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밀수 1 (36/104)

밀수 1

며칠 뒤 열린 조회에서 도현은 금난전권 폐지를 전격 발표했다.

갑작스러운 조치에 신료들은 약간 당황스러워했지만 그동안 금난전권의 여러 폐단에 대해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기에 금방 수긍을 했다.

하지만 세수 감소와 시전상인들의 반발을 우려하며 신료들은 완전 폐지보다는 점진적인 축소를 건의했다.

그러자 도현은 이미 시전상인들이 수용하기로 했고 난전이 활성화되면 오히려 지금보다 세수가 더 늘어날 거라는 말로 걱정을 일축하고 의견을 밀어붙였다.

두 번의 역모 사건을 거치면서 도현의 위상이 엄청 높아진 데다 가장 큰 걸림돌인 시전상인들과도 협의가 됐다고 하니, 신료들도 더 이상 반대를 하지 않았다.

그렇게 숙종 이후 시전상인들에게 부여되어 상업 발달을 저해하던 금난전권 폐지가 결정됐다.

“아이고! 늦었다, 늦었어.”

머리 위에 큼지막한 소쿠리를 올린 중년 부인이 종종걸음을 치면서 시장을 가로질렀다.

한 손은 소쿠리를 지탱하고, 다른 한 손은 아이의 손을 잡아끌면서 바쁘게 움직이는 중년 부인의 얼굴엔 낭패한 기색이 가득했다.

“얼른 가서 자리를 잡아야 하는데.”

지금 손을 잡고 있는 아이는 막내고 이 아이 외에도 위로 두 명이 더 있는데, 볼거리를 심하게 앓는 바람에 사흘 내내 병간호에 매달린 후, 겨우 진정되어 잠을 재우고 집을 나선 참이었다.

새벽에 일찍 나와도 목 좋은 자리를 잡기가 힘든데, 평소보다 두 시간은 늦었으니 마음이 다급해지는 게 당연했다.

“거기 서 씨 아주머니 아니오?”

갑자기 옆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돌아보니 낯익은 행상인이 어슬렁거리며 다가왔다.

“아휴, 깜짝 놀랐네.”

“허허. 매일 첫닭이 울기도 전에 퍼뜩 일어나서 자리 잡으러 오던 아주머니가 웬일로 오늘은 지각인가 그래?”

“말도 말아요. 우리 집 첫애가 며칠 동안 아프다 난리를 쳐서 겨우 재우고 오는 길이랍니다.”

“그거 고생했겠군.”

평소처럼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으려던 중년 부인은 갑자기 이럴 때가 아니라는 듯 허둥거렸다.

“내 정신 좀 보게. 얼른 가야 하는데!”

“어딜?”

“그거야 당연히 장사하러 가야죠. 적어도 이 소쿠리에 담긴 것 중 반 이상은 팔아치우지 않으면 당장 낼모레 시아버님 제사상에 올릴 음식도 못 살 판인데…….”

그렇게 말하던 중년 부인은 문득 여유 있는 표정의 행상인을 보고 도끼눈을 치켜세웠다.

“근데 댁은 왜 이리 한가해요? 팔자 좋으신가 봐.”

“좋기는 개뿔. 저쪽에 있는 주막 주모가 내 얼굴만 보면 외상값 내놓으라며 닦달을 해 대니 어쩔 수 없이 쌈짓돈을 탈탈 털어 갚고 오는 길이오.”

“호호. 그러게 남의 돈 떼먹고는 오래 못 산다니까.”

그거 보라는 듯 깔깔 웃으며 혼잡한 시장 거리의 행인들 사이를 요령 좋게 빠져나온 중년 부인은 상인들이 노점상을 벌이고 있는 길가 한구석에 평소 자신이 지정석처럼 사용하던 자리가 비어 있는 것을 보고 반색을 했다.

“서 씨 아주머니, 여기요.”

옹기와 놋쇠그릇을 늘어놓고 팔던 나이 지긋한 사내가 중년 부인을 보고 손짓했다.

“아이고. 용케 자리가 비어 있었네?”

“안 그래도 계속 사람들이 물어봅디다. 그래서 내 이 자리는 이미 임자가 있으니 딴 데 알아보라고 했지.”

“아유! 고마워라!”

활짝 웃는 중년 부인의 모습에 염소수염을 한 옹기 상인은 곰방대를 탁탁 털며 별것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고마움의 표시로, 여기 떡 하나 드세요.”

“잘 먹겠소.”

“나는 뭐 없나?”

행상인이 불쑥 끼어들어서 자기도 하나 달라는 듯 입을 앙 벌리자 중년 부인은 얄밉다는 표정으로 입안에 쑥떡을 쑥 밀어 넣었다.

“으음. 바로 이 맛이야!”

“아주머니가 물건 팔러 나올 때마다 이렇게 떡을 나눠 주니 뭐 남는 게 있소?”

“그래 봤자 산에서 캐 온 쑥만 있으면 되는 걸요, 뭐. 게다가 평소에 친절을 뿌려 두면 오늘처럼 옆자리에 앉은 누구 씨가 자리도 봐주고 그러는 거 아니겠어요?”

“하하하! 역시 말솜씨론 못 당하겠구먼. 안 그러오, 옹기 파는 양반?”

등에 커다란 봇짐을 멘 행상인은 옹기 상인의 어깨를 탁탁 두드려 대며 웃었다.

그사이에 중년 부인은 서둘러 바닥에 두툼한 천을 깔고, 소쿠리에 담아 온 노리개며 꽃모양의 자수가 그려진 댕기 등을 차곡차곡 펼쳐 놓았다.

바느질에는 자신이 있는지라, 평소 양반 집에서 얻어 오는 삯바느질 일감 말고도 틈틈이 자수를 놓아 이렇게 사람들에게 내다 파는 것이 쏠쏠한 수입원이 되었다.

“오늘은 좀 많이 팔려야 할 텐데…….”

그렇게 말하며 중년 부인과 옹기 상인 그리고 어느새 그 옆에 자리를 잡고 눌러앉아 버린 행상인까지 모두 주르륵 한 줄로 앉아선 손님들이 오기를 기다렸다.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한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손짓과 소리를 곁들여서 호객행위를 한 덕분인지 점심때가 지났을 무렵에는 꽤 많은 수가 팔려 나갔다.

“이 정도면 오늘 안으로 다 팔려 버리는 것 아니오?”

“아유, 괜히 띄우지 말아요. 설레발치다가 나중에 실망할라.”

그러면서도 중년 부인의 얼굴엔 싱글벙글 미소가 지어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저 멀리서 사람들을 헤치며 마치 포졸처럼 어깨에 힘을 딱 주고 거리 한복판을 걷는 한 무리의 사내들을 보자마자 중년 부인의 얼굴이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졌다.

“왜 그러나?”

“에구머니, 이걸 어째? 이봐요, 댁도 가만히 있지 말고 얼른 짐 싸서 일어나요!”

중년 부인은 앞에 늘어놓았던 물건들을 단번에 싹 쓸어서 소쿠리에 집어넣은 후, 옆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던 아이가 채 깨기도 전에 퍼뜩 들쳐 업고 일어서려 했다.

“아니 왜 그러냐니까?”

“저기! 시전상인 밑에서 주먹 노릇 하는 패거리들이 돌아다니고 있잖아요. 괜히 눈에 띄면 무슨 흉한 꼴을 당할지 모르는데 왜 이리 다들 여유만만인지 오히려 내가 궁금하네, 정말!”

시전상인들은 나라에서 부여해 준 권한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들 이외엔 아무도 도성 안에서 좌판을 열 수가 없으며, 만약 불법적으로 그런 행위를 하는 것을 목격했을 시엔 자유롭게 처벌할 수도 있었다.

물론 몇 안 되는 숫자로 넓은 도성 안을 한꺼번에 감시할 수는 없기 때문에 몰래몰래 좌판을 펼치는 상인들이 도처에 허다했다.

그러다 운 나쁘게 걸리면 강제 철거에 지니고 있던 물건을 다 뺏기는 건 물론 심한 경우엔 본보기로 곤장을 맞을 수도 있어서 눈에 띄기 전에 재빨리 내빼고, 지나가면 또 슬쩍 벌리는 것이 평소 풍경이었다.

“허허, 이 아주머니 보게.”

“애 뒷바라지하느라 며칠 동안 장터에 안 나오더니 아주 까막눈이 되었군.”

깐죽거리는 보따리장수는 물론 비교적 점잖은 옹기 상인까지 한통속이 되어 놀리는 소리를 하자, 중년 부인은 뭐가 뭔지 몰라 눈만 깜박거렸다.

“왜, 왜요?”

“도성 안에서 아무나 자유롭게 장사를 해도 된다고 나라님이 말씀하신 게 언제 적 일인데 그래.”

“뭐라고요?”

“덕분에 그동안 거들먹거리던 시전상인들도 이젠 우리들한테 아무런 해코지도 못 하게 됐다 그 말이오.”

“임금께서 이제야 우리들 같은 작은 상인들의 고충을 헤아려 주신 게지.”

주거니 받거니 하며 고개까지 끄덕거리는 두 사람의 말에 중년 부인은 화색을 하며 반겼다.

“어머나! 세상에! 그게 정말이에요?”

“아무렴.”

“못 믿겠으면 아무 포졸이나 붙잡고 물어보게. 관아 옆에 방이 붙은 자리를 가르쳐 줄 테니.”

처음 방이 붙었을 때 대부분이 까막눈인 평민들을 위해 관아 사람이 나와서 크게 한 자 한 자 읽어 줬다며 두 사람이 말했다.

“지난번 임금님 때는 그냥 먹고살기만 하는 것도 빠듯했는데, 왠지 이번 나라님은 다른 것 같단 말이야.”

“요즘 사람들 얘기를 들어 보니 성군이라는 소리도 간혹 나오던 걸.”

“암, 성군이시지. 얼마 전에는 반군도 손쉽게 진압하셨다 하던데 진짜 뛰어나신 분이라니까.”

두 사람 얘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중년 부인은 손을 내저으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아유, 난 그런 어려운 얘기는 잘 모르겠고, 그냥 배부르고 등 따시면 만족해요.”

너스레를 떤 부인은 대궐이 있음직한 방향을 향해 절하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앞으로도 자~알 부탁드립니다.”

모든 것이 다 순조롭게 진행되던 어느 날 병조판서 임경업이 무기 개발을 책임지고 있는 병기장 박호와 함께 도현을 찾아왔다.

이때쯤 웅도에 있던 병기창은 새로 근위대 주둔지가 된 남한산성으로 모두 이전한 상태였다.

인원도 팔도 각지에서 데려온 솜씨 좋은 장인들로 육백 명이나 모아 놓고 중앙군이 쓸 각종 무기와 화약을 제조했다.

“어서들 오게. 두 사람이 함께 짐을 찾아오다니 무슨 일이라도 있나?”

입가에 미소를 띤 도현이 반갑게 맞이하자 예를 갖추고 자리에 앉은 병조판서 임경업은 약간 굳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했다.

“전하께 급히 아뢸 이야기가 있사옵니다.”

“뭔가?”

도현의 물음에 임경업은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아무래도 당분간 근위대 총병의 사격 훈련을 중단해야 될 것 같사옵니다.”

“청나라 팔기군에 대적할 수 있는 강군을 키우기 위해 매일 훈련에 매진해도 부족할 판에 그게 무슨 소린가!”

“저도 안타깝지만 소모되는 화약이 너무 많아서 감당이 안 될 지경이옵니다. 이 상태로 가다가는 얼마 못 가 재고가 다 떨어져 정작 필요할 때 총병을 쓸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사옵니다.”

그러자 도현은 이해가 안 간다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재고가 부족하다니 얼마 전에 화약 생산 시설을 두 배로 확충한 걸로 아는데, 짐이 잘못 알고 있는 건가?”

“전하께서 알고 계신 것이 맞사옵니다.”

“그럼 아무리 총병 숫자가 늘어났다고 해도 생산량 또한 올라갔으니 문제가 없는 것 아닌가?”

“그 부분은 저보다 실무 책임자인 병기장이 아뢰는 것이 이해하기 쉬우실 겁니다.”

도현이 시선을 주자 병기장 박호는 면목이 없다는 듯이 고개를 살짝 숙이며 어찌 된 일인지 상황을 설명했다.

“생산 시설은 늘어났지만 그만큼 원료 수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서 송구스럽게도 상당수 일꾼을 그냥 놀리고 있는 실정입니다.”

“원료가 부족하다니 짐이 직접 병기창에 쓰이는 것은 최우선적으로 구해 주라고 봉황상단에 지시를 내렸는데, 그게 안 지켜졌다는 건가!”

미간을 찌푸린 도현이 화가 난 듯 언성을 높이자 박호는 황급히 양손을 내저었다.

“그런 것이 아니오라 구해 주고 싶어도 물건이 없어서 그렇사옵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조총을 쓰는 데 필요한 화약을 만들려면 유회(버드나무 숯)와 염초, 유황이 필요한데 이 중에 유회를 제외한 두 가지 중요한 원료가 모두 조선에서는 구하기 어려운 것이옵니다. 그래도 염초는 대륙에서 쉽게 가져올 수 있지만 유황은 왜국을 통해야 되는데 이게 쉽지 않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왜 그렇지?”

“수년 전에 일본 막부가 타국에 무기류를 판매하지 못하도록 조치를 내려, 유황을 필요한 만큼 구하기가 어렵습니다. 지금까지는 몰래 흘러나온 것들을 봉황상단에서 구매해 가져왔지만, 운영하는 총병 숫자가 늘면서 화약 소모량도 커지는 바람에 이제 그것으로는 수요를 다 충당하기 어려운 지경이옵니다.”

“으음.”

전혀 예상하지도 못했던 난관에 부딪친 도현은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리고는 낮게 침음성을 흘렸다.

북벌이라는 원대한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지금보다 더 강하고 많은 군대가 필요했고 특히나 총병은 기병으로 이루어진 팔기군을 상대할 핵심 전력이었다.

이런 중요한 병종인데 화약이 없다면 그저 값비싼 쇠뭉치를 가진 무리로 전락하는 거였다.

그렇다고 사격 훈련을 줄일 수도 없었는데 아무리 활보다 익히기 쉽다고 해도 꾸준히 쏘는 연습을 해 두지 않으면 실전에서 빗나가는 경우가 많아 전투력이 현저히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걸 막기 위해서는 훈련이 필수적이었고 그에 따라 화약 소모량이 늘어나는 건 불가피한 일이었다.

“유황 비율을 조절해 적게 넣는 건 어때?”

도현의 물음에 박호는 바로 고개를 내저으며 반대 의사를 표시했다.

“그건 절대 안 됩니다. 혼합 비율을 바꾼다면 폭발력이 떨어질 뿐만 아니라 화약이 완전히 타지 않아 총구에 찌꺼기가 지금보다 더 많이 남게 돼 총기 관리가 어려워지고 실전에서 연사가 힘들어질 겁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런다고 해서 유황 부족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는 건 아니옵니다.”

듣고 보니 득보다 실이 더 많은 방법이기에 도현은 생각을 접었다.

“현재 화약 재고가 얼마나 남아 있나?”

“이번 반란 토벌 때 사용량이 급증하는 바람에 육백 근 정도만이 병기고 창고에 있을 뿐입니다.”

상당히 많은 양이었지만 병력이 확충되면서 총병 숫자가 만 명 이상으로 늘어난 상황에서 그 정도면 단 한차례 격렬한 전투를 치르면 모두 소모되는 정도였다.

거기다가 총병 못지않게 많은 화약을 소모하는 포병까지 있으니 이걸로는 턱도 없었는데, 도현이 계획한 대로 군을 운용하려면 최소 삼천 근 이상을 재고로 항시 보유하고 있어야 됐다.

“화약을 원활하게 생산하기 위해 필요한 유황 양이 얼마지?”

박호는 지체 없이 질문에 대답했다.

“앞으로 늘어날 수요까지 고려한다면 매달 칠백 근 이상은 있어야 되옵니다.”

“칠백 근이라…….”

한 손으로 턱수염을 쓸어내리면서 잠시 고심하던 도현은 앞에 앉아 있는 두 사람을 보고 살짝 팔을 내저었다.

“알았으니 그만 나가 보게.”

“그럼.”

두 사람은 도현의 말에 예를 갖춰 인사하고는 조심스럽게 뒷걸음질을 쳐 밖으로 물러났다.

“칠현아.”

“말씀하십시오, 전하.”

“봉황상단에 연락해서 장 총관을 불러들여.”

“예.”

허리를 숙이면서 대답한 칠현이 나가자 방에 홀로 남은 도현은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꾹 누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끄으응. 산 너머 산이라더니 어찌 된 것이 하루도 편히 쉬는 날이 없군.”

도현이 머리를 싸매고 한참 해결책을 고민하고 있을 때 전갈을 받고 허겁지겁 달려온 장 총관이 도착했다.

“찾으셨사옵니까, 전하.”

“바쁜데 내가 부른 건 아닌지 모르겠군.”

“아니옵니다.”

“자네를 부른 건 다름이 아니라 유황 수급 문제 때문일세.”

그렇지 않아도 이 문제로 골머리를 섞이고 있던 장 총관은 살짝 표정을 굳히며 말했다.

“박 병기장이 다녀간 모양이군요.”

“당장 총병들의 훈련을 중단해야 될 판이라고 하니 얼마나 놀랐는지 아는가?”

“송구하옵니다.”

“아닐세. 미처 이런 부분을 신경 쓰지 못한 짐의 잘못도 크네. 이미 벌어진 건 어쩔 수 없고 빨리 해결책을 마련해야 될 텐데 뭐 생각해 둔 것이라도 있나?”

“급한 대로 부산 왜관에 사람을 보내 최대한 유황을 확보하도록 했사옵니다.”

“그걸로 필요한 수량을 다 채울 수 있겠나?”

“만족할 만큼은 안 되겠지만 그래도 밀수로 왜국에서 흘러나온 유황이 가장 손쉽고 빠르게 구할 수 있는 것이라…….”

스스로도 미봉책이라는 걸 아는지 장 총관은 말끝을 흐렸다.

“후우. 언 발에 오줌 누기도 아니고.”

눈썹을 찡그린 채 잠시 고심하던 도현은 이내 뭔가를 결심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겠어.”

장 총관이 의아한 눈길을 보내는 가운데 도현은 한쪽에 시립해 있는 칠현에게 시선을 주며 말했다.

“가서 이완 단장을 불러와.”

“네.”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두고 보면 알아.”

도현이 자신만만하게 단언하는 걸 본 장 총관은 어쩐지 또 큰 사고를 칠 것 같은 느낌에 불안해졌다.

마침 대궐에 들어와 있었던 이완은 금방 희정당으로 달려왔다.

“이리 와서 앉게.”

“감사하옵니다, 전하.”

반란 이후 실체가 외부에 드러난 주작단은 정식으로 국왕 직속 정보기관이 됐는데 수장인 이완은 정삼품 벼슬을 제수되었다.

품계는 정삼품이었지만 상황에 따라 그보다 훨씬 높은 영의정이나 병조판서도 감찰할 수 있는 막강한 자리였다.

잠시 앞에 앉은 이완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도현은 묵직한 어투로 입을 열었다.

“자네가 해 줘야 될 일이 하나 생겼네.”

“뭐든지 하교만 내리십시오.”

살짝 고개를 숙이면서 하는 말에 도현은 든든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이야기를 이었다.

“장 총관과 함께 유항을 구해 와야 되겠어.”

“유황이라고 하셨습니까?”

“그래. 화약을 제작하는 데 꼭 필요한 물질인데 제일 많이 생산되는 왜가 교역을 금지하고 있어서 수급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군. 군사력 증강을 위해서는 어떻게 해서든 유황을 대량으로 확보해야 되니 주작단과 봉황상단이 협력해서 몰래 밀수해 오도록 해.”

“……!”

밀수라는 말에 이완은 물론이고 함께 있던 장 총관도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치켜뜨며 그를 쳐다봤다.

아무리 유황이 필요하기로서니 국왕이 직접 밀수를 해 오라는 지시를 내릴 거라고 전혀 생각도 못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만약 왜국 막부에 발각되기라도 한다면 외교적으로 큰 마찰이 생길 수도 있사옵니다.”

이완의 우려에 장 총관도 얼른 동의했다.

“이완 단장님의 말씀이 맞사옵니다. 차라리 시간이 조금 걸리더라도 왜국 막부에 사신을 보내 정식으로 유황을 가져오는 방법을 강구해 보는 것이 어떻겠사옵니까?”

그러자 도현은 손바닥으로 보료 팔걸이를 세게 내려쳤다.

탕!

“당장 화약이 없어 총병들이 조총 대신 창을 들고 싸워야 될 판국인데 한가하게 사신을 보낼 시간이 어디 있나! 그리고 관계가 많이 회복됐다고 하지만 간악한 왜국 놈들이 군사력 증강에 쓰일 것이 뻔한 유황 판매를 허용할 것 같나? 아마 어림도 없을 걸세. 만에 하나 이야기가 잘돼 교역을 한다고 해도 우리가 원하는 수량만큼 가져오기 힘들 테고 무엇보다 비밀로 다뤄져야 될 화약 보유량이 고스란히 놈들한테 다 알려질 것이 아닌가.”

잠시 말을 끊고 아차 하는 표정을 짓고 있는 두 사람을 쓸어본 도현은 이내 다시 이야기를 이었다.

“더군다나 유황 구입이 공공연하게 알려진다면 우리의 군사력 증강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청나라가 가만히 있지 않을 걸세.”

마지막 이야기에 두 사람은 심각한 얼굴로 낮게 침음성을 내뱉었다.

“으음.”

실제로 청국은 국왕의 무릎을 꿇리는 치욕을 주며 항복을 받기는 했지만 마음속으로 굴복하지 않고 비수를 갈면서 적국인 명나라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어 등 뒤에 있는 창과 같은 조선을 항상 경계했다.

이런 청국의 속마음을 고스란히 보여 주는 사건이 하나 있었는데 도현이 귀국하기 전 사신으로 왔던 청나라 관리가 조정에서 병자호란 때 부서진 남한산성 성벽을 보수한 걸 보고 전쟁 준비를 하는 것이 아니냐면서 크게 화를 내며 항의하는 바람에 애써 공사한 것을 다시 부숴야 했다.

당시 청과 명이 만리장성을 사이에 두고 한참 격렬한 전쟁을 벌이고 있었던 때라는 걸 감안해도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는데, 그만큼 청나라가 조선을 견제하고 두려워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지금은 상황이 조금 달라졌다고 해도 성벽을 보수했다고 그 난리를 쳤는데 화약 원료인 유황을 대규모로 사들이고 병력까지 증강했다는 걸 알면 청나라가 어떻게 나올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유황을 자체적으로 충당할 방법을 찾아야 되겠지만 지금은 이것이 최선이야.”

“저희 생각이 짧았사옵니다.”

“이번 일은 경들과 나만 아는 걸로 하고 최대한 은밀하고 서둘러 진행시키도록 하게.”

“옛.”

중책을 맡게 된 이완과 장 총관은 결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며칠 뒤 주작단과 봉황상단에서 차출된 정예들이 유황을 구해 오라는 임무를 받고 급히 부산포로 내려갔다.

소지한 마패를 써 역참에서 말을 갈아타며 쉬지 않고 달린 사내들은 도성을 떠난 지 딱 이틀 만에 목적지인 부산포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저깁니다.”

몸에 묻은 흙먼지를 털어 낼 틈도 없이 곧장 사내들이 향한 곳은 부산포에 위치한 봉황상단 지부였다.

통역 겸 실질적인 거래를 위해 봉황상단에서 합류시킨 임지혁의 말에 주작단 조장이자 이번 임무의 책임자인 김근행은 힐끗 고개를 들어 정면에 있는 기와집을 살펴보고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세.”

높은 담장으로 둘러싸인 지부는 안에 물품을 보관하는 창고까지 있을 정도로 꽤 규모가 컸다.

해가 어둑어둑 지고 있는 늦은 시간이라 쉴 새 없이 드나드는 상인과 일꾼들을 위해 활짝 열어 두는 정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문 앞에 도착한 임지혁은 황동으로 만들어진 문고리를 잡고 세게 두드렸다.

탕! 탕! 탕!

“이리 오너라!”

그러자 얼마 있지 않아 빗장을 푸는 소리가 들리더니 젊은 상단 직원이 문을 살짝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

끼이익.

“뉘시오?”

“본단에서 왔네. 지부장님을 뵐 수 있겠나?”

봉황상단에서 신분패로 쓰이는 목패를 임지혁이 내보이자 직원은 약간 놀란 얼굴로 그와 일행을 훑어보고는 대문을 열어 줬다.

“들어오십시오.”

안으로 들어간 임지혁과 일행들은 안채에 있는 접객실로 안내됐다.

주로 중요한 거래처 손님을 접대하는 데 사용되는 곳이었는데 사치스럽지는 않지만 전체적으로 정갈하고 기품 있게 꾸며져 있었다.

특이한 것은 조선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온돌방이 아니라 넓은 책상과 의자가 놓여 있는 형태라는 거였다.

하녀가 내온 차를 마시며 얼마쯤 기다렸을까 문이 열리면서 수염을 탐스럽게 기른 중년인이 한 명 들어왔다.

바로 부산포 지부장 오희갑이었다.

안면이 있는 사이인지 오희갑은 자리에서 일어난 임지혁을 보고는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임 서기, 이거 다시 만나서 반갑구먼.”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나야 뭐 항상 똑같지. 그건 그렇고 함께 온 사람들은 처음 보는 얼굴인데, 누군가?”

책상 너머에 앉아 있는 김근행과 주작단 단원인 김덕생을 보며 묻자 임지혁은 살짝 말을 돌렸다.

“그건 본단 총관님께서 보내신 서찰을 보신 뒤에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래.”

임지혁의 행동에 뭔가 말 못 할 사연이 있다는 걸 짐작한 오희갑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빈 의자로 가서 앉았다.

“여기.”

품속에서 꺼내 내민 서찰을 받아 든 오희갑은 밀봉된 봉투를 찢고 안에 든 종이를 펼쳤다.

어찌 된 일인지 종이에는 아무런 글자도 적혀 있지 않았는데 오희갑은 당황하지 않고 한쪽에 켜 둔 촛불로 서찰을 갖다 댔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아른거리는 불빛 위로 숨겨진 글자가 드러났다.

오희갑의 표정이 점점 딱딱하게 굳어졌는데, 마침내 내용을 다 확인하자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서찰을 바로 촛불에 태워 버렸다.

화르륵.

시뻘겋게 타들어 간 서찰은 금방 재로 변해 버렸고 증거를 깔끔하게 없애 버린 오희갑은, 김근행과 김덕생을 힐끗 쳐다보고는 왼편에 앉아 있는 임지혁에게 시선을 줬다.

“이것 참 어려운 일을 맡았군.”

“지부장님의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다른 일도 아니고 나라를 위한 건데 당연히 도와줘야지. 우리 상단 단독으로는 불가능한 일이고 왜국에서 유황을 빼내 줄 상대가 필요하겠군.”

“예.”

“따로 생각해 둔 곳이 있나?”

“코자에몬 상단이 어떨까 합니다.”

임지혁의 말에 잠시 생각을 해 본 오희갑은 머리를 끄덕이면서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거기라면 규모도 크고 자금력도 상당하니 충분히 원하는 걸 마련해 줄 수 있을 거야.”

“지부장님께서 다리를 좀 놔주십시오.”

“내가 내일 날이 밝는 대로 가덕도 왜관에 가 볼 테니 염려 말게.”

“감사합니다.”

“아닐세. 그리고 옆에 손님방을 준비하라 일러 놓았으니 오늘 밤은 편하게 쉬도록 하게나.”

그는 임지혁 외에 다른 두 사람을 보고서도 똑같이 말했다.

“네.”

다음 날 오 지부장은 왜관에 있는 코자에몬 상단 책임자를 김근행 일행에게 소개했고, 은밀한 대화가 오간 끝에 며칠 뒤 상대편에서 마련해 준 배를 타고 왜국으로 건너갔다.

일행이 탄 배가 나가사키 항구에 근접하자, 낯선 옷을 입고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마침내 도착했군.”

“네. 항구에 도착하면 아마 사람들의 시선을 한눈에 받게 될 겁니다.”

“뭐? 왜 그런가?”

“왜인들과 조선인들은 서로 입고 다니는 옷도 천양지차일뿐더러, 키도 덩치도 우리 쪽이 훨씬 크기 때문에 당연히 눈에 띌 수밖에 없지요.”

상단 직원으로 이미 몇 번 왜국을 오간 적이 있는 임지혁은 아무것도 모르는 두 사람을 위해 웃으면서 설명했다.

“그럼 큰일이 아닌가?”

김근행의 표정이 살짝 찡그려졌다.

비밀 임무를 수행해야 되는데 사람들의 시선을 받는 건 여러 가지로 곤란했다.

“너무 걱정 마십시오. 항구에 가면 저희 말고도 명국 사람은 물론이고 멀리 서양에서 온 양인들까지 심심치 않게 돌아다니는 데다 옷을 바꿔 입으면 크게 시선을 끌지 않을 겁니다.”

“그렇다면 안심이군.”

그때서야 김근행이 굳었던 얼굴을 폈다.

하늘에서 머리 위를 맴돌던 갈매기 무리가 긴 울음소리를 내며 저 멀리 사라지는 것과 동시에 배가 항구에 서서히 정박할 준비를 했다.

돛을 내리고 밧줄을 단단히 묶으라는 선장의 고함 소리를 배경 삼아 잠시 기다리니, 이내 잔교가 준비되었다며 하선해도 된다는 허락이 떨어졌다.

“그럼 이제 어디로 가야 하나?”

“일단 하룻밤 묶을 숙소부터 구해야겠지요. 근처에 널린 것이 여관이니 금방 찾을 수 있을 겁니다.”

말을 할 줄 아는 임지혁이 지나가는 선원을 붙잡고 길을 묻는 동안, 다른 두 사람은 신기하단 눈빛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왜인들은 갓을 쓰지 않고 부모님이 물려주신 소중한 머리카락도 함부로 다룬다더니, 과연 길거리의 남자들 대부분은 머리 부분을 훤하게 드러내 놓고 다니는 것은 물론, 심지어 이마부터 정수리까지 빡빡 밀어 놓은 자도 있어 조선에서 온 두 사람의 눈에는 참으로 이상하고 기이한 모습으로 보였다.

절로 혀 차는 소리가 나오려는 것을 가까스로 참으며 기다리고 있자니 임지혁이 돌아와 말했다.

“저쪽으로 가면 여관들이 모여 있는 거리가 있다 합니다. 일단 거기로 가서 골라 보도록 하지요.”

“으음. 얼른 가세나.”

두 사람이 왜인들을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는 것처럼, 거리를 지나다니는 사람들 역시 임지혁의 말처럼 일행을 힐끔힐끔 훔쳐보면서 뭐라 숙덕거리는 소리가 들렸기에 내심 얼른 이 자리를 뜨고 싶었던 김근행이 반색하는 표정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임지혁의 뒤를 따라 조금 걸으니 제법 널찍한 대로를 중심으로 길 양쪽 편에 여관으로 보이는 목조 건물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거리에 들어섰다.

어느 여관에 묵을지 정하지 못한 채 길 주변을 어슬렁거리고 있으니, 마침 입구 앞에 물을 뿌리러 나온 여 종업원이 일행을 보고선 뭐라 외치며 손짓했다.

“저 아낙네가 지금 우리한테 말하고 있는 건가?”

“예. 자기네들 가게 밥맛이 이 근처에선 최고라며 묵고 가라는데요.”

설마하니 한 번도 본 적 없는 젊은 처자가 사내들에게 대뜸 말을 걸까 싶어 반신반의하던 김근행은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는 임지혁에게 기겁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손님 끄는 데 저리 열심이니 한번 물어나 보지요.”

김근행이 말리기도 전에 대뜸 여종업원 쪽으로 다가간 임지혁은 고개까지 끄덕이며 뭐라 열심히 말하더니 이내 일행을 향해 손짓했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건가?”

“마침 이 층 창가 큰 방이 비었답니다. 전망도 좋아서 항구 거리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하니 오늘 밤은 여기서 묵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만…….”

딱히 반대할 이유도 없어서 머뭇거리고 있자니 아까 그 여종업원이 기대감을 잔뜩 품은 눈빛으로 일행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찬찬히 살펴보니 이제 열네다섯 살 정도밖에 안 되어 보이는데, 벌써부터 집안일을 돕고 있는 건지 아니면 남의 집 하녀 노릇을 하고 있는 건진 몰라도, 이대로 일행이 돌아가 버리면 다 잡은 손님을 놓쳤다며 주인한테 한 소리를 들을지도 몰랐다.

“끄응.”

“일단 방을 한번 보고 결정한다 했으니 올라가 보시지요.”

김근행이 쉽게 결정하지 못하고 고민하고 있자, 임지혁이 옆에서 계단 쪽으로 등을 떠밀었다.

폭이 좁은 일본식 전통 옷을 입고 있던 여종업원이 종종걸음으로 앞에 나서서 복도 끝 쪽에 있는 방문 앞에 무릎을 꿇고 앉더니 미닫이문을 열고 고개를 숙였다.

여관에서 제일 큰 방이라고 하더니 과연 키 큰 사내 셋이 한꺼번에 들어가도 충분히 남을 정도로 여유 공간이 있고, 아래엔 깔끔하게 청소해 놓은 다다미가 깔려 있었으며, 왼쪽 벽에는 도코노마라 하여 바닥을 한 단 높인 자리에 큼지막한 족자가 걸려 있었다.

“이것 보십시오.”

여태껏 아무 말이 없던 김덕생이 창문을 활짝 열고 김근행을 불렀다.

“오, 과연 경치가 좋군.”

주위에 이 층 건물이 몇 개 없는 덕분인지, 탁 트인 전경에 김근행이 감탄사를 터트렸다.

바로 아래에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손쉽게 관찰할 수 있는 것은 물론, 눈을 위로 조금만 돌리면 일행이 방금 전까지 지나왔던 부두와 드나드는 선박들의 모습까지 시야에 다 들어와 항구의 떠들썩한 분위기와 나가사키 특유의 이국적인 분위기까지 한꺼번에 다 느낄 수 있었다.

“아까는 몰랐는데 양인들도 꽤나 많이 보이는군.”

“네. 그리고 저기, 청국 상인들 한 무리도 있습니다.”

“흠.”

“여기라면 나가사키 항에서 무슨 일이 벌어져도 금방 알 수 있겠는걸요.”

그렇지 않아도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던 김근행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가 여관을 잘 골랐군.”

“그럼 전 밑에 내려가서 방값을 미리 내고 오겠습니다.”

“아, 그렇게 하게.”

임지혁이 여종업원과 함께 밑으로 내려가는 소리가 들리자, 김근행은 다시 창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짠 내가 섞인 바다 바람을 깊게 들이마셨다.

일행이 숙박할 곳을 막 정했을 무렵, 나가사키 안쪽에서는 은밀한 연락이 전해지고 있는 참이었다.

요란한 부두거리에서 벗어나 중심지 쪽으로 들어가면 으리으리한 대저택들이 서로 어깨를 나란히 하며 마주하고 있는 지역이 있었다.

여기는 장사로 많은 부를 축적한 상인들이 주로 집을 지은 곳이라 새로 지은 신축 건물이 많았고, 또한 그 규모도 웬만한 무가 저택보다 훨씬 커서 보기만 해도 어깨가 움츠러들 만큼 위용이 화려했다.

그중에서도 나가사키 제일로 손꼽히는 대저택의 심처 깊숙한 곳에서 한 사내가 주인에게 공손히 보고를 올리고 있었다.

“조선에서 온 자들이 방금 항구에 도착했다 합니다.”

“그래? 생각보다 빠르군.”

“며칠 동안 바다가 잠잠했던 덕분이겠죠.”

대나무 발 뒤편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이야기를 듣고 있던 그는 부채로 손바닥을 탁 치는 소리를 내더니 말했다.

“손님이 오셨으니 맞이할 준비를 해야지. 내일 저택으로 초청한다는 전갈을 보내게.”

“알겠습니다.”

무사들이 하는 것처럼 이마와 양옆 머리카락을 말끔히 밀고 중간에만 일본식 상투를 튼 사내가 정좌한 자세로 고개를 숙이고 답했다.

사내가 물러나자 한쪽에 조용히 앉아 있던 젊은 남자가 입을 열었다.

“아버님, 정말 저들에게 유황을 파실 생각이십니까?”

젊은 사내는 코자에몬 가문의 장남이자 상단 후계자인 이토 코자에몬이었다.

옆에 끼고 상단 일을 하나씩 가르치고 있던 사이토는 아들의 말에 인자한 미소를 지으면 물었다.

“왜, 넌 이번 거래를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느냐?”

“솔직히 막부에서 엄하게 금지하고 있는 유황을 조선으로 밀수한다는 것이 마음에 걸립니다.”

“네 말대로 만약 발각된다면 막부의 노여움을 사 패가망신할 수도 있는 상당히 위험한 일이지.”

“그런데 왜?”

의아한 시선을 보내는 아들에게 사이토는 크지 않지만 분명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했다.

“상인이란 원래 이윤을 좇는 자란다. 위험을 감수하는 만큼 얻을 수 있는 이득이 크니 어찌 가만히 있겠느냐.”

“하지만 지나친 도박은 삼가야 된다고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자신이 한 이야기를 잊어먹지 않고 기억하고 있는 아들을 사이토는 기특하다는 듯이 쳐다봤다.

“그랬지. 동시에 승부를 봐야 할 때는 과감하게 투자를 해야 된다는 말도 해 줬을 것이다. 유황을 넘겨주는 대신 조선 조정에서 막부에 정해 준 물량 외에 상품을 가져올 권리를 받는다면 충분히 감수할 수 있는 위험이 아니겠느냐.”

예로부터 조선에서 나는 물건은 아주 귀하게 취급됐는데, 오죽했으면 임진왜란 때 조선을 침략한 장수들이 제일 먼저 한 일이 도자기를 훔치고 장인들을 잡아가는 거였다.

조선에서는 주막 같은 데서 술잔으로 쓰는 막사발을 왜국 영주들이 가보로 여기며 아끼는 것만 봐도 얼마나 가치가 높은지 알 수 있었다.

도자기뿐만 아니라 인삼과 문방사우 그리고 쌀까지 조선에서 나는 물건은 어느 하나 비싸게 거래되지 않는 것이 없었지만, 매년 거래할 수 있는 물량이 정해져 있어 항상 수요에 비해 공급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그런데 정해 준 물량 외에 상품을 더 가져갈 수 있는 방법이 생겼으니 구미가 당길 수밖에 없었다.

상인의 자식답게 조선 물건이 얼마나 큰 돈벌이가 되는지 잘 알고 있던 이토는 아버지의 말에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는 표정을 지었다.

“좋은 공부가 될 테니 이번 거래를 어떻게 하는지 잘 보고 배워라.”

“예.”

다음 날 김근행 일행은 사이토가 보내 준 말을 타고 저택을 방문했다.

“나가사키 최고의 부자라고 하더니 저택이 정말 으리으리합니다.”

높다란 담이 길게 늘어서 있는 걸 보고 김덕생이 놀란 듯 말하자 옆에 있던 임지혁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나가사키뿐만 아니라 규슈에서 제일 돈이 많은 사람의 거처이니 그럴 수밖에요.”

“출발 전에 대충 설명을 듣기는 했지만 코자에몬 집안이 그렇게 부자인가?”

부하인 김덕생과 달리 담담한 시선으로 저택을 살펴보던 김근행의 물음에 임지혁은 아는 걸 친절하게 말해 줬다.

“보통 은 천 관 정도를 가지고 있으면 거부라는 소리를 듣는데, 코자에몬 집안의 재산이 수천 관은 족히 넘는다고 말씀드리면 짐작이 되시겠습니까?”

“대단하군,”

“듣기로는 이곳을 실질적으로 다스리는 번주도 돈이 아쉬울 때면 코자에몬 집안에 손을 벌린다고 합니다.”

상상을 초월하는 부에 김덕생은 내심 감탄을 하면서도 그런 대단한 자와 조금 있으면 직접 만나 거래를 해야 된다는 것에 약간 긴장감을 느꼈다.

그걸 눈치챘는지 임지혁이 자신감 넘치는 어투로 말했다.

“상대도 저희 못지않게 이번 거래를 꼭 성사시키려고 할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임 서기, 자네만 믿겠네.”

“실망시켜 드리지 않을 겁니다.”

직책은 서기에 불과했지만 장 총관이 추천한 인물답게 임지혁은 약간의 동요도 없는 얼굴로 눈을 반짝였다.

잠시 뒤 저택 안으로 들어간 일행은 상단주인 사이토가 머무는 안채로 곧장 안내됐다.

“나리, 손님께서 오셨습니다.”

그러자 미닫이문이 벌컥 열리면서 어린 이토 코자에몬이 나왔다.

총기 어린 시선으로 김근행 일행을 빠르게 살펴본 이토는 살짝 머리를 숙였다.

“상단주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안으로 드시죠.”

종종 지체 높은 집안에서 이토처럼 어린 시동을 쓰기도 했지만, 입고 있는 옷이 비단으로 만들어진 고급품인 걸 단번에 알아챈 임지혁은 상대가 상단주의 아들이거나 친척쯤 되는 인물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주작단 조장답게 김근행도 그걸 눈치챘는지 점잖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고맙네.”

한쪽으로 비켜 선 이토를 지나 실내로 들어가자 일본식 상투를 깔끔하게 틀어 올린 사이토가 정좌를 하고 앉아 있다가 일행을 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까지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제가 이 상단을 운영하고 있는 사이토 코자에몬입니다.”

그러자 대표인 김근행도 정중하게 머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김근행입니다. 사정상 소속을 밝히지 못하는 점 양해해 주십시오.”

동석한 통역을 통해 김근행의 이야기를 전달받은 사이토는 이해한다는 듯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양쪽이 준비된 자리에 앉자 기다렸다는 듯 옆문이 열리면서 예쁘게 기모노를 차려입은 여자 두 명이 들어와 차와 간단한 다과를 내려놓고 나갔다.

“나름 정성을 들여 준비한 건데, 입맛에 맞으실지 모르겠군요.”

별로 생각이 없었지만 김근행은 예의상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깔끔하니 좋군요.”

“차를 제대로 우려내기 위해서 번주의 다도 스승을 초빙해 수년간 수양을 했지요.”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는 사이토의 모습에 김근행은 내심 고소를 지었지만 겉으로는 표시를 내지 않았다.

“그러시군요. 어쩐지 맛이 각별하다고 했습니다.”

가벼운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어느 정도 분위기가 풀리자 사이토가 먼저 본론을 꺼냈다.

“듣자하니 유황을 구하러 오셨다던데, 맞습니까?”

상대의 말을 임지혁이 통역해 주자 김근행은 살짝 얼굴을 굳히면서 대답했다.

“예.”

“알고 계시겠지만 유황은 화약을 만드는 재료라 막부에서 엄격하게 외부 유출을 금지하는 품목입니다.”

“그런 문제가 없었다면 저희가 굳이 먼 왜국까지 올 필요가 없었겠지요. 그리고 불법이지만 밀수가 공공연히 행해지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위축되거나 다급하게 덤벼들지 않고 여유로운 김근행의 모습에 사이토는 씨익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돈이 되는 일이니 아무리 막는다고 해도 길을 뚫는 것이 상인 아니겠소. 그럼 그쪽에서 원하는 물량은 얼마나 됩니까?”

물량을 묻는 건 이번 거래를 받아들일 의향이 있다는 뜻이었기에 김근행은 기뻤지만 끝까지 내색하지 않고 표정을 유지하며 옆에 있는 임지혁한테 시선을 줬다.

그러자 임지혁은 상대를 똑바로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우선 일차로 오천 근이 필요합니다.”

예상보다 많은 물량에 사이토는 살짝 놀란 얼굴을 했다.

“지금 오천 근이라고 했소?”

“네. 거래가 잘 이루어진다면 올해 안으로 그만큼을 더 받았으면 합니다만, 가능하시겠습니까?”

임지혁의 말대로라면 최소 만 근 이상을 사들이겠다는 거였다.

사이토는 자신도 모르게 낮은 침음성을 내뱉었다.

“흐음.”

열도 전체가 화산으로 이루어진 섬이라 유황을 구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만 이렇게 대규모 물량을 사들인다는 건 전쟁 준비를 한다는 뜻이었기에 머리가 복잡해졌다.

더군다나 이 정도면 아무리 번주와 친분이 깊다고 해도 자칫 들켰을 경우에 엄청난 처벌을 각오해야 했다.

상대가 망설이는 걸 눈치챈 임지혁은 숙소에서 가져온 비단 보자기를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유황 대신 저희 쪽에서 드릴 물건입니다.”

사이토가 눈짓을 하자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던 이토가 일어서 비단 보자기를 가져와서는 매듭을 풀었다.

안에는 매끈하게 옻칠을 한 작은 상자가 하나 나왔는데 도자기를 예상했던 사이토는 의아한 얼굴로 상대를 쳐다보고는 뚜껑을 열었다.

딸깍.

안에 들어 있는 건 눈처럼 하얀 소금이었다.

“아니, 이건 소금 아니오?”

“그렇습니다. 유황을 갖다 주시면 똑같은 무게의 소금을 드리겠습니다.”

순간 사이토의 눈에서 탐욕이 일렁거렸다.

도자기 같은 사치품은 비싸게 거래되지만 수요층이 한정되어 있는 반면에 소금은 귀할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한테 다 필요한 것이었다.

새끼손가락으로 상자에 든 소금을 살짝 찍어 맛을 본 사이토는 혀끝에서 느껴지는 강한 짠맛에 머리를 들며 말했다.

“정말 같은 무게로 계산을 해 준다는 거요?”

상체를 약간 앞으로 숙인 모습에서 반 이상 넘어왔다고 판단한 임지혁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예. 비록 사정상 문서로 남기지는 못하지만 확실히 약조할 수 있습니다.”

회귀 전 기억을 살려 햇빛을 이용한 자연 건조 방법으로 소금을 대량생산 하고 있는 도현과 달리 왜국은 아직도 바닷물을 가마솥에 넣고 장작으로 끊이는 방식을 사용했기에 소금이 비싸고 귀할 수밖에 없었다.

반면 유황은 쉽게 채취할 수 있어 같은 무게로 교환한다면 엄청난 이득을 올릴 수 있었다.

머릿속으로 빠르게 주판알을 튕겨 본 사이토는 이렇게 많은 유황을 구하는 조선의 의도가 수상했지만, 밀수로 챙기게 될 이득에 애써 관심을 끊었다.

사이토가 이런 결정을 내릴 수 있었던 건 막부가 왜국을 통치하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각 지역 영주들의 독립성이 강해 한 나라라는 인식이 약하기 때문이었다.

막말로 조선이 밀수해 간 유황으로 그가 있는 규슈만 치지 않는다면 이보다 더한 것도 돈을 받고 팔 수 있었다.

“좋소. 거래를 합시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상대의 말에 임지혁은 얼굴을 활짝 폈다.

바로 세부적인 거래 조건을 조율한 김근행 일행은 사이토에게 융숭한 접대를 받은 뒤 숙소로 돌아갔다.

사이토가 자신의 저택에서 머물 것을 제안했지만 괜한 의심을 살 수 있다는 말로 정중히 거절한 김근행은 회담 결과를 암호문으로 적어 조선에 보냈다.

한편 한양에 있는 도현은 상업 부흥을 위해 과감한 결단을 내리고 이를 추진하려 했다.

그가 신료들과 마찰을 각오하고 상공업을 키우려는 건 경제력이 뒷받침되지 않는 군대는 모래로 쌓아 올린 성에 불과하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었다.

부름을 받고 대전에 모여든 신료들은 다들 긴장한 표정이었는데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아직 반란의 여파가 다 가시지 않았고, 도현이 이런 식으로 소집을 할 때마다 반드시 엄청난 일이 터지곤 했기에 지레 겁을 먹은 거였다.

왕좌에 앉은 도현은 대전을 가득 매우고 있는 신료들을 내려다보며 잠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는데, 그 침묵에 신료들은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 갔다.

인내의 한계가 올 때쯤 도현이 굳게 다물고 있던 입을 열었다.

“오늘 이렇게 경들을 부른 건 한 가지 논의할 일이 있어서요.”

역시 또 뭔가 일을 벌이려고 한다는 생각을 하며 신료들이 긴장한 가운데 우의정 송시열이 질문을 했다.

“그게 무엇이옵니까?”

“지난 반란 때 짐이 직접 친정을 해 본 결과 도로 사정이 군을 움직이기에는 너무나도 열약했소. 다행히 사태가 더 악화되기 전에 토벌을 끝낼 수 있었지만 제때 토벌대가 도착하지 않았거나 전투가 길어졌다면 여러모로 곤란스러웠을 것이오. 그래서 유사시에 관군을 신속히 움직일 수 있는 도로를 건설했으면 하오.”

“……!”

잠시 정적이 흐르던 대전 안은 이내 반대하는 신료들의 목소리로 가득 찼다.

“아니 되옵니다, 전하.”

“외적이 도성까지 빠르게 올라오는 걸 막기 위해 일부러 도로를 정비하지 않고 놔뒀는데 그걸 손대시다니, 다시 재고해 주시옵소서.”

“나중에 큰 화를 당할 수도 있사옵니다.”

이미 예상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신료들이 답답한 소리를 해 대자 살짝 화가 난 도현은 눈썹을 위로 치켜 올리고는 손바닥으로 팔걸이를 세게 내려치며 언성을 높였다.

탕!

“아직도 그런 낡아빠진 소리를 하는 거요! 지난날 청나라 팔기군이 도로가 나빠서 도성까지 밀물처럼 빠르게 치고 내려오지 못했소이까? 오히려 남한산성에 갇힌 아바마마를 돕기 위해 달려오던 각 지방의 원군들이 열약한 도로 사정 때문에 제때 오지 못해 그 치욕을 당한 것 아니오. 상황이 이런데도 한가한 소리를 늘어놓다니 정말 실망스럽소.”

신랄한 비판에 반대를 하던 신하들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머리를 푹 숙이거나 괜히 무안한 얼굴로 헛기침을 했다.

“흠흠.”

“그건…….”

그러자 임경업이 도현의 말에 찬성을 하고 나섰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참으로 지당하신 말씀이옵니다. 전란에 대비해 각 요충지마다 대규모 병력을 주둔시키는 건 아주 비효율적인 일이온데 도로를 정비해 훈련과 무장이 월등히 뛰어난 중앙군이 신속하게 문제가 생긴 곳으로 이동할 수 있다면, 그런 불필요한 지출을 줄일 수 있지 않겠사옵니까.”

“소인도 같은 생각이옵니다. 그렇게 아낀 인력과 재물을 다른 필요한 부분에 투입한다면 보다 강군을 만들 수 있을 겁니다. 아울러 정비된 도로를 평시에는 물자가 오가는 용도로 활용할 수 있어 여러 가지로 이득이 클 것이옵니다.”

새로 호조판서가 된 김육마저 동조를 하고 나서자 송시열이 살짝 굳은 음성으로 이야기를 했다.

“물론 도로를 닦으면 생기는 여러 이점을 신도 모르지는 않사오나 전국에 길을 내려면 막대한 재원이 소요될 텐데, 그걸 충당할 방법이 없지 않사옵니까. 가뜩이나 올해 파종을 제대로 못해 흉년이 예상되는데 괜히 큰 공사까지 벌여 백성들을 힘들게 한다면 원성이 하늘을 찌를 것이옵니다.”

“맞사옵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송시열과 신하들 입장에서는 마지막 패를 꺼내 든 거였지만 도현은 그걸 예상이라도 한 듯 담담한 얼굴로 호조판서 김육을 보며 말했다.

“다들 재원이 부족할 거라는데, 호판도 그렇게 생각하나?”

“아니옵니다. 동시에 전국적인 도로망을 구축한다면 무리가 있겠지만 단계적으로 진행하는 건 가능하옵니다.”

반대 의견을 냈던 송시열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진 가운데 김육의 설명이 계속 이어졌다.

“이번 반란 가담자들의 재산이 국고에 모두 귀속되면서 재정에 여유가 생겼습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하삼도에는 유서 깊은 가문들이 많고 이 중 상당수가 반란에 연루되어 처벌을 받았지 않습니까.”

반란으로 가장 큰 피해를 본 쪽이 바로 산당의 전신인 서인이었기에 누구보다 잘 알았는데, 그런 감추고 싶은 아픈 기억을 김육이 딱 집어서 끄집어내자 송시열과 몇몇 신료들의 표정이 안 좋아졌다.

“흐흠.”

“아무리 그래도 도로를 정비하는 데 들어가는 돈이 한두 푼도 아니고 그걸 다 어떻게 충당할 수 있겠소? 설사 그렇다고 해도 다른 시급한 일이 많은데 어렵게 생긴 여유 자금을 길바닥에 몽땅 갖다 버리다니 그건 절대 안 될 말입니다.”

그러자 임경업이 발끈하며 나섰다.

“방금 전 그렇게 이야기를 했는데 어찌 도로를 정비하는 것이 돈을 버리는 일입니까!”

“말이 그렇다는 거 아니오. 차라리 그 돈으로 임진년 때 불에 타 무너진 경복궁을 재건하는 것이 어떻겠사옵니까?”

“우상 말씀이 옳습니다. 주상께서 계셔야 될 정궁이 수십 년째 폐허로 남아 그냥 방치된다는 건 나라의 수치이옵니다.”

엉뚱하게도 임진왜란 중에 소실된 경복궁 재건으로 불꽃이 튀자 왕좌에 앉아 있던 도현은 미간을 찡그렸는데,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조선을 발전시키고 북벌의 꿈을 이루는 데 밑거름이 될 소중한 돈을 고작 궁궐을 재건하는 데 쓰자니, 한심하고 어이가 없었다.

물론 왕실의 위신을 세우는 것도 중요했지만 속은 다 썩어 빠졌는데 겉만 화려한 속빈 강정이 돼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도현이 이런 생각을 가지는 건 회귀 전 기억이 크게 작용했는데 집권 초기 여러 가지 개혁을 하며 국정을 잘 이끌어 가던 흥선 대원군이 저지른 가장 큰 실책 중 하나가 바로 경복궁 재건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때 들어간 엄청난 재정을 국방 강화나 경제 개발에 썼다면 조선 말기 그렇게 허무할 정도로 힘없이 강대국들에게 이리저리 휘둘리다가 결국에는 일본한테 나라를 빼앗기지는 않았을 거였다.

“여기서 경복궁 재건이 왜 나오는 거요! 우상의 말대로 이 어려운 시국에 으리으리한 대궐을 짓는다고 공사를 벌이면 그거야말로 백성들에게 원성을 살 일이 아니겠소?”

도현의 지적에 송시열은 무안한지 슬쩍 시선을 피했다.

“이번에 반란 가담자의 재산을 몰수하면서 느낀 건데 조정은 매년 세수가 줄어들어 적자에 허덕이는데도 사대부들은 온갖 탈법과 편법으로 부를 불리고 있었으니 이 얼마나 통탄할 노릇이오.”

“그건 일부에 지나지 않는…….”

신하 하나가 변명이라도 하려는지 이야기를 꺼내자 도현은 화를 내며 버럭 언성을 높였다.

“이번에 몰수된 토지 중 삼 할이 세금을 피하기 위해 숨긴 은결隱結인데도 그런 소리가 나오는가!”

강한 질책에 괜히 나섰다가 본전도 못 찾은 신하는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말이 나온 김에 이십 년마다 한 번씩 실시하는 토지 조사를 앞으로는 삼 년마다 실시해 재정을 확충하고 조세를 피하려는 불충한 행동을 막도록 하겠소!”

혹을 떼려다가 오히려 더 큰 짐을 떠안게 된 신료들은 쓸데없이 입을 놀려 사단을 일으킨 동료에게 눈총을 줬다.

까딱 잘못했다가는 정치적 기반인 지방 사대부들의 원성을 살 수 있는 상황에 보다 못한 송시열이 입을 열었다.

“지당하신 말씀이오나 그렇게 하려면 호조의 인력이 너무 부족하옵니다. 여러 상황을 고려해서 십 년 정도로 기간을 조정하시는 것이 어떨지요?”

나름 절충안을 제시했지만 도현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래 가지고 무슨 효과가 있겠소? 호조에 인원을 보충해서라도 무조건 실행할 테이니 그렇게들 알고 있으시오!”

“…….”

단호한 어투로 도현이 결정을 내려 버리자 신료들은 더 이상 반대를 하지 못했다.

“그리고 도로 건설은 재정 상황을 고려해서 일단 도성을 중심으로 수원과 평양을 연결하는 구간을 먼저 공사하고, 필요한 인력은 옥사에 갇혀 있는 죄인들을 쓰도록 하시오. 죄를 짓고 갇혔는데 관아의 식량이나 축내며 편히 쉬는 건 있을 수 없는 일 아니겠소.”

“죄인들을 노역에 동원하는 건 찬성이오나 그거로는 부족하지 않겠사옵니까?”

좌의정 김종일의 이야기에 잠시 생각을 하던 도현은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럴 수도 있겠군. 허면 이런저런 이유로 고향을 버리고 유리걸식하거나 깊은 산속에 들어가 화전을 일구고 사는 백성들이 많은데, 그들을 데려다 일정한 식량과 품삯을 주고 노동을 시키시오.”

“좋은 생각이십니다. 일이 힘들더라도 몇 년만 참고 견디면 모든 죄를 용서하고 양인으로 신분을 회복시켜 준다고 하면 다들 큰 불평 없이 지시를 따를 것이옵니다.”

“그러면 도로도 닦고 부역과 조세를 내는 양인들의 숫자도 자연스럽게 늘어나는 거니 이거야말로 일석이조가 아니겠소.”

“전하의 혜안에 그저 놀랄 뿐이옵니다.”

주거니 받거니 하며 아주 손발이 척척 맞는 도현과 왕당파 신료들의 모습에 이맛살을 찡그린 송시열은 절로 침음성이 흘러나왔지만, 꺼낸 이야기마다 기다렸다는 듯이 반박을 당해 더 이상 반대할 거리가 없었다.

“그럼 더 이상 도로 건설에 이의가 없는 것 같으니 이대로 확정을 하겠소. 완공이 빠를수록 좋으니 공조와 호조는 서로 긴밀하게 협조해 공사를 진행시켜 나가도록 하시오.”

“알겠사옵니다, 전하.”

지시를 받은 두 신하가 머리를 조아리면서 대답하는 것으로 조회는 끝이 났다.

막대한 재정과 인력이 소모되는 도로 건설을 도현이 이 시점에서 시작하려는 건 물류 활성화와 군사적인 이득 외에도 한 가지 중요한 이유가 더 있었는데, 바로 화폐 사용을 촉진시키려는 거였다.

아직 농경사회를 벗어나지 못한 조선에서 상업을 활성화시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백성들이 물물교환 대신 화폐를 사용하도록 만들어야 했다.

이미 십여 년 전 선대왕인 인조가 상평통보常平通寶를 제작해 유통시키려고 했지만, 아직 백성들 사이에 화폐에 대한 인식이 부족해 널리 쓰이지 않고 유야무야되고 말았다.

도현은 그걸 다시 시도하려고 했는데 이번에는 도로 공사 과정에서 일꾼들의 품삯은 물론이고 각종 자재 비용을 화폐로 지급하고 더 나아가 관리와 중앙군 병사 들의 봉록도 쌀 대신 상평통보로 줄 계획이었다.

이러면 전과 달리 시장에 풀리는 화폐가 많아질 것이고 여기다가 봉황상단과 도현에게 약점이 잡힌 시전상인들을 동원해 이걸 받고 상품을 내주게 하면 자연스럽게 유통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원하는 결과를 얻어낸 도현은 가벼운 걸음으로 대전을 나와 거처로 향했는데, 그때 주작단 단장 이완이 가까이 다가와 허리를 굽혔다.

“이완 단장 아닌가?”

“급히 드릴 말씀이 있사옵니다, 전하.”

“그래?”

한쪽 팔을 내저어 호종하는 궁녀와 내관 들을 뒤로 물린 도현은 이완과 함께 근처에 있는 정자로 올라갔다.

“무슨 일이지?”

“왜국에서 연락이 왔사옵니다.”

최근 가장 큰 관심을 두고 있는 문제 중 하나였기에 도현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어떻게 됐다던가?”

“코자에몬 상단이 제안을 받아들였다고 하옵니다.”

“잘됐군. 그럼 언제쯤 유황을 들여올 수 있는 거지?”

“늦어도 다음 달 중순에는 넘겨받을 수 있을 겁니다.”

“마음 같아서는 더 빨리 확보했으면 좋겠지만 어쩔 수 없지. 병조판서한테 말해 당분간 화약을 소모하는 훈련을 자제하는 수밖에. 아무튼 문제가 생기지 않게 조심해서 일을 진행시키도록 해.”

“명심하겠습니다.”

머리를 숙이며 대답하는 이완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준 도현은 정자를 내려가 대기하고 있던 수행원들과 원래 가던 길을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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