한 명이 불쑥 얼굴을 내밀고 하는 소리에 사람들은 무슨 일이냐는 듯 웅성거렸다.
“뭐 때문에 그러나?”
“내가 군관님 속을 어찌 알겠나? 어쨌든 중요한 이야기가 있는 것 같으니 우물쭈물하지 말고 모이시게.”
사내는 그렇게만 말하고 자리를 횅하니 떴다.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펴보니 방금 전 사내 말고도 몇몇이 돌아다니며 똑같은 말을 전하고 있는 걸로 보아, 아무래도 한 군데 모이라는 명령은 진짜 같았다.
“끈 떨어진 연 신세가 된 것도 서러운데 귀찮게 왜 오라 가라야.”
“어쩔 수 없군.”
“그래, 여기 있어 봐야 어쩌겠나.”
하나 둘씩 자리에서 일어서자 나머지 사람들도 눈치를 살피더니 느릿한 동작으로 몸을 일으켰다.
이윽고 넓은 공터에 불합격된 사람들이 모이자, 옆구리에 칼을 찬 군관이 앞으로 나서서 좌우로 쓱 훑어보았다.
“조용! 다들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를 잘 들어라.”
그 말에 서로 수군거리던 병사들이 제각기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자, 꽉 찬 공터에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군제가 개편되면서 며칠 내로 우리 총융청과 훈련도감이 없어지게 되는 것을 다들 알고 있을 것이다.”
낮은 군관의 목소리에 병사들은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때문에 굳이 체력 시험까지 치러 젊은 병사들을 따로 추려 낸 것이 아니던가.
“체력 시험에 통과한 자들은 곧 근위대로 재배치된다. 하지만 여기 남은 나머지 불합격자들은…….”
군관이 잠시 말을 끊고 모여 있는 병사들을 둘러보았다.
병사들은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이제 정식으로 군적에서 지워지는 것인가, 하며 각자 눈을 질끈 감고 군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명단을 작성한 후, 포도청으로 보내질 것이다. 그곳의 포졸로서 마을 치안과 백성들의 민생을 위해 힘쓰게 될 것이야.”
“……!”
예상했던 것과는 전혀 딴판인 군관의 말에 병사들은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그, 그럼 저희는 계속 나라에서 주는 봉록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까?”
“그렇다. 물론 지금까지 받던 것과 비교하면 좀 줄어들겠지만 그 정도는 감수해야겠지.”
“아, 아무렴요!”
“아이고. 고맙습니다, 나으리!”
맨 처음 손을 들고 물었던 병사가 넙죽 엎드려 절을 하자 그에 자극받은 나머지 병사들도 하나같이 입을 모아 기뻐하며 허리를 꾸벅꾸벅 숙여 인사했다.
“어허! 내가 아니라 대궐에 계시는 전하께 감사해하라. 갑자기 일거리가 없어지면 생활이 궁핍해질 것을 가엾게 여기신 전하께서 친히 명하신 것이니.”
“그, 그렇습니까?”
군관의 호령에 처음엔 얼떨떨해하던 병사들은 이윽고 손을 하늘로 쳐들고 외쳤다.
“감사합니다, 전하!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망극하옵니다!”
“우와아아!”
대궐이 있는 쪽을 향하여 절을 하며 환호하는 병사들을 보고 군관 역시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그 역시 한순간에 천팔백 명이나 되는 병사들을 아무것도 없이 거리로 내모는 것은 마뜩지 않았던 바, 새로 등극한 국왕의 현명한 처사에 내심 매우 만족하며 새삼 감탄하였다.
사실 불필요한 지출을 감수하면서도 도현이 이런 결정을 내린 건 다 이유가 있었다.
불합격자들을 이대로 내보내면 일자리를 빼앗았다고 도현에 불만을 가질 수 있고 혹시나 체계적인 군사교육을 받은 이들이 불온 세력에 흡수될 위험도 있었기에, 차라리 돈을 조금 쓰더라도 옆에 끼고 관리를 하는 것이 이익이었다.
더불어 포도청 인원이 늘어나는 만큼 도성과 경기도 일대의 치안을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으니, 앞으로 도현이 개혁을 추진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물론 호조를 맡고 있는 이명이 불필요한 인력이라며 반대했지만, 그는 김자점 일파가 숨겨 놓은 재산 중에 삼십만 냥을 꺼내 넘겨주면서 깔끔하게 무마시켰다.
그렇게 최종적으로 근위대는 기병 육백 명, 총병 이천오백 명, 포병 오백 명으로 총 삼천육백 명의 전력을 갖추게 됐다.
전체적인 숫자는 예전보다 줄었지만 내실을 다져 실제적인 전투력은 훨씬 높아졌고 앞으로 꾸준히 병력을 늘려 갈 계획이었다.
중앙군 개편과 함께 도현은 남한산성을 대대적으로 보수하는 한편, 화기도감을 옮겨 근위대와 용호영이 쓸 무기를 생산하도록 했다.
이전을 하며 화기도감의 인원과 규모를 두 배 넘게 대폭 늘린 도현은 자신이 구상한 개량 신기전을 개발하고 동시에 웅도에서 장인을 데려와 기술을 전수해 신형 조총을 대량생산할 수 있는 체계를 갖췄다.
중요한 무기를 개발하고 만들어 내는 만큼 보안이 중요했기에, 그는 화기도감에 소속된 장인들의 가족을 모두 남한산성으로 이주시켰다.
이런 일들을 하는데 상당한 재원이 들어갔지만 장 총관이 찾아낸 김자점 일파의 숨겨진 재산으로 모두 충당할 수 있었다.
한편 도현은 자신을 최측근에서 지키는 용호영도 손을 봤는데 기존에 내금위內禁衛, 겸사복兼司僕, 우림위羽林衛로 나누어져 있던 걸 하나로 통합시켜, 그가 내린 지시가 바로 말단 위사한테까지 신속하게 하달될 수 있게 지휘 체계를 일원화했다.
호칭도 위사로 통일시키고 인원은 총 팔백 명으로 늘렸다.
병종도 기병과 총병 두 개로 나누었는데 일부에서 조총병은 근접전에 약하다며 반대가 있었지만, 날카로운 총검을 꽂아 조총을 마치 창처럼 쓰는 걸 보여 주고 간단히 우려를 불식시켰다.
이름도 친위대로 바꾸고 수장을 친위대장이라고 하며 정이품에 해당하는 품계를 부여했다.
바뀐 편제에 따라 친위대 위사들은 생각지도 못했던 조총 사격술을 배워야 했는데, 처음에는 많이 어색하고 귀청을 찢는 커다란 총성에 화들짝 놀라 조총을 떨어뜨리기도 했지만 정예병들답게 금방 익숙해졌다.
그리고 도현은 웅도 병기창에서 생산된 웅오식 권총을 박영식을 비롯한 측근 수하들에게 나눠 줬다.
“이건 권총이 아니옵니까?”
호출을 받고 대조전에 들어온 친위대장 신철과 김덕술, 박태철은 도현이 꺼내 놓은 물건을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맞아. 자네들한테 주는 선물이야.”
“이걸 저희한테 주신다고 하셨습니까?”
“그래.”
셋 다 무인인 만큼 새로운 병기에 대해 관심이 많았는데, 특히 지난번에 시제품을 가지고 시험 사격을 하는 현장에 있었기에 놀라움은 더 컸다.
“이 귀한 걸 어찌…….”
“경들이 날 위해 애써 준 걸 생각하면 이보다 더한 걸 줄 수도 있네.”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도현이 하는 말에 세 사람은 감격한 얼굴로 머리를 숙였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이번에 그가 측근들한테 나눠 준 웅오식은 앞으로 대량생산될 제품과 약간 달랐는데, 손잡이 부분에 조선 왕실의 상징인 이화李花(오얏꽃) 문양이 금으로 작게 새겨져 있어 하사품이라는 걸 표시했다.
이렇게 특별한 하사품을 나눠 주면서 도현은 측근들의 충성심과 결속력을 높였다.
아직 마음에 다 차지는 않았지만 중앙군 통합과 친위대 개편을 통해 도현은 개혁을 본격적으로 추진해 나갈 기본 바탕을 마련했다.
<7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