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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권-동북 진출 1 (44/104)

9권

동북 진출 1

한동안 소강상태를 유지하던 대륙이 다시 피비린내 나는 전란 속으로 빠져들고 있을 때, 조선군은 새로운 변혁의 시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군제 개편의 일환으로 도현은 그동안 무과 시험을 통해 무관을 뽑아 쓰던 것을 바꾸어 사관학교를 신설했다.

무과 시험에 합격하면 무조건 사관학교에 들어가 각종 군사교육과 체력 훈련을 받도록 해서, 아무리 시험 성적이 좋아도 이곳을 졸업하지 않으면 무관으로 등용될 수 없게 명문화했다.

이렇게 되자 자연스럽게 무과 시험 합격자도 사관학교 정원에 맞춰 대폭 늘어났는데, 첫 번째 기수인 올해는 쉰 명을 시범적으로 뽑았다.

사관학교의 위치는 완만한 능선과 넓은 강변이 있어 생도들이 훈련받기 좋은 용산龍山에 지어졌다.

첫 번째 생도들의 입학식은 오늘, 임금인 도현이 친히 참석한 가운데 치러졌다.

“날씨가 좋군.”

“아침까지만 해도 비가 부슬부슬 내려서 행사를 어떻게 해야 될지 무척 걱정했는데, 하늘도 주상 전하를 귀히 여기시는 것 같사옵니다.”

옆에서 안내하던 임경업의 말에 도현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병판도 그런 아부를 할 줄 아시오?”

“진심에서 우러나와 올리는 말이옵니다.”

“아무튼 기분은 좋구려.”

회귀 전의 지식을 이용해 사관학교 건설에 이런저런 조언을 해 줬지만, 직접 와서 완공된 모습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던 도현은 주위를 천천히 살펴보고는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건물들이 아주 잘 지어졌군.”

“하교하신 대로 새로운 건축법을 적용했고, 나중에 규모가 커질 때를 대비해 여유 부지를 많이 확보해 두었습니다.”

임경업의 설명대로 주위에 세워진 건물들은 목재를 주로 사용하는 기존 방식과 달리 조선과 서양의 건축양식을 적절히 섞은 이 층짜리 석조 건물로 지어져 있었다.

거기다 군데군데 넓은 잔디밭이 조성되어 있었는데 향후에 건물을 추가로 세울 부지였다.

이름난 명장인 이순신 장군이 북방에서 여진족하고 싸우다가 임진왜란을 몇 년 앞두고 수사水使가 된 것처럼, 조선은 예전부터 지휘관급의 수군과 육군 구분이 명확하지 않았다.

하지만 도현은 양 군이 싸우는 방법과 장소가 확연히 다른데 전문성 없이 중구난방으로 지휘관들을 키우면 안 된다는 판단에 군제 개혁의 일환으로 선을 확실히 긋고 각 군의 특성에 맞는 무관을 육성하도록 했다.

당연히 신설된 사관학교도 수군과 육군이 구분되어 있었는데, 지금은 사정상 한곳에서 교육을 시키지만 가덕도에 짓고 있는 수군 사관학교가 완성되면 그쪽으로 이전해 갈 계획이었다.

또 한 가지 특이한 것은, 최근 병부에 너무 많은 재정을 쓴다는 대신들의 불만에 사관학교 건립 비용을 모두 종일이 내게 되면서 운영은 병부가 하지만 소유주는 왕실이 되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정식 이름도 왕립 사관학교였고 문장에 왕실의 상징인 이화꽃 무늬가 들어갔다.

생도들은 이화꽃 아래 검과 창이 ‘X’ 자 모양으로 교차된 배지를 교복 옷깃에 달았고 이것을 큰 자부심으로 생각했다.

개교식과 입학을 동시에 개최하는 것이었고 국왕인 도현이 참석하는 행사였기에 아주 성대하게 준비가 됐다.

행사는 본관 앞 대연병장에서 열기로 되어 있었는데, 밤새 내린 비에 바닥이 질퍽질퍽해진 것을 병사들이 급히 흙으로 모두 덮어 지금은 말끔한 모습이었다.

어느 정도 걸어가자 예복을 입고 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인물이 사관학교 교수들과 함께 늘어서 있다가 그를 보며 길게 읍을 했다.

“사관학교 방문을 환영하옵니다, 전하.”

“오! 여온汝溫 공 아니시오. 건강은 괜찮으시오?”

여온은 임경업 못지않은 뛰어난 명장인 유림柳琳의 자였는데, 조정의 요직을 거친 뒤 좌의정을 끝으로 은퇴해 유유자적한 생활을 즐기고 있는 걸 도현이 몇 번이나 사람을 보내서 새로 만든 사관학교 교장으로 초빙해 왔다.

유림은 치욕적인 패배를 당한 병자호란 때 강원도 철원군 김화 전투에서 당시 최강의 전투력을 자랑하던 팔기군 수천을 전멸시킨 뛰어난 장군이기도 했지만, 지형지물을 적절히 이용할 줄도 알았고 무엇보다 신무기인 조총을 효율적으로 사용해 적을 섬멸했다는 점을 도현은 높게 샀다.

유림이야말로 새로운 전술과 교리를 가르쳐야 하는 사관학교장에 적임자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도현이 손을 맞잡으며 반가워하자 유림은 황공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염려해 주신 덕분에 건강하옵니다.”

“다행이오. 공처럼 뛰어난 식견을 가진 사람이 조선군의 기둥이 될 인재를 가르쳐 주니 얼마나 든든한지 모를 거요. 앞으로도 몸 건강히 오래오래 짐을 도와주시오.”

“미천한 재주나마 신명을 다해 전하의 뜻을 받잡겠나이다.”

“박 내관.”

“말씀하시옵소서, 전하.”

“어의에게 일러 여온 공이 건강히 후학을 육성할 수 있도록 보약을 한 제 지어 주라고 하게.”

“알겠사옵니다.”

고령인 자신을 염려해 주는 도현의 마음 씀씀이에 유림은 크게 감격했다.

“자, 다들 기다릴 테니 어서 갑시다.”

“제가 안내해 드리겠사옵니다.”

유림은 아까보다 더욱 극진한 태도로 도현을 미리 준비해 놓은 연단 쪽으로 안내했다.

드넓은 연병장에는 이미 쉰 명의 생도들이 오와 열을 맞춰 질서 정연하게 서 있었고, 좌우로는 그들의 가족과 구경꾼들이 자리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본관 앞에 만들어진 높고 화려한 단상에는 당상관 이상의 고위 신료와 사관학교 교수들이 점잔을 빼고 앉아 있었다.

서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군관 한 명이 한쪽에 세워진 큰북을 힘껏 쳤다.

둥둥둥! 둥둥둥!

그러자 사람들이 모두 잡담을 멈추고 앞에 있는 연단을 쳐다보았다.

“국왕 전하 납시오!”

근위대 위사의 우렁찬 외침에 모든 이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곤룡포를 입고 들어서는 도현을 향해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장검을 허리에 찬 근위대 위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천천히 단상으로 걸음을 옮기는 도현의 모습에서 좌중을 압도하는 강한 카리스마와 위엄이 느껴졌다.

“전하.”

“우상도 왔군.”

“이런 국가적인 행사에 나라의 녹을 먹는 대신이 되어서 어찌 빠질 수 있겠사옵니까?”

이채를 띤 도현은 슬쩍 뼈 있는 말을 던졌다.

“난 우상이 사관학교 설립을 하도 반대하기에 안 올 줄 알았소이다.”

“그건 병부에 들어가는 재원이 너무 많아서 그런 것이니 마음 상하셨다면 사죄드리겠사옵니다.”

역시 노련한 정치인답게 당황하지 않고 송시열이 잘 받아넘기자 도현은 피식 미소를 짓고는 이야기를 이었다.

“아니오, 나라의 곳간을 염려하는 경의 충심을 모르지 않소. 그냥 농을 한 것이니 괘념치 마시오.”

“송구하옵니다.”

그렇게 참석한 귀빈들과 간단한 이야기를 나눈 도현은 중간에 있는 단상으로 가 섰다.

아직도 허리를 숙이고 있는 사람들을 스윽 훑어본 도현은 힘이 가득 들어 있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모두 고개를 들라.”

자세를 바로 했지만 감히 도현을 바로 쳐다보지 못한 사람들은 살짝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고는 국왕이 무슨 이야기를 할지 쫑긋 귀를 세웠다.

“오늘은 참 기쁜 날이다. 앞으로 조선군의 기둥이 되어 왕실을 보위하고 만백성을 지킬 젊은 인재들을 보니 절로 웃음이 나고 든든한 마음이 든다. 생도들은 자랑스러운 사관학교의 일원임을 항상 잊지 말고, 이 년 동안 새로운 군사 지식과 무예를 익히고 갈고닦아 단단한 방패와 날카로운 검으로 거듭나기를 바라는 바이다. 모두의 앞날에 영광이 있기를!”

도현의 축사가 끝나자 연병장에 모인 사람들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양팔을 위로 들어 올리며 천세를 외쳤다.

“천세! 천세!”

“와아아아~!”

손을 들어 환호에 화답한 도현이 연단 한편에 마련되어 있는 왕좌로 가서 앉자, 교장인 유림 장군이 나와 짧은 연설을 한 뒤 교수진을 소개하는 것으로 입학식 행사를 끝냈다.

대궐로 돌아온 도현은 자신이 계획한 대로 군제 개혁의 성과가 하나씩 나오는 것에 크게 기뻐하며 측근들과 함께 술을 한 잔씩 했다.

“캬, 오늘따라 술맛이 더 좋은 것 같군.”

“신들도 그렇사옵니다.”

“자, 한 잔씩들 더 받게.”

“예.”

도현의 말에 시립해 있던 칠현이 앉아 있는 대신들의 잔에 대신 술을 따랐다.

그렇게 몇 순배 술이 돌아가자 도현은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주작단을 맡고 있는 이완에게 시선을 주며 말했다.

“대륙 상황은 어찌 돌아가고 있나?”

그러자 이완은 들고 있던 술잔을 내려놓으며 차분한 어조로 대답했다.

“곳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한족들의 반란에 청국 조정이 크게 당혹스러워 하고 있사옵니다.”

“아무리 주력이 남명을 치기 위해 자리를 비웠다고는 하지만, 고작 농민들로 이루어진 반란군에 청 조정이 흔들린단 말이오?”

오랜 시간 심양 관저 생활을 해서 나름 청국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하는 영의정 박황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이야기하자 이완은 한쪽 입꼬리를 살짝 말아 올렸다.

“초반에 관청을 공격해 식량과 무기를 획득해 사기를 올렸고, 무엇보다 반군들이 따로 흩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연락을 하며 유기적으로 움직였던 것이 컸습니다.”

“그렇구먼.”

물론 대놓고 이야기를 하지 않았지만 반군의 기세가 이렇게 거센 것에는 도현의 손길이 결정적이었다는 것을, 여기 모여 있는 대신들은 다는 몰라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그때에야 박황은 조금 이해가 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아무래도 병부를 맡고 있다 보니 청국의 동향에 촌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는 임경업이 정색을 하며 물었다.

“본 국이 시끄러우니 원정에 나선 예친왕도 군대를 돌릴 수밖에 없겠구려?”

“일단 서주徐州에서 행군을 멈추고 상황을 지켜보고 있지만, 결국에는 회군을 선택할 겁니다.”

“대륙 정복을 일생일대의 숙원처럼 생각하는 예친왕으로서는 땅을 치고 통곡할 정도로 원통할 일이겠군.”

도현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이야기에 대신들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것 때문에 북경에서 급보를 보냈음에도 쉽게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는 듯합니다.”

“어찌 됐든 우리에게는 잘된 일이지. 병판.”

시선을 받은 임경업은 상체를 살짝 숙였다.

“하교하시옵소서, 전하.”

“천금 같은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도록 병사들의 조련에 더욱 박차를 가하시오.”

“알겠사옵니다.”

“이제 북벌의 대업을 이룰 날이 머지않았소. 그러니 다른 사람들도 각자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해 주길 바라오.”

“신명을 다하겠나이다.”

북벌이라는 말에, 모여 있던 측근들은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짓고는 열기가 가득 찬 목소리로 크게 대답했다.

그걸 보며 도현은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경들이 있으니 정말 든든하오. 자, 이제 골치 아픈 이야기는 그만하고 즐겁게 술을 마십시다.”

“예.”

아직 조금 더 지켜봐야 했지만, 명의 마지막 숨통을 끊어 놓으려던 예친왕의 발목을 잡고, 조선군이 한 단계 더 도약할 기반이 될 사관학교가 무사히 개교한 것에 기분이 좋았던 도현은 밤늦게까지 측근들과 웃고 떠들며 술자리를 가졌다.

한편 보무도 당당하게 남하하고 있던 청나라 원정군은 북경에서 날아온 급보에 행군을 중단한 채 보름 넘게 서주에 발이 묶여 있었다.

원정군이 처한 상황을 그대로 보여 주듯 주둔지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아 있는 가운데, 지휘 천막에서는 연일 예친왕의 고성이 터져 나왔다.

꽝!

“도대체 북경에서는 뭘 하고 있기에 반군 놈들을 아직도 진압하지 못하고 있는 거야!”

앞에 있는 탁자를 주먹으로 내려치며 예친왕이 분통을 터트리자 모여 있던 장수들은 괜히 불똥이라도 튈까 봐 시선을 아래로 내리고는 어깨를 움츠렸다.

제일 가까운 자리에 앉은 용골대가 예친왕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섭정 전하, 상황이 더 안 좋아지기 전에 회군을 하셔야 되지 않겠습니까?”

“회군이라니! 그건 절대 안 돼.”

“하지만 어제 온 전령에 의하면 황성 부근까지 반란이 확대되고 있다는데 이대로 놔둘 수는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명의 잔당을 바로 코앞에 두고 이대로 발길을 돌리란 말이야!”

“원통하고 아쉬운 마음은 소장도 마찬가지입니다만, 우선 내부 단속부터 해야지 집 안에 불이 난 걸 내버려 두고 명과 전쟁을 벌일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러자 맞은편에 있던 야골타도 용골대의 말을 거들었다.

“섭정께서 행군을 중단하고 이곳에 머물고 계신 것도 후방이 불안해지는 것을 염려해서가 아닙니까. 그러니 일단 황성으로 돌아가 반란군을 진압한 다음에 다시 원정을 나오시지요.”

최측근 심복 두 사람이 회군을 권유하자 예친왕은 침통한 얼굴로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뱉었다.

“후우, 전쟁은 기세인데 대군을 이끌고 여기까지 내려와 양자강을 코앞에 두고 되돌아가야 하다니. 언제 또다시 이곳에 올 수 있을지 모르겠군.”

“그런 말씀 마십시오. 곧 다시 출전해 남경을 불태우고 명의 깃발을 대륙에서 완전히 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맞습니다, 섭정 전하.”

수십만 대군을 일으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님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예친왕은 장수들의 위로에도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힘없이 지시를 내렸다.

“내일 황도로 돌아갈 테니, 그렇게 알고 회군 준비를 하게.”

“옛.”

그만 나가 보라는 듯이 한쪽 팔을 내저은 예친왕은 그날 밤늦게까지 혼자 술을 마시며 아쉬움을 달랬다.

다음 날 아침 원정군 수십만은 주둔지를 정리하고 다시 황도로 회군하기 시작했다.

달포 가까이 이동해 온 길을 되짚어가야 했기에 회군도 쉬운 게 아니었는데, 전투 한번 해 보지 못하고 아무런 소득도 없이 빈손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에 병사들의 사기는 바닥까지 떨어졌다.

거기다가 지금까지 들어간 전비를 고스란히 허공에 날리게 됐고, 앞으로 반란군을 토벌하고 화북 지역을 다시 안정화하려면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들어갈 것이 뻔했기에 여러모로 청나라의 손해가 컸다.

청군의 침략을 앞두고 마음을 졸이던 숭정제는 하늘(?)의 도움으로 위기를 넘기게 되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이때부터 부랴부랴 군사력을 증강하고 남경과 국경 일대의 성벽을 보수하는 등 전쟁 준비를 했다.

하지만 기존 강남 지역의 토착 세력과 북경에서부터 황제를 따라온 신료들 사이의 권력 투쟁과 알력으로 일이 뜻대로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것만 봐도 명나라의 명운이 이제 다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시간을 헛되이 보내고 있는 명나라와 달리 조선은 도현이 세워 놓은 계획에 따라 차근차근 부국강병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아침부터 조금씩 내리던 눈발이 제법 굵어진 가운데 일단의 짐마차 행렬이 그 속을 뚫고 어딘가로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정말 징글징글하게 오는구나.”

“누가 아니래. 이러다가 눈밭에 파묻혀서 꼼짝달싹 못하게 되는 거 아냐?”

솜을 넣어서 만든 벙어리장갑을 낀 손으로 창을 든 병사의 이야기에 말고삐를 잡고 걸어가던 고참병이 입을 열었다.

“아직 한겨울도 안 됐는데 엄살은. 이제 조금만 더 가면 목적지에 도착하니까 힘들더라도 참아.”

“예.”

“근데 성님.”

충청도 출신인 병사의 말에 고참병은 눈을 부라리며 핀잔을 줬다.

“이 자식이, 병장님이라고 부르라니까! 여기 계급장 안 보여?”

“아직 입에 안 붙어서, 죄송해요.”

병사들이 쓰고 있는 철모에는 전에 없던 표식이 붙어 있었는데, 고참병은 일자 모양의 작대기가 세 개였고 대화를 나누는 병사는 한 개였다.

바로 얼마 전부터 지급한 계급장이었다.

명령 체계를 일원화하고 위계질서를 세우기 위해 병사들을 병장, 상병, 하병 순서로 나눴는데 작대기가 세 개인 병장이 최고 높은 계급이었고 하병은 밑으로 열 명의 부하를 거느리는, 조선군 편제에서 가장 작은 전투 단위였다.

“군관들이 들으면 명칭을 똑바로 안 쓴다고 치도곤을 당하니까 조심해. 하려던 이야기가 뭐야?”

“이 겨울에 무슨 병장기를 이렇게 많이 가져가는 거예요?”

순간 고참병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뭘 가져가는지 알지 못하도록 일부러 포장을 씌워 놓은 짐마차들을 쳐다보았다.

추운 겨울에 고생하며 눈밭을 헤치고 가는 것에 대한 불만이 실린 투정이었지만, 확실히 그가 생각해도 필요 이상으로 많은 물량이었다.

“다 쓸데가 있겠지. 그리고 아까 종사관 어른 말씀 못 들었어! 보급품에 대해서는 일절 함구하라고 했는데 자꾸 입을 놀릴래?”

“쳇, 알았어요.”

“이놈이.”

고향 사람이라고 봐줬더니 은근히 기어오르는 것 같아 고참병이 눈을 치켜뜨면서 한 소리 하려고 할 때, 행렬 선두에 서 있던 병사가 앞을 가리키며 크게 외쳤다.

“저기 만포滿浦성이 보인다!”

시선을 돌리자 추위에 꽁꽁 얼어붙은 압록강 옆으로 돌을 쌓아 올린 상당한 규모의 석성이 보였다.

만포성은 평안도 강계도호부에 위치한 국경 마을로 군사방어진지인 진鎭이 설치되어 있었고, 얼마 전 증축을 해서 성벽 높이가 무려 4m에 이르고 둘레는 7km가 넘었다.

주둔하고 있는 병력도 크게 늘어나 현재 다섯 개 백인대가 성을 지키고 있었다.

짐마차 마흔 대와 호송병 쉰 명으로 이루어진 수송 행렬은 활짝 열린 성문을 통과해 안으로 곧장 들어갔다.

“군호 어른.”

집무실에 앉아 정기적으로 병부에 올리는 보고서를 적고 있던 만포 성주 홍치국은 고개를 들며 물었다.

“무슨 일인가?”

“방금 보급대가 도착했사옵니다.”

“며칠 동안 눈이 내려 조금 지체될 줄 알았는데, 제 날짜에 왔군.”

“호송을 맡은 군관이 애를 쓴 모양입니다.”

“나가 보세.”

“예.”

손에 쥐고 있던 붓을 벼루에 내려놓은 홍치국은 의자에서 일어나 부관과 함께 집무실을 나갔다.

군영 안에 있는 넓은 공터는 벌써 짐마차에 실린 물품을 창고로 옮기는 병사들로 인해 분주했다.

“군량은 왼편 창고로 가져가고 나머지는 오른쪽이야!”

“으쌰!”

“빨리 옮겨.”

“김 종사관, 수고가 많군.”

가지고 온 물품 인수인계를 하고 있던 젊은 군관은 홍치국을 보고는 한쪽 손을 심장 부위에 대고 상체를 살짝 숙이면서 얼른 군례를 취했다.

“그간 별일 없으셨사옵니까?”

“잘 있었네. 눈이 쌓여 길이 험했을 텐데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이 많았겠군.”

“아닙니다.”

“오늘은 평소보다 물품이 더 많은 것 같은데?”

짐수레들을 둘러보며 홍치국이 하는 말에 자세를 바로 한 김 종사관이 설명을 했다.

“이번에 새로 군화를 가져왔습니다.”

“군화?”

“예. 잠시만 기다려 보십시오.”

병사들이 옮기고 있는 짐 보따리 가운데 하나를 푼 김 종사관은 뭔가를 들고 와 홍치국한테 보여 주었다.

“이겁니다.”

“이건 가죽신이 아닌가?”

“맞습니다.”

김 종사관이 들고 있는 건 가죽으로 만들어진 장화 형태의 신발이었는데, 목이 무릎 아래까지 올라오고 바닥에는 두꺼운 밑창도 붙어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진창을 건널 때 쉽게 벗겨지고 이동 중에 이물질이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끈이 달려 있어 꽉 조일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주상 전하께서 나라를 지키는 군졸들을 위해 특별히 내탕금을 들여 만들어서 하사하신 겁니다.”

“이런 황공스러울 데가 있나.”

이때까지만 해도 병사들은 아무리 추운 날이라도 달랑 짚신 하나에 두꺼운 버선을 몇 개씩 껴 신고 견뎌야 했다.

겨울이 아니더라도, 재질이 약한 짚신은 조금만 신고 다니면 헤지기 일쑤였고 발도 편하지 않았다.

가장 기본적인 물품이었지만 윗사람들이 그다지 신경 쓰지 않고 그냥 넘어가는 것이기도 했는데, 임금인 도현이 그걸 놓치지 않고 귀한 가죽신을 나눠 준다고 하자 감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앞으로는 매년 병사 일인당 한 켤레씩 배급된다고 하니 아끼지 말고 신고 다니라고 하십시오.”

“이 귀한 걸 매년 준다고?”

“그렇습니다.”

“정말 주상 전하께서 병사들을 아끼는 마음이 크시군.”

“그러게 말입니다.”

도현에게 가장 열렬한 지지를 보내는 세력으로는 병사들을 첫손가락에 꼽을 수 있었는데, 훈련 강도는 세졌지만 군량미를 자체 조달하기 위해 짓던 농사를 일절 하지 않게 되고 보급품도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질이 좋고 풍족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병사들이 좋아하는 것은 봉급이 지급된다는 일이었다.

아무런 보수 없이 몇 년 동안 군역을 치러야 했던 걸 생각하면 정말 엄청난 변화였다.

병사들뿐만 아니라 군관들도 문신에 비해 천대받던 것을 완전히 뜯어고쳐 똑같이 대우해 주며 고위 관직에 오를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다.

이러니 충성심이 생기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었다.

“아, 참. 그리고 강 건너에 보낼 물건도 가져왔습니다.”

얼굴에서 웃음을 지우고 정색을 한 홍치국은 살짝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양이 얼마나 되나?”

“저기에 따로 빼 둔 수레 다섯 대입니다.”

김 종사관이 손을 들어 가리키는 곳을 쳐다보자, 다른 것과 달리 포장이 벗겨지지 않은 채 놓아둔 짐수레들이 눈에 들어왔다.

살짝 고개를 끄덕인 홍치국은 부관을 보며 말했다.

“눈에 띄지 않는 곳에다가 옮겨 놓게.”

“예.”

시선을 바로 한 홍치국은 앞에 서 있는 김 종사관의 어깨를 두드려 주며 이야기했다.

“막사 하나를 치워 놓으라고 했으니, 인수인계를 다 끝내고 푹 쉬었다가 가도록 하게.”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며칠 뒤, 짐수레에 실린 병장기들은 초흐타 부족에 은밀히 전해졌다.

만포성이 바로 초흐타 부족과 거래를 하는 중심 거점이었는데 강변에 세워진 수십 채의 창고에는 노천 광산에서 캐낸 석탄이 가득 쌓여 있었다.

이렇게 모은 석탄은 봉황상단 소속 화물선들이 뱃길을 이용해 제철소가 건설되고 있는 중인 제물포로 실어 날랐다.

마음 같아서는 대용량 용광로를 만들고 싶지만 기본적으로 기술과 경험이 부족했기에 그럴 수 없었던 도현은, 현재 가능한 최대치로 십여 개 이상을 세워 필요한 수요를 충당하려고 했다.

그래서 일단 시험 삼아 먼저 한 개를 만들었는데, 이 정도 용량도 처음이다 보니 여러 번의 시행착오를 거쳐 어렵게 완성할 수 있었다.

여기저기 공사판이 벌어지고 있지만 여전히 황량한 벌판 한가운데에, 삼 층 높이의 고로가 그 위용을 뽐내며 서 있었다.

역사적인 현장을 직접 보기 위해 제물포까지 행차한 도현은, 멀리서도 눈에 확 띄는 커다란 용광로를 보며 감탄을 내뱉었다.

“대단하군. 저기서 쇳물이 얼마나 나온다고 했지?”

도현이 묻자 옆에 있던 유형원이 얼른 나서 대답했다.

“일만 천여 관(약 40톤)이옵니다.”

함께 내려온 신료들은 다들 놀란 표정을 지었다.

“허어, 그렇게나 많이 나오다니.”

“정말 엄청나구만.”

가장 큰 용광로를 보유한 병기창에서 연간 생산하는 철이 삼만 관이 채 안 되니 실로 어마어마한 양이었다.

제철소 건설에 부정적이었던 신료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놀라는 모습에 득의만만한 미소를 지은 도현은 유형원을 보며 이야기를 이었다.

“그럼 오늘 바로 쇳물이 나오는 건가?”

“그건 아닙니다. 안에 넣어 둔 철광석이 녹아서 쇳물이 되려면 하루 정도 시간이 걸립니다.”

“흐음, 그렇군.”

“저쪽에 점화식 준비를 해 놓았으니 가시지요.”

“그러지.”

용광로 앞으로 가자 제철소 건설에 참여한 장인과 인부 수천 명이 모여 있는 가운데 나무로 만들어진 단상 하나가 놓여 있었다.

단상 위에는 반구 형태의 원화로가 자리했다.

뜨거운 태양의 기운을 받아 쇠를 녹이라는 의미로, 수정 돋보기를 이용해 햇빛을 모아 불을 붙일 예정이었다.

원화로를 살펴본 도현은 유형원에게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채화는 누가 하기로 되어 있나?”

“병기장 박호가 할 것이옵니다.”

“그래…….”

잠시 생각을 하던 도현은 이내 뜻밖의 말을 했다.

“짐이 하겠네.”

“예? 무슨 말씀이시온지…….”

“채화를 짐이 직접 하고 싶단 말일세.”

“전하께서요?”

“앞으로 조선의 부국강병을 이루는 데 초석이 될 용광로의 성공적인 완성을 기원하는 의미에서, 짐이 불을 집어넣고 싶네.”

“아…….”

그러자 옆에 있던 영의정 박황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만류했다.

“아직 안전이 확인되지 않아 혹여 큰 사고가 날 수도 있는데, 나라의 근본이신 전하께서 나서시는 건 아니 될 일이옵니다.”

“맞사옵니다, 전하.”

“그냥 병기장에게 맡기시지요.”

다른 신하들도 직접 채화를 하는 걸 반대했지만 도현은 뜻을 꺾지 않았다.

“난 장인들의 기술을 믿소. 아무 일도 없을 테니 걱정하지 마시오.”

“하오나…….”

“유 참의.”

“예, 전하.”

“짐이 채화를 할 테니 그렇게 알고 준비하게.”

일이 갑자기 커져서 상당히 당혹스러웠지만, 도현이 그와 장인들을 믿는다는 것에 유형원은 자부심을 느끼며 고개를 숙였다.

“알겠사옵니다.”

잠시 뒤, 이야기한 대로 도현은 채화를 하기 위해 직접 단상 위로 올라갔다.

하늘을 향해 세 번 절을 한 도현은 손수 자수정으로 만든 돋보기를 가지고 원화로에 햇빛을 모았다.

얼마 안 있어 안에 넣어 둔 짚에서 가느다란 연기가 피어오르더니, 이내 시뻘건 불길이 일어났다.

화르르륵.

그러자 도현은 한쪽에 시립해 있던 병기장 박호가 건네주는 채화봉을 집어 정성스럽게 불을 붙였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채화봉을 들고 용광로 쪽으로 걸어간 도현은 긴장한 얼굴로 쳐다보는 사람들을 둘러보며 크게 외쳤다.

“이것은 단순한 횃불이 아니라 이 용광로를 만든 자들의 열정과 땀이다. 이 노력이 쇠도 녹이는 뜨거운 불길로 다시 태어나, 조선의 찬란한 미래가 될 것이다!”

“우와아아!”

임금인 도현이 자신들의 고생을 인정해 주고 영광을 돌리자, 모여 있던 장인과 인부들은 환호성을 내질렀다.

흥분에 휩싸인 사람들의 함성이 가득 울리는 가운데, 도현은 손에 든 채화봉 끝을 화입봉에 갖다 대어 불을 붙인 다음에 풍구 속으로 밀어 넣었다.

그렇게 조선 최초의 용광로에 불이 지펴졌다.

이제부터는 결과가 나오길 조용히 기다리는 것만 남았다.

만약 뭔가 잘못되어 예정된 시간이 지나도 시뻘건 쇳물이 나오지 않는다면, 용광로 전체를 부수고 다시 지어야만 했기에 다들 마음을 놓지 못했다.

도현 또한 한쪽에 지어진 숙소에서 잠시 쉬라는 권유를 뿌리치고 용광로 앞에 천막을 치고는, 잠도 자지 않은 채 초조한 얼굴로 결과를 기다렸다.

그만큼 절박하다는 뜻이기도 했는데, 지금까지 공사에 들어간 돈도 많았지만 무엇보다 군비 증강과 경제 활성화 모두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는 용광로 가동이 실패한다면 그가 추진하고 있는 개혁이 큰 타격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잠시 눈을 좀 붙이시지요.”

칠현이 뜨거운 차를 건네며 하는 말에 도현은 차가운 새벽 공기에 언 몸을 살짝 풀며 말했다.

“괜찮아. 다른 사람들도 많이 추울 텐데 따뜻한 차라도 갖다 주도록 해.”

“그렇지 않아도 나눠 주고 있습니다.”

칠현의 말에 주위를 둘러보자, 행차를 따라온 궁인들이 따뜻하게 끊인 차가 담긴 나무통을 들고 다니면서 사람들에게 나눠 주고 있는 것이 보였다.

“잘했어.”

“그런데 저렇게 큰 용광로에서 정말 쇳물이 나올까요?”

우려와 기대가 반쯤 섞인 목소리로 칠현이 이야기하자, 도현은 주위에 횃불을 환하게 밝혀 형태가 뚜렷이 보이는 용광로에 시선을 고정시키고는 입을 열었다.

“잘될 거야. 아니, 어떤 일이 있어도 성공해야만 돼.”

어느새 새벽이 지나 아침 해가 떠오르며 예정된 시간이 임박하자, 사람들은 긴장한 얼굴로 용광로를 주시했다.

도현은 신하들과 함께 쇳물이 뿜어져 나오는 것을 잘 볼 수 있게 연단 위로 올라가 자리를 잡았다.

곧 개방될 사출구를 쳐다보며 그는 가슴이 쿵쾅쿵쾅 뛰고 입술이 바짝 마르는 것을 느꼈다.

크게 환호성을 지를 것인지 아니면 절망감을 느끼게 될지의 기로에 선, 아주 피를 말리는 순간이었다.

도현뿐만 아니라 주위에 모인 사람들 모두가 숨을 죽이고 시선을 집중한 채 결과를 기다렸다.

“벌써 모래시계를 세 번이나 뒤집었는데 왜 아직 안 나오지?”

“그러게. 이거 뭐가 잘못된 거 아냐?”

“예끼, 부정 타게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조용히 기다려.”

“으음.”

그렇게 얼마쯤 지났을까. 초조함이 실망과 우려로 바뀌어 갈 때쯤, 갑자기 커다란 굉음이 울리며 출선구에 구멍이 뚫렸다.

퍼엉!

츄아아악.

눈이 부시도록 아름답고 강렬한 섬광이 뿜어져 나오더니 이어서 용암처럼 시뻘겋게 달아오른 쇳물이 이글거리며 흘러나왔다.

“됐어!”

용광로 앞에서 이것을 지켜보던 도현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고, 사람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감격해 목청을 높여 환희에 찬 천세를 불렀다.

“성공이다!”

“정말 쇳물이 나오다니.”

“천세! 천세!”

“와아!”

시뻘건 불똥이 사방으로 튀었다. 뜨거운 열기가 확 느껴지는 쇳물은 미리 만들어 놓은 도랑을 따라 왼편에 세워진 공장으로 흘러갔다.

“유 참의, 정말 수고 많았네.”

흥분한 도현이 얼굴 가득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유형원도 고개를 숙이면서 들뜬 목소리로 대답했다.

“다 주상 전하께서 전폭적인 지원을 해 주신 덕분입니다.”

“앞으로도 계획한 대로 사고 없이 제철소를 완성해 주게.”

“성심을 다하겠나이다.”

“그래, 경만 믿겠네.”

유형원의 어깨를 두드려 준 도현은 다시 계속해서 흘러나오는 뜨거운 쇳물을 쳐다보며 가슴이 벅차오르는 걸 느꼈다.

이렇게 생산된 쇳물은 공장에서 약간의 가공을 거친 다음 남한산성에 있는 병기창으로 가져가 신형 조총과 대포 등 각종 무기로 만들어졌다.

가장 문제가 됐던 철이 안정적으로 공급되자 생산량도 급격하게 늘어났고, 신형 무기 배치 또한 원활하게 이루어졌다.

용광로 가동 성공의 영향은 이뿐만이 아니었는데, 그동안 병기창에 철을 대느라 다른 것을 만들지 못했던 대장간들이 본업으로 돌아가 농기구 등 민간에 필요한 물건을 제작하면서 상업 발전에 또 다른 촉매제가 되었다.

큰 명절인 설을 앞둔 어느 날, 북방 육진 중 하나인 경원성에 속한 기병 다섯 명이 눈 덮인 대지를 이동하며 압록강 부근을 순찰하고 있었다.

국경 지역인 데다가 강 너머에 거주하는 야인들이 수시로 침범해 노략질을 하는 곳이었기에, 조선군은 항상 경계 태세를 유지하며 이상 동향이 없는지를 살폈다.

특히나 지금처럼 한겨울에는 더 위험했는데, 수렵 활동을 하는 야인들의 특성상 식량을 구하기 어려운 계절이고 자연방어선 역할을 해 주는 강마저 추위에 꽁꽁 얼어붙어서 손쉽게 조선 쪽으로 넘어와 약탈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선군은 더욱 긴장하며 순찰 활동을 강화했다.

“조용한데요.”

병사 한 명이 하얀 입김을 내뿜으며 하는 말에, 순찰대를 지휘하던 병장은 주위를 둘러보면서 입을 열었다.

“저기 언덕 너머까지만 확인하고 돌아가도록 하지.”

“예.”

대답과 함께 기병들은 왼편에 보이는 언덕으로 군마를 몰아갔다.

발목까지 쌓인 눈 때문에 이동이 쉽지 않은 가운데, 아까 이야기를 했던 병사가 병장을 보며 말을 걸었다.

“병장님은 좋으시겠습니다.”

“뭐가.”

“설날이 지나고 나면 혼례를 올리시기로 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러자 다른 병사도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여자한테는 아무 관심도 없는 것처럼 군무에만 열중하더니, 언제 그렇게 호박씨를 까셨는지 몰라.”

“그러게.”

병사들의 놀림에 얼굴이 빨개진 병장은 괜히 헛기침을 하며 화제를 돌렸다.

“흠흠, 임무 수행 중이니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주위나 잘 둘러봐.”

“예, 예.”

“큭큭큭.”

그렇게 추위와 피곤함을 농담으로 이겨 내며 언덕을 막 넘은 순찰대는 뜻밖의 광경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헉!”

“야, 야인들이다.”

야트막한 언덕 너머에는 짐승 가죽으로 옷을 해 입은 거란족 전사들이 막 강을 넘어와 머물고 있었다.

못해도 백 명은 훨씬 넘어 보이는 숫자에 순찰대가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사이, 그들을 발견한 거란족 전사들 중 일부가 대형에서 빠져나와 언덕 쪽으로 곧장 말을 달려왔다.

“이런! 후퇴해, 어서 성으로 돌아가 이 사실을 알려야 한다!”

“이랴!”

고작 다섯 명으로 몇 배나 되는 적을 상대할 수는 없었고 순찰대의 임무는 위협이 포착되면 그걸 최대한 빨리 본진에 알리는 것이었기에 현명한 판단이었다.

기병들은 후퇴 지시가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말 머리를 돌려 경원성 방향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높이 쌓인 눈 때문에 마음대로 속력을 내지 못했고 점점 추격해 오는 거란족 전사들과 거리가 가까워졌다.

“젠장!”

힐끔 뒤를 돌아본 병장은, 눈길을 헤치며 장시간 주위를 순찰하느라 군마들이 지친 상태라 이대로 빠져나가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안장 옆에 달아 둔 각궁과 편전을 꺼내 들었다.

“화살을 쏴서 추격을 조금이라도 늦춰라!”

“옛.”

국경 지대에 있으며 많은 경험을 쌓은 노련한 병사답게, 기병들은 능숙한 자세로 안장 위에서 상체를 뒤로 돌려 편전을 쏠 준비를 했다.

편전은 조선이 자랑하는 비밀 병기 중 하나로, 대나무를 반으로 쪼갠 통아桶兒에 길이 86cm 안팎의 작은 화살을 넣어 쏘는 무기였다.

최대 사정거리가 무려 일천 보(1,200m)에 달할 뿐만 아니라 웬만한 갑옷은 그대로 뚫어 버릴 만큼 관통력이 셌으며, 작은 크기 때문에 상대가 막거나 피할 수가 없는 아주 치명적인 무기였다.

“쏴!”

슈슈슉! 슈슉!

바람을 가르는 소리를 내며 편전이 날아가자 얼마 안 있어 거란족 전사들 몇 명이 피를 뿌리며 말에서 굴러떨어졌다.

“컥!”

“크윽.”

이히히힝.

하지만 쫓아오는 거란족 전사들의 숫자는 여전히 많았고, 옆에서 동료가 죽어 가는데도 적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달리는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양쪽의 거리는 점점 가까워졌고 이내 상대편에서도 조선군을 향해 화살을 쏘기 시작했다.

몸을 뒤로 돌려야 하는 조선군과 달리 그들은 말을 달리는 자세 그대로 활을 쏘는 데다, 숫자마저 훨씬 많았기에 아주 치명적이었다.

“으악!”

“큭.”

“천백아!”

방금 전까지 농담을 하던 부하가 화살에 맞아 쓰러졌지만 병장은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고 외면한 채 이를 악물며 말에 채찍을 가했다.

“어떻게든 이 사실을 절제사 어른 영감에게 알려야 돼. 저렇게 대규모로 도강한 걸 모르고 있다가 기습이라도 당하면 큰일이야!”

경원성에 있는 동료들과 혼례를 약속한 정혼녀를 떠올린 병장은 필사적으로 타고 있는 군마 옆구리를 발로 찼다.

여기서 자신과 부하들이 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어떻게 해서든 거란족의 침입을 알려야 된다는 생각에 병장은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간절한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어느 순간 섬뜩한 느낌과 함께 무언가가 등을 쑤시고 들어온 것이다.

퍽.

“으윽.”

거란족 전사가 쏜 화살이 그의 등에 명중해 가슴을 뚫고 나왔다.

답답한 신음을 내뱉은 병장은 시뻘건 피를 쏟아 내며 필사적으로 고삐를 잡았지만, 얼마 가지 못해 손에서 힘이 빠지며 그만 말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털썩.

“으…….”

눈밭에 떨어진 그는 정신이 흐릿해지는 가운데 경원성이 있는 남쪽을 바라보며, 푸른 하늘과 겹쳐져 신기루처럼 떠오른 정혼녀의 얼굴을 붙잡으려고 앞으로 손을 뻗으면서 힘없이 중얼거렸다.

“보, 복녀야, 미안하다.”

말을 끝맺는 순간 옆으로 다가온 거란족 전사가 커다란 장검을 휘둘러 그의 목을 그대로 베어 버렸다.

순찰대를 전멸시킨 거란족 전사들은 육진 중 하나로 천여 명이 넘는 병력이 주둔하고 있는 경원성을 제외한 주변 고을 네 곳을 습격해, 곡식과 가축을 약탈한 뒤 주민 칠십 명을 강 너머로 잡아갔다.

뒤늦게 침입 사실을 파악한 경원 성에서 병력을 내보냈지만, 이미 거란족 전사들은 실컷 약탈을 하고 돌아간 뒤였고 고을은 잿더미로 변해 있었다.

며칠 뒤 함경도 병마절도사의 장계를 가진 전령이 비보를 알리기 위해 급히 한양으로 말을 몰았다.

신년을 맞아 새벽 일찍 일어나 왕실 어른들께 문안 인사를 올린 도현은 자신의 거처로 돌아와 어느새 제법 자란 자식들한테 세배를 받았다.

“아바마마, 어마마마, 앞으로도 몸 건강히 오래오래 사셔요.”

예쁜 새 옷을 차려입고 모인 아이들이 나란히 서서 한목소리로 새해 첫인사를 합창했다.

제일 나이가 많은 숙안 공주부터 시작해서 유일한 아들인 연 그리고 막내로 태어나 애교 하나는 만점인 숙휘 공주까지 보고만 있어도 배가 부를 만큼 사랑스러운 자식들이었다.

“오냐, 너희들도 어디 아픈 데 없이 무럭무럭 커 다오. 그것이 이 아비의 유일한 소원이다.”

“네에.”

“전하, 아이들이 아침 일찍 일어나 준비한다고 피곤했을 텐데 얼른 앉으라 하시지요.”

“그래, 다들 자리에 앉아라.”

도현의 허락이 떨어지자 세 아이들은 제각기 마련된 방석에 엉덩이를 붙이고 자리를 잡았다.

“나랏일이 바빠 요즘 너희들 얼굴 보기도 힘들었는데, 이렇게 가족이 다 같이 모이니 참으로 좋구나.”

도현은 허허 웃으며 아이들에게 물었다.

“요즘 각자 어떻게 지내는지 말해 보아라. 숙안은 아직도 자수 대신 책 읽는 것이 취미더냐?”

숙안 공주는 어릴 때부터 사내 못지않게 총명하기로 유명하여, 규방 아가씨들이 자수 따위를 배우는 동안 사서삼경 같은 서책을 손에 들고 하루 종일 암송해 대는 통에 다른 두 동생들이 괴짜라며 놀려 대고는 했다.

“네, 아바마마. 얼마 전엔 청나라에 다녀온 역관이 가져온 새 서책을 손에 넣었는데, 그게 또 얼마나 재밌는지…….”

책 이야기만 나오면 들떠서 말이 많아지는 것이 숙안 공주의 버릇이었다.

그것을 익히 알고 있는 중전은 머리가 아프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됐으니 그만하여라. 그보다 내가 전에 내준 숙제는 다 했느냐?”

“으…… 아, 아뇨.”

“자, 자. 새해 아침부터 잔소리를 할 필요는 없잖소, 중전.”

도현이 중간에 끼어들어 두 사람을 말렸다.

“그런데 무슨 숙제를 내줬소?”

“숙안이 바느질을 못하는 것은 익히 알고 있으니, 그러면 그림은 어떨까 싶어 난을 그려 오라 했습니다.”

그런데 감감무소식이라며 투덜대는 중전을 도현이 달랬다.

“제 성미에 맞지 않는 일을 억지로 강요할 수는 없잖소.”

“그래도 벌써 열 살이 넘었는데 몸에 익힌 재주가 하나도 없으니 걱정스러울밖에요. 저래 가지고 제대로 시집이나 갈 수 있을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또 어떻소. 숙안은 머리가 좋고 책도 많이 읽어 아는 게 많으니, 곁에 두고 오래오래 말동무 삼으면 되지.”

“전하.”

아직 어린아이라 하지만 오륙 년이 지나면 혼처를 알아봐야 할 정도로 자랄 텐데, 설마 시집도 안 보내고 끼고 살 작정이냐며 중전이 미간을 찌푸렸다.

“농담이오, 농담. 제 앞가림 정도는 충분히 할 아이이니 벌써부터 장래를 걱정하지는 말라는 소리요.”

더 이상 말이 길어지면 안 되겠다 싶어 도현은 재빨리 연에게 화제를 돌렸다.

“그럼 우리 아들은 어떠한지 궁금하군.”

“네?”

누나가 고역을 당하는 걸 흥미진진하게 구경하고 있던 연은 갑작스러운 물음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 누나는 과거를 봐도 될 정도로 공부에 열심인데 넌 어떠하냐는 말이다.”

“아, 그게…….”

“설마 사내가 되어 가지고, 아녀자보다 못하다는 소리는 안 하겠지?”

“음…….”

어떻게 빠져나갈 길이 없을까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던 연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불쑥 말했다.

“아! 저, 드디어 사부님에게 말을 타고 뛰어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어요.”

“사부님?”

누구를 말하는 건가 싶어 도현이 되묻자 중전이 곁에서 속삭였다.

“예전에 후원에서 작은 소동이 있었지 않습니까. 그때 이후로 군관에게 말 타는 것을 배우러 다니더니 어느새 사부님이라 부르며 따르더군요. 그러지 말라고 타일러도 고치지 않기에 포기했습니다.”

“내가 준 망아지 말이로군. 그럼 그때 고삐를 잡고 있던 군관이 계속 연이를 가르치는 건가?”

“네.”

“하하, 나중에 상을 내려야겠군.”

그렇게 말한 도현은 연에게 물었다.

“그럼 이제 말에서 떨어지는 일은 없다, 이 말이냐?”

“그럼요. 처음엔 다른 사람이 고삐를 잡아 줬지만 지금은 제 스스로 잡고 걷는 것뿐만 아니라 뛰기까지 하는 걸요!”

“말 타는 게 재미있는 모양이구나.”

“네, 엉덩이가 좀 아프긴 해도 말에 올라타면 시야가 높아져서 기분이 굉장히 좋아요.”

“오라버니는 나중에 천하를 호령하는 장군이 되고 싶대요. 그러니까 책 같은 건 읽지 않아도 된다고 수업 시간에 맨날 마구간으로 도망쳐요.”

“야, 숙휘 너!”

“왜?”

“비밀이라고 했잖아!”

“어마마마께 비밀이라고 그랬지, 아바마마까지 포함이라곤 안 그랬잖아.”

“아유, 이게.”

“오라버니, 바보!”

약이 오른 연이 주먹을 들어 딱밤을 때리려고 하자 숙휘가 우와앙 울음을 터트렸다.

“이런, 이런.”

삽시간에 주위가 시끌벅적해지자 당황한 중전과는 달리 도현은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큭큭 웃었다.

“연, 숙휘, 두 사람 다 그만하지 못하겠니.”

“하지만 어마마마, 숙휘가 먼저!”

“흐앙! 언니이, 오라버니가 괴롭혀.”

중전이 연을 꾸짖는 동안 숙휘는 재빨리 언니인 숙안에게 안겨 엄살을 피웠다.

입으로는 울음소리를 내면서 얼굴은 쌤통이란 표정으로 혀를 내밀자 그 모양을 본 연이 또 욱해서 씩씩거렸다.

“얘들이 진짜! 송구합니다, 전하.”

“괜찮소, 중전. 아이들은 원래 이래야 제맛이지. 다들 활달해서 보기 좋기만 하구려.”

외동으로 자란 도현은 형제자매가 있는 집을 어렸을 때부터 부러워했기에, 다소 시끄럽긴 해도 정겹게 아옹다옹하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그때 문간에 서 있던 칠현이 소리 없이 다가와 그에게 말을 건넸다.

“전하.”

“응?”

고개를 드니 칠현이 무슨 할 말이 있는 듯 머뭇거리는 표정을 지었다.

“뭐야? 급하지 않은 일이면 나중에 말하고, 급한 일이라도 이따 오후에 처리할 테니 그냥 미뤄 놔.”

가족끼리의 시간을 방해받는 것은 자주 있는 일이지만, 적어도 새해 아침만큼은 여유롭게 지내고 싶은 마음에 도현은 퉁명스레 대꾸했다.

하지만 대충 눈치를 읽은 중전이 재빨리 끼어들어 말했다.

“숙휘의 옷이 더러워졌으니 갈아입히고 오겠습니다. 자, 연이랑 숙안도 얼른 이리 오너라.”

두 아이가 싸우느라 찻잔을 상 위에 엎기는 했으나, 고작해야 물방울이 튀었을 뿐이지 굳이 옷을 갈아입을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일부러 마음을 써 주는데 굳이 고집을 피워 가지 말라고 할 이유도 없어, 도현은 그러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중전이 아이들을 데리고 자리를 비켜 주자 도현은 기분이 상했는지 약간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일인데?”

“함경도에서 급한 장계가 올라왔는데, 아무래도 빨리 보셔야 될 것 같사옵니다.”

함경도면 국경과 접한 곳이었기에 도현은 안색을 굳혔다.

“가져와 봐.”

“네.”

칠현이 장계가 놓인 나무 쟁반을 조심스럽게 건넸고, 그것을 집어 든 도현은 거칠게 끈을 풀어 두루마리를 펼쳤다.

내용을 읽어 내려간 그는 고을 네 곳이 폐허로 변하고 수십 명이 죽거나 노예로 끌려갔다는 보고에 크게 분노했다.

꽝!

“일이 이 지경이 될 때까지 경원 성주는 도대체 뭘 하고 있었던 거야!”

“전하, 고정하시옵소서.”

“당장 비변사 회의를 소집해!”

도현의 노성에 화가 단단히 났다는 걸 눈치챈 칠현은 얼른 허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옛.”

설날이라 입궐하지 않고 자택에서 가족들과 지내고 있던 비변사 소속 대신들은 급히 대궐로 들어오라는 전갈에 허겁지겁 관복을 챙겨 입고 달려왔고, 숙직을 서고 있는 무관을 통해 거란족 일부가 강을 넘어와 국경 지역 고을을 약탈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는 모두 표정이 딱딱하게 굳은 채 도현이 오기를 기다렸다.

“주상 전하 납시오.”

칠현의 외침과 함께 도현이 문을 벌컥 열고 회의실 안으로 들어오자 모여 있던 신하들은 황급히 의자에서 일어나 예를 갖추었다.

비어 있는 상석으로 가서 앉은 도현은 대소신료들을 천천히 훑어보고는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다들 이야기는 들었겠지.”

“예.”

“척박한 땅에서 힘들게 사는 걸 불쌍히 여겨 그냥 내버려 두었는데, 은혜도 모르고 수시로 국경을 넘어와 약탈을 일삼는 건 물론이고 아국 백성들을 죽이고 노예로 끌고 가기까지 하다니. 더 이상 거란족의 행동을 방관할 수는 없소. 이번 기회에 왜구들처럼 본때를 단단히 보여 줘 다시는 이 같은 무도한 짓을 하지 못하도록 만들어야 될 것이오!”

도현의 성격상 그냥 넘어가지는 않을 거라 예상했지만, 남해도(쓰시마)를 점령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또다시 전쟁을 벌이겠다고 하자 신하들은 우려를 표했다.

당장 병조판서 임경업이 반대를 했다.

“신 또한 거란족의 행동에 화가 나지만, 남해도 원정의 피로가 아직 회복되지도 않았는데 다시 군을 일으키는 것은 무리이옵니다.”

“지금은 때가 아닌 것 같사옵니다.”

그러자 도현은 눈썹을 위로 치켜세우고는 강하게 질책했다.

“왜들 이렇게 허약한 소리만 하는 거요! 아무리 지치고 어려운 상황이라고 해도, 무릇 나라의 녹을 먹는 군대라면 백성들이 위험에 처했을 때 그 어떤 것도 물리치고 달려가 지켜 줘야 하는 것 아니오!”

“…….”

“짐도 마냥 편한 것은 아니오. 하지만 거란족이 국경을 넘어와 고을을 불태우고 백성까지 잡아갔는데도 그들을 벌하지 않고 내버려 둔다면, 놈들은 우리를 우습게 보고 앞으로도 수시로 도강을 해 약탈을 일삼을 것이오. 그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이번에 일을 저지른 부족을 찾아내 본보기로 처절한 응징을 가해야 될 것이오!”

이미 정벌을 하기로 도현의 결심이 확고하게 섰다는 것을, 신하들은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었다.

한번 마음을 먹으면 여간해서는 고집을 꺾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데다, 솔직히 반대는 했어도 거란족의 약탈에 분노하고 있던 신하들은 이제 어떻게 하면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을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어디까지 토벌을 하실 생각이옵니까?”

주작단 단장인 이완의 물음에 도현은 약간의 주저함도 없이 바로 대답했다.

“약탈을 한 부족을 찾아내 완전히 토벌하는 건 물론이고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강 너머에 요새를 쌓고 병사를 주둔시켜 안전지대를 확보할 것이오.”

그러면서 도현은 탁자 위에 펼쳐 놓은 지도의 한 부분을 손가락 끝으로 가리켰다.

“최소한 여기까지는 우리 권역으로 편입시켰으면 하오.”

그가 지목한 곳은 바로 미래에 블라디보스토크가 생기는 지점이었다.

단순한 보복을 넘어, 예전 세종대왕이 육진 개척을 했던 것처럼 오랑캐들을 밀어내고 영토를 확장하려 한다는 것을 알게 된 신하들은 다들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전하, 이건…….”

“자칫 잘못하면 청국을 자극해 전쟁이 벌어질 수도 있는 일이옵니다.”

근위대 사령인 박영식이 우려 섞인 목소리로 이야기했지만, 도현은 얼굴색 한번 바뀌지 않고 아주 태연하게 말했다.

“청국은 내부 반란을 수습하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을 테니 염려할 것 없소. 삼국시대부터 우리 민족의 땅이었던 곳을 다시 되찾겠다는데 그들이 뭐라고 할 것인가! 그리고 나중에라도 문제가 된다면 거란족 핑계를 대면 될 것이오.”

확고한 도현의 의지를 엿본 신하들은 청나라의 반응을 염려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의 뜻에 수긍하는 바가 있었기에, 더 이상 반대하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알겠사옵니다.”

“그럼 구체적인 토벌 계획을 세워 보고하시오.”

“네, 전하.”

좌중에 모인 신하들은 모두 몸을 숙여 절하며 크게 답했다.

이어서 열린 대전 회의에서도 신하들의 가벼운 반대가 있었지만, 도현은 강하게 밀어붙여 토벌을 결정했다.

“자, 시작하게.”

상석에 자리한 도현의 말에 이완이 고개를 살짝 숙였다가 바로 하며 입을 열었다.

“먼저 국경 고을을 약탈한 부족이 어딘지 알아냈사옵니다.”

가장 기초적이면서도 중요한 정보였기에 도현은 눈을 반짝였다.

“어떤 놈들인가?”

“거란족 중에서도 아주 호전적인 것으로 유명한 우라타 부족이었습니다. 그런데 조사 중에 알아낸 사실입니다만 단순히 식량이 없어서 약탈에 나선 것이 아닌 듯합니다.”

“그럼 뭔가?”

“원래 자신들보다 약했던 초흐타 부족이 저희와 교역을 하면서 급격히 세력을 불리자 불만을 가지고 시비를 걸어온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설명을 들은 도현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허어, 그럼 우리한테 꼬장을 부린 것인가?”

도현의 자유분방(?)한 화법을 어제오늘 겪어 보는 것이 아니었기에, 이완을 비롯한 신하들은 그러려니 하며 넘어갔다.

“표현은 조금 그렇지만 맞습니다.”

그러자 도현은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리며 이를 부드득 갈았다.

“이것들이 우릴 아주 졸卒로 보고 있군.”

“흠흠.”

“그것보다는 우려한 대로 초흐타 부족의 힘이 커지면서 다른 세력이 급격히 위축되고 있다는 것이 더 정확할 겁니다.”

이완 단장의 지적에 도현은 미간을 모았고 다른 신하들도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문제는 저희가 우라타 부족을 토벌한다면 잔존 세력과 영향력 아래에 있는 소규모 부족들이 초흐타 쪽에 붙어 버릴 가능성이 크다는 점입니다. 그러면 자칫 초흐타 부족이 몇 년 안에 거란족을 통일시키고 강력한 세력으로 부상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최악의 경우를 상정해서 이야기한 것일 테지만, 역사적으로 거란이나 여진처럼 사방에 흩어져 생활하는 유목 민족이 하나의 기치 아래 모이게 되면 엄청난 파괴력을 보였기에 도현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이것만큼은 피해야 했다.

“그럼 토벌을 하지 말자는 건가?”

도현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짜증스럽게 말하자 오른편에 앉아 있던 임경업이 대신 입을 열었다.

“그게 아니라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법으로 토벌을 해야 된다는 이야기이옵니다.”

“구체적으로 설명해 봐.”

“저보다는 작전을 처음 생각해 낸 당사자가 말씀드리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임경업이 시선을 옆으로 돌리자, 제일 말석에 앉아 있던 젊은 무관이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 도현을 보며 군례를 취했다.

“비변사 사직에서 녹을 먹고 있는 고만정이라고 하옵니다.”

눈에 익은 얼굴에 잠시 생각을 더듬던 도현은 이내 그가 누구인지를 떠올렸다.

“자네는 지난번 남해도 원정 때 상단이 보유한 선박을 이용해 보급품을 옮기자는 계책을 내놓은 이가 아닌가?”

임금인 도현이 자신을 기억하고 있음에 고만정은 황공하다는 듯이 허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그렇사옵니다.”

“호오, 이번에는 또 어떤 기발한 생각을 해 냈는지 기대가 되는군. 어디 이야기를 해 봐.”

그가 흥미로운 표정을 지으며 쳐다보자 고만정은 약간 부담스러워하다가 금방 평정심을 되찾고 입을 열었다.

“이번 토벌의 핵심은 약탈을 자행한 우라타 부족을 멸하는 것이 아니옵니까?”

“그렇지.”

“동시에 저희의 군사행동으로 초흐타 부족이 잔당을 흡수해 세력을 늘리는 것을 막아야 되니, 적이 대응하지 못하게끔 신속하게 삼면으로 압박해 들어가 포위 섬멸을 해야 된다는 것이 제 의견이옵니다.”

“어떤 식으로 포위 공격을 하겠다는 거지?”

도현이 눈을 반짝이며 관심을 보이자 고만정은 미리 준비해 온 지휘봉으로 탁자 위에 펼쳐 놓은 지도를 짚으면서 설명을 이어 갔다.

“거란족 같은 유목 부족을 토벌할 때 가장 골치 아픈 것이, 한곳에 정착하고 사는 게 아니기 때문에 공격을 하면 바로 거주지를 버리고 다른 지역으로 도망친다는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군을 세 개로 나눠 온성과 경흥, 경원에서 각각 출전해 학이 크게 날개를 펼치는 형상으로 상대를 동시에 압박해 들어가는 것이옵니다. 이러면 적은 포위망을 빠져나가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다가 안에 갇혀 모조리 섬멸될 것이옵니다.”

이야기를 다 들은 도현은 무릎을 치며 감탄을 내뱉었다.

탁.

“그것 참 묘안이군!”

“작전대로만 된다면 토벌도 성공적으로 끝낼 수 있고, 잔당이 초흐타 부족에 흡수될 일도 없으니 이거야말로 일석이조가 아니겠사옵니까?”

근위대 사령인 박영식의 말에 도현은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고 사직이라고 했나?”

“예, 전하.”

“매번 이런 뛰어난 계책을 생각해 내다니 재주가 정말 대단하군. 이런 인재를 고작 사직 벼슬에 놔둘 수는 없지. 이 시간 이후로 자네를 정사품 군호직에 제수하고 토벌군 참모를 맡길 터이니 재능을 더욱더 크게 펼치도록 하라.”

한 번에 품계를 무려 두 개나 올려 주는 파격적인 승진에 고만정은 약간 놀라면서도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병판.”

“말씀하시옵소서.”

“고 군호가 낸 작전대로 토벌을 진행하시오. 그리고 시간을 길게 끌면 상대가 눈치를 챌 수도 있고, 동북 지방의 특성상 사월이 지나면 수풀이 우거지고 여름이 되면 전쟁을 하기 힘들 테니 그 전에 출전할 수 있도록 준비하시오.”

“알겠사옵니다.”

“흐음, 포위 공격을 하려면 토벌군 규모가 커져야 되겠군.”

시선을 다시 받은 고만정은 침착하게 이야기했다.

“효과적으로 작전을 수행하려면 각 군당 최소 오천 명의 병력이 필요하고, 절반 이상을 기동력이 좋은 기병으로 채워야 하옵니다.”

“그럼 모두 일만 오천 명이군.”

“예.”

“함경도를 맡고 있는 일 군에 그만한 기병이 있나?”

병조판서인 임경업이 대답했다.

“다행히 얼마 전에 편성이 모두 끝나 각 사단별로 기병 오천 명을 보유하고 있사옵니다.”

한 개의 군단이 세 개의 사단으로 구성되어 있으니 총 일만 오천 명의 기병이 있다는 뜻이었다.

“음.”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한쪽 손으로 턱을 매만지면서 잠시 고심을 하던 도현은 이내 진지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각 사단에서 기병을 삼천씩 차출해서 총 이만 육천을 동원하도록 하지. 그리고 토벌대가 빠져나가면 함경도 방어가 취약해질 수 있으니 황해도에서 임시로 한 개의 사단을 올려 보내 보완을 하면 되겠군.”

“그렇게 하겠사옵니다.”

“좋아. 준비 기간이 촉박하지만, 경들이 노력해 주는 만큼 토벌에 나서는 병사들의 목숨을 살릴 수 있다는 마음가짐으로 열심히 맡은 바 임무를 수행해 주게.”

“명심하겠사옵니다, 전하.”

손에 깍지를 낀 도현은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으로 지도에 그려진 동북 지역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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