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밀수 2 (37/104)

밀수 2

사이토 코자에몬이 상단의 역량을 총동원해서 은밀히 유황석을 끌어 모으고 있는 동안, 김근행 일행은 가만히 숙소에 있지 않고 나가사키 부두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면서 왜국과 서양에 대한 각종 정보를 수집했다.

서양 국가에 개방된 항구답게 부두에는 생소한 모양의 선박이 여러 척 정박해 있었고 거리에도 얼굴이 하얗고 눈이 파란 양인들이 심심치 않게 지나다녔다.

신분을 감추기 위해 명나라 상인 복장을 한 세 사람은 부두 한쪽에 위치한 유곽으로 갔다.

외국인들을 상대로만 장사를 하는 유곽은 아직 이른 저녁인데도 얼큰하게 취한 사내와 기생 들의 웃음소리로 가득했다.

지난 며칠간 거의 출근 도장을 찍다시피 해서 그런지 입구에 있던 어린 종업원은 세 사람을 보자마자 반갑게 인사를 하며 자리로 안내했다.

“술은 청주로 갖다 드릴까요?”

“그래.”

머리를 끄덕이며 임지혁이 구리돈 하나를 손에 쥐여 주자 종업원은 입이 귀에 걸린 얼굴로 말했다.

“금방 갖다 드릴게요.”

종업원이 몸을 돌려 주방으로 가자 김근행은 등받이에 몸을 살짝 기대고는 자연스럽게 실내를 살폈다.

넓은 실내에는 벌써 이십여 명의 손님이 기모노를 입은 기생을 끼고 앉아 술판을 벌이고 있었는데 대부분 양인들이었다.

군데군데 긴 곰방대로 아편을 피우는 사람도 있었고, 기생들은 뽀얀 살결이 그대로 보이도록 옷을 입고 김근행 일행을 포함한 손님들에게 노골적인 시선을 보냈다.

이렇게 탁 트인 일 층과 달리 위로 올라가면 여러 개의 방이 있어 일행끼리 술을 마시거나 기생들과 뒤엉켜 보다 진한 행위를 할 수 있었다.

손님들의 얼굴을 하나씩 살펴보고 있을 때 종업원이 술을 가져왔다.

“여기 있습니다.”

“류지, 오늘따라 손님이 더 많은 것 같네.”

술병을 집어 잔에 따르면서 임지혁이 지나가듯이 묻자 종업원은 별다른 의심 없이 대답했다.

“화란에서 온 배가 도착해서 그럴 거예요.”

“화란?”

“네. 저기 왼편에 무리를 지어서 앉아 있는 선원들인데 유리 세공품하고 상아를 잔뜩 실고 왔다던데요.”

류지라는 이름을 가진 종업원이 가리킨 곳을 보자 거친 인상의 양인 대여섯 명이 기생들과 알 수 없는 노래를 부르며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렇군.”

“뭐 필요한 거 있으면 부르세요.”

“알았다.”

류지가 자리를 떠나자 임지혁은 방금 들은 이야기를 일행한테 해 줬다.

“흐음. 정말 양인들과 교류가 빈번하군. 우리가 여기 도착하고 벌써 다섯 번째로 들어온 배지?”

“네. 교역이 활발한 건 맞지만 그것도 이곳처럼 막부에서 허가한 교역장에 한정된 것이지, 양인들이 내륙으로 들어가는 것은 엄격히 금지되어 있습니다.”

“그렇긴 해도 왜국에 이렇게 번화한 항구가 있다니 놀라울 따름이야.”

김근행의 말처럼 나가사키 항은 일확천금을 노리고 온 서양 상인과 선원 들로 넘쳐났는데, 유럽에서 만들어진 각종 무기류와 세공품을 가져와 몇 배의 이윤을 남기고 팔았다.

하지만 모두가 큰돈을 버는 건 아니었는데 어렵게 여기까지 왔지만 풍랑을 만나 화물을 모두 잃어버리거나 이런저런 이유로 빈털터리가 되는 일도 빈번했다.

오늘 만나기로 한 호세 마누엘이라는 서양인도 그런 경우에 속했다.

사기를 당해 가짜 은을 받고 힘들게 가져온 화물을 몽땅 잃었을 뿐만 아니라 설상가상으로 유곽에서 벌어지는 도박판에 잘못 끼어들었다가 큰 빚을 져 타고 온 배까지 빼앗길 판이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에스파니아 출신인 마누엘은 견원지간이나 마찬가지인 화란(네덜란드)인이 대부분인 나가사키인지라 서양 상인들의 도움도 받지 못하고 아예 외면당했다.

호세 마누엘에 대해서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때 유곽 주인이자 기생들의 대모인 오쿠메가 머리를 위로 틀어 올린 채 요염한 차림으로 세 사람이 앉아 있는 탁자로 다가왔다.

“호호호. 시간을 딱 맞춰 오셨네요.”

슬쩍 옆자리에 앉은 오쿠메는 깊게 파인 옷자락 사이로 보이는 풍만한 가슴을 의도적으로 팔에 밀착시키며 색기 어린 미소를 지었다.

웬만한 남자는 그대로 녹아내릴 정도였지만 상대가 단순한 포주가 아니라 나가사키 밤거리를 주름잡는 큰손이라는 걸 알기에, 김근행은 전혀 흔들리는 모습 없이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지금 바로 볼 수 있소?”

“흥. 하여튼 재미가 없다니까.”

살짝 눈을 흘기면서 자세를 바로 한 오쿠메는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따라와요.”

따라 일어선 세 사람은 술꾼들의 주정과 기생들의 웃음소리로 요란한 실내를 가로질러 이 층으로 올라갔다.

다다미가 깔린 복도를 가운데 두고 양옆으로 방이 주욱 늘어서 있었는데 오쿠메는 세 사람을 데리고 안으로 걸어갔다.

오른쪽으로 구부러져 있는 복도를 돌아 제일 깊숙한 곳까지 가자 허리에 칼을 찬 사내 한 명이 장승처럼 서서 지키는 방이 보였다.

사내는 앞장선 오쿠메와 김근행 등을 힐끗 쳐다보고는 말없이 옆으로 비켜섰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삼십 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금발의 서양 남자가 잘 차려진 술상 앞에 앉아 있었다.

바로 호세 마누엘이었는데 그동안의 고생을 말해 주듯 얼굴이 상당히 초췌해 보였다.

김근행 일행이 안으로 들어와도 그는 시선조차 주지 않고 혼자 술을 따라 마셨다.

“요즘 안 좋은 일이 많아서 그런 거니까 이해하시고 다들 앉으세요.”

오쿠메의 말에 세 사람은 맞은편 자리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그때서야 고개를 든 마누엘은 김근행과 일행을 스윽 쳐다보고는 어눌한 왜국 말로 입을 열었다.

“당신들이 내 배를 사겠다는 작자들이오?”

그러자 김근행을 대신해 임지혁이 얼른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후우. 고향에 타고 갈 배까지 팔아야 되는 내 신세가 정말 처량하군.”

마누엘은 길게 한숨을 내뱉고는 힘 빠진 목소리로 이야기를 이었다.

“그래, 얼마나 주실 거요?”

함께 다니면서 임지혁한테 틈날 때마다 왜국 말을 배워 이제 어느 정도 듣는 건 가능해진 김근행이 품속에서 전표를 하나 꺼내 탁자에 올려놨다.

“왜은 사백 냥짜리 전표요.”

상당한 거금이었지만 마누엘은 그다지 기쁜 표정이 아니었다.

그가 멀뚱히 전표를 보고만 있자 옆에 있던 오쿠메가 냉큼 품속에서 매매 계약서를 꺼내선 앞에 손으로 탁탁 두드렸다.

“여기에 지장만 찍으면 끝나요.”

“끄응.”

오쿠메의 재촉에 마누엘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깊이 한숨 쉬고선 먹물을 묻힌 엄지손가락을 종이에 꾹 눌러 찍었다.

무슨 내용인지 읽어 보는 시늉도 하지 않고 오쿠메가 하라는 대로 순순히 지장을 찍는 마누엘의 모습에 김근행은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도박 빚으로 약점을 잡힌 뒷사정을 떠올리고선 납득한 듯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호호, 그럼 이제 다 끝난 거죠.”

지장을 찍은 자리가 다 마르기도 전에 착착 접어서 김근행에게 건넨 오쿠메는 그가 계약서를 받아 드는 것과 동시에 탁자에 올려놨던 전표를 재빨리 집어 풍만한 가슴 사이에 쏙 집어넣었다.

“이봐, 내 몫은?”

여전히 기운 없는 목소리로 미구엘이 묻자 오쿠메는 가볍게 눈을 흘겼다.

“기다려 봐요.”

그리고 미리 준비한 주머니를 툭 던지는데, 받아 보니 안에서 가볍게 짤랑이는 소리가 났다.

“당신 빚을 제하고 남은 거예요.”

“……진짜?”

“이래 봬도 계산은 정확하니까 안 세어 봐도 돼요.”

“…….”

갈수록 표정이 점점 어두워지는 미구엘과 달리 오쿠메는 밝은 목소리로 손뼉을 짝 쳤다.

“자, 그럼 거래도 잘 끝났고, 제가 새로 거하게 한상 차려서 올 테니까 그거라도 드시고 가세요.”

“아니,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사양하지 마세요. 손님을 그냥 보내는 건 예의가 아니죠.”

오쿠메는 살랑살랑 눈웃음을 치면서 먼저 일어났다.

미닫이문이 탁 닫히는 소리와 함께 사내들만 방에 남게 되자 무거운 침묵이 가라앉았다.

“여기 유곽에서는 고급술만 내놓으니 공짜로 준다고 할 때 마시고 가는 게 나을 거요.”

돌연 미구엘이 입을 열었다.

“계속 나쁜 일만 생기더니 그래도 좋은 일 하나 정도는 생기는군.”

자조적으로 내뱉은 미구엘은 자신이 마시고 있던 술병을 탈탈 털어 잔에 따르고는 맞은편에 앉은 김근행에게 권했다.

“고맙소.”

딱히 거절할 이유도 없기에 순순히 술잔을 받아 든 김근행은 홀짝이면서 미구엘에게 물었다.

“빚도 다 청산했겠다, 이제 뭘 하실 생각이오?”

“딱히 생각해 둔 건 없소. 오쿠메가 공으로 놀고먹게 해 줄 리가 없으니, 여기서 나가긴 해야 하는데…….”

뱃사람에겐 목숨과도 같은 배를 팔아서 번 돈이 사백 냥.

거기에 도박 빚을 제하니 고작 남은 거라곤 삼십 냥이 전부였다.

아무리 싼 숙소를 구한다 해도 길어야 두 달 정도밖엔 버티지 못할 텐데,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어깨가 축 처져선 형편없이 풀이 죽어 있는 미구엘을 가만히 바라보던 김근행은 그가 딱해 보였는지 의외의 말을 꺼냈다.

“그럼 우리 쪽으로 와서 일을 해 볼 생각은 없소?”

“일이라 하면?”

“배를 가지고 있기만 하면 뭐 합니까. 그걸 다루는 방법을 배워야 하는데 괜히 낯선 사람을 고용하는 것보다 배 구석구석까지 다 알고 있는 사람에게 가르침을 받는 것이 나을 것 같아 하는 말이오.”

그 말에 미구엘은 순간 표정이 밝아졌지만, 또 무슨 생각을 했는지 주저했다.

“그리해 주시면 더 이상 바랄 게 있겠습니까. 그런데…….”

어느새 존댓말을 쓰기 시작한 미구엘은 조심스레 김근행에게 말했다.

“배를 제대로 다루는 게 목적이라면 선원들도 어느 정도는 필요할 텐데. 그럼 내 밑에 있던 녀석들도 함께 거둬 주시는 겁니까?”

“그건 내가 아직 당신 선원들을 보지 못했으니 뭐라 말 할 수가 없소.”

“음, 역시…….”

선장으로서 최소한의 양심 정도는 남아 있었는지 약간 아쉬운 눈빛으로 미구엘이 고개를 숙이자, 김근행이 금세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일단 내가 만나 보고 마음에 들면 고려해 보겠소. 아무래도 당신도 원래 부하들이 다루기 쉬울 테니까.”

“정말입니까?”

미구엘은 손으로 계속 만지작거리고 있던 술잔을 멀리 치우고선 자세를 가다듬었다.

“난 이쪽 예절 같은 건 잘 모르지만 왜국 사람들은 예를 표할 때 이렇게 하더군요.”

“허허, 이런…….”

정좌를 하고 허리를 꼿꼿이 세운 자세 그대로 이마를 땅에 닿도록 머리를 숙이는 미구엘의 모습에 김근행은 약간 당황한 듯 헛웃음을 흘렸다.

“우리는 왜국이 아니라 조선 사람이니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지만, 마음만은 고맙게 받겠소.”

그렇게 말한 김근행은 뒤에 자리를 지키고 있던 임지혁에게 고개를 돌렸다.

“내 일행이 나중에 우리가 묵고 있는 숙소 위치를 가르쳐 줄 것이니 대충 짐 정리가 끝나면 찾아오시오.”

“네.”

그리고 다시 한 번 고맙다며 미구엘이 말하는데 드르륵 미닫이문이 다시 열리면서 오쿠메가 술상과 함께 안으로 들어왔다.

“많이 기다리셨죠. 사내분들끼리만 술 마시면 적적하실까 봐 우리 가게 아이들도 데리고 왔으니, 흥겹게 놀다 가셔요.”

오쿠메는 호기심에 가득 찬 표정으로 김근행 일행을 향해 웃음을 흘리는 여자들을 소개하다가 문득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아니, 근데 분위기가 이상하네. 미구엘 씨는 또 왜 그러고 앉아 있는 거예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 보라며 옆구리를 찌르는 오쿠메의 행동에 미구엘과 김근행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가볍게 웃어넘기기만 했다.

“이런저런 일이 있었지.”

“뭐예요, 그게?”

“아, 꼬치꼬치 캐묻지 말고 술이나 따르시오.”

“아무튼 사내들이란. 방금 전까지만 해도 죽을상을 해 가지곤 축 처져 있더니 또 지금은 팔팔하시네.”

그래도 우는 얼굴보단 웃는 낯이 보기 좋다며 오쿠메는 능청맞게 장단을 맞추고 분위기를 띄웠다.

마구엘에게 구입한 범선은 길이 사십 미터, 너비 칠 미터, 높이 사 미터에 돛이 두 개 있고 사십여 명의 선원이 탑승하는 중형 범선이었다.

중소 규모 상인들이 애용하는 크기의 배로 건조한 지 이 년도 채 되지 않은 아주 신품이었다.

무엇보다 배에 올라 내부를 살펴본 김근행 일행을 흡족하게 한 건 양옆에 네 문씩 달려 있는 대포였다.

“배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이 정도면 괜찮은 것 같군.”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투박한 포신을 손으로 쓰다듬던 김근행은 고개를 들어 임지혁을 보며 말했다.

“배를 운용할 선원들하고는 이야기가 다 끝났나?”

“마구엘이 나서 준 덕분에 어렵지 않게 계약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일 년 동안이라고?”

“네. 기간을 다 채우면 다시 나가사키에 데려다 주는 조건입니다.”

“선박 운용 기술을 배우기 위해서 어쩔 수 없다고 하지만 난 지금도 양이들을 조선에 데려가는 것이 껄끄럽군.”

부두와 유곽에서 본 서양 선원들의 난잡한 행동 때문에 그런지 김근행은 약간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백성들과 접촉을 철저히 금하고 수군 진영이 있는 절영도(부산 영도)에서만 머물 테니 너무 염려 마십시오.”

“아무튼 조선에 가서 사고를 치지 못하도록 미리 단단히 일러두게.”

“예.”

임지혁의 대답을 들으며 김근행은 선내를 천천히 더 둘러봤다.

배만 덜렁 가져와 봤자 운용 방법을 모르면 여러 가지로 곤란했기에 도현은, 시행착오를 줄이고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서 처음부터 김근행에게 범선을 구하게 될 경우 조종 기술을 배울 수 있도록 가능하면 선원들도 함께 데려오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래서 선주이자 선장인 미구엘과 선원들에게 후한 보수를 제시하고 일 년간 조선 수군에 항해 기술을 가르쳐 주기로 계약했다.

이 밖에도 김근행은 나가사키에 있는 화란 상관을 통해 범선에 사용하는 각종 자재와 포탄을 화물칸 가득 사들였다.

그리고 규슈 지역의 상세한 지도와 번주가 보유한 병력 수 같은 군사기밀까지 은밀히 빼내 수집했다.

최대한 조심한다고 했지만 낯선 곳에서 적은 인원으로 움직이다 보니 행적이 조금씩 노출되고 말았다.

“호오. 그러니까 수상한 자들이 규슈 지도를 구하고 다닌다는 말이지?”

나가사키 봉행소에 속한 무사인 오카모토 켄이치로가 눈을 반짝 빛내며 묻자 부두 윤락가에 장작을 대는 일을 하는 사내가 허리를 굽실거리며 말했다.

“그렇습니다요. 며칠 전에 유곽에서 혼다 상과 은밀히 만나는 것도 봤습니다.”

“설마 봉행소 서기로 있는 그 혼다를 말하는 거냐?”

“맞습니다.”

순간 켄이치로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혼다는 공문서 관리를 맡고 있는 봉행소 하급 관리로 그와 접촉을 했다면 단순한 의심을 넘어 실제로 지도를 구하려는 행동을 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흐음.”

한쪽 손으로 턱을 쓰다듬던 켄이치로는 날카로워진 어투로 물었다.

“어디서 온 놈들이야?”

“그게 조선인 같기도 하고 중인 상인처럼도 보이고…….”

횡설수설하는 사내의 말에 켄이치로는 눈썹을 치켜 올리고는 짜증을 냈다.

“똑바로 말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칠칠치 못하기는. 하여튼 외국인이라는 거지?”

“예. 그건 확실합니다.”

“알았으니까. 그만 가 봐.”

가라고 팔을 휘저었지만 사내는 움직이지 않고 미적거렸다.

“할 말이 남았어?”

“헤헤헤. 요즘 벌이가 시원치 않아서…….”

간사한 웃음을 흘리면서 양손을 비벼 대는 모습에 켄이치로는 허리에 달린 돈주머니에서 구리 돈 열 냥을 꺼내 던져 줬다.

“옜다.”

쨍그랑.

“어이구. 감사합니다, 나리.”

바닥에 떨어진 돈을 얼른 줍는 사내를 내려다보며 켄이치로가 차갑게 말했다.

“그놈들을 눈여겨보다가 더 나오는 것이 있으면 바로 연락해. 알았지?”

“알겠습니다요.”

대답을 들으며 의자에서 몸을 일으킨 켄이치로는 거만한 자세로 자리를 떴다.

밖으로 나온 그는 번잡한 거리를 걸으면서 방금 들은 정보를 곰곰이 생각했다.

외국인이라고 하니 다행히 다른 영주가 보낸 첩자는 아닌 것 같았지만, 지도를 구하는 수상한 행동을 하는 게 아무리 봐도 찝찝했다.

잘만 하면 큰 건수를 하나 올려 영주에게 인정받을 기회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켄이치로는 한쪽 입꼬리를 위로 말아 올렸다.

이렇게 자신들을 노리는 위협이 다가오는 줄도 모르고 김근행들은 조금이라도 더 많은 정보를 알아 가기 위해 열심히 움직였다.

그러는 사이 사이토한테서 유황이 다 준비됐다는 연락을 받고 다시 은밀히 저택을 방문했다.

“어서들 오시오.”

두 번째 만남이라서 그런지 사이토는 한결 더 반갑게 김근행 일행을 맞았다.

“준비가 다 끝났다고 해서 왔습니다.”

자리에 앉자마자 김근행이 본론을 꺼내자 사이토는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짧은 시간 안에 많은 양을 구한다고 상당히 힘들었소이다.”

“고생한 만큼 보상을 받게 될 테니 염려 마십시오.”

통역을 통해 김근행의 말을 들은 사이토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쯤 물건을 건네받을 수 있습니까?”

“이틀 뒤 여기가 아닌 아마쿠사 섬에서 배를 띄울 거요.”

“그럼 늦어도 일주일 안에는 부산포에 도착하겠군요.”

“아마도 그럴 거요. 여기 있는 내 아들이 날 대신해서 갈 테니 잘 부탁하오.”

“이토라고 합니다.”

앉은 자세로 상체를 살짝 숙여 인사라는 이토를 보고 김근행은 약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그만큼 이번 일을 이 사이토가 중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뜻이오. 그러니 윗분께 잘 이야기해서 계속 좋은 거래를 했으면 하오.”

전략물자인 유황이 필요한 조선 입장에서도 코자에몬 상단과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나쁠 건 없었기에 김근행은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판단은 제가 하는 것이 아니지만 좋은 쪽으로 말씀을 드리죠.”

“하하하. 고맙소. 그리고 이건 약소하지만 귀국하는 데 여비에 보태시오,”

말을 하며 사이토는 작은 목함을 하나 내밀었다.

김근행이 뚜껑을 열어 보자 달걀 모양처럼 생긴 왜국 은자가 들어 있었는데 못해도 삼십 냥은 넘을 것 같았다.

명백한 뇌물이었지만 힐끔 사이토를 쳐다본 김근행은 다시 뚜껑을 닫고 목함을 옆에 있던 김덕생에게 주며 말했다.

“잘 쓰겠습니다.”

“더 챙겨 주지 못해 미안할 따름이오.”

“그럼 떠나기 전에 이것저것 준비할 것이 많아서 저희는 이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아 참. 그 전에 한 가지 말해 줄 것이 있소.”

“뭡니까?”

“큰일을 압두고 있는데 혹시 모를 불상사가 생길 수도 있으니 당분간은 자중하며 지내는 것이 좋겠소.”

사이토의 말에 김근행은 안색을 딱딱하게 굳혔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아직 걱정할 정도는 아니지만 부두에 수상한 외국인들이 돌아다닌다는 소문이 들려서 하는 이야기요.”

“으음.”

그 외국인이 누군지 굳이 묻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었기에 김근행은 이맛살을 찡그렸다.

“저희를 감시라도 하신 겁니까?”

그러자 사이토는 한쪽 팔을 내저으며 말했다.

“절대 그런 건 아니니 오해하지 마시오. 그저 장사를 하다 보니까 여기저기 귀가 많은데 그중 한 곳에서 알려 온 소문이오.”

떨떠름했지만 일단 지금은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기에 김근행도 더 이상 따지고 들지 않았다.

“참고하지요.”

“주위가 시끄러워지면 우리 일에도 지장이 생길 수 있지 않겠소.”

“알겠습니다. 그럼 저희는 이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담담한 어조로 말을 한 김근행은 일행과 함께 몸을 일으켰다.

뒷문을 통해 사이토의 저택을 나와 얼마쯤 갔을까 옆에서 걸어가던 임지혁이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조심한다고 했는데 행적이 노출되다니, 죄송합니다.”

“아닐세. 나도 마음이 급한 나머지 너무 일을 서둘렀어.”

“사이토가 이런 말을 한 걸 보면 여길 떠날 때까지 조심해야겠습니다.”

김덕생의 이야기에 김근행은 무겁게 머리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그래야 되겠지.”

그러자 임지혁이 약간 곤란한 표정을 지으면서 김근행을 봤다.

“내일 혼다라는 놈을 만나 군사지도를 받기로 했는데 그건 어떻게 하지요?”

“흠.”

잠시 고민하던 김근행은 이내 결정을 내렸다.

“지도는 포기하기 아까우니까 이것만 처리하고 다른 일은 모두 중단하도록 해.”

“예.”

“저, 그런데 조장님…….”

“말해.”

“아까 사이토가 준 돈은 왜 받으신 겁니까?”

김덕생이 조심스럽게 묻는 말에 김근행은 피식 미소를 지었다.

“왜, 내가 혼자 꿀꺽할까 봐?”

“그게 아니라…….”

당황한 김덕생의 어깨를 가볍게 툭 치며 김근행이 말을 이었다.

“어차피 큰일이 없는 한 당분간은 사이토와 계속 거래를 해야 되는데 안 받으면 상대만 좋은 거잖아. 안 그래도 지도 값으로 줄 돈을 바꿔야 됐는데 이걸로 대신 쓰지, 뭐.”

“역시.”

잠시나마 의심했던 것이 미안했는지 김덕생은 멋쩍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일을 망치면 단순히 우리 목숨만 잃는 것이 아니라 주상 전하와 나라에 큰 죄를 짓는 것이니, 다들 신중하게 움직이도록 해. 그리고 혹시 모르니까 언제든 여길 뜰 수 있게 준비해 놔.”

“알겠습니다.”

이번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기에 대답하는 두 사람의 얼굴에는 결연한 기색마저 어렸다.

“자네는 퇴근 안 하나?”

동료 관리의 물음에 봉행소 서기인 혼다는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서류 더미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직 일이 조금 남아서 자네 먼저 가게.”

“그냥 내일 와서 하지.”

“아침에 일찍 갖다 드려야 되는 거라서 그러네.”

“그럼 어쩔 수 없지. 내일 보세.”

“잘 가게.”

수고하라는 듯이 한쪽 손을 들어 보인 동료가 문을 닫고 나가자 잠시 주위를 살피던 혼다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앞에 놔둔 장부를 옆으로 치웠다.

그러자 규슈 지역의 지형지물과 군사 배치가 빼곡하게 기록되어 있는 지도가 나왔다.

“휴우. 정말 살 떨리는군. 누가 또 오기 전에 빨리 끝내야지.”

품속에서 여러 번 접힌 종이를 꺼내서 펼친 혼다는 얼른 붓을 집어 들어 지도를 보며 똑같이 그렸다.

그림에 취미가 있던 혼다는 어렵지 않게 모사模寫을 했는데 그동안 틈틈이 베껴 절반 이상 완성되어 있었기에 얼마 지나지 않아 작업을 다 끝냈다.

붓을 내려놓고 먹이 다 마르기를 기다린 혼다는 서가로 가서 원본을 얼른 원래 있던 자리에 꽂아 두고는 지도를 곱게 접어 소매 주머니에 숨겼다.

정리를 다 끝낸 혼다는 근무처를 나와 봉행소 정문으로 걸어갔다.

“이제 가십니까?”

입구를 지키고 있던 병사가 알은척을 하자 혼다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감추고 애써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

“일이 남아서 조금 늦었네.”

“조심해서 들어가십시오.”

“수고들 하게.”

“예.”

병사들의 인사를 받으며 정문을 통과한 혼다는 얼마쯤 걸어간 뒤 십년감수한 표정을 짓고는 발걸음을 빨리했다.

그런 혼다를 뒤에서 몰래 쫓아가는 인영들이 있었는데 바로 켄이치로와 부하들이었다.

평상복을 입고 멀찌감치 떨어져서 미행하던 켄이치로는 혼다가 평소 가던 길에서 벗어나 다른 방향으로 가자 눈을 번득였다.

“응? 이쪽은 저놈 집하고 반대 방향이잖아.”

“그러게 말입니다.”

“이거 점점 수상해지는군.”

“애들을 더 불러올깝쇼?”

그의 오른팔이자 치안소 십인장인 털보의 말에 잠시 고심하던 켄이치로는 이내 살짝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저쪽도 많아 봤자 세 명이라니까 우리끼리도 충분할 거야. 괜히 애들을 불렀다가 딴 놈 귀에 들어가면 남 좋은 일만 시키는 거잖아.”

그러자 털보는 누런 이빨을 내보이며 탐욕에 찬 웃음을 지었다.

“하긴 그것도 그렇습니다.”

“놓치기 전에 얼른 따라가자고.”

“예.”

이렇게 뒤에 꼬리가 붙은 줄도 모르고 혼다는 불안한 얼굴로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어느새 시가지를 벗어나 외곽으로 나간 혼다는 한적한 대나무 숲으로 들어갔다.

사방이 빽빽한 대나무로 둘러싸여 아직 해가 완전히 지지 않았는데도 어두컴컴한 이곳은 평소에도 인적이 드물어 은밀한 거래를 하기 딱 좋았다.

초조한 얼굴로 약속 장소에 도착한 혼다는 김근행 등이 서 있는 걸 보고 얼른 가까이 다가갔다.

“오셨구먼.”

“누가 볼지 모르니 얼른 거래를 끝냅시다.”

“이런 외진 곳에 누가 온다고 그러시오.”

“그래도…….”

“뭐, 우리도 빨리 끝내는 것이 좋으니 그럽시다. 일단 물건부터 보여 주시오.”

임지혁이 한쪽 손을 내밀자 혼다는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돈부터 주시오.”

“우릴 못 믿는 거요?”

“…….”

혼다가 말이 없자 임지혁은 양쪽 어깨를 으쓱이고는 작은 가죽 주머니를 하나 꺼내 던졌다.

쩔그렁.

얼떨결에 받아 든 혼다는 쇳소리와 함께 느껴지는 묵직함에 얼른 주머니를 열어 봤다.

그러자 반짝이는 은화가 눈에 들어왔다.

“약속한 대로 오십 냥이오.”

돈을 보자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탐욕에 찬 표정을 지은 혼다는 누가 뺏어 갈까 봐 주머니를 품속에 집어넣었다.

“이제 그쪽에서도 물건을 줘야 되지 않겠소.”

“여기 있소.”

임지혁은 혼다가 내민 두루마리를 건네받아 바로 김근행에게 넘겼다.

진짜가 맞는지 꼼꼼히 살펴본 김근행은 눈을 반짝이며 머리를 끄덕였다.

“그럼 난 이만 가 보겠소.”

“좋은 거래였소. 기회가 되면 다음에 또 봅시다.”

임지혁의 말을 들으며 막 혼다가 몸을 돌리려는 순간 갑자기 왼편에서 우렁찬 고함 소리가 들렸다.

“꼼짝 마라!”

대나무 숲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낸 건 바로 켄이치로와 치안소 병사들이었다.

번뜩이는 검을 뽑아 들고 순식간에 주위를 둘러싼 기세가 아주 흉흉했는데 켄이치로를 본 혼다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헉!”

“웬 놈들이냐!”

반사적으로 검을 빼 든 김근행의 외침에 켄이치로는 음흉한 웃음을 흘리면서 말했다.

“간자 주제에 목소리가 크구나.”

“누가 간자라는 거요!”

“후후후. 네놈들이 여기 있는 혼다와 짜고 관청에 있는 지도를 빼돌리려고 한 걸 이미 다 알고 있다. 그러니 쓸데없이 반항하지 말고 얌전히 오라를 받아라!”

켄이치로의 말에 김근행은 미간을 찌푸리고는 낮게 침음성을 흘렸다.

“으음.”

“뭣들 하느냐. 어서 이놈들을 포박해라!”

“옛.”

겁을 주기 위해 일부러 더 크게 대답한 병사들이 사방에서 거리를 좁혀 오자 김근행은 아랫입술을 꽉 깨물며 말했다.

“젠장! 어쩔 수 없다. 모두 처리한다. 덕생아.”

“네.”

“넌 임 서기를 보호해라.”

“염려 마십시오.”

등 뒤에서 들리는 김덕생의 대답을 듣자마자 김근행은 기합을 내지르면서 앞으로 튀어 나갔다.

무예를 익히지 않은 임지혁을 빼면 십 대 이로 불리한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과감하게 방어보다는 공격을 택한 거였다.

“이야압!”

“헉.”

예상치 못한 상황에 병사들은 크게 당황했고 빗살처럼 휘둘러진 김근행의 검은 정면에 있던 병사의 가슴을 훑고 지나갔다.

서걱.

“크아악!”

공격을 당한 병사는 비명을 내지르며 비틀비틀 양팔을 휘저으면서 뒤로 쓰러졌다.

“이놈이.”

“죽여 버려.”

‘어어.’ 하다가 동료를 한명을 잃게 된 병사들은 분노에 찬 얼굴로 덤벼들었다.

채챙! 챙!

“으악.”

“큭.”

순식간에 양쪽이 한데 뒤엉켜서 칼부림을 벌였는데, 김덕생이 지도를 가진 임지혁을 보호하며 철저히 방어적인 태도를 보이는 반면, 김근행은 적들 사이에 뛰어들어 마치 한 마리 성난 맹수처럼 검을 휘둘러 댔다.

보법을 밟으면서 날카롭게 찌르고 베는 김근행의 검에 벌써 병사 넷이 목숨을 잃고 바닥에 뒹굴었다.

어렵지 않게 제압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과 달리 오히려 이쪽이 밀리는 것 같자 뒤에서 싸움을 지켜보던 켄이치로는 눈썹을 꿈틀거리며 와락 인상을 구겼다.

“칠칠치 못한 것들.”

그러고는 또 한 명의 병사를 베고 있는 김근행을 노려보면서 양손으로 검을 잡고 달려 나왔다.

“죽어라!”

공중으로 도약해서 검을 내려치는 모습이 상대를 단번에 양단해 버릴 기세였다.

그걸 본 김근행은 어깨를 베인 적을 뒤로 밀치고는 급히 검을 위로 들어 올리며 방어 자세를 취했다.

츄앙.

날카로운 쇳소리와 함께 두 사람의 검이 허공에서 맞부딪쳤고 연이어서 십여 합을 나눴다.

켄이치로도 나름 실력 있는 무사였지만, 십팔반무예에 능통한 김근행을 당해 내기는 어려웠는지 처음에는 팽팽하던 것이 시간이 흐를수록 한쪽으로 기울었다.

“이익.”

그러자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켄이치로는 이를 꽉 악물고는 오른쪽 발을 앞으로 디디며 혼신을 다해 검을 찔러 넣었다.

벼락같은 일격에 그대로 있으면 가슴이 꿰뚫릴 상황이었다.

절체절명의 순간이었지만 김근행은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몸을 핑그르르 돌려 피하고는 지체 없이 반격을 펼쳤다.

“하압!”

“크흑.”

번쩍하며 김근행의 검이 자세가 무너진 켄이치로의 몸과 겹쳐지더니 시뻘건 피 보라가 허공에 확 뿌려졌다.

호흡이 약간 거칠어졌을 뿐 상처 하나 입지 않은 김근행과 달리 켄이치로는 내장이 훤히 다 보일 정도로 옆구리를 깊숙이 베였다.

검은 놓치지 않고 있었지만 힘이 빠졌는지 어깨를 축 늘어뜨린 켄이치로는 홱 몸을 돌려 김근행을 무섭게 노려봤다.

“네, 네놈이…….”

입고 있는 옷이 피를 흠뻑 젖었지만 켄이치로는 상관하지 않고 억지로 검을 들어 올리며 김근행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칼등을 타고 핏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것이 상태가 그다지 안 좋아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채 다섯 걸음을 옮기기 전에 켄이치로는 앞으로 푹 고꾸라졌다.

켄이치로를 처리한 김근행이 주위를 둘러보자 적들 대부분이 죽어 있었고 마지막 남은 병사의 가슴팍에 막 김덕생이 검을 쑤셔 박고 있었다.

푸욱.

“우으.”

“괜찮나?”

“예. 임 서기도 멀쩡합니다.”

조금 놀란 것 같지만 그래도 다친 곳 없이 멀쩡한 임지혁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김근행은, 언제 당했는지 한쪽에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혼다를 발견하고 살짝 이맛살을 모았다.

“빼낼 게 더 있었는데 아쉽게 됐군.”

“어차피 행적이 노출된 이상 계속 선을 유지하기 어려웠을 테니 차라리 잘된 건지도 모릅니다.”

김덕생의 말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 김근행은 아쉬움을 지우고 혼다의 시신을 뒤져 지도 값으로 줬던 은화를 챙겼다.

“이제 어떻게 하지요?”

위험은 넘겼지만 치안대에 속한 무사와 병사들을 죽였으니 더 이상 나가사키에 머물 수 없었다.

“할 수 없지. 시신이 발견되기 전에 서둘러 여길 뜨는 수밖에. 임 서기.”

“예.”

“범선에 물자를 다 실었다고 했지?”

질문을 하는 김근행의 의도를 파악한 임지혁은 얼른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좋아. 그럼 범선을 타고 귀환하면 되겠군.”

“다른 건 몰라도 사이토 상한테는 저희가 떠난다는 걸 알려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겠지. 챙겨야 될 짐도 있으니 일단 숙소로 돌아가세.”

“네.”

최대한 발각되는 걸 늦추기 위해 시신을 잘 안 보이는 수풀 사이에 유기한 세 사람은 서둘러 현장을 떠났다.

탕탕탕!

“으음.”

막 잠이 들려던 마누엘은 누가 시끄럽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몸을 뒤척이면서 일어났다.

“이 시간에 누구야?”

어두운 방 안을 손으로 더듬거리며 일어선 마누엘은 미닫이문 너머로 어른거리는 사람 그림자를 향해 물었다.

“누구요?”

“나 임지혁이오.”

“아니, 이런 밤중에 대체…….”

이상하게 생각하면서도 얼른 걸쇠를 풀고 미닫이문을 여니 한 손에 초롱불을 든 임지혁이 바로 앞에 서 있었다.

어딘가 외출했다가 오는 길인지, 소맷자락이 밤이슬로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마누엘의 시선이 어깨에 붙어 있는 잎사귀 쪽으로 움직이자, 그것을 눈치챈 임지혁이 얼른 손으로 떼어 내고 그에게 바짝 다가섰다.

“급하게 배를 출항시켜야 할 일이 생겼으니 얼른 준비를 해서 항구로 오시오.”

“지금 말입니까?”

마누엘은 깜짝 놀라 되물었다.

해가 진 지도 벌써 한참 뒤라, 웬만한 사람들은 모두 잠자리에 들었을 늦은 시각이다.

가게 앞을 밝히고 있는 등불과 야경꾼의 딱딱거리는 소리 외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짙은 어둠 속을 가로질러 배를 띄우러 가다니.

상식을 벗어난 소리에 마누엘은 침착하라며 말했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원래 밤에는 출항을 하지 않습니다. 사방이 깜깜하니 사고가 일어날 위험도 크고요.”

섣불리 나섰다가 암초에라도 부딪히면 그 일을 어쩔 것인가.

아무리 항해에는 초보라지만 그런 사정을 모르지는 않을 것인데 대체 왜 이리 서두르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으니 지금은 일단 내 말을 따라 주시오. 그럼 조금 이따가 배에서 만납시다.”

임지혁은 그 말만 남기곤 쌩하니 몸을 돌려 발소리도 내지 않고 계단을 서둘러 내려갔다.

“이것 참…….”

갑자기 저리 행동하는 걸 보면 뭔가 급한 일이 생기긴 한 모양이었다.

서두르라는 말을 들은 마누엘은 영문도 모르면서 어쨌든 허둥거리며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그래 봤자 원래 짐이 많은 편이 아니라, 옷을 갈아입고 행낭에 자질구레한 소지품들을 한 번에 몰아넣으니 금세 떠날 채비가 갖춰졌다.

불 하나 없는 어두운 여관 복도를 급히 달려 뛰어나간 마누엘은 지금쯤 단잠에 빠져 있을 선원들을 깨우기 위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리고 같은 시각, 김근행은 사이토 저택 정문을 쾅쾅 두드리고 있었다.

한참을 그러고 있으니 마침내 두꺼운 문이 조금 열리며 하인이 얼굴을 내밀었다.

“무슨 일입니까?”

밤중이라 짜증스러운 기색이 가득하던 하인은 얼마 전 저택을 방문했던 김근행의 얼굴을 알아보고 표정을 누그러뜨렸다.

“상단주에게 전해 주시오.”

그러며 김근행이 반으로 몇 번을 접어 작게 만든 쪽지를 건넸다.

“안으로 들어오시지 않고요.”

“아니, 다른 볼일이 있어서 이만…….”

김근행은 잘 부탁한다는 듯 고개를 끄떡이고 서둘러 그 자리를 떠났다.

갑작스러운 일에 당황하긴 했지만 일단 주인의 손님이 전해 주라며 맡긴 쪽지이니 함부로 할 수도 없는 노릇.

다행히 사이토는 다른 사람보다 늦게 자고 새벽에 일찍 일어나는 생활 습관을 가지고 있어서 오늘도 방에 불이 켜져 있었다.

“주인어른, 아직 안 주무십니까?”

“왜 그러느냐?”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방문 앞에서 그렇게 말한 하인은 며칠 전 왔던 손님이 방금 맡기고 간 것이라며 쪽지를 그에게 건넸다.

“흐음.”

쪽지를 펼쳐 내용을 확인한 사이토의 안색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그러고는 앞에 서 있는 하인을 보며 말했다.

“가서 이토와 요시미 행수를 불러오너라.”

“예.”

허리를 굽히며 대답한 하인이 뛰어가자 몸을 돌려 방으로 들어온 사이토는 낮게 침음성을 흘리고는 쪽지를 촛불에 태워 없애 버렸다.

“결국 사단이 생기고 말았군.”

큰일을 앞두고 이런 사건이 터져 절로 짜증이 났지만 지금은 자칫 불똥이 자신에게 튀기 전에 어떻게든 수습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잠시 뒤 사이토는 전갈을 받고 급히 달려온 이토와 요시미 행수에게 짧게 상황을 설명하고 대책을 세웠다.

이런 가운데 주변 정리를 끝낸 김근행 일행은 각자 짐을 챙겨 들고 범선이 정박해 있는 부두로 나왔다.

어둠이 내린 부두는 인적이 뚝 끊겨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마저 풍겼는데 가끔씩 술에 취해 널브러져 있는 주정뱅이와 고양이만이 서둘러 발걸음을 옮기는 김근행 일행을 쳐다봤다.

그렇게 얼마쯤 갔을까 줄지어 정박해 있는 선박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불을 환하게 켜 놓은 범선이 보였다.

바로 얼마 전 매입한 요르카호였다.

가까이 다가가자 이리저리 바쁘게 움직이는 선원들에게 지시를 내리고 있던 마누엘이 세 사람을 발견하고는 앞으로 왔다.

“오셨습니까.”

“출항 준비는 다 끝났소?”

“여기 있는 식수만 실으면 됩니다.”

힐끗 시선을 돌려 항해 중에 마실 식수가 든 오크통을 선원들이 배에 옮겨 실고 있는 걸 본 김근행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최대한 빨리 출항을 해 주시오.”

“알겠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오밤중에 갑자기 배를 띄우게 된 마누엘로서는 당연한 물음이었지만 김근행은 정색을 하며 대답을 피했다.

“그건 알 필요 없소.”

이유를 설명해 주지 않는 것이 약간 불만스러웠지만 마누엘도 안 좋은 기억만 있는 나가사키에 오래 머물고 싶은 마음이 없었기에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일단 배에 오르십시오.”

마누엘의 말에 세 사람은 현측에 설치해 놓은 잔교를 밟고 범선으로 올라갔다.

그렇지 않아도 며칠 뒤 떠나려고 화물을 대부분 실어 놓은 상태였기에 출항 준비는 빠르게 진행됐다.

얼마 있지 않아 모든 준비가 끝나자 마누엘은 선실에 내려가지 않고 함교에 서 있던 김근행에게 다가가 입을 열었다.

“준비가 완료됐습니다.”

“그럼 출항하시오.”

“예. 잔교와 홋줄을 걷어라!”

마누엘의 외침에 선원들은 큰 소리로 복창을 하며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으싸으싸!”

널빤지를 덧대 만들어진 잔교가 치워지고 육지와 선박을 연결해 놓은 훗줄을 모두 걷어 내자 마누엘이 재차 지시를 내렸다.

“출항!”

잠시 뒤 돛을 펼친 범선은 어둠을 가르면서 서서히 부두를 빠져나와 먼 바다로 향했고 세 사람은 점점 멀어지는 육지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안도와 함께 약간 아쉬운 듯한 표정을 지었다.

다음 날 켄이치로를 포함한 치안소 병사들과 혼다가 한꺼번에 출근하지 않고 실종되자 한동안 나가사키 전체가 발칵 뒤집혔다.

실종자가 일반인이 아닌 관공서에서 근무하는 이들이었기에 더 난리법석을 떨었는데, 사이토 코자에몬이 손을 써서 시신을 없애 버리고 적당히 돈을 먹이자 얼마 지나지 않아 흐지부지 미제 사건으로 처리되어 버렸다.

예로부터 더덕이 많이 난다고 해서 이름이 붙여진 가덕도加德島은 부산포 남서쪽에 위치해 있으며 해상 교통의 요지이자 중요한 군사 거점이었다.

그 때문에 오래전부터 봉수대와 수군 병영이 설치되어 있었다.

끼룩끼룩.

갈매기 떼가 한가롭게 날아다니고 고운 모래가 펼쳐진 아름다운 해변 한가운데에 왜구의 침입을 감시하기 위한 통나무로 만들어진 망루가 하나 세워져 있었다.

망루에는 삼지창을 든 조선군 병사 두 명이 약간 나른한 얼굴로 경계를 서고 있었다.

“배도 부르고 날씨도 따뜻한 것이 낮잠이나 한숨 잤으면 소원이 없겠네.”

그러자 옆에 있던 동료가 살짝 눈가를 찡그리며 말했다.

“꿈도 꾸지 마. 지난번에 졸다가 순찰을 돌던 별장 어른한테 걸려서 치도곤을 당했잖아.”

“아하하. 잠이 쏟아지는데 그럼 어쩔 수 있나. 어쨌든 애꿎게 곤욕을 치른 자네한테는 미안하게 됐네.”

“지난 일이니, 뭐. 하지만 두 번은 안 봐줄 테니 그리 알아.”

그렇게 동료가 엄포를 놓자 병사는 웃으면서 다시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교대 시간만 기다리며 한참을 그렇게 서 있는데 문득 아까 잠 타령을 하던 병사가 전방을 가리켰다.

“이봐, 자네도 저거 보이나?”

“뭔데.”

“저기, 무슨 배같이 생긴 게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잖아.”

병사의 재촉에 동료가 손을 이마에 대고 가늘게 뜬 눈으로 바라보니 과연 저 앞에 낯선 배 한 척이 바다 위에 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우리 수군 배는 아닐 테고.”

그냥 지나가는 상선인가, 하며 중얼거리던 동료는 순간 퍼뜩 놀란 듯 몸을 곧추세우고 큰일 났다며 난리를 피웠다.

“왜 그래?”

“저, 저거, 왜선일세!”

“뭐, 정말이야?”

“아무렴! 왜구들이 마을을 습격한 게 오래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잊어먹을까. 놈들이 세간 하며 독에 들어 있던 쌀까지 싹 쓸어가서 우리 작은아버지는 화병으로 앓아누우시기까지 했다고.”

“아, 아무튼 진정하게. 왜선이 꼭 이쪽으로 온다는 법도 없으니.”

괜히 소란을 피워 군영 분위기를 흉흉하게 만들어서 득 될 것도 없다며 병사가 일단 동료를 타일렀다.

하지만 두 사람의 헛된 바람을 비웃기라도 하듯, 왜선은 정확하게 뱃머리를 가덕도 쪽으로 향하고 점점 거리를 좁혀 왔다.

“이봐.”

침을 꿀꺽 삼킨 동료가 병사를 바라보자 그는 굳은 얼굴을 하고 망루에 달려 있는 종을 세차게 쳐 댔다.

땡땡땡땡!

놋쇠그릇을 사정없이 내리치는 것처럼 날카로운 종소리가 사방으로 퍼져 나가자, 늦은 오후의 나른함에 감싸여 있던 군영은 순식간에 벌집을 쑤신 듯 소란스러워졌다.

“뭐야, 무슨 일이야?”

“망루에서 누가 종을 치고 있어!”

사람들이 웅성대는 것과 동시에 허리에 칼을 찬 군관이 병사 둘을 거느리고 망루의 계단을 득달같이 달려왔다.

“누가 종을 쳤나?”

“제, 제가 쳤습니다!”

손을 들고 앞으로 나선 그는 이마의 땀을 훔치며 손가락으로 바다 너머를 가리켰다.

“왜선으로 보이는 배 한 척이 해안가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 말에 군관은 망루 가장자리 기둥을 잡고 몸을 기울여 앞을 바라보았다.

“……!”

때마침 파도는 잔잔하고 바람도 순풍이라, 왜선은 아까 보다 훨씬 더 해안선에 근접해 있었다.

비록 근처에 왜인들의 출입이 허락된 부산포가 있다 하지만 그냥 지나쳐 가는 길이라고 하기에는 가덕도와 너무 가까웠다.

“다들 전투대형을 갖춰라!”

“예!”

군관의 호령이 떨어지자 병사들은 저마다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정해진 자리를 향해 재빨리 움직였다.

그리고 망루에서 내려온 군관은 스무 명을 이끌고 직접 해안가로 달려 나갔다.

깃발도 달지 않은 정체불명의 왜선이 해안가 바로 앞, 수심이 얕은 곳까지 들어와 멈춰 서자 군관은 즉시 병사들을 이끌고 배 위로 뛰어올랐다.

“이놈들, 꼼짝 마라!”

검을 뽑아 든 군관이 엄한 표정으로 소리치자 왜선 선원들은 의외로 반항하는 기색 없이 순순히 양손을 위로 쳐들고 공격할 의사가 없다는 것을 표시했다.

그리고 그들 사이로 선원들과는 다른 옷을 입은 젊은 사내가 천천히 걸어 나왔는데 바로 코자에몬 상단의 후계자인 이토였다.

직감적으로 이놈이 우두머리구나, 하고 눈치챈 군관이 매서운 눈빛으로 노려보는데 그가 입을 열어 말했다.

“김근행.”

“……?”

“김근행을 불러 주시오.”

서툴지만 분명한 조선말로 요구하는 사내의 모습에 말문을 못 알아들은 병사들은 서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군관은 이내 무슨 일인지 짐작한 듯 약간 누그러진 표정으로 옆에 있던 병사를 불러 속삭였다.

“당장 달려가서 군영에 계신 손님을 모셔 오너라.”

“네?”

“가서 그리 말하면 알 것이야.”

“아, 알겠습니다.”

군관의 재촉에 병사는 서둘러 고개를 숙이고 허겁지겁 갑판을 내려갔다.

잠시 뒤 평상복 차림에 갓을 쓴 김근행이 일행과 함께 병사의 안내를 받아 현장으로 달려왔다.

“날 찾아온 사람이 누구요?”

군관은 마치 상관에게 하듯 정중한 태도로 김근행을 대하며 한쪽 팔을 들어 이토를 가리켰다.

“이자입니다.”

“이토 상, 무사히 오셨구려.”

“반갑습니다.”

미소 띤 얼굴로 가까이 다가가 인사를 나눈 김근행은 제일 중요한 화물부터 확인했다.

“물건은 가져왔소?”

“물론이지요. 확인해 보시겠습니까?”

“부탁하오.”

이토가 살짝 뒤를 돌아보며 손짓하자 건장한 체격의 선원 두 명이 선창에서 묵직한 포대를 하나 꺼내 가져왔다.

그러자 김근행은 품속에서 작은 소도를 꺼내 포대를 묶어 놓은 끈을 끊고 내용물을 살펴봤다.

“순도가 높은 유황석입니다.”

과연 이토의 말대로 노란색이 진한 게 품질이 아주 좋아 보였다.

김근행은 흡족한 표정을 지어 보였고 잠시 뒤 병사들은 무기를 내려놓고 선박에 실린 유황 포대를 하역하고 대신 군영에서 소달구지로 소금이 담긴 자루를 가져와 실어 줬다.

모든 작업이 끝나자 어느새 해가 어둑어둑 지는 늦은 오후가 됐다.

물건과 수량에 이상이 없는 걸 확인한 김근행은 이토를 보며 부드러운 어투로 말했다.

“좋은 거래였소.”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아 참. 그러고 보니 나가사키에서 우리 대신 뒷마무리를 깨끗하게 해 줬다던데, 인사하는 것이 늦었구려. 고맙소.”

“아버님께 전해 드리죠. 그런데 다음 거래는 언제쯤 하면 되겠습니까?”

김근행이 고개를 살짝 돌려 옆에 서 있는 임지혁에게 시선을 주자 그가 대신 대답했다.

“저희는 언제든 가능합니다.”

소금 생산량이 풍부하다는 걸 임지혁이 의도적으로 은근슬쩍 흘리자 어렸을 때부터 후계자 수업을 받았다지만, 아직 연륜이 부족한 이토는 몸이 단 표정을 그대로 얼굴에 내비치며 입을 열었다.

“그럼 한 달 뒤에 다시 거래를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흐음.”

사전에 최대한 유황을 확보하라는 지시를 받았지만 김근행은 일부러 바로 대답하지 않고 잠시 뜸을 들인 뒤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럽시다.”

김근행의 승낙에 이토는 얼굴을 활짝 폈다.

“그러면 그때 다시 뵙지요.”

“조심해서 가시오.”

“예.”

서로 만족스러운 거래였기에 아주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며칠 뒤 밀수해 온 유황석은 봉황상단이 소유한 화물선에 실려 마포나루까지 가져간 다음, 거기서 다시 병기창이 있는 남한산성으로 은밀히 옮겨져 화약 제작에 사용됐다.

이로써 화약 부족 문제는 어느 정도 숨통이 트이게 됐다.

“그럼 이제 화약 생산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지겠군.”

도현이 한시름 놨다는 표정을 짓자 이완과 장 총관은 머리를 숙이며 말했다.

“심려를 끼쳐 드려 죄송하옵니다.”

“이번 일은 경험 삼아 앞으로는 병기창에서 필요한 재료 수급에 차질이 생기지 않도록 만전을 기하게.”

“명심하겠사옵니다.”

“그건 그렇고 군을 운용하는 데 꼭 필요한 핵심 물자인 유황을 언제까지 왜국에 의존할 수는 없는 일이고 국내에서 유황 광산을 찾는 건 얼마나 진척이 됐나?”

시선을 받은 주작단 단장 이완이 얼른 대답을 했다.

“하명하신 대로 이의립이라는 자를 시켜 경주 만호봉 일대를 탐광하고 있사옵니다.”

“대계를 이루기 위해서는 유황 광산을 반드시 찾아내야 되니 경이 신경을 쓰고 혹시라도 이 사실이 외부로 흘러나가지 않게 각별히 주의하게.”

“예.”

실제로 왜국 막부가 무기금수조치를 취하며 유황을 구하기 어려워지자 조선 조정은 국내 광산을 찾기 시작했고 오랜 노력 끝에 마침내 순도가 상당히 높은 유황 매장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걸 기억해 낸 도현은 유황 밀수와 별도로 주작단에 탐광을 지시하며 광산 발견자로 기록된 이의립을 실무자로 임명하고 위치도 경주 만호봉 일대로 콕 찍어 줬다.

이런 도현의 지시에 처음에는 반신반의했지만 탐광을 진행하면서 정말 유황 광맥의 흔적이 곳곳에 발견되자, 이완은 그의 능력에 다시 한 번 감복했다.

다 회귀 전에 공부했던 역사서에 기록된 내용이라는 걸 알 수가 없던 이들로서는 어쩌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리고 장 총관은 염전을 더 늘려서 국내 수요와 교역 물량을 충당할 수 있도록 하게.”

“그렇지 않아도 전라도 쪽에 위치한 무인도 하나를 선정해 염전을 추가로 조성 중입니다. 늦어도 올해 말에는 생산을 개시할 수 있을 것이옵니다.”

초기 시설 비용을 제외하면 인건비만 들어가고 아주 적은 비용으로 귀한 소금을 계속 생산해 낼 수 있는 염전은 봉황상단의 알토란같은 사업 중 하나였다.

올해에만 천일염 판매로 삼십만 냥에 달하는 수익을 올리며 도현의 주머니를 두둑하게 만들어 줬다.

그뿐 아니라 거란족과 교역을 통해 군마를 확보하고 왜국에서는 유황을 밀수해 오는 데 톡톡히 한몫을 했다.

“수고했어.”

“한 가지 더 드릴 말씀이 있사옵니다.”

“말해 보게.”

“코자에몬 상단에서 소금 외에도 면포와 인삼을 추가로 구매하길 희망하는데, 어떻게 할지 하교를 내려 주시옵소서.”

“원하는 물량이 얼마나 되지?”

“아직 구체적인 말은 없었지만 왜관에서 거래를 허용한 수량만큼을 더 가져갔으면 하는 눈치였사옵니다.”

잠시 생각을 하던 도현은 이내 앞에 있는 장 총관을 보며 입을 열었다.

“그건 너무 많고 각각 화물선 한 척 분량만큼 가져갈 수 있도록 하게. 그리고 대금은 은으로 받고 말이야.”

“알겠사옵니다.”

도현이 대금을 현물이 아닌 은으로 받으라는 건 다 이유가 있었는데 앞으로 화폐 거래를 활성화시키기 위해 현재 유통되고 있는 상평통보 외에 추가로 제작할 금화와 은화의 재료로 쓰기 위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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