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칙사 (47/104)

칙사

“공격!”

“우와아아!”

슈슈슉!

“컥.”

말을 탄 팔기군이 함성을 내지르며 무섭게 돌격해 오자, 반란군 병사들은 겁에 질려 우르르 대열을 이탈해 뒤로 도망쳤다.

“히익.”

“사, 살려 줘!”

“이런, 동요하지 말고 자기 자리를 지켜라!”

지휘관들이 목청이 터져라 고함을 질러 댔지만, 이미 전의를 상실한 반란군 병사들의 혼란을 가라앉히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두두두두.

쿵! 꽈아앙.

“으아악!”

“도, 도망쳐!”

그나마 남아 있던 병사들도 팔기군이 무기를 휘두르며 대형을 가로지르자 비명을 내지르면서 쓰러지거나 허겁지겁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런 반란군 병사들을 쫓아간 팔기군은 그들의 등에 검을 찔러 넣거나 사정없이 목을 내리쳤다.

슈각!

“끄아악.”

“큭.”

전장은 순식간에 반란군 병사들의 비명과 시신으로 뒤덮였고, 붉은 피가 강이 되어 흘러내렸다.

도저히 가망이 없을 정도로 전세가 기울어지자 말을 타고 반란군을 지휘하던 왕이는 눈물을 머금으며 후퇴 명령을 내렸다.

“크윽, 이렇게 또 지고 말다니. 정녕 하늘은 명을 버리셨단 말인가…….”

“장군.”

“피해가 더 커지기 전에 후퇴 신호를 보내게.”

“알겠습니다.”

잠시 뒤 후퇴를 알리는 나팔 소리가 길게 울려 퍼졌고, 반란군 병사들은 무질서하게 전장을 빠져나갔다.

반대편 언덕에서 그런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던 예친왕은 심드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끝났군. 도망치는 잔병을 말끔하게 정리하라고 해.”

“옛.”

군관이 큰 소리로 대답하고는 명령을 전달하러 가자 예친왕은 옆에 있는 야골타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걸로 북경 부근에 있는 반란 세력은 다 정리됐군.”

“전하가 아니면 이렇게 빨리 토벌을 해 나갈 수 없었을 겁니다.”

“흥, 기병 돌격 한 번에 겁먹은 쥐새끼들처럼 우르르 달아나는 것들을 상대로 승리를 거둬 봤자 별로 기쁘지 않아. 이런 오합지졸들을 처리하지 못해서 황하 강남으로 가던 군을 되돌리게 만들다니 정말 짜증 나는군.”

“…….”

미간을 찌푸린 예친왕이 진심으로 짜증을 내자 야골타뿐만 아니라 주위에 있던 모든 장수들이 눈치를 보며 괜히 불똥이 튈까 봐 몸을 사렸다.

그때 전령 한 명이 급히 언덕을 올라와서는 굴러떨어지듯이 말에서 내려 이쪽으로 뛰어왔다.

“뭐야?”

“심양 도독께서 보내신 서신입니다.”

“호타이가? 이리 줘.”

전령이 내민 봉투를 받아 든 예친왕은 봉인을 뜯고 편지를 펼쳤다.

“으음.”

예친왕이 얼굴을 찌푸리면서 낮게 침음을 내뱉자 야골타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그러자 예친왕은 들고 있던 편지를 와락 구기면서 잇새로 말했다.

“조선 국왕이 두만강을 넘어 우라타 부족을 치고 그 땅을 영토로 편입시켰다는군.”

“조선이 말입니까?”

“그래.”

침략은 수도 없이 받았지만 남을 공격하는 일은 거의 없는 조선이었기에, 야골타와 주위에 있던 장수들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별일이 아닐 수도 있었지만, 비록 북경이 함락되고 화북 지역을 차지했다고 해도 조선과 끈끈한 관계를 가진 명이 아직 명맥을 유지하고 있고 점령지도 반란으로 시끄러운데 등 뒤에서 이런 상황이 벌어지는 것은 청나라 입장에서는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조선이 왜 그런 짓을……?”

“명분은 우라타 부족이 먼저 국경을 침범해 약탈을 벌였기 때문이라는데, 이건 핑계에 불과하겠지.”

“설마 조선이 우리의 뒤통수를 노린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얼마 전까지 명과 상국으로 관계를 유지하던 사이니까 충분히 그럴 수 있지.”

거의 단정을 지어 버린 듯한 예친왕의 표정과 이야기에 또 다른 심복 장수인 용골대가 신중한 의견을 보였다.

“하지만 그들은 이번에 저희가 원정에 나섰을 때 도와 달라는 명의 요청을 단호하게 거절했지 않습니까?”

“그랬지만 똑똑하고 머리가 잘 돌아가는 조선 국왕이라면, 조금이라도 망설이는 조짐을 보이면 우리가 먼저 치고 들어가려고 한 걸 알아차리고 미리 선수를 친 것일 수도 있어. 겉으로는 거부한 것처럼 해 놓고 뒤로는 명과 모종의 이야기를 주고받았을지도 모르지.”

“흠.”

“끄으응.”

장수들은 이야기를 듣고 나자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며 안색을 굳혔다.

“그럼 큰일이지 않습니까?”

“반란에 이어 조선까지 말썽을 피우다니…….”

“어쩌실 생각입니까?”

용골대가 심각한 표정으로 묻자 잠시 전장을 쳐다보며 말이 없던 예친왕은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지금 당장 군대를 몰아 조선을 치는 건 무리겠지.”

“오랜 행군과 전투로 병사들이 많이 지친 상태입니다.”

바로 그렇다고 하는 대신 용골대는 우회적으로 대답했다.

다른 장수들도 용골대와 같은 생각인지 고개를 끄덕였지만 다혈질인 데다가 심양 관저 시절부터 도현과 그다지 좋은 관계가 아니었던 야골타만 혼자 다른 태도를 보였다.

“그렇다고 이대로 놔두면 속이 시커먼 조선 국왕이 뒤에서 무슨 짓을 꾸밀지 모르잖습니까? 이 기회에 깔끔하게 정리해 버려야 됩니다.”

그러자 용골대가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야골타를 봤다.

“그럼 야골타 장군은 아직 반란 토벌이 다 끝난 것도 아닌데 이대로 이곳을 내버려 두고 군대를 조선으로 몰고 가야 된다는 건가!”

평소 그에게 경쟁의식을 가지고 있던 야골타는 피하지 않고 용골대를 마주 노려보고는 콧방귀를 끼면서 말했다.

“흥! 그까짓 허접쓰레기 같은 조선군쯤은 다 갈 필요도 없이 팔기군 몇만 정도만 보내면 벌벌 떨며 겁먹은 개떼처럼 사방으로 흩어져 버릴 게요.”

다분히 도발적인 야골타의 이야기에 화가 난 용골대는 눈썹을 위로 치켜세웠지만, 예친왕이 있는 자리였고 또 스스로도 조선군을 그리 강하게 보지 않았기에 이빨만 부드득 갈며 반론을 재기하지 않았다.

거의 환골탈태를 했다고 할 만큼 조선군이 병자호란 때와 완전히 달라져 있다는 것을 청군 지휘부는 아직 까맣게 몰랐기에, 다른 장수들도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고 무엇보다 예친왕 또한 솔깃해했다.

“하긴 조선을 치는 것에 원정군 전체가 움직일 필요는 없지.”

“맞아.”

분위기가 조선 정벌 쪽으로 기울어지려고 할 때, 장수들 사이에 끼어 있는 몇 안 되는 문관 중 한 명이 조심스럽게 나섰다.

“전하, 외람되지만 제가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병참 보급을 책임진 왕태봉이라는 이름의 문관으로, 원래 명나라 사람이었지만 청에 귀순한 이신이었다.

잠깐 왕태봉을 아래위로 훑어본 예친왕은 이야기를 해 보라는 듯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지금 조선을 쳐서는 절대 안 됩니다.”

그러자 야골타가 벌컥 화를 내며 소리쳤다.

“문관 주제에 전쟁에 대해 뭘 안다고 이래라 저래라 떠드는 건가!”

“전 그저…….”

“전하, 문관들이란 그저 자리에 앉아 탁상공론만 펼치기 좋아하는 자들입니다. 굳이 귀담아 들을 필요는 없으십니다.”

“야골타 장군의 말이 맞습니다. 비록 지금은 청 조정에 몸을 담고 있다지만 왕태봉은 본래 명나라 출신 아닙니까. 조선은 명을 사대하는 나라였으니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감싸고도는 게 당연할 것입니다.”

문관과 무관이라는 차이도 있었지만, 왕태봉이 이신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만주 출신 장수들은 이때다 싶었는지 그를 공격하며 벌 떼같이 들고 일어섰다.

살벌하기까지 한 기세와 출신을 걸고넘어지는 치사한 행태에 왕태봉이 입을 다물어 버리자, 예친왕이 그런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에게 의견을 말해 보라 한 건 바로 이 몸이니 자네들은 입 다물고 있게.”

“하오나 전하…….”

“감히 내 명령에 불복할 생각인가?”

기분이 상한 듯 예친왕의 눈빛이 사나워지자 그제야 분위기를 파악한 장수들은 고개를 조아렸다.

주변이 조용해지자 예친왕이 왕태봉에게 말했다.

“무슨 근거로 그런 이야기를 했는지 어디 한번 말해 봐.”

그러자 숨을 크게 들이쉰 왕태봉은 차분한 어조로 조선을 쳐서는 안 되는 이유를 자세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우선 병사들이 지쳐 있다는 것이 첫 번째 이유이고, 둘째로 조선과 싸우는 걸 뒷받침할 만한 재원이 현재 우리 청국에 없다는 게 가장 큰 걸림돌입니다.”

첫 번째 이유는 이미 알고 있는 것이었기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던 예친왕은 마지막 말에 눈썹을 꿈틀거리며 다그치듯 물었다.

“재원이 부족하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전하께서도 잘 아시겠지만 전쟁이라는 것이 재화를 끝도 없이 빨아들이는 괴물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벌써 일 년 가까이 수십만 대군을 유지하고 있으니, 거기에 들어가는 군비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입니다.”

아까부터 심기가 불편한 표정을 짓고 있던 야골타가 끼어들며 왕태봉을 몰아붙였다.

“처음 원정을 시작할 때 이 년은 거뜬하도록 보급 계획을 전부 다 세워 뒀는데, 무슨 소리야!”

왕태봉은 답답하다는 듯 작게 한숨을 내뱉고는 이야기를 이었다.

“물론 그랬지요. 하지만 그사이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변수가 생겼지 않습니까?”

“변수라면…… 한족의 반란을 말하는 건가?”

뭔가 짐작되는 것이 있는지 옆에 있던 용골대가 정색을 하며 묻자 왕태봉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전하께서 일으킨 군대가 강남 지역을 평정하는 동안 화북에서 농사를 지어 나오는 쌀로 군량미를 조달하고 백성들이 바치는 세금으로 군비를 충당해야 했는데, 반란이 벌어지는 바람에 모든 것이 다 엉망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제야 왕태봉이 하려는 이야기가 뭔지를 알아차린 예친왕과 장수들은 표정을 딱딱하게 굳혔다.

“반란이 화북 전체에 아주 광범위하게 퍼지는 바람에 곡식과 세금을 제대로 거두지 못했고, 그나마 비축해 둔 것도 창고째 약탈당하거나 불에 타 재로 변해 버려 애초에 세워 둔 보급 계획은 전부 무용지물이 되고 만 지 오래입니다. 아직 토벌을 완전히 끝내지도 못했고 국고가 점점 바닥을 드러내고 있는데 이 상황에서 또다시 전쟁을 벌인다는 건 스스로 섶을 지고 불구덩이 안으로 뛰어드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으음…….”

“끄응.”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을 왕태봉이 적나라하게 지적하자, 무안해진 장수들은 살짝 얼굴을 붉힌 채 괜히 헛기침만 내뱉거나 앓는 소리를 내며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게다가 더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그게 뭔가?”

어느새 이야기에 완전히 몰입한 예친왕이 진지한 어투로 묻자 왕태봉은 바로 이야기를 했다.

“늦어도 다음 달 안으로 반란을 완전히 진압하거나 최소한 황하와 대운하를 따라 형성된 곡창지대의 치안을 확보하지 않으면, 파종을 제대로 하지 못해 올해 농사도 망치게 될 겁니다. 그러면 조선의 버릇을 고쳐 주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이런 말씀을 드리기 송구스럽지만 나라의 존망이 위태로워질 수도 있습니다.”

자칫 역적으로 몰릴 수도 있는 아주 충격적인 발언이었지만, 다들 여기까지 오면서 계속된 전란에 황폐해진 논밭을 눈으로 직접 목격했었기에 왕태봉의 이야기가 심각하게 다가왔다.

“진지하게 생각을 해 봐야 될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용골대의 말에 예친왕은 정색을 하고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자네는 조선을 어떻게 했으면 좋겠나?”

“나중에 다시 군사를 일으켜 징치懲治를 하더라도 당장 황제께 반기를 들거나 후방을 공격해 오는 것이 아닌 이상, 일단은 내부 정리가 끝날 때까지 내버려 두는 것이 여러모로 이득이라 생각합니다.”

“흐음…….”

한쪽으로 턱을 매만지며 잠시 고심하던 예친왕은 처음과 달리 많이 차분해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좋아, 조선을 치는 건 나중으로 미루도록 하지. 하지만 그냥 놔두기는 뭐하니 사신을 한양에 보내서 조선 국왕을 질책해 저쪽의 진심을 슬쩍 떠보자고.”

“현명하신 결정이십니다.”

“자네 이름이 왕태봉이라고 했나?”

“그렇습니다.”

고개를 숙이면서 대답하는 왕태봉을 따뜻한 시선으로 내려다보며 예친왕이 말했다.

“앞으로도 내 옆에 있으면서 오늘 같은 충언을 해 주게.”

“……!”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치켜뜬 왕태봉은 자신도 모르게 머리를 들었다가 얼른 다시 숙이며 대답했다.

“충심을 다하겠습니다.”

“그래.”

예친왕 같은 일인지하만인지상一人之下萬人之上의 최고 권력자 눈에 띄었다는 것은 이제 출세가 보장되었다는 이야기였기에, 왕태봉은 잔뜩 고무된 기색이었고 주위의 장수들도 그에게 부러움과 시기가 섞인 시선을 보냈다.

결국 예친왕은 왕태봉의 의견을 받아들여 반란 토벌에 집중하기로 마음을 굳혀, 심양에 전령을 보내 군을 움직이지 말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 예전부터 조선을 자주 들락거렸고 예친왕의 측근 중 하나이기도 한 만월개가 칙사로 임명되어, 도현을 만나기 위해 배를 타고 한양으로 떠났다.

끼룩끼룩.

다행히 파도가 높지 않고 순풍이 불어 주어서, 만월개가 탄 배는 천진을 떠난 지 사흘 만에 조선 근해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육지에 도착한다고 했지?”

답답한 선실을 나와 갑판 위에서 시원한 바닷바람을 마시고 있던 만월개의 말에 함께 있던 하급 관리가 얼른 대답했다.

“예. 선장 말로는 이대로 바람이 불어 준다면 오늘 해가 떨어지기 전에 제물포에 도착할 수 있을 거라고 합니다.”

이제 멀미가 많이 진정됐다고 해도 흔들리는 배 위에서 지내는 건 여간 곤욕이 아니었기에 만월개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다행이구만.”

그때 배가 약간 어수선해지는가 싶더니 선원 한 명이 앞으로 팔을 들어 올리며 크게 소리를 쳤다.

“전방에 배가 보인다!”

만월개가 고개를 돌려 선원이 가리키는 곳을 쳐다보자 정말 멀리 보이는 섬 뒤에서 작은 점같이 생긴 배가 불쑥 튀어 나와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무슨 배지?”

“글쎄요…….”

최근 들어 많이 없어졌다고 하지만 많은 배들이 오가는 길목인 이곳은 예전부터 해적들이 자주 출몰하는 것으로 유명했기에, 대답하는 하급 관리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어, 이쪽으로 오는데요.”

“그렇군.”

정체불명의 배는 사신 일행이 탑승한 관선官船을 향해 빠르게 접근해 왔다.

“혹시 해적선은 아니겠지?”

“아, 아닐 겁니다. 설사 해적이라고 해도 돛대에 꽂혀 있는 깃발을 보면 청나라 관선이라는 걸 알 수 있을 텐데 뭐 하러 우리를 노리겠습니까.”

애써 부정했지만 사신을 태우고 오가는 관선은 상대편 나라에 선물하거나 받은 값비싼 물건을 실고 있는 경우가 많았기에, 굳이 상선이 아니더라도 군인들을 가득 태운 전투함만 아니라면 해적들한테는 군침이 도는 먹잇감일 터였다.

보통은 관선을 공격하면 해당 국가의 분노를 사 큰 곤욕을 치를 테니 쉽게 건드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솔직히 증인도 없는 망망대해에서 벌어지는 일인데 노략질을 하고 상대를 다 죽인 뒤 배마저 침몰시키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낼 도리가 없는 것이다.

그냥 평소대로 육로를 이용할 걸 괜히 배를 탔다고 만월개가 마음속으로 후회하고 있을 때, 정색을 한 채 정체불명의 배를 주시하던 선장이 고함을 질렀다.

“해적이 아니라 조선군이 운용하는 판옥선이다!”

“정말이네.”

“휴우, 살았다.”

선장의 외침에 바짝 긴장하고 있던 선원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만월개도 굳은 표정을 풀었다.

어느새 양쪽은 갑판 위에 타고 있는 서로의 얼굴을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판옥선에서 깃발을 흔들어 신호를 보내자 선장이 배를 멈추었다.

그러자 판옥선에서 작은 쪽배가 하나 내려지더니 조선 수군 몇 명이 노를 저어 이쪽으로 왔다.

“밧줄을 내려 줘!”

“옛. 으쌰!”

선원 하나가 긴 밧줄을 밑으로 던지자 쪽배에 타고 있던 조선 수군 두 명이 그것을 붙잡고 배 위로 올라왔다.

턱.

제일 먼저 승선한 사람은 붉은색 관복을 입고 머리에는 챙이 넓은 모자를 쓴, 다부진 인상의 군관이었다.

뒤를 이어서 허리에 짧은 검을 찬 병사 한 명이 올라왔다.

주위를 한번 훑어본 군관은 약간 서툰 청나라 말로 입을 열었다.

“선장이 누구요?”

그러자 수염을 텁수룩하게 기른 선장이 모여 있는 선원들을 헤치고 앞으로 나왔다.

“접니다.”

“돛대에 청나라 깃발이 꽂혀 있는데, 공무를 수행하는 관선이오?”

“그렇습니다.”

“내가 알기로 청나라에서 관선이 온다는 이야기는 없었는데, 어디로 가는 거요?”

“그건…….”

선장이 막 뭐라고 이야기를 하려는 찰나 뒤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반월개가 거드름을 피우면서 나왔다.

“흠, 그건 내가 대답을 해 주지. 난 황제 폐하의 명을 받들어 조선 국왕을 만나러 가는 명의 칙사일세.”

목에 잔뜩 힘을 준 반월개의 말에 군관은 살짝 놀란 표정을 짓고는 황급히 머리를 숙였다.

“몰라뵈어 죄송합니다.”

“아닐세.”

“상국에서 온 칙사를 번잡한 제물포항으로 모실 수 없으니, 저희가 직접 마포 나루까지 안내하겠습니다.”

“그럴 필요까지는 없는데.”

“아닙니다. 귀하신 분인데 이 정도는 해 드려야지요.”

군관의 말에 우쭐해진 만월개는 크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허허허, 그러면 안내를 부탁하겠네.”

“예.”

아주 정중한 태도로 군례까지 취해 만월개를 흡족하게 한 군관은 옆에 뻘쭘하게 서 있는 선장을 보며 말했다.

“앞에 있는 우리 배에 바짝 붙어서 따라오시오.”

“그러지요.”

선장의 대답을 듣고 몸을 돌린 군관은 병사와 함께 다시 밧줄을 타고 밑에 있는 쪽배로 내려갔다.

“본선으로 돌아가자.”

“알겠습니다.”

“읏차!”

병사들이 노를 저어 쪽배가 천천히 움직이자, 군관은 청나라 관선을 쳐다보면서 보일 듯 말 듯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청국 놈들한테 제물포에 있는 제철소와 각종 시설들을 보여 줄 수는 없지. 오래지 않아 그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 줄 테니 이번에는 어디 마음껏 즐겨 봐라.”

사실 판옥선은 주작단을 통해 칙사가 온다는 사실을 보고 받은 도현의 지시에 따라 만월개가 제철소 같은 중요 시설을 보지 못하도록, 제물포가 아닌 마포 나루로 바로 데려가기 위해 길목을 지키고 서 있던 것이었다.

만월개는 이런 사실을 꿈에도 모른 채 극진한 태도에 감쪽같이 속아 넘어가, 판옥선을 따라 강화도 수로를 통과해 곧장 한양으로 향했다.

“전하, 도승지 들었사옵니다.”

“들라 하라.”

미닫이문이 좌우로 열렸고, 관복을 정갈하게 차려입은 도승지가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들어와 비단 보료 위에 앉아 있는 도현에게 절을 했다.

넓은 방 안에는 도현뿐만 아니라 정보기관인 주작단을 맡고 있는 이완이 먼저 와 있었고, 한쪽에는 칠현이 조용히 시립해 있었다.

“다녀왔사옵니다, 전하.”

“만월개는 도착했나?”

“예. 마포 나루에서 간단한 영접식을 가진 뒤 영의정과 함께 모화관慕華館으로 들어갔사옵니다.”

모화관은 조선시대 중국 황제가 보내는 칙사를 영접하고 머물게 하는 곳으로, 태종 7년에 개성에 있는 영빈관을 모방하여 서대문 밖에 건립했다.

바로 앞에 연꽃이 가득한 저수지가 있고 울창한 소나무 숲으로 둘러싸여 있어 경치가 아주 빼어난 곳이었다.

원래는 왕세자가 직접 신료들을 이끌고 나가 칙사를 영접하도록 되어 있지만, 도현의 아들인 연은 아직 나이가 어렸기에 영의정 박황이 대신 나갔다.

이야기를 들은 도현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청나라 황제가 보낸 사람이라고 해도, 칙사 따위의 방문에 조정 대신들이 몽땅 나가 영접을 해야 된다니 정말 입맛이 쓰군.”

“전하.”

“이게 다 우리가 힘이 없어서 그런 것 아니겠어.”

한탄하듯 말을 내뱉자 도승지와 이완이 면목이 없는 얼굴로 머리를 숙였다.

“모두 신들이 불민해서 그런 것이옵니다.”

“아니야. 임금인 내가 부덕해서 그런 거지 누굴 탓하겠나. 하지만 여태까지는 명이나 청의 눈치를 보며 지냈을지 몰라도, 앞으로는 그 어느 나라도 우리 조선을 함부로 하지 못하게 만들 테니까 두고 보게.”

“꼭 그렇게 하실 거라고 믿사옵니다.”

“그건 그렇고 만월개와 칙사 일행이 우리가 북벌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도록 각별히 신경을 써야 될 거야.”

“안 그래도 칙사 일행과 접촉하는 인원들을 미리 교육해 입단속을 단단히 시켜 두었고, 가능하면 모화관 밖을 돌아다니지 않게끔 매일 연회를 열어 줄 계획이옵니다.”

“그거 가지고는 부족해. 이 단장.”

“말씀하십시오.”

“행여나 불순한 세력이 만월개나 청국 칙사 일행을 만나 쓸데없는 이야기를 못 하게, 단원들을 풀어 철저히 막도록 해.”

도현의 지시에 이완은 눈을 매섭게 번득이면서 대답했다.

“알겠사옵니다.”

제물포에 세우고 있는 대규모 제철소와 군부에 보급 중인 각종 신무기 등 어느 것 하나 청나라의 귀에 들어가서 이로울 것이 없었기에, 최대한 보안을 유지해야 했다.

지난번에 함부로 까불다가 도현에게 크게 데이고 쓸쓸히 돌아간 명나라 칙사처럼 안하무인격으로 행동하지는 않았지만, 모화관에 들어간 만월개도 어깨에 힘을 팍 주고 온갖 거드름을 피웠다.

참으로 아니꼬운 태도였지만, 얼마 뒤 있을 도현과의 만남을 부드럽게 풀고 칙사 일행의 눈과 귀를 가리기 위해 예조에서는 매 끼니마다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푸짐한 진수성찬을 대접하고 밤이면 연회를 열어 주었다.

극진한 대접에, 만나면 두만강을 넘어 영토를 늘린 일을 단단히 따지려고 했던 만월개의 마음은 봄날의 눈처럼 사르르 녹아 버렸다.

까칠하던 태도가 어느 정도 누그러졌다고 판단한 도현은 칙사가 한양에 도착한 지 사흘째 되는 날 대궐에서 만남을 가졌다.

원래는 대전에서 대소신료들이 모두 모인 가운데 알현을 해야 했지만, 발해도 문제로 껄끄러운 분위기가 연출될 게 뻔하고 은밀히 주고받을 것도 있기에 장소를 창덕궁 후원에 있는 전각 중 하나인 주합루宙合樓로 정하고 참석자도 삼정승과 육조판서로 제한했다.

넓지 않은 지역에 주위를 둘러싼 야트막한 언덕의 높낮이를 이용해서 연못과 건물을 조화롭게 배치한 것은 조선 건축의 뛰어남을 여실하게 보여 주었다.

칙사 일행이 얼마 전 예조판서로 승차한 박노의 안내를 받으며 들어서자, 주합루 앞뜰에 서 있던 도현이 미소 띤 얼굴로 반겼다.

“어서 오시오.”

“그동안 강녕하셨습니까?”

국왕인 도현이 직접 누각 아래까지 내려와 맞이하는 것은 최고의 환대라고 할 수 있었기에 만월개는 만족한 얼굴로 아주 살짝, 형식적으로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덕분에 잘 있었소. 듣기로 육로가 아닌 거친 해로로 오셨다는데 고생을 하신 건 아닌지 모르겠소이다.”

“운이 따라 주었는지 오는 내내 바다가 잠잠해서 큰 어려움은 없었습니다.”

“다행이구려. 자, 이럴 것이 아니라 간단하게 주연상을 차려 놨으니 위로 올라갑시다.”

“그러시지요.”

도현의 인도로 천천히 계단을 올라 주합루 이 층에 도달하니, 넓은 누각에 풍성하게 차려진 산해진미와 궁궐 뒤에 펼쳐진 산을 배경으로 한 멋진 풍광이 한눈에 들어왔다.

도현이 가장 상석에, 그다음으로 만월개가 착석하자 뒤따라온 신하들도 차례대로 자기 자리를 찾아 앉았다.

도현을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영의정을 비롯한 조선의 대신들이 자리했고, 반대편인 왼쪽에는 만월개를 따라온 청나라 사람들이 앉았는데, 사뭇 융숭한 대접에도 불구하고 기뻐하거나 감사하는 기색 없이 오히려 당연하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차린 건 별로 없지만 모처럼 준비한 것이니 입맛에 맞았으면 좋겠소이다.”

“하하, 전하의 배려에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참기름을 바른 듯 입에 발린 말로 격식을 차린 만월개는 술잔을 들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며 이야기를 했다.

“청과 조선의 신하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인 것을 기념할 겸, 건배를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거 좋은 생각이오.”

만월개의 제안에 도현이 맞장구를 치며 잔을 들어 올리자, 자리에 앉은 신하들 역시 다 함께 건배할 자세를 취했다.

“그럼 제가 말을 꺼냈으니 먼저 실례하지요.”

크흠, 하며 목을 가다듬은 만월개는 미리 준비라도 해 온 것처럼 매끄럽게 건배사를 소리 높여 외웠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가 싶어 들어 보니, 청국 황제의 만수무강과 그를 칭송하는 내용만이 가득해 마치 여기가 조선이 아닌 청나라 황실인 듯 느껴질 정도였다.

막힘없이 길게도 읊어 대는 만월개를 바라보며 속으로 아부 실력도 이 정도면 수준급이라고 실소를 터트리는 도현과는 달리, 대신들의 표정은 똥이라도 밟은 양 편치 못한 기색이었다.

아무리 청나라 사람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엄연히 다른 나라인 조선에 와서, 그것도 국왕의 앞에서 청국 황제를 내세워 찬양해 대니 배알이 꼴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더군다나 두 번의 호란과 삼전도의 치욕으로 인해 청나라에 대한 신하들의 감정이 그리 좋지 않았기에, 만월개의 행동이 눈에 거슬리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대국인 청나라의 눈치를 봐야 되는 처지였기에 속으로 욕을 해 대면서도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았다.

술이 몇 순배 돌아가고 분위기가 어느 정도 무르익자 만월개가 도현을 보며 짐짓 진지한 어투로 입을 열었다.

“먼저 올린 섭정의 친서를 읽으셨다면 잘 아시겠지만, 이번에 조선이 두만강을 넘어 우라타 부족의 영역을 영토로 삼은 것을 두고 저희 청국 조정에서는 황상 폐하에 대한 도발이니 당장 벌을 내려야 된다며 말들이 아주 많습니다.”

순간 누각 안의 분위기가 차갑게 얼어붙었다.

도현도 얼굴을 굳히는 가운데, 뜻밖에도 우의정 송시열이 제일 먼저 나섰다.

“칙사께서 말씀이 너무 지나치신 것 같소이다. 마치 주상 전하를 겁박하는 것 같지 않소이까!”

“우리가 점령한 곳은 엄밀히 말해 청국의 영토도 아닌데 이건 너무 과민 반응을 보이는 것 아니오!”

바로 이어서 병조판서 임경업이 살짝 상기된 표정을 하고 따지듯 이야기를 하자 만월개는 거만한 눈빛으로 두 사람을 깔아 보며 말했다.

“만주는 청나라의 고향이자 기반으로, 거란족들이 거주하는 지역도 우리의 영역이오.”

다분히 억지스러운 주장이었다.

청나라가 만주에서 힘을 키워 제국으로 성장한 것은 맞지만, 이 지역 전체를 관할하며 지배한 것은 아니었다.

특히 이번에 조선이 영토로 편입한 동부는 청나라를 세운 여진과 적대 관계인 거란족들이 상당수 거주하는 지역으로 북경 천도 이전에도 별다른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그런데도 청나라는 만주 전체를 자신들의 땅이라 우기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더러 어쩌라는 것이오?”

송시열의 물음에 만월개는 시선을 돌려 상석에 있는 도현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요구 사항을 이야기했다.

“당장 두만강 이북에 머물고 있는 군대를 철수시키고, 앞으로는 절대로 강을 넘어가지 않겠다는 약조를 국왕 전하의 이름으로 해 주시오.”

“뭐요!”

이건 단순히 국경을 원래대로 되돌리는 것을 넘어서서 앞으로 조선은 한반도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오지 말라는 뜻이었다.

대번에 속뜻을 파악한 도현은 두 눈을 치켜 떴고, 병조판서 임경업은 화가 단단히 난 얼굴로 버럭 고함을 질렀다.

“이건 명백한 내정 간섭이자 우리 손발을 다 꽁꽁 묶어 놓겠다는 수작이 아니오!”

“그러게 왜 황제의 폐하께 허락도 받지 않고 일을 벌여서 이 사단을 만든 거요. 그나마 당장 팔기군을 보내지 않고 이렇게 잘못을 고칠 기회를 주시는 것을 감사하게 여겨야 할 거요.”

“허어.”

점점 언성이 높아지면서 금방이라도 서로 멱살을 붙잡고 드잡이를 할 것처럼 분위기가 험악해져 갈 때, 가만히 침묵을 지키고 있던 도현이 앞에 있는 상을 손바닥으로 세게 내려치고는 입을 열었다.

탕!

“그만들 하시오. 양쪽 다 이 무슨 추태요!”

“흐흠.”

“허험.”

도현의 말에 언쟁을 멈추기는 했지만, 양쪽 다 감정이 쉽게 가라앉지는 않는지 서로를 쳐다보는 눈길이 심히 곱지 못했다.

그런 가운데 도현은 맞은편에 앉아 있는 만월개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또박또박하면서도 힘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아무래도 칙사께서 뭔가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소이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만월개가 눈을 부릅뜨며 묻자 도현은 시선을 마주치며 담담하게 말했다.

“이번 일이 벌어지게 만든 근본적인 원인은 우리 조선이 아니라 우라타 부족이오. 그들이 국경을 넘어와 마을을 약탈하고 백성들을 노예로 잡아가지 않았다면 결코 군대를 일으키지 않았을 것이오.”

“그러면 토벌만 하고 군대를 물리셨어야지요.”

노련한 정치인답게 만월개가 지지 않고 지적하자, 도현은 앞에 놓여 있는 잔을 들어 술을 한 모금 마시고는 이야기를 이었다.

“우리가 우라타 부족 영역에 군대를 주둔시키는 것은 땅에 욕심이 있어서가 아니오.”

“그럼 뭡니까?”

“다시는 야인들의 침입에 백성들이 고통받지 않도록 미리 완충지대를 만들어 대비를 한 것이오. 솔직히 칙사도 잘 알다시피 이번에 우리가 점령한 땅은 숲과 초지 그리고 산만 잔뜩 있지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지 않소.”

“…….”

만월개 역시 여진족 출신으로 만주 지역에 대해 잘 알고 있었기에, 직접 가 보지는 않았지만 북방에서도 외진 곳에 속하는 동부가 어떨지 대충은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인정을 하면 도현의 의도에 그대로 말려드는 것이었기에 만월개는 날카로운 어투로 쏘아붙였다.

“황무지도 개간하면 보물이 쏟아지는 옥토가 될 수 있지 않습니까? 제가 알기로 실제로 조선에서 사람들을 대거 이주시켜 개간을 하고 있다 들었습니다.”

그러자 도현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건 칙사께서 모르고 하시는 말이오.”

“이주를 시키지 않았다는 겁니까?”

“백성들을 올려 보낸 건 맞소. 하지만 그건 방어용 요새를 쌓고 최소한의 식량을 생산하기 위한 조치였을 뿐이오. 고작 이삼천 명을 이주시켜 그 넓은 땅을 개간하는 건 어불성설이지 않소이까.”

순차적으로 발해도에 삼만 명 이상의 유민을 이주시키고 복속한 거란족들을 조선인으로 품으려는 계획을 추진 중이었지만, 도현은 딱 잡아뗐다.

“으음.”

대답이 궁해진 만월개가 살짝 얼굴을 찡그리며 머뭇거리자, 도현은 주도권을 완전히 조선 쪽으로 가져올 수 있는 마지막 한 수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잘 생각해 보면 이번 일로 청이 꼭 손해를 보는 것만은 아니지 않소이까.”

만월개가 의아한 얼굴로 쳐다보자 도현은 상체를 똑바로 펴며 말했다.

“최근 들어 거란족이 급격히 세를 불리면서 뭉치고 있는 것을 칙사도 잘 알고 있을 거외다. 흩어져 있으면 별거 아니지만 이들이 하나로 힘을 합치게 되면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이 될 것이오.”

청나라 자체가 누르하치라는 걸출한 인물이 부족별로 흩어져 생활하던 여진을 통일해 건국한 국가였기에, 거란의 움직임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만월개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고 경계심 또한 컸다.

특히나 지금은 심양에서 북경으로 천도를 단행한 지 몇 년 되지 않았고, 아직 명과의 전쟁 또한 끝나지 않고 진행 중이라 자연스럽게 만주 지역은 신경을 덜 쓰고 관리가 취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힘의 공백 상태가 되자 그 틈을 거란족이, 더 정확하게는 초흐타 부족이 두각을 나타내며 세력을 급격히 키워가고 있었다.

물론 초흐타 부족이 성장하는 배경에 도현이 있다는 것을 청나라는 아직 몰랐다.

만약 이런 사실을 알았다면 예친왕은 위험을 무릅쓰더라도 조선을 정벌하고 초흐타 부족을 쳐 후방을 정리하려고 들었을 것이다.

거란족 문제를 거론하자 만월개의 표정이 바로 딱딱하게 굳어지는 것을 본 도현은 내심 희심의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했다.

“우리가 새로 얻은 땅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견제를 한다면 거란족도 함부로 경거망동하지 않을 것 아니겠소.”

“으음.”

만월개는 낮게 신음했다.

좀처럼 쉽게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하는 만월개에게 도현은 선심을 쓰듯 한발 양보하는 태도를 취했다.

“과연 청나라에 이득이 되는 것이 어느 쪽인지 잘 생각해 보시기 바라오. 칙사께서는 명민한 분이니 현명한 판단을 하실 거라 믿소.”

그러자 만월개의 얼굴에 고민하는 기색이 더 짙어졌다.

분명 그가 칙사로서 조선을 찾은 목적은 도현을 추궁해 책임을 묻기 위함이었는데, 어느 틈에 이 지경까지 몰리게 됐는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한편 어느 순간 주도권을 거머쥐고는 도리어 상대를 압박하는 도현의 현란한 언변을 직접 목격한 대신들은, 오만한 청나라 칙사가 말 한마디 제대로 못 하는 것을 보고 절로 어깨를 으쓱거렸다.

“칙사를 환영하기 위한 자리인데 이거 내가 괜히 이야기를 길게 끌어 분위기를 망친 것 같군.”

도현이 슬쩍 옆으로 눈치를 주자 칠현이 손뼉을 쳐 대기 중인 악사들을 불러들였다.

이내 거문고와 가야금을 비롯한 각종 악기를 든 악사들이 누각 한쪽에 자리를 잡았고, 하늘하늘 나풀거리는 옷을 곱게 차려입은 어여쁜 무희들이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었다.

평소라면 술에 취해 투명한 옷감 너머로 비치는 무희들의 뽀얀 살결을 노골적으로 훔쳐보는 것에 여념이 없었겠지만, 만월개는 아직도 도현의 말이 머릿속에 빙글대는 듯 악기 소리조차 귀에 들리지 않는 표정이었다.

옆자리에 앉은 다른 일행들 역시 앞에 놓인 술잔에는 손도 대지 않고 그저 눈치만 살피고 있는 것이, 마치 가시방석에 앉은 사람처럼 영 불편한 기색으로 가끔 헛기침만 내뱉으면서 어색한 분위기를 풍겼다.

이토록 지루한 연회가 언제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느릿느릿 시간이 흘러, 마침내 연회가 파한 후 누각을 내려와 배정된 숙소로 향하는 청국 칙사 일행의 얼굴은 마치 먹구름이 낀 듯 어두웠다.

“이제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모화관에 도착하자 그때까지 줄곧 침묵을 지키고 있던 만월개에게 수행을 하던 하급 관리가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만월개는 끄응 하는 소리를 내며 의자에 털썩 주저앉더니,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엔 조선 국왕에게 제대로 한 방 먹었군.”

“그러게 말입니다. 설마하니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칠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연회에서 도현이 화려한 언변으로 상황을 주도하는 것을 다 지켜본 하급 관리는 졌다는 듯 설레설레 고개를 흔들었다.

“섭정께서 조선 국왕을 견제하는 이유가 다 있었어.”

좀처럼 표정을 풀지 못하는 만월개의 혼잣말에 하급 관리가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때, 문이 열리며 청나라에서 함께 온 수행원 중 한 명이 들어왔다.

“대인,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손님?”

“예.”

“누가 왔다는 거야?”

“도승지라고 합니다.”

고개를 갸웃하며 의아한 표정을 짓던 만월개는 수행원의 말에 눈을 반짝였다.

“예조판서도 아니고 국왕의 측근인 도승지가 사전에 약속도 없이 여길 왜 왔을까요?”

“글쎄…….”

“혹시 조선 국왕의 밀명을 받고 온 건 아닐까요?”

기대 어린 표정을 지으며 하급 관리가 쳐다보자 만월개는 고개를 살짝 끄덕인 후, 기다리고 있는 수행원을 보며 지시를 내렸다.

“안으로 들여보내게.”

“네.”

얼마 안 있어 수행원의 안내를 받아 관복을 입은 도승지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도승지 장선징은 중전 장씨의 친동생이었다.

원래 왕명을 출납하고 상선과 함께 국왕을 지근거리에서 보필하는 도승지는 최측근이나 인척이 맡는 경우가 많았다.

역대 그 어느 왕 못지않게 비밀스러운(?) 일을 많이 벌이는 도현이었기에, 믿고 데리고 다닐 수 있는 인물로 여러 날을 고심한 끝에 장선징을 낙점했다.

하지만 아직 나이가 많지 않고 자칫 외척이 득세할 수 있다는 이유로 송시열을 비롯한 산당의 반대가 컸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현은 특유의 뚝심으로 밀어붙여 그를 임명했다.

“이거, 쉬고 계신데 제가 방해를 한 건 아닌지 모르겠군요.”

넉살 좋게 웃으며 장선징이 건네는 말에 만월개는 한쪽 손을 살짝 내저었다.

“아니외다. 자, 이쪽으로 앉으시오.”

“감사합니다.”

이미 대궐에서 얼굴을 보고 통성명을 한 사이였기에 가볍게 인사를 나눈 장선징은 권하는 자리에 앉았다.

방 안은 청의 풍습을 고려해서, 방석을 깔고 바닥에 앉는 것이 아니라 의자와 탁자가 갖춰져 있었다.

조선인 하녀가 차를 내놓고 나가자 만월개는 상대의 반응을 유심히 살피며 용건을 물었다.

“헌데 도승지께서 여기까지는 어쩐 일이시오?”

“하하하, 칙사와 환담을 나누고 북경 이야기도 좀 들으려고 왔지요.”

“그러셨군.”

예상과 다른 말에 만월개가 살짝 실망한 표정을 짓자, 도현을 따라다니며 능구렁이가 다 된 장선징은 한쪽에 있는 청국 하급 관리를 곁눈질하면서 이야기를 했다.

“실은 긴히 드릴 이야기가 있는데…….”

눈치가 빠른 만월개는 하급 관리를 보며 말했다.

“자네는 잠시 나가 있게.”

“예.”

의자에서 일어난 하급 관리가 자리를 피해 주자 방 안에는 만월개와 장선징 둘만 남게 되었다.

“자, 이제 우리 둘뿐이니 용건을 말해 보시오.”

그러자 장선징은 작게 헛기침을 하고는 도현에게 지시받은 대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험, 두 번의 호란 같은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지만, 최근 몇 년간 청과 우리 조선은 아주 좋은 관계를 유지해 왔지 않습니까. 그런데 북방의 조그마한 황무지 때문에 양국의 우의友誼에 금이 가는 것을 주상 전하께서는 안타깝게 여기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우리 황제 폐하의 말씀대로 점령지에서 물러나 국경을 원래대로 되돌리면 될 것 아니오.”

“칙사께서도 청나라 조정에서 중책을 맡고 계시니 그게 쉽지 않다는 건 잘 아시지 않습니까? 솔직히 툭 까놓고 말해 이번 토벌에 저희가 들인 재화에 병사들이 흘린 피와 땀이 땀이니만큼 아무런 소득 없이 물러선다면 그 원망을 다 감당하기 어려울 겁니다.”

미간을 찌푸린 만월개는 앞에 있는 탁자를 손바닥으로 가볍게 탕탕 두드리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결국 절대 물러설 마음이 없다는 거 아니오!”

낮에 있었던 연회와 똑같은 대화가 오갈 것 같자 만월개는 짜증을 냈다.

“주상 전하께서 말씀하셨다시피 청도 조금만 시선을 달리한다면 이익이지 않겠습니까.”

“그런 억지가 어디 있소?”

“그러면 다시는 거란족이 조선 국경을 침범하거나 어지럽히지 않도록 청나라에서 손을 써 주시든지요.”

마음 같아서는 그렇게 하겠다고 시원하게 대답해 주고 싶었지만, 이미 제국의 중심축이 중원으로 옮겨 갔고 만주에 남아 있는 팔기군이라고 해 봤자 고작 오만 남짓이었기에 그 병력으로 드넓은 초원에 흩어져 사는 거란족들을 통제하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설마 거란족이 조선 국왕을 압박하는 데 걸림돌이 될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만월개는 앓는 소리를 내며 얼굴을 구겼다.

“끄으응.”

상대가 곤혹스러워하자 장선징은 가지고 온 비단 보자기를 탁자 위에 올려놓으면서 슬쩍 당근을 던져 주었다.

“이게 뭐요?”

“직접 풀어 보시지요.”

“…….”

잠시 맞은편에 있는 장선징을 물끄러미 쳐다본 만월개는 이내 손을 뻗어 보자기를 싸맨 매듭을 풀었다.

그러자 옻칠이 된 고급 목함 하나가 나왔고, 뚜껑을 열자 안에는 불빛을 받아 번쩍이는 은괴가 가득 들어 있었다.

못해도 수만 냥어치는 되어 보이는 은괴에 만월개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건!”

“칙사께서 돌아가실 때 노잣돈으로 쓰시라고 주상 전하께서 드리는 겁니다.”

말은 그럴듯했지만 만월개한테 주는 뇌물이었다.

평소 같으면 좋다고 냉큼 받아 챙겼겠지만 이번에는 복잡한 일들이 얽혀 있어 선뜻 손을 대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장선징이 은근한 어조로 이야기했다.

“거란족 이야기를 하고 자세한 사정 설명을 하면, 황제 폐하와 섭정께서도 아마 어쩔 수 없는 상황을 이해해 주실 겁니다. 우리 조선은 청과 대립할 마음이 전혀 없다는 것을 아시지 않습니까.”

한참 고심하던 만월개는 결국 욕심을 이기지 못하고 은괴가 든 목함을 가져갔다.

“흠흠, 애써 준비한 성의를 거절하는 건 도리가 아닌 것 같으니, 받도록 하겠소.”

“주상 전하께서도 기뻐하실 겁니다.”

뇌물을 챙긴 만월개는 방금 전보다 확실히 부드러워진 태도를 보였다.

“여기까지 왔는데 아무런 성과도 없이 그냥 빈손으로 돌아간다면 내 체면이 구겨지니, 황제 폐하께 드릴 친서를 하나 써 주셨으면 하오.”

“그게 뭐가 어렵겠습니까. 주상 전하께 말씀을 올려 귀국하실 때 가져가실 수 있도록 해 드리지요.”

“그래 주면 고맙겠소.”

북경에 돌아가서 문책을 피하기 위한 핑곗거리를 하나 마련해 가려는 만월개의 꼼수였다.

사실 뇌물을 받은 것도, 현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겠다는 조선의 의지가 확고한 이상 원하는 대답을 듣기 어려울 것 같으니 돈이라도 챙기자는 생각을 한 것이었다.

두 사람은 그럭저럭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 얼마 뒤 헤어졌다.

만월개는 보름을 더 한양에 머물면서 도현과 다섯 차례 이상 만나 회담을 가졌는데, 여전히 입장 차이를 좁히지는 못했지만 뇌물의 영향인지 연회 때처럼 서로 격하게 대립각을 세우지는 않았다.

실은 자신이 이만큼 노력했다는 것을 청나라 조정과 예친왕한테 보여 주기 위해 면피용으로 가진 만남이니 딱히 성과를 거두지 못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아무튼 그러고 난 뒤 만월개는 서로의 입장 차이만 확인한 후, 도현이 써 준 친서를 가지고 청나라로 돌아갔다.

“칙사는 떠났나?”

도현의 물음에 막 희정당 안으로 들어온 도승지 장선징은 허리를 굽히며 얼른 대답했다.

“예. 마포 나루에서 관선을 타고 떠났사옵니다.”

“아직 넘어야 될 산이 많지만, 일단 칙사가 갔다니 막혀 있던 체증이 내려가는 기분이군.”

“맞사옵니다.”

“그나저나 우리한테는 잘된 일이지만 예친왕의 성격으로 볼 때 불문곡직不問曲直하고 바로 팔기군을 보낼 줄 알았는데, 이거 의외군.”

그러자 왼편에 앉아 있던 이완이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청나라 국내 사정 때문인 것 같사옵니다.”

“자세히 이야기를 해 봐.”

“아직 확실한 것이 아니어서 말씀을 안 드렸는데, 들어오는 보고를 종합해 볼 때 이번 반란으로 각지의 곡물 창고들이 불타거나 약탈당해 재정에 큰 타격을 입었고, 작년 작황마저 좋지 않아 대규모 병력을 오래 유지하기 어려운 상황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 정도로 심각하다는 것인가?”

도현이 눈을 반짝이면서 관심을 보이자 이완은 계속 이야기를 이었다.

“이미 수년 전부터 반란과 전란이 계속 이어지면서 화북 지역의 농경지가 많이 황폐화되어 있는 상태이옵니다. 여기서 파종 전에 빨리 반란 토벌을 끝내지 못한다면 올해 농사마저 망칠 위험이 있으니, 또다시 전쟁을 벌이기는 어려웠던 것 같사옵니다.”

설명을 들은 도현은 손바닥으로 무릎을 쳤다.

“옳거니, 바로 그런 사정이 있었군.”

이제야 평소와 달랐던 청나라의 반응이 모두 이해가 되며 조각이 맞춰졌다.

“아직 완전히 사실로 확인된 것은 아니옵니다.”

“아니, 경의 예상이 맞을 거야. 그게 아니면 예친왕이 이렇게 미적거릴 이유가 하나도 없지. 안 그런가?”

오른편에 앉아 있던 병조판서 임경업은 그가 묻자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주상 전하의 말씀이 옳습니다.”

“뜻밖의 행운이로군.”

“그러게 말이옵니다.”

피식 미소를 짓던 도현은 이내 정색을 하며 말했다.

“하지만 상황이 정리되면 예친왕은 분명 언제고 우릴 치려고 들 테니, 다들 정신 바짝 차리고 만반의 준비를 갖춰야 할 거야.”

“예, 전하.”

“병판.”

“말씀하십시오.”

“신형 조총 생산량을 늘리라는 건 어떻게 됐나?”

“남한산성 병기창에 새로 공장을 하나 더 세우고, 하교하신 대로 분업화를 실행해 이번 달부터 생산에 들어갔사옵니다. 앞으로는 매달 구백 정씩 제작이 가능할 것이옵니다.”

기존 생산량보다 두 배 가까이 늘어난 것이었지만 도현은 썩 만족스럽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그것 가지고는 부족해. 언제 청나라와 전쟁이 터질지 모르는데, 일차적으로 국경을 지켜 내야 될 이 군단의 신형 조총 보급률이 절반도 안 되지 않나.”

“송구하옵니다.”

그의 지적에 군부를 책임지고 있는 병조판서 임경업은 고개를 숙였다.

제철소 가동으로 주재료인 철의 수급을 원활하게 이루고 분업화를 도입해 병기창에 대량 생산 체제를 구축했다지만, 워낙 보급해 줘야 될 곳이 많다 보니 여전히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그동안 국왕군인 근위대를 최우선적으로 무장시킨 뒤 작년부터 각 지방군에 신형 조총을 보급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진행된 북방 토벌을 수행하기 위해서 신형 조총 보급을 일 군단으로 몰아줘 버리는 바람에, 다른 지역은 총병 비율이 일 할도 채 되지 않을 정도로 낮았다.

최소한 심양에 있는 팔기군이 쳐들어오면 제일 처음 맞닥뜨릴 이 군단이라도 완전히 무장시키기 위해 몇 달 전부터 수군이 쓸 화포 생산까지 중단하고 신형 조총 제작에 집중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필요한 수량의 절반도 채우지 못하고 있었다.

“공장을 증설하고 장인을 추가로 뽑아 매달 천 정 이상을 만들어 낼 수 있도록 생산량을 늘리도록 해. 필요한 자금은 봉황상단에 미리 이야기를 해 놓을 테니까 받아서 쓰고.”

“알겠사옵니다.”

“화약 재고는 여유가 있다고 했지?”

“예.”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최대한 많이 생산해 놓으라고 해.”

“그러겠습니다.”

임경업의 대답을 들으면서 시선을 돌린 도현은 이완에게도 지시를 내렸다.

“경은 계속 청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촉각을 곤두세우도록 하게.”

“네.”

“그리고…….”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잠시 말을 끈 도현은, 임경업을 보며 진지한 어투로 입을 열었다.

“내 생각인데 이번에 복속한 거란족을 기병으로 활용하면 어떻겠나?”

뜻밖의 말에 임경업뿐만 아니라 다른 신료들도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거란족 전사들을 말씀이옵니까?”

“그래.”

“아직 복속시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다시 무기를 쥐여 주는 건 너무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저도 그렇게 생각하옵니다. 타고난 기병인 거란족을 활용할 수 있다면 분명 큰 도움이 되겠지만, 지금은 너무 이른 것 같사옵니다.”

신하들 모두가 정색을 하며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지만 도현은 쉽게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경들이 뭘 걱정하는지 짐도 잘 알고 있네. 하지만 청과 전쟁을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그냥 썩혀 두기에는 너무 아까운 패이지 않나.”

“하오나 감수해야 될 위험이 너무 크옵니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복속한 거란족들을 경계하고 배척하며 살 수는 없지 않겠소. 예전에는 적이었지만 이제는 모두 짐이 품어야 될 백성일 뿐이오. 어차피 한 번은 서로 융합되는 진통을 겪어야 할 텐데, 시간을 끌 필요 없이 지금 바로 하는 것이 낫다는 게 내 판단이오.”

“전하…….”

“이게 안 된다면 아무리 백성들을 이주시키고 힘들게 개간을 한다고 해도 발해도를 조선의 영토로 완전히 안착시키는 일은 수십 년이 지나도 요원할 것이오. 그러니 어렵더라도 짐이 지시한 대로 따라 주시오.”

내키지는 않았지만 도현의 말이 백번 옳은 데다 솔직히 잘 훈련된 기병인 거란족 전사들이 탐나기도 했기에 한참을 고심하던 임경업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명에 따르겠나이다.”

“잘 생각했소.”

방 안에 모여 있는 신하들을 천천히 훑어본 도현은 결연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경들의 두 어깨에 조선의 명운이 걸려 있다는 걸 항상 명심하고, 전쟁 준비에 만전을 기하도록 하시오.”

“옛.”

공식적으로 전쟁 준비를 선언하지는 않았지만 도현은 다음 날부터 전시체제로 모든 국정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그런 와중, 도현이 불쑥 잠행을 나가야겠다며 준비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또요?”

이미 심양에 살던 시절부터 도현의 저잣거리 산책에 여러 번 동행한 적 있는 칠현이 그리 되묻자 도현은 혀를 끌끌 찼다.

“야, 누가 들으면 내가 맨날 놀러 다니는 줄 알겠다. 이번에는 중요한 일을 앞두고 있으니 그 전에 백성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민심을 살피러 가는 거야.”

“매일 올라오는 상소문을 읽는 것도 벅차시다면서요.”

“백문이 불여일견!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체감을 해 봐야 그게 진정으로 민심을 살피는 것이지.”

훗훗훗 하면서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손가락을 까딱거린 도현은 얼른 옷을 갈아입고 오라며 칠현을 재촉했다.

왕과 내시에서 젊은 선비와 시종으로 순식간에 둔갑한 두 사람은, 오늘 하루 호위를 할 김덕술과 박태철을 데리고 당당하게 정문을 통과해 궁궐을 벗어났다.

“음, 감개무량하구나.”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몇 년 전만 해도 도둑놈처럼 개구멍을 통해 몰래 빠져나왔는데, 지금은 이렇게 훤한 대낮에도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으니 참으로 감격스러운 일이 아니냐.”

말을 끝맺은 뒤 도현은 양팔을 활짝 벌리고 서서는 햇볕을 쬐는 시늉을 했다.

주변을 지나다니던 행인들이 그 모습을 보고 키득거리자, 칠현은 남부끄럽다며 도현의 소매를 끌어당겼다.

“전하, 길 한가운데에 가만히 서 있는 것도 이상한 일이니 얼른 자리를 뜨시지요.”

“음, 근데 어디로 가지?”

“설마 행선지도 정하지 않으신 겁니까.”

“뭐? 인마, 내가 그렇게 계획 없이 사는 놈처럼 보여!”

버럭 소리치긴 했지만 솔직히 그냥 밖에 나와 저잣거리를 어슬렁거리다 보면 뭐라도 들리고 보이는 게 있겠지, 하고 막연하게만 생각했던 도현은 내심 당황했다.

“이, 일단 시전에 가 보자.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에 가야 민심을 잘 알 수 있겠지.”

“알겠습니다.”

그렇게 칠현을 앞세운 도현은 얼마 가지 않아 인파로 북적이는 거리를 보고 금세 기분이 좋아진 듯 싱글거렸다.

한쪽에는 포목점과 어물전, 그릇 가게 등 크고 작은 상점들이 길게 늘어서 있었고, 그 반대편에는 벽을 따라 보따리 상인들과 아낙들이 바닥에 보자기를 깔고 노점을 벌이고 있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모습이었지만, 도현에 의해 금난전권이 완전히 폐지되면서 생겨난 풍경이었다.

난전이 허용되면 매출이 급감할 거라는 상인들의 우려와 달리 판매하는 물건의 수량과 종류가 많아지면서 오히려 시전을 찾는 사람들이 늘어 상부상조하니, 예전보다 장사가 더 잘되고 있었다.

마침 시기가 봄이기도 해서 새로이 옷을 장만하려는 아낙네들은 포목점 주위에 둘러 모여 옷감을 고르고 있었고, 다른 한쪽에서는 동네 아이들이 고사리손으로 엿을 쭉쭉 빨아먹으며 재잘대고 있는 것을 보기만 해도 활기찬 기운이 느껴졌다.

“왠지 몰라보게 변한 것 같구나.”

“그야 전하께서 등극하신 이후 계속 선정을 베푸시고 상업을 장려하신 덕분 아니겠습니까. 상인의 출입이 잦아진 덕분에 성문을 지키는 병사들은 일거리가 더 늘어났다고 푸념하고 있긴 하지만 말입니다.”

“그래? 나중에 그쪽에 인원을 더 보충하라고 해야겠군. 그리고 행여나 누가 들을 수 있으니까 말을 조심해.”

“예.”

살짝 타박을 주었지만 어찌 됐든 백성들이 잘 살고 있다는 이야기에 흡족한 표정을 지은 도현은 칠현을 돌아보며 말했다.

“출출한데 뭐라도 먹고 갈까?”

“그럼 저기 주막에 가서 국밥을 드시는 게 어떠십니까?”

“난 그냥 엿이나 약과 같은 거라도 괜찮은데.”

“전 아니, 나으리, 옛날이라면 모를까 어린아이처럼 길거리에서 뭘 먹는 건 이제 자제하셔야지요.”

한숨을 푹푹 쉬며 도리질을 치는 칠현의 모습에 도현은 발끈해 손을 들어 올렸다가 끄응 하고 겨우 눌러 참았다.

“으이구. 내가 밖이라서 참는다, 참아!”

뚱하니 토라진 도현은 마침 바로 눈앞에 있는 주막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가 비어 있는 평상에 앉았다.

“아유, 어서 오세요.”

앞치마로 물 묻은 손을 닦으며 머리를 둥글게 말아서 틀어 올린 주모가 반갑게 맞이하자 칠현이 손가락 두 개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주모, 여기 국밥 두 그릇 좀 말아 주시오.”

“네에.”

“막걸리도 한 병 가져다 달라고 해.”

“낮술을 하시게요?”

“너 같은 꼴통이랑 같이 다니는데 술이 없으면 되겠냐. 아니면 화병이 나서 벌써 드러눕고도 남았어.”

도현은 삐딱한 자세로 팔짱을 끼고 찬물을 벌컥 들이켰다.

그러는 사이에 호위로 따라온 두 사람은 마치 다른 일행인 것처럼 약간 늦게 들어와 조금 떨어진 자리에 앉았다.

“따끈한 국밥 두 그릇 대령했습니다~! 젊은 선비님께서 시키신 막걸리도 여기 가져왔어요. 우리 주막 음식 맛은 이 근방에서도 알아주니 입맛에 딱 맞을 거예요, 호호.”

“고맙네.”

도현은 자화자찬하는 주모를 대충 보내 놓고 대접에 직접 술을 따라 쭈욱 들이켰다.

“크으~ 좋다.”

“조선 팔도의 명주란 명주는 다 드실 수 있으신 분이, 이런 시장 한구석에서 파는 막걸리가 그리도 좋으십니까?”

“마, 암만 좋은 거라도 계속 먹으면 질리는 거야. 가끔은 이렇게 거친 술맛이 그리울 때가 있는 법이거든.”

막걸리를 홀짝거리던 도현이 이제 슬슬 먹어 볼까 하며 숟가락을 드는데 주막 입구에 때가 꼬질꼬질한 아이들 둘이 쭈뼛거리는 기색으로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웬 애들이지?”

“아,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계속 요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던데요. 새끼 거지인가 했는데 그건 또 아닌가 보네요.”

두 사람이 이야기 하는 사이 한창 바쁘게 일하고 있던 주모는 곁에 온 아이들을 눈치채고 푸욱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고, 또 하루 종일 배를 곯은 게야?”

“네…… 죄송한데 아주머니, 팔다 남은 음식이라도 좀 주시면 안 될까요?”

“그거야 어렵진 않다만, 너희들도 무슨 수를 내야지. 계속 이렇게 살 수는 없잖아.”

주모는 잘 아는 사이인지 아이들이 손에 든 작은 바가지에 누룽지와 반찬 몇 가지를 담아 주며 종알종알 잔소리를 해 댔다.

형이 말없이 입술만 잘근잘근 씹고 있는 동안, 아직 열 살도 채 안 되어 보이는 어린 동생은 그저 옆에서 멀뚱하니 서 있다가 형이 꾸벅 인사를 하자 따라서 고개를 숙이고는 종종 걸음으로 주막을 나갔다.

“쯧쯧…… 불쌍한 것들 같으니라고.”

“주모, 저 아이들이 대체 뉘 집 자식인데 그러오?”

호기심이 동한 도현이 묻자 주모는 마침 입이 근질근질하던 차에 잘되었다는 듯 수다 보따리를 풀었다.

“말도 마셔요. 저기 산 아래 외진 곳에 사는 애들인데, 지난겨울에 고뿔이 심하게 걸린 어르신이 돌아가시는 바람에 하루아침에 천애고아가 되었다우.”

“어머니는?”

“그분이야 십 년도 더 전에 막내를 낳다가 그만 난산으로 돌아가셨지요.”

“허어, 그럼 애들을 맡아 줄 일가친척이 아무도 없단 말인가?”

“사촌의 사촌쯤 되는 먼 친척이 있다고 하는데 연락이 닿아야 말이지요. 게다가 누가 둘씩이나 되는 애들을 냉큼 받아 주겠어요, 다들 제 앞가림하기 바쁜데.”

주모는 아예 평상 위에 퍼질러 앉아 딱하다며 무릎을 두드렸다.

“그나마 형이란 아이는 어느 정도 컸으니 남의 집 하인 일이라도 하면 밥은 먹고 살 텐데, 또 그건 싫다고 합디다.”

“왜?”

“그야 원래는 뼈대 있는 양반 가문이었으니 자존심이 허락하질 않는 거겠죠. 하긴 양반이라고 해도 삼대가 내리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고 집안 재산만 까먹는 바람에 저 지경이 되었지만. 게다가 돌아가신 어르신이 얼마나 꼬장꼬장한 성격이었는지 겨울에 땔감 살 돈도 없어 벌벌 떨면서도 아침부터 밤까지 공자 왈 맹자 왈 글줄만 외우고 있지 않았겠어요. 아무튼 양반님네들 하고는…… 아니, 배가 고픈 게 먼저지 책을 읽는 게 대순가?”

자기 일처럼 화를 내던 주모는 선비 차림을 하고 있는 도현이 쓴웃음을 짓는 것을 보고 냉큼 손으로 입을 가렸다.

“어머나, 나도 주책이지. 미안해요.”

“아니오. 너무 신경 쓰지 마시게.”

그래도 내심 찔렸는지 주모는 할 일이 있다며 도망치듯 황급히 자리를 떴고, 도현은 벗어 놓은 신발을 도로 주워 신고 일어섰다.

“어디 가시게요?”

“아까 그 아이들이 산다는 곳으로 한번 가 보게. 딱한 사정을 들은 이상 가만히 있을 순 없잖아. 얼른 따라와.”

“자, 잠깐만요! 시켜 놓은 국밥은 다 먹고 가야죠.”

아직 반도 채 먹지 못한 국밥을 허겁지겁 입에 밀어 넣은 칠현은 벌써 저만치까지 간 도현의 뒤를 헐레벌떡 쫓았다.

주모에게 들은 대로 산 아래 외진 곳, 큰 소나무가 입구에 서 있는 낡은 초가집을 찾으니 이미 동냥을 끝내고 돌아왔는지 아이들이 마루에 앉아 밥을 먹고 있었다.

“형아, 이거 꼭 거지들이 먹는 밥 같다. 그치?”

아직 어려 자신들이 처한 처지를 잘 모르는 동생이 해맑게 웃자 형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말했다.

“어쩔 수 없잖아. 수저도 그릇도 돈이 될 법한 건 모두 아버지 장례식 치른다고 팔아 버렸으니.”

그러고 나서 형은 동생의 둥근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먹을 수 있을 때 많이 먹어 둬. 주막 아주머니도 지금은 사정이 좀 나아서 이렇게 남는 밥이라도 주시지만, 나중엔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응.”

자신은 먹을 것에 손도 대지 않은 채 동생이 먼저 먹게 양보한 형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아버님 장례는 어찌어찌 치르긴 했지만, 비석을 세우지 못한 게 마음에 걸리는구나. 작은 것이라도 하나 세워 놓아야 나중에 성묘도 하러 갈 수 있을 텐데.”

“그건 돈 많이 들어, 형아?”

“응. 저기 아랫동네에 사는 석 씨 아저씨한테 물어보니까 스무 냥도 넘게 있어야 된다고 하더라고.”

“우와, 그렇게나 많이?”

“돈이 생긴다고 해도 배움이 짧아서 아버지 묘비에 비문 한 줄 쓸 수가 없으니…….”

형의 얼굴에 근심 걱정이 가득하자 동생도 저절로 밥맛이 떨어졌는지 울상을 지었다.

“그럼 내가 그 비문이라는 것을 써 주마.”

꼬맹이들의 대화를 담벼락에 숨어 엿듣고 있던 도현은 칠현이 말릴 새도 없이 벌떡 일어나 말했다.

“저, 전하 아니, 나으리!”

기겁한 표정으로 칠현이 뒤에서 팔을 뻗었지만 도현은 이미 마루까지 걸어가 아이들 앞에 섰다.

“누, 누구세요?”

“나? 뭐…… 오지랖 넓은 선비라고 생각해라. 그것보다 듣자 하니 너희들 사정이 딱하게 된 것 같은데, 내가 좀 도와주마.”

“괜찮습니다. 그냥 가던 길 가시지요.”

척 봐도 수상한 사람 같았는지, 형은 약간 경계하는 눈빛으로 공손하지만 단호하게 거절하며 동생 앞을 가로막고 섰다.

동생을 지키겠다는 그 기개가 제법 용감하여, 도현은 기분이 상하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맘에 들었다.

“공짜로 비문을 써 주겠다는데 왜 싫다는 거냐?”

“양반 가문의 비문은 아무나 함부로 쓰는 것이 아닙니다.”

“오호라, 그렇다면 내 서예 실력이 성에 안 찰까 봐 싫다는 게로군. 칠현아!”

“예에.”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도현을 말리기에는 벌써 늦었다는 것을 안 칠현이 다 포기한 표정으로 담벼락에서 나와 대답했다.

“가서 종이를 구해 오너라.”

“붓이랑, 다른 거는요?”

“그건 이 아이들이 가지고 있을 거다. 그렇지?”

“그걸 어떻게…….”

“아무리 돈 되는 건 다 팔았다 해도, 아직 양반 운운하면서 체면을 차리는 걸 보면 그 정도는 남겨 두었겠지.”

놀란 표정을 하고 있던 형은 속내를 들킨 듯 얼굴을 붉히고서 방으로 들어가 낡은 붓과 벼루를 가지고 왔다.

칠현이 종이를 구해 오는 동안 도현은 느긋하게 먹물을 갈면서 아이들에게 말을 걸었다.

“비석을 무사히 세우게 되면 그 뒤는 어떻게 할 생각이냐? 신변을 맡아 줄 친척도 하나 없다면서.”

“……어떻게든 먹고살 길이야 있겠지요.”

“그럼 공부는? 아비가 선비였으니 천자문 정도는 가르쳐 줬겠지.”

“그게…… 아버지께서 몸이 아프셔서.”

“하긴 천자문을 안다면 비문을 쓰지 못해 푸념을 하고 있지는 않았겠지. 그리고 형편도 적잖이 어려웠다니 어쩔 수 없었겠구나.”

그러자 형은 분한 듯 인상을 찡그렸다.

“아니요! 절대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어떻게든 공부를 해서 과거에 급제하여 우리 가문을 다시 일으키고 말 것입니다.”

“하하, 그래?”

‘조그만 것이 제법 사내다운 근성이 있군그래.’라고 생각하며 도현이 속으로 흐뭇해하고 있는데 마침 심부름에서 돌아온 칠현이 숨을 몰아쉬며 종이를 내밀었다.

“여, 여기 있습니다. 헉, 헉.”

“그러게 운동 좀 하라고 그랬잖아. 꼴좋다.”

아까의 복수를 하듯 흥 하고 코웃음을 친 도현은 마룻바닥에 종이를 펼치고 붓을 들어 일필휘지로 단숨에 써 내려갔다.

도현이 쓴 것은 논어의 한 구절로, 웬만큼 공부를 한 양반이라면 모두가 다 알 정도로 잘 알려진 문구였지만 중요한 것은 그 내용을 품은 서체였다.

힘 있고 웅장하면서도 획수 하나하나에 패기가 넘쳤고, 막힘없이 흐르는 문장을 보고 있노라면 유려함마저 느껴졌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의 눈에도 도현의 서체가 대단하게 보였는지, 불신이 가득한 눈길로 바라보던 형의 눈빛에는 어느새 외경심이 어렸고 동생은 우와 하며 입을 쩍 벌렸다.

“아저씨, 멋져요! 우리 동네 서당 훈장님도 이렇게 잘 쓰지는 못하는데.”

“오냐. 이 몸이 대단하신 분이라는 걸 이제 알겠지?”

어깨를 으쓱이며 자랑을 하고 있는데, 형은 도현이 쓴 것을 뚫어져라 쳐다보다 이내 재빨리 자세를 바꿔 마루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제가 귀인을 몰라 뵈었습니다. 어떤 분이신지 감히 성함을 여쭤 봐도 될까요?”

“그러니까, 그냥 지나가던 선비라 하지 않았느냐.”

도현은 크흠 헛기침을 하고서 두 아이를 향해 말했다.

“이제 내가 너희들 아버님 비문을 써 주는 데 이의는 없겠지?”

“네.”

“와아!”

기뻐하는 아이들의 표정에 도현도 흡족한 듯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한바탕 소동이 끝난 후, 낡은 초가집을 뒤로하고 천천히 길을 내려오는 도현의 곁에서 칠현이 슬쩍 물음을 던졌다.

“전하, 이제 어찌하실 겁니까? 나중에 저 아이들이 진실을 알면 뒤로 놀라 자빠질 텐데요.”

“뭐, 큰일이야 있겠어? 나쁜 짓을 한 것도 아닌데. 그건 그렇고, 둘 중에 형 쪽이 제법 쓸 만한 자질을 가지고 있던데. 잘만 키우면 나중에 볼 수도 있겠어.”

“설마요. 끼니도 제대로 못 챙겨 먹는 판국에 공부를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러니까 대충 먹고살 수는 있게 뒤에서 몰래 챙겨 줘야지.”

“네에?”

“아, 절대로 내 정체가 드러나게 해선 안 된다. 알겠지?”

“왜 또 저한테 이러십니까? 판은 전하께서 벌리시고 귀찮은 뒷일은 다 제 몫입니까요?”

“억울하면 내시 관두든가.”

도현은 울상을 짓는 칠현을 뒤로하고 휘휘 휘파람을 불면서 발걸음도 가볍게 돌아가는 길을 재촉했다.

대궐로 돌아온 도현은 복수도 좋고 고토 회복도 중요하지만 먼저 어려움에 처한 백성들을 구휼하고 돌보는 것이 우선이라는 생각에, 다음 날 대전 회의에서 굶주리는 사람이 없게 전국에 구제소를 설치해 밥을 나눠 주고 아픈 이를 치료해 주도록 조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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