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양 공략
평소보다 더 일찍 일어난 중전 장씨는 따뜻한 물로 세수를 하고 궁녀들의 도움을 받아 머리에 가채를 올렸다.
도현이 없는 동안 대궐의 기강을 책임져야 할 사람은 바로 중전이므로 언제 어디서나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도록 몸가짐에 더욱 신경을 쓰고 있는 것이다.
“마마, 세자 저하와 공주들께서 문안 인사를 드리러 오셨습니다.”
“들라 하게.”
“예.”
궁녀들이 주변을 치우고 방을 나가자 곧이어 교대하듯이 연과 숙안, 숙휘 공주가 함께 안으로 들어왔다.
“어마마마, 밤새 평안하셨나이까.”
“오냐.”
도현이 출정하기 전에 남긴 당부의 약발이 상당했는지, 제법 의젓한 자세로 문안 인사를 하는 연을 중전은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연이도 간밤에 잘 잤느냐?”
“네.”
“우리 공주들은 어떻고?”
“저희도 아무 일 없었어요.”
“좋은 꿈이라도 꾸면 재밌었을 텐데, 그냥 눈 감았다 뜨니 아침이던걸요.”
깜찍한 표정으로 넷째 숙휘 공주가 그리 말하자 중전은 작게 미소 지었다.
“오히려 잘된 일이지 않느냐. 길몽이면 좋은 일이 생길 징조이니 기쁘기야 하겠다만, 평소에 꾸는 아무런 뜻도 없는 꿈은 잡념이 들게 하고 몸을 피곤하게 하니 없는 것이 더 나은 게다.”
“그런가요?”
잘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숙휘 공주에게 중전은 조금 더 크면 알게 될 거라고 웃어넘겼다.
“그런데 숙안.”
“예.”
“잘 잤다고 한 것치곤 안색이 별로 안 좋구나. 피부도 거칠어 보이고, 무슨 근심거리라도 있는 게냐?”
“아…….”
날카로운 중전의 눈썰미에 숙안 공주는 정곡을 찔린 표정을 지었다.
“사실은 간밤에 일찍 잠자리에 들긴 했습니다만, 푹 자지는 못했습니다.”
“아니, 왜?”
숙안 공주는 어릴 때부터 어른스럽고 얌전해 손이 잘 가지 않는 착한 아이였는데 갑자기 고민거리가 있다고 하니 당혹스러웠다.
“아바마마께선 걱정할 것 없다고 하셨습니다만, 아무래도 멀리 떨어진 데다 위험하기 그지없는 곳에 계시니 어떻게 지내시는지, 어디 다치신 곳은 없는지 이런저런 생각이 자꾸만 들어서…….”
“저런, 그래서 밤새 뒤척이느라 잠을 제대로 못 잔 게냐?”
“예.”
부끄럽다는 듯 숙안 공주가 볼을 빨갛게 물들였다.
연은 사내아이라 후계자로서 특별한 존재고 숙휘 공주는 막내 특유의 애교로 도현을 웃게 하지만, 숙안은 심양에서 첫째를 잃고 두 번째로 얻은 아이라 도현에게도, 중전에게도 각별한 존재였다.
숙안이 중전의 배 속에 들어서지 않았다면 연과 숙휘가 과연 태어났을까 싶을 정도로 부부 사이에 큰 기점이 되어 준 아이.
게다가 머리는 사내 뺨치게 총명한데 어릴 때 앓은 곰보 때문에 여자로서 제일 중요한 용모를 망쳤으니, 두 사람 다 그 점에 대해 미안한 마음이 있어서 도현과 중전은 숙안의 말에는 유독 물렀다.
그런 마음을 숙안도 아는지 남매들 가운데 가장 효심이 깊다는 것은 느끼고 있었지만, 혼자 뜬눈으로 밤을 지새울 정도일 줄은 미처 몰랐는지라 중전은 새삼 감동했다.
“네 마음이 참으로 갸륵하구나. 전하께서 이 일을 아시면 크게 기뻐하실 것이다.”
중전의 칭찬에 숙안 공주는 귓불까지 새빨갛게 익은 채 얼굴을 푹 숙였다.
“어마마마, 아바마마께선 언제쯤 돌아오실까요?”
“글쎄다.”
연의 물음에 중전은 고개를 살짝 저었다.
“어미도 잘 모르겠구나. 다만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말도 있지 않느냐.”
“하지만 편지라도 한 통 써 주시면 좋을 것을.”
“그럴 시간도 없이 바쁘신 것이겠지.”
하지만 말은 그렇게 해도 중전 역시 도현의 소식이 궁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연과 중전이 이런 대화를 하고 있을 때, 돌연 장지문 밖에서 상궁이 소란스러운 인기척을 내더니 말했다.
“중전 마마, 잠시 드릴 말씀이 있사옵니다.”
“지금 세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중인데, 대체 무슨 일이냐?”
중전이 먼저 부르지 않는 이상 어지간해선 상궁이나 내관이 먼저 말을 걸어 대화의 흐름을 깨트리는 일은 없었다.
이상하게 생각한 중전이 일단 들어오라며 문을 열도록 시키자 상궁이 종종걸음으로 들어와 조심스레 머리를 조아렸다.
“말해 보아라.”
“네, 마마. 지금 막 전해진 소식이온데, 전하께서 대승을 거두셨다 합니다!”
“그, 그게 정말이냐?”
“그렇사옵니다. 의주성에서 보낸 파발이 가져온 승전보이니, 확실하옵니다.”
들뜬 목소리로 상궁이 그리 말하자 중전의 얼굴에도 활짝 웃음꽃이 피었다.
“들었느냐, 연아, 숙안, 숙희!”
“네, 어마마마!”
“정말 다행입니다.”
연은 역시 아바마마라며 한쪽 손을 힘껏 하늘로 치켜들었고, 숙안 공주는 곰보 자국이 가득한 얼굴을 환하게 미소로 밝혔다.
고대하던 승전보에 잔뜩 고무된 조정은 곧바로 한양 곳곳에 방을 붙이고 알림꾼을 내보내 백성들한테 대승을 알리도록 했다.
복잡한 한양에서도 가장 많은 사람들이 붐빈다는 운종가.
아직 정오밖에 안 된 이른 시간인데도 많은 사람들이 관보가 붙는 게시판 앞에 잔뜩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점잖게 의관을 차려입은 선비와 장사치 그리고 아이 손을 잡은 아낙네까지 온갖 군상들이 다 있었다.
관청에서 나온 아전들이 커다란 방을 게시판에 붙이자 다른 한 명이 목청을 가다듬더니 이내 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모두 들으시오! 이레 전 의주성 인근 국경에서 또다시 아국을 침략하려던 간악한 청군과, 주상 전하께서 친히 이끄시는 근왕군이 전투를 벌여 대승을 거뒀다는 소식이오. 이날 전투에서 벤 적군의 목이 무려 삼만 두가 넘고 그보다 많은 숫자를 포로로 잡았다고 하오!”
불과 몇 년 전에 한양까지 점령당하고 온갖 패악과 약탈을 저지른 청군이었기에, 그 상처가 생생히 그대로 남아 있는 상황에서 또다시 전쟁을 한다고 하자 두려움에 질려 걱정하던 백성들은 이겼다는 말에 박수를 치거나 환호성을 지르며 기뻐했다.
“우와아아!”
짝짝짝.
“우리가 이겼어!”
“이게 꿈이야 생시야?”
“그러게.”
솔직히 왜국과 북방에 있는 거란족은 그렇다 쳐도, 명을 쫓아내고 자금성까지 차지한 청나라를 상대로 승리를 거둘 수 있을 거라고는 대부분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데 당당히 일전을 겨뤄서 이겨 지난날 당한 치욕을 되갚아 주었다고 하니, 다들 흥분해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양팔을 들어 올려 천세를 외쳤다.
“천세! 천세!”
운종가뿐만 아니라 한양 곳곳에서 비슷한 광경이 펼쳐졌고 전쟁의 무게에 눌려 가라앉아 있던 도시는 환호에 휩싸였다.
며칠 사이로 지방에도 승전보가 전달되어 백성들을 기쁘게 했다.
한편 도현은 북상을 계속해 청나라를 세운 누르하치의 황릉과 황궁이 그대로 남아 있는 심양성 앞에 도착해 있었다.
푸른 강물이 도도하게 흐르는 혼하渾河 강 너머에 우뚝 서 있는 심양성을 도현은 말 위에 앉아 한참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뭘 그렇게 보고 계시옵니까?”
남두병 장군이 옆으로 다가와 묻자 상념에서 깨어난 도현은 입가에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남 장군.”
“예.”
“저기 앞에 보이는 성문 이름이 뭔지 알고 있나?”
“덕성문德盛門이라고 들었사옵니다.”
“맞네. 나에게 아니, 우리 조선한테는 한恨과 치욕스러운 기억이 서린 곳이지. 바로 저기서 병자호란 때 청군의 출병식과 승전식이 열렸고, 형님과 내가 끌려와 수년을 볼모로 잡혀 있어야 했던 조선관도 근처에 있었다네.”
뜻밖의 사연에 남두병 장군은 물론이고 주위에 있던 장수와 호위들 모두가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아픔이 있는 곳인 줄은 미처 몰랐사옵니다.”
“저 성문을 볼 때마다 언제고 내가 직접 군대를 몰고 와 지금 당하고 있는 굴욕을 전부 되갚아 주겠다고 다짐했었는데, 이제 그걸 실제로 이루게 되다니 가슴이 벅차올라 심양성에서 눈을 뗄 수가 없군.”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신 남두병이 성을 함락시켜 전하께 바치겠사옵니다.”
상체를 숙인 남두병 장군이 살짝 격양된 목소리로 말하자 도현은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그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하하하, 장군이 그렇게 말해 주니 심양 황궁에 짐이 발을 들여 놓고 황좌에 앉아 있는 것처럼 기분이 좋군그래.”
“금방 그리될 것이옵니다.”
“남 장군만 믿겠네.”
“맡겨 주십시오.”
고개를 옆으로 돌린 도현은 조선군이 강을 건너오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적군이 후퇴하면서 불을 질러 다 태워 버린 나루터를 보며 이야기를 이었다.
“도하 준비는 다 끝났나?”
“예. 주변 숲에서 통나무를 잘라 뗏목 수십 개를 만들었고, 적이 도하를 방해하는 것을 대비해 강변에 화포를 배치해 두었사옵니다.”
예상을 깨고 조선군이 압록강을 건너 빠르게 북상하자 당황한 청군 패잔병들은 허겁지겁 심양까지 후퇴하면서 나루터뿐만 아니라 근처에 있는 모든 배들을 불살라 버렸다.
폭이 넓고 수심 또한 깊은 혼하渾河 강을 천연 방어선으로 이용해 조선군의 공격을 어떻게 해서든 늦춰 보려는 속셈이었다.
그사이 북경에 지원을 요청하고 만주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여진족 장정들을 모아 심양성에서 수성전을 벌이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상대가 이렇게 나올 것임을 예상했던 도현은 지체 없이 뗏목을 만들어 도하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단 하루 만에 준비가 다 끝났다.
“병사들도 하루 동안 머물며 푹 쉬었으니 언제든지 명령만 내려 주시면 도하를 실시할 수 있사옵니다.”
그러자 도현은 작게 머리를 끄덕이고는 결연한 얼굴로 말했다.
“좋아, 시간이 흐를수록 아군이 불리해지니 머뭇거릴 것 없이 지금 바로 작전을 실행하게.”
“옛!”
명령이 떨어지자 남두병 장군은 군례를 취하면서 큰 목소리로 대답했다.
혼하 강은 북만주 지역에서 발원해 남서쪽으로 길게 흘러 발해만으로 빠져나가는 아주 큰 강이었다.
예전에는 심수瀋水라고도 불렸는데, 심양성 주민들의 중요한 식수원이자 만주 내륙과 해안을 연결하는 교통로 역할도 했다.
강이 넓고 깊어 도하가 쉽지 않았지만 상대가 방어 준비를 다 끝내기 전에 심양성을 함락시키려면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건너갈 수밖에 없었다.
병력을 한꺼번에 다 건너보냈으면 좋겠지만, 뗏목 숫자에 한계가 있어 백인대 다섯 개씩 순차적으로 도하를 시키기로 했다.
강을 건너면서 물에 빠질 수도 있어 습기에 취약한 화약 무기를 쓰는 총병은 일단 모두 제외됐고 창과 검으로 무장한 병사들한테 임무가 주어졌다.
“준비가 됐사옵니다.”
남두병 장군의 말에 도현은 뗏목에 탑승한 일단의 병사들을 보며 머리를 끄덕였다.
“결행해.”
“예!”
대답과 함께 남두병 장군이 손짓을 하자 뒤편에서 대기하고 있던 군관 한 명이 깃발을 좌우로 크게 흔들어 공격을 개시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선봉 부대 지휘를 맡은 유혁연柳赫然이 약간 굳은 표정으로 허리에 차고 있던 장검을 뽑아 들었다.
스르릉.
“뗏목을 띄워라!”
“와아아!”
유혁연의 외침에 강변을 따라 주욱 늘어서 있던 병사들은 함성을 내지르면서 커다란 뗏목을 강으로 밀어 넣었다.
“읏차!”
풍덩.
서른 명씩 탄 뗏목 수십 척이 일시에 출발하는 모습은 상당히 장관이었다.
“하나, 둘! 하나, 둘!”
양옆에 촘촘히 붙어 앉은 병사들은 뒤편에 서서 키를 잡고 있는 군관의 구령에 맞춰 나무를 깎아 만든 노를 힘차게 저었다.
쏴아아.
물살이 꽤 셌지만 일사불란한 움직임에 뗏목들은 한 척도 하류로 떠내려가지 않고 물살을 가르며 반대편을 향해 천천히 나아갔다.
성문 위에서 이쪽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던 청군 병사들은 화들짝 놀라 한쪽에 설치된 북을 쳐 비상 상황을 알렸다.
그러자 얼마 있지 않아 덕성문의 성문이 좌우로 열리더니 일단의 청군 병사들이 황급히 강변으로 달려 나왔다.
“놈들이 이쪽으로 건너오게 해서는 안 된다. 어서 화살을 쏴라!”
재빨리 대형을 갖춘 청군은 활을 꺼내 들고 조선군이 탄 뗏목을 향해 발사했다.
슈슈슉! 슈슉!
씨잉! 씽!
하늘 높이 날아오른 수백 발의 화살은 크게 포물선을 그리면서 뗏목 대열 위로 비처럼 떨어져 내렸다.
자칫하면 강을 건너기도 전에 화살 비에 그대로 고슴도치가 될 판이었다.
그 순간 뗏목 중 하나에 타고 있던 유혁연이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질렀다.
“방패를 들어 올려라!”
처척.
병사들이 가운데 놓아둔 커다란 사각 방패를 집어 머리 위로 들어 올리는 것과 동시에 화살이 쏟아졌다.
투투툭. 후두둑.
마치 소나기가 지붕을 때리는 것 같은 소리가 나며 화살이 방패에 박혔다.
“똑바로 들어!”
“징하게도 쏴 대는구먼.”
“그러게.”
화살이 떨어지는 소리가 날 때마다 병사들은 움찔하며 얼굴을 구겼다.
방패 덕분에 화살 세례를 피할 수는 있었지만 노를 젓지 못해, 뗏목은 강 한가운데 그대로 멈춰 섰다.
퍽!
“히익.”
겹쳐서 든 방패 틈으로 화살 하나가 파고들어 와 바닥에 박히자 바로 옆에 앉아 있던 병사가 기겁했다.
“젠장, 우리 포병대 녀석들은 뭘 하는 거야?”
병사의 불평을 듣기라도 했는지 말이 끝나기 무섭게 조선군 쪽에서 폭음과 함께 방열해 놓은 화포들이 차례대로 불을 뿜기 시작했다.
“방포하라!”
꽝! 꽝! 꽝!
씨우우웅! 씨우우웅!
휘파람 소리를 내며 날아간 포탄은 강 건너편에서 화살을 쏘고 있는 청군을 직격했다.
“화포 공격이다.”
“어서 피해!”
포격을 하는 걸 알고 허둥지둥 적병들이 피하려고 했지만 그 전에 포탄이 떨어져 폭발음을 내며 주위에 있는 청군을 날려 버렸다.
“아아악.”
“크윽!”
폭발 섬광과 화염이 연이어 피어올랐고 사방으로 뿌려진 파편은 청군 병사들을 갈가리 찢어 걸레로 만들었다.
엄폐물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는 강변 모래사장이라 피해가 더 컸다.
포격에 말 그대로 맨몸으로 노출된 청군 병사들은 비명을 내지르며 바닥에 머리를 처박고 엎드려 부들부들 떨거나 무기를 내팽개치고 성으로 달아났다.
뗏목 대열에 가해지던 화살 공격은 자연스럽게 뚝 멈췄고 방패를 내린 조선군 병사들은 불바다로 변한 맞은편 강변을 보며 환호성을 질렀다.
“잘한다!”
“아주 묵사발을 내 버리라고!”
강 건너에 있는 적이 한 명이라도 더 줄어들면 그만큼 자신들의 생존 확률이 올라가기에 반응이 뜨거울 수밖에 없었다.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훔쳐 낸 유혁연은 좌우를 둘러본 뒤 큰 목소리로 병사들을 독려했다.
“이 틈에 강을 건너야 한다. 어서 다시 노를 저어라!”
그러자 흥분을 가라앉힌 병사들은 방패 대신 노를 잡고 뗏목을 움직였다.
“영차, 영차!”
팔이 저리고 힘들었지만 무방비 상태로 강물 위에 떠 있는 것보다는 나았기에 다들 이를 악물고 노를 저었다.
“거의 다 왔다, 조금 더 힘을 내라!”
뗏목들이 강을 거의 다 건너가자 조선군은 포격을 중단했고, 얼마 뒤 단 한 척도 침몰하거나 하류로 떠내려가는 일 없이 모두 도하에 성공했다.
“하선!”
우렁차게 소리치며 유혁연이 먼저 나서자 병장기를 챙겨 든 병사들이 우르르 따라 내렸다.
맡은 임무대로 후속 병력을 위해 모래사장에 교두보를 확보하려는 것이었다.
“이놈들!”
요행히 살아남아 달려드는 청군 병사 한 명의 가슴팍을 발로 걷어찬 유혁연은 뒤로 넘어져 버둥거리는 상대의 심장에 검을 쑤셔 박았다.
푹.
“끄흑.”
그의 숨통을 끊어 놓은 유혁연은 또 다른 적이 없는지 고개를 돌려 좌우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보이는 건 여기저기 흩어진 채 끔찍할 정도로 훼손된 시신들뿐이었고, 운 좋게 남아 있던 적병 몇몇은 조선군 병사들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강력한 천자총통 포탄과 파편에 살상당한 시체들이 온전할 리가 없었다.
보기만 해도 구토가 나오고 입맛이 딱 떨어지는 모습이었지만, 이미 압록강에서 더 처참한 광경을 본 적이 있는 유혁연과 부하들은 비교적 담담한 얼굴로 시신을 지나쳐 앞으로 나아갔다.
이렇게 선발대가 무사히 교두보를 확보하자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도하를 지켜보던 지휘부는 크게 고무되었다.
“좋았어, 화포로 계속 지원을 해 주고 빨리 더 많은 병력을 건너보내 교두보를 튼튼히 할 수 있도록 해.”
“예.”
천리경을 눈에서 뗀 도현의 지시에 장수들은 큰 목소리로 대답했고, 뗏목들은 쉬지 않고 양쪽을 왕복해 계속 병력을 실어 날랐다.
그러자 다급해진 청군이 어떻게든 도하를 막아 보려고 몇 차례 더 병사를 내보냈지만, 그때마다 기다렸다는 듯이 포탄을 날려 대는 포병대의 화력 지원에 교두보 근처에도 못 가고 번번이 좌절해야만 했다.
그사이 강을 건넌 병력은 점점 늘어났고, 통나무로 목책까지 세워 방어를 단단하게 굳힌 조선군은 밤에도 횃불을 환하게 밝혀 놓고 도하를 계속했다.
날이 밝으면 건너가라며 장수들이 만류했지만 도현은 고집을 피워 뗏목에 올랐다.
“장관이군.”
뒷짐을 진 채 뱃전에 서서 주위를 둘러보던 도현이 중얼거리자 함께 있던 박영식 장군이 이야기를 받았다.
“그러게 말입니다. 마치 하늘에 있던 별들이 땅에 내려와 있는 것 같지 않사옵니까?”
병사들이 피워 놓은 수십 수백 개의 횃불을 별에 비유하자 도현은 작게 감탄을 내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호오, 그것 참 멋진 말이군. 박 장군한테 이런 풍류風流가 있는 줄은 미처 몰랐네.”
“송구스럽사옵니다.”
박영식 장군의 약간 쑥스러운 듯한 표정을 보며 입가에 미소를 짓던 도현은 이제 거의 다 도착한 교두보를 살피며 말했다.
“지금쯤이면 예친왕에게 패전 소식이 전해졌겠지.”
“아마 그럴 겁니다.”
압록강에서 대승을 거두기는 했지만 전초전에 불과할 뿐, 아직 북경에 수십만이 넘는 팔기군이 그대로 남아 있었기에 진짜 싸움은 이제부터였다.
그 때문인지 예친왕 이야기를 꺼내자 박영식 장군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예친왕이 여기까지 오는 데 얼마나 걸릴 것 같나?”
잠시 고심을 하던 박영식 장군은 진지한 어투로 입을 열었다.
“아무리 기동력이 좋은 기병으로 구성됐다고 해도 최소한의 준비는 갖춰야 될 테니, 빨라도 달포는 걸리지 않겠사옵니까? 거기다 심양이 떨어지는 걸 감안해 공성무기와 보병까지 합류시킨다면 날짜는 더 늘어날 것이옵니다.”
“달포라…….”
살짝 미간을 찌푸리면서 말끝을 흐린 도현은 고개를 들어 흐릿한 달빛 아래 어렴풋이 보이는 심양성을 바라보았다.
얼마 전까지 황성으로 사용됐던 곳답게 높고 튼튼한 성벽이 이중으로 둘러져 있었고 규모도 커서 십만 병력이 일 년은 너끈히 농성전을 벌일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음 같아서는 이대로 북경까지 군대를 몰고 가서 예친왕과 청국 황제의 무릎을 꿇리고 싶었지만, 아직 조선에 그럴 능력이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도현은 심양을 포함한 요동과 남만주 일대를 손에 넣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딱 그 정도가 지금 조선이 탈이 나지 않고 그럭저럭 소화시킬 수 있는 땅이었다.
물론 그러려면 조만간 잔뜩 독기가 올라 달려올 예친왕을 격퇴하는 것이 먼저였는데, 청이 작정을 하고 전력을 다한다면 열세에 놓일 것이 분명했지만 도현은 내심 믿는 구석이 있었다.
바로 두 달 정도만 버티면 혹독한 추위가 만주 일대에 몰아친다는 것과, 아무리 청나라가 황제가 다스리는 제국이라고 해도 지난 몇 년간 계속 이어진 전쟁과 반란 때문에 오랫동안 조선과 싸울 수 있는 체력이 없다는 거였다.
전부 주작단을 통해 확인한 사실로, 현재 청나라의 국고는 텅텅 비어 먼지만 날리는 상태였다.
덩치는 커졌지만 속으로는 골병이 든 모양새로, 이런 약점이 없었다면 아무리 도현이라도 섣불리 청나라와 싸울 생각을 할 수 없었을 터였다.
“이번 전쟁을 승리로 마무리하기 위해서는 최대한 빨리 그리고 적은 피해로 심양성을 함락시켜야 해.”
“성에 웅크리고 있는 청군이라고 해 봤자 몇천 명이 안 되고, 그나마도 압록강에서 우리 군에 된통 당하고 쫓겨 온 패잔병과 급히 끌어모은 의용군이니 오래 버티지 못할 겁니다.”
“그래야지.”
박영식 장군의 이야기를 들으며 새삼 도현은 기병 전력을 모두 빼내 우회시키는 모험을 해서 앞뒤로 청군을 들이쳐 괴멸시키길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전장을 빠져나간 청군 잔존 병력이 조금만 더 많았더라도 심양성을 공략하는 게 어려워졌을 테고, 그럼 도현이 세운 계획은 시작부터 어그러졌을 것이다.
어느새 맞은편 강바닥에 닿은 뗏목에서 도현 일행이 내리자 유혁연이 다가와 정중히 군례를 취했다.
“어서 오시옵소서, 전하.”
“오, 경은 선발대를 이끈 장수가 아닌가?”
“그렇사옵니다.”
“화살 비를 뚫고 강을 건너는 모습이 정말 용맹스러웠어.”
도현이 친히 어깨를 두드리며 격려를 해 주자 유혁연은 황공하다는 듯이 상체를 숙였다.
“앞으로도 이번처럼만 하게.”
“예.”
“청군의 동태는 어떠한가?”
“몇 차례 저희를 강변에서 몰아내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번번이 실패하자 두 시진 전부터는 꼼짝하지 않고 성안에 틀어박혀 있습니다.”
“야습을 해 오려고 준비 중일지도 모르니 대비를 철저히 해야 될 거야.”
“그렇지 않아도 한 개 천인대가 경계를 서고 있사옵니다.”
“잘했어.”
“쉬실 곳을 마련해 놨으니 이쪽으로 오시지요.”
유혁연의 말에 도현은 고개를 살짝 내저었다.
“아니, 그 전에 교두보를 둘러보고 싶으니 안내하게.”
“알겠사옵니다.”
그를 위해 한쪽에 대형 천막을 쳐 놨지만, 도현은 그리로 가지 않고 다음 날 해가 뜰 때까지 병사들을 격려하며 도하 작업이 잘 진행되는지를 지켜보았다.
워낙 병력과 장비가 많아 다리 없이 뗏목만으로 강을 건너는 것이 쉽지 않았다.
특히 무거운 화포와 물에 젖으면 쓸 수 없는 화약을 옮기는 건 보통 어렵고 힘든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조선군은 놀라운 끈기와 노력으로 정확히 딱 이틀 만에 모든 병력이 교두보로 넘어갈 수 있었다.
이제 성을 함락시키기 위해 전진하던 조선군은 뜻밖의 암초에 부딪쳤다.
쉬이이이잉!
“뭐, 뭐야?”
“헉, 포격이다. 어서 피해!”
이젠 익숙해진 소리에 무심코 고개를 들었던 조선군 병사들은 심양성에서 포탄이 날아오자 기겁을 했다.
쿠쿵! 쿵! 쿵!
“으악.”
“큭.”
“살려 줘!”
밀집대형을 이루고 앞으로 나아가던 조선군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조선군이 쓰는 포탄처럼 파편이 사방으로 뿌려지는 것이 아니라 그냥 큰 쇠공에 불과해 실질적인 피해는 그리 크지 않았다.
그렇지만 압록강 전투의 승리로 조금은 방심하고 있었고 설마 청군이 화포로 공격을 해 올 거라고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기에 심리적인 충격이 더 컸다.
“이런!”
도현도 놀란 건 마찬가지였는데 눈을 크게 치켜뜨고는 황급히 고함을 질렀다.
“어서 우리도 반격하지 않고 뭘 하고 있는 거야!”
그러자 옆에 있던 남두병 장군이 당혹스러운 얼굴로 대답했다.
“사정거리 밖이옵니다. 적 화포를 맞추려면 더 접근해야 되는데, 그러면…….”
“젠장!”
뒷말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반격을 하려면 쏟아지는 포탄 세례를 고스란히 맞으며 화포를 방열해야 되는데 그건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였다.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린 도현은 지금도 비명을 내지르며 죽어 나가는 병사들을 그냥 놔둘 수 없었기에 지휘봉을 꽉 움켜쥐며 퇴각 명령을 내렸다.
“일단 병사들을 모래사장까지 뒤로 물려.”
“예.”
뿌우우웅! 뿌우우웅!
후퇴를 알리는 뿔고동 소리가 길게 울리자 포격을 당하고 있던 조선군은 즉시 뒤로 물러섰다.
우왕좌왕하며 스스로 무너진 청군과 달리 대열을 끝까지 유지하면서 천천히 퇴각하는 조선군의 모습에 성루 위에서 지켜보던 호타이는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준비해 둔 기병은 쓸 수 없겠군.”
조선군이 혼란에 빠지면 바로 성문 뒤에 대기시켜 둔 기병을 내보내 피해를 키우고 가장 골칫거리인 화포를 망가뜨리려고 했었는데 전혀 빈틈을 보여 주지 않았다.
“그래도 이걸로 조선군이 함부로 성을 공격하지 못할 테니 충분히 효과를 거뒀지 않습니까?”
“그렇지.”
호타이는 압록강에서 있었던 패전을 떠올리는 듯 송곳니를 드러내며 이를 갈았다.
생각지도 못한 조선군의 화포 공격에 부하들을 다 잃고 겨우 목숨만 건져 도망쳐야 했던 치욕을 조금이나마 갚은 기분이었다.
“놈들만 화포를 쓸 줄 아는 게 아니라는 걸 이걸로 똑똑히 깨달았을 거야. 조선 국왕이 지금쯤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지 심히 궁금해지는군.”
그렇게 말하며 호타이는 성루 위에 부는 바람을 정면으로 맞으며 조선군이 후퇴하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호타이가 복수의 쾌감에 젖어 있을 때, 커다란 지휘 천막에 모인 조선군 장수들은 모두 침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손쉽게 거머쥘 수 있을 줄 알았던 승리가 모래처럼 스르륵 빠져나가 버렸으니, 차마 도현의 앞에서 얼굴을 들 수 없을 정도였다.
커다란 탁자 앞에 앉아 아까부터 계속 찡그린 표정을 짓고 있던 도현은 마침내 입을 열어 말했다.
“피해가 얼마나 되지?”
그러자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남두병 장군이 대답했다.
“백삼십 명이 죽거나 크게 다쳤습니다.”
“끄으응.”
청군이 쏜 포탄의 위력이 크지 않고 신속하게 물러선 덕분에 피해가 그리 많지 않았지만, 상대 또한 화포를 쓴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조선군에 상당한 충격을 줬고 천막 안 분위기도 무겁게 가라앉았다.
한번 크게 숨을 내쉬고 표정을 푼 도현은 좌중을 둘러보며 이야기를 했다.
“전쟁에서 진 것도 아니고 그냥 공격 시도가 한번 좌절됐을 뿐인데 다들 왜 이렇게 우거지상을 하고 있어? 그리고 청에 화포가 있다는 걸 몰랐던 것도 아니잖아.”
“…….”
“그것보다 내가 듣기로 홍이포紅夷炮의 사정거리는 칠백 보 남짓이라고 했는데, 그게 틀린 거야?”
“칠백 보가 맞사옵니다.”
“그런데 아까는 어떻게 된 거야?”
도현의 물음에 천막 한쪽에 앉아 있던 포병대 지휘관이 심각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원래대로라면 병기창에서 개량한 천자총통이 이십 보 정도 사거리가 더 나와야 되지만, 적이 높은 성벽 위에다가 화포를 거치시키고 쏘는 바람에 이런 결과가 나온 것 같사옵니다.”
“그런 변수가 있었군.”
성벽 높이만큼 청군이 쏘는 홍이포의 사거리가 길어진 것이다.
정말 곤혹스러운 상황이 아닐 수 없었는데, 이러면 화포 지원을 받기 어려워 아무리 수적으로 우세하다고 해도 심양성을 함락시키는 것이 힘들어지기 때문이었다.
예친왕이 대군을 이끌고 올라오기 전에 성을 장악하고 방어 준비를 끝내야 하는 조선군 입장에서는 일이 아주 골치 아파진 것이었다.
“성에 있는 홍이포가 많아 봤자 서른 문이 안 넘는 것 같은데, 그냥 무시하고 공격을 하는 건 어떻사옵니까?”
남병두 장군의 의견에 장수들 상당수가 동조했다.
“피해는 있겠지만 상대가 방어를 더 단단히 하기 전에 승부를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생각 같습니다.”
“저도 찬성입니다.”
가장 신임하는 측근 중 한 명인 박영식까지 남병두 장군의 말에 찬성하자 도현도 그쪽으로 마음이 살짝 기울어졌다.
병사들이 희생되는 건 안타까웠지만, 현실적으로 머뭇거릴 여유가 조선군에게는 없었다.
총공격으로 결심을 굳히려는 순간 말석에 조용히 앉아 있던 고만정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전하, 신이 한 말씀 올려도 되겠사옵니까?”
지략이 아주 뛰어난 고만정이었기에, 시선을 준 도현은 약간 기대 어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말해 봐.”
“우선 저도 심양성을 빨리 함락해야 한다는 것에는 동의합니다. 하지만 조만간 예친왕이 끌고 올 청군과 벌일 일전을 생각한다면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자 왼편에 있던 남병두 장군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살짝 짜증을 냈다.
“누가 그걸 모르나? 우리도 병사들한테 쏟아지는 포탄을 맨몸으로 뚫고 돌격하라는 명령을 내리기 싫지만, 적이 쏴 대는 홍이포를 박살 낼 방법이 없잖은가.”
“아니, 있습니다.”
“지금, 심양성에 있는 홍이포를 상대할 방법이 있다고 했나?”
몸을 앞으로 당겨 앉으며 도현이 관심을 보이자 고개를 바로 한 고만정은 아주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사옵니다, 전하.”
“자세히 설명해 봐.”
“가장 큰 문제는 성벽 위에 올려진 홍이포가 아군이 보유한 화포보다 사정거리가 길다는 것 아니겠사옵니까? 그럼 골치 아프게 생각할 필요 없이 더 멀리서 쏠 수 있는 무기를 동원하면 간단히 해결될 것이옵니다.”
“천자총통이 제일 멀리 날아가는데 그것을 가지고도 안 된다는 이야기를 못 들었나?”
실망한 표정을 지은 남병두 장군이 질책하듯 고만정을 나무라는 것과 달리, 도현은 뭔가 골똘히 생각을 하는가 싶더니 이내 한쪽 손으로 무릎을 치며 탄성을 내뱉었다.
탁!
“그렇군, 그런 간단한 방법이 있었어!”
“……?”
갑작스러운 도현의 행동에 고만정을 뺀 나머지 장수들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도현은 어느새 수심이 싹 다 사라진 표정을 하고는 입가에 살짝 미소까지 지으며 이야기를 했다.
“화포뿐만이 아니라 우리한테는 신기전도 있잖아. 아마 사거리가 천 보가 넘지?”
도현이 기억을 더듬으면서 말하자 시선을 받은 포병대 지휘관은 눈을 반짝이고는 약간 흥분한 어조로 대답했다.
“정확히 천이백 보이옵니다. 새로 개량한 공중폭발형을 쓴다면 청군 포대를 어렵지 않게 제압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런 다음에 천자총통을 전진시켜 성문을 깨뜨린다면 심양성은 손쉽게 함락될 것이옵니다.”
고만정이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덧붙이자 그제야 남병두와 장수들은 머리를 끄덕였다.
“이것 참, 해결책을 바로 옆에 두고 생각해 내지 못했군.”
“그러게 말입니다.”
아까보다 확연히 밝아진 얼굴로 도현이 말했다.
“화포는 화포로 상대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에 빠져 주위를 제대로 둘러보지 못한 것 같군. 아무튼 좋은 계책이야.”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이옵니다.”
“현재 보유한 화약 재고가 얼마나 되지?”
그러자 보급을 맡은 장수가 그를 보며 이야기했다.
“압록강 전투에서 소모가 많았지만 아직 절반가량이 남아 있고, 또 보름 뒤에는 보급대가 도착하니 염려하지 않으셔도 될 것이옵니다.”
조선군은 화약 무기가 주력인 만큼 화약 재고 관리가 가장 중요해 항상 신경을 써야 했다.
눈엣가시 같은 홍이포를 제거할 방법을 찾았으니 더 이상 망설일 아무런 이유가 없었기에 도현은 눈을 날카롭게 번득이며 입을 열었다.
“내일 해가 뜨는 대로 신기전을 써서 적 포대를 박살 낸 다음 총공격을 퍼붓도록 하지. 모레 아침은 심양성 황궁에서 맞았으면 좋겠군.”
도현의 말에 모여 있던 장수들이 일제히 머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그리될 것이옵니다, 전하.”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나 하얀 쌀밥을 지어 병사들을 든든하게 먹인 조선군은 정오가 되기 전에 다시 공격대형을 갖추고 성문 앞에 늘어섰다.
“조선 놈들이 또 공격을 해 오려고 한다고?”
도독부에 있던 호타이가 수상한 낌새에 연락을 받고 황급히 문루 계단을 뛰어 올라오자 부르칸이 정색을 하며 말했다.
“예, 저길 보십시오.”
성 밖으로 고개를 돌린 호타이는 새까맣게 늘어서 있는 조선군을 확인하고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징글징글한 것들 같으니라고.”
“어떻게 하지요?”
“가까이 다가오면 어제처럼 홍이포를 쏴서 쫓아내 버려!”
“풍기는 기세로 봐서는 작정하고 덤벼들려는 것 같습니다.”
“그럼 다 죽여 주면 돼. 성벽이 있는 이상 우리가 유리해.”
다소 억지스러운 말이었지만 딱히 다른 선택지가 없었기에 부르칸은 무겁게 머리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한 손으로 여장藜杖을 짚고 서서 조선군을 바라보던 호타이는 어깨에 입은 총상이 욱신거리는 느낌에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준비가 다 끝났사옵니다.”
병사들과 함께 직접 말을 타고 성문 앞에 선 도현은 군관의 보고에 잠시 심양성을 쳐다보다가 힘이 가득 담긴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공격하라!”
“옛!”
크게 복명한 군관은 가지고 있던 활에 효시를 끼워 하늘 높이 쏘아 올렸다.
삐이이익!
귀청을 때리는 경적이 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젯밤 홍이포가 쏘아진 곳을 향해 미리 각도와 방향을 맞춰 둔 화차 여섯 대가 섬뜩한 소리를 내며 발사됐다.
쉭쉭! 쉬쉬쉭! 쉭쉭!
화차 하나당 백 개에 달하는 신기전이 장전됐는데, 도화선에 불을 붙이자 순식간에 차례대로 하얀 연기를 내뿜으며 하늘로 날아올랐다.
“우와아아!”
모두 육백 개나 되는 신기전이 길게 포물선을 그리면서 날아가는 장면은 정말 장관이었는데, 어제 있었던 전투로 약간 의기소침해 있던 조선군은 그걸 보며 사기가 올랐다.
반면 이미 압록강에서 한 번 당한 적이 있는 청군은 기겁을 하며 허둥지둥 숨을 곳부터 찾았다.
“헉!”
“귀, 귀신 화살이다.”
“피해!”
일반 화살의 세 배나 되는 크기에 섬뜩한 소리를 내며 상상도 못 할 거리를 날아오는 신기전을 언제부터인가 청군 병사들은 귀신 화살이라고 부르며 두려워했다.
신기전의 위력을 경험해 보지 못한 의용군들은 정규군의 모습을 보며 덩달아 허둥거렸다.
그리고 어느 순간 신기전이 공중에서 폭음과 함께 터지며 날카로운 쇳조각으로 이루어진 죽음의 비를 뿌렸다.
꽝! 꽝! 꽝!
투투툭! 투툭! 툭!
“으악!”
“컥.”
방패를 머리 위로 들어 올려 간신히 파편을 막아 낸 병사들도 있었지만, 태반이 우왕좌왕하다 비명을 내지르고 피를 뿌리며 나자빠졌다.
특히 공격이 집중된 홍이포 포대에 있던 포수들은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온몸이 찢겨 나갔다.
단단한 무쇠로 만들어진 홍이포는 포신에 살짝 흠집만 생겼을 뿐 별다른 이상이 없었지만, 포를 쏠 포수들이 다 죽임을 당했기에 무용지물이 되어 버렸다.
천리경으로 홍이포 포대가 전멸했음을 확인한 도현은 회심의 미소를 짓고는 손에 든 지휘봉을 위로 치켜들고 크게 외쳤다.
“공격! 성을 함락시켜라!”
그러자 천인대별로 모여 있던 보병들이 대열을 갖춰 천천히 앞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수만에 달하는 조선군 병사들이 다가오는 모습은 마치 거대한 파도가 밀려오는 것처럼 강한 위압감을 주었다.
이윽고 바퀴가 달린 포가에 올려진 천자총통 한 문이, 커다란 사각 방패를 든 병사 이십여 명에게 둘러싸여 나왔다.
화포를 쏴서 굳게 닫혀 있는 성문을 깨려는 것이다.
문루에 있던 호타이는 그것을 바로 눈치채고 다급히 고함을 질렀다.
“적이 화포를 쏘지 못하게 막아라!”
수적으로도 불리한데 성문까지 열리면 그야말로 끝장이었다.
“포수들이 다 당했습니다.”
부르칸의 말에 호타이는 와락 얼굴을 구기며 악을 썼다.
“다른 병사들을 시켜서 쏘면 되잖아!”
“하지만 화포를 다룰 줄 아는 자가 없습니다.”
“지금 그런 걸 따질 상황이야? 성문이 뚫리기 전에 어떻게든 포를 쏴!”
“……예.”
무리한 지시였지만 호타이의 말처럼 지금은 비상 상황이었기에 부르칸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호타이의 독려에 포대로 올라간 병사들이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는 시신을 그대로 놔둔 채 홍이포를 쏘려고 애를 썼지만, 역시나 아는 것이 전혀 없었기에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포신 안의 이물질을 제거하고 쏴야 하는 것을 모르고 그냥 심지에 불을 붙였다가 폭발을 일으키기도 하고, 그나마 운 좋게 발사를 해도 조준이 제대로 되지 않아 포탄이 엉뚱한 곳으로 날아가 박혔다.
그러는 사이 성문을 유효 사정거리 안에 넣은 천자총통은 빗발치는 화살 세례를 무릅쓰고 방열을 서둘렀다.
방패병들이 앞에 서서 성벽 위에서 쏴 대는 화살을 든든하게 막아 주고 있었지만, 빗물이 처마 지붕을 때리는 것처럼 화살이 방패에 박히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렇지만 포수들은 겁을 먹거나 주춤거리지 않고 침착하게 고각을 조정해 정문에 보이는 덕성문을 겨냥했다.
“장전해!”
소매를 걷어붙인 포술장이 고함을 지르자 포수들이 얼른 탄약상자를 열어 포탄과 장약을 꺼내, 헝겊을 감아 놓은 막대기로 포신 내부를 깨끗하게 청소하고 바로 장약과 공 모양의 포탄을 밀어 넣었다.
“장전 끝!”
마지막으로 조준이 제대로 됐는지를 확인한 화포장은 직접 심지에 불을 댕기면서 외쳤다.
“발사!”
꽝!
슈우우우웅!
뿌연 화약 연기를 뿜어내며 발사된 포탄은 첫 탄임에도 불구하고 일직선으로 날아가 성문을 정확히 맞췄다.
쿠쿵!
천지가 진동하는 듯한 폭음과 함께 엄청난 충격이 덕성문 전체를 마구 뒤흔들었다.
“크윽.”
문루에 서 있던 호타이는 충격에 몸을 가누지 못하고 옆으로 자빠졌다가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괜찮으십니까?”
얼른 다가와 부축하는 부르칸을 보며 호타이가 다급하게 물었다.
“성문은 어떻게 됐어?”
“그것이…….”
부르칸은 말없이 고개를 떨궜고, 호타이는 여장 쪽으로 달려가 아래를 내려다봤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굳게 닫혀 있던 성문이 완전히 박살 나 활짝 열려 있는 것을 본 호타이는 절망한 얼굴로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 안 돼.”
높고 단단한 성벽을 의지하고 버틴다면 지원군이 올 때까지 심양을 지켜 낼 수 있을 거라 한 가닥 희망을 품었는데 이제 다 틀려 버렸다.
“도독, 예비대를 보내 성문을 지키도록 하겠습니다.”
겨우 이백여 명에 불과한 예비대로 뭘 하겠냐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대로 그냥 있을 수도 없었기에 호타이는 힘없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게.”
충격에 휩싸인 청군과 달리 뿌연 화약 연기가 바람에 날려 사라지자 드러난 성문을 본 도현은 손에 들고 있던 지휘봉을 꽉 움켜쥐었다.
“됐어! 전군 돌격, 단번에 성을 함락시켜라!”
도현의 명령에 호종 군관이 깃발을 흔들어 수기 신호를 보내자 천천히 전진하던 조선군은 함성과 함께 창을 앞으로 곧추세우고는 일제히 심양성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우와아아!”
“가자!”
“막아라! 조선군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화살을 쏴라!”
슈슉! 슉! 슉!
“아악.”
“윽!”
성벽 위에서 쏴 대는 청군의 화살에 일부 병사들이 비명을 내지르며 고꾸라졌지만 조선군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돌격해 들어갔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조선군 선두는 부서진 성문 앞까지 육박해 들어갔고, 무기를 빼 든 채 통로를 막고 있던 일단의 청군 병사들과 부딪쳤다.
“한 발도 물러서지 마라!”
“다 죽여!”
채챙! 챙! 챙!
슈각.
“커억.”
“어머니!”
좁은 성문 통로는 순식간에 서로 죽고 죽이는 지옥으로 변했다.
얼굴을 마주 보고 서로의 숨결까지 느껴질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양쪽은 악에 받친 눈빛으로 무기를 휘둘렀고 사방은 병장기가 부딪치는 소리와 비명으로 가득 찼다.
성문이 뚫리면 끝장이었기에 청군은 결사적으로 막았지만 수적 열세를 이기지 못하고 점점 뒤로 밀려났다.
“계속 밀어붙여!”
유혁연은 장검을 휘두르면서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질러 댔고, 그의 독려에 부하들은 더욱 힘을 내 적에게 덤벼들었다.
“다 쓸어버려라!”
다시 한 번 크게 고함을 지른 유혁연은 손에 든 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앞에서 도끼를 들고 그를 내려치려던 적병이 가슴에 검을 맞고는 시뻘건 피를 뿌리며 뒤로 자빠졌다.
서걱.
“꾸엑.”
솟구친 피가 갑옷과 얼굴을 적셨지만 유혁연은 아랑곳하지 않고 또 다른 적병을 찾아 발로 걷어차 쓰러뜨렸다.
병장기가 부딪쳐 불꽃이 튀고 거친 숨소리와 함성이 뒤섞여 들리며 흘러내린 피가 바닥에 흥건히 고여 있는 가운데 전투는 더욱 격렬해졌다.
그리고 어느 순간 유혁연과 부하들은 적군의 방해를 이겨 내고 성문을 통과했다.
일단 길이 열리자 그곳을 통해 조선군 병사들이 꾸역꾸역 밀려들었고, 청군은 커다란 파도에 휩쓸린 모래성처럼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청군도 용감하게 싸웠지만 두세 명씩 한꺼번에 덤벼드는 조선군을 당해 낼 수는 없었다.
시간이 갈수록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어 죽어 나가는 청군의 숫자가 급격히 늘어났고, 전세는 조선군 쪽으로 완전히 기울었다.
“성문이 뚫렸습니다. 이제 성이 함락된 것이나 다름없사옵니다.”
“우리가 이겼사옵니다.”
시커먼 연기와 화염에 휩싸인 덕성문을 보며 주위에 있던 장수들이 들뜬 얼굴로 말하자 도현도 마음이 벅차오르고 흥분됐지만, 애써 냉정을 유지하며 침착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했다.
“아직 전투가 다 끝나지 않았어. 후속 병력을 투입해서 청군을 완전히 제압하도록 해.”
“옛.”
잠시 후 도현의 명령대로 예비대가 움직여 공격에 가담하자, 청군은 급속도로 무너져 내려 더 이상 조직적인 저항을 하지 못했다.
급기야 전의가 꺾이고 지휘 체계마저 상실한 청군은 뿔뿔이 흩어진 채 민가로 숨어들거나 다른 성문을 통해 달아났다.
도망치려던 적은 미리 포위망을 치고 기다리고 있던 기병들이 모조리 다 잡아들였고, 성안에 숨은 놈들도 얼마 버티지 못하고 하나씩 소탕되었다.
그리고 도현이 오래전부터 소원하던 대로 덕성문 문루 위에 금실로 화려하게 수놓인 봉황 깃발이 내걸려 바람에 휘날렸다.
이걸로 청나라의 모체이자 얼마 전까지만 해도 황제가 머물던 황궁이 위치한 심양성이 조선군에 함락되었다.
쩔그럭, 탁. 쩔그럭, 탁.
도현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몸에 걸친 비늘 갑옷에서 차가운 금속성이 울려 퍼졌다.
심양 황궁의 대리석 복도를 걸으며 숭정전으로 향하는 동안 머릿속에 떠오르는 여러 가지 생각에 가슴이 울렁거렸다.
형님인 소현세자가 살아 있었을 무렵엔 멀리서 심양 황궁의 그림자를 보기만 해도 거대한 무엇이 몸을 무겁게 짓누르는 것 같아 왠지 모르게 속이 답답해지며 차가운 땀이 등골을 따라 흐르는 것만 같았는데, 지금은 전쟁의 승자로서 당당하게 안을 누비고 있다니.
격세지감이라고 해야 할까, 감개무량하다고 해야 할까.
뭐라 표현해야 할지 모를 감정을 품에 안고 도현은 활짝 열린 숭정전 문 앞에 섰다.
대전은 무척이나 크고 넓었으며, 바닥은 반들반들하니 흠 하나 없는 대리석으로 깔려 있고, 정면엔 황제가 앉는 금색 옥좌가 단상 위에 놓여 있었다.
옥좌 양옆에는 황제를 수호하듯 금방이라도 하늘로 승천할 것처럼 생생한 두 마리 용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으며, 붉은 기둥을 사이에 두고 화려하게 치장된 향로가 그 아래 각각 한 개씩 쌍을 이루고 있었다.
도현은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가 단상에 올랐다.
사치스러움이 지나쳐 부담스럽기까지 한 옥좌를 힐끗 쳐다본 도현은 그 앞에 서서 등받이를 손으로 쓰다듬었다.
“마침내 여기까지 왔군.”
진짜 해낼 수 있을까, 행여나 잘못된 선택은 아닐까 번뇌와 고민으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밤을 지새운 끝에 드디어 고지에 도착한 것이다.
물론 종착점이 아니라 중간 기점에 불과했지만 그것만으로도 도현에겐 큰 의미가 있었다.
도현이 잠시 상념에 빠져 있는 사이, 요란한 기척과 함께 심양성 도독인 호타이가 숭정전 안으로 끌려 들어왔다.
“큭!”
듬직한 체구의 두 병사에게 붙잡혀 끌려온 호타이는 완전히 패배가 확정된 지금도 반항을 멈추지 않으며 악을 썼다.
하지만 병사들이 무릎 뒤쪽을 쳐 억지로 바닥에 꿇리자 분노에 찬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보다가 도현을 발견하고 이를 갈았다.
“네 이놈……!”
호타이는 지난 압록강 전투에서 입은 어깨 부상 외에도 여기저기 크고 작은 상처가 많았다.
머리는 완전히 봉두난발이 되어 있고 신발은 너덜너덜했으며 갑옷은 그야말로 넝마라도 주워 입은 양 누더기가 따로 없었는데, 그 이유는 순전히 그가 포로로 잡힌 뒤에도 끊임없이 틈을 봐 도망치려 하면서 소란을 일으켰기 때문이었다.
호타이는 처음엔 여기가 어딘지 의문스러워하는 눈치였지만, 이내 심양 황궁의 최중심부인 숭정전인 것을 깨닫고 치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심양은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청의 수도였던 곳이다.
비록 지금은 수도가 북경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황궁으로서의 기능은 사라졌으나, 여전히 그 상징성은 남아 있었기 때문에 도독인 호타이조차 이곳을 드나드는 일은 함부로 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런 성지와도 같은 곳을 적에게 침범당했으니, 그의 자존심이 무참히 짓밟힌 것이나 다름없었다.
“오랜만이로군.”
그와는 과거 심양 관저에 살던 시절 잠시 안면 정도는 있던 사이다.
도현이 말을 걸자 호타이는 대번에 노성을 터트렸다.
“이런 배은망덕한 놈! 지난날 황제 폐하와 섭정왕께서 네게 얼마나 은덕을 베풀어 주셨는데, 그걸 까맣게 잊고 은혜를 원수로 갚다니! 검은 머리 짐승이라는 건 바로 네놈을 두고 하는 말이렷다!”
“난 한 번도 청나라에 은혜 같은 걸 받은 적이 없는데, 도통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군.”
한 나라의, 그것도 왕위 계승 자격이 있는 세자와 왕자를 자기네 나라에 억류해 두고 양팔 양다리를 보이지 않는 끈으로 꽁꽁 묶어 감시하는 것도 은혜라면 이 세상에 지옥에 떨어질 악인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하! 은혜를 받은 것이 없다? 조선은 우리 청을 사대하는 속국이었거늘, 어찌 감히 얻은 것이 없다고 입을 나불거리느냐! 게다가 네놈이 심양에 있던 시절 거처하던 관저는 물론이거니와 입에 들어간 음식 모두 우리 청의 땅에서 나온 것이 아니더냐? 주인을 향해 송곳니를 들이대는 어리석은 짐승 주제에 감히 어디서 입을 놀리는 게야!”
“말은 바로 해야지, 대체 언제부터 조선이 청을 섬겼단 말이냐.”
호타이의 끊임없는 도발에도 불구하고 도현이 침착한 표정을 흩트리지 않자 바짝 약이 오른 그는 한시도 쉬지 않고 입을 나불거려 저주를 퍼부었다.
“두고 봐라, 반드시 섭정께서 네놈을 처벌하러 행차하실 것이다. 그때가 되면 네놈을 갈기갈기 찢어 놓고 조선 땅을 불바다로 만들 것이야!”
“과연 그럴까?”
도현이 두 눈 뜨고 멀쩡히 살아 있는 한 절대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네 말대로 청나라 황제나 예친왕이 직접 그 무거운 엉덩이를 들어 나를 상대하러 온다면, 그야 당연히 맞이하러 가 드려야지. 그리고 이 손으로 그의 목을 베는 모습을 특등석에서 구경할 수 있게 해 주마.”
도현의 마지막 말은 절로 오한이 들 정도로 차가웠다.
“이노오옴! 절대 용서할 수 없다!”
거의 짐승의 울부짖음에 가까운 괴성을 지르며 호타이는 무릎으로 바닥을 기었다.
온몸이 두꺼운 동아줄로 묶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릎이 깨지든 말든 상관없이 단상 위의 도현을 향해 기어오르려 하는 그의 모습에서 증오에 가까운 집념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 위에서 병사들이 호타이를 찍어 눌렀고 그는 끝끝내 단상에 다다르지 못했다.
“이것 놓아라! 내 직접 저놈의 사지를 찢어 놓고 말 테다!”
“입 닥쳐!”
퍽!
아무리 해도 반항을 그치지 않는 호타이를 제압하기 위해 병사 중 한 명이 그를 한쪽 팔로 단단히 붙잡은 후 뒤통수를 눌러 바닥에 쿵 찧었다.
“으으윽……!”
이마가 깨져 피가 주르륵 흐르는 와중에도 그는 눈을 형형하게 빛내며 도현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이 모든 소동을 지켜보고 있던 도현은 아무 관심 없다는 듯 평온한 어조로 말했다.
“적당히 다루도록 해라. 나중에 긴히 쓰일 데가 있을 테니.”
“예!”
죽지만 않으면 팔다리 한두 군데 정도는 부러뜨려도 괜찮았다.
그럼 적어도 더 이상 병사들이 고생할 일은 없을 테니.
도현은 손을 내저어 그를 끌고 가도록 했다.
호타이가 떠난 자리에 붉은 핏자국이 배어 있는 것을 본 도현은 잠시 눈썹을 꿈틀거렸으나, 곧 망토 자락을 휘날리며 등을 홱 돌렸다.
털썩.
오로지 황제에게만 허락된 옥좌에 앉아 팔걸이에 팔꿈치를 기대고 다리를 꼰 도현은 엉덩이로 전해지는 차갑고 딱딱한 감촉을 느끼면서 눈을 감은 채 생각에 잠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