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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의 혼란 (43/104)

대륙의 혼란

조선시대 무武를 천시하던 선비들이 유일하게 즐기는 무예가 바로 궁도 즉 활쏘기였는데, 왕실에서도 역대 임금들이 가끔씩 활을 쏘며 심신을 단련했다.

도현도 국정에 지친 머리를 식히기 위해서 후원에 나와 활을 쏘고 있었다.

백 보 정도 떨어진 과녁을 잠시 바라보던 도현은 한쪽에 놓인 탁자에서 살을 하나 들어 활에 끼웠다.

가벼운 동작으로 활을 들어 올리며 시위를 팽팽하게 당긴 그는 정면에 있는 과녁 중심을 겨눴다.

활쏘기는 고도의 집중력과 근력을 요구하는 무예였는데 시위를 잡고 있는 그의 팔근육이 크게 부풀어 올랐다.

활대가 부러지기 직전까지 세게 당긴 도현은 한쪽 눈을 감고 과녁에 집중하고는 숨을 멈추며 잡고 있던 시위를 놨다.

팅.

쉬이이익.

맑은 소리를 내며 발사된 화살은 일직선을 그리며 곧장 앞으로 날아가 과녁에 꽂혔다.

그러자 과녁 뒤에 숨어 있던 위사가 나와 화살이 꽂힌 곳을 살펴보고는 손에 든 붉은색 깃발을 흔들며 크게 외쳤다.

“관중이오!”

“우와!”

“역시 전하셔.”

순간 주위에 늘어서 있던 위사와 궁인들이 감탄성을 내뱉었고 그도 만족한 표정으로 활을 내렸다.

“대단하십니다. 저도 열 발을 다 과녁 중심에 집어넣지는 못하는데, 정말 신궁神弓이 따로 없으십니다.”

옆에서 구경하던 신철 친위대장의 칭찬에 도현은 피식 미소를 지었다.

“신궁이라니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야.”

“아니옵니다. 한두 발은 몰라도 열 발은 절대 운이라고 할 수 없지요.”

“하하하. 아무튼 기분은 좋군.”

그사이 꽂혀 있는 화살을 다 수거해 깨끗해진 과녁을 보며 그가 다시 활을 쏘려고 할 때 관복을 입은 이완이 안으로 들어왔다.

“아니, 징지澄之 아닌가?”

도현이 친근하게 자신의 자를 부르자 이완은 허리를 굽혀 정중히 예를 갖추며 말했다.

“신 이완, 하교하신 일을 수행하고 방금 돌아왔사옵니다.”

“수고했네. 그래, 갔던 건 어떻게 됐나?”

바로 대답을 하지 않고 이완이 슬쩍 주위를 둘러보자 한쪽에 시립해 있던 칠현이 알아서 가까이 있는 궁인들을 뒤로 물렸다.

“야율보기에게 승낙을 받았사옵니다.”

원하던 대답에 도현은 밝은 표정을 지으며 기뻐했다.

“잘됐군. 정말 수고 많았어.”

“저, 그런데 저쪽에서 한 가지 조건을 더 걸었사옵니다.”

“요구 사항이 더 있었다고?”

“예.”

“그게 뭔가?”

잠시 머뭇거리던 이완은 그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했다.

“소금과 곡식 교역량을 지금보다 두 배 더 늘려 달라는 것이옵니다.”

“으음.”

대충 어찌 된 건지 상황을 파악한 도현은 의외로 화를 내지 않고 눈가를 찡그리고는 낮게 침음성만 흘렸다.

대신 함께 있던 신철 대장이 정색을 하며 말했다.

“고양이한테 생선을 맡기지. 그건 너무 위험한 일이옵니다. 청을 세운 누르하치도 건주여진의 보잘것없는 소부족 출신이었지 않습니까?”

“…….”

마치 이런 조건으로 협정을 맺고 온 자신을 질책하는 것 같아 입맛이 썼지만, 이완 스스로도 가장 걱정되는 부분이 그거였기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자 도현이 한쪽 손을 들어 흥분한 신철 대장을 진정시키고는 담담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조금 껄끄럽기는 하지만 그것보다 더 큰 걸 얻기 위해서 어쩔 수 없지.”

“전하!”

“신 대장이 뭘 걱정하는지 나도 잘 알고 있네. 하지만 무기까지 주는 마당에 소금과 곡식을 좀 더 넘겨준다고 대수겠나?”

“하오나…….”

“미리 겁먹을 것 없이 늑대 새끼가 자라서 우리 발목을 물지 못하도록 잘 관리하면 되는 거야. 이완 단장, 그럴 자신이 있겠지?”

도현의 물음에 이완은 머리를 숙이며 힘차게 대답했다.

“물론이옵니다.”

“그럼 됐어. 그것보다 이러면 북방 군영을 재편하는 작업을 서둘러야겠군.”

“안 그래도 그 문제로 조만간 병판께서 직접 북방 지역을 시찰을 떠나신다더군요.”

사전에 보고를 받은 내용이었지만 신철 대장의 이야기에 도현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남해도 원정을 다녀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병조판서가 고생이 많군.”

“그러게 말이옵니다.”

“칠현아.”

“말씀하시옵소서, 전하.”

“내의원에 일러 고생하는 병판에게 보약을 한 제 지어서 하사하도록 해.”

“알겠사옵니다.”

지시를 내린 도현은 다시 이완에게 시선을 돌리고는 부드럽게 이야기를 했다.

“내가 듣기로 이완 단장의 활 솜씨가 아주 뛰어나다고 하던데, 어디 오늘 한번 구경을 시켜 주게.”

“괜히 전하의 눈을 더럽힐까 두렵사옵니다.”

“사양치 말고 이리 와 실력을 보여 주게.”

“나도 소문으로만 듣던 이완 대장의 솜씨를 보고 싶소이다.”

재차 재촉을 하자 이완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한쪽에 놓여 있는 활 중에 하나를 골라 들었다.

그러고는 차분히 살을 먹인 활을 들어 시위를 당긴 뒤 눈을 가늘게 떠 과녁을 쳐다보다가 이내 손을 놨다.

슈우우웅.

순간 시위를 떠난 화살은 눈 깜짝할 사이에 과녁 중앙에 정확히 박혔다.

잠시 뒤 명중을 알리는 깃발을 위사가 흔드는 걸 보고 주위에 있던 궁인들이 탄성을 내뱉었다.

“와아.”

짝짝짝!

“대단한데.”

“과찬이시옵니다.”

옆에 있던 도현이 박수를 치면서 칭찬하자 이완은 살짝 허리를 숙이고는 겸손한 모습을 보였다.

“자네도 한번 쏴 보겠나?”

고개를 돌리며 도현이 묻자, 그렇지 않아도 이완이 솜씨를 뽐내는 걸 보고 손이 근질근질하던 신철이 얼른 대답을 하며 나섰다.

“예.”

“그럼 이렇게 하지. 두 사람이 번갈아 가며 다섯 발을 쏴서 가장 점수가 높은 쪽에 내가 비단 스무 필을 하사하지. 어떤가?”

“좋습니다.”

“저도 해 보겠사옵니다.”

갑작스러운 상황이었지만 무인으로서 은근히 지기 싫어하는 호승심이 발동한 둘은 빼지 않고 머리를 끄덕였다.

“좋아.”

잠시 뒤 새로운 과녁을 가져와 백 보 앞에 두 개가 나란히 세워지고 도현과 사람들이 흥미로운 얼굴로 지켜보는 가운데 둘을 대결이 시작됐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번갈아 가면서 총 다섯 발을 쏴서 저기 보이는 과녁 중간에 누가 많이 꽂아 넣느냐 하는 걸로 승부를 가리는 거야.”

“옛.”

둘은 서로 상대를 힐끗 쳐다보며 대답했다.

“누구부터 하겠나?”

그러자 신철이 이완을 보며 말했다.

“이 단장께서 먼저 하시지요.”

신철의 양보에 이완은 사양하지 않았다.

“고맙네.”

전통에서 화살을 꺼내 시위에 건 이완은 차분히 아래로 내렸던 활을 다시 들어 올렸다.

그리고 과녁을 똑바로 노려보며 시위를 끝까지 당겼다가 놨다.

피슝.

파공음을 울리며 날아간 화살을 그대로 과녁 정중앙에 촉을 박아 넣었다.

그러자 지켜보던 궁인들이 역시라며 고개를 끄덕였고 신철은 주위의 경탄성을 무심히 한 귀로 흘리며 곧바로 화살을 날렸다.

쉬익!

신철이 쏜 화살 역시 과녁에 있는 붉은 원에 꽂혀 들어갔다.

“이야!”

“두 사람 다 대단해.”

계속해서 두 사람은 한 번씩 번갈아 가며 화살을 쐈는데, 다섯 발 모두 제일 작은 원에 명중시킨 이완과 달리 신철은 두 발이 아쉽게 살짝 벗어난 곳에 꽂혔다.

마지막 화살을 날린 신철이 화살을 거두자 지켜보던 궁인들 모두 환호성을 내질렀다.

두 사람 다 이런 환호성을 받기에 충분한 궁술 실력을 보여 줬다는 것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제가 졌습니다.”

사내답게 신철이 깨끗이 패배를 인정하자 이완도 미소를 지으며 상대의 솜씨를 칭찬했다.

“신 대장의 솜씨도 훌륭했소.”

공개적인 장소에서 대결을 벌여 졌으니 불편함 감정이 남아 있을 만도 했지만, 신철에겐 그런 기색이 손톱만큼도 없었다.

휘하 무장들의 뛰어난 궁술 솜씨에 마음이 든든해지기도 했지만, 서로 앙금을 남기지 않는 모습에 더 기분이 좋아진 도현은 흡족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정말 좋은 구경을 했어.”

그러자 두 사람은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보잘것없는 실력으로 전하의 눈을 어지럽힌 건 아닌지 모르겠사옵니다.”

“하하하! 아닐세. 둘 다 정말 대단했어. 그런 의미에서 비록 졌지만 훌륭한 실력을 보여 준 신 대장한테도 비단 열 필을 상으로 내리겠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그 뒤로도 도현은 한참을 더 두 사람을 격려하며 환담을 나눴다.

협상이 체결됐다는 보고를 받자마자 도현은 제때 역청탄을 가져오기 위해 서둘러 후속 조치에 착수했다.

제일 먼저 일 차분으로 전사 오백 명을 완전무장시킬 수 있는 철제 무기를 초흐타 부족에 넘겨주면서 광산을 경비할 근위대 병력 사백과 인부 육백 명을 만주로 보냈다.

중앙군이자 국왕인 도현을 측근에서 지키는 근왕군勤王軍인 근위대 병력을 먼 만주까지 보내는 건 청나라에 광산의 존재가 새어 나가지 않게 보안을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인부 육백 명은 일부 광산 장인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지난번 남해도 원정 때 포로가 된 왜인들이었다.

이들 왜인 포로는 광산이 있는 늑대계곡에 갇혀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다시는 밖으로 나오기 힘들었다.

이와 동시에 이번 협정으로 더욱 세를 불릴 것이 확실한 초흐타 부족과 혹시 모를 청나라와의 충돌을 대비하기 위해 북방 군영들을 대대적으로 개혁하고 보강했다.

우선 일체감 없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군영들을 통합해 두 개 군단으로 나눴는데, 일 군단은 함경도를 맡고 평안도는 이 군단이 책임졌다.

한 개 군단 밑에는 세 개의 사단을 두고 각 사단은 모두 이만 명의 병사로 구성됐다.

기존의 둔전병이 아니라 이들은 징집병과 직업 군인들로 채워졌는데, 평소에도 농사 같은 건 일절 짓지 않고 군사훈련만 매진해 전보다 질적으로 훨씬 나아졌다.

대신 군영에 딸린 토지를 조정에서 관리하고 부대 운영에 필요한 경비는 병조에서 전부 지원을 해 줬다.

거기다 무장도 신형 조총과 각종 군수품 그리고 봉황상단에서 들여온 혈통 좋은 말을 근위대 다음으로 우선 보급받았다.

더불어서 왕실에서 자금을 모두 투자해 무산 철광산을 개발했다.

함경북도 무산에 위치한 철광산은 매장량이 무려 십칠억 톤에 달하는 초대형 광산이었는데, 광맥이 땅 위로 드러난 노천 광산이라 채굴하기도 용이했다.

원래 국왕이 처리하는 업무도 많았지만 여러 가지 개혁 작업을 진행하고 봉황상단 일까지 처리하다 보니 도현은 하루가 부족할 정도로 바빴다.

오늘도 식사할 여유도 없어 중식을 함께하며 북방 시찰을 하고 돌아온 병조판서 임경업에게 전력 증강 상황을 보고받고 있었다.

“신형 조총 보급은 얼마나 진행됐나?”

“칠백 정을 올려 보내 훈련 중이고 올해까지 병기창에서 생산되는 물량 중 일천 정을 일 군에 우선 보급할 계획이옵니다.”

“원하는 수준까지 총병을 늘리려면 아직 한참을 더 기다려야 되겠군.”

“그래도 하루에 열 정을 만들어 내는 게 고작이었던 처음보다는 생산량이 상당히 늘어난 것이옵니다.”

“그렇긴 하지. 아무튼 이 문제는 제철소가 완공돼서 철을 대량으로 생산해 낼 때까지는 답답해도 어쩔 수 없겠지. 그건 그렇고 기마병 육성은 어떤가?”

“거란족과 거래를 해서 들여오는 수량도 있고 작년부터 봉황상단에서 자체적으로 마장을 운영하면서 태어난 말들이 제법 돼서 현재 일 군과 이 군을 합쳐 육천 명의 기병을 새로 훈련시키고 있는 중입니다.”

임경업의 이야기에 그때서야 도현은 굳어 있던 표정을 조금 풀었다.

“그나마 기마의 보급은 빠르게 진행 중이라니 마음이 놓이는군.”

“하지만 말을 타는 데 익숙해지려면 상당한 훈련이 필요해서 제대로 전투력을 갖추려면 시간이 더 있어야 될 것이옵니다.”

“그렇겠지. 아무튼 급하다고 너무 서두르다 보면 체하는 법이니까 여유를 가지면서 병사들을 강병으로 탈바꿈시키도록 하시오.”

“명심하겠사옵니다.”

그렇게 한참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칠현이 낮은 목소리로 누가 찾아왔다는 걸 알렸다.

“이 단장이?”

“그러하옵니다.”

“들라 하게.”

“예.”

잠시 뒤 문이 열리며 관복을 입은 이완이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와 예를 갖추고는 먼저 와 있던 임경업에게도 살짝 눈인사를 했다.

“급한 일이라는 것이 뭔가?”

방석 위에 무릎을 꿇고 앉은 이완을 보며 도현은 다짜고짜 용건부터 물었다.

“방금 북경에서 급보가 도착했사옵니다.”

“북경이라고?”

“예.”

그러자 뭔가 집히는 것이 있는지 도현의 안색이 살짝 굳어졌다.

“예친왕이 드디어 명나라를 향해 칼을 뽑아 든 건가?”

“그렇사옵니다. 황제의 이름으로 남명을 멸망시킬 것을 천명하며 팔기군에 대대적인 소집령을 내렸다고 하옵니다.”

“결국 그렇게 되는군.”

이미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던 일이었지만 이걸로 인해 파생될 결과가 엄청났기에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허어.”

동석해 있던 임경업도 낮게 숨을 내뱉으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는 가운데 이완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원정에 동원되는 병력이 사십만이 넘는다고 하옵니다.”

“아무리 그래도 화북 지역을 완전히 비워 둘 수 없을 텐데 그렇게나 많이?”

청나라에서 순수 혈통이라 생각하는 만주족 인구가 아무리 많이 잡아도 채 이삼백만이 안 됐는데, 성인 남자라면 전부 타고난 전사라고 해도 최대로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잘해 봐야 육칠십만 남짓이었다.

이걸 감안한다면 화북 지역을 점령하며 지켜야 될 땅이 넓어졌고 적대적인 한족을 통제해야 되는데, 가용 병력을 절반 넘게 전장에 보낸다는 건 상당히 위험한 행동이었다.

“그중 절반은 새로 징집한 한족 병사와 한인팔기라고 하옵니다.”

“어쩐지.”

그제야 도현은 수긍이 된다는 듯이 머리를 작게 끄덕였다.

“북경을 함락시킨 것이 몇 년밖에 안 됐는데 한족 병력을 이십만 넘게 동원할 수 있다니, 예친왕의 수완이 대단하군.”

“그러게 말이옵니다.”

앞으로 북벌을 개시하면 지금 명나라를 치러 가는 한족 병력을 조선군이 상대해야 될 수도 있었기에 도현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아무리 우수한 무기와 전술을 쓴다고 해도 끝없이 계속 밀려오는 인해전술을 감당해 내기란 정말 어렵기 때문이었다.

머릿속으로 드는 상념을 떨쳐 낸 도현은 앞에 있는 이완을 보며 물었다.

“명나라는 어쩌고 있나?”

“지난번에 보고드린 것에서 크게 달라진 게 없사옵니다. 자연방벽인 양자강을 성벽 삼아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지만 통일된 지휘체계 없이 각 지방 유력 세력별로 나뉘어 있어서 제대로 청군을 막아 낼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그러자 도현은 이맛살을 찌푸리며 짧게 혀를 찼다.

“황궁까지 잃고 강남으로 허겁지겁 도망친 신세인데도 숭정제는 아직 정신을 못 차렸군.”

“그나마 전투력이 떨어지는 농민병이 태반이라고 해도 병력은 오십만이 넘어가니 숫자에서는 청나라에 밀리지 않는다는 걸 위안 삼을 뿐입니다.”

“그래 봤자 전세가 불리해지면 모래성처럼 힘없이 허물어질 병력 아닌가.”

“그렇지요.”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임경업이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하지만 기병이 주력인 청나라가 힘을 제대로 발휘하기 어려운 강을 끼고 전쟁을 벌여야 되니, 마냥 명나라에 불리하지는 않을 것이옵니다.”

임경업의 말에 도현은 제법 탐스럽게 자란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머리를 끄덕였다.

“하긴 그런 변수가 있지. 그래도 이 상태로는 오래 버티기 어려울 거야.”

“맞사옵니다.”

명나라의 운명을 회의적으로 보던 도현은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고개를 들어 이완에게 시선을 주며 말했다.

“지난번에 내가 지시한 건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

이완은 살짝 목소리를 낮추며 대답했다.

“단원들 모두 안전하게 자리를 잡고 반란 세력과 접촉에 성공했사옵니다.”

“오, 그거 다행이군. 그럼 언제 일을 벌이는 거지?”

“청국 조정이 대응하기 가장 어렵도록 원정군이 전선에 거의 도착했을 때 각지에서 반란 세력이 들고 일어날 계획입니다.”

조선이 한족 반란 세력을 은밀히 돕다니 자칫 외부로 새어 나가면 엄청난 파장을 몰고 올 이야기였지만, 군부 수장이자 도현의 최측근 중 하나로 이미 뻐꾸기 작전에 대해 대략적으로 알고 있던 임경업은 별로 놀라는 기색 없이 가만히 대화를 듣고 있었다.

“시기를 아주 적절히 선택했군.”

“청나라를 몰락시킬 수는 없어도 상당한 타격과 혼란을 줘서 한동안 남명을 공략하기는 어렵게 될 것이옵니다.”

이야기를 들은 도현은 아주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그것만 해도 어디야. 우리가 북벌 준비를 모두 끝낼 때까지 청나라가 중원을 통일하는 일이 일어나서는 절대 안 되니, 주작단에서 각별히 신경을 쓰도록 하게.”

“예.”

앞에 앉아 있는 두 사람과 시선을 맞춘 도현은 정색을 하며 입을 열었다.

“앞으로 몇 년이 조선의 미래를 결정하는 중요한 시기인 만큼 두 사람 모두 최선을 다해 각자 맡은 일을 해 주길 바라네.”

그러자 임경업과 이완은 상체를 숙이며 크게 대답했다.

“알겠사옵니다, 전하.”

산동반도山東半島는 예전부터 한반도와 가까워 양국 사이의 해상무역이 빈번하게 이루어지던 곳이었는데, 해금령 때문에 한동안 바닷길이 끊겨 있다가 최근 도현이 봉황상단에 이어 한양 시전상인들에게도 교역을 허가하면서 다시 활기를 되찾았다.

연태 포구도 그런 곳 중에 하나였는데 오늘도 조선에서 온 교역선이 두 척이나 들어와 상품을 내리고 각종 약재와 비단 그리고 곡식 같은 걸 실고 있었다.

“아침도 안 먹고 나왔나 뭐가 그렇게 느려 터져!”

“정오까지는 선창을 다 비워야 되니까 빨리들 움직여!”

“예.”

“으싸.”

상인의 호통이 크게 울려 퍼지는 선착장은 배에서 짐을 내리고 싣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 속에 익숙한 얼굴의 사내가 한 명 있었는데 바로 몇 달 전 뚝섬 사냥터에서 도현을 알현했던 주작단 조장 함길현이었다.

그사이 모습이 상당히 달라져 있었는데 수염도 기르고 한족 전통 복장을 입어 모르는 사람이 보면 조선인이라는 걸 전혀 모를 정도였다.

한가로워 보였지만 매의 눈빛으로 주위를 살피고 있는 함길현 앞으로 부하인 길천식이 다가와 귓속말을 했다.

“물건이 다 내려졌습니다.”

“어디 있나?”

“저기 보이는 수레에 실려 있는 것들입니다.”

길천식이 손을 들어 가리키는 곳을 보자 말이 끄는 수레 세 대에 나무 상자들이 가득 쌓여 있는 것이 보였다.

“가 보세.”

“예.”

수레 옆에는 또 다른 주작단 단원인 도석재가 일꾼 복장을 하고 서 있었는데, 품속에는 날카로운 비수가 숨겨져 있었다.

“열어 봐.”

주위에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한 함길현의 말에 도석재는 수레에 실려 있는 상자들 중에 하나를 재빨리 열었다.

끼익.

상자 안에는 상품이 상하지 않도록 채워 넣은 마른 짚과 함께 봉황상단에서 새로 만들어 상류층 부인들 사이에 인기를 끌고 있는 비누가 들어 있었다.

손을 집어넣어 조심스럽게 비누와 짚을 한쪽으로 치우자 밑에 몰래 깔아 둔 병장기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장검과 창, 도끼 같은 것들로 하나같이 중국식이었지만 주작단에 의해 은밀히 조선에서 만들어진 무기였다.

바로 한족 반란 세력을 지원하기 위한 무기들이었다.

누가 볼세라 얼른 다시 짚과 비누로 덮고 뚜껑까지 닫은 함길현은 살짝 고개를 옆으로 돌려 길천식을 보며 말했다.

“얼마나 들어왔지?”

“모두 마흔 상자고 이틀 뒤 한양 시전상인들이 운용하는 교역선으로 서른 상자가 더 들어올 겁니다.”

“좋았어. 포청의 눈에 걸리기 전에 어서 비밀 거점으로 옮겨 놔.”

“알겠습니다.”

짧게 대답한 길천식은 도석재와 함께 약간 떨어져서 주위를 경계하고 있던 다른 단원들을 불러 무기가 실린 수레를 끌고 선착장을 떠났다.

도현의 지시로 주작단이 비밀리에 추진하고 있는 일명 뻐꾸기 작전은, 청나라가 점령한 화북 지역의 한족 불만 세력을 뒤에서 은밀히 지원해 반란 봉기를 일으켜, 예친왕과 청국 조정이 외부로 시선을 돌리지 못하게 내부를 혼란에 빠뜨리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주작단은 반란 세력에 무기를 대거 지원하는 한편 단원을 직접 파견해 반군 병사들을 상대로 군사훈련까지 시켰다.

이걸 위해 상당한 자금이 소요됐지만, 청나라가 명을 멸망시키고 중원 대륙을 통일하는 것이 도현 입장에서는 더 심각한 문제였기에 과감하게 계획을 추진했다.

이렇게 반입된 무기들은 청국 조정의 눈을 피해서 점조직으로 이루어진 화북 지역 각지의 반란 세력에 몰래 흘러들어 갔다.

추수가 모두 끝난 10월 첫날, 이완이 도현에게 보고한 대로 섭정을 맡고 있는 예친왕이 직접 사십만 대군을 이끌고 명나라를 치기 위해 북경을 떠나 남하하기 시작했다.

말이 사십만이지 출정식을 끝내고 북경을 떠나는 것만 사흘이 걸렸고 병력과 보급 물자들이 길게 늘어선 행군 대열은 무려 일백 리에 걸쳐 이어졌다.

이로써 강남으로 피신해 겨우 명맥을 이어 가던 명나라 황실은 또다시 풍전등화의 운명이 됐다.

다급해진 명나라는 급히 원군을 요청하는 사신을 조선에 보냈다.

화창하게 날이 맑은 오후, 도현은 대궐 후원에서 모처럼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중전과 나란히 앉아 정자에서 잡담을 나누고 있자니 시중을 드는 궁녀들과 함께 이쪽으로 오는 연의 모습이 보였다.

“아바마마! 어마마마!”

아장거리며 이쪽으로 걸어오는 연의 모습이 귀여워 절로 얼굴에 미소를 떠올린 도현은 손을 벌려 아들을 번쩍 안아 들었다.

“어서 오너라. 어이쿠, 이젠 제법 무거운데?”

안으면 품 안에 쏙 들어왔던 아기 때가 아직도 눈에 선한 도현이 너스레를 떨자 중전이 밝게 웃으며 답했다.

“어릴 땐 잔병치레를 해서 걱정을 시키더니 지금은 너무 튼튼해서 탈입니다.”

“건강하면 좋지 뭐가 문제란 말이오?”

“사내아이라 그런지 기운이 넘쳐서 돌보는 궁녀들이 애를 먹는다고 하던데요.”

“하하. 정말 그러냐, 연아?”

도현의 물음에 연은 통통한 볼을 잔뜩 부풀렸다.

“궁녀들이 하는 놀이가 재미없으니까 그렇지요.”

“대체 무슨 놀이를 하기에?”

“아무래도 여자들이 많다 보니 손뼉을 치면서 하는 숨바꼭질이나 공기놀이 같은 걸 하는데, 연이는 그게 맘에 안 드나 봅니다.”

사정을 잘 아는 중전이 끼어들어서 답하자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내아이니까 그럴 법도 하지. 여자와 달리 사내들은 원래 몸으로 부딪히면서 구르고 달리고 하는 걸 좋아하거든.”

“맞아요! 그래서 저번에도 칼싸움을 하자고 했더니 비명을 지르면서 도망가더라고요. 진짜 검도 아니고 그냥 나무로 만든 목검이었는데 뭐가 그리 무서운지, 쳇.”

입술을 삐죽이며 불만스럽게 말하는 연을 도현은 웃으면서 토닥거렸다.

“그렇게 검을 휘두르는 게 좋으면 나중에 무술 선생이라도 하나 붙여 줘야겠구나.”

“와아! 정말요?”

“전하.”

마냥 기뻐하는 연과 달리 중전은 걱정스러운 기색을 띄웠다.

“아직 다섯 살밖에 안 됐는데 벌써 무술을 배우게 하는 건 너무 위험하지 않겠사옵니까.”

“지금 당장 배우게 한다는 말이 아니잖소. 참, 그러고 보니 글공부는 어떻게 하고 있느냐?”

갑자기 화제가 공부 쪽으로 흘러가자 연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꾹 다물어 버렸다.

“욘석, 왜 대답을 못 해?”

“어, 그게…….”

씨는 못 속인다고 딴청을 부리며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는 게 영락없이 도현이 궁지에 몰렸을 때 하는 행동이랑 똑같았다.

“네 하는 모양새를 보니 말하지 않아도 답을 알겠구나. 좋아, 그럼 책 한 권을 다 뗄 때까지 무술 수업은 보류다.”

“히잉.”

연이 한껏 실망한 표정을 지었지만 도현은 그래도 내심 뿌듯했다.

어딜 가나 다들 글공부만 중시해서 몸을 단련하는 건 간과하기 쉬운데 연이 무술 쪽에도 관심을 보이니, 문무 양쪽에 모두 뛰어난 사람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이루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제 다섯 살밖에 안 된 아이에게 너무 과도한 기대인가, 하는 생각에 가끔 쓴웃음을 지을 때도 있지만 자기도 모르게 내 자식은 특별할 거라고 믿고 있으니, 이게 부모 마음인가 싶었다.

“너무 그렇게 울상 짓지 마라. 내, 너한테 줄 선물까지 갖고 왔는데 자꾸 칭얼거릴 테냐?”

“선물요?”

귀가 쫑긋한 건 연뿐만 아니라 중전도 마찬가지였다.

“이번엔 또 무슨 신기한 물건을 가지고 오셨습니까?”

중전은 예전에 비누를 선물 받은 것이 어지간히 인상 깊었는지, 그 후로 도현이 뭘 들고 왔다 싶으면 잔뜩 기대를 품고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물어보게 되었다.

“여봐라.”

“네, 전하.”

칠현이 퍼뜩 눈치를 주자 대기하고 있던 내관이 정자 바깥으로 재빨리 달려 나갔다.

그리고 잠시 후, 위사가 고삐를 잡은 작은 망아지 한 마리가 나타나자 연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탄성을 올렸다.

“말이다! 아바마마, 저걸 선물로 주시는 거예요?”

“아무렴. 저 정도로 작은 망아지라면 기마 연습을 하기에 딱일 게야.”

“너무 큰 것 아닌가요? 혹시 말발굽에 차이기라도 하면…….”

“어차피 옆에 계속 위사나 내관이 붙어 다니면서 고삐를 잡아 줄 테니, 크게 다치는 일은 없을 거요. 중전은 여전히 잔걱정이 많군그래.”

“어미가 자식 걱정을 하는 건 당연한 일 아니옵니까?”

오히려 어린아이에게 냅다 망아지를 선물로 주는 게 더 이상하다는 듯 중전이 짐짓 눈을 흘겼다.

“저 타 볼래요! 아바마마, 한번 타 봐도 되지요?”

언제 정자 밑으로 내려갔는지 망아지 앞에 서서 폴짝폴짝 뛰는 연을 도현이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렇게 좋아하는데 너무 그러지 마시오, 중전.”

그러고 나서 도현이 허락한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위사가 조심스레 연을 안아 안장 위에 앉혔다.

“이렇게 고삐를 쥐시고 허리를 쭉 펴시면 됩니다. 갑자기 목을 끌어안거나 갈기를 잡아당기면 놀라서 날뛰니 조심하시고요.”

그 외에도 위사가 이것저것 주의 사항을 말해 줬지만 연은 말 위에 올라탄 것 자체가 너무 신기하고 좋은지 건성으로 응응, 하면서 귓등으로 흘려들었다.

“나 어떻게 하는지 알아! 가끔씩 궁에서 병사들이 말 타고 돌아다니는 거 봤는걸.”

그러면서 연은 흉내를 낸답시고 발을 탁탁 흔들다가 망아지의 엉덩이를 찰싹 두드렸다.

히이이잉!

“저, 저런!”

“얼른 고삐를 잡아!”

깜짝 놀란 망아지가 높은 울음소리를 내며 요동쳤고, 그 순간 연은 손에 잡은 끈을 놓쳐 버린 채 아래로 내동댕이쳐졌다.

털썩.

“전하, 괜찮으십니까!”

말발굽에 밟히는 참사를 피하기 위해 위사가 급히 망아지를 달래는 것과 동시에 기겁한 궁녀들이 한꺼번에 연 주위로 몰려들었다.

“연아!”

삽시간에 안색이 창백해진 중전이 벌떡 일어섰고, 도현 역시 눈을 크게 떴지만 이내 연이 혼자 일어서는 것을 보고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놈, 연아!”

도현이 엄한 표정으로 이름을 부르자 연은 잔뜩 기죽은 모양새로 힘없이 어깨를 떨었다.

“죄, 죄송해요.”

다행히 푹신한 흙바닥에 떨어져서 큰 상처는 없어 보였지만, 본인도 많이 놀랐을 텐데 용케 울음을 터트리지 않고 눈치를 보고 있는 게 대견스러웠다.

“조심해야지. 하마터면 큰일 날 뻔하지 않았느냐.”

“네에…….”

“저, 전하, 저는 가슴이 두근거려서 더 이상 못 보겠습니다. 얼른 저 망아지를 치워 버리셔요.”

“중전, 좀 참아 보시오.”

손을 토닥거려서 중전을 달랜 도현은 연을 가까이 불러 물었다.

“다친 덴 없어 보이는구나. 어때, 다시 도전해 보겠느냐?”

“저, 정말 그래도 되나요?”

“전하!”

“중전은 가만히 좀 계시오. 사내가 한번 칼을 빼 들었으면 무라도 썰어야지, 이대로 물러서면 우리 연이의 체면이 뭐가 되겠소. 그리고 앞으로 내 뒤를 이어서 조선의 군왕이 될 텐데 고작 이런 일로 겁을 먹고 포기한다면, 어찌 만백성들이 임금을 믿고 따를 수 있겠소.”

도현은 연의 눈을 똑바로 보고 다시 말했다.

“이번엔 주위에서 하는 말을 잘 듣고 알려 주는 대로 하는 거다. 알겠지?”

“네!”

연은 입술을 앙다물고 나름 결의가 가득한 표정으로 다시 망아지 위에 올라탔다.

“워. 워. 아까는 미안해. 깜짝 놀랐지?”

자기도 미안한 마음이 있었는지 갈기를 부드럽게 쓸어내리면서 친구 대하듯이 망아지를 달랜 연은 고삐를 잡고 있는 위사에게 다시 설명해 달라고 말했다.

처음엔 망아지 위에서 자세를 잡고 있는 것만 해도 위태위태해 보이더니, 차츰 균형을 잡는 요령을 알아채면서 도현을 향해 손을 흔드는 여유까지 보일 정도로 금방 승마에 익숙해졌다.

“하하! 녀석, 운동신경은 제법 있는 모양이로군.”

“아유, 전 무서워서 제대로 보지도 못하겠습니다.”

“그리 담이 약해서 어쩌려고 그러시오, 중전.”

“전하도 참 너무하셔요.”

하나밖에 없는 귀한 아들한테 위험한 일을 시켰다며 삐쳐 있는 중전과 달리, 도현은 연신 얼굴에서 미소를 지우지 못했다.

“전하.”

그렇게 한창 기분 좋게 떠들고 있는데 도승지가 다급히 정자로 올라와 도현에게 급한 소식을 알렸다.

“어서 대전으로 나가 보셔야 될 것 같사옵니다.”

오랜만에 가족과 보내는 시간을 방해받은 도현은 살짝 눈가를 찌푸리며 물었다.

“무슨 일인데 그러나?”

“명나라에서 사신이 왔다고 하옵니다.”

“뭐?”

자상한 아버지에서 순간 일국의 군주로 얼굴 표정을 뒤바꾼 도현은 잠시 아쉬운 듯 한창 연습 중인 연 쪽을 바라보더니 이내 자리에서 일어섰다.

“미안하오, 중전. 일이 생겨서 이만 가 봐야 할 것 같소.”

목소리 하나만으로 심상치 않음을 알아챈 중전은 함께 일어서서 그의 손을 맞잡았다.

“나랏일이 우선이지요. 얼른 가 보셔요.”

“음.”

서둘러 돌아서는 도현의 뒷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본 중전은 얕은 한숨을 쉬었다.

단 하루만이라도 아무 근심 걱정 없이 보내면 좋으련만.

대전에 들어서자 이미 연락을 받은 신료들이 모두 모여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왕좌로 가서 앉은 도현은 통신사로 왜국에 간 예조판서를 대신해 예조참판을 맡고 있는 박노에게 시선을 주며 물었다.

“갑자기 명나라 사신이 뭣 때문에 온 거요?”

“아무래도 지원병을 요청하러 온 것 같사옵니다.”

“으음.”

사신이 왔다는 이야기에 대충 짐작은 했지만 막상 일이 현실로 닥치자 도현은 이맛살을 찡그린 채 낮게 침음을 흘렸다.

신료들도 청나라가 대군을 일으켜 남진 중이라는 소식을 지난 대전 회의 때 들어서 알고 있었기에 다들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의외인 것인 대표적인 친명주의자인 송시열마저도 사신이 온 걸 그다지 반기지 않는다는 거였다.

“원군이라…….”

낮게 혼잣말을 중얼거린 도현은 대전에 앉아 있는 신료들을 천천히 훑어보며 말했다.

“경들의 생각은 어떻소?”

그러자 임경업이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명나라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한 건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렇다고 저희가 무리를 해서 전쟁에 끼어들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옵니다.”

“맞사옵니다. 자칫 잘못했다가는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꼴이 될 수도 있사옵니다.”

“신도 같은 생각이옵니다.”

왕당파에 속한 신하들이 줄을 지어 반대 의견을 내자 산당 쪽에서 곧 발끈하며 나섰다.

“그렇게 부정적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지 않소!”

“오히려 이번 기회에 명나라와 힘을 합쳐 북벌을 달성할 수도 있는 것 아니겠소.”

“맞소이다.”

특히 송시열과 같이 학문을 수학했고 산당을 이끄는 중추적인 인물 중 한 명인 형조판서 송준길宋浚吉은 아주 강한 어조로 원군 파병을 반대하는 왕당파를 비난했다.

“북벌을 해야 된다며 이런저런 일을 추진해 놓고 이제 절호의 기회가 왔는데 주저하는 건 앞뒤가 맞지 않는 행동이 아니오!”

힐난조의 이야기에 임경업은 얼굴을 살짝 붉히며 맞받아쳤다.

“말이 너무 심하지 않소. 아직 준비가 다 갖춰지지 않았는데 이렇게 떠밀리다시피 전쟁에 끼어들었다가 지난 병자호란처럼 우리 조선만 피해를 입게 되면 형판이 책임을 질 거요!”

“흥! 지난 몇 년간 수십만 냥의 돈을 써 가며 군비를 늘렸는데 아직도 준비가 부족하다니, 변명이 참으로 궁색하오이다.”

“뭐요!”

언성이 점점 높아지자 가만히 양쪽이 하는 꼴을 보고 있던 도현이 손바닥으로 팔걸이를 세게 내려치고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탕!

“모두 조용히 하시오! 경들 눈에는 짐이 보이지도 않소이까.”

“흐흠.”

“송구스럽사옵니다.”

대전에서 임금인 도현을 앞에 두고 신하들이 언성을 높인 건 불경스러운 일이었기에 두 사람은 황급히 머리를 조아렸다.

“서로 힘을 합쳐 나라의 안위를 걱정해도 부족할 이때에 당파를 나눠 다투기만 하다니 정말 실망스럽소!”

차갑게 질책한 도현은 잠시 말을 하지 않다가 딱딱하게 굳은 어투로 다시 입을 열었다.

“명과는 오랜 의리가 있지만 그건 지난 두 번의 호란을 겪은 걸로 충분히 되갚았다고 생각하오. 지금은 사사로운 정보다 국가 백년대계를 염두에 두고 움직일 때요.”

임경업을 비롯해 원군 파병을 반대한 왕당파의 손을 들어 주는 듯한 이야기에 송준길과 산당 쪽 인물들은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전하 순망치한脣亡齒寒이라고 했사옵니다. 자고로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린 법인데, 지금 이대로 명나라가 멸망당한다면 중원을 통일한 청국은 더욱 기고만장해져서 앞으로 저희 조선을 더 혹독하게 괴롭힐 것이옵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그러자 도현은 눈가를 찡그리며 언성을 높였다.

“경들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가! 청국이 대군을 일으켰다고 하지만 명도 양자강을 앞에 두고 단단히 대비를 하고 있기에 쉽게 결판이 나지 않을 것이고, 무엇보다 섭정인 예친왕이 전쟁을 벌이면서도 옛 황도인 심양에 팔기군 육만을 배치해 언제든 국경을 넘어올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다는 걸 잊지 말아야 될 걸세. 우리가 원병을 보내려고 결정하는 순간 이 병력이 압록강을 넘어 곧장 한양으로 밀고 내려올 것이 불을 보듯 뻔한데, 이건 어떻게 할 텐가?”

“…….”

날카로운 지적에 송준길과 산당 쪽 신료들은 대답이 궁해졌다.

그때 어쩐 일로 지금까지 가만히 입을 닫고 있던 송시열이 나섰다.

“전하, 신이 한 말씀 올려도 되겠사옵니까?”

“말해 보시오.”

“때가 안 좋다는 전하의 말씀은 신도 충분히 공감이 되옵니다. 허나 명이라는 든든한 우군을 잃으면 그만큼 저희의 처지가 힘들어지는 것도 사실이지 않사옵니까.”

“그래서 우상도 원병을 보내야 된다는 거요?”

“최소한의 성의는 보여야 되지 않겠사옵니까?”

나름 충신이자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이 큰 인물이었지만, 여전히 고리타분한 성리학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송시열의 모습에 도현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방 유림에 상당한 영향력을 끼치는 송시열과 송준길 같은 신료들이 자신을 적극 도와준다면 그가 추구하는 부국강병을 보다 빨리 이뤄 낼 수 있을 텐데, 성리학에 갇혀 좁은 사고를 하는 것이 너무나도 안타까웠다.

그렇다고 송시열과 산당을 함부로 내칠 수도 없었는데 그러면 국정을 운영하기는 쉬워질지 몰라도 아직 조선을 구성하는 거대한 세력인 유림과의 관계가 더 나빠질 것이 불을 보듯 뻔했다.

“옛 속담에 오얏나무 아래에서 갓을 고쳐 쓰지 말라[李下不整冠]고 했소. 도와줄 거면 나라의 운명을 걸든지 아니면 아예 딱 잘라야지, 이것도 저것도 아니고 어중간한 태도를 취하면 양쪽 모두에게 원망과 의심을 들을 거요. 지난 병자호란도 우리가 어정쩡한 모습을 보이니 청나라가 예방 차원에서 먼저 쳐들어온 거 아니오.”

도현은 송시열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이야기를 이었다.

“경은 우리가 이런 위험을 모두 감수하고 명을 도와야 된다고 생각하는 거요?”

다그치듯 도현이 묻자 잠시 침묵을 지키던 송시열은 고개를 살짝 저으며 대답했다.

“제 생각이 짧았사옵니다.”

송시열이 이렇게 맥없이 물러설 줄은 미처 예상 못 했던 산당 쪽 인물들은 깜짝 놀란 반응을 보였다.

“아니.”

“우상 대감…….”

약간 의외였지만 도현은 송시열도 그렇게 꽉 막힌 인물은 아니라는 걸 새삼 깨달으며 입을 열어 술렁거리는 신료들을 환기시키면서 결론의 내렸다.

“명나라의 원병 요청은 거절하는 것으로 하겠소. 타국의 사신 앞에서 국론이 분열되어 우리끼리 다투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것만큼 꼴사나운 게 없으니, 지금부터 이 문제는 더 이상 거론하지 마시오. 이건 어명이오!”

송준길과 산당 쪽 신료들이 약간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도현이 어명이라며 재빨리 못을 박아 버리자 더 이상 말을 꺼낼 수 없었다.

“오늘 대전 회의는 이걸로 끝내겠소.”

회의를 끝낸 도현은 왕좌에서 일어나 먼저 대전을 나갔고 뒤에 남은 신료들은 친분이 있는 사람들 끼리 삼삼오오 모여 이번 일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특히 산당에 속하는 신료들은 잔뜩 화가 난 얼굴로 자리를 옮겨 갑자기 입장을 바꾼 송시열에게 왜 그랬는지 이유를 따졌다.

“더 강하게 주장을 펼쳐도 모자랄 판에 거기서 물러서다니 도대체 왜 그런 것이오!”

품계는 한 단계 낮았지만 함께 수학을 했고 평소 친분이 두터운 송준길은 배신감까지 느끼는지,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역정을 내며 추궁하듯 말했다.

그러자 송시열은 친우인 송준길과 같은 당파 인사들의 격렬한 반응에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비교적 담담한 어투로 입을 열었다.

“나라고 어찌 상국인 명을 돕고 싶지 않았겠나.”

“그런데 왜 그딴 소리를 한 게야?”

“명나라에 아무리 많은 은혜를 입었다고 해도 나라를 멸망의 구렁텅이로 몰아갈 수는 없지 않겠나.”

“뭐야!”

“자네들도 잠시 화를 가라앉히고 잘들 생각해 보게. 이번에 원병을 보내면 우리가 얻는 것이 뭐가 있겠나?”

“…….”

“상국인 명을 도왔다는 체면이야 살겠지만 바로 청나라의 분노를 사서 병자호란과 같은 전란에 휩싸이게 될 걸세.”

얼마 전 있었던 남해도 원정의 승리로 많이 희석됐지만, 그래도 병자호란의 참혹했던 기억이 머릿속에 또렷이 남아 있는 신료들은 침음을 흘리며 딱딱하게 얼굴을 굳혔다.

“그건 전하께서 우릴 겁주기 위해 하시는 말씀이 아닌가?”

“자네,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송시열이 눈을 똑바로 마주하면서 묻자 비딱한 태도를 보이던 송준길은 일순 말문이 막혔다.

“으음.”

그건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는데, 도현이 경각심을 심어 주기 위해 일부러 청나라가 만주에 얼마나 많은 병력을 배치해 놨고 중원에서 양국 사이에 벌어지고 있는 일을 수시로 이야기해 줬기에, 그저 단순히 겁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건 인식하고 있었다.

“명나라의 사정이 딱하지만 이번에는 전하의 말씀이 옳은 것 같네.”

이야기를 들어 보니 틀린 소리가 아니었기에 송준길과 신료들은 그다지 내키지 않은 얼굴을 하면서도 더 이상 화를 내지는 않았다.

아무리 성리학의 가르침을 따르고 명나라를 상국으로 섬긴다고 하지만, 조선이 무너지면 자신들도 없다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한편 대전을 나선 도현은 희정당으로 돌아와 있었는데, 보료 위에 앉아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그에게 차를 올리면서 칠현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우의정께서 그렇게 순순히 전하의 말씀을 따르다니, 정말 의외였사옵니다.”

상념에서 깨어난 도현은 서탁 위에 놓인 찻잔은 집어 들며 말했다.

“원군을 보내 봤자 아무런 이득이 없다는 걸 우상도 알아차린 거겠지. 아무리 그래도 꼬장꼬장한 사람이 그런 모습을 보이다니 조금 놀라기는 했어.”

“그러게 말이옵니다.”

“아무튼 이걸로 원군 파병 문제를 가지고 우리끼리 다투는 일은 없을 테니 한시름 놨어.”

“하지만 명나라 사신을 달래는 문제가 아직 남았지 않사옵니까?”

“우리가 못 보내겠다는데 제들이 어쩔 거야. 뭐, 미우나 고우나 그동안 함께해 온 정을 생각해 매몰차게 거절하지는 못하고 살살 달래기는 해야 되겠지.”

“아무래도 그러는 것이 좋겠지요.”

자칫 왕당파와 산당의 감정싸움으로 번질 수도 있었던 일이 의외로 쉽게 해결된 것도 기뻤지만, 무엇보다 도현을 흡족하게 한 건 지금까지 무조건적인 사대주의에 빠져 있던 신료들이 조금이지만 변화하기 시작했다는 거였다.

이건 뜻이 잘 안 맞더라도 조선의 지식층을 이루고 있는 유림을 어찌 됐던 최대한 끌어안고 가야 하는 도현에게 상당히 긍정적인 신호였다.

그동안 명나라 사신에게 조선은 말 그대로 호구였다.

오죽했으면 사신이 한 번 올 때마다 대놓고 요구하는 뇌물을 챙겨 주느라 국고가 바닥 나 조정이 휘청거릴 정도였다.

이러니 명나라 관리들 사이에서는 조선에 사신으로 가서 한몫 챙겨 오지 못하면 바보 천치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번에 사신으로 온 명나라 관리인 유정국도 상황이 바뀌어 황성인 북경마저 잃고 강남으로 쫓겨 간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이런 생각을 버리지 못한 채 턱을 치켜들고 거만하게 행동했다.

입장을 정리하기 위해 알현을 잠시 미루고 영빈관에 머물게 하는 동안 온갖 진수성찬을 가져다줘도 괜한 트집을 잡아 밥상을 엎어 버리질 않나, 툭하면 잔치를 열어 달라거나 잠자리 시중을 들 여인을 넣어 달라며 진상을 부렸다.

그러자 접대를 맡은 예조참판 박노가 참다못해 도현을 찾아와 하소연을 했다.

“아무리 상국에서 온 사신이라고 하지만 이건 해도 해도 너무한 것 같사옵니다.”

이야기를 들은 도현은 미간을 좁히며 짧게 혀를 찼다.

“쯧. 애걸복걸 도와 달라고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매달려도 모자랄 판에 예전 영화를 잊지 못하고 안하무인으로 행동하다니 명나라의 운도 이제 다 됐군.”

“그러게 말이옵니다.”

사신한테 쌓인 것이 많은지 왕당파 중에서도 비교적 명나라에 우호적인 박노였지만, 거침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산당 쪽 사람들의 반응은 어떤가?”

“그쪽도 호판을 비롯한 몇몇 인물들이 먼저 찾아가 인사를 나누며 잘 지내는 것 같더니, 고압적인 사신의 태도와 무리한 요구에 학을 떼고 있사옵니다.”

“그렇단 말이지.”

대놓고 웃지는 못했지만 도현은 사대주의에 빠져 자신보다 명나라 황제를 더 떠받들더니 꼴좋다며 내심 고소를 지었다.

“이번 일로 신료들이 명나라에 대해 가지고 있는 환상이 조금이나마 깨졌으면 좋겠군.”

“갈수록 행패가 심해지는데 언제까지 알현을 미루실 것이옵니까?”

박노의 물음에 잠시 턱을 매만지며 생각을 하던 도현은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사신이 술을 즐긴다고 했지?”

“말도 마시옵소서. 얼마나 많이 마시는지 매일 인사불성이 된다고 하옵니다.”

“그래.”

눈을 반짝이면서 고개를 끄덕인 도현은 입가에 묘한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를 이었다.

“조만간 알현을 할 테니 경은 너무 걱정 말고 그만 가 보도록 하게.”

“알겠사옵니다.”

박노가 물러나자 도현은 한쪽에 시립해 있는 칠현을 손짓으로 불렀다.

“이리 가까이 와 봐.”

“예.”

칠현이 가까이 와서 앉자 도현은 목소리를 낮추며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잘 듣고 그대로 실행하도록 해.”

“……네.”

이번엔 또 무슨 얼토당토않은 계획을 머릿속에 품고 있는지 영 걱정된다는 표정으로 칠현이 귀를 기울였다.

띵띵! 띠리링.

“아하하하!”

“호호, 대인, 제 술잔도 받으시어요.”

사신이 도착한 날부터 풍악 소리가 떠날 일이 없는 영빈관에서는 오늘도 요란한 잔칫상이 차려 있었다.

“어디 보자, 한번 안아 보자. 이 요망한 것.”

낮부터 얼큰하게 취한 얼굴로 사신이 어깨를 끌어안자 옆자리에 앉아 있던 기생이 살짝 몸을 뒤틀었다.

“아이 참.”

“어이쿠. 흘기는 눈초리 하고는. 하하!”

하얀 얼굴에 입술을 붉게 칠한 기생이 싫은 척을 하면서 튕기자 유정국은 그게 더 안달이 나는지 연신 웃으며 허리를 잡아 가까이 당겼다.

“사람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하니, 네가 정녕 요물이로구나. 어디서 그런 재주를 익혔느냐?”

“다 제 팔자지 뭐겠습니까.”

기생은 유정국의 잔이 빈 것을 보고 눈치 빠르게 술을 따랐다.

“어릴 때 웬 땡 중이 와서 요 눈 밑의 점을 보더니, 글쎄 평생 사내를 홀릴 팔자라 하지 뭡니까.”

“뭐야?”

기생이 눈물 점을 가리키며 하는 말에 유정국은 유심히 얼굴을 살펴보더니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그래서 기생이 되기로 한 거로구만? 이제 보니 땡 중이 아니라 영험한 스님이었군.”

기분이 좋아진 유정국은 손에 쥐여 주는 술잔을 받아 들고 단숨에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그가 온갖 진상 짓을 해서 그런지 상 위에는 전국 팔도에서 진상되어 온 산해진미가 즐비했으며, 그가 물처럼 마셔 대는 술 역시 고관대작이 아니면 엄두도 내지 못하는 비싼 명주들뿐이었다.

몇 날 며칠이고 이어지는 술판에 사신과 함께 온 수행원들은 물론 호위들까지 술독에 빠진 지 오래라, 몇 명은 말석에서 기생의 치마폭에 폭 감싸여 코를 드르렁대는데, 그 소리가 방 바깥까지 들릴 정도로 요란했다.

그리고 그들이 먹고 마시는 데 질릴 때쯤엔, 하늘하늘 속이 보일 듯 말 듯 얇은 옷만을 걸친 기생들이 반주에 맞춰 춤을 추며 흥을 돋웠으니, 말 그대로 여기가 영빈관인지 아니면 기생집인지 모를 모양새였다.

“으음, 너무 많이 마셨나.”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흥청망청 마셔 대던 유정국이 어지러운 듯 눈을 껌벅거리자, 옆에서 교태를 부리던 기생이 무릎을 가볍게 탁 쳤다.

“무슨 말씀이셔요. 종일 마셔도 까딱없다며 큰소리치시던 분이, 설마 다 허풍이었다는 건 아니겠지요?”

“예끼! 내가 이래 봬도 술 마시기 내기를 해서 한 번도 져 본 적이 없는 사람이야. 이거 왜 이래?”

“그럼 아직 안 취했다는 증거를 보여 주셔야죠.”

“증거?”

영문을 몰라 하는 유정국 앞에 언제 꺼냈는지 기생이 붓과 먹을 들이댔다.

“여기 제 치마폭에 시 한 수 적어 주시와요.”

“에엥. 난데없이 시라니…….”

“조선은 물론이고 청나라에서도 높은 학식을 따를 자가 없는 대인이라면, 즉석에서 시 한 수 짓는 것 정도야 식은 죽 먹기 아니겠어요.”

“으음. 그거야 그렇지만.”

“아잉! 부탁이어요. 만약 그리해 주신다면 소녀 평생 대인이 제게 주신 사랑의 징표로 알고 소중히 간직하고 살겠나이다.”

취기로 어질어질한 정신에 여인의 교태까지 더해지니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던 유정국은 호기롭게 붓을 손에 들었다.

“좋아! 네가 그렇게까지 말하니 어찌 거절하겠느냐.”

“호호, 역시 대인이시라니까요!”

넓게 펼친 치마폭에 붓을 가져다 댄 유정국은 쿵작거리는 풍악 소리에 맞춰 몸을 흔들거리며 생각나는 대로 시구를 써 내려갔다.

“으음, 그러니까…… 이다음이…….”

초점이 제대로 안 맞는 눈을 연신 감았다 뜨는 사신의 행동에 기생은 붓을 쥔 팔을 똑바로 잡아 주며 말했다.

“자, 여기요. 조금 띄어서 이 아래에 계속 쓰시면 되옵니다.”

“허허, 그래그래.”

그리고 결국 시 한 수를 완성하자마자, 유정국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기생 치마폭에 푹 고꾸라졌다.

“대인? 대인.”

몸을 살짝 흔들어 보던 기생은 유정국이 도통 깰 기미가 없이 푹 잠든 것을 확인하고 슬쩍 치마를 빼냈다.

방에서 나가기 전에 주위를 살펴봤지만 이미 다들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었고, 누가 한눈을 팔 기미가 보이면 다른 기생들이 재빨리 달라붙어 정신을 못 차리게 만들었기 때문에 아무도 그녀가 자리를 뜨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문을 닫고 조심스레 밖으로 나온 기생이 짐짓 바람을 쐬러 나온 듯 머리를 매만지고 있자, 숨어서 기다리고 있던 칠현이 다가와 말을 건넸다.

“어떻게 됐느냐?”

“당연히 성공이지요.”

기생은 하얀 속치마가 드러나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끈을 풀어 사신이 쓴 시구가 적혀 있는 치맛자락을 칠현에게 건넸다.

“여자가 어디서 옷을 함부로 훌렁훌렁…….”

“됐네요. 그보다 약속한 대금부터 먼저 주시죠?”

내시 앞인데 뭐 가릴 게 있냐는 듯 당당한 기생의 표정에 칠현은 입술을 삐죽이면서 소매에서 금덩이가 든 비단 주머니를 꺼냈다.

“옜다.”

“호호, 감사합니다.”

“들키지 않게 잘했겠지?”

“한양 최고의 기생 앞에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이래 봬도 사내 혼을 빼 놓는 데는 선수니 걱정하지 마셔요.”

풍월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기생은 눈 밑의 눈물 점을 손끝으로 톡톡 두드리면서 낮게 웃었다.

영빈관을 빠져나온 칠현은 곧장 대궐로 돌아와서 시구가 적힌 비단 치마를 도현에게 바쳤다.

“이게 그거야?”

“예, 전하.”

“어디 보자.”

술에 취해 삐뚤삐뚤 엉망이었지만 누가 적은 건지 못 알아볼 정도는 아니었고 결정적으로 제일 마지막에 사신의 수결이 선명히 찍혀 있었다.

“후후후. 사신을 상대한 기생 이름이 뭐라고 있지?”

“풍월이옵니다.”

“아주 제대로 일을 했군. 혹시 이야기가 새어 나기지 않도록 입을 닫으라고 단단히 일러뒀겠지.”

“물론이옵니다.”

대답을 들으며 치맛단에 적힌 시를 천천히 살펴본 도현은 한쪽에 놓인 붓을 집어 들어 글자를 살짝 고치거나 빈 공간에 새로운 글귀를 적어 넣었다.

그러자 밤하늘에 뜬 밝은 달을 보며 흘러간 세월을 그리워하는 것이, 방탄한 행동으로 나라를 망친 숭정제를 비난하는 걸로 내용이 엄청나게 바뀌어 버렸다.

자신이 바꾼 시를 훑어보며 도현은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후후후. 내일 이걸 보고 명나라 사신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정말 궁금하군.”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던 칠현은 그걸 보고는 작게 한숨을 내쉬면서 못 말린다는 듯이 고개를 내저었다.

“으음…….”

질펀하게 술판을 벌이며 놀았던 유정국은 다음 날 머리가 깨질 듯한 숙취를 느끼며, 해가 중천에 떠서야 이부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만상을 찡그리며 상체를 겨우 일으킨 유정국은 손을 더듬어 머리맡에 놔둔 물그릇을 찾아 벌컥벌컥 들이켰다.

“크으. 이제 좀 살 것 같네.”

얼마나 목이 말랐는지 한 대접을 다 비운 유정국이 손등으로 입가에 묻은 물기를 닦고 있을 때 바깥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대인, 기침하셨습니까?”

“그래.”

그러자 명나라에서 함께 온 수행원 한 명이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드르륵.

“방금 전 대궐에서 전갈이 왔습니다.”

“뭐라고 하던가?”

“오후에 조선 국왕을 만나러 들어오라고 합니다.”

유정국은 뭔가 불만에 가득 찬 얼굴로 퉁명스럽게 말했다.

“흥. 빨리도 부르는군.”

“어쩔까요?”

“부르니까 가 봐야지.”

“그럼 준비를 하겠습니다.”

“난 한숨 더 잘 테니까 시간이 되면 깨우게.”

“알겠습니다.”

귀찮은 듯 한쪽 손을 휘휘 내저은 유정국은 다시 자리에 누웠다.

얼마 뒤 대충 옷을 차려입은 유정국은 가마를 타고 대궐로 들어갔다.

“이쪽입니다.”

대궐 입구까지 마중 나와 있던 도승지의 안내를 받아 유정국은 부용지에 위치한 정자인 애련정愛蓮亭으로 올라갔다.

정자 안에는 조촐하게 차려진 술상을 가운데 두고 도현이 미리 와서 앉아 있었다.

힐끗 도현을 쳐다본 유정국은 고개를 빳빳이 들고는 휘적휘적 거드름을 피우며 가까이 걸어와 빈자리에 털썩 앉았다.

아무리 명나라에서 온 사신이라고 하지만 명색이 임금인 도현 앞에서 최소한의 예의조차 차리지 않다니 이건 해도 너무했다.

당연히 도현은 안하무인 같은 행동에 눈가를 찡그렸고 안내를 해 온 도승지도 얼굴 가득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사신을 째려봤다.

화가 났지만 애써 참으며 도현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동안 밀린 국정 때문에 시간을 낼 수 없었는데, 사신은 그간 편안히 잘 지내셨소?”

그러자 유정국은 심드렁한 어조로 대답했다.

“잘 못 지냈습니다.”

“…….”

“대명제국의 황제 폐하를 대신해 먼 조선까지 왔는데 대접이 이 모양이라니 정말 실망했습니다.”

바로 어제까지 술판을 벌이며 온갖 진상 짓을 다 해 놓고 대접이 부족하다니, 도현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허어.”

“여기 도착한 것이 언제인데 조선 국왕께서는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나타나지도 않고 그렇다고 기다리는 동안 대접이 좋지도 않았으니 이런 홀대가 어디 있겠습니까. 이는 대명제국 황제 폐하를 무시하는 처사입니다.”

간악스럽게도 황제의 위세를 빌려 자신을 겁박하는 사신의 행동에 도현은 겁이 나기보다 울컥 화가 치밀어 올랐다.

성격 같아서는 당장 앞에 있는 술상을 뒤집어 버리고 당장 꺼지라며 호통을 치고 싶었지만 애써 참으면서 이야기를 했다.

“불편하게 했다니 내가 대신 사과하겠소.”

“전하!”

한쪽에 시립해 있던 도승지가 깜짝 놀라 뭐라고 이야기를 하려는 걸 중간에 막은 도현은 차분한 얼굴로 말했다.

“경은 잠시 내려가 있게.”

“하오나…….”

“어허.”

“후우. 알겠사옵니다.”

작게 한숨을 내쉰 도승지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허리를 살짝 숙이고는 정자를 내려갔는데, 자리를 뜨기 전에 적대감 어린 시선으로 사신을 흘겨봤다.

얼마 있지 않아 도승지를 통해 사신의 무례한 행동이 신료들한테 낱낱이 알려질 것이 뻔했는데, 이러면 자연스럽게 명에 대한 반발이 더 커질 수밖에 없었다.

“짐이 술을 한잔 따라 줄 테니 받고 쌓인 것이 있다면 다 푸시오.”

“그러지요.”

쪼르르륵.

술을 가득 따라 준 도현은 자기 잔을 들며 말했다.

“자, 건배합시다.”

“예.”

잔을 깨끗이 비운 도현은 상대를 지그시 바라보며 이야기를 했다.

“술을 꽤 좋아한다고 들었소.”

“장부라면 말술은 아니더라도 즐길 줄은 알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자기가 무슨 이야기책에 나오는 호걸이라도 되는 것처럼 어깨를 으쓱이는 사신의 모습에 도현은 내심 피식 비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렇기는 하지만 정신을 잃고 실수할 때까지 마셔서야 되겠소?”

“전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습니다.”

유정국의 말에 도현은 눈을 가늘게 떴다.

“정말이오?”

“그깟 술 하나 이기지 못해 비실거리는 건 소인배들이나 하는 행동이지요.”

“이것 참.”

짐짓 도현이 곤란하다는 표정을 짓자 유정국은 아직까지 상황 파악을 못 하고 그를 쳐다봤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혹시 어젯밤 연회에서 기생한테 시를 한 수 적어 준 걸 기억하시오?”

뜬금없는 물음에 유정국은 의아한 얼굴을 하며 천천히 기억을 더듬어 보다가 어렴풋이 그런 일이 생각나자, 무심코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만…….”

“박 내관, 그걸 보여 주게.”

“예, 전하.”

시중을 들기 위해 정자 안에 유일하게 남아 있던 칠현이 소매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유정국한테 건네줬다.

“이게 뭡니까?”

“보시면 알 거요.”

“…….”

어쩐지 등줄기를 타고 올라오는 찝찝한 느낌에 잠시 망설이던 유정국은 손에 쥔 물건을 펼쳐 봤다.

칠현이 준 건 바로 어젯밤 풍월이라는 기생한테 받은 시구가 적힌 치맛단이었다.

의아한 얼굴로 치맛단에 적혀 있는 시를 읽어 내려가던 유정국의 눈이 점점 커지더니 이내 하얗게 질렸다.

그리고 마지막에 선명히 찍혀 있는 자신의 수결을 확인하고는 사색이 되어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이, 이럴 수가.”

경악에 찬 사신을 보며 도현은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쐐기를 박았다.

“그냥 약주를 과하게 마셔 실수한 거라고 여겼는데 술에 취하지 않았다고 하니, 이게 사신이 가지고 있는 평소 생각이었구려.”

“아닙니다!”

다급한 나머지 자신도 모르게 언성을 높이며 유정국이 부인하자 도현은 약간 굳은 어조로 추궁하듯 말했다.

“그럼 그게 사신이 적은 것이 아니라는 거요?”

“그건…….”

“필체도 맞고 무엇보다 사신의 수결까지 있는데 아니라고 발뺌할 거요!”

“으음.”

너무나도 확실한 증거에 유정국은 아무런 변명도 못 하고 그저 침음을 내뱉었다.

아무리 만취했다고 하지만 저따위 불경스러운 내용의 시를 쓰다니,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다.

그러다 문득 왜 바로 어젯밤 기생한테 적어 준 시가 도현의 손에 들어갔는지 의아한 생각이 들었고, 어렵지 않게 자신이 함정에 빠졌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이미 촘촘하게 쳐 놓은 거미줄에 옴짝달싹 못하게 걸려든 뒤였기에 유정국으로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끄으응.”

상대를 노려보며 낮게 앓는 소리를 낸 유정국은 날 선 어투로 이야기를 했다.

“원하는 것이 뭡니까?”

입가에 미소를 지은 도현은 느긋한 표정으로 잔을 들어 술을 한 모금 마셨다.

“사신이 무엇 때문에 바다를 건너 여기까지 왔는지 잘 알고 있소. 우리도 청과는 악연으로 엮인 사이라 명을 돕고 싶소이다. 하지만 아는지 모르겠지만 아직 지난 병자호란의 여파에서 벗어나질 못했고, 그나마 남아 있던 여력도 얼만 전에 남해안에서 준동하는 왜구들을 물리치느라 다 써 버려서 안타깝게도 원병을 보내 줄 형편이 되질 못하오.”

이야기를 들은 유정국의 얼굴에는 다급함이 어렸다.

“임진왜란 때 원병 수만을 보내 줘 국난을 이겨 낼 수 있도록 도왔는데, 어찌 이럴 수가 있습니까!”

“임진년의 빚은 그동안 곱절로 쳐서 갚았다고 생각하는데, 명국은 아닌가 보오? 그리고 솔직히 이야기해서 원병이라고 보내 준 병사들은 오합지졸에 군기마저 형편없어 오히려 전쟁을 치르는 내내 조선에 부담만 됐소이다. 왜병과 싸우지는 않고, 거짓 전과를 올리기 위해 아무 죄 없는 양민들을 학살해 귀와 코를 잘라가 소금에 절여 명 조정에 보냈다는 상소와 증인이 한둘이 아니오! 그걸 알면서도 명과의 관계를 생각해 지금까지 모른 척했는데, 어디 한번 조목조목 따져 보겠소?”

“…….”

“이왕 말이 나왔으니 하는 이야기지만 솔직히 임진년에 원병을 보낸 것이 우릴 도와주기 위해서 그런 건 아니지 않소. 정말 그런 마음이 있었다면 진즉에 행동을 했어야 마땅한데, 왜병이 도성을 점령한 뒤에도 계속 북상하고 풍신수길이 명나라까지 칠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자, 그때서야 무거운 엉덩이를 움직인 것 아니오! 그래 놓고 무슨 일만 있으면 재조지은을 갚으라며 온갖 요구를 다 해 대다니 명색이 대국이라고 하면서 그게 뭐요?”

지금까지 명나라한테 쌓인 것을 한꺼번에 풀어 내기라도 하듯 도현은 사신을 앞에 두고 신랄한 비판을 퍼부었다.

다른 때 같으면 당장 사신이 분노를 폭발시켰겠지만 큰 약점이 잡힌 유정국은 아무런 말도 못 한 채 그저 얼굴만 붉으락푸르락했다.

그걸 보면서도 도현은 눈치를 보지 않고 오히려 더 당당한 태도로 말했다.

“뭐, 국정을 운영하려면 사사로운 정보다 자국의 이익을 우선해야 되니 명나라의 행동을 이해하오. 그런 의미에서 우리도 마음은 있지만 그럴 여건이 안 되는 걸 어찌하겠소.”

원병을 보내 줄 수 없다는 거절 의사를 도현이 확실히 밝히자 유정국은 있는 대로 인상을 일그러뜨렸다.

원래대로라면 황제와 상국의 권위를 내세워 도현을 압박해야 되겠지만 칠현이 다시 가져간 치마폭에 적힌 시 때문에 유정국은 그러지 못했다.

오히려 당장 조선이 청국의 후방을 소란스럽게 해 주지 않으면 강한 팔기군을 명나라 혼자서 상대해야 됐기에 유정국은 저자세로 원병을 애걸했다.

“순망치한이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명이 망하면 청국은 반드시 조선도 그냥 두지 않으려고 할 테니 나중에 후회하지 마시고 도와주십시오.”

하지만 도현은 머리를 좌우로 흔들며 매몰차게 거절했다.

“미안하오.”

“전하, 그러지 마시고…….”

이대로 돌아가면 황제의 노여움은 둘째치고 나라가 망할지도 몰랐기에 유정국은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 갔다.

하지만 도현은 더 할 말이 없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내 뜻은 확실히 전달했으니 이만 가 보겠소.”

“전하!”

“아. 그리고 이 시는 혹시라도 밖으로 유출되면 사신이 곤란해질 테니까. 내가 잘 보관해 두고 있겠소이다.”

“…….”

도현을 붙잡아 어떻게든 대화를 더 나누려던 유정국은 툭 던진 마지막 말에 그 자리에서 굳어 버렸다.

이건 그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지 않으면 시를 공개해 버리겠다는 협박이었다.

이게 황제인 숭정제의 귀에 들어가기라도 한다면 원병을 못 얻어 왔다는 질책이 문제가 아니라 대역죄로 유정국 자신은 물론이고 구족이 모두 벌을 받아 극형에 처해질 수도 있었다.

도저히 빠져나가지 못하는 올가미에 걸려든 꼴이었다.

여기까지 생각한 유정국은 허탈한 눈빛으로 정자를 내려가는 도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대궐에 들어가 도현을 알현한 이후부터 유정국은 하루가 멀다 하고 벌이던 연회도 거부한 채 방 안에 틀어박혀 두문불출하며 다시는 신료들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않았다.

그러자 명나라 사신의 행패에 눈살을 찌푸리던 조정 신료들은 갑작스러운 변화에 의아해하면서도 다들 이제 한시름 놨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리고 알현을 하고 난 뒤에 이런 변화가 생겼다는 것에 주목하며 통제 불능이던 사신을 조용히 만든 도현의 능력(?)에 다들 엄지손가락을 추켜들었다.

어떻게든 도현을 다시 만나 사정을 해 보려던 유정국은 계속된 거절에 결국 보름 뒤 아무런 소득도 없이 빈손으로 귀국선에 올랐다.

“도독, 저 부르칸입니다.”

“들어오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온 건장한 체격의 장수는, 호피 의자에 앉아 애검을 손질하고 있는 심양 도독 호타이에게 꾸벅 허리를 숙이며 군례를 올렸다.

“무슨 일인가?”

“조선에서 연통이 왔습니다.”

“그래?”

검면을 헝겊으로 닦던 손을 멈춘 호타이는 고개를 들며 관심을 보였다.

“명나라 사신에 관한 건가?”

“예.”

“내용을 말해 보게.”

“유정국이라는 자가 황제의 칙서를 가지고 원병을 요청했지만 조선 국왕에게 거절당했다고 합니다.”

그동안 조선이 명에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사대를 해 온 걸 생각하면 이번에도 요구를 거절하지 못할 거라 예상했는데, 전혀 뜻밖의 결과에 호타이는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게 정말이야?”

“그렇습니다.”

“의외군.”

“간자의 보고에 의하면 사신으로 온 자가 연일 연회를 벌이고 막대한 뇌물을 요구하는 등 행패를 부리자, 분노한 조선 국왕에게 호통을 듣고 쫓겨나듯 떠났다고 합니다.”

“흐음. 그 정도야 명나라에서 사신이 오면 으레 벌어지던 일이잖아?”

미심쩍어하는 호타이와 달리 부관인 부르칸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이번에는 정도가 심했던 모양지요. 거기다가 다른 것도 아니고 자신들이 급해 원병을 청하러 와 놓고 그렇게 거드름을 피운다면 저라도 화를 냈을 겁니다.”

“하긴.”

“이제 위협이 사라졌으니 대기 상태에 있는 병력을 해산시켜도 되지 않겠습니까?”

부르칸의 말에 호타이는 한쪽 손으로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잠시 고심했다.

도현이 우려한 대로 조선을 경계한 예친왕은 측근이자 뛰어난 장수인 호타이를 심양 도독으로 임명해, 조금이라도 수상한 움직임을 보이면 한양을 치라는 지시를 은밀히 내렸다.

그에 따라 호타이는 언제든지 압록강을 건널 수 있도록 휘하에 거느린 팔기군을 소집해 둔 상태였다.

만약 도현이 원군 파병을 거부하지 않고 신료들이 주장하는 대로 명나라의 요구를 수용했다면, 미처 준비를 갖추기도 전에 팔기군의 공격을 받아 대륙보다 먼저 전란에 휩싸이고 말았을 것이다.

물론 그동안 군비를 충실하게 갖춰 놨기에 지난 병자호란 때처럼 어이없이 무너지지는 않았겠지만, 원하지 않는 때에 벌어진 전란에 이기더라도 큰 피해를 입고 앞으로 계획해 둔 모든 것들을 대폭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다행히 도현은 원군 파병을 거부했고 결과적으로 이런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원래 군대라는 것이 존재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물자를 소모하는 집단이었는데, 특히나 전원 기병으로 이루어진 팔기군은 들어가는 비용이 더 컸다.

기존 병력만 있다면 상관이 없었지만 현재 심양 성에는 조선과의 일전을 상정해 평소 초원에 흩어져 유목 생활을 하는 인원들까지 모두 소집해 두고 있는 상태였다.

“바로 해산시키는 건 조금 그렇고, 보름 정도 상황을 더 두고 본 뒤에 그래도 별다른 움직임이 없으면 그때 소집을 풀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대답을 들으며 호타이는 다시 애검 손질에 집중했다.

조선이 명나라의 원병 요청을 거부했다는 소식은 즉시 파발을 이용해 원정군을 이끌고 남하 중이던 예친왕에게 전달됐고 후방의 변수가 사라지자, 청군은 전쟁에 더욱 집중할 수 있었다.

이런 가운데 청나라가 점령한 화북 지역 반란 세력의 움직임도 물밑에서 긴박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지난번 약속한 대로 병장기 다섯 수레를 가져왔습니다.”

상인 복장을 한 함길현이 능숙한 한어로 이야기를 하자 맞은편에 앉아 있던 초로의 늙은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소.”

초로의 늙은이는 북경 인근에 많은 땅을 가진 대지주로 이름은 왕이였다.

대대로 고관대작들을 배출해 온 명문가의 자손이기도 한 왕이는, 청나라가 화북을 점령하자 은밀히 주변 마을 청년과 뜻있는 지사들을 모아 반란 세력을 규합해 이끌고 있었다.

“같은 한족으로서 오랑캐를 내쫓고 잃어버린 땅을 되찾는 일인데 당연히 도와야지요.”

“그래도 다른 사람이라면 선뜻 나서지 못할 일인데 내 감사의 인사를 하지 않고는 못 배기겠네.”

왕이는 함길현의 손을 잡고 고개를 깊이 숙였다.

나이가 두 배는 많은 노인의 인사를 받자 이 상황이 어색한 듯 함길현은 헛기침을 하고 화제를 돌렸다.

“거사는 언제 벌일 생각이십니까?”

순간 가장 중요한 정보를 말해 줘도 되는지 잠깐 망설이다가, 이내 여태까지 고생해 준 함길현을 믿기로 한 왕이는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번 주 중으로 행동할 예정이네.”

“그렇군요. 꼭 성공하시길 빕니다.”

“나도 그랬으면 좋겠군.”

“그럼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몸 건강하십시오.”

“조심해서 가게.”

“예.”

의자에서 일어난 함길현은 살짝 상체를 숙이며 정중히 포권을 하고는 곧장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객잔 밖에 대기하고 있던 마차에 함길현이 올라타자 마부석에 앉은 도석재가 채찍을 휘둘러 말을 출발시켰다.

“이랴!”

찰싹!

이히히힝.

따각따각.

마차가 객잔에서 멀어지자 수행원으로 위장한 길천식이 함길현을 보며 말했다.

“이제 다 끝났군요.”

“그래. 하지만 진짜 중요한 건 지금부터야.”

“석가장石家莊 일대의 반란 세력도 이곳과 합류한다고 했고 저희가 병장기도 충분히 공급해 줬으니 청군에 쉽게 당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랬으면 좋겠지만 주력이 빠져나갔다고 해도 청군의 전력이 만만치 않으니 잘해 낼 수 있을지 걱정이야.”

함길현이 걱정스러운 듯 말하자 길천식이 잠시 주저하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럼 저희가 조금 도와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우리가?”

“예. 가령 거사일에 맞춰 현령이나 상급 군관들을 제거해 버린다면 지휘 체계에 혼란이 일어나, 제대로 대응을 못 하지 않겠습니까.”

“흐음.”

솔깃한지 함길현은 팔짱을 낀 채 어떻게 할지 고심했다.

“기껏 병장기까지 갖다 줬는데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진압되어 버리면 큰일이지 않습니까.”

“그렇지.”

“그럴 거 같으면 아예 처음부터 저희가 개입해서 일이 틀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나을 겁니다.”

“하긴.”

작게 머리를 끄덕인 함길현은 약간 가라앉은 목소리로 결정을 내렸다.

“좋아. 자네 말대로 하세.”

“잘 생각하셨습니다.”

마흔 살의 청나라 무관인 교창지는 팔기군 중에서도 예친왕의 친위 세력인 백기단 출신으로 북경의 관문이라고 할 수 있는 천진을 지키는 군대의 수장직을 맡고 있었다.

“퇴청하십니까?”

“그래. 내일 아침에 보세.”

오늘 번을 서는 하급 군관의 인사를 받으며 안장 위에 오른 교창지는 잔뜩 거드름을 피우면서 군영과 약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저택으로 말을 몰았다.

수행원이라고는 부관과 전령 역할을 하는 기병 한 명이 전부였는데 아무리 시가지 안이라고는 하지만, 천진과 주변 지역의 병력을 지휘하는 장수의 호위치고는 너무 허술했다.

자신의 무예 실력을 믿는 것도 있지만 화북 지역을 완전히 평정했다는 걸 보여 주기 위해 일부러 이렇게 행동하는 거였다.

그렇게 얼마쯤 갔을까 인적이 드문 골목으로 들어섰을 때 맞은편에 짐마차 한 대가 바퀴가 빠진 채 출구를 비스듬히 막고 있는 걸 발견하고 교창지가 눈썹을 찡그렸다.

“저건 뭐야?”

“제가 가서 확인해 보겠습니다.”

말 옆구리를 발로 가볍게 차 앞으로 달려 나간 부관은 바퀴를 다시 끼우려고 낑낑대고 있는 마부를 내려다보며 고압적으로 입을 열었다.

“길을 막고 뭘 하고 있는 거야!”

그러자 마부는 팔기군 특유의 군복을 입고 있는 부관을 보고는 화들짝 놀라 굽실거리며 말했다.

“아이고. 나리, 죄송합니다. 갑자기 바퀴가 빠져서 그만…….”

“닥치고! 장군님께서 지나가셔야 되니 어서 마차를 옆으로 치워.”

“예.”

겁먹은 목소리로 대답한 마부가 몸을 드는 순간 번쩍하며 뭔가가 날아왔다.

퍽!

“컥.”

마부로 변장한 길천식이 던진 단검에 목이 꿰뚫린 부관은 가래 끓는 소리를 내며 말에서 굴러떨어졌다.

열 걸음쯤 뒤에서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어서 마차가 치워지길 기다리던 교창지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눈을 크게 치켜떴다.

“저, 저런.”

그러다가 이내 길천식을 향해 크게 소리를 지르며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아 들었다.

“이놈!”

금방이라도 말을 몰고 달려가 길천식의 머리에 검을 내려치려 할 때 골목 양쪽 지붕에 숨어 있던 주작단 단원들이 몸을 일으켜서는 재빨리 화살을 쐈다.

슈슉! 슉!

“아악.”

채챙.

함께 있던 병사는 가슴에 화살이 꽂힌 채 비명을 내지르며 말 위에 엎어졌고 교창지는 가까스로 검을 휘둘러 화살을 쳐 냈다.

“젠장!”

그때서야 자신이 함정에 빠졌다는 걸 깨달은 교창지는 욕설을 내뱉으며 주위를 둘러본 뒤 말고삐를 돌려 반대편으로 달아나려고 했다.

하지만 탈출 시도는 함길현이 쏜 화살이 교창지가 타고 있던 말의 목을 맞추면서 바로 저지당했다.

푹.

이히히힝!

말이 고통에 몸부림치며 앞발을 꿇고 쓰러지자 위에 타고 있던 교창지는 몸이 앞으로 쏠리면서 그대로 땅바닥에 패대기쳐졌다.

“크윽.”

옷이 지저분해졌지만 낙법을 펼쳐 크게 다치지는 않은 교창지는 검을 손에 든 채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어느새 지붕에서 내려와 장검을 빼 든 채 가까이 다가오는 함길현과 주작단 단원들을 노려보며 이를 부드득 갈았다.

“감히 천진 한복판에서 날 노리다니 간이 배 밖에 나온 놈들이구나.”

“졸개들이 달려올 시간을 벌려는 모양인데 그렇게는 안 되지.”

“쳇.”

교창지의 꼼수를 눈치챈 함길현은 지체 없이 상대의 허리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챙!

그러자 교창지는 팔기군 천인대장 출신답게 재빨리 검을 쳐냈다.

하지만 첫 번째 공격은 상대의 시선을 분산시키기 위한 허초였는데, 함길현은 서로의 검이 부딪쳐 맑은 쇳소리를 내는 순간 그대로 몸을 반대로 돌려 교창지의 가슴팍을 노리고 횡으로 그었다.

“헉.”

헛바람을 삼키며 교창지가 황급히 뒤로 물러났지만 워낙 거리가 가까운 데다가 허를 제대로 찔려 검격을 피하지 못했다.

슈칵.

“크윽.”

입고 있던 군복이 길게 찢어지며 시뻘건 피가 주르륵 흘러나온 교창지는 얼굴을 와락 구긴 채 비틀거리면서 왼쪽 손으로 상처를 부여잡았다.

“이런 쌍.”

“팔기군 천인장 출신도 별거 아니군.”

비아냥거리는 함길현의 말에 자존심이 상한 교창지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며 무섭게 덤벼들었다.

“죽여 버리겠다!”

그러나 부상으로 인해 움직임이 둔해진 교창지의 공격은 함길현에 의해 모두 막혀 버렸다.

채챙! 챙!

가볍게 방어를 한 함길현은 바로 반격을 했다.

매서운 검격에 교창지는 필사적으로 검을 휘둘렀지만 이미 상대의 움직임을 파악한 함길현은 약점을 교묘히 파고들었다.

푸욱.

함길현이 있는 힘껏 찔러 넣은 검은 섬뜩한 소리를 내면서 상대의 왼쪽 가슴을 깊숙이 파고들었다.

순식간에 피가 옷에 흠뻑 배어 나왔고 교창지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을 부릅떴다.

“이, 이럴 수가…….”

그때 교창지의 귀로 함길현의 싸늘한 말이 파고들었다.

“곧 네 부하들도 따라갈 테니 너무 섭섭해하지는 마.”

“……뭐라!”

의미심장한 말에 경악한 표정을 지은 교창지를 무심히 쳐다보며 함길현은 가슴에서 뽑아낸 검을 내려쳐 마무리를 지었다.

“아, 안 돼!”

검은 피투성이가 되어 엉거주춤 서 있던 교창지의 머리 위로 떨어졌고 이내 비명과 함께 상대는 무너지듯 흙바닥에 주저앉아 숨이 끊어졌다.

“끄아악!”

털썩.

상대가 확실히 죽은 걸 확인한 함길현은 장검에 묻은 피를 쓰러진 교창지의 옷에 쓱쓱 닦아 내며 부하들에게 말했다.

“적들이 오기 전에 어서 여길 뜨자.”

“옛.”

함길현과 주작단 단원들이 사라지고 얼마 있지 않아 신고를 받고 팔기군 기병 스무 명이 허겁지겁 달려왔지만, 이미 상황이 다 끝난 뒤였고 골목에는 교창지와 수행원들의 시신만 쓸쓸히 남아 있었다.

이렇게 함길현과 부하들이 천진에 있는 청나라 주요 관리들을 죽이고 다니는 그 시각, 왕이가 이끄는 반란 세력이 무장 봉기를 일으켰다.

“간악한 오랑캐 놈들을 몰아내고 우리 땅을 되찾자!”

“우와아아!”

“가자!”

삼삼오오 은밀히 시내로 모여든 반란군은 노구를 이끌고 말에 올라탄 왕이의 선동에 함성을 내지르며 일제히 관청으로 쳐들어갔다.

“뭐, 뭐야?”

군영 입구를 지키고 있던 팔기군 병사들은 새카맣게 몰려드는 반란군을 보고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제기랄! 반란군이다.”

“입구를 막아!”

그나마 제일 먼저 정신을 차린 하급 군관의 재촉에 팔기군 병사들은 허겁지겁 입구를 닫으려고 했다.

하지만 어디선가 날아온 화살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슈슉! 슉!

“커헉.”

“끄윽.”

“썩을!”

부하들이 화살에 꽂혀 목숨을 잃고 반란군이 바로 지척까지 접근하자, 하급 군관은 욕설을 내뱉고는 문을 닫는 걸 포기하고 군영 안으로 달아났다.

“오랑캐 놈들은 다 죽여라!”

“반란이다.”

활짝 열린 정문을 통해 군영 안으로 쏟아져 들어간 반란군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무기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숙소에서 뛰쳐나온 팔기군 병사들을 마구 도륙했다.

채챙! 챙! 챙!

“우아아악.”

“끄헉.”

“사, 살려 줘.”

사방에서 비명이 난무하고 죽은 자들이 흘린 피가 바닥에 흥건하게 고이며 군영 안은 한 폭의 끔찍한 지옥도가 그려졌다.

원래대로라면 반란군은 정예병인 팔기군의 상대가 되지 않았겠지만, 일단 말 위가 아니라 바닥에 서서 싸워 기병의 이점을 전혀 살릴 수 없는 데다 숫자도 반란군이 몇 배나 많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갑작스러운 기습에 체계적인 대응을 못 하고 이리저리 뿔뿔이 흩어져 싸우다 보니, 팔기군은 제 역량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었다.

드넓은 초원을 질타하고 만리장성까지 무너뜨린 무적의 팔기군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군영에 남아 있던 오백 명의 청군은 너무나도 힘없이 반란군에 당했다.

격렬한 싸움 끝에 군영을 장악한 반란군은 벅찬 표정을 지으며 피가 묻은 무기를 들어 올리며 환호했다.

“와아아. 이겼다!”

“대명국 만세!”

“만세!”

갑옷을 챙겨 입고 전투를 지휘한 왕이는 얼굴을 붉게 상기시키고는 수하들에게 둘러싸인 채 승리를 만끽했다.

천진뿐만 아니라 산동선과 산서성 등 화북 지역 전역에 걸쳐 반란 세력이 일제히 무장 봉기를 일으켰다.

일단 봉기가 시작되자 오랑캐인 만주족의 지배를 받는 것에 불만이 많던 백성들과 지주계층이 적극 가담해, 순식간에 세력이 불어나 보름도 안 돼 천진에서만 삼만 명의 반란군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함길현을 포함한 주작단 단원들의 사전 공작을 통해 미리 서로 연계를 하고 있던 반란군들은 세를 잔뜩 불려서 곧장 북경을 향해 진격했다.

명나라를 치기 위해 주력이 대부분 빠져나간 데다 남아 있는 병력들은 넓은 화북 지방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어, 청국은 반란을 조기에 진압하는 데 실패했다.

당황한 청국 조정은 병사들을 풀어 북경 내부의 반란을 단속하는 한편 지방에 내려가 있는 병력을 집결시키고 급히 전령을 보내 예친왕에게 상황을 알렸다.

<9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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