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심양 전투 2
끝없이 펼쳐진 드넓은 벌판 한가운데에 산처럼 혼자 우뚝 솟아 있는 거대한 심양성을 보며 예친왕은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웅장하다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심양성은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청나라의 자부심이었지만 지금은 성벽 곳곳에 조선군 깃발이 휘날리고 있는, 치욕스러운 이름이 되어 있었다.
누구보다 자존심이 강한 예친왕은 조선 따위한테 져서 심양성을 빼앗긴 호타이에게 화가 나는 것과 동시에 주제도 모르고 감히 청나라에 검을 들이댄 도현에게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바람이 차갑습니다. 거처가 다 세워졌으니 그리로 들어가시지요.”
옆에 있던 왕태봉의 말에 예친왕은 한창 병사들이 만들고 있는 숙영지를 힐끔 보다가 시선을 아래로 내리며 입을 열었다.
“여기도 땅바닥이 온통 시커멓게 타 있군.”
“……그렇군요.”
심양성 주변뿐만 아니라 요하를 넘은 이후부터 보이는 땅은 모두 이렇게 불에 타 검게 변해 있었다.
젊은 시절의 대부분을 전장에서 보낸 예친왕은 따로 이야기를 듣지 않아도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바로 알 수 있었다.
고개를 바로 한 예친왕은 한쪽 볼을 실룩이더니 정면에 있는 심양성을 날카롭게 쳐다보면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조선 국왕이 날 맞이할 준비를 제법 독하게 한 모양인데, 어디 얼마나 버티는지 두고 보겠어.”
그러고는 말 머리를 돌려 숙영지로 들어갔다.
청군이 나타났다는 보고를 들은 도현은 직접 문루에 올라 상대를 확인했다.
아군 화포의 위력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는지 들판을 가득 메운 청군은 천 보 이상 떨어진 거리에 주둔지를 세우고 있었다.
“말이 이십만이지, 이렇게 실제로 보니 정말 엄청나군요.”
남두병 장군의 말에 도현은 천리경을 눈에서 떼며 이야기했다.
“숫자는 많을지 몰라도 다들 지친 기색이 역력하군.”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며칠이나 진창에서 허우적거리다가 왔으니 진이 다 빠질 수밖에 없지 않겠사옵니까.”
“그렇지.”
살짝 고개를 끄덕인 도현은 뒤를 돌아 모여 있는 장수들의 얼굴을 둘러보고는 피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렇게 든든한 성벽까지 있는데 지쳐서 거지꼴로 나타난 청군을 못 이긴다면 쪽팔리는 일 아니겠어?”
그러자 엄청난 병력 규모를 보고 조금은 질린 듯한 표정을 짓고 있던 장수들이 와 하고 웃음을 터트리면서 긴장을 풀었다.
“하하하! 맞사옵니다.”
“까짓것, 얼마든지 덤벼 보라고 하지요.”
“저런 놈들은 이십만이 아니라 그 배가 쳐들어와도 다 막아 낼 자신이 있습니다.”
“바로 그거야. 꼴을 보니 오늘은 공격해 오지 않을 것 같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경계 병력을 확실히 세우도록 해.”
“예.”
다시 천리경을 든 도현은 그 뒤로 한참을 더 적진을 살펴보다가 예전 황궁에 설치한 지휘소로 돌아갔다.
긴장 속에 하룻밤이 지나갔고, 다음 날 아침이 되자 청군은 숙영지를 나와 심양성 앞에 전투대형을 갖추고 늘어섰다.
선두 열에는 커다란 사각 방패를 가진 방패수와 궁병 그리고 후위에는 보병을 배치하고 예친왕이 직접 지휘하는 팔기군은 제일 뒤에 선 상태였다.
기병인 팔기군은 공성전에서 크게 효용성이 없기 때문도 있지만 소모전이 될 전투에 정예를 투입하기보다는 한족으로 구성된 보병을 앞세우려는 의도로 이런 대형을 짠 듯했다.
갑옷을 갖춰 입고 장수들과 함께 문루에 올라선 도현은 담담한 얼굴로 적진을 살폈다.
“홍이포가 보이지 않는군.”
“야습에서 적이 가지고 있던 화약을 없앴다고 하더니 정말인가 봅니다.”
“잘됐어.”
아군 포병대에 직접적으로 타격을 입힐 수 있는 무기가 바로 홍이포였기에 가장 꺼림칙했는데 그걸 사용하지 못한다니 시작부터 느낌이 좋았다.
“이제 움직이려는 모양이옵니다.”
고개를 들어 앞을 쳐다보자 박영식 장군의 말대로 청군이 전투대형을 갖춰 다가오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도현은 숨을 크게 한번 들이마셨다가 내뱉고 입을 열었다.
“전투준비. 절대 각자 위치에서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말라고 이르라!”
“옛.”
장수들이 상체를 숙이며 대답하는 것과 동시에 커다란 초요기招搖旗가 문루에 높이 세워졌다.
포격에 대비해서 청군은 하나로 뭉치지 않고 각 백인대로 나눠 서로 간격을 유지한 채 전진해 왔다.
이 군단과 근위군단 연합 포병대 지휘관으로 군호 벼슬을 가진 최진석은 다가오는 적군과의 거리를 잠시 가늠해 보고 옆에 있는 신호수를 보며 차분한 목소리로 지시를 내렸다.
“전 포, 방포하라!”
신호수가 붉은색 삼각 깃발을 좌우로 크게 흔들자 장전을 다 끝내고 대기하던 화포들이 일제히 불을 뿜었다.
뻐버버벙! 꽝! 꽝! 꽝!
포루와 성벽 위 포대에 배치된 여러 구경의 화포들이 일제히 육중한 포성을 울리면서 포탄을 발사했다.
쉬우우웅!
미리 사격 고각을 다 측정해 뒀기에 포물선을 그리면서 날아간 포탄은 한 발도 빗나가지 않고 적군을 정확하게 타격했다.
쿠쿵! 쿵! 쿵!
폭음과 함께 적군 대열 사이에 불기둥이 수십 개나 연거푸 치솟았다.
“으악!”
“컥.”
포탄이 터진 곳에 있던 적병들은 비명을 내지르며 쓰러지거나 파편에 갈가리 찢겨 나갔다.
“흐익.”
무더기로 죽어 나가는 동료를 본 적병들이 두려운 표정을 지으며 주춤거리자 뒤에서 말을 타고 따라가던 군관이 검을 빼 들고는 전투를 독려했다.
“머뭇거리지 말고 앞으로 돌격해라!”
코앞에 검을 들이대며 윽박지르자 적병들은 용기를 내 함성을 지르면서 성을 향해 달려 나갔다.
“와아아!”
“공격!”
그런 청군을 향해 아군 화포들도 쉴 새 없이 포탄을 날렸다.
씨우우웅! 씨우웅!
폭음이 울릴 때마다 수십 명이 무더기로 죽어 나갔지만 청군은 아랑곳하지 않고 꾸역꾸역 전진했다.
그런 적병을 따라 화포 각도를 조종하며 조선군 포수들은 기계적으로 화약과 포탄을 밀어 넣고는 심지에 불을 붙였다.
꽝!
우렁찬 포성이 터지며 흰 화약 연기가 사방이 막힌 포루 안을 가득 채웠다.
벽에 나 있는 포 구멍을 통해 탄착 지점을 확인하려고 머리를 내민 화포장은 쏟아지는 화살 세례에 기겁해 뒤로 엉덩방아를 찧으며 넘어졌다.
“어이쿠.”
그 모습에 포탄을 장전하던 포수들이 눈꼬리를 위로 말아 올리며 키득거렸다.
“엉덩이 괜찮으십니까?”
“큭큭큭.”
부하들 앞에서 망신을 당한 화포장은 살짝 얼굴을 붉히고 괜히 화를 냈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장전이나 빨리 끝내!”
“예.”
덕분에 긴장이 풀린 포수들은 아까보다 한결 여유로워진 얼굴로 장전과 발사를 반복하며 맡은 임무를 수행했다.
격렬한 포격을 뚫고 청군이 이백 보 앞까지 접근하자, 성가퀴에 한쪽 손을 올리고 정면을 내려다보던 최진석이 뒤를 돌아 도현을 보며 말했다.
“적이 조총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왔사옵니다.”
그러자 도현은 만약을 위해 커다란 사각 방패를 들고 양옆에 장승처럼 버티고 선 김덕술과 박태철 사이로 몸을 내밀어 적군을 살폈다.
명중률을 높이고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조금 더 가까이 끌어들이는 게 좋았지만 이대로 놔두면 금방 성벽을 타고 기어오르려고 할 것이 분명했다.
화약 무기의 특성상 근접전을 벌여 좋을 것이 하나도 없었기에, 이쯤에서 더 접근하지 못하도록 저지를 해야 했다.
높다란 문루 좌우 성벽 위에 늘어서 있는 병사들을 둘러본 도현은 지휘봉을 위로 치켜들며 크게 외쳤다.
“적들에게 뜨거운 맛을 보여 줘라. 전군 방포!”
총구만 앞으로 내밀고 성가퀴에 몸을 숨기고 있던 병사들은 도현의 사격 명령에 일제히 방아쇠를 당겼다.
타타타탕! 타탕! 탕! 탕!
천둥이 치는 듯한 요란한 총성과 함께 하얀 화약 연기가 성벽 전체를 뒤덮었다.
그리고 바로 이어서 성을 향해 달려들던 적병들이 볏짚 베듯이 우수수 비명을 지르며 고꾸라졌다.
피투성이가 된 시신들 사이에 죽지 않고 부상만 입은 적병들이 미친 듯 비명을 질러 대며 허우적거렸다.
“아악, 살려 줘!”
“내 다리!”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또다시 총성이 울렸고 머리와 가슴에 탄환을 맞은 적병들은 신음을 토하며 뒤로 나자빠졌다.
딱히 몸을 엄폐할 곳도 없는 데다가 재장전 속도가 엄청나게 빨라 청군의 피해는 급속하게 늘어났다.
“제기랄! 우리 편 궁수들은 뭘 하는 거야?”
빗발치는 탄환에 부하 수십 명이 피 칠갑을 하고 땅바닥에 나뒹구는 것을 본 청군 군관이 욕설을 내뱉으며 분통을 터트렸다.
포격에 이어서 조총 사격까지, 이 상태로는 도저히 성을 공략할 수 없었다.
그때 뒤따라온 궁수들이 성벽 위에 있는 조선군 총병을 향해 화살을 쐈다.
슈슈슉! 슈슉! 슉!
성가퀴 밖으로 몸을 드러내고 조총을 쏘던 조선군 총병들은 바람 가르는 소리를 내면서 날아온 화살들이 귓전을 스치고 지나가자 화들짝 놀라 몸을 움츠렸다.
“헉.”
“크윽.”
운이 없는 총병 몇몇은 화살을 맞고 그 자리에 쓰러졌다.
그러자 대기하고 있던 병사들이 달려와 부상병들을 들것에 실어 성 안쪽에 마련된 치료소로 급히 데려갔다.
“금방 의원한테 데려다 줄 테니 조금만 견뎌!”
“으으…….”
빈자리는 곧장 다른 병사들이 들어와서 메꾸며 서로 치열한 공방전을 이어 갔다.
도현이 있는 문루도 화살 공격의 예외가 아니었다.
투투툭!
두 위사들이 들고 있는 방패에 화살이 날아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박히자 옆에 있던 박영식 장군이 다급히 말했다.
“위험합니다. 뒤로 물러서십시오, 전하.”
하지만 도현은 화살이 바로 옆을 스치고 지나가는데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으며 입을 열었다.
“병사들도 자기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데 짐이 어찌 먼저 피하겠나?”
“하오나…….”
“됐으니 아무 소리도 하지 마. 전투가 끝날 때까지 여기서 병사들과 함께할 것이야.”
단호한 태도에 박영식은 우려 가득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뒤로 피하지 않고 병사들을 지휘하겠다는 도현의 말에 강한 신뢰와 믿음이 들었다.
“전고戰鼓를 더 크게 울려라!”
둥둥둥!
이런 가운데 전투는 한층 더 격렬해져, 사방에서 피가 튀고 비명이 가득 울려 퍼졌다.
전투가 언제까지 계속될지 몰랐기에 화약을 아껴야 하는 조선군은 거리가 가까워지자 총병을 뒤로 빼고 궁수와 창병이 앞으로 나와 청군을 상대했다.
“조선군의 저항이 상당히 거센 것 같습니다.”
왕태봉은 예친왕이 기분 나쁘지 않게 살짝 돌려 이야기를 했지만, 예상보다 더 견고하고 강한 조선군의 전력에 청군 장수들도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아까부터 전장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던 예친왕 역시 시간이 갈수록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포격과 총탄 세례를 맨몸으로 받아 내야 했던 선두 열은 거의 괴멸 상태에 놓였고 뒤따라간 병력도 상태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성벽만 넘어가면 끝나는 거야. 좀 더 강하게 밀어붙여!”
예친왕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버럭 고함을 내지르자 장수들은 입을 꽉 다물며 머리를 숙였다.
“예.”
청군 진영에서 전투를 독려하는 독전고가 시끄럽게 울려 퍼졌고 적병들은 개미 떼처럼 끝없이 앞으로 달려 나갔다.
“성벽을 점령해라!”
“우와아아!”
턱.
힘겹게 성벽 아래에 도착한 적병들은 공성용 사다리를 걸치고는 위로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막아라!”
목이 터져라 소리를 친 유혁연은 가지고 있던 권총으로 막 성벽 위로 올라서는 적병을 쐈다.
탕!
“끄악.”
어깨에 총탄을 맞은 적은 피를 튀기며 뒤로 떨어졌다.
주위에 있던 병사들도 창으로 찌르거나 끝이 ‘Y’ 자로 갈라진 장대를 써서 공성용 사다리를 밀었다.
“개새끼들, 여기가 어디라고 기어 올라오는 거야!”
공성용 사다리가 뒤로 쓰러지자, 거기에 매달려 줄을 지어 올라오던 적병들은 비명을 내지르며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어어……!”
“커헉.”
채챙! 챙! 챙!
“으으윽.”
악착같이 덤벼드는 적군 때문에 조선군의 피해가 조금씩 늘어났지만 아직까지는 견딜 만했다.
온갖 비명과 고함이 난무하는 가운데, 성벽 아래는 시신이 쌓여 산을 이뤘고 피가 흘러 강이 됐다.
어느덧 정오가 지나 늦은 오후가 됐지만 성은 좀처럼 함락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청군의 피해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화약을 아끼기 위해 조총 사격을 멈추자 한숨 돌리던 청군은 백발백중의 실력을 자랑하는 조선군 궁수들의 화살 세례에 곤욕을 치르고 있었다.
마치 자신들도 있다는 걸 보여 주기라도 하듯 궁수들은 성가퀴 뒤에 숨어 능숙한 동작으로 화살을 날렸다.
“맛 좀 봐라!”
쉬익.
화살을 먹인 궁수 하나가 시위를 퉁기자 검을 흔들며 적병들을 독려하던 청군 군관이 가슴을 부여잡고 꼬꾸라졌다.
살포시 입가에 미소를 지은 궁수는 등 뒤에 맨 전통에서 화살을 하나 더 꺼내 다음 먹잇감을 찾았다.
이런 식으로 궁수들 사이에서도 편전을 쓰는 병사들이 상대편 군관만 골라 저격을 해 대자 겁을 먹은 지휘관들이 몸을 사렸고, 자연스럽게 통제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게 되었다.
우왕좌왕하면서 공격이 무뎌지자 그동안 뒤로 빠져 쉬고 있던 총병들이 다시 나서 일제사격을 가했다.
타타타탕! 타탕! 탕!
“꾸엑.”
“큭.”
“으악!”
연달아 총성이 울리자 성벽 아래에 있던 적병들은 속절없이 무더기로 피를 뿌리며 생명을 잃었다.
청군은 이만 명이 공격에 나섰지만 피해가 엄청나게 발생해 벌써 병력의 사분지 일가량이 죽거나 다쳤다.
이대로 놔두면 나머지 병력도 오래지 않아 시신이 되어 차가운 땅바닥에 쓰러질 것이 분명했다.
그러자 보다 못한 왕태봉이 예친왕 앞으로 가서 간곡하게 말했다.
“전하, 조선군의 방어가 너무 견고합니다. 이 상태로는 성을 함락시키는 것이 어려우니 잠시 뒤로 물러나 전열을 가다듬으시지요.”
애써 에둘러 이야기했지만 결국 후퇴시키자는 말에 예친왕은 얼굴을 와락 구겼다.
첫 공격에 성을 함락시킬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타격을 입힐 수 있을 거라 여겼는데, 오히려 조선군의 강함만 확인하고 청군 병사들은 사기가 왕창 꺾였으니 분통이 안 터질 리가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병력을 더 밀어 넣어서 이대로 끝장을 보고 싶었지만, 그래 봤자 얻을 것이 없다는 걸 알기에 예친왕은 아랫입술을 꽉 깨물며 입을 열었다.
“오늘은 이대로 물러서지만 꼭 성을 내 손으로 무너뜨리고 말겠어. 퇴각 신호를 울리게.”
“네.”
잠시 뒤 청군 진영에서 뿔고동 소리가 길게 울렸다.
뿌우웅! 뿌우웅!
퇴각 신호에 성벽을 올라가려고 아등바등하던 적병들은 반색을 하며 미련 없이 뒤로 물러났다.
“퇴각한다, 퇴각!”
“후우, 이제 살았어.”
하지만 그냥 곱게 보내 주지는 않겠다는 듯 조선군은 끝까지 화살을 날려 댔다.
빗발치듯 날아오는 화살에 한 무더기의 적병들이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지르며 널브러졌다.
“끄악!”
“윽.”
“나, 나도 데려가!”
“제발.”
피를 흘리며 바닥에 쓰러져 있던 부상병들이 간절한 목소리로 애원하자 보다 못한 청군 병사들이 그들을 들쳐 업었다.
하지만 다시 날아든 화살에 부축해 주던 이들까지 비명을 지르며 고꾸라지자 질겁한 병사들은 부상병을 그냥 방치한 채 달아나 버렸다.
“이 자식들, 질서를 갖춰서 천천히 물러서지 못해!”
지휘관과 군관 들이 노성을 터트렸지만, 한번 무너지기 시작한 청군 병사들을 통제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그들도 썰물처럼 후퇴하는 청군 병사들 사이에 휩쓸려 뒤로 물러나고 말았다.
성벽 위에서 허둥지둥 달아나는 적군을 내려다보며 조선군 병사들은 각자 가진 병장기를 위로 치켜들면서 환호성을 내질렀다.
“우와아아, 이겼다!”
“꼴좋다, 이것들아!”
승리감에 취한 병사 하나가 성가퀴 위에 올라가 아랫도리를 내리고는 엉덩이를 흔들자 주위에 있던 동료들이 와 하고 폭소를 터트렸다.
“하하하하!”
“낄낄낄, 잘한다.”
그렇게 첫날 전투는 청군이 수많은 사상자를 성벽 아래에 남겨 두고 물러나면서 조선군의 승리로 끝났다.
저녁노을과 함께 기나긴 하루가 저물고, 다음 날까지 전투가 잠시 소강상태를 맞이했을 때 심양성 안은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듯 정신없이 바삐 돌아갔다.
“제 힘으로 걸을 수 있는 자는 이쪽으로!”
“어이, 빨리 들것을 가져와.”
“설 수 있겠나? 좀 더 기운을 내 보게. 여기서 이대로 죽으면 안 돼.”
사방에서 다급한 고함과 채근하는 목소리, 누군가의 도움을 요청하는 신음이 한데 뒤섞여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다.
커다란 공터에 천막을 세우고 걷지 못하는 부상자들이나 심하게 다친 사람을 의원들이 돌보긴 했지만, 일손이 부족한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라 다소 경미한 상처를 입은 자들은 입구에서 차례대로 순서를 기다리기로 했다.
“으악!”
“참으시오, 혀를 깨물면 안 돼!”
어깻죽지에 박힌 화살을 의원이 뽑아내려고 하자 병사가 몸부림을 치며 상체를 들썩였다.
주위 사람들 몇몇이 그 소리를 듣고 병사의 팔다리를 움직이지 못하게 억누르는 사이에 의원은 급한 대로 헝겊 뭉치를 입에 쑤셔 넣고 하나, 둘, 셋을 외쳤다.
“끄으으으……!”
“이제 다 끝났소.”
의원은 괜찮다며 병사를 다독거리고 재빠른 손놀림으로 지혈을 한 후 깨끗한 천으로 상처 부위를 둘둘 감았다.
그뿐만 아니라 천막 여기저기서 비슷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는데, 비명과 신음이 연달아 터져 나올 때마다 차례를 기다리고 있던 병사들의 얼굴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그런 와중에 도현이 장수들과 함께 상태를 살피기 위해 천막에 나타났다.
뒤늦게 그를 알아챈 의원들이 바닥에 무릎을 꿇으려고 하자, 도현은 손을 내저어 말렸다.
“지금은 예를 따질 때가 아니니 나보다 부상병들을 돌보는 데 더 신경을 쓰도록 하게.”
“예, 전하.”
잠시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도 고통을 호소하는 병사들의 목소리가 끊이질 않았기에, 의원은 가타부타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다시 부상자를 돌보기 위해 돌아섰다.
한 사람이 먼저 행동을 보이자 우물쭈물하고 있던 다른 의원들 역시 제각기 흩어져 본래 하던 일로 돌아갔다.
“내가 여기에 더 있어 봤자 방해만 될 것 같으니, 다른 곳으로 가는 게 좋겠군.”
마치 또 다른 전쟁터와도 같은 치료소 안 광경을 안타까운 눈빛으로 쳐다보던 도현은 일단 밖으로 나와 다른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려다, 머리에 짐을 이고 오는 아낙네들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들은?”
“노예로 잡혀 있다 풀려난 조선인들 같습니다만…….”
도현의 물음에 대답한 장수도 아낙네들이 왜 이곳에 찾아왔는지 이유를 모르는 눈치였다.
“자, 변변치 않은 것이지만 이거라도 드시고 힘내세요.”
“배가 든든해야 상처도 빨리 낫는다 하지 않습니까.”
그런 말과 함께 아낙네들이 둥글게 만든 주먹밥을 병사들에게 나눠 주었다.
“고맙소.”
“아유, 무슨 말씀을요. 여러분과 주상 전하가 아니었으면 이렇게 훤한 대낮에 자유로이 다니지도 못했을 텐데.”
“그럼요. 작게나마 은혜를 갚는 것이니 얼른 드시기나 하세요.”
아낙네들이 나타나 재잘대며 주위를 밝게 하니 낯빛이 어두웠던 병사들도 조금씩 활기를 되찾았다.
“저이들의 행동이 참으로 대단하고 기특하군.”
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도현이 불쑥 한마디를 내뱉자 장수들도 나서서 말을 거들었다.
“얼마 전까지는 남정네들이 성벽 보강 작업을 돕더니, 이번엔 여자들이 나서서 부엌일을 돕는 모양입니다.”
“병사들이 먹을 음식을 차리는 것도 큰일인데 아낙들이 있어서 다행이군요.”
보기만 해도 절로 흐뭇한 미소가 떠오르는 광경이라, 도현은 방금 전보다 살짝 가벼워진 마음으로 발길을 돌렸다.
“이곳은?”
“일단 응급처치가 끝난 중상자들을 모아 놓은 곳입니다.”
냉기가 올라오지 않도록 바닥에 두꺼운 이불을 깔고, 의무병들이 차가운 물을 적신 수건을 가지고 다니면서 환자들의 상태를 살폈다.
단순히 화살이 몸에 박히거나 칼날이 스친 부상은 지혈만 제대로 해 주면 일단 움직일 수는 있었기에, 처치가 끝나면 바로 의원의 손을 떠나 천막에서 내보내졌다.
그리고 간신히 목숨은 건졌으나 상처가 너무 깊어 도저히 전투에 나설 수 없을 정도로 다친 자들은 옆에 있는 별도의 천막으로 옮겨져 안정을 취하도록 조치되었다.
태반은 적군에 의해서든 의원의 판단에 따라서든 팔다리 중 어느 한쪽을 쓸 수 없게 된 자들이었고, 화살에 의해 눈 한쪽을 잃은 사람, 고열로 헛소리를 지껄이는 사람 등 여러 가지 경우가 있었으나 대부분 좌절감이 가득한 표정을 하고 있다는 것만은 똑같았다.
“저, 전하.”
“이런 황공할 데가…….”
입구 가까운 곳에 누워 있던 몇몇 병사들이 도현을 알아채고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됐으니 그냥 누워 있어라.”
도현은 직접 손을 뻗어 병사들을 말린 다음 찬찬히 천막 안을 둘러보았다.
도현은 자신이 온 것도 모른 채 고열로 괴로워하고 있는 젊은 병사의 머리 수건을 손수 갈아 주기도 하고, 양 눈이 멀어 아무것도 볼 수 없는 병사의 손을 꼭 잡아 주기도 하며 그들의 고통과 시련을 함께 나누고자 했다.
“전하…….”
“흑흑,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얼른 이 몸뚱이가 나아서 또 전장에 나가야 할 텐데, 참으로 원통합니다.”
진심으로 백성을 사랑하는 것이 느껴지는 도현의 이런 행동에 병사들은 뜨거운 눈물을 흘렸고, 어떤 이는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자신의 몸에 울분을 터트리기도 하며 깊은 충성심을 드러냈다.
곧 완전히 해가 져 어두워질 시간이 다 되었다고 알리는 군관의 말에 도현은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떼고 천막을 나섰다.
본격적으로 밤이 되기 전에 숙소로 돌아가려던 도현은 부상자들이 가득한 천막에서 막 나오는 의원을 불러 세웠다.
“자네는 아까 나와 이야기했던 의원이로군.”
“그렇습니다, 전하.”
그는 천막에서 도현을 알아보고 예를 차렸다가, 허락이 떨어지자 바로 돌아서서 환자들을 돌보러 떠난 의원이었다.
외관은 백발이 성성한 노인으로 나이는 벌써 칠순을 가볍게 넘긴 듯했지만 눈에는 총기가 가득하고 이마의 주름에선 관록이 가득 풍겨 나왔으며, 천막 안에서 부상자들을 가볍게 다루며 다른 의원들을 진두지휘하는 모습은 청년 못지않게 힘이 넘쳤다.
부상자들을 치료하는 천막에 들렀을 때 노인을 유심히 살펴봤던 도현은 그가 의원들의 우두머리임을 일찌감치 알아차렸었다.
“부상자들은 좀 어떠한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습니다. 남은 건 젊은이들의 체력과 정신력에 맡겨야지요.”
“필요한 물자는 가능한 한 지원해 줄 테니 최선을 다해 주게. 살릴 수 있는 자는 무슨 짓을 해서라도 목숨을 붙여 놓아야 해.”
“당연하지요. 그것이 의원의 도리 아니겠습니까.”
“음.”
도현은 쉬는 시간을 뺏어서 미안하다고 사과한 뒤 의원을 놓아주었다.
“어쩐지 오늘 밤은 편하게 잠을 못 잘 것 같군.”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을 너무 많이 본 탓일까, 착잡한 얼굴로 중얼거리는 도현의 기분을 달래기 위해 곁에 있던 장수 하나가 짐짓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예상했던 것에 비하면 사상자 수가 적은 편입니다. 의원들이 열심히 노력해 준 덕분에, 못해도 팔 할 이상은 내일 전투에 다시 나설 수 있을 듯합니다.”
확실히 머릿수가 엄청나게 차이 나는 청군을 상대로 이 정도 피해라면, 승리라고까진 말 못 해도 상당히 선전했다고 평가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도현은 고개를 가로젓고 엄격한 말투로 쐐기를 박았다.
“이제 고작 하루가 지난 것뿐이야. 앞으로도 길고 험한 가시밭길을 헤쳐 나가야 한다는 걸 명심하도록.”
“네, 전하.”
도현의 대꾸에 머쓱해진 장수가 한발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오늘 밤은 병사들이 먹는 음식에 각별히 신경을 쓰도록 하게. 사람은 먹어야 기운이 나는 법이니까.”
“알겠사옵니다.”
측은한 시선으로 부상병들이 누워 있는 천막을 한 번 더 돌아본 도현은 이내 장수들과 함께 지휘소로 돌아갔다.
한편 청군 숙영지의 분위기는 초상집이나 다름없었다.
여기까지 오는 것은 힘들었지만 곧 심양을 함락시키고 조선까지 밀고 들어갈 거라 의심치 않았는데 왕창 깨져 버렸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기가 완전히 꺾여 어깨가 축 쳐진 병사들은 여기저기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아 피곤에 지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숙영지 한가운데에 세워진 커다란 지휘 천막에서는 아까부터 잔뜩 화가 난 예친왕의 노호성이 계속 터져 나왔다.
꽝!
“사상자가 얼마라고?”
앞에 있는 탁자를 주먹으로 세게 내려친 예친왕이 눈을 희번덕거리면서 묻자, 오늘 공성전을 지휘했던 한족 출신 무장인 주은천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오, 오천 명이 조금 넘습니다.”
“졸전을 벌여 망신을 당한 것도 부족해서, 뭐? 오천이나 잃었다고?”
예친왕의 호통에 주은천은 털썩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용서를 빌었다.
“죄송합니다, 전하. 워낙 조선군의 방비가 단단해서…….”
어떻게든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주은천이 변명을 늘어놓자 눈썹을 위로 추켜올린 예친왕은 이마에 핏대를 세우며 소리쳤다.
“닥쳐라! 앞장서서 병사들을 독려하기는커녕 멀찌감치 떨어져 주둥이만 나불거려 놓고 어디서 그딴 말을 내뱉는 거야!”
“헉. 저, 전하.”
“꼴도 보기 싫으니 저놈을 당장 밖으로 끌어내라!”
“옛.”
또 즉결 처분을 해 버릴까 봐 가슴을 졸이던 장수들 중 한 명이 얼른 주은천을 데리고 천막 밖으로 나갔다.
“멍청한 놈 같으니라고.”
짜증스럽게 말을 내뱉는 예친왕을 보며 왕태봉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조선군이 보유한 화포와 조총의 위력이 우리의 예상보다 훨씬 강력한 것 같습니다.”
“으음.”
인정하기는 싫었지만, 성벽 아래까지 다가가기 위해서 엄청난 희생을 치러야 했던 것을 직접 눈으로 봤기에 예친왕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성격이 급하고 상대를 잘 깔보는 단점을 가진 야골타마저 오늘 본 조선군의 화력이 충격적이었는지 심각한 어투로 말을 덧붙였다.
“적하고 맞붙어 싸우기도 전에 포격과 조총 사격을 받아 대형이 다 흐트러져 버렸으니 정말 골치 아프게 됐습니다.”
“특히 뭘 어떻게 했는지, 커다란 쇠공이 그냥 떨어진 것이 아니라 폭발해 파편을 사방으로 뿌리는 바람에 병사들의 피해가 더 컸습니다.”
“화포를 쏘지 못하게 막을 방법이 없을까?”
예친왕의 물음에 모여 있던 장수들은 어렵다는 반응을 보였다.
“화살로 견제를 하려 해도 우선 사거리가 짧아 닿질 않는 데다가, 대부분의 화포가 포루 안에 들어가 있어 거의 효과가 없을 겁니다.”
“오히려 공격을 하려다 궁수대가 먼저 박살 나 버리기 십상이지요.”
“그래서 이대로 당하고만 있자는 거야!”
어려운 일이라는 걸 알고 있지만 장수들이 하나같이 고개를 내젓자 짜증이 치밀어 오른 예친왕은 정색을 했다.
그러자 딱히 대답할 말이 없는 장수들은 괜히 헛기침만 하면서 슬쩍 시선을 피했고, 예친왕이 콧구멍을 벌렁거리며 또다시 호통을 치려고 할 때 왕태봉이 한 발자국 앞으로 나와 이야기했다.
“전하, 제가 비록 병법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지만 조선군의 화포를 상대하려면 저희도 똑같이 홍이포를 쓰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을 겁니다.”
“누가 그걸 몰라? 하지만 홍이포를 쓰고 싶어도 화약이 없어 고철 덩어리 신세잖아!”
새삼 요하 인근에서 당한 야습이 뼈아프게 다가온 예친왕은 미간을 좁히고는 한쪽 볼을 실룩거렸다.
그런 예친왕을 보며 왕태봉은 침착하게 이야기를 이었다.
“지금으로서는 어떻게 해서든 화약을 다시 확보하는 것이 최선입니다.”
“끄으응.”
얼굴을 구긴 채 앓는 소리를 내던 예친왕은 이내 눈을 매섭게 번득이고는 좌중을 둘러보며 말했다.
“북경에 연락해서 화약을 최대한 빨리 보내라고 해! 그리고 내일부터 심양성이 떨어질 때까지 쉬지 않고 계속 몰아붙일 테니, 다들 그렇게 알고 각오 단단히 하도록.”
포격 지원 없이 공성전을 벌이면 엄청난 피해가 속출할 것이 뻔했지만, 어차피 예친왕에게 한족 병사들은 쓰다가 죽으면 언제든지 다시 채워 넣을 수 있는 소모품에 불과했기에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이런 결정을 내렸다.
만주족 출신 장수들도 예친왕과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에 별다른 반대를 하지 않았고, 왕태봉을 비롯한 이신들은 한족 병사를 사지로 밀어 넣는 것에 경악하면서도 행여나 불호령이 떨어질까 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다음 날 해가 뜨자마자 화약 보급을 재촉하는 전령이 북경으로 떠났고, 예친왕의 명령대로 한족 출신으로 구성된 청군 보병들은 빗발치는 포격과 총탄 세례를 뚫고 심양성을 향해 돌격했다.
북경, 자금성.
뭔가 급한 일이 있는지 다급한 얼굴로 거의 뛰듯이 걸어간 통정사 이제갑은 언제 봐도 눈이 아플 정도로 번쩍번쩍한 금색 장식과 하늘하늘한 붉은 비단 천으로 꾸며 놓은 태후전 문을 두드렸다.
궁녀의 안내를 받아 안으로 들어서자 코를 찌르는 강한 향내가 온통 주위에 가득했다.
“태후 마마, 신 이제갑이옵니다.”
“어서 오게.”
화려하게 장식된 의자에 앉아 있던 태후는 상아와 비취로 세공한 긴 손톱 장식을 우아하게 흔들며 이제갑을 맞이했다.
“마침 향을 즐기고 있던 참인데 잘 왔네.”
태후는 손을 한번 휘저어 향을 깊게 들이마셨다.
“음, 역시 서역 상인이 들여오는 것은 이국의 독특한 정취가 있단 말이야. 통정사는 어찌 생각하는가?”
갑작스러운 태후의 물음에 이제갑은 당황해 고개를 숙였다.
“저는 향에 대해 무지한지라 잘 모르겠사옵니다만, 태후 마마의 고견을 듣고 보니 어쩐지 신비로운 느낌이 드는 것 같기도 합니다.”
“호호, 고견이라니 당치도 않소.”
태후는 기분 좋은 듯 깔깔 소리 내어 웃고는 궁녀에게 향로를 치우라 일렀다.
“옛날부터 향이란 건 여자들이 가지고 노는 물건이었으니 그대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오. 한데 어쩐 일로 내 처소를 찾으셨소이까?”
“실은 방금 섭정께서 보낸 전령이 도착하였습니다.”
섭정이라는 단어가 나오자마자 태후는 고운 이마를 찡그렸고, 웃는 얼굴이 순간 굳었다가 풀어졌다.
찰나의 변화였기에 일순 착각인가 싶었지만, 태후와 예친왕 사이의 반목과 갈등을 익히 알고 있는 이제갑은 주변 공기가 살얼음처럼 차갑게 얼어붙은 것을 느꼈다.
“흐응, 섭정이 전령을 보낸 게 무슨 대수라고. 그래, 뭐라고 하더이까?”
태후는 짐짓 관심 없는 척 매끈하게 다듬은 손톱 장식의 끝을 부드럽게 매만지면서 딴청을 피웠다.
하지만 그 나른한 동작은 곧 얼른 본론을 꺼내라는 신호와도 같았다.
사소하게 지나가듯 던지는 말 하나,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몸짓 하나에도 수많은 의도가 숨겨져 있는 것이 바로 황궁에 사는 사람들의 태도다.
그것을 이해하지 못해 아둔한 행동을 일삼다가 눈 밖에 나 내쳐진 자들의 수는 이루 헤아릴 수가 없었다.
나름 황궁에서 오래 버티며 닳고 닳은 이제갑은 금방 태후의 의도를 깨닫고 서둘러 입을 열었다.
“섭정께서 북경 군영에 보관 중인 화약 재고를 몽땅 다 끌어모아 전장으로 보내라고 요구하셨습니다.”
“화약을?”
“그렇습니다, 마마.”
태후는 의외라는 표정으로 눈썹을 찡그렸다.
“화약이라면 이미 출정할 때 충분히 들고 가지 않았나? 아무리 전투가 격렬하다 해도 그 많은 양을 벌써 다 써 버렸을 리가 없는데.”
“실은 심양으로 이동 중에 불의의 습격을 받아, 가지고 갔던 화약 대부분을 잃어버린 모양입니다.”
“뭐?”
그녀는 기가 차다는 듯 혀를 차더니 이내 고소하다는 표정으로 입술 끝을 말아 올렸다.
“그래서 섭정이 급히 전령을 보낸 게로군. 하긴 화약이 없으면 아무리 수십만 대군이 있어도 철옹성 같은 심양을 쉽게 함락시킬 수는 없을 테니까.”
태후는 어떻게 할까 하고 나직이 중얼거리며 날카로운 손톱 장식 끝으로 팔걸이를 톡톡 두드렸다.
상황이 아주 재미있게 되었다.
이야기를 듣자 하니 조선군이 예친왕의 대군에 맞서 예상외로 잘 버티고 있는 것 같은데, 이 기회를 이용해 이이제이의 술책을 쓸지, 아니면 체면은 살려 주는 방향으로 몰고 나갈지 참으로 즐거운 고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대전에서는 어떻게 하기로 했소?”
“아직 결정이 나지 않았사옵니다. 이야기를 듣자마자 바로 태후 마마께 소식을 전해 드리러 달려온 것입니다.”
“잘했소.”
태후는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럼 섭정의 요구는 들어주되, 화약을 반만 보내 주도록 하시오.”
“네?”
“내가 꼭 두 번 말해야 알아듣겠나?”
태후가 이맛살을 찌푸리자, 이제갑은 다시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하지만 그리하면 섭정께서…….”
“잘 생각해 보게. 섭정이 화약이란 화약은 모두 다 갖고 가 버렸다가 자칫 지난번 반란과 같은 다급한 일이 터졌을 때, 북경은 무슨 수로 지킨단 말인가?”
“그렇긴 합니다만.”
“절반의 화약을 보내 주는 것만 해도 감지덕지해야지. 애초에 갖고 간 것을 잃어버리지 않았으면 되는 일 아닌가?”
“…….”
태후는 이미 모든 결정을 내렸다는 듯, 흥미를 잃은 얼굴로 옆에 놓인 찻잔을 들었다.
화약을 잃어 불리한 상황이라고는 하나 예친왕이 전쟁에 진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수많은 전투를 헤쳐 나온 그의 지략과 무력을 따져 보면, 조선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머쥐는 건 어린애를 제압하는 것처럼 손쉬운 일일 것이다.
그렇게 되면 가뜩이나 막강한 예친왕의 위세가 더 높아질 것이 분명했다.
예친왕이 승승장구하면 반대편에 선 자신한테 좋을 것이 하나도 없었기에, 태후는 예기치 않게 찾아온 이번 기회를 이용해 그를 조금 괴롭혀 줄 작정이었다.
그간 그의 오만방자한 행실을 참아 줬으니 이 정도 장난쯤은 당연히 쳐도 되지 않은가.
그녀에겐 그런 권리가 충분히 있었다.
더불어 가능성은 낮았지만, 조선군이 예친왕을 이겨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기고만장한 그와 측근들의 기세를 꺾어 줬으면 하는 기대도 있었다.
이런 태후의 생각을 눈치챈 이제갑은 수긍하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걱정스러운 듯 이야기했다.
“하오나 그렇게 하면 군부를 장악하고 있는 섭정의 측근들이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흥! 그놈들도 다 황상의 신하들인데, 황명이 떨어지면 거기에 따라야지 어쩌겠소.”
“그렇긴 하옵니다만…….”
“돈을 쓰든지 아니면 벼슬을 가지고 회유를 하든지, 어떤 방법을 써도 좋으니 섭정에게 화약이 다 가지 않도록 막으시오.”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태후와 한배를 탄 이상 예친왕 세력이 득세하면 자신에게도 불리했기에 이제갑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럼 태후 마마의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공만 믿겠소.”
이제갑이 물러간 뒤, 태후는 미지근하게 식은 차를 마셨다가 뱉어 버렸다.
“차가 맛이 없구나. 항상 따뜻하게 데워 놓으라 하지 않았느냐!”
“죄, 죄송합니다. 이야기 중이셔서 그만…….”
끼어들 수가 없었다고 변명하는 궁녀를 향해 태후는 그 입 닫으라며 신경질을 부렸다.
“벌로 뺨 석 대를 치고 오늘 점심과 저녁밥은 굶기도록 해라.”
“네, 태후 마마.”
노련한 상궁이 아직도 억울하다는 표정의 궁녀를 억지로 일으켜 데리고 나갔다.
그 자리에서 한마디라도 더 벙긋했으면 훨씬 심한 벌을 받았으리라.
태후는 거울을 보고 옷매무새를 점검한 다음, 오늘도 변함없이 아름다운 자신의 미모에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태후 마마, 식사하실 시간이옵니다.”
상을 차릴까요 하고 묻는 상궁의 말에 태후는 창밖으로 비치는 푸른 하늘에 잠깐 시선을 두고는 말했다.
“오늘은 날씨가 좋으니 정원에서 먹고 싶구나. 더 추워지면 눈이 내려 산책하기도 힘들 테니, 모처럼 햇살이 따뜻할 때 즐겨야 하지 않겠느냐? 폐하께도 연락해서 바쁘지 않으면 함께 드시자고 여쭤 보아라.”
태후는 드물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외출복을 몸에 걸쳤다.
이십만 대군이 먹고 자며 적과 싸우려면 엄청난 물자가 필요했기에, 짐마차 수백 대로 이루어진 보급대가 수시로 북경에서 심양까지 긴 거리를 오갔다.
머릿수가 많은 만큼 하루에 소모하는 물량이 어마어마해 보급대 운용에만 삼만 명이 넘는 인원을 투입해야 할 정도였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조금 여유가 있었겠지만, 본대가 가지고 가던 보급품 태반을 야습으로 망실亡失하는 바람에 전쟁 초반부터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조선군의 청야 전술로 황량하게 변한 들판을 말과 황소가 끄는 백여 대의 짐마차가 길게 줄을 지어 느릿느릿 지나가고 있었다.
바로 심양에서 한창 공성전을 벌이고 있는 본대에 물자를 가져다주러 수천 리나 되는 길을 이동해 온 청군 보급대였다.
오랜 이동에 지친 데다가 이제 목적지가 얼마 안 남았다는 안도감에 다들 약간은 긴장이 풀어진 모습이었다.
짐마차 양옆에 병장기를 들고 터벅터벅 따라 걸어가는 병사들만 없다면 초원을 오가는 대상隊商 행렬이라고 착각할 정도였다.
평화롭게(?) 지나가는 청군 보급 행렬을, 먹이를 노리는 맹수처럼 조용히 숨어서 지켜보는 눈이 있었다.
야트막한 언덕 뒤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보급 행렬을 살피던 박경지 장군은 천리경을 눈에서 떼며 혼잣말처럼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군량을 가득 실은 짐마차 백 대라…… 첫 전과치고는 나쁘지 않군.”
“호위 병력도 오백 명이 채 안 되는 것 같습니다. 바로 공격할까요?”
옆에 함께 있던 부관의 물음에 박경지 장군은 망설일 필요도 없다는 듯이 바로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
짧게 대답한 박경지 장군은 다시 한 번 멀리 보이는 청군 보급대를 쳐다보고는 몸을 돌렸다.
언덕 아래에는 얼핏 봐도 오륙천은 넘을 것 같은 기병들이 말에서 내린 채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모종의 임무를 받고 전투 시작 전에 심양성을 나왔던 혼성 기병대로, 이 군단과 근위군단은 물론이고 복속된 거란족 출신까지 섞여 있었다.
중구난방衆口難防처럼 상당히 복잡하고 정신없어 보였지만, 이미 한차례 야습을 벌이며 실전에서 손을 맞췄고 그동안 함께 지냈기에 함께 작전을 치르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아래로 내려오자 부하들을 살피고 있던 지휘관급 장수들이 자연스럽게 박경지 장군 앞으로 모여들었다.
“병사들 상태는 어때?”
“다들 너무 쉬어서 몸이 근질근질하답니다.”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흑치영이 특유의 걸걸한 목소리로 대답하자 박경지 장군은 피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럼 몸을 풀어 줘야지. 호위 병력은 얼마 없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 빠르게 포위를 하고 공격한다.”
“예.”
대답을 하는 장수들의 목소리에 힘이 넘쳤다.
듬직하다는 눈빛으로 부하 장수들을 훑어보던 박경지 장군은 왼쪽 끝에서 시선을 멈추며 말했다.
“무트차한.”
“옛!”
건장한 체격에 부리부리한 눈이 인상적인 무트차한은 타고난 무술 실력과 충성심을 인정받아 판관 벼슬을 제수받고 현재 거란 출신 기병들을 이끌고 있는 자였다.
“이번 전투는 자네가 선봉에 서도록 해.”
다른 조선인 장수들을 다 제쳐 두고 손쉽게 공을 세울 수 있는 기회를 주자 무트차한은 깜짝 놀란 표정을 짓고는 그를 보며 약간 서툰 조선말로 되물었다.
“정말이십니까?”
“그래. 어때, 자신 있나?”
“맡겨만 주십시오. 단번에 다 제압해 버리겠습니다.”
“좋아. 주상 전하께서 자네를 비롯한 거란 출신 기병들한테 거는 기대가 크시니, 이번에 실력을 확실히 보여 주게.”
“네.”
박경지 장군이 가볍게 어깨를 두드리며 격려를 해 주자 무트차한은 약간 상기된 얼굴로 군례를 취했다.
“승마하라!”
잠시 뒤 장수들의 외침에 휴식을 취하던 기병들은 일사불란한 동작으로 각자 군마에 올라탔다.
푸르릉.
“워, 워.”
기병들이 준비를 다 끝내자 박경지 장군은 허리에 차고 있던 장검을 뽑아 들고는 큰 소리를 명령을 내렸다.
“거검.”
차차차촹.
날카로운 쇳소리를 울리며 기병들이 소지한 검을 뽑아 들었고, 기수들은 깃발을 수직으로 곧추세워 안장 앞에 고정했다.
“적 보급대를 친다. 가자!”
“우와아아!”
우렁찬 함성을 내뱉은 기병들은 말발굽 소리를 내며 화살처럼 빠르게 은신해 있던 언덕을 돌아나갔다.
두두두두!
한가롭게 짐마차 옆에 서서 걸음을 옮기던 청군 병사들은 갑자기 뿌연 먼지 구름을 피워 올리며 나타난 조선군 기병대를 발견하고 너무 놀라 순간 온몸이 얼어붙었다.
“저, 저거…….”
“적이다!”
“헉!”
처음에는 의아한 얼굴로 쳐다보다가 높이 치켜든 깃발을 보고 조선군임을 알아차린 청군은 기겁을 했다.
말을 타고 있던 지휘관은 예상치 못한 습격에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채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이런, 어서 방어 대형을 갖춰라!”
우왕좌왕하던 적병들은 지휘관의 외침에 정신을 차리고 황급히 대형을 갖췄지만, 겨우 창 하나로 무섭게 달려드는 기병들을 막아 낼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조선군 기병대는 언덕을 나오자마자 세 방향으로 갈라졌는데, 좌우는 적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주위를 크게 포위했고 무트차한이 이끄는 나머지 병력은 곧장 보급 행렬을 노렸다.
조선군이 나타난 언덕과는 칠백여 보 정도가 떨어져 있었지만 말을 탄 기병은 1분 정도면 도달할 수 있는 거리였다.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 상대가 미처 대형을 갖추기도 전에 거센 파도처럼 조선군 기병대가 들이닥쳤다.
“다 쓸어버려라!”
선두에 선 무트차한이 목이 터져라 외치면서 말 옆구리를 걷어차 속도를 올리자, 뒤에 있던 거란 출신 기병들도 행여나 쳐질세라 박차를 가하며 바짝 붙어 따라갔다.
“창을 단단히 세우고 상대를 말에서 떨어뜨려라!”
청군 지휘관이 고함을 질러 댔지만 이미 겁에 질려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 병사들은 호응해 주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어떻게 용기를 내 맞서 싸워 보려고 해도 수적으로 너무 차이가 나는 데다가 점점 가까이 다가올수록 지축을 울리며 크게 들리는 말발굽 소리가 공포심을 더 극대화시켰기 때문이다.
“우, 우린 이제 죽을 거야.”
“어머니…….”
어느새 백 보 거리까지 접근한 조선군 기병대는 안장 옆에서 뭔가를 꺼내 쐈다.
슈슈슉! 쉬이익, 슈슉!
바람을 가르는 섬뜩한 소리를 내며 날아온 건 바로 화살이었다.
타고난 기병답게 빠른 속도로 달리는 말 위에서 능숙한 동작으로 시위를 당긴 거란 출신 병사들이 쏜 화살은 상대편 머리 위에 비처럼 떨어져 내렸다.
퍼퍽!
“으악!”
“컥.”
“끄윽…….”
몸에 화살이 박힌 적병들은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연달아 화살을 세 발씩 쏜 거란 출신 기병들은 상대가 혼란에 빠져 있는 틈을 놓치지 않고 그대로 덮쳤다.
“죽어라!”
제일 먼저 적들 사이에 뛰어든 무트차한은 달려오는 속도를 이용해 그대로 앞에 서 있던 적병의 목을 베어 버렸다.
슈각.
“아아악!”
적은 비명을 내지르면서 그 자리에 허물어지듯 주저앉았고, 무트차한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다른 상대를 찾아 검을 마구 휘둘렀다.
뒤따라 도착한 거란 출신 기병들도 무자비하게 적을 학살했다.
보병인 청군은 높은 말 위에 앉아 검을 내려치는 거란 출신 기병들의 공격을 막아 내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몇몇이 방패와 창을 높이 쳐들며 격렬하게 저항하기도 했지만 그 수는 얼마 되지 않았다.
사방에서 피가 튀고 비명을 질러 대며 양쪽이 뒤엉켜 난전을 벌이는 전장은 한편의 지옥도가 그려졌다.
채챙! 챙! 챙!
“히익, 도, 도망쳐!”
공포에 질린 적병 일부가 몸을 돌려 달아나려고 했지만 얼마 못 가 주위를 포위하고 있던 조선군 기병대에 죽임을 당했다.
너무나도 일방적인 전투에 대항할 의지를 잃어버린 적들은 가지고 있던 병장기를 바닥에 던지고 항복하기 시작했다.
“사, 살려 주십시오.”
“항복합니다.”
한 명이 손을 들자 눈치를 보던 다른 적병들도 금방 뒤따라 양팔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무트차한과 거란 출신 기병들은 더 이상 살인을 자제하고 항복한 적들을 한 곳으로 모았다.
이각(30분)이 채 안 되는 짧은 전투 시간 동안 살아남은 적병은 백여 명에 불과했고 나머지는 모두 차가운 시신이 되어 바닥에 널브러졌다.
그에 비해 거란 출신 기병들의 피해는 서른 명이 다였다.
전투가 끝나자 부관과 함께 다가온 박경지 장군은 얼굴 가득 미소를 짓고는 여기저기 상대편이 흘린 피를 묻히고 있는 무트차한을 칭찬했다.
“잘 싸웠네.”
“더 빨리 끝낼 수도 있었는데, 죄송합니다.”
“아니야, 이걸로도 충분해. 왜 거란족 전사들이 뛰어난 기병이라 불리는지 오늘 확실히 확인할 수 있었네. 특히 마상에서 달리며 활을 쏘는 건 압권이었어.”
“과찬이십니다.”
명장으로 이름이 높은 박경지 장군이 자신과 부하들을 인정해 주자 무트차한은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앞으로도 활약을 기대하겠네.”
“뭐든 맡겨만 주시면 최선을 다해 임무를 수행하겠습니다.”
“듬직해서 좋구먼.”
말에 탄 채로 살짝 고개를 숙인 무트차한에게 박경지 장군은 신뢰가 가득 담긴 눈빛을 보냈다.
“그럼 귀찮은 것들이 달라붙기 전에 여길 뜨도록 하세.”
“옛.”
잠시 뒤 조선군 기병대는 곡식이 가득 실린 짐마차와 바닥에 떨어진 병장기를 모두 노획해 가져갔다.
그리고 포로가 된 적병들은 부상이 심하지 않거나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 자들만 골라 포승줄에 굴비 엮듯이 묶어서 끌고 갔다.
중상을 입었거나 걷지 못하는 자들은 그냥 방치했는데, 조금 잔인한 것처럼 보여도 후방에서 빠르게 이동하며 보급로 차단 작전을 벌여야 하는 조선군 기병대 입장에서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사실 그냥 다 죽여 버리고 홀가분하게 돌아다니는 것이 더 나았지만 차마 그렇게 할 수 없어서 포로들을 끌고 가는 거였다.
남겨 둔 자들도 운이 좋아 늦지 않게 청군에 발견된다면 살아남을지도 몰랐다.
그렇게 이걸 시작으로 박경지 장군이 지휘하는 조선군 혼성 기병대는 요하 일대와 더 멀리는 만리장성 근처까지 신출귀몰하게 돌아다니면서 보이는 족족 청군 보급대를 습격해 물자를 약탈하거나 몽땅 불태워 버렸다.
한참 동안이나 이런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던 예친왕은 시간이 지나도 보급대가 도착하지 않자 정찰병을 주위에 보내고 나서야 상황을 알게 됐다.
“보급대가 습격을 받았다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예친왕이 노성을 터트리자 한쪽 무릎을 꿇고 앞에 있던 군관이 얼른 머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보급로 주변에 전투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었고, 죽은 병사들의 시신도 발견됐습니다.”
“보급대가 전부 당했다는 거야?”
눈을 무섭게 치켜뜬 예친왕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예.”
엉뚱하게 화를 다 뒤집어쓴 군관이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하자 예친왕은 앞에 있던 술잔을 집어 던졌다.
파삭!
“헉.”
바로 옆을 아슬아슬하게 스쳐서 떨어진 술잔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산산조각 나자 깜짝 놀란 군관은 헛바람을 삼켰다.
“이것들을 그냥!”
“전하, 고정하십시오.”
“이러시면 저들이 원하는 대로 되는 겁니다.”
천막 안에 있던 측근 장수들이 나서 그를 진정시키려고 했지만 예친왕은 흥분을 좀처럼 가라앉히지 못했다.
“내가 지금 가만히 있게 됐어?”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인데 화를 내신다고 빼앗긴 보급품들이 다시 돌아오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왕태봉의 말에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예친왕은 이를 부드득 갈다가 이내 낮게 침음을 내뱉으며 의자에 털썩 앉았다.
“젠장!”
일단 화가 좀 진정된 것처럼 보이자 왕태봉은 안절부절못하고 눈치만 보고 있는 군관에게 시선을 주며 말했다.
“더 보고할 것이 없으면 나가 보게.”
“예.”
그러자 군관은 이제 살았다는 표정으로 얼른 일어나 군례를 취하고는 서둘러 지휘 막사를 나갔다.
고개를 든 예친왕은 날이 잔뜩 선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우리가 단단히 포위를 하고 있으니 심양성에서 나온 건 아닐 테고, 이것들이 갑자기 어디서 나타난 거야?”
“혹시 조선에서 추가로 병력이 더 들어온 것이 아닐까요?”
“으음.”
야골타의 짐작에 왕태봉이 고개를 가로저으면서 이야기했다.
“그럴 수도 있지만 저들이 바보가 아닌 이상 조선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전력이 뻔한데 심양에 있는 군대 외에 또다시 병력을 만주로 보내기는 어려울 겁니다.”
언제부터 예친왕의 측근이었다고 한족 주제에 사사건건 토를 다는 왕태봉을 탐탁지 않게 쳐다보며 야골타는 약간 퉁명스럽게 말했다.
“조선 국왕이 직접 친정을 하고 있으니 어떻게든 이기려고 발악을 하는 것일 수도 있지 않나!”
적대적인 시선에 왕태봉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그것보다는 공성전에 그다지 필요가 없는 기병을 우리가 오기 전에 내보냈다는 것이 더 가능성이 클 겁니다.”
“그렇게 확신하는 증거라도 있나?”
비아냥거리듯 야골타가 묻자 왕태봉은 양쪽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증거는 없지만 후방을 휘젓고 다니며 보급선을 끊으려면 기동력을 갖춘 기병이어야 하는데, 조선군에게 심양에 주력을 두고 또 상당한 규모의 별동대를 운용할 만큼의 기병 전력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핵심을 찌르는 왕태봉의 이야기에 예친왕을 비롯한 다른 장수들 모두 수긍하는 표정을 지었고 야골타도 앓는 소리를 내며 더 이상 시비를 걸지 않았다.
“끄으응.”
그러자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예친왕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놈들이 심양성에서 나왔든 조선에서 왔든, 지금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야. 이대로 활개를 치게 놔둘 수는 없어!”
예친왕의 말에 모여 있던 장수들은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야골타.”
“예.”
부름을 받은 야골타가 한 발짝 앞으로 나서서 상체를 가볍게 숙였다.
“자네한테 백기단의 지휘를 맡길 테니, 후방으로 가서 보급대를 습격한 놈들을 찾아내 몽땅 없애고 돌아오게!”
예친왕은 탁자에 손을 얹고 준엄한 말투로 명령했다.
백기단은 팔기군에 속한 부대 중 하나로 예친왕이 특히 아끼는 정예였다.
“맡겨 주십시오. 감히 우리를 우습게 본 걸 죽어서까지 후회하게 만들어 주겠습니다.”
기세등등한 야골타의 호언장담을 들은 예친왕은 다른 장수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리고 두 번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호위를 지금보다 두 배 더 늘려 보급로를 안전하게 확보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장군들의 우렁찬 대답이 천막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다음 날.
예친왕이 명령한 대로 야골타가 이끄는 백기단이 숙영지를 떠났다.
두두두두!
희뿌연 먼지구름을 일으키면서 수천 기의 말과 병사들이 하나가 된 듯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모습은 가히 장관이었다.
특히 선두에 선 야골타 장군은 깃발을 높이 올리고 가슴을 당당하게 편 자세로 위용을 뽐내고 있어, 멀리서도 누구인지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혼성 기병대가 일을 제대로 처리한 모양이군.”
문루 위에 서서 그 광경을 보고 있던 도현이 중얼거리자 옆에 있던 박영식 장군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청군이 성을 포위하고 있어 외부 소식을 알 길이 없는데 그걸 어찌 아십니까?”
그러자 도현은 손끝으로 백기단을 가리켰다.
“저걸 보게. 혼성 기병대가 보급로를 차단하지 않고서야 저리 많은 인원이 한꺼번에 후방인 요하 쪽으로 움직일 이유가 없지 않나?”
그 말에 박영식이 눈을 가늘게 뜨고 도현이 가리킨 쪽을 쳐다보았다.
두 사람이 잠시 이야기를 나눈 그 짧은 시간에 백기단은 이미 들판을 가로질러 먼 지평선 너머로 사라지고 있었다.
확실히 도현의 말대로 그런 이유가 아니라면 팔기군이 저런 행동을 보일 이유가 없었다.
“과연 그렇사옵니다.”
천리안이라도 가지고 있는 듯한 도현의 혜안에 박영식 장군은 감탄사를 터트렸다.
“너무 치켜세우지 말게. 누구라도 조금만 생각해 보면 다 알 수 있는 것이니 말이야.”
도현은 대수롭지 않은 일로 소란을 피우지 말라는 듯 어깨를 으쓱였지만, 박영식에겐 그런 작은 몸짓마저도 큰 의미로 다가왔다.
익은 벼가 고개를 숙인다고 그 옛날 누가 말했던가.
옛 성현의 말씀은 어느 것 하나 틀린 게 없다며 박영식은 속으로 읊조렸다.
그러면서 자신도 도현을 본받아 작은 공을 세워 놓고 오만해지거나 자만심을 가지는 일 없이 겸양하는 마음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하는데, 문득 코끝에 차가운 것이 와 닿았다.
“이크.”
“무슨 일인가?”
“아뇨, 갑자기 얼굴에 뭐가…….”
박영식은 손을 들어 코끝에 묻은 물방울을 닦아 냈다.
“비라도 오려나.”
마른하늘에 물이 떨어질 리 없으니, 소나기라도 오는가 싶어 위를 올려다보았다.
어째 아침부터 날씨가 흐리더니 지금은 온통 먹구름이 가득 차 있었다.
“한바탕 쏟아질 것 같사옵니다. 이만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행여 비라도 맞을까 싶어 박영식이 그리 말하는데, 도현은 오히려 빙긋 미소를 지었다.
“아닐세.”
“네?”
“비가 아니란 말이야.”
도현의 말소리를 들었는지, 박영식의 눈앞에 흰 물체가 살랑살랑 바람을 타듯 가볍게 휙 스쳐 지나갔다.
“설마, 이건?”
“그래, 눈일세.”
도현은 손을 길게 앞으로 뻗어,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는 하얀 눈송이를 손바닥으로 받았다.
눈은 손바닥에 닿자마자 금방 체온에 녹아 차가운 물방울이 되었다.
“하늘이 우리 편을 들어 주기로 했나 보군.”
그렇게 말하며 도현은 눈송이로 젖은 손바닥을 동그랗게 말아 꽉 주먹을 쥐고, 정면에 보이는 청군 숙영지로 시선을 돌렸다.
“보급로가 끊기고 눈까지 내리니 예친왕의 속이 바짝 타겠군.”
도현이 문루에 서서 첫눈을 맞고 있을 때 예친왕 또한 이야기를 듣고 황급히 천막 밖으로 나와 하늘을 봤다.
“이런!”
양쪽의 반응은 극명하게 갈렸는데, 하얀 눈을 보며 기뻐하는 도현과 달리 예친왕은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며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따뜻한 성안에 있는 조선군과 달리 청군은 바람 피할 곳 없는 황량한 벌판에서 달랑 천막 하나만 의지한 채 추위를 고스란히 다 견뎌 내야 하기 때문이었다.
거기다 가뜩이나 후방에서 날뛰는 혼성 기병대 때문에 상황이 안 좋은데 눈까지 쌓이면 보급이 더 어려워질 것이 불 보듯 뻔했다.
이렇게 여러 가지로 청군에 불리한 것밖에 없으니 첫눈을 바라보며 예친왕이 똥 씹은 표정을 짓는 건 당연했다.
고개를 돌린 예친왕은 벌써 달포 가까이 하루도 쉬지 않고 공격을 하는데도 끄떡하지 않고 있는 심양성을 바라보며 짧게 혀를 찼다.
“미치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