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오르는 전쟁의 불길
“이게 뭔가?”
남해도 정벌 때 민간 상단에서 보유한 선박을 이용해 보급문제를 해결하자는 의견을 내서 도현의 눈에 띄어 진급을 거듭해 정사품 군호가 된 고만정은, 그가 고개를 들며 묻자 약간 긴장한 얼굴로 대답했다.
“청국과의 전쟁에 대비해서 예상 진격로에 위치한 요새와 성을 보수한다는 계획서이옵니다.”
그러자 도현은 두루마리로 된 보고서를 서탁 위에 탁 내려놓고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비변사에서 뭘 좀 착각하고 있는 모양이군.”
“예? 무슨 말씀이신지…….”
“요새와 성을 보수하는 건 수세적으로 방어를 할 때 필요한 것 아닌가?”
“그렇지요.”
“지난번에도 분명히 이야기를 했지만 나는 조선 땅에서 청나라 팔기군과 싸울 생각이 전혀 없어.”
“그럼…….”
“압록강에서 끝장을 봐야지. 그리고 곧장 심양성을 함락시켜, 청이 화북 지역에 있는 주력을 끌고 오기 전에 만주 일대를 장악해 버려야 되지 않겠어.”
단순히 침략해 올 팔기군을 격퇴하는 것을 넘어 정말로 만주를 염두에 두고 있다는 사실에, 고만정은 놀라면서도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그러니까 이건 필요가 없겠지.”
“예.”
“그리고 아직은 살아 있는 명을 무시할 수 없어 우리 쪽에 모든 힘을 다 쓸 수 없고 최대한 빨리 전쟁을 끝내야 될 테니, 지난 병자호란 때 그랬던 것처럼 압록강에서 한양까지 산재해 있는 성과 요새는 그냥 무시해 버리고 곧장 남하하는 것을 택할 가능성이 클 거야.”
“신의 생각이 짧았사옵니다.”
두루마리를 대충 접어서 돌려준 도현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이건 가져가고, 대신 심양성까지 어떻게 하면 신속하게 진격할 수 있을지 새로 계획을 세워 보도록 해.”
“알겠사옵니다.”
“그럼 더 할 말 없으면 나가 봐.”
“예, 전하.”
자리에서 일어난 고만정은 깊이 허리를 숙였다가 펴고는 뒷걸음질로 조심스럽게 희정당을 나갔다.
그러자 한쪽에 조용히 시립해 있던 칠현이 그를 보며 입을 열었다.
“전하.”
“왜?”
“정말 심양을 노리시는 겁니까?”
“당연하지. 그러면 나라의 존망을 건 싸움을 벌이면서 고작 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는 것에 만족할 줄 알았어?”
핀잔을 주듯 도현이 말하자 칠현은 걱정이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은 북경으로 천도를 했다지만 그래도 황궁이 그대로 남아 있고, 도독부를 두고 중히 여기는 곳인데 자칫 청과 사생결단을 내야 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습니다.”
너무 과한 욕심을 부리는 건 아닌지 우려하는 칠현과 달리 도현은 의외로 평온한 얼굴을 하고는 서탁 위에 놓인 찻잔을 들어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이야기를 했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어. 방어에 성공하고 우리가 굴욕적인 사대 관계를 끊는 걸로 전쟁을 끝내자고 해도 청나라가 아니, 예친왕이 순순히 받아들일 것 같아?”
“그건…….”
“아마 불같이 화를 내며 끝장을 보려고 들겠지. 그렇다면 아예 먼저 선수를 치고 들어가 상대의 날개를 꺾어 버리고, 확실하게 기선을 제압한 상태에서 협상을 하는 것이 낫지 않겠어?”
“…….”
“그리고 앞으로 우리 조선이 좁은 한반도에서 벗어나 하늘 위로 높이 날아오르기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일이야.”
항상 가장 가까운 곳에서 도현을 보좌하고 있었기에, 그가 얼마나 큰 야망을 마음속에 품고 있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칠현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전하께서는 꼭 원하시는 것을 이루실 겁니다.”
“고맙다.”
칠현의 응원에 도현은 입가에 살포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비변사에서는 도현의 지시에 따라 추진하려던 수세적 방어 계획을 전면 보류하고, 팔기군의 침입을 저지한 후 곧바로 반격을 가해 심양을 비롯한 주요 거점을 신속하게 장악하는 방안을 연구했다.
이렇게 총력을 기울여서 전쟁 대비를 하고 있을 때 뜻밖의 문제가 발생했다.
“전하, 봉황상단 총관께서 오셨사옵니다.”
“들라 하라.”
문이 열리자 안으로 걸어 들어와 꾸벅 허리를 굽히는 장 총관을 보며 도현은 반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어서 오게. 꽤 오랜만에 보는 것 같은데, 요즘 상단 일이 바쁜 모양이지?”
“자주 찾아뵈었어야 하는데, 송구하옵니다.”
“아니야. 그것보다 정기 보고를 하는 날도 아닌데 오늘은 무슨 일인가?”
그러자 바로 이야기를 못 하고 머뭇거리던 장 총관은 약간 굳은 얼굴로 어렵게 용건을 꺼냈다.
“실은 전하께 보고드릴 일이 하나 있어서 찾아왔사옵니다.”
“흐음, 이거 장 총관이 정색을 하면서 말하니까 괜히 긴장되는데? 그래, 뭔지 이야기를 해 봐.”
“며칠 있다가 이번 분기 결산 보고를 할 것입니다만, 상단 자금이 위험할 정도로 빠르게 감소하고 있습니다.”
“……!”
봉황상단은 단순히 도현이 소유한 어용상단을 넘어 각종 개혁 정책을 추진하는 데 필요한 재원 상당액을 떠맡고 있는 곳이었기에, 여기가 흔들린다는 건 엄청난 후폭풍을 불러올 수 있는 일이었다.
순식간에 표정이 딱딱하게 경직된 도현은 다그치듯 물었다.
“얼마 전에 연간 수입이 백만 냥을 넘겼다는 보고를 받았는데, 돈이 없다니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돈이 없는 게 아니오라 여유 자금이 빠르게 소진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게 그거 아냐.”
얼마나 충격인지 웬만해서는 절대 동요를 보이지 않는 도현이 살짝 평정심을 잃은 모습을 보였다.
“이번 달까지 십오만 냥의 적자가 발생했습니다.”
“내가 알고 있기로 기존에 취급하던 소금뿐만 아니라 비누도 없어서 못 팔 정도로 인기라고 하던데, 적자가 생긴 이유가 뭐야?”
“실은 상단 자체로는 꾸준히 이익 폭이 커지고 있습니다만, 다른 쪽으로 새어 나가는 돈이 너무 커서 이익을 모두 상쇄해 버리고 오히려 적자가 나고 있는 상황입니다.”
장 총관의 말에 도현은 뭔가 짐작되는 것이 있는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혹시 내가 개인적으로 지시를 내린 일 때문에 그런 거야?”
“송구스럽습니다만 맞사옵니다.”
“으음.”
낮게 침음을 흘린 도현은 계속 이야기를 하라는 듯이 한쪽 손을 까딱였다.
“지금까지는 그럭저럭 수익을 맞출 수 있었지만 얼마 전에 있었던 북방 정벌에 많은 전비가 쓰였고 최근 몇 달 사이에 급격히 늘어난 지출까지, 그동안 쌓아 둔 여유 자금마저 꺼내 써야 될 지경입니다.”
충분히 하소연을 할 만한 상황이기도 한 것이, 이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도 아니고 아무리 이윤을 내도 그가 계속 대형 사업을 벌여 자금을 써 대니 오히려 지금까지 적자를 내지 않고 상단을 운영해 온 것이 대단할 지경이었다.
“무슨 이야기인지 알겠어. 하지만 지금은 비상시국이고, 봉황상단은 다른 상단과 달리 금전적인 이익만 추구해서는 안 되는 입장이니까 손해가 나더라도 당분간은 감수하자고.”
“왕실과 국가를 위해 일해야 된다는 건 신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상태라면 앞으로 석 달을 넘기지 못하고 여유 자금마저 다 바닥이 날 것이 분명하니 상단을 계속 유지하려면 뭔가 특단의 조치가 필요합니다.”
“여유 자금이 꽤 되는 걸로 아는데 그것으로도 부족하단 말인가?”
도현의 물음에 장 총관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달에만 추가로 군부에 지원해야 되는 돈이 이십만 냥입니다.”
“뭐가 그렇게…… 끄으응.”
무슨 돈이 그렇게 많이 들어 가냐고 반문하려던 도현은 얼마 전에 신형 조총 보급을 위해 병기창의 규모와 인원을 대폭 늘리라고 지시한 것을 떠올리고는, 말문이 막힌 채 자신도 모르게 앓는 소리를 내뱉었다.
당연한 이야기였지만 결국 봉황상단이 적자가 난 모든 원인은 도현이 제공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도 할 말은 있었다.
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 나라와 백성들을 위해 쓴 것이 아닌가.
“지금 한창 채굴 중인 금광과 은광이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고액 화폐 유통을 시작하면 어느 정도 숨통이 트일 텐데, 그때까지만 어떻게 버틸 방법이 없을까?”
“거래를 할 때 어음으로 하고 독점권을 가진 소금 판매를 담보로 돈을 차용한다면 빠듯하게 버틸 수는 있을 겁니다.”
“그럼 그렇게 하게.”
“그렇지만 이 방법을 쓰면 심각한 부작용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부작용이라는 말에 도현은 살짝 눈가를 찡그렸다.
“그게 뭐지?”
“봉황상단의 주인이 주상 전하라는 건 이제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인데, 자금이 부족해 어음을 쓰고 빚을 낸다는 소문이 퍼진다면 자칫 엉뚱한 오해를 불러일으켜서 경제에 큰 혼란이 올 수도 있습니다.”
과장된 것이 아니라 경제 개혁과 발전을 주도하는 곳이 바로 봉황상단이었기에, 여기가 흔들린다면 다른 상단들에게까지 연쇄적으로 영향을 주며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다.
이건 하루가 다르게 상권이 커지며 성장하고 있는 조선 경제에 치명타였는데, 이런 식으로 신뢰를 잃게 되면 다시 회복하기가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최악의 경우 그가 의욕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경제 개혁에 모두 제동이 걸릴 수도 있는 심각한 문제였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도현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절대 그런 일이 생겨서는 안 돼.”
“그래서 신도 처음에 말씀을 드리지 않은 겁니다.”
“골치 아프게 됐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정말 답답한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한쪽 손가락으로 서탁을 두드리면서 한참을 고심하던 도현은 뭔가 해결책이 떠올랐는지 무릎을 치며 탄성을 내뱉었다.
“그래! 그게 있었어.”
“좋은 방법이라도 생각나셨습니까?”
“결국 돈만 있으면 해결되는 거잖아.”
“그렇지요.”
“웅도 비고에 있는 보물을 꺼내 쓰도록 하세.”
“전하, 그건!”
깜짝 놀란 장 총관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도현을 봤다.
웅도 비고는 예전 심양 관저 시절에 북경이 함락 위기에 놓이자, 숭정제가 급히 피난을 떠나면서 강남으로 옮기려던 황실 보물을 도현이 중간에 가로채 놓은 것이었다.
태조 주원장 때부터 쌓아 온 보물이라 규모가 엄청났는데, 초반에 봉황상단을 만들고 이런저런 일을 벌이며 꽤 많은 금액을 썼지만 그래도 아직 채 반도 쓰지 못하고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건 전하의 비자금이온데…….”
“그러니까 이럴 때 써야지. 아무리 금은보화를 쌓아 두고 있어도 그냥 놔두기만 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어.”
보통은 충분히 부유해도 더 많은 걸 가지려고 하는 것이 사람의 본성인데, 다른 왕들과 달리 재물에 초연한 도현의 태도에 장 총관은 내심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비고를 열어 주신다면 자금 문제는 쉽게 해결될 겁니다.”
“귀물들이 많은데 처분이 어렵지 않겠나?”
그러자 장 총관은 자신만만한 얼굴로 대답했다.
“자고로 그런 물건들은 공급보다 수요가 훨씬 많은 법이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조선 내에서 다 처분하기 힘들면 명나라나 왜국에 가져가 팔면 되니 모두 충분히 제값을 받아 낼 수 있을 겁니다.”
“그러면 되겠군. 아무튼 장 총관이 알아서 잘 처리하게.”
“예.”
한편 조선을 혼내 주는 대신 토벌을 선택한 예친왕은 병력을 총동원해서 반란 세력을 거세게 몰아붙였다.
자신의 발목을 잡은 것을 화풀이라도 하듯 예친왕은 무자비하게 반란군을 처단했는데, 포로는 물론이고 조금이라도 반란 세력에 협조한 마을은 통째로 몰살시켜 다시는 감히 청 조정에 대항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도록 아예 싹을 뽑아 버렸다.
그렇게 살벌한 방식으로 토벌을 벌였지만 반란군의 저항도 만만치 않아, 결국 파종 시기를 놓치고 한여름이 되어서야 화북 지역을 완전히 평정할 수 있었다.
예친왕이 북경으로 개선해 돌아왔을 때, 자금성에서는 어린 황제가 그를 맞이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섭정왕 전하께서 드십니다.”
내관이 고하는 목소리와 함께 갑옷을 입은 예친왕이 묵직한 발걸음으로 성큼성큼 대전을 걸어 들어왔다.
황제만이 앉을 수 있는 옥좌에는 곤룡포를 입은 순치제가 긴장된 표정을 하고 있었는데, 솜털도 채 가시지 않은 앳된 얼굴과 체구에 비해 마치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듯 그가 앉은 옥좌가 너무나 버거워 보였다.
“어서 오십시오, 숙부.”
순치제가 약간 겁먹은 얼굴로 먼저 말을 건네자 예친왕은 자리에 멈춰 서서 고개를 살짝 숙였다.
“신, 토벌을 마치고 돌아왔사옵니다.”
말투는 정중했으나 일부 노대신들은 그런 예친왕을 보고 분한 듯 눈썹을 파르르 떨었다.
아무리 사적으로는 조카와 숙부 관계라고 해도 황제의 신하인 이상 대전에서는 무릎을 꿇는 예를 취해야 마땅한데, 고개만 까딱 숙이는 걸로 끝내 버리니 선대부터 황제를 모셔 온 대신들로서는 그 오만방자함에 피가 거꾸로 솟을 지경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예친왕의 권세가 너무도 막강해, 감히 아무도 그에게 대적하지 못하고 어색한 기운이 감도는 가운데 순치제가 이야기를 했다.
“수고하셨습니다.”
“예.”
미리 외워 둔 연극 대사를 읊는 것처럼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대화가 끝나고 난 뒤, 다시 고개를 숙여 순치제에게 인사한 예친왕은 몸을 뒤로 확 돌려 대신들을 쓸어 보고는 입을 열었다.
“그건 그렇고.”
예친왕의 형형한 눈빛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된 대신들은 순간 그의 기세에 못 이겨 몸을 움찔거렸다.
“반란 세력이 준동할 때까지 대신들은 대체 뭘 하고 있었던 것이오!”
황제가 앞에 있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마치 자신이 자금성의 주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호통을 치자, 대신들은 반감이 들었지만 누구 하나 감히 나서 따지지 못하고 그저 고개만 숙였다.
“왜 말들이 없소! 고작 반란군 따위를 토벌하지 못해 강남까지 내려간 날 다시 회군하게 만들다니 이래 가지고 어찌 뒤를 믿고 맡길 수 있겠소.”
“…….”
꿀 먹은 벙어리처럼 대신들이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가운데 예친왕은 왼편에 서서 유독 안절부절못하는 신하를 지그시 쳐다보며 말했다.
“직례 안찰사!”
“예, 옛. 섭정 전하.”
말을 더듬으며 상대가 황급히 대답하자 예친왕은 날카로운 어투로 쏘아붙였다.
“치안을 책임진 안찰사가 되어서 반란군을 조기에 토벌하기는커녕 오히려 제대로 된 대처를 못 해 자금성까지 위험하게 한 죄를 인정하는가!”
“그, 그건…… 워낙 불시에 그리고 동시다발적으로 반란이 일어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었습니다.”
“듣기 싫다! 죄를 인정하고 뉘우쳐도 부족할 판에 비겁하게 변명이나 늘어놓다니 더 용서할 수 없군.”
“전하.”
“저놈의 벼슬을 빼앗고 당장 금부 감옥에 가둔 뒤, 황제 폐하께 지은 죄를 목숨으로 씻도록 하라!”
삭탈관직을 한 뒤 멀리 외딴 곳으로 귀향을 보낼 줄 알았던 대신들은, 예친왕이 극형을 언도하자 다들 놀란 표정을 지으며 크게 술렁였다.
하얗게 얼굴이 질린 직례 안찰사는 털썩 바닥에 엎드려 용서를 구했다.
“제발 살려 주십시오, 전하.”
하지만 예친왕은 콧방귀를 끼고는 한쪽에 시립해 있는 금의위를 보며 차갑게 말했다.
“흥, 뭣들 하느냐! 이놈을 빨리 끌어내지 않고.”
“옛.”
우렁찬 대답과 함께 앞으로 나온 금의위들은, 엎드려 사정을 하는 직례 안찰사의 양팔을 붙잡고 강제로 끌고 나갔다.
“이거 놔라!”
“좋게 말할 때 따라오시오.”
“폐하! 황제 폐하, 살려 주시옵소서!”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직례 안찰사가 황좌에 앉아 있는 순치제를 바라보며 간절히 애원했다.
하지만 어린 순치제는 이 상황이 그저 무섭고 숙부인 예친왕이 두려운지, 창백해진 얼굴로 직례 안찰사의 시선을 외면해 버렸다.
대전에 모여 있는 대신들도 마찬가지였는데 감히 황제 앞에서 언성을 높이며 고위 관리를 마음대로 처벌하는 것에 반감이 들었지만, 괜히 나섰다가 불똥이 튈까 봐 마음속으로만 분해할 뿐 함부로 입을 열지 못했다.
“흑흑, 폐하!”
결국 모두가 시선을 피하는 가운데 직례 안찰사는 비참한 모습으로 금의위들에게 질질 끌려 대전을 나갔다.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은 대전 안은 숨소리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정막이 감돌았다.
혹시 시선이라도 마주칠까 봐 머리를 푹 숙인 채 눈치만 보고 있는 대신들을 스윽 쓸어 본 예친왕은 날선 목소리로 경고했다.
“또다시 이런 일이 벌어지면 그때는 모두에게 책임을 물을 테니, 알아서들 하시오.”
“…….”
“왜 대답이 없나!”
예친왕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버럭 고함을 내지르자 대신들은 얼른 허리를 숙이면서 대답했다.
“예.”
“그리하겠습니다.”
“어디 두고 보겠소.”
거만한 태도로 말을 툭 내뱉은 예친왕은 건성으로 순치제에게 고개를 까닥이고는 성큼성큼 대전을 나갔다.
그런 예친왕의 뒷모습을 보며 대신들은 크게 한숨을 내뱉으며 한탄했다.
“말세로고.”
“나라가 어찌 되려고 이러는지…….”
“그러게 말이외다.”
이렇게 예친왕의 횡포를 개탄하면서도 아무도 공개적으로 잘못을 지적하지 못하고 그저 뒤에서 수군거리기만 했다.
한편 예친왕의 이런 행동은 입소문을 타고 태후가 머무는 후궁 깊숙한 곳까지 전해졌다.
“마마, 정 태감이 왔사옵니다.”
“들라 하라.”
거울 앞에 앉아 궁녀들이 해 주는 몸치장을 받고 있던 태후는 고개를 살짝 들어 말했다.
태후의 길고 검은 머리카락은 허리께까지 늘어뜨려져 탐스러운 비단 같았으며, 눈썹은 초승달처럼 가느다란 호선을 그렸고 입술은 붉게 칠한 것이 마치 미인도에서 금방 빠져나온 사람처럼 눈부신 미모를 자랑했다.
과연 선대 황제의 총애를 받아 요녀라는 숙덕거림까지 들으면서 후궁을 쥐락펴락했던 여인다운 모양새였으나, 그 아름다움에 단 하나 오점이 있다면 태후가 가지고 있는 남자 못지않은 야망이 그녀의 인상에 어딘지 모를 표독스러움을 더해 주고 있다는 것이었다.
태후의 궁은 후궁 내에서도 가장 좋은 물건만을 지급받는 곳이었기 때문에 그 부유함을 자랑하듯 사방에 최고급 사치품들이 널려 있었는데, 향로에서 피어오르는 달콤한 향은 페르시아에서 조공으로 바친 것이요, 장인에게 명해서 제작한 신발은 옥과 은으로 만들어진 것이었으며 몸에 걸치는 장신구는 아무리 귀한 보석이라 해도 작은 흠이라도 발견되면 가차 없이 내버리곤 했다.
“궁이 시끄럽던데 무슨 일인지 잘 알아보고 왔느냐?”
태후는 길게 쭉 뻗은 손톱 장식의 끝으로 귀밑머리를 만지며 정 태감에게 물었다.
함부로 여기저기 나다닐 수 없는 그녀 대신 궁궐 내의 눈과 귀가 되어 주는 정 태감은 부려 먹기 좋은 든든한 수족이었으나, 웬일인지 그가 대답하길 주저하자 태후의 잘 다듬어진 눈썹이 위로 슥 올라갔다.
“왜 말을 못 하는가?”
“저, 그것이…… 태후 마마, 아뢰옵기 황공하옵니다만…….”
“답답하구나. 얼른 고하지 못할까.”
태후의 기분이 점점 나빠지는 것을 눈치챈 정 태감은 재빨리 바닥에 무릎을 꿇고 말했다.
“예친왕께서 직례 안찰사를 삭탈관직하고 극형에 처하셨다 합니다.”
“뭣이……!”
너무 놀란 나머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태후는 정 태감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았다.
“안찰사는 내 측근이 아니더냐. 섭정이 그걸 모를 리가 없는데 사형을 내렸다고!”
그러다가 태후는 안 되겠다 싶었는지 입술을 자근자근 깨물며 말했다.
“안 되겠다. 여봐라, 당장 나갈 채비를 해라! 내가 직접 황상을 만나 봐야겠다.”
“태, 태후 마마, 안 됩니다. 이미 늦었습니다.”
“설마…….”
“금의위에 끌려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바로 형이 집행되었다 하옵니다.”
“크윽……!”
태후는 분한 듯 이를 갈며 의자에 주저앉았다.
“폐하께서는 어찌 반응하시더냐. 설마 예친왕의 횡포를 그냥 수수방관하셨던 건 아닐 테지?”
하지만 정 태감은 태후의 물음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아무리 태후의 신임을 받는 태감이라 해도, 차마 황제가 마치 꼭두각시처럼 옥좌에 앉아만 계셨다고 고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태감의 반응에 태후는 미간을 찌푸리며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선황제가 붕어했을 때 머리를 써서 자기 아들을 황위에까지 올렸을 정도로 영리한 여인이니만큼, 말하지 않아도 대강 그때의 상황이 어땠는지를 충분히 그릴 수 있었다.
물론 그녀의 영리함이란 것이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않는 얄팍한 것이라 지금에 와서 목을 조르고 있긴 하지만 말이다.
“애초에 예친왕을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었어.”
뒤늦게 후회해 보아도 이미 때는 늦었다.
게다가 그때 예친왕의 힘을 빌리지 않았으면 지금 그녀가 누리고 있는 이런 호사도 없었을 것이었다.
태후는 신경질적으로 손에 들고 있던 얇은 비단 천을 쥐어뜯다가 이내 눈에 예사롭지 않은 빛을 띠었다.
“조용히 섭정이나 하다가 물러날 것이지…… 욕심이 너무 지나치군요, 예친왕 전하. 계속 그렇게 날뛰다가는 언젠가 크게 곤욕을 치를 날이 올 것입니다.”
마치 바로 앞에 예친왕이 서 있는 것처럼 거울을 보고 그렇게 중얼거린 그녀는 분통을 집어 들어 확 내던졌다.
파악! 챙그랑!
“꺄악!”
놀란 시녀들이 부들부들 떨며 바닥에 엎드렸으나, 태후는 그런 그들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앙심을 품은 눈으로 어깨를 크게 들썩였다.
이렇게 청나라 최고 권력자인 예친왕과 태후 사이에 조금씩 균열이 가고 있었다.
압록강 하구 지역에 위치한 의주는 예전부터 중국 사신이 오가고 무역을 하는 교통의 요지였다.
그러다 보니 심양에 있는 팔기군이 조선으로 진격해 온다면 제일 먼저 공격을 받게 될 곳이었다.
실제로도 병자호란 때 침략해 온 청군의 주 공격로 중 하나로 사용된 적이 있었다.
그 때문에 얼마 전부터 많은 병사들이 이동해 오고 각종 군사시설을 짓는 토목공사가 여기저기서 벌어졌다.
의주성 외곽에 위치한 한 야산 자락에서는 공사에 필요한 목재를 구하기 위한 산판이 펼쳐졌다.
“넘어간다!”
“조심해!”
우지끈. 쿵!
벌목꾼의 외침에 인부들이 좌우로 황급히 피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름드리나무가 커다란 소리를 내며 옆으로 쓰러졌다.
“옮기기 좋게 가지 정리부터 해!”
“예.”
“으싸!”
톱과 도끼를 든 인부들은 나무에 개미 떼처럼 달라붙어 순식간에 잔가지를 모두 다 잘라 냈다.
그렇게 정리가 끝난 통나무들은 한쪽에 차곡차곡 쌓아 뒀다가 황소 네 마리가 끄는 수레에 실려 공사장으로 옮겨졌다.
이런 식으로 오전 중에만 베어 낸 통나무만 서른 그루가 넘었다.
“휴, 이 많은 목재를 다 어디다 쓸려는지 몰라.”
이마에 묻은 땀을 소매로 닦아 낸 털보 사내의 말에 잔가지를 한 아름 안고 옆으로 치우던 친구가 입을 열었다.
“사방에 공사판인데 목재를 쓸데가 없으려고.”
“하긴.”
고개를 끄덕이던 털보 사내는 약간 굳은 얼굴로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갑자기 왜 이렇게 공사판을 벌이는 건지, 자네 뭐 좀 아는 거 있나?”
“글쎄. 언제 윗대가리들이 일일이 그런 걸 알려 주고 일을 시켰나? 하지만 최근 들어 의주성에 병졸들이 무더기로 들어오고 공사를 하는 것마다 하나같이 군량 창고나 성벽 같은 군사시설인 걸 보면 조만간 큰 사단이 나지 싶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수레에 실려 나가는 목재들을 보며 친구가 하는 말에 털보 사내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설마 전쟁이라도 터진다는 거야!”
“쉿! 조용히 해. 관리들이 들으면 괜히 헛소문을 퍼트린다고 바로 치도곤을 당할지도 모른다고.”
“으응, 그래.”
아무리 도현이 선정을 베푼다고 해도 일반 백성들한테는 관청만큼 무서운 곳도 없었기에, 털보 사내는 찔끔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봤다.
“십중팔구 그럴 게야. 더군다나 청나라 놈들은 몇 년 전에도 국경을 넘어와서 한양까지 쳐들어가 임금님을 욕보인 적이 있잖아.”
“그렇지.”
당시에는 팔기군이 의주성을 공격하지 않고 곧장 한양으로 내려갔기 때문에 큰 피해는 없었지만, 그래도 전쟁은 일반 백성들에게 큰 두려움이었다.
“이거 산속 깊은 곳으로 피난이라도 가야 되는 거 아냐?”
“뭘 그리 서둘러? 아직은 그냥 짐작일 뿐이잖아. 그리고 조금 걱정이 되기는 하지만 왜구 놈들도 혼내 주고 얼마 전에는 함경도에서 거란족까지 크게 무찔렀다고 하니 이번에는 우리 조선군도 호락호락 당하지는 않을 게야.”
“그럼 좋은데…….”
그때 작업을 지시하던 감독관이 두 사람을 보며 호통을 쳤다.
“어이! 거기, 일 안 하고 뭘 하고 있어?”
“아, 예.”
“공짜로 하는 것도 아니고 임금님이 일당까지 주시는데 농땡이를 쳐서 되겠어!”
“죄송합니다요.”
그러자 두 사람은 잡담을 멈추고 허둥지둥 잔가지를 옮기는 일을 했다.
이처럼 백성들도 뭔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조금씩 눈치챘지만, 두 번의 반란을 무리 없이 토벌하고 그동안 골치를 썩이던 왜구와 거란족 정벌에 성공한 영향인지 걱정과 달리 크게 동요하지는 않았다.
청나라와의 전쟁이 가까워지면서 바빠진 곳 중 하나가 바로 비변사였는데, 오늘도 도현이 직접 참가하는 회의가 열렸다.
“보고들 해 봐.”
도현의 말에 먼저 제일 말석에 자리한 고만정이 일어나 이야기했다.
“지난 석 달간 밤낮으로 보급창에서 신형 조총을 생산한 결과 이 군단의 총병 무장 비율이 오 할까지 올라갔사옵니다. 이런 추세라면 가을이 되기 전에 신형 조총 보급이 모두 완료될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군량미도 봉황상단에서 안남미 십이만 석을 구입해 이쪽으로 운송 중에 있고, 올해 추수가 끝나면 추가로 십오만 석을 더 확보할 수 있을 겁니다.”
“최단 기간에 마무리를 지으면 좋지만 상황에 따라 전쟁이 얼마나 길어질지 모르는데, 이십칠만 석으로 충분하겠나?”
“전쟁에 동원되는 병력을 십만으로 가정할 때 일 년은 넉넉히 쓸 수 있는 양입니다. 그리고 부족하다면 각 군영에 보관되어 있는 군량미를 우선 꺼내 쓰면 되니 큰 무리는 없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렇군. 아군의 주 무기가 조총과 화포인 만큼 무엇보다 화약 재고가 중요한데, 그건 어떤가?”
“현재까지 삼천이백 관(12톤)이 비축되어 있사옵니다.”
“얼마 전에 실시한 거란족 토벌로 소모량이 컸을 텐데 생각보다 많군.”
“자체적인 생산량도 늘어났지만 봉황상단의 도움도 컸사옵니다.”
“어떻게 말인가?”
“팔백 관이 넘는 화약을 왜국과 명나라에서 은밀히 들여와 주었습니다.”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을 지으며 도현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런 일이 있었군.”
“덕분에 소모량을 어렵지 않게 채워 넣을 수 있었습니다.”
“허허, 나중에 장 총관한테 수고했다고 치하라도 해 줘야겠군.”
그러자 옆에 있던 병조판서 임경업이 끼어들며 말했다.
“장 총관과 봉황상단이 없었다면 전쟁 준비를 제때 끝내기 어려웠을 겁니다.”
“맞사옵니다. 이번 전쟁에서 이긴다면 일등 공신은 봉황상단일 것이옵니다.”
다른 참석자들도 봉황상단의 공을 모두 인정하며 칭찬을 쏟아 냈다.
그런 모습을 흐뭇하게 쳐다보던 도현은 다시 분위기를 환기시키고 회의를 이어갔다.
“전쟁이 시작되면 무엇보다 보급을 끊어지지 않고 잘 유지하는 것이 중요한데, 거기에 대한 대책은 어떻게 세워 두고 있나?”
도현의 물음에 이번에는 고만정 대신 병조판서 임경업이 직접 대답했다.
“그렇지 않아도 비변사에서 그것을 두고 갑론을박했는데, 전하께서 말씀하신 대로 방어가 아닌 공격에 중점을 둔다면 아무래도 병참기지를 국경과 가까운 곳에 두는 것이 유리하다는 결론을 내렸사옵니다.”
이야기를 들은 도현도 동의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멀리 후방에 두는 것보다는 수송 거리가 짧아질 테니 그게 낫겠지.”
“예, 저희도 거기에 집중을 했습니다. 그동안 거란족과 거래를 하고 자체적으로 목장을 운영해 군마의 숫자를 대폭 늘렸지만, 기병대에 우선 배정을 하다 보니 보급 능력이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니까요.”
“으음.”
이점은 도현도 전쟁을 앞두고 가장 우려하는 것 중 하나였는데 보급대에 배치된 군마와 짐수레가 필요한 수량에 비해 너무 적었다.
성과 요새에 틀어박혀 방어전을 펼친다면 큰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도현이 구상하는 공세전에서는 치명적인 약점이 될 수 있었다.
“그래서 현재 의주성을 좀 더 크게 확장하고, 거기에 건설 중인 창고들이 완성되면 군량미와 화약을 포함한 보급품들을 미리 가져다 놓을 계획이옵니다.”
“괜찮은 생각이야. 하지만 보급품을 한 곳에 모아 두면 관리하기는 쉽겠지만 자칫 사고의 위험성이 있으니, 한 세 곳 정도로 적당히 분산해서 보관하는 것이 좋겠군.”
“그리하겠사옵니다.”
“아, 참. 그리고 지난번에 짐이 복속한 거란족 전사들을 기병으로 활용하라고 지시한 건 어떻게 됐나?”
“우선 시험적으로 삼천 명가량을 뽑아 운용해 보고 결과가 좋으면 추가로 부대를 편성하기로 했습니다.”
“반응은 어때?”
“조선군이 되는 것에 약간 거부감이 있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지원자가 너무 많이 몰려서, 시험을 쳐 떨어뜨려야 할 정도로 반응이 아주 뜨겁습니다.”
“그래?”
약간 놀란 얼굴을 하던 도현은 이내 이해가 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을 타고 초원을 달리는 전사의 피가 있으니 얌전히 농사를 짓는 것보다 군인이 되는 게 더 적성에 맞겠지. 아무튼 잘됐군.”
“예.”
“다시 한 번 더 이야기를 하지만 복속한 거란족을 조선 백성으로 만들려면 우리가 먼저 마음을 열고 품에 끌어안는 포용심이 있어야 돼. 그러니 절대 차별을 하지 말고 일반 병사와 똑같이 대우하도록 해. 알겠나?”
“일선 장졸들에게 거란족과 우리는 다 함께 주상 전하를 섬기는 같은 백성이라는 교육을 지속적으로 시키고 있으니 염려 마시옵소서.”
“좋아. 차츰 일반 백성들한테도 그런 교육을 시켜 결속력을 키우고 서로 배척하는 일이 없도록 만들도록 하게.”
“그러겠사옵니다.”
그 뒤로도 도현은 장수들과 한참을 더 회의를 계속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어느새 농경지에 심어진 벼들이 누렇게 익은 채 고개를 숙여 추수만 기다리고 있는 어느 날.
예친왕은 왕부에 측근들을 불러 모았다.
섭정인 예친왕이 가진 권력을 보여 주기라도 하듯 왕부는 소小 자금성이라고 불릴 만큼 화려하고 규모가 아주 컸다.
왕부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안채 서재에 예친왕과 측근들이 앉아 있었다.
시비가 다과와 함께 차를 내놓고 나가자, 상석에 자리한 예친왕은 좌우에 있는 측근들을 스윽 쓸어 보고는 묵직한 어투로 입을 열었다.
“오늘 경들을 모이라고 한 건 지난번에 못 다 한 일을 마무리하기 위해서네.”
갑작스러운 호출에 뭔가 일이 있다는 것을 짐작하던 측근들은 순간 눈빛을 번득였다.
“조선을 치시려는 겁니까?”
용골대가 조심스럽게 묻자 예친왕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네. 이번에는 아예 조선이라는 나라를 지도에서 지워 버릴 생각이네.”
단순히 다시 무릎을 꿇리는 것을 넘어 아예 조선을 흡수하겠다는 의지를 보이자, 측근들은 놀란 얼굴로 작게 술렁거렸다.
“꼭 그렇게까지 하셔야 되겠습니까?”
얼마 전부터 총애를 받고 있는 왕태봉이 그다지 내키지 않는 얼굴로 묻자 예친왕은 단호하게 말했다.
“뒤에 조선이라는 화근을 놔둔 채 중원을 일통하려는 대업을 이루기는 어렵다는 것이 내 판단이야.”
“분명히 눈에 거슬리는 행동을 하기는 했지만, 지난번에 군을 회군시켜야 했던 건 한족들의 반란이 원인이었지 조선 때문은 아니었지 않습니까.”
왕태봉이 계속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자 맞은편에 앉아 있던 야골타가 마음에 안 든다는 얼굴로 버럭 고함을 질렀다.
“섭정께서 하신다면 그대로 따르면 될 것이지. 뭐가 그리 말이 많아!”
“주군의 말에 무조건 머리를 조아리는 건 간신들이나 하는 행동입니다. 귀에 거슬리더라도 충언을 드리는 것이 진정한 수하라 생각합니다.”
예전 같았으면 감히 자신의 눈도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을 왕태봉이 뻣뻣하게 얼굴을 들고 말대꾸를 하자 양골타는 눈썹을 위로 치켜 올렸다.
“뭐야!”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예친왕이 한쪽 손바닥으로 앞에 있는 기다란 회의용 탁자를 내려치며 다툼을 멈추게 했다.
탕!
“이게 뭐 하는 행동이냐?”
“흠흠.”
“죄송합니다.”
아무리 측근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가차 없이 내치는 예친왕의 성격을 알기에, 두 사람은 얼른 고개를 조아렸다.
그러자 예친왕은 시선을 옆으로 돌려 왕태봉을 지그시 쳐다보며 이야기를 했다.
“자네는 조선을 치는 걸 반대하는 건가?”
“그런 건 아닙니다.”
“그럼 뭐야?”
“군신의 예를 다하기로 한 약속을 깨고 황제 폐하의 권위에 도전하는 조선은 당연히 벌해야 되겠지만, 말씀하신 것처럼 완전하게 왕조를 멸하려면 저희가 입을 피해도 만만치 않을 겁니다.”
왕태봉의 이야기에 야골타가 비아냥거리듯 말했다.
“그딴 조선군이 뭐가 겁난다고. 이래서 약해 빠진 문관들은 안 된다니까. 지난 병자년 때도 우리 팔기군이 단번에 한양까지 밀고 내려가서 조선 국왕을 붙잡아 무릎을 꿇렸다는 걸 모르나?”
“그건 조선이 미처 대비를 하기 전에 기습적으로 공격해서 곧장 한양까지 치고 내려갔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지 않습니까. 하지만 지금은 이미 양국 사이에 전쟁 분위기가 팽배해 상대도 충분히 준비를 해 놓고 있을 테고, 무엇보다 한 번 썼던 방법에 또다시 당하지는 않을 겁니다.”
“흥! 그래 봤자, 허접쓰레기 같은 조선군이 어디 가려고. 아마 팔기군이 나타나면 싸워 보기도 전에 허겁지겁 도망치기 바쁠 거야.”
자만심 가득한 야골타의 말에 모여 있던 장수들이 동의를 하듯 왁자지껄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명군보다 더 약한 것이 조선군이지.”
“아마 이번에도 우리 깃발만 봐도 겁을 집어먹고 성에 꽁꽁 틀어박혀 부들부들 떨고 있을 거외다.”
두 번의 호란 모두 너무 쉽게 한양이 함락됐고, 마지막 병자호란 때는 인조가 무릎을 꿇고 땅에 이마를 찧는 굴욕적인 항복까지 했기에 청나라 장수들은 대부분 조선군을 우습게 보는 경향이 강했다.
이건 예친왕도 마찬가지였는데 도현과 조선을 경계하면서도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찍어 누를 수 있는 상대로 생각했다.
이런 분위기에 왕태봉은 우려 섞인 표정을 지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물론 저도 우리가 질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명을 무너뜨리고 섭정께서 원하시는 대업을 이루려면 전력을 최대한 보존해야 되는데, 무리하게 조선을 완전히 없애 버리려다가 자칫 피해가 커질까 봐 우려하는 겁니다.”
명나라를 거론하자 예친왕이 살짝 안색을 굳히면서 관심을 보이자 왕태봉은 계속 이야기를 이었다.
“임진왜란 때 한양이 함락되고 영토 대부분을 빼앗긴 상태에서도 끈질기게 왜군과 싸워 결국 칠 년 만에 승리를 거둔 조선입니다. 그리고 자꾸 병자년 이야기를 하시는데 그때도 엄밀히 이야기를 하면 조선 국왕을 남한산성에 가두기는 했지만, 성을 함락시키지 못해 고생하다가 회군을 고심하고 있을 때 상대가 먼저 항복을 하는 바람에 군신 관계를 맺는 것으로 체면치레를 한 것이지 않습니까.”
“뭐라고!”
“말을 가려서 하게!”
이곳에 모여 있는 장수들은 대부분 병자호란 때 참전한 이들이었기에 왕태봉의 말을 듣자마자 발끈하며 그를 죽일 듯이 노려봤다.
예친왕 역시 자신이 세운 공을 폄하하는 것 같아 언짢았지만, 거대한 청나라를 한 손에 쥐고 좌지우지하는 인물답게 한쪽 팔을 들어 흥분한 측근들을 제지하고는 차분한 얼굴로 왕태봉을 쳐다보며 말했다.
“계속해 봐.”
“조선 국왕이 강화도로 피신하고 임진왜란 때처럼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 공격을 해 댄다면, 아무리 팔기군이라도 큰 피해를 입을 것입니다.”
“흐음.”
피해를 겁내는 것은 아니었지만 또다시 조선에서 발목이 잡히면 대업을 이루는 것이 점점 요원해지기에 예친왕은 낮게 침음을 흘리며 눈가를 찌푸렸다.
“그래서 어쩌자는 거야?”
“흡족하시지는 않겠지만 격렬한 저항을 불러올 정복 대신 차선책으로, 지난 두 번의 침공 때처럼 팔기군의 강력한 기동력을 이용해 한양을 신속히 포위한 뒤 조선 국왕을 폐위시키고 저희한테 우호적인 인물로 새 왕을 세우는 겁니다. 그러면 큰 반발 없이 목적을 달성하고 향후 섭정께서 새 국왕을 통해 조선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실 수 있을 겁니다.”
그다지 나쁘지 않은 의견이었기에 예친왕은 팔짱을 낀 채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는 고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 의견대로 한다면 그리 많은 병력을 동원할 필요가 없고 전쟁도 빨리 마무리 지을 수 있으니 확실히 부담은 적겠군요.”
명장으로 이름이 높고 야골타처럼 힘만 앞세우는 것이 아니라 머리를 쓸 줄 아는 용골대가 긍정적인 태도를 보이자 다른 측근들도 살짝 마음이 흔들렸다.
그때 왕태봉이 쐐기를 박는 말을 했다.
“저희가 이루려는 최종 목표는 조선이 아니라 명이지 않습니까.”
그러자 계속 어찌할지를 망설이던 예친왕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며 결정을 내렸다.
“자네 말이 맞아. 조선은 대륙을 일통하기 위한 작은 걸림돌에 불과할 뿐이니 거기에 연연할 필요는 없겠지.”
“바로 그겁니다.”
“용골대 장군.”
“말씀하십시오.”
“조선 왕의 항복을 받아 내는 데 병력이 얼마나 있으면 될 것 같나?”
잠시 생각을 해 본 용골대는 바로 대답했다.
“십만 정도면 충분히 원하시는 걸 이룰 수 있을 겁니다.”
“병자년 때도 딱 그 정도 병력을 가지고 조선을 정벌했으니 적당한 숫자군. 호타이에게 팔기군 오만을 더 지원해 주고 조선을 치라고 해.”
측근들은 일제히 머리를 숙이며 크게 복명했다.
“예, 전하.”
이로써 청나라의 세 번째 조선 침공이 결정되었다.
예친왕의 지시는 신속하게 실행됐는데 며칠 뒤 열린 대전 회의에서 형식적으로 황제의 재가를 받은 뒤 팔기군 오만이 북경을 떠나 심양으로 이동했다.
이 과정에서 아무런 사전 논의도 없이 어린 황제를 허수아비로 만든 채 그저 통보하듯 말을 하고 모든 결정을 내렸기에, 드러내 놓고 불평을 하지는 못했지만 태후와 대신들의 예친왕에 대한 반감은 점점 커져 갔다.
한편 이런 청나라의 움직임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던 주작단의 탐보망에 걸려 곧바로 도현에게 전해졌다.
“북경에 있던 한인 팔기 오만 명이 현재 만주로 이동 중이고 심양에도 팔기군 소집령이 떨어졌다고 합니다. 이런 일련의 움직임으로 볼 때 청군이 아국을 침략하려는 것이 분명합니다.”
주작단 단장인 이완이 간단하게 정보 보고를 하고 자리에 앉자 급히 소집된 비변사 회의에 참석한 이들은 모두 얼굴을 굳히면서 낮게 침음성을 흘렸다.
“으음.”
“결국 이렇게 되는군.”
그동안 이런 날이 올 것에 대비해 만반의 준비를 해 왔지만 막상 일이 닥치자 불안한 기색을 보이며 조금씩 동요하자, 상석에 있던 도현이 크지는 않지만 힘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어차피 각오한 일이었잖아. 쫄 것 없어. 겁 없이 국경을 넘어온다면 모조리 다 쓸어버리고 만주로 쳐들어가 지난번에 당한 치욕을 이자까지 쳐서 되갚아 주면 돼.”
“맞습니다.”
“까짓 어디 한번 덤벼 보라지요.”
도현의 말에 잠시 마음이 약해졌던 걸 떨쳐 낸 장수들은 주먹을 꽉 움켜쥐며 전의를 활활 불태웠다.
“이렇게 되면 우리도 병력을 이동시켜 적과 맞서 싸울 태세를 갖춰야겠군.”
“이미 청군과 제일 처음 조우할 것으로 예상되는 이 군단에 경계령을 내려 뒀습니다.”
임경업의 말에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잘했어. 그리고 근위대도 언제든 국경으로 이동할 수 있도록 준비를 갖춰 놓도록 해.”
“예.”
근위대 사령인 박영식이 묵직한 어투로 대답하자 임경업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봤다.
“꼭 친정을 하셔야 되겠사옵니까?”
“병판은 아직도 내가 전장에 나서는 것이 걸리는 모양이지?”
“솔직히 그렇사옵니다.”
“뭘 걱정하는지 잘 알고 있어. 하지만 조선의 명운을 결정하고 삼전도의 굴욕을 씻는 역사적인 순간을 짐이 함께하지 못한다면 훗날 저세상에서 어찌 선대왕을 떳떳이 뵐 수 있겠나.”
도현의 결심이 확고하자 임경업도 더 이상 만류를 하지 못했다.
“후우. 주상 전하의 뜻이 그러시다면 어쩔 수 없지요. 대신 위험한 행동을 하시면 아니 되옵니다.”
“하하하, 알겠네.”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린 도현은 이내 정색을 하고는 모여 있는 장수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지난 수년간 피땀을 흘린 것이 이 한 번의 전쟁에 좌지우지되니 모두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주게.”
“옛.”
결연한 장수들의 대답을 들으며 도현은 커다란 회의 탁자 위에 펼쳐 놓은 지도에서 의주성이라고 적혀 있는 부분을 뚫어질 듯 노려봤다.
<10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