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건 그리고 복속 (55/104)

재건 그리고 복속

매섭게 불어오던 추위가 한풀 꺾이자 도현은 청야작전으로 완전히 초토화된 심양성 부근과 요동 지역을 재건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고향을 떠나 먼 타향에서 다시 시작하려는 이주민들이 조금이라도 빨리 정착할 수 있도록 도우려는 도현의 배려였다.

심양성에는 건장한 사내들로 구성된 십만 명의 병사들이 모여 있었기에 인력도 충분했다.

“이놈들아. 아침에 피죽도 못 먹었어. 제대로 힘 좀 써!”

“땅이 얼어서 곡괭이가 잘 안 들어가는 걸 어쩌라고요?”

부하 중 한 명이 투덜거리자 작업 감독을 하고 있던 돌쇠가 가까이 다가와서는 곡괭이를 뺏어 들었다.

“넌 집에서 농사도 안 지어 봤어. 무조건 힘으로 파려니까 안 되지. 저리 비켜 봐.”

퉤퉤 손에 침을 묻히고 연장을 잡은 돌쇠는 허리를 써서 가볍게 곡괭이 끝을 땅에 박아 넣었다.

푹푹.

아까와 달리 깊숙이 박히며 땅이 뒤집히자 옆에서 보던 부하들이 감탄성을 내뱉었다.

“우와!”

“역시 우리 별장님은 대단하시다니까.”

“이것들이 참군으로 승차한 지가 언젠데, 아직까지 별장이래!”

곡괭이를 내려놓은 돌쇠가 짐짓 눈을 부라리며 말하자 시선을 받은 부하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사과했다.

“버릇이 돼서 그만…… 죄송합니다, 참군 어른.”

“별장이랑 하늘과 땅 차이인 걸 몰라.”

“예. 예.”

그러고 보니 돌쇠가 쓰고 있는 모자에 새로 바뀐 계급 표시 규정에 따라 정육품 참군을 뜻하는 다이아몬드 모양의 은색 계급장이 두 개 붙어 있었다.

지난 2차 심양 전투에서 청군을 무찌르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걸 인정해 무공훈장과 함께 특별히 품계를 두 개나 올려 준 거였다.

돌쇠 말고도 도현은 전공을 세운 장병들을 신분과 계급에 관계없이 포상해 사기를 높이고 다음에 전쟁이 벌어지면 더 적극적으로 싸울 수 있는 동기를 만들어 줬다.

사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인간 취급도 하지 않으며 인구 통계에도 포함시키지 않았던 노비 출신이 이렇게 당당히 정육품 참군 벼슬을 받아 병사들을 지휘한다는 건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그랬기에 돌쇠는 노비 출신 병사들에게 나도 열심히 노력하면 저렇게 될 수 있다는 좋은 본보기가 됐다.

현대에서 살고 왔기에 선전 효과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도현이 이걸 놓칠 리가 없었고, 세운 전공이 크기도 했지만 일부러 약간 과하다 싶을 정도로 파격적인 진급을 시켜 줬다.

효과는 확실해서 노비 출신뿐만 아니라 심양성에 있는 조선군 병사들 모두 군 생활에 열심이었다.

“그나저나 참군 어른, 요즘 신혼생활은 좀 어떠십니까?”

“눈치 없게 뭘 그런 걸 여쭙고 그래. 당연히 밤낮으로 깨가 쏟아지겠지!”

장난스럽게 주고받는 부하들의 대화에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미천한 신분 때문에 이리저리 고생만 한껏 했고, 나중에 군대에 들어오고 나선 내일 시체가 되어 실려 나갈 수도 있는 위험천만한 일상을 보내는지라 제 한 몸 건사하기도 힘들어 가정을 꾸리는 일은 꿈도 꿀 수 없는 처지였지만, 우연히 피로인 출신의 한 여자를 만나 혼례를 올린 게 불과 보름 전 일이다.

조촐하게 차린 혼례식에는 당연히 부하들도 모두 참석했고, 진심으로 해 주는 축하 인사에 사내답지 않게 눈물까지 글썽이면서 감동했던 것도 한순간.

장난꾸러기 악동처럼 매일 놀려 대는 게 일상이니 도통 당해 낼 수가 없었다.

“크흐음. 네들 진짜 일 안 하고 딴청 부릴래!”

“아이구! 무서워라.”

“참군 어른, 귀가 새빨개지셨는데요?”

쑥스러운 마음에 돌쇠가 버럭 소리를 질렀지만 부하들은 이미 그 속을 꿰뚫어 보고 좋은 건수를 하나 물었다는 듯 마구 놀려 대었다.

“그러지 마시고 저희들한테도 좋은 처자가 있으면 좀 소개시켜 주십시오. 형수님 친구분들이 아주 미인이라고 이미 소문이 쫙~ 났습니다요.”

“너희들이 알아서 해!”

“칫. 너무하십니다.”

“그러게.”

“이제 장가가셨다고 우리는 찬밥이구만.”

“그럼 언제 집들이라도 하십시오. 음식 솜씨가 좋다고 하시던데 만날 군대 밥만 먹는 우리가 불쌍하지도 않습니까?”

“맞아.”

고개를 돌리며 부하들의 짓궂은 농을 모르는 척 피하던 돌쇠는 문득 눈썹을 치켜올렸다.

“아니, 근데 네놈이 우리 마누라 음식 솜씨는 어떻게 알아?”

“그야 혼례를 올리신 이후로 얼굴에 기름기가 좌르르한 게 잘 먹고 다니는 표가 나니까 그러죠.”

“그러고 보니 살이 좀 오르신 것도 같고.”

“옛날엔 옷에 흙이 묻어서 지저분해도 무슨 상관이냐며 그냥 입고 다니시던 분이 지금은 아주 빳빳하게 풀 먹여서 다림질한 것만 걸치시지 않습니까.”

“그러고 보면 역시 집에 여자가 있는 게 좋긴 좋은가 봅니다.”

마지막엔 약간의 부러움을 섞어서 감탄하는 말에 돌쇠는 절로 어깨가 으쓱거렸다.

“그렇게 부러우면 네들도 빨리 장가를 가면 될 거 아냐!”

“아이고, 색시가 있어야 가든가 말든가 할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소개를 좀 시켜 달라고요.”

낄낄대면서 웃고 떠드는 차에 부하들 중 한 명이 멀리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참군 어른, 저기 좀 보십시오. 뭐가 오는 것 같은데요?”

그 말에 고개를 돌려 손바닥을 지붕삼아 햇살을 가리면서 눈을 가늘게 뜨니 뒤에 짐칸이 달린 마차 행렬이 똑바로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무장을 한 병사 몇몇이 눈에 띄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호위 수준이지, 누군가를 해치거나 할 무리로는 보이지 않았다.

잠시 생각을 하던 돌쇠는 곧 마차 행렬의 정체를 알아차린 듯 탄성을 내뱉었다.

“아, 얼마 전 한양에서 이주민들이 출발했다고 하더니 벌써 도착한 모양이군.”

“에, 그래요?”

“어디, 어디.”

“아서라. 거리가 저렇게 먼데 눈을 부릅뜨고 살핀다고 사람 얼굴이나 보이겠냐?”

돌쇠가 핀잔을 주자 득달같이 야유 소리가 터져 나왔다.

“에이, 그래도 미인은 백 리 밖에서도 얼굴이 뽀얗게 빛난다고 하지 않습니까.”

“혹시 압니까, 저 중에 우리한테 시집올 아가씨가 섞여 있을지?”

“참군 어른은 이미 참한 부인을 얻으셨지만, 매일같이 독수공방해야 하는 우리 피 끓는 청춘들의 마음도 헤아려 주셔야지요!”

그러자 돌쇠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쯧쯧 혀를 찼다.

“이것들아. 딴 데 한눈 팔 시간이 있으면 얼른 일이나 해! 남자가 능력이 있어야 여자도 오는 법이야.”

그러면서 그는 부하들의 머리를 세게 쥐어박았다.

그사이 천천히 이동을 해 온 이주민들은 돌쇠와 부하들이 땅을 고르고 있는 곳을 지나 심양성 앞까지 도착했는데, 얼마나 인원이 많은지 행렬 길이가 지평선 너머까지 계속 이어졌다.

이주민들이 도착했다는 소식은 곧장 이제 심양 별궁으로 명칭이 바뀐 예전 황궁에 있던 도현에게 보고됐다.

“전하, 급히 아뢸 일이 있사옵니다.”

책상 좌우에 결재 서류를 잔뜩 쌓아 두고 지난 며칠간 한양에서 온 일거리를 처리하느라 다크서클이 목까지 내려온 도현은 귀찮다는 듯이 고개를 들었다.

“나 바쁜 거 안 보여 중요한 일이 아니면 나중에 말해.”

“꼭 알고 계셔야 되는 겁니다.”

“뭔데?”

읽고 있던 두루마리를 내려놓으며 약간 짜증스럽게 쳐다보자 칠현이 얼른 이야기를 했다.

“한양에서 일 차로 보낸 이주민들이 방금 도착했다고 하옵니다.”

“그래? 시간이 며칠 더 걸릴 줄 알았는데 빨리 왔군.”

안 그래도 조정에서 보낸 장계를 받고 기다리고 있던 중이었기에 도현은 반색을 했다.

“지금 어디에 있어?”

“성 밖에 만들어 둔 임시 주거지에 수용 중입니다.”

“멀리서 백성들이 도착했는데 내가 나가 봐야지.”

몸을 일으킨 도현은 성큼성큼 집무실을 나섰다.

성 앞이 한눈에 다 내려다보이는 문루 위로 올라가자 마차에 온갖 짐을 다 실고 온 이주민 행렬이 긴 줄을 이루며 도착하고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정말 많군. 모두 몇 명이나 된다고 했지?”

“오만 명이옵니다.”

“두 번에 나눠서 보낸다고 그랬지?”

“그렇사옵니다.”

“아직 날씨가 쌀쌀하니 행여나 이주민들이 추위에 몸이 상하지 않도록 각별히 신경을 쓰라고 해.”

“알겠사옵니다.”

칠현의 대답을 들으면서 다시 고개를 앞으로 돌린 도현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이주민들을 바라봤다.

이미 남해도와 북해도에서 이주민들을 정착시킨 경험이 있었기에 먼저 도착해 있던 관리들은 체계적이고 능숙하게 움직였다.

이틀간 임시 주거지에서 머물며 장거리 이동의 피로를 풀게 한 뒤 바로 절반은 심양성에 그리고 나머지는 인근 지역에 오천 명 단위로 분산해 정착시켰다.

아직 성내에 비어 있는 집이 많았고 그동안 군사들을 동원해서 정착지에 미리 마을과 기본적인 시설물들을 세워 뒀기에, 달랑 천막 하나만 치고 아직은 차가운 겨울바람을 견뎌 내야 되는 일은 없었다.

이주민들이 가장 기뻐한 건 집을 배정받는 것과 함께 꿈에도 그리던 토지를 소유하게 된 거였다.

“여기서부터 저기 나무가 있는 곳까지 자네 땅이네.”

하급 관리가 말한 곳을 살펴본 중년 사내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정말로 저 땅이 제 것이라는 말씀입니까요?”

“그렇다네. 이주 전에 이야기를 들었겠지만 특별히 주상 전하께서 정착을 잘할 수 있도록 이 년간 세금을 모두 면제해 주셨으니 그렇게 알고. 필요한 종자는 관청에서 나눠 줄 테니 내일 나와서 받아 가게.”

“아. 예.”

비록 초가집이지만 등을 대고 누울 수 있는 번듯한 가옥에 농사를 지을 땅도 주고 거기다가 종자까지 무상으로 나눠 준다니 중년 사내는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이 안 됐다.

다른 이주민 가족도 안내를 해 주야 했기에 하급 관리는 빠르게 설명을 끝내고는 손에 든 장부를 펴서 내밀었다.

“집과 토지를 받았다는 걸 확인해야 되니까 여기 적힌 자네 이름 밑에다가 수결을 하게. 글을 모르면 그냥 지장을 찍어도 되네.”

그러자 중년 사내는 행여나 방금 받은 집과 땅을 다시 빼앗아 갈까 봐 얼른 엄지손가락을 들며 말했다.

“어디에다 찍으면 됩니까요?”

“여길세.”

엄지손가락에 인주를 듬뿍 묻힌 중년 사내가 지장을 꾹 눌러서 찍자 하급 관리는 제대로 됐는지 확인을 하고는 장부를 덮었다.

“뭐 또 궁금한 것이 있나?”

“없습니다.”

“그럼 내일 종자를 받으러 오는 걸 잊지 말고 혹시 문제가 생기거나 모르는 것이 있으면 바로 관청으로 와서 문의하게.”

“예.”

“그럼 난 바빠서 이만.”

하급 관리가 몸을 돌려 종종걸음으로 사라지자 혼자 남은 중년 사내는 흙을 한 움큼 쥐어 들고는 감격에 찬 얼굴로 앞에 있는 땅을 둘러봤다.

“내 땅이 생기다니…….”

대부분 평생 처음 자신의 땅을 가지게 된 이주민들은 잠이 제대로 오지 않아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새벽부터 농기구를 들고 나와 농사짓기 좋게 땅을 고르며 일했다.

흙을 뒤집고 이랑을 만드는 이주민들의 얼굴에는, 노동의 고됨 대신 시종일관 미소가 그치지 않았고 절로 콧노래가 흘러 나왔다.

한편 이제 파릇파릇 봄 새싹이 나오는 심양성 앞 넓은 벌판에서는 수천 명은 되어 보이는 젊은 사내들이 고함을 지르고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있었다.

“그딴 체력으로 뭘 하겠다는 거야. 뛰어!”

“총검을 찔러 넣을 때는 아랫배에 힘을 주고 힘차게 기합을 내지른다. 자! 해 봐.”

“이야압!”

“더 크게!”

“팔에 힘을 주고 정확하게 찔러야지, 이러면 너희들은 다 죽는 거야! 알겠어?”

“옛!”

“목소리가 작다!”

“알겠습니다!”

“다시 찔러 총!”

“야압!”

“하압! 얍!”

교관의 지시에 간편한 신형 군복을 입은 사내들이 목이 터져라 기합성을 내지르며 나무로 만든 조총을 앞으로 힘차게 찔러 넣었다.

“좋아. 다시 한 번 더!”

이들은 이주민과 함께 온 보충병들로 하루라도 빨리 군대에 적응하고 한 사람 몫을 해내기 위해 혹독한 훈련을 받고 있었다.

멀리서 말을 타고 훈련을 지켜보던 도현은 만족한 듯 머리를 끄덕이며 옆에 있는 남두병 장군을 돌아봤다.

이 군단장으로 압록강과 심양 전투를 훌륭히 수행한 남두병 장군 역시 전공을 인정받아 종이품 부총관으로 승차하고 새로 만들어진 봉황도 도독에 임명됐다.

“남 도독.”

“네.”

“훈련 상태가 아주 좋군.”

“감사하옵니다.”

“전부 이 군단에 배치되는 병력이지?”

“그렇습니다.”

“앞으로 남 도독의 임무가 막중하다는 걸 항상 명심하고 청나라가 함부로 요하를 넘어올 생각을 못 하도록 철통같은 대비 태세를 유지해야 될 것이야.”

“옛.”

이제 봉황도에 주둔하게 된 이 군단은, 주적이자 직접적인 전투는 없지만 여전히 전쟁 상태인 청나라와 마주 보고 대치중인 걸 감안해, 다른 군단보다 많은 네 개 사단으로 편제를 확대하기로 결정했다.

이번에 도착한 보충병들도 기존 부대의 빈자리를 채우는 것도 있지만 이걸 위한 사전 포석이었다.

주둔지 변경으로 비게 된 평안도는 새로운 군단을 창설해 방어하기로 했는데 아직은 병력이 부족했기에 그냥 계획만 마련해 둔 상태였다.

그리고 시범적으로 운용해 봤던 거란족 기병의 효과가 만족스러울 만큼 좋았기에 도현은 복속한 부족 전사들 가운데 만 명을 추가로 더 뽑아 군에 편입시켰다.

덕분에 만성적이었던 기병대 부족에 어느 정도 숨통이 트였다.

물론 과거 게르만족에 군대를 맡기고 향락을 즐기다가 멸망한 로마제국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군부에 들어온 거란족 전사들에게 두 민족은 한 뿌리라는 것과 도현에 대한 충성을 강조하는 정신 교육을 반복적으로 실시했다.

“병사들이 고생하는데 가만히 있을 수 없지. 박 내관.”

“예, 전하.”

“훈련의 고단함을 풀 수 있도록 저녁에 막걸리 오십 통을 내려 주도록 해.”

“알겠사옵니다.”

도현의 말에 남두병 장군이 웃는 얼굴로 이야기를 했다.

“병사들이 알면 다들 크게 기뻐할 것입니다.”

“훈련도 좋지만 가끔씩 이렇게 풀어 주기도 해야지.”

조금 더 있으면서 훈련 모습을 지켜본 도현은 심양 별궁으로 돌아갔다.

잠시 쉬는 시간에 도현이 막걸리를 하사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은 병사들은 주위가 떠나가라 함성을 내지르며 환호했다.

“우와아아!”

“역시 주상 전하뿐이야.”

“이게 웬 떡이야.”

“그러게. 오랜만에 목구멍에 먼지 좀 씻어 내겠구먼.”

“쩝. 이왕 주시는 김에 조금 더 하사하시지.”

병사 하나가 입맛을 다시면서 아쉬워하자 옆에 있던 동료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내일 또 훈련을 받아야 되니까 그냥 입만 축이라는 뜻이겠지.”

“아쉬워서 그러지.”

“그래도 이게 어디야.”

“하긴.”

“자! 전하께서도 이렇게 격려를 해 주시니 더 열심히 훈련에 임하도록 하자.”

“예!”

계속된 훈련에 약간은 지쳐 있던 병사들은 막걸리에 힘이 나는지 힘차게 대답했다.

오기 전에 기본적인 교육을 받았지만 도착과 동시에 실시된 훈련은 정말 입에서 단내가 날 정도로 힘들고 어려웠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청나라와 직접 국경을 마주 대고 있는 곳인 데다 언제 다시 전투가 벌어질지 몰랐기에 다른 군단보다 더욱 혹독하게 훈련이 이루어졌다.

병사들도 이런 상황을 잘 알고 있었기에 당장 그만두고 싶을 정도로 고통스러워도 이를 악물고 버텼고 교관들은 ‘지금 흘린 땀 한 방울이 나중에 너희들의 목숨을 살리게 된다.’는 말을 계속하며 하나라도 더 가르치기 위해 애를 썼다.

이렇게 봉황도는 활기차게 움직이며 하루가 다르게 안정을 찾고 점점 조선 영토로 완전히 편입되어 갔다.

“현재까지 보병 삼천 명과 기병 오천이 훈련에 박차를 가하고 있고 한 달 뒤 모두 새로 창설하는 사 사단에 배속시킬 예정이옵니다.”

“기병은 거란족 출신들이지?”

도현의 물음에 박경지 장군이 머리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렇사옵니다.”

“어떻게 적응은 잘하는 것 같던가?”

“예. 지속적으로 실행한 정신 교육이 효과가 있는지 지금까지는 별다른 문제가 없습니다.”

“다행이군. 복속한 거란족을 완전히 조선 백성으로 끌어안으려면 우리가 먼저 마음을 열고 저들을 받아들여야 된다는 걸 항상 명심하고 차별을 두는 일이 없도록 하게.”

“명심하겠사옵니다.”

“그래도 계획대로 이 군단이 편제를 모두 끝내려면 아직 부족한데 추가 병력이 언제 또 오기로 되어 있지?”

“다른 일이 없다면 다음 달 하순에 한 번 더 보충병이 도착하기로 되어 있습니다.”

“적이 물러간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당분간은 별일이 없겠지만, 그래도 예친왕이 언제 또다시 대군을 몰고 쳐들어올지 모르니까 최대한 빨리 진영을 갖추고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어야 될 것이오.”

그러자 회의실 안에 모여 있던 장수들이 한목소리로 크게 대답했다.

“옛.”

특히 봉황도 도독으로 임명된 남두병 장군은 강한 자신감을 보였다.

이미 한차례 청나라 대군을 격퇴했고 속속 증강되는 전력에 절로 지휘관인 그의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남두병 장군뿐만 아니라 다른 장수들도 걱정과 두려움 따위는 다 사라지고 청군이 쳐들어온다고 해도 다 격퇴시킬 수 있다는 자신이 넘쳐났다.

“이제 수많은 이주민들이 와서 터를 잡고 살게 된 만큼 지난번처럼 청군이 심양성까지 들어오도록 하지 말고 요하를 넘지 못하게 막아 내야 될 것이오.”

요하는 심양 서쪽에 위치한 강으로 지난번 전쟁 이후 자연스럽게 조선과 청나라의 영토를 나누는 국경선이 됐다.

물론 청나라에서는 이걸 인정하지 않았지만 요하 동쪽은 조선군의 수중에 완전히 들어가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염려하지 마시옵소서. 현재 강변을 따라 건설 중인 여섯 개의 요새들이 모두 완성되면 청군은 단 한 명도 봉황도에 발을 들여놓을 수 없을 것이옵니다.”

“도독만 믿고 있겠소.”

앞으로 남두병 장군이 심양과 봉황도를 책임지고 지켜 내야 했기에 도현은 아낌없이 그에 대한 신임을 표현했다.

“그럼 도성으로 개선하실 때 근위대도 모두 철수하는 것이옵니까?”

박경지 장군이 조심스럽게 묻자 거기에 대해서 생각을 끝내 놓고 있던 도현은 살짝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오. 아직은 이곳 사정이 불안하니 기병만 데리고 가고 나머지는 당분간 계속 잔류해 있을 것이오.”

“아. 그렇군요.”

기병대가 빠져 숫자가 조금 줄어들기는 하지만 최정예인 근위대가 남는다는 이야기에 남두병 장군을 비롯한 무장들은 환영하는 표정을 지었다.

고개를 옆으로 돌린 도현은 무장들 가운데 유일하게 혼자 문관 복을 입고 있는 사내를 봤다.

“예산이 부족하지는 않나?”

“아직은 괜찮사옵니다. 하지만 돌발 사태를 대비한 예비비 말고는 여유 자금이 없기에 내년까지는 추가 토목공사나 이주민 정착은 어려울 것 같사옵니다.”

설명을 들은 도현은 살짝 아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 어쩔 수 없지.”

이주민 정착과 함께 군대를 늘리고 각종 방어 시설을 확충하는 데 천문학적인 비용이 소모됐는데, 만약 봉황상단에서 개발 중이던 금광 개발을 제때 성공하지 않았다면 시작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을 거였다.

충분한 수량의 금과 은이 확보되자 주조소에서 화폐를 찍어 올해 일월부터 본격적으로 유통시켰다.

그 자체로도 값어치가 있는 금과 은으로 만든 화폐였기에 금방 재력을 갖춘 상류층 사이에서 퍼져 나갔다.

그러자 덩달아 엽전 거래까지 활성화되면서 조선 경제는 또 한 번 크게 변화하는 전환점을 맞이했다.

“다른 안건이 없으면 오늘 회의는 여기서 끝내도록 하지.”

좌중을 둘러보며 도현이 묻자 박경지 장군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한 가지 더 아뢸 이야기가 있사옵니다.”

“뭔가?”

“제 휘하에 있는 장수를 통해 소규모 거란족 몇 개가 복속 의사를 밝혀 왔다고 합니다.”

“…….”

뜻밖의 말에 잠시 눈만 껌뻑이던 도현은 이내 약간 놀란 얼굴로 물었다.

“그게 사실인가?”

“네.”

“그 장수 이름이 뭐야?”

“무트차한이라고 거란족 출신입니다.”

도독부에 직접 요청하지 않고 기병대 장수를 통해 뜻을 전해 왔다고 해서 약간 의아했었는데 상대가 같은 거란 출신 무장이라면 이해가 됐다.

“당장 이리로 불러와.”

“알겠사옵니다.”

대답과 함께 박경지 장군이 손짓을 하자 뒤편에 서 있던 군관 하나가 회의실을 나갔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서 사각턱에 부리부리한 눈이 인상적인 무장 한 명이 안으로 들어와 군례를 취했다.

“충! 신 무트차한, 주상 전하의 부름을 받고 왔사옵니다.”

못 알아들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거란 출신답게 조선말이 조금은 어색한 무트차한을 천천히 살펴본 도현은 근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제 보니까 지난번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자로군.”

“맞사옵니다. 거란 출신 기병들로 이루어진 부대를 지휘하며 청군 후방을 교란하는 데 한몫 단단히 했사옵니다.”

“그래.”

박경지 장군의 이야기에 도현은 대견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고 무트차한은 하늘같이 높은 자리에 있는 임금이 자신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에 감격한 표정을 지었다.

“듣자 하니 몇몇 거란족이 그대를 통해 복속 의사를 밝혔다고 하던데, 맞나?”

“예. 동고리를 비롯한 여섯 개 부족 족장들이 사람을 보내 와서 분명 저한테 그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호오!”

한 곳도 아니고 무려 여섯 개의 부족이 한꺼번에 그런 의사를 밝혔다는 사실에 도현은 눈을 반짝였다.

사실 백성들을 이주시키고 있어도 광활한 봉황도를 다 채우기란 어려웠는데 설상가상으로 여기뿐만 아니라 북해도도 있었기에 인구 부족은 심각할 정도였다.

그렇다고 봉황도와 북해도를 마냥 비워 둘 수도 없었고 자연적으로 인구가 느는 걸 기다리기에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다.

그런 때에 강제적으로 무릎을 꿇은 것이 아니라 스스로 복속을 원하는 거란족이 생겨난 것은 아주 고무적인 사건이자 골치를 썩이고 있는 인구 부족 문제를 어느 정도 해소할 방법이 될 수 있었다.

“방금 해당 부족에서 사람을 보냈다고 했는데, 그들은 어디에 있나?”

“제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서 직속상관이신 박경지 장군님께 말씀을 드리고 일단 머물 곳을 구해 기다리도록 했습니다.”

“잘했군.”

제법 길게 자란 턱수염을 손등으로 쓸어내리면서 잠시 생각을 한 도현은 이내 고개를 들며 말했다.

“부족장의 승인을 받고 왔다는 걸 증명할 것이 있던가?”

“전하께 복속을 요청하는 연판장連判狀을 가져왔다고 합니다.”

“연판장?”

“예. 해당 부족장의 서명이 모두 들어가 있고 찾아온 이들 또한 그들의 친자식이니 믿을 수 있을 겁니다.”

“친자식들을 보냈단 말이야?”

“그렇사옵니다.”

이 정도면 상대편의 진실성을 충분히 확인할 수 있었다.

“그들을 이리로 데려오게.”

“옛.”

무트차한이 자리를 비우자 오른편에 앉아 있던 남두병 장군이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거란족을 받아들일 생각이시옵니까?”

“왜, 경은 반대인가?”

“그런 건 아니지만 아직 이주민들이 완전히 정착을 하지 못했는데 저희와 생활 방식이 다른 거란족이 대거 들어와서 살게 되면 자칫 분란이 생기지 않을까 염려되옵니다.”

확실히 그런 위험성이 없지는 않았는데 중소규모 부족이라고 하지만 못해도 인원이 일이만은 될 테고 그가 예상하는 대로 일이 진행된다면 앞으로 그 숫자는 크게 늘어날 수 있었다.

그러면 필연적으로 봉황도의 인구 구성비에 문제가 생기면서 영구히 조선 영토로 만들기 위해 기존에 살던 만주족과 한족을 강제로 추방한 것이 무의미해질지도 몰랐다.

“청나라까지 갈 필요도 없이 황도를 빼앗기고 강남 지역으로 밀려나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명과 비교해 우리 조선이 가진 가장 큰 약점이 뭔지 아나?”

갑작스러운 물음에 남두병 장군은 머리를 갸웃거렸다.

“글쎄요.”

“다른 장군들은 알겠나?”

다들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가운데 고만정이 짧게 탄성을 내뱉으며 그를 봤다.

“혹시 인구수를 말씀하시는 것이옵니까?”

“맞아. 청과 명이 대국이라 자처하며 거들먹거릴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힘이 바로 헤아리기조차 어려운 머릿수에 있지. 그 인구를 바탕으로 막강한 군사력을 유지하고 더불어 경제력을 유지할 수도 있는 거야.”

“…….”

“거기에 비해 우리 조선은 어떤가? 힘들게 심양과 남만주 일대를 장악했지만, 여길 제대로 개발하고 지키기에는 인구가 턱없이 부족해. 당장 지난 두 번의 전쟁에서 청나라는 수십만에 달하는 사상자와 포로를 냈지만, 금방 다시 그만한 병력을 모아 쳐들어올 여력이 충분히 있지. 하지만 우리는 그럴 수 없어. 막말로 여기 있는 군대가 무너진다면 한양까지 무주공산이나 다름없지 않나? 하지만 사람은 필요하다고 해서 가도를 닦거나 성곽을 세우는 것처럼 마음대로 늘릴 수 있는 게 아니야. 그런데 이런 문제를 어느 정도 해소시켜 줄 수 있는 거란족이 스스로 복속을 하겠다는데, 약간의 불안 요소가 있다고 그걸 거부해야 되겠나?”

이야기를 끝낸 도현이 시선을 주자 남병두 장군은 무겁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아니야. 꼭 필요한 지적이었어. 아직 확정된 건 아니지만 정말로 복속을 받아 거란족들이 봉황도에 들어와 살게 된다면 북해도에서 한 것처럼 그들을 완전히 조선인으로 흡수할 수 있도록 교육을 철저히 시키고 기존 백성들과 갈등이 생기지 않게 남 도독이 각별히 신경을 써야 될 거야.”

“명심하겠습니다.”

“그래.”

그렇게 시간이 얼마쯤 더 흘렀을 때 밖이 조금 소란스러워지는가 싶더니 거란족에서 보낸 사자를 데리러 갔던 무트차한이 돌아왔다.

그와 함께 들어온 여섯 명의 젊은 사내들은 하나같이 짐승 가죽으로 만든 옷을 입고 머리에는 두툼한 털모자를 쓰고 있었다.

두 줄로 늘어선 사내들은 미리 무트차한이 가르쳤는지 조선식으로 바닥에 엎드리고는 가운데 앉아 있는 도현을 향해 세 번 절을 했다.

“대조선국 국왕 전하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무트차한이 재빨리 통역해 주는 이야기를 들은 도현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묵직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다들 고개를 들라.”

그러자 사내들은 살짝 머리를 들었지만 여전히 시선은 바닥을 봤다.

“동고리와 다른 다섯 부족장들이 보내서 왔다고?”

“옛.”

사내들의 대표인지 아까부터 계속 혼자 물음에 대답하고 있는 자를 유심히 바라보며 도현이 말했다.

“자네는 이름이 뭔가?”

“동고리 부족장의 아들 굴가라고 합니다.”

굴가는 상당히 큰 키에 어깨가 떡 벌어져 있는 것이 강인한 인상을 풍겼다.

“우리 조선에 복속되길 원한다고?”

“그렇습니다.”

“이유가 뭐지?”

말을 돌려서 하지 않고 도현이 단도직입적으로 묻자 잠깐 당황해하던 굴가는 이내 평정심을 회복하고는 차분히 이야기를 했다.

“솔직히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래.”

“이번 겨울 유난히 혹독했던 추위와 가뭄에 키우던 가축 태반이 죽어 나가 부족민들이 굶주리고 있습니다. 이대로 있다가는 모두 아사하거나 부족이 뿔뿔이 흩어져 버릴 상황이라 고민을 하던 중, 먼저 조선에 충성을 맹세한 다른 부족들이 차별받지 않고 잘사는 걸 보고 대국인 조선에 복속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도현은 불리할 수도 있는데 치부를 과감하게 먼저 드러내는 굴가의 모습을 흥미롭다는 듯이 쳐다봤다.

“굶주림 때문이라면, 다른 방법으로도 해결할 수 있을 텐데?”

거란족 같은 유목 민족들이 춘궁기를 넘기기 위해 벌이는 약탈을 거론하자 굴가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주위에 전부 맹수들뿐인데 저희 같은 것들이 뭘 할 수 있겠습니까.”

막강한 군사력을 갖춘 청과 조선 그리고 최근 급격하게 세를 불리고 있는 초흐타 부족을 직접 말하지 않고, 맹수에 비유하자 도현은 씨익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하긴 그것도 그렇군.”

청나라는 말할 것도 없고 당장 조선만 해도 예전과 달리 함부로 건드렸다가는 완전히 박살 날 수 있다는 걸 앞서 우라타 부족의 사례로 이미 보여 줬기에, 거란족들은 감히 약탈에 나설 엄두를 못 냈다.

“다른 사정이 괜찮은 부족 밑으로 들어가는 것이 더 편하지 않나?”

“대부분 비슷한 상황인 데다 그나마 먹고살 만한 초흐타 부족과는 같은 거란족이라고 해도 예전부터 원한을 쌓아 온 철천지원수입니다.”

같은 민족이라는 개념보다 각 부족별로 독자적으로 행동하고 오랜 세월 서로 반목과 싸움을 거듭해 온 걸 알고 있던 도현은 더 이상 그 이야기를 거론하지 않았다.

“연판장을 가져왔다고 하던데?”

“여기 있습니다.”

굴가가 품속에서 두루마리를 하나 꺼내자 근처에 서 있던 위사가 그걸 받아서는 공손히 도현에게 건넸다.

매듭을 풀고 두루마리를 펼치자 복속을 원한다는 글이 적혀 있고 끝에 여섯 부족장의 이름과 지장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그대들의 진심을 알았으니 물러가서 결정을 기다리도록 하라.”

“옛.”

예를 갖춘 굴가와 사내들은 조용히 회의실을 나갔다.

“무트차한.”

“네, 전하.”

“이번에 복속 의사를 밝힌 여섯 부족의 상황이 어떤지, 경이 알고 있는 걸 상세히 설명해 보게.”

그러자 무트차한은 잠시 생각을 해 보고는 신중한 태도로 이야기를 했다.

“저도 자세한 건 모릅니다만 기르던 가축 대부분이 죽은 건 사실인 것 같사옵니다. 식량은 물론이고 가죽과 젖 등 필요한 모든 걸 얻는 가축이 없다면 더 이상 유목 생활이 불가능할 테니 상당히 절박한 상황일 겁니다.”

“평소 교류가 있는 다른 부족에게 도움을 청할 수도 있지 않나?”

박경지 장군의 물음에 무트차한은 고개를 좌우로 내젓고는 계속 말을 이었다.

“다른 부족들도 대부분 비슷한 상황이라 그건 어려울 겁니다. 그리고 조선과 달리 여기저기 흩어져 철저히 부족 단위로 생활하기 때문에 이런 일이 발생하면 아주 이기적으로 변해 서로 살아남기 위한 약탈이 벌어집니다. 그때 동고리 부족처럼 힘이 약한 곳은 손쉬운 먹잇감이지요.”

“그런…….”

“허어.”

극단적인 무트차한의 이야기에 다른 장수들은 국경선을 따라 주위에 산재해 있는 거란족들이 혼란에 빠지는 건 현 상황에서 조선에 좋을 것이 하나도 없었기에 우려 섞인 얼굴로 술렁거렸다.

“아마 전하께서 받아 주시지 않는다면 저들은 오래 버티지 못하고 주변 부족에 먹히고 말 것입니다. 그러면 젊은 여자와 아이를 빼고 다른 부족민들은 모두 살해를 당하고 말겠지요. 이걸 알기에 살아남기 위해서 찾아온 걸 겁니다.”

“최근에 초흐타 부족으로 들어가는 병장기 수가 늘었는데 그것도 이런 이유라고 생각하면 되겠군.”

“그게 맞을 겁니다.”

“으음.”

일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심각해지자 도현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는 낮게 침음성을 흘렸고 표정이 굳어진 남두병 장군이 그를 보며 말했다.

“초흐타 부족의 세력이 커지는 건 상당히 우려스러운 상황이지 않사옵니까.”

“그렇지.”

팔걸이 끝을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리면서 고심을 하던 도현은 이내 고개를 들고는 입을 열었다.

“인구 부족을 해결하는 건 둘째 치고 초흐타 부족을 견제하기 위해서라도 어려움에 처한 중소 거란족을 적극적으로 복속시켜야 되겠어.”

“현명하신 판단이옵니다.”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파악한 장수들도 도현의 말에 머리를 끄덕이며 찬성했다.

“무트차한, 이런 걸 모르고 그냥 넘어갔다면 상당히 일이 복잡해질 뻔했는데 이번에 큰 공을 세웠어.”

“아니옵니다.”

“그러고 보니 조정에서 벼슬을 받고 여러 번 공을 세웠는데 아직까지 거란식 이름을 쓰고 있군. 짐이 새로운 이름을 지어 주고 싶은데, 어떤가?”

도현의 말에 무트차한은 물론이고 주위에 있던 장수들 모두 깜짝 놀랐다.

“그래 주신다면 일생의 영광으로 생각하겠사옵니다.”

“어디 보자…….”

턱을 쓰다듬으며 잠깐 생각을 하던 도현인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

“성은 나와 같은 이李씨로 하고 충성할 충忠 자에 마음 심心 자를 넣어 이충심이 괜찮을 것 같은데, 어때?”

그러자 무트차한의 직속상관으로 평소 그를 좋게 보던 박경지 장군이 옆에 있다가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아직 멋진 이름입니다.”

“무장한테 딱 어울리는 이름이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다른 장수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이름을 하사받게 된 무트차한을 축하해 줬다.

“무트차, 아니지, 이충심, 자네는 정말 기쁘겠군.”

“평생의 광영일세.”

이름을 받은 것도 대단한데 국왕과 같은 이씨 성을 내려 주자 무트차한은 크게 감격해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으며 도현한테 절을 올렸다.

“신, 이충심 이 목숨이 다하는 순간까지 전하께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하하하! 그 마음 끝까지 변하지 말고 거란 출신들이 본보기로 삼을 수 있는 인물이 되어 주게나.”

“옛.”

흡족한 표정을 지어 보인 도현은 시선을 옆으로 돌려 의자에 앉아 있는 박경지 장군에게 지시를 내렸다.

“박 장군.”

“말씀하십시오, 전하.”

“기병 육천을 차출해 명령이 떨어지면 언제든지 이번에 복속을 해 온 부족으로 갈 수 있도록 준비를 해 놓으시오.”

“알겠사옵니다.”

복속을 받아들이기로 결정을 내린 도현은 휘하 장수들과 세부적인 계획을 수립했다.

그를 보좌하기 위해서 와 있던 주작단 간부까지 불러 진행된 회의는 늦은 밤까지 계속 이어졌다.

이미 결정을 내렸지만 일부러 바로 부르지 않고 이틀을 끈 도현은 굴가를 비롯한 여섯 부족의 사신들을 다시 불러 복속을 받아들인다고 알려 줬다.

혹시 귀찮게 생각하며 내치는 건 아닌지 조마조마해하던 사신들은 크게 기뻐하며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

그리고 며칠 뒤 박경지 장군이 직접 이끄는 기병 육천 명이 사신들의 안내를 받아 심양성을 떠났다.

따그락. 따그락.

끝없이 펼쳐진 초원 한가운데를 굽이굽이 가로지르는 푸른 요하 강을 따라 일단의 무리가 뿌연 먼지구름을 피워 올리면서 이동하고 있었다.

갑옷과 병장기로 완전 무장한 기병들이 포장을 씌운 짐마차들을 호위하며 가는 모습이었는데, 행렬이 얼마나 긴지 후미가 잘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런데 행렬 선두에 기수가 들고 있는 깃발이 눈에 상당히 익었는데 자세히 보니 발톱이 세 개 달린 삼족오기였다.

원래는 고구려를 상징하는 표식이었지만 도현의 지시로 작년부터 조선군을 표시하는 깃발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저 능선만 넘어가면 저희 부족의 마을이 보일 겁니다.”

말 머리를 나란히 하고 가던 굴가의 이야기에 이충심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이라면 일개 전사에 불과한 이충심이 족장의 아들인 굴가한테 존댓말은 고사하고 함부로 말도 못 붙일 정도로 신분 차이가 났지만,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달랐다.

이충심은 종오품 판관 벼슬을 제수받은 당당한 조선의 무관이었고 굴가는 복속을 요청한 거란 중소 부족의 일원에 불과했다.

이처럼 확연히 높아진 자신의 신분에 이충심은 자부심을 느꼈고 말과 행동거지 하나하나에서 그게 다 드러났다.

작은 언덕을 넘어가자 굴가가 이야기한 대로 동고리 부족 마을이 나타났다.

강과 제법 나무가 무성한 숲을 병풍처럼 뒤에 끼고 있는 마을은 제법 규모가 컸는데 유목 민족 특유의 이동식 주택인 게르 수백 개가 쳐져 있었다.

조선군이 접근하자 마을에서 일단의 전사들이 몰려나왔고 그걸 본 이충심은 수하들을 돌아보며 단단히 주의를 줬다.

“괜한 오해를 사지 않도록 내가 명령하기 전에는 절대 병장기를 꺼내지 마라!”

행렬을 멈추고 잠시 기다리자 상대가 열 걸음쯤 앞에 말을 세웠다.

전사들은 상당히 긴장한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그중 한 명이 힐끗 굴가를 쳐다보고는 말을 몰아 가까이 다가왔다.

“조선에서 오신 분들이오?”

어색한 조선말에 이충심은 거란어로 대답했다.

“그렇소. 난 주상 전하의 명을 받고 온 이충심이라고 하오.”

“어떻게……?”

너무나도 능숙한 거란어에 상대가 깜짝 놀란 얼굴을 하자 옆에 있던 굴가가 나서 이야기를 했다.

“이분은 저희와 같은 거란 출신으로 조선군 무장이 되신 분입니다. 이 장군님, 이쪽은 제 큰형님인 소손부입니다.”

“반갑소이다.”

“…….”

“형님.”

“아! 그래.”

이충심이 먼저 손을 내미는데도 멍하니 쳐다보고만 있던 소손부는 동생의 말에 정신을 차리고 얼른 악수를 했다.

“소손부입니다. 동부에 살던 부족 전사들이 조선군에 들어갔다는 소문은 들었는데 이렇게 실제로 볼 줄은 몰랐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함께 온 부하들 모두 거란 출신입니다.”

“그렇군요.”

“이 장군님은 조선국 국왕 전하께 직접 이름까지 하사받으셨고 휘하에 천 명의 기병을 거느리는 지위에 계십니다.”

“대단하시군요.”

이어진 설명에 소손부는 감탄 어린 눈빛으로 이충심과 부하들을 살펴보고는 아까보다 더 정중한 태도로 그를 대했다.

“아버지께서 기다리고 계시니 어서 들어가시지요.”

“그럽시다.”

앞서가는 동고리 부족 전사들을 따라 잠시 멈췄던 행렬이 다시 움직였다.

마을로 들어가자 부족민들이 하나둘 몰려나와서는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조선군 행렬을 구경했다.

말을 몰아가며 티 나지 않게 주위를 살핀 이충심은 제대로 못 먹어서 야윈 부족민들과 가축이 거의 없는 걸 보고 상황이 예상보다 더 안 좋다는 걸 느꼈다.

주욱 늘어서 있는 게르를 지나 얼마쯤 들어가자 다른 것보다 두세 배쯤 더 크게 만들어진 게르가 나타났다.

게르 앞에는 마을 원로로 보이는 늙은이들이 서 있었다.

말에서 내린 이충심이 굴가 등과 함께 걸어가자 원로들 가운데 있던 부족장이 그를 반갑게 맞이했다.

“어서 오시오.”

“환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소손부처럼 능숙한 거란어에 깜짝 놀란 얼굴을 하던 부족장은 굴가가 얼른 귓속말을 뭔가를 속삭이자 새삼스러운 시선으로 그를 봤다.

“이거 같은 거란족이라니 더 반갑소이다.”

“저도 그렇습니다.”

“자! 이럴 것이 아니라 안에 들어가서 대화를 계속 나눕시다.”

게르 안은 바깥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넓었는데 커다란 화덕이 놓여 있고 활과 창 같은 사냥 도구들이 벽에 장식품처럼 걸려 있었다.

“편히 앉으시오.”

“예.”

상대가 권하는 대로 이충심은 수행원들과 함께 푹신하게 짐승 가죽을 씌운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부족장과 원로들도 각자 빈자리에 가서 앉았고 서로 탐색전을 벌이듯 바라보는 가운데 약간의 침묵이 흘렀다.

그런 어색한 분위기를 먼저 깬 건 이충심이었다.

“흠. 먼저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확인할 것이 있습니다.”

“말해 보시오.”

이충심은 맞은편에 둘러앉아 있는 부족장과 원로들을 가늘게 뜬 눈동자로 스윽 흩어보고 말했다.

“일전에 부족장께서 아드님을 보내 복속 의사를 밝히셨는데, 진심이십니까?”

“그렇소.”

설마 친자식을 가지고 장난질을 칠까, 하는 눈빛으로 부족장이 답했다.

그 표정에 딴 뜻이 없다는 걸 확인한 이충심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렇다면 제가 기쁜 소식을 전하게 되는군요. 주상 전하께서 동고리 부족의 충심을 받아들이셔서 복속을 허락하셨습니다.”

“그게 정말이오!”

부족장이 무릎을 탁 치는 것과 동시에 원로들 사이에서 기쁨의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동고리 부족에게는 자신들의 생사와 바로 연결된 소식이라 안쪽의 웅성거림이 바깥에까지 전해질 정도로 크게 퍼져 나갔다.

“조용, 조용!”

부족장은 술렁이는 원로들을 큰 호통으로 다잡은 다음, 앞에 있는 이충심에게 미안하다며 사과했다.

“채신머리 없는 모습을 보여서 미안하오.”

“아닙니다. 그리고…….”

“뭐가 또 있소?”

“예. 선물이 하나 더 있습니다.”

의아한 얼굴로 쳐다보는 부족장을 보며 이충심이 입을 열었다.

“이곳 상황이 어렵다는 걸 아시고 주상 전하께서 곡식을 하사해 주셨습니다.”

“그럼 짐마차에 실려 있는 것이?”

“예. 모두 곡식입니다.”

짐마차 마흔 대에 실려 있는 것이 전부 곡식이라니, 그렇지 않아도 기르던 가축이 대부분 폐사하는 바람에 식량이 부족해 골머리를 앓고 있던 부족장의 얼굴이 환하게 펴졌다.

“이렇게 고마울 데가 있나.”

“역시 복속을 잘한 것 같소이다.”

“맞소.”

“조만간 다른 부족장들과 함께 심양에 계신 주상 전하께 정식으로 복속과 충성을 맹세하는 절차를 거치셔야 될 겁니다.”

이충심의 말에 부족장은 미소 띤 얼굴로 머리를 끄덕였다.

“물론이오. 최대한 빨리 부족민들을 데리고 이동할 수 있도록 준비하겠소.”

“아. 미처 말씀을 못 드렸는데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그게 무슨…….”

의아한 표정을 짓는 부족장을 보며 이충심은 도현에게 지시받은 걸 전달했다.

“기존 동고리 부족의 영역을 그대로 조선 영토로 편입시킬 계획이니 굳이 정든 곳을 떠나지 않아도 된다는 겁니다.”

“정말이오?”

당연히 여길 떠나 이제 봉황도로 불리는 지역에 들어가 살 줄 알았던 부족장과 원로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그걸 위해서 저와 부하들이 온 겁니다. 이제부터 여긴 조선 영토가 될 것입니다.”

자신감 가득한 얼굴로 이충심은 단호하게 말했다.

처음에는 그냥 단순히 복속을 원하는 거란족을 받아들이는 것만 생각했던 도현은 신하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이왕 이렇게 된 거 해당 부족의 영역을 모두 조선 땅으로 만들어 영토를 넓히기로 결심했다.

어차피 요하 상류로 차근차근 영향력을 넓혀 나갈 계획이었기에 그걸 조금 앞당겨 실시한다고 생각하면 됐고 더불어 최근 세력을 키우려고 하는 초흐타 부족을 경계하고 압박하는 효과도 있었다.

이야기를 끝내고 나온 이충심이 부하들을 시켜 가져온 곡식을 나눠 주자 부족민들은 크게 기뻐했다.

“자, 자! 곡식은 넉넉하게 있으니까 서두르지 말고 줄을 서시오.”

하급 군관이 크게 외치는 소리에 소식을 듣고 모여든 부족민들은 배급대 앞에 길게 줄을 지어 섰다.

“한 가족당 세 말씩이오.”

병사가 바가지로 뜯어 놓은 곡식 포대에서 쌀을 가득 퍼 가져온 자루에 담아 주자 꾀죄죄한 몰골의 거란 여인은 연신 허리를 굽혔다.

“고맙습니다.”

“이 곡식들은 주상 전하께서 냉해를 입은 여러분들의 딱한 사정을 불쌍히 여겨 보내 주신 것이니 감사히 여기시오!”

배급을 하는 내내 몇몇 병사들이 고깔 모양의 확성기를 들고 도현이 하사한 곡식이라는 걸 목이 터져라 알렸다.

“식량이 없어서 걱정이었는데 이렇게 고마울 데가…….”

“이제 살았어.”

복속을 하기로 했으면서도 마음 한구석에 아쉬움과 머뭇거림이 남아 있던 부족민들은 굴가와 함께 온 거란 출신 기병대의 모습과, 가장 필요한 걸 파악하고 지체 없이 곡식을 가져와 배급해 주는 것에 그런 감정을 모두 지워 버렸다.

그렇게 부족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는 가운데 얼마 있지 않아 박경지 장군이 지휘하는 본대 병력이 뒤따라 도착했고, 며칠 뒤에는 다른 다섯 개 부족에도 조선군 기병대가 찾아갔다.

지도부와 부족민들의 적극적인 협조 속에 복속한 부족의 영역을 순조롭게 접수한 박경지 장군은 구휼 작업을 펼치면서 장기 주둔을 위한 요새 건설에 착수했다.

요새는 모두 여섯 개로 복속한 부족 마을에 하나씩 세워졌는데, 일단 목재로 만들고 차츰 석성으로 확장하고 보강할 예정이었다.

그리고 열흘쯤 지나 정식으로 도현에게 복속을 하기 위해 여섯 부족의 부족장과 수행원 백여 명이 정성스럽게 준비한 공물供物을 가지고 심양성을 향해 떠났다.

복속의식은 예전에 청나라 황제가 대신들과 국사를 논하던 전각에서 이루어졌다.

도현이 앉아 있는 옥좌를 사이에 두고 양옆으로 수많은 신하들이 늘어서 있는 가운데, 거란 전통 복장을 한 부족장과 수행원들이 전각 안으로 조심스럽게 걸어 들어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가장 세력이 크고 나이가 많은 동고리 부족장이 대표로 살짝 고개를 들며 입을 열었다.

“신, 야수케이와 다섯 부족장들이 주상 전하를 뵈옵니다.”

“어서들 오시오. 먼 길을 오느라 고생이 많았소.”

서로 말이 통하지 않았기에 역관이 한쪽에 서서 통역을 했다.

“아니옵니다. 미천한 저희들을 받아 주신 것도 감사하온데, 어려운 사정을 헤아리시고 곡식까지 보내 주셔서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될지 모르겠습니다.”

“이제부터 짐이 보살펴야 될 조선 백성이니 당연한 일 아닌가. 어찌 됐건 도움이 됐다니 다행이군.”

도현은 일부러 조선 백성이라는 걸 강조하며 부드럽게 이야기를 했다.

“여기 저희 여섯 부족의 신물과 지도를 바치니 부디 저희를 받아 주시옵소서.”

말을 하며 야수케이는 양손에 들고 있던 쟁반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쟁반에는 단검 여섯 개와 해당 부족의 영역이 상세히 그려진 지도가 놓여 있었는데 이걸 바치는 건 도현에게 완전히 복속해 충성을 다하겠다는 뜻이 담겨 있었다.

유목 민족에게 복속은 단순히 강한 세력 밑으로 들어가 보호를 받는 걸 넘어 부족민들의 생사여탈권을 비롯한 모든 권리를 상대편에 넘기겠다는 거였다.

바닥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부족장들을 흡족한 표정으로 내려다보며 작게 머리를 끄덕인 도현은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대들의 뜻을 받아들이겠노라. 스스로 짐의 품에 들어온 진실 된 마음을 높이 사서 부족장들에게 각자 금화 이백 개과 비단 오십 필을 상금으로 내리고 종사품 군수직을 제수하노라.”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부족장들은 그 자세에서 고개를 숙이며 합창하듯 대답했다.

“막중한 책임을 맡은 만큼 앞으로 심신을 갈고닦으며 짐이 파견하는 관리들과 함께 백성들을 잘 다스려야 될 것이야.”

“바다와 같은 은혜를 잊지 않고 최선을 다하겠사옵니다.”

“믿겠네.”

고개를 들어 좌우에 늘어서 있는 신하들을 보며 도현은 기분 좋은 얼굴로 이야기를 했다.

“오늘은 기쁜 날이니 연회를 베풀어 축하하고 여섯 부족이 아국의 백성이 된 것을 만천하에 알리도록 하라!”

“예.”

신하들이 일제히 허리를 굽히며 대답했고 지시대로 그날 저녁 여섯 부족장이 참석한 가운데 복속을 환영하는 연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도현은 여섯 부족장을 옆에 앉히고는 직접 어주御酒를 따라 주며 살갑게 대했고 걱정과 달리 너무나도 따뜻한 배려와 대우에 모두 크게 감격했다.

일주일간 심양성에서 융숭한 대접을 받으면서 편히 머문 부족장들은 복속한 거란족에게 조선말과 풍습을 가르치고 행정 업무를 수행할 관리와 함께 각자 부족으로 돌아갔다.

파견된 관리들이 제일 먼저 실시한 것은 조선말 교육과 부족민들의 생활을 바꾸는 거였다.

“앞으로 여러분들은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는 유목 생활을 버리고 한곳에 정착해 농사를 지으며 살게 될 겁니다.”

넓은 공터에 모인 부족민들은 연단 위에 올라선 관리의 이야기에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웅성거렸다.

“갑자기 농사라니?”

“평생 가축만 키워 왔는데 어떻게 농사를 지으라는 거야?”

“그러게.”

전통 가옥인 게르를 보면 알 수 있듯이 항상 풀을 찾아 돌아다니는 거란족에게,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 농사를 지으며 살라니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지만 조선의 그늘로 들어가 백성이 되어 살기로 마음먹은 이상 어쩌면 힘들더라도 극복해야 되는 과정이었다.

이미 농경 사회를 넘어 이제 산업화를 이루려는 조선에서 유목 생활을 고집한다는 건 현실에 맞지 않는 것이었다.

그리고 기존 백성들과의 통합을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었다.

“농사를 짓고 싶어도 방법을 모르는데 어떻게 하라는 겁니까?”

한 부족민이 용기를 내 한쪽 손을 들고 묻자 관리는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농사 경험이 있는 이들을 데려와 요령을 가르쳐 주고 농기구와 종자도 조정에서 나눠 줄 예정이니 아무 염려하지 마시오.”

필요한 것을 지원해 준다고 하니 그나마 다행이라는 표정을 지었지만, 여전히 대부분의 부족민들이 난생처음 해 보는 농사에 불안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자 관리는 약간 강압적인 어투로 입을 열었다.

“이건 어명이오. 지난겨울 불어닥친 냉해로 키우던 가축을 거의 다 잃은 여러분들에게 살길을 열어 주기 위해 주상 전하께서 특별히 하명하신 일이니, 모두 감사한 마음으로 따라야 될 것이오!”

여전히 썩 내키지 않은 일이었지만 도현이 직접 내린 지시이고 현실적으로 가축이 없어 다른 먹고살 방법이 없었기에 부족민들은 이내 수긍을 하며 순순히 따랐다.

“당장 올해부터 뭘 해야 될지 막막한데 농사라도 지어야지.”

“그래.”

당장 다음 날부터 관리의 지도에 따라 부족민들은 마을 근처 황무지를 개간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풍부한 수량을 가진 요하가 흐르고 토질이 비옥했기에 새로 편입된 여섯 부족의 영역은 농사를 짓기 적합했는데, 크고 작은 시행착오가 있겠지만 계획대로 진행된다면 자급자족을 넘어 조선의 새로운 식량 창고 역할을 하게 될 거라고 기대했다.

그리고 이미 북해도에서 실행해 괜찮은 성과를 거둔 정책이었기에 관리들은 일을 추진하는 데 거침이 없었다.

한편 박경지 장군은 도현의 허락을 받아 그냥 썩혀 두기에는 너무 아까운 여섯 부족 전사들을 조선군으로 편입시키는 작업에 착수했다.

이미 부족장들이 도현 앞에 엎드려 복속의식을 행했고 이충심을 비롯한 거란 출신 기병들의 멋진 모습을 보고 부러움을 느낀 전사들은, 모집 공고를 내자마자 너 나 할 것 없이 조선군이 되기 위해 몰려들었다.

“야미르라고 합니다.”

다부진 체격에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전사를 아래위로 천천히 살핀 하급 군관이 붓을 들고, 책상 위에 펼쳐 놓은 서책에 뭔가를 적으며 옆에 서 있는 거란 출신 병사의 도움을 받아 정해진 질문을 던졌다.

“출신은 어딘가?”

“아타르 부족입니다.”

“나이는?”

“스물일곱 살입니다.”

“꽤 많군.”

보통 열일곱에서 열여덟 살에 성인식을 치르면 바로 전사가 되어 사냥을 하거나 부족 간의 전쟁에 나서는 거란족 전통을 생각하면 상당히 많은 나이였다.

“특기는 있나?”

“부족에서 사냥꾼 무리를 이끌었습니다.”

“호오. 그래?”

붓을 멈추고 고개를 든 하급 군관은 앞에 있는 야미르에게 관심을 보였다.

“그럼 추적술에 능하겠군.”

“노루나 곰을 잡으려면 며칠씩 쫓아다니는 경우가 흔하니까요.”

“좋아. 자네는 이제부터 정찰대야. 열심히 하고 뛰어난 실력을 보이면 출신에 관계없이 진급할 수 있는 곳이 조선군이니까 한번 잘해 보게.”

정찰대가 뭘 하는 건지 잘 몰랐지만 일단 자신을 격려해 주는 말인 것 같았기에 야미르는 살짝 고개를 숙여 고마움을 표시했다.

“이걸 가지고 밖으로 나가면 자네가 갈 곳을 알려 줄 걸세.”

“감사합니다.”

기록을 끝낸 하급 군관이 다른 종이를 꺼내 몇 자 기입하고는 도장을 꽝 찍어 내밀자 야미르는 그걸 받아 들고 천막을 나갔다.

그렇게 면담과 체력 검사를 통과한 전사들은 심양성으로 보내져서 각 병과별로 모여 혹독한 훈련을 받아야 했다.

대부분 뛰어난 실력을 지닌 기병들이었지만 각자 움직이며 싸우는 거란족과 달리 조선군은 모든 병사들이 한 몸처럼 유기적으로 맞물려 전투를 벌였기에 훈련이 필수적이었다.

“거기 혼자서 먼저 튀어나가면 어쩌자는 거야? 내가 대형을 지키라고 몇 번이나 이야기했어. 앙!”

“죄송합니다.”

버릇대로 말을 달리는 바람에 자신도 모르게 돌격 대형에서 혼자 돌출된 병사는 교관의 야단에 찔끔한 표정을 지었다.

“이게 장난인 줄 알아. 그렇게 설쳐 대면 눈먼 화살에 제일 먼저 맞아 죽기 십상이야. 그리고 혼자 뒈지면 다행이지만 너 하나 때문에 대형이 흐트러져서 동료들까지 위험에 처하게 된다고! 정신 똑바로 차리고 제대로 해.”

“옛.”

“몸에 익숙해질 때까지 처음부터 다시 한다. 쇄기 대형으로 돌격!”

“아합!”

“가자!”

두두두두!

교관의 외침에 기병들은 바짝 신경을 곤두세운 채 뿌연 먼지를 피워 올리면서 다시 성 앞 벌판을 내달렸다.

낮 동안 정신없이 훈련을 받은 기병들은 곧바로 휴식을 취하지 못하고 저녁 식사를 한 뒤 다시 한곳에 모여 호롱불을 켜 놓고 조선말 교육을 받아야 했다.

훈련에 지쳐 저절로 눈꺼풀이 감겼지만 조선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진급은 물론이고 매달 지급되는 봉급마저 깎였기에 허벅지를 꼬집어 가며 공부에 열을 올렸다.

한편 여섯 부족이 조선에 복속한 이후 형편이 좋아졌다는 소문이 퍼지자 비슷한 처지에 있던 거란족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자존심을 버리고 스스로 조선에 무릎을 꿇고 굴종한 여섯 부족의 행동을 비아냥거리며 질타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식량 사정이 나빠지고 초흐타를 비롯해 큰 세력을 가진 부족들이 약탈을 벌이자 생각이 바뀌었다.

약탈을 당하면 그나마 남아 있는 것까지 모조리 다 빼앗겨 꼼짝없이 굶어 죽을 수밖에 없었고, 유목 민족 간의 복속은 모든 걸 다 넘겨주고 상대의 노예가 되어 산다는 뜻이었기에 여섯 부족이 도현의 그늘로 들어간 것하고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가혹했다.

양쪽 다 중소 부족에게는 끔찍한 결말이었는데 이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조선에 복속한 이후 아무런 걱정 없이 잘살고 있는 여섯 부족의 상황에 눈이 갈 수밖에 없었다.

결국 상황을 견디다 못한 중소 부족들이 하나 둘 사신을 보내 복속 의사를 밝히며 조선으로 넘어갔다.

그러자 조선과의 교역 덕분에 부족한 식량을 확보하고 세력 확장을 꿈꾸던 초흐타 부족의 계획이 일그러졌다.

“아타르 부족이 조선에 넘어갔다고!”

호랑이 가죽을 씌운 의자에 나른한 얼굴로 비스듬히 앉아 있던 야율보기는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불과 며칠 전에 중소 부족 두 개가 조선에 스스로 복속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또다시 같은 일이 발생한 거였다.

특히나 이번에 넘어간 부족은 자신이 집어삼키려고 눈독을 들이던 곳이었기에 충격이 더 컸다.

“예. 조선군과 관리들이 아타르 부족 영역에 있는 걸 확인했습니다.”

“이런 자존심도 없는 놈들. 대요제국의 후예가 고작 배고픔을 못 참고 조선의 노예가 되길 자처한단 말이야.”

“그게…… 저희가 노리는 걸 알고 선수를 친 것 같습니다.”

첫째 아들인 야율호타의 말에 야율보기는 이를 부드득 갈았다.

“이익. 조선에 넘어간 부족이 벌써 몇 곳이야!”

“이번까지 합치면 열 곳입니다.”

그러자 야율보기는 조선에서 들여온 고급 탁자를 손으로 세게 탕 내리쳤다.

“그래! 쥐새끼처럼 야금야금 다른 부족들을 먹어치우다니. 거란 전체를 다 차지하려는 거야, 뭐야!”

“이대로 일이 진행된다면 진짜 그렇게 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감히 내가 노리던 것에 손을 대다니. 반드시 후회하게 만들어 주겠어!”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야율호타가 넌지시 묻자 야율보기는 흥분해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콧김을 세게 내뿜었다.

“어떻게 하기는. 조선 국왕에게 이 야율보기의 존재를 단단히 각인시켜 줘야지!”

“설마 전쟁이라도 벌이실 심산입니까?”

“못할 이유도 없지 않느냐!”

번번이 선수를 빼앗게 약이 오를 대로 바짝 오른 야율보기는 지금 당장이라도 검을 쥐고 군사를 일으킬 기세였다.

“허나, 아버님, 조선은 그리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닙니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는 야율호타가 굳은 목소리로 운을 띄웠다.

“최강이라 불리던 팔기군을 물리친 게 바로 조선군입니다. 얼마 전 심양성을 놓고 벌인 전투의 결과를 아버님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럼 이대로 손 놓고 당하고 있으라, 이 말이냐?”

야율보기의 관자놀이에 불끈 힘줄이 치솟아 올랐다.

거란을 상징하는 대부족 족장으로서 자부심이 대단한 그는 설령 친아들이라 해도 허튼소리를 하면 가만있지 않겠다는 표정으로 야율호타를 매섭게 째려보았다.

심약한 사람이라면 오줌이라도 지릴 것 같은 무시무시한 얼굴을 정면으로 대하면서도 야율호타는 움찔하기는커녕 오히려 대담한 제안을 해 왔다.

“옛말에 적의 적은 친구라는 말이 있습니다.”

뜬금없어 보이는 말에 야율보기는 뭔 소리냐는 듯 한쪽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런 아버지를 향해 야율호타는 기회를 노리는 뱀처럼 등을 낮게 숙이고 교활하게 빛나는 눈동자를 가까이 들이댔다.

“분명 지금쯤 청국은 조선을 향해 속으로 칼을 갈고 있을 겁니다. 그들이 가진 거대한 영토에 비하면 심양성은 아주 작은 일부분에 불과하지만, 무엇보다 천하제일이라 자부하던 팔기군이 기껏해야 동쪽의 오랑캐 나라라며 하찮게 취급하던 조선에 백기를 들었다는 사실로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을 겁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제국의 기원이자 첫 황제의 묘가 있는 곳을 이대로 포기할 리 없지요.”

야율호타의 주장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었다.

만약 야율보기가 청국의 입장이었다 해도, 전세가 불리하여 당장은 후퇴할지 모르나 언제까지고 당하고만 있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만약 이 패배를 설욕하지 못하면 국경을 맞대고 있는 다른 나라들이 청을 만만하게 여길 수도 있으니 어떻게 해서든 구겨진 자존심을 되찾으려 할 것이 자명했다.

“그럼 네 말은?”

“청과 조선이 서로 적대시하고 있으니 이런 상황을 현명하게 이용하자는 겁니다.”

“흐음.”

야율보기는 턱을 쓰다듬으면서 야율호타의 말을 곰곰이 되짚어 보더니 곧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좋다. 그렇다면 네가 책임지고 청국에 끈을 만들어 보아라.”

“맡겨 주십시오.”

부족장의 허락을 받아 낸 야율호타가 깊이 머리를 숙였다.

화르륵.

야율보기가 긴 막대로 게르 중앙에 피운 화로를 들쑤시자 화악, 하고 불길이 일어남과 동시에 새빨갛게 빛나는 불씨가 공중을 날았다.

“어디 한 번 두고 보자고. 나라고 청태조 누르하치처럼 되지 말란 법은 없지 않겠어!”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야율보기의 눈에는 뜨거운 탐욕과 야망이 일렁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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