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권-조청전쟁 (49/104)

10권

조청전쟁

다음 날 아침, 도현은 대전 회의에서 청과의 전쟁을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그러자 큰 혼란이 있을 거라는 염려와 달리 신하들 대부분은 상황을 담담하게 받아들였고, 젊은 관료와 무장 들은 오히려 이 기회에 지난 병자년에 당했던 치욕을 되갚아 줘야 한다며 뜨겁게 전의를 불태웠다.

삼전도의 치욕이 기억에 아직 생생히 남아 있는 상태라 청에 대한 적개심이 강하다지만 상당히 의외의 반응이었는데, 사대부 사이에서도 청을 상국으로 인정하지 않는 데다 지난 두 번의 전쟁을 승리하면서 생긴 자신감이 큰 영향을 끼친 것이었다.

이건 일반 백성들도 마찬가지였다.

겁을 먹고 민심이 크게 동요하기는커녕 각지에서 자발적으로 의병을 결성해 전쟁에 나가겠다며 관청을 찾아왔다.

“허어, 그게 모두 사실이오?”

앞에 앉은 영의정 박황은 도현의 물음에 상체를 살짝 숙이며 대답했다.

“그렇사옵니다, 전하. 이곳 한양만 해도 천여 명이 넘는 장정들이 청과 싸우겠다며 찾아왔고, 숫자 또한 계속 늘어나고 있다 하옵니다.”

“참 흐뭇한 일이군.”

“맞사옵니다. 이게 다 전하께서 그동안 선정을 베푸신 공덕이 아니겠사옵니까.”

함께 자리하고 있던 병조판서 임경업이 한마디 거들자 도현은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큰 싸움을 앞두고 이렇게 백성들이 일치단결한 모습을 보여 주니 정말 마음이 든든한 것 같소. 허나 그렇다고 군사훈련도 제대로 받지 않은 자들을 전장에 세울 수는 없으니, 잘 타일러 돌려보내도록 하시오.”

군사는 원래 많을수록 좋은 것이고, 청국이라는 아주 벅찬 상대와의 싸움을 앞두고 있었기에 당연히 의병들을 모두 수용할 거라 생각하고 있던 신료들은 뜻밖의 말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전하, 비록 훈련이 안 된 인원이라고 하지만 후방에서 보급 물자 운송을 맡긴다든지 여러 가지로 쓸모가 많지 않겠사옵니까?”

“저도 병판과 같은 생각이옵니다. 부디 백성들의 충절을 받아 주시옵소서.”

두 사람이 머리를 조아리면서 하는 이야기에 도현은 빙긋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물론 경들의 이야기처럼 의병들을 받아들이면 전쟁을 수행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오. 하지만 청과 싸우기 위해 수만에 달하는 병력이 국경으로 가는 상황에서, 또다시 많은 장정들이 떠난다면 곧 있을 추수는 누가 할 것이오?”

“……!”

잠시 망각하고 있던 문제를 도현이 정확히 지적하자 박황과 임경업은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전쟁도 중요하지만 제때 추수를 끝내지 못한다면 후방에 남겨진 백성들은 아주 혹독한 겨울을 보낼 수밖에 없고, 자칫 싸움이 길어지기라도 하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되돌아와 우리를 압박하게 될 것이오.”

이어진 도현의 말에 두 사람은 부끄러운 듯이 살짝 얼굴을 붉혔다.

“신들의 생각이 짧았사옵니다.”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라고 했소이다. 백성들이 추수를 잘 끝낼 수 있게 조정에서 각별히 신경 써 주도록 하시오.”

“그리하겠사옵니다, 전하.”

“병판.”

“말씀하시옵소서.”

“출정 준비는 어떻게 되고 있나?”

질문을 받은 임경업은 사뭇 진지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언제든 북방으로 떠날 수 있도록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고, 필요한 보급 물자 수송도 벌써 시작되었사옵니다.”

“보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군대는 절대 전쟁에서 승리할 수가 없소. 특히 우리 군은 화약 무기를 많이 쓰는 만큼 이 점을 유의하고 보급선 유지에 각별히 신경을 쓰도록 하시오.”

“명심하겠나이다.”

“그럼 다들 바쁠 테니 이만들 가 보시오.”

“예.”

두 사람이 인사를 하고 자리를 뜨자 칠현이 곁에 다가와 고했다.

“전하, 슬슬 수라를 드실 시간이옵니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그러고 보니 살짝 배가 출출한 것 같기도 해, 도현은 뒷짐을 지고 일어서며 말했다.

“중전의 처소로 가자. 곧 궁을 비워야 할지도 모르니 얼굴은 보고 가야지.”

“네, 알겠습니다.”

칠현은 옆에 있는 다른 내시에게 도현의 수라상을 교태전에 준비하라 이르고 그의 뒤를 따랐다.

도현과 칠현이 중전의 처소에 도착했을 즈음엔 이미 연락을 받은 중전이 아들인 연과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연이도 같이 있었구나.”

오랜만에 얼굴을 본다며 도현이 연에게 손짓을 해 가까이 오게 했다.

우유처럼 뽀얗던 피부가 어느새 햇볕에 타 까무잡잡해진 것을 본 그는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중전에게 말했다.

“한창 뛰어놀 나이라 하더니, 제법 키도 크고 늠름해졌구려.”

“말도 마셔요. 어렸을 때도 노는 걸 좋아해서 다루기 힘들었는데, 이젠 처소를 지키는 무관들까지 마구 휘두르고 다닌다 합니다.”

“뭐야? 이놈, 아무리 그래도 장난을 너무 심하게 치면 못쓴다. 그들도 다 자기 할 일이 있는데 곤란하게 하면 안 되지 않겠느냐.”

짐짓 엄한 표정으로 도현이 꾸짖었지만 연은 자기도 할 말이 있다는 듯 대꾸했다.

“하지만 아바마마, 제가 뭘 하려고만 하면 다들 안 된다, 위험하다 하면서 아무것도 못 하게 한단 말입니다. 이러다가 진짜 바보 멍청이가 되는 건 아닌가 제 미래가 걱정스럽습니다.”

설마 말대꾸를 할 줄은 몰랐던 도현이 잠시 황당해 할 말을 찾지 못하는 동안, 옆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칠현이 남몰래 큭큭 숨죽여 웃었다.

마냥 어린 줄만 알았더니 한 살 더 먹었다고 따박따박 반박하고 나서는 게 꼭 심양 관저 시절의 도현을 보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연아, 말버릇이 그게 뭐냐?”

당황한 중전이 연을 나무라는데 이때 뒤늦게 제정신을 차린 도현이 버럭 화를 냈다.

“누구 아들인데 바보 멍청이가 돼? 절대 그럴 일 없으니 걱정 마라!”

“저, 전하, 화를 내는 요점이 틀린 것 같습니다만…….”

“엉? 뭐가?”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본인이 모르면 됐지 하고 칠현은 모른 척 오리발을 내밀었다.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가자 중전은 화제를 바꾸기 위해 눈짓으로 얼른 수라상을 들이도록 지시했다.

궁녀들이 차례대로 상을 들여오고, 기미 상궁이 맛보기까지 다 끝낸 후 물러서는 것을 지켜본 중전은 자신이 직접 수저를 집어 도현의 수발을 들었다.

“수라간 나인이 오늘 잡은 잉어가 살이 토실하게 올랐다 하더이다. 잉어는 정기를 보충하는 데도 좋은 영약이니 얼른 한 입 드시지요.”

“음.”

잠깐 헛다리를 짚으며 흥분했던 도현도 중전이 사근사근하게 옆에서 챙겨 주자 금세 기분을 바꿔 얌전하게 밥을 먹기 시작했다.

“연이는 최근 단것을 많이 먹는다고 하던데, 당분간 당과는 금하도록 하여라.”

“어, 어마마마.”

“삼시 중 두 끼를 약과로 때운다니 그게 말이나 되느냐?”

“그, 그래도…… 아바마마, 어마마마께 말씀 좀 해 주세요!”

“중전이 옳다. 단것을 많이 먹으면 나중에 이빨도 썩고 여러모로 안 좋아.”

만약 충치라도 생기면 치료할 의사도 없고 약도 없는데 무슨 생고생을 하려고, 하며 도현은 혀를 쯧쯧 찼다.

도현 역시 어릴 때 양치질도 안 하고 그냥 자 버린 적이 많아, 결국 대학생이 될 무렵엔 충치 치료에 차 한 대 값을 쏟아부은 기억이 있었기에 이번만큼은 중전의 편을 들 작정이었다.

그 표정을 보고 이번엔 어리광이 통하지 않을 것임을 짐작한 연은 침울한 얼굴로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네, 간식은 하루에 한 개로 줄이겠습니다.”

“그래, 갑자기 끊는 것도 힘들 테니 그 정도면 됐다.”

누굴 닮았는지 고집 하나는 쇠심줄보다도 더 질긴 놈이 이 정도면 많이 양보한 편이라, 중전도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그나저나 소식은 들었소?”

“네, 요즘 궁이 많이 시끄럽더군요. 대신들도 이래저래 바쁜 듯하고요.”

불쑥 내뱉은 도현의 물음에 중전은 이런 이야기가 나올 줄 알고 있었다는 듯 놀란 표정도 없이 말했다.

“잠시 자리를 비우게 될 거요. 그동안 궁을 잘 부탁하오.”

“물론입니다. 부디 몸 건강히 잘 다녀오셔요.”

그리고 도현은 연에게도 고개를 돌려 말했다.

“내가 없는 동안 어머니와 누이들은 네가 지켜야 한다. 그게 장남으로 태어난 네 의무니라. 알겠느냐?”

아이에게 너무 무거운 짐을 맡기는 게 아닌가 싶기도 했지만, 연의 신분은 다른 양반집 자제들하곤 달랐다.

장차 보위를 물려받게 될 아이인데 이런 부담감도 이겨 내지 못한다면 앞으로 어떻게 험한 세상을 다스릴 수 있겠는가.

그런 상반된 감정을 마음에 품은 도현의 말에 연은 자질구레한 걱정 따윈 다 날려 버리는 밝은 표정으로 씩씩하게 대답했다.

“네! 염려하지 마십시오, 아바마마!”

“하하, 그래, 듬직해서 좋구나.”

손바닥에 다 들어오는 연의 작은 머리통을 쓱쓱 쓰다듬은 도현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며칠 뒤 도현은 신료와 백성들의 열렬한 환송을 받으며 직접 근위대를 이끌고 의주로 출정했다.

예전이라면 보름이 넘게 걸렸을 먼 거리였지만, 한양과 평양 사이에 신작로가 뚫렸고 무거운 보급 물자는 모두 해로를 이용해서 수송했기에 근위대는 열흘도 안 돼서 의주성에 도착할 수 있었다.

도현은 다음 날부터 이 군단장인 남두병과 여러 장수들을 대동하고 의주성 일대의 방어 시설을 둘러봤다.

압록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올라선 도현은 한쪽 손을 펴서 눈썹 위에 올린 채 주위를 살펴보고는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그동안 고생이 많았겠군.”

도현의 말에 오른쪽에 서 있던 남두병 이 군단장이 고개를 살짝 숙이면서 겸손하게 대답했다.

“다 전하께서 물심양면으로 지원해 주신 덕분이옵니다.”

“아무리 조정에서 도와줬다고 해도, 의주 백성과 병사들이 합심해서 노역을 하고 남 장군이 잘 이끌지 않았다면 제때 방어 시설을 완성하지 못했을 거요.”

“망극하옵니다.”

임금인 도현이 그동안의 노고를 알아주고 친히 다독여 주자 남두병 장군은 그간 힘들었던 것이 한꺼번에 모두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 들었다.

강변을 따라 만들어진 수많은 방어 시설을 보면 이 군단과 의주 백성들이 얼마나 심혈을 기울여 공사를 했는지 알 수 있었다.

특히 강폭이 가장 좁고 바닥이 얇아 청군이 도강을 해 올 것이 거의 확실한 지점에는 총병들이 안전하게 사격을 가할 수 있는 진지가 강을 따라 무려 3킬로미터가량이나 길게 파여 있었는데, 그 뒤로 일 선이 뚫렸을 때를 대비한 예비 진지도 두 개나 더 있었다.

또한 지금 도현이 있는 언덕을 비롯해 강변이 내려다보이는 고지대마다 포대를 축성해 거미줄 같은 화망을 구성해 놓았다.

아무리 무적으로 군림하는 팔기군이라도 여기에 까닥 잘못 발을 들여놨다가는 그대로 곤죽이 될 만큼 엄청난 개미지옥이었다.

“며칠 안에 강변 개활지에다 목재를 잘라 만든 장애물을 설치할 계획이옵니다.”

“진지가 아무리 잘 갖춰져 있다고 해도 적이 말을 타고 빠르게 거리를 좁혀 오면 여러모로 곤란할 테니 괜찮은 생각이군. 이왕이면 이번에 병기창에서 새로 만들어 가져온 신형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를 함께 묻어 두도록 하게.”

“그리하겠사옵니다.”

비격진천뢰는 선조 때 이장손이라는 사람이 만든 일종의 시한폭탄이었다.

무쇠로 표면을 둥글게 만들고 내부에 쇳조각과 구슬을 집어넣어 터트려 주위에 있는 것들을 모두 죽이는 무기였다.

심지를 만들었다가 사용하기 전에 불을 붙이고 밀봉해 날려 보내는 방법을 썼는데, 도현은 이걸 조금 더 발전시켜 현대의 클레이모어처럼 멀리서 조종해 원하는 시점에 폭탄을 일시에 터트려 살상력을 극대화할 수 있게 만들라고 지시했다.

“문제는 청군이 우리가 이렇게 준비를 갖추고 있는 걸 알면서도 이쪽으로 도강을 시도하느냐는 건데…….”

도현이 정면에 보이는 푸른 강물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끝을 흐리자 남두병 장군이 자신 있는 얼굴로 이야기했다.

“강물이 얼어 버리는 겨울이라면 모르겠지만, 다른 곳은 강폭이 넓어 건너기가 쉽지 않고 무엇보다 지난여름에 유난히 강수량이 많았던 덕분에 지금은 가장 낮은 곳도 허리까지 찰 만큼 강물이 크게 불어 있어 여기로 넘어올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언제 무슨 변수가 생길지 모르는 것이 전쟁이니 척후를 광범위하게 운영해서 적군의 동태를 살피도록 하게.”

“알겠사옵니다.”

남두병 장군의 대답을 들으며 다시 앞으로 시선을 돌린 도현은 강변에 만들어진 방어진지를 천천히 살펴봤다.

한편 예친왕이 보낸 팔기군 오만이 도착해 모두 십만에 달하는 군세를 보유하게 된 호타이는 조선을 치기 위해 지체 없이 군대를 남하시켰다.

주작단을 통해 이 소식을 전해 들은 도현은 압록강 북방 오십 리까지 척후대를 투입해 정찰 범위를 넓혔다.

척후대는 아직 조직적인 전투는 익숙하지 않지만 이쪽 지리를 잘 알고 승마에 능한 거란족을 적극 활용했다.

새흐나와 롭산완단이 속한 척후 십이 조도, 같은 부족 출신인 거란족 전사 열 명을 조선인 무관 한 명이 지휘해서 한 개 조를 이뤘다.

“정지!”

앞서 가던 별장이 한쪽 손을 살짝 들며 외치자 거란 출신 기병들은 일제히 고삐를 당겨 말을 멈춰 세웠다.

“여기서 잠깐 쉬면서 간단하게 끼니를 때우고 간다.”

“예.”

끝없이 펼쳐진 초원을 벌써 사흘째 이리저리 헤매고 다닌 척후대 조원들은 다들 약간 지친 얼굴로 말에서 내렸다.

“잘 익은 양고기와 마유주 한잔이 그립구만.”

롭산완단이 크게 기지개를 켜며 하는 말에 새흐나가 피식 웃으며 안장주머니에서 말린 육포 조각을 꺼내 내밀었다.

“내일이면 본영으로 돌아가니, 오늘까지만 육포로 만족해라.”

“쩝, 사흘 내내 이것만 먹으니 이제 냄새도 맡기 싫어.”

“배부른 소리 한다, 언제는 양고기도 아니고 귀한 쇠고기로 만든 거라며 좋아하더니만.”

입맛을 다시며 살짝 투덜대던 롭산완단은 새흐나의 핀잔에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내가 그랬나?”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좀 해. 예전에는 육포도 먹기 어려웠잖아. 싫으면 말고.”

새흐나가 건네줬던 육포를 다시 가져가려 하자 롭산완단은 언제 불평을 했냐는 듯 그것을 낚아채 얼른 입에 넣고 씹었다.

“하여튼 성격 급하기는. 내가 언제 안 먹는다고 했어?”

“으이그.”

땅바닥에 둘러앉은 조원들은 각자 육포와 곡물 가루를 꺼내 먹고 가죽 물주머니에 든 물을 마시는 것으로 간단히 끼니를 때웠다.

그다지 맛은 없었지만 장기간 돌아다녀야 하고 불을 함부로 피울 수도 없는 상황이니 이런 건조 식량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포만감은 느낄 수 없었지만, 그래도 영양소는 다 들어가 있어서, 이걸 먹고 나면 힘이 났다.

타고 온 말들도 고삐를 묶어 놓지 않았지만 잘 훈련된 군마답게 한쪽에 모여 풀을 뜯어 먹었다.

그렇게 배를 채우고 편하게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 바닥에 누워 눈을 감고 있던 새흐나가 약간 굳은 얼굴로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왜 그래?”

“가만있어 봐.”

옆에서 검을 손질하고 있던 롭산완단이 의아한 시선으로 쳐다보자, 한쪽 손을 들어 막은 새흐나는 몸을 엎드리고 바닥에 귀를 가져다 댔다.

갑작스러운 돌발 행동에 뭔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낀 다른 조원들도 긴장한 표정으로 새흐나를 주시했다.

잠시 후 고개를 든 새흐나는 어느새 앞에 와 있는 별장을 보며 딱딱하게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말발굽 소리가 들립니다. 최소 수백 명 이상입니다.”

“확실해?”

그러자 새흐타 대신 롭산완단이 꾸준히 교육을 받고 있지만 아직은 어색한 조선말로 물음에 대답했다.

“이 친구는 우리 부족에서도 제일가는 사냥꾼입니다. 틀림없을 겁니다.”

“으음.”

멀리 있는 사냥감도 어렵지 않게 포착하고 추격하는 거란족 사냥꾼의 능력을 알고 있는 별장은 낮게 침음을 내뱉은 후 사뭇 진지한 어투로 지시를 내렸다.

“방향이 어디야?”

“북동쪽에서 곧장 이리로 오고 있습니다.”

“저기 언덕 뒤에 숨어서 정체를 확인한다. 서둘러!”

“옛.”

말이 끝나기 무섭게 조원들은 재빨리 주위를 정리하고 군마에 올라 왼편에 있는 야트막한 언덕 뒤로 가서 은폐했다.

얼마 있지 않아 새흐타가 이야기한 대로 말발굽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뿌연 먼지를 피워 올리며 기마대가 끝도 없이 몰려왔다.

얼핏 봐도 수만은 족히 넘을 것 같은 대군에 별장은 자신도 모르게 앓는 소리를 내며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끄응.”

“저것들, 청군 놈들 맞지?”

“보면 몰라?”

“새흐타.”

“예, 별장님.”

새흐타가 고개를 옆으로 돌려 대답하자 별장은 품속에서 붓을 꺼내 뭔가를 급히 적더니 종이를 여러 번 접어서 내밀며 말했다.

“빨리 본영으로 전서구를 보내.”

“알겠습니다.”

새흐타는 얼른 은폐해 있던 언덕을 내려와 자기가 타는 말안장 뒤에 매달아 둔 새장에서 전서구를 꺼내 다리에 쪽지를 단단히 매달아 날려 보냈다.

푸드드득!

요란하게 날갯짓을 하며 하늘 높이 날아오른 전서구는 새흐타의 머리 위에서 크게 한 바퀴 선회하더니 이내 의주성이 위치한 남쪽으로 사라졌다.

그렇게 청군이 왔다는 것을 알린 척후 십이 조는 행군 대열이 다 지나갈 때까지 언덕 뒤에 쥐 죽은 듯 숨어 적군의 규모와 상태를 살폈다.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군.”

의주성 관아에 마련된 지휘 본부에서 장수들과 전략을 논의하고 있던 도현은 군단 소속 연락관이 가져온 통신문을 직접 읽고 안색을 굳혔다.

“심양을 떠난 지 이틀밖에 안 됐는데 벌써 여기까지 온 걸 보면, 후속 병력이 더 있을 수도 있지만 일단은 보병 없이 전원 기병으로 이루어진 것이 분명합니다.”

근위대 사령관인 박영식의 말에 남두병 이 군단장도 머리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보나 마나 지난 병자년 때처럼 압록강을 돌파한 다음 산재해 있는 성들을 무시하고 곧장 한양까지 내려올 속셈일 겁니다. 이미 한번 당한 계책에 또다시 넘어갈 거라고 생각하다니, 정말 오만하기 그지없지 않사옵니까.”

조선군을 무시하는 청군의 행동에 남두병 장군이 분통을 터트리자 상석에 앉은 도현은 차분하면서도 힘이 가득 들어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 오만함이 청군에게 지옥을 안겨 줄 것이오.”

말을 끊고 잠시 좌우에 앉아 있는 장수들을 천천히 쓸어 본 도현은 진지한 얼굴로 명령을 내렸다.

“지난 수년간 피땀을 흘리며 준비해 온 것들을 보여 줄 때가 왔소. 배수지진背水之陣, 죽음을 각오하고 필사적으로 싸움에 임하는 자세로 적을 맞이해야 할 것이오.”

“명심하겠사옵니다.”

결연한 얼굴을 한 장수들은 도현의 말에 일제히 머리를 숙였다.

“지금 즉시 적색경보를 내리고 지휘부도 방어진지로 옮기시오.”

“옛.”

망루에 설치된 비상종이 요란하게 울리자 막사에서 쉬고 있던 병사들이 황급히 무장을 갖추고 모여들었다.

적이 지척까지 왔음을 알리는 적색경보가 내려진 것이었다.

땡땡땡!

“꾸물거리지 말고 빨리 뛰어!”

“빼놓고 가는 것 없이 다 챙겨.”

의주성 안은 순식간에 벌통을 쑤셔 놓은 것처럼 북새통이 되었다.

그 와중에도 미리 세워 둔 계획에 따라 준비해 놓은 수레에다 창고에서 꺼낸 보급 물자를 착실하게 옮겨 실었고, 집결을 끝낸 병력들은 각 연대별로 성을 나가 방어진지가 있는 강변으로 빠르게 이동했다.

“오와 열을 맞추고 빠진 인원이 없는지 확인해!”

“다 집합했습니다.”

“일 연대, 출발!”

척척척.

갑옷에 투구를 쓰고 각종 무기를 패용한 병사들은 행군 대형을 갖추고 속보로 아치 모양의 성문을 지나 성 밖으로 나갔다.

이 군단과 근위대 병력 수만 명이 줄을 지어 이동하는 모습은, 마치 사람들로 이루어진 거대한 바다가 움직이는 것처럼 엄청난 장관을 연출했다.

도현도 곤룡포 대신 황금색 갑옷을 갖춰 입고 등 뒤로 붉은색 망토를 늘어뜨린 채 말에 올라 장수들을 거느리고 강변에 구축된 방어진지로 갔다.

지휘부와 보병이 오고 있는 사이에 방어진지 주변 언덕 위에 위치한 포대에서는 폭발의 위험 때문에 땅을 파고 보관소를 만들어 넣어 둔 포탄과 화약을 꺼내 각 화포별로 분배하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읏차!”

“조심해서 옮겨.”

보급되는 물품은 각 포대마다 포탄과 화약을 합쳐 연속해 마흔 발을 쏠 수 있는 분량이었는데, 포탄은 인마 살상용으로 특별히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냥 커다란 쇠구슬에 불과해 큰 피해를 입히기 힘들었던 기존의 것과 달리, 신형 포탄은 땅에 떨어지면 내부에 들어 있는 화약이 터져 수십 조각의 파편을 뿌려 반경 스무 보 이내를 초토화시킬 수 있었다.

이것뿐만 아니라 방어진지에는 현대의 다련장포와 비슷한 신기전 화차 수십 개가 배치되어, 적이 나타나면 불벼락을 뿌려 줄 만반의 태세를 갖췄다.

물기에 젖지 않도록 가죽으로 덮어 놓은 수레에서 소신기전 뭉치를 꺼내 온 병사들은 조심스럽게 하나씩 장전을 했는데, 화차 하나당 한꺼번에 무려 마흔 발을 날릴 수 있었다.

전방에 촘촘히 깔아 둔 비격진천뢰에 각종 화포 그리고 신기전까지, 조선군이 방어진지에 배치한 화력은 웬만한 성 하나는 순식간에 잿더미로 만들어 버릴 수 있을 정도였다.

이것을 다 운용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화약도 엄청나게 들어갔는데, 총생산량의 반년 치에 달하는 화약이 이번 전투에 동원되었다.

이것은 전쟁에 나선 친정군親征軍이 보유한 화약의 오분지 일에 해당하는 막대한 양으로, 도현이 첫 전투를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기도 했다.

이렇게 여력을 모두 투입해 놓고도 지거나 상대를 완전히 제압하지 못한다면 그 뒤부터는 속수무책으로 밀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 도현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승부수를 띄운 것이었다.

의주성을 나온 병력은 도착하자마자 방어진지에 모두 투입되었고, 전장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중앙 언덕 위에 국왕을 상징하는 봉황기가 휘날리며 지휘부가 차려졌다.

그리고 그날 저녁, 평온해 보이지만 일촉즉발의 전운이 감도는 가운데 돌쇠는 일찌감치 저녁밥을 먹고 진지를 순찰하러 나섰다.

둘씩 짝을 지어 경계를 서는 병사들을 제외한 나머지는 자신의 무기를 손질하거나, 여럿이 모여 나직한 목소리로 수군거리거나 하면서 취침할 때까지 시간을 때우고 있었다.

군대에서는 흔한 풍경이지만 그래도 어딘지 모르게 실이 팽팽히 당겨진 듯 긴장감이 가득했다.

그리고 이런 분위기에 반응하듯, 날카롭게 곤두선 신경이 한층 예민해진 것을 느낀 돌쇠는 한 손으로 얼굴 한쪽의 자상을 쓰다듬었다.

심호흡을 몇 번 한 뒤 다시 평정을 되찾은 돌쇠가 느릿하게 발걸음을 옮기는데, 문득 한 무리의 병사가 동그랗게 모여 앉아 대화를 나누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가만히 귀를 기울여 보니 별다를 것도 없는 잡담에 불과했지만, 입을 열어 이야기를 하고 있는 병사들은 여느 때처럼 큰 소리를 내며 웃기도 하고 편안한 표정인 반면 맞은편의 젊은 병사들은 입맛이 뚝 떨어진 표정으로 다 식은 밥알을 깨작거리고 있는 것이 참으로 대조적이었다.

“너희들, 그래서야 내일 싸울 수나 있겠냐?”

“별장님.”

불쑥 들려온 음성에 놀라 고개를 든 젊은 병사들은 상대방이 돌쇠임을 알고 허둥지둥 일어서려 했다.

“아아, 됐어.”

양반도 아닌데 뭘 그리 예의를 차리냐며 돌쇠가 한쪽 발로 자갈을 슥슥 치우고 옆에 끼어 앉았다.

“뭐야, 왜 이리 축 처져들 있어?”

“그게…….”

“막상 전투가 코앞이라니까 쫄았냐?”

돌쇠의 거침없는 말투에 병사들은 서로 눈치만 볼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너무 긴장해서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도 모르겠다고 상관 앞에서 어떻게 솔직하게 말할 수 있으랴.

그러자 돌쇠는 말하지 않아도 다 안다는 듯 피식 웃었다.

“너희들, 이게 뭔지 알아?”

그는 고개를 돌려 얼굴 한쪽에 길게 그어져 있는 오래된 흉터를 드러내 보였다.

벌써 한참 전에 아물었지만, 칼에 베인 상처가 워낙 깊어 흉터가 남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덕분에 안 그래도 좋지 못한 인상이 몇 배로 나빠지긴 했으나, 정작 본인은 이 상처가 꽤 마음에 드는지 틈만 나면 자랑스레 내보이곤 했다.

“예전 전투에서 용감히 싸우다 다친 상처라고 들었습니다.”

돌쇠의 얼굴 상처는 나름 유명한 화젯거리였기에, 아직 신참티를 벗지 못한 젊은 병사들도 알고 있는 눈치였다.

“그래, 이것 말고도 내 몸엔 흉터가 많아.”

돌쇠는 소맷자락과 옷고름을 반쯤 풀어 몸 여기저기에 새겨져 있는 상처들을 보여 주었다.

할퀸 것처럼 얕은 게 있는가 하면 죽지 않은 게 다행이라 생각될 정도로 깊은 것도 보였고, 몸 전체가 어디 하나 매끈한 곳이 없었다.

그걸 본 병사들은 놀란 얼굴로 그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아프진 않으십니까?”

“이미 다 나은 상처인데, 뭘. 가끔 비 올 때 쑤시는 것만 빼면 그다지 불편하지도 않아.”

“역시 별장님은 대단한 분이십니다.”

비록 출신은 내수사 노비로 미천했지만, 그동안 세운 전공을 인정받아 병졸에서 하급 군관인 별장까지 승차한 돌쇠의 이야기는 근위대에서도 유명한 전설이었다.

“별장님은 세상에 무서운 것이 하나도 없으신가 봅니다.”

“인마, 나도 사람인데 어찌 무서운 게 없겠어? 이 흉터는 말이다, 나한텐 훈장 같은 거야.”

“훈장요?”

“그래. 전투를 치르면서 사선을 넘나들다 보면 몸에 이런저런 상처가 생기기 마련이거든. 그러니까 결국 이건 내가 끝까지 살아남았다는 증거란 뜻도 되지. 그리고 흉터가 하나둘씩 늘 때마다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거야, 어제보다 오늘의 내가 조금 더 강하다고 말이지.”

“그럼 뭐가 달라지나요?”

“아무렴! 쇠도 여러 번 두드려야 더 튼튼해지지 않냐, 그거랑 마찬가지야. 그리고 일단 마음가짐이 바뀌면 전투에 임하는 자세도 달라지고, 살아남을 확률도 훨씬 높아지는 거지.”

돌쇠는 굳은살이 박인 단단한 주먹으로 왼쪽 가슴을 툭툭 쳤다.

“기술이나 요령의 차이도 무시할 순 없지만, 결국 마지막에 살아남는 사람을 정하는 건 이 마음 하나에 달려 있다는 거다. 그걸 결코 잊어서는 안 돼.”

“별장님…….”

돌쇠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보니 긴장감에 딱딱하게 굳어있던 관절이 부드럽게 풀리고, 도저히 멈출 것 같지 않았던 몸의 떨림 또한 어느새 멎었음이 느껴졌다.

“그러니까 계집애처럼 밥알이나 깨작거리고 있지 말고 사내답게 퍽퍽 퍼먹으란 소리다, 알겠어?”

“예!”

돌쇠의 말에 용기를 얻은 젊은 병사들은 남아 있던 주먹밥을 한 톨도 남김없이 싹싹 비운 뒤 씩 웃어 보였다.

다음 날 아침이 되자 청군이 말발굽 소리를 울리며 지평선을 가득 메운 채 강 건너편에 모습을 드러냈다.

순찰을 돌다가 찾아낸 야생 더덕을 입안에 넣고 질겅질겅 씹고 있던 돌쇠는 눈앞에 보이는 적을 보며 퉤 하고 침을 내뱉은 뒤 퉁명스럽게 말했다.

“젠장, 더럽게도 몰려오는군.”

“별장님, 우리 이길 수 있겠지요?”

아직 어린 티가 나는 신병이 마른침을 삼키며 잔뜩 긴장한 얼굴로 묻자, 돌쇠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어깨를 가볍게 툭 치며 대답했다.

“훈련받은 대로만 하면 무조건 우리가 이기니까 쫄지 마. 알았지?”

“네.”

“그래.”

이처럼 실제로 적과 맞닥뜨리게 되자 약간의 동요가 일었지만, 하급 군관과 고참 들이 나서서 다독여 주자 병사들은 금방 안정을 되찾았다.

한편 화려한 갑옷을 입고 말 위에 앉아 조선군 방어진지를 확인한 호타이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정말 조선군이 잔뜩 모여 있군.”

척후를 통해 보고를 받기는 했지만 실제로 보니 마치 단단한 벽이 앞을 가로막고 있는 것 같았다.

“도독, 이대로 돌파를 강행하실 겁니까?”

바로 옆에 말을 타고 있는 부르칸이 꺼림칙한 얼굴로 묻자 잠시 침묵하던 호타이가 고개를 돌렸다.

“자네는 어떻게 했으면 좋겠나?”

“이 상태로 정면승부를 하면 패하지는 않겠지만 피해가 클 겁니다. 차라리 조금 시간을 지체하더라도 다른 도하 지점을 찾아보시지요.”

그러자 호타이는 머리를 좌우로 내저으며 말했다.

“강이 가로막고 있고 상대가 방어진을 구축해 놓고 있으니 공략하기가 쉽지는 않겠지. 하지만 우회할 수는 없어.”

“어째서입니까?”

“두 가지 이유가 있네. 첫째는 저 병력을 남겨 두고 곧장 한양까지 내려가면 언제든지 퇴로가 막히거나 뒤통수를 맞을 위험이 있어서고, 둘째는 저기 정면에 보이는 언덕 위에 꽂혀 있는 깃발 때문이야.”

“…….”

“자세히 보면 봉황이 화려하게 수놓아져 있을 거야.”

탁 트인 초원에서 태어나고 자란 유목민족답게 시력이 유난히 좋은 부르칸은 호타이의 말에 눈을 가늘게 뜨고 강 건너에 있는 언덕을 쳐다보았다.

너무 멀어 봉황인지는 확실히 모르겠지만, 다른 깃발보다 족히 배는 더 큰 황금색 사각기가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다.

“조선에서 봉황기는 국왕만이 쓸 수 있는 깃발이지.”

“설마!”

깜짝 놀라 눈을 크게 치켜뜬 부르칸을 보며 호타이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 생각이 맞다면 저기에 조선 국왕이 있을 거야.”

“한양에 있어야 할 자가 어떻게 여기에…….”

부르칸은 믿기 어렵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끝을 흐렸다.

“그건 나도 모르지. 어쩌면 심양성에 간자가 있어 출정 사실이 사전에 유출됐을 수도 있어.”

“혹시 공격을 유도하기 위한 함정이 아닐까요?”

“그럴 수도 있겠지만, 명예를 목숨처럼 여기는 조선 관리들의 모습을 볼 때 다른 것도 아니고 국왕을 상징하는 봉황기를 가짜로 세웠을 가능성은 낮을 거야.”

병자호란 때 인조가 수만 명의 청군이 도열하고 있는 사이를 걸어, 황제인 홍타이지를 향하여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이른바 삼배구고두례三拜九敲頭禮라는 치욕적인 항복례를 하자 소식을 들은 사대부들이 줄지어 자결했던 것을 기억하는 부르칸은 호타이의 이야기에 수긍했다.

“잘만 하면 굳이 한양까지 안 가고 조선 국왕을 잡아 항복을 받아 낼 기회이고, 함정이라고 해도 상대편 주력을 격파해 먼저 기선을 제압할 수 있으니 손해 볼 것은 없겠지.”

이야기를 들은 부르칸은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정면공격을 하면 상당한 피해가 예상되긴 하지만 그 이상으로 얻을 것이 있다는 판단이 든 것이다.

“길게 끌 것 없이 대열이 갖춰지면 바로 공격을 시작할 테니까 준비해.”

“알겠습니다.”

청군의 계획은 간단했는데, 일제 돌격으로 중앙을 돌파한 다음 배후에서 선회해 조선군의 측면을 유린하는 것이었다.

딱히 작전이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아주 단순했지만 가장 효과적이고 파괴력이 큰 공격 방법이었다.

수만에 달하는 팔기군이 말을 타고 일제히 돌격해 들어가는 것만으로도 상대를 공포와 혼란에 빠뜨리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

워낙 병력이 많아 한꺼번에 돌격하는 것이 어려웠던 청군은 총 세 개 제대로 나눠 각각 대형을 만들었다. 그래도 제대 하나에 속한 기병 숫자가 삼만이 훌쩍 넘었다.

준비가 모두 끝나자 호타이는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아 앞으로 내밀며 크게 외쳤다.

“주제도 모르고 감히 황제 폐하께 반기를 든 조선군을 싹 다 쓸어버린다. 팔기군, 돌격!”

뿌우우웅. 뿌우우웅.

돌격 명령과 함께 긴 뿔피리 소리가 전장 가득 울렸다.

그러자 대기하고 있던 일 제대 기병들이 일제히 땅을 박차며 앞으로 뛰어나갔고, 약간의 거리를 두고 이 제대가 뒤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이랴!”

“핫, 핫!”

두두두두두.

청군은 육중한 말발굽 소리로 사방을 진동시키며 마치 시커먼 해일이 몰려오듯 정면에 보이는 조선군을 향해 달려들었다.

조선군 방어진지까지는 사백 보 남짓 떨어져 있었는데, 중간에 넓은 압록강과 모래톱이 펼쳐져 있어 지형이 그다지 안 좋았지만 기병의 속도라면 2~3분 만에 도달할 수 있는 거리였다.

강변을 따라 길게 파 놓은 참호 안에 들어가 있던 조선군 병사들은 거센 파도처럼 밀려오는 청군을 보며 자신도 모르게 몸을 굳히고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젠장, 뭐가 저렇게 많아?”

“완전 개미 떼가 몰려오는 것 같아.”

“우리가 이길 수 있을까?”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 아까 별장님 말 못 들었어? 시키는 대로만 하면 우리가 이겨.”

막상 전투가 임박하자 병사들은 긴장과 불안 그리고 초초한 감정이 복잡하게 뒤엉켰다.

삼한 지방 반란부터 군에 있으면서 수많은 전투를 경험한 고참병들도 이때만큼은 평소처럼 실없는 농담을 던지지 않고 굳은 표정을 지었다.

“모두 정신 똑바로 차리고, 방포 준비!”

그때 같은 진지에 있던 돌쇠가 검을 들고 크게 소리치자 병사들은 어느새 머릿속에 든 잡념이 사라지고 훈련받았던 대로 허리에 찬 가죽 주머니에서 총알을 꺼내 장전했다.

철컥, 철컥.

노리쇠를 비틀어 연 뒤에 총알을 약실에 넣고 다시 되돌려 밀어 장전하며 병사들은 조금씩 긴장된 마음을 풀었다.

그런 보병들 머리 위로 휘파람 비슷한 소리가 울리더니 포대에서 쏜 포탄이 날아갔다.

천리경으로 전장을 살피던 도현은 공격을 시작한 청군이 화포 사정거리 안에 들어오자 약간 굳은 목소리로 지시를 내렸다.

“포대에 신호를 보내라.”

“옛.”

대답과 함께 한쪽에 서 있던 군관이 붉은색 삼각 깃발을 들고는 좌우로 크게 흔들었다.

바로 각 포대에 화포를 쏘라는 신호였다.

그러자 조선군이 보유한 화포 중 가장 사거리가 긴 천자총통부터 차례대로 불을 뿜기 시작했다.

“발포하라!”

신호를 본 군관이 목이 터져라 고함을 지르자, 미리 장전을 다 끝내 놓고 기다리던 화포장들이 바로 들고 있던 횃불로 심지에 불을 붙였다.

치이익.

꽝! 꽝! 꽝!

육중한 포성과 함께 순식간에 뿌연 화약 연기가 포대를 온통 뒤덮었고, 포수들은 곧장 포신에 묻은 찌꺼기를 닦아 낸 뒤 포탄과 화약을 장전하고는 얼마 안 있어 이 탄을 연이어 쐈다.

포물선을 그리면서 날아간 포탄은 말을 달리며 돌격하는 청군 사이에 정확히 떨어져 폭발했다.

슈우우웅- 쿠우웅!

쿠쿵!

“으악!”

“끄어억.”

이히히힝.

폭음이 터질 때마다 말의 구슬픈 울음소리와 청군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명과 싸우면서 이미 화포를 경험했지만, 이렇게 백여 문 가까이 되는 화포가 동시에 불벼락을 치는 것은 청군도 처음이었다.

특히나 커다란 쇠공이 그냥 날아오는 것이 아니라 폭발을 하며 수많은 파편을 사방에 뿌렸기에 피해가 더 컸다.

청군도 충격을 받았지만 가장 놀란 건 말들이었는데, 요란한 폭음에 겁을 먹고 흥분해서는 달려가는 걸 멈추거나 이리저리 날뛰었다.

“이런!”

“워워.”

푸르릉.

팔기군 병사들이 진정시키려고 애를 썼지만 말들은 흥분을 쉽게 가라앉히지 못했다.

앞발을 들고 날뛰자 낙마하는 이들이 속출했고, 몸 위로 덮쳐 오는 말발굽에 큰 부상을 입거나 심지어 목숨을 잃기까지 했다.

그런 청군을 향해 바람을 가르는 소리를 내며 포탄이 쉬지 않고 계속 쏟아졌다.

슈우우웅!

꽈광!

하지만 최강의 군대라는 별명이 그냥 붙은 것은 아님을 보여 주기라도 하듯, 포격에 크게 당황하기는 했지만 팔기군은 이내 전열을 빠르게 재정비한 뒤 포탄 세례를 뚫고 계속 앞으로 돌격했다.

“거리를 좁히면 조선 놈들도 화포를 쏘지 못한다!”

“죽은 동료들의 복수를 하자!”

“와아아!”

포격으로 상당한 타격을 입었지만 아직 청군은 수만에 달하는 병력이 남아 있었고, 호전적인 전사들답게 기세가 꺾이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전의를 불태우며 말에 채찍질을 했다.

풍덩! 풍덩!

강에 도달한 청군은 물보라를 일으키며 거침없이 강에 뛰어들었다.

흐르는 강물을 헤치고 가야 하기 때문에 속력이 조금 줄어들었지만, 수위가 낮아 물이 말 무릎까지밖에 오지 않으니 그대로 도강을 하는 데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아래로 백 보 당기고 준비되면 쏴라!”

포수들은 빠르게 접근하는 청군을 따라 탄착 지점을 계속 바꾸며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장전과 발사를 반복했다.

쿠쿵! 꽈아앙!

폭음과 함께 하얀 물기둥이 솟아오를 때마다 병사들이 피투성이가 되어 날아갔지만, 청군은 전혀 개의치 않고 기세를 올리며 앞다퉈 조선군 진형을 향해 내달렸다.

마침내 청군 일 제대가 강을 건너 이쪽 모래사장에 올라서자 남두병 장군이 도현을 보며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비격진천뢰를 터트려야 되지 않겠사옵니까?”

이대로 방어선까지 적이 쇄도해 들어올까 봐 마음이 초조한 남두병 장군과 달리 도현은 계속 전장을 주시하며 담담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직 멀었어. 조금 더 기다렸다가 효과를 최대화해야 돼.”

“하지만 이러다가 방어선이 뚫리기라도 하면…….”

“이쯤은 총병들만으로도 충분히 막아 낼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말게.”

“……예.”

불안감을 완전히 지울 수 없었지만 남두병 장군은 도현의 말에 더 이상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한편 방어선에 있는 조선군 병사들은 포격을 뚫고 달려오는 청군을 쳐다보며 바짝 긴장했다.

“적이 온다, 모두 사격 준비!”

“먼저 격발하지 말고 지휘관의 명령을 잘 들어라!”

두려움을 없애고 병사들을 집중시키기 위해 군데군데 배치된 군관들은 일부러 더 큰 소리로 고함을 질러 댔다.

머리 위로 계속 포탄이 날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병사들은 참호 벽에 기대서서 가늠쇠로 전방에 보이는 적을 조준했다.

서로의 거리가 점점 줄어들었고,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작은 점으로 보이던 청군이 이제 사납게 일그러뜨린 얼굴이 구분될 정도로 가까워졌다.

숫자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적이 새까맣게 파도처럼 몰려오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며 조선군 병사들은 강한 위압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젠장, 엄청나게 쏴 댔는데 아직도 더럽게 많이 남았잖아!”

“그러게. 우리가 놈들을 막아 낼 수 있을까?”

옆에 선 동료가 불안한 듯 창백한 표정을 짓자 눈이 부리부리하게 생긴 병사가 바닥에 퉤 하고 침을 뱉으며 말했다.

“어차피 이판사판이야. 먼저 못 죽이면 우리가 뒈지는 수밖에.”

“으음.”

“아까 군관들 하는 이야기 들었지? 살아 돌아가서 가족들 다시 보고 싶으면 정신 똑바로 차려.”

“그래.”

불안해하던 병사는 가족이라는 말에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신형 조총을 든 손에 힘을 꽉 줬다.

이 병사뿐만 아니라 지축을 울리는 말발굽 소리를 내며 사납게 달려드는 팔기군의 모습은 아무리 대범한 사람이라도 긴장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여기서 조금만 더 심해지면 양옆에 수많은 전우가 함께 있음에도 마치 적이 자신만 노리고 달려오는 듯한 공포와 착각에 빠질 수 있었다.

그런 압박감을 견디지 못하면 이성을 잃고 뒤로 도망치는 병사가 나오고 공포가 삽시간에 확산되어 결국 대열 전체가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무너지는 것이다.

그걸 알기에 군관들은 다른 생각을 못 하도록 고함을 내지르며 부하들을 다그쳤다.

상대가 백 보 안으로 들어오자 보병 지휘를 맡은 박영식 장군이 첫 번째 방어선 바로 뒤에 있다가 큰 소리로 공격 명령을 내렸다.

“지금이다, 신호를 올려라!”

삐이이익.

귀청을 때리는 날카로운 소리에 급히 고개를 돌린 돌쇠는 화살 끝단에 명적을 단 효시嚆矢가 위로 올라가는 걸 보고 목이 터져라 외쳤다.

“발사!”

그러자 아까부터 적을 조준하고 있던 병사들이 반사적으로 방아쇠를 당겼다.

타타탕! 타탕! 타탕! 탕!

강변을 따라 길게 이어진 참호선에서 불꽃이 번쩍이며 일제히 조총이 발사되었고, 총구에서 나온 총탄은 공기를 가르며 빠른 속도로 날아가 정면에 있는 팔기군을 맞추었다.

“으아악.”

“크흑!”

“컥!”

히히힝.

수천수만 정에 달하는 신형 조총의 일제사격을 그대로 뒤집어쓴 청군 일 제대 선두는 썩은 짚단처럼 우수수 쓰러졌다.

두세 발씩 몸에 총탄을 맞은 적병은 피를 뿌리며 말에서 굴러떨어졌고, 주인 잃은 말들은 총성에 놀라 앞발을 들고 날뛰거나 그대로 뒤돌아 도망갔으며, 비록 낙마했지만 아직 죽지 않고 살아 있던 청군 병사들은 흥분해서 이리저리 날뛰는 군마 말발굽에 짓밟혀 목숨을 잃었다.

“재장전! 쏴!”

철컥, 철컥.

군관이 외치기 전에 훈련받은 대로 쏘자마자 곧바로 능숙하게 재장전을 한 병사들은 쉬지 않고 계속 사격을 가했다.

탕! 탕! 타탕! 탕!

이 시대에 가장 흔한 화승총이 보통 1분 내외로 재장전이 가능했는데, 조선군이 쓰는 신형 조총은 30초 정도면 다 끝낼 수 있었고 거기다 피땀이 어린 반복 훈련으로 시간을 더 단축해 거의 10초에 한 번씩 총을 발사했다.

여기다가 총병 숫자까지 엄청나다 보니 청군은 연속해서 계속 조총이 발사되는 듯한 착각까지 들었다.

한 번에 수십 명의 기병이 피투성이가 되어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강변은 어느새 청군 병사와 군마 들의 시신으로 가득 찼고 그들이 흘린 피로 강물이 붉게 물들었다.

뿌연 화약 연기로 뒤덮인 조선군 진영에서 불빛이 번쩍이고 총성이 울릴 때마다 청군 병사들이 비명을 내지르며 시체로 변했다.

연거푸 날아오는 치열한 총탄 세례와 포격에 일 제대는 이미 병력의 절반 이상을 잃은 상태였다.

그렇지만 여기서 물러설 수 없었던 청군은 엄청난 피해를 감수하면서도 악착같이 조선군과의 거리를 좁혀 왔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뒤에서 계속 후속 병사들이 강을 건너 몰려오고 있었기에 좁은 백사장에 갇혀 다 죽지 않으려면 어떻게든 조선군 방어선을 돌파하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이었다.

“으음.”

강 건너편에서 아군이 조선군한테 혹독하게 당하는 걸 보며 호타이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낮게 침음을 내뱉었다.

어느 정도 피해를 입으리라는 것은 예상했지만 이렇게까지 저항이 거셀 줄은 상상도 못 했다.

특히 조총의 존재는 알고 있었지만 이런 식으로 대규모로 총병을 운영해 총격을 퍼붓는 건 호타이뿐만 아니라 청군 장수 모두에게 충격 그 자체였다.

너무 성급하게 돌격 명령을 내린 건 아닌지 후회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이미 돌이킬 수가 없었다.

“도독, 피해가 너무 큽니다.”

당혹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하며 부르칸이 말하자 호타이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호통을 쳤다.

“여기서 물러설 수는 없어. 거리를 좁히면 저까짓 조총은 무용지물이 될 테니 머뭇거리지 말고 계속 돌격시켜!”

“하지만…….”

“뭘 꾸물거리고 있나, 어서 명령을 전파하지 않고!”

조선군 방어선에 닿기도 전에 기병들이 먼저 전멸하겠다는 이야기가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잔뜩 일그러뜨리고 있는 호타이의 얼굴에 부르칸은 말을 삼켜야 했다.

“옛.”

이미 조선군 방어진지까지 이어지는 길은 일 제대 병사들의 시신과 피로 뒤덮여 있었고 벌써 이 제대가 강을 넘어간 상황이라 돌격을 멈추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러니 병사들의 죽음을 의미 없이 만들지 않으려면 이대로 계속 밀어붙이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조금 뒤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를 알았다면, 호타이는 피해를 감수하더라도 결코 재차 돌격 명령을 내리지 않았을 것이다.

시큼한 화약 연기와 총성 그리고 말발굽 소리가 뒤엉킨 전장에 흥분할 만도 했지만, 도현은 시종일관 차갑게 냉정을 유지하면서 손에 든 지휘봉으로 막 강을 건너온 이 제대를 가리키며 말했다.

“지금이야. 비격진천뢰를 폭발시키게.”

“알겠사옵니다.”

언덕 위에 설치된 지휘소에서 깃발 신호를 보내자 초조하게 폭발 명령을 기다리고 있던 군관들은 지체 없이 도화 장치에 불을 붙였다.

치이익.

강변에 묻어 둔 비격진천뢰까지 이어진 얇은 대나무 통에 삐죽이 나온 심지는 금방 불꽃을 피워 올리며 안으로 타들어갔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천지가 뒤집어지는 듯한 엄청난 폭음이 사방을 진동시켰고, 동시에 수십 개의 불기둥이 치솟았다.

꽈과광! 쿠쿵! 쿵!

방어진지 앞에 땅을 살짝 파고 미리 묻어 둔 비격진천뢰 수십 개가 한꺼번에 터진 것이었다.

폭발이 얼마나 큰지 백 보가 넘게 떨어진 방어선까지 뜨거운 열기가 그대로 느껴졌고 마치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땅이 마구 흔들렸다.

엄폐물도 없이 폭발에 그대로 휩쓸린 청군은 말할 것도 없었다. 폭발도 치명적이었지만 사방으로 뿌려진 수십, 수백 개의 날카로운 쇳조각 또한 살상반경 안에 있는 적들을 걸레처럼 찢어 놓았다.

“끄허억.”

“커컥……!”

“아악!”

지리멸렬한 일 제대를 추월해 곧장 조선군을 유린해 버릴 것처럼 기세를 올리며 달려오던 청군 이 제대는 비격진천뢰가 터지면서 만들어 낸 무시무시한 폭발에 휩쓸려 그대로 박살이 났다.

드넓은 모래사장은 청군 병사와 말들이 흘린 피로 붉게 물들어 있었고 곳곳에서 비명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지옥과도 같은 모습이었지만, 강하게 압박해 오던 청군의 기세가 완전히 꺾인 것에 조선군 병사들은 함성을 내지르며 기뻐했다.

“우와아아!”

“이놈들아, 맛이 어떠냐!”

굳은 얼굴로 전투를 지휘하던 박영식 장군도 뿌연 화약 연기가 걷히면서 드러난 비격진천뢰의 위력에 주먹을 꽉 움켜쥐며 미소를 지었다가 이내 다시 정색을 하며 외쳤다.

“아직 전투가 끝나지 않았다. 모두 진정하고 남아 있는 적에게 계속 사격을 퍼부어라!”

그러자 조선군 병사들은 이제 완전히 두려움을 떨쳐 냈는지 참호 위로 상체를 드러내면서 아까보다 더 적극적으로 조총을 쏴 댔다.

“마, 말도 안 돼.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눈을 크게 치켜뜬 호타이는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무적을 자랑하며 앞에 있는 건 뭐든지 다 짓뭉개 버릴 것처럼 거센 파도가 되어 돌격해 들어가던 팔기군이 상대가 쏟아 낸 화약 무기에 너무나도 어이없이 녹아내린 것이다.

처음 포격과 총탄 세례에 선두 열이 무너질 때까지만 해도 다소 피해는 있을지언정 전투에 패할 거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더 격렬해지는 공격에 청군은 속수무책으로 쓰러졌고, 급기야 비격진천뢰가 동시에 터지면서 회복할 수 없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고 말았다.

이미 강 주위는 시산혈해를 이루며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을 만큼 끔찍한 광경이 펼쳐졌지만, 조선군은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계속해서 포탄을 날리고 사격을 가했다.

얼마나 지독하게 공격을 해 대는지, 쳐들어온 청군을 단 한 명도 남기지 않고 다 죽여 버리려는 것 같았다.

실제로 도현은 만주를 보다 손쉽게 장악하기 위해 호타이가 끌고 온 팔기군을 여기서 모두 괴멸시킬 작정이었다.

주위에 있던 장수들은 전멸 상태에 놓인 일 제대와 이 제대를 보며 너무 놀라 멍하니 입을 다물지 못하거나 공포에 질린 표정을 지었다.

이제 마지막으로 남은 삼 제대가 강을 넘어가려 했지만, 앞서 보낸 병력이 다 박살 난 상황에서 다시 돌격해 들어가 봤자 조선군의 제물이 되어 축차 소모가 될 뿐 적진을 돌파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조선군이 가진 화력을 정확히 파악하지 않고 무작정 돌격을 감행한 것이 너무나도 뼈아픈 실책이었다.

지금 와서 후회해 봤자 다 부질없는 짓일 뿐, 이제 전세가 돌이킬 수 없을 만큼 기울어졌다는 걸 깨달은 호타이는 분했지만 다음을 기약하기 위해서는 그나마 남은 병력이라도 보존해야 했기에 침통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모두 후퇴시키게.”

“알겠습니다.”

내심 바라고 있던 명령이었기에 얼른 머리를 끄덕인 부르칸은 후퇴 신호를 울리도록 했다.

땡! 땡! 땡!

퇴각을 알리는 종소리가 요란하게 울리자 달려가던 삼 제대는 황급히 고삐를 당겨 말을 멈춰 세웠고, 강변에 돈좌된 채 포격과 총탄 세례를 뒤집어쓰며 죽어 나가던 청군들은 허겁지겁 피로 물든 압록강을 다시 건너갔다.

“전하, 적이 후퇴하고 있사옵니다.”

이겼다는 생각에 약간 들뜬 목소리로 남두병 장군이 말하자, 갑옷을 입은 채 전장을 계속 주시하던 도현은 표정 변화 없이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는 지휘봉으로 강 너머에 있는 적을 가리키며 지시를 내렸다.

“어렵게 승기를 잡았는데 이대로 보내 줄 수는 없지. 남 장군.”

“하교하시옵소서.”

“효시를 쏴서 우회시켜 놓은 기병대가 측면을 강타하도록 신호를 보내고, 신기전으로 적군을 혼란에 빠뜨리시오.”

“알겠사옵니다.”

허리를 숙인 남두병 장군의 대답을 들으며 도현은 다시 당당하게 언덕 위에 서서 천리경으로 전장을 살폈다.

잠시 뒤 지휘소에서 발연통을 매단 효시가 붉은색 연막을 피우며 하늘 높이 솟구쳤고, 방어선에 배치된 화차들이 일제히 불을 뿜는 것과 동시에 신기전 수천 발이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쉭! 쉬쉬쉭! 쉬이익―! 쉭!

도화선에 불이 당겨지자 화차 한 개당 백 개의 신기전이 발사됐는데, 매캐한 화약 연기와 허공을 가르는 바람 소리를 내며 날아가는 신기전은 엄청난 장관을 연출했다.

몸체에 장착된 화약통이 연소하며 만들어 낸 추진력 덕분에 일반 화살로는 어림도 없는 거리를 단번에 빠른 속도로 가로지른 신기전은 강 너머에 있는 청군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으아악!”

“끄억.”

“이건 또 뭐야!”

“어서 피해!”

이히히힝.

푸르릉.

겨우 화포 사정거리 밖으로 나와 안도하고 있던 청군에게 신기전 공격은 말 그대로 날벼락이 따로 없었다.

포물선을 그리면서 날아온 신기전은 비처럼 쏟아져 청군을 덮쳤고, 적병들은 한 번에 두세 발씩 꿰뚫린 채 비명을 내지르며 땅바닥에 떨어졌다.

말들도 구슬픈 울음소리를 내며 날뛰다 옆으로 털썩 주저앉았다.

이렇게 직접 타격하는 것도 있었지만 일부 신기전은 비격진천뢰처럼 몸체에 도화선이 달린 폭탄을 달고 있다가 적군의 머리 위에서 터졌다.

꽈꽝! 꽝! 꽝!

벼락이 치는 듯한 폭음이 청군의 귀를 때리는 것과 동시에 폭탄 안에 꾹꾹 채워 둔 날카로운 쇳조각이 아래로 쏟아졌다.

신기전 자체로도 위력적이었지만 공중에서 터트리면 효과가 한층 더 배가한다는 걸 알고 있던 도현의 꼼수가 제대로 통했는데, 청군이 허겁지겁 원형의 방패를 꺼내 들어 어떻게든 막아보려고 했지만 작은 쇳조각 수백, 수천 개가 빠른 속도로 떨어져 내리는 것에는 속수무책이었다.

“크헉!”

“으아아악!”

“사, 살려 줘.”

“여긴 지옥이야!”

공중에서 연이어 신기전이 터지는 것과 함께 청군의 비명이 끊이지 않았다.

쇳조각이 여기저기 박힌 끔찍한 모습으로 죽어 나가는 동료들을 본 팔기군은 어느새 무적의 군대라는 이름은 사라지고 겁에 질려 조금이라도 더 빨리 강에서 벗어나려고 서로 밀치며 발버둥을 쳤다.

급기야 같은 편끼리 칼부림을 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저리 비켜!”

“너나 나와!”

“이 자식이.”

슈각!

“컥.”

“끄억.”

신기전이 공중에서 터지는 것도 놀라웠지만 이제 안전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니, 머릿속에 남아 있던 이성의 끈이 끊어지며 오직 살려고 하는 본능만이 남아 적병들을 지배하기 시작한 것이다.

공포에 질린 적병들은 앞을 가로막는 것이 있으면 그게 같은 편이라도 상관하지 않고 무기를 휘둘렀고, 낙마했지만 아직 살아 신음을 흘리고 있는 동료를 구해 주기는커녕 오히려 그냥 말발굽으로 밟아 죽이며 지나갔다.

“오, 오지 마!”

“끄헉.”

이성을 상실한 청군은 더 이상 아군을 아군이 아니라 그저 퇴로를 막고 있는 장애물로만 인식했다.

강을 건너 날아온 신기전이 공중에서 폭발까지 하자 혼이 빠진 듯한 표정을 짓던 호타이는 혼란에 빠진 부하들이 상잔을 벌이는 모습에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고함을 내질렀다.

“멍청한 놈들, 어서 병사들을 진정시키지 않고 뭘 하고 있는 거냐!”

호통을 친 호타이까지 부장들과 함께 나서서 혼란에 빠진 병사들을 진정시키려고 했지만, 상황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아무리 강한 팔기군이라도 지금처럼 명령 체계가 무너지고 우왕좌왕한다면 그저 평범한 기병에 불과했다.

아니, 오히려 지금은 평소 오합지졸이라고 놀리던 명나라 군대보다도 못한 상태였다.

그나마 조선군이 보유한 신기전 수량이 그렇게 넉넉하지 않아서 금방 사격을 멈췄기에 망정이지 반 시진 정도만 계속 쏴 댔다면 청군은 힘도 제대로 쓰지 못하고 그대로 괴멸당하고 말았을 것이다.

신기전 사격이 멈추자 호타이는 만신창이가 된 병력을 보며 속으로 피눈물을 흘리고는 남은 병사들이라도 보존하기 위해 재차 후퇴 명령을 내렸다.

“조선군이 강을 넘어오기 전에 모두 파속부로 퇴각하라!”

파속부는 현재의 단둥으로,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청나라 마을이었다.

제대로 된 성곽이 없어 방어에 취약했지만 호타이는 일단 그곳으로 후퇴해 전열을 재정비할 생각이었다.

가깝기도 했고, 비록 전투는 패했지만 설마하니 조선군이 압록강을 건너 청나라 영토 안으로까지 쳐들어오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이 깔려 있었다.

거기서 숨을 돌린 뒤 병력을 다시 끌어모아 오늘 당한 치욕을 몇 배로 되갚아 줄 작정이었다.

하지만 그런 호타이의 희망은 후방에서 뿌연 먼지구름을 피워 올리며 조선군 기병대가 모습을 드러내는 것과 함께 산산조각 났다.

두두두두!

“제기랄, 조선군 기병이다!”

근위대와 이 군단 소속 기병 일만이 미리 강을 건너 숨어 있다가 지축을 울리는 요란한 말발굽 소리를 내며 불쑥 후방에서 나타나자 청군은 순간 온몸이 얼어붙었다.

기병대 지휘를 맡은 박경지 장군은 손에 든 장검을 앞으로 내밀며 부하들을 독려했다.

“조선군의 무서움을 보여 줘라, 돌겨어억!”

“우와아아!”

뿌우우웅! 뿌우우웅!

신호수가 말을 탄 채 뿔고동을 길게 불면서 돌격을 알렸고 기병들은 연신 채찍질을 가하며 앞으로 달려 나갔다.

그 모습이 마치 거대한 파도가 덮쳐오는 것 같았다.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린 호타이는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아 들며 외쳤다.

“빨리 전투대형을 갖춰라! 적을 막은 다음 포위당하기 전에 그대로 활로를 뚫어 파속부로 물러난다.”

이대로 포위를 당한다면 끝장이었기에, 피해는 크겠지만 일단 조선군 기병과 맞붙어 퇴로를 열 작정이었다.

호타이의 외침에 우왕좌왕하던 청군은 다급히 모여 전투대형을 갖췄다.

조금만 더 시간이 있으면 제대로 대형을 갖출 수 있었지만 벌써 조선군 기병대가 백 보 안까지 짓쳐들어오고 있었기에 호타이는 혀를 차며 명령을 내렸다.

“공격!”

“이랴!”

호타이가 우렁차게 외치며 옆구리를 걷어차자 깜짝 놀란 말은 힘껏 앞으로 내달렸고 그 뒤를 부르칸과 다른 팔기군 병사들이 따랐다.

여기서 조선군 기병대를 이겨 내지 못하면 더 이상 희망이 없었기에 청군도 필사적이었다.

“거검擧劍!”

차차차창.

구령에 맞춰 검을 뽑아 앞으로 내민 청군은 더욱더 빨리 말을 몰았다.

양쪽을 합쳐 수만 기에 달하는 기병이 지축을 울리며 서로를 향해 돌격하는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강 건너 지휘소에 서서 전장을 살피던 도현은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는 천리경에서 눈을 떼지 못했고, 방어진지에 있는 병사들도 바짝 긴장한 얼굴로 기병 간의 싸움을 지켜보았다.

일촉즉발의 순간 조선군 기병들이 뭔가를 꺼내 들었다.

바로 지난겨울에 벌어진 북방 전투에서 우라타 부족 전사들을 괴멸시키는 데 단단히 한몫을 한 웅-오식 권총이었다.

선두에 서서 돌격을 지휘하다 그것을 본 호타이는 뭔지 몰라도 불길한 느낌이 들었지만, 이미 가속도가 붙어서 달리고 있는 이상 여기서 멈춰 설 수는 없었다.

불안한 마음을 떨쳐 내려는 듯 호타이는 일부러 더 큰 목소리로 부하들을 독려했다.

“단번에 돌파하는 거다. 앞에 걸리적거리는 것들은 다 쓸어버려라!”

양쪽의 거리가 오십여 보로 좁혀졌을 때 박경지 장군이 일제사격 명령을 내렸다.

“쏴라!”

타탕! 탕! 탕! 탕!

불꽃과 함께 화약 연기가 자욱하게 피어올랐는데 조선군 기병들은 아주 능숙한 솜씨로 말을 달리면서 권총에 장전된 다섯 발을 연달아 모두 발사했다.

앞에서 들리는 격렬한 총성에 호타이는 눈썹을 위로 추켜올렸다.

“이게 무슨……!”

강을 건너 돌격하다 괴멸당한 부하들의 모습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과 동시에 날아온 총탄이 팔기군을 덮쳤다.

피슝! 슝!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리고 총탄이 아슬아슬하게 호타이의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화살이면 검으로 쳐 내기라도 하겠건만, 이건 섬뜩한 소리만 들릴 뿐 눈에 보이지도 않으니 공포 그 자체였다.

바로 뒤에서 따라오던 병사들이 무더기로 피를 뿌리며 쓰러졌고 총성은 연이어 터져 나왔다.

그렇게 마주 보며 달려오던 팔기군 수백 명이 총에 맞아 쓰러지자 박경지 장군은 검을 좌우로 흔들면서 호기롭게 외쳤다.

“한 놈도 살려 보내지 마라!”

“우오!”

어느새 사격을 다 끝낸 조선군 기병들은 재빨리 권총을 집어넣은 후 왼손으로 고삐를 잡고 반대편 손으로 장검을 뽑아 높이 치켜들었다.

칼날은 햇빛을 반사해 섬뜩한 반사광을 내뿜었고 기세가 오른 조선군 기병은 살기를 가득 피워 올렸다.

전체 병력으로 볼 때 총탄에 맞아 쓰러진 적병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팔기군은 전투에서 가장 중요한 기선을 완전히 제압당해 버렸다.

그런 가운데 조선군 기병대와 팔기군이 서로 엇갈리면서 빠르게 충돌했다.

촤촤촹!

“크악!”

“으윽.”

이히히힝.

“이야아!”

박경지 장군은 눈앞에 가죽 갑옷을 입은 청군 병사가 가득 들어오자 지체 없이 상대의 옆구리를 검으로 힘껏 베었다.

슈각.

“끄흑.”

일격에 당한 적병은 억눌린 신음을 내뱉으며 옆으로 굴러떨어졌고, 그 순간 박경지 장군이 탄 군마가 어깨에 총상을 입고 땅바닥에 쓰러져 있던 또 다른 적병을 말발굽으로 무참하게 짓이기면서 지나갔다.

꽈직.

“죽어라!”

살짝 불쾌한 느낌에 눈가를 찡그리던 박경지 장군은 적병 하나가 고함을 지르며 달려와 무기를 휘두르자 몸을 비틀어 피하고는 바로 상대편 가슴을 노리고 검을 위로 그어 올렸다.

뼈가 부딪쳐서 잘려 나가는 것이 그대로 느껴졌고 이내 적병이 피를 분수처럼 내뿜으며 뒤로 넘어갔다.

박경지 장군뿐만 아니라 조선군 기병들 대부분이 거침없이 검을 휘두르며 상대를 몰아붙였고, 기세가 꺾인 팔기군은 반격은 고사하고 제 몸 하나 지키기에 급급했다.

말 울음과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가득한 가운데 칼날이 번쩍일 때마다 피를 뿌리면서 낙마하는 것은 열에 아홉이 청군이었다.

예상치 못한 강력한 화약 무기에 방어선 돌파는 실패했지만, 장기인 기병끼리의 전투는 자신이 있었던 호타이는 무적의 팔기군이라는 이름이 무색할 만큼 너무나도 허무하게 무너지는 부하들의 모습에 경악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패배를 인정하기 싫었지만, 드넓은 벌판 곳곳에 쓰러져 나뒹굴고 있는 건 태반이 청군 병사들이었다.

아직 조선군 기병과 치열하게 맞서 싸우며 저항하는 병사들도 보였지만, 상황이 그다지 좋지 않았고 뒤를 돌아보자 어느새 참호를 나온 보병들이 전투대형을 만들어 강을 건너오려고 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진퇴양난이 아닐 수 없었다.

“제기랄!”

이를 부드득 간 호타이는 마지막 발악이라도 하듯 고함을 질렀다.

“싸워! 싸우란 말이다!”

그러고는 부관인 부르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제일 가까이 있는 조선군 기병을 향해 달려갔다.

“하압!”

호타이의 기세에 놀란 상대가 허겁지겁 방어를 했지만 그가 길게 내뻗은 검이 더 빨랐다.

푹.

“끄억.”

검은 상대의 심장을 정확히 꿰뚫었다.

검붉은 피를 울컥 토해 내며 쓰러지는 조선군 기병을 피한 호타이가 말 머리를 돌려 다른 먹잇감을 찾기 위해 주위를 둘러보는 순간, 뭔가 날카로운 것이 어깻죽지를 깊숙이 파고들었다.

“큭.”

시선을 아래로 내리자 어디선가 날아온 총탄이 박혀, 입고 있는 갑옷이 시뻘건 피로 흠뻑 젖고 있었다.

그리고 극심한 고통이 등줄기를 타고 올라왔다.

“젠장할.”

몸을 휘청거린 호타이는 욕설을 내뱉으면서 겨우 중심을 잡고는 한쪽 손으로 상처 부위를 꾹 눌렀다.

나름 지혈을 해 보려는 것이었지만, 피는 멈추지 않고 계속 배어 나왔고 호타이는 아찔한 현기증을 느끼며 그대로 낙마하고 말았다.

털썩.

흙바닥에 떨어진 호타이가 정신을 잃기 전에 본 것은 뭐라고 크게 외치면서 황급히 다가오는 부르칸의 모습이었다.

푸른 압록강을 가운데 두고 벌어진 격렬한 전투는 서산 너머로 뉘엿뉘엿 지는 석양과 함께 조선군의 승리로 끝이 났다.

아침부터 늦은 오후까지 계속된 싸움으로 인해 청군은 총 십만의 병력 중 절반이 넘는 육만 팔천 명이 죽거나 크게 다쳤고, 나머지는 포로가 되었다.

가까스로 전장을 빠져나간 청군은 겨우 천여 명 남짓이었는데 어깨에 총상을 입은 호타이도 여기에 포함됐다.

이에 반해 조선군이 입은 피해는 전사 삼백육십 명에 부상 칠백이십 명으로, 이것만 봐도 얼마나 일방적인 전투였는지를 알 수 있었다.

비록 심양 도독인 호타이를 놓쳤지만 이걸로 만주 지역에 남아 있던 청군은 완전히 괴멸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전장 정리를 하며 하루를 압록강 강변에서 머문 조선군은 다음 날 봉황기를 앞세우고 당당히 강을 건너 만주 내륙으로 진군했다.

그리고 대승을 거뒀다는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 전령이 의주성을 떠나 한양으로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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