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권
대마도 정벌 2
대마도는 조선과 일본 사이에 있는 섬으로 695㎢ 규모의 꽤 큰 규모였지만 경작지가 전체 면적의 4%도 안 될 정도로 지형이 척박한 곳이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지형적인 이점을 활용해 양국 사이에서 중계무역으로 먹고살았는데, 고려시대에는 우리 왕에게 조공을 바치고 대신 쌀과 콩 같은 곡식을 받아 가며 아주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
이런 사이는 조선시대까지 계속 이어졌는데 대마도의 지배자인 도주는 조선 국왕에게 벼슬을 하사받아 일종의 속도 형식으로 조선에 편입됐다.
이걸 가장 잘 보여 주는 것이 1488년 당시 명나라 황제였던 영종의 명을 받아 사신으로 온 동월董越이라는 관리가 쓴 일종의 견문록인 조선부朝鮮賦에 나와 있는 조선팔도총도朝鮮八道總圖라는 지도에 대마도가 조선의 영토로 표기돼 있었다.
조선의 오랜 골칫거리인 왜구가 대마도를 근거지로 활동하자 세종이 이종무 장군을 보내 정벌을 하기도 했었고 임진왜란 때에는 일본군의 침략 거점으로 활용됐다.
이렇게 때때로 배신을 하기도 했지만, 나름의 생존을 위한 행동이었다.
어쨌든 대마도는 거리상 일본보다 조선에 더 가까웠고, 여러 역사서와 지도는 물론이고 일본 막부조차 대마도를 자신의 영토로 생각하지 않았다.
지형적으로 봐도 대마도는 부산에서 불과 50km밖에 떨어져 있지만 일본 규슈와는 거리가 132km나 됐다.
그러던 것이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서 여러 가지 내부 사정으로 대마도를 신경 쓰지 못하는 사이에 은근슬쩍 일본으로 넘어가고 말았다.
드넓은 만주뿐만 아니라 대마도도 되찾아야 되는 우리의 영토인 것이다.
더불어서 임진왜란 때 일본에게 당한 치욕을 조금이나마 되갚는 일이기도 했다.
아무튼 도현의 폭탄 발언은 기껏해야 해당 지역 고을의 수령이나 군영 책임자를 문책하는 정도에서 마무리를 지을 거라고 안이하게 생각하던 신료들을 큰 충격과 혼란에 빠뜨리기에 충분하다 못해 넘쳤다.
대전 회의가 끝나자 의정부로 자리를 옮긴 대신들은 여전히 놀람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 다들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허어. 이것 참, 전하께서 과감하신 건 알고 있었지만 이런 결정을 내리실 줄은 정말 몰랐구려.”
우의정 송시열의 말에 다른 대신들도 동의하듯 머리를 작게 끄덕였다.
“그러게 말입니다.”
“대마도를 정벌하시겠다니…….”
“병판도 전하께서 이런 결단을 내리실 줄 정말 몰랐소이까?”
그러자 병조판서 임경업은 크지는 않지만 묵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장계 자체가 대전 회의 중에 갑자기 올라온 것인데 어찌 알 수 있었겠습니까. 그리고 갑작스럽기는 해도 그동안 왜구가 백성들을 고통스럽게 하고 나라에 피해를 입힌 걸 생각하면 오히려 늦은 감이 있는 것 아니겠소. 난 전하께서 현명한 결단을 내리신 거라 봅니다.”
옆에 앉아 있던 좌의정 김종일이 한쪽 손으로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임경업의 이야기를 거들었다.
“내 생각도 같소. 연례행사처럼 해안 지역 주민들을 괴롭히고 온갖 노략질을 일삼는 왜구의 준동을 언제까지 참고 있어야 되겠소.”
왜구 때문에 해금령을 내릴 만큼 그 피해가 심각했기에 다들 동조하는 표정을 짓는 가운데 우의정 송시열이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왜구들의 행태를 생각하면 분노가 치밀어 오르지만 우리가 과연 멀리 바다 건너에 있는 대마도를 정벌할 여력이 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겠소. 감정에 치우쳐서 일을 저질렀다가 만일 실패라도 한다면 그 후폭풍은 감당하기 어려울 거외다.”
“우상은 전하께서 하시는 일마다 왜 그렇게 부정적이시오?”
“뭐요!”
송시열이 눈썹을 추켜올리며 언성을 높이자 좌의정 김종일도 지지 않고 상대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이야기를 했다.
“지금도 시작부터 초를 치고 있지 않소이까!”
“말이 심하지 않소!”
“그럼 내 이야기가 틀렸단 거요!”
“이 사람이!”
얼굴을 벌겋게 상기시킨 채 두 사람이 금방이라도 멱살을 잡고 싸울 것처럼 으르렁거리자 영의정인 박황이 황급히 나서서 진정시켰다.
“어허. 왜들 이러시오? 다른 신료들한테 모범을 보여야 될 두 사람이 이렇게 싸워서야 되겠소?”
“흐흠.”
“험.”
헛기침을 하며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지만 다행히 두 사람은 말싸움을 멈췄다.
“그동안 백성들을 힘들게 했던 왜구를 징벌해야 한다는 전하의 뜻에는 동의하지만, 우상이 염려하는 대로 준비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으면 큰 낭패를 볼 수 있으니 신하 된 도리로 충언을 드려야 되지 않겠소.”
“내 말이 그거외다.”
“아무래도 이 문제는 군부를 맡고 있는 병판이 대답을 해 줘야 될 것 같소이다.”
순간 방 안에 모인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게 된 임경업은 당황하지 않고 담담한 얼굴로 대답했다.
“전하의 의중에 따라 조금 달라지겠지만 결론부터 이야기를 하자면 불가능한 일은 아닙니다.”
“그게 정말이오?”
송시열이 의구심 가득한 표정으로 쳐다보자 임경업은 살짝 눈썹을 찡그렸지만 화는 내지 않고 이야기를 계속 이었다.
“어차피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다 들통 날 일인데 왜 거짓말을 하겠소.”
“그렇긴 하지만…….”
여전히 못 믿겠다는 듯이 송시열이 말끝을 흐리자 임경업은 간단히 이유를 설명했다.
“운 좋게도 수군은 지난 병자호란 때 피해를 거의 입지 않은 데다 전하의 선견지명으로 기존 판옥선보다 절반 이상 크고 화포를 더 많이 장착하는 새로운 군선을 한창 건조 중인데, 정벌에 나설 즈음에는 이 배들이 모두 완성될 거외다. 그리고 대마도는 섬이 작고 도주가 보유한 병력도 많지 않으니 적은 원정군만으로도 뜻을 이룰 수 있을 겁니다.”
자신에 찬 임경업의 말에 대신들은 서로 귀엣말을 주고받으면서 머리를 끄덕였다.
“병판의 말이 사실이라면 주상 전하의 뜻을 받들어 이번 기회에 왜구들을 벌해, 조선과 왕실의 위엄을 보여 주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어떻소?”
정치적인 이해관계 때문에 살짝 시비를 걸기는 했지만 송시열도 왜구 때문에 피해가 얼마나 큰지 잘 알고 있었기에 더 이상 반대하지 않았다.
“뭐, 정벌에 나설 여력이 있다면 저도 찬성입니다.”
나머지 대신들은 대부분 왕당파였기에 도현의 결정을 지지했다.
“다시는 왜구들이 노략질을 못 하도록 단단히 혼을 내 줘야 됩니다.”
“맞소이다.”
대신들을 둘러본 영의정 박황은 차분한 목소리로 마무리를 지었다.
“그러면 모두 찬성하는 걸로 알고 정벌 준비에 최선을 다합시다.”
“예.”
이렇게 갑자기 떨어진 폭탄에 대신들이 모여 머리를 맞대고 의견을 나누고 있을 때 정작 일을 벌인 원흉(?)인 도현은 거처로 돌아와 느긋하게 간식으로 나온 약과를 먹고 있었다.
“으음. 달달하고 퍼석한 느낌이 없는 게 제대로 만들었군.”
그러자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던 칠현이 작게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후우. 지금 약과가 입으로 넘어가십니까?”
“왜 또 시비야?”
“대마도 정벌 말입니다. 전하께서 하시려는 건 북벌 아니었습니까?”
“맞아.”
“왜구 때문에 화가 나신 건 알겠지만 이건 너무 뜬금없지 않사옵니까.”
어린 시절부터 함께해 온 최측근이었기에 감히 이런 이야기를 꺼낼 수 있는 칠현의 말에 도현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고는 상대를 쳐다봤다.
“정말 내가 아무런 생각 없이 즉흥적으로 일을 저지른 것처럼 보여?”
“……설마.”
식혜가 든 그릇을 들어 한 모금 마신 도현은 보료 팔걸이에 몸을 살짝 기대고는 이야기를 했다.
“솔직히 왜구가 나타난 건 계산 밖이었지만 대마도 정벌은 예전부터 계획하고 있던 일이야. 청국이 바보도 아니고 우리가 내부 정리를 하고 급격히 군비를 확충시킨다면 자신을 노린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할 리가 없겠지.”
“그, 그렇지요.”
“명을 치는 데 장해물이 될까 봐 대군을 몰아 압록강을 넘어와서 삼전도의 치욕을 안긴 저들이야. 거기다가 섭정을 맡고 있는 도르곤은 야심이 클 뿐만 아니라 의심 또한 많은 인물이지. 선대왕 때부터 지금까지 매년 사신을 보내 우리 내부 사정을 염탐하는 걸 보면 알 수 있잖아. 아마 조금이라도 의심이 간다면 지체 없이 군대를 일으켜 병자호란과 같은 일을 다시 벌이고도 남을 거야.”
안색이 굳어진 칠현은 떨리는 목소리로 애써 그의 말을 부정했다.
“설마 아직 강남으로 옮겨 간 명과 대치 중인데 그렇게까지 하겠사옵니까?”
그러자 도현은 손가락 하나를 들어 좌우로 흔들면서 말했다.
“그러니까 더 위험한 거야.”
“예?”
“생각을 해 봐. 대륙의 패자로 확고히 자리 잡고 더 이상 위협을 할 상대가 없다면 동쪽 구석에 있는 우리 조선 따위는 안중에도 없겠지. 하지만 아직 그게 아니니까, 지난번처럼 명과 손을 잡고 뒤를 칠까 봐 먼저 칼을 빼 들 수 있다는 거야.”
“으으음.”
미처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기에 충격을 받은 칠현은 사색이 된 채 자신도 모르게 신음성을 흘렸다.
심양 관저에 있으면서 도현을 따라 전장을 여러 번 경험해 팔기군의 무서움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두려움이 더 컸다.
“그런 청국의 의심을 피하고 군비 확충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대마도를 치는 거야. 국경을 접한 압록강이 아닌 남쪽에서 왜구를 토벌한다면 도르곤도 우리가 군대를 움직이는 것에 대해 간섭하지 않겠지.”
“아!”
“백성들을 괴롭히는 왜구도 토벌하고 도르곤의 의심도 피하면서 동시에 군사력까지 키울 수 있으니, 이거야말로 일석삼조 아니겠어?”
도현의 말에 칠현은 감탄성을 내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대단하십니다.”
그런 칠현을 보며 입가에 미소를 지은 도현은 읊조리듯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아직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겠지만 이번 원정은 북벌이라는 대업을 이루기 위한 첫걸음이 될 거야.”
정벌이 결정되자 조정은 정신없이 전쟁 준비에 들어갔는데 그러는 사이에 도현은 중요한 제도 개편을 하나 단행했다.
그건 바로 비변사備邊司의 역할 조정과 개혁이었다.
원래 비변사는 외적의 침입이나 반란이 발생했을 때 임시로 구성해 군사전략과 전쟁 수행 계획 들을 짜는 기구였는데, 중종5년에 있었던 삼포왜란과 뒤이어 벌어진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 큰 전란이 계속해서 이어지자 상설기구화되고 권한도 막강해졌다.
제대로 운영이 됐다면 유사시 신속한 의사 결정을 통해 군대를 효율적으로 운용할 수 있다는 분명한 장점이 있었지만, 연이은 전란을 겪으며 권한과 영향력이 비대해지자, 원래 맡은 역할에서 벗어나 비빈妃嬪 간택은 물론이고 다른 정치적인 사안에까지 관여하는 등 여러 가지 폐단이 발생했다.
이건 곧 왕권 약화를 의미했는데 강력한 전제 왕권을 지향하는 도현 입장에서는 어떻게 해서든 정리를 해야 될 문제였다.
도현은 대마도 정벌을 핑계로 비변사에 손을 댔는데, 우선 국방과 치안에 관계된 업무만 남기고 나머지 권한은 모두 의정부와 각 행정부서에 넘겨 원해 설립 목적에만 충실하도록 했다.
그리고 수장인 도제조의 명칭을 사령으로 변경하고 지금까지 삼정승 중 한 명이 맡아서 하던 걸 바꿔 국왕인 도현이 수행하도록 했다.
그와 함께 부사령에는 병조판서인 임경업이 겸임하고 나머지 구성 인원도 문관을 배제하고 철저히 병부에 관계된 인물을 앉혔다.
이렇게 교통정리를 하자 그동안 상대적으로 차별받던 무관들은 벼슬자리가 늘어나자 크게 환영했고, 문관들도 비변사에 집중된 권한이 분산되는 것에 만족했다.
도현은 궁극적으로 기존 병조는 각 지휘관의 임명, 둔전 운영, 징병과 군율 집행 등 행정적인 임무를 맡아서 하고 비변사는 훗날 일차세계대전 초기 독일제국이 승리를 거두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참모본부처럼 작전 연구, 작전 계획의 수립, 작전의 지도指導 등, 용병 작전을 전담해 수행하도록 할 계획이었다.
며칠 뒤 개편을 하고 첫 번째 비변사 회의가 열렸다.
“주상 전하 납시오.”
대전 내관이 큰 소리로 도현의 등장을 알리자 의자에 앉아 있던 무관들은 다들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숙이며 예를 갖췄다.
궁녀들이 열어 준 문을 지나 회의실 안으로 걸어 들어온 도현이 가운데 있는 상석에 앉으며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들 좌정하시오.”
“예.”
참석자들이 모두 착석하자 도현은 오른편에 앉은 병조판서 임경업에게 시선을 주며 입을 열었다.
“보고를 시작하시오.”
“먼저 대마도 병력을 감안해서 원정군 규모는 오천에서 일만 명 수준이 적당하다고 의견이 모아졌습니다.”
“수군을 포함한 숫자인가?”
“아닙니다. 순수하게 섬에 상륙해서 적과 싸움을 벌일 지상군만 계산한 것이옵니다. 수군은 경상 좌, 우수영에서 전선 육십 척과 병력 삼천 명이 동원될 계획이옵니다.”
“그럼 모두 합해서 최고 일만 삼천 명이군.”
“그렇사옵니다.”
얼핏 생각하기에 많게 느껴지지만 세종 때 대마도 정벌에 나섰던 이종무가 이백이십 척에 달하는 선박과 일만 칠천 명의 군사를 끌고 간 것과 비교하면 오히려 적은 편이었다.
“군사와 병량 같은 보급 물자까지 다 실고 가려면 배가 부족할 것 같은데?”
도현의 지적에 임경업은 미리 예상이라도 한 듯 바로 대답했다.
“병량과 보급 물자 수송은 바다를 건널 수 있는 대형 선박을 보유한 한양 시전상인과 경강상인 그리고 동래내상에게 맡길 생각이옵니다.”
경강상인과 내상은 예전부터 바다와 강을 무대로 장사를 해 오던 상단이니 당연히 가지고 있는 배가 많았고, 한양 시전상인 또한 최근 금난전권을 반납하면서 도현에게 대륙과의 교역을 허락받아 새로 대형 판옥선을 건조하며 남게 된 전선 수십 척을 불하받았다.
이들이 보유한 배를 모두 동원한다면 충분히 수군 대신 보급 물자를 실어 나를 수 있었는데 이렇게 되면 굳이 다른 지역의 수군 전선을 움직이지 않아도 되기에 아주 효율적으로 군을 운용하는 것이 가능했다.
일종의 민간 위탁이라고 볼 수 있었는데 가장 폐쇄적인 집단인 군부에서 이런 혁신적인 생각을 스스로 해냈다는 것에 도현은 내심 깜짝 놀랐다.
“호오. 그거 괜찮은 생각이군. 누가 의견을 낸 거지?”
“고만정이라고 병조에 사직(정오품)으로 있는 자가 낸 생각이옵니다.”
“그렇군.”
고만정이라는 자도 대단했지만 자칫 헛소리라고 치부할 수도 있는 이런 의견을 묵살하지 않고 정벌 계획에 반영한 군 수뇌부의 태도에 도현은 아주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병력과 물자 수송은 계획한 대로 처리하고 큰 피해 없이 적을 단번에 제압할 수 있게 출전 전에 군사들을 단단히 훈련시키도록 해.”
“옛.”
모여 있는 무관들을 스윽 훑어본 도현은 묵직한 음성으로 이야기를 이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번 원정은 단순히 왜구를 벌하고 소굴을 없애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임진왜란 이후 우리 손에서 벗어나 있던 대마도를 완전히 조선의 영토로 편입시키는 것이 목표라는 걸 명심하시오.”
그러자 무관들은 다들 결연한 눈빛으로 머리를 숙이며 크게 대답했다.
“알겠사옵니다, 전하.”
그렇게 아침부터 시작된 회의는 정오를 넘겨 오후 늦게까지 계속 이어졌다.
사락사락.
조용한 방 안에 종이 넘기는 소리만이 가만히 울려 퍼졌다.
등잔불 하나를 서탁 위에 올려놓고 혼자서 지도와 군부에서 올린 보고서들을 살펴보고 있던 도현은 피곤한 듯 졸린 눈을 슥슥 비볐다.
그냥 다 때려치우고 내일 할까 싶기도 했지만 이내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오늘 할 일을 미루면 내일은 두 배로 일해야 되잖아. 아으, 귀찮아.”
언제라도 눕기만 하면 바로 잘 수 있게 펼쳐 놓은 금침을 바라보며, 도현은 간신히 유혹을 떨쳐 냈다.
“시원한 거라도 마시면 잠이 좀 깨겠지.”
그러면서 옆에 밀쳐놓은 주전자를 한 손으로 들어 보니, 어느새 다 마셔 버렸는지 속이 텅텅 비어 있었다.
쯧 하고 혀를 찬 도현이 밖에서 불침번을 서고 있을 내관을 부르려는 순간 문이 스르륵 열렸다.
“중전?”
깜짝 놀란 도현의 말에 중전이 살짝 웃으며 안으로 들어왔다.
“시장하시지요?”
“아니, 별로…….”
엉겁결에 대답한 도현은 얼떨떨한 표정을 숨기지도 않은 채 중전에게 물었다.
“중전께서 이런 한밤중에 무슨 일로 여기까지 오신 거요?”
“섭섭합니다, 전하. 부부지간인데 꼭 볼일이 있어야만 합니까?”
“그, 그런 건 아니오.”
당황해하는 그의 모습이 우스웠는지 중전은 낮게 웃음소리를 내고는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국사를 열심히 돌보시는 건 좋지만, 너무 늦게까지 깨어 계시면 옥체에 무리가 갑니다.”
“안 그래도 매일 칠현이한테 같은 소리를 듣고 있으니, 중전까지 그러지 마시오.”
“후훗, 그렇습니까.”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란 칠현이는 중전도 깊히 신뢰하는 도현의 최측근이니만큼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나저나 아까부터 맛있는 냄새가 나는데…….”
“코도 밝으셔요. 저녁을 드신 지 오래되셔서 지금쯤이면 출출하실 것 같아 조촐하게 죽을 끓여 왔습니다.”
기다렸다는 듯 소반 위에 올려놓은 작은 그릇을 앞으로 내민 중전이 뚜껑을 열자, 뽀얀 김과 함께 달콤한 냄새가 확 풍겼다.
“흑임자죽입니다. 어의가 말하길, 흑임자는 오장을 보하고 기력이 순환하는 것을 도와 원기 회복에 좋다 하니, 한번 드셔 보셔요.”
은은하게 윤기가 도는 검은색 죽 위에 작은 잣 네 개가 마치 꽃잎처럼 장식되어 흰 사기그릇에 담겨 있었다.
도현이 수저를 들어 한술 뜨니 쫀득한 찰기가 그대로 느껴지는 것이 찹쌀도 아낌없이 버무려 섞은 것 같았다.
“맛이 어떻습니까?”
“음, 꿀맛이군. 흑임자가 이렇게 맛있는 음식인 줄 처음 알았소.”
빈말이 아닌 걸 증명하기라도 하듯 도현은 입맛을 다시며 수저를 바삐 움직였다.
“중전이 밤중에 갑자기 들이닥쳤으니 수라간 궁녀들이 혼비백산했겠구려.”
간식거리를 챙겨 준 게 고마워서 장난삼아 농을 던졌더니, 중전이 새침한 표정을 지었다.
“제가 할 일 없이 아랫사람들이나 괴롭힐 위인으로 보이십니까.”
“응?”
“불씨를 지키고 있는 나인 몇 명밖에 없기에 쉬라 그러고 제가 직접 죽을 끓였습니다.”
“허어, 중전이?”
새삼스레 놀라 도현이 되묻는데 그럴수록 중전은 더욱 입술을 삐죽거렸다.
“어쩐지 평소 먹는 것보다 맛이 더 좋더라니. 우리 중전의 손맛이 들어가 있어서 그랬군.”
토라진 얼굴도 귀여워 도현이 웃으면서 능청맞게 넘기자, 더 이상 화난 척을 할 수 없었는지 중전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하여간 말솜씨는 여전하셔요. 어쨌든 식욕은 있으신 것 같으니 다행입니다.”
싹싹 비운 죽 그릇을 받아 든 중전은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그럼 전 이만 처소로 돌아가겠습니다.”
“벌써?”
“아직 하실 일도 많이 남지 않으셨습니까.”
서탁에 너저분하게 널려 있는 종이 뭉치들을 힐끔 곁눈질한 중전은 고개를 돌렸다.
“고맙소, 중전. 흑임자죽이 정말 맛있더군.”
“나중에 제 처소에 놀러 오시면 더 맛있는 걸 대접해 드리지요.”
그러면서 한 눈으로 살짝 흘겨보는데, 그 모습이 마치 한동안 바빠서 중전을 찾아보지 못한 도현을 원망하는 것 같았다.
“하하, 지금 먹을 걸로 꾀는 거요?”
“전하.”
왕답지 않은 거침없는 말투에 중전이 나무라긴 했지만, 그래도 싫진 않은지 슬쩍 미소 짓는 얼굴에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중전을 보내고 난 뒤, 도현은 다시 서탁 앞에 앉아 방금 전까지 들여다보고 있던 서류들을 들추다가 아직도 입안에 흑임자죽의 달콤한 맛이 남아 있는 걸 느끼고는 혼자 실실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다음 날 병사들의 훈련을 감독하고 있던 흑치영은 근위대 사령인 박영식이 찾는다는 전갈을 받자마자 서둘러 지휘소로 걸음을 옮겼다.
“사령 어른.”
“누군가?”
“저 흑치영입니다.”
“어서 들어오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간 흑치영은 상석에 앉아 있는 박영식을 보고 군례를 취했다.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일단 이쪽으로 앉게.”
“예.”
“차 한잔 하겠나?”
“감사합니다.”
직접 따뜻한 녹차를 잔에 따라 준 박영식은 약간 근엄한 목소리로 용건을 이야기했다.
“이번 대마도 원정에 우리 근위대에서도 병력을 차출하기로 한 걸 자네도 알 거야.”
“네.”
원정 준비에 본격 착수하면서 고위 무관들 사이에 어느 정도 소문이 돌았고 박영식이 측근인 그에게 몰래 귀띔해 준 것도 있었기에 흑치영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도성을 비울 수는 없기 때문에 총병 삼천 명만 보낼 예정인데 자네가 지휘를 맡아 줬으면 하네.”
“제가 말씀이십니까?”
“그래. 해 줄 수 있겠나?”
내심 원정에 참여하길 원하고 있던 흑치영은 눈을 반짝이면서 얼른 대답했다.
“원정에 참여할 수 있다면 평생의 영광일 것입니다.”
“하하하! 그렇지. 그럼 자네가 가는 걸로 알겠네.”
“옛.”
“조만간 출전 날짜가 잡힐 테니 그때까지 함께 갈 병력을 뽑아 놓고 근위대의 명성을 드높일 수 있도록 철저히 훈련을 시켜 놓게.”
“알겠습니다.”
박영식의 말에 흑치영은 힘찬 목소리로 머리를 숙였다.
이렇게 근위대뿐만 아니라 각 군영에서 병력을 차출해 대마도 원정군을 구성했는데, 총사령관은 논의를 거듭한 끝에 병조판서인 임경업이 직접 맡기로 했다.
원래는 정삼품 병마절도사 이상의 고위 무관 중 한 명을 골라 지휘를 맡기는 것이 정상이었다.
하지만 뒤로 한발 물러서서 뒤치다꺼리를 하기보다는 아직 혈기와 호승심이 남아 있어 직접 전장에 나가 군사들을 호령하는 걸 더 좋아하는 임경업이 강력히 원했고, 또 왜국에 군부 수장인 병조판서를 직접 보낼 만큼 조선이 이번 원정을 중하게 생각한다는 걸 보여 주기 위해 도현이 결단을 내렸다.
임경업이 총사령관에 임명되자 확실히 원정군에 무게감이 실렸고 더불어 각 부서 간에 별다른 잡음 없이 준비가 착실하게 진행됐다.
최대한 보안을 유지했지만 워낙 대규모 병력과 물자가 동원되는 원정인 만큼 소문이 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소문은 한양을 넘어 왜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부산포까지 퍼져 나갔다.
부산포 왜관을 드나들며 미곡상으로 수년간 조선과 거래를 해 온 상인인 야스다 아키라는 어둠이 내린 밤 거처에서 수하인 미야모토 카즈키와 은밀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게 정말인가?”
야스다가 놀란 음성으로 묻자 앞에 앉은 미야모토는 정색을 하며 머리를 끄덕였다.
“예, 어르신. 저희와 거래를 트고 있는 내상 행수에게 직접 전해 들은 이야기입니다.”
미야모토가 가져온 정보는 다름이 아니라 조선 조정이 대마도를 치기 위해 내상에 물자를 실어 나를 선박을 빌리려 한다는 거였다.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야스다가 입을 열었다.
“도대체 왜?”
“행수의 말로는 얼마 전에 겐지로 패가 해안 마을을 노략질한 것 때문이랍니다.”
설명을 듣자마자 야스다는 앓는 소리를 내며 미간을 찌푸렸다.
“끄으응. 천둥벌거숭이처럼 마음대로 설치고 다닐 때부터 이런 사고를 칠 줄 알았어.”
“서둘러 도주님께 이 사실을 알려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지. 중요한 일이니 자네가 직접 도주님께 보고를 올리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지시를 받은 미야모토는 머리를 숙이며 짧게 대답했다.
사실 두 사람은 상인이기도 했지만 조선의 동태를 파악하기 위해 대마도주의 밀명을 받고 움직이는 간자였다.
당금 대마도 도주는 소요 요시나리[宗義成]라는 인물로 선대인 요시토시를 이은 이 대 도주이자, 능력이 아주 뛰어난 자였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도쿠가와 막부가 들어서자 전쟁으로 단절된 조선과의 교역을 다시 어렵게 재개시켜 막부의 신임을 받았다.
칠 년 동안 전란에 시달리며 온갖 고통을 겪은 조선이었기에 지금까지 양국 사이에 맺었던 그 어떤 조약보다 엄격한 조건으로 문호를 개방했지만, 이걸로 인해 도주인 요시나리는 대조선 외교의 실무와 교역을 독점하는 엄청난 이득을 얻었다.
이에 따라 대마도는 조선과 통하는 유일한 창구였기에 막부로부터 보호와 관심을 받으며 황금기를 누리고 있었다.
이렇게 우리 역사서에도 자주 등장하며 조선과 왜의 관계에 큰 영향을 끼친 소씨[宗氏]는 처음부터 번주가 아니었고 원래 다자이후[太宰府]의 관리였다.
본거지는 치쿠젠국[筑前国](현재 규슈 지방)의 무나카타군[宗像郡](현 후쿠오카 현의 지방 도시)이었는데, 족보를 위로 거슬러 올라가면 고레무네씨[惟宗氏]에 속하고, 에도시대 방식대로 하면 다이라씨[平氏] 일족의 다이라노토모모리[平知盛](헤이안 시대 말기의 무장)를 선조로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치쿠센[筑前](지금의 후쿠오카 북동 지역)과 히젠[肥前](지금의 사가와 나가사키 현 일대)의 지주인 쇼니씨[少弐氏]의 대관(대리하여 파견된 관리)으로서 있다가 차츰 섬을 장악해 나갔고 이때쯤 성도 소씨로 바꿨다.
십구 대 가주였던 요시토시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왜국을 통일하면서 자연스럽게 그 밑으로 귀속됐고, 쓰시마 번의 초대 도주가 되면서 당당한 영주 가문으로 올라섰다.
농토가 적어 식량 생산이 부족한 대마도는 중계무역으로 먹고살기에 항상 조선의 동향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사지키바라 성의 천수각天守閣은 이른 아침부터 부산포에서 전해진 급보에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특히 상석에 앉은 소요 요시나리는 얼굴이 시뻘겋게 상기된 채 손바닥으로 앞에 있는 서탁을 세게 내려쳤다.
탕!
“그렇게 조심하라 일렀는데 이런 사고를 치다니. 요시다.”
“예.”
한쪽에 있던 무사가 상체를 숙이며 대답하자 요시나리는 화가 잔뜩 난 목소리로 지시를 내렸다.
“당장 군사들을 동원해 겐지로를 잡아들여!”
그러자 선대 때부터 도주를 보좌해 온 구로야마 총관이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어떻게 하려고 그러십니까?”
“놈이 일을 벌이는 바람에 이런 사단이 생겼으니 겐지로를 잡아 넘겨줘서라도 조선 국왕의 분노를 달래야 되지 않겠소.”
“이야기를 들으니 이미 원정군까지 구성하고 있다는데 조선 국왕이 쉽게 마음을 돌리겠습니까?”
“그럼 이대로 조선군이 쳐들어와 섬이 불타고 내가 치욕을 당해야 되겠소!”
휘하에 있는 가신이었지만 평소 원로 대접을 하며 존중해 주던 것과 달리 요시나리는 연신 서탁을 소리 나게 때리면서 언성을 높였다.
“차라리 막부에 도움을 청하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에도에?”
“그렇습니다. 시마바라의 난[島原の乱]을 토벌하고 강력한 권력을 행사하고 계시는 이에미쓰 쇼군께서 도와주신다면 감히 조선군도 함부로 바다를 건너오지 못할 것입니다.”
“흐음.”
구로야마 총관의 이야기에 요시나리는 한쪽 손으로 턱을 매만지며 고심했다.
에도 막부 삼 대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미쓰는 아직 지배력이 약하던 막부를 탄탄한 반석 위에 올려놓은 인물로 훗날 무단정치武斷政治라고 불릴 만큼 무력으로 아랫사람들을 억압하는 독재를 펼쳤다.
“괜히 그러다가 늑대를 피하려고 호랑이를 불러들이는 건 아닌지 모르겠군.”
대외무역의 이익을 독점하려고 나가사키에 대한 통제를 강화한 전적이 있었기에 요시나리는 행여나 막부에서 이번 일을 기회로 자신을 밀어내고 조선과의 교역에 손을 대려고 하지나 않을까 염려했다.
“뭘 염려하시는지 알겠습니다만 일만이 넘는 조선군을 막으려면 이 방법뿐입니다.”
하지만 요시나리가 썩 내켜 하지 않는 표정을 짓자 구로야마 총관은 다른 방법을 제시했다.
“막부군이 섬에 들어오는 것이 꺼림칙하시다면 조선 국왕에게 서신을 한 장 보내 달라고 청하는 건 어떻습니까?”
요시나리는 상체를 앞으로 살짝 숙이고는 솔깃한 얼굴을 했다.
“계속 말해 보게.”
“조선이 쓰시마 번을 건드린다면 막부에서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내용의 서신을 보내는 겁니다. 그 정도는 막부에 있는 인맥을 동원해 적당히 기름칠을 한다면 어렵지 않을 테고 임진왜란의 아픈 기억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조선으로서도 부담감을 느끼고 함부로 경거망동하지 못할 겁니다.”
이야기를 다 들은 요시나리는 무릎을 치며 환하게 얼굴을 폈다.
탁.
“그것 참 묘수로군. 돈은 얼마가 들어도 좋으니 총관이 책임지고 일을 진행하게.”
“예.”
“그러면 겐지로는 어떻게 할까요?”
요시다의 물음에 잠시 생각을 하던 요시나리는 한쪽 팔을 내저으면서 퉁명스럽게 말했다.
“지시한 대로 잡아와. 한양으로 보내 조선 국왕의 화를 풀면 좋고 그러지 않더라도 시간을 끄는 용도로 쓰면 되겠지.”
“알겠습니다.”
머리를 숙이며 대답한 요시다는 뒷걸음질로 방을 나갔다.
이틀 뒤 쓰시마 번의 깃발을 단 배 두 척이 섬을 떠났는데 한 척은 왜구 두목인 겐지로를 한양으로 압송하는 거였고, 나머지 하나는 막부가 위치한 에도로 향했다.
대전에서 신료들과 국사를 논의하고 있던 도현은 대마도에서 사신이 왔다는 도승지의 보고에 살짝 눈썹을 위로 추켜올렸다.
“그러니까 대마도주가 얼마 전 남해안 고을을 노략질하고 도망친 왜구 두목을 보내왔다는 건가?”
좋은 소식인데도 왠지 기분 나쁜 듯한 도현의 반응에 좌의정 김종일이 조심스레 물었다.
“전하, 왜 그러시는지요?”
“흥, 놈들의 수작이 너무 뻔하지 않소.”
그러면서 도현은 팔걸이를 탁탁 두드렸다.
“우리가 원정 준비를 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이걸로 어떻게든 무마시키려는 속셈인가 본데, 어림도 없지.”
대마도주의 행동이 오히려 도현의 원정 의욕에 불을 붙인 듯하자 우의정 송시열이 재빨리 나서서 참견했다.
“전하, 진정하시옵소서.”
송시열은 도현을 비롯한 다른 대신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리도록 충분히 뜸을 들인 뒤 말을 이었다.
“이번 일의 원흉이었던 왜구 두목도 잡혀 왔으니 이쯤에서 대마도주의 호의를 받아들이시는 것이 좋을 듯하옵니다. 만약 원정 계획을 계속 진행하신다면 병사들의 목숨은 물론이고 상당한 물자가 소비될 텐데, 그리하면 국력에 막대한 손실이 있지 않겠습니까.”
“우의정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군.”
도현은 차가운 분노가 일렁이는 눈빛으로 말했다.
“그깟 왜구 두목 한둘쯤이야 어찌 되든 상관없소. 가장 중요한 건 그동안 왜구에 고통받으며 목숨을 잃거나 타국에 노예로 끌려간 우리 조선 백성들의 억울함을 달래고, 앞으로 두 번 다시 조선의 바다에 얼씬도 하지 못하도록 소굴을 없애 버리는 것이 이번 원정의 진정한 목적 아니겠는가!”
순간 말문이 막힌 송시열에게 도현은 다시 한 번 쐐기를 박았다.
“아니면 설마 조선의 우의정이란 사람이 왜구 두목과 조선 백성의 목숨을 저울질하여 값어치라도 매길 셈이오?”
“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갑자기 비난의 화살을 받게 된 송시열이 정색을 하고 부정했다.
더 이상 이래라저래라 왈가왈부할 사람이 없어지자, 도현은 이제 이 이야기는 끝났다는 표정으로 대신들을 향해 말했다.
“왜구 두목은 당장 목을 잘라 도성 문 앞에 효시하고, 대마도주가 보내온 사신은 더 이상 볼일이 없으니 돌아가도록 명하라.”
“저, 전하, 그래도 명색이 사신인데 접견조차 하지 않으시는 건…….”
“이제 와서 그런 법도를 따질 정도로 친한 사이도 아니지 않은가. 어차피 곧 창칼을 마주할 텐데 고이 돌려보내는 것만 해도 충분히 예의는 지켰다고 생각하네.”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선 도현은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그를 바라보는 예조참판 박노에게 마지막 한마디를 던졌다.
“자네가 정 마음에 걸리거든 대충 서신이나 써서 쥐여 주든가. 나머지는 알아서 하도록.”
그리고 바람같이 대전을 빠져나가는 도현의 뒷모습을 대신들은 아무 말 없이 고개 숙여 배웅했다.
대전에서 어떤 말이 오가는지도 모르는 채 영빈관에 앉아 초조하게 차를 마시며 기다리고 있던 사신들은 박노가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 얼른 일어서서 맞이했다.
“조선 국왕께서 이제야 우리를 만나 주신답니까.”
“차 맛이 좋긴 하지만 기다리는 것도 슬슬 지루해지던 참이었습니다.”
밝은 표정으로 저마다 떠들며 관복을 가다듬는 사신 일행에게, 예조참판 박노는 정중하게 유감을 표했다.
“미안하지만 주상 전하를 접견하는 건 어렵겠소이다.”
“그게 무슨…….”
“대신 대마도주께 전할 서신을 준비했으니 체면치레는 할 수 있을게요.”
“누가 예의상 주는 서신 따위나 받자고 이 먼 길을 온 줄 아시오!”
이쯤 되자 대충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한 사신 일행은 화를 버럭 터뜨렸다.
하지만 박노는 표정 하나 무너뜨리지 않고 냉정하게 그들의 말을 반박했다.
“애초에 일이 이 지경까지 된 것은 그대들 탓이 아니오. 그동안 누차 왜구들을 단속해 달라고 몇 번이나 서신과 사신을 보낼 때는 줄곧 무시했으면서, 발에 채일 만큼 많은 도적들 중 고작 한 놈을 잡아왔다고 기세등등한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라 생각되는군.”
“큭.”
“몸 성히 고향에 돌아갈 수 있는 걸 행운으로 여기고 얌전히 돌아가시지요. 가는 길은 이쪽에서 배웅해 줄 것이외다.”
박노가 방을 나오자 미리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병사 둘이 들어와 입구 양옆에 장승처럼 딱 버티고 섰다.
노골적인 푸대접에 치가 떨리긴 했지만 더 이상 어찌할 바가 없음을 깨달은 대마도 사신들은 분한 얼굴을 하고선 황급히 대책을 논의했다.
“이제 어찌합니까?”
“이대로 빈손으로 돌아간다면 도주께서 불호령을 내리실 겁니다.”
사색이 된 일행들이 안절부절못하자 대표를 맡은 중년 관리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후우.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지. 그냥 돌아가는 수밖에…….”
다음 날 사신 일행은 병사들의 엄중한 감시 속에 쓸쓸히 대마도로 발길을 돌려야 했다.
왜구 두목인 겐지로를 잡아 보내 줬지만 기대와 달리 아무런 소득도 없이 도현의 강경한 원정 의지만 확인하고 사신이 돌아오자, 다급해진 요시나리는 총관인 구로야마를 에도로 보내 막부에 중재를 요청했다.
많은 돈을 뿌려 기름칠을 한 것이 통했는지 얼마 있지 않아 막부 관리인 미무라 아키오가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미쓰의 친필 서신을 가지고 부산포를 거쳐 한양에 도착했다.
“막부에서 사신이 왔다고?”
“그렇사옵니다, 전하.”
예조참판 박노의 말에 도현은 미간을 찌푸리고는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것들이 아주 돌아가면서 날 귀찮게 하는군.”
“그래도 왜국의 실질적 지배자인 쇼군이 보낸 사신이니 만나 보셔야 되지 않겠사옵니까?”
혹시나 이번에도 얼마 전 대마도에서 보낸 사신한테 한 것처럼 얼굴도 보지 않고 그냥 돌려보낼까 봐 박노가 안절부절못하며 이야기하자 도현은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영상보고 대신 만나라고 하면 안 되겠지.”
“전하.”
“끄으응. 알았네. 할 일도 많은데 하여튼 이것들은 정말 도움이 안 되는군.”
읽고 있던 서류를 서탁에 내려놓은 도현은 귀찮은 티를 팍팍 내며 자리에서 일어나 대전으로 향했다.
대전에 도착하자 이미 소식을 듣고 모인 신료들이 실내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왕좌에 앉은 도현은 신료들을 스윽 한번 훑어보고는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사신을 들라 하라.”
“예.”
잠시 뒤 좌우로 활짝 열린 문을 지나 일본식 관복을 차려입은 미무라와 일행이 조심스럽게 대전 안으로 들어왔다.
박노가 미리 알려 준 대로 미무라는 왕좌에서 다섯 발걸음 정도 떨어진 곳까지 가서는 무릎을 꿇고 절을 올렸다.
“미무라 아키오 조선의 국왕 전하께 인사드리옵니다.”
대동한 역관이 통역을 해 주자 근엄하게 앉아 있던 도현은 상대를 내려다보면서 차갑게 입을 열었다.
“막부의 사신이 여기까지 무슨 일인가?”
“다름이 아니오라 근래 저희 쓰시마 번과 조선이 작은 오해 때문에 감정이 안 좋아지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시고, 혹시라도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질까 우려한 쇼군께서 친서를 보내셨사옵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도현은 눈썹을 위로 추켜올리고는 손바닥으로 팔걸이를 세게 내려쳤다.
탕!
“쓰시마 번이라니! 대마도는 전조(고려) 때부터 우리나라에 복속되어 경상도의 한 군현으로, 조정에서 현령 벼슬까지 내렸는데 어찌 왜국 땅이라고 하는가?”
“……!”
도현이 이렇게 나올 줄은 전혀 예상을 못 한 미무라와 사신 일행은 눈을 크게 뜨며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이건 대전에 모여 있던 신료들도 마찬가지였는데 화들짝 놀란 얼굴로 그를 쳐다봤다.
대표답게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미무라는 정색을 하며 이야기를 했다.
“쓰시마 번은 오래전부터 저희 왜국에 속해 있었는데 말씀이 너무 지나치신 것 같사옵니다.”
그러자 도현은 피식 미소를 짓고는 미무라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힘이 넘치고 또박또박한 어조로 말을 쏟아 냈다.
“정말 가소롭기 그지없군. 쓰시마 번이라는 명칭 자체가 임진왜란을 일으킨 원흉인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을 통일하면서 붙인 것인데, 그래 봤자 고작 백 년 남짓밖에 안 됐지. 하지만 대마도가 우리 한민족의 땅으로 역사에 기록된 것은 그보다 훨씬 오래전인 삼국시대부터라는 걸 아나!”
실제로 대마도가 신라에 속한 부속 도서였다는 여러 기록이 남아 있었는데, 고려 때에는 도주가 왕실에 스스로 복속을 요청하고 벼슬까지 받았다.
이 전통은 조선 왕조까지 이어져서 대마도주가 조정에서 내린 벼슬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근대까지 계속됐다.
“그러던 것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도둑놈처럼 아국이 혼란스러운 틈을 타 훔쳐 가더니, 오늘날은 간악한 왜구들의 소굴이 되어 우리 백성들을 괴롭히고 있어서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칼을 빼 들었는데, 막부가 무슨 권리로 간섭을 하려고 하는가! 이건 조선 내부의 문제이니 막부는 함부로 끼어들지 마라.”
“하지만…….”
미무라가 뭐라고 반박을 하려는 걸 중간에서 끊은 도현은 단호한 어투로 쐐기를 박았다.
“만약 내 경고를 무시하고 막부가 이번 일에 끼어들려고 한다면 단언컨대 그때는 우리와 일전을 벌여야 할 것이다! 친서를 적어 줄 테니 사신은 왜국으로 돌아가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내 뜻을 쇼군에게 전하라.”
사색이 된 미무라가 다급하게 이야기를 했다.
“예전에는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엄연한 왜국의 영토인데 너무 억지이지 않습니까!”
미무라의 말에 도현은 화가 난 듯 인상을 찡그렸다.
“어허. 내가 그렇게 이야기를 했는데 아직도 말귀를 못 알아듣다니. 더 대화를 나눌 가치도 없다. 내 뜻은 확고하니 이만 썩 물러들 가라!”
“전하!”
이대로 돌아갈 수 없었던 미무라가 애타게 불렀지만 도현의 반응은 차가웠다.
“뭣들 하느냐! 당장 저들을 영빈관으로 데려가라.”
“옛.”
도현의 호통에 시립하고 있던 친위대 위사들이 달려와 사신 일행을 대전에서 끌어냈다.
“한 번 더 재고를 해 주십시오!”
양쪽에서 팔을 붙잡힌 미무라가 다급하게 외쳤지만 도현은 시선도 주지 않고 외면했다.
그렇게 한바탕 소동이 지나가자 처음부터 이번 원정을 탐탁지 않게 여기던 송시열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그래도 명색이 막부에서 보낸 사신인데 저렇게 보내도 괜찮겠사옵니까?”
“상관없소.”
“그러다가 정말 왜국과 전쟁이라도 벌어진다면 큰일이지 않사옵니까?”
아직 임진왜란의 참혹했던 기억이 생생히 남아 있었기에 다른 신료들도 우려스럽다는 시선으로 그를 바라봤다.
불안해하는 신료들과 달리 도현은 너무나도 담담한 얼굴로 이야기를 했다.
“그런 일은 절대 없을 테니 안심하시오.”
“어찌 그리 확신하십니까?”
고분고분하지 않고 사사건건 딴죽을 걸고 나서는 송시열을 살짝 째려본 도현은 이유를 설명했다.
“현 쇼군인 이에미쓰가 지방 영주들을 누르고 막부의 지배력을 공고히 한 것은 사실이지만, 여전히 각 번의 힘이 강성해 조금이라도 빈틈을 보이면 언제든지 치고 올라올 수 있는 상황이오. 이런데 이에미쓰가 고작 변방의 작은 섬에 불과한 대마도를 지키려고 위험을 무릅쓰고 군대를 일으킬 리가 있겠소?”
멀리 떨어진 왜국 사정에 도현이 해박한 지식을 드러내며 상대의 처지를 정확히 짚어 내자 신료들은 감탄성을 내뱉었고 송시열도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대로 순순히 물러서는 건 자존심이 상했는지 송시열이 또다시 트집을 잡았다.
“예상이 틀릴 수도 있지 않사옵니까?”
그러자 도현은 매섭게 번뜩이는 눈으로 대전을 훑어보고는 크지 않지만 힘이 잔뜩 실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주제도 모르고 덤벼든다면 그때는 지난 임진왜란 때 당했던 것까지 합쳐 처절하게 복수를 해 줄 것이오!”
강한 기세를 피워 올리며 도현이 하는 말에 신료들은 물론이고 송시열까지 감히 입을 열지 못하고 마른침만 꿀꺽 삼켰다.
반면 임경업을 비롯한 무관들은 투쟁심이 끓어오르는지 잔뜩 상기된 표정을 지었다.
1646년 5월 마침내 원정 준비를 모두 끝낸 조선군은 도성 밖 공터에서 성대한 출정식을 가졌다.
출정식장은 병사들 말고도 도성과 가까운 고을에서 몰려든 백성들로 흙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원정군 병사들이 군기가 바짝 살아 있는 모습으로 오와 열을 맞추고 질서 정연하게 대형을 갖추고 있는 가운데 정면에는 도현과 대신들을 위해 높은 연단이 만들어져 있었다.
양옆으로는 백성들이 구경을 하려고 몰려 있었는데 급히 동원된 포도청 소속 관원들이 불상사가 생기지 않도록 줄을 치고 식장을 통제했다.
사람들이 몰려들자 잽싸게 간단히 먹을거리를 가져 나와 파는 잡상인까지 있었다.
“어? 자네도 나왔군.”
아들로 보이는 꼬마의 손을 잡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사내는 어릴 때부터 친하게 지내는 친우를 발견하고는 반갑게 말했다.
“당연하지. 이런 좋은 구경거리를 놓칠 수 있나.”
“하긴. 그나저나 이렇게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모인 건 머리털 나고 처음인 것 같아.”
사내의 말에 털보 수염이 난 친구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도성 백성들이 모두 다 여기로 나온 것 같아.”
“도성뿐인가 아마 모르긴 해도 인근 고을 사람들도 다 몰려왔을 걸세.”
“하하하. 맞아.”
그때 연단 쪽에서 커다란 뿔나팔 소리가 길게 울렸다.
뿌우우웅!
“이제 시작하려는 모양이군.”
화려한 예복을 갖춰 입고 허리에 검을 찬 친위대 위사들이 나와 성문 앞을 막고 있던 사람들을 좌우로 밀어내 연단까지 이어지는 넓은 길을 만들었다.
이윽고 취타대와 함께 친위대 기병들이 각양각색의 깃발을 들고 나타나더니 곤룡포를 입은 도현이 눈처럼 하얀 백마를 타고 모습을 드러냈다.
말을 탄 도현의 뒤로 커다란 봉황 깃발이 바람에 따라 휘날리는 모습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절로 감탄성을 자아내게 만들었다.
좌우에 늘어서 있던 백성들은 저절로 바닥에 몸을 엎드려 머리를 조아렸다.
태산 같은 위엄을 풍기며 그를 태운 백마가 한 걸음씩 내딛자 감격한 백성들은 양팔을 하늘 위로 들어 올리며 천세를 외쳤다.
“주상 전하. 천세!”
“천세! 천세!”
도현은 그를 환영해 주는 백성들에게 보답이라도 하듯 한쪽 팔을 들어 흔들었다.
그러자 백성들은 더욱더 그를 연호했고, 몇몇은 벅차오른 감정을 이기지 못해 눈물을 흘리면서 목이 터져라 함성을 내질렀다.
이런 열렬한 반응에 뒤를 따르던 신료들은 깜짝 놀란 표정이었는데,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조선왕조를 통틀어 백성들한테 이렇게 뜨거운 지지와 환호를 받은 국왕은 손에 꼽힐 정도였기 때문이었다.
이게 다 대동법 실행과 금난전권 폐지 등 도현이 일반 백성들을 위한 정책을 적극 실행하고 두 번의 반란을 이겨 내면서 강인하고 믿을 수 있는 군주로 확실히 자리를 굳혔기에 가능한 거였다.
환호성을 받으며 연단에 도착한 도현이 말에서 내려 위로 올라가자 갑옷을 갖춰 입고 앞에 서 있던 임경업이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뱉어 내며 우렁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부대. 차렷.”
처척.
외침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도열해 있던 수천 명의 병사들이 마치 한몸처럼 동시에 다리를 딱 갖다 붙이며 부동자세를 취했다.
“군례!”
“충!”
병사들의 힘찬 목소리가 드넓은 공터를 가득 채웠다.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자로 잰 듯 정확하게 군례를 취하는 모습은 정말 장관이었는데, 지켜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묘한 감동과 흥분을 불러일으켰다.
“바로.”
척.
구령에 맞춰 병사들이 다시 차렷 자세를 취하자 연단 위에 선 도현은 흡족한 얼굴로 자신의 군대를 훑어보고는 입을 열었다.
“자랑스러운 나의 병사들이여, 지난 달 왜구가 또다시 남해안 고을에 쳐들어와 죄 없는 백성들을 죽이고 재산을 빼앗아 갔다는 장계를 받고, 짐이 얼마나 분노하고 마음 아파했는지 모른다. 그래서 다시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왜구의 소굴인 대마도를 정벌하려 한다. 이 역사적인 과업에 나서는 그대들 앞에는 무한한 영광과 승리만이 있을 것이다!”
도현의 말에 병사들은 가지고 있던 무기를 들어 올리면서 크게 함성을 내질렀다.
“우와아아!”
“대조선국 천세!”
병사들이 내지른 함성은 넓은 공터를 가득 울렸고 지켜보는 백성들도 벅차오르는 감동에 함께 소리를 치며 출정식 장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연단 좌우에 시립해 있던 송시열과 산당에 속한 신료들은 어느새 감히 어찌해 볼 생각을 할 수 없을 만큼 도현의 위세가 높아진 걸 실감하며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함성이 조금 수그러들 때쯤 도현은 앞에 서 있는 임경업을 불렀다.
“총사령관은 앞으로 오라.”
계단을 통해 연단 위로 올라온 임경업이 무릎을 꿇고 앉자 도현은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총사령관은 간악한 왜구를 토벌하고 대마도를 짐에게 다시 가져올 수 있겠나?”
그러자 임경업은 약간의 망설임도 없이 즉시 대답했다.
“제 목숨을 걸고 전하의 검이 되어 왜구들을 벌하겠나이다.”
고개를 끄덕인 도현이 옆으로 손을 내밀자 칠현이 들고 있던 보검을 조심스럽게 건넸다.
“이 보검은 전장에서 짐을 대신하니 총사령관은 이걸 들고 적을 단칼에 베어 버리고 승전보를 가져오도록 하라.”
“명심하겠사옵니다, 전하.”
“받게.”
“예.”
두 손으로 보검을 건네받은 임경업은 몇 걸음 뒤로 물러나 돌아서서는 검을 뽑아 머리 위로 치켜들었다.
그걸 본 병사들은 또다시 함성을 터트렸고 이내 공터를 울리는 북소리와 함께 출전 명령이 떨어졌다.
둥둥둥!
“전군 출전!”
도열해 있던 원정군 병사들은 행군 대형을 갖추고 줄을 지어서 질서정연하게 연단을 지나 남쪽으로 나아갔다.
척척척척!
병사들이 행군해 가는 길 양옆에 서 있던 백성들은 손을 흔들거나 큰 소리로 힘을 북돋아 줬다.
“와아!”
“왜구들을 다 혼내 주는 거야!”
“다들 살아서 돌아와!
이렇게 열렬히 응원을 해 주자 병사들은 전장으로 간다는 두려움을 떨쳐 버리고는 어깨를 펴고 턱을 추켜올리며 당당하고 힘차게 발걸음을 옮겼다.
한강을 건너 대구까지 내려온 원정군은 거기서 경상도와 전라도 군영에서 차출된 병력과 합류하고는 다시 남하를 계속해 조선 최고의 명장인 이순신 장군의 숨결이 살아 숨 쉬는 한산도에 도착했다.
맑은 날이면 대마도가 보일 정도로 가까운 부산포가 아니라 거리가 상당히 떨어진 한산도를 집결지로 삼은 건 왜관에 거주하는 왜인들한테 원정군에 대한 정보가 새어 나가는 걸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근처에 세곡을 보관하는 창고가 있어 대군이 움직이는 데 무엇보다 중요한 식량을 확보하기 용이했고, 수백 척의 배들이 한꺼번에 모이기에도 용이했다.
이런 조건을 모두 고려한 결과 비변사에서는 한산도를 집결지로 낙점했고 끝도 없이 몰려드는 병사와 물자 그리고 선박 들로 섬은 발 디딜 틈도 없이 북적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