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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심양 전투 1 (51/104)

2차 심양 전투 1

며칠 간격으로 압록강 전투 패배와 심양 함락 소식이 전해지자 북경 자금성은 발칵 뒤집혔다.

특히 예친왕의 분노가 극에 달했는데, 그는 보고를 들었던 왕부 서재 집기를 다 부수어 놓았다.

당장 대전 회의가 소집됐고 연락을 받은 신료들은 속속 황궁으로 모여들었다.

하얀 대리석 축대 위에 일흔두 개에 달하는 나무 기둥과 황금빛 기와로 만들어진 이중 처마가 올라 있는 태화전太和殿은 자금성 안에서도 가장 중요한 건물로, 황제가 신료들을 접견하고 회의를 하는 정전이었다.

하늘로 승천하는 용 조각이 새겨진 여섯 개의 나무 기둥 안에 황금과 보석으로 치장된 옥좌가 있었고, 그 밑으로 수십 명의 대소신료들이 품계에 따라 늘어서서 넓은 태화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많은 수의 인원이 실내에 모여 있었지만 분위기는 무겁게 가라앉았고, 옥좌에 앉아 있는 어린 황제마저 숨을 죽이고 단 바로 아래에 서 있는 예친왕의 눈치를 보기 바빴다.

다른 신료들과 구분되게 화려한 복식을 갖춘 예친왕은 눈에 핏발이 선 채 딱딱하게 경직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치밀어 오르는 울화에 새벽까지 독한 화주를 들이켰기에 술 냄새까지 약간 풍겼다.

혼자서 열 병이 넘는 술을 비웠지만, 예친왕은 취하기는커녕 오히려 더 정신이 또렷해졌다.

천천히 모여 있는 신료들의 얼굴을 훑어보던 예친왕은 병부상서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입을 열었다.

“보고하게.”

명목상 군부 총책임자인 병부상서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침통한 표정으로 한 발짝 앞으로 나와 이야기했다.

승전 보고였다면 가슴을 펴고 자랑스럽게 말했겠지만, 청제국의 역사에 대대로 기록될 만큼 큰 패배이자 치욕스러운 일이었기에 병부상서의 목소리도 힘이 없었다.

“어젯밤 도착한 전령의 보고에 의하면 심양성이 조선군에 함락됐고, 도독부 소속 병력과 지원군 십만이 모두 괴멸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로써 요동과 남만주 일대가 조선군의 영향력 아래 들어갔고…….”

보고가 이어질수록 태화전에 모인 신료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지고 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수많은 병력과 넓은 영토를 잃은 것도 뼈아팠지만, 무엇보다 신료들을 허탈하게 만든 것은 바로 제국의 발원지라고 할 수 있는 심양성이 함락됐다는 사실이었다.

그것도 누르하치가 청을 건국한 이후 한 수 아래라고 생각했던 조선한테 일격을 당한 것이었기에 더 허탈하고 분이 치밀어 올랐다.

눈을 치켜뜬 예친왕은 병부상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잔뜩 날이 선 어투로 입을 열었다.

“이런 치욕을 당하고도 가만히 있는다면 다른 주변국들까지 우릴 우습게 볼 것이오!”

황제가 있었지만 마치 자신이 태화전의 주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예친왕은 실내가 쩌렁쩌렁 울리도록 목소리를 높였다.

“망가진 자존심을 다시 세우기 위해서라도 당장 팔기군 전체에 동원령을 내려, 감히 겁도 없이 우리한테 칼을 들이민 조선을 지도에서 지워 버리고 은혜도 모르는 조선 국왕을 끌고 와 참수하기를 건의하는 바이오!”

먼저 대군을 일으켜 국경을 넘어가려고 했던 건 청나라였지만, 예친왕과 태화전에 모인 신료들은 그딴 건 상관하지 않았다.

그리고 중원으로 제국의 중심을 옮겨 왔다고 해도 예친왕을 포함한 만주족 대부분이 자신들의 근원이라 생각하는 만주에 대한 애착이 남달랐기에, 군대를 일으키는 데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예친왕을 추종하는 무장과 문신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거병에 찬성하고 나섰다.

“맞습니다.”

“조선에게 본때를 보여 줘야 합니다.”

여기저기에서 찬동하는 말들이 쏟아졌고, 금방 대군을 일으켜 조선을 정벌하는 쪽으로 분위기가 기울어졌다.

그때 황제에게 올리는 상소와 칙령을 총괄하는 통정사通政司의 책임자인 이제갑이 반대를 하고 나섰다.

“지금 팔기군을 동원하는 건 무리입니다.”

가뜩이나 심기가 불편한데 감히 자신의 말에 반대하는 자가 나오자 예친왕은 와락 인상을 쓰며 이제갑을 죽일 듯이 노려봤다.

“뭐야?”

한겨울 벌판에 서 있는 것처럼 실내가 차갑게 얼어붙고 신료들의 시선이 집중됐지만, 통정사 이제갑은 아랑곳하지 않고 이야기를 이었다.

“계속된 전쟁으로 국고가 바닥인데 여기서 또다시 대군을 일으켜 원정을 나서는 건 무리입니다.”

이제갑은 명나라 출신으로 청나라에 귀의한 이신이자 예친왕과 대립각을 세우는 태후의 측근이었다.

갈수록 심해지는 예친왕의 전횡에 불안감을 느낀 태후는 조정 내에서 소외된 이신 세력과 손을 잡는 것으로 자신의 힘을 키우며 상대를 견제하고 있었다.

예전 같으면 어림도 없는 행동이었지만, 북경 함락 이후 야심차게 추진한 강남 정벌이 무산되고 각지에서 벌어지는 반란과 여러 가지 실책 등이 쌓이면서 예친왕의 권위가 조금씩 손상되자 반대로 그만큼 태후의 발언권이 커졌다.

가장 결정적인 건 조정 신료들을 폭넓게 끌어안지 못하고 만주족 출신, 그중에서도 자신의 측근들만 챙기는 예친왕의 행태가 다른 상당수 관리들에게 소외감을 줬고 자연스럽게 태후를 중심으로 뭉치도록 만든 것이었다.

아무튼 평소에도 탐탁지 않게 여기던 이제갑이 반대를 하고 나서자 예친왕은 이를 부드득 갈며 말했다.

“그럼 이대로 심양과 만주를 포기하자는 건가?”

“그건 아닙니다. 단지 사정이 어려우니 팔기군 전체를 소집하는 건 힘들다는 뜻입니다.”

“그게 그거잖아!”

버럭 고함을 지르며 예친왕이 화를 내자 이제갑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섭정께서는 팔기군을 한 번 움직일 때마다 얼마나 많은 재화가 들어가는지 아십니까?”

“…….”

“이번에 심양 도독부를 지원하기 위한 병력 오만을 보내는 데 은자 십만 냥이 들어갔습니다. 적을 만주에서 몰아내고 조선까지 점령하려면 그보다 몇 곱절은 많은 병력이 필요할 텐데 그걸 다 어떻게 감당하라는 겁니까? 병장기부터 먹고 자는 것까지, 군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마어마한 돈이 필요하단 말입니다.”

“지금 날 가르치려는 건가?”

“사실을 말씀드리는 것뿐입니다.”

붉으락푸르락 낯빛이 변한 예친왕은 치밀어 오른 화를 참지 못하고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아 들었다.

차앙.

“네놈이 죽고 싶은 게로구나!”

황제를 호위하는 무장 외에는 그 누구도 황궁에서 병장기를 소지할 수 없게 되어 있었지만, 섭정인 예친왕은 당당히 관복에 검을 차고 다녔는데 이것만 봐도 그의 위세가 얼마나 대단한지를 단적으로 볼 수 있었다.

금방이라도 칼을 휘두를 것처럼 예친왕이 살기등등한 눈빛으로 노려보자 이제갑은 그때에야 창백해진 얼굴로 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왜, 왜 이러시는 겁니까?”

“건방지게 말을 늘어놓더니 이제야 무서운가 보군. 어디 더 입을 나불거려 보시지.”

그때 태화전 문이 벌컥 열리더니 비단옷에 화려한 장신구로 치장한 태후가 안으로 들어와 칼을 들고 서 있는 예친왕을 보며 소리를 쳤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가장 껄끄러운 인물의 등장에 예친왕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지금은 중요한 국사를 논하는 자리이니 태후께서는 나가 주시지요.”

황제의 친어머니로 명목상 황실 최고 어른이었기에, 짜증이 났지만 예친왕은 최대한 감정을 자제하며 말했다.

하지만 태후는 오늘 아주 작정을 하고 왔는지 날이 선 목소리로 예친왕을 공격했다.

“내가 못 올 데라도 왔습니까? 그리고 섭정이야말로 황상께서 계신 자리에서 칼을 뽑다니 이런 무례가 어디 있나요?”

눈을 똑바로 마주 보며 태후가 쏘아붙이는 말에 예친왕은 한쪽 뺨을 실룩이다가 이내 손에 든 칼을 집어넣은 뒤, 두려운 얼굴로 옥좌에 앉아 있는 황제를 돌아보며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사죄를 했다.

“소신이 무지하여 그만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흥분하면 그럴 수도 있지요. 괜찮으니 신경 쓰지 마세요, 숙부.”

예친왕의 기에 눌린 어린 황제가 잔뜩 주눅이 든 얼굴로 더듬더듬 이야기하자 태후는 못마땅하다는 듯이 짧게 혀를 찼다.

“쯧.”

무례를 용서(?)받은 예친왕은 고개를 돌려 무표정한 시선으로 태후를 보며 입을 열었다.

“논의해야 될 국사가 많으니 다른 볼일이 없으면 태후께서는 이만 나가 주셨으면 좋겠군요.”

예친왕이 대놓고 축객령을 내렸지만, 예전과 달리 자신만의 세력을 형성하며 힘이 생긴 태후는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듣자하니 예친왕께서 밀어붙인 조선 정벌이 실패하고 심양성까지 함락당했다던데, 어찌 이런 참담한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의도적으로 태후가 그의 이름을 강조하며 말하자 예친왕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복수를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든 이들에 대한 징계도 함께 이루어져야 할 거예요.”

“…….”

얼핏 듣기에는 타당한 이야기처럼 들렸지만, 군부를 장악하고 조선 정벌을 처음부터 끝까지 주도한 곳이 바로 섭정왕부라는 걸 생각하면 결국 예친왕 일파의 실책을 부각시키고 세력을 꺾어 놓겠다는 의도였다.

이런 얄팍한 술수를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는 예친왕은 이를 갈면서 태후를 노려보았다.

“그건 차후에 사태를 다 수습하고 해도 되지 않겠습니까?”

“자고로 제국을 잘 이끌어 나가려면 상벌이 확실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친왕께서도 반란을 제대로 막지 못한 죄로 전 직례 안찰사를 극형에 처한 것이 아닙니까?”

태후가 그동안 가슴속에 담아 두었던 말을 거침없이 꺼내며 핍박하자, 예친왕은 화가 나면서도 곤혹스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으음.”

다른 때 같으면 그가 가진 막강한 권력으로 대충 뭉개 버렸겠지만, 이번에는 상황이 너무 안 좋았다.

거기다 태후까지 지적을 하고 나서니 더더욱 그냥 넘기기가 어려웠다.

그런 예친왕을 보며 내심 조소를 머금은 태후는 득의만만한 얼굴로 이야기를 이었다.

“그리고 내가 밖에서 들으니 이 통정사의 의견이 하나도 틀린 것이 없더군요. 병부에서 계속 무리한 전쟁을 추진하는 바람에 국고가 텅텅 빈 데다가 비록 화북에서 쫓겨났다고는 하지만 명나라가 남쪽에서 눈을 시퍼렇게 뜨고 호시탐탐 아국을 노리고 있는데 팔기군에 총동원령을 내리는 건 안 될 말입니다.”

“태후께서 병략에 훈수를 두는 건 월권이십니다.”

“너무 답답해서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십만이면 조선을 정벌할 수 있다고 자신만만하시더니, 이제 팔기군을 모두 끌고 가지 않으면 이길 자신이 없어진 겁니까?”

태후가 비아냥거리듯 말하자 시뻘겋게 얼굴이 달아오른 예친왕은 이마에 핏발을 세웠다.

“뭐요!”

“자꾸 총동원령을 고집하시니 하는 이야기입니다.”

“이익.”

자존심을 건드리자 흥분한 예친왕은 이를 부드득 갈아붙이고는 화난 음성으로 말을 내뱉었다.

“좋소, 백기단과 왕부 직속 병력만으로 심양을 되찾고 조선 국왕을 잡아 오겠소.”

“서, 섭정 전하.”

“헉!”

숨을 죽인 채 두 사람의 설전을 듣고 있던 신료들은 예친왕의 폭탄 발언에 화들짝 놀랐다.

특히 야골타와 용골대 등 예친왕 일파에 속하는 자들은 눈을 동그랗게 치켜뜨며 당혹스러워했다.

반면 예친왕을 자극해 원하는 상황을 이끌어 낸 태후는 입가에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이걸로 태후는 공개적인 장소에서 신료들한테 자신의 존재를 확실히 각인시켰고, 더불어 예친왕에게 조선과 벌일 전쟁에 대한 모든 책임을 떠넘긴 것이다.

물론 예친왕이 전쟁에 승리한다면 오늘 한 행동이 오히려 전부 부메랑이 되어 되돌아올 수도 있었지만 일단은 태후 쪽이 얻는 게 더 많았다.

결국 이날 회의에서는 총동원령을 내리는 대신 백기단을 비롯한 팔기군 일부와 섭정왕부의 통솔을 받는 병력만을 일으켜 조선을 치기로 했다.

그리고 이날을 기점으로 그동안 수면 아래에서 갈등을 벌이던 예친왕과 태후가 서로 완전히 등을 돌리며 대립각을 세우게 됐다.

지금까지 허수아비 황제를 앞에 두고 뒤에서 예친왕이 모든 권력을 좌지우지하던 것이 기반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다는 뜻이었고, 내부적으로 엄청난 불안과 갈등을 예고하는 것과도 같았다.

이런 가운데 심양을 함락한 도현은 점령지를 안정화시키고 곧 있을 청군의 반격에 대비해 방어 시설을 확충하는 데 모든 심력을 쏟고 있었다.

“주상 전하를 뵙사옵니다.”

심양성 전투에서 제일 먼저 적군을 물리치고 성안에 들어간 공을 인정받아 정오품 사직으로 승차한 유혁연은 시찰 나온 도현을 보자마자 넙죽 허리를 숙여 예를 갖췄다.

“작업은 잘 진행되고 있나?”

“예. 옹성은 이제 마무리 중이고 포루도 보름 안에 모두 완성될 것이옵니다.”

옹성甕城은 예전부터 만들었던 성곽 방어 시설로, 공격에 취약한 성문 밖에 성벽을 하나 더 둘러서 방어력을 강화시킨 것이었다.

화포를 쏴서 단번에 성문을 깨고 승리를 거둔 도현은 적에게 똑같은 방법으로 당하지 않기 위해 심양성에 있는 성문마다 높다란 옹성을 쌓았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조선군의 장점인 화포를 최대한 효율적으로 운용하기 위해 성벽 곳곳에 포루砲樓를 만들었다.

성벽 일부를 밖으로 돌출시키는 치성과 비슷한 모양의 포루는 공격을 방어하기 위한 지붕을 위에 납작하게 세우고, 몸을 숨긴 채 화포를 정면과 위아래로 쏠 수 있는 구멍을 군데군데 뚫어 놓은 것이 특징이었다.

이런 포루만 긴 성곽을 따라 무려 서른 개나 만들어지고 있었고, 이것 외에도 해자를 넓히고 기병 방어용 장애물을 설치하는 등 도현은 심양을 절대 함락시킬 수 없는 철옹성으로 바꿔 나갔다.

공사 규모도 상당히 크고 주어진 시간도 짧았기에 많은 일손이 필요했는데, 도현은 포로가 된 청군 병사들을 투입해 강제 노역을 시켰다.

천천히 작업 현장을 둘러본 도현은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예상보다 진행 속도가 빠르군.”

“심양성에 있던 조선인들이 자발적으로 공사를 도와준 덕분에 일이 수월해졌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얼마 전 보고를 받았던 도현은 기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지금까지 청나라에 노예로 잡혀 있으면서 고초가 심했을 텐데 이렇게 솔선수범해서 짐을 돕다니 정말 갸륵한 일이군.”

그러자 동행한 남두병 장군이 말을 덧붙였다.

“정말 그렇사옵니다. 성내 치안도 이들의 협조가 없었다면 이리 빨리 질서를 세우기 어려웠을 겁니다.”

천도와 함께 북경으로 옮겨 가고 그동안 도현이 봉황상단을 통해 꾸준히 노예들을 사들여 자유를 줬지만, 그래도 병자호란 때 잡혀 온 숫자가 워낙 많아 심양을 함락했을 때 남아 있는 조선인이 무려 이만 명이 넘었다.

정말 눈물이 날 정도로 가슴 아픈 역사이자 현실이었지만 도현이 북벌을 단행하자 이들이 낯선 땅에 원정을 와서 전쟁을 치러야 하는 조선군에 큰 힘이 되고 있었다.

“더 빨리 구하러 오지 못한 것도 미안한데, 또다시 빚을 지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군.”

“그런 말씀 마십시오. 모두들 한평생을 노예로 살아갈 뻔했는데 그런 운명에서 벗어나게 해 주신 전하께 어찌 감사하지 않겠습니까.”

“맞사옵니다.”

공사를 책임지고 있는 유혁연의 말에 모두들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국왕 된 자로서 백성을 돌보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그보다, 청군 포로들은 그렇다 쳐도 공사를 돕는 우리 조선 사람에겐 곡식이든 뭐든 합당한 대가를 주도록 하게. 지금까지 험한 일을 겪은 사람들이니 아무리 자발적인 협조라 해도 공짜로 부려 먹는 건 안 될 일이야.”

“그리하겠사옵니다, 전하.”

도현의 명을 받은 유혁연은 두 손을 앞으로 모으고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그렇게 장수들과 함께 한창 보강 작업이 이뤄지고 있는 성벽을 따라 걷던 도현은 한 무리의 조선인들이 돌을 날라 돌무더기를 쌓고 있는 모습을 보고 걸음을 멈췄다.

틀어 올린 상투에선 땀에 젖은 머리칼이 삐죽 튀어나와 이마 위에 달라붙어 있고, 본래는 희었을 의복도 지금은 흙먼지로 누렇게 변색되어 있지만 그들의 얼굴엔 지친 기색은커녕 오히려 약간 즐거워하는 듯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도현이 일단 멈춰 서자 그 뒤를 따르던 장수들도 주위를 둘러싼 채로 무슨 일인가 싶어 서 있는데, 문득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돌린 조선인 중 한 사람이 일행을 발견하곤 경악한 얼굴로 바닥에 넙죽 엎드렸다.

“주, 주상 전하를 뵈옵니다!”

사내의 외침에 근처에 있던 다른 사람들도 처음엔 영문을 몰라 하다가 이내 상황을 깨달았다.

“전하시래.”

“뭐야?”

“아니, 어떻게 이런 험한 곳까지…….”

작은 소리로 웅성거리던 것도 잠시, 다들 하던 일을 멈추고 허겁지겁 도현을 향해 무릎을 꿇었다.

크고 작은 소음이 가득했던 주변은 삽시간에 조용한 침묵이 가득한 공간으로 바뀌었다.

하긴 여기 있는 자들 대부분이 다 양민 아니면 천민일 텐데, 감히 도현의 용안을 뵙는 것을 상상이나 했겠는가.

국왕의 가마가 행차라도 하려 치면 기나긴 행렬이 다 지나갈 때까지 고개를 숙이는 것이 당연한 도리이고, 행여나 호기심으로라도 고개를 들어 올리는 행위는 무엄한 것으로 간주되어 중죄인 취급을 받았으니 누구 하나 감히 입을 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내 너희들이 해 주는 일에 대해 벌써 다 들었느니라.”

도현은 흙바닥에 몸을 엎드린 채 머리를 들지 못하는 사람들을 따뜻한 눈빛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아무도 시킨 사람이 없는데 자발적으로 나서서 공사를 거들어 주다니, 너희들의 심성이 참으로 갸륵하고 대견하다.”

“저, 전하……!”

그 간의 고생을 다 녹여 버리듯, 부드러운 미풍처럼 다가와 어루만져 주는 도현의 말투에 어느새 여기저기서 훌쩍훌쩍 흐느끼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니옵니다, 전하. 저희가 어찌 전하의 칭찬을 받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 먼 길을 달려와 구해 주셨는데 평생 목숨을 바쳐 섬겨도 모자랍지요.”

“이토록 큰 전하의 은덕을 어찌 갚아야 할지…….”

“저희는 지금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봇물 터지듯 쏟아지는 사람들의 말에 도현은 뭐라 답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곤란한 표정을 짓다가, 곧 입가에 가느다란 호선을 띄고선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내 다시는 그대들처럼 힘이 없어 고통 받는 백성이 없도록 하겠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흑흑…… 전하.”

잠시 빚어진 소란을 뒤로하고 나머지 공사 현장도 천천히 둘러본 도현은 임시 거처로 삼고 있는 심양 황궁으로 돌아와 자리에 앉았다.

“휴우, 어째 적군과 싸우는 것보다 그 뒤처리가 더 힘든 것 같구나.”

“공사 진척 상황이 맘에 드셨던 모양입니다.”

입으로는 투덜거려도 얼굴은 밝은 표정인 것을 금세 눈치 챈 칠현이 차를 건네며 그리 말하자, 도현은 살짝 목을 축이곤 답했다.

“음, 생각보다 빨리 일이 끝날 것 같아.”

“그거 참 다행입니다.”

청 황제, 정확히 말하자면 섭정왕이 조만간 행동에 나설 것이 분명했기에 방어 시설을 보강하는 일은 빨리 마무리할수록 좋았다.

흔히 그를 가리켜 친조카를 꼭두각시처럼 휘두르는 차가운 심장을 가진 사내라고 하지만, 도현이 보기에 섭정왕은 이성적으로 상황을 파악하고 감정을 다스리는 데 탁월할 뿐 사실은 누구보다 성정이 불같은 사람이었다.

특히 자기 것이라 생각되면 절대 손에서 놓지 않는 야욕과 원대한 야망을 가진 사내가, 어찌 보면 현재 수도인 북경보다 더한 상징성을 가진 심양을 조선군의 손에 내주고도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이런저런 일을 생각하자 머리가 터질 것처럼 복잡해, 답답한 마음으로 다 마신 찻잔을 내려놓는데 칠현이 뭔가 할 말이 있는 듯한 얼굴로 서 있었다.

“뭐야?”

“오늘은 전하께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뜸들이지 말고 빨리 말해 봐.”

그러자 칠현은 히죽 웃어 보이고는 곱게 접은 서찰을 내밀었다.

“오늘 도착한 보급대가 가져온 것입니다. 중전 마마께서 특별히 당부하시며 맡긴 것이라 평소보다 더 빨리 길을 재촉해 왔다더군요.”

“중전이?”

혹시 대궐에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 아닐까 하는 마음에 도현은 서둘러 서찰의 봉인을 뜯었다.

자신이 없는 사이 아이들 중 누군가가 아파서 드러누워 있기라도 한다면 안타까움에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그렇게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서둘러 서찰을 펼친 도현은 이내 딱딱하게 굳었던 표정을 풀고 환하게 웃었다.

“중전 마마께서 뭐라 하십니까?”

칠현도 서찰의 내용이 내심 궁금했는지 편하게 풀어진 도현의 표정을 보고 물었다.

“대궐은 아무 일 없이 평온하다는군. 연이와 공주들도 어디 다치거나 아픈 데 없이 건강하단다.”

서찰은 중전의 성격만큼이나 정갈하고 가냘픈 필체로 요즘 근황을 전하고 있었다.

처음엔 정원에 꽃이 피었다는 사소한 이야기로 시작해서 연이 여전히 승마를 열심히 배우고 있다는 이야기, 공주들은 하루가 다르게 어여쁜 아가씨가 되어 가고 있다는 이야기 등 상상만 해도 절로 미소가 배어 나오는 일들이 담담하게 이어졌고 마지막은 도현의 안부를 묻는 것으로 끝났다.

도현의 승전보가 대궐에 당도하였을 때는 모두가 기쁜 얼굴로 감격스러워했고, 특히 효심이 깊은 숙안 공주가 눈물까지 흘렸다는 이야기에 도현은 자기도 모르게 코끝이 찡해지는 것을 느꼈다.

몇 번이고 되새기듯 중전의 편지를 반복해서 읽은 도현은 곧 칠현을 불러 말했다.

“지필묵을 가져오너라. 중전에게 답장을 써야겠다.”

“네, 전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칠현이 금방 붓과 종이 그리고 먹을 준비했다.

칠현이 옆에서 먹을 가는 동안 도현은 붓을 들고 고심했다.

“왜 그러십니까?”

“음…… 뭐라고 시작해야 좋을지 몰라서 말이야.”

백지를 눈앞에 두니 뭐부터 적어야 할지 막막한 모양이었다.

“전하께서도 주저하거나 망설이는 일이 있으시군요.”

“뭐야?”

“아무것도 아닙니다. 제가 무슨 말을 했나요?”

“하여튼 고놈의 주둥이는.”

“아야야야.”

손을 뻗어 칠현의 입을 살짝 꼬집은 도현은 다시 제대로 붓을 잡고 작게 숨을 내쉬었다.

“어디 보자.”

칠현과 옥신각신 실랑이를 하는 동안 어느새 어깨에 힘이 빠졌는지, 머리가 맑아진 기분이었다.

칠현이 정성껏 간 먹물을 붓 끝에 적셔 종이에 점 하나를 찍는 순간 도현은 언제 고민했냐는 듯 일필휘지로 긴 답장을 써 내려갔다.

오늘 중전이 보낸 서신을 읽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르오. 삭막한 전장에서 들은 중전과 아이들의 소식은 내게 큰 힘이 되었소. 그대를 생각하면 언제나 미안한 마음뿐이라오. 어린 나이에 먼 타국까지 따라와 고생을 했는데 지금도 대궐과 아이들을 다 맡기고 이렇게 홀로 나와 있으니 얼굴을 들 수가 없구려. 하지만 중전이 언제나 그 자리를 지키고 있기에 내 마음이 든든하다오. 이렇게 중전을 생각하며 글을 적으니 호수처럼 깊고 맑은 눈동자와 앵두보다 더 붉고 탐스러운 그대의 입술이 너무나도 그립구려. 사랑하오, 중전. 이 세상에 그대가 없었다면 어떻게 살았을지 모르겠소.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전쟁이 끝나고 다시 돌아갈 때까지 몸 건강히 잘 있으시오.

편지를 다 적은 도현은 직접 여러 번 접어 봉투에 넣고 봉인을 한 뒤 시립해 있는 칠현에게 건네주었다.

“내일 떠나는 파발이 있지?”

“예.”

“거기에 함께 보내도록 해.”

“알겠습니다.”

편지를 받아 든 칠현이 묘한 얼굴로 쳐다보자 도현은 책상 위에 놓인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

“뭐, 할 이야기라도 있어?”

“그냥, 전하를 보면 참 대단한 것 같아서요.”

“뭔 말이야?”

“다른 분들은 후궁도 많이 두시고 그러시는데 전하께서는 중전 마마를 생각하시는 마음이 몇 해가 지나도 한결같으시니 말입니다.”

“부러우면 너도 장가를 가든가.”

“너무하십니다.”

칠현이 울상을 짓자 도현은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농담이야.”

“툭하면 놀리시고…….”

“삐쳤어?”

“아닙니다.”

칠현은 새치름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에이, 삐친 것 맞네.”

“아니라니까요.”

“어쭈, 지금 나한테 화내는 거야?”

“끄으응.”

도현은 얼굴을 찡그린 채 신음하는 칠현을 웃으며 달랬다.

“자, 자, 그만하고 표정 풀어.”

“……예.”

하루하루를 막중한 책임감과 긴장 속에서 살아가는 도현에게 지금처럼 가장 가까운 측근이자 친구인 칠현과 실없는 농담을 나누며 투덕거리는 시간은 몇 안 되는 해방구 중 하나였다.

한편 왕부에 모인 예친왕의 측근들은 태화전에서 태후가 보인 행동에 분통을 터트렸다.

“아무리 간사한 것이 사람 마음이라고 하지만, 누구 덕분에 황실 최고 어른 자리를 차지했는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맞습니다.”

“이건 섭정에 대한 도전입니다.”

야골타를 비롯한 측근들이 언성을 높이면서 태후를 비난하는 것과 달리, 상석에 앉은 예친왕은 무슨 생각인지 담담한 얼굴로 앞에 놓인 마유주만 마셨다.

그러자 다른 사람들처럼 대놓고 화를 내지는 않았지만 표정이 굳은 용골대가 예친왕을 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정말 왕부 병력만 가지고 심양으로 가실 생각입니까?”

“사내가 한번 말을 꺼냈으면 지켜야 하지 않겠나.”

“하지만 부담이 너무 크지 않습니까. 그러다가 자칫 일이 잘못되기라도 하면…….”

우려 섞인 용골대의 말에 예친왕은 눈을 무섭게 치켜떴다.

“내가 조선군 따위를 이기지 못할 것 같나?”

“아, 아닙니다. 제가 실언을 했습니다.”

전장을 호령하는 청나라의 이름난 맹장이었지만 예친왕이 분노를 드러내자 용골대는 황급히 머리를 숙이며 사죄했다.

덩달아 실내 분위기가 차갑게 얼어붙었고 다른 측근들도 마른침만 꿀꺽 삼키면서 그의 눈치를 봤다.

“멍청한 호타이 때문에 치욕을 당했지만, 조선군쯤은 나 혼자만의 힘으로도 충분히 박살 낼 수 있어. 이제 좀 살 만해 지니까 태후가 자꾸 딴생각이 들고 내가 만만해 보이는 모양인데, 마음껏 까불라고 해. 조선 정벌을 끝내고 돌아와서 주제도 모르고 건방 떤 것들을 모조리 다 쓸어버릴 테니까 말이야.”

크게 소리를 치지는 않았지만 살기가 그대로 느껴지는 예친왕의 말에 측근들은 담담한 척해도 그가 얼마나 화가 나 있는지를 깨닫고, 조만간 자금성에 거센 피바람이 불 것을 직감했다.

“용골대.”

“예, 전하.”

“자네는 이번 전쟁에 참여하지 말고 북경에 남아 있도록 하게.”

뜻밖의 지시에 용골대는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내가 자리를 비운 동안 태후가 함부로 경거망동하지 못하게 견제해 줄 사람이 필요해. 자네가 그 역할을 맡아 줘야겠어.”

타고난 무장인 용골대는 전쟁에서 빠지는 것이 아쉬웠지만, 북경을 지키는 일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했기에 이내 수긍하는 표정을 지었다.

“알겠습니다.”

“자네를 믿네. 만약 태후 쪽이 수상한 짓을 벌이면 그때는 가차 없이 먼저 행동에 나서도록 해.”

“무력을 써도 괜찮다는 말씀이십니까?”

긴장한 얼굴로 용골대가 묻자 예친왕은 무겁게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 당하는 것보단 먼저 치는 게 낫지 않겠나.”

“……!”

예친왕의 말에 용골대를 비롯한 측근들은 숨을 삼키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허수아비라고는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황제의 친어머니에게 무력을 행사하는 건 반역에 준하는 행동이었다.

충격과 놀라움도 잠시, 경우에 따라 황위를 가질 수도 있다는 뜻이었기에 내심 그가 섭정에 머물러 있는 것이 불만이었던 측근들의 눈빛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런 시선을 받으며 예친왕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태연한 얼굴로 앞에 놓인 술잔을 비웠다.

며칠 뒤 태후의 요구대로 패전 책임을 지고 병부상서와 군부 고위 관리 여섯 명이 자리에서 물러났는데, 모두 예친왕 휘하에 속한 인물들이었다.

그리고 빈자리는 태후를 따르는 인물들로 채워졌는데 섭정왕부의 반발이 있었지만 조선군에 패하고 심양까지 내준 것을 물고 늘어지며 계속 공격을 해 대자 결국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이 일로 가뜩이나 사이가 안 좋던 양쪽은 감정의 골이 더욱 깊어졌다.

태후의 행동에 이를 부득부득 갈며 속으로 분노를 삭인 예친왕은 자신의 친위대격인 백기단을 비롯해 모두 이십만에 달하는 대군을 끌어모았다.

일반 병사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지만 최정예인 순수 만주 팔기 다섯 개 단이 전쟁에 참가했다.

이건 예친왕이 군권을 장악하고 있어서이기도 했지만, 청나라 군사력의 핵심인 팔기군을 이루는 만주족 전사들한테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다는 뜻도 되었다.

마치 시위라도 하는 것처럼 보란 듯 상대가 대군을 북경성 밖에 집결시키자 태후 쪽은 큰 위협을 느꼈다.

북경성 문루에 올라 직접 모여 있는 병사들을 확인한 태후는 예친왕이 언제든 반역의 깃발을 세우고 황위를 찬탈하려 들 수 있음을 다시 한 번 곱씹으며 가슴속 깊이 새겼다.

선선했던 가을바람이 어느새 차가운 기운을 품고, 맑게 지저귀며 하늘을 날던 새들도 곧 다가올 추위에 대비해 열심히 모이를 모으러 다니는 늦가을 무렵.

겨울의 초입에 성큼 다가선 한양에 때아닌 소란이 일었다.

“병사들에게 보낼 옷이니 꼼꼼하게 바느질을 하게. 솜은 얼마든지 있으니 속을 빵빵하게 채워 넣는 것도 잊지 말고.”

엄한 표정을 한 관리들이 바느질을 하는 아낙네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주의를 줬다.

마침 추수도 다 끝나고 농사일이 한가해질 계절이다.

손이 잠시 비어 여유가 있는 틈을 타 용산에 만들어진 한 건물에선 한양 내에 있는 아낙네들을 모두 불러 모아 전장에 있는 병사들에게 보낼 동복을 짓고 있는 중이었다.

북방의 겨울은 조선에서 보내는 추위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혹독하다고 하니, 평상시에 지급되는 얇은 홑옷만으로는 한참 부족할 것이었다.

게다가 겨울옷은 부피도 크고 양도 많아서 지금부터 얼른 만들어서 운반해야 곧 불어닥칠 추위를 병사들이 이겨 낼 수 있었다.

“일 차로 보낼 동복은 다 만들어졌는가?”

진행 상황도 점검할 겸, 궁녀들과 함께 아낙네들이 바느질을 하는 장소를 찾은 중전이 곁에서 안내를 하던 관리에게 물었다.

“하루나 이틀만 있으면 얼추 수량은 채워질 듯합니다.”

“그래?”

중전이 의외라는 듯 반문했다.

아무리 한양 내의 거의 모든 아낙네들을 소집했다 하지만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 내는 것에는 한계가 있는 법.

작은 아기 옷도 아니고 성인의 몸에 맞춘 겉옷을 만들려면 못해도 한 사람이 반나절은 꼬박 매달려야 겨우 한 벌을 지을 수 있었다.

만약 수량이 한참 모자라다면 조금 무리를 해서라도 독촉을 하려고 했는데, 이 정도 진행 상황이라면 생각 외로 수월하게 보급대가 떠나는 날짜에 맞출 수 있을 것 같았다.

“여기 있는 아낙네들의 절반은 호란 때 집과 재산, 친척 등을 잃은 경험이 있고, 또 나머지 절반은 자식이나 남편을 병사로 떠나보낸 사람들이니까요. 자기 가족이 입을 옷이라 생각하니 절로 힘이 난다고 합니다.”

“그런가.”

중전은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 관리에게 말했다.

“아무리 시간에 쫓긴다고는 하나 밥과 휴식 시간은 제대로 잘 챙겨 주도록 하게. 그리고 필요하다면 대궐의 궁녀들을 써도 상관없네. 나이가 많은 상궁들은 눈이 침침해서 바느질은 무리일 테니, 젊은 아이들 위주로 뽑아 가게나.”

“하오나 어찌 감히…….”

“전하께서 병사들과 함께 전장에 나가 계시는데 궁녀들이라고 해서 가만히 놀고 있으면 되겠는가? 시중을 드는 것뿐이라면 상궁들 몇 명만 있어도 충분하네.”

“알겠사옵니다.”

관리는 단호한 중전의 태도에 아무 말 없이 머리를 조아렸다.

그렇게 짧은 외출을 끝내고 대궐로 돌아오자, 찬 바람이 부는 바깥과는 달리 훈훈한 온기가 가득한 방이 중전을 반겼다.

“중전 마마, 출출하실 텐데 다과를 준비할까요?”

“아니, 됐다.”

중전은 어깨 위에 둘렀던 두꺼운 겉옷을 내려놓고 자리에 앉았다.

“한동안은 할 일이 없으니 다들 나가 있어라.”

“네.”

사락사락 옷자락 스치는 소리와 함께 궁녀들이 장지문을 닫고 나가자, 중전은 햇빛이 환히 잘 들어오는 창가 쪽으로 옮겨 앉은 후 어젯밤에 하다 남은 바느질거리를 꺼내 품에 안았다.

몇 날 며칠 동안 붙들고 앉아 있던 보람이 있어, 도현에게 보낼 동복이 거의 완성된 참이었다.

솜을 두툼하게 넣고 기워 한철을 충분히 버틸 수 있을 정도로 두꺼웠고, 입고 벗기 쉽도록 품이 적당히 넓어 지금 당장이라도 포목점에 가서 내다 팔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잘 만들어졌다.

이제 마무리 작업만 남았는지라, 중전은 흰색 실 대신 도현이 좋아하는 청색과 홍색 실을 사용해 소매 자락에 자수를 넣기 시작했다.

이것만 끝내면 내일 모레 출발할 보급대 편에 도현의 옷을 같이 보낼 수 있을 터였다.

중전은 부처님에게 불공을 드리는 듯한 심정으로 도현의 안부와 무사 귀환을 기원하며 세심하게 한 땀 한 땀 정성을 다해 바늘을 움직였다.

이렇게 중전과 아낙네들의 정성이 가득 담긴 동복은 며칠 뒤 보급대 짐마차에 가득 실려 북방으로 옮겨졌다.

병력을 모두 집결시키고도 사사건건 훼방을 놓는 태후 측의 교묘한 방해와 군량미가 부족해 추수가 다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 했던 예친왕은 마침내 시월 첫째 날 심양을 향해 출병했다.

심양이 조선군에 함락된 지도 벌써 달포가 지났고 조금 있으면 혹독한 겨울이 시작된다는 것 등 여러 가지 불안 요소에 측근들 사이에서도 출병을 내년으로 미뤄야 된다는 이야기가 조심스럽게 흘러나왔지만, 지난번 패배로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은 예친왕은 그냥 계획대로 밀어붙였다.

무려 이십만에 달하는 대군의 출정이었기에 행군 대열은 수십 리에 걸쳐 이어졌고, 이 소식은 곧장 북경에 잠입해 있던 주작단 단원을 통해 한양과 심양으로 전달됐다.

“청군 포로들은 다 내보냈나?”

상석에 앉은 도현의 물음에 남두병 장군이 왼편에 있다가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

“예. 늦어도 보름 뒤면 의주성에 도착할 겁니다.”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이동 중에 행여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감시를 철저히 해야 될 거야.”

“기병 한 개 천인대가 호송을 맡았으니 염려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전쟁이 잠시 소강상태를 이루는 동안 방어 시설 공사와 보급을 모두 끝낸 도현은 전투가 벌어졌을 때 자칫 위험 요소가 될 수 있는 청군 포로들을 모두 압록강 이남 지역으로 이동시켰다.

이들은 엄중한 감시 속에 의주와 평양을 잇는 새로운 도로 건설에 투입될 예정이었다.

더불어 노예 생활을 하다가 구출된 조선인을 제외하고 심양성에 거주하던 만주와 한족 주민들을 모두 만리장성 쪽으로 쫓아 보냈다.

포로들을 옮긴 것처럼 미리 위험 요소를 제거하려는 의도도 있었지만, 향후 심양과 만주 지역을 영원히 조선 땅으로 만들기 위한 사전 정리 작업의 일환이었다.

심양성만 해도 십만이 넘는 만주와 한족 주민들이 있어, 잘못하면 대륙을 정복한다 해도 결국에는 절대다수인 한족에 동화되어 민족 정체성을 상실하고 사라져 버린 많은 이민족들처럼 될 가능성이 있었기에 조금 냉정해 보여도 이런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그나저나 예상과 달리 적이 빨리 반격해 오지 않고 머뭇거린 덕분에 재정비를 끝낼 수 있어서 다행이야.”

“그러게 말입니다. 정말 하늘이 도왔습니다.”

“잘하면 올해는 이대로 넘어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박영식 장군의 말에 도현도 약간 기대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곧 겨울이 시작되니 그럴 수도 있지.”

“그렇게만 된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는데 말입니다.”

탐보망을 통해서 예친왕이 이십만 대군을 북경성 밖에 모아 뒀다는 정보를 전해 들었지만, 가능하다면 조금 더 준비를 갖춘 뒤에 청군과 대결을 벌였으면 하는 것이 도현과 장수들의 바람이었다.

그때 누가 이들의 대화를 엿듣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위사인 박태철이 안으로 들어와 급보를 알렸다.

“전하, 바로 보셔야 되는 전갈이옵니다.”

보통 이렇게 위급을 요하는 일은 나쁜 소식일 경우가 많았기에, 도현은 살짝 얼굴을 굳히며 박태철이 내민 서찰을 건네받았다.

아니나 다를까 봉인을 뜯고 안에 든 종이를 꺼내 내용을 읽어 내려간 도현은 미간을 좁히며 낮게 침음을 내뱉었다.

“으음.”

그러자 오른쪽에 앉은 박영식 장군이 그를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슨 소식인데 그러시옵니까?”

시선을 든 도현은 잠시 좌우에 앉아 있는 장수들을 둘러보다가 이내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예친왕이 군대를 출병시켰다는군.”

“……!”

순간 짧은 침묵이 흐른 뒤 모여 있던 장수들 사이에서 한숨과 탄식이 하나둘 작게 새어 나왔다.

“허어.”

“결국 이렇게 되는군요.”

청군과 싸우는 건 두렵지 않았지만, 잠시나마 꿈꿨던 짧은 평화에 대한 기대가 산산이 부서진 것에 대한 허탈감이었다.

분위기가 가라앉자 도현은 굳은 얼굴을 풀고 일부러 목소리에 힘을 주면서 이야기를 했다.

“어차피 각오했던 일이잖아. 질질 시간을 끌며 전쟁이 길어지는 것보단 빨리 승부를 보는 게 낫지.”

그러자 장수들도 이내 어두운 표정을 지우고 주먹을 움켜쥐며 전의를 다졌다.

“맞습니다. 까짓것, 얼마든지 오라고 하지요.”

“이제 곧 겨울이니 먼 길을 행군해 와서 공성전까지 벌여야 되는 적보다 우리가 훨씬 유리하지 않겠습니까.”

“백만 대군을 끌고 왔다가 요동성을 넘지 못하고 쓸쓸히 발길을 돌려야 했던 수양제처럼 만들어 주지요.”

“바로 그거야. 앞으로 조선의 이름을 후대에까지 오랫동안 찬란하게 빛내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가 여기서 죽는 한이 있더라도 심양성을 끝까지 지켜 내야 될 것이야.”

도현의 말에 장수들은 결연한 얼굴을 하고는 일제히 머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옛.”

다음 날부터 비상령이 내려지자 소강상태 동안 약간 풀어져 있던 병사들은 다시 긴장의 끈의 바짝 조이고는 곧 있을 전투에 대비했다.

그리고 전투가 시작되면 얼마 동안이나 성이 고립될지 몰랐기에, 비변사에서 후방 지원을 맡고 있던 병조판서 임경업은 제물포를 출발해 심양성 바로 앞 혼하까지 이어지는 수로를 이용해 최대한 많은 보급 물자를 수송했다.

북경을 떠나 동진한 청군은 만리장성을 넘어 시월 말쯤 드디어 심양 북서쪽에 위치한 요하遼河 지류에 다다랐다.

여기까지 오는 데 스무 날이 넘게 걸린 것이었는데, 아무리 대군이 움직인다고 해도 보름이 넘지 않는 거리라는 걸 생각하면 상당히 느린 속도였다.

팔기군처럼 전원 기병이 아니라 공성전을 위해 상당수의 보병이 포함됐고 옮겨야 될 보급 물자도 많은 데다가, 무엇보다 겨울이 다가오면서 요하 일대가 질퍽한 진창으로 변하는 바람에 행군이 계속 더뎌지고 있었다.

끼릭끼릭, 덜컹!

“뭐야?”

“젠장, 또 진창에 빠졌어.”

“미치겠네.”

군량을 가득 실은 짐마차 한 대가 진창에 빠져 옴짝달싹 못하자 병사들은 불평을 터트리며 좌우에 붙어 앞으로 밀었다.

“읏차!”

“힘을 줘!”

“하나, 둘.”

여러 명이 달라붙어 겨우 짐마차를 꺼냈지만 얼마 가지 못하고 또 진창에 빠지고 말았다.

짐마차뿐만 아니라 말과 사람들도 발을 한번 내딛을 때마다 푹푹 들어가는 진창을 헤치고 가느라 금방 지쳐 버렸다.

“이렇게 늦어져서야…….”

예친왕을 따라 종군하게 된 왕태봉은 하늘에 구멍이라도 났는지 며칠 전부터 쉬지 않고 내리는 장대비를 맞으며 힘겹게 걸음을 옮기는 병사들을 보면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계획대로라면 벌써 심양성에 도착해 있어야 했지만, 행군 속도는 갈수록 늦어졌고 설상가상으로 때아닌 초겨울 장마에 요하가 범람하면서 길까지 막혀 버렸다.

상류로 우회해서 겨우 강을 건너기는 했지만 이것 때문에 또 천금 같은 시간을 이틀이나 허비하고 말았다.

가뜩이나 땅도 안 좋은데 비가 내려 더 질척해지고 날씨까지 쌀쌀해, 상당수 병사들이 감기에 걸려 고생하는 악순환이 반복되기까지 했다.

밤에 숙영을 할 때면 막사마다 기침 소리가 들렸고, 상태가 너무 안 좋아 낙오된 인원만 해도 벌써 오백이 넘었다.

아직 조선군과 맞닥뜨리지도 못한 상태에서 이 정도나 손실이 발생하고 있다는 건 너무나도 뼈아픈 일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혹독한 날씨와 지형에 적응하지 못하고 고생하는 한족 출신 병사들과 달리 원래 이곳이 고향인 팔기군은 멀쩡하게 전투력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팔기군은 전체 병력의 절반도 안 됐고 또 공성전을 치르기 위해서는 보병인 한족 병사들이 필요했기에 큰 위로가 되지는 않았다.

상황이 갈수록 안 좋아지자 왕태봉은 불벼락이 떨어질 것을 각오하고 예친왕한테 출병 연기를 심각하게 건의했지만, 단번에 거절당했을 뿐만 아니라 너무 나약하고 끈기가 없다는 핀잔까지 들어야 했다.

아직 갈 길이 멀고 넘어야 될 산이 많은데 벌써 이렇게 힘을 빼서 무슨 수로 심양성을 탈환할 수 있을지 한숨만 나왔다.

결국 이날도 삼십여 리밖에 이동하지 못한 청군은 그나마 땅이 덜 질척거리는 곳을 찾아 천막을 치고 숙영지를 세웠다.

저녁이 되자 비가 조금 잦아들었지만 그치지는 않았고 오히려 바람이 더 세게 불어 가만히 있으면 몸이 부들부들 떨릴 만큼 기온이 내려갔다.

군데군데 불을 피우고 경계를 세웠지만 낮 동안 피곤에 절어서 그런지 대부분 꾸벅꾸벅 졸며 제대로 주위를 살피지 않았다.

시간이 자정을 넘어 새벽이 되었을 때쯤, 이런 청군 숙영지로 몰래 접근하는 일단의 무리가 있었다.

철벅철벅.

근위대 마군 대장인 흑치영은 새까만 숯으로 얼굴을 칠한 채 타고 있는 말에 재갈을 물린 상태로 조심스럽게 진창을 헤치며 움직였다.

주위에는 근위대 소속 기병들이 똑같이 위장을 하고는 그를 따랐다.

진창에 말발굽을 내디딜 때마다 시끄럽게 울리는 철벅거리는 소리가 신경이 쓰였지만, 다행히 빗소리에 묻혀 아직까지는 적이 눈치채지 못했다.

기름을 먹인 유삼油衫을 갑옷 위에 껴입었지만 하루 종일 내리는 비에 축축하게 젖었다.

하지만 곧 벌어질 전투에 바짝 긴장을 해서인지 누구도 그것을 신경 쓰지 않았다.

달까지 없는 밤이라 칠흑같이 어두운 데다가 비까지 내려 시야가 정말 안 좋았지만, 추위를 이기기 위해 잔뜩 피워 놓은 모닥불 때문에 흑치영과 조선군 기병들은 적진을 똑똑히 확인할 수 있었다.

고된 행군에 지친 청군은 설마 조선군이 성을 나와 먼저 기습을 할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하고 모두 곯아떨어져 있었다.

바로 이런 점을 노리고 도현은 일부 장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기동력이 뛰어난 기병들을 대규모로 내보내 지금처럼 야습을 감행하기로 한 것이었다.

좀 더 두고 봐야 되겠지만, 상당히 가까이 접근했음에도 청군이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기에 아직까지는 성공이라 할 만했다.

오십 보 앞에 도착하자 흑치영은 한쪽 손을 들어 올려 부하들을 멈춰 세웠다.

말이 달려 속도를 올릴 수 있는 거리가 필요했고 무엇보다 더 접근하면 자칫 상대가 야습을 알아차릴 수도 있었기에 딱 이 정도가 적당했다.

흑치영은 품속에서 이제 기병들의 필수 무기가 되어 버린 웅오식 권총을 꺼내 들었다.

손에서 전해지는, 차가우면서도 묵직한 쇠뭉치의 느낌이 아주 좋았는데 미리 여섯 발의 총알을 꽉 채워 둔 상태였다.

주위를 둘러보자 부하들도 모두 권총을 꺼냈다.

아무리 상대가 방심하고 있다지만 숫자가 훨씬 많은 적진 한가운데로 뛰어들어야 했기에, 다들 얼굴에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뱉은 흑치영은 정면에 위치한 청군 숙영지를 노려보며 크게 외쳤다.

“돌격!”

“우와아아!”

두두두두!

흑치영의 우렁찬 목소리와 시끄러운 말발굽 소리가 어둡고 축축한 밤공기를 찢으며 울려 퍼졌다.

“이럇!”

“하!”

질척거리는 진창을 박차고 앞으로 달려 나간 기병들은 이제 익숙한 모습으로 흔들리는 말 위에서 중심을 잡으며 권총의 방아쇠를 당겼다.

탕! 타탕! 탕! 탕!

요란한 총성이 울리자 경계를 서던 적병 네댓 명이 피를 뿌리며 쓰러졌고, 흑치영과 부하들은 바람처럼 그 옆을 지나 숙영지 안으로 파고들었다.

이제부터는 멈추면 죽는 것이었다.

순식간에 총알 여섯 발을 모두 써 버린 흑치영은 허리께에서 장검을 빼 들고는 갑작스러운 소란에 천막 밖으로 나오던 적병의 목을 지나가면서 베어 버렸다.

슈각.

“컥.”

미처 피할 틈도 없이 날아온 일격에 적병은 단말마를 내지르며 옆으로 쓰러져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뒤따르던 부하들도 닥치는 대로 적병을 베어 넘기며 청군 숙영지를 마구 휘저었다.

“커헉.”

“끄윽.”

땡땡땡!

“적이다!”

비상을 알리는 종소리와 함께 적병의 다급한 목소리가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심상치 않은 소음에 갑옷도 제대로 갖춰 입지 않고 침상에서 일어나 천막 밖으로 나온 예친왕은 온통 아수라장이 된 숙영지를 둘러보고는 버럭 고함을 질렀다.

“무슨 일이야!”

그러자 일단의 병사들을 데리고 어둠 속에서 나타난 야골타가 황급히 예친왕에게 다가와서는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조선군이 야습을 해 왔습니다.”

“뭐야? 감히 이것들이!”

이를 부드득 갈아붙인 예친왕은 어느새 하나둘 모여들고 있는 장수들을 보며 호통을 쳤다.

“도대체 경계를 어떻게 섰기에 야습을 당하는 거야!”

“면목이 없습니다.”

“당장 놈들을 막아! 아니, 팔기군을 출동시켜 다 잡아 죽여 버려!”

화가 단단히 난 예친왕의 불호령에 야골타는 상체를 숙이며 얼른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명령을 받은 야골타는 즉시 팔기군 병사들을 끌어모았다.

양쪽이 뒤엉켜 한창 전투가 진행 중인 숙영지 외곽과는 달리, 예친왕을 포함한 주요 지휘관과 팔기군 병사들이 있던 안쪽은 아직 조선군이 들어오지 않았기에 신속하게 병력을 집결시킬 수 있었다.

시뻘건 불길이 치솟아 올라 어둠을 환하게 밝히고 있는 숙영지 외곽과 그 사이로 들리는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와 비명에 예친왕은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제기랄.”

“죽어!”

서걱.

“끄아악.”

흑치영이 내려친 장검에 앞을 막고 섰던 적병의 가슴이 길게 잘려 나가면서 시뻘건 피가 튀었다.

즉사한 적병이 허물어지듯 그 자리에 주저앉자 재빨리 주위를 둘러본 흑치영은 여전히 우왕좌왕하고는 있지만 점점 적병의 숫자가 늘어나는 걸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조금 아쉬웠지만 이제는 빠져나가야 할 시점이었는데, 자칫 미련 때문에 머뭇거렸다가는 이대로 적군에게 포위되어 야습이 실패로 끝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이만하면 됐다. 모두 집결지로 빠져나가라!”

크게 소리를 친 흑치영은 품속에서 긴 막대기 모양의 신호용 폭죽을 꺼내 들고는 한쪽에 달린 끈을 힘껏 잡아당겼다.

팍!

그러자 길게 꼬리를 남기며 솟구친 불꽃이 공중에서 폭음과 함께 터져 어두운 밤하늘을 환하게 밝혔다.

퍼엉!

서로 이리저리 뒤섞여 있는 데다가 어둡고 비까지 내려 명령 하달이 어려운 상태에서는 폭죽만큼 확실한 퇴각 신호도 없었다.

폭죽이 터지자 용감하게 적과 싸우던 기병들은 미련 없이 상대를 떨쳐 내고는 말 머리를 돌렸다.

하지만 그냥 퇴각하는 것이 아니라 싸우는 와중에 눈여겨봐 두었던 보급 물자 수레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마, 막아!”

기병들이 잔뜩 몰려오자 보급품을 지키고 있던 적병들은 기겁을 했다.

창을 앞으로 내밀며 어떻게든 막아 보려고 했지만 흑치영과 기병들을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채챙! 챙! 챙!

“컥.”

“아악.”

이히히힝.

사방에서 비명과 말의 울음소리가 난무했다.

금방 적을 제압한 기병들은 타고 있는 말안장에 매달아 둔 가죽 주머니를 꺼내 짐 수레를 향해 집어 던졌다.

퍽! 퍽!

날아간 가죽 주머니는 짐수레에 부딪치자 터지면서 안에 들어 있던 액체를 뿌렸다.

짐수레와 보급 물자는 순식간에 정체 모를 액체에 흠뻑 젖었고, 흑치영은 말을 타고 가며 근처 막사에 피워 놓은 횃불을 낚아챈 후 바로 그 액체 위에 던져 넣었다.

화르르륵!

기병들이 뿌린 건 바로 동물 기름이었는데, 횃불이 떨어지자 곧장 화르륵 하고 시뻘건 불길이 치솟았다.

“불이야!”

“이런, 빨리 꺼!”

쏟아지는 빗줄기에도 불구하고 빠르게 번져 가는 불길에 적병들은 기겁을 하며 황급히 달라붙어 불을 껐다.

“가자!”

목적을 충분히 다 이룬 흑치영과 부하들은 말 옆구리를 발로 차며 퇴로가 막히기 전에 서둘러 청군 숙영지를 빠져나갔다.

“잡아라!”

“도망치지 못하게 해!”

때마침 야골타가 이끄는 팔기군이 도착해 달아나는 조선군을 뒤쫓아 가려는 순간, 갑자기 엄청난 폭음이 울리며 커다란 불기둥이 솟아올랐다.

콰콰쾅!

보급 물자 사이에 섞여 있던 화약이 화재에 유폭해 대폭발을 일으킨 것이었는데, 얼마나 위력이 큰지 사방 백 보 안에 있는 모든 물체와 사람들을 날려 버렸다.

엄청난 굉음에 말들이 흥분해서 날뛰었고 병사들도 버섯 모양의 거대한 연기와 불기둥을 멍하니 쳐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달아나던 흑치영과 기병들까지도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볼 정도로 충격이 대단했다.

“어떻게 된 거지?”

“보급 물자와 함께 화약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옆으로 다가온 부관의 말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던 흑치영은 이내 입꼬리를 위로 말아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더 잘됐군.”

“그러게 말입니다.”

화약은 군량 못지않게 아주 중요한 물자였는데 특히나 이번처럼 공성전을 벌여야 할 때에는 꼭 필요했다.

뜻밖의 소득에 기뻐하며 흑치영과 부하들은 빠르게 숙영지를 빠져나와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뒤를 쫓아가던 팔기군은 화약 폭발에 추격을 포기하고 보병들과 함께 황급히 불길에 휩싸인 보급 물자를 건져 내는 데 달라붙었다.

“젠장, 군량부터 끄집어내!”

“으악, 뜨거워!”

꽈꽝!

“헉!”

“크윽.”

“히익!”

허둥지둥 불을 끄며 아직 타지 않은 보급품을 옮기던 적병들은 불길 속에 남아 있던 화약 상자가 또다시 터지자 기겁을 하며 바닥에 엎드리거나 뒤로 물러섰다.

무시무시하게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화약이 계속 유폭을 일으키자, 뒤에서 장수들이 고래고래 소리를 치며 닦달을 했지만 병사들은 감히 가까이 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야습으로 청군이 입은 피해는 막심했다.

여기까지 낑낑거리며 힘들게 가져온 보급 물자가 절반 이상 불에 타 재가 되어 버렸고 천여 명에 달하는 사상자가 발생한 것이다.

천막마다 부상을 입은 채 고통을 호소하며 쓰러져 있는 병사들이 가득했고 한쪽에서는 숙영지 곳곳에 널린 시신을 거둬 화장을 하고 있었다.

여유가 있었다면 비석까지는 못 세워 줘도 땅에 가매장을 해 주었겠지만 그럴 정신이 없었다.

살아남은 병사들은 어제까지만 해도 함께 밥을 먹고 떠들던 동료들의 시신이 아무렇게나 쌓여 불에 태워지는 모습에 더 의기소침해졌다.

이런 가운데 아침이 되자 얄궂게도 며칠간 내내 괴롭히던 비가 거짓말처럼 싹 그치고, 시리도록 추운 날씨가 펼쳐졌다.

“현재까지 집계된 바에 따르면 전사 육백오십 명에 중상 사백삼십 명으로 모두 일천팔십 명의 인명 피해를 입었습니다. 그리고 보급 물자를 실은 짐마차에 불이 붙는 바람에 군량 삼천 석을 포함한 상당수의 물품이 타 버렸습니다.”

“화약은 얼마나 건졌나?”

예친왕이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묻자 피해 보고를 하던 장수는 눈치를 보며 잠시 머뭇거리다가 더듬대며 대답했다.

“그, 그게, 가지고 온 이천 근 모두가 소실됐습니다.”

“그걸 지금 보고라고 하는 거야!”

이야기가 다 끝나기도 전에 예친왕은 욕설을 내뱉으며 탁자 위에 있던 술잔을 집어 장수한테 던졌다.

퍼석.

“윽.”

술잔이 이마에 맞고 깨지자 저절로 신음이 터져 나왔지만 장수는 아픈 표시도 내지 못하고 잠시 비틀거리다가 얼른 자세를 바로 했다.

“내가 그렇게 조심하라고 했는데도 보급 물자를 한곳에 놔둔 놈이 누구야!”

노호성에 행여나 불똥이 튈까 봐 장수들이 자라목처럼 어깨를 움츠리는 가운데, 한 명이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바닥에 털썩 엎드렸다.

“주, 죽을죄를 졌습니다, 전하.”

양 눈썹을 치켜 올린 예친왕은 엎드린 장수를 내려다보며 차갑게 말했다.

“이세전, 네놈이었나!”

“이렇게 될지 정말 몰랐습니다. 믿어 주십시오.”

“이리 큰 피해를 입혀 놓고 고작 그딴 말만 하면 다 끝나는 거야!”

“그런 것이 아니오라…….”

가뜩이나 행군이 계속 늦어져 짜증이 쌓여 있는 상태에서 야습까지 받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예친왕은 벌떡 몸을 일으켜 이세전한테 성큼성큼 다가가더니 허리에 차고 있던 장검을 뽑아 들었다.

스르릉.

천막 안에 있던 장수들이 말릴 틈도 없이 예친왕은 손에 든 장검을 내려쳐 이세전의 목을 베어 버렸다.

“잘못한 건 네놈도 인정했으니 목숨으로 그 죄를 씻어라!”

“살려 주십…… 컥!”

“저, 전하!”

목에 장검이 박힌 이세전은 눈을 부릅뜬 채 가래 끓는 소리를 내다가 옆으로 털썩 쓰러졌다.

피가 튀어 입고 있는 옷이 더러워졌지만 예친왕은 상관하지 않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누구든 또 이딴 멍청한 짓을 벌이면 똑같이 처벌할 테니 알아서 해!”

“…….”

큰 잘못을 저지르기는 했지만, 품계가 상당히 높은 장수를 예친왕이 단칼에 죽여 버리는 걸 본 장수들은 자신도 언제든 저렇게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정색을 하며 온몸이 얼어붙었다.

얼음처럼 차가운 정적이 내려앉은 가운데 예친왕은 의자에 앉아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어깨까지 들썩이면서 크게 심호흡을 한 뒤 숨을 고른 그는 눈치 없는 호위들에게 짜증스럽게 말을 내뱉었다.

“뭘 하고 섰어? 얼른 저걸 내 눈앞에서 치워 버리지 않고!”

그러자 입구를 지키고 있던 호위들은 벼락이라도 맞은 듯 몸을 흠칫 떨다가 서둘러 흙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이세전의 시신을 끌고 밖으로 나갔다.

양팔을 한쪽씩 잡힌 채 짐짝처럼 끌려 나가는 이세전의 시신 뒤로 끈적한 핏자국이 길게 이어졌다.

천막 안의 공기는 미칠 듯이 답답했다. 아직도 귓가에는 이세전이 지른 단말마의 비명이 생생히 울리고 있어, 장수들은 숨 쉬는 것도 잊은 채 그저 바닥만 응시하며 예친왕의 다음 행동을 기다렸다.

“후……!”

질식할 것 같은 긴 침묵 끝에 예친왕은 돌연 술병을 덥석 집어 들고선 병째로 독한 화주를 들이켰다.

그리고 턱과 수염에 묻은 술을 난폭하게 소매 끝으로 스윽 닦아 내고, 입 없는 장승처럼 서 있는 장수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한 시진 뒤에 심양으로 출발할 거니까 그렇게 알고 준비하도록 해.”

장수들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방금 눈앞에서 제대로 변명할 기회도 주지 않고 한 명이 죽어 나가는 걸 봤기에 선뜻 이야기를 꺼내지 못하고 술렁거렸다.

그러자 한쪽에 서 있던 왕태봉이 조심스럽게 이야기했다.

“아직 정리도 다 안 끝났고, 야습을 막느라 병사들이 제대로 쉬지도 못했으니 오늘 하루 이곳에서 더 머물렀다가 행군을 재개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탕!

왼손으로 앞에 있는 탁자를 세게 내려친 예친왕은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빌어먹을 진창과 비 때문에 벌써 한참이나 늦어졌는데 또 시간을 보내라고? 이러다가 심양에 도착하기도 전에 첫눈이 내리면 자네가 책임질 거야?”

흠칫한 왕태봉은 슬쩍 시선을 피하면서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이야기를 했다.

“그런 것이 아니라…… 보급품도 부족한 상황이니, 차라리 여기서 재정비를 하며 후속해서 따라오는 치중부대를 기다리는 것이 어떨까 해서 드린 말입니다.”

“됐어, 잔말 말고 시키는 대로 해!”

강경한 태도에 왕태봉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예.”

그때 밖이 약간 소란스러워지는가 싶더니 하급 군관 한 명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하고 천막 안으로 들어왔다.

“무슨 일이야?”

“저, 그게…….”

안 좋은 소식인지 군관이 바로 이야기를 꺼내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예친왕은 미간을 찌푸리며 답답하다는 듯이 말했다.

“짜증 나게 하지 말고 빨리 말해!”

“어젯밤 우리뿐만 아니라 좌우군도 야습을 당해 큰 피해를 입었다고 합니다.”

“뭐라고!”

병력이 이십만이나 됐기 때문에 청군은 세 개로 나눠 움직였는데, 도현은 예친왕이 있는 중군만 노린 것이 아니라 거란족 출신까지 보유한 기병을 총동원해 한꺼번에 야습을 가했던 것이다.

고개를 번쩍 쳐든 예친왕은 믿기지 않는 얼굴로 소식을 가져온 하급 군관을 보며 되물었다.

“그게 정말이야?”

“예. 특히 후속해 오던 치중부대의 피해가 커서 많은 양의 군량이 못 쓰게 됐다고 합니다.”

아직 피해 규모를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하는 말로 봐서는 심각한 것이 분명했기에, 모여 있던 장수들의 표정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결국 청군은 바로 행군을 재개하지 못하고 상황을 수습할 때까지 현 위치에서 며칠 동안 멈춰 있어야 했다.

이번 야습으로 조선군은 먼저 기선을 제압했을 뿐만 아니라 군량과 화약 같은 보급 물자를 없애는 실질적인 타격도 입혔다.

군량은 아직 보유 물량이 상당히 남아 있어 당장 병사들이 배를 곯지는 않았지만, 화약은 예친왕이 지휘하는 중군에 있던 것이 전부였다.

그래서 진창에 빠져 가며 힘겹게 끌고 온 서른 문의 홍이포가 졸지에 몽땅 쓸모없는 고철덩이가 되어 버렸다.

야습을 당해 제대로 체면을 구긴 예친왕은 바짝 독이 오른 채 다시 심양성으로 향했다.

그때쯤 심양성에 있는 조선군은 전쟁 준비를 모두 끝내 놓고 있었다.

그동안 주변 지역을 돌아다니며 청군 잔당을 소탕하고 여기저기 흩어져 사는 만주족들을 새로 설정한 국경선 밖으로 밀어낸 병력이 모두 복귀하고, 새로 보충병까지 도착하자 심양성에 주둔하는 조선군은 십일만 명으로 늘어났다.

특히 전쟁이 터진 이후로 쉬지 않고 밤낮으로 가동 중인 병기창에서 새로 제작한 각종 화포 오십 문과 신형 포탄이 보급되어 화력도 대폭 보강됐다.

그리고 군량과 기타 보급품도 충분히 비축해 외부의 지원이 다 끊기고 완전히 고립된 상태에서도 일 년은 너끈히 버틸 수 있게 준비를 갖췄다.

“쏴!”

퍼엉!

구령과 함께 화포장이 심지에 불을 댕기자 포루에 설치된 황자총통이 커다란 폭음을 울리며 하얀 화약 연기를 내뿜었다.

슈우우웅.

휘파람 소리를 내며 날아간 포탄은 성 밖 벌판에 떨어졌다.

꽈앙!

그러자 망루에 서서 천리경으로 착탄 지점을 확인한 포병대 지휘관은 고개를 돌려 옆에 있는 병사를 보며 말했다.

“좌측으로 조금 치우쳤으니 조준점을 우로 당기라고 해.”

“옛.”

머리를 숙이면서 대답한 병사는 지시를 전달하기 위해 제법 거리가 떨어진 포루로 뛰어갔다.

잠시 후 아까 포탄을 쏘았던 화포가 다시 불을 뿜었고, 이번에는 벌판에 세워 둔 표적지를 정확히 명중해 박살 냈다.

“명중입니다.”

“좋아, 수고들 했어.”

지휘관도 마음에 드는지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포병대는 아침부터 계속 포를 쏘며 새로 배치된 화포 성능을 시험하는 한편, 전투가 벌어졌을 때 사격 지점이 겹치지 않고 효과적으로 화력을 쏟아부을 수 있도록 방위와 각도를 세밀하게 조정했다.

상당히 귀찮고 힘든 작업이었지만 이렇게 해 두면 실전에서 최소한의 화약과 포탄을 써 최대의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다음은 왼쪽 포루에 있는 화포를 점검할 차례지?”

“네.”

휘하에 있는 군관과 이야기를 나누던 지휘관은 한 기의 기마가 빠른 속도로 달려오는 걸 발견하고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저건 뭐야?”

“글쎄요, 등에 깃발을 꽂고 있는 걸로 봐서 전령 같습니다.”

천리경으로 기마를 살펴본 지휘관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어쩐지 예감이 안 좋군.”

“왜 그러십니까?”

“전령이 나타난 방향을 봐, 북서쪽이잖아.”

“그게 왜……?”

무슨 이야기인지 이해를 못 한 군관이 의아한 얼굴로 쳐다보자 지휘관은 답답하다는 듯 짧게 혀를 차며 말했다.

“쯧, 저쪽에서 저리 급하게 달려와 알려야 될 일이라면 딱 하나밖에 없잖아.”

“헉, 그럼!”

“드디어 예친왕이 군대를 끌고 나타난 거겠지.”

조만간 전투가 벌어질 거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막상 이렇게 닥치자 긴장이 되는지, 군관은 마른침을 삼키며 어느새 바로 앞까지 온 전령을 바라봤다.

“일이 급하게 된 것 같으니까 지금부터는 두 문씩 같이 시험 사격을 실시하게.”

“옛.”

그렇게 장졸들의 복잡한 시선이 쏟아지는 가운데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온 전령은 성문을 지나 곧장 안으로 들어갔다.

전령이 가져온 급보는 바로 도현에게 전달되었고, 잠시 후 작전 회의가 소집되었다.

“방금 도착한 전령의 보고에 의하면 예친왕이 이끄는 청군이 반나절 거리까지 접근했다고 합니다.”

이 군단장인 남두병 장군의 말에 긴 탁자를 사이에 두고 좌우로 나눠 앉아 있던 장수들이 살짝 술렁였다.

하지만 다들 각오하고 있던 일이었기에 놀라움은 잠시였고 이내 담담한 얼굴로 대책을 논의했다.

“피해를 많이 줘서 시간을 조금 더 벌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아쉽군요.”

“그래도 이제 곧 겨울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예상보다 예친왕의 대응이 상당히 늦어진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지.”

고개를 살짝 끄덕인 도현은 남두병 장군을 보며 물었다.

“청야 작업은 다 끝났지?”

“예. 가옥은 물론이고 적군이 말먹이로 쓸 수 있는 초지까지 모두 불에 태워 버렸습니다. 기병으로 구성된 팔기군 수만을 데려왔으니 아마 건초를 구하느라 아주 애를 먹을 겁니다.”

청야淸野 전술은 말 그대로 적이 쓰지 못하도록 농작물과 건물 등 모든 걸 없애 버리는 거였다.

일찍이 삼국시대 때 고구려의 을지문덕 장군이 이 작전을 써서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한 적이 있었다.

지금처럼 보급로가 길고 겨울이라 추운 날씨를 견뎌 내야 하는 청군에 그야말로 목줄을 조일 수 있는 방법이었다.

초원밖에 없는데 무슨 청야 전술을 펼칠 것이 있냐고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심양과 요동 지역은 예전부터 여러 왕조가 중요하게 여기던 곳이었고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청나라의 황도였기에 경작지와 크고 작은 마을이 도처에 널려 있었다.

아까도 언급했지만 말먹이로 쓰일 초지만 다 태워 버려도 길게 이어진 청군 보급선에 상당한 압박이 됐다.

기병대를 동원한 야습도 이런 청야 전술의 일환으로 실시된 것이었다.

예친왕과 청군은 아직 몰랐지만 이것만 봐도 도현이 잘 짜인 작전 계획에 따라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기병대는 어디에 있어?”

“계획대로 야습을 끝내고 모처로 이동해 다음 행동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박영식 장군의 대답에 도현은 정색을 하며 말했다.

“박경지 장군이 지휘를 하고 있지?”

“그렇사옵니다.”

박경지朴敬祉 장군은 많이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충성심이 강하고 사리사욕을 탐하지 않으며 지략이 뛰어난 무장으로, 실제 역사에서도 효종의 북벌 계획을 적극 찬성하면서 이완 등과 함께 깊은 신임을 받은 인물이었다.

“너무 무리는 하지 말고, 때가 되면 맡은 임무대로 움직이라고 해.”

“그리 전하겠습니다.”

수성전을 벌이는 것도 좋았지만 상황이 예의치 않을 경우 예친왕이 기동력이 뛰어난 팔기군을 따로 떼어 내 한양을 바로 노릴 수도 있었다.

그렇게 되면 주력이 심양성에 묶여 있는 조선군 입장에서는 방어 계획을 세워 뒀다고 해도 상당히 불리해질 수밖에 없었고, 최악의 경우 적에게 빈집 털이를 당할 가능성마저 있었다.

심양과 새로 차지한 영토를 지켜 낸다고 해도 본토와 한양이 완전 쑥대밭이 되어 버린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었고 승리해도 승리한 것이 아니었다.

이것을 막고 전쟁의 주도권을 계속 쥐고 있기 위해 도현은 공성전에서 그리 큰 역할을 하지 못하는 기병을 모두 밖으로 내보내, 청군의 보급선을 끊고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도록 견제하는 임무를 맡겼다.

잠시 말없이 회의실에 모여 있는 장수들을 둘러본 도현은 사뭇 진지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했다.

“이제부터가 진짜 싸움이야. 북벌이 성공하느냐 아니면 다시 치욕의 역사를 반복하느냐는 모두 제장들의 두 어깨에 달려 있으니, 각자 맡은 임무에 최선을 다해 주길 바라겠네.”

“옛.”

그날 오후, 청군이 도착하기 전에 박경지 장군이 지휘하는 별동대로 마지막 전령을 보낸 조선군은 성문을 모두 굳게 걸어 잠그고 적을 맞이할 준비를 끝냈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뉘엿뉘엿 지는 석양과 함께, 드디어 청군이 성 앞에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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