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협상 (41/104)

협상

창덕궁 뒤쪽에는 비원秘苑이라고도 불리는 넓은 왕실 후원이 조성되어 있었는데, 백성들의 접근이 엄격하게 금지되던 곳으로 국왕이 잠시 업무에서 벗어나 사색을 즐기거나 휴식을 취하는 장소였다.

그중에서도 인공적으로 조성한 연못인 부용지芙蓉池는 다른 나라에서 절대 볼 수 없는 한민족만의 자연스러움과 멋을 제대로 표현한 곳이었다.

오랜만에 업무를 일찍 끝내고 물 위에 반쯤 떠 있는 부용정芙蓉亭 난간에 뒷짐을 지고 서서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하고 있던 도현은, 문득 시선을 옆으로 돌려 시립해 있는 칠현에게 말했다.

“칠현아.”

“말씀하십시오, 전하.”

“저기 가운데 소나무가 심어진 작은 섬이 있지.”

“예.”

“그게 뭘 상징하는지 알아?”

뜬금없는 질문에 칠현은 살짝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쎄요.”

“하늘이야.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는 천원지방天圓地方 사상에 따라 장대석을 쌓아 네모난 연못을 만들고 그 중간에 저런 섬을 꾸민 것이지.”

“아.”

“이 작은 공간에 우주의 이치를 다 표현해 내다니 정말 대단하지 않아.”

“말씀을 듣고 보니 그렇사옵니다.”

“우주 만물을 발아래에 두고 유유자적 휴식을 즐길 수 있다니, 이거야말로 진정한 제왕의 정원 아니겠어.”

“맞습니다.”

오랫동안 도현을 옆에서 보필해 온 칠현은 그냥 부용지의 아름다움과 선조의 지혜로움을 평하는 듯한 이야기였지만, 그 속에 조선을 그 옛날 고구려처럼 대륙을 질타하며 천하를 호령하는 대제국으로 키우겠다는 도현의 숨은 야망을 읽을 수 있었다.

그렇게 한가로이 머리를 식히고 있을 때 도승지가 종종걸음으로 다급히 정자 위로 올라왔다.

“전하.”

“무슨 일인데 그렇게 호들갑인가?”

“방금 대마도로 떠난 원정군에서 장계가 올라왔사옵니다.”

그렇지 않아도 원정군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던 도현은 반색을 했다.

“그래? 어서 줘 보게.”

“여기 있사옵니다.”

도승지가 두 손으로 받쳐 들고 온 나무 쟁반을 내밀자 도현은 위에 놓인 두루마리를 집어 묶여 있는 줄을 풀고는 서둘러 내용을 읽어 봤다.

장계에는 해전의 승리와 가네이시 성을 함락하고 대마도주인 소요 요시나리를 죽인 내용이 아주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기다리던 승전보에 도현은 크게 웃음을 터트리며 기뻐했다.

“하하하! 역시 임경업 장군이야.”

“좋은 소식인가 봅니다?”

장계를 들고 왔지만 봉인이 되어 있어 내용을 볼 수 없었던 도승지의 물음에 도현은 들뜬 목소리로 이야기를 했다.

“원정군이 대승을 거뒀다는군.”

“감축드리옵니다, 전하.”

“이 기쁜 소식을 나만 알 수는 없지. 당장 방을 붙여 백성들에게 원정군의 승리를 알리도록 하게.”

“알겠사옵니다.”

허리를 굽히며 대답한 도승지는 하교받은 걸 실행하기 위해 서둘러 정자를 내려갔다.

승리를 의심치 않았지만 그래도 항상 변수가 존재하는 것이 전장이었기에 내심 노심초사하던 도현은, 자신의 야망을 이루는 첫걸음이 성공적으로 내디딘 것에 주먹을 꽉 움켜쥐면서 낮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제 시작이야.”

그날 도성 거리 곳곳에 원정군의 승리를 알리는 방이 나붙었고 글을 모르는 백성들을 위해 관청에서 나온 아전衙前이 큰 소리로 승전보를 외치고 다녔다.

금난전권이 폐지되면서 집에서 꼰 짚신을 팔러 나왔던 중년 사내는 시전 한쪽에 사람들이 잔뜩 몰려 있는 걸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간 중년 사내는 가까이 있는 남자 한 명을 붙잡고 물었다.

“뭣 때문에 다들 이렇게 모여 있는 거요?”

그러자 고개를 돌린 남자는 약간 귀찮은 투로 말했다.

“얼마 전에 왜구들을 혼내 주러 출정한 원정군이 대승을 거뒀는데, 관에서 그걸 알려 주는 거요.”

중년 사내도 출정식을 구경하러 갔었기에 눈을 크게 떴다.

“그게 정말이오?”

“이 양반이 속고만 살았나. 정 의심이 되면 저 앞에 있는 아전이 하는 이야기를 들어 보시구려.”

남자의 말에 중년 사내가 앞을 보자 관복을 입은 아전이 깔때기를 입에 대고 크게 소리를 치는 것이 보였다.

“주상 전하의 명령을 받고 떠난 원정군은, 바다에서 왜선 백여 척을 섬멸하고 대마도에 상륙해 본거지인 가네이시 성을 함락시켜, 그동안 왜구들과 손을 잡고 조선 백성들을 괴롭혀 온 소씨 일족을 벌하였다!”

“와아아!”

아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은 박수를 치거나 두 팔을 치켜들며 천세를 불렀다.

짝짝짝!

“주상 전하 천세!”

“잘했다.”

“속이 다 시원하네.”

“역시 주상 전하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을 거치면서 위축되고 패배의식에 젖어 있던 백성들은, 이번 승리로 그런 감정을 단번에 다 떨쳐 내고 우리도 할 수 있다는 강한 자신감을 되찾게 됐다.

이로써 백성들은 도현에 대한 신뢰와 믿음이 더욱 커졌고 이건 바로 왕권 강화로 이어져 개혁을 계속 추진해 나가는 데 강한 원동력이 되는 선순환을 이뤘다.

당장 대마도 원정을 반대했던 송시열과 산당의 입지가 조정에서 급격히 좁아졌고 반대로 도현을 따르는 왕당파는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전하, 예조참판께서 오셨사옵니다.”

“들라 하라.”

미닫이문이 좌우로 열리며 예조참판 박노가 허리를 반쯤 숙인 자세로 들어와 예를 갖추고 바닥에 엎드렸다.

“어서 오게. 멀리 북경까지 다녀오느라 고생이 많았네.”

“아니옵니다.”

박노는 이번 원정에 청국이 예민한 반응을 보일까 봐 염려한 도현이 직접 써 준 친서를 가지고 북경에 있는 예친왕을 만나고 왔다.

“그래, 서찰을 받은 예친왕의 반응은 어떻던가?”

청국의 태도에 따라 앞으로 행보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었기에 도현은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군사를 일으킨 건 껄끄럽게 생각하는 것 같았지만, 그동안 왜구가 아국에 입힌 피해를 소상히 설명하자 이해를 해 줬사옵니다.”

“다행이군.”

약간 굳어 있던 도현의 표정이 풀어졌다.

“하지만 아국이 군세를 늘리는 걸 크게 경계하며 한양 이북에 군대를 새로 주둔시키거나 군사시설을 만들지 말라는 경고도 했사옵니다.”

이어진 말에 도현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하긴 예친왕이 어떤 자인데 호락호락 넘어갈 리가 없지.”

“죄송하옵니다.”

기분이 조금 상하기는 했어도 이 정도만 해도 원하는 건 다 얻은 거였기에 도현은 머리를 숙인 박노를 보며 밝은 어조로 말했다.

“경은 맡은 임무를 잘 수행했으니 미안해할 필요 없어. 그것보다 청국 분위기나 이야기해 보게.”

주작단을 통해 지속적으로 청국에 대한 정보를 듣고 있지만, 문서로 보고받는 것과 현지에 직접 다녀온 사람의 말은 약간 다를 수 있었기에 물음을 던진 거였다.

“지난 대전 회의 때 전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사천성에 세워진 대서국을 멸망시킨 청국은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정국을 안정시켜 나가고 있었습니다. 예친왕이 주장하는 순혈주의에 따라 대신들은 모두 만주족으로 구성되어 있었지만, 하급 관리와 병사 들은 한족을 적극 수용해 기반을 탄탄히 굳히고 있었고 군사력 또한 급격히 늘려 듣기로는 만주 팔기 외에도 한족으로 구성된 군사가 수십만 명에 달한다고 하옵니다.”

북별을 통해 잃어버린 만주 땅을 되찾고 한민족의 영광을 이뤄 내려는 원대한 야망을 품고 있던 도현은 가장 큰 걸림돌인 청국이 무섭게 성장하고 있다는 사실에 표정이 어두워지면서 자신도 모르게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으음.”

“그리고 예전부터 친분이 있던 만월개가 은밀히 귀띔해 준 말에 의하면, 조만간 예친왕이 대군을 일으켜 양자강을 넘어갈 것이라고 하옵니다.”

“양자강을?”

“예.”

“허어.”

강남으로 피신한 명나라와 자연 국경을 이루고 있는 양자강을 넘는다는 건 곧 청국이 대륙 통일을 도모한다는 뜻이었기에 도현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이건 대륙의 혼란을 틈타 힘을 키우려는 도현의 계획에 심각한 차질을 주는 일이었다.

“경이 보기에 만월개의 말에 신빙성이 얼마나 있는 것 같나?”

그러자 잠시 생각을 해 본 박노는 진지한 어투로 대답했다.

“이야기를 다 곧이곧대로 믿을 수는 없지만 호전적인 예친왕의 성향으로 볼 때 빠른 시간 안에 명국을 도모할 것은 분명하옵니다.”

“그렇겠지.”

예친왕이 중원 정복을 자신의 인생 목표로 여기는 걸 잘 알고 있던 도현은 박노의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북경까지 다녀오느라 많이 피곤할 사람을 내가 너무 오래 붙잡고 있는 것 같군. 공식 보고는 내일 조정에서 하고 오늘은 집에 가서 푹 쉬도록 하게.”

“알겠사옵니다.”

한양에 도착하자마자 곧장 대궐로 들어왔던 박노는 자리에서 일어나 꾸벅 인사를 하고는 뒷걸음질을 쳐서 조심스럽게 방을 나갔다.

방에 혼자 남은 도현은 예정되어 있던 석강夕講(임금이 신하들과 더불어 저녁에 글을 강론하는 것)을 취소하고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될지 고심을 거듭했다.

어느덧 해가 져서 밖이 어두워졌을 때 상념에서 깨어난 도현이 입을 열었다.

“칠현이, 게 있느냐?”

계속 방 밖에서 대기하고 있었는지 말이 끝나기 무섭게 칠현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찾으셨사옵니까, 전하.”

“지금 당장 이완 단장을 불러오너라.”

“알겠사옵니다.”

착 가라앉은 목소리에 뭔가 중요한 일이 있다는 걸 눈치챈 칠현은 얼른 대답을 했다.

퇴청해 자택에서 쉬고 있던 이완은 급히 입궐하라는 전갈에 서둘러 관복을 찾아 입고 대궐로 달려왔다.

“어서 오십시오.”

희정당 입구에 들어선 이완은 마중을 나와 있는 칠현을 보자마자 다급히 물었다.

“박 내관, 갑자기 무슨 일인가?”

“저도 자세한 건 모르겠습니다.”

최측근이자 항상 도현 옆을 떠나지 않고 시중을 드는 칠현이 모른다며 고개를 내젖자 이완은 답답한 표정을 지었다.

“허어. 이것, 참.”

“전하께서 기다리신 지 한참이니 어서 들어가 보시지요.”

“알겠네.”

신발을 벗고 건물 안으로 들어간 두 사람은 등불이 켜진 복도를 지나 도현이 머무는 방문 앞에 섰다.

양옆에 늘어서 있던 내관과 궁녀들이 두 사람을 보고는 살짝 머리를 숙이며 길을 비켜 줬다.

“전하, 주작단 단장께서 도착하셨사옵니다.”

“들어와.”

“예.”

옆으로 고개를 돌린 칠현은 이완은 보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들어가시죠.”

옷매무새를 가다듬은 이완은 칠현이 직접 열어 주는 문을 지나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홀로 보료 위에 앉아 있던 도현이 살짝 고개를 들어 그에게 시선을 줬다.

“어서 오게.”

눈짓으로 맞은편을 가리킨 도현은 이완이 자리에 앉는 것을 보고 칠현에게 말했다.

“주위를 조용히 물리도록 해.”

“네.”

칠현은 소리 없이 뒷걸음질을 쳐서 밖으로 나간 뒤 조용히 문을 닫았다.

그리고 호기심 많은 참새 떼를 몰 듯, 손짓을 해서 궁녀와 내관 들을 방 안의 소리가 안 들릴 만한 거리까지 자리를 비키게 한 후 방문 앞을 지키고 서서 혹여나 누가 허튼짓을 하진 않는지 감시의 눈을 빛냈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이러는지 이완이 바짝 긴장한 채 마른침을 꿀꺽 삼킬 때 도현이 입을 열었다.

“이 단장.”

“하교하십시오.”

“아무래도 지난번에 내게 말했던 뻐꾸기 계획을 이제 실행해야 될 것 같네.”

“……!”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뜬 이완은 약간 떨리는 음성으로 되물었다.

“진심이시옵니까?”

그러자 도현은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지으면서 살짝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 청국의 힘이 커지는 걸 더 이상 좌시할 수 없어.”

“하오나 자칫 저희가 한 일이 청나라에 발각되기라도 하면 전면전을 피할 수 없을 것이옵니다.”

“그렇겠지. 허나 구더기가 무서워서 장을 못 담그겠나? 어차피 북벌을 하려면 청나라와 충돌은 피할 수 없는 일이고 머뭇거리다가 때를 놓치고 두고두고 후회하는 것보다 낫겠지.”

단호한 도현의 태도에 이미 결심이 확고히 선 걸 깨달은 이완은 이내 무겁게 가라앉은 얼굴로 대답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사옵니다.”

“예친왕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니까 신중하게 계획을 진행하도록 해.”

“예.”

그 뒤로도 한참 동안 도현과 은밀한 이야기를 나눈 이완은 늦은 밤이 되어서야 희정당을 나왔다.

한편 가네이시 성을 함락한 임경업은 병력을 나눠 섬에 속한 마을들을 하나씩 빠르게 장악해 나갔다.

이미 싸울 만한 장정들은 모조리 요시나리가 강제로 징집해 간 상태였기에 조선군은 별다른 어려움 없이 각 지역을 접수할 수 있었다.

물론 상황 파악을 못 한 일부 토호와 하급 무사 들이 저항을 하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조선군은 가혹하다고 느껴질 만큼 강하게 진압해 주민들이 감히 반항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사로잡은 소씨 가문 일족과 가신들은 한 명도 남김없이 모두 배에 태워 한양으로 압송했다.

“물때를 놓치기 전에 출항해야 된다. 어서들 서둘러!”

“예.”

군관의 말에 수군 병사들은 굵은 포승줄에 줄줄이 묶인 채 선착장으로 끌려나온 포로들을 다그쳐 서둘러 판옥선에 태웠다.

“꾸물거리지 말고 움직여!”

호송을 맡은 병사가 버럭 고함을 지르며 재촉하자 초췌한 얼굴의 포로들이 느릿느릿 걸음을 옮겼다.

포로들 중에는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구로야마 총관과 요시나리의 애첩들도 있었다.

지난 며칠 동안 잠도 제대로 재우지 않고 계속되는 심문을 버티지 못하고 자신이 알고 있는 걸 모두 토해 낸 구로야마 총관은, 이런 처참한 처지가 되어 대마도를 떠나야 되는 현실에 회한이 어린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포로들이 한양으로 가는 배에 오르고 있을 때 임경업은 얼마 전까지 요시나리가 사용하던 가네이시 성 천수각 꼭대기 층에서 휘하 장수들과 회의를 하고 있었다.

“포로들을 태운 배는 한양으로 떠났소?”

임경업이 묻자 바로 옆에 앉아 있던 수군통제사 최영희가 대답했다.

“곧 출발할 겁니다.”

“중요한 인물들이 많으니 행여나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각별히 신경 쓰시오.”

“판옥선 두 척을 호위로 붙였으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그럼 안심이오. 그리고 섬을 장악하는 건 잘 진행되고 있소?”

“패잔병과 몇몇 토호들의 가벼운 저항이 있었지만 모두 제압하고 현재는 모든 마을의 치안을 확보한 상태입니다.”

박도치의 이야기에 임경업은 살짝 머리를 끄덕였다.

“단순히 왜구와 협력한 대마도주를 벌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앞으로 이곳을 조선의 영토로 만드는 게 주상 전하께서 우리한테 내리신 임무이니, 행여나 저항 세력이 생기거나 활동하지 못하도록 철저히 단속해야 될 걸세.”

“알겠습니다. 그리고 마을들을 장악하는 중에 노예로 잡혀 있던 조선인들을 다수 찾아낼 수 있었습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눈가를 찌푸린 임경업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흥! 왜구와 관련이 없다고 오리발을 내밀더니…… 그래, 몇 명이나 되나?”

“보고에 따르면 남녀를 합쳐서 사백여 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죽일 놈들.”

임경업은 이를 부드득 갈며 계속 이야기를 이었다.

“한 명도 빠짐없이 다 구해 내서 성으로 데려오고 조선인을 노예로 삼거나 매매한 자는 전부 체포해서 엄벌에 처하도록 하게.”

“옛.”

“그리고 대마도가 점령당한 걸 알면 막부가 어떻게 나올지 모르니, 경계를 강화하고 일반 포로들을 동원해 부서진 성벽을 다시 쌓고 방어 시설을 보강해야 될 걸세.”

“알겠습니다.”

“최 통제사.”

“네.”

“수군은 오늘부터 주변 해역에 대한 감시와 순찰을 해 주시오. 막부에서 군대를 보낸다면 섬에 상륙하기 전에 바다에서 일차적으로 막아 모두 수장시켜야 될 것이오.”

그러자 최영희는 눈을 매섭게 번득이면서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한 놈도 섬에 발을 들이지 못하게 할 테니 맡겨 주십시오.”

지난 해전에서 수군의 힘과 강함을 똑똑히 지켜본 임경업은 신뢰가 가득 담긴 시선을 최영희에게 보냈다.

“최 통제사만 믿겠소. 그럼 오늘 회의는 이걸로 끝내고 각자 맡은 일을 최선을 다해 수행해 주길 바라겠소.”

“예.”

회의에서 결정된 사항은 바로 실행됐는데 수군은 판옥선을 세 대씩 편대를 나눠 대마도 주변 해역을 순찰했고, 붙잡혀 있던 포로 이천여 명을 동원해 일단 피해가 큰 가네이시 성부터 복구를 시작했다.

앞으로 여길 대마도를 통치하는 중심지로 삼을 예정이었던 임경업은 불에 탄 가옥들은 다 깨끗이 밀어 버리고 여기저기 널려 있는 잔해들 속에서 재활용이 가능한 돌과 자재를 찾아내는 한편 근처 산에서 베어 온 목재를 이용해 조선식으로 새로운 건물과 성벽을 쌓았다.

며칠 뒤 한양에서 도현이 보낸 선전관이 도착했는데 승전을 치하하는 글과 함께 앞으로 대마도를 남해도로 바꿔 부르고 가네이시 성도 새롭게 고송성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며 직접 친필 현판을 내려 줬다.

여기서 고송孤松은 바로 임경업 장군의 호였는데 일부 신하들의 반대가 있었지만, 원정을 성공적으로 이끈 공을 높이 산 도현이 가네이시 성의 새 이름으로 결정했다.

단순히 금은보화를 상급으로 내리는 것보다 훨씬 명예로운 일이었기에 교지를 받은 임경업은 크게 감복했다.

이런 가운데 에도에서는 조선군이 대마도를 점령한 일로 한창 격론이 벌어지고 있었다.

“쓰시마 번이 그리 간단하게 함락됐단 말인가.”

도쿠가와 막부의 삼 대 쇼군, 이에미쓰는 손부채를 탁 접으면서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중얼거렸다.

“미천한 해적들 손까지 빌려서 싸움에 나선다고 하더니, 이렇게 어이없이 며칠 만에 무너질 줄이야. 요시나리도 대단한 인물은 아니었군.”

대마도의 지리적 이점을 이용해 조선과의 무역에서 막대한 이익을 챙겨 온 소씨 가문을 평소 탐탁지 않게 여기던 이에미쓰가 그리 말하자, 가신 중 한 명이 조심스레 반박했다.

“쓰시마 번주가 가지고 있던 병사들의 수도 제법 되고 전투에 참가한 해적들도 많았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일방적으로 당했다는 건, 아마 조선군의 무력이 생각보다 더 높았다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그 말에 여기저기서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들이 보였다.

“흠.”

눈썹을 찡그리고 잠시 아무 말 않던 이에미쓰는 다시 고개를 쳐들었다.

“그래서, 지금 조선군은 어찌하고 있나?”

“네. 아무래도 한동안 눌러앉아 있을 생각인지 잔해들을 치우고 성을 쌓아 거점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게다가 조선 국왕이 친필 현판까지 내려 줬단 말이지. 허!”

어이없다는 듯 크게 헛웃음을 내뱉는 이에미쓰의 반응에 가신들은 그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쇼군, 이제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무엇을?”

“쓰시마는 규슈 바로 코앞입니다. 혹여 그들이 이 기세를 몰아 본토까지 침입할 생각을 한다면…….”

“그래서, 조선과 전면전이라도 벌이자는 건가?”

“그, 그건…….”

이에미쓰의 날카로운 눈빛에 처음 말을 꺼냈던 가신은 힘없이 시선을 떨어뜨렸다.

일전 대마도 일로 한양에 사신을 보냈을 때, 도현은 쓰시마 번과의 분쟁에서 막부가 끼어들면 곧 전면전을 벌이겠다는 뜻으로 알겠다며 이미 선포를 했었다.

그때까지는 설마 쓰시마 번이 이렇게까지 쉽게 떨어지리란 생각을 하지 못했기에 지금까지 팔짱을 끼고 뒤로 물러나 있었지만, 일이 이 지경이 되고 나니 뒤늦게 발등에 불이 떨어진 양 초조해하는 반응들이 나타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곤란하게 됐군.’

이에미쓰는 속으로 혀를 찼다.

상대도 더 이상 일을 크게 벌이려고 들지는 않겠지만, 설령 조선군이 본토에 쳐들어온다 해도 질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문제는 휘하에 있는 영주들이었다.

조부인 도쿠가와 이에야쓰가 절치부심 끝에 임진왜란이 끝난 뒤 혼란스러운 틈을 타 도요토미 가문을 밀어내고 막부 체제를 설립한 지 이제 삼 대째.

주위는 많이 안정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불안 요소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전국에 흩어져 있는 지방 영주들 가운데에는 풍족한 영지와 실력 좋은 무사를 바탕으로 막강한 권세를 누리는 자들도 많았으며, 아무리 충성의 맹세를 했다고 해도 이에미쓰가 자신들을 지켜 줄 힘이 없다고 판단되면 언제든지 뒤통수를 칠 준비가 되어 있는 자도 몇 명은 있을 것이다.

쓰시마 번 함락 때문에 동요할 영주들의 마음을 단단히 휘어잡지 못하면 조선이 문제가 아니라 내부에서 먼저 칼을 맞게 될지도 모르니 어쨌든 뭔가 행동을 취해야만 했다.

여기까지 생각한 이에미쓰는 손부채로 눈앞에 있는 가신 들 중 한 명을 가리켰다.

“미무라, 자네가 조선에 한 번 갔다 와야겠어.”

“제가 말입니까?”

“그래. 가서 조선 국왕과 담판을 짓고 와.”

이에미쓰의 말에 미무라는 상체를 숙이며 크게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며칠 뒤 이에미쓰의 친서를 품에 간직한 미무라가 대마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배를 타고 조선으로 향했다.

바로 부산포로 갈 수 있었지만 일부러 대마도를 들러 현지 상황을 살핀 미무라는, 에도를 떠난 지 열흘 만에 한양에 도착할 수 있었다.

“막부에서 사신이 왔다고?”

“그러하옵니다, 전하.”

서탁 끝을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잠시 말이 없던 도현은 이내 앞에 머리를 숙이고 있는 도승지를 보며 입을 열었다.

“지금 어디에 있지?”

“일단 영빈관에 머물고 있습니다.”

“흠. 어디 무슨 말을 하러 왔는지 이야기나 들어 보지.”

지난번처럼 또 사신을 박대할까 봐 조마조마하던 도승지는 뜻밖의 반응에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얼른 대답했다.

“그럼 바로 대궐로 들어오라 이르겠습니다.”

“그래.”

혹시라도 변덕을 부릴까 봐 냉큼 밖으로 나가는 도승지의 뒷모습을 보며 도현은 한쪽 입꼬리를 씨익 말아 올렸다.

“어디 슬슬 낚시질을 한번 해 볼까.”

얼마 뒤 신료들이 모두 모인 가운데 막부의 사신으로 온 미무라가 역관과 함께 대전에 걸어 들어왔다.

“쇼군님의 말씀을 받고 온 미무라가 조선국 국왕 전하께 인사드리옵니다.”

왕좌에 앉아 깊숙이 허리를 숙여 예를 갖추는 미무라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도현이 약간 심드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낯이 익군. 얼마 전 사신으로 왔던 자가 아닌가?”

그러자 한쪽에 서 있던 예조판서가 대답했다.

“맞사옵니다, 전하.”

“그래, 무슨 일이지?”

지난번 만남에서 제대로 이야기도 꺼내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호통만 듣고 돌아와야 했던 미무라는 정색을 하며 준비해 온 말을 꺼냈다.

“쓰시마 아니, 대마도 일로 찾아왔사옵니다.”

대마도를 쓰시마 번이라고 했다가 큰 곤욕을 치른 기억이 생생한 미무라는 얼른 고쳐서 말했다.

“그 문제는 지난번에도 이야기했지만 조선 내부의 일이니 막부가 참견할 거리가 아니라고 했을 텐데…….”

“저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사옵니다.”

“뭐라!”

“예전에는 어떠했는지 몰라도 막부가 생긴 이래로 지금까지 소씨 가문이 쇼군께 복속해 대대로 대마도를 다스려 왔으니, 조선이 아닌 왜국의 땅이라고 하는 것이 맞지 않겠습니까.”

기도 안 찬다는 듯이 헛웃음을 지은 도현은 앞에 있는 미무라를 노려보면서 차갑게 이야기했다.

“허어. 그래서 어쩌겠다는 거지?”

“아국 영토를 침범한 것은 명백히 잘못된 일이니 포로가 된 소씨 일족과 가신들을 풀어 주시고 속히 대마도에서 군대를 물러 주십시오.”

불같은 도현의 성격을 알고 있던 신료들은 시신의 말에 조마조마한 표정을 지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주먹으로 팔걸이를 세게 내려치며 노호성이 터져 나왔다.

“이런 오만방자한! 터진 입이라고 어디서 그딴 괴변을 늘어놓는 거냐! 정녕 막부는 우리와 전면전을 하자는 것인가?”

“일을 순리대로 풀자는 것입니다.”

단단히 마음을 먹고 왔는지 미무라도 지지 않고 대꾸를 했다.

그러자 옆에서 조용히 대화를 듣고 있던 영의정 박황이 불쾌하단 표정을 짓고는 미무라를 꾸짖었다.

“왜국 사신은 말이 너무 지나친 것 아니오!”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이야기를 가려서 하시오.”

의외는 평소 사사건건 부딪치던 송시열도 미무라가 도현한테 불손하게 행동하는 것이 마음에 안 드는지 살짝 얼굴을 붉히며 날을 세웠다.

그런 송시열을 새삼스러운 시선으로 슬쩍 쳐다본 도현은 한쪽 손을 들어 흥분한 신료들을 진정시키고는 미무라를 내려다보면서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좋아. 그렇게 원하면 이치를 따져 보지. 막부에서 주장하는 건 기껏해야 백 년도 되지 않은 이야기지만 우리는 전조(고려) 때부터 계속 대마도의 존재를 인식하고 도주에게 벼슬을 내려 영토로 관리해 왔으며 소씨 가문도 아국 조정에서 준 벼슬을 버리지 않고 유지해 왔는데 이건 뭐라고 말한 건가?”

“…….”

폭포수처럼 쏟아진 도현의 말에 미무라는 순간 아무런 반박을 하지 못했다.

소씨 가문이 막부에 복속하면서도 조선에서 내려 준 관직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건 익히 알려진 사실이었는데, 그건 양국 사이에서 중계무역을 보다 원활히 하기 위해 일부러 버리지 않은 거였다.

하지만 그것이 지금에 와서 막부가 대마도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는 데 걸림돌로 작용했다.

이대로 밀릴 수는 없었던 미무라는 정색을 하고는 황급히 이야기를 했다.

“억지입니다.”

그러자 도현은 콧방귀를 뀐 뒤 찬바람이 쌩하고 부는 음성으로 말을 내뱉었다.

“흥! 억지는 그쪽이 부리는 것 같은데. 아무튼 더 할 이야기가 없으니, 또다시 이 문제를 거론한다면 우리와 전면전을 벌이겠다는 걸로 알 테니 사신은 썩 물러가라!”

이야기를 끝낸 도현은 왕좌에서 일어나 직접 문을 열고 대전을 나가는 것으로 자신의 의지를 강하게 표현했다.

“끄으응.”

뒤에 덩그러니 남겨진 미무라는 곤혹스럽다는 얼굴을 한 채 밖으로 사라지는 도현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일단 도성 안에 위치한 영빈관으로 돌아간 미무라와 수행원들은 식사도 거르고 이제 어떻게 해야 될지 대책 마련에 부심했다.

“일단 예조를 통해 쇼군의 친서는 전달했지만 조선 왕의 태도로 볼 때 좋게 해결하기는 틀린 것 같습니다.”

가뜩이나 머리가 복잡하던 미무라 아키오는 비관적인 수행원의 말에 살짝 눈가를 찌푸리면서 짜증을 냈다.

“그래서 이대로 돌아가자는 거야!”

괜히 나섰다가 한 소리를 들은 수행원은 찔끔한 얼굴로 말을 얼버무렸다.

“아, 아닙니다.”

“지난번에도 빈손으로 돌아갔는데 또 그럴 수는 없어.”

입술을 잘근 씹으며 내뱉는 말에 다른 수행원이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뭘 어떻게 해 보려고 해도 조선 국왕이 워낙 강경하게 나오니…….”

“뭔가 방법이 있을 거야. 아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길을 찾아야 해.”

두 번이나 연속으로 쇼군의 지시를 이행하지 못한다면 아무리 신임을 받는 신하라고 해도 자리를 보존하기 어려웠기에 미무라는 마음이 초조해졌다.

그때 뜻밖의 손님이 영빈관을 찾아왔다.

“와카도시요리[若年寄] 님, 조선 조정에서 손님이 오셨습니다.”

와카도시요리는 막부의 관직 명칭 중에 하나로 위로 로주를 보좌하고 쇼군 직속의 무사 집단인 하타모토를 감시하는 역할을 하는 중요한 직책이었다.

“손님이?”

이렇게 야심한 시각에 자신을 찾아올 만한 사람이 없었기에 미무라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호위로 따라온 하급 무사에게 물었다.

“누구라고 하더냐?”

“예조참판이라고 합니다.”

“그 사람이 왜?”

그러자 함께 있던 수행원이 살짝 기대에 찬 얼굴로 말했다.

“여기까지 온 걸 보면 뭔가 할 이야기가 있는 것 같은데, 일단 만나 보시지요.”

“흐음. 그래.”

만나서 손해 볼 건 없겠다는 판단에 미무라는 문 앞에 서 있는 하급 무사를 보며 입을 열었다.

“어서 안으로 모셔.”

“예.”

얼마 안 있어 관복을 입은 박노가 역관과 함께 안으로 들어왔다.

“이거, 쉬고 있는데 제가 방해를 한 건 아닌지 모르겠소이다.”

“아닙니다. 이리로 앉으시죠.”

권하는 자리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은 박노는 급히 내온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차분히 이야기를 했다.

“낮에 대전에서는 서로 흥분해서 제대로 대화를 못 나눈 것 같아서 이렇게 왔소이다.”

“지난번에도 그렇지만 조선국 국왕께서 너무 일방적으로 고집을 피우시니 이야기가 되지 않습니다.”

상대의 말에 박노는 살짝 눈썹을 추켜올렸다.

“그건 자꾸 그쪽에서 대마도에 대한 권리가 있다고 억지를 부리니 그러는 것 아니겠소!”

“아니, 그게 왜 억지입니까!”

또다시 대전에서 벌였던 말다툼이 되풀이되려고 하는 걸 박노가 한쪽 손을 살짝 들어 올리며 중간에서 끊었다.

“아무리 이야기를 해 봤자 결론이 안 나오니, 이건 이쯤에서 그만하고 서로 허심탄회하게 속마음을 꺼내 놓도록 합시다. 막부에서는 정말로 우리와 전쟁을 하려는 것이오?”

“그건…….”

전면전은 왜국으로서도 최악의 패였기에 미무라는 바로 대답을 못 하고 말을 얼버무렸다.

“솔직히 다른 영주들의 시선이 신경 쓰일 뿐이지. 왜국 입장에서 대마도는 그리 중요한 섬이 아니지 않소?”

“흠흠.”

정곡이 찔린 미무라가 괜히 헛기침을 하는 걸 보며 박노는 은근한 어투로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괜히 감정만 상하게 하지 말고 서로가 만족할 수 있는 선에서 적당히 타협을 보도록 합시다.”

솔깃해진 미무라는 상체를 살짝 앞으로 숙이면서 관심을 보였다.

“어떻게 말입니까?”

“대마도를 우리가 갖는 대신 지금까지 소씨 가문이 독점하던 조선과의 무역을 막부가 대신 맡도록 하고, 몇 년간 가지 않았던 통신사通信使를 파견해 쇼군의 위신을 세워 주겠소.”

“……!”

이야기를 들은 미무라는 재빨리 머릿속으로 주판알을 튕겼다.

나가사키만큼은 아니지만 조선과의 무역을 독점하면 제법 쏠쏠한 이익이 발생하는 데다 무엇보다 주로 취급하는 물품이 곡물이었기에, 이걸 가지고 식량이 부족한 영주들을 손에 틀어쥘 수도 있었다.

사실 이런 것보다 막부 입장에서 더 큰 유혹은 바로 통신사의 파견이었다.

왜국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건 막부였지만 공식적으로는 천황이 있고 쇼군은 그 밑에서 통치를 위임받은 자에 불과했다.

그래서 언제든 다른 영주가 치고 올라올지도 모른다는 의심과 불안감에 시달렸는데, 국가 외교사절인 통신사를 통해서 막부와 쇼군의 정통성을 타국에 인정받고 백성들에게 알리고 싶어 했다.

이런 이유로 통신사가 올 때마다 막대한 예산을 써 가며 막부에서 대대적인 환영을 벌이는 거였는데, 최근 몇 년 동안 이런저런 사정으로 교류가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박노를 통해 도현이 내민 조건은 상당히 구미가 당기길 수밖에 없었다.

계산을 끝낸 미무라는 자못 진지한 얼굴로 앞에 앉아 있는 박노를 보며 물었다.

“지금하신 말에 책임을 지실 수 있습니까?”

상대가 다 넘어왔다는 걸 눈치챈 박노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면서 대답했다.

“이런 중차대한 일을 어찌 주상 전하의 허락 없이 추진할 수 있겠소.”

“좋습니다. 하지만 제가 단독으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니, 쇼군께 서신을 보내 가부를 결정지을 때까지 조금 기다려 주십시오.”

“알겠소.”

기다려 달라고 했지만 미무라의 반응으로 볼 때 쇼군 역시 이번 제안을 받아들일 거라고 짐작한 박노는 여유로운 얼굴로 찻잔을 들어 남은 차를 마셨다.

야심한 시각이었지만 도현은 아직 잠자리에 들지 않고 방안에 촛불을 환하게 켜고는 각 부서에서 올라온 보고서를 살펴보고 있었다.

“전하, 예조참판께서 오셨사옵니다.”

“들라 하라.”

“예.”

박노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읽고 있던 보고서를 덮은 도현은 예를 갖추고 앞에 앉은 예조참판을 보며 바로 물음을 던졌다.

“어찌 됐나?”

“예상대로 저희 쪽 제안에 큰 관심을 보였사옵니다.”

“그래.”

“막부에 서신을 보내 어떻게 할지 물어본다고 했지만 사신의 반응으로 볼 때 긍정적인 대답이 올 것 같사옵니다.”

도현은 얼굴 가득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작게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야지. 하지만 세상일이라는 게 한 치 앞을 장담할 수 없는 것이니, 만약에 협상이 틀어졌을 때를 대비해서 남해도의 방비를 튼튼히 해야 될 거야.”

“여부가 있겠사옵니까.”

“수고 많았네. 이만 퇴궐해서 쉬도록 하게.”

“예.”

자리에서 일어난 박노는 조심스럽게 물러났다.

최근 군비를 급격하게 늘렸다고 하지만 왜국 전체를 도모하기에는 아직 부족한 것이 많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도현은, 처음 대마도 원정에 나설 때부터 막부와 이 정도 선에서 협상을 하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처음에 강경한 태도를 보인 것도 다 이걸 위한 포석이었다.

바로 이 패를 보여 줬다면 막부도 망설였을 테지만 세게 나가면서 상대를 압박한 다음에 슬쩍 한발 물러서는 척하며 미끼를 던지자, 상대는 덥석 물 수밖에 없었다.

이런 걸 보면 정말 능구렁이가 따로 없었다.

다음 날 미무라는 조선 측에서 제안한 것을 상세히 적은 서신을 지급으로 에도에 있는 이에미쓰에게 보냈다.

결과만 이야기하면 도현의 예상대로 이미 원정군에 넘어간 대마도를 되찾기 위해 군대를 무리하게 일으켜 조선과 전쟁을 하기보다, 이에미쓰는 실리와 자신의 전통성을 세울 수 있는 차선책을 선택했다.

쇼군인 이에미쓰의 허락을 받은 미무라는 얼마 뒤 대전에서 신료들이 모두 다 지켜보는 가운데 예조판서와 협정서를 작성했다.

협정서 내용은 대마도가 조선의 영토인 것을 천황과 쇼군이 인정하고 지금까지 쓰시마 번이 맡아서 하던 대조선 무역은 새로 후쿠오카에 상관을 열고 막부에서 직접 관리하며 금년 안에 에도로 통신사를 파견한다는 것이 명시되어 있었다.

이미 세부적인 사항을 다 협의한 뒤였기에 예조참판과 미무라는 형식적으로 협정서를 살펴본 뒤 맨 끝에 직인을 찍은 후 서로 교환했다.

왕좌에 앉아 있던 도현은 모든 절차가 마무리되자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렇게 일이 다 잘 해결되니 기쁘기 그지없군. 왜국 사신은 그동안 섭섭한 것이 있었다면 다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니 훌훌 다 털어 버리게.”

“예.”

“앞으로도 조선과 왜국이 돈독한 관계를 이어 나가길 바라네.”

“황공하옵니다.”

허리를 굽혀 대답하는 미무라를 내려다보며 도현은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도현이 환송연까지 열어 줘 대접을 잘 받은 미무라는 다음 날 협정서를 가지고 왜국으로 돌아갔다.

이로써 왜구의 노략질로 촉발된 전쟁은 소씨 가문의 멸망과 대마도를 조선에 영구 귀속시키는 걸로 막을 내렸다.

나중에라도 남해도로 이름을 바꾼 대마도가 왜국에 다시 넘어가는 일을 방지하기 위해 도현은 즉시 후속조치에 착수했다.

경상도의 부속도서로 편입하는 것과 동시에 하급 관리 마흔 명을 보내 조선식으로 행정체계를 갖추면서 현지 상황을 고려해 당분간은 군정을 실시하기로 했다.

병조판서인 임경업이 언제까지 조정을 비운 채 대마도에 머물 수는 없기에, 군정 책임자를 수군통제사인 최영희에게 맡기고 섬의 중심지인 이즈하라 포구에다가 수군 주둔지를 만들어 판옥선 서른 척과 삼천여 명의 병력을 주둔시키기로 결정했다.

여기다가 완벽한 흡수를 위해서는 주민들부터 동화시켜야 된다는 도현의 생각에 따라 한글 교육을 실시하고 조선의 풍습을 가르쳤다.

워낙 조선과 교류가 많은 데다 남해도 주민 상당수가 조상을 거슬러 올라가면 한민족에 뿌리를 둔 경우가 많았기에 큰 어려움 없이 받아들였다.

그리고 아무리 선정을 베풀어도 배가 고프면 다 소용이 없다는 걸 잘 아는 도현은, 봉황상단이 들여온 안남미를 대거 가져다 풀어서 민심을 잡았다.

마지막으로 산에 들어가 화전을 일구며 살던 유민 이천여 명을 남해도로 이주시켜서 살도록 해 통치력을 강화했다.

유민들을 태운 배가 선착장으로 들어오자 기다리고 있던 병사들이 깃발을 흔들어 신호를 보냈다.

“천천히, 천천히!”

“열을 지어 이쪽으로 서시오.”

저마다 꾀죄죄한 몰골에 경계하는 눈빛으로 사방을 살피던 사람들은 병사들의 말에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대부분 노모를 모시거나 자식이 딸린 가족 단위가 많아서 서로 떨어지지 않으려고 손을 꽉 잡고 있는 한편, 등에는 전 재산이 담긴 봇짐 따위를 지고 있어서 둘씩 짝을 지어 줄을 서는 데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하급 관리와 병사 들이 참을성 있게 사람들을 어르고 달래며 돌아다니는 동안 남해도라는 낯선 땅에 처음 발을 디딘 유민들 몇몇은 귓속말로 서로 정보를 교환하며 수군거렸다.

“와아! 아버지, 저것 보세요. 이상한 새가 하늘을 날아요.”

갈매기를 처음 본 아이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소매를 끌어당겼다.

“저건 갈매기란다. 바다에 사는 물고기를 잡아먹는 새지.”

“새가 물고기를 먹어요?”

바닷가에서 살아 본 적이 없던 아이는 떨어진 곡식을 쪼아 먹는 참새나 설날에 감나무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까치밖에 잘 몰랐기에 물고기를 먹는 새도 있다는 것에 매우 놀란 모양이었다.

그런 아이의 동그란 뒷머리를 쓰다듬으며 사내는 눈을 들어 남해도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배가 들어오는 선착장 주위는 사뭇 평지가 넓게 펼쳐진 듯 보이지만, 위로 조금만 시선을 올리면 푸른 나무가 무성하게 우거진 산이 높이 솟아올라 있는 게 눈에 띈다.

“농사를 지을 만한 땅이 있을지 모르겠군.”

사내가 걱정스럽게 중얼거리자, 우연히 옆을 지나가던 말단 병사가 그 목소리를 들었는지 불쑥 말했다.

“너무 걱정 하지 마시오. 꼭 농사가 아니라도 사람 일손이 필요한 곳은 어디든 널려 있으니까.”

그게 무슨 소리냐고 사내가 캐물으려 했지만 병사가 바쁜 걸음으로 그 자리를 곧 떠났기에 더 이상 물어볼 수가 없었다.

대충 인원 파악이 다 끝났는지 앞에서 누군가가 크게 징을 울렸고, 드디어 줄이 어딘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수가 많아서 이동하는 속도가 느릿느릿하기는 했지만 주변을 관찰하기에는 제격이었다.

행렬 가까이에서 바삐 움직이는 것은 대부분 관군들이고, 멀찍이에서 이쪽을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보고 있는 사람들은 일반 양민들처럼 보이긴 했으나, 옷이며 생김새가 어쩐지 이질적이었다.

왜놈들 땅을 뺏었다고 하더니 아직 원래 살던 주민들이 조금은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의 눈치를 보며 계속 이동하는 사이 어느새 행렬이 관청 앞까지 도착했다.

새로 지은 것처럼 관청이 크고 깨끗하긴 했지만, 마당에 유민들을 다 수용할 수가 없어 뒷줄의 나머지 사람들은 담벼락을 따라 길게 늘어졌다.

이방 옷차림을 한 하급 관리들이 앞에 책상을 갖다 놓고 죽 늘어선 유민들을 한 사람씩 면담하며 이야기를 나누는데, 그것만 해도 온종일이 걸렸다.

해가 중천을 넘어서야 겨우 차례가 돌아온 사내는 기다리느라 지쳐 잠이 든 아이를 등에 업고 이방 앞에 섰다.

“허허, 아이가 무척 피곤한가 보군. 미안하네, 사람이 너무 많아서.”

“아닙니다.”

원래 있던 고향 마을의 탐욕스러운 아전과는 달리 눈앞에 있는 관리는 꽤 친절해 보여 사내는 마음이 놓였다.

이름과 신분을 확인하는 간단한 절차가 끝나자, 관리가 나무로 만든 패 하나를 주면서 말했다.

“이건 자네가 어디서 온 누구라고 적혀 있는 신분증 같은 것이니 절대 잊어버리지 말게. 그리고 여길 나가면 관졸이 자네 가족들이 살 임시 거처로 안내해 줄 것이야. 천막뿐이지만 잠시 동안 비바람을 피하기에는 충분할 것이니 걱정하지 말고, 여기서 주는 쌀 한 섬과 당장 필요한 가재도구도 잊지 말고 챙겨 가게나.”

“감사합니다. 그럼 언제 돌려 드려야 하는지……?”

관아에서 공짜로 무언가를 주는 일은 거의 없다는 걸 익히 알고 있는 사내가 조심스레 묻자 관리는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왜 그러십니까, 나리?”

“아니, 이것 참. 사람이 생각하는 게 다 똑같군그래.”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 있는 사내에게 관리가 말했다.

“그 전에 왔던 사람도 똑같은 말을 하지 뭔가. 그것도 한두 명이 아니라 자네가 벌써 서른 명째니, 나도 모르게 그만…….”

그러면서 관리는 손가락으로 코 밑에 난 수염을 매만졌다.

“돌려주니 마느니, 그런 건 걱정할 필요 없네. 유민들이 하루빨리 이 섬에 정착할 수 있도록 관아에서 도와주는 것이니 그냥 받으면 되는 것일세.”

“정말입니까?”

“아무렴. 이번 일은 주상 전하의 어명으로 진행되는 것인데 어찌 거짓이 있을 수 있겠나?”

“정녕 그렇다면 감사한 일이지요. 하온데 저는 내일부터 무엇을 하면 됩니까?”

“음, 그건 따로 연락이 갈 걸세. 여기는 산지가 많고 평지가 적어서 반은 농사일을 하겠지만, 나머지 반은 물질이나 산에 가서 나무를 해 오는 일을 해야 할게야.”

관리는 방금 전 적었던 종이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여기에 자네 출신이 남해안의 어촌이었다고 되어 있는데. 그럼 배를 타는 일은 익숙하겠군.”

“하지만 그것도 아주 어릴 때 일이지, 손에서 놓은 게 벌써 십 년도 더 됐습니다. 잘할 수 있을는지…….”

“뭐 모르면 배우면 그만이지 않나. 어쨌든 여기는 사람 일손이 모자라니까 자네같이 젊은 사람이면 큰 도움이 될 거야. 하겠다고만 하면 관아에서 작은 배를 하나 내줄 테니 잘 생각해 보게.”

임시 거처와 쌀, 가재도구에 이어 바다에 타고 나갈 수 있는 배까지.

어디를 가도 이만큼 좋은 조건과 전폭적인 지원을 해 주는 곳이 있다는 소문을 들어 본 적도 없었기에 사내는 떡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지경이었다.

“우응.”

어른들의 말소리가 시끄러웠는지 등에 업힌 아이가 꼬물거리자, 관리가 그걸 보고선 손을 내저었다.

“잘못하다간 아이가 깨겠군. 얼른 나가서 제대로 밥을 먹이고 재우게나.”

“감사합니다, 나리.”

“으음. 다음 사람은 앞으로 오시오!”

사내는 관리에게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하고선 옆에서 기다리고 있던 군졸을 따라 임시 거처를 향해 길을 걸었다.

등에 지고 있는 지게 위에 놓인 쌀의 묵직한 무게에 새삼 감격하면서 사내는 새로운 희망이 가슴에 넘실거리는 것을 느꼈다.

이렇게 이주해 온 유민들은 관청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빠르게 자리를 잡아 갔다.

이런 이주 정책은 자칫 기존에 살고 있던 원주민들의 반발과 반목으로 이어질 수도 있었는데, 도현은 그걸 방지하기 위해 서로 분리하거나 차별하지 않고 똑같이 대우하며 함께 일을 하게 만들어 양측이 화합하도록 유도했다.

막부와 대립이 해소되고 남해도도 많이 안정되자 임경업은 잔류 병력을 남겨 두고 개선 길에 올랐다.

배에 탄 원정군은 해안을 쭉 거슬러 올라가 곧장 제물포까지 간 뒤 거기서부터는 육로를 이용해 한양으로 들어갔다.

승리를 널리 알리고 민심을 결집시키기 위해서 도현은 대대적인 개선식을 열어 힘들게 싸우고 돌아온 병사들을 환영했다.

도현 자신도 신하들을 데리고 한양 성문 밖까지 나가 원정군을 맞이했다.

뜨거운 환대에 원정군 병사들은 절로 어깨가 펴지며 자부심을 가졌고 계급에 따라 도현이 푸짐한 포상을 내려 주머니도 두둑해졌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도현이 내탕금을 풀어 하루 동안 도성에 술과 음식을 공짜로 제공하자 잔치 분위기가 제대로 나며 임금을 칭송하는 목소리가 성 안팎에 가득했다.

전장에서 돌아온 병사와 백성은 한자리에 어울려 술과 음식을 먹으며 무사 귀환과 승리를 자축하며 흥겨운 시간을 보냈다.

이날 하루 동안 잔치를 벌이고 하사금을 내리는 데 수만 냥이 넘는 돈이 들어가 봉황상단을 관리하는 장태범의 입이 한 자나 튀어나왔지만, 이걸로 민심을 하나로 모으고 국왕에 대한 충성심을 심어 줄 수 있었기에 도현은 크게 만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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