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철은 곧 국력이다 (42/104)

철은 곧 국력이다

이제 봄이 가고 여름이 돼서 하루가 다르게 무더워지고 있는 가운데 도현은 오랜만에 답답한 대궐에서 벗어나 뚝섬으로 사냥을 나갔다.

예로부터 풍경이 아름답고 들짐승들이 많은 뚝섬은 실록에도 수십 차례 임금이 이곳으로 행차해 사냥을 즐겼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만큼 왕실의 사냥터로 애용되던 곳이었다.

뚝섬 한쪽에는 국왕이 행차했다는 걸 상징하는 독기纛旗(소꼬리나 꿩 꽁지로 장식한 큰 깃발)가 하늘 높이 세워져 펄럭였다.

낮 동안 사냥을 즐기고 천막에서 쉬고 있을 때 주작단 단장인 이완이 붉은색 무관복을 입은 장정 다섯 명을 데리고 도현을 찾아왔다.

“전하.”

의자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던 도현은 시선을 들어 이완과 앞에 늘어선 장정들을 보며 물었다.

“이들인가?”

“예. 인사들 올리게.”

그러자 부리부리한 눈에 짙은 눈썹을 가진 사내를 시작으로 장정들이 차례대로 예를 갖추며 말했다.

“주작단 십오 조장인 함길현이라고 하옵니다.”

“길천식이라 하옵니다.”

“도석재…….”

자리에서 일어난 도현은 눈도 깜빡하지 않고 부동자세를 취하고 있는 장정들을 한 명씩 천천히 훑어보고는 진지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중원으로 가서 뭘 해야 되는지 다들 잘 알고 있겠지?”

“옛.”

“언제까지라는 기약도 없고 목숨을 걸어야 되는 일인데, 그래도 할 수 있겠나?”

도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조장인 함길현이 약간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전하와 조선을 위해 이 한 몸 언제든지 초개같이 버릴 각오가 되어 있사옵니다.”

“저희도 같은 생각입니다.”

“정말 든든하군.”

흡족한 얼굴로 머리를 끄덕인 도현은 앞으로 걸어가 친히 주작단 단원들의 손을 잡아 줬다.

“그대들의 두 어깨에 조선과 한민족의 미래가 달려 있다는 걸 항상 명심하고 무사히 살아서 다시 만나길 바라네.”

이렇게 도현을 가까이에서 만나는 것도 평생 가문의 영광인데 친히 옥수玉手(임금의 손)를 내밀자 함길현과 단원들은 벅차오르는 가슴을 겨우 진정시키고는 허리를 굽힌 채 양손으로 그의 손을 겨우 맞잡았다.

“전하의 말씀, 가슴깊이 새기겠사옵니다.”

“그래.”

도현이 살짝 고개를 옆으로 돌려 손짓하자 한쪽에서 대기하고 있던 칠현이 천막 밖으로 나갔다가 커다란 술상을 든 궁녀들과 함께 들어왔다.

술상을 내려놓은 궁녀들이 나가자 도현이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내가 해 줄 건 없고 길을 떠나기 전에 술이나 한잔 따라 주고 싶었네. 자, 다들 앉게.”

“……예.”

잠시 머뭇거리던 단원들은 단장인 이완이 괜찮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자, 엉거주춤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그가 직접 주전자를 집어 들자 함길현은 황공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얼른 앞에 있는 술잔을 앞으로 내밀었다.

쪼르르륵.

청아한 소리를 내며 맑은 빛깔의 술이 잔을 가득 채웠다.

이완과 단원들에게 한 명 한 명 직접 술을 따라 준 도현은 잔을 가슴께로 들어 올리며 말했다.

“무사 귀환과 이번 작전의 성공을 위해 건배하세.”

“예.”

건배를 하고 잔에 든 술을 단숨에 쭉 마신 도현은 단원들을 둘러보며 다시 한 번 다짐을 받았다.

“다들 꼭 몸 성히 다시 보세.”

“……알겠사옵니다.”

어려운 임무를 맡긴 미안함과 걱정이 그대로 느껴진 단원들은 가슴이 먹먹해지며 머리를 숙였다.

사실 이번 사냥은 비밀 임무를 띠고 중원으로 가는 단원들을 도현이 직접 만나 격려해 주기 위해 일부러 마련한 행차였다.

그냥 위에서 일방적으로 지시만 내리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먼저 자기 사람을 살뜰히 챙기고 아끼는 모습을 보였기에 주작단을 비롯해 휘하에 있는 많은 이들이 도현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바치는 거였다.

그렇게 밤늦은 시간까지 도현은 단원들과 함께 술잔을 기울였다.

사냥을 다녀온 도현은 무슨 일인지 며칠 동안 대전회의에도 참석하지 않고 거처인 희정당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다.

처음에는 혹시 몸이 안 좋은 건지 염려하던 신료들은 이내 그런 것이 아니라는 걸 알고 안심하면서도 두문불출하는 날짜가 길어지자 근심 어린 시선으로 희정당을 바라봤다.

“참의 어른, 계시옵니까?”

공조工曹 건물 내에 있는 자신의 방에서 한창 업무를 보고 있던 유형원은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붓을 벼루 위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들어오게.”

수하 관헌이 찾아온 줄 알고 무심코 시선을 돌린 유형원은 주상인 도현의 최측근으로 알려진 칠현을 보고는 살짝 놀랐다.

“자네는……?”

“대전 내관으로 있는 칠현이라고 합니다.”

“알고 있네. 그런데 대전 내관이 여긴 어쩐 일인가?”

“주상 전하께서 참의 어른을 찾으십니다.”

“나를?”

“예.”

뜻밖의 말에 유형원은 눈을 크게 치켜떴다.

정삼품 참의에 불과한 자신을 임금이 찾는다니 놀라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했다.

“어서 가시지요.”

“아, 알았네.”

칠현의 재촉에 유형원은 하던 일을 정리도 하지 않고 허겁지겁 몸을 일으켰다.

반계磻溪 유형원은 광해군14년(1622년)에 태어나 현종14년(1673년)까지 살다 간 인물로 실학파의 시조라고 불려도 전혀 손색이 없는 학자였다.

원래는 진사가 된 이후 번번이 최종 관문인 문과에 떨어져 죽을 때까지 관직과 인연이 없었지만, 개방적인 그의 생각과 업적을 잘 알고 있는 도현이 손을 써서 벼슬을 하게 됐다.

사실 스물네 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정삼품 참의라면 엄청난 고속 승진을 한 것인데, 이것도 유형원을 중히 쓰기 위해 도현이 뒤에서 몰래 밀어준 덕분이었다.

칠현을 따라 서둘러 걸음을 옮긴 유형원은 어느새 도현 앞에 서 있었다.

“신 공조 참의 유형원, 주상 전하의 부르심을 받고 왔사옵니다.”

정중하게 예를 갖추는 유형원을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던 도현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리 앉게.”

“예.”

감히 시선을 마주하지 못한 채 유형원은 앞에 놓인 방석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공조 일은 할 만한가?”

의외의 질문에 살짝 당황하던 유형원은 이내 틀에 박힌 대답을 했다.

“전하의 성은에 감사하며 성심을 다해 일하고 있사옵니다.”

“듣자하니 성리학 외에 지리와 음운音韻, 선술仙術, 문학 같은 잡기에 관심이 많다고?”

“…….”

이때까지만 해도 선비가 성리학 외에 다른 학문에 관심을 가지는 걸 안 좋게 보는 경향이 강했기에 유형원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그의 눈치를 봤다.

“여러 성인들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백성들을 이끌어 갈 관리라면 실생활과 업무에 필요한 걸 알아 두는 것도 필요한 일이지.”

조정의 녹을 먹는 관리가 엉뚱한 것에 관심을 가진다고 크게 호통을 듣고 최악의 경우 벼슬까지 떨어질 거라고 생각하던 유형원은, 의외의 반응에 오히려 당혹감을 느꼈다.

“그래서 말인데 이걸 한번 살펴보게.”

이야기를 하며 도현이 서탁 위에 놓여 있던 종이를 하나 집어서 내밀자 유형원은 얼른 두 손으로 받았다.

여러 번 접혀 있는 종이를 펼치자 무슨 건물 설계도 같은 것이 나왔는데, 나름 세상 경험이 많다고 자부하는 유형원으로서도 처음 보는 거였다.

“뭔지 알겠나?”

“송구스럽습니다만 신의 지식이 짧아 알아보지 못하겠나이다.”

“그럴 거야. 조선은 물론이고 중원에도 아직 없는 건물일 테니 말이야.”

입가에 묘한 미소를 지은 도현의 말에 유형원은 더욱 종이에 그려진 건물의 용도가 궁금해졌다.

“제철소製鐵所라는 걸세.”

“이름을 들어 보니 철을 만들어 내는 곳인가 보옵니다.”

“역시 금방 알아차리는군, 맞아. 기존에 대장간에서 소량의 철을 만들어 내던 걸 벗어나 대규모 시설을 지어 대량생산 하는 곳일세.”

철을 만지는 장인이 아니었기에 유형원은 도면만으로 쉽게 감이 잡히지 않았지만 이야기를 하는 걸 봐서 뭔가 엄청난 시설임에는 틀림없었다.

도현은 앞에 있는 유형원을 똑바로 쳐다보며 사뭇 진지한 어조로 이야기를 이었다.

“예전에도 그랬지만 앞으로는 철 생산이 곧 그 나라의 국력을 상징하게 될 걸세. 당장 군대만 해도 철이 없다면 조총은 고사하고 화살촉 하나 만들어 낼 수 없지 않나. 장차 짐이 계획하는 개혁이 본궤도에 오르고 북벌을 위해 계속 군비를 확충해 나가려면 지금처럼 대장간에서 망치로 두들겨 철을 뽑아내는 방식으로는 절대 그 수요를 감당할 수 없어. 그래서 고로高爐를 이용해 대량으로 철을 생산할 수 있는 시설이 꼭 필요한 거네.”

그가 계획하는 건 한꺼번에 대량의 쇳물을 뽑아낼 수 있는 고로를 갖추고 거기서 나온 철을 가지고 기본적인 철강재를 생산하는 현대적인 개념의 제철소 건설이었다.

계획대로 일이 진행된다면 더딘 신형 무기 보급을 획기적으로 늘릴 수 있고 산업화를 촉발시켜 조선의 경제 부흥을 앞당길 수 있었다.

하지만 반대로 위험부담도 컸는데, 많은 재정과 인력이 들어가는 대공사인 만큼 자칫 실패라도 한다면 송시열을 위시한 정통 사림들의 공격을 받아 지금까지 애써 이끌어 온 경제 개혁이 모두 물거품이 될지도 몰랐다.

그래서 이 일을 믿고 맡길 수 있는 적임자를 찾던 도현은 뛰어난 인재이자, 실학의 선구자고 추진력 또한 갖춘 유형원을 선택했다.

“경이 제철소 건설을 맡아 줬으면 하네.”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말에 유형원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말까지 더듬었다.

“제, 제가 말입니까?”

“그래.”

얼핏 봐도 엄청난 대형 공사가 분명한데 이런 일을 공조판서도 아니고 일개 참의에 불과한 자신에게 맡긴다고 하자 유형원은 깜짝 놀라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이런 큰일을 맡기신다니 평생의 영광이옵니다만 신의 능력이 부족해 자칫 전하께 누를 끼치지나 않을지 염려되옵니다.”

완곡한 사양이었지만 도현은 물러서지 않고 살짝 고개를 내저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 꼭 경이어야 하네.”

“저보다 뛰어난 인재들이 조정에 많사옵니다.”

“물론 그렇겠지. 하지만 이 일에는 아무리 능력이 있어도 성리학에 꽉 막혀 있는 사람보다 경처럼 열린 사고를 가진 인물이 필요하네. 이건 어명이니 다른 말 하지 말게.”

“…….”

도현이 어명이라며 아무런 말도 못 하게 아예 못을 박아 버리자, 이제 꼼짝없이 제철소 건설을 맡게 된 유형원은 임금이 자신을 인정해 주는 것이 기쁘면서도 막중한 부담감에 벌써부터 앞이 캄캄해졌다.

“부족하지만 최선을 다해 성과를 이뤄 내겠사옵니다.”

“경이라면 잘할 수 있을 걸세.”

“예.”

다음 날 대전회의에서 도현은 제철소 건설을 공식화했다.

그러자 송시열을 비롯한 산당은 물론이고 왕당파에서도 우려하는 태도를 보였다.

특히 호조를 맡고 있던 김육은 각종 개혁과 토목 공사로 지출이 급격히 늘어 가는 상황에서 제철소 건설 같은 대규모 공사를 벌일 여력이 없다며 대놓고 반대했다.

“주상 전하의 계획대로 한다면 무려 이십만 냥의 자금을 들여 제철소라는 걸 짓겠다는 건데, 이만한 여유 자금도 없을뿐더러 솔직히 과연 이렇게까지 해서 철을 생산해야 되는지 의문이옵니다.”

공론화하기 전에 미리 살짝 운을 띄워 뒀는데도 김욱이 이렇게 반대하자 도현은 이맛살을 찡그리며 말했다.

“군비 증강과 지금 추진하고 있는 각종 개혁을 원활하게 이끌어 가기 위해서는 철의 수급이 무엇보다 중요한데, 현재 병기창과 각지의 대장간에서 나오는 물량 가지고는 턱없이 부족하니,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제철소를 만들려는 것이오. 그리고 자금은 지난 두 번의 반란에서 거둬들인 재물과 대동법 실시로 발생한 여윳돈이 있지 않소?”

“대동법으로 재정이 늘어난 건 사실이지만 전하께서 실행하시는 여러 가지 개혁으로 지출 또한 커져 빠듯한 처지입니다. 그리고 말씀하신 자금은 이번에 벌어진 남해도 원정처럼 급작스럽게 돈이 필요할 때를 대비한 예비비로 남겨 둬야 해서 제철소 건설에 내놓을 잉여 예산이 없사옵니다. 꼭 필요하다면 북한산성 보수 공사가 끝나는 내후년으로 미루시는 것이 어떻겠사옵니까?”

나름 국가 재정을 생각해 적당한 타협점을 제시한 거였지만 오히려 도현의 화를 돋우고 말았다.

꽝!

손바닥으로 팔걸이를 세게 내려친 도현은 크게 호통을 쳤다.

“당장 여기저기에서 철이 부족해 일이 제대로 안 되고 있는데 이 년을 어떻게 더 기다리라는 건가!”

“하오나…….”

“고작 돈 몇 푼 아끼려다가 더 큰 걸 놓치게 된다는 걸 왜 모르는가!”

강한 박력에 밀린 김육과 신료들이 찔끔한 표정을 지으며 앉아 있자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송시열이 나섰다.

“이십만 냥이 결코 적은 돈은 아니지 않사옵니까. 그리고 무조건 새로운 시설을 짓기보다는 기존에 있는 걸 최대한 활용하고 용량을 늘린다면, 작은 투자로 큰 효과를 얻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옵니다. 또 이번 기회에 그동안 조정에서 이것저것 너무 과하게 일을 벌인 건 아닌지 점검해 보고 고칠 건 고쳐야 될 것이옵니다.”

제철소 건설을 넘어 은근슬쩍 그가 추진하는 개혁 자체를 걸고넘어지자, 도현은 이마에 핏줄을 세우며 단호한 어투로 입을 열었다.

“철은 곧 국력이오! 하다못해 농사에도 쇠로 만든 농기구를 사용해야 되는데, 저 강대한 청국과 일전을 벌이려면 얼마나 많은 철이 필요하겠소. 말로만 북벌을 주장하면서 병사들에게 죽창 하나만 달랑 쥐여 주고 전장에 나가 적과 싸우라고 할 것이오.”

잠시 말을 멈춘 도현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좌중을 훑어보자 신료들은 괜히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했다.

“흐흠.”

“험.”

그러다가 송시열한테서 시선을 멈춘 도현은 잔뜩 화가 난 목소리로 이야기를 이었다.

“조정 대신이라는 사람들이 멀리 보지 못하고 당장 앞만 생각해 주먹구구식으로 대충 땜질만 하려 들다니 정말 실망이오. 이래서 나라의 미래가 어떻게 되겠소! 조정에 돈이 없다면 내탕금을 털어서라도 제철소를 지을 테니 그렇게들 아시오.”

마지막 말을 내뱉은 도현은 더 이상 이야기를 하기 싫다는 듯이 왕좌에서 벌떡 일어나 대전을 나가 버렸다.

그러자 대전에 남겨진 신료들은 곤혹스러운 얼굴로 웅성거리며 이야기를 나눴다.

“이거, 주상께서 화가 단단히 나신 모양이오.”

“그러게 말입니다.”

“전하께서 이렇게까지 하시는데 웬만하면 뜻대로 해 드리는 게 좋을 것 같소만.”

왕당파의 수장이자 도현과 인연이 깊은 박황의 말에 송시열이 고개를 내저었다.

“이미 벌려 놓은 일도 태산인데 여기서 뭘 또 더한다는 겁니까!”

눈썹을 찌푸린 박황은 마주 언성을 높이며 말했다.

“전하의 말씀이 아주 틀린 건 아니지 않소! 철 생산은 군비 증강과 바로 직결되는 문제인데 평소 북벌을 입에 달고 다니시는 우상이 반대를 하다니, 정말 의외오이다.”

졸지에 표리부동表裏不同한 사람이 되어 버린 송시열은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뭐요!”

“어허. 이러다가 큰 싸움이 나겠습니다. 두 분 다 진정하십시오.”

대사헌 김익희가 얼른 나서며 만류하자 두 사람은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반대로 돌렸다.

그 뒤로 한참을 더 신료들끼리 제철소 건설을 가지고 갑론을박, 이야기를 나눴고 송시열이 이끄는 산당에 비해 왕당파의 세가 훨씬 우세했기에 결론은 도현의 뜻을 따르기로 했다.

하지만 얼마 전 끝낸 남해도 원정과 진행 중인 각종 토목공사로 재정에 그리 큰 여유는 없었기에 공사대금의 절반인 십만 냥을 호조에서 내고 나머지는 내탕금으로 충당하도록 했다.

공사비 전액을 자신이 부담하더라도 제철소 건설을 강행하려던 도현은 썩 만족스럽지는 않았지만, 신료들이 내민 조정안을 받아들였고 바로 공사를 전담할 제철 도감都監을 만들고 공조참의 유형원을 책임자로 임명했다.

완공이 되면 투자 금액에 따라 국가와 왕실이 절반씩 지분을 가지고 제철소 운영은 공조보다 이윤에 밝고 시장 상황에 보다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봉황상단이 맡아서 하기로 했다.

도현이 계획한 용광로는 하루에 일 톤가량의 쇳물을 뽑아낼 수 있는 크기였는데, 욕심 같아서는 그것보다 더 큰 용량으로 만들고 싶었지만 기술의 한계 때문에 이 정도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현재 기술로는 계획된 용광로를 만드는 것도 모험에 가까웠는데, 기본적으로 이런 크기를 만들어 본 적이 없었기에 하나부터 열까지 맨땅에 머리를 부딪치는 심정으로 제작해야 됐다.

그나마 도현이 며칠간 두문불출하며 머릿속에 있는 회귀 전 지식을 쥐어짜 내 상식 수준이었지만 대략적인 원리와 용광로 구조를 책자로 정리해 줬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다면 감히 제철소를 만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유형원과 장인들이 두 손을 들고 말았을 게 분명했다.

용광로 구조는 내화벽돌로 쌓아 올린 원통형 본체와 흐르는 강물을 이용한 수차를 돌려서 공기를 불어넣는 열풍로로 구성됐다.

본체 꼭대기에서부터 철광석과 석회석 그리고 석탄의 일종인 역청탄을 바싹 말린 코크스를 차례차례 쌓은 뒤 열을 가해 쇳물을 만드는 방식이었다.

재료인 철광석과 유연탄은 함경도에 대량으로 묻혀 있었지만, 거기에 제철소를 짓기에는 국경도 가깝고 여러모로 문제가 많은 데다 멀리 운송을 해야 되는 단점이 있어, 한양하고 가까운 제물포를 건설 부지로 정했다.

바닷가라 용수 공급도 용이하고 무엇보다 뱃길을 이용해 재료를 운송하기에 적합했다.

그렇게 제철소 건설 준비가 조금씩 진행되고 있을 때 한 가지 기쁜 소식이 전해졌다.

“비누를 만들었다고?”

시원한 식혜를 마시며 쉬고 있던 도현은 뜻밖의 보고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렇사옵니다. 여기 시제품으로 나온 것을 가져왔으니, 한번 보시지요.”

봉황상단 총관인 장태범이 자랑스럽게 말하며 고급스러운 목함을 하나 앞으로 내밀자 도현은 긴가민가하는 표정으로 뚜껑을 열었다.

그러자 약간 투박했지만 정말 회귀 전에 쓰던 비누와 비슷하게 생긴 물건이 안에 들어 있었다.

비누를 집어 든 도현이 코로 냄새를 맡자 진달래꽃 향기도 살짝 났다.

“취향이 고급스러운 부인들한테 팔려면 꽃향기 같은 것이 나면 더 좋을 거라는 전하의 말씀에 진달래를 첨가했는데, 마음에 드시옵니까?”

담담하게 이야기했지만 마치 칭찬을 바라는 강아지처럼 눈을 반짝 빛내며 쳐다보는 장 총관의 모습에 도현은 작게 감탄성을 내뱉었다.

“허. 정말 대단하군.”

동물 기름과 해초를 불에 구워서 얻는 알카리 등을 합성해서 비누를 만드는 방법을 알려 줬지만, 이렇게 빨리 향까지 첨가한 완성품을 가지고 올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에 놀라움이 더 컸다.

모양과 향은 그럴듯해도 세척력이 형편없으면 말짱 다 꽝이었기에 도현은 고개를 돌려 한쪽에 시립해 있는 칠현을 보며 말했다.

“세숫물을 가져와.”

“예.”

얼마 있지 않아 궁녀 한 명이 놋쇠로 된 세숫대야에 물을 반쯤 담아서 도현 앞에 내려놓고 나갔다.

“어디.”

일부러 먹물을 묻힌 손을 물에 담근 도현은 비누를 쥐고는 살짝 비볐다.

회귀 전 쓰던 비누만큼은 아니었지만 바로 하얀 거품이 나면서 먹물이 깨끗이 씻겨 나갔다.

깨끗해진 손을 이리저리 살펴보며 도현은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제대로 만들었군.”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이옵니다.”

사실 초기 비누 형태의 물건은 조선에도 있었는데 석감石鹼이라고 해서 예전부터 잿물에 여뀌 등의 풀 즙과 밀가루를 응고제로 섞어서 사용했다.

그리고 잿물 대신 팥으로 만든 조두澡豆라는 것도 있었는데, 이건 고급품으로 지체 높은 양반가나 왕실 여인들만 썼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쓰기가 불편하고 세척력도 떨어지는 데다 무엇보다 장기간 보관하기가 어려웠다.

봉황상단에서 만들어 낸 비누는 이런 단점을 모두 해결했을 뿐만 아니라 향까지 좋으니, 시전에 내놓기만 하면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갈 것이 분명했다.

이 정도 품질이라면 국내뿐만 아니라 외국에 가져다가 팔아도 충분히 승산이 있었다.

그렇지만 상품화를 하기 위해서는 아직 중요한 걸림돌이 하나 남았다.

“개당 판매 단가가 얼마나 되지?”

“다섯 푼입니다. 나중에 물량이 늘어나면 네 푼 정도까지 떨어질 수 있고, 꽃 향이 들어가지 않는 건 세 푼이면 되옵니다.”

근위대 징집병 월급이 열 냥이니 싸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꿈도 못 꿀 만큼 비싼 가격도 아니었다.

사실 비누 개발을 서두른 건 늘어나는 지출을 감당하기 위해 봉황상단의 새로운 수익원을 발굴하기 위한 것도 있었지만, 그것보다 현실적인 필요성 때문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조선뿐만 아니라 다른 국가들 모두 질병에 의한 사망률이 아주 높았는데, 기본적으로 목욕을 잘하지 않고 위생 상태가 불량한 것이 큰 원인이었다.

임금인 도현이 일일이 백성들을 찾아다니며 목욕을 시킬 수는 없었기에, 값싸고 좋은 비누를 유통시켜 자연스럽게 개인위생과 청결에 신경 쓰도록 유도하려는 거였다.

그래서 제일 처음 선보일 곳도 집단생활을 해서 전염병 확산과 발병에 취약한 집단 중 하나인 군軍에 보급품으로 나눠 줘 반강제로 사용하도록 할 계획이었다.

또 다른 사용처도 역시 군이었는데, 총기를 대량 보급해 조총병을 육성하자 대두된 문제점이 바로 사격 후에 남는 화약 찌꺼기를 제거하는 거였다.

회귀 전이라면 윤활유의 일종인 강중유를 써서 간단히 제거하겠지만, 석유 한 방울 구할 수 없는 곳이었기에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화약 찌꺼기를 그냥 놔두면 오작동이나 폭발의 위험성이 있었기에 항상 신경 써서 관리를 해야 했는데, 그렇다고 솔로 빡빡 문질러 버리면 힘들게 파 놓은 강선이 손상되기에 조심해야 됐다.

실제로 근위대를 포함해 조총이 보급된 일선 부대에서 총기 손질 불량으로 인한 사고와 조총 파손이 꽤 빈번하게 일어나 비변사에서 대책을 심각하게 논의하는 일까지 있었다.

그래서 고심 끝에 도현이 생각해 낸 것이 바로 비누를 이용한 총기 손질이었다.

비누를 녹인 뜨거운 물을 조심스럽게 총구에 흘려 넣은 뒤 조금 기다리면 자연스럽게 안에 붙어 있던 화약 찌꺼기가 떨어져 나왔다.

이런 과정을 여러 번 반복한 다음에 깨끗한 물로 헹궈 내고, 마른 천으로 물기를 하나도 없이 다 닦은 후 총구 안쪽을 코팅하듯 동물 기름을 살짝 칠하면 된다.

이렇게 상당히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했지만 강중유가 없는 상태에서 총기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 방법이 최고였다.

아무튼 이런 이유로 비누 개발과 생산은 꼭 필요한 일이었다.

“가격도 그 정도면 적당하군.”

고개를 끄덕인 도현은 칠현이 건네주는 수건으로 물에 젖은 손을 닦으며 이야기를 이었다.

“일단 박 사령한테 말을 해 놓을 테니까 근위대에서 쓸 비누 오천 장을 시험 생산해서 납품해 봐.”

“알겠사옵니다.”

“그리고 아무래도 비누는 미용에 관심이 많은 여자들 사이에 입소문이 나야 되니까, 중전과 내명부에 선물로 줄 것도 좀 챙기고.”

상재가 뛰어난 장태범은, 도현의 말이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옆에 놔둔 비단 보따리를 앞으로 살짝 내밀며 이야기했다.

“그러실 줄 알고 미리 준비해 왔사옵니다.”

“역시 장 총관이야.”

굳이 이야기를 해 주지 않아도 비누를 팔려면 어디를 공략해야 되는지 제대로 맥을 짚고 있는 모습에 도현은 얼굴 가득 미소를 지었다.

도현이 처소를 찾았을 때, 중전은 방에서 자수를 놓고 있었다.

“주상 전하 납시옵니다.”

예고치 않은 방문에 중전이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도현이 손을 내밀어 만류했다.

“중전의 얼굴이 보고 싶어 잠시 들른 것뿐이니, 그렇게 당황할 필요 없소.”

“아무리 그래도 법도가 있는데 어찌 그러하겠습니까?”

직설적인 도현의 말에 중전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입가에는 미소를 머금었다.

“흐음.”

상석에 앉은 도현은 궁녀가 내온 다과에는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지그시 중전을 바라보았다.

“왜 그러십니까?”

“중전이 예쁘다는 걸 새삼스럽게 느끼고 있는 중이오.”

“네?”

갑작스러운 칭찬에 중전의 뺨이 잘 익은 사과처럼 빨갛게 달아올랐다.

“이리 가까이에서 보니 중전은 피부가 참 깨끗하군. 마치 열여섯 소녀 피부 같소. 다른 부인네들의 질투가 이만저만이 아니겠는걸.”

“저, 전하.”

어쩔 줄 몰라 하는 중전을 앞에 두고 도현은 슬슬 밑밥을 깔기 시작했다.

“부끄러워하지 말고 말해 보시오. 무슨 피부 관리 비법이라도 있소? 내 소문으로 듣자 하니, 저 멀리 서역에 있는 나라에서는 여자들이 피부를 좋게 하기 위해서 진흙도 얼굴에 바르길 서슴지 않는다 하던데…….”

“어머, 진흙을요?”

그 더러운 걸 어떻게 얼굴에 문지를 수가 있냐는 표정의 중전에게 도현이 껄껄 웃어 보였다.

“뭐, 가축의 젖으로 목욕도 한다고 하는데, 어디까지가 소문이고 진실인지 누가 알겠소.”

“대체 어디서 그런 이야기를 들으셨어요?”

“얼마 전, 심심하던 차에 재밌는 얘깃거리가 없냐고 물어보니 칠현이가 외국 사신한테 들었다며 말해 주더군. 그런 소리를 듣고 여기 와 보니 새삼 중전의 고운 피부가 눈에 띄어서 하는 말이오.”

“그러셨군요.”

이제야 이해가 간다는 듯 중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매일 격무에 시달리는 도현이 내심 걱정되던 차에, 이런 가벼운 화제로 그가 기분 전환을 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환영이었다.

“하지만 저는 매일 아침저녁으로 깨끗하게 세안을 하고 몸을 정갈히 하는 것 외에는 딱히 비법이라 할 만한 게 없사옵니다.”

“흐음. 그런가.”

기대를 만족시키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표정을 하자, 도현이 웃으며 방 바깥에 대기하고 있는 칠현을 불렀다.

“아까 맡긴 것 좀 가지고 오너라.”

“예.”

칠현은 발소리를 내지 않는 재빠른 몸놀림으로 가까이 다가와 도현에게 비단으로 감싼 목함을 건넸다.

“그게 무엇이옵니까?”

중전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물었다.

“여기 오기 전에 봉황상단 사람들을 만나서 아까 그 이야기를 했더니 마침 좋은 물건이 있다며 진상해 올리기에 중전이 쓰라고 가져 왔소.”

그러면서 도현은 얼른 풀어 보라고 손짓했다.

설마 깜짝 선물까지 준비했을 줄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중전은 기쁜 얼굴로 비단을 풀어 목함 뚜껑을 열더니 그 안에서 풍겨 나오는 짙은 꽃향기에 눈을 크게 떴다.

“세상에…….”

말을 잇지 못하는 중전을 향해 도현이 물었다.

“맘에 드는지 모르겠군.”

“네, 좋고말고요! 어쩜 이리 좋은 향기가 난단 말입니까.”

빛깔 고운 한지에 감싸인 네모난 비누를 손으로 들어 본 중전은 몇 번이나 코를 갖다 대며 향을 맡았다.

“방에 놔두면 매일 아침마다 꽃밭에 있는 기분일 것 같사옵니다.”

“하하, 그건 놔두고 감상하는 물건이 아니오.”

“그럼요?”

“물이 닿으면 신기하게도 거품이 일면서 더러운 걸 깨끗하게 씻어 주는 역할을 하지. 특히 얼굴이나 몸을 씻을 때 쓰면 무척 기분이 상쾌하다오.”

“정말입니까?”

“아무렴. 못 믿겠으면 당장 오늘 밤에 시험해 보시오.”

그러고 나서 도현은 혹시나 싶어 말을 덧붙였다.

“필요하면 더 줄 테니 내가 준 거라고 괜히 아껴 쓰지 말고, 알겠소?”

“네에.”

중전은 괜한 걱정을 하는 도현이 고마운지 웃으면서 답했다.

그리고 바로 그날 밤.

높게 틀어 올린 머리를 풀고 잘 채비를 하고 있던 중전은 궁녀들이 대야에 손 씻을 물을 가지고 들어오는 걸 보고 도현이 준 선물을 떠올렸다.

“어머나.”

“와아.”

중전이 보석함에서 비누를 꺼내자마자 널리 퍼지는 향기에 궁녀들이 깜짝 놀라 감탄사를 터트렸다.

“마마, 어디서 갑자기 좋은 냄새가 나옵니다.”

“호호, 너희들도 이 향기가 맘에 드는 모양이구나.”

주변 반응에 자기도 모르게 어깨가 으쓱한 중전은 도현이 일러 준 대로 비누를 살짝 물에 담가 문질렀다.

물 색깔이 갑자기 하얗게 변하면서 부드러운 거품이 일자 궁녀들은 신기한 것을 본 양 저마다 몰려들어 중전이 하는 행동 하나하나를 유심히 지켜보았다.

비누로 손과 얼굴을 씻고 평소 하던 대로 깨끗한 비단 천에 물기를 닦은 중전은 확실히 보들보들해진 피부 감촉에 만족하며 거울을 보았다.

“……!”

거울에 비친 중전의 얼굴은 평소보다 두 배로 뽀얗고 반질반질해서 마치 이름난 명공이 만든 백자를 보는 것만 같았다.

매일 보는 자신의 얼굴인데도 만지면 보드랍고 탱탱한 것이, 마치 낮에 도현이 말했던 것처럼 열여섯 소녀 때로 돌아간 듯 착각될 정도였다.

“마마, 정말 아름다우십니다!”

곁에서 이 변화를 지켜보고 있던 궁녀들은 마구 호들갑을 떨었고, 중전 역시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으나 애써 체통을 지키라며 타일렀다.

이날 이후로 중전은 매일 아침저녁 세안 시간에 비누를 쓰는 것은 물론, 목욕을 할 때도 애지중지하며 몸에서 떼놓지 않아, 궁녀들은 물론 부인들 사이에서 소문이 퍼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그리고 도현의 예상대로 중전을 포함해서 대신들에게 하사품으로 몇 개 나눠 준 비누를 써 본 고관대작 부인들은 매끈해진 피부와 목욕을 한 뒤 은은하게 풍기는 꽃향기에 열광했다.

부인의 아름다운 모습에 거사(?)를 치르고 늦둥이를 본 사람까지 있었는데, 부부 금실을 좋게 하는 물건이라고 해서 사랑 애愛 자를 써서 ‘애감’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했다.

아무튼 이렇게 입소문이 나자 상점에 비누를 내놓는 족족 다 팔려 나갔는데, 어떤 부인들은 아예 물건이 들어오는 날이면 몸종을 새벽부터 세워 뒀다가 싹 쓸어 가기도 했다.

이렇게 되자 비누를 구입하지 못한 다른 손님들의 항의가 빗발쳤고, 급기야 봉황상단에서는 일인당 두 개씩 판매 수량을 제한하는 방법까지 써야 됐다.

그리고 급히 생산량을 대폭 늘렸지만 갈수록 커져 가는 수요를 다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대박을 치며 돈을 갈퀴로 마구 긁어 갔다.

이런 가운데 제철소 건설도 부지 선정을 마치고 본격적인 공사를 앞두고 있었다.

화르르륵.

한여름인데도 불구하고 엄청난 열기를 뿜어내는 가마 앞에 관복을 입은 유형원과 제철도감 소속 장인들이 땀을 비 오듯 흘리며 긴장한 얼굴로 서 있었다.

전통 방식으로 지어진 가마는 소나무를 장작으로 태워 1,300도나 되는 엄청난 온도를 유지했는데 내부는 그야말로 이글거리는 불덩이 그 자체였다.

이렇게까지 온도를 올리는 건 흙이 뜨거운 불에 구워질수록 단단해지는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얼마쯤 지났을까 한쪽에 놔둔 모래시계를 확인한 장인 한 명이 약간 긴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시간 다 됐습니다.”

그러자 와벽장瓦壁匠들의 우두머리인 중년 사내가 진지한 눈빛으로 한참 동안 가마 상태를 꼼꼼히 살펴보고는 유형원한테 가서 입을 열었다.

“이제 열어 봐도 될 것 같습니다.”

“그럼 입구를 열게.”

“예.”

중년 사내가 눈짓을 하자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장인들이 망치를 들고 가마 입구를 막고 있는 흙을 조심스럽게 부셨다.

쿵! 쿵!

흙이 아주 단단하게 굳어져 있었지만 망치로 세게 몇 번 내려치자 이내 금이 가며 부서져 내렸다.

그렇게 부서진 흙을 치우자 시커먼 가마 입구가 드러나며 후끈한 열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나마 안에 쌓아 둔 장작이 다 타 가마가 어느 정도 식었기에 망정이지, 그러지 않았다면 뜨거운 열기에 화상을 입었을 거였다.

어느 정도 정리가 되자 장인들 중 한 명이 가죽 장갑을 손에 끼고 엉금엉금 기어서 가마 안으로 들어가더니 아직 열기가 남아 뜨거운 벽돌을 하나 꺼내 왔다.

“여기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두꺼운 가죽 장갑을 끼고 벽돌을 건네받은 중년 사내는 작은 실금이라도 있는지 이리저리 돌려봤다.

그걸 보고 있던 유형원이 못 참겠는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물었다.

“어떤 것 같나?”

고개를 든 중년 사내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유형원과 장인들을 스윽 쳐다보고는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번에는 제대로 나온 것 같습니다.”

“정말인가?”

다급히 되묻는 유형원에게 벽돌을 보여 주며 중년 사내는 머리를 끄덕였다.

“예. 색깔도 제대로 나왔고 금이 간 곳이 하나도 없지 않습니까? 이 정도면 뜨거운 쇳물에도 거뜬히 견뎌 낼 겁니다.”

서른 번 넘게 벽돌을 구워 냈지만, 번번이 엄청난 열기를 견디지 못하고 부서지거나 금이 가는 실패를 계속 반복했는데, 몸과 마음이 다 지쳐 갈 때쯤 드디어 성공했다고 하자 유형원은 양반 체면도 잊고 크게 기뻐했다.

“하하하! 정말 수고 많았네.”

“도감 어른도 고생하셨습니다.”

“우와아! 완성이다.”

“드디어 해냈다.”

주위에 있던 장인들도 주체할 수 없는 기쁨에 양손을 번쩍 들어 올리고 환호성을 내질렀다.

용광로 건설에 꼭 필요한 내화벽돌을 만들어 냈다는 소식에 크게 기뻐한 도현은 와벽장들을 대궐로 불러 치하한 뒤 상금을 푸짐하게 내렸다.

그렇게 준비가 모두 끝나자 길일을 택해 천지신명께 제祭를 올리고는 본격적으로 제철소 공사를 시작했다.

이날에는 도현이 직접 대소신료들을 대동하고 참석해 하늘에 일꾼들의 안전과 사고 없이 공사가 끝나기를 기원했다.

“자! 힘껏 당겨.”

“으싸!”

쿵! 쿵!

호령과 함께 일꾼들이 굵은 동아줄을 잡아당기자 커다란 바위돌이 위로 들어 올라갔다가 떨어졌다.

건물을 세우기 전에 바닥 다지기를 하는 것인데, 워낙 부지가 넓다 보니 여러 군데서 똑같은 작업이 동시에 진행됐다.

그리고 한쪽에서는 대형 가마 세 개가 만들어져 굴뚝에서 시꺼먼 연기를 피워 올리며 쉴 새 없이 내화벽돌을 구워 냈다.

한여름이라 가뜩이나 날씨도 더운 데다 장작을 때는 가마 앞은 피부가 시뻘겋게 익어 갈 만큼 후끈거렸기에, 와벽장들은 웃통을 다 벗고 상체를 드러낸 채 땀에 흠뻑 젖어 일을 했다.

“화력이 안 줄도록 장작을 더 넣어.”

“예.”

우두머리인 중년 사내의 호통에 장인들은 얼른 옆에 쌓아 둔 장작더미를 한 아름씩 안고 와서 가마에 채워 넣었다.

이런 가운데 제철소 건설에 지대한 관심이 가지고 있는 도현은 제가 끝났는데도 대궐로 돌아가지 않고 이틀째 제물포에 머물며 공사 현장을 둘러보고 있었다.

“저기가 용광로를 세울 자리라고 했지?”

칠현이 양팔을 벌려 펼친 설계도면을 보며 도현이 묻자 옆에서 수행하고 있던 유형원이 얼른 대답했다.

“그렇사옵니다.”

“이만 근이 넘는 용광로가 세워지면 땅에 하중이 많이 갈 텐데, 지반은 튼튼한가?”

아무래도 바닷가에 인접한 곳이다 보니 땅이 조금 물렀는데, 도현은 혹시나 용광로를 짓고 난 뒤에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침하가 될까 봐 걱정됐다.

수천 도에 달하는 쇳물이 담긴 용광로에 침하로 금이 약간이라도 간다면 바로 엄청난 대형 사고로 이어지는 거였다.

“무게를 감안해서 부지 중 제일 땅이 튼튼한 곳을 골랐고 바닥 다지기도 더 신경 써서 하고 있사옵니다.”

“흐음.”

나름 침하가 일어나지 않도록 조치를 취하고 있었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지 약간 눈가를 찡그리던 도현은 이내 진지한 말투로 이야기를 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긴 쇠기둥을 땅에 박아 넣도록 하게.”

“쇠기둥이라고 하셨사옵니까?”

생전 처음 들어 보는 방법에 유형원뿐만 아니라 뒤에 서 있던 도감 관리들도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 구조물을 세울 자리에 긴 쇠기둥을 박아 두면 땅이 단단해지지. 집을 튼튼하게 하기 위해서 기둥을 세우는 것처럼 말이야.”

적절히 예를 들며 설명하자 그때야 유형원과 관리들은 이해가 되는지 짧게 감탄성을 내뱉으며 머리를 끄덕였다.

“아.”

“그런 방법이 있었군요.”

“건축에 대해서도 해박하시다니 대단하옵니다.”

회귀 전 공사장에서 건물을 올리기 전에 철제 파일을 박는 걸 떠올리고 이야기를 했을 뿐인데, 엄지손가락을 추켜들면서 신하들이 존경스러운 눈빛을 보내자 도현은 내심 쑥스러운 마음이 들었으나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했다.

“가장 핵심인 용광로가 불안하면 안 되니 쇠기둥을 촘촘히 박아서 지반을 확실히 다지도록 하게.”

“알겠사옵니다.”

“철광석을 쌓아 둘 야적장은 어딘가?”

“이쪽입니다.”

그 뒤로도 한참 동안 공사 현장을 둘러보며 진행 상황을 점검한 도현은, 저녁에 제철도감 관리와 장인 우두머리들을 불러 거하게 잔치를 베풀어 주고는 다음 날 도성으로 돌아갔다.

한편 제철소가 제대로 돌아가려면 원료인 철광석과 역청탄의 수급이 원활해야 했기에, 도현은 주작단의 보호하에 뛰어난 탐광 기술자들을 함경도와 간도 일대로 보내 필요한 광산을 찾도록 했다.

광맥 탐사라는 것이 열에 아홉은 실패할 정도로 상당히 어려운 작업이었는데, 그나마 회귀 전 지식을 이용해 대략적인 위치를 찍어 줬기에 기술자들이 모래사장에서 바늘을 찾는 개고생은 하지 않아도 됐다.

그래도 워낙 지역이 광범위하고 아무 데나 땅을 판다고 원하는 광물이 나오는 건 아니어서 주작단 단원과 기술자 들은 노숙을 하며 발이 부르트도록 험한 산을 헤매고 다녀야만 했다.

무더운 여름이 지나고 북쪽에서 찬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올 때쯤 그 결과물이 나왔다.

“이건가?”

“그렇사옵니다.”

이완이 가져온 보자기를 풀자 탐광 기술자들이 힘들게 캐 온 광석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도 직접 본 적은 없었지만 회귀 전 책에서 읽은 대로 암흑색에 유리 광택이 나는 것이 역청탄이 분명해 보였다.

하지만 실수가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기에 도현은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불을 붙여 봐.”

“예.”

일반 석탄과 역청탄을 구분하는 또 다른 특징들이 불을 붙이면 긴 불꽃을 내고 특유의 악취가 섞인 매연이 나온다는 거였다.

한쪽에 시립해 있던 칠현이 작은 화로를 가져오자 이완은 작은 망치를 꺼내 도현이 보는 데서 광석 일부를 쪼개서는 화로 안에 넣었다.

화르륵.

그러자 얼마 안 있어 광석 조각에 불이 옮겨붙으며 타올랐는데, 역청탄의 특징이 모두 나타났다.

그걸 확인한 도현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오! 제대로 찾았군.”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그게 뭔가?”

“광석을 찾아낸 곳이 장백산 너머 만주 땅이옵니다.”

“으음.”

비교적 석탄 자원이 풍부한 조선이었지만 제철 산업의 핵심인 역청탄은 거의 없다는 걸 이미 알고 있던 도현은 담담한 얼굴로 이야기를 했다.

“청국의 영역 안인가?”

“그게 애매합니다.”

“자세히 설명해 봐.”

“만주 전체를 청국이 자기 영토라고 하지만 구석구석까지 통제력이 미치지 못하고, 실질적으로 광산이 발견된 곳에서 터전을 일구고 살아가는 자들은 거란족입니다.”

사실 현재 만주는 무주공산이나 마찬가지였다.

스스로 만주족이라 부르며 자신들이 태동한 조상의 땅이라고 말하지만 만주는 거란족을 비롯한 여러 유목 민족들이 얽히고설킨 채 살아가는 공간이었다.

그나마 후금이었을 때는 심양을 도읍으로 해서 만주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했지만, 산해관과 북경을 차례로 함락시키고 중원으로 국가의 중심이 옮겨 가자 상대적으로 통제력과 관심이 많이 떨어졌다.

아무리 그래도 청국의 허락 없이 몰래 광산을 개발했다가 자칫 들키기라도 하면 전쟁이 벌어질 수도 있는 아주 민감한 문제였다.

그렇다고 청나라에 광산 개발을 허락받는 것도 어려웠는데, 겉으로는 태연한 척해도 조선을 경계하는 상대에게 오히려 꼬투리를 제공해 애써 추진하고 있는 모든 계획들이 성과를 내기도 전에 수포로 돌아갈 수도 있었다.

“그렇단 말이지.”

한쪽 손으로 턱을 매만지며 잠시 고심하던 도현은 이내 결정을 내렸는지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지시를 내렸다.

“이제 와서 멈출 수는 없어. 거란족이라면 소금 거래를 하며 봉황상단과 사이가 좋으니, 장 총관을 통해 역청탄 광산이 위치한 곳을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지 은밀히 의사를 타진해 보라고 해.”

내심 청나라와 충돌을 우려해 광산 개발을 포기하거나 다른 곳을 알아볼 거라 생각했던 이완은 의외의 결정에 깜짝 놀라 말했다.

“청국과 전쟁이 벌어질 수도 있사옵니다.”

당황한 이완과 달리 도현은 차분한 얼굴로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며 이야기를 했다.

“알고 있네.”

“그런데 왜…….”

“여기서 멈추면 죽도 밥도 안 돼. 지난번 왜국에서 유황을 몰래 가져왔을 때처럼 대업을 이루기 위해서는 과감한 결단이 필요해.”

“그럼 조금 더 탐광을 해서 다른 광산을 찾아보는 건 어떻사옵니까?”

이완의 말에 도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루가 다르게 청나라의 힘이 강성해지고 있는 상황에 머뭇거릴 여유 따위는 없어. 그리고 무엇보다 제물포에 짓고 있는 제철소가 완공되기 전에 광산 개발을 끝내기 위해서는 시간이 촉박하다는 걸 경도 잘 알고 있지 않나.”

“하지만…….”

알아듣게 설명을 했지만 여전히 이완이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으며 머뭇거리자 도현은 단호한 어투로 말했다.

“지금 과감하게 움직이지 않으면 영원히 청국을 넘어설 수 없어. 날 믿고 지시한 대로 일을 추진하도록 하게.”

도현이 이렇게까지 말하자 신중한 태도를 보이던 이완도 고개를 끄덕이며 더 이상 반대를 하지 않았다.

“알겠사옵니다.”

“청나라가 광산의 존재를 늦게 알수록 우리한테 유리하니 봉황상단과 협조해 최대한 감춰야 될 것이야.”

“명심하겠사옵니다.”

“좋아.”

얼마 뒤 광산 확보 임무를 맡은 일단의 무리가 한양을 떠나 두만강을 넘어갔다.

“여기서부터 초흐타 부족의 영역입니다.”

거란족과의 밀거래를 전담하며 큰 성과를 내 행수로 승진한 오삼돌의 이야기에 말 머리를 나란히 하고 가던 건장한 덩치의 사내가 고개를 들어 앞을 쳐다봤다.

놀랍게도 붉은색 무복에 장검을 허리에 찬 사내는 주작단 단장인 이완이었다.

자칫 청국과 전쟁이 벌어질 수도 있는 아주 중요한 임무인 만큼 부하를 보내지 않고 이완이 직접 나선 거였다.

“오 행수는 여길 자주 와 봤겠군.”

“거래 때문에 두 달에 한 번은 꼭 오니까요.”

“청나라와 이들의 관계는 어떤가?”

“글쎄요.”

잠시 생각하는 듯한 표정을 짓던 오삼돌은 이내 이완을 보며 이야기를 이었다.

“같은 유목민족이기는 하지만 서로 원수라고 생각하시면 될 겁니다.”

“그 정도로 사이가 나쁘단 말인가?”

“대대로 같은 영역 안에서 가축을 키우며 떠돌아다니는 유목 생활을 하다 보니, 초지를 두고 반목과 약탈을 계속 이어 온 데다 무엇보다 거란족이 세운 통일 왕조인 요나라가 바로 여진족이 일으킨 금에 멸망을 당했으니, 청나라와 감정이 좋을 수가 없지요.”

“그렇군.”

청나라 몰래 일을 벌여야 되는 이완 입장에서 양쪽의 관계가 나쁘다는 건 아주 좋은 징조였다.

이완은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하며 대상 행렬이 움직이는 대로 천천히 말을 몰았다.

그렇게 두 시진가량을 더 이동하자, 황량한 초원 한가운데 거대한 녹주(오하시스)가 거짓말처럼 나타났고 그 주위로 가축 떼와 유목민 특유의 천막들이 수없이 펼쳐져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예상했던 것보다 부족 규모가 큰 걸 보고 이완은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대단하군.”

“원래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저희하고 소금과 곡식을 거래하면서 차츰 주변 소규모 부족들을 흡수해 이렇게 규모가 커졌습니다.”

설명을 들은 이완은 대충 이해가 간다는 듯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때 오하시스 방향에서 일단의 기마가 뿌연 먼지구름을 피워 올리면서 이쪽으로 달려왔다.

아무리 우호적인 부족이라고 해도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 아무도 몰랐기에 상단 호위 무사들은 접근하는 상대를 주시하며 언제든지 무기를 뽑을 수 있게 준비했다.

“워워!”

고삐를 당기며 말을 멈춰 세운 초흐타 부족 전사들은 다행히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는데, 그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사내는 오삼돌을 보고 마치 친형제처럼 반겼다.

“오 행수, 어서 오시오.”

“반갑습니다.”

오삼돌도 평소 친분이 있는지 얼굴 가득 미소를 짓고는 말을 앞으로 몰고 나가 사내와 악수를 나눴다.

사내는 야율호타라는 이름을 가진 자로 초흐타 부족장인 야율보기의 후계자이자 첫째 아들이었다.

“다음 달쯤에 오는 것 아니었소?”

“긴한 사정이 생겨서 이번에는 조금 당겨 왔습니다.”

오삼돌의 말에 야율호타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무슨 일이기에……?”

그러자 오삼돌이 힐끗 뒤에 있는 이완을 돌아보며 말했다.

“자세한 건 조금 이따가 부족장님을 뵈면 그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본능적으로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꾹 다물고 말 위에 앉아있는 이완과 관계된 일이라는 걸 알아차린 야율호타는 작게 머리를 끄덕였다.

“흐음. 알겠소. 마을까지 안내해 줄 테니 따라오시오.”

“예.”

마을은 처음 오삼돌이 찾아왔을 때와 비교해 확연히 달라져 있었는데, 말과 가죽을 받아 가는 대신 봉황상단에서 가져다준 곡식을 먹고 아이들이 포동포동 살이 올라 있었고, 옷도 짐승 가죽이 아니라 잘 짜인 천으로 해 입었다.

양옆에 늘어서 있는 게르를 지나 안쪽으로 들어가자 장정 스무 명도 거뜬히 수용할 수 있을 것 같은 커다란 천막이 나왔다.

“부족장의 게르입니다.”

구태여 설명을 해 주지 않아도 한눈에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장막을 걷고 앞장선 야율호타를 따라 오삼돌과 이완은 게르 안으로 들어갔다.

게르 내부는 예상보다 훨씬 넓었는데 비단 옷을 입고 허리에 단검을 찬 야율보기가 호랑이 가죽으로 만든 태사의에 앉아 있었고 양옆에는 부족 원로들이 자리했다.

오삼돌은 익숙한 동작으로 야율보기 앞에 서서 허리를 살짝 굽히며 먼저 인사를 했다.

“부족장님,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어서 오게. 호타한테 들으니 손님을 모셔 오셨다고 하던데, 뒤에 서 있는 사람인가?”

“그렇습니다.”

자연스럽게 좌중의 시선이 쏠리자 이완은 한 발자국 앞으로 나와서는 오삼돌과 같이 예를 갖추며 말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조선국에서 온 이완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 당상관 벼슬을 하고 계시는 높은 분입니다.”

오삼돌의 소개에 야율보기는 눈을 반짝이며 흥미로운 시선으로 이완을 한차례 훑어본 뒤 입을 열었다.

“초흐타 부족을 이끌고 있는 야율보기라고 하오.”

“초원에서 최고로 용맹한 전사들을 휘하에 두신 대부족장이시라고 들었는데,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이완의 칭찬에 야율보기는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과찬이오. 멀리서 귀한 손님들이 오셨는데 이렇게 세워 두는 건 예의가 아니지. 여봐라, 의자를 내 드려라.”

“예.”

한쪽에서 대기하고 있던 전사 두 명이 나무로 만든 의자를 가져오자 이완과 오삼돌은 사양하지 않고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부족 여인들이 시큼한 맛이 나는 마유주를 내왔다.

“속이 든든해질 테니 한번 마셔 보시오.”

“감사합니다.”

약간 거북스러운 느낌이 들었지만 이완은 내색하지 않고 거침없이 나무 잔에 든 마유주를 단번 죽 들이켰다.

“크으. 좋군요.”

그러자 야율보기가 손바닥으로 팔걸이를 가볍게 내려치며 기분 좋은 목소리로 말했다.

“높은 관리라고 해서 공자 왈 맹자 왈 골치 아픈 글이나 외운 샌님인 줄 알았더니 아니구먼. 우리 초흐타 부족에 잘 오셨소.”

아까와 달리 진심이 담긴 야율보기의 말에 이완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면서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부족장인 야율보기의 호감을 얻는 데는 성공했으니 일단 첫 단추는 잘 끼워졌다.

잠시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며 분위기를 푼 야율보기는, 한쪽 손에 마유주가 담긴 잔을 든 채 앞에 있는 이완은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조선국의 높은 관리가 이 먼 초원까지 고생을 마다하지 않고 온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테니, 어디 용건을 꺼내 보시오.”

야율보기의 말에 자세를 바로 한 이완은 사뭇 진지한 얼굴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실은 부족장님께 한 가지 부탁이 있어서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왔습니다.”

“부탁이라…… 그게 뭐요?”

“남동쪽 강 너머에 있는 늑대계곡에서 광석을 캐는 걸 허락해 주셨으면 합니다.”

뜻밖의 이야기에 야율보기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한쪽에 앉아 있는 아들을 봤다.

“늑대계곡이라면 그 불에 타는 검은 돌들이 종종 나오는 곳 아니냐?”

“맞습니다.”

야율보기는 시선을 다시 이완에게 돌리며 물었다.

“거기서 무슨 광석을 캔다는 것이오?”

어차피 광산을 개발하게 되면 다 알려질 일이었기에 이완은 숨기지 않고 대답했다.

“방금 말씀하신 검은 돌을 가져갈 겁니다.”

“장작 대신 쓰려고 해도 독한 연기가 나와서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돌인데 그걸 가져가서 뭘 하려는 게요?”

“대장간에서 쇠를 녹이는 연료로 쓸 생각입니다.”

“나무를 베서 쓰면 될 것을…….”

“저도 잘은 모르지만 장작보다 화력이 좋다고 하더군요.”

“하긴…….”

가끔씩 부족원들이 지표면 위로 드러난 역청탄을 주워 와 장작 대용으로 쓰기도 했기에 야율보기는 머리를 끄덕이며 수긍하는 표정을 지었다.

“오 행수의 얼굴을 봐서 허락해 주고 싶지만, 광산을 만들면 자연스럽게 땅이 파헤쳐질 것이고 그럼 소중한 가축들이 먹을 풀이 줄어들 테니 그건 어렵겠소.”

대화가 잘 풀리는 것 같았는데 뜻밖에도 야율보기가 거부 의사를 보이자, 이완은 약간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설득을 했다.

“초지가 훼손되지 않도록 최대한 조심해서 광석을 캘 겁니다.”

“그래도 썩 내키지 않는구려.”

유목 민족의 특성상 초원을 어머니의 품이라며 섬겼는데, 그런 소중한 땅을 함부로 건드리는 것에 야율보기는 물론이고 동석한 부족 원로들도 별로 탐탁지 않게 여겼다.

자칫 이대로 이야기를 끝내 버릴 것 같은 분위기에 이완은 서둘러 준비해 온 패를 꺼내 보였다.

“광산 개발을 허락해 주신다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지금도 충분하니 우린 더 필요한 것이 없소.”

“일단 한번 보시지요.”

옆에서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오삼돌도 이완을 거들고 나섰다.

“조건을 들어 본다고 손해 날 건 없지 않겠습니까?”

“흠…….”

그러자 오삼돌의 체면을 생각해서 야율보기는 못 이기는 척 머리를 끄덕였다.

“좋소. 어디 이야기해 보시오.”

“백문이 불여일견不如一見이라고 직접 보시지요.”

말을 한 이완이 눈짓을 하자 뒤편에 서 있던 주작단 단원이 게르 밖으로 나가 제법 묵직한 상자를 가져와 야율보기 앞에 내려놨다.

“이게 뭐요?”

“열어 보시죠.”

“…….”

뭔가 엄청 자신 있어 보이는 이완의 태도에 야율보기는 궁금증 가득한 얼굴로 아들인 야율호타를 보며 말했다.

“열어 봐라.”

“예.”

대답과 함께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 나온 야율호타는 거침없이 상자 뚜껑을 위로 들어 올렸다.

끼이이익.

“아니, 이건!”

상자 안에 들어 있는 건 장검과 갑옷 그리고 도끼, 창 같은 철제 무기류였다.

기껏해야 금이나 은을 예상했던 야율보기는 뜻밖의 물건에 눈을 동그랗게 치켜떴다.

“광산 개발을 허락해 주시면 보시는 무기들을 공급해 드리겠습니다.”

“그게 정말이오?”

솔깃한지 야율보기는 몸을 앞으로 당겨 앉으면서 물었다.

“제가 왜 부족장님께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이건 우리 조선국 주상 전하께서 직접 약속하시는 겁니다.”

“으음.”

이완이 임금인 도현까지 거론하자 야율보기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인 뒤 잠시 생각을 하다가 다시 입을 뗐다.

“무기는 얼마나 줄 수 있소?”

그러자 이완이 한결 여유로운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부족 전사들 모두를 무장시키고도 남을 정도는 될 겁니다.”

순간 야율보기의 눈이 번득이면서 탐욕이 가득 어렸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거란족 남자들은 타고난 전사에 사냥꾼이었지만, 대장 기술이 없어 제대로 무기를 갖추고 있는 자가 드물었다.

그래서 식량이 귀한 겨울철이나 가뭄에 강을 건너 조선 사람들이 사는 마을을 습격할 때마다 곡물도 훔쳐 갔지만 쇠붙이는 숟가락까지 다 싹싹 긁어 갔다.

교역을 해서 사냥한 짐승 가죽을 팔아 필요한 무기를 구입하면 되지 않겠냐고 간단히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그게 불가능했는데 조선은 말할 것도 없고 같은 유목민 출신인 청나라마저 거란족의 힘이 커질까 염려해 무기류의 거래를 일체 엄금하고 있었다.

이런 귀한 무기를 한두 개도 아니고 부족 전사들에게 다 돌아갈 만큼 주겠다고 하자, 솔깃해질 수밖에 없었다.

사실 도현이 이런 제안을 하라고 했을 때 내부적으로 반대가 심했는데, 거란족의 세가 강성해져서 만약의 경우 이들이 두만강을 넘어 국경 마을들을 습격하기라도 하면 함경도와 평안도에 있는 군영으로 감당하지 못하는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었다.

이런 우려에 도현은 지난 두 번의 반란과 남해도 원정에서 성능을 확실히 검증한 신형 조총을 국경 지대를 지키는 군영에 우선 배치하면 거란족 기병을 충분히 막아 낼 수 있다며 걱정을 일축했다.

“잠시 우리끼리 논의를 해 봐야 될 것 같으니 미안하지만 두 사람은 자리를 좀 비켜 주시겠소.”

“그러시죠. 부디 좋은 결과가 나왔으면 합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이완은 의미심장한 말을 던지고는 오삼돌과 함께 게르를 나왔다.

밖으로 나온 오삼돌은 뒤를 힐끔 쳐다보고는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어떻게 될까요?”

“속단할 수는 없지만 부족장의 반응을 보니, 잘 풀릴 것 같군.”

“하긴 무기는 소금과 함께 거란족들이 애타게 원하는 물품이니까 쉽게 거절하지는 못할 겁니다.”

누구보다 거란족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오삼돌의 말에 이완은 머리를 끄덕였다.

오는 길에 가져온 물품을 풀고 평소처럼 거래를 하며 이틀을 기다리자, 드디어 결론이 났는지 두 사람은 다시 부족장의 부름을 받고 게르로 갔다.

게르 안으로 들어가자 약간 초췌한 얼굴의 야율보기가 두 사람을 맞이했는데 안색만 봐도 그동안 광산 문제를 두고 부족 수뇌들 간에 상당한 격론이 벌어졌다는 걸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이거,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오.”

“아닙니다.”

“일단 앉으시오.”

“예.”

비어 있는 의자에 두 사람이 착석하자 야율보기는 진지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했다.

“먼저 결론부터 말하면 늑대계곡에서 광산을 개발하는 걸 허락하기로 했소.”

됐다는 생각에 주먹을 꽉 움켜진 이완은 약간 들뜬 어조로 말했다.

“감사합니다.”

“아! 아직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으니 더 들어 보시오.”

“말씀하십시오.”

“그 대신 철제 무기와 별도로 소금과 곡식 교역량을 지금의 두 배로 늘려 주시오.”

“소금과 곡식을 말입니까?”

“어렵겠소?”

“그게…….”

민감한 문제였기에 이완이 선뜻 대답을 못 하자 야율보기는 단호한 어투로 이야기를 했다.

“이게 안 된다면 우리도 광산 개발을 허락할 수 없소.”

“…….”

뜻밖의 암초에 이완은 자신도 모르게 이맛살을 찡그렸다.

지금도 봉황상단하고 교역을 해서 들여온 소금과 곡식을 가지고 예전보다 두세 배나 세를 불렸는데, 여기서 물량이 더 늘어나면 자칫 초흐타 부족이 조선의 통제를 벗어나 버릴 위험이 있었다.

지금의 청이나 예전 요나라 그리고 원나라처럼 강력한 부족이 나와 유목민족을 통일하게 되면 그 저력이 엄청났기에, 조선 입장에서는 늑대를 쫓으려다 호랑이를 불러들이는 꼴이 될 수도 있었다.

이런 이유로 봉황상단도 초흐타 부족과 거래를 하며 물량을 세심하게 조절해 왔다.

정보와 각종 간계를 맡은 주작단 책임자로서 선뜻 내키는 상황은 아니었지만, 전권을 주며 무슨 일이 있어도 광산 개발을 성사시키라는 도현의 지시를 떠올린 이완은 한참을 망설이다 이내 무겁게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습니다. 대신 저희도 조건이 있습니다.”

“말해 보시오.”

“늑대계곡에서 저희가 무슨 일을 하든 간섭하지 않는 완전한 자유를 보장해 주시고, 청나라가 알지 못하게 비밀을 유지해 줬으면 합니다.”

조선과의 일이 청국 조정에 알려지면 초흐타 부족으로서도 좋을 것이 없었기에 마지막 조건은 문제가 없었지만, 거래 이후 늑대계곡에 대해 아무런 간섭도 하지 말라는 부분이 걸렸다.

하지만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는데 역청탄의 진정한 쓰임새를 모르는 야율보기가 생각하기에 잃는 것보다 얻는 게 더 많은 거래였기 때문이었다.

“알겠소.”

“그럼 바로 문서로 남기도록 하지요.”

“그럽시다.”

그 자리에서 이완은 준비해 온 지필묵으로 지금까지 합의한 내용이 들어간 협정서를 작성한 뒤 서로 지장을 찍고 한 장씩 나눠 가졌다.

“이제 골치 아픈 일도 다 끝났으니 거하게 술이나 한잔 합시다.”

술이라면 이완도 어디 가서 빠지지 않는 말술이었기에 빼지 않고 머리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하하하! 역시 호탕해서 마음에 드는군. 당장 술상을 내오도록 해라. 오늘은 어디, 코가 삐뚤어질 때까지 마셔 봐야겠다.”

“옛.”

잠시 뒤 부족 여인들이 독한 마유주와 방금 잡아서 장작에 구운 양고기를 가져왔고, 대낮부터 시작된 술판은 밤늦게까지 이어졌다.

이걸로 도현은 용광로를 가동하는 데 가장 중요한 재료 중 하나인 역청탄을 힘들게 확보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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