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상륙 (40/104)

상륙

원정군이 점점 다가오는 가운데 요시나리와 가신들은 마지막으로 희망을 걸고 있던 구로야마 총관마저 아무런 소득 없이 빈손으로 돌아오자 큰 충격에 빠졌다.

“가을이나 되어야 지원군을 보내 줄 수 있다니. 당장 내일이라도 조선군이 상륙해 섬을 불바다로 만들 판인데 무슨 헛소리야!”

얼굴을 붉게 상기시킨 요시나리가 연신 팔걸이를 내려치며 호통을 치자 앞에 엎드린 구로야마 총관은 곤혹스러운 얼굴로 머리를 숙였다.

“어떻게든 지원군을 함께 데려오려고 최선을 다했습니다만…… 면목이 없습니다.”

원정이 있을 거라는 첩보를 입수하자마자 병력을 최대한 끌어모으고 있지만 워낙 척박하고 인구가 적은 곳이다 보니 육천 명 정도가 한계였다.

그마저도 이제 수염이 듬성듬성 나기 시작한 소년부터 백발이 성성한 늙은이까지 무기를 들 수 있는 사내란 사내는 다 박박 끌어모은 거였다.

“지원군을 늦게 보내 주는 이유가 뭐야!”

“그게 병력을 모으려면 시간이 걸린다고…….”

대답을 듣자마자 요시나리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핑계는 그럴듯하군.”

“지난 시마바라의 난 때 막부가 무려 십이만 명이라는 토벌군을 한 달 만에 모아 반란을 진압한 적이 있는데, 이러는 것은 저희를 도와줄 생각이 없는 겁니다.”

옆에 있던 요시다의 말에 요시나리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아무리 방어가 공격보다 유리하다지만 지금 가진 병력으로는 최소 일만 명 이상이라는 원정군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대마도를 지키기 위해서 선대부터 지금까지 자신의 가문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해 왔는데 이제 와서 그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될 위기에 처하다니 너무 분하고 억울했다.

특히 매년 온갖 명목으로 세금을 받아 가면서 결정적인 순간에 도움을 주지 않고 외면하는 막부의 행태에 요시나리는 큰 배신감을 느꼈다.

일단 지금은 막부에 대한 분노보다 당장 눈앞에 닥친 조선군을 막는 것이 먼저였기에 요시나리는 애써 화를 가라앉혔다.

“결국 우리 스스로 섬을 지킬 수밖에 없겠군. 승산이 있을까?”

“숫자는 상대보다 적지만 여긴 저희의 안방이라는 이점이 있으니 성문을 단단히 걸어 잠그고 장기간 농성을 벌인다면 전쟁을 오래 지속하기 어려운 조선군은 겨울이 되기 전에 물러갈 것입니다.”

구로야마 총관의 말에 무사들의 수장인 요시다가 반대 의견을 냈다.

“병법서대로 한다면 총관님의 말씀이 맞지만 오랫동안 외적의 침입이 없어 이곳 사지키바라 성만 해도 성벽이 낮고 성문 또한 약해 공성전을 벌이기에는 역부족입니다. 차라리 적이 섬에 상륙하기 전에 바다에서 승부를 보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해전을 벌이자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구로야마 총관이 살짝 미간을 찌푸리면서 바로 반박했다.

“지난 임진년에 우리 군이 조선 수군한테 어떻게 당했는지 잊은 건가! 판옥선과 화포로 무장한 저들과 해전을 벌이는 건 자살행위일세.”

“그때하고 지금은 다릅니다. 예전과 달리 우리 전선에도 화포가 장착되어 있고 무엇보다 조선군에는 이순신이 없지 않습니까.”

이순신 장군이 없다는 말에 해전을 회의적으로 생각하던 가신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훗날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영웅으로 추앙받은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이 이순신 장군은 자신과 비교할 수도 없는 사람이라고 기자들 앞에 공개적으로 이야기를 했을 만큼 일본에서는 이순신 장군을 경외했다.

“그리고 왜구 두목들에게 도움을 청해 함께 전투를 벌인다면 농성전과 달리 오히려 저희가 수적으로 더 우세한 상태에서 조선군을 맞이할 수 있을 겁니다.”

이야기를 들은 요시나리는 솔깃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얼마 전에 겐지로를 잡아 조선으로 보낸 일이 있는데 왜구 두목들이 순순히 손을 잡으려고 하겠나?”

“감정이 조금 상해 있기는 하겠지만 대마도가 조선군에 점령당하면 저들도 중간 기항지를 잃어버리게 되니 함께 움직일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렇지.”

어두운 숲을 헤매다 구원의 빛을 발견한 사람처럼 요시나리는 무릎을 쳤다.

요시나리의 동생인 가베이도 옆에서 듣고 있다가 요시다를 거들었다.

“원래 해적질로 먹고사는 놈들이니 조선군과의 싸움에서 밀리지도 않을 테고 지금이라도 급히 연통을 돌린다면 오육십 척은 거뜬히 모을 수 있을 겁니다.”

계획대로만 된다면 기존에 쓰시마 번이 보유한 전선을 합쳐 무려 팔십 척에 달하는 대함대를 꾸릴 수 있었다.

팔걸이 끝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며 잠시 고심하던 요시나리는 그 정도면 충분히 승산이 있겠다는 계산이 나오자, 굳어 있던 얼굴을 펴고 어느새 자신감을 되찾은 목소리로 결정을 내렸다.

“좋아. 바다에서 승부를 보는 걸로 하지.”

“도주!”

분위기가 반대쪽으로 기울자 불안한 표정을 짓고 있던 구로야마 총관이 다급히 그를 부르자 요시나리는 한쪽 손을 들어 말을 막고는 단호하게 이야기를 했다.

“총관이 뭘 걱정하는지 나도 알고 있네. 하지만 이대로 허무하게 섬을 내줄 수는 없지 않나? 공성전도 좋지만 지금으로서는 이게 가장 승산이 높다는 것이 내 판단이야. 그러니 결정에 따라 주게.”

도주인 요시나리가 이렇게까지 말을 하자 더 반대할 수가 없었던 구로야마 총관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후우. 알겠습니다.”

“가베이.”

“말씀하십시오, 형님.”

“네가 직접 두목들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하도록 해라.”

“예.”

방 안에 모여 있는 가신들을 스윽 훑어본 요시나리는 정색을 하며 딱딱하게 굳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번 결전에 가문의 운명이 달려 있다는 걸 명심하고 최선을 다해 대비를 하도록.”

“옛!”

가신들이 상체를 숙이며 한목소리로 대답을 하는 가운데 말을 끝낸 요시나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갔다.

병력과 보급품 수송을 맡은 상단 선박이 다 도착하자 일주일간 휴식을 취하며 가볍게 합동 훈련을 해서 손발을 맞춘 원정군은 드디어 한산도를 떠나 목표인 대마도를 향해 출항했다.

끼룩끼룩!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에 갈매기 몇 마리만 떠서 머리 위를 날아다니고 있을 뿐 아주 평화로운 가운데 함대는 파도를 해치며 순조롭게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혹시 있을지 모르는 습격에 대비해 함대는 병사들이 탄 상단 선박을 중앙에 두고 ‘>’ 형태의 대형을 갖추고 있었다.

선두에는 새로 건조한 신형 판옥선을 배치했는데 기존 전선보다 훨씬 크고 화포 또한 엄청나게 장착된 걸 보고 상선 선원들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에 수군 병사들은 자신들이 타고 있는 전선에 대한 강한 자부심과 우월감에 저절로 어깨가 펴졌다.

갑옷을 입고 허리에는 도현한테 하사받은 보검을 찬 임경업은 함교에 서서 끝없이 펼쳐진 수평선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옆으로 돌려 함대 지휘관인 수군통제사 최형희를 보며 말했다.

“대마도까지 얼마나 남았나?”

잠시 해도를 보고 거리를 가늠한 최형희가 바로 대답했다.

“지금처럼 순풍이 계속 불어 준다면 유시酉時(오후 다섯 시부터 일곱 시)에는 섬이 보일 겁니다.”

“그렇군.”

“이제 여름 초입이라 해가 길다고 하지만 금방 어두워질 텐데 속도를 조금 늦춰 내일 아침에 도착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글쎄…….”

이야기를 들은 임경업이 한쪽 손으로 턱수염을 쓰다듬으면서 고심할 때 갑자기 돛대 위에 올라가 있던 견시수의 다급한 고함 소리가 울렸다.

“전방에 정체불명의 선박 출현. 서른 척 이상!”

말을 듣자마자 임경업과 최형희는 전방을 쳐다봤다,

그러자 견시수가 보고한 대로 선박 수십 척이 수평선을 넘어오는 것이 희미하게 보였다.

한참 유심히 정체불명의 선박을 살피던 최형희는 낮게 침음성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왜선입니다.”

“확실한가?”

“앞으로 길게 뻗어 있는 선수재로 볼 때 왜국의 주력 선박인 세키부네가 분명합니다. 저 정도 숫자가 한꺼번에 몰려다니는 건 흔치 않은 일이니 십중팔구 저희를 요격하러 나온 것 같습니다.”

여기에 왜선이 나타났다는 건 원정군의 움직임이 상대편에 노출됐다는 뜻이었기에 임경업은 미간을 찌푸리다가 이내 눈을 매섭게 치켜뜨며 말했다.

“차라리 잘됐군. 적들을 모조리 다 바다에 수장시키고 여유롭게 상륙해 섬을 점령하는 거야. 최 통제사, 적 함대를 부술 자신이 있겠지?”

임경업의 물음에 최형희는 자신감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그럼 최 통제사를 믿겠네.”

어차피 결론은 하나였지만 적과 싸우는 걸로 결정되자 임경업은 삼도 통제사인 최형희가 마음껏 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지휘권을 맡기고 한발 뒤로 물러서 줬다.

최형희는 지휘봉을 빼 들며 휘하 군관들에게 크게 소리쳐 명령을 내렸다.

“전원 전투태세! 보급함대에 여기서 대기하라는 수신호를 보내고 전선들은 일자 진형을 갖춘 뒤 전진하라!”

“옛!”

복명을 한 군관들은 신호용 깃발을 올리며 통제사의 명령을 각 함선에 빠르게 전파했다.

“전원 전투태세! 전원 전투태세!”

“빨리 움직여!”

갑판장이 빽빽 고함을 치는 가운데 수군 병사들은 급히 무기를 챙겨 들고 선실에서 뛰쳐나와 각자 위치로 갔고 전선 양쪽 측방에 있던 포구가 열리면서 시커먼 포신이 삐죽 모습을 드러냈다.

도현이 등극한 이후 군부에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살핀 만큼 훈련이 잘되어 있던 수군 병사들은 순식간에 전투태세를 완료했다.

그때 중앙에 위치해 있던 보급선들이 서서히 속력을 늦추며 함대에서 떨어져 나왔다.

상륙병력과 물자가 전투 중에 소실되는 걸 막기 위해 전장에서 분리하는 거였는데, 보급선들은 일반 판옥선이 아니라 공격에 취약한 상선이라 현명한 결정이었다.

전라도와 경상도 수영 소속 전선들로 이루어진 연합함대는 노까지 사용해서 이제 모습이 확연히 드러난 적을 향해 거침없이 나아갔다.

한편 대형 세키부네 함교 위에 의자를 놓고 앉아 있던 소요 요시나리는 전방에 보이는 조선군 함대를 노려보며 살짝 눈가를 찡그렸다.

“판옥선이 원래 저렇게 컸던가?”

“아닙니다. 아무래도 조선에서 새로 만든 전선인 것 같습니다.”

“으음.”

예상치 못한 변수의 등장에 요시나리가 찜찜한 표정을 짓자 옆에 있던 요시다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래 봤자 숫자는 저희가 훨씬 많으니 너무 염려 하지 마십시오.”

“하긴.”

씨익 미소를 지은 요시나리는 몸을 일으켜 좌우를 둘러봤는데, 기함 양옆으로 각양각색의 깃발을 단 세키부네 수십 척이 대형을 이루고 있었다.

얼핏 봐도 족히 백여 척은 넘었다.

걱정과 달리 조선군의 원정에 위협을 느끼고 요시나리가 제시한 보상금에 혹한 왜구들이 적극적으로 지원 요청에 동참한 결과 이런 대함대를 이룰 수 있었다.

걱정을 떨쳐 내고 금방 자신감을 되찾은 요시나리는 손에 들고 있던 부채를 앞으로 내밀며 크게 소리쳤다.

“단번에 적함대로 파고들어서 놈들을 쓸어버린다. 전속 전진!”

“옛. 돌격하라!”

요시나리의 명령에 대마도 함대는 선창 밑에 있는 격군들을 마구 닦달해 속력을 올리며 조선 함대를 향해 쇄도해 들어갔다.

그러자 최형희는 함대를 멈춰 세우고는 방향을 틀어 왼쪽 측면을 드러낸 채 일자로 길게 늘어섰다.

“내가 명령하기 전에는 절대 쏘지 마라!”

통제사의 외침에 포탄을 밀어 넣고 화약까지 가득 채운 포수와 무기를 들고 방패 뒤에 엄폐한 수군 병사들은 잔뜩 긴장한 얼굴로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적선을 노려봤다.

거리가 좁아질수록 수군 병사들은 손에 땀이 차오르고 입안이 바짝바짝 말랐다.

하지만 통제사인 최형희의 명령이 없었기에 다들 무기를 들고 있는 손을 쥐었다가 펴며 공격 지시가 떨어지기만을 기다려야 했다.

“아이고, 성님, 이러다가 심장이 터져 불것소.”

같은 마을 출신인 데다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낸 사이라 형님 동생 하는 억삼이가 안절부절못하자 심지에 불을 댕길 횃불을 손에 든 중년 사내는 적선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차분히 말했다.

“쫄 것 없어.”

“허지만.”

계속 불안해하자 중년 사내는 살짝 고개를 돌려 억삼을 쳐다봤다.

“임진년 때도 우리만 만나면 판판이 깨지던 왜놈들이야. 그런데 지금은 그때보다 더 크고 화포도 훨씬 많이 장착한 판옥선을 타고 있는데 뭐가 걱정이야.”

“괜찮겠지요?”

“당연하지. 전투가 시작되면 넌 내 옆에만 딱 붙어 있어.”

“난 성님만 믿소.”

그렇게 병사들이 바짝 긴장하고 있을 때 적선이 사정거리 안으로 완전히 들어오자 마침내 기다리던 공격 명령이 떨어졌다.

“쏴!”

최영희의 명령은 옆에 있던 군관들과 수신호를 통해 전 함대로 퍼져 나갔다.

“전 함대 발사!”

“적선을 부숴 버려라!”

신경을 곤두세우고 대기하던 포수들은 명령을 듣자마자 지체 없이 심지에 횃불을 갖다 대 불을 붙였다.

치이익.

꽝! 꽝! 꽝!

순간 판옥선 측면에 장착되어 있던 화포 수백 문이 일제히 불을 뿜는 장관이 연출됐다.

조선군 함대는 뿌연 화약 연기로 뒤덮였고 포물선을 그리면서 날아간 포탄들이 비처럼 쏟아져 적선을 덮쳤다.

우지끈! 꽈꽝!

“아악.”

“으윽.”

“어서 피해.”

단 한 번의 일제사격에 적 함대는 상당한 타격을 입었는데, 단단한 나무 기둥과 판재로 장갑을 두르는 판옥선과 달리 속도에 치중해 가벼운 대나무 한 겹만 덧대어 방어가 취약한 세키부네는 날아온 철환에 그대로 구멍이 뚫리거나 부서졌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조선군이 이렇게 강한 화력을 뿜어낼 거라곤 생각하지 못한 요시나리는 멈칫거리며 당황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버럭 고함을 질렀다.

“당장 반격해!”

그러자 옆에 있던 요시다가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 저희 화포 사정거리 밖입니다.”

“제기랄!”

그때서야 조선 함대와의 거리를 가늠해 본 요시나리는 이를 부드득 갈며 욕설을 내뱉었다.

“상관없어. 그냥 쏴!”

“그렇지만…….”

가뜩이나 화가 나 죽겠는데 요시다가 명령을 따르지 않고 머뭇거리자 요시나리는 이맛살을 찡그리며 버럭 호통을 쳤다.

“거리가 짧다는 건 나도 알아. 하지만 이대로 계속 두들겨 맞고 있을 수는 없잖아! 그러니까 우리도 화포를 쏴서 놈들의 움직임을 둔하게라도 만들란 말이야.”

그때서야 요시나리의 의도를 알아차린 요시다는 황급히 상체를 숙이며 대답했다.

“아, 알겠습니다.”

“에잉.”

답답하다는 듯이 혀를 찬 요시나리는 쉴 새 없이 포격을 해 대는 조선군 함대를 노려보면서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꽝! 꽈꽝! 꽝!

잠시 뒤 요시나리의 명령에 따라 화포를 발사했지만 판옥선 근처에도 가지 못하고 힘없이 떨어져 애꿎은 물기둥만 솟구치게 했고 그나마도 조선군 함대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숫자가 적어 별다른 위협이 되지 않았다.

“하하하! 저것 봐.”

“포탄이 아깝다, 아까워.”

“큭큭큭. 맞아.”

적들이 전방에 하얀 물기둥만 만들어 내는 걸 보고 포수들이 박장대소를 하며 놀리자, 함교에 서 있던 최형희가 묵직하면서도 자신감에 넘치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화력은 우리가 우세하다. 적선이 가까이 접근하기 전에 아주 묵사발을 내 버려라!”

“우와!”

“배 아랫부분을 노려라!”

노련한 포술장의 지시에 따라 포수들은 적선에 치명타를 안길 수 있는 바닷물과 선체가 맞닿은 부분을 집중적으로 노렸다.

빠각.

우지끈.

결과는 참담했는데, 철환에 단단한 판재가 쪼개지면서 뚫린 구멍으로 바닷물이 거세게 밀려들었다.

쏴아아아.

“어푸푸.”

“어서 구멍을 막아.”

“판자를 가져와.”

적병들이 황급히 널빤지를 가져와 덧대 어떻게 해서든 침수를 막아 보려는 순간 또 다른 철환이 바로 옆 벽을 뚫고 들어와 모두 피 떡으로 만들어 버렸다.

꽈꽝!

“헉.”

“끄악!”

“큭…….”

가뜩이나 방어력이 약한 세키부네인데 침수까지 발생하자 선체가 옆으로 기우뚱거리더니 이내 균형을 잃고 뒤집어졌다.

“으아악!”

“배가 침몰한다.”

“살려 줘!”

이렇게 막대한 피해를 입으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꾸역꾸역 접근해 온 적 함대는 마침내 판옥선들을 화포 사정거리 안에 두게 됐다.

“발포하라!”

쿠쿵! 쿵! 쿵!

그러자 적선들은 지금까지 당한 걸 되갚아 주려는 듯이 아군 판옥선들을 향해 화포와 조총 사격을 가했다.

티팅! 팅!

“이크.”

낑낑거리면서 포구에 무거운 철환을 집어넣던 억삼은 상대가 쏜 총탄이 난간에 세워 둔 방패 깊숙이 박히자 화들짝 놀라 목을 움츠렸다.

“괜찮아?”

“예, 옛.”

“이제부터 근접전이니까 정신 똑바로 차려.”

“알겠수.”

정신없이 날아오는 총탄이 무서웠지만 억삼은 애써 두려움을 떨쳐 내고 다시 철환을 화포에 장전했다.

이렇게 수군 병사들은 목숨이 위험한 상황 속에서도 주춤거리거나 겁먹지 않고 용감하게 자기가 맡은 임무를 수행했다.

이제 서로 포격을 주고받으면서 상대에게 피해를 입혔지만 한 발 한 발 치명타를 가하는 조선군과 달리 적군은 명중탄이 거의 없고 그나마도 선체에 큰 타격을 주지 못했다.

바로 숙련도의 차이였는데 화포가 달려 있지만 평소 거의 쓰지 않았던 적과 달리 입에서 신물이 나올 때까지 훈련을 거듭한 조선군 포수들은 백발백중의 실력을 자랑했다.

거기다가 개량된 조선군 화포는 사거리뿐만 아니라 장전 속도마저 빨라서 상대가 한 발을 겨우 쏠 때 이쪽은 두세 발을 연달아 날릴 수 있었다.

이처럼 빠른 속사력과 긴 사거리를 가진 조선군의 공격에 적 함대는 지속적인 피해를 입고 반파되거나 침몰하는 전선이 늘어 갔다.

함교에 서서 전투 지휘를 하던 요시나리는 처참한 상황에 주먹으로 난간을 세게 내려치며 고함을 내질렀다.

“젠장! 이게 무슨 꼴이야!”

“주군, 아직 실망하기에는 이릅니다. 포격전은 밀렸지만 이제 도선을 하게 되면 단병접전에 능한 저희가 승기를 잡게 될 겁니다.”

요시다의 말에 요시나리는 눈을 번득였다.

“그렇지. 어서 배를 조선군 전선에 가까이 붙여!”

“옛.”

포격전에서 밀리자 적 함대는 근접전을 벌여 전세를 역전시키려고 했다.

하지만 자신들의 장단점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던 조선군은 적군의 의도를 단번에 파악하고는 바로 대처에 들어갔다.

“적선과 거리를 유지하면서 천천히 뒤로 후퇴해 학익진을 펼쳐라!”

둥둥둥!

북과 깃발로 통제사의 명령이 전달되자 판옥선들은 천천히 후진을 하며 일렬로 늘어서 있던 진형을 바꿔 양 날개를 좌우로 펼쳐 적을 가운데 가두고 삼면에서 공격을 퍼붓는 학익진을 펼쳤다.

“더 힘차게 노를 저어라!”

“으싸! 으싸!”

마치 수십 척의 판옥선들이 한 몸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진형을 바꾸는 데에는 갑판 아래에 있는 격군들의 피땀 어린 노력이 숨어 있었는데, 군관의 지시에 따라 근육이 터지고 손바닥이 찢어져도 쉬지 않고 노를 저으며 거친 바다와 사투를 벌였다.

이런 가운데 아무래도 거리가 가까워지다 보니 적군의 조총 사격에 포수들의 움직임이 둔해지고 피해가 발생하자 활을 든 궁수들이 나섰다.

“화살을 쏴라!”

슈슈슉! 슈슉! 슉!

“으악.”

“크헉.”

“칙쇼!”

활은 조총과 달리 직사뿐만 아니라 곡사도 가능했는데 수군 병사들은 그런 이점을 최대한 살려 상대를 공격했다.

판옥선처럼 적선에도 방패를 세워 뒀지만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와 머리 위로 떨어지는 화살 공격에 적병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상대편 배에 뛰어들어 난전을 벌이려고 갑판 위에 잔뜩 서 있던 적병들한테는 그야말로 날벼락이나 마찬가지였다.

쏟아진 화살 세례에 여기저기서 비명이 터져 나왔고 갑판은 어느새 화살에 맞아 쓰러진 적병과 시뻘건 피로 끔찍한 지옥도가 만들어졌다.

그렇게 본진에서 적 함대를 잡아 두는 사이에 양쪽 날개를 모두 다 펼친 조선군 함대는 가운데 갇힌 적선들을 향해 십자포화를 퍼붓기 시작했다.

“지금이다. 적선을 모조리 다 불태워 버려라!”

“발사!”

꽝! 꽝! 꽈꽝!

육십여 척의 판옥선이 동시에 뿜어내는 무시무시한 포격이 아직도 상황 파악을 못 하고 성난 멧돼지처럼 무조건 앞으로 돌격만 하고 있던 적선을 마구 헤집었다.

슈우우웅!

꽈꽈꽝! 쿠쿵!

기존 판옥선이 측면에서 쏠 수 있는 화포가 열 문 미만이었던 것과 달리 신형 전선은 스무 문 이상을 장착해 강력한 화력을 일시에 쏟아부었다.

거기다가 사격 각도까지 미세하게 조정할 수 있어서 정확히 적선이 가장 취약한 아랫부분을 겨냥해 타격했다.

조선군 함대의 파상 공격은 지금까지 아군 함선에 둘러싸여 있어 비교적 안전했던 요시나리의 기함까지 피해를 입혔다.

꽈직!

포탄이 기함의 옆구리에 직격하자 사방으로 나뭇조각과 파편 들이 마구 흩날렸다.

그 와중에 배가 출렁하면서 크게 기우뚱거리자 주변에 있던 적병들은 가까스로 난간을 잡아 균형을 잡았지만 의자에 앉아 지휘를 하고 있던 요시나리는 바닥을 나뒹구는 치욕을 맛봐야 했다.

“크윽!”

“괜찮으십니까?”

무거운 갑옷 탓에 혼자선 제대로 일어설 수도 없는 요시나리를 병사들이 겨우 부축해 자리에 앉혔다.

황급히 다가온 요시다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를 살피며 묻자 요시나리는 얼굴을 붉히고는 짜증스럽게 말을 내뱉었다.

“젠장. 이게 무슨 꼴이야!”

넘어진 게 창피한 것도 있었지만, 좀처럼 전투가 원하는 대로 풀리지 않고 아군 전선들이 하나둘 전투 불능 상태에 빠지거나 침몰하는 게 그를 분노하게 했다.

“주군, 아무래도 이 이상 전투를 계속하는 건 무리인 것 같습니다. 일단 물러났다가 다시 결전을 벌이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러자 요시나리는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리고는 주먹으로 난간을 세게 내려치며 크게 호통을 쳤다.

“바다에서 조선군과 결판을 내자고 한 사람이 바로 자네 아닌가! 그런데 이제 와서 그딴 이야기가 나오나?”

“면목 없습니다.”

지은 죄가 있기에 요시다는 기가 꺾인 표정으로 고개를 떨궜다.

“조금만 가면 섬이 나오는데 여기서 밀리면 끝장이다. 어떻게든 승부를 봐야 돼. 그리고 피해가 크지만 아직 숫자는 우리가 더 많아.”

스스로 다짐을 하듯 말을 내뱉은 요시나리는 커다란 목소리로 전투를 독려했다.

“단병접전이 벌어지면 우리가 이긴다! 노를 더 빨리 저어서 속력을 올려라. 무조건 배를 붙여야 한다. 어서 돌격기를 올리고 북을 쳐라! 전 함대 돌격!”

최후의 발악이라도 하듯 이미 지치고 기진맥진한 함대에 요시나리는 돌격 명령을 내렸다.

그것은 남은 전력이나마 살려서 섬으로 돌아갈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스스로 차 버리는 어리석은 결정이었다.

돌격 깃발이 오르고 전투를 독려하는 북소리가 울려 퍼지자, 침몰하거나 대파되어 항해 능력을 상실한 삼십여 척을 제외한 나머지 적선들이 속도를 올려 통제사가 있는 중앙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걸 본 최영희는 두려워하기는커녕 오히려 입가에 미소를 머금으며 큰 소리로 지시를 내렸다.

“후후후. 스스로 불구덩이 속에 뛰어드는군. 전포대 선두에 위치한 적선부터 차근차근 부숴 버려라!”

“옛!”

통제사의 명령은 순식간에 각 전선으로 전파됐고 포수들은 신속히 발사 준비를 갖추고 목표를 겨냥했다.

“조준. 발사!”

꽝! 꽝! 꽝!

판옥선에 장착된 화포들이 일제히 불을 뿜으며 선두에 튀어나온 적선을 집중 타격했다.

수십 발이나 되는 포탄이 한꺼번에 날아와 떨어지자 하얀 물기둥에 둘러싸인 세키부네는 마치 종이로 만든 배처럼 힘없이 찢겨 나갔다.

꽈득.

“아악.”

“배가 침몰한다.”

“내 다리.”

“어서 피해.”

간신히 살아남은 적병들은 포격에 넝마처럼 너덜너덜해진 배가 서서히 가라앉자 혼비백산해서 바다로 뛰어들었다.

풍덩!

“살려 줘.”

배가 침몰하면서 생기는 소용돌이에 휩쓸려 가지 않으려고 물에 뛰어든 적병들은 필사적으로 헤엄을 쳤다.

선두에 섰던 적선이 침몰하자 화포 사격은 그다음 배로 옮겨 갔고 그렇게 조선군 포수들은 차례차례 세키부네를 깨부쉈다.

이렇게 되자 돌격해 오던 적선의 움직임이 차츰 둔해지더니 급기야 후퇴 명령이 없었는데도 선수를 돌려 달아나는 배가 생겨났다.

“다 틀렸어. 어서 여길 빠져나가야 돼.”

단일 세력이 아니라 여기저기서 왜구들을 끌어모아 함대를 만든 요시나리의 최대 약점이 전황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한 척이 이탈하자 눈치를 보고 있던 다른 왜구들도 바로 뒤를 따랐고 순식간에 적 함대의 대형이 무너졌다.

상대편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던 최영희는 적군 대형이 균열을 일으키는 걸 발견하자마자 지체 없이 돌격 명령을 내렸다.

“적이 흔들린다. 함포사격을 계속 퍼붓고 돌격선 앞으로!”

그러자 온통 뿌연 화약 연기로 뒤덮인 조선군 함대 뒤에서 거북선 다섯 척이 마치 유령처럼 나타나 빠른 속도로 우왕좌왕하고 있는 적선 사이를 파고들었다.

“전속력으로!”

둥둥둥!

“으싸! 으싸!”

북을 빠르게 두드리며 군관이 소리치자 격군들은 있는 힘껏 박자에 맞춰 노를 저었다.

쏴아아.

파도를 가르며 일직선으로 나아간 거북선은 제일 가까이 위치한 세키부네의 측면을 향해 속도를 줄이지 않고 그대로 달려들었다.

“충돌한다!”

작은 창으로 밖을 살피던 병졸의 외침에 격군들은 노를 꽉 붙잡으며 몸을 웅크렸고 이내 앞쪽에서 뭔가 부딪치는 강한 충격이 선체에 전해졌다.

쿠쿵!

꽈직.

둔탁한 충돌음과 함께 거북선 선수 아래에 설치된 충각이 적선 측면을 뚫고 들어가 성인 몸통보다 큰 구멍을 만들었다.

“후진!”

“힘껏 저어라!”

“으싸!”

끼이이익.

격군들이 노를 반대로 저어 거북선이 뒤로 물러서자 구멍을 통해 바닷물이 콸콸 쏟아져 들어갔고 이내 적선은 한쪽으로 서서히 기울어졌다.

이렇게 직접 부딪쳐 깨뜨리는 충각 공격을 가할 뿐만 아니라 거북선은 적선들 사이로 끼어들어서는 양옆에 달린 화포 사십 문을 일시에 발사해 상대편 선체를 걸레 조각처럼 찢어발겼다.

꽈꽈꽝! 쿠쿵! 꽝!

“크아악.”

“꾸억.”

가뜩이나 화력에서 밀리는데 거북선들이 돌격해 들어와 이처럼 마구 내부를 헤집고 다니자 적 함대는 대형이 완전히 흐트러졌다.

이런 가운데 주위에 있던 군선들이 하나둘 격침당해 어느새 제일 앞으로 나오게 된 요시나리는 부채 모양의 지휘봉을 신경질적으로 흔들면서 전투를 독려했다.

“물러서지 말고 계속 싸워라!”

목에 핏대를 세우고 고함을 질러 댔지만 요시나리의 명령을 따르는 군선은 몇 척 되지 않았다.

오히려 선수를 돌려 도망치는 군선이 더 많을 정도로 승부의 추는 조선군 쪽으로 확실히 기울어졌다.

하지만 요시나리는 그걸 인정하려 들지 않고 계속 고집을 부렸는데 그때 판옥선에서 날아온 화살 하나가 그의 왼쪽 어깨에 박혔다.

푸욱.

“컥!”

화살이 박힌 요시나리가 신음을 내뱉으며 옆으로 쓰러지자 요시다가 화들짝 놀라 황급히 그를 부축했다.

“주군!”

“제기랄.”

겨우 상체를 일으킨 요시나리는 극심한 고통에 얼굴을 있는 대로 구겼다.

부상 부위를 살핀 요시다는 다행히 화살촉이 뒤로 관통해 있지만 출혈이 심한 걸 보고 품속에서 하얀 손수건을 꺼내 임시로 지혈을 하며 말했다.

“더 이상은 무립니다. 다음을 도모하시려면 지금이라도 뒤로 물러나셔야 됩니다.”

“이익.”

분에 못 이겨 이를 부드득 갈던 요시나리는 이미 만신창이가 되어 뿔뿔이 흩어져 도망치고 있는 아군 군선들을 보고는 힘없이 고개를 떨궜다.

“함대를 후퇴시키게.”

계속 고집을 피우면 어떻게 하나 걱정하던 요시다는 요시나리의 말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얼른 대답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요시나리를 부축해 함교 안쪽으로 옮긴 요시다는 큰 소리로 후퇴 명령을 내렸다.

“퇴각! 퇴각하라! 각 군선은 재량껏 전장을 빠져나가서 이즈하라에 다시 재집결해라.”

그러자 용병으로 참가한 왜구들이 다 도망쳐 버리고 몇 척 남지 않은 채 분전하고 있던 쓰시마 번 소속 군선들이 선수를 돌려 후퇴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마치 학이 커다란 양 날개를 길게 펼치고 있는 것처럼 삼면을 포위한 판옥선들의 포격과 거머리처럼 물고 늘어지는 거북선의 공격에 적선 태반이 전장을 빠져나가지 못하고 바다에 가라앉았다.

백여 척이 넘었던 적선 중에 전장을 벗어난 군선은 겨우 사십 척도 안 됐는데, 그마저도 선체 여기저기에 크고 작은 피해를 입은 상태였고 나머지는 모두 침몰되거나 대파되어 위태롭게 떠 있었다.

“꽁지가 빠지게 도망가는 꼴 좀 봐!”

“하하하! 고놈들 쌤통이다.”

“우와아! 우리가 이겼다.”

물에 빠져 허우적대는 동료도 미처 챙기지 못하고 허겁지겁 달아나는 모습에 수군 병사들은 크게 웃음을 터트리며 승리감을 만끽했다.

해전을 지휘한 최영희는 전투를 치르느라 지친 병사들을 쉬게 하고 함대 재정비를 위하여 추격을 포기했는데 어느새 해가 져서 수평선 위로 붉은 노을이 지고 있었다.

거북선 돌격을 제외하고는 철저히 거리를 두고 포격전을 벌인 조선군은 침몰된 군선은 없고 적이 쏜 포탄에 맞아 선체 일부가 부서진 판옥선 세 척이 피해의 전부였다.

이걸로 훗날 조선해협해전으로 불릴 원정 첫 번째 전투는 조선군의 완벽한 승리로 막을 내렸다.

소요 요시나리는 아주 처량한 모습으로 이즈하라에 돌아왔는데, 아침까지만 해도 백여 척에 달하는 대함대를 거느리고 보무도 당당히 출항했던 것과 달리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던 기함은 여기저기 부서지고 망가진 채 엉망이었고, 그나마 함께 귀환한 배도 몇 척 되지 않았다.

소식을 듣고 급히 영주성에서 달려온 가베이는 완전히 패잔병이 되어 돌아온 배와 병사들을 보고 그대로 얼어 버렸다.

“어, 어떻게 이럴 수가…….”

“저기 영주님이십니다.”

함께 온 무사의 말에 시선을 돌린 가베이는 형인 요시나리가 한쪽 어깨에 붕대를 감은 채 요시다의 부축을 받으며 배에서 내리는 걸 발견하고 화들짝 놀라 앞으로 달려갔다.

“형님,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초췌한 얼굴의 요시나리는 가베이의 물음에 힘없이 대답했다.

“보다시피 지고 말았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합니까?”

“이대로 섬을 내줄 수는 없으니 에도에 지원군을 요청하고 성에서 끝까지 버티며 농성을 하는 수밖에.”

“으음.”

이를 부드득 갈며 내뱉는 요시나리의 말에 가베이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해전에서 승부를 볼 작정으로 정예병 대부분을 끌고 가서 지금 남아 있는 병사들은 나이가 많거나 전쟁이 벌어지자 급하게 끌어모은 농민병이었다.

그나마도 숫자가 천 명이 채 안 됐고 무장마저 형편없었는데, 이런 상태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암담했다.

“일단 영주님의 부상을 치료하는 게 급선무니, 말씀은 나중에 나누시는 게 좋겠습니다.”

“음. 그도 그렇군.”

요시나리를 부축하고 있던 요시다가 그렇게 말하자, 가베이가 수하를 불러 말을 끌고 오게 했다.

상처 때문에 쉽사리 움직이지 못하는 요시나리를 위해 직접 손으로 발을 받친 요시다는 그가 안장에 앉아 고삐를 잡는 걸 본 후에야 자기 말에 올라탔다.

가베이가 요시나리의 옆에서 보조를 맞추고, 요시다가 그 뒤를 따르자 성에서 호위 격으로 딸려 온 병사들 몇몇도 함께 움직이며 자리를 떴다.

당초 예상했던 화려한 개선식 대신 초라하기 짝이 없는 귀환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말을 타고 떠나면서 남긴 먼지 구름 사이로 더욱 비참하게 남겨진 자들이 있었으니, 바로 마중을 나온 사람조차 없는 일반 병사들이었다.

저마다 팔이며 머리에 붕대 하나씩 감고서는 힘없는 발걸음으로 걸어 나오는데, 사지가 성하거나 상처가 없는 사람을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출발할 때는 그리 기세등등했던 장정들도 지금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남의 눈에 띌세라 고개를 푹 숙여 두건으로 얼굴을 가린 채 발밑만 보고 걸었다.

하늘에 높이 뜬 보름달도 부끄러운 패배자의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은 이들의 마음을 헤아렸는지, 짙은 먹구름으로 감싸여 빛도 새어 나오지 않는 그런 어두운 밤이었다.

다음 날 새벽 원정군 함대는 어둠을 밝히며 힘차게 떠오르는 일출을 뒤로하고 이즈하라 앞바다에 모습을 드러냈다.

“여기가 왜구들의 소굴이군.”

함교 난간에 선 임경업이 희뿌연 새벽안개 사이로 보이는 이즈하라를 지그시 바라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 함께 있던 최영희가 담담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우리가 되찾아야 될 땅이기도 하지요.”

“맞아.”

고개를 끄덕인 임경업은 아까와 다른 눈빛으로 항구를 천천히 훑어보고는 말을 이었다.

“상륙 준비는 다 끝났지.”

“예.”

“그럼 머뭇거릴 것 없이 바로 시작하지.”

“알겠습니다.”

기함 돛대에 붉은색 삼각 깃발이 올라가자 판옥선 다섯 척이 대형을 이탈해 선착장으로 접근했고 나머지 군선들은 선체를 틀어 측면을 드러낸 채 언제든 포격을 가할 수 있도록 만반의 태세를 갖췄다.

바닥이 평평하고 넓은 U 자 모양의 평저선平底船인 판옥선은 모래톱에 걸리지 않고 아주 얕은 곳까지 들어가 줄사다리를 내리고 병사들을 상륙시켰다.

바로 옆에 잘 만들어진 선착장이 있었지만 어제 치러진 해전에서 도망친 적선 다섯 척이 먼저 정박해 있기도 했고, 혹시 매복이 있을지 몰랐기에 임경업은 사방이 다 트인 마을 근처 해안을 상륙지로 결정했다.

창과 검으로 무장한 선발대 오백 명은 허리까지 오는 바닷물을 헤치고 해안에 올라와서는 재빨리 전투대형을 갖추며 주변을 경계했다.

지난 김자점의 반란 때 형을 따라 도현을 도운 공으로 정오품 판관이 된 이관은 날이 시퍼렇게 살아 있는 검을 손에 쥔 채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매복이 있을지도 모르니 다들 긴장하고 날 따라와라.”

“옛.”

이관이 지휘하는 선발대는 조심스럽게 마을로 걸음을 옮겼다.

바로 뒤에 영주성인 가네이시가 있어 원정군의 상륙을 막으려면 꼭 지켜야 되는 요충지였지만, 어찌 된 일인지 노약자와 여자 들만 남아 두려움에 떨고 있을 뿐 마을 전체가 텅 비어 있었다.

한 시진에 걸쳐 수색을 벌였지만 별다른 이상이 없자 이관은 만약을 대비해 선착장에 방어 대형을 구축하고는 함대에 상륙해도 좋다는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판옥선들과 함께 뒤편에서 대기 중이던 상선 수십 척이 차례로 선착장에 들어와 병력과 물자를 내려놓기 시작했다.

흑치영도 근위대 총병 삼천 명을 데리고 1진으로 배에서 내렸다.

약간 들뜬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고 있을 때 등에 전령 깃발을 단 병사 한 명이 달려오며 그를 불렀다.

“군호 어른.”

“무슨 일이냐?”

근위대가 확대되면서 자연스럽게 흑치영의 계급도 올라갔는데 사령인 박영식은 정삼품 병마절도사가 됐고 그는 정사품 군호 벼슬에 제수됐다.

얼마나 급하게 뛰어왔는지 전령은 숨을 헐떡이면서 어깨에 메고 있던 가방에서 명령서를 꺼내 흑치영한테 내밀었다.

“총사령의 명령입니다.”

임경업이 보낸 거라는 말에 황급히 명령서를 펼친 흑치영은 안에 적힌 내용을 읽어 보고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명령서를 품속에 집어넣은 흑치영은 고개를 돌려 옆에 서 있는 부관을 보며 말했다.

“부관.”

“말씀하십시오.”

“우리가 선두에서 성까지 길을 여는 임무를 맡았다. 즉시 움직일 수 있도록 준비하게.”

“옛.”

상륙을 하자마자 우왕좌왕하지 않고 한곳에 집결해 있던 근위대 소속 총병들은 잠시 뒤 말에 오른 흑치영을 선두로 질서정연하게 선착장을 출발해 멀리 보이는 가네이시 성을 향해 행군했다.

시야가 제한된 산속인 데다 어디에 매복이 있을지 몰랐기에 병사들은 총신에 긴 대검을 부착했다.

이러면 사격할 때 조준이 힘들고 재장전하는 데 불편했지만 가까운 거리에서 난전이 벌어지면 조총을 창 대용으로 쓸 수 있었다.

거기다 임경업은 총병만 보내지 않고 이관이 지휘하는 창병 오백을 함께 움직이게 해서 전투가 벌어지는 것에 대비했다.

다행히 꼭대기에 있는 산성이 아니라 기슭에 위치한 평성이었기에 길이 험하지는 않았지만 약간의 오르막과 양옆에 울창한 숲이 있어 긴장을 놓지 못했다.

그렇게 가네이시 성이 바로 지척에 보이는 지점까지 왔을 때 앞장서서 이동하던 흑치영이 뭔가 수상한 낌새를 느꼈는지 한쪽 손을 들어 올리며 병사들을 멈춰 세웠다.

“왜 그러십니까?”

옆에 있던 부관이 묻자 흑치영은 주위를 둘러보고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이상하지 않아.”

“뭐가 말씀이십니까?”

“방금 전까지만 해도 시끄럽게 울어 대던 새소리가 여기서는 왜 들리지 않지?”

“…….”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사방이 쥐 죽은 듯이 조용했는데 순간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에 부관은 얼굴을 굳히며 그를 봤다.

“혹시?”

“맞아. 매복이 있는 게 분명해.”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한 흑치영은 고개를 뒤로 돌리며 명령을 내렸다.

“모두 전투 대형을 갖춰라!”

매복이 있을지 모른다는 이야기를 듣고 잔뜩 긴장하고 있던 병사들은 명령이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신속하게 네모난 방진方陣을 구축했다.

공선전을 벌이기 전에 조금이라도 상대에 피해를 주기 위해서 주변 마을에서 급히 끌어모은 농민병 칠백을 데리고 숲에 매복하고 있던 가베이는 이런 조선군의 움직임에 얼굴을 구기며 소리쳤다.

“젠장! 적이 눈치챘다. 모두 공격.”

“우와아아!”

함성을 지르며 적군이 왼편 숲에서 뛰쳐나오자 흑치영은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로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아 들었다.

“창병은 계속 주위를 경계하고 총병들은 왼쪽에 있는 적을 조준하라!”

처처척.

침착하게 훈련받은 대로 삼 열 사격 대형을 갖추고 조총을 들어 올린 부하들이 금방 조준까지 끝내자 흑치영은 재차 큰 소리로 외쳤다.

“발사!”

명령과 동시에 총병들은 방아쇠를 힘껏 당겼다.

타타탕! 타탕! 탕! 탕!

콩 볶는 듯한 날카로운 총성과 함께 자욱한 화약 연기가 주위를 뒤덮는 가운데 일제사격을 받은 적군은 비명을 내지르며 썩은 짚단처럼 우수수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으악!”

“컥.”

“끄윽.”

조선군이 가진 신형 조총이 아무리 속사 능력이 뛰어나다지만 워낙 양쪽의 거리가 가깝다 보니 연달아 발사하는 어렵다고 판단한 흑치영은 단번에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 한꺼번에 총을 쏘게 했고 효과는 바로 나타났다.

커다란 총성이 울리며 쏟아진 총탄에 절반이 넘는 인원이 죽거나 부상을 입고 쓰러지자 가뜩이나 억지로 끌려와 전투 의지가 약했던 농민병들은 공포에 질려서 무기를 내던지고는 뒤로 달아났다.

“히익.”

“도, 도망쳐.”

“이런 멍청한 것들이. 도망치지 말고 어서 적과 싸워라!”

검을 들고 소리를 고래고래 질러 대는 가베이는 지금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형인 요시나리를 보좌하기 위해 어릴 때부터 가문 무사들에게 검술을 배운 가베이는 자신의 실력에 자부심이 컸다.

그 때문에 구로야마 총관이 극구 말리는데도 불구하고 농민병들을 끌고 성을 나와 매복을 한 거였다.

그런데 전투가 시작됨과 동시에 어떻게 손쓸 틈도 없이 박살 나자 하늘 높은 줄 모르던 자존심이 산산이 부서졌다.

전날 비참한 패잔병의 모습으로 돌아온 형과 병사들을 보고 조심했어야 됐는데, 지금 후회해 봤자 너무 늦어 버렸다.

도망치는 농민병의 목을 검으로 베며 전투를 독려했지만 이미 겁에 질려 이성을 상실한 병사들을 돌려세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런 와중에 말에 탄 흑치영의 외침이 다시 울려 퍼졌다.

“창병 앞으로 적들을 다 쓸어버려라!”

“돌격!”

단 한 번의 사격에 전열이 흐트러지는 걸 보고 상대가 오합지졸이라는 걸 파악한 흑치영의 명령에 이관이 부하들을 이끌고 앞으로 돌격했다.

채챙! 챙! 챙!

“크악!”

“으윽.”

창을 내밀며 용감하게 뛰어간 병사들은 적군을 덮쳐 짚단 베듯 가차 없이 상대를 베어 넘기거나 마구 찔렀다.

“꾸에엑.”

“컥.”

잔뜩 겁먹은 얼굴로 죽창을 찔러 오는 농민병의 목을 벤 이관은 지저분한 옷에 무기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다른 적들과 달리 화려한 장식이 달린 투구를 쓰고 있는 가베이를 발견하고 이채를 띠었다.

“저놈이 우두머리군.”

“헉! 막아라.”

“이얍!”

검을 치켜든 채 달려드는 이관을 보고 가베이를 호위하던 무사가 경호성을 외치며 황급히 앞을 가로막았다.

채챙!

두 사람의 검이 허공에서 부딪치는 순간 이관은 커다란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날렵한 동작으로 빙글 원을 그리며 검을 쳐올려 상대편 무사의 옆구리를 길게 베었다.

슈각.

“끄헉.”

억눌린 비명과 함께 무사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고 이관은 걸음을 멈추지 않고 그대로 달려가 당황한 가베이의 머리를 노리고 검을 있는 힘껏 내려쳤다.

“죽어라!”

“헉!”

눈을 크게 치켜뜬 가베이가 본능적으로 검을 위로 올렸지만 타고난 신력에 무게까지 실은 이관의 공격을 막아 내는 건 역부족이었다.

“끄아악.”

푹.

상대편 검을 힘으로 밀쳐 낸 이관의 장검은 정확히 가베이의 얼굴에 틀어박혔다.

시뻘건 피와 뇌수가 튀어 올라 이관의 갑옷을 흠뻑 적셨고 절명한 가베이는 그가 검을 뽑아내자 뒤로 무너지듯 쓰러졌다.

그러자 이관은 죽은 가베이의 목을 잘라 높이 쳐들며 크게 외쳤다.

“적장이 죽었다. 모두 항복해라!”

이관의 말에 이미 전투의지를 상실해 있던 농민병들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가지고 있던 무기를 바닥에 던지고는 양팔을 들고 투항했다.

“사, 살려 주십시오.”

“항복합니다.”

“창병들은 즉시 무기를 수거하고 항복한 적을 포박해라!”

“옛.”

이어진 명령에 창병들은 크게 복명하고는 두려움에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 농민병들을 한곳에 모아 포승줄로 묶은 후 바닥에 떨어진 무기를 수거하는 등 서둘러 전장 정리를 했고, 근위대 총병은 경계 태세를 유지하며 혹시 있을지 모를 공격에 대비했다.

부하들을 지휘하고 있는 이관에게 흑치영이 말을 몰아 다가갔다.

“멋지게 적을 다 처리했군.”

“아닙니다. 군호께서 지휘하시는 총병대가 단번에 상대의 기선을 제압해 버린 덕에 저희는 그저 편하게 이삭줍기를 했습니다.”

이관이 활약하는 걸 뒤에서 하나도 빼놓지 않고 다 지켜봤던 흑치영은 겸손한 태도에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하하하! 성난 황소처럼 달려가 적장과 호위 무사를 단번에 베어 버리는 걸 봤네. 작은 피해로 상대를 물리칠 수 있었던 건 자네 공이 커. 수고했네.”

“감사합니다.”

군례를 취하며 살짝 상체를 숙이는 이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주면서 흑치영이 이야기를 이었다.

“곧 본대가 뒤따라올 테니 창병 일부를 남겨 전장 정리를 맡기고 우리는 바로 움직이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부상을 당한 병사를 포함해서 창병 오십을 남겨 둔 선발대는 잠시 재정비를 한 뒤 다시 영주성을 향해 진격했다.

이게 유일한 매복이었는지 그다음부터는 별다른 문제없이 움직인 선발대는 정오 무렵에 가네이시 성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성 앞에 있는 공터에 자리를 잡은 선발대는 당당하게 방진을 갖춘 채 늘어섰고 얼마 있지 않아 임경업이 이끄는 본대가 합류했다.

안장 위에 앉아 정면에 보이는 가네이시 성을 천천히 훑어본 임경업은 오랜만에 전장에 나선 것이 즐거운지 활기찬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성벽이 높지 않군.”

“전국시대를 거치며 수시로 다툼을 벌인 다른 영주들과 달리 소씨 가문은 외부의 침략을 받은 적이 거의 없어서 그럴 겁니다.”

예전부터 함께해 온 부관인 박도치의 설명에 임경업은 머리를 끄덕였다.

확실히 가네이시 성은 여러모로 허술했는데 성벽이 삼 미터 정도밖에 안 됐고 가장 중요한 성문은 그냥 목재 건물을 하나 지어 입구를 막는 형식으로 되어 있어 화포 공격과 화공에 아주 취약해 보였다.

그리고 내부를 복잡하게 만들고 군데군데 요새 같은 걸 세워 적군의 침입을 저지하는 다른 영주 성과 달리 방어 시설도 적고 아주 단순한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일본 성에서 가장 중요한 시설로 영주 가족들이 거주하고 전쟁 시에는 지휘소 역할을 하는 천수각 또한 규모가 작고 그다지 높지 않았다.

어찌 됐건 성을 함락시켜야 되는 원정군 입장에서는 공략하기가 편하니 나쁠 것이 하나도 없었다.

“어떻게, 바로 공격하시겠습니까?”

잠시 고심하던 임경업은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금 전력만 가지고도 충분히 성을 함락시킬 수 있겠지만 쓸데없는 공명심과 조급함 때문에 아까운 병사들을 희생시킬 수는 없으니 선착장에서 하역 중인 화포가 도착하기를 기다리도록 하세.”

살짝 아쉬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지만 틀린 말이 아니었기에 박도치는 머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명령을 내린 임경업은 고요히 빛나는 눈을 한 채 그대로 조금 더 가네이시 성을 살펴보다가 말 머리를 돌렸다.

임경업의 지시에 따라 원정군 병사들은 재빨리 근처 숲에서 나무를 잘라와 성과 마주 보는 곳에 목책을 세우고 임시 주둔지를 만들었다.

한편 천수각 꼭대기에 위치한 넓은 방에서는 소씨 가문 수뇌들이 모두 모여 대책을 세우느라 고심하고 있었다.

“목책과 숙영지를 세우는 걸로 봐서 일단 오늘은 공격을 하지 않고 그냥 넘어갈 생각인 것 같습니다.”

구로야마 총관의 이야기에 붕대를 감고 상석에 앉아 있던 요시나리가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어다.

“아직 가베이의 소식이 없나?”

그러자 잠시 머뭇거리던 구로야마 총관이 침통한 어투로 대답했다.

“지금까지 돌아오시지 않는 걸 보면 아무래도 전사하신 것 같습니다.”

“아니야. 절대 그럴 리가 없어!”

“주군…….”

평소 죽이 잘 맞고 각별히 아끼는 동생이었기에 요시나리는 살아 있을 확률이 낮다는 걸 알았지만, 그걸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요시다.”

“예.”

“오늘 밤 북문으로 은밀히 병사들을 내보내 가베이를 찾으라고 하게.”

평상시도 아니고 조선군이 성 밖에 있는 상황에서 수색대를 내보내는 건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였기에 요시다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너무 위험합니다.”

“그러니까 몰래 나가라는 거 아닌가.”

가뜩이나 가베이가 농민군 칠백을 끌고 나갔다가 다 말아 먹는 바람에 병력이 부족한데 수색대를 내보내라고 하자, 야단을 각오하고 반대하려던 요시다는 반대편에 앉아 있는 구로야마 총관이 눈짓을 하며 작게 고개를 내젓자 앓는 소리를 내며 머리를 끄덕였다.

“끄응. 알겠습니다.”

그렇게 가베이에 대한 이야기가 정리되자 구로야마 총관이 딱딱하게 굳어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오늘은 그럭저럭 넘어간다고 해도 당장 내일부터 조선군이 성을 함락시키려 할 텐데 어찌해야 될지 걱정입니다.”

처음 전략을 세울 때 수성을 주장한 건 구로야마 총관 자신이었지만 지금은 그때와 상황이 너무나도 달랐는데, 우선 그동안 애써 키운 정예병 태반이 해전에 나섰다가 허무하게 수장되어 버렸고, 급히 주민들을 징집했지만 숫자도 적고 무기가 없어 죽창 하나만 달랑 쥐여 줄 정도로 형편이 안 좋았다.

“지원군을 요청하는 사신은 에도에 보냈나?”

“예. 오늘 새벽에 쾌속선을 타고 떠났으니 늦어도 이틀 뒤에는 막부에 주군의 서신이 전달될 겁니다. 하지만 지원군이 올 때까지 성을 지켜 낼 수 있을지…….”

구로야마 총관이 어두운 표정으로 말끝을 흐리자 요시나리가 손바닥으로 팔걸이를 세게 내려치며 호통을 쳤다.

탕!

“무슨 그런 나약한 소리를 하는 거야! 이 가네이시 성은 우리 소씨 가문이 자리를 잡은 이후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적에게 떨어진 적이 없는 곳이야.”

그러자 구로야마 총관은 낮게 한숨을 내쉬고는 상석에 있는 요시나리를 쳐다보면서 심각한 어조로 이야기를 했다.

“지금까지는 그래 왔지만 이번에는 그렇게 낙관을 할 상황이 아닌 걸 주군께서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당장 성안에 있는 병사들이라고 해 봤자 주민들을 억지로 끌고 와 세워 둔 것에 지나지 않고, 그나마도 쓸 만한 병력은 작은도련님께서 매복을 하신다고 나가 다 잃고 지금 남아 있는 건 태반이 열다섯 살 이하의 어린아이거나 오십이 넘은 노인인데 이들을 데리고 성을 지킬 수 있겠습니까. 아마 모르긴 해도 조선군이 공격해 오면 제대로 싸워 보지도 않고 뿔뿔이 흩어지지나 않으면 다행일 겁니다. 이대로 성이 무너진다면 선대부터 이어져 내려온 소씨 가문의 명맥이 여기서 끝날 수도 있습니다.”

“으으음.”

아픈 곳을 사정없이 찌르는 구로야마 총관의 지적에 요시나리는 이마에 핏줄이 돋아났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화를 못 내고 그저 낮게 침음을 흘렸다.

“그래서 어쩌자는 건가?”

“이대로 맞붙는 건 승산이 없습니다. 차라리 치욕스럽지만 조선군에 항복을 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뭐!”

항복이라는 말에 요시나라는 얼굴을 시뻘겋게 붉히며 버럭 고함을 질렀고 함께 있던 요시다와 다른 가신들도 발끈했다.

“아무리 상황이 불리하지만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항복이라니 차라리 막부에서 지원군을 보내 줄 때까지 옥쇄를 하는 심정으로 성을 지키는 것이 백번 낫겠습니다.”

“나도 같은 생각이오.”

상황이 이 지경이 됐는데도 아직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있는 가신들의 모습에 구로야마 총관은 암담한 얼굴을 했다.

“정녕 성이 불타고 소씨 가문이 여기서 문을 닫는 걸 봐야 되겠소!”

언성을 높이며 따끔하게 소리친 구로야마 총관은 상석으로 시선을 돌려 간절히 재차 항복을 권유했다.

“예전에도 조선이 대군을 일으켜 섬에 쳐들어온 적이 있었지만 해적질을 한 왜구와 노예로 잡혀 온 백성들만 되찾아갔지 땅에 욕심을 내지는 않았습니다. 이번에도 그럴 가능성이 크니 항복을 하고 저들이 원하는 걸 내준다면 영지와 가문을 보존할 수 있을 겁니다.”

어제 있었던 해전에서 조선군의 강함을 온몸으로 체험했고 현재 가진 전력이 너무나도 보잘것없다는 걸 잘 아는 요시나리는 구로야마 총관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정말 그렇게 될까?”

“틀림없습니다. 아마 조선군도 이번 원정에서 큰 피해를 입는 건 원치 않을 테니 허장성세虛張聲勢로 세를 과시하며 협상을 한다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겁니다.”

팔걸이를 손가락 끝으로 툭툭 두드리면서 잠시 고심하던 요시나리는 이내 살짝 힘이 빠진 목소리로 이야기를 했다.

“거센 바람 앞에서는 꼿꼿이 서 있기보다 갈대처럼 휘어질 줄도 알아야 된다고 했으니, 그렇게 하지.”

“잘 생각하셨습니다.”

“그럼 협상은 누굴 보내는 것이 좋겠나?”

요시나리의 물음에 구로야마 총관이 사뭇 결연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제가 가겠습니다.”

“총관이?”

“예. 주군께서 나가실 수는 없느니 총관인 제가 대표로 가는 것이 어느 정도 상대와 격을 맞출 수 있을 것입니다.”

“괜찮겠나?”

“염려하지 마십시오.”

“흐음.”

확실히 다른 가신들보다 무게감도 있고 언변과 머리가 뛰어난 총관이 나서는 게 낫겠다는 판단에 요시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게.”

“최선을 다해 원하는 결과를 얻어 내도록 하겠습니다.”

“협상을 하더라도 우리가 약한 모습을 보이면 다 허사이니 모두 정신 바짝 차리고 싸움에 대비하도록.”

“알겠습니다, 영주님.”

그 뒤로도 어떻게 협상을 할 것인지 세부적인 사항을 논의한 요시나리와 가신들은 늦은 밤이 되어서야 회의를 끝냈다.

다음 날 아침 성문이 열리며 구로야마 총관과 호위 두 명이 백기를 든 채 말을 타고 나와 조선군 진영으로 왔다.

일찍 일어나 갑옷을 갖춰 입은 임경업은 군영 중앙에 위치한 지휘 천막에서 휘하 장수들을 불러 모아 놓고 오늘 있을 전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화포는 도착했나?”

임경업의 물음에 부관인 박도치 장군이 바로 대답했다.

“예. 어젯밤 배에서 내린 천자총통天字銃筒 열 문을 군영에 끌어다 놨습니다.”

천자총통은 천天, 지地, 현玄, 황黃 등으로 구분되는 조선의 화포 중에서 가장 사거리가 길고 위력이 큰 것이었다.

“병사들이 고생했겠군.”

한쪽에 당당히 앉아 있던 흑치영이 임경업을 보며 이야기를 했다.

“그럼 계획대로 오늘 공격을 하는 겁니까?”

“그래야지. 무차별 포격을 가해 성벽과 성문을 허물어뜨린 다음에 곧장 병사들을 돌격시켜 함락하는 거야.”

그러자 지위가 낮아 뒤편에 서 있던 이관이 조금 머뭇거리면서 나섰다.

“저, 장군, 공성전을 시작하기 전에 항복을 권유해 보는 건 어떻겠습니까?”

이야기를 꺼낸 이관을 힐끗 쳐다본 임경업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뭐, 그것도 나쁘지 않지만 상대가 우리 요구 조건을 받아들일지 모르겠군.”

그때 하급 군관 한 명이 들어와 군례를 올렸다.

“충. 말씀을 나누시는 중에 죄송합니다.”

“무슨 일인가?”

회의 중간에 끼어든 것이 마음에 안 드는지 살짝 눈가를 찌푸리면서 박도치가 묻자 하급 군관은 얼른 용건을 이야기했다.

“성에서 사신이 찾아왔습니다.”

“사신?”

“예.”

뜻밖의 상황에 장수들은 약간 술렁이면서 최고 지휘관인 임경업을 쳐다봤다.

“들여보내.”

“알겠습니다.”

상체를 숙이며 대답한 하급 군관이 천막을 나가자 박도치가 의아한 얼굴로 말했다.

“왜 찾아왔을까요?”

“만나 보면 알겠지.”

잠시 뒤 구로야마 총관과 호위들이 무장한 군관 세 명의 감시를 받으며 천막 안으로 들어왔다.

주위를 살핀 구로야마는 가운데 앉아 있는 임경업을 보고는 앞으로 몇 발자국 걸어가 먼저 머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쓰시마 번의 총관을 맡고 있는 구로야마라고 합니다.”

약간 더듬거리기는 했지만 정확한 조선말로 구로야마가 자기소개를 하자 임경업은 의외라는 시선을 보며 입을 열었다.

“원정군 총사령을 맡고 있는 임경업이라고 하오. 그런데 총관이라면 꽤 높은 직책일 텐데 조선말이 상당히 능숙한 것 같소.”

“대외무역을 담당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익히게 됐습니다.”

“그렇군.”

임경업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는 것과 동시에 구로야마가 넌지시 캐물었다.

“헌데 조선 병조판서의 이름과 똑같으신데, 설마……?”

“바깥 사정에도 밝군.”

그렇다고 완곡히 둘러 답하는 임경업의 말에 구로야마는 놀란 표정을 떠올렸다.

총사령관을 맡고 있을 정도니 조정에서 제법 높은 위치의 장군인 줄은 짐작했지만, 설마 군부의 최고 지휘관이라 할 수 있는 병조판서가 직접 행차를 하였을 줄은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는 곧 쓰시마 번 내에서 추측하고 있는 것보다 조선 조정이 이번 일을 훨씬 중요하게 여긴다는 뜻이었기에 구로야마는 재빨리 속으로 다시 주판알을 굴리며 임경업이 권한 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래, 무슨 할 말이 있어서 찾아왔나?”

“네.”

구로야마는 헛기침을 한 번 하고 목을 다듬었다.

“저희 영주님의 명을 받들어, 항복하겠다는 뜻을 전하러 왔습니다.”

“항복이라…….”

굳이 이런 시기에 사신을 보내왔으니 대충 비슷한 내용일 줄은 알았다.

임경업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구로야마 총관은 초조한 듯 연이어 말했다.

“더 이상 전투를 계속해 봤자 양쪽 다 이득이 될 게 없으니 이쯤에서 화해를 청하는 것이 낫다는 게 저희 쓰시마 번 가신들과 영주님 모두의 결정입니다. 전쟁보상금은 조선 조정에서 원하시는 대로 지불하고, 왜구들이 조선 해안을 두 번 다시 노략질하지 못하도록 철저히 단속하겠다고 약조하겠습니다. 대신 영주님과 가솔들의 안전은 보장해 주십시오.”

이것만 해도 쓰시마 번에선 최대한으로 양보한 조건이었다.

그러나 임경업 장군은 입술에 미소를 띠더니 팔짱을 끼고 몸을 뒤로 기댔다.

“정말 염치가 없군.”

“그게 무슨?”

느닷없이 튀어나온 빈정거림에 구로야마는 당황했다.

“지금까지 몇 번이나 있었던 기회를 제 발로 걷어찬 주제에, 칼이 바로 목 앞까지 들어오니 이제야 급해진 건가. 여태껏 애꿎게 죽어 나간 조선의 백성은 신경도 안 썼으면서 정작 자신의 목숨은 보장해 달라니 그게 가당키나 한 소린가 이 말일세.”

“자, 장군!”

“대마도 도주의 항복은 일단 받아들이겠네.”

구로야마의 항의를 가볍게 받아넘긴 임경업은 ‘그러나…….’ 하며 일어섰다.

“도주와 그 가족은 물론이고 주군을 잘못 섬긴 가신들까지 모두 채포해 한양으로 압송해 갈 것이야. 그 이후 문제는 주상 전하께서 알아서 하시겠지. 이제부터 대마도는 조선의 영토가 될 것이네.”

“그럴 수는 없습니다! 막부에서 가만히 있을 리가……!”

“흥. 어찌 될지 두고 보면 알겠지. 정오까지 기한을 줄 터이니 돌아가서 도주에게 알리게. 성문을 열고 항복할 것인지 계속 저항할 것인지, 최종 결정을 하라고. 만약 정오가 지나도 망루에 백기가 걸려 있지 않으면 거절로 알고 공격을 시작할 걸세.”

단호하게 말하고 돌아서는 임경업 장군의 표정엔 더 이상 협상의 여지 따위는 없다는 의지가 확고했다.

그 모습을 본 구로야마는 뭐라 말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이내 포기하곤 힘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성으로 돌아갔다.

구로야마 총관을 통해 조선군의 요구를 전해 들은 요시나리와 가신들은 크게 화를 내며 결사항전을 결정했다.

시간이 흘러 정오가 지났지만 성문 위 망루에는 백기가 걸리지 않았다.

이미 이렇게 될 걸 예상하고 있던 임경업은 시간이 되자 망설임 없이 도현이 하사한 보검을 뽑아 들며 크게 소리쳤다.

“오늘 안에 성을 함락시키고 천수각에 봉황 깃발을 올리자! 화포를 발사해 성을 부숴라!”

“옛!”

명령과 함께 뒤에 있던 신호수가 공격을 알리는 깃발을 높이 치켜들고 흔들자 조준을 끝내 놓고 기다리던 천자총통 열 문이 일제히 불을 뿜었다.

“발사!”

꽝! 꽝! 꽝!

슈우우웅!

굉음과 함께 크게 포물선을 그리면서 날아간 철환은 정면에 있는 성문과 성벽을 마구 두들겼다.

꽈꽝! 쿠쿵!

강한 충격에 성벽 일부가 부서지거나 흔들렸고 조선군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궁수대를 동원해 불화살까지 날렸다.

슈슈슉! 슈슉!

“끄악!”

“컥.”

화르르륵.

목재로 만들어진 성문과 망루는 불화살이 집중적으로 날아와 꽂히자 금방 시뻘건 불길이 치솟았다.

“부, 불이야!”

“뭣들 하느냐! 어서 불을 꺼…… 아아악.”

병사들을 다그쳐 화재를 진압하던 무사는 어디선가 날아온 화살에 맞아 비명을 지르면서 망루 아래로 떨어졌다.

포격에 불화살 공격까지 가뜩이나 방어군 태반이 전투 경험이 전무한 농민병이라 불안한 상태였던 적군은 금방 혼란에 빠져들었다.

“히익.”

“우린 다 죽었어.”

“젠장! 우리도 어서 반격해라.”

부상을 무릅쓰고 직접 지휘에 나선 요시나리의 외침에 얼마 남지 않은 조총병과 궁병이 대응사격을 했다.

타탕! 탕! 탕! 슈슉!

하지만 워낙 숫자도 적은 데다 조선군이 앞에 세워 둔 커다란 방패에 막혀 아무런 위협도 가하지 못했다.

오히려 위치가 드러나서 각궁을 든 조선군 궁병의 저격에 커다란 피해를 입었다.

쉬이익.

퍽!

“크헉.”

“꾸억.”

이렇게 되자 화살이 날아올까 봐 적병들은 감히 성벽 위로 고개조차 들지 못했고 그사이에 조선군은 마음 놓고 포격과 불화살 세례를 퍼부었다.

성내로도 쏟아져 내리는 불화살에 여기저기서 불기둥이 치솟으며 이제 손을 쓰기 어려울 만큼 화재가 번졌고 사방에서 불에 타 죽는 사람이 속출했다.

“으아악. 살려 줘.”

“뜨, 뜨거워!”

거기다가 천자총통에서 발사된 단단한 철환이 계속해서 날아와 부딪치자 성벽 곳곳이 무너져 내리면서 가네이시 성은 급격히 방어력을 상실해 갔다.

쿠쿵!

꽈드득.

“성벽이 상당 부분 무너졌습니다.”

박도치 장군의 말에 임경업은 무표정한 얼굴로 성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아직 멀었어. 성안에 있는 적들이 저항 의지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계속 두들긴다.”

“지금도 충분하지 않습니까?”

“아니. 다시는 감히 주상 전하께 반항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도록 철저히 밟아 버려야 해.”

일방적인 살육을 벌이는 것 같아 조금 불쌍한 마음이 들었지만 이내 그동안 왜구들이 조선 백성들을 괴롭힌 걸 떠올린 박도치는 바로 그런 생각을 지웠다.

“옛.”

그 뒤로도 조선군의 포격과 불화살 공격은 한 시진이 넘게 계속 이어졌다.

몸에 불이 붙은 채 성벽 아래로 떨어지는 적병도 있었고 집중 공격을 받은 성문 망루는 지붕이 다 무너졌다.

그러자 드디어 굳게 다물고 있던 임경업의 입이 열리며 공격 명령이 떨어졌다.

“포격 중지. 전군 돌격 앞으로. 반항하는 자는 한 놈도 남기지 말고 다 목을 베어라!”

둥둥둥!

“돌격!”

붉은색 돌격 깃발과 함께 북소리가 전장 가득 울려 퍼지자 잔뜩 전의를 불태우고 있던 병사들이 주위가 떠나가라 함성을 외치며 앞으로 달려 나갔다.

그와 동시에 흑치영이 지휘하는 근위대 총병들은 성벽을 향해 마구 총격을 하며 아군을 엄호해 줬다.

“우와아아!”

타탕! 탕! 탕! 탕!

“끄헉.”

“큭.”

돌격을 저지하기 위해 성벽 위로 몸을 일으키던 적병들은 비명을 내뱉으며 그대로 쓰러졌고, 조선군은 반쯤 무너진 성문을 단번에 쓸어버리고 그야말로 물밀 듯이 성안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이미 포격과 불화살 공격으로 전투 의지를 완전히 상실한 적병들은 조선군이 밀고 들어오자 싸울 생각도 하지 않고 뿔뿔이 흩어지거나 그대로 무기를 버리고 항복했다.

저항하는 건 일부 무사들과 원래 대마도주의 병사였던 이들뿐이었는데 그 숫자는 무시해도 좋을 만큼 소수였다.

당연히 얼마 버티지 못한 채 제압당해 버렸고 조선군은 성문을 지나 요충지를 하나하나씩 장악하면서 곧장 천수각으로 향했다.

포격이 심해지자 성문 망루를 떠나 천수각으로 피했던 요시나리는 가신들과 함께 아래를 내려다보고는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지옥 같았던 포격과 불화살 공격은 멈췄지만 조선군이 성내로 진입해 들어오면서 혼란은 극에 달해 있었다.

천수각의 높은 위치 덕분에 성내의 참혹함이 한눈에 다 들어왔는데, 시뻘건 불길이 곳곳에서 피어오르며 화재가 번지고 있는 가운데 조선군은 마치 늑대가 양 떼를 쫓듯 겁에 질려 달아나는 병사들을 따라가 무기를 휘둘러 댔다.

조선군이 강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채 하루도 버티지 못하고 이렇게 허무하게 성이 무너질 줄은 정말 몰랐다.

“끄으응.”

참담한 상황에 아랫입술을 꽉 깨문 요시나리는 낮게 앓는 소리를 냈고 어느새 천수각까지 밀고 들어온 조선군은 두꺼운 나무로 만든 입구를 도끼로 부수고 실내로 난입했다.

“막아라!”

“커억!”

조선군이 계단을 올라가려고 하자 마지막 남은 무사들이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얼마 버티지 못하고 모두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졌다.

꽈직.

드디어 꼭대기 층에 다다른 흑치영과 이관이 미닫이문을 부수고 안으로 뛰어들자 요시나리와 함께 있던 가신들이 검을 뽑으며 앞을 가로막았다.

그 모습이 사뭇 비장했는데 상대를 훑어본 흑치영은 사나운 기세를 피워 올리면서 고압적으로 소리쳤다.

“이제 다 끝났다. 쓸데없는 저항으로 아까운 목숨을 잃지 말고 어서 모두 무릎을 꿇고 항복해라!”

“이놈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요시다가 분노한 얼굴로 버럭 호통을 치자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분위기로 내용을 대충 짐작한 흑치영은 입가에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여기 또 상황 파악을 못 하는 멍청이가 있군.”

“죽어라!”

앞으로 달려 나온 요시다가 양손으로 든 검을 내려치는 걸 몸을 비틀어 가볍게 피한 흑치영은 그대로 상대의 허리를 베어 버렸다.

서걱!

“끄어억.”

쨍그랑.

섬뜩한 소리와 함께 내장이 보일 정도로 깊게 옆구리가 베인 요시다는 눈을 크게 치켜뜬 채 낮은 신음을 내뱉으면서 힘없이 아끼는 검을 떨어뜨리며 그 자리에 주저앉듯 쓰러져 목숨을 잃었다.

“요시다!”

구로야마 총관과 함께 자신을 어릴 때부터 보좌해 온 요시다가 죽자 눈이 돌아간 요시나리는 야차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리고는 흑치영에게 달려들었다.

“이놈!”

그걸 신호로 잠시 대치하고 있던 양쪽이 서로 엉겨 붙어 칼부림을 하면서 방 안은 비명과 시뻘건 피로 물들었다.

채챙!

“아악.”

“컥.”

조선군 쪽의 숫자가 훨씬 많았기에 싸움은 금세 한쪽으로 기울었고 가신과 무사들은 하나둘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요시나리도 분노에 검을 마구 휘둘러 댔지만 어깨 부상을 당한 상태라 움직임이 둔해 흑치영은 어렵지 않게 공격을 모두 막아 냈다.

츄아앙!

챙!

“이야압!”

마음대로 풀리지 않자 화가 난 요시나리는 틈을 보다가 기합을 지르며 흑치영의 왼쪽 어깨를 노리고 있는 힘껏 검을 찔렀다.

자칫 치명상을 당할 수도 있는 상당히 매서운 공격이었지만, 흑치영은 순간 재빨리 목표가 된 어깨를 뒤로 슬쩍 빼면서 반대쪽 팔에 들린 검을 사선으로 휘둘렀다.

슈각!

검이 요시나리의 상체를 깊고 길게 베어 내는 것과 동시에 시뻘건 피가 튀어 흑치영이 입고 있던 갑옷에 묻었다.

“흐윽.”

그대로 움직임을 멈춘 요시나리는 혈관이 잘렸는지 엄청난 피를 흘리면서 몸을 휘청거렸다.

“내, 내가 이렇게 죽다니…….”

출혈 때문에 얼굴이 창백해진 요시나리는 원통하다는 듯이 흑치영을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그런 상대를 무심하게 바라보던 흑치영은 상처가 너무 깊어 치료를 받는다고 해도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웠기에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검을 휘둘러 끝을 내 줬다.

“잘 가시오.”

날카롭게 휘두른 검에 요시나리의 머리가 베여 바닥에 떨어졌다.

잠시 뒤 다른 가신들도 모두 죽거나 제압당했고 천수각 지붕에 봉황 깃발이 내걸리는 것으로 성이 완전히 함락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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