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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불씨 (46/104)

새로운 불씨

“전하, 오전에 보시고 남은 상소문이옵니다.”

“컥.”

간식으로 다과를 우물거리고 있던 도현은 칠현이 내민 상소문 더미를 보고 목에 뭔가가 탁 걸린 듯한 기침 소리를 냈다.

“괜찮으십니까?”

“안 괜찮아.”

도현은 입맛이 뚝 떨어졌다는 표정으로 이맛살을 찌푸렸다.

“아까 전에도 그렇게 많은 상소문을 읽었는데, 아직도 저렇게 많이 남았어?”

도현은 상소문 중 하나를 집어 아무렇게나 펼쳐 보고는 한숨을 푸욱 쉬었다.

“아니, 도승지는 어디 휴가라도 갔대? 겉에 상소문이라고 적혀 있으면 그냥 나한테 바로 올려 버리는 거야? 어째 매일 빠짐없이 읽어도 끝이 안 나.”

“그래도 도승지께서 걸러서 그 정도 아닙니까.”

“근데 왜 눈 감았다 뜨면 매일 아침 두 배로 늘어나 있냐고. 무슨 자가 증식하는 아메바도 아니고.”

“아…… 뭐요?”

“그런 게 있어.”

귀찮다는 표정으로 손을 휘휘 내저은 도현은 이게 다 날 괴롭히려는 사대부들의 수작이라며 툴툴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새벽 아침 해가 뜨기도 전에 일어나서 밥 먹고 제일 처음 하는 일이 상소문 읽기인데, 중간에 간식을 들거나 신하들과 대면하는 시간 빼고는 상소문에 파묻혀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차라리 요즘 보고서처럼 제목, 본문, 결론 이렇게 세 가지로 나뉘어 있으면 읽기라도 편하지.

옛 성현의 말이 어쨌느니 중국 고사에 이런 이야기가 있느니 하면서 인용문을 들먹이는 건 물론이고, 중국 사람도 알까 싶은 어려운 한자투성이라 여간 알아보기가 힘든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간혹 선비들 사이에 유행하는 거랍시고 서체까지 흘려 쓰면 그냥 보다가 던져 버리고 싶을 지경.

국왕이 되어 신하와 백성의 이야기를 들으려면 상소문을 읽는 것이 필수 불가결이라고는 하지만, 이러다가 내가 먼저 죽겠다 싶은 생각이 드는 게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이러니까 역대 조선 왕들이 제 명대로 못 산 거야.”

“뭐라 하셨습니까?”

“아냐, 됐다.”

마음 같아선 그냥 내일로 미루어 놓고 아들딸 재롱이나 보러 가고 싶지만 그랬다간 일이 곱절 아니, 세 배로 불어서 자신을 덮칠 게 뻔할 뻔 자.

그냥 죽었다 생각하고 일이나 하자며 칠현에게서 상소문을 받아 들어 읽을 자세를 취하던 찰나, 밖에서 고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전하, 도승지께서 만나 뵙길 청하나이다.”

“응?”

갑작스러운 도승지의 방문에 도현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칠현을 마주 보았다.

“도승지랑 만날 약속이 되어 있었던가?”

“아니요.”

“……설마 아까 욕한 걸 들었나.”

“에이, 설마요.”

“아냐,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던데…….”

찔리는 게 있는지라 떨떠름하게 중얼거리는 도현에게 밖에서 한 번 더 독촉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전하.”

“어, 들라 하라.”

드르륵.

양옆으로 미닫이문이 열림과 동시에 도승지가 방 안으로 들어와 허리 숙여 인사했다.

“전하.”

“음, 그래, 무슨 일이오?”

그러면서 도현의 시선은 자연스레 도승지의 손에 들린 두루마리 쪽으로 향했다.

매일같이 상소문 더미를 보내는 것도 모자라 이젠 직접 가져오기로 했나, 싶은 생각에 도현이 짜증스러운 표정을 짓자 영문을 모르는 도승지는 조심스레 그의 눈치를 살폈다.

“상소문을 살피시는 데 제가 방해를 했사옵니까.”

“아니오. 그냥 도승지가 올린 상소문 몇 개를 읽던 중인데, 방해랄 것이 뭐가 있겠소. 하하!”

도현은 언뜻 봐도 스무 개는 넘어 보이는 상소문을 손으로 탁탁 두드리며 말했다.

“열심히 읽으면 오늘 중으로 끝낼 순 있겠지, 아무렴!”

“아…… 네, 그렇사옵니까.”

어색하게 웃는 도현의 모습에 칠현은 터져 나오는 폭소를 참느라 얼굴이 벌겋게 변했다.

“……?”

“크흠, 그래서? 용건이 뭔지 말해 보시오.”

“아, 네. 여기 토벌대에서 전령을 통해 보내온 장계를 가져왔사옵니다.”

애초에 토벌대를 파견할 때 거기서 보내는 연락은 무조건 바로 올리라는 명령이 있었기에 도승지가 직접 들고 온 것이었다.

“어디 보자.”

도승지의 손에서 두루마리를 잽싸게 받아 든 도현은 그것을 얼른 양손으로 펼쳐 빠르게 내용을 훑어 내려갔다.

대충 반 정도를 읽은 도현은 더 볼 것도 없다는 듯 장계를 탁 반으로 접고서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토벌대가 대승을 거두었다는군.”

“정말이옵니까?”

“감축드리옵니다, 전하.”

곁에서 눈을 동그랗게 뜨는 칠현과 더불어 도승지의 축하 인사를 받은 도현은 요 근래 처음으로 가장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북방에서 전해진 승전 소식에 조정이 크게 들썩이는 가운데, 도현은 신료들을 소집해 후속 조치를 논의했다.

“토벌대가 대승을 거두었다는 소식은 다들 들었을 것이오.”

왕좌에 앉은 도현이 한껏 힘이 들어간 목소리로 말하자 영의정 박황이 머리를 살짝 숙이며 입을 열었다.

“예. 세종대왕께서 오랑캐들을 징벌하고 육진을 개척해 북방을 안정시킨 것과 버금가는 큰 업적이시옵니다.”

“이 모든 것이 전하의 선견지명과 과감한 결단 덕분에 이루어 낸 쾌거이옵니다.”

“거둔 승리에 비해 피해가 경미하다고 하니, 이 또한 하늘이 전하를 도운 것이 아니겠사옵니까.”

“감축드리옵니다, 전하.”

“허허허.”

처음 북방 토벌 이야기를 꺼냈을 때 붕당을 가리지 않고 거의 대부분의 신료들이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던 것을 생각하면 이제 와서 이러는 것이 살짝 괘씸했지만, 아직 얻어 낼 것이 남아 있었기에 도현은 내색하지 않고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어찌 짐 혼자만의 공이겠소. 다 경들이 짐을 믿고 따라 준 덕분이오.”

“황공하옵니다, 전하.”

뼈가 있는 도현의 말에 신료들은 약간 무안한 표정을 지으며 머리를 숙였다.

“대승을 거둔 함경도 병마절도사 김정태와 휘하 장졸들에게 상급을 내렸으면 하는데, 경들의 의견은 어떤가?”

그러자 병조참판인 임경업이 제일 먼저 나서 찬성했다.

“공을 세웠으면 상을 내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옵니다.”

“맞사옵니다.”

신료들이 별다른 반대를 의견을 내지 않자 도현은 미리 생각해 둔 것을 이야기했다.

“그럼 토벌대를 이끈 김정태를 공신으로 등록하고 품계도 한 단계 높여 종이품 부총관에 임명하시오. 휘하의 다른 장졸들도 거둔 공에 따라 상급을 내리도록 하겠소.”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그리고…….”

잠시 대전에 모인 신료들을 스윽 훑어본 도현은 가장 중요한 문제를 꺼냈다.

“이번에 토벌한 우라타 부족의 영역을 완전히 우리 영토로 만들기 위해, 세종대왕께서 하신 것처럼 군진을 설치해 관리할 것이오.”

“……!”

반대를 최소화하기 위해 일부러 비변사 참가 인원과 몇몇 측근을 제외하고는 철저히 비밀에 붙인 계획이었기에, 신료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란 얼굴로 그를 쳐다봤다.

“설마 앞으로도 계속 두만강 너머에 병력을 주둔시키시겠다는 말씀이시옵니까?”

우의정 송시열이 굳은 표정으로 묻자 도현은 약간의 주저함도 없이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순간 대전이 술렁였고, 신료들은 당혹스러운 감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자면 청이 어떻게 나올지도 걱정이지만 새로운 영토를 관리하고 지키는 데 적지 않은 국력이 소모될 것이옵니다.”

“각오하고 있소. 하지만 처음에는 어렵더라도 일단 우라타 부족의 영역이 우리 영토로 완전히 편입되면 여러 가지로 이점이 많을 거요. 당장 비옥하고 넓은 벌판만 해도 모두 농토로 개간한다면 식량 생산에 큰 도움이 될 테고, 머지않아 대망을 이루기 위해 군을 움직일 때도 아주 요긴하게 쓰일 수 있을 것이오.”

“으음…….”

그가 말하는 대망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는 사람은 대전에 아무도 없었다.

청의 시선을 생각해 대놓고 주창하지는 못해도, 도현과 조정 신료들 모두 항상 북벌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리고 북방 영토를 취하는 것은 먼 옛날 만주 벌판을 호령한 고구려의 잃어버린 옛 땅을 되찾는 뜻깊은 일도 될 것이오.”

도현의 이야기에 젊은 신료들은 가슴속 깊은 곳에서 뭔가 뜨거운 것이 올라옴을 느꼈다.

하지만 송시열을 비롯한 노신들은 얼굴을 굳히며 걱정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중원에 진출하면서도 만주를 자신들의 고향이라 말하며 중요하게 생각하는 청나라가 이 사실을 알면 가만있지 않을 것이옵니다.”

그러자 도현은 송시열과 시선을 마주치며 차분히 이야기를 했다.

“여진족들이 모여 사는 곳과 멀리 떨어진 동쪽으로 한참 치우친 땅이고, 당분간은 소문이 퍼지는 것을 철저히 막을 것이니 너무 염려하지 마시오.”

“열 포졸이 도둑 하나를 못 잡고,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간다고 청나라도 눈과 귀가 있을 텐데 언제까지 비밀로 숨길 수는 없는 일 아니겠사옵니까?”

“물론 그렇겠지.”

웬일로 순순히 인정을 한 도현은 이내 눈을 번득이고는 힘이 가득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때도 청나라가 얼토당토않은 요구를 해 온다면 단호히 거절하고 일전도 불사할 것이오!”

“헉!”

“저, 전하.”

그가 너무나도 단호한 태도로 그동안 은연중에 일부러 거론하지 않았던 청나라와의 전쟁을 이야기하자, 신료들은 크게 당황했다.

그의 최측근 중 하나이자 왕당파의 수장인 영의정 박황도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우지 못하며 황급히 상황을 수습하려 했다.

“흠흠, 전하. 말씀이 조금 과하셨던 것 같사옵니다. 그 정도로 이번에 확보한 땅을 중하게 여기신다는 뜻이시겠지요.”

실언으로 대충 무마시키며 넘어가려던 박황의 노력은 바로 이어진 도현의 말에 말짱 도루묵이 됐다.

“아니, 진심으로 하는 이야기일세.”

“전하!”

얼굴이 창백해진 박황이 기겁을 하며 그를 쳐다봤지만 도현은 아주 작정을 했는지 마음속에 담아 두고 있던 생각을 거침없이 쏟아 냈다.

사실 지금까지, 말로는 북벌을 주창하면서도 군사력을 키우며 실제로 행동에 나서는 것은 꺼리는 송시열과 유림 세력에 불만이 많았다.

이런 식이라면 자신의 뜻을 펼쳐 나가는 데 심각한 장애 요인이 될 거라는 판단에, 도현은 그들에게 흑인지 백인지 태도를 분명히 할 것을 강요하기로 마음먹었다.

“입으로는 삼전도의 치욕을 갚고 북벌을 이루자며 떠들어 대면서 정작 청나라와 부딪치는 일이 벌어지면 뒤로 물러서려고만 하니, 이래 가지고 무슨 대업을 이룰 수 있겠소! 솔직히 경들이 진정으로 지난날의 한을 씻어 낼 마음과 용기가 있는지 의문이오.”

아픈 곳을 쿡쿡 찌르는 말에 부끄러워진 신료들이 얼굴을 붉힌 채 아무런 대꾸도 못 하는 가운데 그의 이야기가 계속 이어졌다.

“이번 일만 해도 그렇소. 장차 나라에 큰 이익이 되고 대륙으로 뻗어 나가는 전초기지로 활용할 수도 있는 땅을, 병사들이 피를 흘려 어렵게 얻은 그곳을 단지 청나라가 무서워 그냥 포기한다는 게 말이 되는 소리요!”

마치 속마음을 꿰뚫어 보는 듯한 도현의 시선에, 잠시 말이 없던 송시열은 헛기침을 하며 굳게 다물고 있던 입을 열었다.

“흠흠, 저희라고 왜 북벌을 이루고 싶은 마음이 없겠사옵니까. 하지만 너무 성급하게 서둘렀다가 자칫 지난날 삼전도에서 당한 치욕이 또다시 벌어질까 봐 염려해 그런 것일 뿐이옵니다.”

“맞사옵니다, 전하.”

그러자 도현은 살짝 미간을 모으고는 답답하다는 듯이 신료들을 쳐다봤다.

“경들이 뭘 우려하는지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하다가 어느 세월에 북벌을 할 수 있겠소? 아무리 좋은 계획도 실행에 옮기지 않으면 말짱 헛것이라는 걸 모르시오?”

틀린 말이 하나도 없었기에 도현의 질책을 들은 송시열은 머리를 숙이며 말했다.

“송구하옵니다.”

“이래도 새로 획득한 영토에 진을 세우는 일을 반대할 것이오?”

어쩌다 보니 여기서 반대를 하면 북벌 자체를 부정하는 것과 동일시되어 버리는, 묘한 상황이 되고 말았다.

바로 대답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던 송시열은,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는 도현과 잠시 시선을 주고받다가 이내 이야기를 했다.

“아닙니다. 대업을 이루는 데 도움이 된다면 그렇게 하셔야지요.”

“뜻대로 하시옵소서.”

다른 신료들도 뒤따라 상체를 숙이면서 대답하자 도현은 흡족한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병판.”

“하교하시옵소서, 전하.”

“각 부처들과 협의해 토벌이 마무리되는 즉시 진을 설치할 수 있게끔 만반의 준비를 갖추도록 하시오.”

“알겠사옵니다.”

“그리고 새로 확보한 땅을 완전히 우리 영토로 만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조선 백성들이 거기서 사는 것이 중요하니, 형판은 강제 노역을 하고 있는 유민들 중 일부를 이주시켜 터전을 일굴 수 있도록 하시오. 가급적 가족 단위로 보내고 북방으로 가는 자들은 남은 노역 기간과 상관없이 풀어 줄 것이며, 개간하는 농토 중 일부를 무상으로 나눠 주겠다고 짐의 이름으로 공표하시오.”

“예.”

“따로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다들 알고 있겠지만, 오늘 대전에서 한 말은 청나라의 귀에 들어가지 않도록 입을 단단히 단속해야 될 것이오.”

명과 전쟁을 벌이면서도 심양에 수만 명의 팔기군을 남겨 둘 정도로 조선을 견제하는 청나라였기에, 도현이 북벌을 주창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그 후폭풍이 어떠할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랬기에 신료들은 하나같이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

“염려 마시옵소서.”

“그럼 비변사는 서둘러 진을 설치할 구체적인 계획을 작성해서 올리고, 대전 회의는 여기서 끝내도록 하겠소.”

“옛.”

지시를 내린 도현은 왕좌에서 일어나 당당한 걸음으로 대전을 나갔다.

“이거, 전하께서 너무 서두르시는 것 아닙니까?”

“그러게 말입니다. 군사력을 키워 남해도 원정과 이번 토벌까지 모두 성공시킨 것은 인정하지만, 아직 청나라 팔기군을 상대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은데 벌써 칼을 빼 들려고 하시니 어째 걱정스럽습니다.”

“대감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대전을 나와 아무런 말없이 걸음을 옮기던 송시열은 좌우에 서서 함께 걸어가는 신료들의 물음에 피식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조금 서두르는 감은 있지만 그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예?”

“무슨 말씀이십니까?”

송시열은 의아한 표정을 짓는 신료들을 보며 진지한 어조로 이야기를 이었다.

“솔직히 아까 대전 회의 때 주상께서 지적하신 대로, 우리가 북벌을 주창하기는 했지만 막상 구체적인 실행 계획을 내는 것이 부족했던 건 사실이지 않나.”

“그거야 병자호란 같은 치욕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신중하게 움직이다 보니 그런 것 아닙니까.”

“그건 핑계일 뿐이고. 나만 해도 복수를 하고 싶은 마음은 간절했지만 어느새 북경을 함락시키고 우리가 상국으로 섬기던 명을 바람 앞의 촛불과 같은 가련한 신세로 만들어 버린 청과 결전을 벌일 용기가 선뜻 나지 않았네.”

“으음…….”

송시열이 자신의 치부를 과감하게 드러내자 신료들은 일순 놀라면서도, 자신들 역시 비슷한 처지였기에 찔리는 표정을 지었다.

“한쪽 발만 걸친 채 머뭇거리고 있던 내 등을 주상께서 떠밀어 주시니 난 오히려 홀가분한 기분이 드는데, 자네들은 안 그런가?”

“뭐, 속은 시원합니다.”

“앞으로 전하께서 어떻게 북벌의 꿈을 이뤄 나가시는지 한번 지켜보도록 하세.”

“예.”

송시열은 다시 휘적휘적 걸음을 옮겼다.

도현은 새로 생긴 영토를 발해도渤海道라고 직접 이름 짓고 편입 작업을 서둘러 진행시켰다.

주민들 대부분이 야인이라 불리는 거란족들인 데다가 아직 불안정한 주변 상황을 고려해 당분간 발해도에서 군정을 펼치기로 결정하고, 이번 토벌에서 큰 공을 세우고 종이품 부총관이 된 김정태를 도독에 임명해 관리를 맡겼다.

더불어 그곳에 이주시킬 유민을 선별하는 작업에도 박차를 가했다.

그리고 혹독한 자연환경을 감안해 지난번 남해도 정벌에서 포로가 된 왜구 천여 명을 먼저 올려 보내 기반 시설 공사를 시작하도록 했다.

“왜구들은 출발했나?”

질문을 받은 도승지는 허리를 살짝 숙이며 대답했다.

“예, 오늘 아침 전하께서 토벌대에 내리는 하사품과 함께 도성을 떠났사옵니다.”

“인력을 빼 간다고 공조에서 불평을 하지는 않았나?”

“그럴 리가 있겠사옵니까.”

도승지는 부인을 했지만, 사실 자고 나면 또 새로운 공사판을 벌인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이것저것 진행하고 있는 일이 많은데, 더 충원해 줘도 부족할 판국에 이주시킬 유민에 이어서 왜구 포로들까지 일손을 빼 가니 공조에 속한 관리들이 불평을 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이러한 사정은 도현도 알고 있었지만 일부러 모르는 척 넘어갔다.

그때 문밖에서 상궁의 목소리가 들렸다.

“전하, 봉황상단 총관과 호조참판께서 오셨사옵니다.”

“들라 하라.”

도현의 허락에 미닫이문이 열렸고, 관복을 입은 호조참판 김육과 장 총관이 안으로 들어와 예를 갖추고는 칠현이 내준 비단 방석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어서들 오게. 그렇지 않아도 발해도에 들어갈 예산 문제로 긴히 물을 것이 있었는데 잘 왔네.”

“진을 설치하는 데 드는 예산 말씀이시옵니까?”

“그래. 발해도에 머물 군사와 주민들이 한겨울 매서울 추위를 한데서 그냥 나게 하지 않으려면 당장 공사를 시작해야 될 텐데, 그쪽으로 돌릴 여유 예산이 있나?”

“토벌이 예상했던 것보다 빨리 끝난 덕분에 전비戰備로 마련해 둔 자금이 절반가량 남아 있으니 우선 그것으로 충당하고, 그래도 모자라는 건 예비비로 빼 둔 것을 일부 쓰면 가능할 것 같사옵니다.”

“그러면 따로 예산을 마련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군.”

“당장은 그렇사옵니다만, 전하께서 계획하신 대로 발해도를 개발하려면 몇 년 동안 지속적으로 상당한 금액의 예산이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김육의 말에 도현은 밝은 표정으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발해도가 개발되면 더 많은 이익으로 되돌아올 것이니 그 정도 투자는 해야 되겠지. 안 그런가, 장 총관?”

“지당하신 말씀이옵니다.”

“그건 그렇고, 두 사람이 무슨 일로 함께 날 찾아온 거지?”

보료 등받이에 살짝 몸을 기댄 도현이 묻자 호조판서 김육은 옆에 놔둔 작은 나무 상자를 앞으로 내밀며 이야기했다.

“지난번에 하교하신 화폐 견본품이 완성되어 보여 드리려고 왔사옵니다.”

“그래? 이리 가져와 봐.”

상체를 앞으로 살짝 숙이며 도현이 관심을 보이자 옆에 시립해 있던 칠현이 얼른 나무 상자를 집어 서탁 위에 올려놨다.

나무 상자는 옻칠이 된 고급품이었는데, 걸쇠를 풀고 위로 뚜껑을 열자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금화와 은화가 하나씩 들어 있었다.

“오!”

짧은 감탄성과 함께 금화를 집어 든 도현은 이리저리 꼼꼼히 살펴보았다.

기존에 쓰이는 엽전보다 조금 작은 크기에 앞면에는 조선 왕실을 표시하는 봉황이 크게 음각되어 있고, 뒷면에는 한 일一 자와 함께 작은 이화꽃 무늬가 아주 정교하게 테두리를 감싸고 있었다.

은화 역시 재질만 다를 뿐 똑같은 모양이었다.

“전에 봤던 도안대로 아주 잘 나왔군.”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이옵니다.”

“함량은 어떻게 되지?”

“둘 다 금과 은이 각각 칠 할씩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정교하게 음각을 조각해 위조를 어렵게 했사옵니다.”

그 정도면 상당히 높은 함량이었고 한눈에도 위조가 쉽지 않아 보였다.

이건 아주 중요한 문제였는데 기껏 금화와 은화를 만들어 유통시켜도 차익을 노리고 함량이 떨어지는 저질의 위조 주화가 나온다면, 도현이 경제 수준을 높이기 위해 야심차게 추진 중인 화폐 활성화가 실패로 끝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주조가 상당히 어려워 보이는데, 대량으로 찍어 내는 데 문제는 없는 건가?”

“틀을 제작하는 것이 조금 힘들었지만, 기본적으로 금과 은을 혼합물과 섞어 녹인 쇳물을 부어 굳히는 주조 방식이기 때문에 생산에는 큰 어려움이 없사옵니다.”

“다행이군. 그럼 언제 백성들에게 풀 수 있을 만큼 생산이 되겠나?”

“이미 필요한 자재와 장인들이 대기 중이니 전하께서 윤허하신다면 달포 안에 일차적으로 각각 만 개씩을 만들 수 있사옵니다.”

상당히 많은 수량이었지만, 조선 전체의 수요를 충당하기에는 많이 부족했다.

그동안 외국, 특히 왜국과의 무역을 통해 주화 제작에 필요한 은을 많이 확보했다지만 필요한 양에는 아직 턱없이 부족했다.

물론 도현과 왕실에서 각각 보관 중인 일종의 비자금을 꺼내 놓는다면 어느 정도 필요량을 충족시킬 수 있었지만, 그건 말 그대로 비상시를 대비해서 가지고 있는 재화였기에 함부로 쓰기가 어려웠다.

“그것 가지고는 많이 부족할 텐데.”

도현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자 김육이 얼른 입을 열었다.

“재료 문제는 염려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사옵니다.”

“응? 그게 무슨 말이야.”

“봉황상단에서 해낸 일이니 저보다 장 총관이 아뢰는 것이 나을 것 같사옵니다.”

시선을 살짝 옆으로 돌린 도현은 의아한 얼굴로 김육과 나란히 앉아 있는 장 총관을 쳐다봤다.

그러자 장 총관은 약간 들뜬 목소리로 이야기를 했다.

“전하께서 말씀해 주신 구성군 광산에서 금이 나왔사옵니다.”

잠시 눈만 껌뻑이던 도현은 이내 얼굴을 활짝 펴며 크게 기뻐했다.

“그게 사실인가?”

“예, 여기 처음으로 캐내서 제련한 금괴를 가져왔사옵니다.”

장 총관이 가져온 비단 보자기를 풀자 손바닥만 한 크기의 금괴가 누런 황금빛을 발하며 모습을 드러냈다.

“정말이군.”

칠현이 재빨리 가져온 금괴를 받아 든 도현은 연신 감탄을 터트렸다.

“이렇게 빨리 금맥을 찾아낼 거라고는 생각 못 했는데, 고생이 많았겠군.”

“다 주상 전하께서 광산 위치를 정확히 짚어 주신 덕분이옵니다.”

“허허허, 그런가.”

봉황상단에서 찾아낸 금광은 바로 조선을 대표하는 삼대 금광 중 하나인 삼성금광三成金鑛이었다.

삼성금광은 여러 가지 재미있는 일화가 많았는데, 원래 발견자는 최창학이라는 한량이었다.

그는 서른이 넘도록 투전판과 시장을 전전하는 백수로 이웃들의 손가락질을 받으며 살았지만, 우연히 고향 근처인 평안북도 구성군 관서면에서 엄청난 매장량을 가진 금광을 찾아내 벼락부자가 되었다.

곧이어 삼성금광을 바탕으로 구성과 의주, 삭주 일대의 금광 수십 개를 인수해 운영하면서 황금대왕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나중에 여러 금광을 일본 기업에 넘기고 친일 행각을 펼쳐 지탄을 받았지만, 보잘것없는 백수건달에서 엄청난 부를 거머쥔 최창학의 성공은 많은 백성들의 부러움을 사면서 대한제국 후기와 일제강점기에 일어난 골드 러쉬의 시초가 됐다.

이런 최창학의 사연은 워낙 유명한 이야기이다 보니 회귀 전 역사학도였던 도현도 알고 있었는데, 화폐유통을 위해 막대한 금과 은이 필요해지자 그것을 떠올리고 봉황상단에 삼성금광 개발을 지시한 것이었다.

하지만 정확한 위치는 모르고 대충 어디쯤에 있다는 정도만 알고 있었기에 실제로 금맥을 찾아내고 광석을 캐내는 데에는 상당한 시일이 걸릴 줄 알았다.

그런데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빠른 시간에 이렇게 금괴를 만들어서 가져오니 기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제 단청과 영흥의 광산도 새로운 제련법을 사용하는 시설 확충이 끝나면 은을 대량으로 캐낼 수 있으니, 화폐 주조에 필요한 재료 마련은 어렵지 않을 것이옵니다.”

원래 두 곳은 납과 아연 산지였지만, 연산군 때 궁중 세공 장인이었던 김감불金甘弗과 노비 김검동金儉同이 연철을 질산으로 녹여 은을 분리해 내는 새로운 제련법을 발견하면서 은 광산으로 탈바꿈하게 됐다.

매장량도 상당했지만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고 명의 조공 요구가 점점 커지면서 일부러 폐광시킨 것을 얼마 전부터 도현의 지시로 다시 개광했다.

희망적인 김육의 말에 도현은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지. 다 경들이 열심히 노력해 준 덕분이네.”

“아니옵니다.”

“금화와 은화의 생산은 화폐유통을 활성화시켜 경제를 부흥시키는 초석이 될 테니 앞으로도 계속 애를 써 주게.”

“성심을 다하겠나이다.”

도현의 말에 두 사람은 머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그가 이렇게 화폐유통에 각별히 공을 들이는 것은 농경사회를 벗어나 산업화를 이루기 위해서 꼭 해내야 하는 필수적인 일이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여러 산업 시설을 만들고 상행위를 활성화시킨다고 해도, 막말로 초나 방자유기를 하나 구입하는 데에 지금까지 교환 수단으로 통용된 쌀이나 베를 쓴다면 제대로 값어치를 산정할 수도 없고 아주 비효율적이었다.

그리고 화폐의 유통은 경제를 국가에서 관리하고 통제할 수 있다는 면에서도 장점이었다.

도현의 지시가 떨어지자 김육은 호조 직속의 주조소에서 금화와 은화의 대량생산을 시작했다.

엽전 이외에 상위 가치의 주화가 나오면 도현이 의도하는 대로 화폐 사용을 더욱 활성화할 수 있었다.

한편 새롭게 발해도라고 명명된 예전 우라타 부족의 영역에서는 마침내 이명고 휘하에 있던 중소 부족까지 모두 복속을 끝내고 본격적인 개척과 안정화 작업에 들어갔다.

“여기입니다.”

배수현의 말에 타고 있던 군마에서 내린 신인석 기병 연대장은 주위를 천천히 살펴봤다.

그가 서 있는 곳은 그리 크지 않은 강을 앞에 두고 넓게 펼쳐진 초지였는데, 군데군데 무너져 내린 성곽의 흔적이 무성하게 자란 풀숲 사이에 보였다.

“정말 예전 발해성의 흔적이 있군.”

“저도 근처에 사는 부족민들한테 이야기를 들어 살펴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크기로 봐서는 중소 규모의 작은 진鎭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

신인석은 동의한다는 듯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앞에 강이 있어 자연 장애물로 삼을 수 있고 왼편에 위치한 자작나무 숲을 제외하고는 사방이 다 탁 트여 있으니 시야 확보에도 유리하겠어.”

“맞습니다.”

“여기서 발해가 만든 성을 보니 이곳이 우리 조상들이 생활했던 옛 땅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는군.”

“그러게 말입니다.”

감개무량한 표정을 짓던 신인석은 고개를 돌려 옆에 서 있는 배수현을 보며 말했다.

“우리도 여기다가 진을 세우도록 하지.”

“결정하셨습니까?”

“그래. 위치도 이만하면 괜찮고, 무엇보다 거의 다 허물어지긴 했지만 예전 발해 성터에 우리가 다시 머문다면 의미가 있을 것 같아.”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그럼 임시 주둔지에 있는 병력을 데려오고, 혹시 모를 위험 세력과 지형지물 수색을 위해 백인대 하나를 내보내 주위를 정밀하게 살펴보도록 해.”

“알겠습니다.”

“아직 정오가 안 지났으니까 오늘 안에 주변 정리를 끝내고 숙영지를 세울 수 있도록 어서 서두르자고.”

“옛.”

얼마 뒤 먼지구름을 피워 올리며 기병연대 병사들이 군마를 타고 도착했다.

천막을 치고 하룻밤을 보낸 병사들은 다음 날부터 본격적인 공사에 들어갔는데, 우선 요새를 세울 땅에 무성하게 자라 있는 잡초부터 깨끗이 베어 냈다.

잘라야 할 풀이 너무 많고 군데군데 가시나무까지 있어 이걸 언제 다 하나 싶기도 했지만, 건장한 사내들이 한꺼번에 우르르 달려들어 작업을 시작하니 하루 만에 정리가 됐다.

이어서 인근 숲에서 잘라 온 목재와 돌로 요새 건설을 시작했는데, 기존 발해성의 잔해는 없애 버리지 않고 최대한 활용했다.

한 개의 연대 병력이 주둔하는 지역 거점 요새를 세우는 것은 보통 어려운 공사가 아니었는데, 병사들을 다 동원한다고 해도 인력이 턱없이 부족했다.

그래서 조선군은 비변사의 지침에 따라, 복속한 인근 부족민들을 데려와 일을 시켰다.

물론 앞으로 조선에 동화시켜 곧 이주해 올 유민들과 함께 발해도를 개발하고 지킬 백성으로 삼아야 했기에 강제 동원이 아닌 쌀이나 소금 같은 대가를 꼬박꼬박 지급했다.

이런 식으로 함께 힘든 일을 하고 부딪치면서 조선인과 거란족 간의 이질감을 줄이고, 자연스럽게 이제 당신들은 조선 백성이라는 소속감을 주려는 것이 비변사의 의도였다.

그렇게 수천 명에 달하는 인력이 달라붙어 작업을 하자 요새는 하루가 다르게 제 모습을 드러냈다.

“다녀왔소.”

“어서 오세요.”

우라타 부족의 영향력 아래에 있던 중소 부족 출신인 세흐나가 게르 입구에 걸려 있는 천을 걷으며 안으로 들어오자 부인이 그를 반갑게 맞이했다.

세흐나 가족이 살고 있는 게르는 그의 연로한 부모님과 아내 그리고 세 살과 다섯 살짜리 아이들이 함께 생활하는 곳으로, 여섯 명이 자기에는 비좁은 듯해도 익숙해지면 따뜻하고 편안한 보금자리였다.

“아이들은?”

“놀러 나갔는데 밥때 되면 알아서 들어오겠죠.”

한자리에 오래 머물지 않는 거란족 아이들은 나중에 짐이 되기 때문에 장난감 같은 것을 가지고 노는 일이 드물었다.

그 대신 초원을 뛰어놀거나 부족 안에서 키우는 가축들을 데리고 노는 것이 그들의 일상생활이었기에, 아침부터 밤까지 밖에 나가 있어도 별로 걱정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는 것이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보다 등에 진 그 짐은 뭐예요?”

웃차, 하고 세흐나가 바닥에 내려놓는 포대를 가리키며 부인이 물었다.

“어, 공사장에 나가서 일을 도운 사람들한테 하나씩 나눠 주더군.”

“어디 보자…… 어머, 이거 쌀이잖아요.”

부인은 쌀 한 줌을 손에 집어 들고 놀란 듯 말했다.

“이걸 왜 줬는데요?”

“오늘 일한 대가라던데.”

“정말요? 세상에, 그냥 강제로 일을 시키는 건 줄 알았는데 이렇게 쌀을 주다니. 조선이 청나라보다 작은 나라라고 하던데 실제론 꽤 여유가 있나 보네요. 우리 같은 사람들한테까지 곡식을 나눠 주는 걸 보니 말이에요.”

포대에 담긴 쌀은 약간의 잡곡이 섞이긴 했어도, 원래 농사를 짓지 않는 데다 겨울이 끝나고 이제 파종을 시작하는 봄이라 식량이 부족한 거란족에게는 쉽사리 볼 수 없는 귀한 물건이었다.

기르는 가축과 말 덕분에 고기가 부족할 일은 없지만, 사람이 그것만 먹고 살 수는 없는 법이었다.

곡식과 야채, 과일도 가끔씩 먹어 줘야 했는데 다른 곳에서 구하려면 비싼 돈이나 모피를 줘야 했다.

그런 귀한 곡식을 이렇게 덜컥 받게 되니 좋으면서도 약간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그건 잘 모르겠고,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다 받아 갔는데 앞으로도 큰 사고나 농땡이를 치지 않는 이상 정기적으로 식량을 나눠 줄 거라고 하더군. 내일은 소금을 준다고 해서 다들 신이 났어.”

“소금이라고요?”

“그래.”

짭쪼름한 맛을 떠올리자 아내는 절로 입에서 군침이 흘렀다.

그 소금이라는 것을 고기에 살살 뿌려 구우면 특유의 누린내가 싹 사라질 뿐만 아니라 육질이 쫄깃해지는 것은 물론, 국물에 넣으면 간이 딱 맞아서 평소보다 맛이 배는 더 좋아지는 효과가 있었다.

사람이 사는 데 꼭 필요한 물품 중 하나였지만, 소금을 만드는 방법을 몰라 가끔씩 부족에 상인이 들르면 겨우 구할 수 있을 뿐이었다.

양은 한 줌밖에 안 되는 것이 때론 보석보다 더 비쌀 때가 있어 정말 아껴 가며 조금씩 쓰는 것인데, 그걸 공짜로 나눠 준다고 하니 아내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당신, 소금은 꼭 받아 와야 해요. 이왕 받는 김에 우리 애들도 다 데리고 가서 하나씩 가져오면 안 되려나?”

“에이, 그런 꼼수는 금방 눈치채지.”

“하긴. 아, 그러고 보니 아까 낮에 조선인 군관이 찾아왔었어요.”

“무슨 일로?”

“내일부터 마을 아이들한테 조선말을 가르칠 거래요. 말뿐만 아니라 쓰고 읽는 법, 간단한 계산법까지 이것저것 가르쳐 준다는데. 당신, 어떻게 생각해요?”

“앞으로 이 땅을 조선이 지배한다고 하니 배워서 나쁠 건 없겠지.”

세흐나는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대꾸했고, 아내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저녁을 맛있게 차려 줄 테니까 잠깐만 기다리고 있어요.”

“그래.”

음식을 하기 위해 아내가 자리를 비우자 빈 의자에 털썩 엉덩이를 걸치며 앉은 세흐나는 입구에 놓여 있는 쌀자루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리저리 거처를 옮기면서 힘들게 유목 생활을 하는 것보다는 한곳에 정착해 조선인으로 사는 것도 괜찮겠어.”

세흐나뿐만 아니라 많은 거란족들이, 조선의 이런 유화적인 행동에 반감을 줄이고 점점 호감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얼마 후 조선인 유민 이천여 명이 도착했고, 그보다 앞서 왜구 출신 포로 천 명이 와서 부족한 인력을 보태자 앞으로 발해도를 지키고 개발하는 데 중심이 될 성과 요새 건설이 탄력받기 시작했다.

특히 유민들은 이 년간 나라에 바치는 세금을 면제받고 일인당 일정한 양만큼 개간하는 토지의 소유권을 인정해 준다는 왕명에, 힘든 줄도 모르고 새벽부터 밤늦은 시간까지 밖에 나가 일을 했다.

그리고 도현은 비변사의 의견을 받아들여 발해도에 모두 일곱 개의 성을 만들기로 했다.

고구려의 옛 성인 춘화성을 중심지로 삼아 군과 행정을 펼칠 도독부를 설치하고, 나머지 여섯 개의 요새와 성은 다른 야인 부족과의 경계에 세워 새로운 국경선으로 삼았다.

그렇게 조선이 우라타 부족의 영역을 영토로 편입하는 작업을 착착 진행시켜 나가자, 이웃한 초흐타 부족은 그것을 불편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아버님, 다녀왔습니다.”

혼자 게르 안에서 마유주를 마시고 있던 야율보기는 입구를 막아 놓은 가죽을 걷고 들어온 셋째 아들을 보며 입을 열었다.

“소문이 사실이더냐?”

“예.”

살짝 미간을 찌푸린 야율보기는 손에 들고 있던 나무 잔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자세히 이야기해 봐.”

“조선 임금이 무려 육만 명에 달하는 토벌군을 일으켜서 동시에 삼면으로 밀고 들어와 포위를 한 뒤, 단 한 번의 전투로 이명고를 죽이고 우라타 부족 전사들을 전멸시켰다고 합니다.”

“허어.”

자신도 함부로 대하지 못할 정도로 강대한 세력을 자랑하던 이명고가 그렇게 힘없이 무너졌다는 이야기에 야율보기는 믿기 어렵다는 표정을 지었다.

“정말 단 한 번의 전투로 결판이 났다는 말이냐?”

“네, 믿기 어려우시겠지만 사실입니다. 조선군이 포위를 하던 도중 우라타 부족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중소 부족과 소소한 충돌이 있었지만, 승부를 가린 전투는 한 번뿐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당시에 이명고 족장이 끌고 간 전사가 이만이 넘었다고 하더군요.”

“그럼 실제로 맞붙은 전력은 서로 엇비슷했다는 게냐?”

상체를 앞으로 당기며 야율보기가 묻자 야율치오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조선군이 일만 정도 더 많았다고 하지만 보병이 절반 이상이었으니 큰 의미가 없다고 봐야 합니다.”

나름 자세히 조사를 해 왔지만 도주한 적이 거의 없을 정도로 당시 전투가 너무 일방적으로 끝났고, 지금은 정보가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게 철저히 통제를 하고 있어서 초흐타 부족은 가장 중요한 총병의 존재에 대해 알지 못했다.

“으음.”

얼굴을 딱딱하게 굳힌 야율보기는 자신도 모르게 침음을 내뱉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이명고가 꼼짝도 못하고 당할 만큼 조선군이 강하단 말이냐?”

“…….”

비록 지금은 봉황상단을 통한 교역으로 조선과 가깝게 지내고 있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번에 당한 우라타 부족처럼 초흐타 부족도 식량이 떨어지면 수시로 강을 넘어 국경 마을을 약탈했었다.

그래서 조선군의 수준을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결과가 나오자 야율보기는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문제는 그게 아닙니다.”

“무슨 말이야?”

“이번에 가서 보니 단순히 토벌만 한 것이 아니라, 성과 요새를 지으며 점령한 땅을 아예 차지하고 들어앉으려는 것 같았습니다.”

“뭐야!”

이야기를 듣자마자 야율보기는 양쪽 눈썹을 위로 치켜세우며 언성을 높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단순히 토벌만 하고 돌아가는 것과 조선이 우라타 부족의 영역을 영토로 편입하며 두만강 너머로 세력을 확장하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이었다.

당장 교역을 통해 입수한 곡식과 소금을 가지고 급격히 세력을 늘려 가던 것에 제동이 걸릴 수밖에 없고 자칫 잘못하면 우라타 부족처럼 조선에 복속될 위험마저 있었다.

거기까지는 안 가더라도 그동안 만만하게 생각했던 조선이 강한 힘을 가졌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니었다.

“갈수록 태산이군.”

“이대로 그냥 두고 보실 겁니까?”

잔을 집어 독한 마유주를 한 모금 들이켜 야율보기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어쩌자고?”

“원래 국경대로 강을 넘어가라고 항의해야지요.”

“수만에 달하는 병력을 일으킨 걸 보면 조선 국왕이 아주 작정을 하고 나선 것이 분명한데, 순순히 말을 들어줄 거 같으냐?”

“그러면 이대로 놔두실 겁니까?”

“흐음.”

이맛살을 모으며 잠시 고심을 거듭하던 야율보기는 이내 작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입을 열었다.

“좋아, 살짝 반응을 떠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네가 사신으로 갔다 오너라.”

“알겠습니다.”

야율보기의 결정에 야율치오는 약간 굳은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다음 날 야율치오는 십여 명의 전사들과 함께 부족을 떠나 이제 발해도라는 이름이 붙은 땅으로 향했다.

며칠 말을 달린 야율치오 일행은 새로 설정된 국경선 부근에서 순찰 중이던 조선군 기병과 만나 신분을 확인 절차를 거친 뒤, 공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는 요새로 안내되었다.

도독부에 상황을 알리고 결정을 기다리는 동안 야율치오 일행은 얼마간 요새에 머물러야 했는데, 다행히 오래 걸리지 않고 그를 본성으로 데려갈 인물이 왔다.

“오랜만이오.”

반가운 목소리로 문을 열고 객사로 들어오는 사내를 본 야율치오는 살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상대가 내민 손을 맞잡았다.

“아니, 최 사직 아니십니까?”

“얼마 전 우라타 부족에 사신으로 갔을 때 많은 도움을 받아, 언제고 다시 만나 고마움을 표시하고 싶었는데 이렇게 보는구려.”

“하하하, 이거 정말 반갑습니다.”

마중을 나온 사람은 다름 아닌 토벌 전에 모종의 임무를 받고 우라타 부족에 갔었던 최승주였는데, 두 사람은 그때 함께했던 인연으로 친분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함경도 병영에서 군관으로 근무한다고 했지요?”

“맞소이다. 지금은 도독부 참모로 있소.”

처음 들어 보는 관직에 야율치오는 머리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도독부가 뭘 하는 곳입니까?”

“이번에 새로 생긴 관청이라 잘 모르실 거요. 바로 새로 조선의 영토가 된 발해도를 관장하는 곳이오.”

상대가 무슨 이유로 찾아왔는지 알고 있던 최승주는 일부러 여기가 조선 땅이라는 것을 강조하며 말했다.

“으음, 그렇군요.”

반가운 마음도 잠시, 이야기를 들은 야율치오는 새삼 조선이 우라타 부족의 영역을 집어삼키려는 의지가 확고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야율치오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음을 본 최승주는 내심 미소를 지으면서도 모르는 척 이야기했다.

“도독부가 있는 본성으로 가려면 여기서 한참을 더 들어가야 되는데. 어떻게, 지금 출발하시겠소?”

“그럽시다.”

이미 충분히 쉬었고 한시라도 빨리 초흐타 부족의 입장을 전해야 했기에 야율치오는 고개를 끄덕이며 따라나섰다.

요새를 떠난 야율치오 일행은 최승주가 데려온 호위대와 함께 도독부가 있는 춘화성으로 향했다.

거리가 상당히 멀었기에 이틀 뒤에야 목적지인 춘화성에 도착할 수 있었다.

고구려 옛 성의 흔적이 상당 부분 온전히 남아 있었고, 제일 많은 인력이 투입된 덕분에 춘화성은 복구공사가 꽤 진척되어 있었다.

가뜩이나 여기까지 오면서 예전에 그가 알던 것과 달리 중무장을 하고 군기가 바짝 든 조선군을 보고 마음이 복잡했던 야율치오는, 십육 척이 넘어서는 높은 성벽을 가진 커다란 성이 지어지고 있는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이것만 봐도 조선의 힘을 충분히 실감할 수 있었는데, 특히 잘 벼려진 한 자루의 검처럼 예기가 살아 있고 절도 있게 행동하는 조선군은 최강이라고 자부하는 팔기군에 못지않은 정예처럼 보였다.

이런 병사들이 수만이나 되니 우라타 부족이 그렇게 힘없이 무너진 것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됐다.

“병사들이 매우 뛰어나 보입니다. 이번 전투에서 조선군이 우라타 부족을 꺾고 승리를 거둔 이유를 알 만하군요.”

야율치오의 이야기에 말을 나란히 타고 가던 최승주는 여유로운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아무래도 국경을 지키며 수시로 전투를 치르다 보니 강군이 될 수밖에 없지요. 거기다가 주상 전하께서 각별히 국방에 신경을 쓰셔서 더욱 훈련에 매진하고 있소이다.”

“흠.”

하나같이 잘 제련된 병장기와 쇠와 가죽으로 만든 갑옷을 입고 있는 모습에 전사인 야율치오는 부러운 시선을 보냈다.

“그런데 저기 있는 자들은 병졸들이 아닌 것 같습니다만.”

야율치오가 가리키는 곳을 쳐다본 최승주는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했다.

“아, 저들은 조선에서 여기로 이주해 온 백성들이라오.”

“…….”

“땅은 넓은데 사람은 적고, 복속한 거란족들은 농사를 짓는 법을 모르니 그걸 가르쳐 줄 이들이 필요하지 않겠소. 그래서 주상 전하께서 본국에 있는 유민들을 이쪽으로 보내 주신 거요.”

얼핏 봐도 숫자가 상당했는데 벌써 백성을 이주까지 시키고 있다는 사실에 야율치오의 안색은 더 굳어졌다.

대화를 나누던 그들은 어느새 통나무와 돌을 이용해 제일 먼저 완성한 도독부 건물에 도착했다.

도독부는 처마가 있는 조선식 기와집 형태로 지어졌는데, 넓은 발해도의 군과 행정을 모두 관장하는 곳이다 보니 규모가 상당했고 중무장한 백인대 한 개가 철통같이 경계를 서고 있었다.

다른 일행들은 객사로 먼저 보낸 최승주는 야율치오와 측근 호위 한 명 그리고 역관만 데리고 안쪽 깊숙한 곳에 위치한 도독 집무실로 갔다.

집무실 앞을 지키고 있는 하급 군관에게 다가간 최승주가 말을 건넸다.

“수고가 많군. 초흐타 부족에서 온 사신을 모시고 왔으니 도독께 말씀을 전해 주게.”

“연락을 받았습니다. 안으로 들어가시죠.”

그러자 힐끗 함께 온 야율치오와 초흐타 부족 전사를 쳐다본 하급 군관은 순순히 옆으로 비켜섰다.

“고맙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부관이 한쪽에 서 있고 김정태 장군이 책상 앞에 앉아 뭔가를 읽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충! 초흐타 부족 사신을 모시고 왔습니다.”

절도 있게 군례를 취하며 최승주가 하는 말에 김정태 장군은 시선을 들어 앞에 있는 야율치오를 봤다.

“이쪽이 사신인가?”

“예. 부족장인 야율보기의 셋째 아들로, 이름은 야율치오하고 합니다.”

조선말은 몰랐지만 눈치로 자신을 소개하고 있음을 알아차린 야율치오는 한 발짝 앞으로 나와 살짝 고개를 숙이면서 입을 열었다.

“야율치오입니다.”

그러자 김정태 장군도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받았다.

“김정태라고 하오. 이렇게 만나게 돼서 반갑소.”

“저야말로 영광입니다.”

통역을 통해 가볍게 인사를 나눈 김정태 장군은 집무실 중앙에 있는 긴 회의 탁자를 가리키며 자리를 권했다.

“자, 일단 앉아서 이야기를 나눕시다.”

“그러시죠.”

도독부에서 일하는 하녀가 가져온 따뜻한 차를 한 모금 마신 김정태 장군은 맞은편에 있는 야율치오를 보며 차분한 어조로 먼저 말을 꺼냈다.

“솔직히 초흐타 부족에서 사신을 보냈다는 이야기에 많이 놀랐소. 혹시 우리가 이 땅을 영토로 편입하는 문제 때문에 찾아온 것이오?”

상대가 먼저 치고 들어오자 약간 당황하던 야율치오는 이내 조금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원래 목적한 대로 잡혀갔던 조선인들을 구해 내고 토벌을 끝냈으니, 마땅히 두만강 너머로 되돌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름 강단 있게 이야기를 했지만, 김정태 장군은 조금의 동요도 없이 시종일관 같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군.”

“……?”

야율치오가 의아한 시선으로 쳐다보자 김정태 장군은 한쪽 손가락으로 탁자를 탁탁 두드리다가 멈추고는 정색을 했다.

“이 땅은 야인들의 터전이기도 하지만, 그와 동시에 우리 조상들의 땅이기도 하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일부러 거란이 아니라 만주 지역에 흩어져 유목 생활을 하는 민족을 조선 사람들이 통칭해서 부르는 야인이라는 말을 쓴 김정태 장군은, 야율치오와 시선을 맞추며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말 그대로요. 여긴 우리 조상들의 땅이니 후손인 우리가 되찾아야 할 의무와 권리가 있다는 것이오. 당장 지금 이렇게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이곳만 해도 예전 고구려 성터에 다시 성을 세우고 있는 것이지 않소이까?”

여기뿐만 아니라 만주 곳곳에 고구려와 발해의 유적이 남아 있기에, 조선 측의 주장이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야율치오는 이대로 그냥 수긍을 할 수 없었는데 상대편의 논리대로라면 지금 초흐타 부족이 차지하고 있는 영역도 조선의 땅이 되기 때문이었다.

탕!

다혈질인 야율치오는 두 손으로 앞에 있는 탁자를 세게 내려치며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말은 우리 부족 땅까지 조선의 영토라는 겁니까!”

얼굴을 벌겋게 상기한 채 흥분한 야율치오와 달리 김정태 장군은 태연하게 찻주전자를 들어 어느새 빈 잔을 채웠다.

쪼르르르.

자신을 무시한다고 생각한 야율치오가 이마에 핏대를 세우고 버럭 소리를 치려는 찰나, 김정태 장군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야율보기 족장의 아들 중에 불같이 뜨거운 성격을 가진 사람이 있다고 하더니, 소문이 맞는 것 같소이다.”

“이익.”

“비록 드넓은 만주가 예전 조상들의 땅이라고 하지만, 이미 오랜 시간이 흘렀고 초흐타 부족처럼 터전을 잡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데 돌려 달라며 분란을 일으킬 마음은 없소. 이건 내 개인의 생각일 뿐만 아니라 주상 전하의 뜻이기도 하오.”

성격이 급해 가끔 실수를 저지르기는 하지만 머리까지 나쁜 건 아니었던 야율치오는, 김정태의 말에 담긴 속뜻을 금방 알아차리고는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방금 전에는 조상들의 땅이니 여기서 물러날 의사가 없다고 했지 않습니까?”

“맞소. 가급적 무력을 쓰고 싶지 않았지만, 이명고가 협상 자체를 거절하는 바람에 이렇게 검을 빼 들게 된 것이고 그 과정에서 이 땅을 되찾게 됐으니 영토로 편입시키는 것일 뿐이오.”

“다시 말해 더 이상 세력을 넓힐 의사는 없다는 겁니까?”

“우리 조선은 싸움보다 평화를 사랑하는 선비의 나라요.”

마지막 말에 야율치오는 수긍하는 표정을 지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이번 일의 발단은 전적으로 죽은 이명고에게 있었고, 조선이 평화적(?)으로 문제를 풀려고 했다는 건 직접 사신과 함께 우라타 부족을 찾아갔었던 야율치오도 잘 알고 있었다.

비록 처음 목적했던 대로 조선군을 두만강 너머로 되돌려 보내지는 못했지만, 초흐타 부족의 영역을 포함한 다른 땅에는 관심이 없다는 입장을 확인한 것만도 큰 수확이었다.

솔직히 조선이 피를 흘리고 많은 전비를 써서 확보한 영토를 순순히 포기할 거라는 기대도 애초에 하지 않았었기에 야율치오는 미련을 빨리 버렸다.

“장군의 말을 믿어 보겠습니다.”

그러자 김정태 장군은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그럼 골치 아픈 이야기는 대충 마무리된 것 같으니, 자리를 옮겨 술이나 한잔 합시다. 자고로 사내들이 흉금을 터놓고 우정을 쌓는 데에는 술보다 좋은 것이 없지 않겠소.”

김정태 장군의 너스레에 아까부터 딱딱하게 경직됐던 집무실 안 분위기가 사르르 풀렸다.

며칠을 더 머물면서 조선군의 실체를 눈치껏 살핀 야율치오는 춘화성을 떠나 부족으로 돌아갔다.

이걸로 조선과 초흐타 부족의 갈등은 어느 정도 해소가 됐지만 단지 문제를 잠시 봉합시킨 것에 불과할 뿐, 근본적인 해결책은 되지 않았다.

채챙! 챙! 챙!

대궐 후원에 위치한 연무장에서는 붉은색 무복을 입고 이마에 비취가 박힌 비단 띠를 질끈 동여맨 도현이 진검을 들고 친위대장인 신철을 상대로 대련을 펼치고 있었다.

그동안 정사政事를 보면서도 무예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던 도현은 움직임에 거침이 없었다.

심양 관저 시절부터 봐 왔고, 잠시 무예를 가르치기도 했던 신철 대장 역시 그의 실력을 알기에 최선을 다해 검을 휘둘렀다.

츄앙.

귀를 때리는 금속음이 울렸고, 양옆으로 떨어져 거리를 벌린 두 사람은 살짝 거칠어진 호흡을 가다듬었다.

“후우, 그동안 실력이 더 느신 것 같사옵니다.”

그러자 도현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가르치는 검술 사부가 좋아서 그런 것 아니겠나.”

“황공한 말씀입니다. 이번에는 좀 더 강하게 들어갈 테니 마음 단단히 먹으십시오.”

“마음대로 하게.”

“그럼 갑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거리를 좁혀 온 신철은 그대로 무기를 크게 휘둘렀고, 도현은 지체 없이 두 손으로 쥔 검을 일자로 내밀어 방어했다.

챙!

맑은 쇳소리를 내며 공격이 막히자 신철은 맞붙은 도현의 검면을 타고 흐르며 신속하게 아래에서 위로 올라왔다.

이대로 공격을 허용하면 자칫 목에 치명적인 부상을 입게 될지도 모르는 한 수였다.

하지만 도현도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도현은 기합을 내뱉으며 검에 힘을 주고 빙글 돌려서 상대편의 공격을 무위로 돌렸다.

그러고는 바로 주춤하는 상대의 품속으로 파고들며 강하게 몸을 부딪쳤다.

퍽!

“큭.”

가슴을 들이받힌 신철은 답답한 신음을 토해 내고는 엉덩방아를 찧으며 뒤로 넘어졌고, 도현은 틈을 놓치지 않고 냉큼 검을 상대의 목덜미에 가져다 댔다.

척.

“오늘은 내가 이긴 것 같군.”

얼른 몸을 일으키려던 신철은 도현의 말에 몸에서 힘을 빼고는 어깨를 으쓱였다.

“이제 저보다 검술 실력이 더 좋아지신 것 같사옵니다.”

“하하하, 경이 봐준 거겠지.”

“아니옵니다. 하루하루 실력이 일취월장하시는 것을 보면 정말 감탄밖에 안 나올 정도입니다.”

“이거, 오늘 경이 내 얼굴에 금칠을 해 주는구려. 자, 내 손을 잡아.”

도현이 한쪽 손을 내밀자 신철은 황공하다는 듯 두 손으로 붙잡고 일어났다.

“감사하옵니다.”

“읏차.”

그때 연무장 밖에 조용히 시립하고 있던 칠현이 가까이 다가와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전하, 발해도에서 장계가 올라왔사옵니다.”

“그래?”

공손히 내민 두루마리를 받아 든 도현은 고개를 돌려 신철에게 이야기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해야 되겠네.”

“예.”

한쪽에 가져다 둔 의자로 가 앉은 도현은 궁녀가 건네주는 수건으로 얼굴에 묻은 땀을 닦아 낸 뒤 묶여 있는 끈을 풀고 두루마리를 펼쳤다.

장계는 발해도 도독인 김정태 장군이 직접 적어 보낸 것이었다.

“흐음.”

천천히 내용을 읽어 내려간 도현은 살포시 미소를 지으며 두루마리를 접어 칠현에게 주었다.

“김 장군이 초흐타 부족과의 문제를 잘 처리했군.”

“발해도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사옵니까?”

신철이 조심스럽게 묻자 도현은 시원한 냉수를 한 모금 마시고는 장계에 적힌 내용을 이야기해 줬다.

“우리가 군대를 물리지 않고 점령한 땅에 성을 쌓고 영토로 편입하려니까 초흐타 부족이 불안해진 모양이야. 그래서 사신을 보내왔는데 김 장군이 적당히 구슬려서 돌려보냈다는군.”

“초흐타 부족이라면 제물포 제철소에서 쓰는 석탄이라는 것을 가져오는 곳 아닙니까?”

“맞아.”

“잘못되어서 초흐타 부족이 석탄 공급을 막기라도 하면 낭패이지 않습니까.”

얼굴을 굳히며 걱정하는 신철과 달리 도현은 느긋한 표정을 지었다.

“김 장군이 오해를 풀어 줬다고 하니까 당분간은 별일 없을 거야. 그리고 석탄 광산은 근위대 병력이 장악하고 있어서 함부로 건드릴 수 없을 테고. 만약 허튼 행동을 한다면 그때는 우라타 부족처럼 본때를 보여 주면 되지 않겠어.”

“그러면 정말 청과 전쟁이 벌어질 수도 있사옵니다.”

남해도에 이어 북방 원정까지 연달아 성공하자 도현이 너무 자만심에 빠진 것은 아닌지 신철은 크게 우려했다.

정색을 하며 쳐다보는 신철의 모습에 도현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농담이야.”

“예?”

“지금 초흐타 부족과 등을 돌려 봤자 아무런 이득도 없다는 걸 설마 내가 모르겠어?”

“그럼…….”

“상황이 극단적으로 진행된다면 모르겠지만 그때까지는 잘 구슬려서 손을 잡고 있어야지. 솔직히 이번 토벌은 먼저 약탈을 한 이명고를 혼내 주려는 것도 있었지만, 최근 급격하게 힘을 불리고 있는 초흐타 부족이 엉뚱한 마음을 품고 함부로 경거망동하지 못하도록 경고를 하려는 목적도 포함하고 있었어.”

“아.”

그때서야 신철은 굳어 있던 표정을 풀었다.

“그나저나 이렇게 되면 얼마 안 있어서 청국에도 우리 행동이 알려지겠군.”

“그렇겠지요.”

발해도가 위치한 만주 동부 지역은 청국의 영향력이 거의 미치지 않는 지역이었지만, 이렇게 소문이 퍼져 나가면 오래지 않아 예친왕의 귀에까지 이야기가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처음부터 각오를 했고 어차피 한 번은 부딪쳐야 되는 상대였지만 청국이 가진 힘을 생각하면 이쪽 역시 껄끄러울 수밖에 없었다.

“괜찮을까요?”

다시 심각해진 얼굴로 신철이 쳐다보자 도현은 앉아 있던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며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예전부터 우리 조선을 상당히 껄끄럽게 여기며 극도로 견제하던 놈들이니 당장 난리를 치겠지. 하지만 지난번 대전에서 이야기를 했다시피 국내 사정 때문에 쉽게 움직이지는 못할 거야.”

“예친왕이 직접 나서지 못한다고 해도 심양에 주둔 중인 팔기군 만으로도 저희한테는 큰 위협이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하지만 우리도 지난 두 차례의 호란처럼 호락호락 당하지는 않을 거야. 물론 아직 북벌 준비가 다 안 끝났으니까 가능하면 충돌은 피하는 것이 좋겠지.”

땀을 닦은 수건을 칠현에게 건네준 도현은 앞에 서 있는 신철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툭 질문을 던졌다.

“청나라와 전쟁을 벌이는 것이 두렵나?”

그러자 신철은 약간의 머뭇거림도 없이 결연한 어투로 대답했다.

“싸움이 벌어지면 제일 앞에 서서 팔기군의 목을 벨 것이옵니다.”

“나도 마찬가지야. 경처럼 충성스럽고 범처럼 용맹한 장수들이 짐의 옆에 있는데 무엇이 두렵겠나.”

“황공하옵니다.”

신철의 듬직한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준 도현은 대궐 지붕 너머로 서서히 지는 붉은 노을빛을 받으며 그대로 연무장을 나와 희정당으로 걸음을 옮겼다.

시간이 흘러 포근한 늦봄이 되자 농사꾼들은 일 년 농사를 위해 논밭을 갈아엎고 퇴비를 뿌리며 파종 준비에 들어갔다.

그 즈음 경제 부흥과 개혁을 위해 도현이 야심차게 실행한 사업 중 하나인 도로 건설이 완성되었다.

평양에서 출발해 한양을 거쳐 수원으로 이어지는 가도街道였는데, 비록 포장이 안 된 흙길이었지만 짐마차 두 대가 동시에 통과할 수 있을 만큼 폭이 넓고 울퉁불퉁하지 않게 정비되었다.

이 정도만 해도, 적이 쳐들어오는 진격로로 쓰일 수 있다는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도로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던 조선에서는 아주 획기적인 수준의 길이었다.

원래는 반년 정도 더 공사를 해야 했지만, 두 번의 반란을 진압하며 강제 노역형을 받은 수만 명의 사람들과 왕명에 의해 이리저리 화전을 일구면서 떠돌던 유민들을 작업에 투입해 공기를 앞당길 수 있었다.

중점 사업인 만큼 개통식 행사에는 도현이 직접 참여해 자리를 빛냈고, 공사를 감독한 관리와 인부 들을 치하하며 내탕금을 풀어 성대한 잔치를 벌여 주었다.

거나하게 차려 놓은 잔칫상 덕분에 그날은 모든 인부와 그들의 가족이 맛있는 음식을 배불리 먹을 수 있었는데, 그건 끝쇠네 집안도 예외가 아니었다.

“얘, 천천히 먹어. 체하겠다.”

“그냥 놔둬.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니 좋기만 한데 뭘 그래.”

다람쥐처럼 양 볼 한가득 반찬을 넣고 우물거리는 아이를 부인이 타박하자, 끝쇠가 말리면서 허허 웃었다.

“자주 못 먹는 거니까 더욱 아껴 먹어야지요.”

“예끼, 이 사람. 잔치 음식은 먹으라고 있는 건데 아껴 뒀다 그걸로 고사라도 지낼 생각이오?”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담.”

끝쇠의 놀림을 받은 부인은 토라진 듯 고개를 돌린 뒤, 콩고물이 묻은 떡 하나를 집어 입에 넣었다.

“그나저나 아직 노역 기간이 삼 년이나 남았는데, 다음엔 어디로 가게 되는 거예요?”

“여기저기 공사가 벌어진 곳이 많으니 어디든 가겠지.”

“기왕이면 가까운 지역으로 갔으면 좋겠어요. 우리 둘뿐이면 어디든 상관없지만, 애가 아직 어리니 따라오기 힘들잖아요.”

“음, 역시 그렇겠지?”

그러면서 끝쇠는 세 식구가 임시로 머물고 있는 천막 안을 살짝 둘러보았다.

유민으로 화전을 일구며 떠돈 생활이 벌써 오 년이 넘은지라, 언제든지 떠날 수 있도록 무거운 짐은 없고 갈아입을 옷과 밥그릇 정도가 다였다.

그래도 이것저것 물건이 제법 됐기에 짐수레 하나를 구한다면 아이를 태우면 떠나는 길이 어느 정도는 수월해질 것 같았다.

끝쇠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한참 밥을 먹고 있는데 밖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보게, 아무도 없는가?”

“뉘십니까?”

무슨 일이냐는 듯 쳐다보는 부인을 뒤로하고 끝쇠가 천막 밖으로 나가 보니, 인부들을 관리하는 여러 감독관들 중 한 명이 앞에 서서 그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고, 감독관님께서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내 오늘은 자네에게 좋은 소식을 알려 주려고 왔네.”

뒷짐을 지고 선 감독관은 씨익 웃으며 끝쇠를 바라보았다.

“그간 공사 현장에서 자네가 성실히 일한 걸 기특하게 여기신 전하께서, 앞으로 남은 삼 년간의 노역 기간을 면제해 주고 약속한 대로 신분을 양민으로 올려 주기로 하셨네.”

그러면서 감독관은 품이 큰 소매 주머니 안에 넣어 놓았던 나무 호패를 꺼내 그에게 슥 내밀었다.

너무나 뜻밖의 소식을 들은 끝쇠는, 한동안 멍하니 서 있다가 뒤늦게 따라 나온 부인이 옆구리를 쿡 찌르자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서둘러 호패를 받아 들었다.

“가, 감사합니다, 감독관 나으리.”

“나 말고 자비로우신 우리 주상 전하께 감사하게나.”

“물론입지요.”

한양이 어디 쪽인지도 잘 모르지만 대충 위쪽이라 짐작한 꺽쇠는 북쪽 하늘을 향해 넙죽 절을 하며 머리를 수그렸다.

“그리고 전해 줄 소식이 아직 한 가지 더 남았네.”

“네?”

또 뭐가 더 있나 싶어 끝쇠가 반문했다.

“이번에 노역 기간을 면제받은 사람은 자네뿐만이 아니네. 우리 감독관들이 그동안 눈여겨본 사람이 한 서른 명 정도 되는데, 그들에겐 특별한 기회가 주어질 거야.”

“그게 무엇입니까?”

“자네, 양민이 되긴 했으나 막상 이대로 여길 떠나서 밥을 벌어먹고 살려면 앞길이 막막하지 않겠나?”

“그야…… 그렇지요.”

불현듯 끝쇠의 안면에 먹구름이 드리워졌다.

이제 어엿한 양민이라곤 하지만 정착해서 살려니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

나라에서 식량과 함께 매달 주는 약간의 돈을 모아 두기는 했지만 일한 기간이 짧아 그리 큰 금액이 되는 것도 아니었다.

지금까지 하던 대로 아무 곳에서나 화전을 일굴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고 장사를 하자니 평생 흙만 만지고 산 사람이 어디 요령이나 알겠는가.

양민이 되겠다는 생각만 했지 그 뒤엔 뭘 어떻게 해야겠다는 계획은 없었던 끝쇠는 감독관의 말에 착잡한 심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런 그의 마음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감독관이 끝쇠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말을 안 했다 뿐이지 다들 같은 형편이니 안심하게나. 그래서 하는 이야기인데, 이제 양민이 되었으니 정식으로 관에 소속되어 인부들을 관리하는 감독관이 되는 건 어떤가?”

“네? 정말이십니까?”

“아무렴, 참말이지. 자네들은 힘든 공사 현장에서도 도망치지 않고 몇 년 동안 성실하게 자기 몫을 다 해낸 사람들이니 돌아가는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뿐더러, 현장 인부들하고도 안면이 있잖은가.”

감독관의 제안은 마른하늘에 단비와도 같은 것이었다.

그 말을 듣자마자 끝쇠는 흙바닥에 옷이 더러워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털썩 무릎을 꿇은 채 그에게 절을 하며 고마워했다.

“아이고, 나으리! 정말 감사합니다. 이놈 끝쇠, 나으리 은혜 잊지 않고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이런, 얼른 일어나게.”

감독관은 손을 뻗어 일어나는 걸 도와주고서는 그의 등을 탁 두드렸다.

“이게 다 자네가 성실하고 바르게 산 덕분이니, 앞으로도 계속 그 마음 잊지 말게나.”

“여부가 있겠습니까.”

“음, 그럼 난 이만 가네.”

어험 하는 헛기침 소리를 남기고 감독관이 자리를 떠나자 줄곧 뒤에서 숨을 죽이며 듣고 있던 부인이 냉큼 뛰쳐나와 끝쇠의 소맷자락을 붙잡고 엉엉 울었다.

“아이고, 여보, 평생 떠돌이로 살다 죽을 줄 알았더니 우리 인생에도 드디어 좋은 날이 오나 봐요.”

“암, 정말 잘됐어.”

“흑흑.”

“이 좋은 날 울긴 왜 울어.”

“너무 기뻐서 그렇지요.”

끝쇠는 부인의 손을 꼭 잡고 토닥였다.

갓 시집왔을 때는 아직 뽀얗던 손등이 궂은일을 많이 한 탓에 거북이처럼 쩍쩍 갈라져 있는 모습을 보니 가슴이 찡해져 와 눈물이 글썽거리는 것을 겨우 눌러 참았다.

이렇게 끝쇠 말고도 건설 현장에서 일하는 인부들 중 착실한 이들을 몇몇 선발한 도현은 노역 기간을 면제하고 일자리까지 마련해 주었다.

그러자 자신들도 열심히 일하면 저렇게 될 수도 있다는 희망이 생긴 인부들은 감독관의 지시를 성실하게 수행하며 더욱 적극적으로 작업을 했다.

도현은 단지 도로만 덩그러니 만들어 놓는 것이 아니라,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큰 전란을 겪으면서 거의 유명무실해져 버린 역참 제도를 정비하고 보완해 제 역할을 제대로 해낼 수 있도록 했다.

역참이란 삼십 리마다 역驛을 두고 마필과 관리자를 상주시켜 공문公文, 진상품進上品, 관물官物 등을 옮기는 것을 돕고 공무 수행자 숙소와 교통수단을 제공하는 제도였다.

도현은 이것을 조금 더 확대해서 조정 관리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들도 이용할 수 있게 했다.

이런 일련의 조치와 조금씩 활성화되고 있는 상공업이 맞물려 도로 이용자들이 크게 늘어났고, 덩달아 역驛이 있는 곳 주변 상권도 성장했다.

이처럼 완공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도로의 효용성이 눈으로 입증되자, 힘을 얻은 도현은 곧바로 수원에서 부산포까지 이어지는 길을 연장하고 제철소를 포함해 각종 산업 시설이 들어설 제물포와 한양을 연결하는 도로 건설을 지시했다.

도로가 상공업을 활성화시키고 운송비를 낮춰 한양의 물가 안정에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을 확인했고 짐마차 한 대당 한 냥의 이용료를 받아 제법 짭짭할 수입을 올리고 있었기에, 이번에는 조정 대신들과 호조도 크게 반대하지 않았다.

매서운 추위를 견뎌내고 다시 식물들이 생명의 싹을 틔우는 봄처럼, 이렇게 도현이 추진한 사업들이 하나둘씩 성과를 내고 있을 때 멀리 북방에서는 그가 우려하던 일이 결국 벌어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소문이 전부 사실이라는 건가?”

심양 도독 호타이가 들고 있던 술잔을 탁 소리가 나게 탁자에 내려놓고는 고저 없는 목소리로 묻자, 부관인 부르칸은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부족장이었던 이명고는 전사하고 우라타 부족과 부근 중소 부족들을 모두 복속시킨 조선 국왕은 요새와 성을 세워 점령지를 영토로 편입시키려 하고 있습니다.”

순간 퍼석하며 호타이가 손에 쥐고 있던 술잔이 힘없이 깨졌다.

“도독!”

“내 이럴 줄 알았어. 황제께 머리를 조아리는 척하면서 감히 뒤로 이딴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이거지.”

“시작은 우라타 부족이 먼저 국경을 침범해 약탈을 한 거라고 합니다.”

“그게 그거지. 빌미는 이명고가 제공했을지 몰라도, 이렇게 빨리 대군을 일으켜 토벌을 끝내고 영토로 편입시키고 있는 것을 보면 그 전부터 은밀히 군사를 키웠던 것이 틀림없어.”

“…….”

확실히 지금까지 보여 주었던 조선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행동과 결과였기에, 부르칸은 호타이의 말에 딱히 반론을 재기하지 못했다.

그러다 깨진 술잔 조각이 피부에 상처를 냈는지 호타이의 손에서 피가 살짝 베어 나오는 것을 발견하고 화들짝 놀랐다.

“이런, 피가 나는군요. 바로 의원을 불러오겠습니다.”

“됐어.”

“하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듯 손을 내저은 호타이는 눈을 매섭게 번득이며 말했다.

“당장 북경에 있는 예친왕 전하께 소식을 알리고, 팔기군을 소집해.”

“조선을 치실 생각이십니까?”

“당연하지. 우리가 여기에 있는 이유가 뭔지 잊었나? 중원을 통일하기 위해서는 뒤를 깨끗하게 해 둬야지.”

“그렇지만 조선 국왕이 황제 폐하께 반기를 든 것도 아니고, 한족들의 반란 때문에 화북 지역이 소란스러운데 원정에 나서는 건 여러모로 무리이지 않겠습니까?”

우려 섞인 부르칸의 말에 호타이는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는 마뜩지 않은 어투로 입을 열었다.

“자네, 언제부터 이렇게 말이 많아졌나?”

자신이 너무 나섰다는 것을 깨달은 부르칸은 황급히 고개를 숙이며 사죄했다.

“죄송합니다, 도독.”

“주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든지 우리는 맡은 일만 충실히 수행하면 되는 거야. 그리고 내가 심양 도독에 임명되면서 예친왕 전하께 받은 임무는 조선이 경거망동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고. 무슨 이야기인지 알겠나?”

“예.”

“앞으로 조심하게.”

“알겠습니다.”

“더 보고할 것이 없으면 그만 나가 봐.”

약간 차가운 호타이의 말에 부르칸은 굳은 얼굴로 상체를 숙였다.

“그럼.”

문이 닫히고 방 안에 혼자 남은 호타이는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으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두 번이나 혼을 내 줬는데도 정신을 못 차리다니. 이번에는 한양을 아예 불바다로 만들어 버리겠어.”

그날 예친왕에게 보내는 전령이 심양성을 나와 말을 타고 북경으로 급히 달려갔고, 만주 지역 팔기들이 긴급 소집됐다.

이런 청군의 움직임은 심양에 있는 간자들을 통해 즉시 도현한테 알려졌다.

이미 예상하고 있던 일이었기에, 알현을 요청하고 찾아온 이완의 보고를 받고도 도현은 크게 놀라지 않고 차분한 태도를 유지했다.

“결국 이렇게 됐군.”

“바로 팔기군에 소집령을 내린 것을 보니 아무래도 그냥 넘어가기는 어려울 것 같사옵니다.”

“그렇겠지.”

잠시 입을 꾹 다물고 뭔가를 고민하던 도현은 이내 앞에 앉아 있는 이완을 보며 이야기를 했다.

“화북 지역의 반란은 어떻게 되어 가고 있나?”

“초반에는 북경 근처까지 장악하며 기세를 올렸지만, 얼마 전부터 회군한 예친왕이 본격적으로 토벌을 시작하자 예상한 대로 급격히 위축되고 있습니다.”

“산둥반도에서 회전을 벌여 크게 패했다고 했지?”

“네. 견고한 성벽으로 둘러싸인 제남濟南성에서 수성전을 벌였으면 결과가 달라졌을 텐데, 무모하게 기병이 주축인 청군을 상대로 벌판에 나가 싸웠다가 무려 사만이 넘는 병사를 잃었다고 합니다. 물론 제남성도 함락당했고 말입니다.”

워낙 땅도 넓고 수십만 대군을 되돌리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보니, 원정을 떠났던 청군은 이제야 북경과 산둥성 인근에 도착해 토벌을 시작했다.

그사이 반란군의 규모는 급격하게 불어나 거의 삼십만이 넘었고, 제남을 비롯한 여러 주요 성과 도시를 장악하고 자체적으로 세금까지 걷으며 금방이라도 북경을 함락해 청국을 만리장성 너머로 쫓아 보낼 것 같았다.

하지만 자리를 비웠던 청군 주력이 되돌아오고, 반란군 지휘부가 승리에 취해 제남회전처럼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저지르면서 상황이 급변하고 있었다.

“멍청한 것들 같으니라고. 반란군 지휘부에 침투한 주작단 단원은 뭘 하고 있는 거야?”

아쉬운 마음에 도현이 역정을 내자 이완이 약간 어두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도움을 주려고 해도 규모가 늘어나면서 지휘부 안에서 파벌이 갈려 서로 주도권 다툼을 벌이는 바람에, 제어하기가 쉽지 않은 상태이옵니다.”

“갈수록 태산이군. 아직 반란이 성공하지도 않았는데 떡밥에 눈이 멀어 반목을 하다니, 아무래도 더 이상 예친왕의 발목을 잡는 건 기대하기 어려운 것 같아.”

“신도 같은 생각이옵니다.”

“이제 어쩌지…….”

원래 도현이 계획한 것은 두만강을 건너 우라타 부족 영역을 집어삼키고, 한족 반란 토벌에 정신이 없을 청나라의 약점을 이용해 대화로 적당히 타협을 보는 거였다.

조선의 행동이 신경 쓰여도 중원 통일을 다 이루지 못했고 내부에서 소요가 계속 벌어지는 이상, 아무리 호전적인 예친왕이라고 해도 함부로 군대를 일으키지 못할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나름 성공 가능성도 높고 괜찮은 계획이었지만, 한족 반란군의 지휘부가 무능을 드러내면서 연속해 삽질을 하고 예친왕이 예상보다 신속하게 움직이는 바람에 모든 것이 다 엉망이 되어 버렸다.

미간을 찡그리고는 손가락으로 보료 팔 받침 끝을 툭툭 두드리던 도현은 고개를 들어 올리면서 말했다.

“심양과 만주에 남아 있는 청군 병력이 얼마라고 했지?”

“상당수가 천도와 함께 황제를 따라 화북 지역으로 넘어갔지만 여전히 심양성을 중심으로 팔기군 오만이 잔류해 있사옵니다.”

광활한 만주 전역을 관할하는 병력으로는 부족해 보였지만, 팔기군이 가진 전투력을 고려하면 결코 만만히 볼 전력이 아니었다.

그리고 전원 기병으로 구성된 팔기군은 수성보다 공격에 특화된 군대였기에 신속히 국경을 넘어와 곧장 한양을 치는 용도로는 오히려 이 정도가 딱 적당했다.

실제로 병자호란 때도 청군은 국경에서 한양까지 산재한 여러 성들과 요새를 모두 무시해 버리고 곧장 밀고 내려와 조선의 방어 체계를 단번에 무력화시켜 버렸다.

그 때문에 인조는 강화도로 피난을 가지 못하고 허겁지겁 남한산성으로 도망갔다가 갇혀 버려 삼전도의 치욕을 당하게 된 것이었다.

당시의 교훈을 잊지 않고 도현이 수세적인 방어 전략 대신 공격적으로 쳐들어오는 적을 상대하는 것으로 기본 틀을 뜯어 고쳤지만, 아직 미흡한 부분이 많았다.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되겠지만, 만약 조만간 팔기군이 우리를 공격한다면 압록강을 넘기 전에 끝장을 봐야 해.”

그러자 이완은 정색을 하며 그를 봤다.

“설마 선제공격을 염두에 두고 계신 것이옵니까?”

“필요하다면.”

“전하.”

화들짝 놀란 이완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자 도현은 살짝 손을 내저으며 이야기를 했다.

“청나라와 전쟁을 피할 수 없게 되면 그럴 수도 있다는 걸세.”

“으음.”

아니라고는 했지만 그동안 봐 왔던 도현의 성격으로 볼 때 수가 틀리면 진짜로 심양을 먼저 칠 수도 있었기에 이완은 좀처럼 얼굴을 펴지 못했다.

“일단 모든 눈과 귀를 동원해서 예친왕과 심양에 있는 팔기군의 동태를 면밀하게 주시하도록 해.”

“허면 군부에 비상령을 내리시지는 않는 것이옵니까?”

잠깐 생각을 해 본 도현은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당장 전쟁이 벌어지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먼저 호들갑을 떨면 오히려 상대편에 잘못된 신호를 보낼 수도 있으니까 그냥 놔두도록 하지.”

“알겠사옵니다.”

“앞으로도 조금이라도 이상한 조짐이 보이면 바로 보고하게.”

“예.”

짧게 대답한 이완은 예를 갖추고 조심스럽게 밖으로 물러났다.

자리에서 일어난 도현은 방 한쪽 벽에 걸려 있는 북방 지도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고심에 찬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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