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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군 (53/104)

철군

첫눈이 내린 이후부터 기온이 급격하게 내려가더니 이제 밖에 나와서 숨을 쉬면 하얀 입김이 나올 정도로 추워졌다.

예친왕과 지휘관급 장수들은 머무는 천막에 땅을 파고 숯불을 피우는 화로를 만들어 어느 정도 따뜻하게 지낼 수 있었다. 하지만 일반 병사들은 그런 호사를 누리지 못했다.

도현이 쓴 청야 전술로 인해 땔감으로 쓸 나무를 구하기가 어려웠기에, 그냥 천막 안에 들어가 가지고 있는 옷가지를 다 덮어쓰고는 오들오들 떨며 견뎌야 했다.

물론 주위에 장작으로 쓸 나무가 없다고 해도 말 배설물을 땔감 대용으로 쓸 수 있었지만, 그건 지휘관들이나 군마를 타고 다니는 팔기군에 우선적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한족 병사들한테까지 줄 것이 없었다.

가끔씩 배급되는 것도 양이 너무 부족해 기온이 더 내려가는 밤에만 잠깐 아껴서 불을 피워야 했다.

그 때문에 병사들 대부분이 감기에 걸렸고 동상 환자까지 발생하는 등 청군의 전투력이 급속하게 저하되어 갔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보급대를 습격해 전멸시킨 조선군 혼성 기병대를 아직 찾아내지는 못했지만 야골타가 이끌고 간 백기단이 요하 인근을 수색하고 다니면서 끊어졌던 보급로가 다시 이어져 군량과 물자 공급이 다시 재개됐다는 점이었다.

이런 상태에서 보급마저 중단되었다면 청군 병사들은 더욱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을 것이 틀림없었다.

이처럼 힘들게 지내는 청군과 달리 조선군은 모두 미리 보급해 준 두툼한 솜옷을 갑옷 위에 껴입고 투구 밑에는 짐승 가죽으로 만든 남바위까지 써서 체온을 유지했고, 숙소는 물론이고 경계를 서는 성벽 곳곳에 화톳불을 피워 따뜻하게 몸을 녹였다.

남바위는 속에 털이 붙은 가죽을 대고 겉은 비단 같은 천으로 만들어 이마와 귀 그리고 목까지 덮을 수 있도록 한 일종의 방한모였다.

여기다 손에는 장갑까지 꼈는데, 동작이 불편한 벙어리장갑이 아니라 다섯 손가락을 모두 자유롭게 쓸 수 있게 가죽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이 모든 것이 도현의 지시에 의해 제작되고 보급한 것이었다. 들어가는 비용이 너무 많다고 호조와 신료들이 반대했지만,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는 병사들에게 아까울 것이 뭐가 있냐며 그가 강력히 밀어붙여 이루어졌다.

결론적으로 현명한 선택이었다는 것을 현재 전장에서 대치 중인 양쪽 병사들의 상태로 알 수 있었다.

상황이 점점 나빠지자 마음이 초조해진 예친왕과 청군 지휘부는 더욱 병사들을 몰아붙여 심양성을 공략했지만 번번이 큰 피해만 입고 물러나야 했다.

벌써 성이 포위되고 공성전을 벌인 지 한 달하고도 열흘이 지나가고 있었다.

“전하, 남두병 장군이 왔사옵니다.”

문밖에서 들리는 내관의 말에 도현은 읽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들라 하라.”

“예.”

문이 열리자 갑옷 차림의 남두병 장군이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와서는 오른쪽 주먹을 심장 부위에 가져다 대며 정중한 자세로 군례를 취했다.

“찾으셨사옵니까, 전하.”

“그래, 일단 이리 와서 앉게.”

“예.”

남두병 장군은 도현이 권하는 대로 비어 있는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밖에 있느라 추웠을 테니 따뜻한 녹차로 몸을 좀 녹이게.”

“망극하옵니다.”

도현이 손짓을 하자 한쪽에 시립해 있던 칠현이 화로 위에 올려 둔 주전자를 가져와 찻잔에 녹차를 따라 주었다.

“들게.”

김이 모락모락 나는 녹차를 한 모금 마시고 남두병 장군이 찻잔을 내려놓자 도현은 의자 등받이에 몸을 살짝 기대며 이야기를 했다.

“아직 비상북 소리가 울리지 않는 걸 보니 청군이 잠잠한 모양이군.”

“그렇사옵니다. 숙영지 밖으로 나오지도 않고 쥐 죽은 듯 틀어 박혀 있는 걸로 봐서 오늘도 조용히 넘어갈 것 같사옵니다.”

“흐음, 그래…….”

한쪽 손으로 턱수염을 매만지면서 잠시 뭔가를 생각하던 도현은 이내 고개를 들고 입을 열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공격을 해 대다가 갑자기 사흘이나 꼼짝 않고 있다니, 아무래도 뭔가 찝찝하군.”

“눈도 내리고, 이제 한계가 온 것이 아니겠사옵니까?”

“그렇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지만, 내가 알고 있는 예친왕은 고작 이 정도에 기가 꺾일 사내가 아니야.”

“…….”

비록 적이었지만 청 태조인 누르하치도 하지 못한 북경 함락에 성공한 예친왕을 도현은 마음속으로 인정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조만간 총공세를 펼치기 위해 힘을 비축하는 것 같아.”

도현의 말에 남두병 장군은 정색을 했다.

“사실 소신도 조금 불안하기는 했사옵니다.”

“며칠 전부터 짐마차를 잔뜩 끌고 온 보급대가 연이어 도착했으니, 이번에는 아마 그동안 쓰지 못했던 홍이포를 앞세우고 오겠지.”

“그럼 큰일이지 않사옵니까?”

“어차피 한번은 겪어야 될 일이니 그렇게 호들갑 떨 필요 없어. 그저 지금까지 해 왔던 것처럼 최선을 다해 적과 싸우면 되는 거야.”

“하지만…….”

“철벽보다 단단한 성벽이 있고 용맹한 병사들이 든든하게 버티고 있는데 뭐가 걱정인가.”

쳐들어오면 막아 낸다. 단순해 보이면서도 현재로서 이것만큼 분명한 명제가 없었기에, 남두병 장군은 걱정 가득했던 표정을 씻어 내며 고개를 끄떡였다.

“전하의 말씀이 옳사옵니다.”

“적이 아주 단단히 마음먹고 공격해 오는 만큼 어려운 전투가 될 테니 우리도 대비는 해 둬야겠지. 각 포대에 충분한 양의 화약과 포탄을 옮겨 놓고 병사들을 교대로 쉬게 해 체력을 회복시키도록 하게.”

도현의 지시에 남두병 장군은 머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알겠사옵니다.”

지휘부에서 이런 이야기가 오가는 사이, 병사들은 성안에 위치한 막사에 모여 꿀처럼 감미로운 휴식 시간을 가졌다.

“후우~!”

긴 곰방대를 입에 물고 불을 붙인 병사가 길게 연기를 내뿜었다.

뜨끈하게 불을 지펴 놓은 구들장 덕분에 온몸이 노곤해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싫을 정도로 만사가 귀찮았다.

“거참, 방 안에서 그렇게 뻐끔뻐끔 피워 대면 어찌하오?”

맞은편에 앉은 다른 사내가 투덜거리자 병사는 킬킬 웃으며 일부러 얼굴에 대고 후 연기를 불었다.

“어허! 왜 이래?”

사내가 질겁한 표정으로 마구 손사래를 쳐서 연기를 흐트러뜨렸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면 될 것 아닌가? 정 못 참겠으면 밖에 나가서 그렇게 좋아하는 맑은 공기나 쐬고 오시게, 나는 여기서 꼼짝도 안 할 것이니.”

“아무튼 성깔도 지랄 맞아서는.”

“흥.”

일부러 들으라고 하는 소리임에도 불구하고 병사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얼굴로 콧방귀만 뀌고 말 그대로 방바닥에 딱 붙어 뒹굴거렸다.

“거, 영락없는 한량이로구먼.”

두 사람이 아옹다옹하는 모습을 보고 있던 중년 사내가 웃으면서 병사에게 말을 건넸다.

멋들어진 턱수염을 기른 중년 사내는 병사들 중 가장 연장자이기도 했고 이 막사에 머무는 백인대를 지휘하는 하급 군관이었다.

그래서 비슷한 연배인 다른 사내에겐 막말을 하면서 놀아도 그에겐 함부로 대하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대꾸했다.

“아무렴, 한량이지요. 배부르지, 등 따시지, 우리 고을에서 가장 부자라고 하던 최 진사 댁 나리도 이렇게 팔자가 좋지는 못했을 거요.”

병사는 방금 전 먹어 치운 밥그릇을 들어 보였다.

도현의 지시로 병사들에겐 매일 적어도 한 끼씩은 고기반찬이 배급되었는데, 오늘은 사골을 푹 고아 만든 고깃국이었다.

“내 생일 때도 이렇게 좋은 밥은 못 얻어먹어 봤는데, 어디 가서 이런 대접을 받아 본단 말이오?”

“그게 다 목숨값 아닌가. 당장 오늘이라도 청나라 군대가 쳐들어오면 목을 걸고 싸워야 하는데, 자네는 전혀 무섭지 않나 보군.”

“무섭지요. 저번 전투에서 바로 옆에서 웃고 이야기하던 동료의 눈알에 화살이 박혀 지랄 발광을 하던 꼬락서니를 본 사람이 난데, 어찌 안 무섭겠소.”

“그거야 다들 그렇지.”

여기에 있는 병사들은 모두 벌써 두 달 가까이 이어지고 있는 공성전에서 살아남은 백전노장들이었다.

처음 동료가 죽어 나가는 모습을 봤을 땐 꿈에 나올까 봐 무서워 한숨도 자지 못하고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기도 했었다.

지금이야 다들 잊고 안정을 되찾았지만, 그래도 떠올리기 싫은 기억인 건 분명했다.

“한데 지금은 사정이 다르니 이리 마음 편하게 누워 있을 수 있는 거 아니겠소.”

“사정이 다르긴? 성벽 위에 올라가면 아직도 청나라 군대가 진을 치고 있는 게 뻔히 보이는데.”

“하지만 그냥 거기 있을 뿐, 쳐들어오진 않잖소.”

“우리가 방심하기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지.”

“그래도 너무 조용하니까 하는 말이지요. 우리가 마지막으로 놈들과 싸웠던 게 벌써 사흘 전이오.”

그러면서 병사는 입술 끝으로 까딱거리던 곰방대의 재를 탁 털었다.

“그러고 보니…….”

“간만에 맞는 소리도 하는군.”

“지금까지 그렇게 지독하게 덤볐으니 이제 지칠 만도 하지.”

“맞아.”

다들 휴식을 취하느라 조용하던 막사 안에 두 사람의 이야기 소리가 꽤 컸는지, 가만히 듣고만 있던 사람들 중 몇몇이 맞장구를 치며 동의했다.

“이러다가 그냥 흐지부지 끝나는 거 아니야?”

“그럼 좋지.”

“누가 아니래?”

어느새 병사들은 기대 어린 표정을 지었다.

“무르구먼, 물러.”

그때 턱수염을 기른 중년 사내가 무릎을 탁 치며 사람들의 이목을 모았다.

“무슨 말씀입니까?”

“청군이 과연 그렇게 우리 입맛대로 움직여 줄 것 같은가? 놈들이 조선 땅에 쳐들어와 저지른 행패를 떠올려 보게. 아마 더 칼을 갈면 갈았지 절대 가만히 놓아주진 않을걸.”

전투 경험은 물론이고 그래도 하급 군관이라 훨씬 보고 듣는 것이 많았기에 병사들은 귀를 쫑긋 세우고 이야기를 들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한껏 느긋한 표정으로 풀어져 있던 병사들의 얼굴에 어느새 다시 가벼운 긴장감이 떠올랐다.

중년 사내는 좋은 분위기를 깨서 미안했지만 아직 전쟁이 끝난 것도 아닌데 괜한 기대감을 품고 긴장이 풀어지면 안 됐기에 일부러 악역을 자처했다.

“그럼 놈들이 곧 다시 쳐들어올 거라는 말입니까?”

“그래. 저 많은 대군을 일으켜 놓고 이대로 순순히 물러서지는 않을 거야. 그때 가서 개죽음 당하기 싫으면 다들 정신 똑바로 차리라고.”

그 말을 끝으로 중년 사내는 입을 다물었다.

“으음.”

방금 전까지 화기애애하던 막사 안은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고 병사들의 표정 또한 굳어졌다.

다음 날, 그동안 조용하던 청군이 숙영지를 나와 성 앞에 도열하면서 짧았던 평화가 깨지고 전장에는 다시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이번에는 붉은색 망토를 등 뒤로 늘어뜨리고 화려한 갑옷을 입은 예친왕이 말을 타고 나와 직접 전투를 지휘했다.

그리고 도현이 예상한 대로 지금까지 화약이 없어 고철 신세였던 마흔 문의 홍이포를 끌고 나와 보란 듯이 전투대형 앞에 방열했다.

홍이포의 등장에 조선군 병사들은 바짝 긴장했고 장수들과 함께 문루에 서 있던 도현도 낮게 침음을 흘렸다.

“마흔 문이라…… 꽤 많군.”

“전하의 말씀대로 예친왕이 아주 단단히 마음을 먹은 모양입니다. 저길 보십시오, 지금까지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던 팔기군까지 나왔습니다.”

얼굴을 살짝 굳힌 남두병 장군이 한쪽 손을 들어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자 한족 보병과 확연히 차이가 나는 복색의 팔기군 병사들이 말에서 내려 대형 뒤편에 모여 있었다.

기병인 팔기군까지 공성전에 투입한다는 건 심양을 함락시키겠다는 예친왕의 의지가 얼마나 강한지 단적으로 보여 주고 있음을 의미했다.

주위를 둘러본 도현은 장수들의 표정이 무겁게 가라앉아 있자 일부러 더 과장되게 자신만만한 태도를 보였다.

“그래 봤자 성벽을 넘지 못하고 모두 차가운 눈밭에 드러눕게 될 거야. 오죽 급했으면 기병을 말에서 내리게 해 공성전에 투입하다니, 예친왕이 측은하군. 안 그런가들?”

“하하하! 맞사옵니다.”

“이십만이 아니라 백만 대군을 끌고 와도 심양성은 함락시키지 못할 겁니다.”

“압록강에서 싸워 보니 팔기군도 별것 아니더군요.”

박영식을 시작으로 장수들 모두 한마디씩 하며 긴장을 풀고 전의를 다졌다.

“청군이 이처럼 발악을 하는 걸 보면 이번 전쟁도 끝이 얼마 남지 않았다. 마지막에 영광스러운 승리의 깃발을 올리는 건 우리가 될 테니, 다들 최선을 다해 각자 맡은 임무를 수행하도록.”

“옛.”

우렁찬 장수들의 대답을 들으며 몸을 돌린 도현은 정면에 있는 청군 진영을 바라보면서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준비가 다 끝났습니다.”

다른 장수에게 보급로 확보 임무를 맡기고 급히 복귀한 야골타의 말에 가만히 고개를 끄덕인 예친왕은, 날카로운 눈으로 마치 거대한 산맥처럼 버티고 선 심양성을 잠시 노려보다가 입을 열었다.

“시작해.”

“예.”

전투 시작을 알리는 북소리가 전장 가득 울려 퍼지는 것과 동시에 방열을 끝내 놓고 대기하던 청군 홍이포가 먼저 포문을 열었다.

둥둥둥!

“발사!”

지휘관이 사격 명령을 내리자 길게 늘어서 있던 홍이포들이 차례차례 포탄을 발사했다.

꽝! 꽝! 꽝!

우렁찬 포성이 귀를 때리면서 천지가 진동했고 매캐한 화약 연기가 앞을 가렸다.

긴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포탄은 심양성 곳곳에 떨어졌다.

쉬우우웅!

콰꽝! 쿠쿵! 쿵!

“와아!”

빗나가는 것도 있었지만, 쏜 포탄이 성벽을 때리자 그동안 조선군이 일방적으로 퍼부어 대는 포격에 고생했던 청군 병사들은 환호성을 내질렀다.

예친왕도 잘하면 오늘 성을 함락시킬 수 있겠다는 생각에 고무된 표정을 지으며 돌격 지시를 내렸다.

“오늘에야말로 심양을 탈환하자. 공격하라!”

돌격 깃발이 오르자 제일 앞에 서 있던 한족 보병들이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앞으로 뛰어나갔다.

“가자!”

홍이포의 포격 지원을 받고 며칠 동안 쉬며 재충전을 해서 그런지 병사들도 그 어느 때보다 성을 함락시키겠다는 의지가 강했다.

쿠쿵!

후두두둑.

상대가 쏜 포탄이 명중했는지 육중한 소리가 울리면서 천장에서 돌가루가 떨어지고 바닥이 흔들렸다.

그러자 포루 안에 있던 포수들이 움찔하며 몸을 움츠렸다.

“겁먹지 마라. 놈들이 아무리 포탄을 쏴도 포루 안에 있는 이상은 우릴 상하게 하지 못한다. 무시하고 반격해라!”

최진석이 큰 소리로 독려하자 그제야 포수들은 정신을 차리고 각자 맡은 화포에 달라붙어 사격 각도를 잡았다.

얼마 있지 않아 두 번째 포탄이 포루에 명중했지만 아까와 달리 포수들은 멈칫거리지 않고 묵묵히 포구에 화약과 둥근 포탄을 밀어 넣었다.

“장전 끝!”

“좋아, 쏴!”

최진석의 구령에 포신을 밖으로 내밀고 있던 화포들이 일제히 불을 뿜었다.

퍼퍼퍼펑!

사방이 꽉 막힌 실내라서 더 크게 들리는 폭음과 함께 바퀴가 달린 포가에 얹힌 화포가 발사 충격으로 인해 뒤로 밀려났다.

“적이 포격을 하지 못하도록 홍이포부터 먼저 없애라!”

악을 쓰며 외치는 최진석의 말에 화포장들은 포구 밖으로 머리를 내밀어 착탄 지점을 확인하고 고각을 다시 조정한 뒤 곧 이 탄을 발사했다.

숙련된 포수들답게 금방 재장전을 끝내자 화포장은 심지에 불을 붙였다.

파지직하는 소리를 내며 불이 타들어 가더니 이내 우렁찬 포성이 울렸다.

전투 시작 전에 각 화포마다 연속해서 열 발을 쏠 수 있는 양의 포탄과 화약을 놔두었지만 초반부터 양쪽의 포격전이 격렬해지면서 순식간에 동이 나 버렸다.

“화약 더 가져와!”

“뭘 꾸물거리고 있어!”

화포장들이 목에 핏대를 세우고 고함을 치자 뒤에 있던 병사들이 창고에서 포탄과 화약이 든 나무상자를 낑낑거리면서 가져다주었다.

이쪽이 쏘는 만큼 포루에 명중하는 포탄도 점점 늘어났지만, 커다란 돌을 잘라 튼튼하게 쌓아 올리고 아름드리 통나무로 지지대까지 군데군데 세운 덕분에 끄덕하지 않고 잘 버텨 줬다.

그러자 포수들은 든든하게 포탄을 막아 주는 포루를 믿고 침착한 모습으로 포격을 이어 갔다.

조선군과 달리 완전히 노출된 채 방포를 하고 있던 청군 포병대는 지근거리에서 터지는 포탄에 크게 동요했고 갈수록 포를 쏘는 것이 늦어졌다.

쉬우우우웅! 꽈아앙!

“흐익.”

앞으로 사십 보 정도밖에 안 떨어진 곳에 포탄이 떨어져 폭발하자 청군 포수들은 기겁을 하며 흙바닥에 머리를 박고 엎드려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걸 본 청군 장수는 눈을 치켜뜨고 손에 든 장검을 엎드려 있는 포수의 목에 들이대며 윽박질렀다.

“겁쟁이 같은 놈, 어서 일어나 화약을 재지 못하겠느냐!”

“아, 알겠습니다.”

화들짝 놀란 포수는 더듬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걸 본 다른 포수들도 겁먹은 얼굴로 허둥지둥 일어나 바닥에 떨어진 화약통과 포탄을 주워 들었다.

“빨리 움직여라!”

“예.”

날카로운 호통에 포수들은 서둘러 장전을 끝내고 심지에 횃불을 가져다 댔다.

이윽고 불을 붙이려는 순간, 머리 위에서 들리는 섬뜩한 소리에 무심코 고개를 든 청군 장수는 시커먼 포탄이 그가 서 있는 곳으로 날아오는 걸 보고 눈을 크게 떴다.

“헉!”

그대로 몸이 얼어붙은 청군 장수는 아무 소리도 못 하고 그저 헛바람만 삼켰다.

그리고 얼마 후 밝은 섬광이 눈을 멀게 하는 동시에 요란한 폭음이 그의 고막을 강하게 때렸다.

정신을 잃은 청군 장수는 뒤이어 휘몰아친 충격파에 장난감처럼 몸이 날아갔고, 포탄이 터지면서 사방으로 튄 불꽃은 홍이포 옆에 잔뜩 쌓아 둔 화약 상자에 옮겨붙으며 유폭을 일으켜 엄청난 불기둥을 만들어 냈다.

콰콰쾅!

커다란 화염과 폭음에 일부 병사들은 깜짝 놀라 엉덩방아를 찧었고 말들도 앞발을 들어 올리며 날뛰었다.

예친왕이 탄 군마도 예외는 아니었는데 흥분해서 거칠게 두레질을 하는 걸 겨우 달래서 진정시켰다.

이히히힝.

“워, 워.”

고개를 돌려 폭발이 일어난 곳을 본 예친왕은 포격을 받은 홍이포뿐 아니라 유폭이 일어나며 삼십 보 간격으로 나란히 붙은 화포 서 문이 한꺼번에 다 박살 난 데다, 주위에 있던 병사들까지 휩쓸려 죽은 것을 보고 얼굴을 와락 구겼다.

“젠장! 빨리 조선군 화포부터 무력화시키지 않고 뭘 하는 거야!”

“애를 쓰고 있지만 단단한 포루 안에 들어가 있어서 여의치 않은 모양입니다.”

왕태봉의 말에 예친왕은 앞에 보이는 높다란 포루를 노려보며 짧게 혀를 찼다.

“쯧, 그래서 이렇게 당하고만 있을 거야? 제아무리 튼튼하게 지었어도 계속해서 두드리다 보면 무너지게 되어 있어. 포루를 집중 공격하라고 해!”

전투에 이기기 위해서는 원거리에서 포탄을 날려 대는 화포부터 제압해야 된다는 것에 이의가 없었기에 왕태봉은 군말 없이 머리를 숙였다.

“옛.”

예친왕의 지시가 아니더라도 청군 포병대는 자신들이 살아남기 위해서 모든 화력을 포루에 집중시켰고, 이건 조선군도 마찬가지였다.

쉬우우웅!

꽈꽝! 꽝!

격렬한 포격이 오가는 가운데, 화포 숫자도 많고 거북이 등껍질처럼 단단한 포루에 보호를 받는 조선군이 조금씩 우세를 잡으며 청군 홍이포를 하나씩 침묵시켜 갔다.

이처럼 서로 상대를 먼저 제압하기 위한 포병대의 피 말리는 포격전이 계속되는 한편, 성벽을 두고 벌어지고 있는 양측 보병들 간의 싸움도 이에 못지않게 아주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채채챙! 챙! 챙!

“으악!”

“큭.”

그사이 운제雲梯 같은 공성병기를 수십 대나 만들어 낸 청군은 말과 인력을 써서 성벽 아래까지 끌고 간 뒤 긴 사다리를 펼쳐 성을 공략했다.

“방포하라!”

타타탕! 탕! 탕!

이에 맞서 조선군이 신형 조총과 화살을 쏴 상대를 공격했지만 청군은 그동안 당한 걸 교훈삼아 두꺼운 나무에 철판을 덧댄 커다란 직사각형 방패를 들고 전진해 왔다.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와 고통에 찬 비명이 난무했고, 높다란 성벽은 병사들이 흘린 피로 붉게 물들었다.

도현이 있는 문루 앞에서도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적이 성벽 위로 한 발자국도 올라오지 못하게 막아라!”

화살이 문루 위까지 날아오는 위험한 상황이었지만 도현은 아랑곳하지 않고 손에 든 장검을 이리저리 휘두르며 전투를 독려했다.

그런 도현의 등 뒤로 국왕을 상징하는 커다란 봉황기가 때마침 불어오는 바람에 힘차게 나부꼈다.

한편 말을 탄 채 전투 상황을 지켜보던 예친왕은 홍이포까지 투입해 공격을 하고 있음에도 조선군의 방어가 좀처럼 깨질 기미가 보이지 않자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는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야골타.”

“예, 섭정 전하.”

“자네가 팔기군을 끌고 가서 성문 위에 황룡기를 꽂도록 하게.”

황룡기는 청나라를 상징하는 깃발로 금색 바탕에 한 마리의 용이 그려진 모양이었다.

“알겠습니다.”

눈을 번득이며 짧게 대답한 야골타는 한쪽에서 대기하고 있는 팔기군 병사들 앞으로 말을 몰아갔다.

그러고는 허리에서 장검을 뽑아 들며 크게 소리쳤다.

“섭정께서 심양성을 되찾아 오길 원하신다.”

지금까지 계속 전투를 벌이느라 지친 한족 병사와 달리 전력을 유지하며 휴식을 취했던 팔기군 병사들은 가지고 있던 병장기를 위로 치켜들며 호응했다.

“우오!”

비록 공성전을 위해 말에서 내렸지만 정예들답게 전의가 뜨겁게 불타오르는 얼굴로 금방이라도 성을 함락시켜 버릴 듯한 기세였다.

“돌격! 조선 놈들한테 팔기군의 무서움을 보여 주자!”

“와아아!”

야골타가 장검을 앞으로 쭉 뻗으며 돌격 명령을 내리자 삼만에 달하는 팔기군 병사들이 함성을 내지르며 달려 나갔다.

어느 한쪽으로 기우는 것 없이 팽팽한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팔기군의 가담은 전장 분위기를 급격히 요동치게 만들었다.

“전하, 팔기군이 움직였사옵니다.”

남두병 장군의 다급한 외침에 고개를 든 도현은 새까맣게 몰려오는 팔기군의 모습에 낮게 침음을 내뱉었다.

“으음.”

“예친왕이 승부수를 띄운 것 같습니다.”

그러자 도현은 콧방귀를 끼며 말했다.

“흥, 그래 봤자 성을 함락시킬 수는 없을 것이야.”

“맞사옵니다.”

팔기군쯤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이야기했지만 속으로는 신경이 쓰이는지 도현은 손에 든 지휘봉을 꽉 움켜쥐었다.

그사이 성벽 아래에 도착한 팔기군은 제일 취약한 성문을 집중적으로 공략했다.

“성문을 부숴라!”

커다란 도끼를 들고 온 팔기군 병사들은 대여섯 명이 한꺼번에 서서 나무로 만들어진 성문을 마구 찍어 댔다.

쿵! 쿵! 쿵!

“읏차! 읏차!”

도끼를 머리 위로 치켜들었다가 힘껏 내려칠 때마다 나무 조각이 사방을 튀며 성문에 흠집이 푹푹 파였다.

“이런, 적이 성문을 열지 못하도록 막아라!”

도현이 소리치자 총병과 궁수들이 아래에 몰려와 있는 팔기군을 향해 사격을 가했다.

타타타탕! 타탕!

슈슈슉! 슉!

총탄과 화살이 마구 쏟아졌지만 팔기군 병사들은 이런 경우에 대비해 커다란 사각 방패를 머리 위로 들고 있어서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

간혹 총탄이 방패를 뚫거나 틈새로 들어온 화살에 몇몇 팔기군 병사들이 피를 뿌리며 쓰러졌지만 상대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성문을 부수어 나갔다.

얇은 철판을 겉에 덧대 단단히 보강했지만 이대로 놔두면 일각도 못 버티고 성문이 뚫릴 것 같았다.

“저런!”

아래를 내려다본 도현은 다급한 목소리로 옆에 있는 남두병 장군을 불렀다.

“남 장군.”

“말씀하옵소서.”

“성문이 뚫려서는 절대 안 되오. 당장 비격진천뢰를 써서 밑에 있는 적을 모두 날려 버리도록 하시오!”

“옛.”

짧게 대답한 남두병 장군은 뒤로 몸을 돌려 근처에 있던 군관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압록강 전투에서 많이 써 버려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었지만, 언제 성문이 깨질지 모르는 급박한 상황이었기에 아끼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잠시 후 병사들이 검은색에 커다란 쇠공 모양의 비격진천뢰 두 발을 가지고 올라왔다.

“심지를 조정하고 어서 밑으로 집어 던져라.”

“네.”

유혁연의 말에 병사들은 목곡에 감긴 화약선을 최대한 짧게 조정해서 내부에 다시 집어넣고 뚜껑을 닫았다.

그리고 바로 삐죽 튀어나온 심지에 불을 붙이고는 지체 없이 성문 아래로 집어 던졌다.

“이거나 먹어라!”

휘이익.

거무튀튀한 비격진천뢰가 중력의 법칙에 따라 떨어지자 적병들은 돌덩이인 줄 알고 분분이 옆으로 피했다.

퍽.

묵직한 소리를 내며 땅바닥에 박힌 비격진천뢰를 본 적들은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게 뭐야?”

“글쎄.”

겉보기에는 포탄처럼 생겼는데 터지지도 않고 사람이 직접 손으로 집어 던졌으니, 비격진천뢰를 본 적이 없는 대부분의 적들은 요상하다는 시선으로 바라봤다. 하지만 지금은 전투 중이라 호기심을 풀 만큼 한가로운 상황이 아니었기에 이내 관심을 끄고 성문을 공격하는 데 집중했다.

“뭔지는 몰라도 정통으로 맞으면 바로 골로 가겠군.”

“그러게.”

“뭣들 하는 거야! 불발탄 따위에 신경 쓰지 말고 전투에 집중해!”

그 순간 내부에 넣어 둔 시한장치가 다 타들어 간 비격진천뢰가, 천지가 요동치는 듯한 폭음을 울리며 폭발했다.

꽈아아앙!

환한 섬광과 함께 사방으로 쏟아진 파편에 아무것도 모르고 반경 사십 보 안에 있던 적들은 피투성이가 되어 날아갔다.

“으아악!”

“큭.”

시야를 가리던 희뿌연 화약 연기가 바람에 날려간 뒤 드러난 광경은 참혹하기 이를 데 없었다.

주인을 잃은 팔다리가 아무렇게나 나뒹굴었고, 파편에 맞아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적병들이 고통을 호소하며 벌레처럼 흙바닥을 기어 다녔다.

그걸 본 팔기군 병사들은 큰 충격을 받았지만 슬퍼할 여유도 없이 다시 날아오는 총탄과 화살에 허둥지둥 방패를 들어 올려야 했다.

여기저기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고, 적병들은 피칠갑이 된 채 꼬꾸라졌다.

이쯤 되면 물러갈 만도 했지만 야골타는 오히려 더욱 강하게 부하들을 몰아붙였다.

“도망치는 놈들은 내가 직접 목을 베겠다. 쉬지 말고 공격해라!”

그냥 말뿐인 협박이 아니라 실제로 팔뚝에 빨간 띠를 맨 독전대를 뒤에 배치해서 적병들이 공격을 머뭇거리거나 도망치지 못하게 막았다.

이러다 보니 계속해서 비격진천뢰를 다섯 발이나 더 터트려 상대편에 피해를 입혔음에도 불구하고 끈질기게 달라붙어 도끼질을 해 댄 팔기군은 결국 성문을 부수고 말았다.

우지끈.

꽈앙!

“됐다!”

부서진 성문으로 팔기군 병사들이 물밀 듯 쏟아져 들어갔다.

그렇지만 다행스럽게도 청군이 나타나기 전에 미리 쌓아 둔 옹성 입구만 부서졌을 뿐, 본래 성문은 아직 건재하게 남아 있었기에 적군이 성안으로 바로 들어오는 것은 막을 수 있었다. 하지만 안심할 수만은 없었다.

적군의 기세로 볼 때 성문이 얼마나 버텨 줄 수 있을지 장담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전투 상황을 지켜보던 예친왕은 드디어 옹성 입구가 뚫리며 답답하게 진행되고 있는 공성전을 타계할 기회를 포착하자 예비대까지 모두 투입하는 초강수를 두었다.

“와아아!”

“봐라! 이제 조금만 더 두드리면 성을 함락시킬 수 있다. 남은 성문마저 깨부수고 안에 있는 조선군을 모조리 다 도륙해라!”

잔뜩 고무된 예친왕의 외침에 야골타는 팔기군 병사들을 성문 쪽으로 꾸역꾸역 밀어 넣었다.

어느새 좁은 옹성 안이 팔기군 병사들로 가득 들어찬 가운데, 적들은 또다시 도끼로 굳게 닫혀 있는 성문을 마구 찍어 댔다.

성벽 아래와 성문 주위에는 이미 죽은 시신들로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지만, 적군은 이제 지겹게 이어지던 공성전의 끝이 보인다는 생각에 마지막 남은 힘을 모두 쥐어 짜내며 성을 공략했다.

이대로 적군의 진입을 속수무책으로 허용하며 지금까지 잘 버텨 오던 조선군이 무너지는 것처럼 보이는 순간, 반전이 일어났다.

팔기군이 금방이라도 성문을 깨 버릴 듯 거센 기세로 달려드는데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서서 문루를 지키고 있던 도현은 지휘봉을 높이 치켜들며 목이 터져라 크게 외쳤다.

“지금이다, 쏴라!”

그러자 문루와 옹성 성벽 위에서 대기하던 총병들이 일제히 몸을 일으켜서 아래에 몰려 있는 적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타타탕! 타탕! 탕! 탕!

귀청을 찢는 요란한 총성이 울렸고, 문루와 옹성이 짙은 화약 연기에 뒤덮여 잠시나마 보이지 않을 만큼 많은 총탄이 발사됐다.

“재장전, 발사!”

군관의 지시를 들으며 재빨리 장전을 끝낸 총병들은 이 탄을 쐈고, 그 뒤로도 쉬지 않고 계속 동작을 반복하며 총탄을 날려 댔다.

화약 연기 때문에 밑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워낙 많은 적병들이 웅성 안에 들어와 있었기에 딱히 조준할 필요도 없이 쏘면 맞게 되어 있었다.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 총성에 섞여 비명이 연이어 들려왔다.

“끄악.”

“컥!”

“사, 살려 줘.”

사방에서 비처럼 쏟아지는 총탄에 팔기군은 한 번에 수십 명씩 피를 뿌리며 시체로 변해 흙바닥에 나뒹굴었다.

어디로 몸을 숨길 곳도 없는 데다가 움직이기도 힘들 정도로 빽빽하게 몰려 있는 팔기군은 고스란히 총탄을 다 맞으며 살아 있는 표적이 됐다.

이렇게 대학살이 벌어지고 있는 줄도 모르고 야골타는 병사들을 다그쳐 웅성 안으로 꾸역꾸역 밀어 넣었다.

무질서하게 좁은 웅성 입구를 지나 안으로 들어온 팔기군 병사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날아오는 총탄에 비명을 지르며 그 자리에 쓰러졌다.

완전히 개미지옥이 따로 없었는데, 겨우 안쪽 상황을 알아차리고 청군 지휘관들이 돌입을 중단시켰을 때에는 이미 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옹성 내부가 죽은 팔기군 병사들의 시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뭐가 기다리고 있는 줄도 모르고 뛰어 들어갔던 천인대 하나가 고스란히 전멸당한 것이다.

청군의 수난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는데 지금이 승부처라고 판단한 도현은 여태까지 쓰지 않고 아껴 둔 신기전을 쏴 잠시 주춤거리고 있는 적을 타격했다.

“발사!”

성안에 방열해 놓은 화차 마흔 대가 신기전을 일제히 쏘아 올리자 엄청난 화약 연기가 주위를 뒤덮었다.

짙게 깔린 화약 연기 사이로 포수들은 한쪽에 세워 둔 수레에서 새 신기전을 가져와 발사가 끝난 화차에 재장전했다.

쉬이이익! 쉬쉭! 쉬이이익!

화포처럼 요란하지는 않지만 섬뜩한 소리를 내며 공중으로 날아오른 신기전 수천 발은 포물선을 그리며 성벽을 넘어가 청군의 머리 위에서 폭발했다.

퍼펑! 펑! 펑!

그러자 화살대 아래에 달려 있던 긴 원통에서 작은 쇠구슬 수천 수백 개가 쏟아져 나와 청군을 덮쳤다.

후두두둑.

“헉!”

“꾸엑.”

쓰러진 적병들 중 머리나 심장 같은 치명적인 곳에 파편이 박혀 즉사한 자들은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은 살려 달라고 울부짖으면서 고통 속에 피를 흘리며 흙바닥을 기어 다녔다.

화차 부대는 연달아 세 번이나 발사해 무려 사천 발이나 되는 신기전을 청군에 퍼부었다.

이것만으로도 상대편의 기세를 꺾어 놓기에 충분했지만, 조선군은 여기서 만족하지 않았다.

“청나라 놈한테 뜨거운 맛을 보여 줘라. 방포!”

최진석의 명령에, 치열한 포격전 끝에 청군 홍이포를 모두 침묵시킨 조선군 화포들이 다시 불을 뿜어 대기 시작했다.

꽝! 꽝! 꽝! 꽝!

포격을 받아 여기저기가 부서졌지만 그래도 아직 건재한 포루에서 발사된 수십 발의 포탄은 가뜩이나 신기전으로 인해 너덜너덜해진 청군을 마구 유린했다.

특히 조선군이 쓰는 포탄은 흙바닥에 박히는 단순한 쇠공이 아니라 내부에 화약을 잔뜩 채운 것이어서, 터지면 영향권 안에 있는 적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다.

엄청난 진동과 충격이 청군을 엄습했고, 날카로운 파편은 사방으로 튀어 적병들을 찢어발겼다.

충격이 얼마나 큰지 마치 땅이 다 뒤집히는 것 같았다.

우르릉! 꽈아앙!

쿠쿵!

“으, 으아아악!”

“제발 살려 줘.”

“큭.”

적병들 사이에 포탄이 떨어져 터지자 어떤 이는 머리가 날아가고 다른 병사는 파편이 온몸에 박혀 즉사했다.

충격파에 허공으로 떠오른 적병들은 한참 멀리 튕겨 나가 그대로 땅바닥에 패대기쳐졌다.

“동요하지 말고 계속 조선군과 싸워라!”

말 위에 탄 야골타가 손에 든 장검을 이리저리 휘두르며 목이 터져라 고함을 질러 댔지만, 그보다 더 큰 폭음에 묻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설사 야골타의 외침이 들렸다고 해도 이미 기세가 꺾인 적병들이 그의 뜻대로 움직일 가능성은 적었다.

그 정도로 각종 화포와 신기전 그리고 총병들까지 총동원해 마치 보유한 화약을 다 써 버리기라도 할 듯 마구 뿜어 대는 조선군의 화력은 무시무시했고, 상대편에 큰 공포를 안겼다.

꽝하고 폭음이 나는 곳에 살아남은 생명은 아무도 없었다.

폭발은 적병들을 삼켰고 이내 그들에게 죽음을 선사했다.

“도, 도망쳐야 돼!”

“흐익.”

두려움을 견디다 못한 청군 몇몇이 비명을 질러 대면서 뒤로 몸을 돌려 달아났다.

“이 비겁한 놈들, 당장 멈추지 못할까!”

분노한 야골타가 당장 쫓아가 때려죽일 듯 노호성을 터트렸지만 도망병들은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그러자 공포가 삽시간에 퍼져 나가, 후퇴 명령이 없었는데도 한족 병사는 물론이고 정예인 팔기군까지 너도나도 자기 진영으로 도망쳤다.

허둥지둥 도망쳐 오는 병사들의 모습에 예친왕은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소리를 내질렀다.

“도망치지 말고 싸워! 싸우란 말이다!”

그러나 이미 모래성처럼 무너지기 시작한 전열을 수습하는 건 쏟은 물을 다시 주워 담으려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예친왕의 노호성에도 불구하고 병사들의 이탈이 계속되자 그의 화는 하늘 끝까지 치솟았다.

“천하에 쓸모없는 버러지들 같으니……!”

그는 주위에 있는 장수들을 돌아보며 크게 손을 들어 명령했다.

“도망치는 병사는 모조리 베어 버려라!”

“하, 하오나.”

“저들 전부를 말씀입니까?”

“그래. 뭣들 하고 있나? 어차피 저런 겁쟁이들은 있어 봤자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

예친왕이 흥분해서 외치는 말에 장수들은 당황해서 그를 만류했다.

“앞서 도망치는 자들을 죽여 봤자 다른 사람이 뒤를 이을 뿐입니다. 지금은 일단 고정하시고 병사들을 추슬러 전열을 재정비하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상황을 되돌리기에는 이미 늦었다.

한둘도 아니고 공격에 나섰던 병사들 전부가 도망쳐 오고 있는데 그들을 다 죽이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미 승기는 조선군에게 넘어갔다는 것을 누구나 깨닫고 있는 가운데, 예친왕만이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격한 분노를 가슴에 품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 무슨 치욕인가!”

한낱 소국에 불과하다며 조선을 눈 아래에 두고 얕보던 예친왕에게 있어 이보다 더한 모욕은 없었다.

젊은 시절부터 그는 전쟁터에 나서면 항상 앞에 나가서 장군들을 진두지휘하며 싸웠고, 전략적 후퇴는 있었어도 결코 적에게 등을 보이는 꼴사나운 행동을 한 적은 없었다.

그런데 오늘의 이 추태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빠각!

너무 힘을 준 탓에 예친왕이 손에 들고 있던 지휘봉이 뚝 하는 소리를 내며 반으로 쪼개졌다.

그는 바닥을 후려치듯이 지휘봉을 내던지고는 말고삐를 움켜쥐고 돌아섰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여기서 더 버티는 건 무의미했다.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예친왕은 쉽사리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섭정 전하!”

“숙영지로 돌아간다!”

히이잉!

애마가 길게 울음소리를 내며 앞발을 위로 들어 올렸고, 예친왕은 그 한마디 말만 남긴 채 성난 몸짓으로 숙영지를 향해 내달렸다.

예친왕이 결단을 내리고 사라지자 다른 청군 장수들의 행동은 재빨랐다.

“후퇴! 후퇴한다!”

사방에서 깃발이 마구 휘날리고, 목이 터져라 외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난무했다.

한편 문루에서 전투를 지휘하던 도현은 지독하게 공격을 해 대던 청군이 무수히 많은 시신만을 남긴 채 썰물처럼 뒤로 물러서자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오늘도 성을 지켜 냈군.”

지금까지 공성전을 벌여 오면서 가장 격렬하면서도 힘든 전투였다.

중간중간 방어선이 무너질 뻔하는 위기의 순간들이 찾아올 때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지만 병사들이 열심히 싸워 준 덕분에 모두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공을 들여 준비한 회심의 일격이 실패로 돌아갔으니, 자존심 강한 예친왕의 성격으로 미루어 본다면 아마 지금쯤 화병이 나기 일보 직전일 것이다.

오만함과 자만심으로 똘똘 뭉쳐 있는 예친왕의 표정이 종잇장처럼 구겨지는 것을 직접 구경하고 싶었는데 사뭇 아쉽게 되었다고 생각하며 도현은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전하, 청군이 물러나고 있습니다!”

함께 전투를 치른 장수들이 쾌재를 울리며 들뜬 목소리로 고했다.

“승리를 거두신 것을 감축드리옵니다, 전하!”

“이제 청군의 기세도 주춤하겠군요.”

“오늘의 승리는 모두 다 전하 덕분입니다!”

온갖 축하가 쏟아지는 가운데 남두병 장군이 도현에게 말했다.

“이렇게 크게 당했으니 이제 쳐들어올 엄두를 못 낼 겁니다. 한동안은 다시 소강상태가 이어지겠군요. 차라리 포기하고 이대로 물러나 줬으면 제일 좋겠습니다만…….”

“과연 그럴까?”

아직 낙관하기에는 이르다는 표정으로 도현이 답했다.

“청군이 어찌 나올지는 아직 더 두고 봐야지. 예친왕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상대하기 까다로운 인물일세.”

그러면서 도현은 뒷짐을 진 자세를 풀고, 바람에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 넘기며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막 전투가 끝나 힘들겠지만, 사상자들을 수습하고 부서진 방어 시설을 속히 다시 복구하도록 하게.”

“옛.”

장수들의 대답을 들으며 도현은 무거운 얼굴로 방금 전까지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전장을 둘러봤다.

매캐한 화약 냄새가 코를 찌르는 가운데, 성벽 아래는 말 그대로 시산혈해를 이루고 있었다.

시신의 대부분이 성한 데 없이 갈가리 찢겨 있었고 피가 흘러 누런 흙바닥을 온통 붉게 만들었다.

조선군도 승리를 거두기는 했지만 피해가 컸는데 여기저기에 병사들이 부상을 입고 힘없이 성벽에 기대 앉아 있었고 방어 시설도 망가진 곳이 눈에 보였다.

특히 가장 전투가 치열했던 성문 옹성 안은 살아 있는 자보다 시신이 훨씬 더 많을 정도였다.

다들 지친 기색이 역력했지만 부상당한 동료를 한 명이라도 더 살리기 위해서 병사들은 부상병을 들것에 실거나 부축해 내성에 있는 치료소로 데려갔다.

그리고 아군 전사자들을 정성스럽게 수습해 성안 공터에다 임시로 가매장을 했고 적군 시신은 전염병이 도는 것을 막기 위해 한쪽에 모아 화장하며 전장을 수습했다.

이날 전투로 청군은 무려 사만 명에 달하는 사상자가 발생했다. 인명 피해도 컸지만 무엇보다 그동안 쓰지 못했던 홍이포는 물론이고 최정예인 팔기군까지 투입하고도 심양성을 함락시키지 못했다는 것에 청군의 사기는 그야말로 바닥까지 떨어지고 말았다.

거기다 그냥 진 것도 아니고 조선군 앞에서 병사들이 지휘관의 통제에 따르지 않고 겁에 질려 명령도 없이 마음대로 후퇴해 버리는 추태까지 벌였기에 예친왕의 분노는 더 극에 달했다.

마음 같아서는 명령을 듣지 않은 병사를 전부 처형해 버리고 싶었지만 그러기에는 숫자가 너무 많았다.

그래서 대신 제일 먼저 등을 돌리고 도망친 병사 이백 명을 잡아낸 예친왕은 숙영지 한가운데 모든 병력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그들의 목을 베어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엄단했다.

그러고는 재정비가 필요하다는 장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고집을 피워 바로 다음 날부터 공성전을 재개했다.

하지만 지칠 대로 지치고 사기마저 바닥을 기는 청군은 처음처럼 예리한 공격을 할 수가 없었고, 그 상태로 피해만 계속 늘어갔다.

명의 새로운 황도인 남경.

비운의 숭정제崇禎帝가 예친왕이 이끄는 청나라 군대에 쫓겨 도망친 끝에 안식처로 삼은 도시다.

주작단 소속으로 남경에서 활동 중인 김하방은 널찍한 비단옷 소맷자락을 펄럭이며 네모반듯한 포석 위를 잰걸음으로 걷고 있었다.

현재 남경에서 그는 상당한 위치에 있었는데, 본래대로라면 감히 황제를 알현하는 것을 청할 수도 없는 신분이지만 숭정제가 북경을 탈출할 때 그의 도주를 적극적으로 도왔고, 남경에 정착하기까지 여러모로 손을 써 준 인연이 있었기에 자유롭게 황궁을 들락날락하며 소위 말하는 측근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관직을 하사할 테니 출사하는 것은 어떠냐는 제의를 받은 적도 있지만, 김하방은 상인이 그의 천직이라며 끝끝내 고사했다.

이렇게 갑자기 급부상한 그를 탐탁지 않게 여기며 시기하는 자들도 몇 명 있었으나 그건 극소수였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황제의 총애를 받는 김하방을 부러워하며 친하게 지내고 싶어 했다.

이런 배경을 이용해 그는 여러 가지 이권 사업에 뛰어들어 몇 년 만에 남경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거상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태감 어른, 그동안 건강하셨습니까.”

“아니, 이게 누군가? 어서 오시게.”

새로운 황궁 바깥에 있는 태감의 저택을 찾은 김하방은 대문을 열어 준 하인에게 이름을 밝히자마자 곧장 안채로 안내되었다.

태감이 사는 저택은 크고 넓은 마당과 안채를 중심으로 양옆에 별채가 세워져 있는 형태였는데, 고관대작이나 남경 최고 부자의 저택과 견주어도 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훌륭한 집이었다.

마침 안채에서 쉬고 있던 태감은 읽고 있던 책을 덮고 일어나 김하방을 반갑게 맞이했다.

“어서 앉게. 자네 얼굴을 보는 게 오랜만인 것 같네그려.”

“장사를 하느라 남경을 잠시 떠나 있었습니다.”

“그래, 그래. 내 들은 기억이 나는군.”

태감은 잔주름이 진 눈을 깜박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이번엔 뭘 하고 왔나?”

“평소랑 비슷합니다. 광동성에 풍년이 들어 거기서 쌀을 매수하고 왔습니다. 그리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뭐 돈이 될 만한 것이 없나 살폈습지요.”

“하하하! 대륙이 좁다 하고 돌아다니는 자네가 부럽네. 그런데 자네 얼굴을 보니 나한테 뭔가 할 말이 있는 것 같구먼?”

황궁에서 오랫동안 황제를 모시며 보낸 세월은 헛것이 아니라는 듯, 태감이 예리한 눈길로 지적하자 김하방은 숨기는 것도 없이 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역시 태감 어른은 못 속이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김하방은 작은 보따리 하나를 들어 올렸다.

“이건 태감 어른께 드리는 선물입니다.”

“아니 뭘 이런 걸.”

태감은 생각지도 못한 선물에 놀란 듯 기쁜 표정을 지으며 보따리를 풀었다.

단단한 목합 안에 족히 어른 팔뚝만 한 굵은 인삼들이 열 개는 넘게 들어 있었는데, 그 안에서 풍겨 나오는 향기가 너무나도 그윽해 저도 모르게 코를 벌름거렸다.

“이건 인삼이 아닌가?”

태감직에 있으면서 황궁에 진상되는 별의별 물건들을 다 보아 온 그는 한눈에 김하방이 들고 온 물건의 정체를 알아채고 감탄하듯 말했다.

“게다가 다들 품질이 최상급 정도는 되어 보이는군. 이렇게 좋은 물건은 손에 넣기 힘들었을 텐데.”

“인삼 중에서도 제일 효능이 좋은 게 조선 삼이지요. 마침 아는 상인이 가지고 있다는 말에 태감 어른이 생각나 사들였습니다.”

“이런 걸 내가 받아도 되나 모르겠군.”

“오래오래 장수 무강하시라고 드리는 것이니 사양하지 마십시오.”

“하하, 내 그럼 고맙게 잘 받겠네.”

태감은 싱글벙글 웃는 낯으로 인삼 보따리를 챙겼다.

안 그래도 나이가 많은 데다 이런저런 일이 많아 심적으로 부담이 컸는지 요즘 부쩍 기력이 쇠한 듯한 느낌이 들었는데, 김하방이 어찌 알고 눈치 빠르게 인삼을 갖다 주니 오늘 당장이라도 달여서 먹을 생각이었다.

“그래, 이번에 밖에 나가서 들은 이야기 중에 뭐 재밌는 소문 같은 건 없나?”

화제를 바꿀 요량으로 태감이 묻자, 김하방은 기다렸다는 듯 탁자에 바짝 다가앉았다.

“안 그래도 태감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게 뭔가?”

“조선이 청과 전쟁을 벌이고 있다는 것은 알고 계십니까?”

“음, 금방 끝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지금까지 전쟁이 이어지는 걸 보면 조선이 잘 버티고 있는 모양이더군.”

“태감께서도 알고 계셨군요.”

“아무렴, 나도 눈이 있고 귀가 있는데 그 정도로 큰 소란을 어찌 모르겠는가? 특히 상대가 무엄하게도 오랑캐 주제에 북경을 차지하고 있는 청이니 신경을 쓰지 않을 수가 없지.”

태감이 신경을 쓰고 있는 건 단지 그 이유 하나 때문은 아닐 것이다.

당시 반란이 크게 일어나긴 했어도 섭정왕이 군대를 이끌고 들이닥치지만 않았더라면 북경에서 그리 초라하게 내몰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황제라는 만인지상의 지위에 앉은 자가 목숨을 위협당하며 맨몸으로 거리를 뛰어다니게 만들다니.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는 괴로운 기억을 만들어 준 자가 바로 섭정왕이었으니 지금도 악감정을 품고 있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태감께서 상황을 파악하고 계시다면 이야기가 빠르죠.”

김하방은 마른 입술에 침을 바르고 말을 계속 이었다.

“지금이 바로 하늘이 내려 준 기회라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그게 무슨 말인가?”

“섭정왕은 휘하의 거의 모든 병사들을 데리고 심양에서 조선군을 상대하고 있습니다. 뛰어난 무력을 자랑하는 장수들은 물론, 창이나 칼 같은 병장기와 화약도 전부 다 짊어지고 갔단 말이지요.”

그제야 태감은 김하방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를 깨닫고 눈을 번뜩였다.

“자네, 설마.”

“그렇습니다.”

김하방은 고집스러운 눈빛으로 태감을 마주 보았다.

“사냥개가 집을 비웠으니 북경은 그야말로 무주공산이나 다름없죠. 누구든지 먼저 치는 사람이 승기를 잡을 것입니다.”

“하지만.”

팔기군에 워낙 크게 당해서인지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태도를 보이는 태감을 김하방이 끈질기게 설득했다.

“빈집 털이를 하려면 지금이 바로 적기입니다. 망설이는 순간 진 거라고 생각하고 누구보다 재빨리 움직여서 섭정왕의 뒤통수를 쳐야만 합니다. 그리하면 그동안의 치욕을 설욕하는 것은 물론, 명의 깃발을 다시 중원에 휘날리는 것도 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처음엔 미심쩍은 얼굴로 김하방의 말을 듣고 있던 태감의 표정이 서서히 변화했다.

그 역시 청의 뒤통수를 쳐서 지금까지 수세에 몰리기만 했던 상황을 단번에 역전시키는 걸 한 번도 상상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청나라의 막강한 군세를 상대해야 한다는 것이 항상 걸림돌이었기에 김하방의 말은 엄청난 유혹으로 다가왔다.

한참을 고심하던 태감은 이내 고개를 작게 끄덕이며 말했다.

“무슨 이야기인지 알겠네. 내일 입궁하는 대로 폐하께 말씀드리도록 하지.”

“잘 생각하셨습니다. 저, 그리고…….”

말을 살짝 끌던 그는 상인다운 약삭빠른 표정을 드러내고는 은근한 목소리로 앞에 있는 태감을 보며 입을 열었다.

“만약 황상께서 결단을 내려 군대가 출진한다면, 보급 물자를 공급할 군상軍商은 저에게 맡겨 주실 수 없겠습니까?”

“뭐? 하하! 이 사람, 이제 보니 이걸 노린 거군.”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황제 폐하와 명을 위하는 충심에서 드린 이야기입니다. 다만 어차피 필요한 군상이라면 제가 맡아서 미력하나마 북경을 되찾는 데 도움이 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천연덕스러운 김하방의 대꾸에 태감은 그제야 속이 시원한 표정을 지었다.

김하방이 뭘 노리고 이런 제의를 하는지 의심스러웠는데, 그 속셈을 알고 나니 흐린 하늘에 잔뜩 끼었던 먹구름이 깨끗하게 걷히는 기분이었다.

“후후후, 뭐, 그렇다고 하세.”

“그럼 들어주시는 겁니까?”

“그거야 황제 폐하의 뜻에 달려 있지 않겠나? 하나 폐하도 싫다고 하지는 않으실 걸세. 물론 그 전에 전쟁을 할지 안 할지부터 결정해야 되겠지.”

그러자 김하방은 쐐기를 박는 말을 했다.

“제게 군상을 맡겨 주신다면 이익금의 오 할을 드리겠습니다.”

“흠.”

오 할이라면 결코 나쁜 제의는 아니었다.

아니, 일단 전쟁이 벌어지면 엄청난 군비가 소모된다는 걸 생각해 보면 떡고물 정도가 아니라 한몫 단단히 잡을 수 있는 기회였다.

재빨리 머릿속으로 주판알을 두드린 태감은 시원하게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좋아, 내가 자네에게 목숨 값을 빚졌으니 그 정도는 해 줘야지.”

“감사합니다.”

머리를 숙인 김하방은 태감 모르게 살짝 입꼬리를 위로 말아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이빨 빠진 호랑이지만 어찌 됐든 명을 움직여 청나라가 조선과의 싸움에 전력을 다할 수 없도록 만들고 더불어 진짜 의도를 숨기기 위해 군상에 관심이 있는 척해 상당한 금전적 이득까지 챙기게 됐으니 이거야말로 일석이조, 도랑 치고 가재 잡는 격이었다.

한시도 청에 당한 치욕을 잊지 않고 오매불망 북경 자금성으로 돌아갈 날만을 벼르고 있던 숭정제는 태감의 이야기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군대를 일으킬 결심을 굳혔다.

일부 대신들이 아직 준비가 덜 됐다는 이유를 들며 반대했지만, 황제인 숭정제의 결심이 워낙 확고했고 화북 지역에 기반을 두고 피난을 온 대신들이 적극 찬성을 하면서 전쟁은 급물살을 탔다.

며칠 뒤, 청군의 남하를 막기 위해 양자강 근처에 나가 있던 하진 대장군에게 겨울이 지나면 북경으로 진군하라는 황제의 칙령이 떨어졌다.

머릿수만 많을 뿐이지 적군의 도강을 막아 내는 것도 벅찰 정도로 오합지졸인 병력을 이끌고 원정을 가라니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황제의 명령이었기에 하진은 어쩔 수 없이 일단 준비를 하는 척이라도 했다.

그러자 이런 움직임은 얼마 안 돼 강 건너편에 있는 청군에 포착됐고 바로 북경에 파발이 보내졌다.

소식이 전해진 북경은 발칵 뒤집혔다.

정말 쳐들어올지 아니면 그냥 간만 보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예친왕이 주력 병력을 대부분 빼내 간 데다 아직 작년의 반란이 완전히 진압되지 않고 불씨가 남아 있는 상황에서 명이 이런 조짐을 보인다는 것 자체가 큰 위협이었다.

예친왕과 그를 따르는 군부 세력이 전공을 세우는 걸 바라지 않았던 태후는 곧바로 어린 황제의 이름으로 심양성을 공략하고 있는 군대에 철군 명령을 내렸다.

무릎까지 푹푹 들어갈 정도로 눈이 쌓인 가운데, 청군은 오늘도 공성전을 벌이고 있었다.

“공격! 물러서지 말고 계속 밀어붙여라!”

“와아아!”

채챙! 챙! 챙! 챙!

뒤에서 전투를 독려하는 장수들의 외침을 들으며 앞으로 달려 나간 적병들은 두 달 가까이 계속 이어지고 있는 싸움에 피로 붉게 물든 성벽에 공성용 사다리를 걸치고 위로 기어 올라갔다.

“어딜 올라와!”

타탕! 탕! 탕!

“으아악!”

“큭.”

그런 적을 향해 성벽 위에 있던 조선군들은 걸쭉한 욕설을 내뱉으며 조총 방아쇠를 당기거나 활을 쐈다.

총성이 울릴 때마다 사다리를 올라오던 적병의 머리가 수박처럼 터져 나갔고 화살에 맞아 비명을 내지르며 밑으로 떨어졌다.

“다 뒈져 버려!”

도현 역시 문루 위를 지키고 서서 병사들을 지휘했다.

“북을 울리고 적이 성벽 위로 올라오지 못하게 막아라!”

뒤편에 있던 고수鼓手는 도현의 외침에 더욱 가열차게 북채로 대고를 두드렸다.

둥둥둥! 둥둥둥!

그러자 병사들은 전장 가득 울려 퍼지는 북소리에 힘을 내 적과 맞서 싸웠다.

청군은 끊임없이 성을 두드려 댔지만, 저번처럼 날카로운 예기는 보이지 않고 어딘가 힘이 빠져 있는 모습이었다.

늦은 오후가 되자 청군은 아무런 소득도 없이 성벽 아래 시신만 잔뜩 남긴 채 숙영지로 물러났다.

어둠이 내려앉은 저녁.

현재 청군이 처한 상황을 알려 주듯 숙영지는 활력 없이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꽝!

“벌써 며칠째야? 조선을 점령하는 건 고사하고 심양도 탈환하지 못해 전전긍긍하고 있다니 이게 무슨 창피냔 말이야!”

노발대발해서 예친왕이 고함을 지르자 지휘 천막 안에 모여 있던 장수들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대꾸도 못 하고 그저 죄인처럼 머리만 숙이고 있었다.

그런 모습이 예친왕을 더 화나게 만들었다.

“내 이야기가 말 같지 않은 거야?”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럼 왜 아무 대답이 없어!”

잔뜩 가시가 돋쳐 있는 말에 장수들은 머뭇거리다가 하나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조선군의 방비가 너무 견고합니다.”

“계절도 우리 군에 도움이 안 돼서 눈과 강추위에 보급이 원활하지 못하고 병사들 대부분이 감기에 걸려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한 명이 시작하자 기다렸다는 듯 여기저기서 이야기가 쏟아졌다.

그렇게 한참을 떠들어 대던 장수들은 상석에 앉아 있는 예친왕의 표정이 심상치 않은 걸 깨닫고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정색을 하고는 서늘한 눈빛으로 모여 있는 장수들을 쓸어본 예친왕은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지금 북경으로 철군이라도 하자는 거야?”

“그런 것이 아니오라…….”

시선을 받은 장수가 변명을 하려 하자 예친왕은 말을 끊으며 버럭 고함을 질렀다.

“지휘관이라는 자들이 이따위 나약한 생각을 가지고 있으니 병사들이 제대로 싸우지 않는 것 아닌가! 겨울에 전쟁을 해서 힘든 건 조선군도 마찬가지야. 그리고 애초에 이런 걸 다 감안하고 나왔는데 이제 와서 이러쿵저러쿵하는 건 변명에 불과해!”

단단히 화가 났는지 예친왕이 연신 손바닥으로 앞에 있는 탁자를 내려치자 장수들은 찔끔한 얼굴로 어깨를 움츠렸다.

사실 그도 여러 가지로 상황이 불리하다는 걸 모르지 않았지만, 다른 나라도 아니고 항상 발밑으로 여기던 조선군을 상대로 자신이 이렇게까지 고전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존심상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더 장수들을 다그치는 거였는데, 그렇게 짜증을 내고 있을 때 갑자기 입구가 열리며 군관 한 명이 다급한 표정으로 들어왔다.

한참 열을 올리고 있는 와중에 방해를 받은 예친왕은 따가운 시선으로 군관을 노려보며 날카롭게 말했다.

“뭐야!”

그러자 군관은 식은땀을 흘리면서 잔뜩 주눅이 든 얼굴로 입을 열었다.

“북, 북경에 계신 황제 폐하께서 칙사를 보내셨습니다.”

“칙사가 왔다고?”

뜻밖의 말에 예친왕은 한쪽 눈썹을 추켜올리며 되물었다.

“예.”

“으음.”

장수들도 모두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술렁이는 가운데 왕태봉은 정색을 하고는 예친왕을 바라봤다.

“갑자기 무슨 일로 칙사가 온 걸까요?”

“나도 모르지. 아무튼 황제께서 보낸 칙사를 기다리게 할 수는 없으니 안으로 데려와.”

“예.”

군관이 나가고 얼마 있지 않아 관복을 차려입은 중년 사내가 수행원들과 함께 천막 안으로 들어왔다.

“섭정께서는 황제 폐하의 칙서를 받으시오!”

비단 두루마리가 올려진 나무 쟁반을 받쳐 든 칙사의 외침에 예친왕은 의자에서 일어나 예를 갖췄다.

원래는 바닥에 머리를 세 번씩 박으며 절하는 걸 세 번 반복하는 삼배구고두례까지는 아니더라도 양쪽 무릎을 꿇고 경건한 자세로 칙서를 받아야 했지만 예친왕은 살짝 허리를 숙였다가 펴는 것으로 대신했다.

아무리 황족이라고 해도 대역죄로 큰 벌을 받을 수 있는 행동이었지만 예친왕은 거리낌이 없었고 주위에 서 있던 장수들도 당연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칙사마저 살짝 눈가를 찌푸릴 뿐, 딱히 지적하지 않았다.

아니 그럴 수 없었다는 것이 더 정확했는데 황제의 권위도 무시할 만큼 예친왕이 가진 힘이 크다는 방증이었다.

“만세, 만세, 만만세.”

칙사는 두루마리가 놓인 쟁반을 앞으로 내밀었다.

“받으시지요.”

두루마리를 집어 든 예친왕은 봉인을 풀고 그 자리에서 펼쳐 내용을 읽어 내려갔다.

이내 얼굴을 와락 구긴 그는 앞에 서 있는 칙사를 쳐다보며 물었다.

“이게 정말 황상…… 아니, 태후의 뜻인가?”

아무리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권력을 가진 예친왕이라지만 도를 넘어서는 말에 칙사는 짐짓 표정을 굳히며 말했다.

“무엄하십니다. 섭정께서 황족이시고 사사로이 황상의 숙부가 되신다지만 너무 말씀이 심하신 것 같군요.”

그러자 예친왕은 한쪽 볼을 실룩이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해!”

“…….”

안하무인격의 행동에 칙사는 내심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그렇다고 막강한 권력을 가진 상대를 꾸짖을 용기는 없었기에 불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칙서에 옥쇄가 찍혀 있으니 당연히 황제 폐하의 뜻이지요.”

“그렇단 말이지.”

아직 어린 황제가 이따위 칙서를 보낼 리가 없으니 결국 태후가 뒤에서 조종했다는 걸 예친왕은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었다.

뿌드득!

“좋은 게 좋은 거라고, 그동안 오냐오냐하며 숙여 줬더니 이제 내가 만만하게 보이는 모양이군.”

예친왕이 이를 갈며 말을 내뱉자 칙사는 얼굴을 굳혔다.

“폐하의 칙명을 거부한다면 반역이 됩니다.”

그러자 예친왕은 앞에 있는 칙사를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여기까지 오느라 힘들었을 테니 이만 물러가서 쉬도록 하게.”

못 들은 척 대답을 회피하는 예친왕의 태도에 칙사는 살짝 당황한 듯하다가 이내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모쪼록 현명한 결단을 내리시기 바랍니다.”

칙사로 보내진 이상, 확실한 대답을 듣기 전까지는 돌아갈 수 없었지만 여기서 당장 결정을 내리도록 예친왕을 몰아붙이는 건 아무래도 불가능했고 또 상대의 위치를 생각할 때 그럴 만한 입장도 아니었다.

만약 이 이상 밀어붙였다간 안 그래도 심기가 불편한 예친왕의 분노를 사 지금 이 자리에서 당장 목이 떨어져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물론 예친왕이 감히 황제가 보낸 칙사에게 손을 댈 리는 없겠지만, 군권을 쥔 그를 괜히 자극해서 상황을 더 악화시킬 필요는 없었다.

칙사가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나가자, 이내 너른 지휘 천막 안에 살얼음판 같은 침묵이 흘렀다.

“전하, 칙서에 뭐라고 적혀 있습니까?”

야골타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예친왕은 돌아서서 의자에 앉는 것과 동시에 신경질적으로 황제의 칙서를 탁자 위로 내던졌다.

“명군이 양자강을 넘어 북진해 올 조짐이 보이니 그만 전투를 끝내고 회군하라는군.”

“예에?”

“그럴 수가.”

충격적인 소식에 장수들은 하나같이 놀란 표정을 짓고는 크게 술렁였다.

한쪽에 서 있던 왕태봉도 정색을 하고는 상석에 앉아 있는 예친왕을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이대로 심양을 탈환하지 못하고 되돌아가야 하다니, 그건 절대로 용납할 수 없어!”

“그러면 황명을 거역하신 것이 됩니다.”

차마 반역이라는 말은 꺼내지 못하고 왕태봉이 돌려서 이야기를 하자 옆에서 듣고 있던 장수들의 안색이 굳어졌다.

예친왕도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장막 뒤의 실력자로 제국을 좌지우지 하는 것과 현 황제를 끌어내리고 직접 황좌에 앉는 건 완전히 다른 문제였기 때문이다.

아무리 충분한 힘을 가졌고 잘 포장한다고 해도 반역을 일으키는 건 여러 가지로 걸리는 것이 많았다.

그렇다고 이대로 황제를 내세운 태후의 말을 따르기에는 자존심이 상했고, 자칫 그동안 공고히 쌓아 온 권력 기반이 흔들리는 계기가 될 수도 있었기에 예친왕의 고민은 깊어졌다.

그런 예친왕의 눈치를 보며 왕태봉이 입을 열었다.

“이렇게 칙서까지 보내온 걸 보면 명군의 준동이 심각한 상태일 수도 있습니다.”

고개를 든 예친왕은 눈을 가늘게 뜨며 왕태봉을 바라봤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다른 의도가 숨어 있을지도 모르지만, 어찌 됐든 명군의 위협은 사실이고 솔직히 혹독한 겨울 추위와 보급이 원활하지 않아 더 이상 공성전을 지속하기도 어렵지 않습니까. 때맞춰 이렇게 칙서까지 내려왔으니 그냥 못 이기는 척 철군을 하시지요. 그리고 군대를 재정비하고 준비도 철저히 해서 다시 조선군을 상대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왕태봉의 이야기가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예친왕도 상황이 그다지 좋지 않다는 걸 잘 알고 있기에 한쪽 볼을 실룩이면서도 호통을 치지는 않았다.

그걸 보고 예친왕이 흔들리고 있다는 걸 알아차린 왕태봉은 좀 더 적극적으로 설득했다.

“황명을 어기고 계속 심양을 공략하다가 정말로 명군이 양자강을 넘어와 북경으로 진격해 온다면 그 후폭풍은 엄청날 것입니다.”

순간 예친왕은 얼굴을 살짝 구겼다.

태후가 중심이 된 반대파의 탄핵이나 모함은 무섭지 않았지만, 그의 평생의 꿈이 중원을 통일하는 거였기에 애써 차지한 화북 지역이 흔들리는 건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끄으응.”

“두 걸음 전진을 위해 한 걸음 뒤로 물러선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정국을 크게 보시고 이번에는 잠시 숨을 고른다 생각하시어 칙명을 따르십시오.”

그러자 예친왕은 고개를 옆으로 돌려 야골타를 보며 물었다.

“자네 생각은 어때?”

“원하시는 대로 하십시오. 전 전하의 뜻을 따를 뿐입니다.”

손가락으로 앉아 있는 의자 팔걸이를 툭툭 두드리면서 한참을 고심하던 예친왕은 마침내 결정을 내렸는지 고개를 들며 입을 열었다.

“황제의 명을 거역할 수는 없지. 철군 준비를 하도록 해.”

“잘 생각하셨습니다.”

왕태봉뿐만 아니라 그가 내심 어떤 결정을 내릴지 마음을 졸이던 장수들 대부분이 안도한 표정을 지었다.

반면 예친왕은 이유가 어찌 됐든 발아래로 보던 조선군을 이기지 못하고 쓸쓸히 물러나야 한다는 것에 큰 분노와 좌절감을 느끼며 참담한 얼굴을 했다.

이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계속된 전투에 지쳐 있던 청군 병사들은 철군 명령에 크게 환호했다.

때마침 눈도 그치고 맑은 날씨가 이어지는 가운데, 며칠 뒤 청군은 숙영지를 걷고 북경으로 철군하기 시작했다.

행군 대형으로 줄을 지어 이동하는 병사들을 뒤로한 채 말에 올라, 마치 철벽처럼 굳건히 서 있는 심양성과 높다란 문루 지붕에 바람을 맞아 나부끼는 조선군 깃발을 노려보던 예친왕은 평소의 냉철하던 그답지 않게 감정을 억제하기 힘들었는지 아랫입술을 꽉 깨물면서 나직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번에는 이렇게 물러서지만, 다음에 다시 오면 그때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성을 탈환하고 말 것이야.”

그렇게 스스로 다짐을 한 예친왕은 말 머리를 돌려 행군 대열에 합류했다.

심양성을 사이에 두고 무려 두 달하고도 보름 동안 계속된 전투는 이렇게 조선군의 승리로 끝이 났다.

이십만 대군을 동원했던 청군은 절반이 넘는 십삼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는데, 최정예이자 예친왕의 권력 기반인 팔기군도 이만 명 가까이 피해를 입었다.

뿐만 아니라 홍이포 마흔 문을 포함해서 어마어마한 분량의 물자와 군자금을 허공에 날리고 말았다.

돈으로 따지면 백만 냥에 달하는, 그야말로 억 소리가 나오는 액수였다.

문제는 이 모든 걸 청 황실이나 조정이 아니라 예친왕 혼자서 다 부담했다는 것이었다.

청나라를 한 손에 쥐고 흔드는 섭정왕부에서는 강아지도 황금 수저를 물고 다닌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로 그동안 막대한 부富를 쌓았지만, 이번 한 번의 패배로 상당 부분을 까먹게 됐다.

돈뿐만 아니라 야심 차게 추진한 전쟁에 패배하며 군부 내 지지도 흔들리는 등 여러모로 득보다 실이 많았다.

도현이 지휘한 조선군도 이만에 달하는 사상자가 생기며 만만치 않은 피해를 입었지만 청군에 비하면 아주 적은 것이었다.

조선 역시 인적, 물적 손실이 컸음에도 불구하고 웃을 수 있는 것은 예친왕의 공격을 막아 내면서 심양과 남만주 일대의 지배권을 공고히 하게 됐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전쟁이 완전히 끝난 건 아니었는데, 청나라가 존재하고 자신들의 근거지였던 만주를 되찾으려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 이상 심양은 양국 사이의 화약고가 될 수밖에 없었다.

<11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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