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 진출 2
토벌 목표와 계획이 확실하게 결정되자, 조선군은 비변사를 중심으로 빠르게 전쟁 준비를 갖추어 나갔다.
기존 육진 너머 두만강 이북 지역의 지형과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거란족들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었기에, 제일 먼저 주작단을 투입해서 정보를 수집했다.
자칫 이런 움직임이 우라타 부족에게 토벌이 있을 거라는 사실을 미리 알려 주는 것이 될 수도 있었기에, 최대한 은밀하게 행동했다.
그리고 토벌군 최고 지휘관은 함경도 병마절도사이자 일 군단장인 김정태가 맡았다.
중앙에서 지휘관을 내려보낼 수도 있었지만 그러면 상대가 이상 조짐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었고, 무엇보다 현장 상황을 가장 잘 아는 인물이었기에 임경업을 비롯한 여러 무관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그를 토벌군 대원수로 삼았다.
이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조선에 우호적인 초흐타 부족을 통해 끌려간 조선인들을 풀어 달라는 사신을 보내며 유화적인 행동을 보이는 연막작전을 펼쳤다.
“여기서부터가 우라타 부족의 영역이라고 합니다.”
사직 벼슬을 가진 무관으로 사신 임무를 맡은 최승주는 역관의 이야기에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는, 옆에 있는 유약해 보이는 인상의 남자에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밤에 지형도를 그려서 남겨야 되니 주변 풍경을 꼼꼼히 살피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나으리.”
긴장한 얼굴의 남자는 화공畵工으로, 우라타 부족 지역의 지형을 몰래 그려 두기 위해 데려온 자였다.
조선에서 보낸 사신은 최승주를 포함해 열 명 정도로 아주 단출했지만, 길잡이 겸 호위로 따라온 초흐타 부족 전사 스무 명까지 합하자 규모가 제법 되었다.
그렇게 하루를 더 가자 최승주 일행은 우라타 부족 전사들과 조우할 수 있었다.
“온성까지는 그래도 견딜 만했는데 역시 북방이다 보니 추위가 장난이 아니군요.”
함께한 시간이 제법 되다 보니 이제 많이 친해진 역관의 말에 최승주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이 제일 추울 때니 더 그럴 게야.”
그때 초흐타 부족 전사들을 이끄는 야율치오가 한쪽 손을 들어 올리며 행렬을 멈춰 세웠다.
“무슨 일이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야율치오는 초흐타 부족장의 셋째 아들로, 우라타 부족이 사신한테 위해를 가하거나 함부로 대하지 못하도록 일부러 일행에 끼워 넣어 주었다.
사내답게 선이 굵은 인상의 야율치오는 그를 돌아보며 약간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누군가 이리로 빠르게 접근하고 있는데 아무래도 우라타 부족 전사 같소.”
“으음.”
싸우러 온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는 아무도 몰랐기에 최승주는 정색을 했고, 야율치오는 검을 뽑아 들며 만약의 사태에 대비했다.
초흐타 부족 전사들이 원형의 진을 만드는 것을 보고 최승주도 함께 온 호위들한테 지시를 내렸다.
“경계 태세를 갖추되 명령이 있기 전에는 절대 먼저 무기를 뽑지 않도록 하게.”
“옛.”
호위는 다 합쳐서 다섯 명밖에 안 됐지만 일 군단에서도 가려서 뽑은 정예들이었다.
타고난 사냥꾼의 피가 흐르는 거란족답게, 얼마 있지 않아 말발굽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며 일단의 기마가 나타났다.
두두두두.
얼추 서른 명은 넘어 보였는데 사냥한 짐승 가죽으로 옷을 해 입은 것은 초흐타 부족과 똑같았지만 머리 장식이 약간 달랐다.
이히히힝.
우두머리로 보이는 우락부락한 인상의 사내가 스무 보쯤 떨어진 곳에 말을 멈춰 세운 후, 앞으로 나와 눈을 부라리면서 큰 소리로 외쳤다.
“여긴 우리 우리타 부족의 영역이다. 싸움을 걸려는 것이 아니라면 당장 꺼져라!”
초흐타 부족 전사들을 의식한 다분히 호전적인 말이었는데 이쪽에서는 야율치오가 앞으로 나서서 지지 않고 눈싸움을 하듯 상대를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내 이름은 야율치오라고 한다. 조선국에서 온 사신을 데리고 왔으니 길을 열어라!”
순간 상대는 살짝 인상을 쓰며 뒤편에 있는 사신 일행에게 시선을 주었다가 이내 야율치오를 보며 말했다.
“야율이라는 성을 쓰는 것을 보니 초흐타 부족장의 친척인가?”
“야율보기가 내 아버님이시다.”
“흐음.”
조선에서 온 사신도 그렇지만 초흐타 부족장의 아들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상대였기에, 사내는 어떻게 할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망설였다.
그러자 역관의 도움을 받아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최승주가 말을 몰아 조금 앞으로 나오며 이야기를 했다.
“난 대조선국 국왕 전하의 어명을 받고 온 최승주라고 하오. 그쪽 부족장과 이야기를 나눌 것이 있어서 왔소이다.”
옆에 붙어 있던 역관이 얼른 통역을 하자 사내는 최승주를 빤히 바라보다가 이내 결정을 내렸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우릴 따라오시오.”
약간 퉁명스럽게 말을 내뱉은 사내가 부하들과 함께 말 머리를 돌려 앞장을 서자 최승주는 내심 두근거리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일단 한고비 넘겼군.”
“그러게 말입니다.”
역관도 앞서 가는 우라타 부족 전사들을 한 십 년은 더 늙은 얼굴로 쳐다보았다.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사신 일행은 반나절을 더 눈이 수북이 쌓인 벌판과 숲을 지난 다음에야 우라타 부족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거란을 대표하는 부족 중 한 곳답게 규모가 상당했다.
일단 이동식 주택인 게르가 수도 없이 세워져 있었고, 허리에 검을 찬 전사들이 채찍을 휘두르며 근처 강에서 물을 먹이고 돌아온 가축을 우리로 몰아가고 있었다.
부족민들이 호기심과 경계하는 마음이 뒤섞인 시선으로 사신 일행을 힐끔힐끔 숨어서 보는 가운데, 그들은 마을 중앙에 있는 제일 큰 게르로 안내되었다.
“이쪽으로 오시오.”
말에서 내린 최승주는 일행 몇 명과 함께 사내를 따라 게르 안으로 들어갔다.
게르 내부는 상당히 넓었는데, 중앙에 화덕을 설치하고 불을 피운 덕분에 추운 바깥과 달리 따뜻한 온기가 돌고 있었다.
부족 원로들을 좌우에 대동하고 호피로 장식한 의자에 비스듬한 자세로 앉아 있던 중년인은 사신 일행을 위아래로 훑어본 뒤 약간 나른한 어투로 입을 열었다.
“이자들이야?”
“그렇습니다, 족장님.”
안내를 한 사내의 대답에 족장인 이명고는 최승주 옆에 서 있는 야율치오를 보면서 말했다.
“야율보기 족장의 아들이라고?”
“셋째인 야율치오라고 합니다.”
“초흐타 부족이 조선과 친하게 지낸다는 이야기는 익히 듣고 있었지만, 대륙을 호령한 요遼 제국의 후예임을 잊고 이렇게 호위 노릇이나 하다니 정말 한심스럽군.”
상대의 도발에 야율치오는 눈썹을 위로 치켜세우면서 발끈했다.
“말씀이 너무 지나치신 것 아닙니까!”
“사실을 있는 그대로 이야기한 것뿐인데 뭐가 지나치다는 거지?”
“이익.”
말 한마디 제대로 꺼내 보지도 못하고 칼부림이 날 것 같은 분위기에 최승주가 얼른 나섰다.
“뭔가 잘못 알고 계신 것 같은데, 야율치오 공은 이쪽 지리가 어두운 저희의 부탁으로 함께 와 주신 겁니다.”
상대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면서도 야율치오의 체면을 살려 주는 이야기에, 일부러 상대를 자극했던 이명고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가 펴며 그를 쳐다봤다.
“네가 조선 국왕이 보낸 사신인가?”
“그렇습니다.”
이명고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는 아주 거만한 태도로 말했다.
“할 이야기라는 것이 뭔지 말해 봐.”
“…….”
아무리 배운 것 없는 무식한 오랑캐라고 하나, 안하무인격의 행동과 태도에 최승주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나가 버리고 싶었지만, 맡은 임무가 있었기에 최승주는 애써 마음을 가라앉히고는 준비해 온 이야기를 했다.
“얼마 전 국경을 넘어와 조선 영토에 있는 고을 네 곳을 약탈하고 백성 수십 명을 잡아간 것에 심한 유감을 표하며, 당장 사람들을 돌려줬으면 합니다.”
그러자 뻔뻔스럽게도 이명고는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를 봤다.
“약탈이라니? 우리는 강을 넘은 적이 없는데 잘못 찾아온 것 같군.”
“믿을 만한 증거가 있는데도 이러실 겁니까?”
이명고는 피식 비웃음을 띠고는, 상체를 앞으로 살짝 숙이며 번들거리는 눈빛으로 위협하듯 입을 열었다.
“글쎄, 우린 아니라니까. 당연히 잡아 온 조선인들도 없어.”
“으음.”
“더 할 이야기가 없으니까 그렇게 알고, 조금 있으면 해가 질 테니 오늘 밤은 여기서 묵고 내일 날이 밝는 대로 떠나게.”
한쪽 팔을 휘저으며 이명고가 하는 말에 최승주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는 인사도 하지 않고 몸을 돌려 게르를 나갔다.
그렇게 사신 일행이 모두 물러가자 원로 중 한 명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족장, 조선국 사신을 이렇게 홀대해도 괜찮을지 모르겠소.”
그 말에 이명고는 거만한 표정으로 콧방귀를 뀌었다.
“흥, 나이가 드니 세상 모든 게 다 걱정거리로 보이시나 보오.”
“얘기하는 걸 들으니 다 알고 온 것 같은데 나중에 토벌대라도 끌고 오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조선 국왕이 그럴 만한 배짱이나 있을 것 같소?”
이명고는 클클 웃으며 대꾸했다.
“토벌대를 파견하려면 벌써 그리하고도 남았을 거요. 헌데 사신 따위를 보내서 교섭을 하려 드는 걸 보면 저쪽이 이번 일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뻔히 보이지 않소.”
“그래도 만약이란 게 있는 법인데.”
“만일 토벌대를 이끌고 온다면!”
이명고는 발로 바닥을 쿵 굴렀다.
“그땐 우리의 자랑스러운 전사들로 응대하면 될 것 아니오! 강을 건너오려고 하는 즉시 날쌔고 용맹스러운 기병을 몰고 가 덮치면 적들은 손도 쓰지 못하고 모래성처럼 쓰러지게 될 것이오.”
“으음.”
자신만만하게 단언하는 이명고의 말에, 원로들은 반박할 말도 찾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강력한 청나라 군대라면 모를까, 조선군 정도라면 상대할 만하다는 분위기가 팽배했던 것도 이유 중 하나였다.
“이봐.”
걱정이 완전히 가신 건 아니었지만 원로들이 어느 정도 납득하는 걸 보면서 이명고는 한쪽에 서 있던 전사를 불러 말했다.
“내일 아침 해가 뜨자마자 조선에서 온 사신 놈들을 우리 영역 밖으로 쫓아내 버려. 우물쭈물하고 있으면 엉덩이를 걷어차서라도 내보내란 말이다.”
“예!”
한편 게르 밖으로 나온 최승주와 그 일행은 이명고에게 받은 모멸감으로 치를 떨고 있었다.
특히 그중에서도 가장 분노한 것은 야율치오로, 굵직한 눈썹을 파르르 떨며 이를 바득바득 가는 모습이 곁에서 보고 있기가 두려울 정도였다.
“체면을 생각해서 굽히고 나가 줬더니, 오만방자함이 하늘을 찌르는군!”
“진정하시오.”
“내가 지금 진정하게 됐소? 아무리 이 근방에서 세력이 크다지만 우리 초흐타 부족도 그에 못지않은데, 마치 아랫사람 대하듯이 건방을 떠는 꼴 하고는!”
“우라타 족장이 다혈질에 자존심이 세기로 유명하다고 하더니 과연 소문대로인 것 같더이다.”
“흥! 단순히 간이 배 밖으로 나온 것뿐이겠지. 두고 보시오, 내 언젠가 그놈의 코를 납작하게 해 줄 거요.”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한 최승주가 목소리를 낮추라고 눈치를 줘도, 이미 기분이 상할 대로 상한 야율치오는 화를 억누르기는커녕 오히려 생각할수록 분통이 터지는지 씩씩거렸다.
하지만 옆에서 최승주가 갑자기 한숨을 푹 내쉬자 그 소리를 듣고선 겸연쩍은 표정을 지었다.
“미안하군. 원래의 목적은 잡혀 온 조선인들을 풀려나게 하는 거였는데, 목적을 이루기는커녕 빈손으로 쫓겨나게 생겼으니 뭐라 할 말이 없소.”
“아닙니다. 모든 것이 내 교섭력이 부족한 탓이겠지요.”
괜찮다고 도리질을 치지만 최승주의 얼굴엔 근심과 걱정으로 어두운 빛이 드리워져 있었다.
“너무 상심하지 마시오. 내가 아버지께 부탁드려서 어떻게든 해결을 보게 만들 테니.”
“말이라도 그렇게 해 주시니 고맙소이다.”
정중하게 인사를 올린 최승주는 손을 들어 돌아서는 야율치오와 헤어져, 자신에게 배정된 게르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일이 이렇게 되어서 어떡합니까?”
뒤에서 조용히 따라다니던 역관이 근심 가득한 얼굴로 말을 걸자, 최승주는 표정을 싹 바꾸며 대답했다.
“대충 예상은 하고 있었으니 상관없지. 나중에 철저히 본때를 보여 줄 테니 그때를 기대하게.”
야율치오를 상대하던 때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 같은 모습이었다.
그렇게 차가운 말을 내뱉은 최승주는 문득 멈춰 서서, 방금 전에 나왔던 대형 게르를 돌아보았다.
이명고의 성격을 반영하듯 주위의 크고 작은 것들과는 달리 눈에 띄게 화려하고 커다란 게르가 서서히 지고 있는 피처럼 붉은 노을을 등에 지고 우뚝 서 있었는데, 그 모습이 마치 앞으로 다가올 전쟁을 예고하는 것 같았다.
다음 날 최승주는 이명고를 다시 만나려고 했지만 문전박대를 당하고 그대로 쫓겨났다.
어쩔 수 없이 빈손으로 귀환하게 된 사신 일행은 왔을 때와 달리 곧장 남쪽으로 내려가 두만강을 건너 돌아왔는데, 이 길이 얼마 뒤 조선군의 진격로가 될 것이었다.
이런 식으로 필요한 정보를 수집하면서 더불어 상대가 조선을 깔보며 방심하게 만든 도현은, 강추위가 서서히 물러가고 언 땅이 녹으면서 파릇파릇한 새싹이 나오는 봄이 되자 토벌 준비를 모두 끝낼 수 있었다.
그리고 사월 어느 날, 드디어 도현의 출정 명령이 떨어졌다.
“함경도 병마절도사 김정태는 어명을 받으라!”
붉은색 도포를 입은 선전관의 외침에 의관을 정제한 채 두 손을 모으고 앞에 서 있던 일 군단장 김정태는 살짝 굳은 얼굴로 몸을 바닥에 엎드렸다.
“수시로 국경을 넘어와 약탈을 하고 힘없는 백성들을 괴롭히는 우라타 부족의 무도함을 더 이상 좌시할 수 없기에, 함경도 병마절도사 김정태를 대원수로 봉하니 즉시 토벌대를 이끌고 가 그동안 저지른 죄를 벌하고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북방 야인들에게 짐의 위엄을 알리도록 하라!”
“성은이 망극하옵나이다.”
낭독이 끝나자 김정태는 그 자리에서 세 번 절을 하고 선전관이 건네주는 교지를 공손히 받았다.
“이것은 주상 전하께서 따로 대원수께 하사하시는 보검입니다. 토벌에 나서는 동안 부원수 이하 모든 장졸들의 생사여탈권을 맡기신다고 하셨사옵니다.”
“알겠네.”
즉결 처분권을 주는 것만큼 지휘관의 권위를 세워 주는 처사도 없었다.
두 손으로 받은 보검을 감히 허리에 차지 못하고 옆에 있는 부관한테 건넨 김정태는 선전관을 보며 물었다.
“다른 말씀은 없으셨나?”
“여름이 되면 산천초목이 우거져 적이 숨기 좋고 더위에 병사들이 쉬이 지칠 수 있으니, 그 전에 토벌을 모두 끝내라는 말씀이 있으셨습니다.”
“나도 길게 끌 생각은 없네.”
“그럼 전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수고했네. 따로 머물 곳을 마련해 뒀으니 푹 쉬고 한양으로 돌아가도록 하게.”
“예.”
군례를 취한 선전관이 군영 병사를 따라 숙소로 가자 김정태는 뒤에 모여 있는 장수들을 돌아보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회의를 할 테니 모두 따라 들어오게.”
“알겠습니다, 장군.”
감영뿐만 아니라 일 군단 휘하에 있는 사단 지휘관들까지 모두 소집했기에, 넓은 회의실이 좁아 보일 정도로 무관들이 꽉 들어찼다.
“다들 주상 전하가 내리신 어명을 들었을 것이오. 이 시간 부로 일 군은 갑甲호 비상 체제로 전환하겠소. 정 사단장.”
자신을 부르자 일 사단장(종삼품)직을 맡고 있는 정한우가 김정태와 시선을 마주치며 대답했다.
“예.”
“자네가 맡은 임무가 제일 중요하네. 온성을 출발해 북쪽에 위치한 흥개호수興凱湖水까지 최단 시간 안에 도달해, 우라타 부족과 주변 중소 부족들이 서쪽으로 달아나지 못하게 길을 차단해야 하네.”
흥개호수는 온성 북동쪽에 위치한 커다란 담수호로, 면적이 무려 4,380㎢에 달하고 평균 수심이 4~5m나 됐다.
우수리 강을 포함한 주위의 수많은 하천들이 모여 이루어진 호수였는데 수량이 풍부하고 어족 자원도 많았다.
“유목 민족의 특성상 정확하게 그어진 국경선은 없지만 진격로가 초흐타 부족의 영역과 가까우니 각별히 신경을 써서 군을 움직여야 할 것이오.”
“알겠습니다.”
“나머지 군도 공격 개시와 동시에 각자 맡은 방향으로 신속히 진격해, 한 놈도 빠져나가지 못하게 포위하고 모두 일망타진할 수 있도록 하시오.”
“옛.”
“그리고 도강을 위한 부교 설치는 다 끝났나?”
시선을 받은 부관은 얼른 대답을 했다.
“네, 세 곳의 도하 지점에 각각 네 개씩 모두 열두 개의 부교를 만들어 놨습니다.”
“적이 눈치채지는 않았겠지?”
“작업을 은밀히 실시했고 수면 바로 아래에 잠기도록 해 놓았으니 모를 겁니다.”
“아직 날씨도 추운 데다가 물에서 하는 공사라 병사들이 고생을 많이 했겠군. 군량과 보급 물자 준비는?”
“그것도 다 끝났습니다. 최소 여섯 달 분량이 확보됐고 토벌이 시작되면 한양에서 추가로 보급할 계획입니다.”
“좋아.”
이미 다 보고받은 내용이었지만 마지막으로 점검을 하는 의미로 확인을 한 김정태는 좌중에 모인 무관들을 천천히 쓸어 본 뒤 묵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세종대왕께서 동북 육진을 개척한 이후 처음으로 벌이는 대규모 북방 원정이오. 주상 전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이번 전쟁은 단순히 국경 지역에서 말썽을 피우는 오랑캐를 토벌하는 것을 넘어, 단군 때부터 이어져 내려왔지만 대국의 힘에 밀려 잠시 내려놓아야 했던 우리의 땅을 일부나마 다시 되찾는 역사적인 발걸음이니, 이에 강한 자부심과 사명감을 가지고 상대와 싸워 주길 바라겠소.”
김정태의 말이 끝나자 결연한 표정으로 앉아 있던 무관들은 일제히 머리를 숙이며 크게 군호를 외쳤다.
“충!”
이만 육천 명의 병력을 동원하기로 한 처음 계획과 달리, 여러 첩보 활동으로 수집한 정보를 분석한 결과 우라타 부족과 영향력 아래에 있는 중소 부족을 모두 소탕하고 점령지를 안정적으로 확보하려면 토벌군 규모가 더 늘려야 된다는 결론이 나오자 도현은 일 군단 전체를 투입하기로 최종 결정을 내렸다.
세 개의 사단이 군단을 이루는 편제를 유지하고 있으니 모두 육만 명에 달하는 대군이 동원된다는 뜻이었다.
일 군단의 출전으로 공백이 되는 함경도 방위는 황해도와 강원도, 경기도에서 각각 한 개 사단씩을 임시로 차출해 메우기로 하고 이동에 들어갔다.
도현이 내린 어명을 받은 김정태는 정확히 이틀 뒤 출정 명령을 내렸고 온성과 경흥, 경원성에 집결해 있던 토벌군은 아침 해가 뜨는 것과 동시에 일제히 미리 설치해 둔 부교를 통해 강을 넘어갔다.
달그락. 달그락.
삼월이었지만 아직 다 녹지 않은 얼음 조각이 둥둥 떠다니는 강이 내려다보이는 야트막한 언덕 위에서 병사들이 도강하는 것을 지켜보던 정한우 일 사단장은, 옆에 있는 부관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도강이 끝나려면 얼마나 남았지?”
“소달구지에 실린 보급 물자까지 모두 건너가려면 내일 오후가 되어도 어려울 것 같습니다.”
작전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일분일초가 아까운 정한우 장군은 자꾸만 지체가 되는 도강에 눈가를 찌푸리며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을 지었다.
“뭐가 그렇게 오래 걸려? 애초 예상에는 하루면 된다고 했잖아.”
“그렇긴 한데 날씨가 풀리면서 생긴 유빙遊氷에 부교 하나가 망가지는 바람에 자꾸 지체가 되고 있습니다.”
“끄으응.”
사고로 부교를 두 개밖에 쓸 수 없으니 시간이 늦어지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는데, 앓는 소리를 낸 정한우 장군은 답답한 마음에 살짝 짜증을 냈다.
“부교 관리를 잘했어야지. 한시라도 빨리 진격해야 될 상황에 이게 뭔가!”
“면목이 없습니다.”
“쯧.”
짧게 혀를 차고는 다시 한참 도강 중인 병사들을 쳐다보던 정한우 장군은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래도 안 되겠군. 이러다가는 토벌 계획 전체가 일그러지겠어.”
“어쩌시려고 그러십니까?”
“기병연대는 모두 도강을 끝냈다고 했지?”
“예. 아침에 제일 먼저 강을 건넜습니다.”
부관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정한우 장군은 정색을 하며 지시를 내렸다.
“그럼 기병대부터 우선 진격시키고 보병은 치중부대와 함께 뒤를 따르도록 해.”
“기병대 단독으로 말씀이십니까?”
“그래.”
“그러면 자칫 본대와 거리가 너무 벌어져서 보급이 끊길 수도 있습니다.”
조심스럽게 부관이 우려를 나타냈지만 정한우 장군은 단호한 태도로 결정을 번복하지 않았다.
“그 정도 위험은 감수해야지. 대신 밤을 새워서라도 도강 작업을 빨리 끝내고 본대가 뒤를 받쳐 줘야 할 것이네. 이것 말고 다른 좋은 방법이 있으면 말해 보게.”
“…….”
걱정은 되지만 정한우 장군의 이야기대로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포위 공격을 펼친다는 토벌 계획이 초반부터 실패할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시간이 없으니 어서 기병연대에 명령을 전달하도록 해.”
“옛.”
대답을 들으며 다시 시선을 언덕 아래로 돌린 정한우 장군은 개미 떼처럼 줄을 지어 부교를 건너고 있는 병사들을 굳은 얼굴로 바라봤다.
아침에 선발대로 부교를 건너온 일 사단 기병연대는 강변에서 약간 떨어진 벌판에 모여, 차가운 강물에 젖은 몸을 모닥불에 말리며 이동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따각따각.
이히히힝.
“군호 어른!”
다급히 달려와 굴러떨어지듯 타고 있던 말에서 내린 전령이 외쳐 대는 소리에 모닥불 가장자리에 서서 불을 쬐고 있던 기병연대장 신인석이 몸을 뒤로 돌렸다.
“무슨 일인가?”
“사단장님께서 보내신 명령서입니다.”
“이리 주게.”
전령이 사선으로 메고 있던 가죽 가방에서 꺼낸 쪽지를 건네받은 신인석은 먼저 정한우 장군의 수결을 확인한 뒤 종이를 펼쳐 내용을 읽었다.
“음.”
“뭐라고 적혀 있습니까?”
옆에 있던 일 대대장 배수현이 궁금한 표정으로 묻자 신인석은 명령서를 보여 주며 말했다.
“도강이 지체되니 일단 우리만 먼저 진격을 시작하라는 지시야.”
“하긴, 도강이 너무 늦어지고 있기는 하지요.”
“일다경(15분) 뒤에 출발할 테니 병사들을 준비시키도록 해.”
“보급품은 얼마나 챙길까요?”
잠시 고심을 한 신인석은 이내 입을 열었다.
“본대가 뒤따라온다고는 하지만 언제 돌발 상황이 벌어질지 모르니, 기동력이 떨어지지 않는 한도 안에서 식량과 물자를 최대한 가져가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군례를 취하며 대답한 배수현이 지시를 전달하기 위해 자리를 뜨자, 신익선은 발로 모닥불을 밟아서 끄고는 한쪽에 세워 둔 자신의 말에 다가가 스스로 군장을 챙겼다.
얼마 뒤 준비를 모두 끝낸 기병연대는 말발굽 소리를 울리며 진격을 시작했다.
“목표는 흥개호수다. 앞에 걸리적거리는 것들은 다 뭉개버리면서 진격한다!”
“우오!”
“가자!”
신익선의 외침에 기병들은 타고 있던 말 옆구리를 살짝 걷어차며 속보로 눈이 녹은 벌판을 가로질러 내륙으로 이동했다.
흥개호수까지 이동해야 될 거리가 만만치 않았기에 기병연대는 처음부터 무리하지 않으면서 행군했다.
그렇게 반나절을 달려갔을 때, 미리 주변 살피기 위해 앞서 보낸 정찰병이 돌아와 보고를 했다.
“전방에 소규모의 거란족 마을이 있습니다.”
“이쪽 지역은 동고 부족 영역입니다.”
옆에 있던 배수현의 이야기에 신익선은 눈을 번득이면서 말했다.
“동고 족이라면 수시로 강을 넘어와 국경 고을을 약탈하는 놈들 아냐?”
“맞습니다. 몇 달 전에도 온성 근처 고을 하나가 털려 큰 피해를 입었지요.”
“잘 걸렸군. 이번 기회에 손을 봐 줘야지. 모두 전투를 준비하라고 해.”
“예.”
이동을 하느라 약간 긴장이 풀렸던 기병들은 신익선의 지시에 다시 마음을 가다듬으며 말을 몰았다.
멀리서 보이는 동고 부족 마을은 유목 민족 특유의 주택인 게르 수십 채가 옹기종기 모여 있고 키우는 가축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는, 아주 평화로운 모습이었다.
하지만 겉보기와 달리 이들이 약탈을 주업으로 삼으면서 수시로 두만강을 넘어와 조선 백성들을 괴롭히는 강도 떼라는 것을 잘 알고 있던 기병들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강한 살기를 뿌리며 돌격 대형을 갖췄다.
마을에서는 갑작스러운 조선군의 출현에 화들짝 놀라 급히 전사들을 소집하며 허둥거리고 있었다.
그런 모습을 말 위에 앉아 가만히 쳐다보던 신익선은 고삐를 돌려 뒤에 늘어서 있는 부하들과 눈을 마주치며 크게 외쳤다.
“단번에 끝낸다! 그동안 우리 백성들을 괴롭히고 재물을 약탈해 간 놈들이니 머뭇거리지 말고 손을 써라. 전군 돌격!”
“우와아아!”
신익선이 검으로 정면을 가리키고는 말 옆구리를 차며 앞으로 달려 나가자 부하들도 일제히 함성을 내지르면서 돌격했다.
두두두두.
“이랴!”
“하!”
거친 말발굽 소리가 지축을 울렸고 거센 파도가 된 기병들은 그대로 동고 부족 마을을 덮쳤다.
급히 무장을 챙긴 동고 부족 전사 오십여 명이 마주 달려 나왔지만 조선군의 돌격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츄아아악!
“크윽.”
“컥.”
투툭. 쿵!
커다란 파열음을 내며 양쪽이 충돌하는 순간, 시뻘건 피가 사방에 뿌려졌다.
아무리 거란족이 타고난 전사라고는 하지만 몇 배나 차이가 나는 수적 열세는 어쩔 수 없었다.
돌격 대형을 단단히 갖춘 조선군 기병들이 검을 휘두를 때마다 고통에 찬 비명과 신음이 터져 나오며 동고 부족 전사들이 하나둘 피투성이가 되어 낙마했다.
지휘관이었지만 몸을 사리지 않고 선두에 선 신익선은 앞을 가로막던 적군의 옆구리를 검으로 베어 버리면서 부하들을 독려했다.
“다 쓸어버려라!”
“우오!”
함성으로 화답한 기병들은 미미했던 저항을 모두 분쇄해 버리고는 기세를 살려 마을로 물밀 듯 들이닥쳤다.
“살려 줘!”
“꺄아아악!”
워낙 갑작스러운 공격이라 미처 피하지 못한 부족민들은 겁에 질려 비명을 내질렀고, 조선군 기병들은 그런 사람들은 건드리지 않고 지나가며 무기를 들고 저항하는 자만 골라 검을 휘둘렀다.
“끄아악.”
채챙! 챙!
노약자와 어린아이를 가리지 않고 살인과 약탈을 일삼는 거란족과 비교되는 행동이었다.
사방에서 울리는 말발굽 소리와 함성은 공포를 불러일으켰고, 살기를 뿌리며 바람처럼 지나가는 조선군 기병의 모습에 부족민들은 혼란에 빠졌다.
그때 들고 있는 검에 피를 진득하게 묻힌 신익선의 목소리가 크게 울렸다.
“항복해라! 손을 들고 항복하는 자는 살려 준다.”
이미 싸울 수 있는 전사들이 다 죽거나 부상을 당한 상태라 저항할 힘이 없었던 부족민들은, 외침을 듣자마자 그 자리에 엎드리거나 손을 들며 항복했다.
“공격 중지!”
신익선의 외침에 조선군 기병들은 공격을 멈추고는 겁에 질려 있는 부족민들을 한곳으로 모으게 했다.
“첫 승리를 거두신 것을 감축드립니다.”
애초에 상대가 안 되는 적이었기에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인 신익선은 대충 묻은 피를 털어 낸 뒤 검을 집어넣으면서 말했다.
“아군의 피해는?”
“한 명이 가벼운 자상을 입은 것을 제외하고는 전무합니다.”
“다행이군.”
그때서야 굳어 있던 표정을 살짝 푼 신익선은 여기저기 널려 있는 시신과 몸을 떨며 한쪽에 모여 있는 부족민들을 힐끗 쳐다보며 이야기를 이었다.
“곧 본대가 따라올 테니 부족민들이 다른 곳으로 도망치지 못하게 모두 포박해서 놔두고, 우리는 전장 정리가 끝나는 대로 다시 이동한다.”
“알겠습니다.”
신속히 진격해야 하는 기병연대 입장에서 포로들은 걸리적거리는 존재였다.
모두 풀어 줬다가는 토벌을 피해 초흐타 부족 영토로 넘어갈 것이 뻔했고, 그렇다고 살육에 미친 집단도 아닌데 다 죽여 버릴 수도 없었다.
그래서 생각해 낸 방법이, 도망치지 못하게 포박해서 후속으로 오는 본대에 처분을 맡기는 것이었다.
현재 처한 상황에서는 아주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금방 전장 정리를 끝낸 기병연대는 불에 탄 게르와 굴비처럼 포승줄에 묶인 포로들을 뒤에 남겨 놓은 채 다시 진격을 재개했다.
공격은 여기뿐만 아니라 다른 두 곳에서도 동시에 이루어졌고, 방심하고 있던 거란족들은 제대로 저항도 하지 못하고 속절없이 당하고 말았다.
이렇게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는 것도 모른 채, 이명고는 잡아 온 조선 여인들 중 얼굴이 반반한 이 몇을 골라 옆구리에 끼고 술을 마시고 있었다.
“이, 이거 놔주세요!”
옷고름을 풀려는 이명고의 손길을 피해 여자가 몸을 뒤틀었지만, 건장한 사내의 힘을 당해 낼 수는 없었다.
“하하, 앙탈이 심하군. 하긴 이 정도는 반항을 해 줘야 심심하지 않지.”
어깨를 잡아끄는 손아귀 힘이 어찌나 우악스러운지 여자의 입에서 절로 고통스러운 신음이 튀어나왔다.
“많이 마셔라.”
커다란 대접에 가득 따른 술을 여자의 입안에 쏟아붓자, 미처 다 삼키지 못한 술이 주르륵 턱을 타고 흘러 옷자락을 흠뻑 적셨다.
“콜록, 콜록.”
고통스럽게 기침을 하는 여자의 모습이 재미있게 느껴지는 듯 그는 낄낄 소리 내어 웃었다.
“자아, 그럼 다음에는 누가 내 잔을 받아 볼 테냐?”
“…….”
아직 시집도 가지 않은 어린 처녀가 잔인하게 희롱당하는 것을 본 다른 여인들은, 분노로 치를 떨면서도 대항할 힘이 없는 자신을 원망하며 시선을 떨구었다.
“뭐야, 아무도 나설 사람이 없느냐? 기껏 술자리까지 준비했는데 다른 사람의 성의를 무시하면 안 되지. 조선은 선비의 나라라서 예를 중시한다고 하더니만 다 헛소리였나 보군.”
한껏 비웃으면서 술잔을 기울이는데 돌연 바깥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리더니, 누군가가 벌컥 게르 입구에 걸려 있는 천을 걷어 젖혔다.
“뭐야?”
한껏 흥이 올라 있는데 누가 방해하는 거냐는 듯 기분 나쁜 표정으로 돌아본 이명고는 게르 안으로 들어온 자가 측근 수하인 이탑인 것을 보고 술잔을 내려놓았다.
“원로 중 한 명이 뒈지기라도 했나? 계집들이랑 같이 있을 땐 방해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이러고 계실 때가 아닙니다, 족장.”
잔뜩 겁에 질린 조선 여인들 사이를 성큼성큼 걸어온 이탑은 그의 곁에 무릎을 굽히고 앉아 다급하게 속삭였다.
“지금 조선군 토벌대가 강을 건너 삼면으로 밀고 들어오고 있다 합니다.”
“……!”
쩌억!
이명고가 손에 힘을 주자 잡고 있던 술잔에 커다란 금이 가며 산산조각 났다.
“다시 말해 봐. 놈들이 언제 강을 건넌 거야?”
“벌써 사흘 전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걸 지금 보고해!”
와장창! 쨍그랑!
“꺄악!”
“아악.”
화가 치민 이명고가 술상을 발로 찼고, 그 바람에 상다리가 부러져라 위에 올라와 있던 음식과 접시 들이 요란한 소리와 함께 바닥에 나뒹굴었다.
이명고가 옆에 끼고 있던 처녀는 반쯤 벗겨진 저고리를 부여잡고 다른 여자들과 함께 구석에서 두려움에 벌벌 떨었다.
“시끄러워! 조용히 해.”
훌쩍거리는 울음소리에 짜증이 난 이명고가 크게 소리쳤다.
“족장.”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토벌군이 강을 건너는데도 아무도 몰랐다니! 제대로 된 이유가 없으면 네놈부터 목을 칠 테니 그렇게 알아!”
“워낙 갑작스럽게 쳐들어온 데다가 이쪽에 소식을 알리려는 자는 놈들이 모조리 잡아 빠져나가지 못하게 막았고, 그 때문에 상대가 바로 코앞에 닥칠 때까지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한 것 같습니다.”
“이런 씹……!”
이탑의 보고를 들을수록 이명고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몇 수 아래라고 하찮게 보던 조선군에게 제대로 뒤통수를 맞은 셈이니, 자존심이 하늘을 찌르는 이명고에게 이보다 더 한 치욕이 없었던 것이다.
“당장 전사들을 소집해!”
“옛!”
대답을 들으며 이명고는 이를 부드득 갈았다.
“조선 놈들, 감히 겁도 없이 강을 넘다니. 다 죽여 버리겠어.”
이명고의 소집령이 떨어지자 우라타 부족은 물론이고 그의 영향력이 미치는 주변 중소 부족 전사들까지 모여들어 순식간에 이만 명이 넘는 대군이 만들어졌다.
그사이 조선군 토벌대에 대한 정보도 속속들이 들어오며 상대의 윤곽이 잡혔다.
“그러니까 최소 오만이 넘는다는 거야!”
호피 가죽을 씌운 의자에 앉은 이명고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묻자 이탑이 굳은 얼굴로 머리를 살짝 숙이면서 대답했다.
“예. 일단 확인된 것만 그 정도고 더 많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동고 부족을 비롯한 주변 중소 부족 십여 개가 이미 토벌대에 당했고, 온성 쪽에서 올라오고 있는 토벌대는 벌써 흥개호수 부근까지 도달했다고 합니다.”
“젠장!”
토벌대가 이렇게 빨리 밀고 올라올 줄은 몰랐던 이명고는 욕설을 내뱉으면서도 당혹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게르 안에 모인 부족 원로와 전사들도 마찬가지였는데, 다들 어두워진 낯빛으로 크게 술렁였다.
“이렇게 되면 자칫 토벌대에 포위될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흥개호수까지 갔다면 이미 서쪽 방향은 막힌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허어.”
동쪽이 바다로 막혀 있는 지형적 특성 때문에 흥개호수 아래와 우수리강 지류가 거미줄처럼 뻗어 있는 북부 삼림 지역이 막히면, 우라타 부족은 꼼짝없이 갇혀 독 안에 든 쥐 신세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걸 감안해 조선군은 세 방향의 진격로 중 동쪽 해안을 따라 올라가는 부대 규모를 한 개 연대 수준으로 줄이고, 대신 여유 병력을 나머지 두 곳에 배치해 전력을 보강했다.
이명고도 이런 위험을 모르지 않았지만, 내색하지 않고 손바닥으로 앉아 있는 의자 팔걸이를 세게 내려치고는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탕!
“토벌대가 겁도 없이 여기까지 올라왔다면, 모두 죽여서 까마귀 밥으로 만들면 될 것을 뭘 그렇게 호들갑인가!”
“무려 오만이나 된다고 하지 않소이까?”
원로 중 한 명이 따지듯 이야기를 하자 살짝 이맛살을 찡그린 이명고는 콧방귀를 뀌며 강한 자신감을 보였다.
“흥! 그까짓 허접쓰레기 같은 조선군쯤은 오만이 아니라 십만이 몰려온다고 해도 하나도 겁나지 않소.”
“설마 토벌대와 정면 대결이라도 벌일 생각이오?”
“당연하지 않소. 그럼 토벌대를 피해 겁먹은 개처럼 꼬리를 말고 북쪽으로 도망이라도 쳐야겠소?”
“굳이 싸울 필요 없이, 잡아 온 조선인들을 풀어 주고 적당히 협상을 하면…….”
원로의 이야기를 중간에 끊은 이명고는 조소 어린 표정을 짓고는 빈정거리듯 입을 열었다.
“작정하고 토벌군을 일으킨 조선 국왕이 그런다고 순순히 군사를 물릴 것 같소?”
“그건…….”
“젊었을 때는 안 그러시더니만 나이가 드시면서 겁쟁이가 되신 것 같소이다.”
이명고의 비아냥거림에 원로는 얼굴을 벌겋게 붉히며 발끈했다.
“족장!”
그런 원로를 무시해 버린 이명고는 한쪽에 서 있는 이탑에게 시선을 줬다.
“전사들은 모두 준비됐지?”
“옛.”
“내일 아침, 날이 밝는 즉시 출정한다.”
“알겠습니다.”
이탑의 대답을 들으며 의자에서 일어난 이명고는 원로들을 내려다보면서 이야기했다.
“토벌대가 강을 건넌 걸 후회하게 만들어 줄 테니, 두고 보시오.”
“으음.”
두만강 지류 중 하나인 훈춘강을 따라 옛날 고구려 시대의 성곽 유적들 여러 개가 남아 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북쪽에 위치한 것이 춘화성이었다.
춘화성은 오랜 세월의 풍파 속에서도 성곽과 망루 등이 그런대로 잘 보존되어 있었는데, 지금은 이명고의 친동생인 이태립이 삼천 명가량의 부족민을 데리고 독립해 나와 거점으로 삼고 있었다.
이명고의 소집령이 떨어졌지만 어차피 우라타 부족 영역으로 들어가려면 춘화성을 지나야 했기에, 이태립은 전사를 이끌고 가지 않고 그냥 성에 남아 형이 대군을 이끌고 오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기다리던 이명고의 군대보다 김정태 장군이 지휘하는 조선군 토벌대 본진이 먼저 모습을 드러냈다.
“저기가 춘화성입니다.”
“으음.”
말 위에 앉아 정면에 보이는 성을 천천히 살핀 김정태 장군은 살짝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거란 놈들이 쓰기에는 아까운 곳이군.”
“지금까지 지나온 다른 성들과 달리 성곽 시설이 절반 이상 남아 있고, 위치상 우리가 점령하려는 지역의 중앙에 있어 토벌이 끝난 뒤 본진으로 사용하기에 여기만큼 안성맞춤인 곳도 없을 겁니다.”
부관의 설명에 김정태 장군도 동의를 했다.
“그렇군. 허면 일단 저놈들부터 정리를 해야겠지.”
김정태 장군이 쳐다보는 곳에는 거란족 전사 천여 명이 살기등등한 모습으로 도열해 있었다.
“아무리 선발대로 기병 이천 명만 끌고 먼저 왔다지만, 성을 나와 정면 대결을 선택하다니 우릴 너무 우습게 보는 것 같군.”
“그러게 말입니다. 성곽이 무너진 부분이 있어서 제 역할을 다하지는 못해도 방어전을 펼치는 데에는 꽤 도움이 될 텐데, 저러고 있는 꼴을 보니 기분이 썩 좋지는 않군요.”
“저런 놈들은 제대로 본때를 보여 줘서 다시는 까불지 못하도록 만들어야 돼. 기병대, 돌격 준비 됐지?”
“예, 명령만 내리시면 됩니다.”
대답을 들으며 뒤편에 돌격 대형을 갖추고 늘어서 있는 기병대를 훑어본 김정태 장군은, 크지는 않지만 힘이 잔뜩 담긴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깨끗이 정리해 버리라고 해.”
“옛.”
잠시 뒤 김정태 장군의 명령을 전달받은 기병대 지휘관은 검을 뽑아 앞으로 향하며 크게 외쳤다.
“거란 놈들에게 조선군의 힘을 보여 주자!”
“우와!”
“기병대 돌격, 앞으로!”
“이랴, 가자!”
“하! 하!”
두두두두!
돌격 명령에 이천 명이나 되는 기병이 고함을 지르며 일제히 앞으로 달려 나가는 모습은 정말 장관이었다.
그러자 상대편도 기괴한 소리를 내며 마주 달려오기 시작했다.
“히야!”
타고난 전사답게 한 덩이가 되어 짓쳐 오는 거란족의 기세는 상대편에 상당한 위압감을 주었지만, 지난 이 년간 도현이 군제 개편을 실행하며 혹독하게 담금질을 해 온 조선군 기병도 결코 밀리지 않고 강한 살기를 뿌려 댔다.
빠르게 가까워진 양쪽이 서로 부딪치기 직전, 조선군 기병들이 허리에서 검 대신 시커먼 물체를 하나 꺼내 들었다.
바로 병기창에서 개발한 웅오식 수석 권총이었다.
“쏴라!”
지휘관의 외침에 기병들은 정면을 겨냥한 후 권총 방아쇠를 당겼다.
타탕! 탕! 탕! 탕!
“컥!”
“아악.”
이히히힝.
권총을 보고 뭔지 몰라 그저 의아한 표정만 짓던 적들은 사방을 울리는 총성과 함께 쏟아진 총탄에 비명을 내지르며 타고 있던 말에서 굴러떨어지거나 피를 뿌렸다.
흔들리는 말 위라 제대로 조준하기는 어려웠지만, 이천 명이 한꺼번에 쏘는 총격은 충분히 위력적이었다.
“뭐, 뭐야?”
선두에서 달려가던 동료들이 귀청을 울리는 총성과 함께 맥없이 쓰러지는 모습에 적들은 크게 당황했고, 사격음에 익숙한 조선군 군마와 달리 상대편 말들이 겁을 먹고 마구 날뛰자 대형이 완전히 흐트러졌다.
연속해서 장전된 여섯 발을 다 쏜 조선군 기병들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재빨리 권총을 집어넣은 뒤 검을 빼 들고 혼란에 휩싸인 적군을 덮쳤다.
콰콰쾅!
“으악!”
“윽.”
“끄허억!”
권총 사격에 잠시 멈칫한 것이 치명적으로 작용했는데, 순간 기병의 가장 큰 장점인 속도를 잃고 대열마저 흐트러진 거란족 전사들은 하나로 뭉쳐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돌입해 들어오는 조선군에 갈기갈기 찢겨 나갔다.
채챙! 챙! 츄앙!
“맞서 싸워라!”
“끄억.”
이리저리 흩어진 거란족 전사들은 검을 휘두르면서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서너 명씩 짝을 지어 철저히 협공을 퍼붓는 조선군 기병의 공격에 속절없이 목숨을 잃었다.
그런 모습에 이태립은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꽉 깨물며 고함을 질렀다.
“멍청한 것들! 당황하지 말고 한데 뭉쳐서 싸워!”
하지만 전투를 독려하는 이태립의 말은 다 이어지지 못했다.
타아앙!
바로 옆에서 들린 커다란 총성에 이태립은 깜짝 놀라 흠칫거리며 고개를 돌렸고, 조선군 기병 한 명이 총구에서 하얀 연기가 솟아나는 권총을 든 채 자신을 겨냥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시선을 밑으로 내리자 복부에서 시뻘건 피가 찐득하게 배어 나오고 있었다.
“제기랄.”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리면서 욕설을 내뱉은 이태립은 무너지듯 서서히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털썩.
총성에 놀라 마구 날뛰던 이태립의 말은 흙바닥에 쓰러진 주인의 몸을 앞발로 그대로 밟아 버렸다.
치명적인 총상을 입은 데다 머리마저 말발굽에 으깨진 이태립은 비명도 제대로 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절명하고 말았다.
그 뒤로도 기선을 확실히 제압한 조선군 기병들의 일방적인 학살이 이루어졌다.
권총 사격과 바로 이어진 돌격에 기세가 꺾인 데다 족장인 이태립이 죽자, 거란족 전사들은 구심점을 잃고 완전히 사분오열되기 시작했다.
타고난 전사라는 명칭이 무색하게도 적들은 패색이 짙어지자 등을 돌리고 달아났고, 조선군 기병들은 그들을 쫓아가 검을 휘둘렀다.
슈칵!
“끄윽.”
곳곳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고, 바닥은 죽은 적군의 시신과 피로 흥건하게 젖었다.
이처럼 속절없이 죽어 나가는 적군에 비해 조선군 기병들의 피해는 아주 경미했는데, 그동안 받은 훈련과 권총이라는 신병기 덕분이었다.
기마 전투에 강한 자신감을 보이면서 상대를 업신여기던 적들은 한 시진도 안 돼 처절할 정도로 당하며 거의 전멸에 가까운 완패를 당했다.
쉰 명 미만의 적들만이 겨우 목숨을 건져 허겁지겁 전장을 빠져나가는 것으로 대승을 거둔 조선군은, 노약자와 아이 들뿐인 춘화성을 별다른 저항 없이 접수했다.
깃발을 당당하게 휘날리며 반쯤 무너진 성문을 지나는 조선군의 모습을 남은 거란족 사람들은 적대심이 가득 담긴 눈초리로 노려보았다.
“뒤통수가 따끔거리는데.”
“하하, 우리한텐 적이지만 저들에게는 가족이니 어쩔 수 없잖아.”
“이만큼이나 사람 수가 많으면 성실하게 농사나 지어서 밥을 먹고 살 것이지, 쯧.”
“뼛속부터 유목 민족이니 농사라는 단어는 저들 머릿속에 있지도 않을걸.”
“그런가.”
“자, 잡담은 그만하고 잔당들이나 얼른 색출해.”
“옛.”
군관의 지휘 아래 병사들은 각각 몇 명씩 짝을 지어 성안을 수색했다.
성이라고 해 봤자 반쯤 무너진 터에 제멋대로 자리를 잡고 있었던 것뿐이기에, 빈집과 게르를 뒤져 숨어 있는 거란족 사내들을 찾아내는 것은 수월한 일이었다.
하지만.
“아…….”
커다란 게르의 뒤쪽, 천막으로 덮여 있는 수상한 창고 같은 건물을 발견하고 천을 걷어 낸 조선 병사들은 아연한 표정으로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깔개조차 없는 차가운 땅바닥에 사람들이 짐승처럼 웅크리고 있었다.
이른 봄이라지만 아직 손끝이 얼 정도로 추운데 얇은 홑옷, 그것도 넝마처럼 너덜너덜해진 것을 겨우 몸에 두르고 있는 그들은 목욕을 한 지가 언제인지 모를 만큼 고약한 냄새를 사방에 풍겼다.
창고라고 생각했던 것은 거의 짐승 우리에 가까운 모양이라, 혹여 비바람이 불기라도 하면 꼼짝없이 그대로 다 맞아야 할 처지였다.
“으으…….”
갑작스레 햇빛이 비쳐 놀랐는지, 신음을 내며 한 사람이 몸을 일으켰다.
땟국으로 더러워진 얼굴이었지만 머리 모양새나 옷차림으로 볼 때 조선 사람이 확실했다.
“이보시오, 정신 차리시오!”
다급해진 병사가 도망치지 못하게 입구를 막아 둔 나무 창살을 흔들며 소리쳤다.
“에잇, 열쇠를 가져와!”
“지금 그럴 시간이 어디 있어. 그냥 부숴 버려!”
콰직! 퍽!
병사들 네댓 명이 한꺼번에 달려들어 단단한 검 손잡이와 창대 끝으로 우리를 마구 내려치자 입구에 걸려 있던 자물쇠가 산산조각 났다.
“괜찮으시오?”
안으로 달려 들어간 병사가 얼른 사내를 부축해 바깥으로 데리고 나왔다.
병사들이 사내 말고도 우리 안에 갇혀 있던 다른 조선인들을 부축하거나 업어 나르는 동안, 그를 부축한 병사가 건네준 대나무 수통의 물을 마시고 겨우 정신을 차린 사내가 소맷자락을 붙잡고 애원했다.
“우리 말고도 조선인들이 더 있습니다. 그 사람들도 구해 주셔야 합니다.”
“몇 명이나 되나?”
“잘은 모르겠지만 저쪽 반대편으로 젊은 아낙들이 끌려가는 것을 봤습니다.”
“여자까지 끌고 왔다고?”
“유부녀고 처녀고 가리지 않고 다 잡혀 왔어요. 우리야 남자이니 힘쓰는 일 말고는 한 게 없지만 여자들은 그동안 무슨 짓을 당했을지…….”
비통한 표정으로 말을 끝맺지 못하는 사내의 모습에, 조선 병사들은 가슴 깊은 곳에서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걷잡을 수가 없었다.
“이런 개만도 못한 놈들!”
퍼억!
병사 중 한 명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주먹을 휘둘렀고, 게르에 숨어 있다가 붙잡혀 있던 거란족 사내는 졸지에 정면으로 주먹을 얻어맞고 바닥에 나뒹굴었다.
“크윽!”
“죽어!”
“이, 이봐, 그만해!”
“어이, 누가 좀 말려!”
“됐어, 그냥 놔둬. 맞아도 쌀 짓을 했잖아. 에이, 퉤!”
“암만 그래도…….”
더 때리라고 부추기는 사람이 대부분이었고 말리는 사람은 몇 명 안 되었다.
이러다 큰 소란으로 번지는 건 아닌지 불안해질 때쯤, 근처에 있던 군관이 달려와 구타를 뜯어말렸다.
“이게 무슨 짓이야! 숨은 거란족 병사들을 찾아내라고 했지 누가 두들겨 패라고 했어?”
“이놈들이 한 짓을 보십시오, 어떻게 화를 안 내고 배기겠습니까!”
병사들의 아우성에 군관은 그제야 처참한 몰골을 하고 있는 조선인들을 발견했다.
“이런 썩을…….”
저도 모르게 욕설을 지껄인 그는, 아차 싶었는지 혀를 차고는 크게 소리쳤다.
“어쨌든 구타는 안 돼! 다들 진정하라고.”
“끄응.”
“위에서 내려온 명령대로 수색을 끝내는 게 먼저야. 나도 놈들이 한 짓에 분노가 치밀어 오르지만, 그렇다고 우리도 똑같은 행동을 할 수는 없잖아. 그러니까 다들 마음 가라앉히고 혹시 또 갇혀 있는 조선인이 없는지 살펴봐.”
“알겠습니다.”
“예.”
겨우 소란이 가라앉자 군관은 서둘러 이 소식을 윗사람에게 전하기 위해 뛰어갔다.
이렇게 구출해 낸 조선인들이 무려 백여 명 가까이 됐는데 다들 그동안 얼마나 힘든 생활을 했는지 피골이 상접한 모습이었다.
풀려난 조선인들은 토벌대 병사들을 부여잡고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뜨거운 눈물을 흘려, 모두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날 밤, 전장 정리를 끝낸 장수들이 성안에 세운 지휘 천막에 모두 모이자 김정태 장군이 입을 열었다.
“다들 수고가 많았네.”
“아닙니다.”
“우리 쪽 피해는 얼마나 되나?”
“쉰일곱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만, 그중 경상자 스무 명은 부상이 가벼워서 며칠 치료를 받으면 바로 복귀할 수 있을 겁니다.”
처음으로 천 단위가 넘는 적 기병과 정면 대결을 펼친 터라 걱정했었는데, 예상보다 훨씬 적은 피해로 승리를 거두게 되자 김정태 장군은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다행이군. 병력이 부족한 것도 아니니, 무리하지 말고 부상병들이 충분히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조치하게.”
“알겠습니다, 장군.”
“그리고 이곳에 잡혀 있던 조선인들은 어찌했나?”
질문을 받은 부관은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
“모두 빼내 군영에서 보호하고 있습니다만 다들 심신이 크게 지쳐 있는 상태입니다.”
“그동안 가축보다 못한 대접을 받으면서 노예처럼 부려졌으니 그럴 만도 하지. 일단 마음을 추스르고 기력을 회복하도록 도와주고, 어느 정도 안정이 되면 보급 부대를 따라 고향 마을에 안전하게 돌아갈 수 있게 해 줘.”
“예.”
성을 함락한 뒤 찾아낸 조선인 포로들의 처참한 모습을 똑똑히 목격한 장수들은 거란족에 대한 적개심과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다들 고생이 많았네. 기병대는 오늘 적과 전투를 벌였고 다른 부대도 여기까지 쉬지 않고 행군을 하느라 지치고 힘들겠지만, 얼마 전에 들어온 정찰 보고를 볼 때 곧 이명고가 직접 끌고 나온 부대와 일전을 치러야 될 것 같아.”
이쯤 돼서 이명고가 움직일 거라는 걸 예상했고 또 결전은 조선군도 바라던 바였기에 장수들은 크게 놀라지 않고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적군의 규모는 얼마나 됩니까?”
오늘 크게 활약한 최기용 기병연대장의 물음에 부관이 대신 대답했다.
“정찰병의 보고에 의하면 이만 내외라고 합니다.”
“이만이라…….”
“허어.”
“역시 유목 민족이라 전사들의 소집이 빠르군.”
“그러게 말입니다.”
상대의 규모를 들은 장수들은 순식간에 정예 기병 이만을 모은 거란족의 저력에, 새삼 감탄하면서도 겁을 먹기보다는 강한 승부욕을 보였다.
“그 정도면 이명고가 끌어모을 수 있는 전사를 다 데리고 온 것일 테니 잘하면 한 번의 전투로 토벌을 끝내 버리는 것도 가능하겠군요.”
“이리저리 도망 다녔으면 골치 아팠을 텐데, 차라리 잘됐습니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휘하 장수들의 반응에 김정태 장군은 미소를 지었다.
“자네들의 말대로 조만간 벌어질 전투에서 이명고군의 주력을 전멸시킨다면 그 이후부터는 가벼운 소탕전만 남게 될 걸세. 그러니 다들 정신 바짝 차리도록 해.”
“예.”
“적들이 현재 빠르게 남하 중이라고 하니, 굳이 병사들의 체력을 소모할 필요 없이 춘화성 위쪽에 위치한 벌판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전투를 치르는 게 좋을 것 같군. 자네들의 의견은 어떤가?”
그러자 보병 지휘관인 신종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은 생각인 것 같습니다.”
“이번에는 그대가 이끄는 보병들이 활약을 해 줘야 할 텐데, 자신 있겠지?”
“맡겨만 주십시오. 거란 놈들이 조선 총병들의 무서움을 뼈저리게 느끼도록 만들어 주겠습니다.”
신종수의 대답에 김정태 장군은 신뢰가 가득 담긴 시선을 보냈다.
“믿어 보지. 앞으로 달려오는 거란 놈들을 모조리 쓸어버리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다른 장수들도 이번 전투에서 우라타 부족을 확실히 분쇄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주게.”
“옛!”
천막에 모여 있던 장수들은 김정태 장군의 말에 일제히 머리를 숙이며 크게 복명했다.
“모두들 피곤할 테니 오늘은 이만하지. 아직은 적진 한복판이나 마찬가지니까 숙영을 하는 동안에도 경계를 게을리하지 말도록 해.”
“네.”
“그럼 가 보겠습니다.”
“그래.”
군례를 취한 장수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지휘 천막을 나간 후, 혼자 남은 김정태 장군은 탁자 위에 펼쳐 놓은 지도를 보며 작전을 점검했다.
다음 날 김정태 장군은 춘화성에 약간의 보급 부대만 남겨놓고는 전 병력을 십여 리쯤 떨어진 벌판으로 이동시켜 진을 쳤다.
한편 전사들을 이끌고 빠르게 남하하던 이명고는 춘화성에서 도망쳐 온 패잔병들과 만나 친동생인 이태립이 죽었다는 비보를 들었다.
꽈직.
자신도 모르게 힘이 들어가 손에 쥐고 있던 술잔을 깨 버린 이명고는, 앞에 엎드려 있는 패잔병을 내려다보며 분노에 찬 목소리로 되물었다.
“태립이가 죽었다니 그게 사실이야!”
“……예. 전투 중에 그만…… 적에게 당하셨습니다.”
이야기가 끝나기 무섭게 앞으로 달려 나온 이명고는 패잔병의 멱살을 꽉 틀어쥔 채 들어 올리고는 이를 갈며 소리쳤다.
“그 지경이 될 때까지 네놈들은 도대체 뭘 하고 있었던 거야!”
“커컥. 그, 그게 상황이 워낙 급박하게 돌아가는 바람에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패잔병이 말을 더듬으며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자 이명고는 입가에 냉소를 지었다.
“거짓말! 도망치느라 태립이의 안위는 안중에도 없었겠지.”
“아닙니다.”
“흥, 사실이라고 해도 비겁하게 족장을 버리고 도망쳐 온 겁쟁이에 대한 벌은 하나뿐이다.”
“……!”
푸욱!
섬뜩한 소리와 함께 차가운 금속이 살을 파고드는 느낌에 시선을 아래로 내린 패잔병은, 이명고가 자신의 복부에 단검을 깊숙이 찔러 넣은 것을 보고 눈을 크게 치켜떴다.
“큭.”
“이것으로 죄를 씻어라.”
“이…… 이.”
원한 가득한 눈빛으로 이명고를 노려보던 패잔병은 이내 고개를 떨어뜨리고는 힘없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헉.”
“족장님!”
갑작스러운 상황에 모여 있던 전사들이 화들짝 놀라 쳐다봤지만, 이명고는 태연하게 피 묻은 단검을 죽은 패잔병의 옷에 슥슥 닦고는 다시 의자로 가서 앉았다.
“어서 치워.”
“……예, 옛.”
호위 한 명이 얼른 시신을 끌고 밖으로 나가자 이명고는 왼편에 서 있는 이탑을 보며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일 춘화성으로 가서 조선 놈들을 다 죽여 버릴 테니까 그렇게 알고 전사들을 준비시키도록 해.”
“알겠습니다.”
동생의 죽음에 분노한 이명고의 눈에는 시퍼런 살기가 가득했다.
어둠을 밀어내고 찬란하게 떠오르는 붉은 태양은 언제 봐도 사람들에게 벅찬 감동을 선사했는데, 건곤일척의 결전을 앞두고 있는 이 순간은 더더욱 그러했다.
아침 일찍 밥을 지어 먹고 대기하고 있던 토벌대 병사들은 날이 밝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지축을 울리는 말발굽 소리를 내며 지평선 너머에서 모습을 드러낸 우라타 부족의 전사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왔군.”
경계병의 보고에 지휘 천막 밖으로 나온 김정태 장군은 새까맣게 몰려오는 적을 보며 담담한 어투로 말했다.
“예상한 대로 규모는 이만 내외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풍기는 기세로 보니 저쪽도 아주 단단히 마음을 먹고 나온 모양이군요.”
“여기서 밀리면 끝장이라는 걸 알 테니 당연히 그렇겠지. 하지만 이기는 쪽은 우리야. 모두 전투태세를 갖추라고 해.”
“옛.”
잠시 뒤 전투준비를 알리는 뿔고동 소리가 길게 울리자 토벌대 병사들은 백인대별로 신속하게 전투대형을 갖추었다.
뿌우우웅! 뿌우우웅!
“이제부터 실전이니까, 다들 정신 똑바로 차려!”
“어떤 경우라도 대열을 흐트러뜨리지 말고 명령에 따라 움직이도록. 알겠나!”
“예!”
지금까지는 선두에 선 기병들이 거의 대부분의 전투를 치르며 진격로를 열어 주었기에 거란족과 맞닥뜨려 싸울 기회가 없었던 보병들은 약간 긴장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것을 본 하급 군관들은 일부러 더 크게 고함을 질러 보병들이 실수를 하지 않고 정신을 바짝 차리게 했다.
그렇게 토벌대가 전열을 갖추는 사이에 상대편도 삼백 보쯤 떨어진 곳에 멈춰, 길게 늘어섰다.
숫자로는 양쪽이 삼만 대 이만으로 조선군이 조금 우세했지만, 전장인 평지에서 강한 기병으로만 구성된 적과 달리 아군은 절반가량이 보병이었다.
하지만 창을 들고 다니는 일반 보병이 아니라 총병들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기에 쉽게 승패를 예단하기는 어려웠다.
말 위에 서서 상대를 쳐다보던 이명고는 자신이 생각하고 여태까지 봐 왔던 오합지졸 조선군이 아니라, 군기가 바짝 살아 있고 투기 또한 넘치는 모습을 보고 무의식적으로 낮게 침음을 흘렸다.
“으음.”
“돌격 준비가 다 끝났습니다, 족장님.”
이탑의 보고에 정신을 차린 이명고는 살짝 굳은 얼굴로 뒤에 도열해 있는 전사들을 훑어보고는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빼 들며 명령을 내렸다.
“겁도 없이 우리 땅을 침범한 조선 놈들에게 거란족의 무서움을 알려 주자!”
“우와아아!”
목청을 높여 전사들이 크게 함성을 내지르자 이명고는 검을 앞으로 내리며 외쳤다.
“돌격!”
“이야! 가자!”
명령이 내려짐과 동시에 전사들은 타고 있던 말 옆구리를 발로 가볍게 차며 일제히 앞으로 달려 나갔다.
두두두두두!
순간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땅이 마구 울렸다.
무려 이만에 달하는 기병이 달려오는 모습은 가히 장관이었지만, 그것을 정면에서 보며 온몸으로 맞서 싸워야 하는 병사들한테는 엄청난 압박과 공포를 안겨 주었다.
“꿀꺽.”
“젠장, 더럽게 많네.”
아무리 훈련을 많이 받고 용감해도 동요하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러자 실전 경험이 많은 선임병과 하급 군관 들이 나서 병사들을 다독였다.
“함께 있는 동료와 너희가 들고 있는 무기를 믿어라! 저딴 놈들은 조총 사격 몇 번이면 다 벌집으로 만들어 버릴 수 있다.”
“까짓것, 한 번 죽지 두 번 죽냐. 그동안 우리 백성들을 괴롭힌 거란 놈들한테 본때를 보여 주자고!”
“우와!”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병사들이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자 보병 지휘관인 신종수가 말을 탄 채 외쳤다.
“거총!”
처처처척.
병사들은 개머리판을 어깨에 대며 총을 들어 올렸다.
기병은 같은 기병으로 상대하는 것이 정석이다. 그리고 조선군이 상당한 숫자의 기병을 보유한 것 또한 알고 있는데 아무런 움직임이 없고, 보병들이 창도 아니고 처음 보는 기다란 쇠막대를 꺼내 들자 말을 달려오는 거란족 전사들은 의구심이 들었다.
하지만 기병은 한번 달리기 시작하면 쉽게 멈출 수가 없었기에, 의문을 가지면서도 속도를 늦추지 않고 조선군 진영을 향해 계속 돌격해 들어갔다.
순식간에 거리가 좁아져 이제 백여 보 앞까지 적이 육박해 들어오자 말발굽 소리가 심장까지 울렸다.
두 팔에 힘을 잔뜩 주지 않으면 조준을 제대로 할 수 없을 정도로 몸이 떨려 왔다.
긴장감과 공포가 급격하게 늘어났지만, 조선군은 겁을 먹고 대열을 이탈하는 사람 하나 없이 흔들리지 않고 침착하게 지휘관의 명령에 따랐다.
“조준!”
표적은 얼마든지 있었기에 대충 겨냥하고 쏴도 다 맞을 정도였다.
과도한 긴장감에 자신도 모르게 방아쇠를 당길 만도 했지만, 그런 병사가 한 명도 나오지 않는 것을 보면 그동안 얼마나 많은 훈련을 받았는지 잘 알 수 있었다.
이제 적들의 얼굴을 똑똑히 확인할 수 있을 만큼 양측의 거리가 가까워졌다.
억겁 같은 시간이 흐르고 거란족 전사들이 유효 사정거리 안에 들어오자, 마침내 신종수의 입에서 기다리던 명령이 떨어졌다.
“쏴라!”
타타탕! 타탕! 탕! 탕!
명령과 동시에 수천 개의 총구에서 시뻘건 불길이 솟았다.
“커억.”
“윽!”
이히히힝!
기괴한 소리를 내며 앞에 서서 달려오던 거란족 전사들은 총탄 세례에 마치 짚단 넘어지듯 우수수 비명을 내지르면서 바닥에 떨어졌다.
기껏해야 화살 공격 정도를 예상한 적들은 총성이 울리자 본능적으로 나무에 가죽을 덧대어 만든 둥근 방패를 들어 올려 몸을 가렸지만, 날아온 총탄은 그런 상대의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그대로 관통해 거란족 전사들을 유린했다.
비명이 사방에서 난무했고 거란족 전사들이 당황하는 사이에 또다시 총탄 세례가 퍼부어졌다.
“일 열, 재장전. 이 열, 발사!”
앞에 서 있던 총병들이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허리띠에 매고 있던 화약 주머니와 총알을 꺼내 재빨리 재장전을 하는 동안 두 번째 열이 사격을 했다.
타타탕! 탕! 탕!
또다시 천둥이 치는 듯한 요란한 총성이 울리자 수많은 적들이 총탄에 맞아 피를 뿌리면서 나뒹굴었다.
처음 겪어 보는 조총 공격에 잠시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이명고는 그제야 상황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다급히 외쳤다.
“방패로 몸을 최대한 가리고 거리를 좁혀 난전을 벌여라!”
들고 있는 방패가 총탄을 막는 데 아무런 효과가 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것 말고는 딱히 다른 대안이 없었다.
지금 할 수 있는 건 생사를 운에 맡기고 빨리 거리를 좁혀 상대가 조총을 쏘지 못하게 하는 방법뿐이었다.
“총병 부대, 지금부터는 적 선두를 향해 자유 사격을 실시해라!”
신종수의 지시에 총병들은 장전을 하는 대로 순서를 가리지 않고 사격을 해 댔다.
탕! 탕! 탕!
급하게 서두르다가 화약이 든 가죽 주머니를 떨어뜨리거나 총알을 놓치기도 했지만, 대부분 막상 전투가 시작되자 떨지 않고 아주 침착하게 훈련받은 대로 움직였다.
사격이 선두에 선 적에게 집중적으로 가해지자 돌격해 오는 거란족 전사들의 피해가 급증했고, 더불어 속도까지 현저하게 떨어졌다.
큰 피해를 입으면서도 죽기 살기로 거리를 좁혀 오는 거란족 전사들은 광폭한 살기를 뿜어 댔다.
숫자를 꽤 줄였다고는 하지만 적들의 기세는 여전히 살아 있었기에, 이대로 부딪친다면 총병들도 타격이 클 수밖에 없었다.
총병 하나를 키우는 데 들어가는 시간과 비용을 생각할 때,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다고 해도 총병 부대가 치명적인 손실을 입는다면 오히려 큰 손해였다.
이제 양쪽의 거리가 오십 보밖에 남지 않았을 때, 조선군 진영 좌우 날개에서 커다란 함성이 울리며 지금까지 모습을 보이지 않던 기병대가 쏟아져 나왔다.
“기병대 돌격! 거란 놈들의 숨통을 끊어 놓자!”
“우와아아!”
기병 연대장인 최기용의 외침에 기병들은 가지고 있던 검을 높이 치켜들며 호응했다.
그들은 두 자루의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앞으로 달려 나와, 무방비 상태로 텅텅 비어 있는 적군의 양쪽 옆구리를 사정없이 파고들었다.
“이런 썅!”
얼굴을 와락 구긴 이명고가 욕설을 내뱉는 것과 동시에 양쪽이 충돌했다.
콰콰콰쾅!
이번에도 어김없이 권총을 쏴서 먼저 피해를 입힌 조선군 기병은 당황한 적에게 검을 마구 휘둘렀다.
탕! 탕! 탕!
“아악!”
“끄억.”
섬뜩한 총성이 울리며 발사된 총탄은 적군이 들고 있는 방패와 두꺼운 가죽 갑옷을 너무나도 쉽게 뚫고 들어가 거란족 전사들의 목숨을 앗아 갔다.
설마 말을 탄 상태에서 총을 쏠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적군은 큰 충격과 혼란에 빠져들었다.
말들도 총성에 놀라 이리저리 날뛰는 바람에 적들은 더 애를 먹었다.
이히히힝.
푸르릉.
“이런.”
“워워, 가만히 있어!”
이명고마저 오랜 시간 타고 다닌 애마가 흥분해서 말을 듣지 않는 것을 진정시키느라 진땀을 빼야 했다.
계속 이어지는 사격과 양쪽 측면을 치고 들어온 기병대의 공격에, 적들은 더 이상 돌격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멈춰 선 상대와 달리 달려오는 속력을 그대로 가진 채 거란족 전사들을 덮친 조선군 기병들은, 마치 난폭한 맹수처럼 날뛰면서 적을 마구 물어뜯었다.
“컥.”
츄악.
“죄다 죽여 버려!”
푸욱.
전속력으로 달려온 최기용은 검을 휘둘러 앞을 가로막고 있던 적병의 목을 날려 버리며 지나갔다.
그러자 옆에 있던 다른 적병이 동료의 복수라도 하려는 양 최기용의 등 뒤를 노렸지만, 따라오던 조선군 기병이 내지른 검에 어깨를 베이고는 비명을 지르면서 낙마했다.
“감히 어딜 노리는 거야!”
이렇게 조선군 기병들은 서로를 보호하면서 달리는 속도를 늦추지 않고, 적들 사이를 빠르게 지나가며 눈에 보이는 족족 상대편을 향해 검을 찔러 넣었다.
거란족 전사들도 격렬하게 저항했지만 돌격의 기세를 살린 조선군 기병대의 공격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적군의 피로 만들어진 혈로를 뚫어 내며 상대편 진영을 아래위로 크게 가로지른 기병대는 재빨리 반전을 해서 재차 돌격을 감행했다.
타고 있는 말들이 머리를 흔들며 단내와 함께 거친 숨결을 토해 냈지만, 한차례 피 맛을 본 기병대는 온몸이 흥분한 상태가 되어 지치기는커녕 살기를 더욱 강하게 피워 올렸다.
쿠꽝!
거친 파공음이 울리고 또다시 비명과 선혈이 난무하면서 적군 대열이 무너져 내렸다.
사방에 널려 있는 거란족 전사들의 주검과 지금 이 순간에도 조선군이 휘두르는 검에 부하들이 비명을 내지르며 죽어나가는 것을 보며, 이명고는 허탈한 얼굴로 믿기지 않는 듯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어떻게 이럴 수가…….”
처음 전투를 시작할 때만 해도 조선군을 박살 내 버릴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결과는 정반대가 되어 버렸다.
아무리 조총이라는 예상치 못한 무기의 등장과 상대편이 쓴 전술에 놀아났다고 해도 이건 아니었다.
이를 악다문 이명고는 검 손잡이를 꽉 움켜쥐며 외쳤다.
“모두 이쪽으로! 함께 돌격 대형을 만들어 적진을 돌파한다!”
어떻게든 이 절망적인 상황을 벗어나려는 이명고의 마지막 발버둥이었다.
그러자 이탑과 근처에 있던 전사 수백여 명이 모여들었다.
막 앞에서 얼쩡거리는 적병의 가슴에 검을 쑤셔 박은 최기용은 그것을 보고 눈을 번득이며 고함을 질렀다.
“저놈이 이명고다!”
전투를 시작하기 전에 누구든 족장인 이명고의 목을 베는 자에게 금 열 냥을 주겠다는 포상을 걸어 두었기에, 순간 주위에 있던 조선군 기병들이 일제히 말 머리를 돌려 달려들었다.
“금 열 냥짜리다!”
“저놈 머리는 내 거야!”
“흥, 누구 마음대로!”
“적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아라!”
상황이 엉뚱하게 전개되자 이탑은 다급한 목소리로 전사들에게 지시를 내리고 직접 나서서 덮쳐 오는 조선군 기병에 맞서 싸웠다.
채챙! 챙!
개개인의 무위는 거란족 전사들이 앞섰지만, 조선군 기병은 수적으로 훨씬 많은 데다 효율적인 협공까지 펼쳐 상대를 압박했기에 상대가 되지 않았다.
병장기가 부딪치는 쇳소리와 함께 끈적한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거침없이 검을 휘둘러 목 없는 시신 여러 구를 만들어 낸 최기용은, 달려드는 조선군 기병의 가슴에 칼을 박아 넣어 낙마시키는 이명고를 보고 그쪽으로 말을 몰아갔다.
잠시 숨을 고르고 있던 이명고는 최기용이 다가와 검을 내려치자 얼른 방어를 했다.
채애앵.
맑은 쇳소리가 울리는 가운데 최기용은 연속해서 검격을 날리며 호탕하게 말했다.
“군호 최기용이, 오늘 네놈의 목을 가져가야겠다!”
상대의 도발에 이명고는 눈썹을 치켜세우며 콧방귀를 뀌었다.
“흥! 어디, 가져갈 수 있으면 그렇게 해 봐라.”
허공에 잇달아 불꽃이 튀었다.
이명고는 힘으로 상대를 몰아붙였다. 그러나 최기용도 만만치 않았는데,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공격을 막아 내고는 조금이라도 틈이 보이면 여지없이 검을 찔러 넣었다.
슈칵.
“큭.”
최기용이 내지른 검에 어깨를 살짝 베인 이명고는 그만 평정심을 잃고 사선으로 크게 무기를 내려 그었다.
“죽어!”
휘이익.
실력이 엇비슷한 상대에게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행동이었지만, 뜻밖의 패전으로 인한 흥분과 불안감이 그를 조급하게 만들었고 결과는 치명적이었다.
상체를 살짝 틀어서 공격을 피해 낸 최기용은 허점을 놓치지 않고 곧바로 반격을 가했다.
“끝이다!”
“헉…… 이놈이!”
화들짝 놀란 이명고가 몸을 뒤로 빼려고 했지만, 검을 위로 올려치는 최기용의 행동이 한 박자 더 빨랐다.
촤아아악.
최기용이 휘두른 검은 이명고의 오른쪽 옆구리에서 가슴까지 정확히 살을 가르며 지나갔고, 그의 몸에서 내장과 함께 폭포수처럼 피가 쏟아져 나왔다.
“끄허억.”
숨넘어가는 신음을 토해낸 이명고는 배를 움켜잡고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눈을 끔뻑이다 안장에서 풀썩 떨어졌다.
그렇게 이명고를 포함한 거란족 전사 이만 명은 조선군에게 모두 전멸당하고 말았다.
개중에는 이명고가 죽고 전황이 완전히 기울자 필사적으로 탈출을 시도하는 자들도 있었지만, 어느새 주위를 포위하고 있는 보병과 가볍게 뒤쫓아 온 기병들이 휘두른 검격에 예외 없이 피를 뿌려야 했다.
아침부터 시작된 전투는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모두 끝났다.
이번에도 조선군의 대승이었다.
전장을 수습하고 하룻밤을 쉰 조선군 토벌대는 승전 소식과 함께 목표였던 이명고를 참살했다는 내용을 적은 장계를 한양으로 보내고는 다시 북상하기 시작했다.
믿었던 이명고와 전사들이 전멸했다는 소식에 우라타 부족은 난리가 났다.
원로들이 모여 밤새 대책을 논의했지만, 이미 싸울 수 있는 전사 대부분을 이명고가 이끌고 갔던 상태였기에 조선군의 진격을 저지할 만한 마땅한 방법이 없었다.
갑론을박 끝에 조선이 그동안 보여 준 유화적인 모습에 기대를 걸어 보기로 한 원로들은, 이번 전쟁의 빌미가 된 조선인들을 모두 돌려주고 엎드려 용서를 빌기로 결정하고 급히 사절을 파견했다.
다른 때 같았으면 먹혔을지도 몰랐지만, 정복 군주 성향이 강한 도현에게 우라타 부족의 영역을 모두 조선 땅으로 편입시키라는 어명을 받은 김정태 장군은 잡혀갔던 조선인들만 돌려받고는 크게 혼을 낸 뒤 찾아온 사절을 쫓아냈다.
조선군이 원하는 것은 단 한 가지, 무조건적인 항복과 복속이었다.
너무나도 강경한 태도에 원로들은 어쩔 수 없이 근거지를 버리고 도망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그것도 뜻대로 되지 않았는데, 본진이 이명고군과 전투를 벌이는 동안 쾌속 진격을 한 일 사단과 삼 사단이 흥개호수에 이미 도달해 유일한 탈출로인 우수리강 지류를 막고 거대한 포위망을 완성해 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사들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던 우라타 부족은 우수리강 지류에 도착해 포위망이 만들어져 있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리고 망연자실했다.
뒤에서는 토벌대 본진이 쫓아오는 상황에서 그야말로 진퇴양난의 위기에 빠졌는데, 그렇다고 강행 돌파를 시도하기에는 전력이 너무 미미했다.
지금도 노약자와 어린아이 들이 대부분인 상황에서 자칫 부족 전체가 와해되어 버릴 수도 있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그저 발만 동동 구르고 있을 때, 어느새 반나절 거리까지 압박해 온 토벌대 본진에서 내일 정오까지 항복하지 않으면 군을 몰아가 모두 쓸어버리겠다는 최후통첩을 했다.
원로들은 부족의 운명이 걸린 일이었기에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마감 시한 직전까지 고심을 거듭한 끝에, 결국 백기를 들고 김정태 장군을 찾아가 무릎을 꿇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